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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도자기나 만드는 야만국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 발틱 함대를 이긴 것을 보고서야 문명국임을 알게 되었다"라는 영국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일본의 러일 전쟁 숭리는 일본 역사상 최고 최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함대의 총 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 제독은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으며, 일본 역사 10대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가게 되었다.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아사히 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자, 도고 제독은 그 기자를 즉각 야단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세계적인 전쟁 영웅 도고 제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본 해군 소장 가와다 이사오가 쓴 "포탄을 뚫고"라는 책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당시의 조선에서 유일하게 청렴한 장군이었고 충성심과 전술전략 운영 능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전술을 금방 잊어 버리고 38년만에 병자호란을 다시 당했다.

조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일본에서는 그를 존경하여 메이지(明治) 시기 신식 해군이 창설되었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 19세기 말 일본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 전술 전략"이라는 교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8년간이나 영국에서 넬슨 장군을 연구하였던 도고 제독의 우상은 언제나 이순신 장군이었다. 러일 전쟁 승전 후 도고 제독이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있을 즈음, 미국 해군 사관 학교 4학년 임관 후보생들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도고 제독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 도고 제독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입니다"
영국의 넬슨 정도만 알던 미국 사관 생도들은 이순신이 누구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러시아 발틱 함대가 블라디보스톡 항으로 가기 위해 대한 해협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진해 앞 바다의 일본 연합 함대는 진해만에서 대한 해협 방면으로 마중을 나가 아직 잠이 덜 깬 발틱 함대를 기습하여 격파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큰 전투 경험이 없었던 일본의 병사들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런데, 이 때 도고 총사령관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는데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대부분의 일본 군함에서 간단하지만 엄숙한 신사 참배가 있었다. 갑판 위에 자그마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일제히 승전을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때에 제단에 모셔진 신은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일본 해군들은 자기네들이 전쟁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러시아 발틱 함대를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원했다. 공교롭게도 이 예식이 행해지던 해역은 그 옛날 일본인 조상들이 무더기로 수장되었던 바로 그 남해 바다였다.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지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혼령이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기도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도, 어쨌든 일본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고 그 승리는 일본을 세계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창안해서 사용한 전술은 정자전법(丁字戰法) 이다.

이 정자전법(丁字戰法: 敵前回頭作戰) 은 설정된 목표를 향해 일시에 집중 포격을 가하여 함포의 명중율을 높임으로써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사실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 을 이용한 일제 집중타방 전법(一濟 集中打方 戰法) 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다만 글자의 모양에 따라 T자형 전법으로 서양에 소개된 후,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근세 해전의 주 전법이 되어 온 전술이다.

http://cafe.naver.com/geochips.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61 

(http://cafe.naver.com/geochips/161) (카페 가입해야 볼수있음)

 

 

 

 

일본인들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와 찬양 및

도고 제독의 발언 근거들

 

1.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와키사카 야스하루)

2.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1805) 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 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일본 해군 준장, 사토 데쯔라로)

3.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 

(출처: "朝鮮役(조선역)- 일본 석학, 토쿠토미 테이이찌로)

 

4.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 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 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일본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5.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川田功 ))

6.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 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 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 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이조사 대전) 저자, 아오야 나기(靑柳南冥)
 

http://cafe.naver.com/geochips/120 (카페 가입해야 볼수 있음 가볍게 참고해 볼만함)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logId=5788377&userId=withnike21# (가볍게 읽어볼만함)

 

[1] 面白い話がある。それは、日露戦争の時に東郷平八郎が日本海海戦で大勝利して凱旋した。彼は元帥になった。そのお祝いの席上である人がおべっかをつかって「この度の大勝利は歴史に残る偉大なものだ。ちょうど、ナポレオンをトラファルガーの海戦で敗ったネルソン提督に匹敵すべきあなたは軍神である」といった。東郷はそれに答えて「おほめにあずかって恐れいるが、私に言わせればネルソンというのはそれほどの人物ではない。真に軍神の名に値する提督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李舜臣ぐらいのものであろう。李舜臣に比べれば自分は下士官にも値しないもの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러일전쟁 당시 토오고오 헤이하치로오가 동해 해전에서 대승리를 하고 개선했다. 그는 원수가 되었다. 그 축하연에서 어떤 사람이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번의 대승리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을 트라팔가해전에서 패배시킨 넬슨 제독에 필적할 만한 당신은 군신입니다”라고 했다. 토오고오는 이에 답하여 “칭찬의 말씀은 고맙지만, 사실 넬슨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 정말로 군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제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순신 정도겠지요.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 자신은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책『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     安藤彦太郎・寺尾五郎・宮田節子・吉岡吉典(編)『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日本朝鮮研究所、1964年)   안도오 히코타로오, 테라오 고로오, 미야타 세츠코, 요시오카 요시노리(편), “일, 조, 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 (일본 조선 연구소, 1964)

 

[2] KBS 역사 스페셜에서는 도고가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말하길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있는 책 이순신 각서(李舜臣覚書) 를 소개한적이 있다. 참고로 이순신 각서 이 책은 도고 제독 생전에 일인 사학자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의 책 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일본 해군이 장군의 한산도 대첩(한산도 해전) 을 높이 평가해서해마다 통영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제(이순신 진혼제) 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일본 해군의 이순신 진혼제라고 한다.

 

[3] 2009년 아사히 신문에서 간행한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나온다. 책은 1905년 일본 연합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했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 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함대는 발틱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전쟁에서 일본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 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

 

[4] 李舜臣の勇猛と機略は日本側にも有名になった。日露戦争でバルチック艦隊を破った東郷平八郎は列強各国でもその作戦が激賞されたけれど、その東郷も「自分はナポレオン艦隊を撃破したネルソン提督に比べられるかもしれないが、とうてい李舜臣にはおよばない」と言っている。

이순신의 용맹과 기략은 일본 측에도 유명해 졌다. 러일 전쟁에서 발트 해의 함대를 어긴 도고 헤이하치로는 열강 각국에서도 그 작전이 격상되었지만, 그 도고도 "나는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한 넬슨 제독에 비할 수도 있겠지만 도저히 이순신에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출처: www.isis.ne.jp/mnn/senya/senya1038.html

 

이 글에선 일단 도고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찬양하는 말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거 말고는 쓰레기 2ch 의 똥 같은 글들이 하도 많이 검색돼서 반신반의하다가

세미나 관련글(아래) 를 보고 도고 제독의 발언이 근거가 있긴 있다는 게 확인됐다.

 

研究会では田中秀雄氏が「明治軍人の李舜臣評価」と題して、明治時代の日本
海軍を代表する佐藤鉄太郎らが李将軍を「ネルソン以上の提督」と絶賛したこと
を紹介。

연구회에서는 다나카 히데오 씨가 "메이지 군인 이순신 평가"이라는 제목으로 메이지 시대의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사토 테츠타 로우들이 그를 "넬슨 이상의 제독"이라고 극찬한 것을 소개

출처: www5f.biglobe.ne.jp/~kokumin-shinbun/H16/1606/1606056seminar.html

 

또 같은 사이트에서는 일본 명성 대학강사가 도고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는 것을 각종 문헌으로

검증했다고 한다. 

また藤岡寛次明星大学講師は「東郷元帥と李舜臣」と題して、「東郷元帥が
 李将軍を尊敬していたことは韓国人の間では良く知られていることだが」と
 前置きして、それを各種文献に基づき検証した結果を報告した。

또 후지오카 칸지 메이세이 대학 강사는 "토고 원수와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도고 원수가

그를 존경했던 것은 한국인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것인데"와 전제하고, 그것을 각종 문헌에 따른 검증한

결과를 보고했다

 

[5] 私はいつぞや頭山満翁に伴われて、東郷さんのお邸にお伺いし、お目に掛ったことがあるのです」。こう私の昵懇な韓国人李英介氏が話していた。「そのとき元帥が私にこう言われた、『あなたのお国の李舜臣将軍は私の先生です』と」。名提督というものは、藍の色の深々と沈潜した重厚さがあり、何か底から押し上げてくる、寂寥に堪えたところがある。提督李舜臣もこういう人であったかも知れない。あとでまた聞いたことだが、東郷曰く、「自分はネルソンに比べられるかも知れない。しかし李舜臣は私を越えている」と。 (中略)明治三十八年五月二十七日未明、「敵艦見ゆ」との警報に接し、連合艦隊は鎮海湾から出動するのであるが、全艦隊が沖を出て間もなく、各艦の将士は遙か西の方を向き、李舜臣鎮魂の礼を行った。李提督は、一五九八年十一月十八日の夜明け、南海島北側の水路で残敵急迫中、流れ弾が左腋下から貫通し、海戦七年連勝のこの提督は息を引き取ったのである。李提督を師として忘れずにいた限り、日本海軍には常に栄光があった。   ‘

저는 예전에 토오야마 미쓰루옹과 함께 도고씨의 저택을 방문하여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와 친한 한국인 이영개씨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원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네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제 스승이십니다.”라고요.’ 명제독이란, 남색의 깊이와 침잠하는 중후함이 있어, 무언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적요함을 견뎌낸 점이 있다.

제독 이순신도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도고는 ‘자신은 넬슨에 비교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를 넘어서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략) 메이지 38년 5월 27일 새벽, ‘적함 발견’이란 경보를 접하고, 연합함대는 진해만에서 출동했는데, 전함대가 앞바다로 나오자마자, 각함의 장병들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이순신에게 진혼의 예를 올렸다.

이제독은 1598년 11월 18일 새벽, 남해도 북쪽의 수로에서 잔적을 소탕하다 유탄에 왼쪽 어깨 아래를 관통당해, 해전 7년 연승의 제독은 숨을 거두었다. 이제독을 스승으로서 잊지 않은 한, 일본해군에는 항상 영광이 있었다

藤塚明直「アドミラル李舜臣を讃ふ」『慶熙』第8号(京城公立中学校同窓会、1977)

후지즈카 아키나오, ‘이순신 제독을 찬양함’ “경희” 제8호(경성 공립 중학교 동창회, 1977)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본 해군 관계자들의 발언 및 도고 제독의 발언과 일본 인들의 이순신 장군 찬양 발언을

기록하고 있는 여러 책들

 

1. 藤井信雄『李舜臣覚書』(古川書房、1982)   후지이 노부오, “이순신 비망록” (후루카와쇼보오, 1982)

2. 金素雲『近くて遙かな国から』(新潮社、1979)   김 소운,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신쵸오샤, 1979)

3 . 藤塚明直「アドミラル李舜臣を讃ふ」『慶熙』第8号(京城公立中学校同窓会、1977)  

후지즈카 아키나오, ‘이순신 제독을 찬양함’ “경희” 제8호(경성 공립 중학교 동창회, 1977)

4. 金素雲「魚睡園閑話」『アジア公論』1976年1月~1977年12月連載(国際文化協会発行(ソウル))、注2前掲書後記による  

김 소운, ‘어수원한화’ “아시아공론” 1976년1월-1977년 12월 연재(국제 문화 협회 발행(서울))

 

5. 司馬遼太郎『坂の上の雲6』(文藝春秋、1972年)   시바 료타로, “언덕위의 구름6” (분게슌슈, 1972)

6. 司馬遼太郎『坂の上の雲1187回』(サンケイ夕刊、1972年)   시바 료타로, “언덕위의 구름 1187회” (산케이석간, 1972)

7. 司馬遼太郎『街道をゆく第33回――李舜臣』(『週刊朝日』1971年)  

시바 료타로, “길거리를 가다 제33회—이순신” (“주간아사히” 1971)

8. 安藤彦太郎・寺尾五郎・宮田節子・吉岡吉典(編)『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日本朝鮮研究所、1964年)  

안도오 히코타로오, 테라오 고로오, 미야타 세츠코, 요시오카 요시노리(편), “일, 조, 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

(일본조선연구소, 1964)

 

9. 注2前掲書  

10. 注2前掲書。来日時期に関しては金素雲『天の涯に生くるとも』(新潮社、1983年) 巻末年譜による  

11. 小野崎誠編『海軍兵学校出身者(生徒)名簿 改訂版(第三版)』(海軍兵学校出身者(生徒)名簿作成委員会、1987年)  

12. 이순신 장군은 당시의 조선에서 유일하게 청렴한 장군이었고 충성심과 전술전략 운영 능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전술을 금방 잊어 버리고 38년만에 병자호란을 다시 당했다.

조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일본에서는 그를 존경하여 메이지(明治) 시기 신식 해군이

창설되었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하였다"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

川田功『砲弾を潜りて』(博文館、1925年) 카와다 이사오, “포탄을 뚫고서” (하쿠분칸, 1925)

川田功『砲弾を潜りて』(博文館、1925年)  

 

[6] 참고로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저서 '坂の上の雲'("구름 위를 가다") 에서 제41호 어뢰정 정장 水野廣德 의 증언과

해군 소위로 러일 전쟁 대마도 해전에 참가한 川田功 의 러일 전쟁 당시 실제로 일본 해군이 이순신 장군

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예식을 거행한일이 있었다고 증언한것을 옮겨 놓았다.

도고 함대의 수뢰사령(水雷司令) 인 가와타 쓰도무 소좌 ‘함대가 출동할 때 이순신 장군의 영에게 빌었다’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땅히 세계 제일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력

그의 지모와 용기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상찬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

이 부분의 구체적인 책 제목과 인용 근거는 충무공 수련원 연구 실장 최두환씨의 '충무공 이순진 전집'에서 확인 가능

 

[7] 러-일 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전 뒤 자신을 넬슨 제독에 버금가는

군신(軍神) 으로 치켜세우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넬슨은 군신이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

당시 도고 함대의 수뢰사령(水雷司令) 인 가와타 쓰도무 소좌는 함대가 출동할때 이순신 장군의 영에게 빌었다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출처: [이순신2] 울돌목에서 불가능의 목을 치다 [한겨레21 2004 10 19 00:09]

 

[8] 1908년 일본 해군 제독 사토 데츠타로 넬슨 따위는 이순신 장군과 비교할 수 없다며 이순신 장군을 찬양함

이것은 제국국방사론(帝國國防史論) 과 조선 지방 행정 26년 2월호에 남아있다.

(고 이종학 선생에 의해 원전과 완역된 문장이 공개)

 

[9] 구 제국 일본 사관학교 졸업생들이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렬사에 참배했다는 내용은 충렬사 관리인(익명) 의 증언을 근거로 해서, 유명한 이순신 연구가인 최석남씨의 저서(한국의 명장 이순신 하권) 에 기록이 남아있다.

[10] 구 제국 일본 해군 함정이 진해에 입항할 때마다 통영을 향해 이순신 장군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내용은 일본 고위급 문관의 양자였던 한국인 K씨의 증언을 근거로 해서, 역시 최석남씨가 그의 저서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11] 도고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매우 존경했다는 내용은 유명한 수필가인 김소운씨가 일본 해군 중좌의 증언을 듣고 이를 다시 최석남씨에게 전한 내용이, 역시 최석남씨의 저서에 남아있다고 함

[12] 도고가 세운 승전비인가가 거제도에 있다. 거기에도 이순신 찬양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일본군 영웅 승전비라고 거제시청 창고에 처박아 뒀다고 함. 10년전에 중앙일보에서 다룬적이 있다.

 

러일 전쟁때 일본 해사는 이순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강했고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이순신을 배워서 세계적인 해군을 양성하자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그런 분위기에서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하는것은 무리가 없다. 실제로 러일 전쟁전에 이순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승리를 기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사상속에서 근대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한 군사학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이런 자료의 축척은 이순신 장군을 서양에 널리 알리는 계기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서양의 유명 해양 박물관에 거북선이 있는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http://cafe.naver.com/krvsjp/189 (도고 제독의 이순신 장군 발언 진위 조사 글 읽어보면 괜찮음)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75495 (이것도 가볍게 읽어보면 괜찮음)

 

[13] 경남 거제 향토 연구소 이승철 소장:  일본은1904년 러일 전쟁 때 거제에 해군 기지를 두었는데, 출전 시 이순신 장군의 영전에 일본군 장군 도고 헤이하치로가 묵념을 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서 "적이라 할지라도 배우고 존경할 줄 아는 것이 일본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518000002)

 

http://blog.naver.com/jupark88/140013605141 (이 글에서 이미 소개했지만 한번 더 가서 읽어보셔도 괜찮음)

 

요약: 이 당시 일본 해군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배와 찬양이 공공연히 이뤄졌음은 교차 검증할 사료가 많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백한 사실이라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 못할 확실한 증거가 없는 도고의 어록을 굳이 괜히 인용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정황 증거상 사적으로 도고 제독 역시도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도고가 직접 말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이로 인해 도고가 직접 말한 증거가 어딨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되기엔 조금 신뢰성이 부족한면이 있다.

내(도고) 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함대는 발틱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전쟁에서 일본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 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

이 말도 도고 제독이 직접 이순신 장군을 언급 한거라면서 2009년 아사히 신문이 간행한 책이 이 말이 수록되어 있는 1905년 일본 연합 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했는데 이 기록 역시 도고제독의 말을 누군가가 들었다는 거다..

아무튼 제국주의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 해군에서는 이순신을 굉장히 팔아먹었다(...). 당시 일본 해군과 육군은 다른 나라 군대라고 말할 정도로 반목과 경쟁이 심했는데, 해군측은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들면서 "것 봐라. 해군없으면 날고 기어도 전쟁에서 못이긴다"는 내용의 선전을 했다. 일설에 따르면 러일전쟁의 한 일본 해군 병사는 "마음 속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승전(쓰시마 해전) 을 기도드렸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자신이 일본 해군의 선전용으로 이용된 것을 아셨다면 이순신 장군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일본 사람들이 본 이순신 장군의 모습
실제 일본인이 이순신장군의 모습을 그린 거라고합니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이순신 장군이 무서웟으면 저렇게 그려놨을까요 

과연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 어떤 모습일까요 


위 이미지가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 모습이라고합니다.

무슨 염라대왕급의 위엄이네요 
조금 큰 사이즐 볼까요..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 큰 사진.. 

 

1854년 일본의 출판사인 금행당이 발간한 조선정벌기에 등장한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라고합니다.

위 금행당이 발해한 책의 내용에는 이순신은 혼자의 힘으로 능히 오랑캐(여진족)과 적병을 무찔렀다
(실제로 여진족을 무찌르고 적군의 수장을 생포한 유일한 장군이 이순신이죠)

그리고 병졸은 단합하는데 이르렀고 전라수군절도사로 귀갑선을 제조했다 
충성스럽고 용맹함은 계림(한국의 별칭)에서 가장 뛰어났다.. 

삼국지의 관우와같은 느낌을 그려놨네요 

보기만해도 지렸을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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