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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GHaaa

달달한게 좋아1화 - 내 나이가 어때서?

어른여

 "이 총각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자알 생기고, 직장도 뻔듯하고 조건이 억수로 조응께 꼭 만나봐라. 내가 야 엄마랑 친구라서 잘 안다. 놓치면 후회할끼다.  아가씨 나이도 있는데 그만 팅기라. 알긋제?"

일요일 새벽 7시, 천금 같은 아침잠을 깨운 이 전화는 잠을 방해한 것 말고도 중매쟁이의 선을 넘어서 버린 건방짐으로 향아의 기분을 완벽하게 망쳐 놓았다.

향아

 “아놔~ 이 할매가.....”

향아

 "30살이면 죄인이냐? 나 아직 창창해! 이 나이면 어떤 상태의 남자든지 무조건 감사합니다 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거야? 죄다 이상한 놈만 소개해 주면서 나더러 튕긴다고 말할 자격이나 있어? 중매쟁이면 말 함부로 해도 되는 자격증이라도 있는 거냐? 그런 사람이 소개 시켜주는 사람이면 뻔하다. 뻔해! 안 그래?"

향아는 전화기를 붙들고 민영이에게 중매쟁이에게 못한 얘기를 해대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열이 뻗치고, 말을 할수록 혈압이 치솟는다.

민영

 "그래서, 나간다고? 만다고?"

향아

 "....나가야지…. 안 나가면 엄마의 그 잔소리…. 읔!"

민영

 "근데 또 딱지 놓을 생각부터 하니? 그래도 혹시 알아?"

향아

 "점심때 선 볼 남자한테 전화가 와서 만날 약속을 했는데 목소리가 자기도 썩 내키지 않는 듯하더라니까. 얼마나 잘났다고 처음 전화에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냐? 보지 않아도 재수다."

민영

 "너 말하는 품새를 보니 설사 킹카 중의 킹카가 나온다 해도 텄네.“

향아

 “나는 먼저 예의 지키며 말했어! 그런데 그쪽이 무매너였어!”

향아는 억울해하며 툴툴거렸다.

민영

 “그런데 몇 시에 만나기로 한 거야?"

향아

 "시간 다 돼가."

향아는 전화를 끊고 거울 앞에 앉았다. 비록 내키지 않는 자리지만 오갈 데 없는 노처녀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딱지를 놨으면 놨지 맞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그녀다.

향아는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몸매는 대한민국 표준 사이즈, 아담한 키에 예쁜 살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는……. 좋게 아주 많이 좋게 말하면 글래머지. 오늘은 화장도 잘 받고 상태도 좋아 보여 다행이다.

민영이가 지적이면서도 조신해 보이는 분위기를 낸다고 했던 연노랑 가디건에 흰색 남방을 받쳐 입고, 단정한 검정 스커트를 입고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한바탕 손님들이 휩쓸고 나간 뒤에야 잠시 쉴 틈이 생겼다. 태진과 민영, 향아는 같이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민영은 170cm의 늘씬한 키에 약간 검은 피부를 가진, 눈이 저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섹시한 여자다. 친구인 향아가 봐도 침이 흐르는데 남자들이 보면 그 반응은 버라이어티하다. 워낙에 겉모습이 화려해 자칫 접근 불가의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실제 성격은 주위 친구들에게는 왕 엄마로 통할 정도로 포용력이 있고 털털한 성격이다. 

태진은 민영의 애인이자 향아의 친구이기도 한데, 귀엽게 생겼으며 멋있게 보일 때도 있고, 성격도 좋지만, 가끔 똥오줌 못 가리는 장난이 흠인 녀석이다. 하지만 민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남자이기도 하다.

민영은 연한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민영

 "어제 어땠어?"

향아

 "뻔했지. 나랑 키가 거의 비슷하더라…."

민영

 "그렇게 작던?"

향아

 "아무리 길게 봐줘도 160이야. 게다가 커피숍에서 자기 이름 부르며 찾으니까 띠꺼운 표정으로 카운터를 보더니 내가 생각보다 괜찮았던지 표정이 풀리더마. 그리고는 전화할 때와는 딴판으로 얘길 하는 거야. 묻지도 않은 얘길 주절~주절~"

민영

 "네가 맘에 들었나 보네. 넌 무슨 얘기 했어?"

향아

 "그 인간이 묻더군. 자기에 대해 어떻게 들었느냐고. 그래서 솔직하게 답해줬지. 중매하시는 분이 일요일 아침 7시에 전화를 해서 이 총각은 키도 크~~~고, 자~~~~~알 생기고 집안도 좋~~~~~~~고, 돈도 많고, 직장도 번듯하다며 놓치면 후회할 거라고 하셨다고 했지."

민영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구?"

향아

 "못할 건 뭐야? 보기 전과 본 후 행동이 너무 달라져서 얄밉더라, 어쨌든 그 얘기는 자기도 무안한지 헛웃음을 웃고 말대."

민영

 "그렇게 따지고 보니까 네가 여태껏 변변한 남자친구 하나 못 사귄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향아

 "나도 고민해 본 부분인데 아마도 내가 너무 완벽해 남자들이 부담을 가져서가 아닐까?"

민영

 "그거 개그야?"

향아

 “.....”

민영

 “도대체 어떤 인간 남자를 원하는 거야?”

향아

 "별거 없어, 필이 파악 꽂히는 남자!"

민영

 "꿈 깰 때가 지났는데 말이야. 응? 이향아?"

향아

 "필이 꽂히지 않는다면 이것저것 조건을 보게 돼. 근데 보자마자 필이 팍 꽂혀 버리면 머리 아프게 그런 계산 안 해도 되잖아."

민영

 "철 들려면 한 참 멀었어…. 아주머니가 걱정할 만해."

남자를 사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향아가 먼저 좋아했던 사람도 꽤 있었고 그중 두어 명은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사귀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거나 할 경우에는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다. 이 나이에 결혼보다는 연애가 편하다고 생각을 하다니…. 엄마가 아시면 기절하실 일이다. 심리 상태가 이상한 걸까? 이러다가 평생 사랑 한번 못해 보고 죽는 건 아닐까? 

나도 남들 하는 사랑 한번 해 보고 싶다구!

따르르르릉~~!

향아

 "네. 허브 샌드위치입니다…. 엄마…. 응 봤는데 꽝이다. 아이구~또또 잔소리......뭐? 또? ....오데서 글케 자꾸 델꼬 오네? 능력도 좋다. 알았어. 고만! 만날 테니까 고만 좀 해라. 잔소리도 종이에 써놓고 보나? 숨도 안 쉬고 말을 하네."

또 선보라는 성화다. 향아는 애써 성질을 누르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일부러 핸드폰을 꺼놨더니 가게 전화로 하신 것이다.

민영

 “또?”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독차지한 듯한 향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민영

 “그렇게 선보는 거 싫어하면서 보라는 대로 다 보는 게 신기해.”

향아

 “이게 다 생존 전략이야. 선 한번 보면 한동안은 조용하게 살 수 있거든. 정말 처절하지 않니?”

민영

 “눈 낮추고 연애를 해. 처절하게 살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향아

 “그놈의 행복 어디 가면 살 수 있니? 학교 때 행복은 성적순이고, 성인이 돼서 행복은 남자냐? 나 혼자 있어도 행복하다는 걸 왜 몰라줄까?”

향아의 푸념에 민영이가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민영

 “부모님의 행복이 너의 결혼이라 그래. 그것도 네가 좀 알아주렴.”

향아

 “너 미워!”

향아는 버럭 하며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영은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한다. 이럴 때는 맞장구 좀 쳐주면 안 되나?

이건 뭐 내 친구가 아니라 엄마 친구다.

회색 윗도리에 검정 바지를 입었다구?

어제저녁에 전화한 남자는 숫기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약속을 정했고, 자신의 복장을 설명해 주었다.

거리로 나서니 어느새 봄의 가운데 와있는 듯했다. 길가 개나리가 샛노랗게 피어있었다. 어쩌다 보니 꽃을 보며 즐거워 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약속 장소인 커피숍은 다행히 가게와 멀지 않았고, 벽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누구인지 슬쩍 짐작해 볼 수도 있었다. 

마침 길 가 쪽으로 앉은 짙은 회색 니트에 검정 바지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모르겠지만 키는 꽤 커 보였다. 숙인 뒷 머리카락은 조금 긴 듯했고 끝이 약간 곱슬 거리는 것이 만져보게 싶게 했다.

분위기는 괜찮은 것 같네. 웬일이야? 

그 중매쟁이 할머니가 이런 남자도 다 알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란 게 이런 경우인가 보다.

약간은 흥분되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가 그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도 점점 커졌다. 마지막 걸음을 걷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들더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

그와 눈이 마주친 향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찌릿하더니 온몸으로 번져갔다.

전화로 받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남자다. 소심할 거라고 쪼잔할 거로 생각했는데 이 남자 소심, 쪼잔함. 과는 인연이 없는 모습이다. 그런 단어가 있는지도 모를 남자다.

30대 초반 정도로 몸에서 에너지가 솟는 남자다. 약간 검은 피부에 갸름한 얼굴선을 가졌지만 강한 눈빛이 얼굴선에서 나오는 여성스러움을 샤프함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엄해 보이는 단단한 입술이지만 도톰한 아랫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정우

 "누구시죠?"

듣기 좋은 중저음의 보이스. 하지만 냉정함이 묻어났다. 순간 이 남자에게 가졌던 호감이 50% 떨어졌다.

향아

 "그렇게 물으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오늘 선 보기로 한 사람이죠. 여기서 보기로 약속 장소도 그쪽에서 정했잖아요."

나 기분 나빠, 엄청 나빠. 재수 없어! 라는 무언의 말이 확실히 전해지는 향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남자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다.

기막혀...선 보기 싫으면 나오질 말든가! 호감도 마이너스 10000% ! 그럼 그렇지.. 그 할매는 하자전문이시지.

정우는 앞에 앉아 갈등하고 있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통통한 볼이 무척이나 귀엽다. 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인상을 쓰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순둥이 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다. 이 여자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실을 말해 주려 했지만, 뭔가가 말문을 닫게 했다.

정우

 "아…. 죄송합니다. 제가 딴생각하고 있다가 그만 실례를 했습니다. “

그가 일어서며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훨씬 크다. 185는 넘을 키다. 

정우

 “민정우라고 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 손을 떨떠름하게 보더니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아주 소심하게 조금 내민 손을 정우는 자신의 큰 손으로 힘 있게 잡았다.

부드럽고 작고, 포근한 손을 가진 여자다.

향아

 ".....이향아예요."

악수 한 번에 향아는 위압감을 느꼈다. 자신을 보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남자는 야수다. 그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걸까? 첫눈에 반한다는 게 바로 지금 이건가?

맞선남2

 "이향아씨?" 

갑자기 옆에서 새된 목소리가 들려와 향아는 정신이 번쩍 들며 목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목소리의 주인공도 회색과 검은색을 입고 있었는데 민정우라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보였다. 이 남자가 바로 선 남이다!

‘잠깐! 그럼 이 사람이 오늘 내가 만날 사람이라면 이 남자는 왜 자기인 척하는 거야? 걸리면 죽는다는 초 개사이코?’ 

향아는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거칠게 일어섰다.

향아

 "뭐예요?"


달달한게 좋아2화 - 정강이를 까다

그녀의 물음에 그가 빙긋이 웃는다. 

웃어? 지금 웃었어? 이게 재미있어?????? 진짜 미친놈이야?

향아

 “병원 가보세요. 똥오줌 못 가리게 되기 전에.”

마음 같아서는 이 남자의 멱살을 쥐고 뇌의 위치가 바뀌도록 흔들어 토를 하게 한 다음 우주 밖으로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버거웠기에 이를 악물고 비꼬는 한마디 해주는 거로 끝내야 했다.

향아

 "저기..그리고 죄송해요. 오늘은 안 되겠고 다른 날에 전화 주실래요? 죄송합니다."

향아는 진짜 선 볼 남자에게 사과를 구하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향아

 “더 퍼붓고 나왔어야 했는데…. 망할! 망할! 망할! 재수 없는 놈!”

정우

 “잠깐만요, 이향아씨,”

그놈이다. 

부르지 마! 따라오지 마!!!!

향아의 걸음걸이는 더 빨라진다.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린다. 향아는 날 듯이 빨라진다. 삽질, 뻘짓 한 게 너무 창피해서 죽을 지경인데, 게다가 마음도 흔들렸던 터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도 소용없이 그가 향아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려세운다.

잡지 마라니까! 이런...개.....!

퍽!

내꺼 인 듯 , 내 꺼 아닌, 내 거 같은 다리~~~♪♬♪ 분명 자신의 다리였지만 향아의 다리는 마치 인공지능인 듯 알아서 초개사이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정우

 “커헉!”

정우는 정강이에 가해진 극심한 고통에 신음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사이 그 여자는 꼬랑지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뛰다시피 도망을 간다.

정우

 “으...야!!!!!!!”

향아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화가 난 정우가 소리를 지르자 뛰어가던 그 여자가 정우를 돌아봤다. 그녀는 너무도 통쾌해 하며 크게 비웃고 있었다.

어이없고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화나고 그러면서도 짜릿한 감정에 정우는 그 여자가 건물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가 아직도 충격 상태인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정우

 "오늘 향아씨와 만나기로 하신 분이죠?"

맞선남2

 "네? 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멍하니 서 있던 그 남자는 정우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 

정우

 "이향아씨 연락처 제게 주시죠."

맞선남2

 "네?"

정우

 "그쪽보다는 제게 우선권이 있거든요."

맞선남2

 "이것 봐요!"

그 남자는 정우의 거만한 행동에 불쾌해졌다. 하지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자신이 쉽게 상대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이 남자는 가지고 싶은 걸 가지는 데 익숙한 남자였다. 그는 쪽지에 향아의 연락처를 정우가 내민 핸드폰에 찍어 주고는 카페를 나가버렸다.

바보 자식! 달란다고 금세 주냐? 그런 태도로 제대로 된 여자 만나겠어?

띠르르릉~~~ 형 정민의 전화였다. 

정우

 "어. 쉬는 사람 불러 내놓고 왜 안 와……? 20분? 일없어, 저녁에 집으로 와."

정우는 형이 약속을 펑크내자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 약속이 크든 작든 약속을 깨는 것은 질색이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다. 꽤 괜찮은 수확을 했으니까. 그 대신 그의 정강이는 벌써 시퍼레지며 부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자리에 다시 앉아 커피, 잔을 다시 들었다.

민영

 "뭐? 푸하하하..!!!!"

민영은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그녀의 자지러진 웃음소리에 가게 안의 손님들이 놀란 듯이 바라보았다. 향아의 얼굴에도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향아

 “그 남자가 쫓아올까 봐 엄청나게 조마조마했다는 거 아니냐~, 간이 막막 미친 듯이 벌렁벌렁 대는데 지금도 뛰어. 이것 봐. 손에 식은땀 가지 났어. 그래도 시원하다~~!”

민영

 "소심하기로는 전국 1위 감인데 가끔 보면 똘끼충만이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선 볼 남자 이름도 모르고 선을 보러 나가?"

민영은 향아를 신기하게 보며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향아

 "상대방 남자 이름을 안 가르쳐 주는 게 그 할매 스탈~이야. 가끔은 성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서 신경을 쓰지 않았어. “

상쾌했던 기분은 잠시, 향아는 우울하게 대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우울했다. 비록 효도 선이었지만 아주 조금은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기에....처음 그 남자가 선 상대였다면...아니지! 아냐! 그런 음흉한 놈은 생각할 가치도 없어! 정신 건강에 아주 나쁘다구.

민영

 "어땠어?"

향아

 "으응? 잘 못 들었어."

민영

 "선상대로 착각했던 남자 느낌 어땠냐구?"

향아

 "그럭저럭 볼만했어."

사실 그럭저럭이 아니라 아주 근사했다. 한마디로 최상급! 최소한 겉모습만은..

민영

 "흠....그럭저럭 이라? 꽤 괜찮았나 보네."

향아

 "생긴 거랑 다르게 하는 짓은 거지깽깽이에 초개사이코였어!"

향아는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민영은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추었다.

민영

 "일어선 김에 마트에 좀 다녀와. 샐러리랑 과일이 똑 떨어졌어."

민영이의 질문이 부담스러웠던 향아는 반가워하며 당장 마트로 향했다. 열을 받아서인지 마트의 지하 식품 코너에서 시식 코너를 다 섭렵하고 순대 볶음까지 2인분을 해치우고 슬슬 가게로 향했다.

정우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창밖을 뚫어져라. 봤다. 그곳에는 개나리가 보인다. 노란 개나리…. 수수하지만 질리지 않는.. 작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은 꽃. 그는  그 남자가 찍어 준 번호를 보다가 버튼을 눌렀다.

민영

 "여보세요?"

전화 목소리가 육성보다는 더 성숙하게 들린다.

정우

 "이향아씨?"

민영

 "향아 핸드폰이긴 한데, 잠깐 자리를 비웠어요.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정우

 "아닙니다. 그곳 위치 좀 가르쳐 주십시오."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진 향아는 오는 길에 어버이날 빼고는 사지도 않던 꽃을 한 아름 샀다. 샛노란 프리지어로. 배부르겠다, 예쁜 꽃도 샀겠다. 완전히 풀어진 기분으로 가게로 들어서던 그녀는 작은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를 발견하는 순간 순식간에 똥을 밟고 서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향아

 "뭐...뭐야?"

정우

 "인사만 나누고 그렇게 가버리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정우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특히 여자들에게는 신의 숨결이나 마찬가지인 효과만점 백만 불짜리 미소를 날렸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보니 별 효과는 없다. 딱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향아

 "너…. 스토커야?"

민영

 "향아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평소와는 달리 무서운 표정으로 몰아붙이는 향아의 낯선 모습에 민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보기 드문 매력의 소유자의 낯선 남자가 꽃처럼 가게로 날아 들어와서는 향아를 찾자 민영의 호감과 호기심이 치솟던 중이었다. 그런데 향아의 날 선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가 아는 향아라면 광대승천 정도는 할 텐데 말이다.

정우

 "손님한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민정우는 향아가 목에 칼을 대도 꿈쩍도 안 할 듯이 계속 느긋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것이 향아를 더 열 받게 했다.

이 망할 놈이! 날 우습게 보는구나? 나 그렇게 만만한 여자 아니거든!

향아

 "아~손님? 그럼 샌드위치나 사서 가."

민영

 "이향아! 너 손님한테 왜 반말이야?"

민영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매사 남한테 싫은 소리 제대로 못 하는 얘가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설마...이 남자가?

향아는 너무 열이 뻗쳐 머리카락이 홀랑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인데 뭐 어때. 이 정도면 자기도 기분 나빠서 나가겠지. 뒤늦게 사과라도 할 모양으로 온 것 같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면 정강이에 대한 사과를 받으러? 그것도 이미 늦었다. 인마~!

향아

 "기분 나빠?"

정우

 "아니. 말 터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좋아. 그런데 여기는 무슨 샌드위치가 맛있나? 추천 좀 해 줄래?"

민정우는 미소까지 지으며 탁자에 팔을 괴었다. 

향아가 미쳐 날뛰더라도 재미있어할 놈이었다. 생각보다 뻔 수가 높은 놈이 아닌가?! 여기서 더 버티다가는 흥분할 때 버벅대는 모습을 보여 줄지도 몰라 향아는 더는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자고로 똥이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법! 이미 밟았다고 계속 밟고 서 있는 건 바보도 하지 않을 짓이다.

향아

 "민영아, 먼저 들어갈게."

향아는 빨개진 얼굴로 정우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입구 쪽으로 가는데 마침 태진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태진

 "자기야, 화났어? 잉잉 싫어~! 자기 보려고 서둘러 왔단 말이야."

분위기 파악 못 한 태진이 향아에게 바싹 다가와 팔짱을 뀌며 귀여운 척을 해댔다.

향아

 “저리 안 가?”

태진

 “웅~웅~시쪄~시쪄요~때찐이는, 때찐이는~”

민영

 “윤태진씨, 그만하자.”

민영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태진은 즉각적으로 향아에게서 손을 떼었다. 향아는 잘못은 없지만, 눈치가 없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는 나가 버렸다. 정우는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우는 민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향아에게 치근덕대던 녀석을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얼결에 향아에게 당한 태진은 억울했다.

태진

 "향아 왜 저래? 장난 좀 친 것뿐인데..."

민영

 “척 보면 몰라? 향아 표정이 그렇게 살벌한데 장난치고 싶던? 그리고 이 시간에 회사에 있어야지. 여기는 무슨 일이야? 혹시 잘린 거야?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구!"

태진

 "무슨 소리! 외근 나왔다가 들어가는 우리 자기야 보려고 잠시 들린 거야. 지금 들어갈 거야.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 남자는 또 누구?"

민영

 “잘생긴 남자.”

민영은 테이블에 앉으며 턱을 괴고는 그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태진

 “야! 태민영, 너 지금 한눈파는 거야? 그것도 바람이다!”

민영

 “외근 나온 거라며? 얼른 들어가요, 우리 자기~”

민영이가 윙크를 날렸지만, 태진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다.

정우는 재빨리 밖으로 나왔지만, 택시를 타는 향아의 뒷모습을 겨우 봤을 뿐이다.

정우

 “잘도 빠져나갔군.”

택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정우는 아쉬움에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가게 안에서 민영이와 태진이가 보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진

 “아! 그러고 보니까 동창회 연락받았어?”

태진의 말에 민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눈을 반짝거렸다.

태진

 “그럼 우리 향아 기운 날 일 있겠네!”

민영

 “응?”

태진

 “이향아의 열렬한 짝사랑. 벌써 까먹었어?”

민영

 “아!”

정우는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현관에 놓인 굽 높은 구두를 보고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유리

 "정우씨~!

아니나 다를까..유리다. 

정우

 "남의 집에 이런 식의 방문은 불~법침입이야."

유리

 "정우씨. 사람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섭섭하게 그러기예요?“

정우의 불쾌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유리

 “당신이 나한테 화난 건 알지만 오해라니까. 그 남자 그냥 친구야. 허물없는 친구. 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다시는 안 볼게. 화내지 마요. 응?"

유리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으로 정우를 올려다보며 풍만한 가슴을 정우의 팔에 지그시 눌렀다. 예전에는 유리의 이런 뻔한 행동이 재미있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이젠 짜증만 날 뿐이다. 정우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팔을 뺐다.

정우

 "우리 사이는 끝이라고 말했잖아."


달달한게 좋아3화 - 잘가요...짝사랑

정우의 싸늘한 반응에 한유리는 화가 치솟았지만 참았다. 정우가 자신을 단순히 즐기는 상대로 만나왔다는 걸 알지만, 이 남자는 내게 어울린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는다.

유리

 "오늘은 얘기할 기분이 아닌가 봐. 이만 가 볼게...내일부터 출근한다길래 축하해주러 온 거였어요. 전화 줘요."

정우

 "한유리. 나 끈적거리는 거 싫다."

유리

 “쉬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유리는 정우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나가 버렸다.

정우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유리를 처음 봤을 때 남녀 사이를 진지하게 보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어 만났던 건데 잘 못 본 것 같다. 담배 한 개비를 빼 물고 베란다로 나가니 시원한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올해 나이 서른 둘. 슬슬 집안에서는 결혼 압력이 심심찮게 들어오지만, 정우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주변에 너무도 흔한 껍질뿐인 결혼 생활들..

그리고 사랑이라던 것이 금세 유효 기간이 지나 폐기처분 되어버리는 것들.

사랑은 시시한 것이다.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 상태가 너무도 편하다. 더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만약 그가 결혼한다면 완벽한 여자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지는 않으나 모든 조건과 배경이 그와 어울릴 만한 그런 여자.

아...괴롭다..아침부터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잔소리 한 바가지를 아침밥 대신 먹었다. 또 딱지를 놨다고 화를 내신다. 

어른여

 "이번 총각은 참하다 카더만 니는 와그리 까다롭네! 어떤 자슥을 만날라꼬 그라노! 한번 데꼬 와바라. 구경 좀 하자."

향아

 "엄마..내가 딱지를 놓은 게 아이고, 사정이 쫌 이상해져서 다음에 보자 그랬다. 다시 연락되면 만날끼다. 먼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도 모르면서 화부터 내지 마라!"

어른여

 "..에나가? 알았다. 그라모는 그리 꼭 해라."

엄마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셨다. 그 사건이 있은 지 거의 일주일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아마 그 총각도 너무도 황당한 사건인지라 집에 미처 보고를 못했었나 보다. 향아는 선을 봐도 보고는 않는다.

민영

 "어머니가 화가 많이 나셨나 봐."

향아

 "으~~~지겨워! 지겨워!" 

향아는 안경을 벗으며 눈을 비볐다. 그리고 아침 손님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를 훑어보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아침잠이 많은 그녀로서는 미칠 지경이다. 민경은 그런 그녀에게 늦게 나오라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게다가 겨우겨우 현상유지를 하는 마당에 게으름까지 피우는 개념 몰상식한 여자는 아니다.

민영

 "참, 오늘 과 동창회 있는 거 알지?"

향아

 "가기 싫어. 귀찮아.“

민영

 "진영 선배도 온다던데?"

향아

 "...정말? 선배는 이런 모임 잘 안 오잖아!"

의자에 축 늘어져 금방이라도 잠들 듯하던 향아가 진영 선배라는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인다.

민영

 "그렇다네. 어쩔래?"

향아는 고교 시절 짝사랑했던 김진영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고1 때 고3이던 선배를 본 순간 주변에 폭죽이 터지고 그의 몸에선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었다. 그 선배를 따라 같은 대학, 같은 과를 갔다. 

그렇게 향아를 첫눈에 뻑 가게 했던 그가 돌아왔다. 그리고 솔직히 초개사이코에게 아주 잠깐 끌렸던 건 연애를 너무 하고 팠던 신체의 솔직한 반응이다. 그러니 진영 선배를 꼭 내 것으로 만들 테다! 

향아

 "어쩌긴~! 가야지. 3년 만에 보는 건데...선배 유학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슬펐는데! 그땐 미처 내 맘을 말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민영

 "행여나? 니가?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이 있을까?"

향아

 "....두고 봐! 기필코 나의 짝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민영

 “그 말은 진영 선배 유학 가기 전에도 들었다지, 가기 전에 약혼하겠다고 했던가? 어쨌던가?”

민영은 결국 선배의 유학 전날, 선배가 아닌 자신을 앞에 두고 밤새 술을 마시며 울던 향아를 생각해내며 말했다.

향아

 "민영아, 지금껏 선이 꽝이었던 것은 진영 선배를 기다리라는 신의 계시였던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니? 초개사이코를 만난 것도 어이없는 선남들을 만난 것도 이것을 위한 시험이었을 분이야."

향아는 지금 민영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김진영! 그뿐이다!

민영은 잔뜩 흥분한 향아를 보며 웃음이 났다. 서른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 같은 면이 많은 그녀를 보면 막냇동생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향아는 딸 부잣집의 삼녀일남 중 막내 셋째 딸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지만 어떤 때는 큰 언니 같을 때도 있다. 가끔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그녀의 전부는 아니기에 민영은 향아가 좋다.

며칠 전 그 문제의 남자는 바로 그 가짜 선남이었다고 향아가 말을 해줬다. 어쨌든 그가 향아를 보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지만, 향아는 전혀 모르는 눈치다. 어떤 때는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데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둔치다. 타고 난 듯하다.

민영

"기대할게. 8시까지 모이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좀 일찍 가게 문 닫자."

향아

 “헉! 이 꼴로 가면 안 돼! 준비해야 하는데..마사지도 좀 하고...머리 세팅도 하고..할 일이 너무 많아! 옷! 입을 만한 게 있었나? 민영이 너 옷 좀 빌려줄래? 아..아니지..사이즈가 너무 틀리잖아~~~어떡해~~~~뼈 붙이는 성형 수술도 있으면 좋겠다!”

민영

 “알았어. 그만 징징거려. 지금 퇴근해서 준비해.”

향아

 “진짜? 땡땡땡큐! 넌 역시 최고야!”

향아는 민영을 왈칵 끌어안으며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출했다.

민영

 “대신 오늘 확실히 진영 선배 잡아야 해?”

향아

 “걱정 마.”

향아는 지금 기분 같아서는 뭐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되는 선의 실패와 이상한 변태 자식 때문에 자꾸만 쪼그라드는 자신감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핑크빛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영 선배를 놓쳐서는 안 된다.

민영

 “아! 깜빡했다. 가는 길에 주문배달 하나만 해주고 가.”

향아

 “얼마든지, 어디야? 그냥 날아 가주겠어.”

향아

 "이 자슥은 가게가 코앞인데 연약한 친구를 배달이나 시키고 말이야~!꼭 일 못하는 것들이 젤 열심인 척이라니까."

향아는 샌드위치가 든 가방을 들고 태진이가 일하는 회사 라운지에 와 있다. 태윤이네 회사에 주문이 있을 때면 민영이가 항상 왔었지만, 어젯밤 싸웠다면서 향아에게 대신 부탁했다.

그가 일하는 회사는 국내에서 덩치가 큰 회사는 아니지만, 자금 면에서는 어느 기업 못지않은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그가 샌드위치 가게를 동업하는 이유는 향아의 끈질긴 설득 작업 때문이었다. 민영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노후대책부터 세워둬야 한다며 여자는 그 남자의 현재보다는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둥 감언이설에 넘어가 투자를 했는데 아직은 아슬아슬하게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

안내 데스크에서 태윤을 기다리는 동안 향아는 깔끔한 라운지를 둘러보며 오가는 사원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다가 과거 생각이 났다. 

한때는 그녀도 이런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요즘처럼 가게가 어렵게 운영이 될 때는 다시 회사에 다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향아

 “얘는 왜 이렇게 안 나와?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빨리 나와라~윤태진!”

향아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회사 중앙 홀을 지나던 정우는 뜻밖에도 향아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이곳 회사로 옮겼을 때 저 남자가 팀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저 남자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평소 자기답지 않은 행동에 약간 당황을 했다. 어지간히 심심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는 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밀어 내버렸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녀를 보니 그때 느낀 미묘한 감정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정우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기대감이라 여겼다. 평소 만나던 여자들과는 다른 그녀에게 느끼는 신선함.

그때는 쓰고 있지 않던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질끈 묶고 헐렁한 체크무늬 남방과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대학생 같아 보일 정도다.

그런데 여긴 웬일일까? 가게 이름이 적힌 가방을 보니 배달이라도 온 걸까?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그 가게에서 봤던 남자가 향아를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상은 좁다더니 그 남자는 이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도 정우를 보자 꽤 당황한 듯했지만 분수를 지켜 섣부르게 아는 척을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때도 제법 친해 보였는데...애인 사이인가?

향아

 "야! 너 어쨌기에 민영이 대신 날 오게 만드냐?"

태진

 "미안~. 어제 말다툼을 약간 했거든."

향아

 "빨리 풀어, 그런 거 오래가면 안 좋은 거 알지?"

태진

"알지. 참 그런데 우리 오늘 회식이야."

향아

 "뭐? 오늘 동창회인 거 몰라?"

태진

 "그게...갑자기 정해진 거라...이번 주에 실장이 새로 왔는데 오늘에야 환영회 겸 회식을 한다네."

향아

 "그래서 못 온다고?"

태진

 "참석해야지... 그래서 말인데 2차는 나 있는 대로 오면 안 될까? 우리도 저녁 먹고 2차로는 나이트 갈 거거든. 물랑루즈로."

태진은 그때 가게에서 본 남자가 바로 우리 실장이더라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넓은 물랑루즈에서 두 사람이 마주칠 확률이란 거의 없고 게다가 향아는 오늘 진영선배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니 그런 일까지 알아봤자 신경 쓰일 뿐이니까.

이렇게 해서 향아의 동창회는 물랑루즈에서 피크를 이루게 됐다. 물랑루즈는 영화 속의 무대를 옮겨온 듯 화려해 감탄을 자아내는데 다른 클럽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약간 고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잃지 않아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어 요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분위기였지만 향아만이 비 맞은 똥강아지였다.

평소 같으면 멋지게 드리워진 저 붉은 비로드 커튼을 부여잡고 춤추느라 민영과 함께 땀을 빼고 있었겠지만...지금 이 순간은 이 안에 있는 모든 장식품을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불을 질러 버리고 싶다! 

향아의 첫사랑은....애인이 있었다. 애인은 향아의 동창인 양수정으로 학교 때부터 사이가 나빴다. 같은 사람을 좋아했기도 했지만 모든 것에서 둘은 서로 맞지 않았다.

수정은 여우 짓을 잘해서 항상 진영 선배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지만 향아는 어쩐지 타이밍을 놓쳐 우스꽝스러운 면만 보여주는 등 좋은 인상은 거의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중반은 수정의 계략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더욱더 그녀에는 나쁜 감정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그들은 행복한 커플이었다. 수정은 진영 선배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영 선배도 그녀를 너무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사이에 자신이 낄 곳은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거야…. 괜히 헛바람이 들어서는….

향아는 오늘 밤을 위해 사 놓고 모셔만 두었던 10센티짜리 하이힐을 신고, 흥분된 마음으로 특별히 옷까지 사 입었지만 지금 그 하이힐은 그녀의 발을 아프게 옥죄고 장딴지까지 뻐근하게 만들었으며 옷 또한 몸에 붙는 스타일이라 눈치 없는 똥배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희미하게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배에 힘을 잔뜩 주고 태연한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들을 향해 즐거워하는 미소까지 지었다. 그리고 다시 독한 양주를 한 잔 비웠다. 이 순간 그녀의 유일한 낙은 술이었다. 이왕 낸 회비 술로 본전 이상의 것을 찾고야 말겠다고 결심하는 향아였다. 


달달한게 좋아4화 - 우리 이렇게 자꾸 만나면 정말 사귀어야 할까 봐요?

향아가 다시 술을 원샷하는 것을 보는 민영은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민영

 "괜찮아?"

향아

 "물론이지. 선배한테 애인이 없다는 게 이상한 거지! 그게 수정이라는 게 짜증 나지만."

민영

 “너 오늘 선배를 차지해 버리겠다며? 이러고 있을 거야?”

향아

 “임자 있잖아.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드리는 게 아니야. 벌 받아.”

민영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향아

 “그래도 중간에 끼는 건 상도덕이 아니지…. 너 같으면 태진이랑 중간에 누가 가로채면 좋겠어?!”

민영

 “흠…….”

민영이 향아의 말에 너무도 진지하게 생각을 한다.

향아

 “야, 태민영! 그렇게 오래 생각하면 어떡해! 당장 '안 돼! 그년 걸리면 능지처참 할 거야!'라고 해야지!”

민영

 “솔직히..태진이랑 내가 좀 오래 사귀긴 했지….”

향아

 “태민영! 뭐래? 태진이 알면 난리 날 소릴! 헛소리라도 하지 마. 그나마 알콩달콩 연애의 환상을 지켜주는 건 니들이란 말이다!”

민영

 “남녀관계에 환상을 가지지 마."

향아

 "싫어. 난 가질래.“

향아는 다시 술을 홀짝거리며 중얼거렸다.

태진

 “이향아, 너 뭐해? 진영 선배 딴 여자랑 저러고 있는데 두고 볼 거야?”

태진이 술 냄새를 풍기며 향아 옆에 앉아 어깨동무했다.

민영

 “임자 있는 몸이시라며 안 건드리시겠단다.”

태진

 “으잉? 우리 향아 너무 착해! 그래서는 사랑은 쟁취할 수 없어! 사랑은 직진!”

민영의 말에 태진이 단호하게 말하며 팔을 앞으로 쭉 뻗는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법 마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회식 자리에 가서 한잔, 동창회 와서 한잔, 쉴 새 없이 마시고 있는 태진이다.

향아

 “.....됐어...내 인생에 직진은 무리야....”

시무룩하다 못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 향아를 보며 태진은 같이 술잔을 들었다.

태진

 “힘내, 이향아! 우리 회사에 킹카 완전 많아~ 내가 꼭 갑 중의 갑으로 소개해 줄게.”

민영

 “우리 태진이가 이렇게 맘이 넓어~ 사랑해~자기야~~”

민영의 말에 태진은 번개처럼 그녀의 곁으로 가서 앉는다.

쪽~쪽~쪽

민영이가 태진의 생일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애교를 콩떡같이 부리자 태진은 찰떡같이 받아 그녀 얼굴 여기저기에 마구 뽀뽀를 해댔다. 평소에 애교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민영이지만 이렇게 가끔 과감하게 투척해주는 센스가 있다.

두 사람을 보는 향아는 너무도 부러웠다. 

진영선배와 자신도 당연히 저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정의 방해도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용기가 없었다. 선배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바랐기에 수정 때문이라는 핑계를 댔다. 자신의 비겁함으로 어쩌면 진짜 사랑할 기회를 놓친 건지도 모른다.

난....진영선배 때문에 속상한 걸까? 아니면 그 기회를 놓친 것 때문일까?

한숨을 쉬며 앞을 보는데 민영과 태진이는 아직도 그러고 있다. 이것들이 위로해준다는 거야? 염장질의 기본을 보여주겠다는 거야? 싸웠다더니 화해는 또 언제 했대?

향아

 “그만 쪽쪽 거리고 나가서 놀아, 이것들아!”

향아의 면박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전혀 멋쩍은 기색도 없다. 그때 진영선배가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진영

 "향아야, 나랑 한 곡 출래?"

마치 먼저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자신의 바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진영 선배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헉! 진영 선배에~! 정말이요? 

향아의 가슴이 마구 벌렁 이려는 찰나,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수정이었다. 그녀가 향아를 불쌍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심을 쓰는 표정에 향아는 비위가 상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날려 버리고 싶었다. 저 빵빵한 엉덩이를 걷어차서 지구 밖으로 날려 버리고 싶다. 

수정

 "그렇게 해. 내가 오빠한테 너랑 춤춰달라고 부탁했어."

고맙게 여기라고 말하는 수정의 행동에 향아는 미친 듯이 펄쩍대던 가슴이 쏴 해져버렸다. 얼마나 처량해 보이는지 몰라도 이런 식의 동정은 절대 사양이다.

민영

 “그래, 향아야 선배랑 춤 한번 춰줘.”

거절하려는 향아를 눈치채고는 민영이와 태진이가 그녀를 진영 쪽으로 밀어붙였다. 

아니. 이것들이 친구 맞아? 지금 침 흘리는 똥개 같은 심정인데 아예 확정을 하려구? 

태진

 “임자 있는 선배가 또 언제 너같이 매력적인 싱글이랑 떳떳하게 춤춰 보겠냐?”

태진이가 다시 한 번 부추긴다.

향아

 “난 싫….”

민영

 “김수정 저 계집애 여유 있는 척하는 거 다 뻥이야. 네가 선배한테 껌처럼 붙어 있으면 약 올라 죽을걸. 못 먹는 감 찔러나 봐. 수정이 저거 눈 돌아가는 거 보고 싶다.”

민영이가 거절하려는 향아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생글생글 미소 짓는 저 얼굴을 깨끗이 지워주마! 어쭙잖은 그따위 여유를 못 부리게 만들 테다. 질투로 일그러진 얼굴로 이곳을 나가게 해 주마!

향아는 다짐하며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서 선배의 손을 꼭 쥐었다. 순간 술기운 덕인지 무모함이 온몸을 휘돌았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찔러보고 비벼보고…. 쪼물딱 거려도 보고. 이 순간 만은 김진영, 당신은 내 꺼다!

플로어로 나간 진영이 향아의 허리에 손을 가볍게 올리자 향아는 진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진영은 당황한 듯 몸이 굳어졌지만, 향아는 짐짓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바라보았다.

향아

 "선배. 긴장 풀어요. 수정이가 이 정도도 이해 못 할까 봐 그래요? 와 ~벌써 수정이한테 꽉 잡혀나 보네!"

진영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진영은 뜻밖에도 향아의 적극적인 자세에 당황했다. 학교 때 이미 향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뿐 아니라 꽤 많은 여학생이 그랬다. 하지만 향아는 인사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며 어쩔 줄 모르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과감하게……. 그녀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오자 자신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수정이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향아

 "그럼 됐네. 자, 내 허리 꼭 잡아요. 그래야 그림이 되지."

진영은 그녀의 말대로 허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잘록한 허리에 부드러운 가슴이 느껴진다. 

향아는 오기와 술의 힘을 빌려 평소 같으면 하지 못했을 짓을 천연덕스럽게 했지만, 심장은 벌렁거리고 있었다. 선배가 향아의 허리를 잡자 그녀는 수정이 쪽을 봤다. 수정은 향아를 무섭게 째려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향아는 그런 수정을 보며 더욱 진영의 목을 꽉 끌어안아 보이며 그녀에게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혀를 내밀어 보였다. 이번에는 수정도 화가 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

 "실장님, 정말 재미없으시다. 술도 잘 마시지 않으시고...얘기도 않으시고…."

남

 "게다가 춤도 사절이라니!"

여

 "이 자리는 실장님 환영회 라구요!"

정우

 "미안해요. 내가 술에 약해서.."

직원들의 노골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미소만 지었다. 이런 자리는 워낙에 싫어해 월요일에 출근한 뒤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피하다가 오늘에야 마련한 자리였다. 그것도 향아가 이곳에 온다는 걸 몰랐다면 1차에 얼굴만 잠깐 비치고 집으로 가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고 1시간쯤 지나자 향아와 그 일행들이 들어왔다. 이미 1차를 걸친 듯 제법 취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앞에 앉은 커플을 보며 연신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샌드위치 가게의 여자와 자기 회사 직원인 남자는 다행히도 커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시하게 생긴 어떤 남자와 같이 플로어로 나가더니 척하니 끌어안는 게 아닌가! 틀림없이 향아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고 그 또한 당황한 듯했지만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노다지라도 캔 듯해 보였다.

남

 "그런데 아까부터 어딜 그렇게 보십니까?"

눈치 빠른 김대리가 계속한 눈을 파는 정우를 눈치채고 물었다.

정우

 "저기 선 본 여자가 와 있어서요."

남

 "네~~~~에?!"

남

 “선이요?”

뜻밖의 대답에 직원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선이라니....사장의 둘째 아들이기도 한 실장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만약 그가 여자 문제만 떠들썩했다면 그를 무시했겠지만, 그의 뛰어난 일 능력은 단점들을 덮어버릴 정도였다. 

어쨌든 그가 독신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인지, 집안의 압력에 형식상으로 응한 것인지...어쨌든 여자 직원들은 실망의 표정이 물결쳤고, 남자 직원들은 어떤 여자-필히 대단히 미인일 거라는 기대-일까 하는 표정으로 정우의 시선을 쫓았지만,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미녀가 없었다. 아…. 저기 플로어에 나가 있는 늘씬한 미녀인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작달막한 향아가 아니라 민영이었다.

향아

 "선배…."

취했다는 핑계를 대고 진영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진영

 “많이 마셨어?”

향아

 “네. 선배한테 할 말이 있어서 용기가 필요했거든요.”

진영

 “무슨 말?”

향아

 “.......학교 때 제가 선배 엄청 좋아했었던 거 아세요?”

진영 선배의 말을 기다리는 향아의 심장이 쿵덕 쿵덕 뛴다. 진짜로 말해버렸다. 평생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진영

 “너랑 자주 눈이 마주쳤었어. 그지?”

알고 있었구나...향아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정

 “어머~ 너 너무 오바 한다. 싱글로 오래 있더니 지나치게 뻔뻔해졌네? 호호호!"

그때였다. 귀에 경기가 일어날 정도로 간드러진 수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영은 향아와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런 그의 행동은 향아의 마음을 비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수정이는 필살기인 귀여움을 떨며 진영의 팔짱을 꼈다. 

자신을 불쌍해하면서도 고소해 하는 저 망할 표정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겠다. 

진영

 "수정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진영이는 수정의 말이 불편한 듯했다.

수정

 "내가 뭘? 농담한 거라구. 향아도 그 정도는 알 거야. 그지?"

수정이 얄밉게 이죽거리더니 향아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수정

 “그런데 너, 지금 꼴이 참....추해 보여. 그것도 알지? ”

안다. 그렇게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비참한 상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로 솟든지 땅으로 꺼지든지 하고 싶었다. 이렇게 초라해 질 줄 알았으면 동창회 따위 오지 말 걸 그랬다. 제발 아무라도 좋으니 자신을 구해주길...아니면  콱 죽어버리게 해 주길..ll!

정우

 "우리 이렇게 자꾸 만나면 정말 사귀어야 할까 봐요?"

마침 음악이 끝나면서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향아와 수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향아는 경악으로, 수정은 첫눈에 반해 버린 눈빛으로.

그는 눈이 부시도록 흰 셔츠에 단추를 두어 개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향아

 "다...당신.."

다시 느린 음악이 흐르고 정우는 버벅대는 향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가 막힌다. 이 남자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그리고 그의 엉뚱함에 향아는 얼떨결에 정우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정우

 "자꾸 보네? 당신."


달달한게 좋아5화 - 데이트 신청? 아니면 시비 거는 거?

  

그제야 향아는 정신이 들어 그 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수정과 진영의 눈앞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야 악마에게 영혼도 기꺼이 팔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 남자는 아니다.

향아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도 그녀를 따라 왔다. 다시 두 팔을 그의 가슴에 대고 밀쳤지만, 그는 그녀를 미소까지 지으며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거야? 맞아. 이 남자의 무례함 때문이야. 재수 없이 나서기는!

향아는 기분 나빠하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10센티짜리 굽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는 위에 있었다. 10센티로는 한참이 부족하다….

향아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지시지?”

정우

 "당신 친구가 보고 있는데?"

이 남자...눈치가 국보급이다. 슬쩍 수정 쪽을 보니 수정은 아예 대놓고 향아와 갑자기 나타난 이 남자를 보고 있는데 진영보다 멋진 남자를 아니 메가톤급 매력남을 향아가 알고 지낸다는 것 지체가 용납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폼생폼사...어차피 이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다 끝이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들이다. 진영 선배로 못다 한 한풀이, 어쨌거나 허우대만이라도 멀쩡한 이 남자로 대신하자.

향아는 빠른 포기와 함께 다른 선택을 했다.

향아가 수정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정우는 그것이 신호인 양 다시 음악에 몸을 맡겼다. 다행히 그녀와 약간 거리를 두었기에 향아는 조금이나마 진정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전혀 모르는 남자의 품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이 남자가 흑기사처럼 됐지만 남의 선 자리에 나서는 사이코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 시선을 올리면 그의 눈과 마주칠까 봐 참았다. 왜인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그리고 그에게서 상쾌한 향이 났다. 무슨 향수일까?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점점 그의 품으로 더 다가서고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심장이 쿵..쿵..쿵...쿵쿵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정우

 "당신...키가 더 컸네?"

헙!

너무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당신...이라는 단어에 대책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 또한 더 세차게 뛴다. 가만있지 못할까! 눈치 없는 심장 같으니….

향아

 "하이힐 신었어. 척 보면 몰라?"

그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향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우

 "발도 아픈 가 봐. 약간 절뚝거리는 것 같아."

그래. 아프다. 아프면 어쩔 건데? 

삐딱한 향아의 마음을 들은 것처럼 정우는 춤을 멈추고 그녀의 팔을 잡고는 무대를 빠져나가 조용한 룸으로 데려가서 그녀를 앉히고는 앞에 버티고 섰다. 갑자기 룸에는 왜 데려온 거야? 

향아는 경계태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우

 "내가 벗겨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대로 한 방 차일 것 같아서 말이야."

벗겨? 뭘? 

정우는 울그락 불그락 수시로 변하는 향아의 표정을 보며 그녀에게 더욱 다가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번뜩이더니 그녀의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간다.

정우

 "내가...해 줄까?"

향아는 점점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겁이 덜컥 나 비명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이놈이..이 놈이 기어이.....미쳤지, 이향아, 어쩌자고 이런 사이코를 따라 여기까지 들어와?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어도 똥오줌은 가렸어야지! 

그런데 긴 속눈썹에 쌓인 그의 눈빛이 반짝 웃음으로 덮이는 듯하더니….

정우

 “푸하하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더운 여름날 시원한 생수 같은 웃음소리였다. 가지런한 치아가 검은 듯한 피부에 대비되어 더욱 하얗게 보였다.

그런데 왜 웃지? 설마 날 놀린 거야? 향아는 처음 잘못된 만남에서 정강이 한대가 못내 한스러웠다. 아예 분질러 버렸어야 했다.

생각보다 먼저 팔이 그를 향해 나갔다. 사정없이 휘둘러 대는 팔에 얼굴은 겨우 피했지만 웃느라 정신을 못 차려 꽤 맞고서야 그녀의 두 팔을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정우

 "큭..큭...그만..그만..난 신발을 말하는 거였는데..큭.하하하하하하하.."

그는 여전히 어깨를 들썩여 가며 웃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미웠든지 그리고 안도감에 어이없이 눈물이 나오려 했다. 그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당황한 듯 웃음을 겨우 멈췄다.

정우

 "미안해...그냥 장난이었는데…."

향아

 "..당신..뭐야? 뭔데....자꾸 날 바보취급 하는 거야? 왜 그러는 건데!"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올라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에게 팔을 잡혀 있어서 닦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비참하게도 코까지 훌쩍거려야 했다. 수정이에게 짝사랑 선배를 뺏긴 데다가 쌩 날건달 같은 놈한테 두 번이나 놀림을 당하다니....통한의 눈물이었다. 

이향아 인생 최대의 굴욕적인 날이다. 다시는 이런 날이 있을 수 없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향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속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정우

 "스쳐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렸었는데, 당신이 자꾸 생각나. 우리 만나자."

뚝! 눈물이 완전히 멈췄다. 심장도 같이....향아가 자기 귀를 의심하고 있는 사이 그는 일어섰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요즘 기력이 좀 달리긴 했지만, 헛소리도 들리나? 내일 건강검진을 가야 하나?

정우

 "내일 저녁 식사 같이할까?"

그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향아

 "....."

계속되는 환청에 향아는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정우

 "내가 잘 가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지. 가게로 내가 데리러 갈게."

그는 말을 마치고는 룸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순간 향아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따라 나갔다.

향아

 “자..잠깐!”

아픈 발 때문에 향아가 불편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갔다.

향아

 "누가 당신이랑 만나? 이 세상에 남자가 당신밖에 없대도 난 싫어!"

정우

 "결혼하자는 말이 아니야. 사귀자는 말이지."

데이트 신청을 한 남자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참으로 삭막한 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향아

 "나도 결혼하자는 말 안 했어!"

어이없는 그의 말에 향아가 버럭 했다.

정우

 "그럼 된 거 아닌가? 블루문에 8시 예약해 놓을게. 그리고 그 신발은 신고 나오지 마."

정우는 기막혀하는 향아를 두고 나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향아는 자신이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거로 생각했다. 데이트 신청을 한 것 같은데, 끝은 또 시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시비를 거는 거야? 먼저 아는 체하며 나선 건 자기면서? 진짜 사이코야?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던 향아는 술을 깨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자. 병원에도 가고, 보약도 짓자. 왕침도 맞자!

민영

 “이향아! 한참 찾았잖아. 어디 있었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다니.”

민영이와 태진이가 그녀를 보고는 다가왔다.

민영

 “...화장실?”

민영

 “얘 왜 이래? 막 마시더라니. 집에 가자.”

멍해 보이는 향아가 걱정스러워진 민영은 태진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는 멀쩡하다는 향아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났을 때, 정말 머리가 아팠다. 두통약을 한 알 삼키고는 민영에게 전화해 몸이 아주 많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두통도 두통이지만 민영과 태진이가 어제 일을 캐물을게 무서워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도 이제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을 것이다. 자신도 믿기지 않은 어제의 일을 어떻게 정리가 된단 말인가...

향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전 내내 방바닥에 눌어붙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던 그녀는 게임이나 할까 하고 컴퓨터를 켰는데……. 이놈이 고장이다. 할부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가 불만이야? 

향아는 기름기가 많이 도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안경을 걸치고는 피시방으로 향했다. 

대낮인데도 피시방은 만원이었다. 

모두 백수야? 왜들 이렇게 모여 있어?

겨우 한자리를 얻어 앉았는데 옆자리는 남자 꼬마 아이 두 명이 열심히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곧 향아도 서서히 게임에 열중해 갔다.

앗싸~! 승리의 기운을 받아갈 무렵 옆자리에 꼬맹이 친구들이 두어 명 더 붙더니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향아

 "얘들아, 조금만 조용히 해 줄래?"

어린남

 "죄송합니다."

쪼끄만 것들이 예의는 바르군. 하지만 꼬맹이들의 침묵은 30초를 넘기지 못했다. 

서로 잘했네~못했네~ 바보! 병신! 이 녀석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그 속에서 향아는 20여 분을 견뎠다.

향아

 "얘들아…."

참다 참다 못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린남

 "야! 아줌마가 조용히 하라잖아!"

헐~~~! 뭐라구? 아.....줌......마........................아줌마.....아줌마..아줌마..아줌마..

어린남

 "아줌마들 화내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지?"

꼬맹이들은 내 가슴에 대못을 야무지게 박으며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수군댔다. 더 기분 나쁜 건 자신을 아줌마라 칭했던 꼬맹이의 표정이 예의가 발랐으며 듣는 꼬맹이들조차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게임을 할 기분이 깨끗이 사라져 버린 향아는 밖으로 나왔다가 울적한 기분을 수다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민영이가 혼자 지키고 있는 가게로 향했다.

민영

 "그래서 아줌마 소리에 충격 먹고 이리로 왔다구?"

향아

 "거기 더 있다가는 걔들한테 나 아줌마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나름 동안이라 자부했는데...이제 끝인 건가?“

향아는 너무나도 우울해 하며 민영을 쳐다본다.

민영

 "초등학생한테 교복 벗으면 다 아줌마 아저씨야. 그러니까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마."

향아

 "...찐한 연애 한 번 못 해봤는데…. 벌써 그딴 소리나 듣다니…. 사실 요즘 심심찮게 아줌마 소리 들어. 예전에는 사람들이 '결혼 안 했죠?'라고 물었는데 요즘은 '결혼했죠?' '아기 있어요?'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니까! 내 청춘을 나도 모르는 새 어디다. 흘려버린 느낌이야…. 남들 다 하는 연애 나는 왜 못하는 거야!"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는 향아를 민영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민영

 "향아야, 너……. 한 번도 안 해 봤지?"

향아

 "어? 뭘?"

민영

 "남자랑 자봤냐고!"

향아

 "......."

민영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30년이라니...너무 소중하게 지켜온 거 아냐?"

이 시대는 서른 살 숫처녀가 흠이 될까? 

자신은 조선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나?

향아

 ".....순결은 결혼 첫날밤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어. 호기심에서 자기는 싫다구……. 내가 잘못됐다고는 생각 안 해."

민영

 "네 생각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나는 네가 남자에 대해 너무 환상을 가지는 것 같아서 그래. 남자든 여자든 완벽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완벽한 상대가 만들어지는 거야."

향아

 “그렇긴 하지만…….”

민영

 "그런 사랑을 원한다면 우선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향아

 "...혹시 민정우를 말하는 거야?"


달달한게 좋아6화 - 결혼 말고 연애만?

민영

 “꼭 민정우를 두고 말하는 건 아니야. 그 남자한테 관심 있어?”

향아

 “아니~무슨! 절대!”

향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의 단단한 팔과 가슴이 옆에 있는 듯 열기가 느껴졌다.

민영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살피듯 쳐다보았다. 서른의 나이이지만 남자 경험은 없는, 하지만 남자 선택에 있어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이향아. 어제 잠깐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을 안 한다. 반응으로 봐서는 그 남자에게 끌리는 게 분명하다.

민영

 "그 남자가 너에게 관심 있는 건 확실하지만….“

향아

 “정말? 네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래 보였어?”

향아는 어쩌면 그 남자의 관심이 단순 호기심이 아니라 진짜 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민영

 “그 사람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있대. 물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확실하대."

하지만 민영의 다음 말에 향아의 기대가 꺾였다.

향아

 "그걸 어떻게 알아? 어디 정보원이라도 심어뒀어?"

민영

 "태진이 상사래."

그래서 그가 어제 그곳에 있었구나. 향아는 어젯밤 원치는 않았지만, 불쑥 흑기사처럼 나타난 그가 생각났다. 

향아

 “윤태진….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은 거야?”

향아는 태진이 괘씸해졌다. 미리 좀 말해 주지….

민영

 "소개팅시켜 줄까?"

향아

 "....다음에.“

향아는 민정우와 내일 만나기로 했다는 걸 민영에게 말하지 않았다. 

잘 안될 확률이 더 많은 데 말해서 안 좋은 꼴만 보이고. 불쌍해 보이는 게 싫어서였다.

향아

 “미안한데 나 집에 먼저 가면 안 될까? 약을 먹었는데도 아직 머리가 아파."

민영

 "그래.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어, 어제 모두 회식이라도 했나 보다."

민영은 향아가 불편하지 않게 신경을 써주었다. 

향아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엎드려 생각에 잠겼다.

민정우.....당신은 어떤 남자지? 당신과 만난다는 건 어떤 걸까? 그보다 내일 나는 어떤 얼굴로 당신을 봐야 하지? 당신을 만나는 게...과연 좋을까?

심란한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아줌마와 결혼, 주름이라는 단어.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는 서른 살 애인 없는 처자에게 이 단어들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향아

 컥! 이거 주름? 이건 기미?????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언제부터?

향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한탄 속에 잠겼다.

예전에는 스킨과 로션, 파우더 립글로스가 전부이던 화장대가 어느새 화이트닝 제품, 탄력 제품. 링클 제품, 커버스틱, 짙은 립스틱등 그 종류가 화려해졌다. 빨간색 립스틱이 잘 어울릴 때면 나이가 든 증거라더니....살 때는 이것들을 열심히 발라서 빵빵한 탄력을 되찾아 버리라는 각오를 하게 했던 것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장식용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수술을 하자. 한방에 효과를 보자! 라고 결심했지만, 그마저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가는 세월 누가 막겠냐며 순리대로 살겠다고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꾸미는 것도 귀찮아져 대강 철저히 하다 보니 오늘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독신주의는 아니니 언젠가는 결혼 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처럼 대강 맞으면 대강 맞춰서 결혼할지도 모른다.

진한 사랑에 빠져 행복한 결혼으로 간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징한 사랑은 자신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는 향아였다. 

혹시 전생에 의자왕이었을까? 너무 많은 여자를 거느린 대가로 현생에 별 볼 일 없는 처자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시간을 보니 5시다. 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텐데…….

오늘 나가지 않는다면 그와는 이대로 끝이겠지…. 다시 그런 남자와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러고 보면 그가 큰 잘못을 한 건 없다. 착각한 것도 그녀고, 그녀가 새 될 뻔했을 때 도와준 건 그다. 

좀 아깝기는 해. 어디 가서 그런 남자 만나기는 힘들지……. 그래. 만나자!

그도 무거운 만남은 싫은 게 분명하고 향아도 드라마에나 나오는 가슴 저린 사랑을 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따지고 냉소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향아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자. 민정우 말대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1시간 후, 향아는 집을 나서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괜히 튕긴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늦지 않으려고 서둘렀는데 차가 무지막지하게 막히는 것이다. 그 덕에 30분이나 늦고 말았다. 뭐 이쯤이야 애교로 봐 주겠지.

블루문은 조용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으로 재즈가수가 공연하지 않을 때는 손님들이 직접 공연을 하기도 하는 곳으로 분위기 만점이기도 했지만 묘하게도 자유로운 분위기도 있었다. 어색해지기 쉬운 첫 만남을 가지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웨이터

 “예약되어 있으신가요?”

향아

 “..네. 민정우씨요.”

웨이터

 “이쪽으로 오시죠.”

왠지 안내해 주는 웨이터마저도 잘 생겨 보인다. 집에서부터 뛰기 시작한 심장은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한다.

자리까지 안내하려는 웨이터를 보내고 잠시 그곳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블루문의 조명이 그의 얼굴에 선명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쌍꺼풀은 없지만 시원스런 눈매, 쭉 뻗은 콧날에 큼직한 입술...약간 각진 턱에는 푸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있다. 풍성한 머릿결이나 저 수염 자국을 보면 그는 수염도 자주 해야 할 것 같다. 볼수록 그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가벼워 보이는 듯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그래..남자...

이때까지 몇몇 남자를 만나왔지만 정말 남자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민정우는 그녀에게 남자로 다가왔다. 그게 그녀를 이 자리로 오게 한 것이다.

이향아를 여자로 느끼게 한 최초의 남자, 민정우.

진짜 남자와의 가벼운 연애라....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정우가 그녀를 돌아봤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어색해 하자 그는 일어서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우

 "어서 와."

향아

 "....내가 좀 늦었죠? 차가 막혀서요."

향아는 뻔하지만, 진실을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핸드백을 옆 의자에 놓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창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향아

 "유리창으로 다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말없이 미소만 짓는다. 

젠장! 훔쳐보는 거 다 들켰잖아! 이러면 지고 들어가는 거잖아!

정우

 "존댓말? 연장자 취급해 주는 건가?"

이런....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굽히고 들어갔다. 계속 지는 분위기이다. 이거 역전 시켜야 되는데..어떡하지?

향아

 "워낙 예의 바르게 자라서 초면에는 누구처럼 말꼬리 잘라 먹는 법을 배우지를 못했어요~"

향아가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는 재미있어하는 미소를 지었다. 

왜 또 웃는 거지?

아! 이제야 생각났다. 먼저 반 토막짜리 말한 건 그녀다. 원인 제공은 그였지만…. 어쨌든!

그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지대한 노력이 엿보였다. 

향아

 "괜찮아요...맘 놓고 웃어.."

정우

 푸하하하하하하하!

웃으란다고 정말 웃니? 그것도 시선 집중까지 시키면서.....별로 웃을 일도 아니구만! 그렇게 과하게 웃으면 기분이 더 나빠지잖아.

하지만 기분 나쁜 것도 순간으로 지나가 버리고 이렇게 되고 보니 어색함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일단은 더 이상 보여줄 못난 게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향아에게서도 미소가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우스웠다. 둘은 마주 보며 마구 웃어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웨이터와 지배인이 음식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볼 때까지 웃었다. 

정우

 "괜찮아요. ...이제 됐어요..."

겨우 웃음을 먼저 진정시킨 그가 지배인을 안심시켰지만, 지배인과 웨이터는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정우

  "처음에 나빴던 거 이제 다 잊기다?"

향아

 "그래."

정우

 "그런데 당신, 나이도 어리면서 꼬박꼬박 반말할 거야?"

향아

 "그런 거 신경 안 쓰게 생겼는데..겨우 2살 차이 가지고 그러기야?"

지지 않고 받아치는 향아를 보며 정우는 자꾸만 누군가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가슴 속에서 웃음이 나왔다.

정우

 "나, 성질 나쁜 둘째야. 당신은?"

향아

 "난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참고로 둘째 언니랑은 서로 물어뜯고, 머리털 뽑으면서 컸어. 그러니까 내가 겉보기에 말랑하게 생겼다고 쉽게 보면 안 돼!"

정우

 "나도 형이랑 격투기 하면서 컸어."

향아

 "흠..우리 두 사람 제법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아."

정우

 "난 운동하는 거, 음식 만드는 거, 일하는 거, 여행가는 거, 조용한 거, 게임하는 거...좋아해."

싫어하는 게 없다는 뜻이잖아! 나랑 완전 반대다!

향아

 "난...운동 중에서는 숨쉬기 운동 만큼 완벽하고 긴 역사를 지닌 게 없다고 생각해. 음식은 만드는 것 보다 먹는 게 좋아. 되도록 설거지도 멀리하는 편이고, 여행은 데려다주면 가고, 기분 나쁠 때는 조용한 게 좋아. 그리고 자는 거 무지하게 좋아해."

말해놓고 나니 민망해져 어깨를 으쓱이는 향아다.

정우

 "샌드위치 가게를 하면서 만드는 게 싫다니?"

향아

 "먹고 살아야지."

향아를 보며 정우는 갑자기 낭패감이 들었다. 혹시 이 여자 자신을 남자가 아닌 신체구조만 다른 동성 친구 정도로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정우

 "너무 솔직하군. 여자들은 그런 거 감추고 싶어 하지 않아?"

향아

 "....너무 솔직해서 벌써 싫증 난 거야?"

정우

 "나도 솔직하게 말할까?"

향아

 "........"

향아는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속속들이 다 알고 싶었다. 민정우 이 남자 상대방 듣기 좋으라고 거짓말할 타입은 아니기에...하지만 약간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향아

 "아니. 차츰 알아가지 뭐."

정우

 "그럼 왜 당신은 솔직하게 말한 거지?"

향아

 "아껴 먹는 사탕이 맛있대. 그리고...결혼할 게 아니니까~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정우

 "당신...정말 맘대로군."

정우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어디서도 이런 여자를 보지 못했다. 남자를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또 쥐고 흔들기도 한다.

향아는 자신도 자신의 이런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런 남자 앞에서 이러는 건지...귀찮다. 이러고 저러고 생각하고 따지고...그러다 보니 연애다운 연애 못 해 봤는데 또 이러고 있다니..서로의 부담 없는 만남에서 더 이상 생각하는 건 에너지 낭비다. 그냥 즐기자. 좋잖아? 그냥!

맛있는 식사를 즐겁게 즐기는데 옆 테이블의 남자가 자신의 연인을 위해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불러주자 향아의 얼굴에서 부러움이라는 광채가 줄줄 흘러내린다.

정우

 “부러워?”

정우의 말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끄덕이는 향아. 눈까지 반짝거리며 그를 올려다 본다. 그 눈을 본 순간, 정우는 생전 하지도 않던 짓을 하고야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럴 수가! 저 여자 마녀야?


달달한게 좋아7화 - 첫 키스. 그리고 확인....

절대로 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길 바란다는 강력한 바램을 텔레파시로 보냈지만 말이다.

그는 향아의 바람대로 근사한 피아노 연주까지 들려주고 있다. 

무대 위의 그는 멋졌다. 

느슨하게 내린 넥타이와 연푸른 줄무늬 셔츠를 입은 그는 음악에 빠져들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리듬에 몸을 맡겼다. 살짝 미소 짓는 그 모습은 그녀뿐 아니라 블루문 안에 있는 여자들의 체온을 확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저 남자가 내 남자란다~ 멋지지? 부러워 죽겠지?’

향아는 유치하게도 모르는 여자들을 상대로 우쭐해졌다. 

하지만 이내 저런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다니 잘하긴 잘한 건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를 쳐다보는 여자들을 보면서 벌써부터 신경을 쓰고 질투하는 자신이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이향아....미친 거야? 겨우 한번 본 남자야. 그런 남자한테 소유욕이라니. 이거 꼴값이야!

스스로 욕을 하고 있는데 정우가 연주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 향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감탄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절대로 속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 이러다가 내일이면 결혼하자고 덤빌 기세니까.

향아

 "대단해! 어떻게 양손이 따로 움직일 수 있을까? 난 아무리 해도 안 되던데…."

향아는 양손으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해 보이는 데 여전히 양 손가락이 같이 움직였다.

정우

 "어릴 때 형한테 지기가 싫어서 형이 하는 건 무조건 죽자 살자 했거든."

향아

 "그 형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만능 스포츠맨에 머리까지 똑똑한 그런 사람일 것 같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

정우

 "우리 형 둥실둥실 아저씨야. 머리숱도 한산하고..성격도 쪼잔하고 매력 없어."

왠지 까칠하고 짜증스러워 하는 말투. 

이거 질투야? 와!

어쩜 상대에게 신경을 쓰는 건 자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향아

 “흐음...정말?”

정우

 “무슨 뜻이야? 내가 우리 형을 비하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향아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어? 동생이랑 너무 다르게 생긴 것 같아서 물어본 건데. 혹시 질투야?”

정우

 “그건 당신 바람이지.”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정우는 왠지 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순둥이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으면서도 상대가 놀랄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하다.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여자다.

게다가 참는다고 참는데도 그녀의 얼굴에서 새어 나온 미소를 보는데 가슴이 간질간질 거리는 기분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후로 시간은 어떻게 갔는지 흘러가 버렸고, 정우는 향아의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향아

 "오늘 정말 재밌었어.!"

향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지만 선뜻 집 안으로 들어가 지지 않았다. 

그건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휭하니 돌아서서 가는 게 당연했는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정우

 “조심해서 가.”

향아가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자 그가 그 손을 잡았다. 

향아

 “아..”

놀란 그녀가 손을 빼내려 하자 정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경계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정우

 “잘 자.”

손을 빼자고 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만큼의 악력이었지만 향아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그와 같았고, 그의 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따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보내고 방 안으로 들어온 향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행복함에 푹 잠겼다. 창밖으로 달려가 그의 차가 떠나며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득 모든 게 꿈인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날아오를 듯한 이 행복감을 말해야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것만 같아 당장 민영에게 전화를 했다.

향아

 “민영아! 나, 향아!”

민영

 <넌 줄 알아. 좋은 일 있어? 목소리가 어째 10옥타브는 올라갔네?>

향아

 “있었징! 있잖아....”

순간 향아는 말끝을 흐렸다. 이 행복이 너무 신기루 같았다. 내일 그가 전화가 없으면? 내일 문자를 했는데 그가 답이 없으면? 

내일...내일..내일....내일이 더 이상 없으면?

민영

 <뭔데?>

향아

 “좋은 꿈을 꿨어. 꿈에 인성이 오빠가 반지를 주지 뭐냐? 핫핫핫!”

민영

 <야! 이향아! 그깟 꿈 쪼가리 얘기하려고 간만에 좋은 분위기 깨냐? 담부터 밤 9시 이후 전화하지 마!>

민영

 <윤태진! 저리 안 가?>

태진

 <넌 나보다 우정이냐? 나는 안 보여? 우리 얼마 만인데!!!>

이런...결정적인 순간에 전화를 했나 보다. 미안..친구야.

향아

 “미안. 낼 보자. 마저 해.”

향아는 전화를 끊고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천장에 민정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향아

 “미쳤나봐! 본 지 얼마나 됐다구...잠깐...다른 여자들도 데이트하면 이러나? 데이트하지 백 년 만이라 뭘 알 수가 없네...”

향아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가 아무리 잘 생기고, 그와의 데이트가 아무리 만족스러워도 어쩜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너무 조신하게 살아 온 걸까?

띠링~

문자음 소리에 확인해 보니 정우였다. 잘 자라는 문자려니 하고 본 순간,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만 보자는 거였다.

향아

 “아니. 왜? 무슨 얘길 하려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아니지...굳이 헤어지자는 말을 다시 와서 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연락 안하면 끝이지. 우리가 무슨 소개팅을 한 것도 아니고..오다가가 만난 사이잖아”

혼자 중얼대며 방 안을 헤매는 향아는 불길한 예감에 선뜻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정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향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던 그는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 차를 돌려 온 것이다. 그녀를 만난 후로 여자들에게서 평소 느끼던 마음과는 다른 것을 느끼는 것에 스스로가 당혹스럽기만 하다. 

부정하려 해도 끌린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한 이상 직진이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그녀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동그란 두 눈엔 불안감이 깔렸고, 맞잡은 두 손에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내려왔을까?

향아

 “왜요?”

정우

 “풉!”

난데없는 그녀의 귀여운 존댓말에 정우는 웃고 말았다. 확실히 긴장한 거다. 어느 정도는 안심되지만 이 여자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향아

 “왜 웃어요?”

향아는 또 밑도 끝도 없이 웃는 그를 보며 기분이 상했다. 

내가 웃기게 생겼나? 왜 자꾸 웃어? 아니면 이 상황이 웃겨? 어디가?

정우

 “존댓말.”

향아

 “아....”

향아는 손으로 바보같이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이러니 민영이나 태진이가 허당이라고 하지..

향아

 “왜..무슨 일인데?”

경계하면서도 새침한 그녀의 모습에 정우는 하마터면 다짜고짜 끌어안을 뻔했다.

정우

 “궁금한 게 있어서.”

향아

 “뭐가?”

경계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금세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도 뭔지 모르지만 그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의 표정은 단순했다. 절대로 이 여자처럼 다양하게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정우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향아

 “네?”

다시 존댓말. 정우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간다. 하지만 그의 물음이 당황스러웠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향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정우

 “내가 남자야?”

젠장!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감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정우는 자신의 입을 치고 싶었다.

향아

 “..남자지..그럼 뭐야?”

그녀는 무슨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는 표정이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정우

 “아냐. 됐어. 들어가서 쉬어.”

다소 김 빠지듯 한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확실히 자신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는 더욱더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기가 찜찜했지만, 향아로서는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향아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가.”

힘차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를 본 순간 정우는 뭔가가 가슴 속에 치솟았다. 그리고 그 팔을 확 잡아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는 그의 품으로 덥석 안겼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보고 놀람으로 약간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맛보았다. 가벼운 키스...

정우

 "와인 맛이 나..."

정우는 가볍게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그녀를 만난 후 하고 너무도 하고 싶었던 일. 

그녀는 놀란 듯 굳어 있었지만 곧 그에게 살짝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자 머뭇거리며 응해주는 그녀가 느껴졌다. 그의 키스는 더 열렬해졌고 그의 등을 잡고 있던 향아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에서 느끼는 와인 맛에 더욱 취해갔다. 그녀의 목에서 작은 스카프가 미끄러져 내렸지만 두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쉬운 듯 입술을 뗀 정우는 향아를 꼭 끌어안았다가 몸을 떼었다.

정우

 "다행이다."

약간 쉰 듯한 그의 목소리...그런데 뭐가?

정우

 "당신이 혹시나 날 남자가 아닌 친구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정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다. 그녀의 스스럼없는 행동들이 그에게는 그렇게 비췄단 말인가?

향아는 그런 그가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여 순간적으로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한참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까지 내렸다. 그리고 마무리 키스를 해주었다.

정우

 "확인 작업 끝."

향아는 깜짝 놀란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지켜보며 그는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그는 향아가 창가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우는 조금 전 불이 켜진 창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돌아서는데 바닥에 떨어진 작은 스카프가 보였다. 그녀가 하고 있던 스카프였다. 스카프를 주워 올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우

 "응..지금?"

정우는 다시 향아의 창문을 올려 다 보았다.

기석

 "그래..30분쯤 걸리겠다."

정우는 친구 지석의 전화를 끊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향아의 심장은 방금 백 미터를 뛴 듯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신이 그에게 키스하다니! 정확히는 뽀뽀였지만, 그것도 첫 데이트에..상상 속에서나 해보던 걸 직접 하다니 마치 뭔가에 홀린 게 분명하다.

향아

 “아니지! 시작은 먼저 그쪽이야...그래도..그런데...”

향아는 너무도 오랜만에 심장에 손을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느꼈다.

아...심장이 이렇게 뛰는구나. 내 심장이 이렇게 뛰고 있었어. 

향아

 “민영아! 나 애인 생겼어!!!”

향아는 미친 것 마냥 천장을 향해 소리치며 자축했다.


달달한게 좋아8화 - 생각만 해도 좋다.

기석은 유리와 같이 있었다. 정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눈치 빠른 기석은 정우가 인상을 찌푸리는 이유를 알아챈 듯 미안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정우

 "좀 늦었네."

기석은 잔 하나를 받아서 술을 따라 주며 정우의 귀에 속닥거렸다.

기석

 "얼굴 풀어~임마..내가 오라 한 거 아냐. 그리고, 이왕 와 있는데 그러지 마라."

정우

 "내가 뭘? 아직 한 마디도 안했다."

정우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기석 옆에 앉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만나던 여자와 끝이 났다고 해서, 조금 끈적거린다고 해서 짜증이 나지 않았다. 여자란 다 그렇다고 치부해버렸었다.

그게....그녀 때문인가? 그녀를 생각하니 아까의 기습 뽀뽀가 생각났다. 지금껏 그런 여자는 없었다. 그를 그렇게 당황하게 하고 심장을 간지럽게 하는 그런 경우는 없었다.

제대로 걸린 기분이다. 좋은데 경계하게 되는 그런 묘한 기분.

기석

 "야...왜 그래? 인상 쓰다가 쪼개면 신체구조에 민망한 일 생기는 거 알지?."

기석이가 자기 잔으로 그의 잔을 쳤다. 자신이 웃고 있었나? 그랬나보다. 기석과 유리가 이상한 듯 자신을 보고 있다.

유리

 "정우씨..나 불청객이라고 화난 거 이제 풀렸죠?"

유리는 계획된 조심스러움으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에는 저 모습이 예뻐 보였는데...사람 마음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띠르르르르르..

기석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전화기를 들고 자리를 피했다. 유리는 그 틈을 타 옆으로 바짝 다가와 다소 소심한 태도로 슬쩍 몸을 붙여온다.

유리

 "오해라고 말했는데..그 남자 정말 친구란 말이에요. 그러니 제발 화 풀어요. 네?"

정우는 유리와의 거리를 만들었다.

정우

 "한유리, 네가 뭘 하든 오해 안 해..아니 상관없어, 너한테 지조 같은 거 바란 적도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까. 우린 끝난 사이니 더더욱 관심 없어."

유리는 히스테리가 치솟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껏 자신을 이토록 무시한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를 집착하게 하는 남자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미치게 만든다.

유리

 "정우씨, 설마 여자 생겼어요? 그런 거예요?"

여자들의 육감이란 정말 무섭다니까...향아도 이런 무서운 육감을 가지고 있을까? 이럴 수가...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가 모든 것의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정우

 "다른 게 이유가 되지 않아. 당신과 내 사이가 끝난 거야. 다시는 이렇게도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래."

유리

 “왜 일방적으로 끝이라고만 해요? 내 감정은? 내 감정은 생각 안해줘요?”

유리는 기어이 서러움에 눈물이 솟았다. 진심으로 그가 미웠고 서운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진심이 정우에게까지 가지는 못한 듯 그는 여전히 차가웠다.

정우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었잖아. 난 오히려 이런 당신이 당혹스러워.”

유리는 다시 얘길 하려 했지만 마침 기석이가 다가왔고 그녀는 화를 애써 누르며 일어섰다. 

기석

 "어..유리씨 벌써 가요?"

유리는 기석의 인사를 무시하고는 그냥 가 버렸다.

기석

 "확실히 끝장을 봤나 보네."

기석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우

 "술 마시자고 불렀으면 술이나 마셔. 헛 소리 말고."

기석

 "새 여자 생겼지?"

유리에 이어 이제는 기석까지..

내가 얼굴에 써 붙이고 다녔나? 정우의 미간이 당혹스러움으로 찌푸려졌다.

정우

 “뭐래?”

정우는 시침을 떼며 술을 들이켰다.

기석

“민정우, 나 송기석이야. 날 띄엄띄엄 보지 마. 내가 널 몰라? 그 여자 좋아하지?”

기석이 이 자식,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알고 있는 눈치다. 어떻게 알았지? 진짜 얼굴에서 티가 나기라도 하나? 

기석

 “푸하하하하하하!”

정우

 “이 자식. 너 뭐야?”

기석의 폭소에 정우가 짜증을 냈다.

기석

 "큭큭큭.....블루문에서 내 동생 알바 하잖아. 거기서 네가 어떤 여자랑 미친 듯이 웃더라고 전화 왔더라. 내가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보니 맞네. 맞아."

기석이가 키득거리며 말을 했다. 정우를 속였다는 게 마냥 뿌듯한 듯하다.

정우

 "네 동생? 언제부터?"

생각지도 못한 기석의 대답에 정우는 당혹스러웠다.

기석

 "그게 중요해?"

정우

 "....."

정우는 레스토랑에서의 일이 생각이 나서 다시 멋쩍은 웃음이 났다.

기석

 "이놈 이거 봐라? 나도 같이 웃어보자. 그 여자 때문에 즐거운 거야?"

기석의 말에 정우가 말없이 웃는다.

기석

 "....민정우가 여자 때문에 진짜 웃는 다구? 언제 소개 시켜 줄 거야?"

정우

 "관심 꺼."

기석

 “재용이랑 준희는 아직 모르지? 애들 알면 난리 날거야! 누구한테 먼저 말하지? 아! 단체방!!”

기석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정우

 “가만 좀 있지?”

정우는 기석의 핸드폰을 뺐었다. 

기석은 그런 정우를 보며 다짐했다. 꼭 보고 말리라고...그리고 준희와 재용에게도 알리리라고.

향아

 “앗!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다시 갖다 드릴게요!”

향아

 “어쩌죠? 제가 계산을 잘 못 했어요. 5천원을 더 내셔야 해요. 죄송합니다.”

향아

 “어? 건영 빌딩이 아니라 해신이었어요? 금방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민영은 아까부터 실실 쪼개느라 실수 연발을 하는 향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룻밤 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반나절 만에 가게를 말아먹을 만큼의 실수를 하고도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자 민영은 공중에 떠다니는 향아를 잡아다 앉혔다.

민영

 "말해."

향아

 "나..머리 퍼머 할까?"

민영

 "뭐?"

향아

 "지금 머린 너무 애 같잖아. 좀 더 여성스러워 보이고 싶어. 요즘 여자 연예인들 많이 하는 거 있잖아. 단발에 웨이브 살짝 들어가 있는 거. 어떨까?"

민영

 "어울리겠다....아니 이게 아니지. 너 하룻밤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마도 민영은 향아가 정우를 사귄다는 것을 알면 펄쩍 뛸지도 모른다. 그녀는 향아를 어미 닭처럼 챙기려는 경향이 있으니까. 장녀 증후군이 좀 심한 편이다.

민영

 "혹시 진영 선배 때문에 충격받은 거야? 수정이 그거 원래 여우잖아.."

진영선배? 아...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와 수정이...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진영 선배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렸는데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민영

 “그냥 잊어버려. 태진이랑 내가 근사한 남자 찾아서 소개팅해 줄게.”

다소 찜찜해지는 향아의 표정을 본 민영이가 위로해 준다. 어제 진영 선배를 보니 수정이한테 꽉 잡혀서는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선배는 꽤 괜찮았던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향아가 아깝다.

향아

 "뭐...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향아는 민영의 걱정에 대강 대답했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그리웠다고 말했건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향아

 “민영아, 나 사실...”

민영

 “너,,,민정우 만나니?”

향아

 “응? 어떻게 알아?”

민영

 “진짜야?”

민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하다. 이런 반응 보기 힘든데 진짜 놀랐나 보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지? 지금 막, 말할 참이었는데?

향아

 “어떻게 알아...”

띠링띠링띠링~~~

향아

 "여보세요?"

정우

 <잘 잤어?>

민정우다.

향아

 "어.."

향아는 민영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정우

 <난 누구 때문에 못 잤는데 당신은 잘 잤다구? 이거 섭섭한데?>

너스레를 떠는 그 때문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민영의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에 애써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정우

 <그런데 뭐 잊어버린 거 없어?>

향아

 "뭘..잊어?"

내가 뭘 깜빡 한 건가? 뭐지?

정우

 <바깥을 봐.>

그의 목소리대로 고개를 돌리니 밖에서 그녀의 스카프를 들고 손을 흔드는 그가 보였다. 민영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도 그에게 꽂혔다. 

향아

 “지금 막, 말하려고 하는데 네가 알아버렸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게.”

향아는 전화를 끊고는 민영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녀의 걸어오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향아의 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정우

 "점심은?"

향아

 "먹었어. 당신은?"

정우

 "난 당신이랑 먹으려고 그냥 왔는데?"

향아는 그런 그에게 미안해졌다.

향아

 “그럼 우리 가게로 가자. 우리 가게 샌드위치 맛있어.”

정우

 “그러고 싶긴 한데, 무섭게 노려보고 계신 분 때문에..”

정우가 가게 쪽으로 고갯짓하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끔거린다 했더니 민영이가 노골적으로 대놓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우

 “그리고 나 지금 식사 약속 있어서 가는 길이야.”

향아

 “뭐?!”

정우

 “당신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도 자꾸 이러게 되네.”

향아가 인상을 쓰자 정우는 재미있어했다. 그녀는 전혀 재미있어하지 않지만 말이다.

정우

 “여기 스카프.”

정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스카프를 손에 쥐여 준 다음에도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민영

 “애틋해서 어떻게 헤어지고 들어왔니?”

민영이가 팔짱을 끼고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향아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향아

 “향아는~민영이가 그러면 무쩌워요~~향아 무쩌워하는 거 시쩌해여~~”

향아는 미안해하며 그녀의 곁으로 가서 팔짱을 끼며 아양을 부렸다.

민영

 “그딴 짓은 윤태진만 하는 걸로 하자?”

하긴, 민영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이런 짓이지. 통할 리가 없다. 

향아

 “미안. 진짜 아까 막, 말하려고 했는데 민정우한테서 전화가 딱 와 버렸네?”

민영

 “어떻게 된 거니? 순식간에 뭐가 이래?”

향아

 “나도 솔직히 얼떨떨해. 너무 순식간이라 실감도 안 났고...동창회때 만나자는 얘기 듣고도 잘 될지 안 될지도 몰라서 말하기도 조심스러웠어.”

민영

 “꺄! 뭐야? 이향아! 이틀 새에 만리장성이라도 쌓은 거야?”

향아

 “아냐! 거기까지는 아니고...”

민영

 “응? 그럼 키스?”

민영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향아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얼굴이 붉어진 향아가 발끈하자 민영은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가 곧 심각해진다.

민영

 “천천히 알아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향아

 “알아. 걱정 마. 그런데 너 태진이랑 연애 시작했을 때 태진이만 생각하면 기분이 막 좋아지고, 그러다가 불안해지고 그랬어?”

향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묻자 민영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민영

 “하아...널 어쩌니? 서른 나이는 어디로 먹었을까?”

향아

 “내가 연애다운 연애 해 본지가 백 만년이라 그래!”

향아가 발끈하자 민영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영

 “그래서 너의 백 만년만의 연애가 기쁘면서도 걱정이 되는 거야. 막 달릴까 봐. 그 남자 솔직히 너랑은 너무 달라. 네가 그래서 끌리는 것일 수도 있어.”

진심으로 향아의 연애가 기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민정우가 그녀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되는 민영이었다. 향아는 연애의 끝을 겁나했다. 상처 받을까 봐 항상 몸을 사렸다. 

향아

 “나도 그 생각 안 해 본 거 아니야. 그런데 기분이 좋아. 그 사람 생각만 해도 웃어. 내가 지금 그래."


달달한게 좋아9화 - 나를 흔드는 그 여자

정우는 감정 변화가 큰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상태를 굳이 표현하자면 시큰둥 정도일 것이다. 그게 제일 편하다. 과하게 기쁘지도, 슬프지도 나쁘지도 않은 딱 편한 상태에 가까운 시큰둥.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다. 거래처의 일이 생각보다 매끄럽게 풀리지는 않아 다시 한 번 더 방문해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별 것 아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깔끔하게 처리 못한 자신에 대해서 못마땅했을 것이다.

이런 기분 상태는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다.

아....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

 “정우씨.”

유리가 회사 입구에 서 있다. 몸에 빈틈없이 붙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화려한 꽃 같았다. 어디에 있건 시선을 집중시키고 만져보고 싶게 한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런데 그 여자는...

또, 또. 또! 왜 자꾸 이향아 생각을 하는 거야? 

정우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자타공인 바람둥이이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도 다른 여자와 비교하는 못난 짓은 하지 않았다. 

뭐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정우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이런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다.

유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정우

 “아...무슨 일이야?”

유리의 말에 정우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요 며칠 무엇엔가 홀린 게 분명하다.

유리

 “아니야. 점심시간 다 지났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 당신 시간 될 때 언제라도 연락 줘요.”

유리가 가느다란 손목에 걸려 있는 롤렉스시계를 흘낏 보고는 아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할지 뻔했기에 돌아서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남

 “우와! 저 여자 누구야? 연예인 아냐?”

태진

 “옆에 실장님 아니세요?”

태진의 말에 문 차장의 눈에도 그제 서야 실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남

 “그러네. 역시 실장님은 애인도 남다르네. 급이 달라.”

태진

 “예쁘긴 예쁘네요.”

남

 “윤대리 여자 친구도 예쁘던데? 물랑루즈에서 봤던 그 여자분 맞지?”

태진

 “아..네. 하하하하”

태진은 민영의 칭찬에 금세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남

 “나도 총각 때는 예쁜 여자 숱하게 만났었지. 하지만 마누라는 외모 보면 안 돼. 알지?”

문차장의 일명 ‘살다보면 시리즈- 마누라 편’이 시작되자 태진은 대강 맞장구를 치며 다시 실장 쪽을 봤지만 이미 두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딸깍.

커피 잔을 내려놓는 유리의 손톱은 화려한 보석이 박힌 매니큐어가 되어 있다. 커피 잔 하나 내려놓는 동작 하나조차도 나른하게 계산적이다.

정우

 “할 얘기가 뭐야?”

유리

 “뜻밖이라...당신이 날 잡을 줄 몰랐어요.”

솔직히 정우도 자신이 유리를 잡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 자신을 통째로 흔드는 이향아 때문인 것 같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그 여자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리 같은 거였다. 

유치하지만 그랬다.

정우

 “아니면 자꾸 찾아올 테니까.”

정우는 긴 다리를 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시간이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유리는 화가 치솟았지만 참았다. 솔직히 민정우 정도의 배경을 가진 남자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민정우가 아니니 자신이 한발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항상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진정 가지고 싶은 게 있을 때 가장 큰 고비는 바로 자존심이라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려면 기꺼이 무릎을 굽힐 수도 있어야 한다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했지만, 민정우를 만나고 나서는 아니었다.

유리

 “인정할게요. 잠깐 그 남자 만난 거 사실이에요.”

유리의 말에도 정우의 시선은 여전히 바깥을 보고 있다.

유리

 “하지만, 달라지고 싶었어. 우리 만남이...서로가 가볍게 시작한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달라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당신이 나한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질투해 주길 바랐어요.”

아..아...여전히 뻔한 말.

정우는 자신의 유치한 반항심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유리

 “그게 나빠요?”

유리는 자신을 보지 않는 그의 시선을, 얼굴을 잡고 자신에게로 돌리고 싶었다.

유리

 “정우씨! 날 보지도, 내 얘기를 듣지도 않을 거면서 왜 여기 있는 거죠? 진짜 너무 하잖아!”

화가 난 유리가 참지 못하자 정우의 시선이 그제야 그녀에게로 향했다.

정우

 “내 관심을 끌기 위해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거잖아.”

유리

 “하아...그래요. 그거에요.”

너무도 무덤덤한 반응에 유리는 김이 빠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

 “어떻게 하면 내가 당신에게 그 무엇을 해도 관심이 없다는 걸 이해시킬 수 있을까?”

유리

 “....”

정우의 말에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만큼 했다. 자존심이 아예 없는 여자인 듯 매달리고 애원해봤다. 더 이상은 하기 싫다. 

유리

 “좋아요.”

유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건방진 태도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

 “두고 보죠. 과연 그 무엇에도 당신이 지금처럼 여전할지.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만나는 그 여자도 처음에야 신선하겠죠. 뭔가 특별한 게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 그런 거 다 잠깐이라는 거. 당신이 날 밀어내는 이유가 싫증이듯. 언젠가는 그 여자의 신선함과 독특함도 싫증 날 거예요.”

정우

 “잘 가.”

정우는 협박성 발언을 하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유리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지만 돌아서는 순간 미소는 일그러졌다. 이렇게 된 이상 혼자 힘이 아닌 집안 힘이라도 빌려야 했다. 어떤 여자인지 몰라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 언젠가 싫증 날 대상이다. 

민정우. 두고 봐. 네 마음 따위 필요 없어. 그냥 내 앞에 무릎 꿇고 비는 꼴만 보면 돼.

태진

 “우웅~~짜기야~~때찐이 와쪄요~~”

태진이가 과한 애교를 분출하며 가게로 들어왔다.

향아

 “우웩~!”

향아가 배달을 가는지 가게 가방을 들고 나서며 그를 향해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나갔다.

그러거니 말거나 태진은 카운터에서 계산 중인 민영에게 다가가 팔꿈치를 괴고 윙크를 날렸다.

민영

 “우리 윤태진씨는 지치지도 않아요.”

민영이가 카운터에서 나오며 주방으로 향했다.

민영

 “저녁 전이지? 뭣 좀 만들어 줄까?”

태진

 “좋지. 같이 먹자. 퇴근 시간이 점심 먹고 땡이면 얼마나 좋을까?”

태진은 가까운 자리에 앉으며 피곤한 듯 뒷목을 주물렀다.

태진

 “아 참! 우리 실장 있잖아. 휘황찬란한 애인 있더라.”

민영

 “뭐???????????”

민영이가 순식간에 주방에서 튀어나왔다. 실로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절대 서두르거나 과하게 흥분하는 법이 없는 그녀가 이렇게 과한 반응이라니?

민영

 “지금 뭐라고 했어?”

민영은 마치 태진이가 바람이라도 핀다고 고백한 것 마냥 무서운 기세로 재차 물었다.

태진

 “......왜 이래?”

민영

 “지금 민정우 애인 있다고 했지? 확실해? 진짜야? 직접 봤어?”

태진

 “..으응...그런데 그게 이렇게 엄청난 일이야?”

태진이가 얼떨떨해하며 되물었지만, 민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민영

 “언제 봤어? 어떻게 봤어? 어떤 여자야? 민정우도 확실히 그래 보였어?”

태진

 “아까 점심시간 지나서 회사 앞에서 봤어. 어떤 여자랑 실장님이 같이 있는 걸 봤는데 여자가 가려니까 실장님이 급하게 잡더라구.”

민영

 “뭐? 그 정도로 애인이라고 한 거야? 그냥 아는 여자일 수도 있는 거잖아!”

민영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을 보고 애인이라고 단정 짓는 태진을 못마땅하게 봤다.

태진

 “모르는 소리 마. 네가 그 여자를 못 봐서 그래. 멀쩡한 남자라면 그런 여자를 그냥 아는 여자로 두지는 않아. 게다가 연인들의 그 묘한 분위기가 있지.”

민영

 “멀쩡한 남자라면?”

태진

 “나는 너한테만 멀쩡한 남자야. 알면서~❤”

순간 민영의 눈빛이 살벌해지자 태진이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덕인지 민영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져다.

민영

 “어쨌든 네가 보기엔 애인 사이 같았다는 거지?”

태진

 “그럼! 옆에 문과장님도 계셨어.”

민영

 “하아...이 망할 자식! 왠지 불안 불안했어.”

민영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며 가게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태진

 “도대체 무슨 일인데 실장 사생활에 네가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을 해?”

민영

 “......향아가 그 자식을 만나.”

태진

 “응? 뭐...진짜야? 진짜?”

민영

 “향아가 얼마나 들떠 있는데...”

태진

 “향아가 우리 실장이랑? 우리 이향아! 우와! 우와!!!! 그럼 그 쭉빵녀랑 한판 붙는 거야? 아니지 이미 그 여자를 밀어낸 건지도 몰라!”

민영

 “윤태진! 지금 농담할 때야?”

민영의 날카로운 반응에 태진은 움찔한다.

태진

 “...아니...믿기지가 않아서...그런데 진짜야? 난 안 믿겨서 그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민영

 “향아한테는 일단 아무 말도 마. 확실한 거 아니니까. 알았지?”

태진

  “알았어. 절대 말 안 해!”

향아

 “뭘 나한테 말을 안 한다는 거야?”

민영

 “이향아!”

태진

 “향아야!”

소리 없이 들어 온 향아 때문에 민영과 태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향아

 “뭐야? 뭔데 이렇게들 놀라?”

민영

 “무슨 배달이 이렇게 빨라? 캬~ 역시 배달의 민족 후손답다. 우리 향아는 뭘 해도 이렇게 똑 부러져요!”

향아

 “헛소리하지 말고, 도대체 무슨 비밀이야?”

향아는 태진의 너스레에 넘어가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에게 숨기는 뭔가가 엄청난 게 분명하다고 직감이 소리친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눈치를 보는 민영과 태진을 보니 100%다!

향아

 “얼른들 말 안 해? 가게 문 닫고 누가 더 고집 센지 해 봐?”

순둥이지만 무식하게 고집을 피워 피곤하기 그지없는 타입이 바로 이향아다. 태진과 민영은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태진

 “민영이가 그러던데 너 우리 실장이랑 사귄다며?”

향아

 “야! 윤태진! 너..”

순간 향아가 놀란 듯 민영을 본다. 민영도 태진의 발언에 당황한 듯 태진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태진

 “민영이가 네가 직접 말하기 전엔 나더러 아는 척 말라고 한 거야.”

향아

 “아...”

향아의 얼굴이 붉어지며 민영을 살짝 흘겨보자 민영도 미안해했다.

태진

 “이거 축하를 .....”

태진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다가 민영의 매서운 눈빛에 말끝을 흐렸다.

태진

 “아~ 배고프다. 밥 먼저 먹자. 우리 모두 알찬 하루를 보냈으니 식사를 해야지. 안 그래? 여성분들 여기 앉으시고. 내가 오늘은 쉐프가 되겠어.”

태진은 너스레를 떨며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민영

 “미안. 향아야. 네 입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건데.”

향아

 “괜찮아. 무슨 대단한 일급비밀이라고.”

향아는 한 사람이 더 알게 되자 현실감 없던 연애가 한 걸음 더 확실하게 현실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왜 내가 보낸 톡에 답이 없는 거지? 읽은 건 분명한데...바쁜가?


달달한게 좋아10화 - 짝사랑의 컴백

 

그녀에게서 파란 하늘을 찍은 사진과 짧은 톡이 왔다.

향아

 <예뻐>

당신도 예뻐. 

정우는 하지만 그렇게 답을 보내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 이렇게 단시간에 흔들리는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이런 낯선 감정은 그에게 두려운 생각조차 들게 한다. 못났지만 유리의 말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그동안의 그에게는 맞는 말이니까. 

그래서 이 낯섦이 더 조심스러워지는 그였다.

준희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 여기 와서 계속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냐?”

준희가 바 위로 그 긴 몸을 더 길게 늘이며 정우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정우는 핸드폰을 뒤집어 버렸다.

준희는 이곳 바 JeJe의 사장이자, 중학교 때부터의 동기이자, 기석과 다른 친구 재용과 함께 15여년이 훌쩍 넘는 친구이기도 하다.

지금 바는 인테리어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데 오늘 정우는 친구로서가 아니라 인테리어 사업자로서 일하는 중이다.

정우

 “어디가 또 불만인데? 바닥? 천장? 입구? 화장실? 주방?”

준희

 “너처럼 재미없는 놈한테 왜 여자들이 미치는지 몰라. 이번 여자는 좀 달라? 기석이가 흥분했더라. 하지만 난 이번에도 비슷하다고 본다. 넌 여자 취향이 일관적이거든.”

정우가 화제를 바꾸려 했지만, 준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 오히려 용하게 참았다 싶다.

정우

 “나 지금 일하러 왔다구요.  뭐가 불만이신지 말을 해야 고치지, 사장님아.”

준희

 “오케이. 일 얘기 먼저 하자. 저기 천장 쪽 있잖아...”

정우는 그녀의 생각을 밀어버리고 준희의 말에 신경을 쏟았다.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자 향아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한심해 보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향아

 “뭐야...사춘기도 아닌데...하루가 지난 것도 아니고. 많이 바쁠 수도 있잖아.”

집으로 온 향아는 침대에 누워 계속 핸드폰과 대화를 하는 중이다.

향아

 “이렇게 집착하는 거 나빠. 남자들이 싫어해. 남자뿐 아이라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짓이야.”

향아

 “그래도 궁금하고 걱정돼.”

향아

 “일 년을 사귀었어, 이 년을 사귀었어? 며칠 됐다고 이 난리야?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다시 연락해. 답답하긴!”

향아

 “그러게, 여자들이 썸남에게서 연락이 안 와요. 관심이 없는 걸까요? 제가 싫은 걸까요? 요럴 때는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해라! 이랬는데...내가 지금 그 꼴이네. 이제 그 마음을 알겠어.”

향아

 “답답이! 그냥 전화해! 오늘 바빴어? 나도 오늘 바빠서 정신없었어. 이렇게 보내라고 이 멍청아! 누가 사랑 고백을 하래~ 결혼하자고 말을 하래~ 그냥 안부 인사야! ”

향아

 “.....그냥. 지금 네가 문자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엄마가 지금 그녀를 보면 ‘지랄 미친년 염병하네. 이년아 정신 챙기라! 내가 머라 카드나? 선 본 놈들 중에서 하나 고르지 머한다고 다 싫다카드마 제비 같은 새키한테 목을 매노? 참말로 지랄도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라고 말이다...

띠르르를~~~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놀란 향아는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퍽!

향아

 “웁!”

젠장...입에 정통으로 맞았다. 

띠르르르르르~~띠르~~

향아

 “응. 왜?

향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전화를 받았다.

진영

 <다행이다. 화 많이 났을 줄 알았는데....>

향아

 “왜 화가 나? 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야. 나도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빠서 전화에 신경 못 써. 설마 내가 당신 연락 기다리느라 아무 일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앗! 이러면 기다리고 삐진 티가 나잖아! 

진영

 <전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절대 아니야. 오히려 고마운걸. 너그럽게 이해해 줘서….>

향아

 “나 원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다 좋다 좋다 하지도 않아.”

잘했어. 잘했어! 이 정도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고, 포용력 있으면서도 결단력 있다는 걸 잘 어필했어! 

향아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뿌듯해 했다. 그런데 뭔가가 좀 찜찜하다. 민정우인데 민정우가 아닌 듯한...목소리가 살짝,,,아니, 많이 좀 다른....

진영

 <우리 만나자. 만나서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향아

 “...누구세요?”

진영

 <.....응?>

향아

 “누구세요?”

진영

 <하하하....향아야. 나야. 김진영. 잘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그래?>

헉! 진영 선배란다! 진영 선배! 어떻게 그와 진영 선배를 헷갈릴 수가 있지? 연애를 너무 못해봐서 이제 막 아무나 다 좋은 단계에 와 버린 거야?

진영

 <혹시 술 먹고 있었어? 민영이랑?>

향아

 “....아뇨..하하하하..선배, 안녕하세요. 제가 잠깐 딴 사람이랑 혼동했지 뭐예요. 그런데 무슨 일로?”

진영

<아..그랬구나. 저번 동창회 일로 내가 너무 미안해서.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향아

 “그랬구나. 그런데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저 다 잊었어요.”

진영

 <그래도 난 그게 아니지. 지금 나올 수 있어?>

향아는 순간 망설였다. 예전 같으면 전광석화같이 튀어 나가 이미 그의 앞에 앉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미친년처럼 핸드폰과 이야기를 하느니 나가자.

향아

 “네. 어디로 가면 돼요?”

준희네 가게 일을 직원들에게 맡기고 그녀의 집으로 왔다. 딱히 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심란한 마음에 이곳으로 왔다. 그녀의 집 창문을 보고 있는데 불이 꺼지더니 잠시 후 건물 입구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분홍색 커다란 후드티를 걸친 모습이다.

그녀를 본 순간 하루 종일 심란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마치 자신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때맞춰 나온 그녀가 예뻐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있는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급히 갔다. 

진영은 카페 문이 열리고 향아가 들어오자 일어섰다.

진영

“여기야.”

향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이미 그녀 몫으로 커피를 시켜 놓은 상태였다.

진영

 “내가 미리 시켜놨어. 다른 거 마실 거면 말해.”

향아

 “아뇨. 괜찮아요.”

커피를 홀짝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향아는 이 침묵에 웃음이 났다. 옛날에는 선배와 같이 있으면 잘 보이고 싶은 초조함에 1분 1초가 아까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로 며칠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초조하지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이 다만 좀 어색할 뿐이었다.

진영은 오랜만에 다시 본 향아에게서 색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여자 친구인 수정이 있었지만, 수정의 집착과 소유욕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수정은 항상 뭔가를 바라고 계산을 했다. 지금 이러는 자신이 바람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지난밤 수정의 행동에 대한 사과를 위한 자리다.

진영

 “그날 수정이가 말을 좀 함부로 했어.”

향아

 “뭘요. 수정이 성격이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사과를 해도 선배가 아니라 수정이가 해야죠.”

진영

“그렇긴 하지. 그런데 수정이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거야. ”

피식....

향아의 갑작스런 웃음에 진영이는 의아해했다.

진영

 “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어?”

향아

 “아뇨. 선배는 항상 수정이 대신 사과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향아의 말에 진영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참으로 바보처럼 보이는 짓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영

 “아...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지난 일은 계속 마음에 걸렸어.”

이 남자의 어디가 좋았을까? 아무런 매력도 없는데. 외모가 잘 나기는 했지만, 민정우에 비하면...앗! 또 그 남자를!

향아는 그의 생각을 떨치려고 고개를 젓다가 카페 유리 너머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머릿속의 그 남자 민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향아가 뭘 어쩌기도 전에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버렸다.

향아

 “어..어..어..”

진영

 “왜 그래? 누가 있어?”

진영이 향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봤지만 이미 정우의 뒷모습만 멀리 보일 뿐이었다.

향아

 “선배, 미안. 다음에 봐요. 지금은 제가 급한 일이 생겼거든요.”

향아는 선배가 말을 들었건 말건 급한 마음에 밖으로 향해 달렸다. 

기분이 더럽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구나. 

정우는 화가 치밀었다. 이향아가 그 병신 같은 남자와 만나서 웃고 있었다. 자신에게 웃어 주던 웃음과 똑같았다. 톡에 답이 없다고 그 남자를 만난 것 같아 화가 났다.

그곳으로 뛰어들어가려던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돌아서서 와 버렸다.

왜 도망치듯 온 거지? 정작 잘못한 건 이향아야.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구! 

먼저 거리를 둔 건 자신이면서 그녀가 막상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보기만 해도 몸속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그새 사라지다니...향아는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향아

 “무슨 걸음이 이렇게 빨라?”

게다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향아는 주변을 좀 더 찾다가 결국 집으로 왔다.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가 변심했을지도 모른다는 괜한 의심을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민정우는 아마도 낮에 연락을 못 해서 집으로 직접 찾아온 건데...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으니.

향아

 “아무 일 아니었다 해도 화 날 만해. 나라도 눈 돌아.”

혼잣말하던 향아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가 변심하지 않아서이고, 질투가 확실한 것에 대해 기뻤다. 

향아

 “하루쯤 속 타게 그냥 두겠어. 크하하하하하하~~~!” 

어제 퇴근 할 무렵만 해도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던 향아가 오늘 아침은 또 세상없이 좋은 얼굴이다. 민영은 틀림없이 민정우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침 배달과 손님들도 정신없는 한때를 보내고 나서야 민영은 향아를 보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민영

 “그 남자랑 싸웠다가 화해라도 한 거야?”

향아

 “싸우긴 누가. 애들이냐?”

향아는 냉장고 안의 재료 양을 확인하며 말했다.

민영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향아

 “응? 뭘?”

민영

 “천천히 하라고 했잖아. 서둘지 말라구.”

향아

 “알아. 명심하고 있어.”

전혀 명심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한 향아의 모습에 민영은 차라리 태진이가 봤다던 그 여자에 대해 말을 해 줄까 하다가 겨우 참았다.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이다. 태진이에게 확인해 보라고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정우

 “............?”

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찍 흐르고 손바닥에도 땀이 차는 것 같다. 확실하게 주제넘은 질문을 한 게 확실하다. 

태민영!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 찍히면 진짜 회사 그만둬 버릴 거야!

태진은 속으로 울고 있었지만, 정우 앞에서 억지로 순진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지금 태진은 바람을 쐬러 나온 실장의 뒤를 우연인 것처럼 따라 나와 염탐 중이다.

정우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윤태진씨?”

태진

 “하하하하...기분이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그때 그 여자 분이 하도 이뻐서요.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태진은 실장이 되묻지 말고 그때 그 여자가 여자친구다, 아니다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정우

 “내 일에 윤태진씨가 상관할 바도 아니지만,”

그가 잠시 말을 끊더니 벽을 등지고 서며 자신을 똑바로 보자 고양이 앞의 생쥐가 된 기분이다 

정우

 “그걸 묻는 의도가 더 궁금한데?”


달달한게 좋아11화 - 쿨 한 연인들?

확실히 화난 게 분명하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직장 상사에게 여자친구에 대해 겁 없이 묻다니....주제 파악 못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겠지. 태진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렇게 된 거 듣고 싶은 답을 들어야지.

태진

 “의도라니요?”

정우

 “윤태진씨도 알잖습니까? 내가 그쪽 동창과 만나고 있다는 거.”

태진은 자신을 뚫어져라 보며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정우를 보며 그가 차라리 성질을 부리며 관심 끄라고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태진

 “...죄송합니다.”

정우

 “물론 죄송해야죠. 서로 지켜야 할 건 지켜야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는 조심해 주세요. 윤태진씨.”

끝내 들어야 할 대답은 듣지 못한 채 태진은 벌게진 얼굴로 혼자 남았다. 

민영

 “알았어. 미안해. 다시는 그런 부탁 안 해. 여하튼 민정우가 다른 여자, 얘길 꺼냈을 때 상당히 불쾌해 했다는 거지?”

태진

 <그래. 나 이제 들어가 봐야 해. 민영이 너, 이번 빚 톡톡히 갚아야 해!>

민영

 “알았어~ 알았어. 저녁에 봐.”

민영은 괜한 걸 시켜서 자기만 곤란해졌다고 짜증을 내는 태진을 겨우 달랜 다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뒤에서 자기 통화를 듣고 있는 향아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영

 “헉...너..너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향아

 “너야말로 뭐야? 왜 내 얘기를 두 사람이 비밀로 해? 무슨 얘긴데 내 얘길 내가 몰라야 해?”

민영은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숨겨 봤자 라는 생각에 태진이가 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결국 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향아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향아는 심란해 보였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민영

 “괜찮아?”

향아

 “...모르겠어...”

민영

 “섣부르게 판단하지마. 내가 빨리 말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지 않아서야. 그러니까 너도...”

향아

 “그래서 네가 천천히 하라고 계속 그랬구나?”

민영

 “응..”

향아

 “고맙다. 친구야. 너밖에 없네. 태진이도 수고했어. 그 간땡이 작은 애가 큰일 했어.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향아는 괜히 미안해하는 민영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향아

 “네 말대로 그냥 아는 여자 일 수도 있잖아. 직접 물어볼래. 미리 상상하고 헤어질 준비하고 그러는 거 안 해.”

민영

 “오~ 이향아! 너 제법이다! 아직 애기라고 생각했는데. 내 친구 많이 멋져졌어.”

민영은 자신이 그동안 향아를 너무 애 취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향아

 “아니까 이제 오버해서 그러지 마. 또 그러면 진짜 화낸다?”

민영

 “알았어.”

민영에게는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솔직히 향아의 머릿속은 미친 듯이 시끄러웠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와 수천 번을 더 싸우고, 이별을 수천 번 하는 중이었다. 

설마...그래서 그가 어제 그렇게 가버렸나? 그래서 연락도 안 됐나? 여자친구가 있었으니 그런 장면을 보고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을까? 아니야...분명 그는 화가 났었어. 잘됐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그런 표정일 리 없어.

확실하지 않은 상황은 바쁜 점심시간이 거의 지날 무렵 그가 나타나자 끝이 났다.

민영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향아가 나갔다.

정우는 태민영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고깝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인지는 뻔하다. 향아와 같이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우

 “친구가 아니라 엄마 같네.”

다소 불만스러운 정우의 말에 향아가 웃었다.

향아

 “그런 셈이지. 울 엄마가 민영이 믿고 날 서울로 보냈으니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먼저 변명을 할 기회를 주려는 침묵이기도 했다.

향아

 “어제 일, 혹시나 오해할까 봐...별거 아니었어요.”

이런 상황이 처음인 향아가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정우

 “오해 안 해.”

너무도 담백한 그의 대답. 

오해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긴 한데 뭐지 이 기분? 

왠지 관심이 없는 듯한.....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서운해지는 향아였다.

향아

 “잘됐네. 잘 됐어.”

향아도 쿨 한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도 그에게 굳이 묻지 않았다. 피곤하지 않은 연애. 바로 이런 걸 둘 다 바랐던 거다. 인제 와서 새삼스레 딴 여자가 있나? 사실대로 말해라, 말하면 용서하겠다 이딴 소리를 하는 게 우스울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양다리 금지 이런 것도 미리 말해 둘 걸 하는 생각을 했다.

정우는 그녀가 이미 알고 있을 한유리에 대한 일을 묻지 않자 피곤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정우

 “안 물어?”

향아

 “어?”

정우

 “물어볼 줄 알았는데.”

향아

 “아....뭘 물어. 믿어.”

믿는다고 해버렸다. 믿기는 개뿔...질투심으로 머리카락이 홀랑 다 타버릴 것 같은데. 회사 앞에서 그렇고 그랬다는데 따지고 싶고 심지어 때려주고 싶기까지 한데. 

젠장...쿨 한척 하다가 홧병 생기겠다.

향아

 “참 밥 먹었어? 나 못 먹었어.”

향아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정우

 “그래? 그럼 아주 맛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기대해.”

향아

 "응."

정우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믿는다는데...믿는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향아

 "그런데 점심시간 거의 끝나 가는데 들어가지 않아도 돼?"

정우

 "걱정해 주는 거야? 그거 기분 괜찮네. 걱정 마. 외근 나간다고 했으니까."

향아

 "그러고 다니면 잘리지 않아?"

정우

 "이 정도로 짤릴 만큼 나 능력 없지 않아."

향아

 "그거 자신감이야? 자만심이야?"

정우

 "둘 다."

향아

 "재수 없다는 얘기 많이 듣지?"

정우

 "질투를 받는다는 건 내가 그만큼 우월하다는 증거지."

향아

 “아..네..그렇군요.”

진심 가득한 그의 대답에 향아 역시 진심 가득한 떨떠름한 표정이 나왔다.

정우는 향아의 떨떠름한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웃음은 전염성이 강한가 보다. 정우가 웃을 때면 향아도 웃음이 삐질 거리며 새어 나온다. 찜찜한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묻어 버리는 수밖에.

그들은 김치찌개를 잘하기로 소문 난 곳으로 갔다. 오래된 간판과 그만큼 오래된 가게.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지만 맛 하나는 끝내주는 집이다.

정우

 “괜찮겠어?”

정우는 향아가 행여나 이런 곳을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녀는 이미 코로 맛을 느끼는 중이었다.

향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얼른 들어가자!”

향아는 정우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자리 하나를 맡을 수가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두부가 큼직하게 올라가 있는 먹음직스러운 김치찌개가 나왔다. 

정우

 "음~맛있겠네!"

정우는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듬뿍 떠서 향아에게 건네주었다.

솔직히 향아는 일하는 중간중간 빵으로 배를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위장이 꿈지럭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는 그가 신기해 보였다.

정우

 "왜 안 먹고 나만 봐?"

향아

 "당신이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는 게 언발런스해 보여서.."

정우

 "한국 사람치고 김치찌개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그는 별 얘기를 다 한다는 듯 피식 웃더니 찌개를 한 숟가락을 푸짐하게 밥 위에 올리고 쓱쓱 비벼 향아에게 가져 왔다. 

뜻밖의 그의 행동에 향아는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우

 "내 손 미안하게 할 거야?"

정우도 순간적인 자신의 행동에 놀랐지만, 숟가락을 더욱 가져다 댔다.

향아는 그가 내민 밥을 한입에 받아먹었다. 

밥풀이 튀어 나올 새라 꾹꾹 씹어 먹는 그녀의 눈빛과 머쓱한 표정의 그의 눈빛이 마주쳤다. 어색하면서도 뭔가 찌릿한 것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볼이 미어터져라 씹어먹고 있는 상황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기류였다.

이건 뭐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체하겠네...

정우

 "음식 장사 하니까 음식은 제법 만들겠네?"

향아가 어느 정도 음식을 넘기자 정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그녀도 느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당황해하는 그녀를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의 생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는 향아는 그저 그의 질문이 반가울 뿐이었다.

향아

 "음식장사 한다고 다 잘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

정우

 "못한단 소리야? "

향아

 "재료 섞는 건 민영이 담당이야. 난 서빙 쪽이지. 그리고 난 먹는 게 더 좋아“

정우

 "그래도 김치찌개 정도는 하겠지?"

향아

 "물론이지. 그런데 민영이가 말하길 내 음식에는 미스터리가 있대."

정우

 "미스터리?"

향아

 "분명 모든 재료가 들어가는 데도 뭔가 빠진 듯한 맛이 든다는 거야. 그보다 더 불가사의 한 건 1년 후에 만들어도 똑같은 음식을 만들면 그때와 똑같은 맛이 난다는 거지."

정우

 "그래서 결혼 어떻게 할래?"

정우는 자신이 꺼낸 말에 놀랐다. 결혼이라니...여자 앞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것도 먼저! 결혼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단어를 이렇게 부담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썼다는 것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녀는 그 단어가 뭐가 우스운지 큰 소리로 웃었다. 주변 테이블의 시선이 집중될 만큼.

정우

 "결혼 얘기가 그렇게 우스워?"

향아는 크게 웃어대는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정우를 보며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향아

 "우리 엄마 같아서. 엄마가 나더러 그런 얘길 자주 하시거든. '야야, 니는 청소도 안하고, 엄식도 제대로 몬 만들고..우짤라고 그라네? 시집이나 제대로 가것나? 간다케도 걱정이다. 그라다가 소박이나 맞을 까바서 겁난다.' 이러시거든"

정우

 "그럼 당신은 뭐라 그러는데?"

향아

 "걱정마라~ 내가 누꼬! 미모, 재치, 떨어지는 게 엄는 완벽미인아이가. 그런 흠 한가지 쯤은 있어야 인간 다버 보이는 기라. 이런 나를 데꼬 가는 놈은 봉 잡은기라~ 이러지."

정우는 실감 나게 사투리까지 써가며 얘기하는 그녀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정우

 "어머니가 그런 말 듣고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향아

 "당연하지~ '미친년, 지랄 염병을 한다. 저리 치아라!'  이러시지."

정우

 "재미있으신 분 같네."

향아

 "내가 말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믿으시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셔...지금 생각해보면 아시면서도 다 속아 주신 것 같아."

정우

 "당신이라면 나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속아 주셨을 거야. 우리 부모님은 내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으신다니까. 특히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그의 말에 괜히 서운해지는 그녀였다. 그가 이미 선수임을 알았고, 그래서 가볍게 사귀기로 한 것이지만 가벼운 여자관계를 시인하는 그의 대답에 마음 한구석이 쏴 한 건 왜지?

정우는 자신의 말에 그녀가 그렇지 않다고 해주길 바랐는데 말없이 동의의 미소를 짓자 배신감을 느꼈다. 

정우

 “뭐야? 지금 동의하는 거야?”

띠르르르르~·

마음 상한 듯한 정우에게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고향 집에서 온 전화였다.

향아

 "여보세요? 엄마...어..친구가 놀러 와서 잠깐 나왔다........어..어....김치? 전번 거 남았다. 내년까지 먹어도 남는다. 신경 쓰지 마라..뭐? 선? 또?..."

 


달달한게 좋아12화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향아는 엄마가 전화한 이유를 알자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으려 했다. 아무리 연애만 하기로 했다지만 그 앞에서 맞선 얘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가 상관없다며 받으라고 하자 향아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모습에 오기가 생겨 상체만 살짝 틀어 전화를 받았다.

향아

 “그만 좀 보자. 지치지도 않나? 쉬어가면서 하자.”

계속되는 선 자리 주선에 지칠 만큼 지쳐갔지만, 그렇다고 엄마한테 연애 중이라고 말한다는 건 결혼 날짜 잡으시라는 말과 같기에 그 말은 더더욱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다.

어른여

 <시끄럽다 고마! 니가 지금 그런 말 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나? 니 언니들은 다 25살에 결혼 했다. 니만 이 나이까지 이라고 있다꼬! 이번에는 에나로 괜찮다카더라. 알겄제? 잘해 바라이?>

향아

 “....어..알았다..”

어른여

 <가시나! 대답하는 꼬라지 바라! 니 또 트집만 잡아라, 내가 올라가서 같이 나간다!>

향아

 “아~ 진짜..김여사님, 흥분하지 마라. 끊자.”

앞에 앉아서 통화내용을 다 듣고 있는 정우가 신경이 쓰였다. 그는 최소한 딴짓을 하는 척도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도 그는 빤히 보고만 있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걷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도 곧 먹기 시작했지만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향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향아

 "당신은 선 본 적 있어? 아니다...없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이향아. 미친년...차라리 입 다물고 있지.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내버려두지. 

말재주도 없으면서.. 왜! 굳이!

정우

 "선. 볼 거야?"

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지? 왜 물어? 무슨 의도야? 같이 가기라도 하게? 아니면 쌍 맞선이라도 볼 테야?

향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민정우라는 남자를 분해라도 하는듯이 세세히 뜯어보았다

이런 경우가 있다니...개 같은 경우가 이런 걸까? 황당무계. 

어이 상실의 대표적인 예다.

향아는 선보는 남자를 앞에 두고 등 쪽 45도 각도로는 정우를 두고 앉아 있다. 정말 골 때린다....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 건지가 헷갈릴 지경이다

"선. 볼 거야?" 라고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1초도 되지 않은 그 짧은 머뭇거림 동안 정우는 이미 자신의 행동을 결론 내린 것이다.

정우

 "내가 봐 줄게."

정우의 말에 농담인 줄 알았다. 당연히 농담이지. 진담으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하지만 진심이었다. 진심이라는 게 더 기가 차서 향아는 또 쓸데없는 오기를 부렸다. 올테면 와봐라. 

향아

 “그래. 그러던가.”

그래서 향아는 미장원가서 머리도 하고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지는 뻔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이 일을 알게 된 민영은 황당해 했다. 당연하지...자신도 황당한데 그녀라고 오죽할까..

민영

 “사귀는 거 아냐? 그냥 친구 하기로 했어?”

향아

 “결혼 따로, 연애 따로.”

민영

 “뭐?”

향아

 “민정우나 나나 둘 다 결혼 생각 없다구.”

민영

 “너 정말 미쳤어?”

향아

 “모두의 연애가 결혼으로 끝나지 않아. 그리고 모두가 결혼을 목표로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구. 우린 우리한테 맞는 연애를 하는 거야.”

맞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바라던 연애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민영

 “진짜 웃기고들 있다.”

향아

 “같이 안 나가?”

민영

 “너무 어이없어서 잠깐 쓰러져 있다가 나갈 거야.”

향아

 “알았어. 문 잠그고 가.”

보란 듯 쫙 빼입고 가려는데 그는 그녀의 집 앞까지 차를 가지고 왔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구...하고 그 차를 탔더니 약속 장소인 호텔 카페까지 데려다주고 정말로 그녀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민정우, 당신의 정신세계는 안드로메다 군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선보는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그 막가파 할매의 소속인가 보다. 아담한 키에 생각 없는 단어 선택에...환장하고 싶어진다.

환장해 버릴까?

35세의 선남은 그 나이답지 않은 동안에 뽀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첫인상은 좋았지만, 불행히도 그는 피터팬 증후군 환자였다.

나이드는 게 싫은 그는 거울을 볼 때 주름살이 하나하나 늘 때마다 괴로워하며 오이 팩을 일주일에 2번 정도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최근 1일 1팩이라는 새로운 미용법을 알게 됐다며 그녀에게도 추천했다.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그는

맞선남

 "나이가 들수록 자기 관리는 해야 한다고 봐요."

향아

 "그렇죠.."

내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거야? 그런 거야? 하긴...내가 요즘 잠을 못 잤지. 민정우의 충격 선언 때문에 잠이 와야 말이지.

향아는 피곤이 물밀 듯이 밀려오며 자신의 뺨으로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푸석푸석함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맞선남

 "그리고 전 일주일에 최소 2번은 헬스장에 갑니다. 향아씨는 하는 운동이 있나요?"

향아

 "...없어요.."

할 시간이 어딨니? 가게 문 닫고 나면 평균 9시가 넘는다. 그 시간이 되면 꼼짝도 하기 싫단 말이다!

맞선남

 "그럼 저랑 같이 다녀요."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자기관리 잘하는 튀는 30대라고 생각했다. 화장 안 하는 게 어디야..하면서.. 그런데 정말 참을 수 없는 말들을 너무도 그가 당연하게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맞선남

 "...결혼 생활 중에 남편과 의견차가 생기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향아

 "...서로 독립해서 살아온 시간이 있고, 자기 생각이나 고집이 있을 나이니까..서로 양보하는 거죠."

맞선남

 "몇 프로요?"

향아

 "글쎄..반반씩이요?....아니면 60:40 정도? 보통은 여자가 많이 참는다고들 하니까. 무리하면 70:30 정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너무 착한 척했나? 향아는 점점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지고 있었다. 막말하고 싶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막말을 내뱉게 하는 유전자가 없는 듯하다.

맞선남

 "난 내 성질 대로 못 하면 못살 것 같아요."

향아

 "여자가 그걸 못 받아 준다면 어쩌려구요?"

맞선남

 "이혼이죠."

향아

 “아....”

맞선남

 “향아씨. 결혼하면 시부모님 모실 거죠? 우리 부모님이 많이 연로하세요.”

우리 엄마 아버지도 연로하셔...이 피터팬 빠야!

향아

 “.....효도는 셀프죠.”

참다못해 향아가 한마디 하자 선남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아서 함부로 말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인지 괜히 30%까지 양보한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했다 싶어 후회하는데 이 인간 그만 나가자며 먼저 일어서는 게 아닌가! 

앗! 선수를 뺏겼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 호텔 보이가 그의 차로 보이는 차를 가져다 댔다.

맞선남

 “집이 어디세요?”

향아

 “아뇨. 데려주지 않아도 돼요.”

맞선남

 “그래도 그건 매너가 아니죠.”

선남이 차 문을 열고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매너? 매너 같은 소리 한다. 매너 아는 사람이 막말하니?

멱살을 잡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향아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맞선남

 “그래요. 그럼 먼저 갈게요. 연락하겠습니다.”

선남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향아

 “선 인생 몇 년인데 척 보면 알아. 절대 연락 안 하지. 하지만 행여나 혹시 나의 바람을 말하자면 연락하지 마세요.”

향아는 조용히 자신의 바람을 빌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어느새 정우가 그녀 앞에 차를 댔다. 오늘따라 매너남들이 넘치는구나.반갑지 않아. 

특히나 민정우는 절대로 반갑지 않아.

향아

 “괜찮아. 그냥 가.”

정우

 “타.”

향아

 “됐어.”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이 상황을 즐기는 걸까?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인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너야. 민정우!

정우는 지금 그녀의 눈빛이 뭘 말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지금 그의 차를 타느니 차라리 앞서 간 선남의 차를 잡아타고 가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하지만 향아를 이대로 혼자 보내기가 싫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택시 앞을 막고서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털썩 타자 그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가 대놓고 그녀를 살피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 향아는 더 불편했다.

향아는 그런 한심한  남자들이나 만나고 다니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디서 그런 불량품들만 나타나는지. 오늘은 더더욱 더 한심해진다. 

민정우의 여자들은 다 화려할 거라는 생각에 비참해지기까지 하다. 최악이다.

진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렇지...팔아먹을 만한 사정이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시련을 주는가? 줄 때 주더라도 꼭 오늘, 꼭 저런 선남을!

향아

 "술 먹자."

향아는 정우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 표정은 같이 먹고 같이 죽자는 것 같았다. 

정우는 말없이 그녀가 말하는 곳으로 차를 몰았고 그녀는 신촌의 단골인 듯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바로 주인아저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향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향아가 미스코리아 인사를 했다.

술집아저씨

 "어이구~ 이게 얼마 만이야? 이쁜 친구는 안 왔어?“

향아

 “네. 담에는 꼭 데려올게요.”

술집아저씨

 “어? 남자 친구야?"

향아

 "네. "

술집아저씨

 "잘 생겼네. 어울려 그림이 좋아."

향아

 "정말요?"

술집아저씨

 "그래. 간만에 남자친구 데려왔으니 서비스로 술 한 병 줄게."

향아

 "아저씨~땡큐!"

자리에 앉은 그녀는 파전과 알탕, 굴전, 매운 오뎅탕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술이 오자 그녀는 각각 한 잔씩 따랐다.

향아

 “완 샷!”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혼자 잔을 비웠다. 

정우가 잔을 채워주자마자 석 잔을 연거푸 마셔 정우가 그녀의 잔을 잡았다.

정우

 “안주 나오면 마셔. 취해.”

향아

 “당신 재미없어. 술친구 해줄 줄 알고 데려온 건데 잔소리나 하고. 진짜 진짜 재미없어. 그런 소리 많이 듣지?”

정우

 “그러잖아도 얼마 전에도 그런 소리 들었어.”

향아

 “아! 혹시 그 여자가?”

향아는 별생각 없이 그 말을 내뱉고 바로 후회했다.

향아

 “헤헤..취소.”

정우

 “아니. 여자 말고 친구 녀석이 그러더라.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정우는 다행히 더 이상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향아

 “진짜? 어떤 친구야? 통찰력이 깊네.”

정우

 “나보다 더 재미없는 놈이야.”

향아

 “아~”

그녀는 금세 흥미를 잃고 안주를 간절히 기다리는 눈빛으로 주방 쪽을 쳐다보았다.

정우

 "아까 선 본 남자, 아니더라..당신이랑 안 어울려."

향아

 “....”

정우

 “남자는 남자가 보는 게 정확해.”

향아

 "알아."

드디어 안주가 나오자 향아는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들고 덤벼들었다. 

정우

 “진짜야.”

정우가 진심으로 말했다.

향아

 "알아. 내가 뭐래?"

굴전을 양념장에 찍어 먹던 그녀가 심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달한게 좋아13화 - 거짓말...그래 거짓말...

향아

 “그 남자 피터 팬 빠였어. 내 취향 아니야.”

그녀는 농담하며 싱긋 웃고는 굴전을 입안에 넣고 맛있게 먹었다. 

기분이 좀 풀렸나?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차에 태웠지만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를 몰라 난감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 기분 맞춰 준 적이 없었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그녀가 굴전을 집어 주었다.

향아

 "먹어봐. 이 집 굴전이 예술이야."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듯 멀뚱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향아는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향아

 "얼른~."

정우는 향아의 젓가락에서 굴전을 받아먹긴 했지만 계속 찜찜한 기분이었다.

향아

 "이봐~~~요?“

그녀가 얼굴을 갸웃갸웃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향아

 “기분 나쁜 선 본 건 나야. 그런데 왜 당신 표정이 그래?"

정우

 "당신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우가 다소 난감해 하며 말했다. 그녀는 그의 이런 진심이 느껴져 기뻤다.

향아

 "이제 괜찮아. 물론. 사실 당신 앞에서 보는 거 괜찮은 남자가 나왔으면 했는데 좀 실망스러울 뿐이야. 폼이 안 살잖아."

향아는 머쓱하면서도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향아

 "내가 술 먹고 죽을까 봐 걱정돼? 이래 봬도 나 술, 아주 쎄. 한 번도 테잎이 끊어진 적이 없다니까. 당신 술 먹고 뻗으면 내가 데려다줄게. “

오히려 큰소리를 빵빵 치는 그녀가 정우는 안쓰럽고 걱정됐다. 차라리 짜증을 부리고 그 선남을 욕하고, 하다못해 거기까지 따라나선 자신을 욕하는 게 낫겠다.

향아

 “어라? 그래도 인상 쓰고 있네?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주라."

향아는 자신보다 더 기분이 심란한 듯한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이런 선 한두 번도 아니고 기분 전환은 어렵지 않다.

정우

 "하하하하...내가 인상 쓰고 있는 거니까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정우는 엉뚱한 그녀의 제안을 듣고서야 표정이 약간 풀렸다.

향아

 "아니지. 당신이 나 때문에 인상 쓰고 있는 거니까 내 부탁을 들어줘야 당신 인상도 풀어지는 거지. 싫으면 됐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녀의 억지에 그는 수긍하고 말았다.

정우

 "아냐. 뭔데?"

향아

 "나, 담에 선 볼 때도 봐 줄 거지?"

정우

 "....."

이 여자...취한 거지? 취한 거야...취했어...취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도 정우는 아무 말이 없다. 주점에서 향아가 그 말을 꺼낸 뒤로 그는 아무 말이 없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그도 따라 내렸다. 

향아

 “그냥 가. 나 안 취했다니까?”

향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건물 안으로 떠밀었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진짜 화가 난 건가? 그 상황에서 그 말은 분명 개그였다. 개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지.

현관문까지 와서도 여전히 말이 없다.

향아

 “가. 들어갈게.”

그녀도 그에게 말 걸기를 단념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정우

 "당신은? 당신은 내가 선 보면 봐 줄 건가?"

그의 갑작스러운 뜻밖의 질문에 향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지? 자기처럼 농담을 하는 건가?

향아

 "....어...그래..."

정우

 "거짓말..거짓말."

그가 그녀를 뚫어지게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향아의 얼굴을 와락 잡고는 깊은 키스를 해 왔다. 마치 그녀를 먹어 버릴 듯이 거친 키스였다. 화가 난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 키스에 응하며 그의 몸에 팔을 감싸자 키스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열정과 부드러움..달콤함이 느껴졌다. 

낮에 느꼈던 좌절감, 허무함, 비참함이 모두 날아갔다. 민정우의 입술이 주는 뜨거움에 언짢았던 모든 것이 타버렸다. 

향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를 더욱 세게 잡았다. 그의 거친 숨결이 뺨에 느껴졌다. 그녀는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의기양양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우는 자신했다. 

이렇게 자신의 키스에 속절없이 빠져드는 여자다. 이향아, 당신은 내가 다른 여자 보는 거 못 참을 거야. 

향아

 "거짓말일지..아닐지...두고 봐.."

향아는 그의 눈빛을 알아채고는 괜한 오기를 부렸다. 항상 이 오기 때문에 사고를 치지만 제어가 되지 않는다. 특히 민정우에 한해서는 이렇게 유치한 오기라도 부려야 상처받지 않을 것 같다.

정우

 "...곤란해...정말 곤란한데..."

정우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서 그의 표정만큼이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향아는 기꺼이 그가 주는 짜릿함에 빠져들었다.

그를 보내고 방으로 들어온 향아는 현관문에 늘어지듯 기댔다. 

♬♪♪♬~!

놀래라...깜짝 놀라 화면을 보니 엄마다. 이번 남자는 보고가 빨랐나 보다.

향아

 "엄마.........뭐?"

어른여

 "잘해바라. 그 총각이 니 조타 켔단다. 다행이다. 니 조케 보는 사람이 있어서..내는 걱정 마니 했다아이가. 아무도 안데꼬간다 칼까바서.."

그놈 날 물로 봤나 보네? 어이없다. 미친 거야? 아니면 진심이야?

향아

 "엄마! 그놈 재수 없는 놈이다! 사람 보자마자 이혼부터 생각하는 미친놈 이더구만 내 한테 시집살이 하란다, 말이 되나?"

어른여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러컸나? 그냥 하는 소리제! 또 만나바라>

향아

 “엄마는 내가 이상한 놈이랑 결혼해서 개고생해야 조컸나? 그랑기가? 진짜 섭하다! 우찌 나한테 그라노?”

향아는 흥분하다 못해 광분하자 엄마는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듦이 분명한 신음을 흘리며 전화를 끊으셨다.

♬♪♪♬~! 

이번에는 민영이다.

민영

 "어떻게 됐어?"

향아

 "꽝이지. 뭐..."

민영

 "당연하지. 민정우가 따라붙었는데 어떤 남자가 제대로 보이겠어?"

향아

 "제대로 보였어. 첫인상은 좋았다구..근데 알고 보니 또 불량품이었지만.."

향아는 다시 그 피터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민영

 "어쩜..네가 보는 남자들은 다 그러니?"

향아

 "아무래도 그 중매쟁이가 날 위해 모아뒀다가 하나씩 내보내는 것 같아, 게릴라 전술이지..내가 지쳐서 그런 놈들이라도 오케이 할 때까지..무서운 음모야."

민영

 "그나저나 민정우는 뭐래?"

향아는 창가로 다가가 까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향아

 "담에 나 선 볼때도 따라오라고 했어."

민영

 "뭐?! 너..너 제정신이니?"

향아

 "글쎄..그 말 할 때는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그 사람은 진지하더라."

민영

 “너 엉뚱한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 이해가 안 가. 사귄다며?"

향아

 "내가 말했잖아. 그 남자와 나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는 동화를 하자는 게 아니라고. "

그랬다. 민정우와 연애하기로 했을 때 해피엔딩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선 볼 때 봐달라는 말을 다시 한 건 그냥 농담이었다. 그가 웃어버리길 바랐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반문에 그녀는 망치로 가슴을 호되게 맞은 것만 같았다. 우습게도 배신감도 느껴야 했다. 

정우

 "나는 여자와 사랑을 하지는 않아. 잠자리를 하지."

정우는 긴 다리를 포개고 앉아 기석을 보며 말했다. 샤워를 마치고 쉬려는데 밤늦게 기석이가 맥주를 사 들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기석은 오늘 일을 알고는 기가 막혀 했다.

기석

 "너, 그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정우

 "좋아해. 싫어하는 여자랑 뭣 하러 만나? "

기석

 "그럼 그 말은 뭐야?"

정우

 "네가 여자와의 사랑을 물었잖아."

기석

 "이놈, 또 궤변을 늘어놓네! 좋아하는 게 사랑이지 .네가 지금껏 여자가 좋아서 만났냐? 필요해서 만났지."

정우

 "네 말이 맞아.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만나. 필요하고 좋아해. 그래서 더 흥미진진해."

기석

 "미친놈...그러다 보면 죽네사네~그러면서 결혼하는 거야. 선수란 놈이 기본도 몰라요."

정우

 "....어쩌면..모를지도. 모르는 게 편해. 알고 싶지 않아."

기석

 “웃기고 있네.”

기석이 어이없어하자 정우는 김빠진 미소를 지으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기석

 “아! 기대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오래 안 가는 거야? 재미없는 놈.”

정우

 “왜 너까지 나더러 재미없는 놈이래?”

기석

 “누가 또 그래?”

정우

 “준희도. 그리고...그 여자도.”

기석

 “하하하하하! 그 여자 마음에 든다. 헤어지기 전에 소개 좀 해주라. 내가 한턱 거하게 쏠게.”

정우

 “꿈도 꾸지 마라.”

기석

 “응?”

정우의 말에 소파에 늘어져 있던 기석의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기석

 “내가 그 여자 어찌할까 봐 철벽 치는 거냐?”

정우

 “쓸데없는 소리 계속할 거면 가. 피곤해서 잘 거야.”

기석

 “알았어. 그 여자 얘기는 안 할게. 그럼 딴 여자, 얘기 좀 하자. 유리씨는 깨끗이 정리된 거냐?”

정우

 “왜 그렇게 내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너희 어머니한테 너 장가가게 신경 좀 쓰시라고 해야겠다.”

기석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연락이 와서는 너 어떤 여자 만나냐고 묻더라. 최소한 정리는 깨끗이 하고 만나.”

정우

 “전혀. 그리고 네가 이렇게 걱정을 하니 난 내 걱정 안 할란다.”

기석

 “망할 놈...그나저나 준희네 가게는 언제야?”

정우

 “다 끝났어. 조만간 할 거야. 넌 조양 쪽 일은 어떻게 됐어?”

정우와 기석은 공동으로 건축 사무실 를 운영하고 있었다.

기석

 “걱정 마.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우리가 맡을 확률이 90%야.”

정우

 “메르디앙 일도 그러다가 엎어졌잖아. 방심하지 마.”

기석

 “그 일은 진짜 지금 생각해도 이상해. 어쩜 그렇게 순식간에 맘을 바꿨지? 어쨌든 이번 일은 내가 기필코 따낸다. 민정우. 능력자야. 하나도 하기 힘든데 두 개나 완벽하게 해내다니. 이러니 여자들이 침을 흘려 안 흘려? ”

정우

 “송기석. 넌 기승전여자냐?”

기석

 “아니지. 기승전민정우지❤”

기석이 정우를 향해 하트를 마구 쏴댄다.

정우

 “미친 새끼...”

밤새 기분이 꿀꿀 하더니 아침이 되어도 꿀꿀하다. 비까지 오는 일요일이라니. 향아는 침대 위를 뒹굴 거리며 민영과 통화 중이다.

향아

 “민영아. 비도 오는 일요일이라니! 우리 오랜만에 영화 보러 갈까?”

민영

 <미안. 태진이랑 가기로 했어. 같이 가자!>

향아

 “됐네. 내가 태진이한테 무슨 원망을 듣고 싶어서 그런 만행을 저지르겠니?”

민영

 <민정우 있잖아. 쿨한 연인.>

향아

 “몰라. 이번 주 내내 바쁜가 봐. 코빼기도 못 봤어. 대한민국 일은 자기가 다 하나 봐.”

민영

 <이제야 좀 연인 티가 나네.>

향아

 “...있잖아. 민영아....”

민영

 <그래. 물어봐.>

향아

 “히힛~ 어케 알았쪄?”

민영

 <뻔하지. 연애에 대해 뭐가 또 궁금해?>

향아

 “민정우랑 같이 있으면 뭔가가 찌리리리해. 왜 그렇지? 진영 선배나 다른 남자와 있을 때는 그런 거 없었거든. 기분이 좋고 붕붕 떠 있기도 했지만 그러지는 않았었어.”

민영

 <뭐랄까...성적 긴장감이랄까? 성적으로 끌리는 거야.>

향아

 “아....그럼 어떡하지?”



달달한게 좋아14화 - 능력자 민정우

민영

 <어쩌긴?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던가.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던가.>

향아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했는데?”

민영

 <잘 생각해 봐. 난 태진이랑 약속 시간 다 돼서 가야 돼.>

향아

 “으응. 재밌게 보내”

그거구나. 자신이 그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것. 하지만 민정우 또한 그녀에게 끌리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요즘 코빼기도 안보이는 건데

민영과의 통화를 끝내고 잠시 바닥을 뒹굴던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래, 기분전환에는 머리 손질이 최고지. 

모닝퍼머는 20% 할인에  신장개업으로 30%까지 할인이 되니 오늘은 필히 머리를 하라는 신의 계시이다. 퍼머를 하는 동안 환상적으로 예쁘게 나올 헤어 스타일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의 계시는 계시였는데 싼게 비지떡이라는 것도 불변의 진리이다..

향아

 “헐...”

미용실여직원

 “어머~ 언니! 퍼머 너무 잘 나왔어요! 이게 지금은 퍼머기가 강해서 좀 그래 보이는데 조금씩 자연스럽게 풀릴거에요. 정말 잘 어울린다!”

이 머리는 송혜교가 해도 살릴 수가 없다! 파릇파릇하면서도 섹시한 아이돌 여가수가 한다 해도 못 살리는 머리다.

급노화 한 양배추 인형 같은 꼴이라니...

바로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머리가 많이 상한다는 말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돈도 제법 셌다. 영양 코팅을 하면 머리에서 광채가 난다는 미용사의 말에 넘어간 결과 모닝퍼머 20%와  30%세일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똑똑 끊어지기까지 한다면 비극이다.

그래..하루 종일 머리를 감자..지까짓 게 조금이라도 풀어지는 양심이라도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집으로 오자마자 머리를 계속 감아댔다. 어찌나 감아댔는지 온 집안에 샴푸 향이 퍼져 있을 정도다.

***

딩동~!딩동~!

정우

 “어?!”

주문한 음식이 온 거라 생각을 하고 문을 열었지만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철가방을 든 배달청년이 아니라  민정우였다. 차에서 내려 뛰어왔는지 머리에 맺힌 빗방울을 떨어내고 있었다. 딥 블루 자켓에 검정 셔츠, 그리고 다소 밝은 파랑색바탕에 작은 패턴이 있는 바지차림의 그는 이 우중충한 날씨에서도 빛이 난다.

이렇게 멋있을 수가! 아무리 봐도 멋있어...

멍하니 보고만 있던 향아는 그가 그녀의 코 앞으로 불쑥 간 짜장을 내밀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향아

 "...웬일이야?"

정우

 "비 오잖아....아! 당신 머리 했네? 이뻐."

향아

 “이쁘긴..아닌 거 알거든.”

정우는 한 발 더 다가오더니 젖어있는 향아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의 행동에 향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버리며 머리카락에 그의 손이 닿지 못하게 했다.

 

정우

 "들어오란 말도 안 해?"

그녀의 행동이 조금 섭섭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향아

 "그러고는 싶지만...정리가 안돼서.."

집안은 개판이다. 비록 너무도 솔직하게 모든 얘기를 했지만 그래도 실물을 보여주기는 부끄러운 그녀였다.

정우

 "그래서 이대로 가라구?"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럼 방을 치워. 나는 기다릴게 하는 자세다.

향아

 "...그럼 여기서 5분만 기다려."

향아는 정우를 문밖에 세워두고는 빛의 속도로 방 안을 떠도는 잡동사니들을 장롱과 서랍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무릎이 나오다 못해 축 늘어진 츄리닝 바지도 갈아입었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배달 청년이 건네고 간 짜장 한 그릇을 여전히 들고 서 있었다. 확실히 눈이 삐었나 보다. 다소 우스꽝스러울 이런 그의 모습마저 섹시해 보인다.

향아

 "들어와."

향아는 자장면을 받아들고 그를 들어오게 했다. 

정우는 방 하나와 거실이 있는 그녀의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생각과는 다르다. 아기자기하고 드라이플라워가 벽을 장식한다든가..커다란 곰 인형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장식도 꽃도 없다. 물론 인형도 없다. 

심지어 자신의 방보다도 장식물이 없다. 유달리 서랍장이 많다는 게 눈에 띈다.

향아

 "여자 방 치고는 좀 썰렁하지?"

정우

 "깔끔하네.."

향아

 "인테리어에 워낙 관심이 없어서."

정우

 "내가 해 줄까?"

향아

 "당신이? 냅 둬."

향아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받으며 식탁에 자장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향아

 "같이 먹자. 점심 전이지?"

정우

 "응."

헐...한 번쯤은 괜찮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덥석 앉아서 먹는 게 아닌가! 

의외로 식탐이 있구나...

인간적이긴 하지만...지금은 별로다.

할 수 없이 향아도 맞은편에 앉아 한 그릇의 자장면을 맛나게 아니지...서로가 좀 더 많이 먹기 위해 한마디 말이나 눈짓 없이 열심히 먹기만 했다.  종종 같은 면발을 입에 문 관계로 묘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소스를 튀겨가며  난생 처음 자장면의 소스까지 남김없이 깨끗이 해치웠다.

정우

 "이렇게 맛있는 자장면은 처음 먹어봤어."

정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거실로 가서 앉았다. 

향아도 커피 물을 올려놓고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향아

 "당연하지. 남의 것 뺏어먹는 맛이 원래 좋은 거야."

볼맨 향아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배가 고팠는데 정우 때문에 여전히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정우

 "남의 것이라니? 내가 돈 줬어!"

정우가 향아 못지않게 정색을 했다.

향아

 "시킨 건 나니까 내 거지!"

정우

 "어허~! 이 여자, 우기네!"

향아

 "당신이야말로 남의 집에 와서, 남의 식사를 뺏어 먹고서도 뻔뻔스...웁!"

그가 갑작스레 그녀의 입가를 혀로 핥았다. 

정우

 "소스..가 묻었어."

그렇게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살짝 닿았던 입술은 어느새 열정이 실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가 싶더니 옷 속으로 손이 들어와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렸다. 따뜻한 몸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그녀가 움찔하자 그는 다른 손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의 키스는 입술을 떠나 턱을 따라 목에 머물렀다. 그의 숨결도 그녀의 숨결도 점점 거칠어 졌다. 그의 손이 등을 돌아 가슴 근처까지 오자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 거렸다. 

짜릿한 기대감이 몰려오면서도 더 이상 진행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다. 

어쩌지? 싫지는 않지만 조금은 두려움도 있다.

그의 손을 잡았고, 그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로 울어댔다.

삐____!삐______________!

너무도 반가운 소리에 향아는 벌떡 일어나 커피를 타러 싱크대로 갔다.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있었지만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심장은 여전히 벌렁거렸다. 

커피를 타는 동안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 번 빨개진 얼굴은 쉽사리 가라앉지를 못했다. 잠깐 밖에라도 나갔다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향아

 "인스턴트야."

그녀는 그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아직도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향아

 "비 그치면 날씨가 더 더워지겠다 그지?."

정우

 "오늘 친구 녀석 가게 개업 해. 같이 가자."

향아

 "당신 친구?....내가 꼭 갈 필요 없지?"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오늘의 헤어 스타일은 눈물이 날 것 만 같아서 거절했다.

정우

 "같이 가.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문을 열었다.

향아

 "안간다니까!"

정우

 "이왕이면 예쁘게 하고 나와."

정우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 만척하며 자켓을 들고는 나가 버렸다. 향아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커피를 마저 마시기 시작했다. 

혼자 가든지 말든지. 나는 안가. 절대!

쾅!쾅!

하지만 잠시 후 그가 현관문을 세게 두드렸다.

정우

 "10분 내로 안 나오면 내가 직접 입혀 줄 거야.“

궁시렁 거리며 그녀는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속 우스운 머리가 보였지만 막무가내인 정우 때문에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

정우가 데려간 곳은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바였다. 모인 사람들도 한가닥하는 것이 분명한 분위기들이었다. 청바지에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산뜻한 블라우스와 자켓을 걸친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가 가벼운 옷차림이어서 가볍게 맞춰 입은 거였는데.....주눅이 들었다. 

정우

 “괜찮아.”

쭈뼛거리는 그녀를 느꼈는지 정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녀의 자신감이 회복 되지는 않았다. 

역시 오지 말았어야해. 노화된 양배추 인형 머리에...이런 옷차림...

향아

 “하아...”

향아의 심란한 한숨 소리에 정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옆에 바싹 끌여다붙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화려한 사람들을 정처 없이 헤매며 자신을 비관하는 중이었다.

정우

 “나 좀 봐.”

시큰둥한 얼굴로 그녀가 올려다보자 정우가 괜찮다며 힘내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향아는 그 미소에 더 화가 났다.

향아

 “나갈래.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정우는 그녀가 당황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 일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터였다.

정우

 “화났어?”

정우의 말에 향아의 눈꼬리가 올라가며 입술이 앙 다물어 졌다.

향아

 “말이라고 해? 이 꼬라지를 하고 내가 여길 오고 싶겠어?”

향아가 자신의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정우

 “당신이 뭐가 어때서 이쁘기만 해!”

향아

 “장난해? 당신 눈은 어쩌다 보니 뚫려 있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 안보여?”

처음 보는 향아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신경질 적인 모습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른 여자들이 이런 경우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간혹 있으면 그냥 저절로 풀릴 때까지 무시했었다.

향아

“멍청이!”

이 남자가 이렇게 눈치가 없었나? 이렇게 멍청했던가? 

향아는 말을 하면 할수록 너무 화가 났다. 한 대 치고 싶은 걸 참느라 주먹을 꼭 쥐고 있어야 했다. 이 주먹도 언제 어느 순간에 발사할지 모를 일이다.

태진이가 민정우가 자기네 회사 사주 아들이라고 했을 때 놀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만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큰 부담이나 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그걸 직접 느끼기 전이다.

이렇게 그런 걸 직접 느껴야 하는 현장에 하필이면 초라한 모습인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금수저 흙수저 라는 말이 불현듯 생각나며 민정우라는 남자가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자꾸만 나쁜 생각만 들었다. 

이 남자가 ‘연애만’이라고 했던 건 이런 신분차이 때문이었을까?

향아

 “속상해서 갈래....”

정우는 자신이 너무 배려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화를 낼 때보다 속상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생처음 헤매는 중이다.


달달한게 좋아15화 - 미쳤어?

 

기석

 “저거..저거...”

준희

 “맞아. 민정우.”

기석이 버벅대자 준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을 끝맺어줬다. 

기석

 “사람들 앞에서 정우가 쩔쩔매다니..그것도 저 여자 앞에서...이거 동영상으로 찍어 놔야 하는 거 아냐?”

기석은 눈 앞에 펼쳐지는 기이한 광경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평소 정우가 선호하던 타입은 분명 아니었다.

160cm가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에 약간(?)통통한 몸. 선하고 귀여운 인상이긴 하지만 죽이게 섹시하거나 눈에 확~ 튀는 미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우는 그런 그녀를 소중히 대하고 있었다. 손까지 잡고...

저 녀석이 여자 손을 저렇게 꼭 잡아 줬던 적이 있었던가!

준희

 "저놈이 산해진미 다 맛보더니...꽤...흠....소박해졌네....저 분위기를 보아하니 얼음덩어리 민정우를 난로 옆에 놔둔 것 같은 걸~..참, 그런데 저 자식 유리도 여기 온 거 아냐?"

준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유리를 찾았다.

기석

 "끄응...모르지..새 여자와 옛 여자가 만나다니.."

기석은 유리의 불같은 성질을 알기에 벌써 걱정이 됐다.

준희

 "인마, 네 여자냐? 왜 네가 인상이냐?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셔주면 돼. 그나저나 저 여자분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야. 그러기 전에 인사해야지?."

인생 모토가 강 건너 불구경인 준희는 다시 기석의 어깨를 세게 후려치고는 정우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준희

 "민정우~! 왔냐?"

정우

 “준희야. 나 가봐야겠다. 나중에 다시 올게.”

정우는 향아를 보호하듯 그녀 앞으로 나섰지만, 준희는 이미 상황을 파악한 뒤였다. 

준희

 “이미 사람들이 다 봤어. 지금 나가면 더 이상해. 따라와. 사람들한테는 내가 잘 둘러댈 테니까 일단 조용한 데 가서 해결해.”

준희를 따라왔던 기석도 대강 눈치를 채고는 이곳으로 쏠린 시선들을 돌리려고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기석

 “참! 그거 알아요?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구하기 힘들었는지....”

기석의 의도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졌다.

준희가 가게 사무실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나간 후에도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가 멍청이라고 한 게 맞다. 

향아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기분대로 그녀를 끌고 온 것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바닥만 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다. 정우는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 앞에 눈높이를 맞추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정우

 “미안. 내 생각이 정말 짧았어.”

그 말에 그녀가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정우

 “나는 당신이 그대로도 충분했는데...당신은 아니었나 봐.”

향아

 “알기는 아네...”

정우

 “화 풀어. 응?”

향아

 “......속상해.”

정우

 “내가 진짜 멍청이야.”

향아

 “그래서가 아니라...당신이 너무 멀게 느껴졌어. 갑자기 당신을 대하는 게 어색해...”

정우

 “뭐? 왜?”

정우는 향아의 뜻밖에 말에 당황했다. 친구 가게 개업식에 만족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오게 되어 화가 난 건데 왜 갑자기 자신에게 거리감이 느껴진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향아

 “당신. 태진이 회사 사주 아들인 거 알아. 그런데 그런가 보다 했어. 실감이 잘 안 났던 거 같아. 그런데 여기 오니까 당신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보였어.”

정우

 “이향아!”

갑자기 정우가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향아가 놀란 토끼처럼 그를 본다.

정우

 “당신이야말로 멍청이잖아!”

그가 진심으로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우습게도 마음이 조금은 풀리며 웃음이 났다. 그도 멍청이지만 자신도 멍청이는 맞다. 

왜 자신과는 연애만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신분 차이인 건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지금보다 더 화를 낼 것 같지만....

향아

 “왜 나랑은 ‘연애만’ 이야? 당신과 내가 달라서?”

말하고 말았다.....자신이 말을 한 게 아니라 저절로 튀어 나간 것에 가깝다. 어쨌든 입 밖에 내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여자 이야기도 입 다물었으면서! 

후회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화도 내지 않고, 그녀 말이 맞다고 하지도 않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기만 한다.

향아

 “아..미안. 나도 연애만 하자고 했으면서 너무 갔지?”

정우

 “그럼 결혼할까?”

잘못 들었나 보다.

정우

 “결혼할까?”

그가 다시 말한다. 제대로 들은 것이다. 그럼 농담인가? 농담이다.

향아

 “미쳤어?”

미쳤냐니...정우는 기분이 나빠졌다. 차인 기분까지 들었다. 

자신도 불쑥 내뱉어놓고 아차 하기는 했다. 하지만 난생처음 말해 본 청혼에 미쳤냐는 대답이라니....

하지만 미치긴 했나 보다. 

머릿속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없었는데 어쩌다가 결혼하자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니 미친 거지.

정신 차리자. 이 미친 새끼야!

정우

 “당신이 바보 같은 말을 하니까 그러잖아.”

정우가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렸다.

향아

 “나도 좀 예민했어. 미안.”

정우

 “집에 데려다줄게. 가자.”

정우가 일어나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향아

 “혼자 갈 수 있어. 당신은 여기 친구들이랑 있어야지.”

민정우의 뜬금포 청혼은 정말 충격이었다. 

비록 진심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발언에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지.

준희

 “으응? 그게 무슨 말씀들?”

갑자기 엄청나게 잘 생긴 남자가 물 잔을 손에 들고 문 앞에 서 있다. 노크 소리가 들렸었나? 

향아는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그 남자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이름이 그대로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정우와는 다른 뽀얀 피부에 짧은 머리, 한쪽 귀에만 한 귀걸이, 늘씬한 키, 붉은 입술. 상큼한 민트색 재킷에 흰색 티셔츠, 검정 바지와 단화 차림. 누군가를 닮았는데...누구더라?

조민성! 자신이 유일하게 열광하는 배우 조민성을 닮았다. 

아니 그보다 더 잘 생겼다!

향아

 “아!”

향아의 탄성에 정우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나 보다. 이런 상황에도 이 남자의 외모에 정신이 쏠리다니...그럴 만큼 정말 잘 생겼다.

정우는 향아가 감탄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나빠졌다. 

이 여자 진짜....

준희

 “무슨 일인지 몰라도 물 좀 드시는 게 나을 듯해서 가져왔어요.”

준희는 호의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향아에게 물 잔을 건넸지만, 정우가 무뚝뚝하게 잔을 가로챘다.

정우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가 봐.”

정우의 뚱한 반응에도 상관없이  준희는 향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준희

 "안녕하세요. 박준희라고 합니다."

이런 치명적인 미소라니...철벽녀라 해도 이 남자에게는 다 넘어가겠다. 

향아

 "안녕하세요...이향아예요."

향아가 내민 손을 그가 마주 잡았다. 생각보다 거친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준희의 큰 손이 향아의 손을 감싸자 그녀는 볼까지 붉게 물이 든다. 그것을 보는 정우의 표정이 불쾌감으로 찌푸려진다.

정우와 준희, 그리고 기석, 이재용, 이렇게 넷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기석이가 그야말로 착한 남자의 전형이라면 정우는 풍기는 이미지가 정중하면서도 차가운 면이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데 준희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놀자 주의여서 부드러운 이미지였다. 

그런 면들이 여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우보다 더했으면 더 한 바람둥이에 겉모습만큼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재용은 사채업을 하는데 오늘은 보이질 않는다.

정우

 “향아야, 가자.”

정우가 준희에게 잡혀 있는 그녀의 손을 빼내며 재촉했다.

준희

 “뭘 그렇게 서둘러. 이왕 왔는데 친구들한테 향아씨 소개도 좀 하고 그래.”

준희는 정우를 놀릴 재미에 들떴다.

준희

 “향아씨도 좀 진정 된 것 같은데. 이제 좀 괜찮으시죠?”

준희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자신에게 가까이 대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자 향아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향아

 “...네. 감사합니다.”

준희

 "봐. 향아씨도 괜찮다고 하잖아. 친구들 오랜만에 모였는데 그냥 가버리면 다들 서운해할 거야. 인사만 하고 가.“

준희가 진심으로 서운해하며 정우와 향아를 만류하자, 향아는 왠지 미안해졌다. 좋은 분위기를 자기 때문에 깨는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향아

 “그렇게 해. 정우씨. 난 이제 괜찮아.”

정우

 “아냐. 집에 가자.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정우가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자 향아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준희는 터지는 웃음을 꾹 참는 듯했다.

정우는 그런 준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준희

 “알았어. 더는 안 잡을 게.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난 이만 손님 접대를 하러 나가야겠어. 향아씨. 가기 전에 인사는 하고 가요. 꼭이요!”

향아

 “네.”

준희가 나가고 나자 정우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우

 “망할 자식...”

향아

 “왜 친구 욕하고 그래? 욕할 짓 안 했는데.”

향아의 말에 정우는 이번엔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정우

 “좋냐?”

향아

 “뭐가?”

뜬금없이 좋냐니? 뭐가?

 왜 비꼬는 거지?

정우

 “나한테 화낼 때는 언제고 저놈한테는 아주 녹더라?”

아....그랬어? 

향아는 웃음이 났다.

정우

 “웃지 마! 생각만 해도 좋아?”

향아

 “잘 생긴 건 사실이잖아.”

향아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에게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자꾸만 웃는 그녀 때문에 정우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어떻게 자신의 청혼은 미쳤나는 말로 튕겨 버리고 박준희의 빤질거리는 낯짝에는 헤벌쭉할 수가 있냐구!

향아

 “잘 생겼는데 그럼 어쩌라구?”

정우

 “이향아!”

그가 정색하자 향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 이상 그를 자극하면 감당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아

 “...?”

문으로 향하던 정우의 발걸음이 멈추면서 향아를 돌아봤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스킨십을 한 건 처음이다.

향아

 “나한테는 당신이 더 멋져. 당신이랑 있으면 두근거려. 찌릿찌릿해.”

당신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는 말을 어쩌면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할 수가 있는 거지? 

정우는 순간 머리가 어찔해져 왔다.

향아

 “그러니까 화 풀어. 응?”

그러면서 향아가 잡은 손을 아이처럼 장난스럽게 흔들어 댔다.

정우

 “핫...”

향아

 “웃었다.”

정우

 “화 풀려서 웃은 거 아냐. 어이없어서 웃은 거지.”

기석

 “어떻게 됐어? 여자분 괜찮아?”

기석이가 싱글거리며 사무실에서 나오는 준희를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준희

 “아주 장관이다. 정우 녀석, 임자 만났어. 그놈 성격에 절대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 봤자 힘든 건 자기지.”

준희

 “가서 경헌이랑 병규랑 애들 좀 불러와.”

기석

 “야!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또 정우 열 받게 하려고 그래?”

준희

 “지금 아니면 정우 애인 소개 못 받아. 어쩔래? 어서~어서~ 빨리 서둘러!”

준희는 기석을 재촉해서 보내고는 사무실 쪽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달달한게 좋아16화 - 라이벌 그녀?

향아

 “어....”

향아는 문을 열자마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여자1

 “안녕하세요!”

기석

 “와~ 보는군요!”

남자1

 “민정우 오랜만이다?”

모두들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하는 통에 얼결에 향아도 통성명을 해야 했다.

향아

 “아..안녕하세요. 이향아라고 합니다.”

기석

 “송기석입니다. 반가워요.”

향아가 친구들에게 쌓여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정우는 준희를 살벌하게 노려 보았다. 바로 가지 못하게 저 녀석이 꾸민 짓이다.

준희

 “그러게 왜 그냥 내빼려고 해?”

정우

 “무슨 상관인데?”

준희

 “그러니까. 네가 누굴 사귀든, 헤어지든 상관없었지. 그런데 네가 자꾸 궁금하게 굴었잖아. 그러니 어째? 얼굴 한 번 보고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 이럴 수 밖에.”

준희는 정우의 기분 상태 따위보다 자신의 궁금증이 더 중요하다.

정우

 “너 때문에 향아가 불편해 하면 가만 안 둬!”

준희

 “이봐~이봐~ 이렇게 구니 내가 궁금해? 안 궁금해?”

정우의 협박에 준희는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우

 “네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것만 알아 둬. 그럴 기회가 생기면 꼭 할 거야.”

준희

 "네 덕에 가게가 잘 될 것 같아. 역시 민정우야."

준희는 정우의 말을 무시하고는 근사한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그의 친구들과 통성명을 마친 향아의 귀에 준희의 말이 들어왔다.

왜 정우 덕에 가게가 잘 된다는 거지? 공동 투자라도 한 건가? 

의아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준희는 정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준희

 "향아씨, 이 녀석 원래 인테리어 하는 놈 이예요. 몰랐어요?"

향아

 "네?...대명 기획실 실장 아니예요?"

준희

 "그야 부업이고, 본업은 인테리어예요. 이 가게 이 녀석이 맡아서 한 거예요. 보기보다 제법이죠? 근데 이놈이 친구한테도 에누리가 없어요. 아주 박한 놈이랍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말로만 듣던 완벽체 인간이라는 게 바로 민정우였던가?

정우

 "나중에 이야기 해 줄게."

향아가 정우를 외계인 보듯 하자 정우는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잡아 당겼다.

여자1

 “귀엽기는 하지만 의외다.”

여자2

 “그렇지? 전에 엄청나게 화려하고 예쁜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는데. 그 여자와는 헤어진 건가? 그 여자보다 못하다.”

여자1

 “뭐야? 너 여자라고 질투하냐?”

여자2

 “질투는 무슨. 이왕이면 나보다 예쁜 여자랑 사귀는 게 덜 배 아프다는 거지.”

여자1

 “어쩌면 대기업 딸일지도 몰라.”

여자2

 “아~ 그렇다면야! 역시 민정우네.”

그닥 즐겁지 않은 뒷담화를 나누고 있는 저들은 그녀가 인사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배 아프겠지. 

그런데 자신이 대기업 상속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더 배가 아플까? 문득 그 모습들이 상상이 되어 향아가 웃음이 났다. 그때 기석과 얘기를 나누는 정우가 보였다. 

이곳에는 민정우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기석이라는 저 사람과 박준희가 정우와 격 없이 친해 보였다.

여자1

 “민정우는 아쉬울 게 없겠어. 안 이뻐도 배경 좋은 여자도 만나고, 잘 빠진 여자도 만나고. 그날 기분 따라 만날 수 있잖아.”

아..진짜..듣자듣자 하니까 좀 심하잖아? 향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때였다.

준희

 “앞에 대고 얘기를 해. 뒤에서 백 날 이래봤자 민정우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너희들의 이런 애타는 마음을 몰라준답니다.”

여자2

 “아...박준희..”

사람들이 그의 등장에 멈칫하는 듯 했다.

여자1

 “우리가 뭘... 그냥 생각보다 약해서..”

여자2

 “맞아. 솔직히 너무 평범하잖아. 진짜 대기업 상속녀야? 준희 넌 뭐 좀 알지?”

준희

 “이렇게 뒷담화 하는 너희들 보다 훨씬 나은 여자라는 건 확실해.”

준희의 말에 향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닮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기분이 한결 나아진 향아는 준희가 특별히 만들어 준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소주와 막걸리, 맥주로 일관된 음주를 즐겨온 그녀는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지만 맛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어 잔에 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화장실. 화장실이 어딨지? 

정우

 “뭐? 유리가? 그걸 왜 이제 말 해?”

기석

 “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안 보이길래 안오는 줄 알았지.”

기석은 날카로운 반응의 정우의 눈치를 봤다. 

기석

 “향아씨 잡아 먹힐까봐 벌써 걱정이냐? 이럴 거 왜 데려왔어?”

정우

 “후회 중이다.‘

기석의 말에 정우는 인상을 썼다. 진심으로 후회 중이다. 물론 향아가 처음보다는 편해진 것 같아 다행이지만 유리가 있다면 또 달라진다.

정우

 “한유리 어딨어?”

기석

 “아까 잠깐 보였는데 또 안보이네? 그냥 갔나?”

기석이 그랬으면 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유리를 찾았다.

정우

 "그런데. 향아는? 왜 안 보이지?“

정우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그녀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졌다.

화장실도 여기저기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복잡한 듯한데 전혀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정리가 된 것이 정말 신기했다. 

이 모든 걸 저 민정우가 했단 말이지? 

화장실을 둘러본 그녀는 티슈에 찬 물을 적셔 얼굴을 눌러 주었다. 

아놔~ 퍼머...거울 속을 자신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며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은 갸름한 얼굴에 복숭아 빛 뺨을 가진 여자였다. 놀라운 화장술이 아니어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몸매 또한 향아가 꿈에나 그리던 가냘프고. 그러면서 나올 데 나오고, 들어 갈 데 들어간 환상의 몸매. 

그리고 제 2의 피부 같은 살구 빛 드레스. 그리고 목에서 번뜩거리는 것은 틀림없는 다이아몬드 일 것이다. 

다른 한 명도 비슷한 키에 검정 원피스. 짧은 단발을 한 여자였는데 처음 여자보다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뻤다.

여기는 예쁜 여자들만 오는 데야?

자신을 감탄의 눈으로 살피는 것을 안 건지 그 여자는 향아을 향해 으스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머리도 똑똑하고 집도 부자일 것 같다. 게다가 키도 커서 170은 되어 보였다. 이런 걸 보고 축복받은 유전자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자신이 모습이 이 순간에 못마땅해졌다.

민정우 때문에 이런 꼬라지로 여기 까지 오게 되다니...다시 화가 난다!

그 여자는 얇은 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겨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라도 하듯 보더니 세면대에 걸터앉더니 팔짱을 꼈다. 그녀의 행동들은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향아가 화장실을 나가려 하는 순간 그 여자가 말을 걸었다.

유리

 "한유리라고 해요."

살구빛 드레스를 여자가 가늘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향아

 "이향아라고 합니다."

처음 보는 여자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는 이 여자는 친화력이 좋은 걸까? 호기심이 많은 걸까? 

향아는 마지못해 그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아주 찬 손이었다.

유리

 “정우씨랑 같이 왔죠?”

이곳에서 정우 모르면 간첩인가보다. 유명인사가 따로 없다. 

유리

 "..정우씨와는... 예전부터 알고 있는 친한 사이라고 해 두죠."

이 여자 정말 기분 나쁘네. 누가 물어봤나? 

저렇게 띄엄띄엄 말하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거 밖에 더 돼? 

불쾌해진 향아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의외로 여자의 악력이 상당해 쉽게 빼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유리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손의 힘을 풀었다. 검은색 드레스의 여자가 재미있어 하며 키득거리자 향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희

 “아~ 전 김나희라고 해요. 유리 친구죠.”

검은색 드레스의 여자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나희

 “저는 카인 쥬얼리 다자이너예요. 그쪽은 뭐하는 분이세요? 아..실례인가요?”

향아

 “친구들이랑 샌드위치가게를 동업하고 있어요.”

나희

 “사업하시는구나?”

향아

 “그냥 작은 가게예요.”

나희

 “그럼 향아씨 아버님도 정우씨네처럼 사업하세요?”

향아

 “아뇨. 그냥 평범한 공무원이세요”

나희

 “공무원? 아~ 공무원이시구나.”

무시하는 게 분명한 저 말투! 이 여자 뭐지? 점점 기분이 더더더 나빠진다. 

확연히 기분이 나빠진 향아의 얼굴을 만족스런 듯이 본 유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을 나갔다.

나희

 “담에 또 봐요~”

검은색 드레스의 여자는 무시하는 웃음을 지으며 향아를 훑어 보고는  처음 여자의 뒤를 따라 나갔다.

저거 뭐야? 

민정우 잘난 거 너무도 잘 알고 시작했고, 그래서 시작한 거지만 벌써부터 태클이라니...

잠깐! 혹시 태진이도 보고, 정우의 지인도 봤다던 그 대단한 미모의 여자가 바로...?

향아는 자신의 옷차림새를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거울 속의 모습도 재확인하며 화가 나 얼굴이 빨개졌다.

향아

 “민정우. 당신 진짜 미워!”

아무리 둘러봐도 향아가 보이지 않는다. 

홀을 둘러 봤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없다. 불편해서 혹시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거나 아닐까?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친구들과 인사만 끝내고 그냥 갔어야 했다. 

기석

 "향아씨, 아까 화장실 가더라."

기석이가 두리번거리는 정우를 보며 일러 주었다.

정우

 "그래? 언제 들어갔어?"

기석

 "어쭈리구리~ 내가 오늘 너 때매 골고루 놀랜다. 마중이라도 나가"

정우

 "낯선 자리잖아."

기석의 농담에도 정우는 정색으로 반응을 했다.

기석

 "어라~? 민정우가 변명까지?"

기석은 평소와는 다른 정우의 태도가 흥미로웠다. 

더 놀려 주려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유리가 보였다. 나쁜 예감이 확실하게 몰려온다. 

기석

 "유리씨 화장실에서 나오네."

정우의 고개가 순식간에 유리쪽으로 향했다. 부드럽게 웨이브가 진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유리

 "안녕하세요, 기석씨?"

유리는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기석에게 아는 체를 했다.

기석

 "네. 반가워요. 전 다른 친구 좀 보러 갈게요."

기석은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유리

 "저번에는 그렇게 가서 미안했어요. 나중에 꼭 한잔 같이하기예요~“

유리는 자신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뜨는 게 분명한 기석이가 재미있었다. 

정우의 친구 중 제일 무난한 성격이 소유자였다. 

박준희는 모델 같은 외모에 항상 예의바르고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건 가면이고, 이재용은 흉터가 있는 얼굴과는 상관없이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지만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린다. 직업 또한 별로다.

유리

 “아무리 헤어진 사이래도 이제 인사도 안하기예요? 의외로 촌스럽다니까."

유리는 정우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결별 통보를 받은 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다시 이렇게 보는 것이 자존심 강한 그녀로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정우

 "한유리..."

유리

 "인상 쓰지 마요. 당신 따라 온 거 아니니까. 너무 잘난 척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끈적거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마요."

그녀가 이렇게 나오니 정우는 미심쩍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라도 향아와 같이 왔는데 유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봐야 한다는 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유리

 "그러니까 앞으로 나 보더라도 전염병 환자 보듯 하지 말라구요. 자꾸 그럼 곱게 먹었던 마음이 삐뚤어 질 수 도 있어요."

정우

 "...."

유리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지만.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

유리

 "잠깐이요."

유리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스쳤다. 

유리

 "티끌이 묻었지 뭐예요."


달달한게 좋아17화 - 화 내지마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향아는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았다. 나오자마자 일부러 찾지 않았는데도 눈에 확 튀는 커플이었다.

‘군계일학’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이구나 싶었다.

그녀가 서 있는 쪽에서는 정우의 뒷모습만 보였다. 당장 달려가려는데 한유리라는 여자가 그의 목을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저게 진짜…! 

손모가지를 확 그냥…. 확…!

속에서 천 불이 치솟으며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네가 어쩔 건데?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한짓이었다. 

망할!

향아 뿐 아니라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린다는 것을 알고 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저 여자 말대로 두 사람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친한 사이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마치 버려진 여자처럼 보고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사람1

 “내가 봤다던 여자야. 저 여자!”

사람2

 “와! 연예인급인데? 아름다워. 여신이네.”

사람3

 “저런 여자를 두고 왜…….”

심지어 보란듯이 수군거렸다. 그녀의 반응이 궁금한 거겠지. 그녀가 개밥에 도토리가 되어간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가 유리의 손을 잡았다.

확신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말하던 그 여자가 바로 한유리라는 것을.

두 사람 현재 진행형인가? 정우가 그럴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애 세포가 파괴되어 가던 이향아의 인생에 민정우라는 남자는 하늘이 내려주신 맛난 과자와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과자가 언제까지나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 맛 난 과자는 불량 과자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불량 과자를 너무 좋아해서 배탈이 나도 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아무리 뺏고 못 먹게 했어도 화장실에 숨어서라도 먹고는 했다.

이대로 나가버리자니 자존심 상하고, 있어도 바보가 된 기분이다.

 전화하는 척이라도 해서 바쁜 척 보이고 싶었는데 핸드폰은 정우가 하도 서두르는 바람에 집에 두고 챙겨오지도 못했다.

준희

 "신경 쓰지 마요."

준희다. 어째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안쓰러움에 다가온 것이다.

향아

 "네…? 네…."

누군들 신경 쓰고 싶어서 쓰나…. 가서 꽂히는걸. 이렇게 표정관리가 안 된 걸 들키다니. 집에 가고 싶다. 

향아

 "저 여자 누구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한유리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얻어야 했다.

준희

 “흠…. 예쁜 여자?”

향아

 “……. 아……. 네….”

떨떠름한 그녀의 반응에 준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커플들은 어째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된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준희

 "그건 정우 녀석한테 직접 들어요.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칵테일뿐이랍니다."

준희가 정체불명이지만 맛있는 칵테일 한잔을 또 그녀에게 내밀었다.

향아

 "그만 마실래요…. 뭐가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강하던데요. 더 먹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말을 마친 향아는 준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통 그런 시선을 받으면 어색해 하기 마련인데 그는 이런 경우가 익숙한 건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희

 "내가 너무 잘 생기긴 했죠?"

향아

 “하하하하!”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하는 그의 뻔뻔스러운 표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향아

 "맞아요. 잘 생겼어요…. 내가 좋아하는 배우랑 너무 닮았어요."

준희

 "조민성?"

향아

 "그 배우 아세요?"

준희

 "알죠. 그런 얘기 가끔 듣거든요. 하지만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에요. 그놈보다야 내가 훨씬 나은데."

여전히 뻔뻔한 말투와 표정에 향아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향아

 "하하하하...그럼 내가 말실수 한 거니까 사과해야 하나요?"

준희

 "사과 대신 지금 개발 중인 칵테일 시음 좀 해봐 줘요. 보아하니 술 좀 할 것 같은데?"

향아

 "애주가를 알아보시는군요."

향아는 술을 마셔서라도 이런 찜찜한 기분을 풀고 싶어서 준희를 따라갔다. 그의 행동은 어딘가 무척이나 게으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느릿느릿 하는데도 지루하게 느껴지거나 보는 사람이 짜증스럽게 보이게 하지 않았다. 

이 사람도 고양이 같다. 정확하고 절도 있는 민정우와는 정반대다.

정우는 향아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가 준희와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준희의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를 보는 향아의 표정은 처음에는 그에게 뭔가 화가 난 듯하더니 무표정해졌다가 다시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준희

 “조민성 좋아하면 사인받아 줄까요?”

정우를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던 향아는 준희 말에 눈빛을 번뜩이며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쭉 내밀었다.

향아

 “진짜요? 그럴 수 있어요? 이왕이면 사진에 받아주세요!”

준희

 “농담인데…. 너무 진지하게 그러니까 미안해지잖아요.”

향아

 “아놔!”

준희

 “좀 알 것 같네요.”

준희가 순식간에 바뀌는 그녀의 표정과 반응을 유심히 보며 중얼거린다.

향아

 “뭘요?”

이번에는 또 샐쭉한 표정이다.

준희

 “정우가 향아 씨한테 반한 이유요.”

향아

 “……. 진짜 그래 보여요? 정우 씨가 진짜 진심으로 나한테 반한 게 확실합니까?”

제발 그랬으면 하는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향아를 보자니 준희는 웃음이 났다. 취기가 올랐는지 발그레해진 얼굴에 발음도 늘어지고 있다.

준희

 “아마도?”

향아

 “아…. 진짜 짜게 굴 거예요?”

준희

 “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다면 나한테 잘 보여야 해요.”

향아

 “어떻게 잘 보여요? 뭐…. 칵테일 시음 할 거 있으면 다 마셔 보면 되나?”

향아는 모든 술을 다 마셔버리겠다는 기세로 덤볐다.

***

정우

 "한유리, 화장실에서 향아한테 무슨 얘길 한 거야?"

유리

 "아까 말한 것처럼 인사만 나눴어요. 

어차피 사람들이 수군대면서 우리 사이 얘기하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알던 사이라고 간단하게 소개했어요. 

오히려 그러는 편이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지 않죠. 안 그래요?"

그가 먼저 말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유리의 말을 믿더라도 향아의 기분이 어떨 거라는 건 짐작이 갔다. 

유리

 “내가 잘 못 한 거예요? 나름 배려한 건데. 당신이…….”

정우는 유리가 말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고 향아에게 다가갔다. 

유리가 뒤에서 모멸감으로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것도 모르고…. 알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정우

 "재미있어?"

정우는 스톨에 걸터앉은 향아의 뒤를 감싸듯 섰다.

향아

 "응. 지금 준희 씨가 만드는 칵테일 시음 중인데 엄청 맛있어."

그녀 앞에는 이미 빈 잔이 여러 개다. 게다가 향아의 얼굴을 보니 제법 마셨다. 전에 마시는 걸 보니 본인은 술이 세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향아는 연신 손에 든 칵테일을 연신 홀짝거렸다. 그런데 정우의 손이 뻗어와 잔을 채가 버렸다.

향아

 "어라라???"

정우

 "그만 마셔. 아무거나 먹지 마.“

준희

 “아무거나 라니! 너 말 고따위로 할래? 내가 만드는 칵테일 맛있다고 한 잔만 더 달라고 졸라대던 놈이!”

준희가 발끈했지만, 정우는 그를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정우

 “준희 칵테일은 은근히 세단 말이야.”

향아는 말리는 정우를 무시해 버렸다.

향아

 "준희 씨, 또 만드는 거 없어요? 오늘 내가 다 시음해 줄게요."

정우

 “그만 마셔. 화난 거 있으면 말해.”

향아

 “그런 거 없어. 그냥 칵테일이 맛있어.”

향아가 진짜라며 웃어 보였다.

향아

 “준희 씨. 한 잔 더!”

하지만 오히려 정우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는 이런 걸 싫어했다. 아닌 척하는 것. 괜찮은 척하는 것. 그를 속이는 이런 것들. 

준희는 정우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두 사람의 다툼에서 끼우지 말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는 자리를 피했다.

정우

 "이향아. 나 봐. 화났지?"

정우가 양손으로 향아의 얼굴을 잡아서 그녀는 꼼짝없이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향아

 "내가? 화낼 일이 뭐가 있다구?"

그녀의 시선이 마지못해 그를 보고 있는 듯했지만 눈동자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거짓말도 못 하면서 속일 걸 속여야지. 정우는 기분은 나빴지만, 또 한편으로는 향아의 질투심이 좋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질투심을 이런 상황에서 유치하게 이용하기는 싫었다.

정우

 "좋아. 이번 한 번만 얘기할 거야. 한유리와 나, 예전에 사귀었던 사이였어, 하지만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향아

 "……."

정우

 "할 말 없어?"

향아

 "……. 배고파. 아까 당신이 내 자장면 뺏어 먹어서 그래."

그렇다, 아니다 말도 없이 그녀는 대뜸 배고프다는 얘기만 한다. 

정우는 그런 그녀 때문에 화가 났지만 애써 눌렀다. 

향아는 아마도 믿고 싶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 상대를 무시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리고 옛 애인이 있는 자리에 자신을 데리고 왔다는 것도 화가 났을 것이다. 

정우

 “알았어. 일어나.”

정우는 그녀가 비틀거릴까 봐 손을 잡아 일으켜서 뷔페 테이블로 데려갔다.

향아

 “음…. 맛있다. 이건 뭐지?”

향아는 이것 저것을 맛있게 먹으며 하나하나 먹을 때마다 뭔지 궁금해했다. 

진짜 궁금한 건지 정우와 말을 하기 싫은 건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눈은 그를 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여기 온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굳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면 몇몇만 불렀으면 됐을 일이다.

정우

 “한 대 때릴래? 그래, 한 대 쳐.”

그제야 향아가 그를 올려다본다.

정우

 “싫다는 당신을 억지로 끌고 오다니….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

향아

 “정말 왜 그랬어? 뜬금없이 왜 하필 오늘 친구들이랑 만나게 한 거야?”

정우

 “그러게. 당신을 자랑하고 싶었나 봐. 그런데 그러지 말걸. 그냥 꽁꽁 숨겨 둘걸.”

향아

 “왜?”

이런 곳에 데려온 것도 썩 좋지만은 않지만 숨겨 둔다는 것도 좋지는 않다.

정우

 “아까워. 당신이 너무 아까워.”

그가 그녀의 귀엽게 말린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정우

 “우리 그만 갈까?”

향아

 “응.”

향아는 미소 지으며 정우의 팔짱을 꼈다. 화난 게 모두 풀려 버렸다. 다 지난 일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망치는 바보짓을 하지 않을 거다.

유리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유리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게 유리가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누가 더 누구보다 더 잘 어울리는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유리

 "그런데 어떻게 만났어요? 두 사람 교차점이 없잖아요."

남자1

 "그래. 어떻게 만났냐?"

여자1

 “혹시 운명적으로?”

여자2

 “업계 파티? 아니면 회사에서?”

여자1

 “궁금해요! 어서 말해줘요!”

그의 친구들도 가뜩이나 궁금해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향아가 팔짱을 빼려 하자 정우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그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윙크를 한다.

정우

 "선 봤어."



달달한게 좋아18화 - 엄마다!

여자1

 "에?"

남자1

 "지금 선이라고 했냐?"

사람들의 표정은 민정우의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 듯한 표정이었다. 

여자1

 "아직도 고리짝 개그나 하고 있어."

남자1

 “넌 여전히 썰렁한 농담을 즐기는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여자2

 "정말이에요?"

사람들은 이번에는 향아에게 질문을 했다.

향아

 "…. 네."

그의 말이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기에 향아는 그렇다고 말했다.

남자1

 "그런데 왜 너 선 본 거 아무도 모르지? 어제 너희 어머니 우리 집에 오셨었는데 그런 얘기 안 하시던데?"

정우

 “내 사생활을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쌀쌀맞은 그의 반응에 사람들은 더 이상 질문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샅샅이 알고 싶어 했지만, 정우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정우에게서 대답 얻기를 포기한 듯 향아를 쳐다봤지만, 정우가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아예 바를 나가버렸다.

향아를 잡아두고 모든 것을 파헤치고 싶어한 사람들은 멀어지는 그들을 아쉽게 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1

 “진짜 선 본 거야?”

남자1

 “본인들이 직접 선이라고 하잖아….”

여자2

 “진짜 상속녀였어?”

사람들의 시선은 감탄으로 바뀌어 갔다.

멍청이들 같으니….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희

 “상속녀는 무슨. 아버지는 지방 공무원에 본인은 어디 변두리에서 손바닥만 한 가게 한다던데요? 그것도 친구들이랑 동업.”

나희가 유리 대신 향아의 정보를 흘렸다. 

여자1

 “어떻게 자세히 알죠? 친해요?”

나희

 “무슨! 저런 여자랑. 물어보니까 자기 입으로 술술 말하던걸요.”

여자1

 “그럼 얼마 못 가겠네.”

여자2

 “그러게. 급이 전혀 안 맞잖아. 잠깐 흥미인 거지.”

나희

 “또 모르죠! 신데렐라가 될지 누가 알아요?”

여자1

 “신데렐라도 신분은 높다는 거 몰라요?”

***

수군거리며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들이 느껴져 향아는 못내 불편했다. 하지만 입구에서 잠깐 돌아봤을 때 한유리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노려보는 그 눈빛이란…. 고소하기도 했지만 섬뜩하기도 했다. 

향아

 "저 사람들 심부름센터 고용해서 내 뒷조사 할지도 몰라."

정우

 "신경 쓰여?"

향아

 "당연하지. 여기 오니까 당신 배경이 실감 나."

정우

 "신경 쓰지 마."

향아

 "진짜 당신 정체가 뭐야?"

정우

 "준희 말대로 난 건축사야. 지금은 형 부탁 때문에 잠시 회사 일을 보는 거고. 그러니까 집안 사업은 나와는 상관없어."

향아

 "그래서 내 방 꾸며 준다고 그랬구나. 능력 좋네. 이 일 저 일 못 하는 일이 없어서…."

그는 정말 부러워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우

 "이제 와서 신경 쓰여?"

향아

 “당신 부모님이 아시면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정우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 없으셔. 내 인생이니까.”

향아

 “모든 자식들이 하는 말이지. 내 인생은 나의 것…. 허무한 외침이랄까?”

정우

 “나는 예외야.”

향아

 “그건 당신 생각이구. 지금껏 누구보다 더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입히고, 고생 없이 키워 놨을 테니 당연히 욕심이 생기시겠지.”

정우

 “흠…. 그런 쪽으로 파 본다면 대학 졸업은 장학금으로 했고, 내 사무실을 차릴 때 빌린 자본금은 다 갚았어. 그 사무실 자본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해 주신 거구. 고등학교 때까지는 잘 먹고. 잘 입혀주신 거 인정.”

향아

 “헉…. 당신 진짜 능력자구나……! 나 이런 사람 처음 봐! 좀 만져볼게….”

향아는 도대체 민정우라는 남자가 실체인지 확인하려는지 손으로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정우는 그런 그녀가 너무도 귀엽고 우스웠다.

향아

 “아…. 그래서 그런지 왠지 같은 인간계열인데도 뭔가 느낌이 달라.”

정우

 “그래서 갑자기 싫어지기라도 한 거야?”

향아

 "내 꿈이 로열 패밀이랑 사귀는 거였거든. 꿈이 이루어졌으니 좋지."

정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뽀글거리는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정우

 "꿈을 이뤄졌으니 나한테 고맙지? 뭐해 줄 거야?"

향아

 "지금 잘난 체하는 거야?"

정우

 "어."

이렇게 그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을 때면 엄해 보이는 입매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지고, 날카로운 눈매도 춤을 춘다.

향아

 "그럼 계속 잘난 체해. 내가 그냥 받아 줄게. 민영이한테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아무한테나 이런 영광은 베풀지 않아."

정우는 신사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우

 "영광이군요."

***

향아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의 비는 어느새 제법 굵어져 있었다.

정우

 "아까 불 켜 놓고 나왔나 봐. 당신 방에 불이 켜져 있어."

정우가 차 창밖을 통해 그녀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정우

 “우산, 트렁크에 있어.”

향아

 "내리지 마, 뛰어가면 돼."

향아는 내리려는 정우를 말리고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정우

 “향아야!…잡아 먹냐? 뭐가 저렇게 급해?”

작별 인사 할 틈도 주지 않고 달려가는 향아의 뒷모습을 보며 정우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

입구로 들어선 그녀는 머리와 옷 위로 앉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2층 계단을 올라 열쇠를 구멍에 꽂고 돌리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향아

 "악…!“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주저앉고 말았다.

정우

 “나야! 미안. 미안…. 많이 놀랐구나.”

향아

 “저…. 정우 씨….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자신을 놀라게 한 사람이 정우라는것을 안 향아는 오히려 화가 날 정도였다.

정우

 "미안. 당신 빠뜨린 게 있어서…."

정우가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우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준다.

향아

 "뭐?"

정우

 "이거."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대고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시작된 키스는 조금 더 진해져 갔다. 

향아의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오자 그녀의 허리를 감은 정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향아는 앙탈을 부리며 가볍게 그를 밀어냈다.

향아

 “그만….”

정우

 “한 번만 더….”

정우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키려는 찰나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어른여

 "니가?"

헉…. 이 목소리는 

엄……. 마……. 다……!

***

어른여

 "니……. 내가 바보로 보이나?"

향아

 "아니…."

어른여

 "그라모는 내가 갑자기 봉사로 보이나?"

향아

 "아이다~!"

향아는 점점 눈에 힘이 들어가는 엄마의 매서운 시선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일념으로 최대한 진실 된 표정과 목소리를 내었다. 억울한 피해자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보여야 했다.

향아

 "아까 그 사람은 우리 가게 일로 의논할 게 있어서 온 사람이다. 절~때로 아무 사이도 아이다. 진짜다! 민영이한테 물어봐라."

엄마는 민영이가 장녀답다며 딸인 향아보다 더 믿는 경향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와 아버지는 당신 자식들보다 주변 말에 더 흔들리시는 편이다. 

평소에는 그런 게 너무 싫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런 면에 매달려야 했다.

어른여

 "그라모는 니가 미친년이가? 와 아무 사이도 아인데 주둥이를 대고 있더나?"

향아

 "참~내! 아이라 안 카나! 뭐가 묻어서 떼줄라 카는데 엄마가 문을 갑자기 팍 여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문에 밀려서 그렇게 된 거야."

어른여

 “그놈이 니 허리도 이리이리 잡고 있더마! 그것도 내가 잘못 본긴가?”

엄마는 정우가 향아의 허리를 꽉 감싸고 있던 장면을 굳이 재연까지 해가며 흥분을 하신다.

향아

 “…. 그…. 놀라서 넘어질 것 같으니까 잡아 준 거지! 그라모는 엄마는 내가 자빠져야 조컸나? 머리라도 콱 깨지야 돼? 지금이라도 뭐…. 벽에 대고 콱 박아 삘까?”

향아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이 오히려 성질을 내며 진짜로 벽에 머리를 박을 듯이 벽으로 다가갔다. 

이른바 응가 한 놈이 성질 내기…!

제발 먹혀라!

향아

 "엄마는 내가 그리 몬 미덥더나? 와그리 못 믿는데? 그라모는 맘대로 생각해라!"

엄마는 향아의 열연에 드디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심했다는 생각에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향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이때다!

마무리 굳히기…. 

정우 씨 미안~ 이게 다 당신을 위한 배려야.

향아

 "그리고, 그 사람 유부남이다. 클날 소리 마라!"

어른여

 “…. 야야…. 아니면 됐다. 와 성을 내노. 내는 니가 이리 살다가 혼자 늙을까 봐서 그라지.”

엄마는 향아의 심하게 어설픈 뻥을 그대로 믿으시는 눈치다. 

쪼끔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대로 털어놨다가는 내일 아침 아버지 올라오시고, 점심쯤에는 민정우가 불려 와서 신상이 탈탈 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상견례. 그리고 다음달 쯤에는 결혼식을 올릴지도 모른다.

향아

 "근데 연락도 없이 뭔 일인데?"

어른여

 "영건이 아재 딸 결혼 때메 왔다가 니 보고 갈라꼬 핸드폰으로 종일 전화해도 안 받더만. 그래서 민영이한테 전화하니까 받데. 가가 열쇠가 있어서 여기 데려다주고 갔다. 영건이 아재 아는 니보다도 영 아인데 잘만 결혼하는데 니가 운제 할라꼬 이리 있네. 내가 참말로 속상하다. 니만 보면 열불이 터진다."

향아

 “알았다~알았어요. 선 자리 들어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 본다. 무조건 안 가리고 다 본다!”

아…. 핸드폰, 오늘 그것만 내 손에 있었던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억지로 엄마를 속일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여하튼 엄마, 속아 넘어가 줘서 넘넘 고마워~! 그리고 죄송해요! 선은 더 열심히 볼게!

***

향아가 민정우를 지키기 위해서 메소드급 연기를 펼칠 때 정우는 차 안에 앉아서 여전히 충격 상태였다. 

기분이 정말 이상하다. 

황당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개밥에 도토리가 된 듯하기도 하고…. 

그 순간 문이 열리자 향아는 정우를 무서운 힘과 순발력으로 그를 밀어 버렸다. 

벽이 없었다면 우주까지도 날아갔을지 모를 힘이었다.

향아

 "엄마…! 어…. 언제 왔네?"

어른여

 "너그들 머하네? 이 사람 누꼬?"

그녀의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향아의 어머니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에게 무언의 희망을 보냈다. 

무슨 내용인지는 지나가던 개라도 알 정도였다.향아도 무척이나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우

 “아…. 저 안녕하십니까? 저는….”

향아

 "김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우

 “으응…?”

그가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난데없이 정우에게 오히려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향아

 “그럼 내일부터 점심시간에 샌드위치 10개씩 배달해 드릴게요. 비도 오는데 바래다주셔서 감사하구요~ 어서 빨리 가세요…."

정우가 미처 뭐라 하기도 전에 여전히 충격 상태인 그녀의 엄마 팔을 잡고는 현관문을 그의 코앞에서 쾅 닫아버렸다.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정우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일에 그야말로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정우

 “뭐지? 이향아? 이건 뭐…. 참나…. 도대체 뭐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우스워?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야?”

결국, 집으로 가던 차를 돌려 다시 준희의 가게로 향했다. 이 기분으로 아무도 없는 집에 가면 계속 황당했던 그 장면을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달달한게 좋아19화 - 아무것도 아닌 사이?

기석

 "어? 우리 정우~또 보네."

술이 제법 취한 기석이가 잔을 들며 반가워했다. 가게 안은 모두 돌아가고 기석과 준희뿐이었다.

준희

 "오늘은 네 애인이랑 있을 줄 알았는데?"

준희는 말짱해 보였다.

정우

 "나도 술이나 한 잔 줘봐. 네가 만든 이상한 거 빼고"

준희는 정우에게 병맥주를 건넸다. 그는 단숨에 반을 마셔버렸다.

기석

 "무슨 일 있었구나? 싸우기라도 했어?"

준희

 "싸운 게 아니라 그냥 차인 거 같은데? 그것도 문 앞에서."

정우는 거의 정확하게 말하는 준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준희

 “맞구나? 캬캬캬캬캬캬~~~ 어쩔 거야~~이 기쁨을!”

기석

 “그만 좀 웃어라.”

준희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이럴 때는 웃는 거야~ 울면 더 이상하니까~? 캬캬캬캬캬캬”

준희는 배를 움켜잡고 과하게 신이 났다. 기석이가 눈치를 줘도 소용없었다.

그리고는 맥주를 마저 비우고는 바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기석

 "민정우! 벌써 가냐?"

준희

 "냅둬라. 민정우 싫다는 여자가 있다는 게 나는 행복하구만." 

정우

 "박준희! 남은 공사비나 얼른 입금해!"

준희

 "향아 씨한테 꼭 전해 줘. 언제든지 오면 술 공짜라구~아주 멋진 여자야!"

나가는 정우의 뒤로 즐거워하는 준희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기분 풀러 갔다가 되려 더 엉망이 돼버렸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이번에는 집에서 전화가 왔다.

정우

 "네……. 네. 어머니. 내일 갈게요."

무슨 일이시지? 성북동 집에는 사흘 전에 갔었는데. 또 선 보라는 성화이시겠지.

***

기석

 “진짜 퇴짜 맞은 건가?”

정우가 사라진 입구를 보며 기석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준희

 “보면 모르냐? 그 신선한 충격에 정우 넋 나갔잖아.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 거지. 하지만 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정확하게는 오늘 알았지.”

준희는 정우가 두고 간 맥주병을 치웠다.

기석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준희

 “이향아. 정우 애인. 오늘 만나 보니까 정우가 꽤 애타겠다 싶어서.”

기석

 “그래? 내가 보기엔 숙맥이던데? 완전히 순진해서 정우한테 너무 휘둘릴까 봐 걱정되더라. 다른 여자들은 정우랑 끝나고 좀 매달리고 신경질 내다가 친구 하자면서 끝내잖아. 하지만 그 여자는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 같아. 벌써 불쌍해진다.”

기석은 아까 본 향아의 모습을 생각했다. 비록 정우가 그녀를 애지중지 대하기는 했지만 낯선 분위기에 위축되고 겁먹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준희

 “송기석, 그러니까 네가 자꾸 여자들한테 차이는 거야”

준희가 컵을 닦으며 그를 놀렸다.

기석

 “야!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구!”

그러잖아도 얼마 전 썸 타던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는 바람에 속이 쓰린데 준희 이 자식이 속을 제대로 긁는다.

준희

 “순진하니까 더 애타는 거지. 정우가 예전에 상대하던 여자들은 눈짓하나, 손짓 하나만 해도 정우가 뭘 원하는지. 다음 단계가 뭔지 바로 계산이 나왔어. 그런데 이 여자는 그런 과가 아니야. 직접 말로 해줘도 긴가민가 농담이세요? 진담이세요? 할 타입이야.”

기석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그 정도 센스도 없겠어?”

준희

 “나이가 있으면 뭘 하나? 경험이 없을 텐데. 그리고 결정적인 건 정우가 그 여자한테 완전히 빠져서 이미, 지가 먼저 휘둘리고 있어.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석

 “하긴…. 다르긴 달랐어.”

준희

 “자기가 휘둘리고 있는 주제에 누굴 휘두를 수나 있나?”

기석

 “그런데 그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느낌은 깨끗하고 편하고 좋긴 했지만 말이야.”

기석은 정우가 그 여자에게 빠진 결정적 매력을 알 수가 없었다.

준희

 "그랬을 수도 있지. 숨길 줄도 모르고 생각하는 거 다 보이는데 정우 녀석이 아~ 이랬겠구나 싶었지.”

준희가 닦은 컵을 진열장에 각을 세워 올려두었다.

기석

 “……. 너…. 설마……. 그러는 거 아니다.”

기석은 갑자기 싸한 느낌에 준희의 등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준희

 “병신. 뭐라는 거야? 정우는 몰라도 난 그런 타입 무서워. 나한테는 비무장지대야.”

준희가 기석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

태진

 “푸헐~! ”

태진이의 입안에 있던 샌드위치가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민영이도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태진

 "아주머니가? 캬~아깝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태진이가 너무도 아쉽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향아

 "넌 회사 지각 아냐?!"

향아가 대놓고 가라고 눈치를 줬다.

태진

 "신경 쓰지 마. 차가 막혀서 늦었다고 하면 돼."

아침을 여기 와서 해결하고 가는 태진이가 오늘따라 심하게 얄미워 눈치를 줬건만 끄떡없다. 하지만 민영이가 째려보자 태진은 무거운 엉덩이를 마지못해 들고 미련이 가득 담긴 눈길을 남기고 나갔다.

태진

 “자기야. 우리 통화하자. 꼭!”

민영

 "…. 그래서 민정우를 거래처 사람으로 만들고, 유부남으로 등극까지 시켰단 말이지?"

향아

 "정우 씨도 그 순간을 재치 있게 넘긴 내게 감사하고 있을 거야. 그 후의 노력을 알면 강제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위기에서 구해준 내가 신으로 보일지도 몰라."

민영

 “이향아. 너 갑자기 지능이 떨어진 거야? 아니면 진짜 바보야?”

향아

 “네가 우리 사이를 몰라서 그래. 정우 씨는 내 마음과 같아.”

민영

 “글쎄다. 갑자기 민정우가 불쌍해진다.”

민영은 고개를 저으며 태진이가 뿜어 놓고 간 음식파편들을 닦아냈다.

***

탁.탁.탁.탁.탁…….

기획실 회의 탁자 위를 두드리는 쭉 뻗은 손가락만이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 누구도 움직임이 없는 마네킹 상태다. 누군가가 숨소리만 크게 내도 실장의 무시무시한 눈초리가 날아가 꽂힐 판이었다. 

오늘따라 실장의 기분은 아주 저기압이었고 게다가 직원들의 실수마저 잦았다. 1년 치 실수를 한꺼번에 하려는 기세들이었다. 

휘릭~ 휘릭~ 휘릭~

서류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직원들의 침이 한 움큼씩 넘어간다.

차라리 화를 내지…. 서류 한 장에 실장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게 죽을 맛이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결정적으로 각자의 기획안이 형편없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장의 저조한 기분이 그나마 평균 정도의 기획서들을 최악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실장이 불같고 깐깐한 성격이라고 듣긴 했지만, 평소의 깍듯하고 선을 지키는 모습에 그런 평판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실장을 보니 평판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성격은 아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서리가 잔뜩 끼어있었다.

정우

 "이런 기획서들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이걸로는 동네 구멍가게도 차릴 수 없습니다."

문차장

 "실장님, 모두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정우

 "더 심하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쓰레기로 뭘 하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한 건가요?"

정우는 기획서가 담긴 파일을 던지듯 내려놓고 일어섰다.

정우

 "내일까지 새로운 기획서 올리세요. 이런 쓰레기 말고 제대로 쓸 수 있는 거로. 능력이 안 되면 사표들 쓰시던가요."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 낸 정우가 회의실을 나가자 그제야 직원들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직원1

 “어떻게 항상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만 나와? 그럼 내가 여기 있겠어?”

직원2

 “그럼 지가 한 번 내보던가!”

직원3

 "기획서가 참신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해!"

직원1

 “쓰레기라니! 사표라니!!! 이건 갑질이야, 슈퍼 갑질! 요즘 얼마나 갑질에 예민한데 시대파악을 못 하시네”

직원2

 “사주 아들이라고 너무한 거 아냐?”

직원3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그동안 우리를 방심하게 해놓고 한 방에 날려버리시네!"

직원1

 "노총각 히스테리 아냐?"

문차장

 "자자, 잡담 그만해. 실장님 말이 지나친 감은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이럴 시간에 일 쪽으로 머리들 굴리라구. 안 그랬다간 내일은 기획서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걸 보게 될지도 몰라."

직원3

 “아…. 진짜!”

직원1

 “오늘 또 야근이네….”

직원2

 “꼭 약속 있는 날만 이러더라!”

문차장

 “이럴 시간에 어서 시작해. 온종일 기획안 만들 거야? 다른 업무는 안 볼 거야?”

문차장은 불만 가득한 사람들을 달랬다. 일을 태만하게 진행한 직원들의 잘못이 컸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은 실장의 태도가 당황스럽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진은 정우의 저기압 원인 중 일부는 어쩌면 향아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향아

 "정말? 정우 씨가 나 때문에 성질을 부려?"

태진

 <그게 아니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출근할 때부터 계속 저기압이더라고. 혹시 어제 일이 원인일지도 모르니까 니가 와서 풀어주던지, 모시고 나가서 풀던지 해줘. 여기 시베리아야. 니가 원인이 아닐지라도 애인이 데이트 신청하면 좀 풀리지 않겠냐?>

향아

 “장난하지 마”

태진

 <내가 장난하는 거 같냐? 오늘 같은 분위기면 회사 때려치우고 싶어!>

향아

 “끊어!”

태진의 전화를 끊은 향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민영

 “왜 남의 남자친구한테 성질이야?”

민영이가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며 한마디 했다.

향아

 "내가 키스해 달라고 덮쳤냐? 먼저 시작한 건 자기면서 들켰다고 성질을 내다니…. 그렇게 걱정이 됐단 말이야?“

향아는 어젯밤 화장실에서 몰래 정우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화가 나서 받지 않은 거라면 괘씸하다.

민영

 “내 생각에는….”

향아

 “누가 결혼하자고 말이라도 했어? 자기를 위해서 순진하신 우리 엄마까지 속였건만! 쿨하고 대범한 줄 알았더니만 순 밴댕이 좁쌀영감 같으니!"

향아가 민영의 말을 자르며 흥분해서 가게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민영

 "어쩌면 정우 씨는 네가 아주머니 앞에서 자기를 숨겨서 화가 났을지도 몰라. 너희 말대로 결혼 생각은 없더라도 사귀는 건 사실이잖아. 그런데 넌 그를 어떻게 대했니? 입장 바꿔 생각해봐. 그 상황에서 너라면 어땠을지."

향아

 “입장 바꿔서…?”

민영

 “그래. 생면부지 사람 취급했잖아. 그것도….”

민영은 말을 끊더니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민영

 “결정적인 순간에 말이야. 하하하하하~~”

향아

 “웃지 마!”

버럭 했지만 향아는 민영의 말에 수긍이 갔다. 

향아

 "민영아, 네가 샌드위치 5개만 만들어줘. 나도 5개 만들게."

민영

 "어?"

향아

 "어제 정우 씨한테 샌드위치 10개 배달 간다 그랬잖아. 먹을 거 만들어서 가면 얘기할 분위기가 더 부드러워질 거야. 그리고 나의 깊은 뜻과 노력을 알게 되면 풀리겠지."

민영

 "그러면 네가 다 만들어야지!"

향아

 "이벤트지~이벤트! 내가 만든 거 찾아내기. 재미와 맛을 한꺼번에 느끼게. 빨랑 만들어,"

민영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이지만, 민정우 진짜 불쌍하다..이건 뭐..애랑 연애하는 거잖아.”

향아

 “무슨! 애랑 키스도 해? 얼른 만들어. 그래야 내가 배달을 가고. 그래야 태진이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어?”

민영은 향아의 재촉에 마지못해 거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민정우가 불쌍하다.


달달한게 좋아20화 - 민정우도 선 본다

향아는 정성이 가득 담긴 샌드위치를 들고 점심시간에 맞춰 정우의 회사로 가서 로비에 도착해 전화했다. 

향아

 “정우 씨. 나야!”

정우

 <무슨 일이야?>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녀는 당황했다.

정말 삐졌나 보네? 처음 만났을 때 빼고 이런 목소리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정말 많이 화가 났나 봐..

향아

 “많이 바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버렸다. 

정우

 <응>

아…진짜. 꼭 이렇게 쌀쌀맞아야 해? 

좋은 마음으로 왔는데 향아는 서운했다. 문득 손에 든 샌드위치가 처량해 보였다. 혼자 다 먹든지 노숙자한테 주든지...아니면, 퇴근하고 주든지. 

향아

 "점심 먹었나 해서.. 그런데 바쁜가 보네. 시간 나면 전화해."

정우

 <할 말이 있으니까 전화한 거잖아?>

정우의 목소리는 정말 쌀쌀맞기 그지없다. 이쯤 되니 슬슬 화가 났다. 잘 보이려고 민영이의 테크닉을 빌려 화장도 머리도 다시 하고 왔는데 그 정성이 아까워지는 순간이다.

소개 안 해줬다고 삐진 거야? 아니면 들켜서 삐진 거야? 당신 속마음이 뭐야?

향아는 손에 들린 가방을 보며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마음고생 하는 태진이나 줘야지. 사무실 사람들한테 인심 좀 쓰는 거지 뭐.

향아

 "아냐. 바쁜 것 같은데 수고해."

정우

 <손에 든 건 뭐야?>

어떻게 알았지? 어디서 보고 있나?

향아는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정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정우와 비슷한 키에 덩치가 더 큰 남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시나리오는 정우가 평소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는 거였는데 이런 표정으로 서 있는 건 생각도 못 한 일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며 샌드위치를 주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인사만 하고 가기에는 더 어색하다.

나 때문에 삐졌으면서 왜 굳이 아는 체를 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거야? 심술부리는 건가?

향아는 표정이 굳어지고 괜히 왔다는 후회감이 폭풍처럼 몰려드는 것을 느끼며 도망가고 싶어졌다.

향아

 "어…그게 태진이 점심 배달 왔어."

향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엘리베이터 쪽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태진이가 그곳에서 나타나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정우

 "윤태진 씨 점심 먹으러 나갔는데?"

태진이 땡돌이 같으니. 학교 때도 그러더니 여전하구나. 늦게 먹으면 체해? 똥배나 나와 버려라!

향아

 "아…. 내가 좀 늦었네. 전화해서 가게로 가져가라고 해야겠네."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향아를 정우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이런 분위기 너무 싫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배짱이 없다. 

게다가 정우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해부라도 하듯이 보고 있다. 

향아

 "나 그럼 갈게. 민영이 혼자서 바쁠 거야."

정우

 "향아야…."

그가 불렀지만 향아는 끝까지 그를 보지도 않고 황급히 돌아서서 로비를 빠져나갔다. 어이없게도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우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민

 "누구?"

정우

 "...."

정민

 "혹시 여자친구?"

정우

 "응."

정민

 "그래? 어머니가 지금 네 맞선 준비 중이시던데."

정민은 정우의 시인에 향아라는 아가씨가 사라진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전 여자친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여자와는 완전히 다르다. 다른 행성 출신이라 할 정도다.

정우

 "맞선? 어머니는 왜 또 괜한 헛수고를 하시는 거야. 이젠 포기하신 줄 알았는데. 어차피 오늘 집에 가야 하니까 확실히 말해야지."

정민

 "평창동 아주머니가 오셔서 너 선봤다는 얘길 하셨거든. 그동안 그렇게 선보라고 얘길 해도 마이동풍이더니만 식구도 모르는 선이라니. 어머니도 당황하시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평창동이라면 기영이다. 

어제 준희네 가게에서의 일을 얘기했나 보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다.

정민

 "그런데 너, 진짜 선 본 거냐?“

정우

 “어.”

정민

 “뭐? 우리 몰래 결혼 정보 회사에 등록이라도 했어? 왜? 언제?"

무덤덤하기론 정우보다 더한 형  정민이다. 

그런 정민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로비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정우를 다그치고 있다.

정민

 “풉”

그 여자가 우리 형도 웃게 하다니…. 대단하긴 대단하다.

정민

 “웃지 말고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너라도 부모님이 반대하면 힘들어.”

정민이 정색하고 재촉한다.

정우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정우는 말머리를 돌리며 짜증스런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정우가 바라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포기하고 사시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형 말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

정우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했는데도 선을 보라니…. 대놓고 반대하시는 것보다 더하시네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애원과 협박으로 정우를 설득하는 어머니를 보며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정우엄마

 “내가 그 아가씨 반대하는 게 아니잖니. 당장 그 아가씨와 결혼할 것도 아니면 선 한 번쯤 보는 게 뭐 그리 어려워?”

어머니는 어떻게든 정우를 설득시키려 하는 데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으시다.

어머니는 다른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정우의 이런저런 일들을 간섭하고 걱정하는 등 적극적이시다. 정우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덜 해졌지만 그런 면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반면 아버지는 정우나 정민이가 무엇을 하든 책임만 진다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결정한 일에 대해 실패도 하면서 쓴맛도 보면서 알찬 경험을 하게 했다.

지금 착각이었던 향아와의 첫 만남을 얘기해 봤자 맞선을 보라는 말이 취소될 리는 없을 것 같다.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든, 없든 무조건 봐야 할 선 자리인 것이다.

정우엄마

 "이제 다시는 이런 거 하라고 하지 않으마. 이번 자리는 정말 탐이 나서 그래. 삼송그룹 질녀라는데 아주 참한 아가씨래. 어디서 네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 집에서 먼저 혼담이 들어왔었는데 네가 워낙에 이런 걸 싫어해서 말을 못하고 있었어, 그런 네가 우리 몰래 선을 보러 다니니 이번 선도 보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구나."

어머니는 절대 강요는 아니지만

네가 이 자리를 거절하면 매우 서운할 것이며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충분히 풍기면서 아쉬운 듯 말했다.

삼송그룹 질녀라면 유리다..

왠지 쉽게 물러나는가 싶었더니 이런 짓을 뒤에서 꾸미고 있었나 보다. 정우의 미간이 못마땅함으로 찌푸려진다.

정민

 "당장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니까 한 번 봐. 보고 아니면 안 보면 되고. 그죠, 어머니"

정우엄마

 “그래. 그냥 만나기만 해.”

정우가 특유의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변하자 정민이 조심스레 중재에 나섰다. 

정민은 자신 봤던 정우의 전 여친이 삼송의 질녀라는 걸 모르고 있다.

형수

 "중매도 나쁘지 않아요."

형수가 다과를 내려놓으며 형과 어머니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형수와 형은 중매로 만났는데 적당한 조건으로 결혼한 케이스다.

괜찮은 엄마, 괜찮은 아내, 괜찮은 며느리, 괜찮은 형수이다. 

중매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결혼 생각도 없으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다. 

정우는 아무 말도 없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사업하시는 분이니 당연히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가 집안에 구미가 당기실 것이다.

차를 마시는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표정이시다.

정민

 "누가 시킨다고 할 놈이 아니니 내버려둬요."

정우

 "죄송합니다. 선 볼 생각이 없습니다."

정우엄마

 "정우야!"

딱 부러지는 정우의 대답에 정민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정민은 사업에서는 칼 같은 면을 발휘하지만, 부모님께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효자다. 

하긴 그런 형 덕에 자신은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으니 그에 대해 불만은 없다.

정우엄마

 "정 싫다면 네가 선 봤다는 아가씨 데려오너라. 그럼 선 보라는 얘기도 없던 거로 하마."

어머니의 표정은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표정이다.

정우아빠

 “그럼 네 어머니 말대로 해.”

아버지도 드디어 어머니를 거드신다.

향아를 가족에게 소개한다?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긴 하지만 썩 나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가족에게 떳떳하게 소개할 수도 없는 샌드위치 열 개짜리 김 사장이 되어 버린 마당에 그러는 게 잘한 일일까? 

그녀는 아니라는데 자신은 왜 그래야 하는가? 

대놓고 거절하고, 대놓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여자한테?

자신에게 이런 유치함이 있었다. 하지만 유치해도 어쩔 수 없다. 

자신만 진지해지는 이런 상황이 싫다. 

혼자만 쩔쩔매고 마음 상하고 신경 쓴다.

정우

 "그럼 언제 선 볼지 약속이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정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든 식구들이 기쁨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심지어 아버지마저도 정우의 결정을 기대했던 것이다.

정우엄마

 "그 말은 네가 우리 모르게 선 본 아가씨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니?"

정우

 "선도 신경 쓰지 마시고, 그 아가씨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까부터 민영이가 향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모른척하려 했지만 너무도 노골적인 살핌에 향아는 테이블을 닦던 손을 멈추고 민영을 바라보았다.

향아

 "왜?"

민영

 "연락 없어?"

향아

 "뭐가?"

민영

 "민정우. 벌써 며칠 째야? 맨날 보고 통화하던 사람들이 요즘은 뜸하다 못해 보이질 않아서."

향아

 "우리 집에 몰래카메라라도 달아놨냐?"

향아는 그렇지 않아도 나흘째 연락이 없는 민정우 때문에 약이 오른 상태였다. 

그렇게 헤어진 후로 전화 한 통도 없다니! 생긴것 답지 않게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철저한 위장술이었나 보다. 

그녀가 먼저 전화할 수도 있었지만 그 날 이후 선뜻 전화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열 받아! 쫌팽이 민정우!

퍽! 퍽! 퍽!

향아는 볼에 담긴 삶은 계란을 마치 살인이라도 할 듯이 짓이기기 시작했다.

민정우!

당신이 안 하면 나도 안 해!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웬 오바야? 

향아

 “웃기시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진심에 민영이가 쳐다본다.

민영

 “궁금하면 네가 전화해.”

향아

 “됐거든! 그런 쫌팽이..계속 삐져 있으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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