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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의 이순신에대한 평가 / 세계4대해전과 한산도대첩
세계인들의 이순신에대한 평가
■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영국 해군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해를 다시 손 본 공로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와키사카 야스하루>
■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1805)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일본 해군준장, 사토 데쯔라로>
■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승전 축하연 답사에서-일본 해군제독, 토고 헤이하찌로>
■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
<출처: "朝鮮役(조선역)- 일본 석학, 토쿠토미 테이이찌로>
■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이조사 대전)저자, 아오야 나기(靑柳南冥)>
■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川田功 )>
이순신장군의 삶
무인의 길 - 이순신 일본침략에 대비하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둥근 지붕에 못이 박혀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발발 - 조선수군 일본의 발목을 잡다.
1592년 4월 13일(음력) 마침내 이순신이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수십만 대군의 일본군이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일시에 침략한 것이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만전의 준비를 한 후, 1592년 5월 4일 첫 출전을 한다. 이 출전에서 그는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하였다. 이어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하였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진작하였고, 결국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개전 이 후 거침없이 공격해오던 일본군의 전략(수륙병진)에 큰 타격을 주어 전쟁의 방향을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세계 4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은 조선 총통과 전선의 우수성, 이순신 특유의 창의적 전술인 ‘학익진’을 사용한 전투로 해군 수장으로써 이순신의 뛰어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투이다. 159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조선 수군의 잇따른 해전 승리, 의병들의 출현, 명나라 군대의 참전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은 강화 교섭 자체를 반대하는 조선을 배제시킨 채, 전투에 소극적인 명나라와 약 3년 9개월 동안 지루한 강화협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순신은 이 기간 동안에도 군량 확보, 병력 충원, 전함 건조, 무기 제작 및 화약 비축, 군사 훈련 등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전염병과 군량미 부족이라는 악조건과 싸우며 해상 작전을 수행해나갔는데, 1594년 3월 난중일기에는 장군도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군량확보를 위해서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려 둔전을 경영했으며, 어로작업과 소금제작으로 수만 석의 군량을 마련하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난의 길 - 13 VS 133 명량해전 승리로 다시 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은 이러한 모든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위기에까지 몰린 이순신은 결국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방면되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1597년 7월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다. 3년 9개월 동안 이순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룩해놓은 조선수군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패전 소식은 곧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장군은 즉시 조선 수군 부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한 달에 걸친 해안지역 정찰에 나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남해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흩어졌던 장병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무기와 군량미를 모았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교지를 받게 된다.
이순신에게는 13척의 판옥선만이 남아 있었다. 명량해전은 이러한 이순신의 함대가 수백 척의 적선과 맞서 싸운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을 활용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 함대를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결국 133척의 적선과 맞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전량해전의 승기를 타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을 막아내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해전으로 셋째 아들을 잃게 된다. 패배한 일본군이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가 보복한 것이다.
이 후로 이순신은 고하도, 고금도로 차례로 진영을 옮기면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8000여명의 병력과 5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 일본은 철군을 서두르게 된다.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 진정한 영웅 이순신 길이 살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는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치열한 전장의 선상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애국심과 우수성을 떨친 마지막 해전이었으며, 조선 수군이 주도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이순신은 7년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최소 23전 이상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훌륭한 장수였다. 그러나 단지 싸움에만 능한 장수가 아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바쳐 끝까지 백성과 나라를 사랑한 진정한 리더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오늘날에도 이순신을 가장 사랑하고 닮고 싶어 하는 영웅으로 꼽는다.
한산도 해전
한산도 해전은 1592년부터 1598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 기간 중에 벌이진 해전 중에 규모가 크고 중대한 해전이었다.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아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 온 것이었다. 토요토미는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을 침략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야심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 한산도대첩 이후에 일본군들은 조선 침략 전략을 바꾸어야 했으며, 전쟁의 양상이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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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조선왕조는 1392년에 건국된 이래로 왜와 200년 동안 사신을 교류를 하였으며,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두 나라를 둘러싼 정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의 통치자가 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1500년대에 일본은 전란 중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 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통일 이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침략할 기회가 자신에게 왔다고 여겼다. 그는 동아시아의 지도가 새겨진 부채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이러한 야망을 구체화 시켰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침략하여 정복한 첫 번째 일본의 통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지방 영주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587년에 그는 대마도를 정복하여 대마도 영주로 하여금 한양으로 가서 조선 조정에 명나라를 침공 하고자 하니 길을 열어달라는 자신의 뜻을 밝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 영주는 그 당시 조선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사실대로 조선 조정에 알릴 수 없었다. 대마도 영주는 한양에 가서 조선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청하였다.
조선 조정은 1590년에 통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일본으로 갔던 통신사는 토요토미의 서한을 들고 돌아 왔다. 이 편지에서 토요토미는 명나라를 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다시 강력한 어조로 밝혔다.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은 왕께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하였다.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가망성이 크다고 한 반면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 조선의 전쟁준비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통신사가 돌아온 이후, 조선 조정은 일본 침략 가능성을 제고하여 침략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고 한다. 하여, 남부지방에 지방관인 감사를 새로 임명하고 이들을 파견하였다. 새로 임명된 감사들은 무기를 준비하고 성을 축조하였다. 이때 많은 성들이 경상도에 새로 건조되거나 다시 지어졌다. 새로운 병영도 지어졌다.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조선 조정은 수군 사령관들도 새로 임명해 나갔다. 1591년 2월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고 이억기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초에는 원균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새로 임명된 수군 사령관들은 각자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 중에서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하여 완벽에 가깝게 준비를 하였다. 그는 많은 양의 무기, 화약, 군량을 준비하였으며 거북선 3척을 비롯한 새로운 전선도 건조하였다.
다. 일본의 침략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약 160,000명의 일본군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약 8천의 조선군은 이에 맞서야 했다. 일백년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다져진 일본군은 조선군을 맞아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강력한 조총으로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선군 또한 화약무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육박 전투에서는 대부분 칼, 창, 화살로 대응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대규모 일본군의 침략사실과 계속된 패전 소식을 접한 후, 당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올려 이로 인해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립장군을 국왕의 특사격인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남부로 파견하였다. 신립 장군은 일본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충주에 있는 탄금대에서 대면하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신립장군의 패배 이후 일본군의 북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4월 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피신하였고, 이틀 뒤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였다.
2. 한산도 해전후의 상황
가. 계속되는 해전에서의 승리
해전에서의 양상은 육전과 달랐다. 조선 수군은 전라도의 수군을 중심으로 경상도의 수군과 연합하여 일본 수군을 계속하여 격파하여 나갔다. 한산도해전 이전에 조선 수군은 약 7번의 전투에서 일본 수군과 대전하여 이를 모두 이기었다. 이러한 조선 수군의 승리는 훈련으로 단련된 수군이 있었고 조선의 전선이 화포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같은 뛰어난 장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침략 전략에서 애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 장군들에게 되도록 많은 배를 구축하여 많은 병력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즉, 일본군의 침략 전략은 대부분 육지에서의 전투와 성 건조에 있었던 것이다. 해전에서 계속 패전을 거듭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 장수들에게 수군 전략을 바꾸도록 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일본 수군은 연합하여서 조선 함대에 맞서기로 하였다. 일본 수군은 진해에 있는 안골포, 웅포 등지에 성을 쌓고 전투를 준비하였다.
일본 조정에서 수군을 연합하여서 출전하라고 하였으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혼자 출병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전쟁 초반에 수군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제대로 된 해전을 해보지 못했던 차였다. 1592년 7월 7일 와키사카는 함대를 이끌고 항구를 떠났다. 와키사카의 함대가 거제도 인근 바다에 도착하여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을 즈음에 조선 함대는 미륵도에 있는 당포에 있었다.
나. 함대구성과 사령관
조선함대 | 일본함대 | |
---|---|---|
사령관 | 전라좌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전라우도 수군통제사: 이억기 경상우도 수군통제사 : 원균 | 와키사카 야스하루 |
함대 | 54척 | 73척 |
다. 전투내용
7월 7일에 한 백성이 조선 함대에 찾아와서 일본 함대가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조선 수군은 회의를 열어 전략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견내량 앞바다가 좁아서 판옥선의 방향을 바꾸기 어려웠고,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면 육지로 도망하였으므로, 일본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격파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8일 조선 함대는 5~6 척을 견내량 앞바다로 보내어 유인토록 하고, 나머지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기하였다. 견내량에 이른 조선 함대의 분대는 먼저 공격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배에 올라 대응 사격하였다. 조선 함대의 분대가 퇴각할 것처럼 행동하자, 일본함대가 이를 쫓았다.
조선함대의 분대는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한산도에 있던 조선 함대에 합류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그의 유명한 전법 중 하나인 학익진을 펴서 공격에 나섰다. 조선함대는 학이 날개를 편 것과 유사하게 전열을 가다듬었고 일본 함대를 둘러쌌다. 조선함대는 유인되어 들어오는 일본 함대에 공격하여 초반에 2~3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조선함대는 먼저 적의 대장선을 공격하여 적의 명령체계를 무너뜨린 후 공격에 박차를 가하여 일본 전선을 격침시켜 나갔다. 대부분의 일본 전선들이 조선함대의 전선에 접근하기 전에 격침되었으며 전투는 2~3시간 만에 끝이 났다.
라. 전투결과
일본 함대의 피해는 전례에 없는 것이었다. 일본 함대는 총 73척 중 59척의 전선을 잃었다. 이 배의 정원을 감안하여 추측해 보건데 약 3000명의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조선함대는 배를 잃지 않았고 사상자 또한 미비하였다.
3. 한산도해전의 영향
조선은 한산도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세 가지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첫 번째로, 조선은 풍족한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군량미 확보는 조선군에게 이어서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두 번째로, 조선함대를 무력화하려는 일본의 시도가 실패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군의 침략전략이 변화되어야 했다. 일본군은 원래 조선의 바닷길을 확보하여서 북진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 무기와 군량미를 제공하며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산도 해전에서 패하면서, 이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북진해 있었던 일본군들은 배고픔과 보급품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군은 명을 치기 위해서 반드시 이들에게 음식과 보급품을 댈 보급로가 필요했으나, 육로 또한 조선 육군과 의병에 의해서 차단되었다. 많은 평민들과 스님들로 이루어진 의병들이 일본군을 공격해 왔던 것이다.
세 번째로, 일본군이 더 이상 북진이 어려워져, 명나라가 육지로 참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가 명에 원군을 요청하여, 명나라 군대가 참전을 하게 되었다.
한편, 한산도 해전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까지 남해 바다를 지켜냈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내었다. 1598년 8월 18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측근들은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몇 달 후, 이 사실은 밝혀졌으며 일본 조정은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의 퇴각을 명령하였다. 1598년 11월 19일에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일본으로 돌아가던 일본 함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약 200여척의 전선을 잃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이 전투 중에 이순신 장군은 총상으로 죽게 되었으나, 그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은 조선,명연합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노량해전 후, 잔존해 있던 일본군이 부산을 떠나면서 임진왜란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 즉 조선, 명(중국), 왜(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국토는 7년여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되었으며 많은 유물이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비록 전란의 피해를 재건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 전쟁 후에도, 조선왕조는 3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조선왕조와 달리, 명나라와 왜의 통치자였던 토요토미의 치세는 끝을 맞게 되었다. 명나라는 전쟁 이후에 경제가 쇠퇴하고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이 계속 일어났으며, 1644년에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여진족은 이후 중국의 마지막 절대왕정 국가였던 청나라를 세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시절, 지방 영주였던 토구가와 이예야스는 토요토미의 정부를 전복하고, 에도-지금의 도쿄-로 수도를 옮기고, 에도 막부시대를 열었다. 토구가와는 1607년에 조선에 다시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이 응하면서 두 나라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신을 교류하였다. 조선은 통신사로 불리는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통신사는 500여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중에는 사신을 비롯하여 화가, 도공, 의사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은 이 통신사를 통하여서 조선의 신기술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특히,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4. 참고자료
가. 방송자료
1) 불멸의 이순신 : KBS 드라마, 2004.
2) 역사스페셜 : KBS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나. 서적
1) 징비록 : 유성룡, 김홍식, 2003
2) 임진왜란 해전사 : 이민웅, 2004
3)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2005
4) 세계를 바꾼 50인의 전쟁영웅(50 Military leaders who changed the world) : 윌리엄 웨어(William Weir), 2007
5)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 :임원빈, 2005
다. 웹사이트
1) 해군 사관학교 : http://www.navy.ac.kr
2) 대한민국 해군 : http://www.navy.mil.kr/
3) 현충사 : http://www.hcs.go.kr
4) 여수 거북선 : http://www.gbs.go.kr/main.html
5)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트라팔가해전
트라팔가르 해전은 나폴레옹전쟁시대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해전이다. 서유럽 대부분을 재패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동쪽으로 더 넓히고,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이는 트라팔가에서 넬슨과의 전투로 한나절의 꿈이 되고 말았다.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영국은 수 년동안 바다의 지배자로 남게 되었다.
1. 역사적 배경
가. 나폴레옹의 야망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명한 감옥이었던 바스티유를 폭도들이 불태웠다.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몰락을 가져왔고 프랑스가 공화국이 되는 초석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주변 왕정 국가들의 반대를 불러왔다. 왕정 국가들의 왕족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도 이러한 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그들은 연합하여서 프랑스에서 다시 절대 왕정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1792년부터 젊은 프랑스 공화당원과 왕정국가들의 군대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한 남자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은 원래 해군장교가 되고자 했으나, 그는 포병장교가 되어야 했다. 왕족과 귀족들의 자제만이 해군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20살이었으나 1793년의 영국과의 전투, 1795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투로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97년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로 가서 항복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1797년 10월 17일에 오스트리아는 캄포 포르미오조약에 서약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폴레옹전쟁의 첫 번째 장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로서 그는 그의 관심을 영국으로 돌리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1797년에 프랑스인들을 설득하여 영국왕정이 반드시 자신들에 의하여 무너져야 전 유럽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렇게 전쟁명분을 만들어가며, 그는 영국 침략을 위해 모든 역량을 해군을 세우는데 쏟아 부었다. 영국 침략 계획은 그러나 넬슨 제독과 영국해군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아미엔조약이 1802년에 조인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약 14개월 동안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강력한 권력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1804년 12월 2일에 스스로 나폴레옹 1세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 날 이후로, 자신의 제국을 더 넓히고자 하는 나폴레옹의 야망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점령하고자 다시 계획을 세웠다.
나. 넬슨제독의 끝없는 추격
영국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영국의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 영국의 운명은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영국이 섬나라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중요성을 어떤 나라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1804년말 스페인과 프랑스는 연합하여 영국을 침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의 함대가 나폴레옹의 손안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영국 침략을 위해 2000여 척의 배와 90,000명의 군대를 준비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들은 프랑스의 해안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함대에 그의 지상군이 바다를 건너 영국에 도착할 동안 영국함대를 막으라고 명하였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함대는 프랑스의 브레스트, 로쉐포트, 툴롱항과 스페인의 카디즈, 페롤에 흩어져 있었고, 영국 함대는 이들 항구 길목에서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고 있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캐러비안 해에서 연합하기로 했는데, 이는 영국해협을 건너는 동안 영국 함대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의 총 지휘관이었던 빌레뉴브의 제독의 함대는 툴롱항에 있었으며, 이를 넬슨 제독이 감시하고 있었다. 빌레뉴브 함대는 1805년 3월 30일에 마침내 툴롱에서 넬슨을 따돌리고 출항하여 대서양으로 향하였다. 넬슨제독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빌레뉴브 함대가 지중해로 갔다고 여겨 이집트 근처로 함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빌레뉴브 함대를 뒤쫓기 시작했다. 한편, 카디즈항에 있던 스페인 함대는 항을 빠져나와 빌레뉴브 함대와 연합하게 된다.
다. 영국 침략 계획의 실패
빌레뉴브함대가 캐러비안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에 도착했을 때, 빌레뉴브 제독은 페롤항에 있던 함대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빌레뉴브 제독은 나폴레옹황제가 그가 영국해협으로 와서 영국함대로부터 막아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페롤항으로 가서 남아있는 프랑스함대를 이끌고 북진하기로 했다. 페롤항으로 가는 길에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로버트 캘더 제독의 함대와 부딪히게 되었으나 캘더 제독을 따돌리고 페롤 바로 밑에 있는 항구인 비고항에 도착하였다.
나폴레옹은 5개월동안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영국 침략에 전력을 쏟고 있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연합하여서 프랑스를 침략하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침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움직여서 독일로 향하였다. 또한 그는 빌레뉴브함대에게 지중해로 들어와서 프랑스 지상군을 도우라고 명하였다.
2. 해전 전후 상황
가.함대와 사령관
영국함대 |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 |
---|---|---|
사령관 | 총사령관: 호라티오 넬슨 제독, 콜링우드 제독 | 총사령관: 찰스 빌레뉴브 제독 |
함대 | 총 32척의 전선 | 프랑스 함대:26척, 스페인 함대: 15척 |
나. 전투의 시작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10월 18일에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카디즈를 떠났다. 넬슨 제독은 카디즈에 9월 말에 도착하여서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열었다. 넬슨 제독의 전투 전략은 프랑스 함대가 카디즈를 떠나기 전에 결정되어 지고 있었다. 넬슨 제독의 계획은 함대를 나누어서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해 들어가는 것으로 정했다.
10월 21일에 넬슨의 영국함대는 스페인연안의 트라팔가곶에서 빌레뉴브 함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넬슨 제독은 자신의 함대를 웨더와 리 분대로 나누었다. 그는 웨더 분대를 이끌고 콜링우드 제독으로 하여금 리 분대를 이끌게 하였다.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접근해 오자 빌레뉴브 제독은 카디즈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명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함대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늘어뜨린 전법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전법 형태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전선의 양쪽 뱃전을 적으로 향하게 해야 함포 사격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넬슨제독의 계획에 따라 영국 함대는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중간 부분을 끊고 서쪽에서 끊고 들어갔다. 넬슨제독은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때문에 영국 함대는 빠른 속도로 전지해 나갈 수 있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웨더 분대는 빌레뉴브제독의 배인 부상테어 앞을 끊고 들어갔으며 콜링우드 분대는 더 남쪽을 끊고 들어갔다. 콜링우드 분대의 목표는 스페인 사령관의 배를 부수고 넬슨의 공격으로 흩어진 전선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넬슨의 분대 중 두 척은 본대가 방향을 바꾸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공격을 시작하기 시작하자, 빌레뉴브의 배보다 앞에서 전진하고 있던 배들을 공격했고, 콜링우드 분대는 뒤 쫓고 있던 스페인 함대의 분대와 맞서게 되었다. 교전이 무르익을 즈음인 1시 15분쯤 넬슨제독이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았다. 넬슨의 웨더분대는 프랑스 함대의 중간부분에 있던 배들을 격침시켰고 일찍이 분대에서 떨어져 나가서 싸우고 있던 2척이 있던 곳으로 향하였다. 이들과 교전 중이던 프랑스 함대의 분대는 넬슨의 웨더 분대가 자신들에게 향해오자 퇴각하였다. 넬슨제독은 그의 선장인 토마스 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4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다. 결과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많은 해군을 잃었으며 21척의 전선은 영국함대에 포획되었다. 사상자는 프랑스군만 해도 엄청났는데 2218명의 프랑스 해군이 죽고 1,155명이 부상을 당했다. 스페인 군은 1,025명이 죽었고 1,383명이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7천명정도의 해군이 포로로 잡히었다. 반면 영국함대는 배를 한 척도 잃지 않았으며, 넬슨 제독을 비롯한 449명의 해군이 죽었고 1,24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3.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향
트라팔가르 해전이 끝난 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압승을 거두고 오스트리아에게 프레스버그조약에 사인하도록 하였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더 많은 땅을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로는 강력한 영국 해군을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그의 영국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나폴레옹은 영국의 대유럽대륙 무역을 막아서 영국의 경제적 힘을 축소시키려 하였다. 1806년 11월 21일에 그는 모든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막아서 고립시키려고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책은 그를 고립되게 만들었으며 그의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대륙봉쇄령은 그의 제국과 제국 내 유럽 국가들 간의 분쟁을 초래했다. 1810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의 무역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향한 그의 군사적 전략은 실패하였고 그의 권세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영국인들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승리를 수백년동안 축하해왔다. 영국의 유명한 석상중 하나는 이 해전을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의 석상으로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에 있다. 2005년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200주년을 맞아서 영국 해군은 세계해군함대 전시, 루미나리에 축제 등과 같은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4. 참고자료
가. 웹사이트
1) HMS Victory: http://www.hms-victory.com/
2) National Archives: Trafalgar Ancestors: http://www.nationalarchives.gov.uk/trafalgarancestors/
3) National Maritime Museum: Nelson - http://www.nmm.ac.uk/nelson
4) BBC history: http://www.bbc.co.uk/london/content/articles/2005/04/21/nelson_feature.shtml
5) BBC News: http://www.bbc.co.uk/hampshire/content/articles/2005/05/17/trafalgar200_feature.shtml
6) Napoleon.Org: http://www.napoleon.org
7) Nelson Navy: http://www.nelsonsnavy.co.uk/battle-of-trafalgar.html
살라미스 해전
들어가며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 492년에서 448년까지 일어난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비록 이 전투가 다른 전투인 마라톤전투와 테르모필레 전투에 비해서 유명하지 않지만, 이 전쟁은 아테네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1. 역사적 배경
당시에 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의 손 안에 있었다. 페르시아 인들은 서아시아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제국을 세웠다. 이들은 서쪽으로 영토를 더 넓히기 위해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점령해야 했다. 그래서, 페르시아 여러 왕의 재위기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를 침공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재위기간에 일어났다. 그는 그리스 이오니아 지방을침략했던 왕인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었다. 이오니아 지방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연합해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자,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군대를 보내서 반란을 제압하게 된다.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이 다른 그리스 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아테네만 유일하게 군대를 보내주었고, 결국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을 도와주었던 아테네를 제압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략했을 때,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대군을 아테네에서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벌판에서 맞는다. 이 전쟁은 아테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 후에 한 연락병이 아테네로 뛰어가서 아테네 군의 승리를 외친다. 그는 이 말을 전하고 죽었다. 그가 행했던 일은 후에 현대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초석이 된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아테네 침공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죽게 된다. 그래서 아테네 침공 작전은 그의 아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신하들은 그가 페르시아에 있도록 두지 않았다. 신하들은 아버지의 대업을 이어야 한다고 그를 종용했다. 마침내, 그는 침공 계획을 세우고 페르시아 전역에서 군대를 모은다. 군대 모으는 일이 끝날 즈음에 그는 그리스 본토로 진군하게 된다.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군이 528만이었다고 기록하지만, 현대 그리스 역사가들은 360만 정도로 보고 있다.
페르시아 군은 해안가를 따라서 남진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음식이나 무기를 해군한테서 조달 받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페르시아 군이 중부 그리스의 중요한 요충지인 테르모필레 근처인 말리스의 타키스 지방에 도착했다. 만약 그리스가 이 테르모필레 지역을 잃게 되면 아테네와 그 남부 지역의 도시국가들도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그리스 남부의 31개 도시국가들은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군에 맞서기로 한다. 스파르타인들이 이 연합 그리스 군대의 리더가 된다.
기원전 480년 8월 18일에 테르모필레 전투는 시작된다.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는 7천명의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페르시아 군과 싸운다.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연합군보다 20배나 많았다. 이틀 동안 페르시아 군은 이 적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한다. 꾀가 많았던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 출신의 배신자에게 연합군의 진지가 있는 테르모필레 지역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을 묻는다. 곧, 페르시아 군이 이 길을 따라 진군하게 된다. 그리스 연합군은 레오니다스 왕에게 퇴각하자고 하였지만, 그는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군과 남아서 전투를 치루게 된다.
레오니다스가 그리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때,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는 아르테미시움지역에 정박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있다가 그리스 연합군을 돕기 위해서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전략을 간파하고 그의 함대를 이 지역으로 보낸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시움 지역에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많은 수의 군대와 배를 잃게 된다. 또한 그들은 아르테미시움에 도착해서 전투를 벌였을 때 또 다시 배를 많이 잃게 된다. 이 러한 손실은 페르시아 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한편,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군이 에게해 지역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에 항복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배로 이 손실을 메꾸었다고 그의 책에서 주장한다.
그리스 함대는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후에는 자신들 국가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 아르테미시움에서 퇴각하여서 살라미스 섬으로 이동하게 된다.
2. 해전
가. 전력비교
그리스함대 | 페르시아함대 | |
---|---|---|
사령관 | 총사령관: 유리비아데스(스파르타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아테네 사령관) | 총사령관: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 |
함대 | 300~370척의 삼단노선과 50여척의 펜테콘테선 | 800척(가장 적은 추정량:650 삼단노선, 그리스 학자들은 1000척이 넘었다고 주장함.) |
나. 전략회의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한 후에 그리스 연합군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스파르타 인들은 살라미스 인근 이자 그들의 영토와 가까운 코린트해협으로 퇴각하자고 주장하였다. 아테네인들은 그곳으로 퇴각할 경우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해 온 아테네 인들이 페르시아 군의 희생양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회의는 점차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회의 장소를 떠나서 그리스 함대가 살라미스 섬에 남도록 할 방법을 궁리했다. 마침내 그는 그의 페르시아 출신 충복을 크세르크세스에서 보낸다. 그의 노예는 그리스 군의 연합이 와해되고 있으며 크세르크세스가 지금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면 페르시아 군이 이길 수 있다고 전하도록 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곧 살라미스 섬의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페르시아 군이 살라미스를 향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 연합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스 군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크세르크세스는 전투를 한눈에 보고자 아이가레오스 산에 오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최측근들은 그리스 전함을 누가 제일 많이 부시는지 적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다. 전투의 시작
페르시아 군은 함대의 몇 대를 살라미스 섬을 우회하여 그리스 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남은 함대는 살라미스 섬 앞의 작은 섬 때문에 두 부대로 나누었다.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함대가 들어갈 동안 그리스 연합군은 전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함대의 위용에 겁에 질려서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섬 때문에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적이 퇴각한다고 생각하여서 한꺼번에 진입을 시도 하였다. 곧 페르시아 함대는 아군 배와 서로 섞여서 전진하지도 퇴각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페르시아 함대의 배들이 진입하지 그리스군은 배를 빨리 선회하여서 먼저 공격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은 청동으로 만든 배의 머리로 들이 받아서 적 함을 부시도록 하여 함대의 전열을 흐트러 뜨리는 것이었다.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함선들을 부시기 시작 하였고 페르시아 함대를 둘러쌌다. 페르시아 군이 퇴각 하려 하면 뒤에 있던 페르시아 군에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40 척을 잃은 반면 페르시아 군은 200척을 잃었고 모두 바다에 가라앉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전투가 끝날 즈음에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였다. 사실, 그의 이번 그리스 침공의 목표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이미 이룬 상태였다. 그의 휘하 장수들은 그리스에서 퇴각하자고 왕께 건의를 하였고 그는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남은 페르시아 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3. 결과
아테네가 이 해전에서 승리를 이끔으로서 아테네의 황금기가 시작 되었다. 이 전투 후에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를 다시 공격 하였으나 그리스 군은 다시 그들을 무찔렀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날 무렵 아테네 인들은 아테네 제국의 초석을 만들어 갔고 아테네는 곧 지중해의 힘 있는 국가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 해군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매년 9월 12일에 기념식을 연다.
반면, 페르시아 제국은 전투 이 후에 쇠약해져 갔고, 식민지 지역에서 더욱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 제국이 150년 더 지속 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4. 참고자료
가. 영화
* 300(2006), Warner Bros. Pictures
나. 책
* 헤로도투스의 역사책에서 본 페르시아 전쟁 이야기 :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책을 조지 윌리암 콕스가 풀어 쓴 책.
* 고대 그리스 백과사전 : 니겔 가이 윌슨이 2006년도에 출판한 책.
* 살라미스 해전 : 베리 스트라우스가 쓴 것으로 시몬과 슈스터에서 2004년도에 출판한 책.
다. 웹사이트
* Answers. Com : http://ancienthistory.about.com/od/salamis/g/Salamis.htm
* Britannica : http://www.britannica.com/eb/article-9065030/Battle-of-Salamis
* BBC : http://www.bbc.co.uk/dna/h2g2/A13114748
칼레해전
칼레 해전은 스페인 아르마다(스페인어로 함대라는 뜻)가 영국을 침략하려는 군사작전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을 다시 카톨릭 국가로 되돌리고 영국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해 앙갚음 하려고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영국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스페인은 많은 지상군을 준비하였으나 영국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어떤 항구에도 입항하지 못했다. 영국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영국해협 주변인 칼레지방에 있는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해전을 치뤘다. 이 해전 이후에 스페인 점점 해양력을 잃게 되었고 이는 영국이 새로운 해양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 역사적 배경
가. 종교개혁
1517년에 독일의 성직자였던 마틴 루터가 95개의 반박문을 내었고 이 내용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곧,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파직되었고, 그의 교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후에,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따라 독일의 지방영주들은 자신들 영토의 종교를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교운동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환영받았고 구교와 신교간의 분쟁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로마 카톨릭, 즉 구교와 헨리 8세 치세 때에 등을 돌렸다.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 수도원의 재산을 빼앗고 영국 교회의 수장은 자신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선언하게 된 이유는 로마정부가 자신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분쟁은 1572년 8월 24일에 프랑스에서 극에 달했다. 많은 위그노들(신교도들)이 마르게리타 공주 결혼식에서 구교도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필립2세는 스페인 영토였던 네덜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신교도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쟁은 네덜란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1566년 신교도들의 정당이 영국의 도움으로 반란을 꾀한다. 후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필립2세의 종교탄압 정책은 칼레 해전에서의 패전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스페인 지상군이 스페인 배에 오르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나. 영국과 스페인의 분쟁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힘이 강한 나라였으며,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에도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국왕인 필립 2세는 신실한 구교신자였으며 영국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다. 스페인이 터키와 신교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를 보내서 스페인의 배들을 노략하도록 도와주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종교를 계승하였고, 유럽 대륙에 있는 신교 국가들, 즉 네덜란드와 같은 곳을 지원해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특히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있던 스페인 세력이 영국의 큰 위협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주변의 플랑드르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해 놓은 상태였다.
영국인들의 지속적인 스페인 선 노략으로 인해 스페인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필립2세는 1580년 7월부터 영국 선박을 감시하고 서인도제도와 대서양에서 계속해서 노략질을 한 드레이크를 벌하라고 영국에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내렸고, 영국군을 네덜란드로 파견해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도왔다.
다. 필립 2세의 영국 침략 계획
필립 2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가 죽고나자 영국 침략 계획을 세웠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는 스페인을 등에 업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필립 2세는 로마의 도움을 얻고자 영국 침략 계획을 종교 전쟁으로 과장하였다. 마침내 필립2세는 침략 명분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587년에 드레이크경이 카디즈항으로 들어와서 필립 2세가 침략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스페인 전선들을 대부분 침몰시켜서 미루어져야 했다. 이 전선들에 보급 물품들이 많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런 물품들도 다시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영국 침략 계획은 애초에 전설적인 제독이었던 산타 쿠르즈에 의해서 세워졌다. 산타크루즈는 아일랜드를 먼저 점령하고 그 후에 영국으로 전진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후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를 이어서 메디나 공이 다시 계획을 세웠다. 메디나 공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해전 경험은 다소 부족한 이었다. 이 또한 스페인이 칼레 해전에서 패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필립2세의 계획은 그의 함대를 네덜란드에 있던 지상군인 파르마공의 군대와 합해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필립 2세와 측근들은 강력한 스페인 지상군이 영국에 내리자마자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라. 영국의 전쟁준비
영국은 스페인 내부에서 정부를 모으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영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였다.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월싱험은 그의 사람을 스페인 왕궁에 심어놓고 첩보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영국 고문서들을 보면 그가 스페인이 침략하기 1년 전부터 이미 침략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침략 계획을 알게 된 직후 방어 전략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도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동시에, 영국은 전선들의 구조를 변경하고 많은 배를 건조하였다.
스페인의 침략 계획 실행내용, 함대의 규모, 사령관의 이름등도 스페인 내에서 활동하던 영국 스파이들에 의해서 본국으로 전해 졌다.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 스파이가 영국 정부로 보낸 편지내용에는 130척의 배가 영국 침략을 위해서 준비되었으며 돈 알론소 디 리바가 스페인 지상군 총 사령관이 되었다고 정확히 적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파르마공에게 함대가 언제 도착할 것인지 알리기 위해서 한 스페인 배가 스페인 함대가 출발하기 전에 네덜란드로 떠났다 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 편지는 사실 스페인 함대를 위해서 출병에 참여한 이탈리아 선장의 편지를 토대로 쓰여진 것이었다.
2. 칼레해전 전후 상황
가. 함대와 사령관
영국함대 | 스페인함대 | |
---|---|---|
사령관 | 하워드제독, 드레이크 제독, 호킨스 제독 | 총사령관: 메디나공,지상군 총사령관: 돈 알론소 디리바 |
병력 | 15,000명 | 총:28,000 지상군:20,000, 해군 및 추가병력:8,000 |
함선 | 총:197척 전투선: 새로 건조한 갈레온선 20척을 포함한 75척 | 총 : 130척 전투선 : 65척, 병선:2척 |
나. 스페인 함대의 출항
스페인 함대는 리스본항을 출항하여 오늘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영토인 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파르마공의 지상군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출항한 후 심한 폭풍 때문에 스페인 함대는 예정된 시각보다 더디게 영국 쪽으로 북상하였다.
7월 중순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해협의 서쪽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7월 30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 영토인 콘월지역에서 목격되었다. 이때 영국 함대는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는 초승달 모양의 전형을 취한 채로 영국해협을 따라 플란더스 지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국 함대와 스페인 함대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하워드 제독은 여국 함대를 네 개의 분대로 나누고 한 분대는 자신이 한 분대는 드레이크 제독이, 한 분대는 호킨스 제독이, 그리고 나머지 한 분대는 마틴경이 이끌도록 하였다.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몇차례 교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드레이크 경이 스페인 함대의 한 척을 포획했고 한 척은 스페인군의 실수로 불타 침몰하였다.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메디나공이 파르마공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함포와 탄약을 준비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는 승리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파르마군과 만나기로 한 칼레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았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영국 함대 또한 스페인 함대 근처에 정박하였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칼레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사람을 파르마공에게 보내었으나 파르마공의 군대는 몇 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최근 밝혀진 스페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파르마 공은 이미 이 침략 계획이 실패한 것이라 여겨서 그의 군대를 내륙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다. 결전의 날
8월 6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면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의 전선 사이로 불을 붙인 작은 배들을 보내자 스페인 선원들은 곧 자신들의 배가 폭발할 것이라고 여겨서 배들을 잇고 있던 줄을 잘라버리고 출항하였다. 함대의 전형은 이 때문에 흐트러졌고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기회가 영국 함대에 왔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동안 영국 함대는 칼레항 근처에 있는 그라블린 항에서 많은 스페인 전선들을 침몰시켰다. 스페인 전선들이 영국 배들에 근접하여 올라탄 후 전투를 벌이려고 했으나, 익히 이 전술을 알고 있었던 영국 함대는 먼 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스페인배의 접근을 피했다. 영국 전선들은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고 스페인 전선들은 영국 함대와 플랜더스 지방 사이에 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다.
라. 결과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여 오려고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도니아 공은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는 스페인 군이 스코틀랜드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제임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터였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왕은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신임을 어기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굶주린 스페인 선원들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정박하여서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이를 미리 예상한 엘리자베스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되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산탄더항에 도착하게 된다.
3. 칼레해전의 영향
칼레 해전이 끝난 후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1604년에 런던 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영국은 계속해서 네덜란드의 신교 세력을 지원하였고 스페인 선박들을 갈취하여서 부를 쌓았다. 시간이 갈수록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 또한 시들어 갔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은 스페인의 해양력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스페인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스페인이 힘을 잃어갈수록 영국은 힘을 얻었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차렸는데 이는 영국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영국은 1604년에 스페인 외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세우게 되었다.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처녀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고자 지어졌다고 한다.
4. 참고자료
가. 영화
1) 엘리자베스 : 유니버셜 영화사, 2007
나. 서적
1) 세계를 변화시킨 50인의 전쟁 영웅 : 윌리엄 웨버, 2007
2) 스페인 아르마다의 패배: 가레트 마팅리
다. 웹사이트
1) Learning curves : http://www.learningcurve.gov.uk/snapshots/snapshot39/snapshot39.htm
2)British Library: http://www.bl.uk/learning/histcitizen/uk/armada/source2/channel.html
3)National Archives : http://www.nationalarchives.gov.uk/nelson/gallery7/trafalgar.htm
4) BBC History : http://www.bbc.co.uk/history/british/tudors/adams_armada_01.shtml
5) Channel 4: http://www.channel4.com/history/microsites/H/history/pirates/armada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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