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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데렐라1화 - 일곱살의 소녀

1. 일곱 살의 소녀.

부르릉. 부르릉.

더위를 피해 대청마루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할머니가 마당 밖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자동차 소리에 귀가 쫑긋해졌다. 

오늘은 손꼽아 기다리던 서울로 시집보낸 막내 딸내미와 사위, 그리고 귀여운 손녀가 오기로 한 날이다. 

아마도 동이 틀 무렵부터 기다렸을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만 백번은 족히 본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무신을 꺾어 신었다. 

대문 밖으로 나가볼 요량이었다. 

막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민주

 “할무니!”

민주였다. 

앙증맞은 입술로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오는 손녀를 보는 순간 잔뜩 주름이 진 얼굴에 함지박만 한 미소가 걸렸다.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발걸음을 내디디고 걸음을 재촉했다. 

할머니

 “어이구 내 강아지!”

어린민주

 “할머니. 안녕히 계셨어요?”

할머니

 “오냐오냐. 민주도 잘 있었고?”

어린민주

 “네. 방학 때라서 엄마·아빠랑 놀러 왔어요.”

할머니

 “오냐오냐. 잘했다.”

민주 아빠가 주차하고 뒤늦게 들어오면서 허리를 숙였다. 

양손에는 짐이 가득하였다. 

한걸음 뒤에는 민주 엄마가 뒤따라왔다. 

민주아빠

 “저희 왔습니다. 장모님.”

민주엄마

 “엄마, 저희 왔어요.”

할머니

 “그래. 어서들 와. 차는 안 막혔고?”

민주아빠

 “네. 별걱정 없이 잘 왔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집에 계신가요?”

할머니

 “그래. 자네들 온다는 소식 듣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아마 낮잠이라도 주무시는 모양이야.”

민주아빠

 “알겠습니다. 우선 안으로 올라가시지요. 오랜만에 뵈었으니 절이라도 해야죠.”

그 말을 듣고 할머니가 질색을 했다.

할머니

 “어이구, 절은 무슨. 시답잖은 소리는 말고. 저쪽에 사랑방 치워놨으니 일단 거기다가 짐 풀게. 거기가 제일 시원하니 지낼 만할 거야.”

민주아빠

 “하하, 알겠습니다.”

민주는 부모님들이 짐을 푸는 동안 외갓집을 구경했다. 

방이 4개나 있는 기와집으로 방마다 달린 문은 특이하게도 나무로 문틀을 대고 그 위에는 창호지로 막아놓은 형식이었다. 

뒤편과 왼쪽에는 크게 이루어진 대나무 숲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마당과 수돗가가 있었다. 

구석에 닭장도 있었다. 

마당 위에 풀어놓은 닭들이 대나무 숲을 오고 가며 빽빽 거리고 있었다.

닭은 유치원 사육장에서 보긴 했으나 시골 닭은 학교 닭과 비교도 할 수 없게 컸다. 

거의 크기가 2배는 됨직했다. 

신기한 마음도 있었으나 괜히 다가가면 공격할 것 같은 불안감에 민주는 슬금슬금 닭을 피해 대문 밖으로 향했다.

창열

 “어라? 너 누꼬?”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아이들이 민주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비슷비슷한 또래들로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옆에 있는 아이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줬다.

봉주

 “아, 일마가 그 서울에서 온다는 아이인갑다. 여기 할머니네 손녀. 맞제?”

창열

 “나도 들었다. 엄청 예쁘고 곱다던데. 실제로 보니 참말이네.”

아이들은 민주가 대답할 새도 없이 지들이 묻고 지들끼리 대답했다. 

칭찬이 분명했지만, 왠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이 아는 한국말인데도 엄청 이상하게 들려왔다.

봉주

 “니 몇 살이노? 한 6살쯤 먹어 보이는데?”

창열

 “뭔 6살이노? 7살은 되어 보이는데. 난 10살이다. 여기 이장님이 우리 아빠시고.”

그 옆에 있는 촌놈도 자기를 소개했다.

봉주

 “난 9살. 저쪽 집에 산다.”

소개한 녀석은 손가락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집을 가리켰다. 

지들끼리 떠들어 댄 후 두 녀석의 시선이 민주에게로 향했다.

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민주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어린민주

 “난 7살이고. 할머니 집에 놀러 왔어. 김민주라고 해.”

창열

 “김민주? 와, 이름도 억수 예쁘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름을 말 안 했구나. 난 김창열. 그리고 얘는 오봉주.”

이름을 말하고 히죽거리는 폼이 영락없는 맹구 같았다.

딱히 호감 가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서울 소년만 봐오던 민주에게 시골소년들은 그냥 촌놈들일 뿐이었다. 

봉주와 창열, 민주의 시선은 여태껏 한마디로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남은 녀석에게로 돌아갔다.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유일한 녀석이었다. 

남자애는 뭐가 못마땅했는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민주는 그때야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촌티가 났지만, 촌놈치곤 제법 잘생긴 편이었다. 

두 녀석과는 다르게 키도 크고, 강단도 있어 보였다. 

창열

 “닌 왜 자기소개 안 하는데?”

어린경훈

 “지금이 뭐,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시간이가? 고마 치워뿌라. 퍼뜩 가기나 하자.”

무엇이 그렇게 심통이 난 것일까? 

녀석이 갑자기 혼자 발걸음을 떼며 둘을 재촉했다.

어린경훈

 “안가나? 이러다가 해 다 지겄다.”

창열

 “저놈아 뭐가 저리 심통났노? 아, 쑥스러워서 저러는 긴가? 민주라 켔지. 나중에 또 보재이.”

봉주

 “안녕.”

세 녀석은 나타난 것도 금방이었지만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지들끼리 인사하고, 지들끼리 사라졌다. 

힐끔 뒤를 보고 손을 흔드는 봉주를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줄 뻔한 걸 발견한 민주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내가 왜 저런 촌놈들이랑!?

민주엄마

 “민주야! 어딨니!?”

집안 마당에서 민주를 들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민주

 “응, 엄마 나 여깄어!”

민주의 목소리를 듣고 엄마가 대문 밖으로 쫓아 나왔다.

민주엄마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어린민주

 “엄마, 혹시 쟤네 알아?”

엄마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민주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민주의 손끝은 벌써 저만치나 가고 있는 소년들을 향해 있었다.

민주엄마

 “아, 쟤네? 봉주랑 창열이랑…. 그리고 경훈이었던가? 쟤네 만났어?”

어린민주

 “응.”

민주엄마

 “잘됐네. 여기 와있는 동안 쟤네들이랑 친구 하면 되겠다. 민주 심심하지 않게끔. 민주도 좋지?”

민주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나오는 목소리도 새침했다.

어린민주

 “싫어!”

민주엄마

 “아니, 왜? 새 친구들 생기는데 왜 싫어?”

어린민주

 “저기 끝에 있는 얘. 쟤 재수 없어.”

민주의 손가락은 세 명의 소년 중 가장 우측에 있는 녀석. 경훈에게로 향해 있었다.

민주엄마

 “경훈이? 걔가 왜 싫어? 혹시 방금 무슨 일 있었어?”

어린민주

 “몰라, 그냥 싫어.”

***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민주는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를 계속했다. 

컴퓨터도 없고 TV도 잘 나오지 않았다. 

집 구경은 다 했고, 무료함을 달래줄 뭔가가 시급했다. 

마당구경을 하고 대문 근처에서 서성이는데 어제 만난 아이들을 또다시 만났다. 

멤버는 어제 그대로였다.

봉주

 “엇? 또 보네. 나 기억나제? 봉주. 우리 지금 놀러갈낀데 같이 갈래?”

어린민주

 “놀러?”

놀러라는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물끄러미 녀석들이 들고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검은 봉다리. 

긴 작대기에 망태기를 엮어 만든 엉성한 잠자리채. 

처음엔 곤충채집이라도 하러 가는 줄만 알았다.

창열

 “뭐하노? 멀뚱멀뚱 서 있고. 퍼뜩 가자. 안 갈끼가?”

옆에 창열이도 민주를 재촉했다.

민주는 순간 갈등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린경훈

 “절마 별 관심 없는갑다. 그냥 우리끼리 가자. 서울 아들은 이런 거 하고 안 논다. 더군다나 쟈는 계집아이가?”

경훈이가 기어코 한마디를 내뱉어 민주의 마음을 들쑤셔 놨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두 녀석과는 달리 경훈은 민주에게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어딜 가든 예쁘고 귀여운 외모로 어른들의 관심을 늘 독차지하던 민주였다. 

그 대상은 비단 어른뿐만이 아니라 같은 또래들에게도 통용됐다. 

다니던 유치원에서도 가장 예쁜 어린이 상을 받고, 유아 잡지모델에 나왔다.

유치원에 가면 자신과 짝꿍이 되고 싶어 하는 남자애들이 발에 챌 정도로 널리고 널렸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면전에 대고 무시한 남자애는.

괜한 자존심이 생겼다. 

어린경훈

 “그냥 우리끼리 놀자.”

뒤돌아서서 가려는 소년들의 발목을 민주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어린민주

 “기다려.”

어린경훈

 ​“응?”

어린민주

 “엄마한테 허락받고 와야 하니까. 기다리라고….”

별 잘못한 것도 없는데 끝에 가서는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였다. 

민주의 대답에 봉주와 창열이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창열

 “그래, 퍼뜩 다녀 온나.”

어린 민주에게는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무료함을 달래줄 것들이 더 시급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촌놈 삼총사는 그런 민주의 무료함을 달래줄 가장 좋은 상대였다.

넷은 개구리와 메뚜기를 잡고, 산에 올라가 밤도 따 먹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고 지낸 민주에게는 처음 해보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재미있기만 했다.

민주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경훈을 잘 따랐다. 

경훈은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10살이었다. 

창열과도 동갑이었지만 경훈이 1월생으로 제일 생일이 빨랐다. 

서울에는 빠른 생일 자라는 게 없어졌지만, 아직 시골에서는 통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맏형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은근히 귀찮아하면서 산딸기도 따다 주고, 개구리 뒷다리는 민주에게 다 주고, 자기는 앞다리만 먹었다. 

나머지 두 녀석도 민주에게 친절하긴 했지만, 그저 그런 얼뜨기일 뿐이었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경훈이 난 놈이 분명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똑 부러진 구석이 있었다. 

민주는 그 후 외갓집에 올 때마다 이들과 어울려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늘 재미있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민주가 10살 되던 해. 

사건은 태풍이 오고 난 후 며칠 후에 벌어졌다.

*

그날도 변함없이 삼총사와 냇가로 향하던 길이었다. 

늘 놀던 장소에 도착한 삼총사와 민주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냇가를 쳐다봤다.

어린경훈

 “와, 물 억수 불었네. 오늘은 안 되겠다. 그냥 돌아가자.”

수심이 불어난 냇가를 보고 경훈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전에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려 둑이고, 저수지도 난리가 났다. 

흐름도 평소보다 세고, 수심도 깊어져 있었다. 

민주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어린민주

 “오늘 여기서 못 노는 거야? 나 오늘 그림일기 쓰려고 했는데.”

어린경훈

 “안된다. 물이 이렇게 불어나서는 못 논다. 돌아가서 따다 놓은 옥수수나 삶아 묵자.”

경훈의 단호한 말에 민주가 곧 울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고사리 같은 오른손에는 오리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튜브가 들려 있었다. 

튜브 한번 못 타보고 돌아가야 하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물이 이렇게 불어나서는 다 큰 어른들도 위험했다. 

봉주가 그걸 보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봉주

 “성님. 저만치만 올라가면 상류 쪽에 좀 얕은 데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놀면 어떻습니까?”

어린경훈

 “저 위?”

봉주

 “평소에는 너무 얕아가꼬 못 노는데, 지금이라면 물이 불어 놀만 할 것 같지 않겠습니까?”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건드리기만 하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민주를 보자 경훈의 마음도 약해졌다. 

어린경훈

 “민주야. 그리 놀고 싶나?”

끄덕끄덕.

끝내 눈가에 맺힌 눈물이 민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경훈의 마음이 금세 약해졌다.

어린경훈

 “그래, 위로 한번 가보자. 잘하면 튜브 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자.”

어린민주

 “응!”


츤데렐라2화 - 톱스타의 일상(1)

2. 톱스타의 일상(1)

200m 정도 거슬러 도착한 곳은 꽤 한적한 공터를 끼고 있는 상류 지점이었다. 

평소에는 물의 수심이 발목 정도밖에 되질 않아 놀기엔 적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물이 불어나 엉덩이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창열

 “이정도면 놀만 하네. 퍼뜩 들어온나. 민주야.”

수심 상태를 체크해본다고 봉주와 창열이가 먼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민주도 오리 튜브를 들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민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웃음 터트리는 소리가 물 흐르는 소리보다도 청아했다. 

경훈은 큼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애들이 노는 것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봤다.

창열

 “닌 왜 안 들어오고 거기서 똥폼 잡고 서 있노?”

창열이 질문에 경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등을 돌리며 말했다.

어린경훈

 “여름이라 해도 아직 물이 차다. 난 불 피울 땔감 좀 구해오께. 민주 절마 저대로 나오면 틀림없이 감기 걸릴끼다.”

창열

 “하이고 마, 저놈 시키 오지랖은. 멋있는 척은 혼자 다하고 자빠졌네. 들오기 싫으면 치아뿌라.”

어린경훈

 “고마, 시끄럽다 마. 민주나 잘 데리고 놀고 있으라.”

얼마나 지났을까?

경훈이가 자리를 비운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아이들 고함이 울려 퍼졌다. 

때마침 경훈도 땔감거리를 손에 들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분주해 보이는 것이 뭔가 사달이 난 것이 분명했다.

창열

 “민주야! 민주 절마 잡아라! 뭐하노 퍼뜩 안 쫓아가고!?”

어린경훈

 “뭐, 뭔데!?”

사고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경훈은 튜브를 타고 저만치 떠내려가고 있는 민주를 발견했다.

두 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민주를 부르며 물을 헤쳐 쫓아가고 있었다.

경훈은 들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내팽개치고 지면 위를 달려 재빨리 민주를 쫓아갔다. 

물이 불어난 냇가라서 그런지 유속속도가 엄청났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지면을 내달리고 있음에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어린경훈

 “민주야! 민주야! 정신 단디 잡고 있으라! 알았제!”

경훈은 몇 번이나 그 같은 말을 외쳤는지 모른다. 

물론 민주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급류에 휩쓸리면서 정신을 잃었는지 이미 민주는 몸이 축 늘어진 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냇가로 뻗은 긴 나뭇가지에 민주가 부딪히고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 틈에 경훈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민주를 안고 나왔다.

찰싹. 

찰싹.

어린경훈

 “민주야. 민주야! 내 말 들리나?”

경훈은 민주의 뺨부터 때리며 의식이 있나를 확인했다. 

물먹은 솜 인형처럼 축 늘어진 민주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민주의 코를 잡고 입부터 들이밀었다. 

현장에 창열이가 도착했고, 그 후에 봉주가 도착했다. 

경훈의 행동을 보고 있던 창열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창열

 “인마, 니 지금 뭐하노?”

어린경훈

 “빙시야, 넌 인공호흡도 모르나? 내가 민주 잘 보고 있으라켔지? 닌 민주 잘못되면 내한테 죽을끼다. 알았나?” 

아무리 산골 소년이라고 해도 인공호흡을 제대로 배웠을 리가 만무했다. 

이제 고작 13살, 12살인 아이들이다. 

그저 TV에서 본대로.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흉내를 내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분명 효과는 있었다. 

경훈이 입으로 숨을 몇 번 불어넣어 주자 민주가 사레 걸리는 소리를 내며 머금고 있던 물을 토해냈다.

컥. 컥.

봉주

 “하이고마. 이제 살았네. 이제야 살았어.”

그걸 보고 봉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창열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경훈이가 그 모습을 보고 쌍심지를 켰다.

어린경훈

 “왜 우노. 이 빙시 같은 게. 민주 잘못됐으면 우짤 뻔 했노. 닌 진짜 내한테 죽을 뻔했다.”

창열

 “엉엉…. 내도 놀랐다. 혹시나 민주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싶어 가꼬…. 민주는 이제…. 괜찮은 기가?”

어린경훈

 “내도 잘 모른다. 우선 숨은 쉬고 있는 거 같은데….”

창열이의 울음은 봉주에게도 전염됐다. 

봉주는 아예 목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을 보자 경훈도 눈물이 왈칵 솟았다. 

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경훈이 입술을 깨물고 둘을 질책했다.

어린경훈

 “빙시들아 그만 울고 우선 119에 신고부터 하자. 봉주니 니네 집에 가장 가까우니까 후딱 집에 가서 119에 신고하고, 경철이랑 내는 민주를 민주네 집까지 옮기자. 알았나!?”

창열

 “으…. 으응.”

봉주

 “으…. 으응.”

어린경훈

 “뭐하노? 퍼뜩 움직이라! 퍼뜩!”

[따뜻하고, 보드라운 입술.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누구를 저렇게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는 것일까? 

그 형체는 흐릿하고, 불 정확했지만, 소년이 느끼고 있는 감정만큼은 선명했다. 

간절하고, 절박하여 가슴이 아려왔다. 누구였을까? 

그 소년은 누구를 저렇게 애타게 부르는 걸까?]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된 민주는 다행히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에서 하루 동안 심신을 가다듬고 서울로 곧장 상경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세 사람과의 인연은. 

그리고 18년이 지난 지금.

***

카메라와 조명이 가득 메운 스튜디오 안. 

그 속 한가운데에는 늘씬한 원피스 차림의 모델이 도도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다. 

찰칵. 찰칵. 찰칵.

스튜디오 안에는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연신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촬영감독

 “김민주 씨. 이쪽 한번 바라봐 주세요.”

그녀의 시선과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가 따라다니며 그녀를 찍기에 급급했다. 

16년 신상 s/s 컬렉션 모델로 발탁된 그녀는 화보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A그룹에서 런칭하는 신상 컬렉션 화보 잡지로 소위 잘나간다는 여배우들은 모두가 탐내는 촬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정보다 촬영시간도 길고, 스텝들의 요구사항도 많았다.

촬영시간이 길어질수록 민주의 주름도 깊어졌다. 

그놈의 미소를 지으라는 소리만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았다. 

하도 웃었더니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다. 

도무지 촬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 매니저가 황급히 휴식시간을 요구했다.

촬영감독

 “좋아요. 조금만 쉬었다가 합시다.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 간단히 요기 거리를 하고 30분 후에 다시 봅시다.”

카메라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매니저와 코디가 황급히 민주에게 붙으며 그녀를 대기실로 끌고 들어왔다.

***

쾅.

민주가 거칠게 의자에 앉으며 힐을 벗어 던졌다.

민주

 “아, 씨. 다리아파. 이걸 만든 놈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렇게 높은 걸 신고 어떻게 걸어 다녀? 뭐? 컨셉이 파리의 연인? 파리가 얼마나 큰 땅인데 이런 걸 신고 돌아다녀? 10분도 못 걷고, 발목 나가 뒈지겠네.”

정수

 “하하하…. 누나. 참으세요.”

매니저는 행여 누가 볼까 봐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 대기실 안에는 코디네이터와 민주. 자신뿐이었다.

매니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민주는 전혀 그만둘 마음이 없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화를 온종일 터트릴 기세였다.

민주

 “네가 힐을 신어봤어? 이거 15cm짜리 굽이라고. 네가 온종일 이걸 신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 그러고도 참으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코디네이터도 심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연

 “암요. 남자들은 절대 이해 못 할걸요?”

정수

 “에이, 다른 여자들은 잘만 신고 다니던데요. 뭘.”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뻔했다.

무식이 화를 불러 왔다.

민주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주

 “뭐, 뭐!? 야, 채연아. 분장실 가서 안 신는 하이힐 하나만 가지고 와라. 제일 큰 사이즈로다가.”

채연

 “네? 그건 어디다가 쓰게요?”

민주

 “어디다 쓰긴. 쟤 신기려고 그러는 거지.”

민주가 자세를 고쳐 앉고, 매니저를 쳐다봤다.

민주

 “야, 너. 지금부터 내 말 똑바로 들어. 오늘 온종일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거야. 만약 벗거나 발 아프다고 징징 되면 넌 그날로 사망했다고 복창하는 거야. 내 말 알아들었어!?”

이쯤 되면 장난인지 진담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민주의 표정을 보니 진담 같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민주

 “뭐해? 어서 안 가지고 오고?”

채연

 “언니. 진짜 가지고 와요?”

민주

 “이것들이 요즘 군기가 빠졌나. 같은 말 두 번씩 하게 만드네. 아, 그리고 이채연 너!”

채연

 “네?”

민주

 “너 누가 이딴 옷 픽업해오랬어? 내가 스커트나 치마 같은 거 가지고 올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불똥은 삽시간에 전염됐다. 

산불이라도 낼 기세였다.

민주가 아직도 들고 있던 하이힐을 거꾸로 들며 코디네이터에게 들이밀었다. 

민주

 “콱, 씨! 빨리 말 안 해!?”

코디네이터가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채연

 “위로 15㎝요…?”

민주

 “그래!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 허벅지가 두꺼워서 15㎝ 위로 올라간 건 안 입는다고. 그런데 이거 지금 몇 센치야? 한 20㎝는 돼 보이지 않아?”

채연

 “제가 재봤는데요…. 16㎝ 정도 될 거 같아서…. 가지고 왔는데요.”

민주

 “이게 16㎝ 정도라고? 지금 나랑 장난해? 나 지금 옷 말려서 팬티 다 보이는 거 같지 않아? 이게 어딜 봐서 16㎝야. 이게 어디서 구라를!”

채연

 “언니. 그래도 이게 메인 옷이라고 해서 제가 가지고 온 거예요. 원래는 채윤희 쪽에서 가지고 가려던 거 제가 겨우 빼내 온 거라니까요.”

민주

 “뭐? 채윤희 쪽에서?”

열을 올리던 민주가 멈칫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반응에 옳다구나 싶어 코디가 말을 이었다.

채연

 “네. 저도 언니가 짧은 치마 싫어하는 거 아는데요. 메인 옷을 다른 쪽에 뺏길 수는 없잖아요. 언니 쪽에서 안 입으면 그쪽에서 이 옷 입는다고 해서….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채윤희 씨가 이런 원피스가 가당키나 해요? 컨셉이 파리의 연인인데 채윤희 씨는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이 옷은 언니한테 되게 잘 어울려요. 이 옷 언니한테 딱 이예요. 딱.”

채연이 말한 어떤 부분에서 약발이 먹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민주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민주

 “뭐, 하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세계가 선정한 올해의 연인 35위인 내가 아니면 이런 옷을 누가 소화하겠어? 채윤희? 걘 이런 옷 절대 못 입지.”

정수

 “저기, 누나. 53위요. 53위. 35위가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눈치 없는 매니저가 민주의 말을 정정해줬다.

민주가 다시금 눈을 부라렸다.

민주

 “그거나 그거나! 그리고 너 자꾸 내 말 끼어든다? 야, 아직도 하이힐 안 가지고 왔어? 빨리 안 가지고 와?”

저 눈치로 어떻게 천하의 김민주 매니저를 5년씩이나 하고 있나 싶다. 

코디네이터가 한심한 눈으로 매니저를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채연

 “언니. 지금 제가 본 것 중 최고로 예쁘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아이고, 우리 예쁜 언니 화장도 좀 다시 고치고. 아! 발 아프니까 잠깐 슬리퍼 신고 계세요. 제가 얼음찜질이라도 해드릴 테니까….”

코디네이터가 말꼬리를 흐리며 매니저를 쳐다봤다. 

뭔가 눈빛을 보내는 거 같기는 한데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걸 보고 있던 민주가 혀를 찼다.

민주

 “쯧쯧, 저런 눈치 없는 놈을 내가 5년씩 데리고 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 봤더니 저놈이 아니라 나한테 문제가 있었네. 이 바닥에선 눈치가 생명인데 저놈의 눈치는 도통 생겨날 줄을 몰라. 지금 채연이가 너한테 얼음 가지고 오라는 소리잖아. 후딱 가서 얼음 가지고 와.”

정수

 “그러면 하이힐은…?”

민주

 “하이힐 신고 얼음 가지고 올래? 빨리 안 나가!?”

그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매니저가 얼른 대답했다.

정수

 “네! 누나! 금방 다녀올게요!”

매니저가 나가는 것을 보고 민주가 다시금 혀를 내찼다.

민주

 “어이구, 저 화상. 쟤는 눈치를 붕어빵 삶아 먹었다니? 어떻게 내 밑에서 5년씩이나 있었으면서 너보다도 못하니? 혹시나 쟤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일찌감치 접어라. 내가 보기엔 쟨 솔로가 딱이야. 저놈은 여자 만나면 안 돼.”

코디네이터 뜻밖에 얼굴이 확 붉어지면서 손사래를 쳤다.

채연

 “언니는 제가…. 무슨….”

민주

 “아무튼 빨리 촬영이나 끝났으면 좋겠네. 나 20분만 눈 붙일 테니까 깨우지 마. 밥도 안 먹어. 하아, 피곤해 죽겠다.”

말이 끝나기가 민주는 곯아떨어졌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떻게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 수 있을까? 

어쩌면 고단한 생활의 연속인 연예인 생활에서 저것도 일종의 살아가기 위한 방도인지도 몰랐다. 

그 사이 얼음을 구해온 매니저가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정수

 “누나, 얼음 구해왔…….”

그대로 두면 민주를 깨울 기세라 채연이 매니저를 만류했다.

채연

 “쉿! 언니 잠들었어요.”

정수

 “어? 그러면 이건 어떻게 해?”

채연

 “뭘 어떻게 해요? 들고나와요. 괜히 옆에서 부산거리다가 혼나지 말고.”


츤데렐라3화 - 톱스타의 일상(2)

3. 톱스타의 일상 (2)

촬영은 3시간이나 더 이어진 후 밤늦게서야 끝이 났다.

겨우 스케줄을 마친 민주가 맥이 풀린 모습으로 벤에 올랐다.

민주

 “아하. 피곤해 죽겠다. 정수야. 뭐 먹을 거 없니?”

정수

 “먹을 거요?”

민주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그 망할 화보촬영 때문에. 아, 이런 날은 우동에 시원한 쐬주 한잔이 딱인데.”

그대로 놔두면 포장마차라도 업어올 기세라 황급히 채연이 만류했다.

채연

 “안돼요. 언니! 아침에 촬영 있으시잖아요. 언니는 저녁에 면 먹으면 얼굴 부어서 안 돼요.”

민주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민주

 “하아, 그러게 말이다. 내 신세가 어떻게 우동 한 그릇도 마음대로 못 먹는 신세가 돼버렸을까? 뭔 부귀영화를 얻겠다고 이 짓이라니? 우동도 못 먹고.”

운전하고 있던 정수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정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으면 되죠. 포장마차 앞에서 차 세울까요?”

채연이 고개를 홱 돌려 정수를 째려봤다.

채연

 “오빠!!!” 

정수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데? 내가 뭐 잘못했어?”

민주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민주

 “냅둬라. 쟤는. 저것도 병이야 병. 왜 보험 같은 거 들면 8대 질병 같은 거 보장해주잖아. 저런 거는 포함을 왜 안 시켜주나 몰라? 내가 보기엔 암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데 말이야.”

채연이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가방에서 칼로리 바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채연

 “언니, 우선 이거라도 드세요. 가다가 편의점 보이면 샌드위치라도 사올게요.”

민주

 “그래, 일단 이거 먹고 살자. 기운이 나야 저 자식을 죽이든 살리든 할 테니까.”

찌익.

오물오물.

민주는 칼로리 바를 몇 번 베어 물더니 절반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먹다 잠들까 싶다.

손에 들고 있던 칼로리 바가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채연은 괜히 콧잔등이 시큼해졌다. 

조용히 옆자리에 있는 담요를 들고 와 민주의 몸 위에 덮어줬다.

채연

 “아, 언니 불쌍해. 벌써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진짜 대표님도 해도 너무하셔.”

정수

 “그러게 말이야. 진짜 이건 노예계약이지. 노예계약. 요즘 저렇게 일하는 배우가 어디 있다고.”

둘이 찰떡 호흡을 맞추며 기획사 대표를 뒷담화하는 동안 민주는 오랜만에 반가운 꿈을 꾸고 있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입술.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빛. 

잊을만하면 한 번씩 꿈에 나타나는 장면]

언제부터 이런 장면들이 꿈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씩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민주는 깨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꿈속에서 느껴지는 그 애틋함과 간절함이 민주의 감각을 한참이나 붙잡아두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지만, 왠지 그 느낌이 좋았다.

민주

 “츠으읍.”

입가로 흐르는 차가운 느낌에 민주는 잠에서 깼다. 

무의식중에 닦아 내린 손등에는 침이 흥건했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창밖을 확인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민주

 “어, 뭐…. 뭐야? 다 왔어?”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민주는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벤 뒷좌석에는 채연이 잠들어 있었고, 정수는 운전석에 앉아 스마트폰 게임에 한창이었다. 

인기척 소리에 정수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수

 “누나, 깼어요?”

민주

 “언제 왔어? 왔으면 깨우지.”

정수

 “하도 곤히 주무시길래 못 깨웠어요. 뭐 좋은 꿈 꾸셨어요? 자면서도 막 웃으시던데.”

그 말을 들은 민주는 오히려 자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주

 “내가 그랬어?”

정수

 “네. 침도 막 흘리시고. 혹시 남자 꿈꾸셨나? 입술도 막 내미는 것이 키스하고 그러시는 것 같던데.”

민주

 “키, 키스!?”

당혹함에 민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주

 “어머 어머, 얘, 얘가 미쳤나!? 나, 김민주야. 김민주. 세계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여인 19위. 연인으로 삼고 싶은 여인 53위 몰라?”

정수

 “누나는 뭐 여자 아닌가? 남자 꿈꾸는 게 뭐 어떻다고. 그리고 누나 사실 연애 한 번도 못해봤잖아요.”

민주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민주

 “허, 허…! 얘, 얘 좀 봐라? 내가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봤다고?”

정수

 “네.”

민주

 “레알. 진심으로 네라고 대답한 거니? 지금?”

정수

 “내가 누나를 몰라요? 내가 누나랑 일한 지 벌써 5년이나 됐는데 남자 제대로 만난 거 한 번도 못 봤거든요? 누나 모쏠 아니셨어요?”

이쯤 되면 기막히지도 않다. 

되려 웃음이 나왔다.

민주

 “뭐, 모쏠? 얘는 내가 낸 스캔들이 몇 갠 데. 너, 나를 그렇게 몰라?”

정수

 “피….”

민주

 “저, 저. 쌍눔의 시키를 그냥!”

계속해서 깐족거리는 정수를 보고 민주는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핸드백으로 때릴까? 주먹으로 때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채연이 소란스러움에 잠에서 깨어났다. 

채연

 “아함, 언니. 집에 들어가실 거죠?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등 떠미는 듯한 채연의 태도에 민주가 못 이기는 척 내리며 정수에게 경고했다.

민주

 “어휴, 이걸 확 그냥! 너 채연이 때문에 오늘 산 줄 알아. 나 김민주야. 김민주. 그런 내가 뭐 어떻고 어때? 하!!!!”

코웃음을 치며 차에서 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얼마나 몰골이 웃겼을지는 말 안 해도 알았다. 

그나마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민주

 “아이씨, 이놈의 차는 왜 이렇게 높아서 난리야?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차 준 거 아니야?”

쾅! 쾅!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최고급 벤 승용차를 박살이라도 낼 기세였다. 

민주는 옆문을 두 번이나 걷어차며 신경질을 토해냈다. 

차 상태를 확인하러 나와 보려는 정수를 채연이가 급히 손짓으로 말리고 들어가라는 시늉을 취했다.

저놈의 눈치는….

끝까지 말썽이다.

채연

 “언니, 배고프시죠? 어서 들어가세요. 제가 언니 좋아하는 김치볶음밥 해드릴 테니까.”

민주

 “그거 먹고 내일 촬영 어떻게 하라고?”

채연

 “헤헤, 제가 얼굴 안 붓는 약도 처방받아왔어요. 짠, 여기! 한의원에서 직접 만든 건데 이거 먹고 자면 다음 날 붓기 싹 빠진대요.”

아닌 게 아니라 채연의 왼손에는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한의원 봉지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민주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주

 “진짜? 이거 먹고 자면 얼굴 붓기 쫙 빠진대?”

채연

 “그럼요. 유명한 연예인들도 이 한의원에서 많이들 처방받아간대요.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세요. 얼른 먹고 주무셔야 내일 또 힘내서 촬영하시죠.”

민주

 “그러면 라면도 한 젓가락 먹을까? 어차피 붓기 싹 빠진다며?”

민주가 보기 드문 생기 가득한 얼굴로 채연을 채근했다. 

채연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민주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채연

 “좋아요. 대신 딱 한입만이에요. 딱 한입!”

민주

 “캬아. 좋아. 빨리 들어가자. 거기다가 소주도 한잔하자. 으, 생각만 해도 좋네.”

*

다음 날. 

최이사

 “아이구, 감독님 너무 죄송해요. 우리 민주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급히 병원에 왔는데, 몸살이랑 스트레스가 심해서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하네요. 아, 아니에요. 촬영을 못 가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한 3시간 정도 늦을 것 같아서요. 병원에서는 입원하라고 난린데 우리 민주가 또 프로페셔널 하잖아요. 굳이 입원하라는 걸 마다하고 링거만 맞고 바로 현장으로 가겠다고 난리네요. 아, 네. 네. 네…. 아이고,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러면 조금 이따가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독님.”

달칵.

전화를 끊은 최이사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상사태란 말에 부랴부랴 왔더니 민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볼은 호빵 같이 부풀어 있었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질 않았다.

최이사

 “민주야. 너 얼굴이…. 잠자는 사이 폭탄 맞았니?”

휙.

질책 담긴 화살은 민주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던 채연에게로 돌아갔다.

민주

 “채연이 너…. 약 먹고 자면 붓기 싹 빠진다며? 그런데 지금 내 얼굴이 왜 이래?”

옆에서 듣고 있던 최이사도 거들었다.

최이사

 “그래, 민주 얘 얼굴이 왜 이러니? 나도 한 번 들어나 보자.”

눈만 껌뻑 껌뻑거리던 채연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떼었다.

채연

 “그게 저어…. 언니가 라면 하나 다 드시고. 국물까지 다 드셨어요. 소주엔 라면 국물이 끝내준다면서….”

최이사

 “뭐야!? 민주 너어, 그게 사실이야?”

화살은 다시 민주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민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과연 톱스타였다.

뻔뻔함도 탑 수준이었다.

민주

 “아니, 뭐…. 내가 이럴 줄 알았나? 내가 원래 약발이 잘 받는 체질이라 약 먹으면 괜찮을 줄 알았지. 아, 몰라 몰라! 빨리 얼음이나 가져다줘. 빨리 붓기 빼야 하니까.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불가마에 가서 몸이나 지져 볼까? 붓기 빼는 데는 불가마가 짱인데.”

아이구 두야... 

최이사가 이마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최이사

 “민주야. 제발…. 우리 제발 쫌…! 오늘 촬영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지? 무려 첫 촬영이라고 첫 촬영! 세상에 첫 촬영에 지각하는 배우가 어딨니!!! 응?”

민주

 “잘 알죠. 그러니까 이러고 있지!”

최이사

 “시간 없으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 해. 곧 출근 시간이라서 차 엄청 막힌다고.”

민주

 “알았어요. 그런데 이사님도 같이 가시게요?”

최이사

 “그럼 이 사단이 났는데 내가 같이 안 가고 배겨? 빨리 준비해. 서둘러서 가게. 채연이 너는 아이스박스에다가 얼음팩 좀 챙기고. 자자, 빨리빨리!!!”

***

촬영지는 인천 월곶 포구. 출근길이 겹쳐서 한참을 달린 끝에 겨우 도착했다. 

원래 촬영 시작시각은 아침 8시.

민주가 타고 있는 벤은 거의 12시가 다 돼서야 촬영장에 들어섰다.

차 안에서 촬영장 분위기를 살펴보던 최 이사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최이사

 “아이씨. 저 양반들은 오늘 왜 나왔대? 오늘은 안 나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채연

 “어머, 언니! 큰일 났어요! 최기웅이랑 김복란 선배님 나오셨는데요?”

채연이도 창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출연자들을 체크했다. 

그 말에 놀란 것은 민주도 마찬가지였다.

민주

 “진짜?”

그 둘은 자신이 찍고 있는 작품 출연자 중 가장 고참 연기자였다. 

민주의 어머니 아버지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리딩 연습 때 빼곤 민주도 현장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민주도 창문에 얼굴을 대며 밖 동태를 살폈다.

민주

 “뭐야. 진짜네. 대본 보니까 오늘 촬영분도 없던데. 분위기 보러 나오신 건가?”

채연

 “언니. 이제 어떡해요. 저분들 지각하는 거 정말 싫어하신다고 소문났는데.”

민주

 “어쩔 도리가 있나. 난 죽었다 하고 기어가야지. 나 얼굴은 어때? 좀 아파 보여?”

멀쩡해 보여도 너무 멀쩡해 보이는 게 탈이다. 

차마 그 말은 입밖에 끄집어낼 수 없었다.


츤데렐라4화 - 톱스타의 일상 (3)

4. 톱스타의 일상 (3)

드르륵.

문을 열고 민주가 차에서 내렸다. 

덩달아 최이사도 내렸다. 

최이사는 곧장 감독에게 달려가고, 민주는 최기웅이랑 김복란 선배에게 다가갔다. 

민주를 보고 먼저 두 사람이 아는 체를 해왔다.

김복란

 “왔어?”

최기웅

 “왔어?”

민주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몸이 아파 쓰러지는 바람에…. 링겔 좀 맞고 오느라 늦었어요.”

최기웅과 김복란은 연기바닥에서만 4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연기자다. 

연예계는 인기 높은 게 최고라곤 하지만 둘의 존재감은 여느 탑배우라고해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어마 무시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이런저런 경험도 많았다.

내공도 만만치 않았다.

김복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히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복란

 “그래, 알았어. 그런데 너 어제 소주에 라면 먹고 잤니?”

민주

 “네?”

김복란

 “얼굴이 아직도 부어있다. 술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민주

 “헙.”

정곡이 찔렸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민주

 “아니에요. 제가 무슨.”

김복란

 “아니라면 아닌 거지. 알았다.”

눈치는 챘지만 별다른 추궁은 하지 않는다. 

이 또한 탑배우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그들만의 방법이다. 

이곳이 원래 이런 곳이다. 

인기가 있으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

민주

 “그런데 오늘 촬영 없으시지 않아요? 이곳엔 왜 오신 거예요?”

김복란

 “그냥 마실 삼아 나왔지. 집에 있으니 심심하기도 하고. 어떤 분위기로 촬영되나 구경도 할 겸.”

민주

 “아, 네. 그러시구나. 그러면 저는 준비하러 가볼게요.”

김복란

 “어, 그래.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역할이나 잘해. 어디 연기 많이 늘었나, 한번 보자.”

민주

 “제 연기는 두 분 선배님에 비하면 지족지혈이죠.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엄마, 아빠.”

민주가 깜찍하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점차 멀어지는 민주를 보고 최기응은 웃음을 끝내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말았다. 

새침한 척 뒤돌아서는 민주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김복란이 슬며시 눈을 흘겼다.

김복란

 “얘, 민망하게.”

최기웅

 “하도 웃겨서요. 큭큭큭. 귀엽군요. 이번 우리 딸은.”

김복란

 “어이구, 귀엽기는요. 무식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지족지혈이 뭡니까. 지족지혈이.”

최기웅

 “왜요. 귀엽잖아요. 나는 마음에 드는데요?”

김복란

 “에휴, 퍽이나요.”

최기웅

 “왜? 난 저 친구 좋던데? 요새 애들은 너무 깍쟁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정이 잘 안 가요. 그런데 민주 저 친구는 뭘 해도 얼굴에 다 티가 나는군요. 난 저런 친구들이 좋아요. 음흉한 것보단 낫잖아요?”

김복란

 “하긴, 그건 그렇지만. 저놈의 발연기가 조금은 나아졌는지 원.”

최기웅

 “나도 그게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뭐, 예전보다는 나아졌겠죠. 연기는 할수록 늘어나는 법이니까.”

***

민주

 “싱.싱.한.해.산.물.이.있.어.요. 싸요. 싸. 아주. 싸요.”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던 촬영감독도, 스텝들도. 그리고 모든 연기자들이 김민주 연기에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특히나 카메라 감독은 주인공만 아니라면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명색이 직업이 탤런트라는 인간에게서 저런 연기가 나올 수가 있는 거지?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촬영감독

 “컷컷컷!!!!”

지금이라도 촬영 접고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캐스팅은 끝났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대로 끝까지 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촬영감독

 “민주 씨. 긴장했나 봐요? 잠깐 긴장 좀 풀고 할까요?”

민주

 “예? 감독님. 저 긴장 하나도 안 했는데요?”

촬영감독

 “아, 그러면 제가 긴장했나 봅니다. 잠깐 담배 좀…. 피고 오겠습니다. 5분만 쉬겠습니다.”

촬영감독이 울분을 삭이려면 3개는 피워야겠다고 다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걸 보고 있던 최이사가 다급히 민주에게 붙었다.

최이사

 “민주! 평소에는 잘하더니 오늘은 왜 그래?”

민주

 “제가 뭘요?”

최이사

 “연기가 어색하잖아!”

민주

 “응? 난 평소대로 한 건데. 많이 이상했나요?”

최이사

 “아니, 많이까지는 아니고 조금? 자자, 그러지 말고. 감정을 조금 더 이입시켜보자고. 부모님 둘 다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 뒷바라지해야 한다고 가정해보란 말이야. 그런데 집에 쌀이 떨어졌어. 동생 준비물도 사줘야 하는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해삼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상상해봐. 절박한 표정으로. 감정을 대입해서. 뭐라도 팔기 위해 노력하는 장사꾼이 되는 거지.”

*

기어코 담배를 3개비 피고 온 감독이 다시금 메가폰을 잡았다. 

촬영감독

“자, 다시 갑니다. 민주 씨 준비됐어요?”

민주

 “예. 감독님.”

촬영감독

 “좋아요. 다시 잘해봅시다. 액션!”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주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민주

 “해산물 팔아요. 싸게 팔아요. 조금 전에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삼, 전복, 소라도 있어요. 언니! 거기 지나가는 언니! 여기 물건 다 싱싱해요. 해삼 다섯 마리 사가면 소라 하나 서비스 줄게요. 아저씨! 아니 오빠! 그러지 말고 물건 좀 보고 가세요!”

조금 전의 민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카메라 앵글 안에는 민주라는 사람은 없고, 하루하루 잡은 해산물을 팔아 연명하는 작품 속의 주인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민주의 변화에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은 침묵했다.

심지어 카메라감독마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주의 연기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비아냥이 아닌 감탄 소리가 흘러나왔다.

촬영감독

 “컷! 우와 좋았어. 민주 씨. 연기가 엄청 많이 늘었는데?”

언제 이런 칭찬을 들어봤을까?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든 감독에게 민주가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민주

 “다, 감독님과 동료 배우분들 덕분입니다. 더 성장해나가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촬영은 민주의 선전으로 무탈 없이 끝이 났다. 

모두들 수고했다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민주 역시 돌아가는 밴에 몸을 실었다. 

왜일까? 

첫 촬영치고는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량 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민주는 촬영이 끝나면서부터 굳은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라 모두들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이런 적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히 벌집 건드려 쏘이는 것보단 조금 불편한 채로 있는 편이 나았다.

정수는 묵묵히 운전만 했고, 채연은 뒷좌석 구석에 처박혀서 창밖만 쳐다봤다. 

민주와 가장 근접한 곳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최이사만이 민주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결국 그 불편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최이사

 “민주, 오늘 수고 많았어. 연기 좋더라. 그런데 기분이 어찌 좋아 보이지 않네? 피곤해서 그래?”

사람이 물었음에도 들려오는 대꾸가 없다.

대신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시선만이 돌아왔다. 

얼마나 눈빛이 날카롭게 잘 벼려있던지 당장 살인자 역으로 캐스팅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뭘까. 

이 분위기는.

한참 동안 매서운 눈빛으로 최이사를 쏘아보던 민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변화 없는 표정만큼이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있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곱지 않았다.

민주

 “이사님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부모님이랑 동생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최이사

 “응?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민주

 “아까 사람 많은 곳에서 부모님이 어쨌네! 동생 준비물이 어쨌네 해삼이 어쨌네 했잖아요!”

최이사

 “아, 그거? 그거는 민주 연기하는 데 도움되라고 조언 차원에서…. 한 말인데. 그게 기분 나빴어?”

민주

 “이. 사. 님.”

쿠션 위에 반쯤 몸을 기대고 있던 민주가 상체를 세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민주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가족 이야기는 되도록 제 앞에서 하지 말아 달라고.”

최이사

 “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민주 씨 피곤해서 너무 예민해진 거 아니야?”

최이사는 평소에 잘하지도 않는 존칭까지 써가며 식은땀을 흘렸다. 

화를 내던가 신경질을 부리면 차라리 그게 낫겠는데, 정색하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민주는 잘 벼려진 칼날 같아서 당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땐 정말이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민주

 “어디 제가 제 입으로 얘기해볼까요? 2013년 3월경. 강촌에서 가족드라마 촬영하던 날 이사님이 휠체어 타고 있는 남자아이 보면서 그러셨죠. 차라리 제 동생을 섭외해서 오면 디테일이 더 살 거라고. 실제로 제 동생 섭외하려고까지 하셨죠? 그리고 같은 해 드라마 종영하면서 10월경에 다큐멘터리 찍자고 하셨죠? 이슈거리 만들어서 이미지 메이킹하자고. 2014년 5월경에 저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잡지에 인터뷰 기사 내셨더라고요? 저희 부모님 이야기도 함께. 어디 계속해볼까요? 2015년도에 매거진 잡지에 자료 돌리셨죠? 기자까지 불러서 직접 병실 사진까지 찍게 하고. 그리고 또….”

이대로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아서 최이사가 말을 끊었다.

최이사

 “미…. 미안해. 민주 씨. 난 다 민주 씨 잘되라는 차원에서….”

민주

 “그게 어디 저 잘되라고 하는 일인가요? 다 회사 잘되라고 하는 일이지?”

최이사

 “알았어. 진정하고. 이제부터는 다신 가족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게. 그러면 됐지?”

최이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무릎을 꿇진 않았지만 사과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민주는 옆에 꺼내놓은 선글라스는 쓰고 다시 쿠션에 몸을 기댔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이런 식으로 화를 터트려봤자 자신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최이사가 그렇게 싹싹 빌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안다. 

하지만 민주는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기분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고 원동력이 가족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이루고자 14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연예계 바닥에 뛰어들었다. 

자신에게 가족을 빼고 나면 연예계에서 버틴 14년이란 세월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인기를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러한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충분히 힘들고, 지쳤다. 

이제는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연예인으로서가 아닌 인간 김민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날이 오겠지. 

언젠간 오겠지. 

꼭 오겠지. 

그렇게 자조한 것이 벌써 10년이 넘었다. 

연예인을 그만두고, 인간 김민주로서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 그 날. 

그 옆에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줄 가족들이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지금 민주가 꿈꾸는 유일한 소원이고,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민주

 “좋아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만약에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저도 참지만은 않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일단 화를 내면 불같지만 뒤끝이 없는 게 민주의 장점이다. 

최이사는 됐다 싶은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고마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이사

 “알았어. 내 다시는 안 그럴게.”

간신히 숨 쉴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정수가 이때다 싶어서 말을 걸었다.

정수

 “누나, 근데 어디로 모실까요?”

민주

 “집으로 가자. 내일 스케줄도 없는데 하루 푹 쉬어야겠다.”

정수

 “집이라면 일산 집 말씀하시는 거죠?”

민주

 “어, 그래.”

정수

 “알겠습니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츤데렐라5화 - 꼴불견 남자

 

5. 꼴불견 남자

1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일산에 위치한 고층아파트.

이곳은 민주가 5년 전 이사한 곳이다. 

13살이 되던 해 가족 모두가 타고 있던 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뇌사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했다. 

하나뿐인 어린 남동생은 그 후유증으로 하반신 불구로 평생동안 휠체어 신세로 지내야 했다. 

돈을 버느라 바빠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남동생이 못내 마음에 걸려 지내기 편하라고 얻은 전셋집이다. 

혹시나 생활에 불편할까 봐 주5일 방문하는 도우미 아줌마도 고용했다.

민주에게는 회사에서 얻어준 오피스텔이 여의도에 있었지만, 민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산에 있는 집에서 동생과 시간을 같이 보냈다. 

***

1303호.

비밀번호를 누르자 개폐장치가 열렸다.

짤막한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민주가 신발을 벗어 던지며 들어왔다.

민주

 “김승훈! 누나 왔다.”

불러도 대답 없자 민주는 거실, 부엌, 방 순으로 승훈을 찾았다.

평소와는 달리 거실이 너저분했다. 부엌 싱크대에도 설거지가 넘쳐났다.

민주

 “뭐지? 도우미 아줌마가 안 치웠나? 야, 김승훈! 방에 있냐?”

이 집에서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있는 방주인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게임 폐인의 모습이었다.

빵빠라빠라빠라빠라빵빵빵!!! 

승리!!!

민주는 보자마자 폐인 자식의 뒤통수부터 후려갈겼다.

퍽.

민주

 “승리는 무슨 개뿔. 누나 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하냐?”

승훈이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문질렀다.

승훈

 “아씨…! 왔다고 얘기나 좀 해주던가. 벨을 누르던가!”

민주

 “내가 내 집에 오는데 벨을 왜 눌러? 너는 너 방 들어갈 때 노크하고 들어가니?”

승훈

 “그건, 아니지만….”

민주

 “근데 집 꼴이 왜 이래? 오늘 아줌마 오는 날 아니야?”

승훈

 “아줌마 휴가 갔어. 아마 다음 주 월요일에나 오실걸?”

승훈이 게임을 하는 책상 옆에는 빈 컵라면 용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 

굴러다니는 음료수 캔. 

거지소굴이 따로 없었다.

민주

 “크으, 냄새. 도대체 컵라면을 얼마나 처먹은 거야. 너 이러다가 영양실조 걸려. 밥 먹으라고 밥. 라면만 먹으면 질리지도 않니?”

승훈

 “어, 질리면 이것저것 바꿔먹으면 돼. 라면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민주

 “참으로 똑똑한 천재님 나셨습니다. 예, 예, 예….”

쉬겠다고 집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민주를 기다렸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을 치우고,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마지막엔 승훈의 방을 치웠다. 

계속되는 무더위에 쓰레기들을 얼마나 방치해두었던지 벌써부터 쉰내가 나는 듯했다.

민주

 “어이구, 내 팔자야. 어찌 하루라도 마음 편히 쉬는 날이 없네.”

***

쓰레기봉투에 이것저것 잔뜩 쑤셔 넣은 민주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도우미 아줌마가 오려면 4일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쓰레기를 집안에다가 그대로 방치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쓰레기를 갖고 내려오기는 했지만 직접 쓰레기를 버려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다가 버리는지조차도 몰랐다.

밤늦은 시간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1층에서 멀뚱멀뚱 서 있다가 뭔가가 잔뜩 쌓여있는 곳을 발견했다.

민주

 “아, 저기구나!”

반색하며 걸어갔다. 

그곳에는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뭐지? 경비아저씬가? 사복을 입은 거 보니. 폐지 줍는 사람인가? 그러기엔 너무 젊은 것 같은데. 요즘 청년 실업이 장난 아니라던데 그렇게 취직이 힘드나?’

민주는 제 딴에는 친절을 베푼답시고, 젊은 청년을 불렀다.

민주

 “저기요. 아저씨. 여기 있어요. 그리고 힘내세요. 아직 나이도 젊으신 거 같은데….”

사내가 인기척 소리에 힐끔 돌아섰다.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 얽혔다.

예상보다도 훨씬 젊은 모습이었다. 

서른 전후나 되어 보일까? 

키도 크고,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저만하면 훌륭했다. 

스윽.

사내의 시선이 잠시 민주에게 머물더니 그녀가 가지고 온 쓰레기 봉지로 향했다.

어찌나 엉성하고 대충 묶었는지 살림살이를 어떻게 하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민주는 괜히 손이 부끄러워서 얼른 버리고 갈 작정이었다.

민주

 “그러면 전 이만…. 수고하세요.”

친절하게 수고하라는 인사까지 남겨두고 돌아서려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민주의 발목을 잡았다.

경훈

 “저기요.”

멈칫.

아, 보나 마나 내 얼굴을 봤으니 사인해달라는 거겠지? 

집 앞이라고 너무 신경 쓰지 않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나마 선글라스라도 끼고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사진이라도 같이 찍어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같은 주민이라 사진 찍기를 거절하기도 조금 그렇다. 

악수나 한번 해주고 땡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민주

 “네?”

사내의 큼지막한 손은 어느새 민주가 들고 온 쓰레기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컵라면 용기, 음료수 캔, 물병, 과자, 쓰다만 걸레. 온갖 잡스러운 것들은 죄다 넣어온 것 같았다. 

민주

 “왜 그러시죠?”

경훈

 “분리수거라는 말 모르시나요?”

민주

 “분리…. 뭐요?”

경훈

 “분리수거. 지금 들고 오신 거 보니까 분리수거가 하나도 안 되어 있으시네요?”

민주

 “네?”

경훈

 “분. 리. 수. 거.”

사내는 바로 1m 옆에 걸려있는 커다란 푯말을 가리켰다. 푯말에는 커다랗게 분리수거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민주

 “아, 그냥 버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이거 쓰레기종량제 봉투인데요?”

경훈

 “캔은 캔끼리.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끼리. 음식물은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다시 분류해서 가지고 오세요.”

휙.

젊은 사내는 민주가 가지고 온 쓰레기더미를 그대로 민주에게 던지다시피 내밀었다. 엉겁결에 쓰레기를 떠안은 민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의 행동이 너무 무례하게 느껴졌다.

민주

 “저기, 이것 보세요. 아저씨. 어차피 쓰레기종량제 봉투에 다 담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남 이사 분리수거를 하든 말든 아저씨가 뭔데 참견이세요?”

경훈

 “이 아줌마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네. 종량제 봉투에 재활용, 음식물 등 혼합배출은 10만 원에서 30만 원 이하 벌금이라는 거 모르시나?”

민주

 “뭐, 뭐!? 아줌마!? 이봐요!!!”

민주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쌍심지를 키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민주

 “어딜 보고 아줌마래! 저 몰라요!?”

경훈

 “제가 알아야 합니까?”

민주

 “허, 참…. 나 김민주예요. 김민주. 내가 시집 안 간 처녀라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이 다 아는데 뭐, 아줌마!?”

경훈

 “제가 장가 안 간 총각이라는 사실은 이곳 동네주민들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댁이 먼저 저보고 아저씨라고 불렀잖아요?”

민주

 “뭐, 뭐라구요!?”

이쯤 되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자신이 먼저 아저씨라고 불렀으니 딱히 반박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보고 아줌마라니? 

국민 여배우라 불리는 자신의 얼굴은 길가는 초등학생들도 모두 알고 있다. TV만 보고 있어도 한 시간에 한 번꼴로 광고에서도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포스터, 잡지에서도 찾으려면 널리고 널린 게 자신 얼굴인데 이토록 모르쇠로 일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민주는 앞에 있는 사내가 아줌마라고 불렀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모르는 척한다는데 더 화가 났다.

민주

 “진짜 나 몰라요!?”

경훈

 “압니다. 김민주 씨. B동 1303호.”

민주

 “뭐야. 우리 집 주소까지 다 알고 있으면 모르는 척하기는….”

민주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길가는 꼬마들도 사인해달라고 달려드는 판국에 혈기 왕성한 총각이 자신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됐다. 

자신이 누구인가? 연인이 되고 싶은 51위….

민주

 “어머!?”

돌연 사내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번호라도 달라는 뜻인가 싶어 민주의 콧대가 높아졌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사내의 태도를 물었다.

민주

 “지금 번호 달라는 거예요?”

사내는 오른손으로 든 자신의 스마트폰 액정을 왼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훈

 “보이시죠? 1303호. 반상회 미참석 30회. 벌금 60만 원입니다.”

민주

 “뭐, 뭐예요?”

정말이었다. 

사내가 들이민 액정화면에는 사내가 말한 내용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민주

 “이게 뭔데요!? 반상회? 벌금?”

경훈

 “동네마다 반상회가 있다는 건 아시죠? 한번 불참 당 벌금 2만 원입니다. 2달에 한 번씩 진행되고, 5년 동안 한 번도 나오시지 않으셨으니. 총 30회. 벌금 60만 원 내시면 되겠습니다.”

민주

 “전 반상회를 한다는 소리 처음 듣는데요? 그리고 뭔 벌금이 그렇게 비싸요?”

경훈

 “모르는 건 그쪽 사정이고. 반상회는 주민들의 공동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 어딜 가든 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벌금 2만 원이 초기 반상회모임에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선정된 액수입니다. 미참석 주민은 다수의 공동의견에 따라야 하는 건 당연히 알고 계시죠?”

민주

 “그, 그거야 뭐.”

경훈

 “핸드폰 줘보세요.”

민주

 “네?”

경훈

 “핸드폰 줘 보시라구요.“

휙.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 민주의 핸드폰을 뺏다시피 하곤 자신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바로 끊어버리곤 민주에게 핸드폰을 되돌려줬다.

경훈

 “제 번호입니다. 이 번호로 계좌번호 적어서 문자 넣어드릴 테니까 그 계좌로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1303호 김민주 씨.”

민주

 “이봐요. 보자 보자 하니까! 그리고 뭔데 당신이 돈을 내라 마라 예요?”

경훈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저희 어머니가 김민주 씨가 살고 있는 B동 반장님이라는 거? 제가 하지 않으면 어머님이 하셔야 하거든요. 그럼 빠른 입금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마지막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는 모습이 뭔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대단히 불쾌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민주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

쾅.

씩씩거리며 문을 닫고 들어온 민주에게 승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승훈

 “왜 그래? 밖에서 뭔 일 있었어?”

민주

 “아, 쓰레기 버리고 나갔다가 개 또라이 만났어. 뭔 동네에 저런 미친놈이 다 산다니?”

띠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경훈

 -우리은행 xxx-xxxxxxxxxxx 서춘희.

설마 진짜 보낼 줄이야.

민주가 문자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민주

 “헹!!! 어림도 없지. 내가 순순히 줄줄 알고?”

바로 삭제버튼을 눌러 문자를 지워 버렸다.

돈이 아깝다기보다는 그 무례한 사내놈에게 굴복하는 게 싫을 뿐이었다.

승훈

 “뭔데 그래?”

민주

 “아니야. 넌 알 거 없어. 너 그보다도 아파트 단지 내에서 반상회 한다든가 뭐 그런 소리 들은 적 있어?”

승훈

 “반상회? 아, 예전에 몇 번 찾아온 거 같긴 하던데…. 잘 모르겠는데?”

민주

 “그럼 너 혹시 분리수거 해봤냐?”

승훈

 “분리수거? 그딴 건 왜 하는데? 그냥 버리면 되는 거 아냐? 근데 그건 왜? 아줌마가 다 해주시잖아?”

민주가 한숨을 쉬었다.

민주

 “됐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가서 게임이나 해라. 그놈의 승리를 하든지 패배를 하든지.”

승훈이 하반신을 잃고 빠진 것은 게임이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힘들어 친구도 없었고, 그나마 친구들이 생겨도 승훈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였다. 

그때 승훈을 지탱해준 것은 게임이었다.

민주가 보기에는 거의 중독수준에 가까웠다. 

하지만 딱히 말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저렇게 가상공간 속에서라도 뭔가를 해내는 데 열정적이고, 그것으로 인해 성취감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민주

 “야! 누나 피곤해서 잘 거니까 게임 한다고 밤새지 마.”

승훈

 “알았어. 내가 애야?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잠이나 자. 또 촬영장에서 졸다 사진 찍히지나 말고. 도대체 나이가 몇 갠 데 졸다가 침을 흘려?”

민주

 “뭐야!? 기사 봤어?”

승훈

 “내가 보고 싶어서 봤냐?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 나 참, 부끄럽지도 않나. 당장 회사에 전화 걸어서 기사 내려 달라고 해. 내가 다 쪽팔리니까.”

민주

 “저, 저눔의 시키는 오랜만에 누나를 보고 한다는 소리가. 확, 인터넷 선을 뽑아버릴라.”

다시 게임을 진행시키는 승훈에게는 이미 누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게 아무리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톱스타라 할지라도.

누나는….

그냥 누나인 거다.

그래서 민주는 그런 승훈이가 더욱 고마웠다.

유일하게 자신을 톱스타 김민주가 아닌.

인간 김민주로 보아주는 사람. 

자신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건 절대 안 본다는 승훈이었지만 민주는 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사나 영상화된 건 승훈이가 빠짐없이 다 챙겨본다는 거. 

대부분이 악플, 욕 달린 게 태반이라 그걸 봤다고 하면 자신이 속상해할까 봐 일부러 안 본 척한다는 것을.

귀여운 자식.

오랜만이었다. 

가슴속으로 따스함이 스며드는 이런 기분은. 

이런 게 바로 가족애라는 것이겠지?

민주

 “아, 역시 집이 좋다!”


츤데렐라6화 - 두 번째 만남.

6. 두 번째 만남.

다음 날 아침.

민주는 몰려오는 허기를 견디다 못해 이른 아침부터 눈이 떴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에도 딱히 먹은 게 없었다. 

밴에서 이동하면서 먹은 김밥 반 줄이 전부. 

주린 배를 움켜잡고 부엌으로 나와 선반 칸을 열었다. 

있어야 할 물건이 보이질 않았다.

민주

 “어!? 분명히 여기다 뒀는데? 어디 갔지? 내 밥! 내 밥 어디 갔어?”

혹시 다른 데다가 놔뒀나? 

이리저리 한참을 뒤적이고 있는데, 승훈이 부엌으로 나왔다.

승훈

 “뭐해? 뭐 찾아?”

민주

 “어, 여기 있던 내 시리얼 못 봤어?”

승훈

 “시리얼? 그거 없는데?”

민주

 “어디 갔어? 혹시 네가 먹었어?”

승훈

 “아, 그거? 토토 줬는데?”

민주

 “토…. 토? 걔는 또 누구…. 래니?”

승훈

 “강아지야 강아지. 토토라고. 내가 예전에 말 안 했나? 이 동네에 아주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 있다고.”

민주

 “허….”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승훈이 가끔 나가서 산책하는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주 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고. 그 강아지 주인이랑 친구 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민주

 “너, 설마…. 내 밥을 강아지한테 줬다는 거니 지금?”

승훈

 “저번에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왔는데, 줄 게 없더라고. 그래서 혹시 줘봤는데 잘 먹던데?”

민주

 “야 이…. 김승훈!!!!”

승훈

 “아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민주

 “너 하나밖에 없는 이 하늘 같은 누님의 아침밥을 고작 멍멍이 한 끼의 간식으로 갖다 바쳤다고 말하는 거냐? 내가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승훈

 “나는 누나가 하도 안 먹길래 버릴 건 줄 알았지.”

민주

 “그런다고 멍멍이를 줘?”

승훈

 “버리는 것보단 낫잖아!?”

민주

 “콱! 씨……. 그건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라고. 아침 한 끼 먹을 때마다 반 그릇. 그게 딱 내 정량이야. 촬영할 때 배 나온 거 보일까 봐 그 이상은 먹고 싶어도 못 먹어. 그런데…. 감히 니가 내 밥에 손을 대!?”

승훈

 “뭐 그리 유난이야? 그냥 밥 먹으면 되잖아. 밥. 아니면 라면을 먹던가.”

민주

 “저, 저 이놈의 시키가…!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냐? 누나 지금 다이어트 중인 거 몰라?”

휠체어에 앉아서 눈만 껌뻑거리는 승훈을 보고 있자니 때리고 싶어도 차마 기운이 나질 않는다. 

아니다. 배가 고파서인가? 

어쨌든 때릴 힘도 없다. 

상대하고 있자니 기운이 빠졌다.

민주

 “에휴, 내가 말을 말자. 근데 이런 아침부터 웬일이야? 아직 6시밖에 안 됐는데. 설마, 나랑 같이 놀아주려고 일찍 일어난 거야? 오랜만에 누나랑 산책하러 나갈까?”

승훈

 “웬 산책? 귀찮게. 나 밤새웠어. 이제 잘 거야. 아 졸려. 아아함...”

그래도 어렸을 때는 누나 말도 잘 듣고 제법 착한 애였는데, 어찌 커갈수록 컨트롤도 안되고 제멋대로만 하려고 든다. 

당연히 그에 비례해서 해대는 잔소리도 늘었다. 

민주

 “자알 하는 짓이다. 밤새 게임 질하느라 정신 빠져가지고 이제야 잠을 주무시겠다고?”

승훈

 “랭 게임 하느라 밤새웠단 말이야. 아무튼, 난 잔다.”

민주

 “랭 게임? 그게 뭔데? 새로 나온 게임이야?”

승훈

 “아, 그런 게 있어. 설명해도 누난 몰라.”

민주

 “저게, 이제 툭하면 누나를 무시하고 그러네. 너 롤인가 뭔가로 프로데뷔할 거라고 하더니 그새 또 딴 거 하는 거야? 스타 접고 롤 한다고 까불 때부터 알아봤어. 도대체 쟤는 누굴 닮아서 저렇게 끊기가 없는 줄 몰라.”

승훈

 “어휴, 이 무식아! 롤에서 랭커들이 하는 게 랭 겜이거든?”

민주

 “아, 그게 그거였어? 난 또 새로운 게임하는 줄 알았지. 근데….”

민주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곧게 펴진 손바닥이 승훈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딱.

승훈

 “악! 뭐야! 왜 때려!!!”

민주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아침부터 계속 까부네. 니가 요즘에 좀 덜 맞았지? 이게 죽을라고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난리는!? 게임을 안 하면 모를 수도 있는 거지. 겨우 그딴 일로 누나한테 소리를 쳐?”

승훈

 “아! 왜! 아침부터 때리고 난리야. 머리 나빠지게!”

민주

 “그러면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랴? 그리고 자꾸 누나한테 따박따박 말대답할래?”

승훈

 “내가 애야? 어휴, 내가 진짜 말을 말아야지.”

휙.

휠체어를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승훈의 뒤통수를 대고 민주가 소리쳤다.

민주

 “야! 밥은!?”

승훈

 “아까 라면 먹었어!”

민주

 “또 라면이야!?”

승훈

 “남이사 라면을 먹든 말든!”

민주

 “저, 저눔의 시키가...”

쾅.

민주의 말을 잘라먹은 것은 거세게 문 닫히는 소리였다. 

잠시 후 민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잔소리는 하지만 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의 마음이 어디로 도망간 것은 아니었다.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민주

 “근데 쟤는 어떻게 된 게 볼 때마다 라면만 먹었대. 저래서 영양섭취가 제대로 되나? 그러고 보니 조금 마른 거 같기도 하고. 보약이라도 한 채 지어줘야 하나?”

***

시리얼을 사기 위해 집을 나온 민주는 엘리베이터 탑승했다. 

눈곱도 떼지 않고, 선글라스만 착용했다.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아서 입고 잔 츄리닝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민낯이지만 선글라스를 끼니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칭찬했다.

민주

 “어휴, 누군 진 몰라도 참 예쁘네. 예뻐. 완전 미스코리아가 따로 없어. 생얼에 이 정도면 됐지. 어맛!?”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더니 정지했다. 

12층.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움직이자마자 멈춰 선 것 같더니 고작 한층 내려간 것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할딱이는 숨소리와 함께 커다란 털 뭉치가 민주에게 뛰어들었다. 

놀라고 말고 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민주가 깜짝 놀라 소리부터 내질렀다.

민주

 “꺄아아악!!!”

헥헥헥.

경훈

 “토토! 그러면 안 돼! 이리와!”

민주

 “뭐, 뭐야!!!?”

거의 민주에게 반쯤은 매달리다시피 안겨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강아지였다. 

올드 잉글리쉬 쉽독이라 불리는 애완견. 

아니, 개님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덩치는 웬만한 어린아이만 하고, 눈썹 위로 난 긴 앞머리로 눈을 덮고 있었다.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 빼꼼히 눈을 내밀고 혓바닥을 내뺀 모습이 덩치에 맞지 않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개를 딱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민주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개 주인도 개를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개 주인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사과하려고 했었다.

경훈

 “아, 죄송합니다. 원래 이 녀석이 사람한테 달려들진 않는데….”

말꼬리가 점점 흐려지더니 이내 들려오는 말도 끊어졌다. 

민주는 똑똑히 보았다. 

사과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째질 듯 옆으로 돌아간 눈동자를. 

그리고 한껏 일그러진 미간을.

민주가 쌍심지를 키며 달려들었다.

민주

 “아니, 이것 보세요. 사과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하다가 마는 경우는 또 뭔가요?”

경훈

 “생각해보니 딱히 잘못한 거 같진 않아서요.”

민주

 “뭐, 뭐예요!? 당신네 개가 나를 물 뻔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경훈

 “우리 토토는 얌전해서 사람 안 뭅니다. 오히려 놀란 것은 우리 토토지. 강아지 처음 봅니까?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요?”

민주

 “뭐라고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토토?”

순간 민주는 자신의 시리얼을 먹어치운 정체불명의 강아지를 떠올렸지만, 연관관계를 찾기도 전에 사내의 말에 넉다운이 되었다.

경훈

 “아침부터 츄리닝 차림으로 어딜 가시나 봐요? 혹시 운동이라도 가시나? 아니면 혹시…. 모닝 담배 피우러?”

이쯤 하면 약 올리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이 상황에서 그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어제 이후로 잠시 누그러졌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민주가 소리를 빽하니 질렀다.

민주

 “아니, 이 사람이 나를 몰로 보고!? 저 담배 같은 거 안 피우거든요!?”

경훈

 “아니면 말고. 뭐 그리 정색을 하고 그래요? 담배도 엄연히 기호식품인데. 그러고 보니 정색을 하니까 더 이상하네.”

민주

 “됐고! 그보다 여기 사시나 봐요. 12층?”

경훈

 “1203호 삽니다.”

민주

 “오호,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아침부터 웬 개 산책? 일은 안 하시나 봐요. 혹시…. 백수…. 신가?”

경훈

 “…….”

긍정도 부정의 대답도 아니었다. 

민주가 지레짐작하곤 알겠다는 표정으로 박장대소를 했다.

민주

 “오호호호! 맞구나 맞아! 그럴 수도 있지 뭔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요. 요즘 취업하기 힘들다는 말은 들었어요. 청년 실업이 10년 만에 최대라고 하던데. 살다 보면 일을 쉴 수도 있고, 그러는 거지. 뭘. 창피해 하고 그래요. 물은 사람 민망하게.”

이토록 유쾌한 적이 근래에 또 있었을까?

민주는 한 방 먹였다는 기분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이왕이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기대했으나 표정의 변화는 찾기 힘들었다. 

아니, 한숨과 함께 민주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눈빛의 의미를 민주는 곡해했다. 

너무 심한 말을 해서 상처를 줬나 싶었다. 그래서 일부로 더 오바해서 말했다.

민주

 “뭐예요? 그런 표정은? 사람 무안하게. 나는 내 입으로 말도 못해요!?”

경훈

 “어제 제가 보낸 문자 받았죠?”

민주

 “뭔 문자? 난 못 받았는데요?”

경훈

 “흐음. 내가 어제 분명히 보냈는데?”

사내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민주를 쳐다봤다. 

본인이 받지 않았다는데 보냈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치미를 떼는 것 같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민주가 ‘이젠 어쩔거냐?’ 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의외로 사내는 아무런 동요 없이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들겼다.

띠링-!

그리고 잠시 후, 민주의 핸드폰에서 문자도착메시지가 울렸다.

경훈

 “지금 다시 보냈어요. 문자 온 소리 들은 걸 보니 분명히 갔네요. 저는 분명히 보냈으니까 빠른 시일 안에 입금해주세요. 그럼 이만.”

허, 저런 간단한 방법이? 

민주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1층으로 향하던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알리고, 사내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곤 개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경훈

 “가자, 토토!”

그 모습을 민주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지켜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내와의 거리가 꽤나 멀어진 뒤였다.

민주

 “뭐야? 지 할 말만 다 하고 가는 거야? 이봐요!”

경훈

 “…….”

민주

 “이것 보세요!”

경훈

 “…….”

민주

 “어, 그래 지금 내 말 씹는 거지? 너 오늘 딱 걸렸어. 어제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다만 오늘은 어림도 없지! 너 거기 딱 기다려!”


츤데렐라7화 - 서경훈이란 남자.

7. 서경훈이란 남자.

민주는 종종걸음으로 따질 듯이 쫓아가다 이내 몇 걸음 못 가서 멈춰 섰다. 

현관문 앞에서 동네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명과 맞닥뜨렸다. 

아주머니들이 민주를 보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네주민1

 “어머, 김민주 아니야?”

동네주민2

 “맞는 거 같은데?”

동네주민1

 “맞네. 맞아. 김민주! 여기 산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말이 진짜였나 보네.”

그냥 지나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에이씨, 하필이면….“

민주

 “하…. 하하하…. 아, 안녕하세요.”

하는 수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리며 주민들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동네주민1

 “어머, 정말이야! 어머, 김민주 씨! 나 김민주 씨 팬이에요. 그런데 정말 우리 동네 사시네? 너무 반갑다. 진짜.”

민주

 “네네…. 호호호. 저도 무척이나 반갑네요.”

특유의 여배우 하이톤이 목젖을 간지럽힌다.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하다. 

가식이네 연기네 해도 반갑다는 팬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게 연예인의 숙명이다. 

팬과 안티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벌써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은 15년 차 민주는 그 같은 생리를 너무 잘 알았다.

동네주민2

 “우리 아들도 김민주 씨 왕 팬이잖아. 같은 동네 산다는 거 알면 엄청 좋아하겠다. 그런데 같은 동네 살면서 민주 씨를 어쩜 여태껏 한 번도 못 봤지? 하긴 뭐, 이제부터라도 종종 보면 되지.”

민주

 “호호호…….”

동네주민1

 “민주 씨 근데 이번에 영화 들어갔다면서. 제목이 뭐더라? 해녀? 그거 언제 개봉해요?”

민주

 “저도 잘 모르겠네요. 찍어 봐야 알겠죠? 호호호.”

입은 웃으면서 아줌마들 앞에 서 있지만, 민주의 시선은 아까 전부터 사내의 뒤만 쫓고 있었다. 

동네주민과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 사내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졌다. 

이미 뒤쫓기엔 너무 늦어 보였다.

민주를 불러 세워놓고 아줌마 두 명은 해녀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젠 전복 이야기를 해대고 있었다. 

전복은 어디 고장이 맛있네. 질기네. 싱싱하네. 

별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자식새끼들에 이어 사돈 팔촌 땅 산 이야기까지 풀어놓을 기세라 민주가 황급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물론 억지웃음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주

 “저기, 어머니들? 전 이만 가볼게요.”

동네주민1

 “왜? 벌써 가게?”

민주

 “예, 제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요. 그럼 안녕히….”

‘운 좋았다. 네놈은 아줌마들이 살린 거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내를 고 씹으며 민주는 황급히 자리를 모면했다.

민주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주머니들이 쑥덕거렸다.

동네주민1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네! 사람이. 소문에는 싸가지 없다고 난리던데.”

동네주민2

 “그러게? 그래서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돼. 그리고 어쩜 저렇게 얼굴이 예쁠까? 수술했겠지?”

동네주민1

 “그럼 했지. 저 얼굴이 안 한 얼굴이겠어? 보니까 눈이며 코며 다 했더만.”

동네주민2

 “아차!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어서 집에 가서 자랑해야겠다. 김민주 만났다고.”

동네주민1

 “나도 나도.”

***

일산에 자리 잡은 S 스포츠 센터.

이곳은 n 그룹에서 운영하는 대형 스포츠센터로 스쿼시, 탁구, 수영, 골프, 에어로빅 등 갖가지 생활스포츠를 한 건물 안에서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복합스포츠센터다. 

그 규모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최대 규모였다. 

최첨단 시설을 구비해놓은 것은 물론, 관리에 있어서도 독보적이다.

강습에서도 체계적이고 뛰어난 강사진들이 많아 수도권은 물론 지방에서도 일부러 찾아와 센터를 이용할 정도였다.

경훈

 “하나, 둘, 셋, 넷!”

삑. 삑. 삑. 삑.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구령을 붙이는 이들이 있다. 

이곳은 스포츠센터 5층에 자리 잡은 대형 수영장. 

이곳에서 수영을 배우는 이들은 대부분 스포츠센터를 이용하는 고객 중에서도 VIP급 이상으로 분류된 회원들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센터 회원권을 구매하면 어지간한 스포츠시설을 전부 이용할 수 있는, 반면 수영장은 별도의 추가금액을 더 지불해야한다. 

그 금액이 6개월 이용기준 300만 원에 가깝다. 센터 연간이용권이 500만 원인 걸 생각한다면 이곳 수영장을 찾는 고객들은 최소한 1년에 이곳 센터에 800만 원을 갖다 바치는 고객인 셈이다.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고가의 이용료다. 그런데도 수영회원권을 끊겠다는 수강생들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수영회원권을 발급받으면 5층에 위치한 선팅룸, 스파시설, 찜질, 모든 음료와 간단한 다과 등이 무료로 제공된다. 

그 퀄리티는 거의 호텔 서비스 수준에 이른다. 요청할 경우 전문 강사와 1:1 맞춤형 교육도 가능했다. 

물론 이 또한 무료다. 

간단한 서핑, 기초적인 스쿠버다이빙을 배울 수 있는 전문 시설도 운영되고 있다.

수준이 이 정도니 이곳은 단순한 수영장 개념이 아닌 해저레포츠 강습소라고 봐도 무방했다. 여가를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최근 운동부족으로 인해 벌어지는 각종 사회적인 현상들이 대두되면서 이곳 스포츠센터 또한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회원권이 워낙 고가인 탓에 이곳을 이용하는 회원들은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상류층의 사모님들이나 자제들이 주를 이뤘다.

강남을 중심으로 좀 있다 싶은 사모님, 미혼의 여성들은 대부분 친목의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10명 남짓한 아줌마들이 3열 종대로 간격을 벌리고 있고, 그 정면에는 마주 본 채 서 있는 수영강사가 있었다. 

준비운동이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몸을 푸는 아주머니들은 준비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시선을 온통 빼앗고 있는 것은 정면에 서 있는 수영강사였다.

정갈하게 착용한 수영모와 잘 매칭되는 우뚝 선 콧날과 그 위로 짙게 자리 잡은 검은 눈동자.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속눈썹이 묘하게 어우러져 여성미와 남성미를 동시에 느껴지게 만든다.  

차분하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성난 듯 부풀어 있는 가슴근육과 그 아래로 탄탄하게 조각되어있는 복근. 

전문보디빌더가 아니라면 발달시키기 어렵다는 외복사근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곳 S 센터에서 자랑하는 스타강사 중의 한 명.

수많은 수영강습생들이 배우기를 희망하는 1순위 지명의 서경훈 강사다.

거리를 벌려 몸풀기 체조가 한창이고, 경훈은 회원들 사이를 거닐며 동작들을 보고 있다. 가장 앞 열에 서 있는 회원이 경훈에게 말을 건넸다.

여성회원2

 “서 코치. 저번 주에 휴가 간다고 하더니 바닷가 갔나 봐? 피부가 좀 탔네?”

경훈

 “서해안으로 친구들과 낚시 다녀왔습니다. 귀찮아서 선크림을 안 발랐더니…. 좀 탔네요.”

여성회원1

 “아휴. 요새는 남자들도 피부 관리해야지. 귀찮다고 선크림 안 바르고 그러면 안 돼. 저번 달에 우리 회사에서 선크림 새로 나온 게 있는데 내가 다음번에 올 때 몇 개 가져다줄게. 촉감이 좋아서 아주 잘 발려. 뭐, 서 코치야 워낙 인물이 좋으니 좀 태워도 좋긴 하지만. 호호호호.”

뭐가 좋은지 자기가 말하고 옆에 아줌마들과 깔깔거리느라 난리가 났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경훈은 자연스럽게 호루라기를 불면 체조를 독려했다.

경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 집에도 선크림은 있습니다. 그보다도 회원님. 팔 드세요. 삑! 삑! 삑! 운동하실 때 말씀하시면 호흡 빠집니다. 집중하세요.”

여성회원1

 “아휴. 나 조금 전에 아래층에서 헬스하고 올라왔단 말이야. 몸 안 풀어도 돼.”

여성회원2

 “나도 힘들어 죽겠어. 다리 후들거린단 말이야.”

여성회원3

 “저도요. 저도.”

그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나도 나도.’를 외쳐댔다.

급기야 주저앉는 회원들도 발생했다.

이런 식의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경훈은 골머리를 앓았다. 

대부분 수강생들이 30, 40대의 상류층 여성들이다 보니 대하기에 어려움이 따랐다. 개중에는 센터를 운영하는 이사진들과 맞닿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 저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회원만 해도 VIP 중에서도 로얄급으로 분류되어있는 회원이다 보니 경훈이 함부로 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실력을 향상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이곳을 찾기보다는 친목이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다 보니 대충 체조로 몸 풀고 몸에 물 적시고, 타월을 휘감고 수영장 안을 활보하는 광경들은 이곳에선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다. 

오죽하면 훈련 위주의 일정보다는 놀이 위주의 일정을 짜라는 센터장의 말이 있을까?

‘젠장, 차라리 초딩 들을 가르치는 게 편하지. 이것도 이젠 못 해먹겠네.’

경훈

 “예, 그러면 준비운동은 충분해 보이니 그만하고, 슬슬 물에 들어가 보도록 하죠. 저번 시간에 배운 자유형을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계신 강사님과 같이 지도를 해드릴 것이니 음…. 오늘 나오신 회원님들이 12분이니까 6분씩 나눠서 지도해드리면 되겠네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회원 12명이 일사불란하게 서경훈 앞으로 줄을 맞춰 섰다. 움직이는 빠르기가 거의 해병대 수준급이었다.

여성회원1

 “난 경훈쌤한테 배울래.”

여성회원2

 “나도.”

여성회원3

 “우리야 늘 경훈쌤이지.”

이 같은 사태에 옆에서 보조하기로 온 아르바이트 강사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경훈으로서도 종종 겪어본 일이기에 이젠 당황하거나 놀랍지도 않았다. 

경훈

 “저기, 회원님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원활한 강습을 위해 반으로 나누시는 편이….”

경훈은 말꼬리를 흘리며 앞서 선크림을 운운했던 회원을 쳐다봤다. 

그녀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준재벌 그룹으로 소문나있는 n 화장품회사 이사의 와이프다. 사실 지금 시간에 모인 회원들의 절반 이상은 그녀의 인맥을 타고 따라 들어온 회원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경훈의 눈길을 받은 회원이 찡긋거렸다. 

‘알았다’는 일종의 제스처인 셈이다.

그녀가 곧장 뒤돌아서서 말했다.

여성회원1

 “자기들. 뒷줄 6명은 저기 옆에 있는 젊은 쌤한테 배우면 되겠네. 자기들이 이러니까 우리 경훈쌤이 곤란해 하잖아. 자, 빨리빨리 움직여. 시간 간다. 거기 솔미네도 움직이고. 뭐해? 어서 움직이라니까?”

그 말은 들은 뒷줄 회원들이 삐죽거리며 홀로 방치되어있는 아르바이트 강사 앞으로 다가갔다. 

다들 말똥 밟은 것처럼 얼굴이 울상이었다.

아르바이트 강사가 특별히 못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경훈과 비교되는 몸매, 비교되는 얼굴, 비교되는 키. 무엇하나 나은 점이 없었다.

그렇게 남북이 분단된 듯 줄은 정확히 두 갈래로 나뉘었다.

경훈이 도움을 준 회원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여성회원1

 “아휴. 우리 사이에 이런 거 가지고 뭘. 그보다도 경훈쌤. 이번 타임 끝나고 스케줄 비지? 우리 1층 로비에서 차 한잔 하기로 했는데 경훈쌤도 같이 가자. 내가 시원한 거 한잔 사줄게. 어때, 괜찮지?”

경훈

 “아하하….”

이런 식의 요청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평소에는 잘도 거절했지만, 오늘은 왠지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경훈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츤데렐라8화 - 김민주는 모쏠이래요(1)

8. 김민주는 모쏠이래요. (1)

m 방송국의 출연자 대기실.

그 안에는 메이크업이 한창이 김민주와 매니저, 그리고 코디네이터. 그 앞에 메이크업담당자가 출연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분장을 찍어 바르고 있는 민주에게 정수가 대본을 내밀었다.

정수

 “여기 대본 가지고 왔어요.”

민주

 “쌩큐.”

정수

 “근데 어제 하루 잘 쉬셨어요? 모처럼 쉬시는 날이었는데 하루 종일 뭐하셨어요?”

민주

 “아, 몰라 몰라! 웬 또라이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 잡쳤어. 그거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했잖아. 너, 내가 뭐에 한번 꽂히면 계속 그거에 꽂혀 있는 거 알지?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정수

 “왜 또 그러세요? 혹시 인터넷 댓글 보셨어요? 그런 거 보시지 말라니까.”

민주

 “너는 내가 악플에 상처받는 거 봤니? 그런 거 아니야. 얘.”

정수

 “하긴. 이젠 내성이 생기실 때도 됐지.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는 게 너무 목소리가 컸나 보다. 

민주가 쌍심지를 세웠다.

민주

 “이게, 죽을래!?”

정수가 움찔하며 반문했다.

정수

 “죄, 죄송해요.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민주

 “요즘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줬지? 오늘 어디 한번 먼지 나게 맞아볼래!? 이걸, 확. 그냥.”

정수

 “죄송해요. 누나.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근데 왜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셨는데요? 뭔 일 있었어요?”

이런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이랴. 

다행히 어물쩍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민주가 손을 들자 얼굴에 메이크업하고 있던 분장사가 손을 멈췄다. 

민주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의자를 회전시켰다. 

의자가 빙글 돌아가면서 정수가 서 있는 방향 쪽을 향했다.

민주

 “너 혹시 반상회 같은 거 나가 본 적 있어?”

정수

 “반상회요? 제가 그런 걸 왜 나가요? 그리고 저는 빌라 사는데요. 채연아. 혹시 너희 반상회 같은 거 해?”

질문을 받은 정수가 오히려 옆에 있는 채연에게 되물었다. 채연은 저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채연

 “아니? 난 원룸 사는데? 원룸도 살아도 그런 거 해야 해요?”

민주

 “됐다. 내가 너희한테 뭘 기대하니.”

빙글. 

회전식으로 돌아가는 의자를 도로 원위치시키고 민주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대기 중이던 분장사가 다시 분을 찍어 발랐다.

정수

 “아니, 갑자기 반상회는 왜요? 뜬금없이.”

채연

 “그러게요. 언니 혹시 반상회 나갔어요?”

민주

 “아니, 글쎄. 웬 미친놈이 나보고 반상회 안 나왔다고 뭐라고 하더라. 뭐, 벌금을 내라나 뭐라나?”

정수

 “에이, 누나가 그런 거 나갈 시간이 어딨어요? 그리고 벌금 같은 거 걷는 거 불~법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민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반응하기가 무섭게 다시 의자를 정수 쪽으로 회전시켰다. 

코디가 놀라며 주춤거렸다. 하지만 민주는 이런 거 저런 거 챙길 겨를이 없었다.

민주

 “너, 지금 그거 한 말 다시 말해봐. 벌금 걷는 거…. 불~법. 그거 진짜야?”

정수

 “예, 저도 얼마 전에 뉴스 보고 알았는데. 반상회 같은 거 참석 안 한다고 벌금을 걷어가는 건 전부 불~법이래요.”

채연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채연

 “맞아 맞아! 나도 본 거 같아요. 언니.”

민주

 “오호라, 그래!? 그러면 안내도 아무런 문제 없겠네?”

정수

 “그럼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누가 미쳤다고 반상회 벌금 같은 걸 내요? 그런 거 낼 돈이 있으면 고기나 한 번 더 사 먹겠다.”

채연

 “맞아!”

민주

 “그런데 돈 내라는 미친놈은 뭐지? 문자로 계좌번호까지 찍어주던데?”

정수

 “네에!? 문자요? 누나! 혹시 그 사람이 누나 전화번호도 알아요?”

민주

 “어. 지 맘대로 핸드폰 뺏어가서 번호 가져가던데?”

정수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수

 “누나! 나, 알 것 같다! 촉이 온다. 와.”

민주

 “뭔데? 뭐가 알 것 같은데?”

정수

 “아무래도 그 사람 뭐 있는 거 아니에요? 스토커라던가 사생팬이라던가. 요즘에 뭐 수상한 일 없었어요? 누가 계속 따라온다는 거 같던가. 아니면 협박편지 같은 걸 받았다던가.”

민주

 “글쎄…. 딱히 없는 거 같긴 한데.”

정수

 “아무튼 조심하세요. 제가 보기에는 일부로 그 사람이 전화번호 따 가려고 수작 부린 거 같아요. 뭔가 구린 냄새가 나요. 분명히!”

민주가 손사래를 쳤다.

민주

 “에이, 설마!? 바로 우리 집 아래층에 살던데?”

정수

 “그래요? 뭐 아니라면 다행이고. 하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민주

 “뭐. 그건 그렇지만….”

민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스토커…?

싸가지가 조금 없긴 하지만 집착 있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인물도 그만하면 준수했다. 

스토커 이미지와는 영 맞질 않았다. 

자신과의 첫 만남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오히려 여자들한테 스토커를 당하면 당했지 할 것 같은 타입은 아니었다.

민주

 “흐음….”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문이 열리며 조연출이 들어오며 스탠바이를 알렸다.

스태프

 “김민주 씨. 준비해주세요!”

정수

 “네. 알겠습니다.”

조연출이 나가고 곧이어 민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주

 “자. 그만 나가볼까?”

정수

 “네, 누나!”

민주

 “윽!”

민주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다섯 걸음도 채 걷지 못했을 때였다. 비명소리가 먼저 터졌고,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며 벽에 기대듯 쓰러졌다. 

현기증이 돌았다. 

시야에 초점이 잘 맞질 않고,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무엇보다 민주를 괴롭히는 건 관자놀이를 후벼 파는 듯한 지끈거림이었다.

깜짝 놀란 정수와 채연이 옆에 붙었다.

정수

 “누나!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채연

 “언니, 괜찮으세요?”

민주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민주

 “아, 괜찮아. 괜찮아. 호들갑 떨 거 없어. 현기증이 나서 다리가 풀린 것뿐이니까.”

말하는 것과는 달리 민주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고 있었다. 

어찌 된 게 부딪힌 몸보다도 머리가 더 아파 보였다.

정수

 “누나! 설마 또 머리 아프세요? 한동안 괜찮으셨잖아요!”

민주

 “약이 떨어져서 한동안 안 먹었더니 그런가 봐. 소란피울 거 없어. 사람들이 본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가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복도에 서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런 식의 상황은 어떠한 경우라도 좋지 않았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소문이 난다.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또 대부분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고작 넘어진 것 한 번으로 별의별 소문이 다 나는 게 이 바닥이다. 

약을 했냐는 둥, 담배를 피워서 그랬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악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또 다른 기삿거리를 낳게 되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게 연예계다.

왜? 시청자들은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것 원하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피해는 고스란히 당사자가 떠 앉게 된다. 광고 CF라도 몇 개 찍어놓은 상태면 품위유지 훼손 등의 이유로 해당 회사에서 고액의 위약금을 청구 당하기도 한다. 딱히 잘못한 일도 없고, 제일 억울한 게 여배우지만 이런 미치고 환장할 일들은 이곳에선 흔히 벌어지고 있었다.

욕은 욕대로 먹고 돈은 돈대로 날리고.

이러한 상황을 민주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정수

 “감독님한테 잠시 쉬었다가 한다고 말씀드릴까요?”

민주

 “아니 됐어. 그보다 두통약 있어? 으윽!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네.”

정수

 “그러고 보니까 누나 작년에도 건강검진 안 받았죠? 안 되겠다. 제가 이사님한테 말씀드려서 최대한 스케줄 변경해보도록 할게요. 내일이라도 당장 종합 검사받아 봐요. MRI랑 CT도 다시 찍어보고. 누나 진짜 이러다가 큰일 나요!”

민주

 “알았어. 검사든 뭐든 다 받을 테니까 일단 약부터 구해와 봐. 오늘 촬영은 해야지. 빨리. 채연이는 나 좀 부축해주고.”

채연

 “아, 알았어요. 언니!”

민주

 “나, 김민주야 김민주. 대한민국 탑 여배우. 이까짓 두통쯤에 질 것 같아!?”

민주는 정수가 급히 가지고 온 두통약 6알을 한꺼번에 목구멍에 넘기며 중얼거렸다.

***

다음 날.

S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최홍길 교수의 진료실.

최홍길 교수는 민주를 10년 넘게 담당해오던 주치의다. 그의 앞에는 민주가 앉아 있고, 그 뒤로는 늘 그렇듯이 정수와 채연이 붙어 있었다.

최홍길 교수가 차트기록을 살펴보며 민주에게 물었다.

최교수

 “그러니까 어제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꼈다는 거죠? 예전과 마찬가지로요?”

민주

 “네. 한동안 괜찮다가 어제 갑자기 그러네요.”

최교수

 “지금은 어떻습니까?”

민주

 “예, 지금은 괜찮아요.”

최교수

 “흐음.”

최홍길 교수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곤 이내 입을 열었다.

최교수

 “김민주 씨의 증상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단기기억손실에 의한 충격 여파라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외 다른 문제점이 있는지는 좀 더 정밀한 검사가 끝나봐야 알겠습니다만, 엑스레이나 CT상의 이상 문제는 딱히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민주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최교수

 “음…. 그건 아닙니다. 지금 김민주 씨는 어렸을 때…. 그러니까 7살 때부터 10살 때까지의 기억 일부분이 없다는 거죠? 두통도 그 무렵에 시작됐고요.”

민주

 “예. 맞아요. 정확히는 10살 때 급류에 휩쓸려 죽을 뻔한 사고를 겪은 후에 기억이 사라졌어요. 신기하게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보낸 기억들이 하나도 생각나질 않아요. 다른 건 다 기억나는데.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런 게 가능한 건가요 선생님?”

최교수

 “좀처럼 드문 케이스이긴 하지만 가능은 합니다. 현대의학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영역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사실 죽을 뻔한 사고를 겪고 제정신인 사람은 그렇지 많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던가, 아니면 급류에 휩쓸릴 때 어딘가에 강하게 머리를 부딪쳤다던가. 가능성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기억상실은 뇌가 불안하게 만드는 경험들에 대처하고자 하는 일종의 방어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두통도 일종의 신경성 장애 비슷한 건데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민주

 “그러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최교수

 “그건 아닙니다. 기억상실이 이렇게 오래도록 지속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완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환자로 하여금 그때의 사건을 의식적으로 재경험하게 하고 당시의 사건들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도움됩니다만, 김민주 씨 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고….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다면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

 “정서적으로 뭘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거죠? 예를 들자 면요…?”

최교수

 “음. 쉽게 말하자면 김민주 씨의 문제는 너무 바쁜 연예인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을 정서적으로 완성시켜주는 것은 별게 아닙니다. 휴식을 취하고,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오는 호르몬인 옥시토신과 엔도르핀, 도파민 등은 사람을 정서적으로 안정을 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행복지수가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는 줄어들게 마련이니까요. 행복한 사랑을 꿈꾸고, 연애하는 사람 중에는 신경정신과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휴식? 연애? 사랑? 

죄다 민주와 상관없는 단어들뿐이다.

민주

 “에이,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저 바쁜 연예인이라는 거. 제가 그런 거 할 시간이나 있나요?”

최교수

 “물론 압니다. 김민주 씨 혹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게 언젠지 기억나십니까? 이성으로써 남자를 말입니다.”

민주

 “음….”

잠깐 썸 비슷한 것을 타본 적은 있지만 연애라고 하기에는 모자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경험은 기억 속에 없었다.

하지만 제 입으로 그걸 끄집어내기는 조금 그랬다.

연인으로 삼고 싶은 51위가 실은 남자 한번 제대로 못 만나봤다는 슬픈 이야기를 어찌….

정수

 “선생님! 우리 누나 모쏠이래요! 남자 한 번도 못 만나봤어요!!!”

저... 저…. 개눔의 시키가….


츤데렐라9화 - 김민주는 모쏠이래요(2)

9. 김민주는 모쏠이래요. (2)

민주가 어물쩍하는 사이 잽싸게 정수가 말을 가로챘다.

마치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이었다.

민주

 “야! 김. 정. 수!”

그런 슬픈 이야기를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떠들다니.

그것도 저렇게 큰 소리로.

찢어 죽일까. 말려 죽일까. 

턱밑까지 차오르는 살기를 느꼈는지 정수가 슬그머니 민주의 시선을 외면했다.

최홍길 교수가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교수

 “제가 보기에는 김민주 씨는 지금 스트레스 중독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계속해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두통도 갈수록 심해질 거고, 종래에는 약으로도 참기 힘든 정도가 될지도 모릅니다.”

민주

 “에이, 설마요….”

민주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최홍길 교수의 얼굴 어디에도 농담 섞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진지해 보이는 게 탈이었다.

덩달아 민주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민주

 “진짠가요?”

최교수

 “예.”

민주

 “진짜예요? 그러면….”

민주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민주

 “저 치료 못 하면 죽는 건가요? 얼마나 살 수 있는 거죠? 1년? 2년? 설마 그것도 못살고 죽는 건 아니겠죠?”

정수

 “…….”

채연

 “…….”

정수가 한숨을 내쉬었고, 채연도 부끄러운 듯 시선을 외면했다. 

이야기의 방향이 어찌 저렇게 흘러간단 말인가?

이젠 저것도 재주려니 싶다. 

정수가 조심스럽게 최홍길 교수에게 질문했다.

정수

 “저어, 선생님. 이런 말씀 외람되지만, 혹시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아이큐도 떨어지나요?”

최교수

 “하하, 그건 아닙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주는 절규하며 부르짖기에 바빴다.

민주

 “말도 안 돼! 내 나이 28살에 결혼 한 번 못해보고 이대로 죽어야 한다니. 이럴 순 없어! 안돼!”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절규하는 민주를 보고 최홍길 교수가 그녀의 행동을 만류했다.

최교수

 “저기, 김민주 씨? 누가 죽는다고 했나요?”

민주의 행동이 그 말에 정지했다. 갈 곳 잃은 눈동자는 새로운 구원자를 본 것 마냥 최홍길 교수를 향했다.

민주

 “네!? 선생님…. 그러면 저 안 죽는 건가요!?”

정수

 “누나….”

채연

 “언니….”

민주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정수와 채연은 이미 창피함으로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최교수

 “네, 물론 안 죽습니다. 다만 지금 같은 환경 속에서는 기억상실증도, 그리고 지속해서 찾아오는 두통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선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시간 맞춰 드십시오. 약으로도 통증을 참을 수 없으면 다시 내원하시고요.”

정수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대답은 정수가 했다.

그리곤 민주를 끌고 나오다시피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민주가 방문을 나오기가 무섭게 구시렁거렸다.

민주

 “어휴, 죽는다는 줄 알고 식겁했네. 아니, 왜 겁은 주고 난리야! 난리는!? 지금 찍어야 할 촬영이 몇 갠 데. 그런데 정수야.”

정수

 “네?”

민주

 “그거 못 찍고 죽으면 혹시 위약금 내야 하는 거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쩔 땐 민주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보다 못한 정수가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정수

 “누나!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민주

 “아이씨. 깜짝이야! 얘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나 귀 안 먹었거든? 그러니까 살살 말해! 콱! 그리고 너 좀 전에 모라고 그랬어? 뭐 모쏠? 너 내가 모쏠인 거 봤어? 내가 남자들한테 인기가 얼마나 많은….”

정수

 “아, 진짜 내가 누나 때문에 못살아!!! 정말!!!”

정수가 뭐가 삐쳤는지 민주를 버려둔 채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민주

 “야! 어디가!? 채연아, 쟤 왜 저러니?”

채연

 “아, 몰라요!!!”

채연도 정수를 따라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민주

 “뭐야, 쟤네 둘 다 왜 저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더위 먹었나? 야, 같이 가! 같이 가자니까!?”

***

동해에 위치한 경포해수욕장.

이곳은 여름 때면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피서객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이곳을 주로 찾는 이들은 20, 30대의 젊은 층들과 칭얼대는 아이들과 손잡고 온 학부모들이 대부분이다. 

따가운 햇빛을 그대로 맞으며 오리 튜브에 바람을 넣다 지친 가장. 

남자친구들끼리 놀러 와 어떻게든 여자 한번 꾀어보려고 눈에 불을 밝히는 촌놈들.

인생 사진 한 번 남겨보겠다고 셀카 100방씩 찍는 아가씨들까지.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갖가지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 수많은 인파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일행의 수는 셋!

전원 남자. 

평균 신장이 183cm 정도는 족히 돼 보이는 키와 잘 단련된 상체. 

적당히 그을려진 피부색이 잡지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다름 아닌 일산에 위치한 S 스포츠센터 강사들.

왼쪽부터 간판스타 서경훈과 저녁 파트타임에서 수영강사로 일하는 남정현, 스쿠버다이빙교사 전희철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 손에는 하나같이 초코맛 쭈쭈바가 들려 있었다. 쭉쭉 거리며 아이스크림에 심취해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지금 이들은 살인사건을 공모 중이었다.

경훈

 “희철이, 이 새끼 여기다가 묻어버리고 둘이 올라갈까?”

정현

 “여기는 시체가 보이니까 바닷속에 끌고 가 익사시켜버리자. 돌 매달고. 아니면, 잠수했을 때 산소통 호흡기를 떼버릴까? 사고사로 위장시키기 좋잖아.”

경훈

 “그것도 좋네. 역시 넌 내 친구.”

손바닥끼리 부딪치며 하이파이브. 

짝.

희철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희철

 “아, 형들!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요?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정현

 “난 장난 아닌데?”

경훈

 “나도.”

하이파이브. 

짝.

역시 이래서 친구는 통하는가 보다. 

서경훈과 남정현은 고등학교 친구 때부터 친구다. 

남정현이 스포츠센터강사로 취직하고 경훈에게 일자리를 소개시켜줘서 지금은 같은 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희철은 같은 센터에서 일하는 스쿠버다이빙 교사 현재 27살로 둘보다 4살 동생이다.

희철

 “아,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거참 되게 모라고 하네.”

희철이는 자신을 죽일 공모가 계속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사실 무늬만 동생이지 형들 머리 꼭대기에 있는 능 구렁이었다. 

유머러스하고, 재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형들에게 애교도 떨 줄 아는. 

셋 중에서 가장 처세술에 능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 3명이 일행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고, 다시 한 번 쳐다보는 것이 마치 말을 걸어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벌써 이와 비슷한 일이 여러 번 벌어졌지만, 희철과 정현은 어째 꿈쩍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들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희철이가 애달은 표정을 지었다.

희철

 “저, 저, 형들! 우리 이러지 말고 잠깐 헌팅해서 놀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딱 2시간만! 네!? 아, 제발!!! 쫌!!!”

지금 셋은 비치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물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들 셋은 종종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러 동해를 찾았다. 

물이 만조 때가 돼야 포인트로 진입할 수 있는 수심이 되는데, 물때를 잘못 알고 너무 서둘러서 온 탓에 할 일이 없어서 해변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다.

경훈

 “그런데 희철아.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일부러 그랬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너 여자 꼬시려고 일부러 빨리 오자고 했지?”

정현

 “동의한다에 한 표.”

경훈의 말에 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철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희철

 “아! 저도 연애도 좀 하자고요! 팔팔한 27살 나이인데 여자 친구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경훈

 “있잖아. 여자친구. 갤러리아 아파트 407호 회원님. 풉.”

정현

 “풉.”

말을 한 경훈도 듣고 있던 정현도 누가 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407호 회원은 40대 중반의 여성회원으로 희철이가 귀엽다고 자꾸 밥 먹자고 치근덕거리는 회원 중 한 명이었다. 

저번엔 엉덩이 만졌다고 희철이가 성추행으로 고소한다고 길길이 날뛴 적도 있었다.

희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희철

 “아, 쫌!!! 진짜 유치하게 이러기에요!?” 

경훈

 “어, 그럴 건데?”

정현

 “넌 애사심이 너무 없어. 사장님이 입사 때 뭐라고 그랬어? 여성회원들은 ‘여자친구다’라고 생각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랬지? 너, 지금 이러는 거 엄연히 양다리다? 407호 회원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안 그래?”

아주 작당을 했는지 낄낄거리면서 희철이를 공격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이러한 놀림은 셋 사이에서는 일상과 가까웠다.

피해자는 대부분 희철이었지만 그도 딱히 이런 상황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소개팅녀1

 “저기요….”

그때 조금 전 힐끗거리며 가던 비키니녀 3명이 되돌아와 경훈이의 일행들에게로 다가왔다. 모두 20대 중반 정도의 여성들로 특히나 말을 건 여성은 앞머리를 단정히 내려 곱게 양 갈래로 딴 귀엽게 생긴 여성이었다.

소개팅녀1

 “괜찮으시다면 같이 노실래요? 세 분이서 오신 거 같은데. 저희도 마침 세 명에서 놀러 왔거든요.”

희철이의 입이 입가에 걸렸다. 

셋 다 비주얼도 나쁘지 않았다. 몸매도 착했다. 파트너 찍기를 해서 누가 걸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희철이 넙죽 말을 받았다.

희철

 “좋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들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여긴 좀 더운 거 같으니 간단하게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부터 나눌까요? 바로 앞에 괜찮은 카페가 있는데.”

소개팅녀1

 “네. 좋아요!”

세 명의 여성들이 저희끼리 재잘거리며 카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이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았다.

그녀들의 뒤태를 보고 있는 희철의 눈이 뒤집혔다.

희철

 “이게 웬일이야.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라니!”

적극적인 네 사람과는 달리 경훈과 정현의 표정과 행동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다 먹고 남은 애꿎은 쭈쭈바만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희철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양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희철

 “아, 좀!!! 형님들. 하나뿐인 아우 연애 좀 합시다. 협조 좀…. 네!?”

정현

 “아 참, 귀찮게 시리….”

마지못해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일어나는 두 사람.

상황이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빼기도 힘들었다.

정현

 “딱 1시간 만이야. 올라가는 길에 저녁은 니가 쏘고. 콜?”

희철

 “오! 케이! 협상완료! 자자, 갑시다 가. 여성분들 기다립니다.”

희철이 두 사람을 양팔에 끼고는 종종걸음으로 여자들을 쫓아갔다.


츤데렐라10화 - 동해안에서 생긴 일(1)

  

10. 동해안에서 생긴 일 (1)

커피숍 안.

귀찮다고 툴툴거리는 것과는 달리 남정현은 여성 한 명과 열렬히 대화 중이다. 

워낙에 말재주가 좋고, 타이밍에 맞춰 화두 변환이 재빨랐다. 

그러다 보니 여자에게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희철 또한 처음 대화를 주고받은 양갈래 머리 여성과 잘되는 분위기였다. 

간헐적으로 웃음도 짓고, 리액션도 나오는 걸 보아 연락처를 물어본다면 당장에라도 건네줄 기세였다.

문제는 경훈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주로 질문을 하고 말을 하는 쪽은 여자였다.

경훈은 주로 대답을 하던가 듣기만 했다.

소개팅녀1

 “아, 수영강사셨구나. 어쩐지 몸매가 좋으시더라니…. 일산 스포츠센터라면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그럼 세분 다 그곳에서 일하시나요?”

경훈

 “네.”

소개팅녀1

 “아, 그러셨구나. 스쿠버다이빙 하러 오셨다고 그러셨죠? 그거 재미있나요?”

경훈

 “뭐, 그럭저럭? 취미 삼아 하는 거니까요.”

소개팅녀1

 “저도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어요. 되게 어려울 것 같지만….”

경훈

 “네. 기회가 되면 배워보세요. 쉽진 않아요.”

소개팅녀1

 “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끝.

설마 이게 끝?

진짜로 끝이란 말이야?

여자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제가 가르쳐드릴까요? 라는 말이 나와야 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차후의 만남을 기약하며, 연락처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이번 여름에 제대로 된 킹카 한번 물어보려고 머리도 유행하는 단발로 자르고, 염색도 섹시해 보이게 은색으로 믹스했다. 

선팅 샵에 가서 피부까지 태우고, 몸매가 부각되게 흰색 비키니로 빼입고, 가슴도 커 보이게 왕 뽕브라를 넣었다. 

일부로 해변과 잘 어울리도록 파란색 컬러렌즈까지 끼고 나왔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다. 

아니, 웬만한 여자연예인을 뺨칠 정도로 훌륭했다. 

그런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저런 얼빠진 대답과 표정이라니.

설마 자신을 마음에 안 들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한 채 경훈의 진짜 속내가 궁금해졌다.

소개팅녀1

 “경훈 씨라고 하셨죠? 이상형이 혹시 어떻게 되시나요?”

경훈

 “음, 이상형요?”

소개팅녀1

 “네.”

자신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면 자신과 일치하는 것들을 말하겠지? 

이를테면, 단발이라던가, 까무잡잡한 피부라던가. 파란색 눈동자라던가.

경훈

 “전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닌 여자가 좋아요. 눈동자 색은 짙은 검정색이면 좋겠어요.”

소개팅녀1

 “…….”

경훈

 “성격은 좀 직설적이고, O형 같은 여자. 약간의 푼수기가 있으면 더 좋고. 나이는 저랑 한 4살 정도 차이?”

여자는 더 이상 들어주고 있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무엇하나 자신과 맞는 것이 없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녀를 보고 일행들이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 나갔다.

졸지에 파트너를 잃은 희철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희철

 “뭐, 뭐야!? 갑자기 왜? 왜 그러는 건데요?”

하긴 녀석으로써도 황망하긴 했을 것이다. 

완전히 잘 돼 가는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파트너가 친구를 쫓아가 버렸으니….

정현이 옆에서 희철을 위로했다.

정현

 “뭐긴 뭐야. 꽝 된 거지. 그래도 가는 길에 밥은 니가 쏴야 하는 거다. 난 최선을 다했다.”

이건, 위로라기보다는 약 올리는 거에 가까웠다.

희철

 “아씨! 진짜!!!”

씩씩거리며 나가는 폼이 담배를 두 개비는 피울 기세였다. 

정현도 나가기 위해 짐을 챙겨 일어섰다.

정현

 “야, 뭐해? 나가자.”

경훈은 조금 전부터 어느 한 지점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는 맥주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긴 생머리에 새하얀 피부. 

하염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칠흑 같은 눈동자.

김민주.

정현

 “야! 뭐하냐니까?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너 혹시 저런 스타일 좋아하냐? 하긴, 김민주 안 좋아하는 남자가 대한민국에 있겠냐만은.”

경훈

 “어!?”

정현

 “뭐냐, 그 당황하는 눈빛은? 그러고 보니까 어째 방금 말한 이상형이 김민주와 비슷한 거 같기도 한데?”

경훈

 “미친놈. 그건 또 언제 엿들었어?”

정현

 “내 귀로 들리는 것도 못 듣냐? 아무튼, 너 방금 그거 여자한테 큰 실례한 거야. 아무리 싫어도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경훈

 “시끄러워 인마.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둘러댄 거야. 그럼 대놓고 싫다고 하냐?”

정현

 “하긴…. 셋 다 너무 까지긴 했더라. 나도 내 스타일 아니었어. 그보다 얼추 시간 다 된 거 같으니까 다이빙이나 하러 가자. 희철이 자식 삐진 것도 좀 풀어주고.”

경훈

 “어.”

정현이 경훈을 보고 혀를 내찼다.

경훈

 “쯧쯧, 하여튼 특이한 놈.”

***

비슷한 시각. 동해 해안가 제법 한적한 곳.

이곳은 로케이션 촬영이 한창이다. 많은 스태프 연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으며,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김민주가 10여 분째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민주

 “죄송해요. 기자님. 제가 워낙 바빠서 따로 시간을 못 내서 이리로 오시라 불렀어요. 괜찮으시죠?”

기자

 “아. 물론이죠! 김민주 씨 바쁜 거야 세상이 다 아는데…. 괜찮습니다. 그러면 인터뷰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민주

 “네.”

기자

 “듣자하니 해녀의 여자주인공 역할을 맡으셨는데, 촬영 도중 어려운 점은 없으십니까?”

민주

 “호호호, 전혀요. 스태프분들도 모두 친절하시고, 선배님들도 다 잘 대해 주시고….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촬영하다 보니 전혀 어려운 점을 못 느끼겠어요. 너무 편안해요.”

기자

 “아, 네….”

뻔한 질문, 뻔한 대답. 

기자가 서둘러 다음 질문으로 넘겼다. 

어차피 지금까지의 내용은 본론을 끄집어내기 위한 초석일 뿐이었다.

기자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듣자하니 이번 촬영은 유독 대역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수중 촬영 씬은 대역 연기자분이 소화하기로 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민주

 “네? 그, 그건 뭐…. 아무래도 수중연기는 제 전문분야가 아니고…. 위험한 부분도 있으니까요. 감독님이 대역을 권하시더라고요. 저는 사실 대역보다는 직접 연기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제 전작 보셨죠? ‘소림사 날다.’ 거기에서 와이어 달고 액션씬 찍는 거 그거 제가 직접 다 한 거거든요. 그거 때문에 하루라도 몸에 멍이 안 든 날이 없을 정도였어요. 호호호. 대역을 쓰면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떨어진달까? 뭐, 아무튼 제 생각은 그래요. 직접 이것저것 부딪혀보는 게 연기발전에 도움도 되는 것 같고….”

기자

 “아, 예….”

FM 같은 일괄적인 대답.

하지만 민주는 이 같은 질문에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기자는 길고 긴 민주의 대답 중에 정확히 필요한 맥락만을 짚어냈다.

기자

 “그러면 대역 연기자가 수중 씬의 대부분 촬영한다는 게 사실이긴 한가 보네요?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김민주 씨가 물 공포증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대역 연기자를 쓰시는 것도 그것과 상관있는 건가요?”

민주

 “네?”

기자

“이번에 영화화될 ‘해녀’라는 작품은 해녀들의 사실적인 생활과 내용을 다루는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감독님도 리얼리티 부분을 신경 쓰기 위해서 녹화 전부터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해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잠수복을 입고 물에도 들어가 보시고. 해녀는 전반적인 삶이 대부분 물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렇게 따지자면 대역 연기자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건 아무래도 리얼리티 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작품의 컨셉은 리얼리티인데 말입니다.”

민주

 “네? 그게 무슨….”

민주는 참으로 오랜만에 당황스러웠으나 명색이 여배우다.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을 때보다 사라지는 시간이 더 빨랐다.

민주

 “호호호, 오해가 있으셨구나! 물론 저도 사람인데 물이 무섭기야 하죠. 하지만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대역 연기자를 쓰는 건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요즘 스쿠버다이빙이나 잠수하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제가 요즘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복식호흡이에요! 물속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있고 싶어서 매일같이 호흡법도 익히고 있답니다.”기자: “아, 그러신가요?”

민주

 “그럼요. 지금은 아직 미숙해서 수중씬 연기를 직접 못하고 있지만, 차차 나아지고 있으니 조만간 직접 연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기자

 “그렇다면 직접 전복도 캐고, 해삼도 잡는다는 말씀인가요?”

민주

 “네. 물론이죠. 운이 좋아 문어라도 한 마리 건지면 기자님한테 대접해 드릴게요. 대신에 기사 잘 뽑아주셔야 해요?”

기자

 “하하, 물론입니다. 직접 잡으신 문어를…. 저야 영광이죠.”

가까스로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긴 했지만 나름 잘 막아냈다.

*

기자를 돌려보내고 민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민주

 “어휴, 저 기자 어디서 왔다고 했지? 집중 매거진?”

정수

 “네. 전에도 누나 인터뷰한 적 있는 기자예요.”

민주

 “그때도 저렇게 까칠하게 인터뷰했니?”

정수

 “글쎄요. 기억이 잘….”

민주

 “그나저나 인터뷰 질문 체크는 했어? 안 했어? 왜 말도 안 되는 저런 질문이 나와?”

정수

 “분명히 했는데. 그때는 저런 질문 없었단 말이에요.”

민주

 “너, 진짜 일 똑바로 안 할래? 내가 질문받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정수

 “죄, 죄송해요. 저도 저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어요.”

민주

 “뭐, 어찌 됐건 넘어가긴 했는데…. 아, 몰라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아이씨! 나 물 공포증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아내가지고….”

정수

 “그러기에 왜 그런 말을 하셔가지곤…. 그냥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지. 그게 뭐 딱히 문제 될 건 없잖아요?”

민주

 “그러면 그 상황에서 기자 말에 ‘네네. 저 물 공포증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대역으로 갈 겁니다. 라고 말하니?’ 리얼리티 성을 강조하는 영화촬영현장에서? 너도 줄곧 같이 있었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가뜩이나 발연기다 대역빨이다 말들 많아 죽겠는데. 그 와중에 또 그런 기사 나가 봐. 안티팬들이 참도 날 가만 놔두겠다. 어떻게든 물어뜯어 죽이려고 들겠지.”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면 그뿐이다.

지금으로써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정수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기사 잘 좀 써달라고 말해볼게요.”

민주

 “그건 그렇고. 채연아!?”

채연

 “네, 언니!?”

민주

 “나 아까부터 화장실 가고 싶어 죽겠는데, 화장실 어디에 있니?”

채연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채연

 “저기요.”

민주

 “저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채연

 “저기 큰 바위 뒤에서 해결하셔야 해요.”

민주

 “나보고 저기서? 그냥 아무것도 없는 데서?”

채연

 “제가 망봐드릴게요. 여기 화장실 가려면 차 타고 나가야 해요. 그러니까 들어오시기 전에 화장실 들렀다가 오시라니까.”

민주

 “아이씨…. 급해 죽겠는데. 빨리빨리.”

민주가 하는 수 없이 앞장서서 손짓하자 채연이 쪼르르 민주를 쫓아갔다.

일단 급해서 오긴 왔는데…. 제대로 발 디딜 공간도 부족하고, 옆에는 시원하게 바다가 탁 트여있어 누가 볼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채연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망을 봐주고 있어서 사람 다가올 걱정은 없을 것 같은데….

민주

 “에라이, 모르겠다! 급해 죽겠는데.”

결연한 결심을 한 그때. 뭔가가 민주의 발을 타고 뭔가가 빠르게 올라왔다.

바, 바퀴벌레!?

민주

 “끼아아악!!!”

벌레를 털어내기 위해 거의 발악적으로 몸을 일으킨 민주가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며 옆으로 굴렀다. 

머리부터 바위에 닿았는지 민주는 땅에 머리를 대는 순간 축 늘어졌고, 그런 민주를 넘실대는 파도가 삼켰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주의 비명소리에 놀라 쫓아온 채연이 민주가 사라진 것을 보고 정수를 찾았다.

채연

 “오빠! 큰일 났어! 언니, 언니가!!!!”


츤데렐라11화 - 동해안에서 생긴 일(2)

11. 동해안에서 생긴 일(2)

경훈 일행들은 한창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중이다. 

해안가에 근접해있는 곳이 수심이 그다지 깊진 않지만,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기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서가던 정현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훈

 “응?”

경훈도 거의 동시적으로 물체를 확인했다. 

쓰레기? 

그건 아니다. 뭔가 꽤 커다란 물체였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죽은 사람의 시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명확해졌다. 

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는 시체(?)를 먼저 잡아챈 것은 경훈이었다. 

그런데 어째 정현과 희철은 저만치나 떨어져 있었다. 

고개 질을 힘차게 좌우로 하는 걸 보아 근처에도 오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혼자서 끌어올리긴 너무 무거웠다. 이리 와서 도우라고 수신호를 보내니 둘은 그제야 마지못해 다가오며 시체를 위로 밀어 올렸다. 

옷을 입고 축 늘어진 사람을 수면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푸아!”

가까운 뭍으로 끌어올린 세 사람은 건져 올린 사람의 정체부터 확인했다.

얼굴을 보니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정현

 “뭐, 뭐야!? 김민주 아니야?”

희철

 “죽었나? 형, 혹시 죽은 거 아니에요?”

정현

 “아직 얼굴색 괜찮은 거 보니까 방금 빠진 거 같은데? 혹시 오늘 여기 근처에서 촬영한다는 소리 못 들었어? 아니면 혹시, 자살인가!?”

희철

 “아! 그러고 보니 근처에서 영화촬영 한다고 했던 거 같아요. 그게 여기였었나?”

정현

 “야, 숨을 붙어있냐?”

정현과 희철이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라 그런지 말에도 두서가 없었다. 

하기야 이런 일을 처음 겪는데 침착한 게 오히려 더 이상 한 거다.

그 와중에서도 가장 정신을 못 차리는 건 경훈이었다.

정현과 희철은 처음 봤다. 

저토록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경훈의 모습은.

정현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정현

 “야! 서경훈! 뭐해? 숨 쉬나 빨리 확인하라니까!?”

정현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훈이 그제야 민주의 호흡을 확인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경훈은 거의 반사적으로 민주를 눕히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호흡을 불어넣고, 심장을 압박하고.

경훈

 “이봐요!!! 정신 좀 차려보라고!!! 김민주 씨!!!”

호흡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에는 뺨을 때리고,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또다시 반복.

호흡을 넣고, 심장을 압박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점점 심폐소생술을 행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경훈의 얼굴도 변해갔다. 종내에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최근 들어 이토록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았다. 

18년 전. 

이맘때쯤. 

그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훈

 “이봐!!! 정신 차리라고! 제발 정신 좀 차려!!!”

경훈의 외침이라도 들을 것일까?

쿨럭. 

마침내 민주의 입이 벌어지더니 한 줌의 물을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경훈이 반색하며 서둘러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마저 남은 물을 게워내게 하고, 고개를 돌려놓은 채로 몸을 다시 반듯이 눕혔다.

호흡이 돌아왔으니 일단 고비는 넘긴 셈이다. 

“휴.”

순간 세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경훈의 얼굴이 제일 볼만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툭 건드리면 그대로 쏟아낼 것 같았다.

그것을 놓칠 정현이 아니었다.

정현

 “뭐냐? 누가 보면 마누란 줄 알겠다? 너 혹시 울고 있는 건 아니지?”

경훈

 “시끄러워 인마! 빨리 119나 불러!”

희철

 “형! 제가 이미 불렀어요.”

꿈틀.

민주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정신이라도 차린 것일까? 

눈꺼풀이 떨리더니 슬그머니 올라갔다. 

경훈이 그것을 발견하고 민주의 뺨을 때렸다.

경훈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눈이 닫히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이다.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민주를 외치며 일행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민주가 사라진 것을 안 일행들이 민주를 찾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희철이 두 손을 교차시키며 존재를 알렸다.

희철

 “여기예요! 여기! 김민주 씨 여기 있어요!!!”

소리를 들은 그들이 민주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다가왔다. 그리고 의식을 잃고 있는 민주를 확인했다.

정수

 “누, 누나!!!”

채연

 “언니!!!!!”

때마침 응급차가 도착하고, 119대원들이 민주를 급히 응급차에 실었다. 

매니저인 정수가 응급차에 타기 전 명함을 한 장 꺼내 경훈에게 내밀었다.

정수

 “지금은 경황이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일단 병원에 가야 해서…. 이거 받으세요. 제 명함입니다. 차후에 연락해주시면 사례해 드릴 테니 연락 한번 주세요. 그럼.”

말을 마친 정수가 응급차에 급히 따라 타고, 채연이 그 옆을 지켰다. 

스태프들은 수군거리며 현장으로 돌아갔다.

정신없는 순간이 지나가고 정현이 중얼거렸다. 

정현

 “그래도 살아나서 다행이네. 이야, 그런데 구조해낸 사람이 천하의 김민주일 줄이야.”

희철

 “그러게요. 형. 저도 깜짝 놀랐잖아요. 그런데 뭣 때문에 바다에 빠졌을까요?”

정현

 “나야 모르지. 아무튼, 운이 좋았어. 우리가 마침 그곳에 없었더라면 아마 김민주 씨는 죽었을걸?”

희철

 “그건 당연하죠. 난 처음에 뭐가 시커먼 게 있길래 영락없이 시체인 줄 알았다니까요!?”

정현

 “너도? 나도 나도! 처음엔 나도 시첸 줄 알고 완전 식겁했다니까!?”

정현이 희철이 떠들다 말고 경훈을 툭 하고 밀쳤다.

정현

 “야, 근데 아까부터 멍하니 뭐하냐?”

경훈

 “……겠지?” 

정현

 “뭐라고?”

경훈

 “민주 말이야…. 괜찮겠냐고?”

정현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내가 의사냐?”

경훈

 “…….”

정현

 “뭐, 목숨에는 크게 지장 없겠지. 좀 쉬면 나을 거야. 그런데 뭐냐 너. 마치 아는 사람처럼 그렇게 막 다정하게 부르고. 너 좀 수상해. 혹시 김민주 씨 아는 사이냐?”

경훈

 “글쎄.”

정현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글쎄는 또 뭐냐?”

경훈

 “뭐, 그런 게 있어.”

정현

 “그래서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저놈 진짜 수상하네.”

정현이 눈을 흘기며 대답을 재촉했다. 

허나, 애초에 경훈은 친절하게 대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경훈은 옆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장비를 챙기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정현

 “뭐야 쟤!? 야! 같이 가 인마! 같이 가자니까!?”

***

다음 날. 

민주가 입원해 있는 VIP 병실. 

우걱우걱.

민주

 “야, 정수야. 거기 있는 콜라 좀 따라줘 봐봐.”

민주는 왼손으로 피자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남은 한 손은 피클을 집어 먹기 위한 포크대용이다. 

콜라를 따라 먹기 위한 손 따윈 없었다. 

민주

 “뭐해!? 빨리 콜라 좀 따라달라니까?”

정수가 한숨을 쉬며 콜라를 잔에 따라 내밀었다.

정수

 “어휴, 누나. 천천히 좀 드세요. 그러다 체하겠어요.”

민주

 “야, 인마. 내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아? 촬영한다고 전날부터 굶어. 또 물에 빠져 실신해있느니라 하루를 굶어. 꼬박 이틀을 굶었다고. 그런데 지금 나한테 먹는 거 가지고 구박 주는 거니?”

정수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렇게 막 먹어도 되나 싶어서요.”

민주

 “야, 걱정 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위장은 끝내주게 튼튼해. 다른 연예인들은 다이어트네 뭐네 하면서 위염, 위장병 그딴 거 달고 사는데 난 여태껏 위 때문에 병원 간 적은 한번 도 없어. 아악…!!!”

피자를 또다시 구겨 넣던 민주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렸다.

정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수

 “왜요. 왜!? 무슨 문제 있어요? 어디 아파요!?”

민주

 “아니, 그게 아니라…. 피자 먹고 있으니까 치킨도 먹고 싶어서 그러지.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지금 시키기엔 너무 늦었겠지? 오븐에 구운 그 바삭한 치킨 껍질이 엄청 땅기는 데 말이야.”

정수

 “누나!!!”

정수가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정수

 “아이씨, 어디 아픈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그리고 지금 혼자 피자 한 판 다 드셨어요! 그런데 그런 말이 나와요!?”

민주

 “뭐!?”

민주가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앞에 놓인 피자 상자를 쳐다봤다.

앞에 놓인 L 사이즈 피자 한 판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툭.

들고 있던 피자 조각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공이 확장되고, 입이 벌어졌다.

마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

민주

 “뭐야!? 피자 다 어디 갔어? 정수 니가 먹었니? 채연이 니가 다 먹었어!?”

옆에 서 있던 정수와 채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민주

 “뭐야!? 그러면 설마 내가 피자 한 판을 다 먹었다는 거야!? 하느님, 맙소사.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피자 한 판을 다 먹어. 그것도 라지 사이즈를! 이게 다 몇 칼로리야? 어디 보자 피자 한 조각에 400㎈라고 잡고, 8조각이니까 3,200㎈? 오, 마이 갓!”

절규하는 모습이 마치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민주

 “아, 내가 미쳐 돌아. 내일 당장 촬영을 어떻게 하라고. 너넨 옆에서 안 말리고 뭐 했니? 아니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수야. 빨리 의사쌤 불러와 봐.”

정수

 “갑자기 의사 선생님은 왜요?”

민주

 “피자 먹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뭐, 음식물을 빨리 분해하는 그런 주사 같은 거 한방 놔달라고 하면 안 될까?”

정수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민주

 “그런 거 없나? 아직 없어? 아직 현대 의학으로 그런 거 못 만들었어!?”

민주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수의 음성은 단호했다.

정수

 “네. 없어요. 그런 거.”

민주

 “아악! 악! 아악악!!!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이럴 게 아니라 빨리 헬스장부터 가자. 운동하고 불가마에서 땀 좀 쫙 빼면 어떻게든 되겠지. 빨리 퇴원 수속부터 밟자. 뭐해? 옷 안 챙기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민주를 보고 정수가 피식거렸다.

혹시나 민주가 어떻게 되나 싶어서 한숨도 못 자고, 채연과 같이 병실을 지킨 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깨어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저렇게 사람이 쌩쌩하게 살아날 수 있을까 싶었다.

정수

 “이제 완전히 살아나셨네! 우리 누나. 걱정 마세요. 대표님이 며칠 동안 촬영 빼준다고 집에서 푹 쉬시라고 했어요. 감독님이랑도 이야기 다 끝냈으니까 3, 4일 정도 푹 쉬시고 촬영 준비하시면 될 것 같아요. 운동도 천천히 시작하시고요.”

다 죽어가던 민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눈동자에는 생기마저 돌았다.

민주

 “진짜!? 그 말 진짜지!?”

정수

 “네.”

민주

 “아싸!!!”

정수

 “그렇게 좋으실까? 다들 걱정한 것도 모르시고.”

민주

 “얘는…. 걱정도 사서 한다. 나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도 한번 물에 빠질 뻔한 적이 있었는데도 살아났잖아. 이번에도 그렇고. 아무래도 난 물에 빠져 죽을 팔자는 아닌가 보지. 전생에 용왕님. 아니, 인어공주쯤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물을 무서워하는 거 보면 참 이상하단 말이야. 씻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물이 나랑 잘 안 맞나?”

민주가 떨어트린 피자 조각을 냉큼 다시 집었다.

정수

 “또 드시게요?”

민주

 “그러면 먹던 걸 아깝게 버리니? 뭐, 내일부터 빡세게 운동하면 되니까. 콜라 한 잔만 더 줘봐라. 정수야. 으음. 역시 피자는 불고기 피자가 짱이라니까.”

몸서리치게 좋아하는 민주를 보자니 피자가 저렇게 맛있는 음식인가 싶을 정도였다.

세상 다 가진 듯한 행복한 표정.

대한민국을 들썩 이는 스타가 겨우 피자 한 조각에 저런 표정을 짓다니.

정수

 “그렇게 맛있으세요?”

민주

 “그러엄. 작년 크리스마스 때 이후로 처음 먹는 건데 완전히 꿀맛이네. 아참, 근데 정수야.”

정수

 “네, 누나.”

민주

 “나 또 꿈꿨다?”

정수

 “꿈요? 아, 혹시 가끔 꾸신다는 그 꿈요? 물속에 빠진 누나를 누가 구해주는 꿈 말이에요?”

민주

 “그래. 그런데 이번에는 요상한 게 말이지…. 이전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어. 얼굴도 희미하게 보인 것 같고. 꽤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이야. 아참,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나 빠지면서 누가 구해줬다고 그랬지? 남자 셋? 연락처는 받아놨어?”

정수

 “제가 경향이 없어서 연락처를 받진 못하고, 제 명함을 줬어요. 뭐, 기다리면 전화 오겠죠.”

민주

 “얼굴은? 얼굴은 잘생겼어?”

정수

 “누나도 여자라고 얼굴 따지는 거예요?”

민주가 우물 쭈물거리며 대답했다.

민주

 “아니 뭐. 내가 꼭 그렇대? 그냥 나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가 싶어서 궁금해서 그런 거지…. 그리고 이왕이면 못생긴 것보단 잘생기면 더 좋지 않겠어?”

평소에는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 굴기 일쑤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여자다.

정수

 “셋 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어요. 스쿠버 다이빙하는 사람들 같던데.”

민주

 “그래!? 그러면 혹시 내가 본 게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정수

 “그거야 모르죠. 그런데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누나 물에 빠진 다음부터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면서요?”

민주

 “으음. 그건 그렇지만….”

정수

 “전화 와서 직접 보면 알게 되겠죠.”

민주

 “그래, 만약에 전화 오면 나한테도 꼭 알려줘. 알았지!?”

정수

 “네, 알겠어요. 누나.”


츤데렐라12화 - 내 이름은 서경훈 (1)

12. 내 이름은 서경훈.

정신없던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 스포츠센터에 출근한 경훈을 누가 불러 세웠다.

정현이었다.

정현

 “야, 경훈아. 이거 봤냐? 김민주 기사?”

정현이 자신이 스마트폰을 통해 보고 있던 기사를 경훈에게 내밀었다.

[김민주 실족사 될 뻔.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이를 두고 네티즌 갑론을박.]

와, 대박. 해녀가 물에 빠져? 완전 코미디 ㅋㅋㅋ

 ┗ 그러게요. 이번 영화 완전 망할 각. 감독님. 지금이라도 여주 교체하심이?

   ┗ 뭐야, 김민주 또 영화 찍어요? 아직 정신 못 차렸네.

     ┗ 수영도 못하는 게 웬 해녀 역? 보나 마나 대역 빨. 그냥 대역을 여주로 ㄲㄲㄲ

정현

 “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냐? 아무리 네티즌들이 생각 없는 초딩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죽을 뻔한 사람한테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리고 김민주가 실제로 해녀야? 역할이 해녀인 거지. 하여간 우리나라 네티즌 수준이 겨우 이것밖에 안 돼요. 쯧쯧.”

보다 못한 정현이 한마디를 터트렸다.

경훈

 “이리 줘 봐!”

댓글을 보고 폭발한 경훈이 정현의 스마트폰을 뺏어 들고 화면을 두들겼다.

정현

 “뭐하게?”

경훈

 “가만히 있어 봐.”

틱. 틱. 틱. 틱.

[죽을 뻔한 사람한테 너무들 하시는 거 아니에요? 위로는 못 해줄망정. 진짜 너무들 하시네.]

띠링.

┗뭐야. 혹시 김민주 팬? 

띠링.

┗냄새가 나는데? 

틱. 틱. 틱. 틱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데 그냥 보고 있자니 너무하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띠링.

┗아무 상관 없는데 웬 열폭? 너 혹시 김민주 매니저?

 ┗아닌데요.

  ┗그럼 알바냐? ㅋㅋㅋ 김민주 돈 많네. 알바도 사서 댓글도 달고.

경훈

 “이런. 씨!”

가만히 내버려두면 영락없이 핸드폰을 부술 기세라 정현이 급히 핸드폰을 뺏었다.

정현

 “참아 인마. 뭐 이런 글에 흥분해서 댓글을 달고 그래?”

경훈

 “아오, 저런 새끼들은 모두 고소해서 감방에 보내 버려야 해. 뭐, 저런 새끼들이 다 있어!?” 

정현

 “미친놈. 악플 단다고 감방 가면 우리나라 교도소가 어디 남아나겠냐? 그리고 너 뭐냐? 남의 일이라고는 관심조차 없던 애가 너답지 않게 댓글 같은 걸 달고? 도대체 왜 그래? 아…. 너 혹시…?”

경훈

 “혹시 뭐!?”

정현

 “김민주한테 푹 빠졌냐? 하긴 그때, 네 눈빛이 이상하긴 하더라. 뭐야. 드디어 서경훈이 31년 만에 첫사랑에 빠진 거냐!?”

경훈

 “미친놈.”

정현

 “근데 이거 축하해줘야 하는 거냐? 말아야 하는 거냐? 하필 상대가 연예인이라니.”

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희철

 “난 찬성! 연예인도 사람인데요. 뭐. 그냥 만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언제 왔는지 희철이가 손을 들며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정현은 완고했다.

정현

 “난 반대! 연예인이 좀 바빠? 사귀게 된다고 해도 얼굴 볼 시간이나 제대로 있겠어? 더군다나 언론에 노출돼봐. 평소에도 사진 같은 거 찍기 싫어하는 저놈이 참도 좋아하겠다.”

희철

 “에이, 그래도 김민주인데요?”

정현이 심히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

 “하긴…. 김민주가 보통 연예인은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난 반대!”

희철

 “왜요!? 김민주가 어때서요!?”

정현

 “난 기센 여자는 딱 질색이거든. 난 순종적인 여자가 좋아.”

희철

 “그건 형 취향이고요! 경훈이 형 취향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정현

 “경훈이도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할걸? 안 그러냐?”

정현이 팔꿈치로 경훈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동의를 구했다.

경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떡 줄 놈들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김칫국물부터 마시고 있는 놈들. 

그때 정현이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정현

 “아! 그러고 보니 김민주 매니저가 명함 주지 않았어? 그거 어쨌어? 경훈이 니가 받지 않았어?”

경훈

 “명함? 그거 버렸는데?”

정현

 “뭐!? 그걸 왜 버려!? 매니저가 사례한다고 전화 달라고 하지 않았어!?”

경훈

 “사람을 구하면 잘한 일이지 뭔 사례. 넌 돈 받으려고 사람 구하냐?”

정현이 금방 그 말에 수긍했다.

정현

 “하긴 네 말도 맞네. 괜히 전화하면 사례비 요구하는 것 같고 조금 그렇긴 하겠네…. 역시 서경훈! 내 친구답다! 그래도 아깝긴 하네. 김민주랑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너 김민주 좋아하잖아!?”

경훈

 “됐어 인마! 그리고 좋아하긴 아까부터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그래!?”

정현

 “뭐, 그건 지나간 일이니까 잊어버리고. 그보다 주말에 소개팅 있는 거 알지? 빠지면 절대 안 돼! 너 포함 3명이니까 무조건 참석이야. 오케이?”

그 말을 들은 희철이 귀가 번쩍 떠졌다.

희철

 “형, 이번 주에 소개팅해요!?”

정현

 “어, Y 여대 무용과 4학년들.”

희철

 “와! 진짜요!? 형 나도 나도!!!!”

개 껌을 코앞에 둔 강아지처럼 희철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정현이 그런 희철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정현

 “아무렴. 내가 널 빼놓았을까 봐!?”

함지박만 한 미소가 입가로 번졌다.

희철

 “아싸! 역시 형밖에 없어요! 평생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님.”

정현

 “오냐.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아우.”

***

우림아파트 B동 앞에 있는 놀이터. 

끼익. 끼이익. 

끼익. 끼이익.

쇠와 쇠가 맞닿아서 나는 그네 소리가 고요한 침묵을 깨고 요란스럽게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텅 빈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경훈이었다.

누구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경훈의 시선이 B동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을 향하기를 반복했다.

동네주민1

 “어!? 1203호 총각 아니야? 밤늦은 시간에 안 자고 놀이터에서 뭐해?”

지나가는 행인이 경훈을 보고 아는 체를 해왔다. 

같은 동에 사는 동네 주민이었다.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경훈

 “아, 안녕하세요. 그냥 잠이 안 와서 바람이나 쐬려고 나왔어요.”

동네주민1

 “그래? 그러면 먼저 들어갈게. 나중에 보자고.”

경훈

 “예, 들어가세요.”

숙인 고개가 펴지기가 무섭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경훈

 “휴…. 오늘은 안 올 모양인가?”

그때 B동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흔히 연예인 차량이라고 말하는 하얀색 밴 차량이었다.

경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파트로 들어가는 현관문에 앞에 도착한 것과 밴이 현관문 앞에 정차한 것은 비슷한 시간에 이루어졌다. 

드르륵.

벤 차량의 문이 열리고,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민주

 “오늘 수고했어. 가는 길에 채연이 잘 데려다주고.”

정수

 “네. 누나.”

민주

 “그러면 들어가. 운전하면서 졸지 말고.”

정수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내일 전화 드릴게요.”

민주

 “어, 그래.”

땅바닥에 발을 딛고 내린 것은 다름 아닌 김민주였다.

차를 돌려보내고 고개를 돌린 민주는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낯익은 사내를 발견했다.

민주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민주

 “어!? 이게 누구야? 1203호?”

말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경훈의 걸음도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경훈

 “이 시간에 오는 겁니까? 12시가 다 된 시간에?”

경훈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민주

 “흥, 남 이사 늦게 오든 말든 뭔 상관이래요? 아참! 그리고 전에 말한 그 반상회 있잖아요. 그거 내가 알아보니까. 어맛!?”

경훈은 민주가 종알거리든 말든 그녀의 몸을 잡고 앞, 뒤, 옆. 심지어는 머리까지 이리저리 둘러봤다.

민주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경훈

 “아, 다쳤다고 해서. 지금은 괜찮은가 해서.”

민주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요? 그런데 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예요?”

경훈

 “TV에 온통 김민주 씨 이야기뿐이던데. 그걸 내가 모를 리가. 몸은 좀 괜찮아요? 혹시 떨어지면서 머리 부딪히진 않았고?”

민주

 “뭐, 검사결과 이상 없다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퇴원을 했죠.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보니까 아까부터 은근히 계속 반말이네? 왜 계속 반말해요?”

경훈

 “같은 동네 살고. 오늘로써 세 번째 만남이고. 딱 봐도 내가 나이가 더 많고. 아줌마들하고는 잘만 친하게 말하던데. 나도 말 좀 편히 하면 안 됩니까?”

반박할 수 없는 당당함이란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리일까?

민주는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남 때부터 그랬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하고. 지금도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은근슬쩍 반말 섞어 사용하고.

그런데도 하는 행동이나 말들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민주

 “그건 그렇고! 1203호 씨. 반상회 벌금 걷는 거 불~법인 거 알고 있어요!?”

경훈

 “서경훈.”

민주

 “네?”

경훈

 “제 이름이 서경훈이라고요. 1203호 씨가 아니라.”

민주

 “아니 뭐, 그거나 그거나.”

경훈

 “서. 경. 훈.”

민주

 “아, 뭐 좋아요. 서.경.훈.씨! 반상회 벌금 걷는 거 불~법인 거 아시냐구요. 듣자하니 그런 건 안내도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경훈

 “물론 압니다. 반상회 나오시는 분 중에 직업이 변호사이신 분도 계시니까요. 내가 설마 그걸 몰랐을까 봐?”

민주

 “네? 알고 있다고요? 하…!?”

민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적잖아 당황했다.

당연히 모를 줄 알고 어떻게 반격을 해서 한 방 먹여줄까? 그 생각뿐이었는데, 오히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당당하고 저 자신만만한 태도가 더 기분 나빴다.

민주

 “알고도 벌금 막 걷고 그래도 돼요?”

경훈

 “혹시 아파트 뒤편. 10분 거리 정도에 생활 복지관 있는 거 알아요?”

민주

 “복지관이요? 갑자기 말하다 말고 웬 복지관? 오호라, 할 말이 없으니까 화제를 전환하는구나? 그렇게 말 돌리면 누가 그냥 넘어갈 줄 알고!?”

꼬투리를 잡은 민주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민주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민주를 보고 경훈이 피식거렸다.

이 상황을 역전시킬 카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경훈은 초지일관이었다.

경훈

 “일단 들어보시죠. 그곳엔 주로 갈데없는 어린아이들이나 거동 불편한 어르신들. 뭐, 식사 하러 오는 노숙자들도 있고. 대부분이 사회에서 외면받은 소외계층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우리 동뿐만 아니라 다른 동에서 모인 반상회 불참 벌금은 모두 그곳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부 후원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거 알아요. 김민주 씨? 우리나라에 소외계층 중엔 돈이 없어서 하루에 밥 한 끼 못 사 먹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걸?”

민주

 “진짜요? 에이, 설마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돈이 없어서 밥을 굶고 그래요?”

경훈

 “김민주 씨는 어려서부터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자라서 잘 모르나 본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주위에.”

사실 여부는 당장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 같아 보이진 않았다.

경훈의 나지막한 어투와 표정. 

거짓말을 할 상황과 분위기는 아니었다.

민주는 저도 모르게 경훈을 통해 그러한 상황들을 납득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경훈

 “아무튼. 반상회에서 모인 벌금과 동네 주민들이 보태주신 후원금으로 봉사자분들과 함께 한 번에 한 번꼴로 복지관에 가서 무료로 급식을 나눠주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원봉사 같은 거죠.”

민주

 “아. 그러셨구나…. 그러니까 그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시죠?”

경훈

 “뭐, 비슷합니다.”

민주

 “아하, 좋은 일 하시고 계셨구나.”

따지자고 달려들었지만, 점점 말소리는 작아져 나중에는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 되었다.


츤데렐라13화 - 내 이름은 서경훈 (2)

13. 내 이름은 서경훈 (2)

경훈

 “뭐, 사실 우리 동네 주민들 중에 벌금 아까워서 못 낼 정도로 못사는 분들은 안 계시고, 굳이 안 내겠다고 하시는 분들한테는 억지로 받지 않고 있습니다. 김민주 씨도 내지 않겠다고 하시면 받지 않겠습니다.”

민주가 발끈하며 외쳤다.

민주

 “아니, 누가 안 내겠대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기분 나쁘네!? 그런 거라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이제 와서 돈 몇 푼에 쪼잔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요? 사람 이상해지게? 나, 생각만큼 그렇게 쪼잔하고 옹졸한 사람 아니거든요? 해마다 불우이웃이다 뭐다 기부도 많이 하고 그래요. 나.”

경훈

 “아,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민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일부로 중요한 말은 쏙 빼먹고! 지금 저를 돈 몇 푼에 쪼잔하게 구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있잖아요. 처음부터 이래저래 해서 걷는 돈은 불우이웃에게 쓸 거라고 말하면 누가 안 냈을까 봐요?”

경훈의 표정에서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생각을 해보니 민주의 말이 옳았다.

이런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누가 뭐래도 경훈이었다.

경훈이 장난기 섞인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민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경훈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한 거 같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민주였다.

민주

 “아니, 뭐 그렇게 정색을 하시고 사과하실 것까지야. 사람 민망하게….”

경훈

 “아닙니다. 듣고 보니 제가 잘못한 것 같네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사과다.

행동과 말투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쌓인 것이 몇 마디의 말에 풀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적의는 풀어졌다.

민주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뭐…. 그런데 의외네요? 자원봉사 같은 건 전혀 안 하게 생긴 얼굴인데.”

경훈

 “네?”

민주

 “아, 아니에요. 그보다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서 그러니까 내일 계좌이체로 해드릴게요.”

경훈

 “네. 그러세요. 문자는 가지고 계시죠? 적힌 계좌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민주

 “알았어요.”

민주는 경훈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사람의 온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경훈

 “그러면 내시는 거로 알고 밤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는 길이죠? 같이 엘리베이터 타시죠.”

민주

 “네. 뭐.”

***

밀폐된 공간. 

어색한 기류.

뭔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민주 혼자만 느끼고 있는 기분일 수도 있었다.

어색함을 깨고자 민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주

 “아니, 근데. 나는 퇴근했다 치고, 그쪽은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이 늦은 시간에? 친구들 만나고 오셨나? 아니면 데이트?”

경훈

 “친구들 만나고 돌아오는 중입니다.”

민주

 “아하, 친구들? 그러셨구나.”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경훈이 민주를 한번 힐끔거린 뒤 말을 이었다.

경훈

 “그리고 저 여자 친구 없습니다.”

민주

 “아하, 여친 없으셨구나. 하긴 뭐, 성격이 그러면….”

말꼬리를 교묘하게 흘리며 눈을 흘기는 게 알만하다는 얼굴이었다. 

경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훈

 “뭡니까? 그런 표정은?”

민주

 “아니 뭐…. 누가 뭐래요? 나는 아무 말도….”

‘꼬르륵.’

꽤 큰소리였다.

어디서 발생한 소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정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종알대던 민주의 입이 슬그머니 들어가며, 민망한 듯 눈동자를 돌렸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맴돌고 민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을 흘렸다.

민주

 “호호호호, 제가 오늘 하루 종일 먹지를 못했더니 배가 좀….”

정수가 들으면 기겁을 할 소리를 민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꼬르륵.’

“풉.”

또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기어이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사실 경훈이 웃는 것은 뱃속에서 나는 소리보다도 ‘아이씨.’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배를 매만지는 민주의 표정이 더 웃겼다.

경훈

 “배가 많이 고프신가 봐요?”

민주

 “호호호. 뭐, 조금?”

경훈

 “다이어트 중? 지금도 충분히 말라 보이는데….”

민주가 반색하며 넙죽 그 말을 받았다.

민주

 “그렇죠!? 사실 제가 잘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은 아닌데, 그놈의 카메라가 뭔지…. 1kg만 쪄도 시청자들이 보톡스를 맞았네, 관리 안 하네. 악플들을 워낙 다는 바람에 제대로 못 먹지도 못해요. 사실, 오늘도 먹은 거라고는 샌드위치 한 조각이랑 요구르트 하나가 다예요. 그러니 배가 안 고프고 배기겠어요?”

민주는 낮에 피자 한 판을 다 먹어치웠으면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민주

 “이럴 땐 집에 가서 양푼에다가 갖은 나물 넣고 비빔밥 해먹는 게 짱인데. 참기름 몇 방울 딱 넣고. 아이씨…. 말하고 나니까 또 군침 도네. 아, 먹고 싶다. 비빔밥.”

입맛을 다시는 민주를 보고 경훈이 또 한 번 피식거렸다.

경훈

 “아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으면 되죠? 그게 뭐 어렵습니까?”

민주

 “아, 됐고요. 댁은 말해도 몰라요. 연예인의 고충이 뭔지. 휴우….”

민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태어나면서 죽을 순간까지도 모를 것이다.

특히 그 대상이 남자라면 더욱더.

보통 여자도 아니고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다.

먹을 것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스트레스는 당사자가 돼보지 않는 이상 절대 알 리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여자 배우로써 살아가는 삶이 결코 생각만큼 만만하진 않았다.

띵-!

한참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춰선 곳은 12층에서였다.

그와 동시에 민주의 말도 끊겼다.

민주

 “다 왔네요. 잘 가세요.”

경훈

 “네. 그러면 조심히 들어가세요.”

경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문이 닫혔다. 

경훈은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내비쳤지만, 그에 반면 민주는 다른 곳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민주

 “아, 배고파. 왜 이렇게 허기가 지지? 딱 오늘까지만 더 먹을까? 어차피 나흘 동안 쉴 거니까 운동 더 하면 되잖아? 아, 그래. 그래야겠다. 그런데 집에 남은 찬밥이라도 있으려나? 저번에 보니까 나물도 몇 가지 있던 거 같던데. 그거 아직도 있으려나?”

자신과의 타협을 마친, 13층에 도착한 민주가 나는 듯 발걸음을 빨리했다.

***

띠리링-! 

철컹-!

민주

 “야, 김승훈! 누나 왔다! 어라? 웬일이냐?”

민주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거실에 나와 있는 승훈을 보고 민주가 반색했다.

민주

 “컴퓨터 귀신이 웬일로 컴퓨터를 안 하고 있대?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승훈

 “…….”

민주

 “밥은…?”

총총걸음으로 승훈 앞에까지 온 민주가 승훈의 어깨를 툭 하니 밀쳤다.

민주

 “야, 뭐냐? 누나 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하기냐?”

승훈

 “으으으으.”

그러든 말든 승훈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원래부터 감정의 변화가 많지 않은 녀석이었다.

웬일인지 오늘따라 안색이 더욱 어두웠다.

뭔가 아주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민주도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민주

 “왜? 뭔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승훈

 “됐어. 누난 말해도 몰라.”

민주

 “뭔데 그래? 심각한 거야!?”

승훈

 “으으으으으. 난 망했어.”

민주

 “아, 뭔데!? 뭐냐고!?”

계속되는 치근거림에 승훈이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승훈

 “아, 글쎄…. 나 조금 전 4연패 당했어.”

민주

 “뭐? 뭔 4연패?”

승훈

 “게임! 게임 말이야! 나 랭겜에서 4연패 당했다니까!?”

민주

 “…….”

민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눈썹이 역방향으로 반달처럼 휘어졌다. 

입술 꼬리가 실룩이는 걸 겨우 끌어내리고는 말했다.

민주

 “그러니까. 지금 게임을 하다가 졌다고 이 난리는 피우는 거라고?”

승훈

 “게임이 아니라 랭게임! 무려 4연패라고! 완전 발렸어. 허접 같은 놈들이었는데. 그것도. 내가 캐리하고 있는 게임을! 이 챌린저님께서! 으아악!!! 난 망했어! 완전 개망 했다고!!!”

민주

 “아, 난 또 뭐라고? 하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열을 내냐? 다시 이기면 되잖아?”

승훈

 “으아아악!!!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이래서 누나한테는 말해도 모를 거라고 그랬지!? 그게 생각처럼 쉽다면 개나 소나 전부 챌린저겠지. 도대체 누나랑은 대화가 안 돼! 대화가!”

따악!

기어코 억누르고 있던 민주의 손바닥이 승훈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승훈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소리쳤다.

승훈

 “아! 왜 때려!!!”

민주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러면 부둥켜안고 위로라도 해주랴?”

승훈

 “아씨! 누나는 내 맘 몰라!”

민주

 “별로 알고 싶지도 않거든? 그보다 밥은? 밥은 먹었어?”

승훈

 “아, 몰라! 나 지금 완전 멘탈 털렸으니까 말 시키지 마! 혼자 있고 싶으니까!”

쾅!

승훈은 결국 토라져서 지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기어이 민주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민주

 “어이구…. 아주 지랄 납셨네. 고작 게임에 몇 번 졌다고 저 난리래? 챌린저? 그건 또 뭔 소리야?”

승훈 입장에서야 어찌 됐던 별문제가 아니란 것을 안 민주가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밥통을 뒤졌다.

지금은 저렇게 삐쳐있어도 몇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게임을 붙잡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민주

 “오케이. 밥은 있네. 다음은 반찬.”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짐승처럼 민주의 행보는 냉장고로 이어졌다.

민주

 “콩나물이랑…. 김치…. 아이씨…. 이거밖에 없어? 시금치 없나? 비빔밥에는 시금치가 들어가야 하는데….”

냉장고를 뒤져도 넣을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과 김치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반찬 통 2개를 꺼내 든 민주가 선반에서 꺼낸 양푼에 밥과 반찬을 때려 부었다.

고추장도 한 숟가락 넣은 민주가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선반을 뒤적였다.

민주

 “어라? 참기름이…. 없나?”

요리재료를 모아놓은 선반에는 없었다. 

서랍 속에도 없고, 냉장고 속에도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민주

 “아이씨, 뭐가 이렇게 없는 게 많아? 비빔밥은 참기름을 넣어야 고소한데…. 그러고 보니 달걀도 없고.”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민주가 투덜거렸다.

민주

 “나가서 사와?”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안 나갔을 테지만, 지금 민주의 머릿속에는 잘 버무려진 비빔밥 생각만이 가득했다. 

본능은 귀차니즘을 이긴다.

꽂힌 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민주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민주

 “안돼! 둘을 빼놓고는 비빔밥이라 할 수 없지. 나가서 사와야겠다.”


츤데렐라14화 - 비빔밥 사건

14. 비빔밥 사건

편의점 안.

모자를 눌러쓴 민주가 편의점 바닥을 휩쓸면서 두리번거렸다.

없다. 없어. 

아무리 둘러봐도 찾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

 “뭐야!? 편의점에서 참기름 안 파나? 저기요? 여기 참기름 없나요?”

찾다 못 찾은 민주가 카운터에 점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직원에게서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점원

 “죄송합니다. 저희 매장에는 참기름이 없습니다. 전에는 갖다 놨는데 워낙 찾는 손님들이 없어서요.”

민주

 “아, 네….”

실망감만 가득 안고 민주는 달걀 2알만 손에 덩그러니 쥔 채 편의점을 나왔다.

***

터벅터벅.

올 때는 비교적 가벼운 발걸음이었으나 달걀 2알 쥐고 돌아가려니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기분까지 꿀꿀해 졌다.

민주

 “아이씨…. 그놈의 참기름이 뭐라고 내가 지금, 이 고생이야? 어디 파는 데 없나? 몇 방울만 있으면 되는데…. 옆집에 가서 빌려달랄 수도 없고….”

그때 민주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민주

 “아, 그렇지. 1203호!”

하지만 이내 도리질을 했다.

민주

 “아니야. 아니야. 뭐 친한 사이라고 참기름을 빌려달라고 그래? 더군다나 이 시간에 비빔밥 먹게 참기름 좀 빌려달라고 그러면 나를 어떻게 보겠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 같기도 했다.

민주

 “아니지. 뭐 내가 돈을 빌려 달래? 고작 참기름 몇 방울인데? 어려울 때 돕고 살아야 이웃 사촌이지. 왜, 이사하고 그런 날에는 옆집에 망치도 빌리고 그러잖아? 뭐,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민주

 “아니야. 그래도 조금….”

민주

 “아니지!?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민주

 “아이씨…. 미치겠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민주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민주

 “아니 이게 뭐 고민할 문제라고?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직접 찾아가긴 조금 그러니까…. 일단 문자를 해야겠다. 번호가 어디 있더라…?”

***

띠링-!

느닷없이 온 문자 메시지에 경훈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자정이 넘는 시간. 덩그러니 온 문자의 내용이 가관도 아니었다.

민주

 ‘혹시 집에 참기름 있어요?’

발신지는 김민주.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마저 났다.

경훈

 “첫 문자를 참기름으로 시작할 줄이야. 진짜로 집에 가서 비빔밥 해먹으려고 했나 보네. 참기름이 다 떨어졌나?”

경훈이 피식 웃으며 답장했다.

***

답장이 온 것은 민주가 경비실 초소를 막 지났을 때였다. 

띠링-!

민주

 “어, 왔다. 왔어! 어디 보자….”

경훈

 [있어요. 빌려드려요?]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본 민주가 환호성을 질렀다.

민주

 “오케이! 좋았어!”

신들린 속도로 답문을 보냈다.

민주

 [지금 가지러 갈 테니까 문 앞에서 만나요.]

경훈

 [집 앞요? 그냥 집으로 와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민주

 “엥? 왜 집으로 오래? 이 시간에?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

왠지 내키지 않았다. 

경계심이 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남자 혼자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다.

민주

 [그냥 갖고 나오시면 안 돼요?]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내고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12층에 도착하고 문 앞에 갈 때까지도.

민주

 “아, 뭐야…. 왜 답장이 없어? 전화해볼까?” 

결국, 민주는 서성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도 민주는 괜히 다른 사람이 볼까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카메라에 많이 노출되는 연예인이다 보니 주변을 살피는 것은 본능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달칵.

경훈은 조금 전에 봤던 그 차림 그대로였다.

경훈

 “아, 왔어요?”

민주

 “미안해요. 집에 참기름이 떨어져서. 편의점에 갔는데 팔질 않아서….”

경훈

 “아, 잠깐만 기다려요. 그러지 말고 들어와요.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문을 연 경훈이 몇발자국 움직이면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민주는 여전히 삐죽거렸다.

민주

 “아, 그래도 남의 집에 막 들어가는 건 조금…. 그냥 빨리 줘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경훈

 “나도 지금 참기름을 써야 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들어와서 기다려요. 모기 들어온다니까? 얼른 들어와요.”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훈은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어디론 가로 사라졌다. 

현관문 불이 팟-! 하고 꺼지면서 어둑해졌다. 

괜히 서 있기도 뻘쭘해진 민경이 슬그머니 신발에서 발을 빼냈다.

민주

 “뭐, 정 그렇다면야….”

***

민주는 경훈이 사라진 지점을 쫓아 거실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집 크기와 구조는 비슷했지만 해놓은 인테리어가 자신의 집과는 대조적이었다.

여기저기 화초도 놓여 있고, 큼지막한 그림이나 액자들이 걸려있어 밋밋한 집임에도 불구하고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경훈이 있는 곳은 불이 환히 켜진 부엌이었다.

그가 뭔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민주

 “뭐해요?”

등에 가려 뭐하는 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식탁 위에는 반찬 통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큼지막한 대접 안으로 숟가락을 넣고 뭔가를 비비고 있었다.

경훈

 “자, 이제 마무리.”

참기름의 뚜껑을 열고, 대접 위로 흘리자 고소한 냄새가 부엌 안을 진동했다.

민주는 냄새만으로도 그것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냈다.

민주

 “비빔밥?”

경훈

 “엘리베이터 안에서 비빔밥 이야기를 들었더니,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자, 여기요 참기름.”

경훈이 참기름을 건넸지만, 민주의 신경은 온통 식탁 위에 놓인 대접 위로 가 있었다. 단숨에 식탁 앞으로 가 대접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킁킁거렸다.

민주

 “우와 시금치에, 도라지에, 가지까지!? 우와아아…. 맛있겠다.”

민주는 뭐에 홀린 듯 의자를 빼 앉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야무지게 밥을 슥슥 대더니 이내 가득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몇 번 씹기도 전에 닫힌 입이 도로 벌어지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입안에서 도는 감칠맛과 참기름의 조화.

그리고 옅게 씹히는 가지의 부드러운 향과 맛. 

오독오독 하게 씹히는 씁쓸한 도라지의 맛까지.

너무 맛있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맛이 날 수가 있지?

혹시 약이라도 탔나?

세계 3대 진미라는 푸아그라나 캐비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됐다.

민주

 “으으음…. 너무 맛있어. 완전 예술이야!”

민주는 벌써 연거푸 씹는 둥 마는 둥 네 숟가락이나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경훈이 한마디 했다.

경훈

 “어허, 이것 보세요. 왜 남의 밥을.”

민주

 “아, 진짜 먹을 거 가지고 치사하게…. 같이 좀 나눠 먹읍시다. 이웃끼리. 내가 먹는 게 그렇게 아까워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눈을 부라리는 게 한마디만 더 하면 총으로 쏴 죽일 기세였다.

경훈이 하는 수 없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조용히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어찌 모양새가 남의 집에 와서 밥 뺏어 먹는 꼴이다. 

불편한 자세로 한 숟가락 겨우 떠서 목에 넘긴 경훈이 불평을 토해냈다.

경훈

 “아, 거 좀. 나도 먹읍시다. 그쪽이 다 먹으면 난 뭘 먹어요?”

민주

 “아, 그러니까 좀 많이 좀 비비지. 남자가 좀스럽게 이게 뭐예요. 이게? 누구 코에 붙이라고.”

경훈

 “허….”

민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밥알들을 싹싹 긁어 한 숟가락을 만든 후 그것을 입으로 떠넘겼다.

마지막 한 숟가락이었다.

씹다가 만 밥알이 튀는지도 모르는 채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에 뜨곤 아쉬움을 토해냈다.

민주

 “에이씨, 먹다가 만 것 같네. 쩝…. 밥 더 없어요?”

경훈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경훈은 기가 차지도 않았다.

설마 했는데, 혼자 한 대접을 그 자리에서 비워낸 것이다. 

다 먹고 나서 한 말도 가관이었다.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지 티타늄 합금을 깔고 다니지 않는 이상 저럴 수는 없었다.

경훈

 “아니, 도대체 남의 집에 와서 밥을 뺏어 먹는 경우는 뭡니까? 그리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옆에 사람이 있으면 나눠 먹는 경우가 있어야지 그걸 먹어보라는 말도 안 하고 다 먹습니까? 그것도 혼자?”

민주

 “아니, 나만 먹었나? 그쪽도 먹었잖아요?”

경훈

 “예, 먹었죠. 딱 한 숟가락! 내 집에서. 내가! 내걸 먹는데! 눈치 보면서 겨우 딱 한 숟가락 먹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민주

 “아니…. 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뒤늦게야 자신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을 느꼈는지 입을 쏙 집어넣고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염치가 없긴 했다.

민주

 “아니, 뭐…. 내가 일부로 그랬나? 먹으려고 한 건 아니고…. 음식이 워낙 맛있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슬슬 기어가는 말투로 마지막에는 따가운 시선을 피해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민주가 곁눈질로 경훈의 동태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민주

 “그리고…. 미안한 건 미안한 건데요…. 그쪽도 너무 뭐라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밥 좀 먹었다고 계속 구박이나 주고. 먹는 거로 뭐라고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거예요. 대신에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리면 되잖아요.”

경훈

 “아니, 누가 그쪽한테 밥 얻어먹자고 이러는 겁니까?”

민주

 “아니…. 그럼 이미 없어진 걸 어떻게 하라고요!!!?”

계속되는 고자세에 민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민주

 ”아, 진짜! 치사하게 계속 이럴 거예요? 스테이크 살게요. 스테이크. 그것도 제일 비싼 거로다가. 한우로. 그러면 됐죠?”

경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미소를 떠올랐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경훈

 “흠흠, 언제요?”

민주

 “네?”

경훈

 “아니, 그러니까 언제 스테이크를 사겠다고요?”

민주

 “뭐….”

민주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했다.

민주

 “조만간?”

경훈

 “그러니까 조만간 언제?”

민주

 “음, 그러니까….”

띠리링-!

민주

 “앗, 전화가 왔네!? 여보세요?”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민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을 낚아챘다.

민주

 “어, 승훈이니? 나? 지금 밖인데? 어, 지금 집에 돌아가는 길이야. 편의점에 잠깐 나왔어. 어, 어…. 어…….”

전화를 끊을 때쯤에는 이미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있었다.

개폐장치가 열리는 알람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스르륵 문이 닫혔다.

통화의 여운이 닫힌 문 사이로 길게 맴돌다 사라졌다.

경훈

 “허….”

그 광경을 지켜본 경훈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라진 터라 완전히 눈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식탁에 남은 것이라고는 빈 대접 위에 놓인 숟가락과 반찬 통들. 

민주가 가지고 온 달걀 2개가 전부였다.


츤데렐라15화 - 마른하늘에 날벼락 (1)

  

15. 마른하늘에 날벼락 (1)

다음 날 아침.

민주는 언짢은 기분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

시끄러운 소음. 

앞뒤로 빵빵거리는 자동차들.

귓구멍에 뭐라도 쑤셔 넣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달콤한 휴식시간을 출근길 전쟁터에서 보내고 있는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심경이 그러다 보니 자연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곱지 않았다.

민주

 “아니, 대표님은 왜 자꾸 회사에 들어오라는 거니!?”

정수

 “누나, 기사 터졌잖아요. 그거 때문에 들어오시라는 거 같은데요?”

민주

 “그런 기사 한두 번 터져? 그것 때문에 오라 가라 한다고?”

정수

 “아니, 뭐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지만….”

정수가 뭔가 미적거리면서 말을 흐렸다. 

그걸 놓칠 민주가 아니었다.

민주

 “뭐야!? 뭐 있네. 있어. 뭔데 그래?”

민주의 다그침에 정수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수

 “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민주

 “내가 널 모르니? 아주 입이 근질거려 죽겠는데 꾹 참고 있는 거 같은데. 속 시원하게 한번 털어놔 봐. 뭐야? 뭔데 그래?

정수가 삐죽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정수

 “누나, 오늘 아침 기사 안 보셨어요?”

민주

 “나 원래 인터넷 기사 같은 거 잘 안 보잖아. 뭐 기사 떴어?”

채연

 “언니, 여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채연이 핸드폰 화면에 뭔가를 띄워 민주 앞으로 내밀었다.

[한보람. 뺑소니 혐의로 긴급체포. 어제 새벽 1시경. XX고등학교 횡단보도앞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치고 달아난 혐의로 한보람 씨를 긴급체포했습니다. 한보람 씨는 어제저녁 술자리를 가진 뒤 귀갓길에 이 같은 행위를 한 것으로 보여지고, 횡단보도 부근 CCTV 영상을 통해 차량 번호를 특정. 한보람 씨 소유의 자동차인 것을 확인하고 강남경찰서에서 한보람 씨를 긴급 구속하였습니다.]

민주

 “허, 이런 미친X.”

민주는 기사를 읽어 내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직 연예인이. 그것도 여자 탤런트가 음주운전에 뺑소니라니. 

민주

 “어이구,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음주운전에 뺑소니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옆에 남자라도 타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대리를 안 부르고 지가 직접 운전했겠지. 아무튼, 막장이네! 막장. 내가 아무리 개념이 없더라도 술 먹고 운전은 안 하는데 말이야.”

민주의 말을 정수가 히죽거리며 받았다.

정수

 “하긴, 그건 그래요. 누나는 개가 될 때까지 마셔도 운전은 절대 안 하는데 말이에요.”

채연이가 정수의 말에 양념을 보탰다.

채연

 “응. 술만 먹으면 맨날 오빠보고 데리러 오라고 그렇잖아? 막 새벽 3시에도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고. 그치?”

가만히 듣고 있자니 주고받는 내용이 전부 험담에 가까웠다.

민주의 입술이 꿈틀거리며 눈썹이 S자 곡선을 그렸다.

민주

 “아주 이럴 때만 신이 나서 아주 쿵짝이 잘 맞지?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개? 지금 나보고 개라고 그랬니? 그리고 새벽에 나 데리러 오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그러면 만취한 꼴로 택시 붙잡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다 사진이나 찍힐까? 어!?”

정수

 “아, 아니에요! 제가 언제 그랬다고. 채연이 쟤가 괜한 소리 하는 거예요. 그렇지 채연아!?”

채연

 “어? 어어어...”

마지못해 채연이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민주

 “어라? 둘 다 가만히 있어봐봐.”

민주가 눈동자가 왼쪽으로 향하더니 이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채연에게로 향했다.

민주

 “이것들 봐라? 새벽 3시? 내가 그 시간에 정수한테 전화한 건 채연이가 어떻게 알고 있지? 뭐야. 너희 둘이 새벽 3시에 막 같이 있고 그랬어?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본데?”

정수

 “네!?”

채연

 “에!?”

마치 중학생이 담배 피우다 담임선생님한테 걸린 것처럼 반응들이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민주

 “오호, 이것들 봐라? 새벽 2시에. 나만 쏙 빼놓고. 둘이. 뭔 짓을 하고 있었길래 채연이가 저렇게 나한테 열폭을 할까? 혹시 너희 둘이 나 빼놓고 만나고 그랬니?”

두 사람의 입이 쏙 들어갔다. 

특히 채연은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꾹 다문 입으로 대변했다.

정수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원했다.

정수

 “누나, 대표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저희 그러면 잘린단 말이에요.”

채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도권은 잡았겠다. 민주가 느긋한 태도로 쿠션에 기대며 물었다.

민주

 “좋아. 알았어. 그런데 둘이 얼마나 됐어? 사귀고 있는 거야? 아니면 썸?”

정수가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사실을 실토했다.

정수

 “저희 이제 10일 됐어요.”

민주

 “10일? 가만 있어 보자…. 10일쯤이면 목포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네? 언제 사귀자고 한 건데?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지 채연은 얼굴이 벌게져 있었고, 정수가 머뭇머뭇하더니 그날 일을 털어놨다.

정수

 “스태프한테 아이스크림 돌린다고 슈퍼에 갔는데 입구에 동전 넣고 돌리는 뽑기가 있더라고요. 반지를 뽑았는데…. 그거 주면서 제가 사귀자고 했어요.”

민주

 “뭐야, 그러니까 500원짜리 뽑기 반지 주면서 사귀어달라고 했다고? 그런데 그걸 채연이가 승낙했고?”

정수

 “네….”

민주는 기어코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차 안이 떠나가라 깔깔대고 웃었다. 나중에는 너무 웃다가 꺽꺽거렸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망해진 채연과 정수의 볼이 벌게진 채 홍시처럼 익어갔다.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린 민주가 눈물까지 닦으며 말했다.

민주

 “아, 저 팔푼이랑 누가 사귈까 궁금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네. 헌데 장난감 반지는 너무 한 거 아니니? 다이아 반지는 못 해줄망정.”

정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수

 “누나, 저 돈 없는 거 잘 아시면서….”

민주

 “하긴. 그건 그렇지. 너네들이 나랑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정수

 “저는 4년, 채연이는 1년 반 정도 됐을걸요?”

민주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빨리 가네. 정수 너 만난 게 엊그제 같았는데 말이야.”

정수

 “그러게요. 그때 누나는 완전히 대 스타였는데. 제가 누나 왕 팬이었잖아요!”

민주

 “그러면 뭐 하니. 지금은 여친이라고 쿵짝 맞아서 같이 내 뒷담화나 까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까 둘이 나 없으면 아주 신나겠구나? 어쩐지 요새 귀가 막 간지럽고 그렇더라니.”

정수

 “에이, 설마요. 제가 어떻게.”

채연

 “아니에요. 언니! 절대 안 그래요!”

정수와 채연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민주

 “그래? 가뜩이나 나 물어뜯는 안티들 많아 죽겠는데. 너희들까지 보태면 안 되지. 우리가 같이 보낸 세월이 얼만데.”

밴이 어느덧 회사 앞 주차장에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정수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자동차를 세웠다.

정수

 “다 왔어요. 누나.”

민주가 내리기 직전에 정수를 불렀다.

민주

 “회사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백화점에 좀 들리자.”

정수

 “백화점이요? 뭐 사시게요?”

민주

 “모르면 몰라도 둘이 사귀기로 했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말이 안 되지. 다이아는 못 해줘도 커플링 정도는 사줄 수 있으니까 내가 하나씩 해줄게.”

정수

 “누나.”

채연

 “언니.”

정수와 채연이 감동 받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민주가 오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민주

 “뭐니, 그런 표정은? 됐고. 예쁘게 잘 사귀기나 해.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말고. 만약 들킨다고 해도 난 모르는 일이니까. 알았어?”

정수

 “네.”

민주

 “들어가자. 우리 대표님이 또 뭔 이야기를 하실지 기대되네. 뭐, 한보람 하차하고 다른 배우가 들어온다는 뻔한 이야기일 테지만. 아, 뭐 그런 거 가지고 뭘 사람을 오라 가라 해. 귀찮게 말이야. 전화로 하면 될 거 가지고.”

***

JK엔터테인먼트.

처음에는 자그마한 소규모회사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매니지먼트사 중 한 곳.

연기자, 가수, 진행자들. 각종 분야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으면서 소속 연예인들이 폭넓고,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게 국외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민주가 회사 현관을 통과하자마자 내부에 있던 직원들이며 소속 연예인들이 인사를 하기에 분주했다.

배우로 14년 차, 이 바닥에서 생활했으니 인사를 하는 횟수보다 받는 횟수가 아무래도 훨씬 많았다.

민주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표실로 곧장 직행했다.

민주가 들어서자 업무를 보고 있던 하무성 대표가 자리에 앉아 반갑게 민주를 맞이했다.

대표

 “어서 와요. 김민주 씨.”

민주

 “안녕하셨어요. 대표님?”

대표

 “그럼, 나야 뭐. 늘 잘 있지. 일단 앉죠.”

민주가 성큼 걸어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민주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아침부터 부르신 거죠? 그것도 대표님이 직접?”

대표

 “촬영하다가 다친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요. 내가 걱정돼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 몸은 괜찮은지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 할 이야기도 있고.”

민주

 “뭐, 보시다시피 괜찮아요. 죽을 뻔하긴 했지만 살았으면 된 거죠. 할 이야기는 아마도 촬영과 관련된 거겠죠? 저도 봤어요. 한 보람 뺑소니 기사.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죠?”

대표

 “하하하. 급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요. 맞아요. 그것 때문에 불렀어요. 혹시 마실 거라도?”

민주

 “아니요. 됐어요. 그냥 빨리 말씀하시죠.”

대표

 “그래요. 그러면 시간을 절약하자는 차원에서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죠. 해녀에서 한보람이 빠지고, 채윤희가 들어가기로 결정 났어요. 그것 때문에 김민주 씨 보고 들어오라고 불렀는데….”

민주

 “자, 잠깐!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채윤희!?”

민주가 대표의 말을 끊었다.

순간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대표

 “네. 채윤희. 여러 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채윤희 씨가 최종 합격했어요. 아마도 다음 촬영 때부터 보게 될 거에요. 난 기사 봤다길래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민주

 “하…. 말도 안 돼. 걔가 어떻게….”

단 한 번도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그 이름이 왜 거론된단 말인가?

민주

 “걔는 그걸 또 하겠대요?”

대표

 “본인이 하기 싫었으면 안 했겠죠? 배역을 맡는 건 본인 의사가 중요한 거니까.”

민주

 “하. 걔가 미치지 않고서야 나랑 어떻게 같은 작품을 하겠다고… 그것도 친구 역할로?”

민주는 거의 팔짝 뛰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민주

 “나 안 할래요. 걔랑은 죽었다 깨어나도 같이 작품 못해요! 감독님한테 걔랑 갈 것인가, 나랑 갈 것인가 알아서 하라고 전해주세요.”

대표

 “하하하. 김민주 씨. 진정하시고….”

민주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채윤희랑 같이 작품을 하라고 하는데?”

대표

 “저도 김민주 씨와 채윤희 씨의 관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감독님이랑 작가님과 협의가 끝난 일이에요.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참에 채윤희 씨랑 같이 잘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듣자하니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하던데….”

민주

 “대표님! 지금 미쳤어요? 채윤희랑 잘해보라고요? 방금 한 말은 못들은 걸로 하죠. 대표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 실망시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대표

 “흐음.”

민주

 “가자. 정수야!”

민주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정수와 채연이 안절부절못한 태도로 상황을 살피다 결국 민주를 따라 쫓아나갔다. 민주를 쫓아나간 것은 둘뿐만이 아니었다. 

최기성 이사도 ‘민주 씨!’ 를 부르며 쫓아나갔다.

방안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무성 대표뿐이었다. 


츤데렐라16화 - 마른하늘에 날벼락 (2)

16. 마른하늘에 날벼락 (2)

최이사

 “민주 씨! 민주 씨!”

최이사가 민주의 허겁지겁 쫓아가 민주의 팔을 잡아당겼다.

민주

 “아이씨! 이거 놓으세요! 이사님!”

최이사

 “민주 씨가 이러고 나가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민주

 “이사님도 분명히 들으셨잖아요! 대표님이 채윤희랑 같이 작품 하라고 한 거. 세상에! 제가 미쳤어요? 걔랑 같이 작품을 하게!?”

최이사

 “자자, 그러지 말고 일단 내방으로 좀 갑시다. 응? 진정 좀 하고. 내가 따로 할 이야기도 있고 그러니까.”

최이사는 거의 매달려 애원하는 수준이었다.

민주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 섞인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회사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민주의 고압적인 자세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 안이고 보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이런 식이면 새어 나오는 말들을 전부 막을 수 없었다.

멈칫한 민주를 최이사가 거의 밀다시피 자신의 방으로 밀어 넣었다.

민주가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

달칵.

최이사

 “일단 앉자고. 앉아. 민주 씨.”

정수

 “예. 누나 일단 진정 좀 하세요.”

정수와 채연, 그리고 최이사가 협동해서 민주를 소파에까지 앉히는 데 성공했다. 민주도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제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대표라는 직함보다는 이사를 상대하는 것이 심적으로 편했다.

민주가 앉기가 무섭게 불만을 토해냈다.

민주

 “아니, 이사님. 말 좀 해보세요. 일이 왜 이렇게 됐죠? 채윤희라니요? 걔가 진짜. 뭔 생각으로 나랑 같은 작품을 한다고 했지? 내가 여자주인공이라는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말이야.”

최이사

 “그,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엔 최이사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견이 없었다.

이 자리로 소환해서 뭔 생각이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민주

 “아, 미친X! 돌은 X! 재수 없는 X!”

민주는 계속 채윤희를 씹고 씹었다.

아무리 씹고 또 씹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풍선껌으로 만들어서 하루 종일 질겅거리고 다니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것을 잠자코 보고 있던 최이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최이사

 “아니 그런데 민주 씨. 왜 이렇게 둘은 앙숙이 된 거야? 뭐,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었나? 나도 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만 알고 있지. 뭐, 딱히 들은 이야기는 없는 거 같은데.”

민주

 “있어요! 그런 게!”

민주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말은 짧았지만, 궁금해하지 말라는 의미는 확실히 전달됐다.

최 이사도 굳이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최 이사는 민주를 설득하는 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최이사

 “민주 씨. 그런데 말이야. 이런 타이밍에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런데 말이야. 내가 들은 소리가 있거든.”

민주

 “아, 채윤희 이야기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거든요?”

하지만 최이사는 막무가내였다.

최이사

 “글쎄. 내 이야기 좀 들어봐봐. 이번 배역 맡으려고 채윤희 쪽에서 준비를 좀 한 모양이더라고.”

민주

 “준비요?”

최이사

 “사실 해녀에 ‘이원희’ 역할 최종 후보가 김민주 씨랑 채윤희 씨 두 명이었거든? 그런데 최종적으로 김민주 씨가 발탁된 거지. 채윤희 씨는 떨어졌고.”

민주

 “그래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최이사

 “내부적으로 검토된 사항이라 매스컴엔 안 올라왔지만 내가 또 발이 넓잖아. 작가들 쪽에서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왔어. 아마 확실할 거야.”

민주

 “하, 채윤희 걔가요? 연기로 보나 대중성으로 보나 이슈 성으로 보나. 걔보다는 제가 당연히 낫죠. 그리고 제가 어디 채윤희 같은 애랑 비교될만한 레벨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최이사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김민주 씨가 특급이라면 채윤희 씨는 A급? 아니지 A-급정도?”

민주

 “B요 B. 걔를 어디다가 갖다 붙이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최이사

 “응, 그래. B라고 하자. 그런데 민주 씨도 알잖아. 송윤아 작가님 작품 채윤희 씨가 되게 하고 싶어 하던 거.”

민주

 “뭐, 송윤아 작가님이야 워낙 유명하시니. 다른 배우들도 다 그분 작품 들어가고 싶어 해요. 저도 그분 작품이라서 들어간 거고.”

최이사

 “그렇지! 아무튼, 최종후보가 채윤희 씨가 된 이유가. 수영은 기본이고, 잠수도 10m씩 한다던데? 원래 고향이 부산 쪽이라서 어려서부터 물질하면서 크고 그랬나 봐. 애당초 최종후보에 오른 이유가 그런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나 봐.”

민주

 “걔가요?”

최이사

 “응. 그때야 다른 배역은 모두 캐스팅이 끝난 상태였고, 여주인공 역할만 남았으니까 민주 씨랑 겹쳐서 못했지만, 지금은 한보람 역이 비어버렸으니 이때다 싶어 얼른 들어온 거겠지. 뭐, 여자주인공 역할은 아니지만, 조연치고는 비중이 큰 역할이니 할 만하다 싶지 않았겠어?”

생각해보니 채윤희 입장에서는 솔깃한 제안 같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고욕인데 한 작품 안에서 그것도 친구 사이로 연기한다니? 

가만…!?

민주

 “뭐야, 채윤희 걔 잠수도 10m씩 막 한다고 그랬죠? 지금?”

최이사

 “어, 그랬지.”

민주

 “그러면 촬영도 대역 없이 가겠네요?”

최이사

 “그렇겠지? 그런 점에 높이 평가돼서 발탁된 거니까.”

민주

 “에이씨. 그러면 나는요? 같은 해녀 역할인데 나는 대역으로 가고. 채윤희 걔는 대역 없이 가고?”

최이사

 “어, 어……. 아무래도…. 조금 그림이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최 이사가 민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최이사

 “민주 씨. 지금이라도 준비하자. 저번에 기사 터진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민주 씨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아. 응?”

민주

 “결단이라니요?”

최이사

 “지금이라도 배우자. 수영이랑 잠수. 이참에 물 공포증 같은 건 싹 없애버리자고! 실은 내가 그거 이야기하려고 불렀어.”

민주

 “아이씨! 미치겠네.”

민주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영락없이 그래야 할 판국이었다.

이미 한창 촬영되고 있는 작품을 자의로 빠진다고 말하면 위약금은 둘째 치고, 이미지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꼴 보기 싫은 배우가 있어서라니.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있고, 되는 것이 있다.

이번 일은 전자 쪽에 가까웠다.

민주

 “야 정수야. 핸드폰 줘봐. 내 것 너한테 있지?”

정수

 “네? 갑자기 핸드폰은 왜에…?”

민주

 “주라면 줄 것이지 말이 많아.”

민주는 슬그머니 내미는 핸드폰을 낚아채 어디론 가로 전화를 걸었다.

저런 행동과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꼭 어김없이 사고를 쳐서 민주를 쳐다보고 있는 세 사람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어김없이 오늘도 맞아 떨어졌다.

민주

 “어, 전화 받네. 여보세요!? 채윤희?”

전화번호가 바뀌었거나 안 받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그 목소리였다.

채윤희

 [어?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요. 언니가 전화를 다 주고?]

민주

 “우리가 고깝게 인사를 나눌 처지는 아닌 거 같고. 너 작품에 들어오기로 했다면서?”

채윤희

 [어머, 벌써 소식이 갔어요?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민주

 “너 미친 거 아니야? 나 들어와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같이 작품을 하겠다고?”

채윤희

 [왜요? 제가 더 잘해서 주목받을까 봐 겁나요? 하긴…. 뭐, 언니 발연기야 세상이 다 알고 있긴 하지만….]

민주

 “하…!? 이게 누가 누굴 보고 발연기래? 너야말로 연기 안 되니까 인맥총동원해서 여기저기 낙하산으로 꽂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채윤희

 [왜 이래요? 이번에는 정당하게 오디션 보고 들어간 건데? 그보다도 언니 긴장 좀 하셔야겠던데요? 언니 수중씬 올 대역이라고 다들 수군거리는 거 아시죠? 저랑 비교되지 않으시려면 연습 좀 하시고 오셔야겠어요. 그게 뭐 하루 이틀 만에 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차, 언니 물 공포증도 있으시죠? 그걸 내가 깜빡했네. 아무래도 작품 끝나기 전까지는 못 보겠네요. 언니 물속에 들어가는 건.”

민주

 “이, 이게…! 야! 너 어디야! 이게 뚫린 입이라고…. 너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뚜…. 뚜…. 뚜….

여차하면 핸드폰을 집어 던질 기세였다.

지켜보는 이들도 언제 터질지 몰라 불안 불안하기만 했다.

민주

 “허, 이게 말하고 있는데 끊었어!? 지금 끊었다 이거지!? 미친…!”

민주가 재다이얼을 눌렀다. 하지만 전화는 받지 않고,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안내 메시지만 계속 흘러나왔다.

민주 놔, 채윤희 이게 아주 제대로 열 받게 하네. 아우…. 당장 쳐들어가? 아주 오늘 요절을 내놔!?”

민주의 반응만 보더라도 어떤 내용들이 오갔는지 충분히 짐작됐다. 최이사와 정수, 채연은 동시에 민주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민주라면 충분히 적진 기지로 쳐들어가고도 남았다.

최이사

 “참아. 민주 씨.”

채연

 “언니, 참으세요.”

정수

 “누나….”

민주는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며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급하게 정수가 물을 가지고 왔다.

정수

 “누나, 여기 물.”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키고도 민주는 한참이나 씩씩거렸다.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민주

 “어, 그래. 채윤희 니가 한번 해보자 이거지? 감히 나 김민주를 우습게 봤어?”

휙.

김민주가 최이사를 바라봤다. 

불똥이 튀려는 것일까? 

최 이사가 움찔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최이사

 “아, 왜에에에! 왜 또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나 무섭게…!”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민주

 “이사님. 저 수영 배울게요. 잠수도 배우고! 걔가 10m 잠수한다고 그랬죠? 저는 20m…. 아니지. 30m까지 잠수해서 전복도 막 따고, 그럴래요. 아주 채윤희 그X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겠어.”

민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최 이사의 두 눈이 회동그래졌다.

최이사

 “진짜?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진짜 수영 배우겠다고?”

정수

 “누나, 그 말 진짜예요!?”

평소 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는 정수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주

 “제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요? 저 한다면 하는 여잔 거 아시잖아요?”

최이사

 “어, 어어어!!!? 무, 물론이지. 내가 잘 알지. 민주 씨가 허튼소리 안 한다는 건!”

최 이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속으로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저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설득시켜 수영을 가르치나 고민했던 그로서는 이런 상황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채윤희와의 통화가 오히려 민주를 자극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었다.

최이사

 “그러면 언제부터 시작할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장에라도 가능한데 말이야. 어때?”

민주

 “내일부터 시작하죠. 오늘은 오후에 가볼 데가 있어서요.”

격앙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황소라도 때려잡을 듯 날뛰던 것치고는 금세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최 이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이사

 “가볼 데? 어디? 약속이라도 있어?”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정수가 최 이사에게 눈짓을 줬다.

뭔가 불편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면 정수가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최이사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정수가 내민 스케줄 다이어리를 보고 단숨에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달력에는 병원이라는 글씨와 함께 동그랗게 처져 있었다.

최이사

 “아….”

최이사의 탄식성이 끊어지기도 전에 민주의 대답이 이어졌다.

민주

 “오랜만에 어머니한테 들리게요. 오늘이 어머니 생일날이거든요.”

어찌 조금 전보다도 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최 이사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민주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으로써 애도를 표현했다. 

최이사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어머니 생신이 이맘때쯤이었지? 그런 거라면 진즉에 말하지. 나도 같이 찾아뵐까? 오랜만에 어머니한테 안부라도….”

민주

 “됐어요. 뭐 좋은 데라고.”

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주

 “가자. 정수야.”

더 이상 분위기가 침체될까 봐 정수가 얼른 뒤에 따라붙었다.


츤데렐라17화 - 가족이라는 단어

17. 가족이라는 단어

민주

 “엄마. 생일 축하해.”

민주가 병실 안에 누워있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다.

평소에 민주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애틋하고,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느새 입가의 근육이 파르르 떨리더니, 촉촉해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위태로이 걸려있던 눈망울에 매달려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그것이 한 겹, 두 겹. 겹치더니 이내 턱 아래로 흘러 떨어졌다. 

민주

 “엄마…. 아…. 흑흑흑….”

민주는 결국 여인의 품 안에 엎드린 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여인은 미동조차도 없었다. 입에는 산소마스크를 걸고, 조용히 눈을 감고 민주의 행동들을 받아줄 따름이었다.

벌써 14년째다.

한 번쯤이라도 자신의 투정 어린 모습을 받아줄 때도 됐건만 엄마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14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생명유지 장치의 도움을 받으며 견디고 있었다. 14년 전에 벌어졌던 교통사고로 민주의 아버지는 목숨을 잃고,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됐으며, 동생은 하반신마비가 왔다.

오직 사고를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민주 자신뿐이었다.

불행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리 못사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린 민주가 재산을 지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법적 보호자를 자청하고 나선 큰아버지에 의해 재산은 거의 탕진됐고, 몇 번이나 큰 수술을 거쳐야 했던 동생의 병원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련해야만 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민주가 독해지기로 마음먹은 게.

욕도 많이 먹었고, 악플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다.

대중들의 관심을 받으며, 생활하는 연기자지만 민주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 생활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14살 나이의 어린 민주가 돈을 벌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민주는 참고 참았던 것을 이렇게 한 번씩 엄마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며 터트리곤 했다.

그럴 때면 뭔가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그랬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민주가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들어올 때 비해서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민주

 “엄마. 나 이번에 해녀라는 작품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저번에 말한 채윤희라고... 내가 제일 싫어한 애도 같이 들어온대. 그래서 나 걔보다 잘하려고 수영도 배우기로 했어. 원래는 죽기보다 하기 싫었는데,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한번 해 보려고.”

[그래, 우리 딸 수영 배우기로 했어? 기특하네.]

민주

 “헤헤.”

마치 엄마가 말을 대답을 해주고 있다고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민주가 엉망이 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민주

 “나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해서 연기자고 꼭 인정받고 싶어. 사실 내가 연기는 조금 딸리잖아. 이참에 수영배우고 물 공포증도 없애면 연기자로서 조금 더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 배우고 나면 잘했다고 꼭 칭찬해 줘야 해. 알았지? 우리 딸 잘했다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그래. 엄마가 머리 쓰다듬어 줄게.]

민주

 “진짜? 진짜다. 꼭 약속한 거다?”

민주는 가만히 있는 엄마의 새끼손가락을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걸고 흔들었다.

민주

 “약속.”

손이 움직여지진 않았지만 대신 따뜻한 체온의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그 바람에 민주는 또 한 번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 따뜻한데. 

살아있는 것이 분명한데. 

당장에라도 움직일 듯한데.

…….

민주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신 때문에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했다. 

민주

 “엄마, 나 이제 가볼게. 당분간 바빠서 못 올지도 몰라. 하지만 잘 견디고 있어 줘야 해? 알았지?”

일어서서 엄마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민주는 다시금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얼굴에 화장이 잔뜩 번져 전쟁터가 따로 없을 것이다. 

민주가 엄마와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다.

민주

 “안녕, 엄마.”

[잘 가. 우리 딸.]

***

다음 날.

일산의 위치한 S 스포츠 센터 5층.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간 경훈은 어깨에 메고 있는 백을 내려놓고, 상의를 탈의했다. 잘 다듬어진 상체와 뚜렷한 복근이 선명하게 보인다. 강사의 실력도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주 고객층이 30, 40대 여성회원들이 많은 까닭에 외모나 신체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는 게 이곳이다.

경훈을 비롯한 많은 강사들은 대부분 웨이트를 통해 자신의 신체는 꾸준히 가꾸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누군가 접근했다.

친구 정현이었다.

정현

 “요, 브라덜. 왔어?”

정현이 주먹을 오므려 앞으로 내밀었다. 

녀석이 기분 좋을 때 하는 제스처 중 하나였다.

경훈

 “뭐냐? 그 유쾌 발랄한 아침 인사는?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경훈이 주먹을 내밀어 가볍게 툭 치며 화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은 계속 싱글벙글한다.

정현

 “빅 뉴스가 있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거 먼저 들을래?”

경훈

 “뭔데 그래?”

정현

 “음. 공짜로는 알려줄 수 없지. 저녁 쏴.”

경훈

 “뭐야!? 오는 길에 운명의 여자라도 만났냐?”

보나 마나 시답지 않을 이야기일 거라 짐작하고, 경훈은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왔다. 정현이 쫓아 나오며 계속 말을 걸었다.

정현

 “너 이거 안 들으면 진짜 후회 할 텐데?”

정현의 표정을 보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기대할만한 건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 첫 여자 친구랑 키스하고 달려와 자랑할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 여자랑 첫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도 흥분하며 저런 표정을 지었고.

대부분은 여자와 관계가 있었다. 

이번에도 틀림없었다. 

경훈

 “여자냐?”

정현

 “빙고! 역시 내 친구! 하지만 내가 아니라 니 이야기야.”

경훈

 “응? 나? 나 여자 없는데?”

정현

 “궁금하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 궁금하면 저녁 쏘라니까?”

경훈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말해 봐봐.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정현

 “좋은 소식부터? 나쁜 소식부터?”

경훈

 “나쁜 소식부터?”

정현

 “나쁜 소식은…. 음…. 너 개인 교습 생겼어. 일주일에 2번. 1시간 30분씩.”

경훈

 “오, 마이 갓! 나 개인 교습 안 한다고 하니까!? 아, 실장님 어딨어? 내가 전에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정현

 “끝까지 들어봐. 그런데…. 놀라지 마라?”

경훈

 “응?”

정현

 “강습생이 김민주야.”

경훈

 “김민주?”

경훈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자신이 들은 이름과 머릿속에서 떠오른 이미지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경훈

 “설마. 그 김민주!?”

정현

 “그래, 탤런트 김민주!”

경훈

 “아니, 김민주가 왜?”

정현

 “나도 오늘 듣고 놀랐다니까? 사실은 그게 말이야. 나한테 들어온 교습인데 김민주인 걸 알고 내가 널 추천했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다 돕고 사는 거지. 혹시 김민주랑 잘되면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어때? 이 정도면 좋은 소식 맞지?”

경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강민주와의 1:1 교습?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정현

 “진짜 너랑 무슨 인연인가? 이상하게 김민주랑 자꾸 엮이네. 뭔가 운명적인 듯한 느낌이 들어. 아. 로맨틱해.”

경훈

 “그래서 언제부터라는데?”

정현

 “원래는 다음 주부터 진행한다고 했는데, 변경됐나 봐. 오늘부터 바로 한다던데?”

경훈

 “오늘부터? 그렇게 빨리?”

정현

 “일단 사무실로 가봐. 실장님이 너 찾으시니까.”

***

S 스포츠 센터 1층.

1층에 있는 카페는 이곳을 이용하는 회원들의 놀이터이자 휴게실이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스포츠 센터를 들릴 때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 

카페 내에서 간단한 브런치나 다과를 팔고, 커피 맛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접근성과 편의성이 좋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스포츠 센터를 찾는 회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화제성이 있는 드라마나 남자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여성회원1

 “아휴, 한보람 하차하고 채윤희가 들어가기로 했다면서? 난 걔 별로던데.”

여성회원2

 “나도 걔 별로더라. 예전에 뭐였더라? 출동 엑스맨인가? 거기 나온 프로그램 봤는데 얘가 좀 맹하더라. 코도 좀 이상하고. 수술한 건가? 좀 티 나던데?”

여성회원3

 “호호호,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여자 연예인치고 얼굴에 손 안 댄 사람 있나? 김민주도 봐봐. 죄다 얼굴 다 해 가지고. 내가 아는 동생 친구의 동창 와이프가 강남 성형외과 의사인데. 거기서 얼굴 다 했다고 하던데?”

여성회원2

 “어머, 진짜? 김민주도 얼굴 다 했대?”

여성회원3

 “그러엄. 눈, 코, 턱. 다 했대. 사진도 찍고 그랬다는데. 그거 다 한 얼굴이라니까?”

여성회원1

 “와, 완전 감쪽같이 잘했네. 별로 티도 안 나 보이던데?”

여성회원3

 “이그! 자기 요즘 너무 의학을 모른다. 요즘엔 해도 티 잘 안나. 이거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나도 이거 코한 거잖아. 호호호호. 어때? 감쪽같지?”

여성회원1

 “어? 어…. 그. 그래?”

한창 수다가 삼매경인 아줌마들 바로 뒤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와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김민주와 정수가 바로 그들이었다.

김민주가 마주 앉아 있는 정수를 보고 볼멘소리를 냈다.

민주

 “아니,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붙잡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라니? 채윤희 씹는 거야 나로서는 찬성하지만 듣다 보니 내 흉이네? 그리고 내 얼굴이 다 고친 얼굴이라고? 지들이 봤다니?”

정수

 “누나가 참으세요. 아줌마들은 원래 다 그러잖아요.”

민주

 “참으니까 이러고 있지. 그나저나 채연이는 왜 이렇게 안 와?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 맞아?”

정수

 “네. 협찬 수영복 가지고 1층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올 때가 다 됐는데 왜 이렇게 안 오지?”

민주

 “그까짓 수영복은 나도 집에 많다니까. 뭐, 굳이 수영복까지 협찬을 받아온다고….”

정수

 “왜요!? 난 그런 채연이 모습이 열심히 일하는 거 같아서 보기 좋던데요?”

민주가 양 눈썹이 가운데로 몰리더니 입술의 모양마저도 일그러졌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팔을 꼬며 혀를 내찼다.

민주

 “쯧쯧쯧. 퍽이나. 예로부터 사랑에 눈먼 놈들은 답도 없다더니. 정수 너마저 그럴 줄은 몰랐네.”

정수

 “히힛.”

민주

 “그저 좋단다. 저리도 좋을까?”

때마침 채연이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연

“앗! 언니!”

채연이의 소리가 너무 큰 탓일까? 졸지에 주변 이목이 집중됐다.

뜻하지 않게 민주의 얼굴이 팔렸다.

개중 몇몇이 민주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여성회원2

 “어머, 저기. 김민주 아냐?”

여성회원1

 “맞네. 맞아. 김민주네. 어머! 이런 데서 김민주를 다 보네?”

여성회원2

 “사진이라도 찍어달라고 해볼까? 우리 아들이 김민주 되게 좋아하는데.”

여성회원3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던데. 찍어주겠어? 다른 연예인들은 사진도 잘 찍어주고 그런다던데. 에이, 관둬.”

아까부터 아줌마 한 명이 자꾸 험담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신경이 가 있던 찰나였다.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민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주

 “아이씨, 저 아줌마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그걸 보고 정수가 기겁하며 들릴까 말까 한 작은 어조로 속삭였다.

정수

 “누나, 어쩌시게요?”

민주

 “가만히 있어 봐.”

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군거리던 테이블로 다가갔다.

말투와는 달리 얼굴에는 예의 바른 상냥한 미소를 띤 채였다.

민주

 “어머, 어머니들 안녕하세요. 운동하러 오셨나 봐요?”

여성회원2

 “어, 어머어머! 진짜네. 진짜! 저 김민주 씨 팬이에요. 너무 반가워요!”

민주

 “호호호, 여기서 다 제 팬을 만나보네요. 사진 같이 찍으실래요?”

여성회원2

 “어머, 진짜!? 진짜 그래도 돼요!?”

민주

 “물론이죠. 블로그에 올리셔도 돼요. 대신 예쁘게 찍어주셔야 해요?”

찰칵. 찰칵.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채연이 정수 옆에 다가가 속삭였다.

채연

 “언니, 왜 저래?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정수

 “어휴, 내버려둬. 저러는 게 한두 번이야? 누나는 다 좋은데 꼭 이상한 데서 승부욕이 발동된단 말이야?”

사진 요청이 여기저기 쇄도하고 있을 무렵, 처음에 민주 뒤편에서 험담했던 아주머니가 민주에게 다가가 사진을 요청했다.

여성회원3

 “민주 씨. 나도 사진 한 장만 부탁해도 될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민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 봐 놀라는 표정이 할리우드 배우 뺨칠 정도였다.

민주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여성회원3

 “아, 민주 씨. 바쁜가 보네. 그러면 빨리 사진 한 장만….”

민주

 “어머,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급한 약속이 있는 걸 깜빡하고.”

아예 등까지 돌려버린 민주가 정수와 채연을 보며 손짓했다.

민주

 “너희들 거기서 뭐 해? 늦겠다. 빨리 가자?”

정수와 채연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기 뒷담화 했다고 복수하는 거지?’

‘아마도? 진짜 유치하다니까.’


츤데렐라18화 - 수영 센터 (1)

18. 수영 센터 (1)

5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민주가 선글라스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민주

 “너희 지금 내가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정수

 “…….”

채연

 “…….”

둘은 시선을 마주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해 무엇하랴. 이심전심인 것을.

민주

 “세상을 살다 보면 말이야. 유치해져야 할 때도 있는 거야. 지금 내가 딱 그랬어.”

정수

 “저희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민주

 “표정이 말을 하고 있잖아. 표정이!”

띵-!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민주가 발을 내디뎠다.

똥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두 명을 데리고 민주가 사무실 앞에서 멈춰 섰다.

민주

 “아, 거참.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둘이 어디라도 좀 갔다가 와.”

정수

 “네?”

민주

 “어차피 1시간 30분짜리 강습이면 2시간 정도는 여유 있을 거 아니야? 데이트나 좀 하고 오라고. 근처에서 밥이라도 사 먹던가.”

민주가 지갑에서 5만 원권 두 장을 꺼내 정수에게 쥐여줬다.

민주

 “그렇다고 너무 늦지는 말고. 나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정수

 “누나.”

채연

 “언니.”

두 명이 마치 십 년 만에 상봉한 형제를 보듯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민주를 쳐다봤다.

잘만 하면 눈물도 흘릴 것 같았다.

민주

 “뭐야!? 이 오글거리는 표정들은? 됐고. 빨리 가봐. 채연이는 그거 나주고.”

채연

 “네. 언니.”

채연에게서 수영복 가방을 건네받은 민주가 사무실로 모습을 감추자 정수와 채연이 서로를 바라봤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자유시간이 좋아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정수가 5만 원권 두 장을 손에 쥐고 흔들어 보였다.

민주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가자!”

***

민주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내가 사무실 안에 앉아 있었다.

민주

 “어? 1203호?”

경훈은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경훈

 “또 1203호입니까?”

민주

 “아, 이름이…. 서…. 뭐였더라? 서장훈?”

경훈

 “서. 경. 훈입니다.”

민주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둘 사이 대화에 실장이 끼어들었다.

실장

 “어라? 두 분에서 아는 사이?”

민주

 “네. 서장훈 씨 저희 아파트에 살아요.”

경훈

 “아, 진짜! 서경훈이라니까. 왜 자꾸 남의 이름을 바꿔 불러요? 제가 농구선수입니까?”

민주

 “아, 그거나그거나! 같은 선수끼리. 제가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서 그래요. 미안해요. 됐어요!?”

경훈

 “그 정도면 치매 수준 아닙니까? 병원 가봤어요?”

민주

 “치매라니요! 저 아직 쌩쌩하거든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말을 너무 막 하시네.”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실장이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장

 “두 분이 생각보다 친한가 보네.” 

민주

 “에엑!? 저희가요!?”

경훈

 “에엑!? 저희가요!?”

둘이 누구랄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같은 반응에 실장이 피식거렸다. 

실장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네요.”

경훈

 “네에!?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번에는 경훈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선수를 놓친 민주는 입술만 삐죽였다.

실장

 “경훈 씨 원래 사람 앞에서 험담하고 그러는 스타일 아니잖아? 경훈 씨 하는 거 보니까 난 정현 씨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금방 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보다는 두 분에서 이야기하는 쪽이 더 편할 테니까. 경훈 씨가 안내 좀 해드리고, 오늘 일정에 맞춰 강습도 진행해주고. 할 수 있겠지?”

경훈

 “제가요?”

실장

 “별 무리 없어 보이는데?”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

 “뭐, 그러죠.”

실장

 “뭐야, 바라던 거 아니었어? 대답이 왜 이렇게 시원찮아?”

민주를 의식해서일까? 

경훈이 민주를 힐끔 쳐다보곤 말꼬리를 흐렸다.

경훈

 “뭐….”

실장

 “싱겁긴.”

툭.

실장이 경훈의 어깨를 툭 치고는 민주를 쳐다보고 말했다

실장

 “등록은 이미 다 해놨고, 오늘부터 센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설명은 민주 씨 앞에 있는 서경훈 강사가 해줄 겁니다. 이용하시다가 불편하신 부분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그러면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주

 “아, 네…. 뭐. 저도 잘 부탁드려요.”

민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한 실장의 손을 잡았다.

***

경훈과 민주는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민주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센터 여기저기를 거닐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민주

 “와, 진짜 크네요? 밖에서 볼 땐 몰랐는데.”

경훈

 “그렇죠? 전국최대규모니까요. 김민주 씨는 VVIP 회원으로 등록되어있으니까 전 시설 모두 무료로 이용 가능합니다. 이용하시고 싶은 시설이 있으면 그냥 이용하시면 됩니다. 개인 라커룸은 마음에 드시는 곳을 쓰시면 되고, 운동복도 무료로 대여해드리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데스크에서 요청하시면 됩니다.”

민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주

 “아, 그런데. 의외네요? 이런 데서 다 보고? 전 그쪽이 백수인 줄 알았는데. 강사셨어요?”

경훈

 “네?”

민주

 “아, 아니에요. 그냥 동네주민을 이런 데서 만나니까 신기해서요. 하…. 하하…!!”

경훈

 “뭡니까? 싱겁긴. 저야말로 놀랐네요. 그보다 듣기로는 스쿠버다이빙이랑 수영 수강신청을 하셨다고요?”

민주

 “네. 제가 최근에 들어간 작품이 있는데, 역할이 해녀역이에요. 도움될까 해서 배워보려고요.”

경훈

 “그렇다면 지금 실력은 어느 정도시죠?”

민주

 “실력이요? 완전 초보예요.”

경훈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초보신가요? 혹시 개헤엄도 못 치시는 건….”

민주가 과장스럽게 반응했다.

민주

 “숙녀한테 개헤엄이 뭡니까? 개헤엄이. 그냥 아예 못한다고 보시면 돼요. 제가 실은... 이거 비밀인데요. 잠깐 이리.”

민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짓을 했다. 

경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귀에 대고 들릴까 말까 한 어조로 속삭였다.

민주

 “제가 실은 물 공포증이 있어서요. 샤워할 때 빼놓곤 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는 목욕탕도 못 가요. 무서워서.”

경훈

 “아, 그러셨구나. 어쩌다가?”

민주

 “그걸 꼭 말해야 하나요?”

경훈

 “왜 그러는지 정도는 알아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말하기 곤란하신가요?”

민주

 “곤란하진 않지만…. 뭐,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라서요. 실은 제가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요. 11살 때인가? 시골에 물놀이하다가 익사 당할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이후로 물을 무서워해요.”

경훈

 “익사요?”

민주

 “부모님 말씀으로는 시골에 놀러 갔다가 사고당한 거라고 하던데. 기억은 잘 안 나요. 이상하게도 사고 전에 시골에서 지냈던 기억이 없어요. 그때 동네 애들이랑 어울려서 놀다가 그랬다고 하던데….”

경훈

 “동네 애들이요?”

경훈의 눈이 번쩍 떠졌다.

경훈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요?”

민주

 “네. 병원에도 가봤는데, 기억상실? 뭐 그런 비슷한 거라네요. 정신적으로 충격이 커서 그렇다고 하는데…. 제가 의사가 아니니 뭐 알 수가 있나요? 그러면 그러는가 보다. 하는 거지.”

경훈

 “아, 그러셨구나. 어쩌다가….”

경훈은 깊은 탄식 음을 내뱉었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다.

사실 경훈은 민주에게 말하지 못할 서운함 같은 것이 쌓여 있었다. 

사고 이후 한 번도 소식을 전해주지 않은 것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사실, 성인이 된 후 민주와의 만남은 아파트 1층에서가 처음이 아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기에 스치듯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민주는 아예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무심히 경훈 옆을 지나쳤다. 

그때 자신이 민주를 알아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지금 와서 생각해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물론 세월이 너무 흘러 자신을 알아보기란 무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경훈은 그것이 못내 섭섭했다. 

그래서 처음 재활용분리수거장에서 일부로 더 못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억상실증이란 소리를 듣는 순간 그 같이 서운했던 감정들이 씻은 듯이 내려가고, 그것은 이내 미안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민주

 “실은 얼마 전에도 그것 때문에 병원 갔다가 왔어요. 요즘에도 가끔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거든요.”

경훈

 “의사가 뭐랍니까? 이상 있대요?”

민주

 “음…. 뭐, 큰 문제는 없고. 제가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 그렇다고 하네요. 뭐, 당장 죽지는 않으니 큰 문제는 없는 거죠. 그러면 됐죠. 뭐.”

경훈

 “이유도 알 수 없고 아프다면 큰 문제 아닌가요?”

민주

 “응? 왜 내 건강에 오바하고 그래요? 뭐에요? 또 그런 눈빛은? 아프다고 하니까 막 제가 불쌍해 보여서 막 잘해주고 싶고 그래요?”

경훈

 “뭐, 약간?”

민주

 “뭐예요, 진짜? 됐고! 앞으로 못한다고 핀잔이나 주지 마세요. 나 그런 거 딱 질색이니까.”

경훈

 “뭐,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보도록 하죠.”

경훈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경훈

 “슬슬 수업할 시간이 됐네요. 아줌마들은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민주 씨도 수영복 갈아입고 5층 F 지역으로 오세요. 20분 후면 수업 시작할 겁니다.”

민주

 “엥? 웬 아줌마? 개인 강습 아니었어요? 난 그렇게 알고 왔는데?”

경훈

 “1시간은 단체교육이고, 30분은 개인 교육시간이에요. 늦지 않게 준비하고 오세요. 탈의실은 맞은편에 있습니다. 수영복은 챙겨오셨죠?”

민주

 “네. 뭐….”

경훈

 “그러면 조금 있다가 뵙도록 하죠. 저도 준비할 게 있어서.”

민주

 “네….”

어물쩍거리는 사이 경훈이 되돌아오던 길을 밟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민주도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걸음을 뗐다.

***

웬일인지 아줌마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사람이 의외의 장소에 나타난 까닭일 것이다.

여성회원1

 “어머머, 웬일이야? 김민주네.”

여성회원2

 “뭐야, 김민주가 여긴 웬일이야? 설마 수영 배우러 온 거야?”

여성회원3

 “와, 역시 연예인이라서 그런가? 되게 예쁘네. 실물이 더 나은 것 같은데?”

김민주가 수영복을 입고 등장하는 순간 아줌마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동물원 안 원숭이도 이것보단 나을 것이다.

김민주를 구경하겠다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몰려든 모양이다.

제아무리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라곤 하지만 이렇듯 무리가 지어있는 공간에 수영복 차림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은 천하의 김민주라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이씨, 이럴까 봐 개인 강습 받겠다고 한 건데.’

어찌 첫 수업 날부터 일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몸매에 자신이 없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먹은 피자와 비빔밥 때문에 배가 조금 볼록해졌다. 요 며칠 폭식을 했더니 옆구리 살도 조금 삐져나오는 것 같았다. 자연히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러닝이라도 좀 뛰고 올 걸 그랬나? 채연이 얘는 웬 비키니를 가지고 와서.’

뒤늦은 후회를 해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옷을 전부 탈의한 후에 비키니 수영복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보통은 촬영 때문에 비키니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며칠 전부터 식단을 조절하고, 전날에는 배가 나올까 봐 물 한 모금도 먹지 않는다. 화보용 몸매는 보통 그렇게 완성된다.

헌데, 지금은 촬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전날 폭식도 했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의 몸매는 단연 아줌마들 사이에서 돋보였다. 아줌마들이 시기 반 질투 반이 섞인 표정으로 민주를 훑어보기 여념이 없었다. 


츤데렐라19화 - 수영 센터 (2)

19. 수영 센터 (2)

삑삑삑삑-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기다리던 경훈이 등장했다.

아줌마들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됐다.

민주도 힐끔 경훈을 쳐다봤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딱 벌어진 어깨와 그 아래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이었다.

‘오? 운동 좀 했나 본데?’

경훈

 “자자, 곧 수업 시작합니다. 줄 서시고, 거기 잡담 그만 하세요.”

아는 얼굴이 나타나자 민주가 반가움에 손을 올려 아는 체를 하려다 머쓱해진 표정으로 도로 내렸다.

경훈의 시선은 전혀 민주 쪽으로 향해 있지 않았다. 

움찔거린 손이 절로 민망했다.

‘뭐야, 아는 체도 안 해 주고? 강사라고 뻐기는 거야 뭐야?’

민주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일까?

경훈이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내가 정리되자 경훈이 민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훈

 “오늘 새로운 학생이 왔습니다. 김민주 씨. 다들 알고 있으실 것 같고, 환영의 의미로 박수 한번 쳐줍시다. 모두 박수.”

“짝짝짝짝.”

느닷없이 풀장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주가 머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경훈

 “자자, 인사도 했으니 이제 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럼 모두 구령 붙여서 운동 시-이-작-!”

준비운동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좌우로 해주고,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동작들이 대부분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아줌마들이 하나둘 준비된 동작에 맞춰 손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 삑. 삑. 삑. 삑.

오른쪽. 삑. 삑. 삑. 삑.

아래. 삑. 삑. 삑. 삑.

아무것도 모르는 민주도 옆 사람을 힐끔거리며 따라 할 수 있을 만큼의 기초적인 동작들뿐이었다.

시시한 것들뿐이라 나중에는 하품까지 나오려고 들었다.

‘아, 뭐야? 초딩도 아니고. 뭘 귀찮게 이런 걸 해?’

민주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너무나 적극적인 태도로 준비운동에 임하고들 있었다.

그때 신경질적인 호루라기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삑삑삑삑 -!

경훈

 “거기 김민주 씨!”

민주

 “네?”

경훈

 “준비운동 제대로 안 합니까?”

옆에서 깔깔거리는 아줌마들 웃음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낙엽 떨어지는 모습만 봐도 10대 소녀들은 까르르 거린다곤 하지만 여기 모인 아줌마들도 그에 못지않아 보였다. 과장 돼도 너무 과장되게 웃었다.

뜻하지 않은 지적질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웬 지적질?’

첫 수업. 그것도 시작하자마자 지적을 받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민주

 “저, 제대로 하고 있거든요!?”

경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경훈이 민주에게 바싹 붙어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몸에 타인의 손이 닿자 민주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민주

 “어머머, 왜 남의 몸에 허락도 없이…!”

경훈은 들은 척 만 척, 한 손으로는 민주의 등을 접고, 한 손으로는 민주의 팔을 내렸다. 강압적인 행동에 등이 저절로 90도로 굽어졌다.

민주

 “악!”

목구멍에서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경훈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경훈

 “스트레칭을 할 때는 확실하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쭉쭉. 아셨습니까?”

두두둑. 두두둑.

요근래 운동을 하지 않고 너무 늘어진 탓일까? 

관절들이 살려달라고 저마다 아우성을 쳤다.

여성회원1

 “호호호, 민주 씨. 운동 잘 안 하나 봐?”

여성회원2

 “자기 요가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런데 생각보다 뻣뻣하네?”

그 소리를 들은 아줌마들이 민주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민주

 “아니, 그게…. 요 며칠 몸이 안 좋아서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경훈

 “자자, 마무리합시다. 호흡 가다듬으시고…. 하나…. 둘…. 하나…. 둘….”

그새 경훈은 호루라기를 불며 정면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불 지펴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얄미웠다. 달려가 어깨로 차징해서 물에 빠트리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경훈

 “자자, 잡담들 그만하시고. 열 맞춰서겠습니다. 열을 2개로 나누겠습니다. 킥보드 없이 자유형이 가능하신 분은 왼쪽, 아직 킥보드가 필요하신 분은 오른쪽에 서겠습니다.”

경훈의 말에 맞춰 줄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민주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몰라 조용히 손을 들었다.

민주

 “저기, 선생님!? 저는요?”

경훈

 “민주 씨는 초보니 당연히 오른쪽에 섭니다.”

민주

 “네.”

민주가 슬그머니 오른편 줄 끝에 삐죽거리며 들어갔다.

딱히 친절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무뚝뚝한 경훈의 태도에 왠지 실망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경훈은 아르바이트강사를 왼쪽 앞에 밀어 넣고는 지시했다.

경훈

 “자, 왼쪽 줄은 여기 있는 강사님을 따라 2번 라인에 입수합니다. 오른쪽 분들은 저를 따라 4번 라인에 들어옵니다.”

순간 아줌마들 사이에서 불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성회원1

 “아니, 경훈쌤! 여태껏 숙련자들을 경훈쌤이 가르쳐줬잖아. 왜 갑자기 바꾸는 건데?”

여성회원2

 “뭐야, 설마 김민주 씨 들어왔다고 지금 편애하는 거야?”

경훈

 “하하하. 그럴 리가요. 오늘만입니다. 오늘만.”

아줌마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경훈의 말에 맞춰 아르바이트강사를 쫓아 4번 라인에 들어갔다. 어째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가르치는 꼴이다. 

달래고 어르고, 어째 초등학생들보다도 통제가 힘들었다.

경훈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외쳤다.

경훈

 “자. 우리도 이동합니다.”

수영장은 크게 6개의 라인으로 나누어져 있다.

위로 갈수록 수심이 낮아 초보자들이 이용하기가 수월했다. 4번 라인은 수심이 대략 1m 정도로 초보자들이 킥보드 차기에 적합한 수심이었다.

킥보드를 이용해본 회원들은 능숙하게 물에 들어가 구령에 맞춰 킥보드를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문제는 민주 차례부터였다.

경훈

 “김민주 씨?”

앞사람이 물에 들어가 킥보드를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는 제자리에 서 있을 뿐 물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민주 뒤편에 서 있던 회원이 민주를 재촉했다.

여성회원1

 “민주 씨 뭐해? 안 들어가!?”

하지만 민주는 요지부동이었다.

자세히 보니 안색이 파랗게 질려있고, 입술도 살며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경훈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민주를 뒤로 불렀다.

경훈

 “민주 씨, 잠깐 이리와 보세요.”

경훈이 어느새 가져온 가운으로 민주의 몸을 덮어주었다.

경훈

 “괜찮아요?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민주

 “아, 조금 어지럽긴 한데 괜찮아요. 물 앞에 서니까 다리가 얼어붙어서….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경훈

 “예, 알겠습니다. 잠깐만 이곳에서 쉬고 있으세요. 따뜻한 음료라도 좀 마시고. 아무래도 민주 씨는 개인 강습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혼자 있을 수 있겠죠?”

단둘이 있으니 조금 전보다는 조금 살가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기엔 민주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마음 한 편에 드는 불안감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민주

 “선생님. 저 할 수 있을까요?”

경훈이 민주의 어깨를 두들기며 대답했다.

경훈

 “잘 될 겁니다.”

***

민주

 “응?”

민주가 눈을 뜬 건 그 후로 50여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아무래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호루라기를 불던 경훈의 뒷모습이었다.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시끌벅적했던 아줌마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왠지 큰 공간 속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바로 옆에는 경훈이 의자에 앉아 뭔가를 조물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경훈이 잠에서 깬 민주를 발견하곤 말을 걸어왔다.

경훈

 “아, 깼어요?”

민주

 “제가 깜빡 졸았나 봐요. 에엑!?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어요?”

민주가 정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훈

 “존다고 하기에는 조금…. 아예 대놓고 자던 거 같던데. 의외로 털털한 성격인가 봐요? 이런 데서 꿀 숙면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민주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뭐, 내가 잠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편이긴 하지만…. 으아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수면을 취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민주

 “근데 뭐해요?”

경훈은 조금 전부터 조물거리고 있던 것을 손바닥 위로 올려놓은 상태로 내밀었다.

그것은 아기 손바닥만 한 튜브 인형이었다.

민주

 “오리 인형? 뭐예요, 유치하게. 아직도 이런 거 갖고 놀아요?”

경훈

 “뭐…. 이곳엔 가끔 어린아이들도 오니까. 이런 거 주면 좋아하거든요. 자.”

경훈이 오리 인형을 내밀었다.

민주

 “뭐에요? 내가 애도 아니고. 나 가지고 놀라고요? 그런데 이거 은근히 귀엽다.”

몸통을 누르자 삑- 삑- 소리를 내며 오리 모양이 일그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민주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걸쳤다.

민주

 “헤헤, 진짜 귀엽네.”

삑삑삑.

덩달아 그것을 보고 있던 경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슬그머니 걸쳤다.

경훈

 “자, 그거 들고 따라와요. 휴식시간 끝났습니다. 가운도 거기에 놔두고.”

민주

 “응? 어디 가려고요?”

민주가 가운을 벗고 경훈을 따라간 곳은 유아용 풀장이었다.

높이는 무릎 정도? 물은 차갑지 않고 미지근했다.

경훈

 “오늘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리 들고 들어오세요.”

민주

 “네? 여기서요?”

경훈

 “일단 앉아보세요.”

경훈이 먼저 자리를 깔고 풀장 위에 앉았다. 앉으니까 물 높이가 허벅지에 찰랑거릴 정도로 차올랐다.

경훈

 “뭐해요? 앉으라니까? 설마 이것도 무서워요?”

민주

 “아니, 그건 아니지만….”

민주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앉았다.

경훈

 “어때요. 이 정도 높이도 무섭나요?”

민주

 “네, 뭐. 이 정도는 괜찮아요.”

경훈

 “오리 줘 봐요.”

경훈이 내민 손위로 민주가 오리 인형을 올려놓아 줬다.

경훈이 물 위에 오리 인형을 띄웠다. 녀석은 마치 돛단배처럼 기우뚱기우뚱하면서 물에 둥둥 떠다녔다.

민주의 시선은 온통 오리에게 빼앗겨 있었다.

경훈이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경훈

 “원래 개인수강은 30분씩이지만 익숙해질 때까지 30분씩 더 봐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녁 타임까지는 휴강시간이니 딱히 할 일도 없고. 대신 당분간은 단체강습은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민주

 “진짜요? 그래도 돼요?”

민주가 솔깃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민주는 아줌마들과 어울려 수영을 배울 자신이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수영은커녕 물에도 못 들어갔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음번에도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구경거리나 놀림거리가 되는 건 민주로서도 사양이었다.

설마, 이러한 점을 배려해준 것일까?

여하튼 경훈이 특별히 신경을 써주고 있는 건 확실했다.

민주

 “보기와 달리 의리 있으시네요? 이웃 사촌이라고 챙겨주시는 거예요?”

경훈

 “절 어떻게 봤는데요? 이래 봬도 의리파라는 소리 많이 듣는 편인데.”

민주

 “그쪽이요? 전혀 안 그렇게 생겼거든요?”

경훈

 “뭐, 첫 만남이 썩 좋진 않았으니까. 아참, 그런데 내일 뭐 합니까? 혹시 스케줄 있습니까?”

경훈의 질문에 민주는 속으로 웃었다.

남자들이 작업하기 전에 흔히 묻는 대사였다.

고루하고, 진부했다. 어쩜 이렇게 남자들은 다 똑같은 건지.

민주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꾸 딱딱하게 말할 거예요? 무슨 군대 온 줄 알겠네.”

경훈

 “아…. 제가 그랬습니까?”

민주

 “이봐. 또 그런다.”

경훈

 “수강생들 가르치는 게 습관이 돼서….”

민주

 “뭐, 그건 그렇고. 이틀 더 쉬어도 돼요. 딱히 할 거 없는데 왜요? 설마, 나랑 다정하게 모닝커피를 마신다든가 산책하러 가자... 이런 거는 건 아니죠?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닌데?”

경훈

 “뭐…. 그것도 좋긴 한데…. 어쨌든 시간 돼요?”

민주

 “되기야 되죠. 뭘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경훈

 “그러면 내일 아침 6시에 1층에서 봅시다. 일어날 수는 있어요?”

민주

 “저, 엄청 부지런하거든요? 그리고 누가 내일 나가기나 한데요? 웬 헛물?”

경훈

 “나와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튼, 나오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그리고 오늘은 이쯤하고 그만 일어나죠. 저기 매니저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경훈의 말대로 풀장 입구 쪽에 정수와 채연이 서성이고 있었다. 민주와 시선이 얽히자 반갑다는 듯 손을 교차하며 흔들었다. 

경훈

 “자, 그만 갑시다.”

경훈이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민주가 물었다.

민주

 “이거 오리는요?”

경훈

 “가져요. 내가 주는 거니까. 민주 씨 오리 좋아하잖아요.”

경훈

 “네?”

경훈은 대답 대신 웃고 그냥 가버렸다.

민주가 오리를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크기가 작아 손에 쏘옥 들어왔다.

민주

 “뭐야? 내가 언제 오리를 좋아했다고 그래? 그리고 또 자기 멋대로 네. 내가 무슨 신하도 아니고 이래라저래라.”

민주도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모습을 보이며 앞서가는 경훈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민주

 “은근히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란 말이지. 나쁘지 않아. 강사라서 그런가?”


츤데렐라20화 - 봉사활동

  

20. 봉사활동

민주

 “에이씨, 나는 또 여기 왜 나와 있는 거니?”

민주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민주

 “아니지. 아니야. 내가 절대 뭘 기대하거나 궁금해서 나온 건 아니야. 그냥 운동. 그래,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가는 거야. 암. 나는 운동을 좋아하니까!”

민주는 운동복차림으로 운동화를 신고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 중이다. 

시간은 정확히 6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하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현관문으로 힘차게 나온 민주는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

전혀 자신이 기대했던 장면이 아니었다.

경훈

 “아, 왔네요.”

1층에는 경훈이 먼저 나와 민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를 반기는 것은 경훈뿐만이 아니었다. 동네주민들이 여러 명 나와 있었다. 

숫자는 5명. 

전원이 어깨에 ‘부녀회’라고 쓰여 있는 노랑 띠를 두르고 서 있었다. 그들 곁에는 정체불명의 박스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이삿짐센터들이나 쓸법한 노란색 바구니 안에는 솥이나 냄비 따위의 고물들이 담겨 있었다.

아줌마들이 민주를 발견하고 저마다 반가운 듯 소리쳤다.

동네주민1

 “어라? 진짜 나왔네?”

동네주민2

 “어머, 웬일이야!? 나온다길래 설마 했는데. 진짜네? 민주 씨. 반가워요!”

민주가 자신을 환호하는 동네주민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경훈을 슬쩍 옆으로 잡아당겼다.

귓가에 입을 대고 작은 말로 속삭였다.

민주

 “뭐에요? 어떻게 된 거에요?”

경훈

 “아, 보시다시피. 부녀회 모임?”

민주

 “그쪽은 남자잖아요! 근데 웬 부녀회? 그리고 이건 다 뭐에요!? 저 물건들은 다 모고?”

경훈

 “아, 실은. 오늘 그날이에요. 저번에 말한 복지관 봉사 가는 날. 내가 어제 말 안 했던가?”

민주

 “어젠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요! 뭐에요, 장난해요. 지금!? 모처럼 쉬는 날 지금 봉사 활동하자고 나 부른 거예요!? 그것도 아침 6시에!?”

경훈

 “봉사활동에 시간이 뭐 중요합니까? 좋은 일하자는 건데. 자자, 그러지 말고 민주씨도 이거 하나 착용하시고.”

경훈은 친절하게 노란 띠 하나를 민주의 어깨에 둘러줬다.

민주

 “어머, 어머?”

어찌해볼 새도 없이 얼떨결에 노란 띠를 착용했다.

경훈

 “좀 웃어요. 이미지관리? 연예인은 그런 거 해야 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아줌마들은 속도 모르고 부녀회 노란 띠를 착용한 모습을 보고 깔깔대고 있었다.

민주로써는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만으로도 미칠 노릇이었다.

경훈이 옆에서 남몰래 속삭였다.

민주

 “혹시, 지금 오붓한 데이트 뭐, 그런 거 기대하고 나온 겁니까? 커피 마시자고 해서?”

민주

 “허, 나를 몰로 보고? 내가? 천하의 김민주가 그쪽이랑!?”

경훈

 “어라? 약간 화난 표정인데? 진짠가 본데?”

그냥 헛웃음만 났다. 

헛소리대회라도 열린다면 당장 금메달도 문제없어 보였다.

허세 병, 왕자 병에 또 저런 헛소리하는 재주까지 갖췄을 줄이야.

트리플 비호감.

경훈

 “뭐해요? 안 와요?”

앞서가던 경훈이 뒤를 돌아보며 민주를 불렀다.

어느 틈에 경훈은 아줌마들과 어울려 물건들을 잔뜩 든 채 걸음을 떼고 있었다. 아줌마들이 뒤돌아서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해댔다.

민주가 인상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민주

 “갑니다. 가! 간다고요!”

***

민주

 “아이고 고되다.”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이 왼쪽, 오른쪽 어깨를 두들겼다.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어깨, 허리, 다리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민주는 1시간 30분 만에 녹초가 되었다. 

정말이지 살림과는 연이 먼 모양이었다. 햇반이나 돌려먹을 줄 알지. 할 줄 아는 게 전무해서 감자랑 양파를 깎고, 달걀 푸는 데만 모든 시간을 넘게 허비한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온갖 허드렛일은 민주의 차지였다. 

제대로 된 장소가 없다 보니 주방과 연결된 뒷마당 바닥에서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데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해 절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메라 앞에서 봉사활동을 흉내를 내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쓸쓸히 잡일을 하는 것은 민주로서도 처음이었다.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몽땅 털어오던가 아니면 손질되어있는 재료를 마트에서 사 오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경훈

 “할 만해요?”

언제 왔는지 경훈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자신들이 떠맡은 일을 하고 있어 민주만 투정부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민주

 “병 주고 약 줘요!?”

경훈이 내민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리를 쭉 펴고 풀어진 동공으로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목구멍으로 따뜻한 것이 넘어가자 잠시 피로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민주

 “올 때마다 이렇게 일을 하는 거예요? 도대체 음식을 얼마나 만드는 거예요?”

경훈

 “한 100인분쯤 되나?”

민주

 “그렇게 많아요?”

경훈

 “이곳을 이용하는 분들은 그것보다 적은데 음식 하는 날이면 소식 듣고 오는 분들도 계셔서 그래요. 보통 그 정도씩은 만들어요.”

민주

 “아, 그렇구나.”

경훈

 “그런데 요리는 아예 못하나 봐요? 영 일이 서툴던데.”

민주

 “제가 뭐, 요리 배울 시간이 있겠어요? 그리고 요즘에 사다 먹는 것도 괜찮아요. 밥은 햇반 돌려먹으면 되고. 햇반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경훈

 “뭐, 하긴.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나오세요. 배식시간 다 됐으니까.”

민주

 “배식요? 뭔 배식?”

경훈

 “8시부터 배식 시작할 거예요. 민주 씨도 나와요. 감자는 그만 깎고.”

민주

 “남은 거는요?”

경훈

 “이 정도면 충분해요. 남은 것은 식당 아주머니가 알아서 처리하실 거예요.”

바라던 바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가 감자를 버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지관 1층 식당 한편에 부녀아줌마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배식준비를 하고 있었다. 줄곧 건물 밖에서 감자만 깎다 보니 건물 안 사정을 몰랐는데, 막상 식당 안에 들어와 보니 배식 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족히 30명은 넘게 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줌마들 손짓에 민주가 그들 무리에 합류해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두건까지 썼다.

동네주민1

 “민주 씨는 여기 있는 감자조림을 담아주면 돼.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민주

 “제가요?”

동네주민1

 “그러면 여기 민주 씨 말고 다른 사람 또 있어? 자, 국자 받고. 양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한 국자씩만큼만. 너무 많이 주면 뒷사람 먹을 게 없으니까. 알았지?”

민주

 “네, 뭐….”

배식이 시작되자 줄지은 사람들이 무섭게 배식 판을 앞으로 내밀었다. 대부분의 중년 이상의 행색이 좋지 않은 노숙자들이거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주는 혹시 자신을 알아본 팬들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그런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개중에 민주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 김민주 씨?’나 ‘수고하세요,’정도가 전부였다.

그 같은 반응에 맥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민주

 “많이 드세요.”

동네주민1

 “맛있게 드세요.”

음식을 나눠주고, 맛있게 먹으라고 말을 보태는 것은 생각보다 할 만했다.

감자 깎거나 양파를 까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 이런 비슷한 배역을 맡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인 시절이었고, 연기도 잘 못 하던 때라 단순한 대사 한마디가 어렵고 긴장되기만 했는데, 지금은 카메라가 없어서인가 훨씬 편안하고 쉬운 느낌이었다.

할머니1

 “이, 처자 TV에서 본 거 같은데 연예인인가? 어디서 봤더라. 달빛동네? 거기서 봤나?”

나이가 일흔 정도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민주를 아는 체 해왔다. 

왠지 할머니를 보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민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민주

 “네, 맞아요. 달빛동네 거기서 제가 둘째 딸 역할 했어요.”

할머니1

 “아, 맞네. 맞아! 하이고, 그것참 재미있게 봤는데.”

민주

 “네. 할머니. 그건 끝났지만, 앞으로도 계속 TV에 나올 거니까 예쁘게 봐주셔야 해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구요. 밥도 많이 드세요.”

할머니1

 “아이고, 고마워라. 웃는 모습이 예쁘기도 하지. 내 손주 며느리 삼고 싶네.”

민주

 “호호호, 할머니도 참. 저보다 훨씬 예쁜 손주 며느리 보시게 될 거예요.”

50여 명 정도가 음식을 받아간 뒤 잠깐의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배식은 9시까지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들어왔다. 한가해진 틈을 타 민주는 식당을 돌아다니며 회수 안 된 먹다 남은 식판을 회수하거나 더러워진 식탁을 닦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일행 없이 홀로 떨어져 밥을 먹고 있는 할머니 한 명을 보았다. 

행색이 초라하고,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가만 보니 제대로 다듬지 못한 앞머리가 계속 아래로 흘러내려 국물에 빠져 찰랑거리고 있었다.

민주

 “할머니, 잠깐만 계셔보세요. 머리가 다 젖잖아요.”

민주는 자신이 머리에 꽂고 있는 핀을 빼내 할머니 머리에 채워주었다. 보석이 박혀있는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핀이었다.

민주

 “자, 이제 드셔도 돼요. 부족한 거 있으시면 더 말씀하시고요.”

할머니2

 “아이고, 고마워라.”

할머니는 가만히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더니 소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순간 그 모습에서 민주는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 생각이 났다.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도 최소한의 영양섭취만을 유지하고 있어, 뼈 가죽만 남아 보기에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모습도 연령대도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지만 단지 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할머니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비쳤다.

민주가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으로 자글자글 주름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민주

 “할머니. 자식들 있으세요?”

할머니2

 “자식 없어. 모두 죽었어.”

민주

 “그러면 혼자 사시는 거예요?”

할머니2

 “벌써 수십 년은 됐는데 뭘.”

대답은 퉁명스러웠지만, 그 툴툴거리는 말투에서 애잔함이 느껴졌다.

가족 없이 홀로 수십 년을 지냈다고 하니 민주로서는 도저히 그 슬픔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죽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외로움이 덜 느껴지거나 희석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는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민주는 그 처지가 왠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찔끔거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고는 손바닥으로 눈을 말렸다.

민주

 “아, 내가 왜 이러지? 할머니. 혹시 뭐 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할머니2

 “먹고 싶은 거?”

민주

 “네.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할머니2

 “음…. 닭고기 먹고 싶은데.”

민주

 “닭고기요?”

할머니2

 “살아 있을 때 아들이 닭볶음탕을 자주해줬는데, 요즘엔 그게 자꾸 먹고 싶네.”

민주

 “아, 지금은 그게 없는데…. 혹시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지금 있는 반찬으로다가.”

할머니2

 “그러면 다음번에 올 때 닭볶음탕 해줘.”

민주

 “네? 다음번에요?”

할머니2

 “힘들면 관두고.”

민주

 “아, 아니에요. 다음번에 오실 때 꼭 해드릴게요. 뭐,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머니2

 “진짜? 진짜 해주는 거야?”

민주

 “물론이죠. 다음번에 오실 때 꼭 해드릴게요.”

민주가 할머니와 멀어진 뒤 급하게 경훈을 찾았다.

민주

 “저기, 여기 다음번에 음식 하로 언제 와요?”

경훈

 “매달 15일에 오는 데요. 그건 왜요?”

민주

 “아이씨,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가지고. 나 다음 달 15일 날 뭐 하고 있지? 스케줄 봐야 되나?”

경훈

 “뭔데 그래요?”

민주

 “저기 앞에 있는 할머니한테 다음번에 닭볶음탕 해드리기로 했는데. 혹시 가능할까요?”

경훈

 “엥? 닭볶음탕요? 그거 재료비가 많이 들고 손도 많이 가는데….” 

민주

 “아이씨, 치사하게! 돈은 내가 전부 되면 되잖아요. 그래서 되요 안 돼요?”

경훈

 “뭐, 되긴 합니다. 그런데 아줌마들이 싫어할걸요? 알다시피 닭 손질이 만만치 않아서. 100인분을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민주

 “제가 다 하면 되잖아요. 제가! 아무튼, 다음번 메뉴는 닭볶음탕으로 해죠. 무조건. 알았죠?”

경훈

 “뭐….”

민주

 “그러면 약속한 겁니다. 메뉴 바꾸면 절대 안 돼요!”

뭔가 알 수 없는 결의에 가득 찬 민주를 바라보는 경훈의 동공에는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경훈은 사실 아까 전부터 민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말을 걸면서 머리핀을 할머니 머리에 꽂아주고 있는 모습까지.

성격이 드세니 사납니 해도 정 많고, 속 깊은 여자다. 

김민주라는 여자는.

그러고 보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새침을 떠는 모습이나 울음이 많은 모습이나. 남들 앞에서 강한척하는 모습까지.

어렸을 적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눈길이 간 거지도 모르겠다.

경훈을 잠자코 쳐다보고 있던 민주가 몸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민주

 “뭐예요? 그런 표정은?”

경훈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민주 등 너머 TV를 가리켰다.

브라운관 안에는 요즘 한참 인기가 좋은 걸그룹들이 가득 차 있었다.

민주가 툴툴거리며 등을 돌렸다.

민주

 “난 또. 하여간 남자들이란.”


츤데렐라21화 - 술 한 잔에 털어버리고

21. 술 한 잔에 털어버리고

다음 날. 

K 스튜디오 안.

오늘은 K그룹에서 선전하는 맥주 광고 재촬영이 있는 날이다.

대기실로 마련된 방안에선 민주가 얼굴을 고치고 있었고, 그 뒤로는 정수가 적당한 곳에 편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정수

 “누나, 뭐 기분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오늘은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

민주

 “내가? 뭐처럼 쉬어서 그런 게 아닐까?”

정수

 “하긴. 그동안 누나가 너무 못 쉬긴 했죠.”

민주

 “쉬니까 확실히 좋긴 좋더라. 이 얼굴 때깔 달라진 것 좀 봐. 팩하나 했을 뿐인데 아주 윤기가 좌르르 흐른다 흘러. 화장도 잘 먹고. 역시 사람은 쉬어가면서 일을 해야 해. 그런데…. 아…. 아…. 아이씨…!”

조금 전부터 어디가 불편한지 배를 매만지던 민주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깜짝 놀란 정수가 달려왔다.

정수

 “누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민주가 배를 움켜쥐며 대답했다.

민주

 “그게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래. 요 며칠 폭식을 해서 어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운동만 했거든.”

정수

 “아이씨! 누나는 진짜 이런 거로 놀래키지 좀 마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민주

 “채연아, 뭐 먹을 것 좀 없냐? 이대로 촬영 들어가면 나 배고파서 쓰러질지도 몰라.”

채연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촬영이에요. 먹을 건 없고. 아! 이거 어떤 팬분이 주고 갔는데.”

채연은 탁자 한편에 올려놓은 상자를 민주에게 내밀었다.

지름 20cm 정도의 예쁜 선물용 종이상자였다. 

민주

 “이게 뭐야? 혹시! 먹는 거 아닐까!? 초콜릿이나 사탕. 뭐 그런 거 있잖아! 크기가 딱 인데?”

민주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달콤한 초콜릿도.

사탕도 아니었다.

민주

 “끼야아악!!!!”

민주는 기겁하며 들고 있는 상자를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진 상자가 그 내용물을 툭 하고 내뱉었다.

엎어진 상자 안에서 죽은 생쥐가 툭 하고 떨어졌다.

채연

 “꺅꺅꺅!!!”

정수

 “으아아악!!!!”

그것을 보고 덩달아 채연과 정수도 소리를 질렀다. 밖에 대기 중이던 스태프도 달려오고, 황급히 누군가가 지시를 내렸다.

스태프1

 “치워! 어서 빨리!”

한바탕 소동이 난 후, 죽은 생쥐는 치워졌지만, 녀석이 남긴 충격은 여전히 대기실 안을 맴돌았다. 

민주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민주

 “뭐야? 팬이 가져다준 거 아니었어!?”

채연이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채연

 “저도 잘 몰라요. 퀵으로 온 건데. 상자가 예쁘길래 팬이 준 건 줄 알았는데….”

정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정수

 “아이씨. 웬 또라이 같은 놈이! 뭐 이딴 걸 보내고 지랄이야! 이건 가만히 놔두면 안 돼요! 제가 경찰에 신고라도….”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는 정수를 민주가 조용히 말렸다.

민주

 “됐어. 그만해.”

정수

 “뭘 그만해요! 이런 건 강경하게 대응을 해야 한다니깐요. 누나!?”

민주

 “그만하라니까!? 가뜩이나 요즘 시끄러워 죽겠는데, 이런 게 기사로 터져 봐. 팬들이 나 불쌍하다고 응원을 할까? 아니면 쌤통이라고 고소해 할까? 나는 후자 쪽이라고 보는데 말이야.”

예민해진 민주도 덩달아 신경질이 가득했다. 

하긴 평상시처럼 행동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정수

 “하지만….”

민주

 “이런 일 한두 번 겪어봐? 뭐, 하긴 생쥐를 받은 건 처음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냥 넘어가자. 시끄러워져 봤자 도움되는 거 하나도 없으니까.”

정수

 “예, 알았어요. 그러면 퀵 회사에 전화해서 물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만 알아볼게요. 내 이 자식. 잡히기만 하면 가만 안 놔둘 거예요!”

민주

 “그래, 혹시 알게 되면 나한테도 말해줘.”

정수

 “네. 알았어요.”

삭막해진 분위기 속에 스태프 한 명이 우물 쭈물거리며 다가왔다.

스태프1

 “저기…. 김민주 씨. 촬영 준비 다 됐다는데요. 힘드시면 조금 있다가 촬영할까요?”

민주

 “아니요. 괜찮아요. 바로 촬영하죠.”

채연

 “언니, 괜찮으시겠어요? 조금 쉬었다가 하시는 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채연도 만류했다.

하지만 민주의 뜻은 완강했다.

민주

 “아니, 됐어. 뭘 이런 일로 호들갑이야.”

민주는 심호흡했다.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김민주다.’

민주

 “후….”

민주는 심호흡한 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작 이 정도 일에 흔들린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민주

 “가자! 촬영하러.”

***

아침부터 시작된 광고촬영은 꼬박 13시간을 촬영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주

 “하아, 오늘도 또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민주는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주차장에 세워놓은 밴에 승차했다.

몸이 노곤하고, 맥이 탁하고 풀렸다. 

소파에 몸을 기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축하고 늘어졌다.

정수

 “누나, 어디로 모실까요?”

민주

 “여의도 오피스텔이 더 가깝지? 내일도 와야 하니까 거기로 가자.”

정수

 “괜찮겠어요. 누나? 오늘 안 좋은 일도 있었는데? 그냥 일산 집으로 가시는 편이….”

민주

 “안 좋을 건 또 뭐야? 그냥 가. 빨리 가서 쉬고 싶으니까.”

정수

 “네.”

정수가 액셀을 밟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는가 싶더니 얼마 못 가 덜컥하고 정차했다.

민주는 물론 채연도 덩달아 몸이 심하게 흔들리다 멈췄다.

놀란 민주가 소리치며 물었다.

민주

 “뭐야!!?”

정수

 “아, 죄송해요. 갑자기 고양이가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민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민주

 “어휴, 깜짝 놀랐잖아!”

정수

 “죄송해요.”

다시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곧 한산한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지만, 조금 전에 놀랐던 심장은 여전히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었다.

두근. 두근.

왠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을 가도 도무지 진정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 동안 잘 참고 억눌러왔던 불안감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민주

 “정수야. 차 돌려. 그냥 일산으로 가자.”

정수

 “네?”

민주

 “밤에 혼자 있기 싫다고. 그러니까 차 돌리라고!”

정수

 “네.”

끼이이익-!

1차선으로 차선을 바꾼 정수가 유턴 신호에 맞춰 핸들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민주는 바람이라도 쐬면 기분이 좋을까 창문을 내렸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긴커녕 휑한 거리가 주는 풍경은 적막감을 더해줄 따름이었다.

***

일산 집에 도착한 밴이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려는 민주를 정수가 걱정되는 눈으로 쳐다봤다.

정수

 “누나 괜찮아요?”

민주

 “괜찮냐는 소리만 몇 번째니? 됐으니까 어서 가봐.”

정수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민주

 “됐어.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정수

 “네. 그러면 뭐….”

더 이상 권유했다가는 욕설이 날아올 판국이었다.

정수와 채연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올게요.”

채연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올게요.”

민주

 “그래.”

민주를 태웠던 밴이 떠나고 민주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었다. 회사에서 얻어준 오피스텔에는 가봤자 아무도 없고 그래도 집에 온기라도 붙어 있는 집이 낫겠다 싶어서 일산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헌데 막상 집에 들어가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찝찝한 기분이 남아 있는 게 들어가서도 편히 쉬지 못할 것 같았다.

민주

 “아, 이럴 땐 소주 한잔이 딱 인데!”

민주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오늘은 술 한 잔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허물없이 부를만한 술친구 한 명이 없었다. 정수보고 되돌아오라고 전화를 할까 하는 생각에 괜히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누군가 민주를 향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경훈

 “뭐에요? 지금 와요?”

민주

 “어!? 서경훈 씨?”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은 놀이터로 이어진 입구에서부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민주

 “이 시간에 웬 놀이터?”

경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경훈

 “뭐, 잠도 잘 안 오고 해서.”

민주

 “아, 잘됐네! 잠도 안 오는데 우리 같이 소맥이나 한잔합시다.”

경훈

 “웬 소맥? 이 시간에요?”

민주

 “자자, 그러지 말고 한잔해요. 내가 살 테니.”

민주에 의해 거의 끌려가다시피 간 곳은 동네 상가 건물 앞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 

경훈은 종종 온 경험이 있지만, 민주로서는 처음 오는 곳이었다. 

민주가 텅 비어 있는 포장마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구석 자리에 앉았다.

민주

 “와, 여기 좋네. 맨날 보기만 했지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네.”

경훈

 “술친구 없어요?”

민주

 “제가 친구가 어딨어요? 경쟁자들이라면 모를까. 여기 아줌마 맥주랑 소주 좀 주세요! 뜨끈한 우동도 두 그릇도 주시고요! 아, 그리고 닭똥집도! 닭똥집도 한 접시 주세요!”

경훈

 “근데 내일 촬영 없어요? 이 시간에 술을 마시고?”

민주

 “에이, 몰라요! 촬영 그까짓 거. 될 대로 돼라지.”

경훈

 “응? 김민주 씨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요? 뭔 일 있어요?”

민주

 “하아, 오늘은 기분이 좀 그래요.”

한숨을 쉬는 민주를 보며 경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민주의 행동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구나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아줌마가 내온 맥주와 소주. 그리고 김치 한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민주가 맥주와 소주를 섞고,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한 방울까지 탈탈 목구멍에 넘기고야 잔을 내려놨다. 

민주

 “크으, 좋다. 역시 이 맛이지.”

경훈

 “아, 거 좀 천천히 먹어요. 누가 뺏어 먹습니까?”

민주

 “첫 잔은 원 샷! 그런 것도 몰라요? 쯧쯧, 술 헛 배웠네.”

경훈

 “어이구, 퍽이나.”

경훈도 혀를 차며 자신 앞에 놓인 소주잔에 술을 채웠다. 

민주가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잔을 가리켰다.

민주

 “어어어!? 소맥 안 먹고?”

경훈

 “전 맥주 안 먹습니다. 그냥 소주만 마실게요.”

민주

 “쳇. 의리 없기는.”

경훈

 “아니, 도대체 여기서 의리를 왜 찾습니까? 술은 저마다의 선호도가 있는 건데. 소주랑 맥주랑 섞어서 마시면 맛있는 것 같지만 그게 다음 날 얼마나 속이 부대끼는지 압니까?”

민주

 “아, 꼰대. 잔소리쟁이.”

민주가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주문을 받은 아줌마가 우동과 닭똥집을 내오며 살가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주인아줌마

 “자, 여기 우동 나왔습니다. 김민주 씨 우리 동네 산다는 건 들었는데. 보는 건 처음이네. 내가 특별히 많이 담았으니까 많이 먹고, 자주 놀러 와요.”

민주

 “호호호, 고맙습니다.”

주인아줌마

 “아휴, 실물이 훨씬 더 예쁘네. 그래, 많이 들어요. 부족한 거 있으면 또 말하고.”

민주는 우동이 놓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다음 후루룩 짚어 삼켰다. 그리고 반찬 삼아 닭똥집도 연거푸 두 점이나 입안으로 가져갔다. 

한참이나 오물거리더니 세상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민주

 “으으음. 맛있어!”

또다시 우동을 한 젓가락 먹고, 닭똥집을 짚으려다 경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경훈은 먹지를 않고 자신이 먹고 있는 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츤데렐라22화 - 술이 웬수지

22. 술이 웬수지.

민주

 “안 먹고 뭐 해요? 멀뚱멀뚱? 닭똥집 먹는 연예인 처음 봐요?”

경훈

 “네. 처음 봅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입가는 좀 닦고 드시죠. 연예인이라면서 입가에 그렇게 양념이나 잔뜩 묻히고.”

경훈이 냅킨을 짚어 민주에게 건넸다.

민주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눈을 곱게 흘겼다.

민주

 “아, 먹다 보면 양념도 묻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남자가 그런 거 가지고 쪼잔하게. 여자는요 그렇게 지적하는 남자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이제 보니까 여태껏 왜 혼자인지 알겠네. 저러니까 여자가 없지.”

경훈의 미간이 씰룩거렸다. 

볼이 헛바람을 잔뜩 머금고는 그것을 토해냈다.

이렇게 어이없는 말을 듣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경훈

 “허? 제가 귀찮아서 안 만드는 거지 못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여자 한 트럭은….”

민주

 “아, 됐고요! 술이나 한잔 따라줘 봐요. 누가 그런 거 궁금하댔나?”

경훈

 “하…?”

볼멘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려고 준비 중인데 민주가 먼저 경훈의 말을 잘라먹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축 늘어진 차분한 어조였다.

민주

 “뭐, 아무튼.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술 한 잔이 절실했거든요. 마시고는 싶은데 혼자 먹기는 싫고 그랬어요.”

후루룩.

쏘아붙일 땐 언제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서 우동 국물을 마시고 있는 민주를 보니, 미간에 잡힌 주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어디로 튈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이 여자는.

민주는 한 시간가량 술을 먹으면서 잠시도 입을 쉬질 않았다. 

저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 많았다. 주로 연예인험담이나 일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마지막에는 채윤희를 물고 늘어졌다. 학창시절에 이랬네 저랬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꺼내놓았다.

경훈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별다른 맞장구를 쳐주지 않아도, 들은 척 만척해도 민주는 꿋꿋하게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줄곧 해댔다.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되자 민주가 거의 만취 상태에 이르렀다. 

경훈이 마지막 잔을 비우며 말했다.

경훈

 “그만 들어갑시다.”

민주

 “어? 아직 술 남았잖아. 더 마실 거야!”

경훈

 “취했어요. 그만 마시고 들어가자고요.”

민주

 “나 안 취했는데? 완전 멀쩡한데?”

경훈

 “안 취하기는. 발음도 완전 엉망이구만. 아줌마 여기 계산해주세요.”

계산서를 받아든 아줌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주를 쳐다봤다.

주인아줌마

 “민주 씨 술이 약한가 보네. 그런데 경훈 총각 민주 씨랑 알던 사이였어? 둘이 꽤 친해 보이네?”

경훈

 “우리 아랫집 살아요. 이웃 사촌지간 정도?”

주인아줌마

 “에이, 그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또 남녀 사이는 척 보면 알지. 둘이 뭐 있지!? 뭐야, 혹시 둘이 썸타고 그런 거야?”

힐끔. 

경훈이 곁눈질로 민주의 상태를 체크했다. 

혹시나 방금 말을 민주가 들을까 신경 쓰였다. 헌데, 그 같은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는 인사불성이 되 앉은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업어 가도 모를 판국이었다.

아줌마가 거슬러주는 잔돈을 챙기며 경훈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줌마가 간드러지게 웃어 재꼈다.

주인아줌마

 “호호호, 또 싫다는 소리는 안 하네. 한번 잘해봐. 민주 씨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니까.”

경훈

 “저 여자가요?”

주인아줌마

 “쯧쯧. 총각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좋아하지도 않은 남자랑 이 밤중에 술 마시는 여자가 있을까? 호감이 없으면 절대 못 할 일이지.”

***

민주

 “끄어어어.”

민주는 퀭해진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알람이 울려서 가까스로 일어나기는 했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어디 하나 나사가 풀린 것처럼 떡 벌어진 입에서는 괴상한 신음소리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속에 있는 냄새를 밖으로 배출하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입안에서 맴돌고 있는 냄새들이 어젯밤 먹은 것들을 목구멍에서 끄집어낼 판국이었다.

달칵. 

문을 열리고 승훈이가 방안으로 들었다.

침대 앞으로 다가온 뒤 킁킁대더니 코부터 부여잡았다.

승훈

 “크으, 술 냄새. 뭔 술을 그렇게 마셨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끔뻑거리며 민주가 물었다.

민주

 “승훈아. 내가 지금 살아 있기는 한 거니?”

승훈

 “살아있으니까 이러고 있지. 그래도 집은 용케 찾아왔네? 자, 이거 마셔.”

승훈이 건넨 건 숙취 해소제였다. 

민주

 “뭐야? 이런 게 집에 왜 있어? 너 술 마셔?”

승훈

 “내가 술 마시는 거 봤어? 어제 형이 주던데?”

민주

 “형? 혹시 아래층 형이 나 데려다줬니? 1203호가? 그러고 보니까 나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어? 필름이 끊겼나? 기억이 안 나.”

승훈

 “어이구, 잘하는 짓이다. 다 큰 기집애가 술 먹고 필름이나 끊기고. 그런데 누나가 경훈이 형을 어떻게 알아? 혹시 둘이 술 마셨어?”

민주

 “어? 뭐,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그런데 이 자식이 죽을라고!”

탁.

민주의 손이 승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민주

 “누나한테 기집애라니? 자꾸 까불어! 어!?”

승훈

 “아이씨, 왜 때리고 난리야. 꼭 할 말 없으면 때리더라!”

민주

 “이 자식이 그래도!”

팍. 팍. 팍. 팍. 

민주의 손이 승훈의 뒤통수에 몇 번 오간 뒤에야 승훈이 졌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승훈

 “아이씨, 아침부터! 그보다도 형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누나를 침대까지 옮겨준 게 형이니까. 뭐, 둘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몰라도.”

민주

 “뭐? 서, 설마. 그 사람이 나를 침대에 데려다줬어? 내 방에도 들어오고?”

승훈

 “그러면 내가 하냐? 이 다리로?”

민주

 “뭐, 하긴. 그것도 그렇지만.”

승훈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지 좀 말고. 정 마시고 싶으면 집에 와서 마셔. 내가 술 정도는 따라줄 수 있으니까.”

민주

 “어? 어……. 어.”

승훈

 “그리고 괜히 기사 떴다고 댓글 같은 거 읽고 그러지 마. 악플 같은 거 일일이 신경 쓸 거 없어. 다 병X들이 할 짓 없어서 다는 것뿐이니까. 그런 거 때문에 속상해서 술 먹지도 말고.”

민주

 “…….”

어제는 다른 이유로 술을 마셨지만, 굳이 변명하진 않았다.

알아봤자 같이 속만 상할 뿐이다. 

가족이 주는 위로는 그 마음을 전달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다. 민주는 이미 동생에게 충분한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승훈

 “그거 마시고 나와. 아줌마가 어제 콩나물국 끓여놨는데 그거 먹고 가. 오늘 스케줄 있잖아.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찌개 끓여 놓을게.

민주

 “어? 어….”

승훈이 나가자 민주는 눈을 껌뻑거렸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민주

 “가만! 그 사람이 나를 집까지 업고 왔다고 했지? 설, 설마…?”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민주는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어제 입은 옷이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속옷도 그대로고.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주

 “휴, 내가 술을 끊든가 해야지. 아. 진짜.”

민주는 손에 들려있는 숙취 해소제를 한 번에 들이켰다. 

한약재가 함유되어 있는지 특유의 쓴 내가 올라왔지만 조금 지나자 오히려 속을 가라앉혀주는 기분이었다.

이제 빈 병이 된 숙취 해소제를 쳐다보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이런 건 또 언제 챙겼대? 그렇게 안 생겨서. 의외로 자상한 면도 있네.”

***

다음 날.

연이어 K그룹의 맥주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 민주는 어제와 같은 스튜디오를 찾았다.

어제 작은 소동 때문인지 대기실은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는 곳이었다. 일종의 작은 배려인 셈이었다.

채연

 “엇? 언니 오셨어요?”

미리 대기실 안에 와있던 채연이 민주와 정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민주가 노트북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민주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떴어?”

채연

 “오랜만에 팬 카페 들어가 봤어요. 언니도 한번 봐 보실래요?”

민주

 “아니. 됐어. 너는 내가 그런 거 보는 거 봤니?”

채연

 “하긴. 누나는 이런 데 관심 없으시지.”

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의자에 앉은 민주가 발을 까닥까닥하고는 채연 쪽으로 힐끔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신의 팬 카페라고 하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민주가 관심 없는 척 넌지시 물었다. 

민주

 “그런데…. 채연아. 지금 회원 수가 몇 명 정도야? 작년보단 조금 늘었나?”

채연

 “10만 명쯤? 그 정도 돼요.”

민주

 “뭐야! 그것밖에 안 돼? 작년엔 15만 명이었잖아?”

채연

 “이것도 유령회원들이 태반이에요. 안 잘라서 그러지 정리하고 나면 5만 명도 안 될걸요? 언니, 이참에 정리 좀 할까요?”

민주

 “혹시, 채윤희 걔도 팬 카페 그런 거 있어?”

채연

 “그럼요. 그 언니 회원 수 장난 아니에요. 팔로워도 많고. SNS에 사진도 자주 업데이트하잖아요. 팬 카페에도 종종 들어가서 회원들이랑 채팅하고 그러는 거 같던데.”

민주

 “팔로워? 그건 또 뭐야? 팔로워라면 날아다니는 독수리? 그거 말하는 거야?”

채연

 “그건 팔콘이고요! 어휴, 언니도 참! 팔로워. 좋아요 눌러주는 팬들이에요.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자꾸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민주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 알고 있는데 왠지 자신만 몰라 바보 된 느낌이었다. 

민주

 “아, 그래서 팬 회원 수가 몇 명이나 된다는 건데!!?”

채연

 “팔로워만 한 20만 명쯤 될걸요? 정확히는 저도 몰라요.”

민주

 “20만 명? 뭐가 그렇게 많아?”

채연

 “더 많은 연예인도 허다해요. 100만 명 넘는 아이돌도 있어요.”

채연의 말에 민주가 곱게 눈을 흘겼다.

말은 하지 않아도 못마땅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민주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민주

 “됐어! 냅둬! 나를 성원해주는 소중한 팬들을 자르긴 왜 잘라? 그리고 단 한 명의 팬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연기하는 게 진정한 연기자인 거야. 누가 그런 숫자에 연연하니? 촌스럽게.”

게시글을 보고 있었는지 한동안 침묵하던 채연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채연

 “어!? 팬클럽 회장이 사퇴한다는데요? 카페에 공지 떴어요.”

민주

 “뭐? 팬클럽 회장이? 도대체 왜?”

채연

 “글쎄요? 저야 모르죠.”

대답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수가 대답한 것이다.

정수

 “아, 그건 제가 알아요. 서지은인가 하는 애가 회장이었는데 이번에 팬클럽 탈퇴하고 언블레스 팬클럽 회장직 맡기로 했대요.”

민주

 “언블레스?”

정수

 “이번에 데뷔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에요. 요즘에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 대세잖아요.”

민주

 “잘하고 있는 걸 왜 그만둬? 남자 아이돌이 뭐가 좋다고? 그래서 회장직은 누가 한대?”

정수

 “회원 중에서 뽑겠죠? 부회장이 되거나. 아마 부회장이 맡아서 할 가능성이 제일 커 보이긴 하는데.”

민주

 “부회장?”

정수

 “저도 예전에 팬 미팅 때도 한번 봤어요. 아마 30대 중반 정도 됐을 걸요? 삼촌 팬이죠. 삼촌 팬. 누나 얼굴이 그려져 있는 티셔츠도 입고 오고 그랬어요. 완전 열성팬이던데.”

민주

 “아, 그래?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고?”

정수

 “글쎄요. 그것까진 저도 모르죠.”


츤데렐라23화 - 의문의 사내

23. 의문의 사내.

정수가 어깨를 으쓱거리곤 말을 이었다.

정수

 “나중에 시간 되면 팬 미팅이나 한번 해요. 그러고 보니 작년엔 못했네. 누나가 사고 치는 바람에.”

민주

 “얘는 또 무슨 내가 사고를 쳤다고.”

정수

 “어라? 기억 안 나세요? 작년에 클럽에서 술 먹다가 옆 테이블이랑 시비 붙어가지고. 경찰서 끌려가고, 기지 회견하고 막 그랬잖아요. 겨울쯤이었는데? 그래서 팬 미팅도 취소했잖아요. 조용히 자숙한다고... 헙!”

정수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야차처럼 일그러져있는 민주의 얼굴을 본 까닭일 것이다.

자칫하면 하이힐을 벗어 던질 기세였다. 정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했다.

나지막이 민주가 혀 찼다.

민주

 “쯧쯧, 너는 다 좋은데 항상 그 입이 문제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정수

 “네...”

민주

 “조심해라.”

정수

 “네.”

정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난 5년 동안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일까?

처음에는 뭣도 몰라 의기소침할 때도 있었지만, 가족같이 지낸 세월이 5년이다 보니 이젠 저러는 것도 성격 탓이려니 하고 넘어가진다.

민주

 “아참, 그리고 어제 일 그거 어떻게 됐어? 알아본다던 거.”

정수

 “그렇지 않아도 어제 담당 회사랑 전화통화 했어요. 다행히 접수처에 CCTV가 달려 있다고 해서 오늘 가서 확인하기로 했어요. 누나 촬영 들어가면 저 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민주

 “잠깐? 어디 있는 건데?”

정수

 “영등포래요. 금방 다녀올게요.”

민주

 “영등포? 바로 옆이네? 그래, 알았어.”

정수

 “그리고 이거 오전 중으로 촬영 끝내준다고 했으니까 끝나면 바로 강릉으로 가야 될 거 같아요.”

민주

 “강릉에? 거긴 내일 가는 거 아니었어?”

정수

 “오늘 급하게 촬영씬 생겼다고 전화 왔어요. 동해 쪽에 풍랑주의보 뜰 예정이라 바람 심하면 촬영하기 힘들다고 오늘 밤샘 촬영해서 분량 뽑는대요. 내일까지 촬영할지도 몰라요.”

민주

 “밤새? 아이씨, 갑자기 웬 촬영을 한다고 그래. 아무런 준비도 못 해왔는데.”

못마땅한 표정으로 민주가 투덜거렸다.

정수

 “할 수 없죠. 그거 때문에 지금 그쪽도 비상인가 봐요. 연기자들 스케줄 조정한다고.”

민주

 “뭐, 날씨가 그런다면 할 수 없지. 알았어.”

이런 일은 연예인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특히나 야외촬영은 날씨의 영향에 크게 좌지우지된다. 

이 같은 일은 누가 대비한다고 해서 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독의 잘못도, 연기자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책임을 질 사람이 없기에 자칫 예정 없는 촬영을 진행하다가 출연자들과 스태프들 사이에 신경전이 오가기도 한다.

민주도 처음에는 이 같은 문제로 짜증을 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있었다.

똑똑.

스태프1

 “김민주님. 촬영 들어갈게요. 준비해주세요.”

대기실 밖에서 스태프의 소리가 들려왔다.

민주

 “어, 촬영 들어간다.”

정수가 서둘러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정수

 “누나, 그러면 조금 있다가 스튜디오에서 봬요. 채연이는 누나 잘 챙겨주고.”

스튜디오에서 나온 정수는 곧장 영등포에 위치한 해피 콜 센터 지점으로 향했다.

전화로 미리 언질을 해놔서인지 어제 분 녹화테이프가 준비되어있었다. 정수와 관계자는 컴퓨터를 통해 전날 녹화 분을 살폈다.

별로 어렵지 않게 발송자라고 의심되는 인물을 특정할 수 있었다.

담당직원

 “담당 여직원이 말하기를 웬 남자였다고 합니다. 저도 전화를 받고 테이프를 돌려봤는데,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알아보기 힘듭니다. 아마도 여기 이 남자일 겁니다.”

관계자가 재생되고 있는 화면을 정지하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 안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30대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어제 배달되어온 상자를 들고 있었다.

정수가 상자를 보고 소리쳤다.

정수

 “예, 맞아요! 이 상자예요! 혹시 이 남자 전화번호나 주소 그런 거 알 수 있을까요?”

담당직원

 “아, 그건 곤란합니다. 고객에 대한 신상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는 게 내부 방침이라…. 그리고 아마 연락처나 주소 모두 가짜일 겁니다. 어느 누가 그런 짓을 할 건데 제대로 서류에 작성해놓겠습니까?”

정수

 “하긴, 그도 그렇네요.”

담당직원

 “필요하시면 영상은 복사해드리겠습니다. 근데, 딱히 가져가 봤자 도움이 못될 것 같습니다. 워낙 화질이 흐리고, 모자까지 쓰고 있는 터라….”

정수

 “뭐, 그래도 일단 복사해주세요. 혹시 또 모르니까.”

담당직원

 “네. 알겠습니다.”

***

‘해녀’ 로케이션 현장.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촬영 팀들은 촬영에 바쁜 모습들이고, 다른 한 켠에서는 다음 씬을 위한 준비로 스태프들이 분주했다. 

다음 촬영 씬을 위해 연기자들은 거센 해풍을 맞으며, 의자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대부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떨던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였다. 대기시간이 길어질 경우 차에 들어가 수면을 취하기도 하지만 연기자 짬밥 40년차인 최기웅, 김복란 같은 고참 선배가 차에서 나와 있을 경우엔 어지간한 배우들도 차에서 기어 나와야 했다.

괜히 바쁜 척, 졸린 척했다가 눈 밖에 나면 알게 모르게 피곤해지는 일이 생기곤 했다.

광고촬영을 끝낸 민주는 오후 늦게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몸은 괜찮냐?’ ‘걱정 많이 했다.’ ‘조금 더 쉬고 나오지 그랬느냐.’등 스태프들과 출연자들 사이에서 훈훈한 인사들이 오고 갔다. 본체만체 한 것은 시건방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채윤희 뿐이었다. 

민주가 가까이에 다가오자 하는 수 없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는 체를 해왔다.

채윤희

 “나왔어요?”

민주

 “어, 오랜만이네?”

민주가 비어있는 채윤희 옆자리에 앉았다.

물꼬를 먼저 튼 것은 민주였다.

민주

 “참, 별일이 다 있네? 이렇게 작품 하다가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채윤희

 “그러게요. 살다 보니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민주

 “우연? 하...!?”

민주가 콧방귀를 꼈다.

민주

 “지금 나랑 장난해?”

채윤희

 “장난 아니거든요? 그러면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 있다고 해서 작품 골라가면서 들어가야겠어요 제가? 정 꼴 보기 싫으면 언니가 나가시던가?”

민주

 “뭐? 와... 이런 말미잘 개구리 같은 년을 봤나. 너 내가 예전에 경고했지? 다신 눈에 띄지 말라고.”

채윤희

 “언니도 참...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 바닥 좁은 건 세상이 다 아는데 어떻게 눈에 안 띄어요? 연기자가 작품이 좋으면 들어가는 거지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작품 들어가요? 하긴, 뭐. 용케 그 연기력으로 연기자 생활하고 있는 거 보면 용하긴 하네요. 의외로 작품 고르시는 안목이 좋으신가 봐요? 하는 것마다 망하진 않는 거 보면?” 

민주

 “허, 뭐…. 이런.”

역시나 보통내기가 아니다. 

경력도 나이도 민주보다 아래건만 무엇 하나 지려고 들질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빨이 밀린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그랬다. 

그렇다고 질 수는 없었다.

민주

 “뭐, 내가 연기력이 좀 딸린다고 쳐. 그건 인정. 하지만 나는 이슈성이 있잖아? 신발이며, 가방이며, 옷이며 뭐 하나 걸쳤다 하면 모두 완판되는 거 몰라?”

채윤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채윤희

 “그게, 뭐 자랑이라고. 연기자가 연기만 잘하면 됐지.”

민주

 “참, 어이없네. 그건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너 쇼핑몰 냈다며? 그건 잘되고 있니? 듣자하니 완전 망했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채윤희

 “흥, 완전 망한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잘되던 말 던. 자기가 뭔 상관이래?”

민주

 “야! 다 들리거든? 좀 작게 말해줄래?”

채윤희

 “들리라고 하는 거거든요!?”

민주

 “이게, 이씨!”

민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채윤희도 지지 않고 일어섰다.

채윤희

 “뭐요? 잘하면 치겠네요?”

민주

 “어, 그래. 너 오늘 머리털 좀 뽑아보자. 내가 또 왕년에 머리카락 좀 뽑고 놀아봤거든!?”

채윤희

 “언니만 놀았어요!? 저도 좀 놀았거든요!?”

신경전이 계속 오고가자 민주의 매니저와 채윤희의 매니저가 달려 둘이 뜯어말렸다.

정수

 “어어어, 둘 다 그만 하세요. 그만.”

억지로 둘이 떼어놓자 못 이기는 척 둘 다 고개를 돌렸다. 

채윤희

 “흥.”

민주

 “흥!!!”

원래부터 치고받고 싸울 마음은 없었다. 조금 분위기가 과잉된 것뿐.

다만 이번에는 거리를 멀찌감치 두고 앉았다.

민주가 진정되자마자 뒷담화부터 늘어놓았다.

민주

 “어휴, 조그만 게 지지를 않아. 지지를. 너도 봤지? 눈 부릅뜨고 대드는 거?” 

정수가 맞장구를 쳤다.

정수

 “누나는 말빨로 채윤희씨 절대 못 이겨요. 한두 번 겪어요?”

민주

 “그러게. 쟤는 어디서 그런 거 배우는 학원 다니나 봐. 말빨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네. 나도 그런데 있으면 등록하고 좀 배워 볼까 봐.”

정수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속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정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1시간은 더 대기해야 할 거예요. 그동안 잠이라도 좀 주무세요. 제가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작하면 알려드릴게요.”

민주

 “됐어. 그냥 여기 있을래.”

정수

 “왜요? 밤새 촬영하시려면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편이….”

민주

 “차 안에 혼자 있기 무서워.”

처음에는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정수

 “네?”

민주

 “차에 혼자 있으면 괜히 그 일이 생각날 것 같단 말이야. 아까 CCTV영상 보고 왔는데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했다면서? 괜히 그 남자가 불쑥 차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든 단 말이야.”

이럴 때 보면 연예인 김민주가 아닌 영락없이 겁 많은 여자 같았다.

하긴,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남자라도 무서울 것 같긴 했다.

정수

 “혼자 있기 무서우면 채연이도 같이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요?”

민주

 “아니 됐어. 그냥 여기 있을래. 바닷가라서 그런지 바람도 좋은데 뭐.”

정수

 “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차에서 담요 가져다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민주

 “응, 알았어.”

처음 채윤희와 같이 찍는 촬영이건만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밤새 계속된 촬영 속에 다들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할 뿐. 

그것은 민주도 채윤희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의남자

 “여기 커피 한잔 드세요. 피곤하시죠?”

새벽 무렵. 친절한 웃음을 가진 스태프 한명이 민주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피 한잔이 간절하던 찰나였다. 

의례 벌어지는 일이기에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것은 민주도 마찬가지였다.

민주

 “어머, 고마워요.”

의문의남자

 “네, 그럼….”

수십 명이 뒤엉켜서 일을 하는 촬영 현장이다.

스태프 옷을 걸쳐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젊은 사내를 주목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때였다. 민주를 찾는 외침이 들려온 것은.

스태프1

 “김민주씨! 김민주씨!?”

민주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민주

 “네!?” 

스태프1

 “지금 바로 촬영 들어갈게요.”

민주

 “네. 바로 갈게요!”

민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민주

 “에이씨, 하필이면 지금….”

아쉬운 표정으로 커피잔을 쳐다보던 민주가 등을 돌렸다. 

동시에 민주를 어둠 속에서 관찰하고 있던 사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조금 전 그 사내였다. 얼굴에 만연했던 친절했던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모자 아래로 엿보이는 눈매가 날카롭게만 느껴졌다.

잠시 후, 사내는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츤데렐라24화 - 두근두근

24. 두근 두근

수영강습 3일째.

첫 번째 날과 두 번째 날은 물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유아용 풀장에서 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문제는 오늘부터였다.

오늘은 조금 더 진도를 내기 위해 더 깊은 풀장에서 강습하기로 했다.

사실 민주는 물론 경훈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염려했던 대로 민주는 풀에 발도 담그지 못했다.

민주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민주

 “무, 무서워요. 못하겠어요.”

경훈

 “허리춤밖에 안 와요. 걱정 말고 들어가요.”

민주

 “그건 아는데. 바... 발이... 잘 안 떨어져요.”

경훈

 “거기 그대로 있어 봐요.”

경훈이 풀에 몸을 먼저 담그고, 바짝 붙어 자신에게 안겨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경훈

 “잡아 줄 테니 내려와요. 팔은 내 목에 두르고. 천천히.”

민주

 “네? 그, 그래도 그건 좀….”

민주는 또 다른 이유로 경훈을 거부했다.

타인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장소도 장소이거니와 맨살이 드러난 수영복 차림으로 남녀가 마주보고 안는다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가 않았다. 

경훈

 “김민주씨!!!”

큰 호통소리가 민주의 사고를 잘라먹었다.

경훈

 “아니, 배울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수영 안 배울 거예요? 이대로는 평생 가도 못 배웁니다. 처음에는 다 이렇게 배우니 겁먹지 말고 내려오세요. 앞에 계단도 있으니 하나씩 밟고.”

민주

 “그,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풀장 들어오는 데만 반나절이 걸릴 것 같았다.

경훈이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민주의 팔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풀장 구석에 마련되어있는 입수 계단을 이용해 한걸음, 한걸음 발을 떼어놓더니 막바지에는 경훈이 잡아끄는 힘에 의해 그대로 경훈 쪽으로 엎어졌다. 민주의 손은 자연스럽게 경훈의 어깨 위로 둘러졌다.

몸이 물에 잠긴다는 생각에 사고가 불안해졌지만, 다행히 발이 풀장 바닥에 먼저 닿았다. 

경훈이 흔들리는 민주의 눈동자를 붙잡았다.

경훈

 “좋아요. 김민주씨!? 그대로 저를 보세요 저를. 딴 데 보지 마시고. 팔은 그대로 두시고.”

경훈이 손으로 민주의 얼굴을 고정시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딴 곳을 쳐다봄으로써 신경이 분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다행히 불안한 듯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소 차분해지더니 이내 경훈에게 고정됐다. 

경훈

 “좋아요. 심호흡 한번 하시고요.”

민주

 “후으으읍.“

경훈

 “좋아요. 내뱉으시고.”

민주

 “휴우우우.”

경훈

 “좋습니다. 이제는 손을 풀어도 좋아요. 자, 내 손을 잡으시고. 걷는 거부터 할게요. 다른 곳은 말고 저를 보세요.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민주

 “네. 알았어요.”

경훈은 손을 맞잡은 상태로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속도는 느렸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타인의 의지가 아닌 자의의 의지로 물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

행여 떨어질세라 손은 서로 꼭 맞잡은 상태였다. 

몸이 너무 경직되어있는 것 같아서 경훈이 농담을 한마디 던졌다.

경훈

 “민주씨는 운이 좋은 줄 아세요. 잘생긴 내 얼굴 실컷 보고 있으니.”

민주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경훈

 “어 농담 아닌데? 전 민주씨 얼굴 보고 있으니 좋네요. 어? 이제 보니 뺨 아래 점이 있었군요. 이제껏 몰랐었는데. 너무 작아서 여태껏 안 보였나?”

긴장을 풀어주려는지 평소와는 달리 말이 많았다. 여태껏 자신이 알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떠들어댔다.

어느새 길이 50m 정도에 달하는 풀장 끝에 도달하고, 둘은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가고 있었다. 

경훈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맴돌았다.

경훈

 “어때요? 아무것도 아니죠?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무섭고, 그러나요?”

민주

 “뭐….”

경훈

 “그것 봐요. 난 처음부터 민주씨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요.”

민주

 “그래도 손 놓으면 안 돼요. 절대요. 알았죠?”

경훈이 안심하라는 듯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경훈

 “안 놉니다. 안심하세요.”

중간 정도쯤에 왔을까? 잘 걷고 있던 민주가 발을 헛디뎠는지 몸이 순간 기울었다. 

민주

 “어머!”

민주가 미끄러지려는 걸 경훈이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경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경훈

 “괜찮아요?”

민주가 중심을 잡고 일어섰을 때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어깨가 자신의 꼭 껴안고 있었다. 넘어질 뻔한 사실에 놀라서인지 아니면 경훈에게 안겨 있어서 그런 건지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두근... 두근...

이대로 더 있다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민주가 경훈의 품에서 벗어났다.

민주

 “돼, 됐어요. 그만.”

경훈

 “네?”

민주

 “오늘은 그만해요. 너무 긴장을 했나... 봐요.”

경훈

 “네. 뭐.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죠. 수고했어요.”

민주

 “휴...”

풀장에서 나온 민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심장부근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

스포츠센터에서 나온 후 민주는 벤을 타고 이동 중이다.

민주는 차에 타면서부터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정수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수

 “누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민주

 “응? 내가 뭐?”

정수

 “아니, 나오신 후로 계속 말이 없으시길래….”

민주

 “아, 아니야. 그냥 생각 중이야.”

정수

 “네? 생각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민주

 “…….”

민주는 거기까지 대답하고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정수도 더는 말 시키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지금 민주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과 상념들이 뒤엉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민주

 ‘내가 아까는 왜 그랬지?’

민주는 조금 전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고 씹기에 여념이 없었다.

왜? 왜 그렇게 심장이 떨렸을까? 혹시,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갑자기 발을 헛디뎌서? 

혹시 두통이 심장으로 이전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머릿속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설마... 하는 생각을 끄집어냈다.

민주

 “1203호 그 사람한테 설마 내가 무슨 감정 같은 거라도 느낀 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민주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민주

 “으아아악!!! 말도 안 돼!”

정수

 “왜요! 왜! 누나 왜 그러세요!?”

채연

 “언니!?”

깜짝 놀란 정수와 채연이 물었다.

민주는 둘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이 단절된 혼자만의 세계에 진입했다.

민주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나 김민주야 김민주. 세계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여인 19위. 그렇게 아름다운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남자를!?”

허공에 대고, 침을 튀기며 혼자 떠들어댔다. 

마치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민주

 “내가 그동안 너무 남자를 안 만났나? 그래서 그런 걸까? 하긴. 내가 그동안 남자를 안 만나긴 했지. 일이네 뭐네. 일도 많았고... 시간도 별로 없었고... 그래.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남자를.”

채연

 “어떻게 해. 언니 진짜 미쳤나 봐!?”

채연이 발을 동동 굴리며 민주를 쳐다봤다.

정수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수

 “누나. 다음 스케줄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민주

 “나? 내가 왜?”

정수

 “아니, 그게... 어디가 아파 보이셔서.”

민주

 “멀쩡한데 왜? 아참, 그보다도 채연아.”

채연

 “네?”

민주

 “요즘에도 나한테 소개팅이네 뭐네 그런 거 해보라고 들어오고 그러니?”

채연

 “예, 그럼요. 얼마 전에도 김변호사님 통해서 명함 한 장 들어왔는걸요?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팬이라면서.”

민주

 “김변? 내 담당 변호사?”

채연

 “네. 뭐, 듣자하니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래나 뭐래나.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언니 소개팅 받으시게요? 언니, 그런 거 싫어하셨잖아요.”

민주

 “아니야. 내가 생각해보니까 그런 게 필요할 거 같긴 하더라고. 그 명함 아직도 가지고 있지?”

채연

 “네... 가지고는 있는데.”

민주

 “그러면 연락해서 적당히 운 띄우고, 날짜 한번 잡아봐.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채연

 “네? 진짜요?”

민주

 “너는 내가 농담하는 거 봤니? 아무튼 알았지?”

채연

 “네... 연락해 볼게요.”

사람이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면 주변에서는 이상하게 보기 마련이다. 

민주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채연은 물론 정수도 영문도 모른 채 민주를 살폈다.

도무지 저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담겨져 있을까?

민주

 ‘그래, 일단 다른 남자를 만나보는 거야. 내가 그동안 남자를 너무 안 만나서 머리가 이상해진 걸 거야. 그런 남자를 보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뭐... 솔직히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몸도 나쁘지 않고... 가만 보니까 은근히 잘 챙겨주는 거 같기도 하고, 손도 참 크고 부드러웠지. 그런 남자들이 결혼하면 아내한테 참 잘해준다고 하던데. 가만... 지금 내가 또 무슨 생각을…!’

민주가 퍼뜩 상념에서 깨며 머리를 흔들어 재꼈다.

민주

 “아, 미쳤어. 미쳤어! 채연아.”

채연

 “네, 언니?”

민주

 “그 약속 내일 당장 잡아!”

순간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채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채연

 “네에!? 내일 당장이요?”

민주

 “어, 내일 당장. 지금 전화해서 내일 어떠냐고 물어봐.”

채연

 “지금요?”

민주

 “어, 지금.”

 ***

다음 날. 커피숍 안.

민주

 “후우...”

들릴까 말까 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민주는 발을 꼰 자세로 까딱거리며 여념이 없었다.

그녀 앞에는 40대 같이 생긴 30대 아저씨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벌써 탈모가 진행되고 있는지 앞머리는 숱이 듬성듬성했고, 몸 관리를 하나도 않는지 늘어진 살들은 타이트하게 껴입은 와이셔츠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첫인상부터 그리 호감형은 아니었다. 

피부도 칙칙한 톤이라 별로 좋지 않았고, 억양마저도 어눌했다. 

김변호사 나이가 서른 조금 넘지 않았나? 그런데 이런 삼촌 같은 친구가 있을 줄이야.

사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천하의 김민주를 앞에 두어서인지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소개팅남

 “연락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먼저 연락을 주실 줄은….”

민주

 “아, 예. 제가 마침 근처에 스케줄이 있는데 시간이 잠깐 비어서요.”

소개팅남

 “감사합니다. 바쁜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아, 떨리네요. 김민주씨를 앞에 두고 있으니까.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칭찬 일색인 남자와는 달리 민주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에게 터럭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잘 꾸미고, 치장해놓은 남자연예인을 보다가 이렇듯 일반인을 보면 아무래도 비교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민주가 남자에게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그 같은 이유에서인지 몰랐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 남자는 인물도 빠지지 않는단 말이야? 키도 크고, 피부도 꽤 좋은 편이고. 혹시 무슨 관리 같은 거 따로 받나?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

멈칫.

‘가만, 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민주는 또 서경훈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민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런 민주의 행동에 남자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개팅남

 “김민주씨?”

민주

 “아, 저기 죄송해요. 제가 급한 스케줄이 생각나서. 미안해요.”

도망치듯 커피숍을 빠져나온 민주는 근처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벤에 탑승했다.

한창 모바일게임 중이던 정수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민주에게 물었다.

정수

 “어라? 누나 왜 이렇게 빨리 나오세요? 들어간 지 20분도 안됐잖아요?”

민주

 “빨리 출발해.”

정수

 “네? 어디를요? 다음 스케줄가려면 2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민주

 “잠깐 일산센터에 들리자. 지금 가면 차 안 막히니까 30분이면 가지?”

정수

 “네. 그건 그런데….”

민주

 “직접 보고 확인해봐야겠어! 뭐해? 어서 출발 안하고?”

정수

 “네. 뭘…?”


츤데렐라25화 - 자꾸만 마음은 향하고

25. 자꾸만 마음은 향하고

일산에 위치한 S스포츠센터. 

4층에 자리한 수영장 안. 

스카프를 온통 머리에 감고, 선글라스만 얼굴에 내놓은 여자가 풀장주위를 기웃거리고 있다.

아까 전부터 무엇을 찾는 것일까? 수상한 여자를 발견한 수강생들이 저마다 수근 거렸다.

여성회원1

 “저기, 김민주 아니야?”

여성회원2

 “맞네. 맞아. 그런데 저기서 왜 저러고 있지?”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외출복으로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민주를 보자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설마, 얼굴만 스카프로 칭칭 감아 매면 김민주라는 걸 들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일까?

경훈을 찾기 위해 변장(?)까지 하고 들어온 김민주는 고개를 알 수 없는 서운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민주

 “뭐야... 어디 갔나? 왜 안 보이지? 오늘은 안 나오는 날인가?”

경훈

 “김민주씨!?”

느닷없이 귓가에서 들리는 중얼거림에 민주가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았다.

바로 등 뒤에는 경훈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민주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민주

 “아이씨, 깜짝이야!!!”

경훈

 “여기서 뭐하세요? 오늘은 나오는 날도 아닌데?”

민주

 “아하하하... 그게 저어.”

경훈

 “……?”

민주

 “제가 깜빡 잊어먹고 놔두고 온 게 있어서요. 그거 가지러.”

경훈

 “여기서요? 락커룸이 아니고?”

아차 싶은 민주가 황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 

민주

 “아, 제가 반지를 잃어버렸어요. 반지를. 어제 여기서 잊어버린 거 같아서 혹시 있나 싶어서….”

경훈

 “반지요? 중요한 건가요?”

민주

 “아하하, 그, 그럼요. 되게 아끼는 반진데... 아이고, 그걸 잃어버렸으니 이제 어쩌나….”

힐끔.

입은 부지런히 나불대면서도 눈은 경훈을 훑어보기에 바빴다.

‘와, 이제 봤더니 생각보다 키가 더 크네? 이렇게까지 컸었나?'

태평양같이 벌어진 어깨와 잘 단련돼 보이는 듯한 가슴 근육.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진 복근. 수영모를 착용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스포티한 남성미까지.

이쯤 되면 인정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뭐, 아까 그 남자보단 낫긴 하네. 몸도 나쁘지 않고.’

경훈

 “김민주씨?”

민주

 “아, 네!?”

경훈

 “지금 찾는 건 조금 무리인 거 같으니까 물 빼는 시간에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혹시 분실물 들어온 거 있나 확인도 해보고. 제가 찾게 되면 연락 드릴 테니 돌아가 계세요.”

민주

 “네? 그냥 돌아가라고요?”

경훈

 “풀장 안에서 잃어버렸으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혹시 뭐 더 하시고 싶은 말이라도…?”

민주

 “아! 아니에요. 돌아가야죠. 돌아갑니다. 호호호...!”

민주가 웃으면서 옆에 마련되어있는 비치의자에 슬쩍 엉덩이를 걸쳤다.

민주

 “아, 오늘 너무 오래서 있었나? 다리가 좀 아프네. 잠깐 쉬었다가 가야겠다.”

혼잣말치곤 너무 큰소리다. 마치 누군가가 들으라는 것처럼.

경훈이 싱겁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경훈

 “네. 그러세요. 저는 수업이 있어서 이만….”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경훈의 등판과 엉덩이에 시선이 고정됐다. 특히나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밀착된 엉덩이가 도드라져 보였다. 

‘이야, 운동을 많이 하나 보네. 애플힙엔 스쿼트라던데. 스쿼트를 많이 하나? 뒤태가 장난이 아닌... 헉!’

이 무슨 해괴한 생각이란 말인가?

생각 같아선 머리털을 죄다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미쳤나? 남자 엉덩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민주의 시선을 느낀 걸까? 경훈이 돌연 멈칫 뒤돌아서서 민주를 보고 손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민주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왠지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헉, 심장은 또 왜이래. 뭐지? 나 진짜 어디 아프나?’

두근. 두근.

민주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황급히 그곳을 뛰쳐나왔다.

***

그날 저녁.

정현

 “아이씨. 뭐야! 우리가 왜 이런 고생까지 해야 하냐고?”

갑작스런 노동에 차출된 정현이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희철

 “아, 맞아요. 형! 이 넓은 곳에서 그 반지를 어떻게 찾는다고! 그리고 오늘은 물 빼는 날도 아니잖아요!”

희철도 질세라 거들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날 시간이다. 모두가 집으로 귀가한 어둑어둑한 저녁.

경훈과 정현, 희철은 풀장에 남아 물빼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S수영센터는 자체적으로도 정화시스템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풀장에 찬물은 10일에 한번 꼴로 밖에 빼지 않는다. 물 빼고 청소하는 일은 대부분 담당 직원들이나 청소업체를 통해서 해결한다. 

한마디로 지금 이들은 사서 고생하고 있다는 소리다.

워낙 풀장이 큰 탓에 물 뺀지 30분이 넘었지만, 절반도 채 빠지지 않았다. 

경훈

 “시끄러워! 도와주기 싫으면 그냥 가던가!”

정현

 “아니, 뭐. 누가 간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식이 승질머리하고는.”

사실 물만 빼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물을 뺀 다음이었다. 아무리 정화시스템이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곳이다 보니 이물질이나 오염 등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긴 호수 관을 통해 여기저기 붙어있는 머리카락이나 먼지, 쓰레기 등을 쓸어내는 일은 고스란히 세 명의 몫이었다.

정현

 “어제 잃어버린 게 오늘까지 있겠냐? 누가 집어갔겠지. 비싼 것도 아니라며? 김민주씨 돈 많잖아. 그냥 다시 사라고 해.”

희철

 “맞아. 그러면 되겠네.”

정현과 희철은 수도와 연결된 긴 호수관을 잡고 풀장 벽면을 이리저리 씻어내고 있었다.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모두가 지쳐있을 무렵. 

정현이 바닥에서 뭔가 발견한 듯 소리쳤다. 그의 손끝은 정확히 전방 5m앞 풀장 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현

 “앗, 저기!!!”

경훈

 “뭐야! 찾았어?”

모두의 시선이 정현에게로 향했다.

정현이 바닥에서 뭔가를 집더니 자랑스럽게 그걸 내밀었다.

그것은 반짝이고 있는.

정현

 “아싸, 500원 주웠다.”

500원짜리 동전이었다.

경훈이 험악한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경훈

 “…죽고 싶냐? 장난치지마라.”

정현이 볼멘 가득 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정현

 “아, 몰라! 없잖아! 그만하고 가자. 다 찾아봐도 없잖아? 나 조금 있다가 약속 있다니까?”

벌써 2시간째다.

아무리 풀장이 넓다고는 하지만 물을 다 뺀 상태로 세세하게 훑어 봐도 안 나왔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경훈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잃어버린 반지를 찾고 싶다기보단 찾은 반지를 보고 민주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경훈

 “둘은 먼저 가. 나는 조금 더 찾아보고 갈 테니까.”

정현

 “하여간 고집은. 누가 서경훈 아니랄까 봐. 아무튼 난 먼저 간다. 지금도 늦었어.”

이미 마음이 떠난 놈 붙잡아봐야 뭣하랴 싶다.

경훈

 “여자 만나러 가냐?”

정현

 “그러면 내가 저녁에 남자 만나는 거 봤냐? 우정 어린 남자는 너희 둘로 족하다. 나 진짜 간다.”

정현이 뒤돌아서자 눈치를 보고 있던 희철이도 따라나섰다.

희철

 “어? 형! 저도 같이 가요! 저도 약속이….”

경훈

 “그래, 가라 가. 이 의리 없는 것들아.”

날다람쥐마냥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가는 둘을 보고 경훈은 피곤한 듯 목을 좌우로 꺾었다.

시계는 어느덧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하고 나가야 될 시간이긴 했다.

경훈

 “쩝, 꼭 찾아주고 싶었는데….”

***

띠리릭.

자동개폐장치가 소리를 내며 철컥하고 열린다.

문이 열리고 신발을 벗어던진 민주가 승훈이를 불렀다.

민주

 “승훈아. 나 왔다.”

웬일인지 승훈이 게임을 하고 있지 않고 거실에 나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주

 “뭐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이젠 누나를 봐도 본 척 만 척이냐?”

승훈

 “요즘 자주 오네?”

민주

 “내 집에 내가 오는데 뭐! 불만이냐!?”

그런데 승훈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민주는 괜히 걱정부터 들었다.

민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승훈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무척이나 심각하니까.”

민주

 “왜? 또 뭐? 게임하다가 너무 많이 졌어? 아니면 누구랑 싸웠어?”

승훈

 “그런 게 아니야. 이건 근본적인 문제야. 아무래도 나 롤 그만해야 될까 봐. 내 친구들도 다들 접을 거래.”

민주

 “어? 그게 뭔 소리야? 너 그거 롤인가 뭔가 하는 거 열심히 했잖아? 인제 와서 왜?”

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놈이다.

그런 놈이 롤을 하지 않겠다니 아무래도 생각보다 큰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승훈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의 길을 한 번쯤 되돌아봐야할 시간인 것 같아서. 여지껏 뭘 해왔나 싶기도 하고. 다이아, 챌린저. 그까짓 게 뭐냐 싶기도 하고. 그래서 나 아주 중대한 결심을 했어.”

민주

 “뭘?”

승훈

 “오버워치로 갈아타기로.”

민주

 “뭐?”

승훈

 “롤 하던 친구들이랑 오버워치로 갈아탈 거야. 그래서 오버워치를 제패할 거야. 벌써 팀 이름도 정했어. 우주최강드림팀. 어때? 죽이지?”

민주

 “…….”

잠시 동안이나마 승훈을 걱정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승훈

 “그래서 말인데 모니터 화면 좀 더 큰 걸로 사주면 안 될까? 아무래도 오버워치는 해상도가 생명이라 지금 있는 걸로는… 아얏! 왜 때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민주의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민주

 “지금 있는 모니터 바꾼 지 1년도 안 된 거거든? 그리고 너 장인이 연장 탓하는 거 봤어!? 이게 지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걸 어디서 연장 탓이야!” 

승훈

 “아씨! 사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때려! 누나 때문에 자꾸 머리 나빠지잖아!”

민주

 “아주 지랄 납셨다. 네 머리 나쁜 걸 왜 내 탓을 하는데?”

승훈

 “아, 왜. 누나는 협찬 같은 거 많이 받고 그러잖아. 그런 데다가 하나 협찬해달라고 하면 안돼?”

민주

 “왜? 게임모델을 하라고 그러지?”

승훈

 “엇!? 그거도 좋은 생각이네. 혹시 그런 쪽에서 광고 들어오면 무조건 찍는다고 그래. 그런데 아는 사람 있으면 한정판 아이템이나 피규어 같은 거 막 주고 그러거든.”

민주

 “…….”

머저리 동생이랑 계속 이야기를 하느니 차라리 바람이나 쐐야겠다 싶어 베란다로 나갔다. 발아래로 흰색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주차라인에 멈춰 서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운전자석에서 사내가 문을 열고 내렸다.

민주

 “어?”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민주가 황급히 뒤돌아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민주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승훈

 “뭐야? 갑자기 어디 가?”

들려오는 대답 대신.

민주를 문밖으로 밀어낸 문이 ‘띠리릭’소리를 낸 후 침묵했다. 


츤데렐라26화 - 수상한 남자

26. 수상한 남자

경훈

 “하아. 결국 못 찾았네.”

흰색 승용차에서 내린 경훈은 한숨을 토해냈다. 

시간은 벌써 10시.

끝내 반지는 찾지 못했다.

경훈

 “다음번에 만날 때 반지를 꼭 주고 싶었는데.”

뭔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터벅터벅.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현관문을 통과하는데, 저만치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런 타이밍에 만날 거라는 걸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민주였다.

민주

 “어머? 지금 오시는 길인가 봐요? 같은 동네 사니까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도 되네요. 호호호.”

경훈

 “어디 가세요?”

민주

 “아. 조오기. 앞에 편의점에요. 마침 맥주가 다 떨어져서.”

경훈이 맥 풀린 어조로 말했다.

경훈

 “미안해서 어쩌죠? 반지 못 찾았어요. 찾아본다고 찾아봤는데….”

민주

 “어? 네?”

경훈

 “반지요. 반지 잃어버리셨다고 아까 찾아오셨잖아요?”

민주

 “아, 맞다! 반지. 설마, 여지껏 그거 찾으시느라... 늦으신 거예요?”

경훈

 “뭐, 겸사겸사?”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주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를 몰랐다.

그냥 상황을 모면하고자 되는대로 내뱉은 말을 저렇게 귀담아들을 줄은 몰랐다.

미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반지를 찾느라 이런 늦은 시간까지 그곳에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민주

 “아하하하, 그거 이제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잃어버린 반지 그거, 우정반지예요. 우정반지. 친구랑 같이 맞춘.”

경훈

 “네? 아까는 되게 아끼는 반지라고….”

민주

 “아, 제가 그랬었나요?”

솔직히 뭐라고 떠들어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경훈

 “제가, 내일 다시 찾아….”

민주

 “됐어요! 됐어!”

민주가 급히 경훈의 말을 잘랐다.

민주

 “조금 전에 절교했어요. 걔랑. 그러니까 반지 안 찾으셔도 돼요. 아하하하….”

경훈

 “네에!? 그게 무슨.”

말이 안 된다. 

말이 되는 게 더 이상하다. 

민주가 속으론 욕설을 내뱉으며 미소를 띄웠다. 능청스럽게 웃자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말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민주

 “그보다 맥주 사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뭐, 저 때문에 시간 허비하셨으니 제가 맥주라도 몇 개 사드릴 수 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경훈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경훈

 “뭐...”

대답도 하기 전에 민주가 경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민주

 “갑시다. 가요.”

***

영등포에 위치한 어느 한 오피스텔. 

1606호.

불이 모두 소등된 어두컴컴한 방안.

유일하게 방안을 비추는 건 구석 한쪽에 놓인 흑백 모니터뿐이다. 

모니터 안에는 4개로 분할된 영상이 보이고 있었다. 

관찰용 CCTV라 짐작되는 화면들이다.

화면들은 각기 침실, 거실, 드레스룸, 마지막은 화장실을 비추고 있었다. 

방안이 전체적인 풍경은 이렇다 할 가구하나 보이지 않고, 휑한 게 마치 이사 오고 난 직후의 모습이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만으로도 식별은 충분했다.

벽면에는 김민주의 브로마이드가 빼곡히 붙어 있고, 방안 곳곳에는 상자로 보이는 박스들과 누군가에게 붙였을 법한 편지. 그리고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각종 상자와 편지봉투에는 TO. 김민주라는 이름이 선명히 적혀있었다. 누군가 민주에게 보낸 선물들이었다. 

도대체 이것들이 왜 민주의 방이 아닌 이곳에 있는 걸까?

의문의남자

 “오늘도 안 들어오는 건가?”

사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정면에 걸려 있는 달력 오늘 날짜 란에 X표시를 했다. 최근날짜를 중심으로 요 며칠 동안에는 유난히 X표시가 많았다.

사내는 옆에 놓인 옷 하나를 집었다. 민주가 집에서 즐겨 입는 분홍색 티셔츠였다. 

셔츠에 코를 박더니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옷에 묻어있는 옅은 화장품 냄새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빨려 들어갔다.

사내가 코를 벌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의문의남자

 “흐으으음... 이 냄새…. 너무 좋아.”

냄새에 만취해 황홀감에 빠져있는 눈동자는 그의 감정이 거짓이 아니란 걸 말해주는 듯했다.

뭔가 위험해 보였다. 이 사내.

한참을 그러고 있던 사내가 탁자 위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쳐 가장 뒤편으로 넘겼다. 그곳엔 김민주의 스케줄이 적혀 있었다. 

사내의 안광이 번쩍하고 빛났다.

의문의남자

 “내일은.... 화장품광고 사전미팅과 해녀 촬영이 있군.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민주는 화장품 같은 광고가 가장 잘 어울린단 말이야.”

사내는 작은 액자 안에 넣어놓은 사진을 꺼내 들었다. 실사로 찍힌 사진 안에는 김민주의 얼굴이 또렷했다.

사내가 김민주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입을 맞췄다. 

의문의남자

 “사랑해. 민주야.”

***

광고 사전미팅을 끝낸 민주와 정수가 건물 1층 로비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민주가 어디가 불편한 듯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콧속이 간질간질 거렸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민주

 “에에취!”

민주가 코끝을 찡그리며 삐져나온 코를 슥슥 닦아냈다.

민주

 “아씨, 누가 내 욕하나? 웬 재채기가 나지? 혹시 채윤희 그 기집애가 어디서 내 욕하고 있나?”

정수

 “누나, 귀가 간지러운 거겠죠. 재채기가 아니라.”

민주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다음 스케줄은 강릉으로 가면 되지?”

정수

 “네. 거기서 밤까지 촬영하면 돼요. 뭐,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고 갈까요? 미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시간 잠깐 비는데.”

민주

 “아, 바닷가라 다 좋은데 가는 것도 일이란 말이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참 좋을 텐데. 밥은 됐고, 잠깐 영등포 오피스텔에나 좀 들리자.”

정수

 “네? 거긴 왜요?”

민주

 “가서 필요한 거랑 입을 옷들 몇 벌 챙기게. 요 며칠 일산 집에만 있었더니 입을 옷이 없네?”

정수

 “당분간 일산 집에서 지내시게요?”

민주

 “응, 아무래도 요즘 뒤숭숭한 게 혼자 있기도 무섭고 그러네. 잘됐지 뭐. 수영센터도 일산에 있으니 가까우니까.”

이윽고 두 사람은 주차해놓은 벤에 도착했고, 민주가 문을 열고 뒷좌석에 승차했다.

정수가 안전벨트를 매면서 말을 이었다.

정수

 “잘 생각하셨어요. 제 생각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집에는 승훈이도 있으니까. 아참, 그런데 누나 수영은 좀 느셨어요?”

민주

 “뭐, 아직은 그냥 그래. 물에 간신히 떠 있을 정도? 이제 무서운 건 많이 없어졌어. 다음에는 자유형 배워보려고.”

정수

 “와, 그래도 대단하네요! 누나 전에는 물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워하셨잖아요.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대단하신가 봐요?”

민주

 “뭐….”

민주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상하게도 남 칭찬을 하는데도 듣기가 싫지 않았다.

정수

 “아참 그런데 누나. 누나 가르쳐주는 수영 쌤이요. 전에 어디선가 본 거 같지 않아요?”

민주

 “응!? 어디서? 너 경훈쌤 본적도 없지 않아?”

정수

 “전에 누나 찾는다고 한번 들어가서 얼핏 봤어요. 그런데 분명 어디선가 본 거 같긴 한데 기억이 안나요.”

민주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건 아니고?”

정수

 “그런가?”

민주

 “뭐,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혹시 오다가다 봤을 수도 있겠네. 그 사람도 우리 동에 살더라고.”

정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정수

 “헐, 대박! 누나랑 같은 아파트에 살아요?”

민주

 “응. 심지어는 아래층에 살아. 내가 전에 말 안했나? 난 1303호. 그 사람은 1203호.”

정수

 “누나, 나 지금 소름 돋은 거 보여요? 어떻게 그렇게 만날 수가 있지? 혹시 두 분이 뭔가 인연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에요? 전생에 부부였다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만날 수가 있지? 말도 안돼...”

민주

 “어머, 얘! 부부는 무슨….”

민주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너스레를 떨었다. 눈가가 반달모양처럼 휘어진 게 결코 싫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정수가 그런 민주의 모습을 보곤 길가다 똥 밟은 표정을 지었다.

정수

 “헐랭!? 누나 그 반응은 뭐예요!? 뭔가 이상한데?”

민주가 새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민주

 “내가 뭘?”

정수

 “상황이 그렇잖아요. 내가 평소에 알던 누나라면 저런 반응을 지으면 안 되는데. 누나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니면 혹시 누나 그 쌤 좋아하나!?”

민주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민주

 “어머! 어머,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좋아하긴 누가 누굴 좋아해!? 나 김민주야 김민주! 너 내가 남자나 막 좋아하고 그런 사람으로 보이니?”

정수

 “네!?”

민주

 “아, 됐고. 어서 출발이나 해! 어서!”

갑자기 돌변한 민주의 표정을 보고 정수가 슬그머니 등을 돌려 자세를 원위치시켰다. 더 이상 한마디라도 하면 뒤통수를 맞을 분위기였다. 

시동을 걸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움직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정수가 슬그머니 백미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수

 “누나. 가다가 채연이 좀 태우고 갈게요. 요 앞 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민주

 “그러던지 말던지.” 

정수

 “그런데 누나.”

민주

 “뭐!?”

정수

 “얼굴 빨개지셨어요. 누나 진짜 그 쌤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정수가 숨죽여 웃었다. 

그 모습은 참고 있던 민주를 기어코 폭발하게 만들었다.

민주

 “더워서 그래! 더워서! 넌 에어컨 안 키니? 날 쪄 죽일 셈이야?”

정수

 “네? 아까부터 켜져 있는데요?”

민주

 “내 말은 팍팍 좀 틀란 말이야! 팍팍!”

***

영등포 역세권에 자리 잡은 오피스텔. 

이곳은 민주의 편의를 위해 회사 측에서 잡아준 오피스텔이다. 비교적 역세권에 위치해있고, 교통시설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외부인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주상복합건물이라 어지간한 편의시설은 건물 안에 모두 비치되어 있다. 

1층 로비를 통과하자 대기하고 있던 보안담당자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경비원

 “김민주씨. 오랜만입니다.”

민주

 “어머, 안녕하세요?”

경비원

 “택배가 온 게 몇 개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요 며칠 집을 비우셔서 저희가 보관하고 있긴 한데.” 

옆에서 정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수

 “아 그래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경비원

 “그러시겠어요? 그러면 제가 안내해드리죠. 이쪽으로 오세요.”

경비원을 따라가면서 정수가 말했다.

정수

 “누나, 먼저 올라가 계세요. 택배 가지고 바로 올라갈게요.”

민주

 “어? 어, 그래.”

엘리베이터를 잡아탄 민주가 무료한지 거울을 보며 발을 까닥거렸다.

한가한 시간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 이용객이 없었다. 

괜히 핸드폰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정돈했다.

16층. 1605호. 

엘리베이터는 마침내 16층에 도달했다. 

승강기 문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민주는 코앞에서 느닷없이 열리는 옆집 대문에 멈칫거렸다.

옆집 문을 밀고 나온 거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남자가 먼저 민주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옆집남자

 “어? 안녕하세요.”

민주

 “아...네. 안녕하세요.”

민주가 말꼬리를 흐리며 인사에 답했다.

옆집 남자는 자신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키에 흰색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눈 꼬리가 쳐지고 말쑥하게 생긴 게 편안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옆집남자

 “옆집에 김민주씨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네요. 영광이네요. 팬입니다.”

민주

 “아, 예. 반가워요. 그런데 그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시지 않았어요? 혹시 그분은 이사 가셨나요?”

옆집남자

 “아, 저희 할머니십니다.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지셔 가지고 저한테 집을 맡겨두시고 요양 가셨어요.”

민주

 “아하, 그러시구나. 전에 뵐 때는 건강해보이시던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셨나 봐요?”

옆집남자

 “뭐... 나이 드신 분들이 다 그렇죠. 그보다 지금 들어오시는 길이신가 봐요?”

민주

 “네. 뭘 좀 가지러 잠깐 들렸어요. 금방 나갈 거예요.”

옆집남자

 “네에, 그러시구나. 그러면 일보세요. 저는 이만.”

민주

 “예, 뭐….”


츤데렐라27화 - 스쿠버 다이빙

27. 스쿠버 다이빙

서로 예의 있게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남자는 문을 닫고 자신의 집으로 사라졌고, 민주는 몇 걸음 더 옆으로 옮겨 자신의 현관문 도어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뒤쫓아 온 정수가 뒤에서 소리쳤다.

정수

 “어, 누나. 같이 가요!”

품 안에 들고 있는 상자가 한 가득이었다.

민주

 “어휴, 뭐가 이렇게 많아?”

정수

 “요 며칠 한동안 들어왔잖아요. 맨 위에 것 좀 받아주실래요?”

민주

 “어? 그래.”

정수

 “그런데 앞에서 뭐하고 계셨어요? 왜 집에 안 들어가시고.”

문을 열고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어던진 민주가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민주

 “나 방금 옆집 남자 만났다?”

정수

 “옆집요? 옆집에 할머니 혼자 산다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민주

 “어, 그동안 누가 찾아온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래서 독거노인이구나 싶었는데. 오늘 보니까 손자가 와있는 거 있지?”

정수

 “손자요? 독거노인이라면서요?”

민주

 “글쎄.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지. 딱히 할머니랑 이야기해본 적이 없어서.”

정수

 “사인해달라거나 사진 찍어달라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민주

 “어, 그런 말 안하던데?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졌어. 꽤나 예의바르던데…?”

정수

 “그래요? 그보다 누나 챙길 거 있음 빨리 챙기세요. 나가다가 초밥 집에 들러 초밥이라도 사가게. 누나 여기 앞에서 파는 초밥 좋아하시잖아요.”

민주

 “응. 잠깐만 기다려. 옷 좀 챙기고.”

민주가 사용하고 있는 곳은 거의 50평에 달하는 꽤 큰 규모의 오피스텔이었다.

오피스텔은 쓰리 룸으로 되어있는데, 제일 큰 곳은 드레스 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드레스 룸 안에는 사계절 입을 수 있는 옷들만 수백 벌, 각종 가방, 액세서리 등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그곳에서 옷을 뒤적거리던 민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하게 집에서 입는 옷들은 따로 수납장에 보관해두는데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이 보이질 않았다.

민주

 “어라? 분명히 저번에 빨아서 여기다가 놓아뒀는데?”

직접 살림을 하지는 않지만 편하게 입는 옷가지들이나 속옷 같은 건 민주가 직접 세탁을 했다. 그런데 저번에 분명히 잘 개어서 넣어놓은 옷이 보이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팬이 직접 만들었다는 조그마한 이니셜이 새겨져 있는 분홍색 티셔츠였다.

민주

 “그게 어디 갔지? 어디 다른 빨랫감에 딸려 들어갔나?”

그 이외에도 자신이 즐겨 입는 팬츠도 보이지 않았다. 잠옷 대용으로 민주가 종종 즐겨 입던 바지였다.

민주

 “이상하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방에 옷가지랑 속옷 등을 구겨 넣고 나오려는데 액세서리를 보관해놓은 수납장이 슬그머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하판은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상판은 위에서도 잘 보이게 투명한 유질재질로 되어있는 수납장이다. 열려진 수납장을 닫으며 내려다보니 불빛에 반사된 상판유리에 지문이 묻어있었다.

묻어 있는 지문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조금 이상했다.

민주

 “내 지문이 이렇게 생겼었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수납장을 열었다.

수십 개로 나뉘어져있는 칸막이에는 단 한 곳의 빈곳도 없이 빼곡히 액세서리가 들어차 있었다.

누군가 물건을 훔쳐갔으면 칸이 비어있을 터, 도난당한 물건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민주가 드레스 룸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값비싼 고가의 물품들은 원래 위치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었다. 특히나 가장 잘 보이는 선반에는 최하 몇 백만 원부터 시작하는 명품 백들이 즐비했다. 

만약 도둑이 들었다면 가장 먼저 없어질 물건들이었다.

민주

 “뭐, 기분 탓이겠지?”

휴지로 유리에 묻은 지문을 닦는데 밖에서 정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수

 “누나! 아직 멀었어요?

민주

 “어!? 지금 나가.”

문 앞으로 이어진 현관문 앞에는 벌써 정수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레스 룸에서 가지고 나온 백을 어깨에 메며 민주가 말했다.

민주

 “정수야. 그런데 요즘 자꾸 좀 이상하네?”

정수

 “네? 뭐가요?”

민주

 “물건들이 자꾸 없어지는 거 같아.”

정수

 “진짜요? 여기는 누나만 들어가잖아요. 뭐 비싼 거라도 잃어버리셨어요?”

민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정수

 “또 어디다가 놔두시고 깜빡하신 거 아니에요? 누나 리모컨도 냉장고에 넣으시고 막 찾으러 다니시고 그러잖아요.”

민주

 “내가 그랬었나?”

정수

 “누나. 깜빡깜빡하는 것도 치매래요. 혹시 누나 치매 온 거 아니에요!?”

민주

 “뭐야!? 이게 이씨…!”

민주가 눈을 부라렸다.

한마디만 더 하면 한 대 맞겠다 싶었다.

정수가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문밖으로 발을 내뺐다.

도망가려는 정수의 발목을 민주가 잡았다.

민주

 “너, 요즘 보니까 은근히 디스를 많이 한다? 그동안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줬지? 옛날 추억 나도록 한번 만들어줘!?”

그 말 한마디에 한동안 느슨했던 긴장감이 팽팽해진 기분이었다.

옛날 생각을 하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정수

 “하하하, 누나 농담이에요. 농담. 조크 모르세요? 이러다 늦겠어요. 빨리 가요. 초밥집에는 제가 미리 전화해놨어요. 헤헤.”

***

강릉 로케이션 현장.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 같던 채윤희와의 촬영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확고부동한 톱스타로 자리가 굳건한 김민주와 무서운 속도로 김민주의 자리를 위협하는 채윤희와의 신경전은 역시나 만만치가 않았다.

첫날 이후로 이렇다 할 소동은 없었지만, 매일같이 지속되는 신경전은 여전했다.

둘이 같이 붙어있는 날은 매니저는 물론 스태프들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촬영이 임해야 할 정도였다. 

언제 뭔 일이 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였다.

촬영감독

 “컷!”

컷 사인을 보낸 감독은 녹화된 영상을 보며 또 다른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와 채윤희. 

둘의 연기는 보통. 수준 그 이하였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니 더 대단했다.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지만, 거북이가 늙어 죽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조금씩 늘고 있었다.

이래서는 답도 없었다.

김민주만 놓고 봤을 때는 그럭저럭 볼만은 했다. 

연기가 조금 딸리긴 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물론 이슈성이 좋아서 그 여파로 개봉도하기 전부터 실검에 벌써 몇 번이나 올랐다.

김민주 단 세 글자의 이름으로 그 정도 파급효과라면 이미 주인공 역할을 다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개봉해서 연기를 못해서 작품 망쳤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미스캐스팅으로 작품이 망치면 그 총대는 고스란히 배우가 지게 된다. 

감독의 탓이 아니기 때문에 감독 된 입장에선 다음 영화 제작할 때 스폰서 물기도 수월했다. 감독으로선 전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채윤희도 조연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마스크 깨끗하고, 이미지도 발랄해서 젊은 층 지지도가 높았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르 드라마에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문제는 둘을 붙여놨을 때다.

둘 다 누가 더 연기 못하나 시합이라도 하는 걸까? 

차라리 초등학생에게 국어책을 던져주고 읽으라고 해도 저것보단 잘할 것 같았다.

한쪽이 못하면 한쪽이 이끌어주고 리드해줘야 하는데…. 이건 뭐.

촬영감독

 “아, 괴롭다. 괴로워.”

카메라를 통해 방금 찍은 녹화 본을 한창 보던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가야 할지 아니면 재촬영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재촬영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연기를 저 김민주와 채윤희가 해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건 아마도 평생 가도 불가능할 것이다.

촬영감독

 “나 담배 좀 피고 올게. 아... 정말 미치겠다.”

머리를 박박 긁으며 감독이 일어났다. 

조감독이 알겠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배우 캐스팅에 최종 오케이 사인을 내린 건 자신이었으니까.

조감독

 “예, 다녀오십시오.”

감독이 자리를 뜨자 조감독이 자리에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조감독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

경훈

 “좋아요. 준비됐나요?”

민주

 “이거 꼭 해야 해요?”

민주는 잔뜩 얼어붙은 표정으로 경훈을 쳐다봤다.

경훈

 “이번 작품 역할이 해녀역이라면서요? 잠수 못 하는 해녀 봤나요?”

민주

 “…….”

민주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맞는 말이었기에.

둘은 S센터에 위치한 스쿠버다이빙 교육실에 와 있다.

이제 어느 정도 물에 들어가는 익숙해진 민주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를 수면 아래에 넣는 것이다. 아직도 민주는 익사할 뻔한 기억 때문에 몸이 잠수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꼭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 중 하나였다.

경훈은 스쿠버다이빙 지도자격증도 있었기에 민주를 교육시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쿠버다이빙은 수영과는 별개의 개념이기에 수영을 전혀 못 하더라도 교육을 받을 수가 있다. 물에 대한 공포심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고, 다이빙을 먼저 배우면 수영을 더욱 쉽게 배울 수가 있다. 이것은 민주에게는 꼭 필요한 교육 중 하나였다.

입수 대 위에 민주와 경훈이 마주 보며 서 있다. 둘은 슈트를 입고 나란히 호흡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민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속도 안전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물에 빠지더라도 안정적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 인지시켜준다면 그까짓 물 공포증은 단숨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경훈

 “자, 숨 들어 마시고. 내쉬고. 들어 마시고. 내쉬고. 좋아요. 자, 이제 들어갑니다. 천천히.”

부력조절기를 조절하고 숨을 뱉자 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1m, 2m, 3m, 5m, 10m.

천천히 경훈과 민주의 몸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속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마치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거나 두려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경훈씨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민주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경훈에게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경훈

 “OK.”

손대면 맞닿을 거리에서 경훈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주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잘하고 싶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저 남자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연기 이외에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츤데렐라28화 - 강한 부정은 긍정

28. 강한 부정은 긍정

이런저런 생각이 들 무렵 어느새 발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깊이가 얕아 15m정도밖에 못 내려갔지만, 이 정도면 맛보기로 충분했다.  

경훈이 어느 한쪽을 향해 손가락을 찔러댔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동전 하나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입수하기 전에 위에서 떨어트린 100원짜리 동전이다.

집중도를 높여주기 위해 경훈이 일부로 위에서 떨어트려 놓은 것이다. 

지름 8미터정도 되는 원통박스에 물을 채워놓은 공간. 이러한 한정된 공간 속에서 교육생들의 집중도를 더욱 높여주기 위해서 종종 쓰는 방법이다. 

경훈이 100원짜리 동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민주가 동전을 줍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민주가 동전을 줍자 오케이 사인을 한 다음 손가락으로 위를 향해 찔러댔다.

경훈

 “올라갑시다.”

올라가자는 뜻이다.

간단한 수신호만으로도 의사전달은 충분했다.

민주는 가르쳐 준 대로 부력조절장치로 조끼에 부력을 채우고 숨을 들여 마시자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물 밖으로 몸을 완전히 빼낸 민주가 대견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경훈을 얼싸안았다.

민주

 “봤어요? 내가 잠수하는 거? 나 완전 잘했죠?”

월드컵 4강 진출 골을 넣었을 때 기쁨은 기쁨도 아니었다. 

격하게 좋아하다 둘은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황급히 떨어졌다. 기쁨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설렜던 것만큼 어색함이 찾아왔다.

경훈이 헛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경훈

 “크, 크흠! 뭐, 초딩들도 다 하는 겁니다. 뭐 그리 잘했다고 할 것까지는….”

민주

 “쳇, 칭찬 한 마디해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경훈

 “뭐, 그렇다고 아주 못 했다는 건 아닙니다. 잘했어요. 아주 조금?”

민주

 “됐네요! 누워서 절 받기도 아니고….”

경훈

 “저기. 김민주씨!? 이런 상황에서 딱히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누워서가 아니라 엎드려서 절 받기입니다만? 혹시 몰라서 그러시는 건….”

무안을 주자 민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민주

 “아, 뭐! 그거나 그거나! 꼭 저렇게 초를 친단 말이지. 뭐, 어감이 비슷한 게 헷갈릴 수도 있지.”

경훈

 “아니, 그게 어떻게 비슷합니까? 완전히 다른 말인데 그걸 구분 못….”

경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눈을 곱게 흘기고 있던 민주가 돌연 무방비상태에 있던 경훈을 와락 껴안은 것이다.

경훈은 어정쩡한 자세로 민주의 몸을 받았다. 

민주는 아예 작정하기로 한 듯이 목 뒤로 팔까지 둘러 경훈을 꼬옥 안았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경훈은 밀쳐내진 않았다. 

두터운 슈트의 재질을 뚫고, 경훈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민주의 따뜻함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의 체온이 슈트 밖으로 방출될 리는 당연히 없겠지만, 그냥 느낌이 따뜻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듯한 기분 좋은 냄새가 코끝에서 살랑거렸다.

경훈

 “아니, 이게 무슨…?”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민주의 말이 귓가로 들려왔다.

민주

 “고마워요. 서경훈씨.”

경훈

 “네에?”

민주가 안고 있는 팔에 힘을 더욱 주었다.

민주

 “고맙다고요. 서경훈씨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제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요. 물이 무서워서 그 흔한 대중목욕탕, 온천탕 한번 못 가봤거든요. 머리를 감을 때도 눈을 뜨고 서서 샤워기로만 감아요. 머리를 담그는 것이 무서워서.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지난 18년간을….”

담담하게 말하는 말투에는 많은 고통과 슬픔이 묻어 나왔다.

민주

 “이제는... 수영도 하고, 온천욕도 즐기면서 조금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목욕탕은 조금 그렇긴 하겠지만…. 어쨌든. 전 지금 그래서 서경훈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민주의 상체가 조금 들썩이는가 싶더니 훌쩍이는 소리 비슷한 게 들려왔다.

애잔한 슬픔이 귓가로 들려왔다.

경훈

 “지금 울어요?”

몸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소리로 변화했다.

민주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민주

 “너무... 기뻐서... 그러는 거예요. 너무 기뻐서.”

***

일산에 위치한 김민주의 집. 

사.랑.해.김.민.주.

6글자가 써 있는 편지를 받고 민주, 정수, 채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편지지 안에는 여러 가지 스크랩이나 잡지 등에서 오려낸 글자들이 합쳐져 그 뜻을 명확히 전달하고 있었다.

정수

 “이거 확 신고해버릴까요? 한두 번도 아니고.”

정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민주가 턱에 손을 괴고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민주

 “이게 몇 번째지?”

정수

 “거의 매일같이 와요. 벌써 5통째예요.”

채연

 “언니, 이거 진짜 싸이코 아니에요? 아, 소름 끼쳐.”

일반적인 손편지라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발신지도 없고, 필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종이글씨를 오려 붙였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일반 팬이라면 이런 식으로 팬레터를 보내지는 않는다. 이건 누가 봐도 정상적인 팬레터가 아니었다.

정수

 “누나!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날지도 몰라요! 이거 완전 또라이 사이코 짓이라니까요? 분명히 그 죽은 생쥐도 이 녀석이 보낸 걸 거예요. 이거 신고해야 해요!”

민주

 “됐어. 그냥 조용히 넘어가. 이런 협박이나 위협편지 같은 거 연예인이면 흔히 받는 일이야. 소란 떨 거 없어.”

정수

 “하지만….”

민주

 “됐다니까? 승훈이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괜히 얘 걱정하니까.”

정수

 “알았어요. 하지만 회사에는 이야기해놨어요. 일이 심각해질 것 같으면 이사님이 바로 신고한데요. 아, 속상해!”

정수의 말대로 벌써 5일째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려니 했다. 하지만 며칠째 반복되니 이젠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됐다.

채연과 정수는 신고하자고 난리였지만 민주는 생각이 달랐다.

팬보단 안티 팬이 더 많은 스타에겐 영화개봉을 앞둔 지금으로써는 이런 이슈거리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민주는 그 같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민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그보다 시킨 일은 다 했어? 이틀 뒤에 나 오전 스케줄 다 빼논 건 맞지?”

정수

 “네. 누나 뭐, 봉사하는 날이라면서요? 제가 스케줄 다 조정해놨어요.”

민주

 “닭은? 내가 닭도 사놓으라고 했잖아. 넉넉하게 100마리 정도?”

정수

 “네. 닭도 다 손질된 걸로 주문해놨어요. 감자랑 식재료도 모두 새벽 시간에 맞춰 배달될 거예요.”

민주

 “좋아. 잘했어.”

정수

 “그런데 갑자기 웬 닭볶음탕이에요? 누나 그런 거 하실 줄 모르시잖아요. 밥물도 맞출 줄 모르시면서….”

민주

 “얘는 무슨…? 밥은 전기밥솥이 하지 내가 하니? 그리고 동네 반상회에서 하는 행사인데 한 명의 주민으로서 빠지면 되겠니? 그런 좋은 일이 있으면 참가하는 게 당연하지.”

정수

 “피... 누나가 언제부터 그런 걸 했다고.”

민주

 “시끄럽고. 너랑 채연이도 낼 모래 늦지 않게 와. 감자랑 양파 까야하니까.”

정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수

 “네? 저랑 채연이도요?”

민주

 “허, 얘네 좀 봐라? 그럼 안 오려고 그랬니?”

정수

 “아, 아니에요. 가야죠. 당연히 가야죠. 하하하하.... 저 감자 되게 잘 깎아요. 엄마가 식당 하셔서 많이 까봤어요.”

민주

 “잘됐네. 그러면 감자는 너가 다 까면 되겠다. 채연이는 양파 까라고 시키고.”

하느님 맙소사. 

정수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정수

 “다요? 하하하하.... 두 포대를 시켰는데요?”

민주

 “그래서 싫어!?”

싫다고 대답하면 족히 한 달은 시달릴 것이다. 

지옥 구경은 하루면 족했다.

정수

 “아, 아니에요. 좋아요. 좋아. 잘 드는 감자 칼로 준비해 갈게요.”

***

이틀 후. 

9월 15일 새벽 4시.

민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주 오래간만에 스스로. 그것도 새벽 시간에 눈을 뜬 것이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간단하게 입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서 자는 정수와 채연이를 발로 톡톡 건드려 깨웠다.

민주

 “야야, 기상! 기상!”

정수

 “으으음!? 뭐야. 벌써 아침이에요?”

정수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전날 촬영 끝나고 일산에 도착한 게 저녁 11시경이라 그냥 민주네 집에서 같이 잔 것이다.

맞은편에서 자는 채연도 일어나는가 싶더니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지 앉아 졸기 바빴다.

민주

 “5시에 닭 오기로 했다며? 빨리 가서 받아야지. 빨빨 일어나. 채연이도 좀 깨우고.”

덜컥.

그때 승훈의 방문이 열리며 승훈이가 휠체어를 밀며 나왔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 나와 본 모양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녀석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게임을 해댔는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승훈

 “누나 오늘 밥 하러 간다며?”

민주

 “어? 어. 이 몸이 닭볶음탕에 도전하시기로 했지.”

승훈

 “만들 줄은 알고?”

민주

 “푸하하하! 내가 이날을 위해 백 선생님의 레시피를 공수해왔다는 거 아니겠어? 여기 적혀 있는 대로만 만들면 문제없어!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상의 앞주머니 호주머니를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그곳에 레시피가 적혀있는 메모지가 들은 모양이다.

승훈이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승훈

 “어휴. 또 누굴 죽이려고? 그냥 사는 게 낫겠다에 한 표. 내가 누나 요리 솜씨를 몰라? 차라리 라면을 먹고 말지.”

민주

 “이게, 아침부터 초칠래? 그럴 거면 다시 네 방으로 들어가. 이 도움 안 되는 자식아.”

민주가 발가락을 세워 승훈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때아닌 장난에 승훈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승훈

 “아씨! 더럽게 뭐하는 짓이야!?”

민주

 “더러우면 뭐! 어쩔 건데 이 자식아!”

콕콕.

승훈

 “아, 진짜 유치하게! 왜 이래 진짜!?”

민주

 “나 원래 유치했거든!?”

민주는 계속해서 장난을 걸어댔다. 뭔가 낯설었다.

방금 잠에서 깼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를 한껏 보충한 듯한 생기발랄한 모습. 

마치 보고 싶은 애인을 만나기 직전에 한껏 들떠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승훈

 “혹시 누나, 남자 생겼어?”

생각 없이 내뱉은 승훈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가 민주에게 꽂혔다.

민주

 “어!?”

카운터를 맞은 듯 민주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에 반응에 놀란 것은 승훈도 마찬가지였다.

승훈

 “헐, 대박. 진짜야? 반응 보니까 딱 알겠네! 뭐야? 혹시 아침준비같이 하기로 했어? 설마, 경훈이형? 맞지!? 누나 설마 경훈이형 좋아해!?”

민주

 “이게 미쳤나!!? 아침부터 뭔 헛소리야!”

민주가 강한 부정과 함께 발가락에 힘을 모아 승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폐부 깊숙이에서 부터 뿜어져 나온 외침이 목구멍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승훈

 “아아아악!!! 아 진짜! 그만 좀 해! 아프다고!”

민주

“그러니까 왜 까불어? 죽을래?”

민주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승훈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꼬집힌 대를 마구 문질렀다.

승훈

 “어휴... 진짜 경훈이형은 누나가 이러는지 알아!? 아휴, 형이 아깝다. 형이 아까워.”

민주

 “자꾸 헛소리할래? 좋아하긴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죽고 싶냐? 죽을래!?”

주먹을 들이대는 민주를 피해 또 맞겠다 싶어 방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도망가면서도 기어이 한마디를 보탰다.

승훈

 “아악! 진짜! 저 성질머리!”

쾅.

전쟁이 치러지고 난 후의 전쟁터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게 구분 지어 진 그 무렵, 정수와 채연은 떠돌아다니는 패잔병처럼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순간 승자인 민주의 시선이 둘에게로 향했다.

마치 또 다른 먹잇감을 참는 하이에나 같은 표정이었다.

민주

 “뭐? 뭘 봐? 준비 안 해!?”

멀뚱히 서 있던 정수와 채연이 부리나케 거실을 벗어났다.

정수

 “어어, 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채연

 “저, 저도요 언니.”


츤데렐라29화 - 생활 복지관에서

29, 생활 복지관에서 

복지관 뒷마당에서부터 이어진 공터에 이른 새벽부터 차 한 대가 들어와 물건을 내리고 있다.

닭을 비롯한 아침 음식에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민주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물건을 내리는 작업이 한창 중이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이미 현장에는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듬직한 체구의 사내였다.

민주

 “어? 서경훈씨!?”

민주가 저도 모르게 반가워 손을 흔들었다. 

민주를 발견한 경훈이 미소 지어 보였다.

경훈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네요?”

민주

 “그럼요. 제가 또 시간약속은 칼같이 지키거든요. 그런데 서경훈씨는 6시에 나오시기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경훈

 “뭐, 잠이 안 와서 일찍 나왔습니다. 운동도 할 겸.”

민주

 “호호호. 그러셨구나. 뭐, 마침 잘됐네요. 혼자 하기도 심심했는데.”

옆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정수가 끼어들었다. 

수상한 눈초리가 가득했다.

정수

 “뭐예요? 두 분?”

민주

 “아, 여기는 나 수영 가르쳐주시는 서경훈씨. 그리고 이쪽은 매니저 김정수. 그리고 그 옆은 이채연. 서로들 인사 나눠요.”

정수

 “처음 뵙겠습니다.”

경훈

 “반갑습니다.”

소소한 인사와 악수가 오고갔다. 경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정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정수

 “그런데, 혹시 저 언제 보신 적 있으세요?”

경훈

 “네?”

정수

 “꼭 전에 어디선가 뵌 분 같아서.”

경훈

 “아, 아닐 겁니다. 저도 민주씨랑 같은 동에 사니까 오고가다 마주쳤나 보죠.”

정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먼젓번 민주에게 물었을 때와 비슷한 대답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수

 “아, 분명히 어디선가 봤는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걸 보고 있던 민주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민주

 “거봐. 내가 그랬잖아. 아파트에서 봤나 보지.”

사실 정수와 경훈은 민주가 갯바위에서 미끄러졌을 당시 본적이 있었다. 정수가 명함을 건네주며 연락하라고 했지만 워낙 경황이 없던 터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경훈이 그 일을 끄집어낸다면 분명 알아차릴 수도 있었겠지만 경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색낸다는 소리 듣기도 싫고, 민주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경훈

 “뭐,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일손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물건을 정리하고 손질하기 시작할 무렵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주위가 밝아졌다. 

솥단지를 걸고, 불을 피우기 시작하자 아파트 부녀 회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끼어있었다.

민주가 못마땅한 눈으로 정수를 흘겼다.

민주

 “뭐야, 정수 네가 기자들 불렀어?”

정수

 “아뇨!?”

민주

 “그러면 어떻게 알고 왔어? 혹시 회사에 말했어?”

정수

 “네에... 회사에 말하긴 했는데….”

굳이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민주가 분통을 터트렸다.

민주

 “아이씨. 최이사 그 인간 진짜!”

불청객은 다름 아닌 기자들이었다. 

잡지, 신문사 등 네 군데에서 왔는데 35mm짜리 방송용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온 기자도 있었다. 이런 광경은 민주가 결코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모처럼만에 연예인 김민주가 아닌 그냥 보통 사람 김민주로써 하고 싶은 일은 하는 것이다. 기자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민주가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들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주위가 산만해 일이 되질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이미 온 기자들보고 되돌아가 달라고 말한다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게 분명했다.

뚜뚜뚜-!

신호음이 가고 찰칵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왔다.

최이사

 “어, 민주씨가 이 시간엔 웬일이야!?”

민주

 “최이사님! 이사님이 기자들 불렀어요?”

최이사

 “아, 그거!? 어, 내가 불렀지. 어때? 기자들 많이 갔어!?”

속도 모르고 궁금한 듯 물어보는 질문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당연히 나오는 소리도 곱지 않았다. 

민주가 신경질 가득한 소리로 소리쳤다.

민주

 “예, 덕분이에요! 최이사님! 제가 언제 기자들 불러달라고 했어요!?”

최이사

 “기자? 아, 그거!? 좋은 일하는 건대 어때서? 선행이다 기부다 뭐다 해서 연예인들 이미지 메이킹 하는데 이만한 아이템 없는 거 잘 알잖아? 내가 회사이름으로 복지관에 기부도 좀 하려고. 선행도 베풀고, 매스컴도 타고. 완전 일석이조인 셈이지. 어때 내 아이디어가?”

듣다 듣다 민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민주

 “최이사님!!!!”

최이사

 “아이씨.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야단이야? 좋은 날에? 아무튼, 잘하고 와. 그만 끊는다.”

뚜뚜뚜뚜-!

민주

 “여보세요? 여보세요!? 뭐 이런….”

정수

 “누나 참으세요. 기자들 봐요.”

민주

 “어휴. 진짜 내가 이 인간 가만 놔두나 봐라.”

복지관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던 기자들이 부녀회원들을 붙잡고 이것저것을 묻는가 하면,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민주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괜히 안 좋은 소리가 들릴까 봐 옆에서 보는 내내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녀회 아줌마들한테 점수 좀 따 놓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그러던 중 기자 한 명이 민주에게 다가와 질문했다.

기자

 “저기, 김민주씨? 듣자하니 오늘 행사는 부녀회에서 하는 봉사활동의 일종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이런 모임 자주 나가십니까? 또, 오늘 아침음식은 김민주씨가 직접 메뉴를 선정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동행으로 보이는 촬영기사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민주를 찍고 있었다. 

35mm짜리 비디오카메라는 줌으로 땡기면 모공까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의식이 안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다.

‘아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이나 좀 하고 나올걸. 비비밖에 안 바르고 나왔는데. 이미 다 찍혔겠지? 에라, 모르겠다.’

속마음과는 달리 민주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웃는 건 민주가 카메라 앞에서 펼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연기 중 하나였다.

민주

 “호호호. 저 이런 모임 좋아해요. 시간 되면 되도록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 메뉴를 닭볶음탕으로 한 것은 별다른 이유라기보다는 요즘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다들 고생하시는데 맛있고, 건강한 닭요리를 여기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대접해드리고 싶었어요. 이거 먹고 더위 이겨내시라고요. 일종의 그런 거죠 모.”

전형적인 대외용 멘트였다. 

민주는 사실대로 그대로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할머니에게 음식을 대접해드리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와전되어 매스컴에 노출될지가 두려웠다. 

의도와는 달리 누군가에게 베푼 조건 없는 선행이 누군가에겐 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이미 기자들까지 다 불러들인 마당에 이런 내용이 기사화되면 어떠한 내용들의 리플이 달릴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민주

 “그럼 전 이만 바빠서.”

자리를 피한 뒤 남몰래 쥐어진 메모지를 들여다보면서 민주는 양념 만들기에 한창이었다. 재료 손질은 다 됐으니 끓이면서 양념을 넣기만 하면 됐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도통 먹어봐도 뭔 맛이 뭔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레시피는 3인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니 민주 같은 요리초보가 그걸 보고 100인분이 넘는 양념 양을 맞출 리가 만무했다. 

민주

 “에라,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대는 대로 닭, 감자, 파, 양파 등을 모조리 때려 붓고 양념장을 넣고 끓으니 제법 걸쭉한 국물이 우러나왔다. 

조금 끓인 후 국물을 맛보니 완전히 맹탕이었다. 

추가로 고춧가루, 간장 등을 때려 붓고, 라면스프를 넣고서야 국물이 제맛을 찾아갔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경훈

 “어!? 제법 먹을 만한데요?”

음식이 준비되기 전에 경훈이 먹어보고선 내린 시식 평이었다. 

아주 못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면 어쩌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민주가 내놓은 닭볶음탕은 제법 먹을 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꽤나 맛있었다. 

뒷걸음질에 제대로 한방 얻어걸린 셈이었다.

민주가 자랑스럽게 라면스프봉지를 흔들어댔다.

민주

 “후후. MSG의 위력? 나는 건강한 맛이네 뭐니 해도 이게 짱이더라고요. 음식이 일단 맛이 있어야지 먹지.”

경훈

 “몇 개나 넣었는데요?”

민주

 “한 10개?”

경훈

 “아, 어쩐지 익숙한 맛이더라니!?”

*

어느덧 8시가 되고, 전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복지관을 찾았다. 그런데 어찌 저번보다 더 줄이 길어진 느낌이었다. 

먼젓번에 식사를 하고 와서 김민주를 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냈고, 또 촬영을 한다고 주위가 시끄러워서 모인 사람들까지 합쳐진 결과였다. 

민주는 그들 중에서 먼젓번에 봤던 할머니를 발견했다. 

낯선 이가 이토록 반가운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할머니가 식판에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자 민주가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건넸다.

민주

 “할머니, 제가 저번에 드시고 싶다던 닭볶음탕을 준비해봤어요. 맛은 비록 없겠지만, 모쪼록 맛있게 드셔주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2

 “저번에 그 아가씨? 아이구, 진짜로 해줬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민주

 “그럼요. 약속했잖아요. 저는 약속한 것은 꼭 지키거든요.”

할머니가 고기 한 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2

 “아이고, 맛있다. 우리 아들이 해준 것보다도 더 맛있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요리도 잘하네.”

민주도 덩달아 활짝 웃어 보였다.

민주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전 혹시 맛없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거든요.”

할머니2

 “아니야. 정말로 맛있어. 맛있게 잘 먹을게요.” 

말 한마디에 새벽부터 고생한 것이 모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뭔가 뿌듯한 일을 한 것 같았다.

대체로 전반적인 분위기는 기자들 간의 평가도 좋았고, 식사한 사람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예기치 못하게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준비해놓은 음식이 모자랄 뻔했지만, 다행히도 모자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것은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벌어졌다.


츤데렐라30화 - 카메라 소동

30. 카메라 소동

할머니

 “어이쿠….”

할머니 한 분이 식당에서 나가는 길에 번잡스러움을 피하려 하다가 하필이면 그만 카메라를 세워놓은 쪽으로 넘어진 것이다.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지며 렌즈에 금이 갔다. 외부충격으로 인해 외형도 망가졌다.

카메라맨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카메라맨

 “아니, 할머니! 카메라를 망가트리시면 어떻게 해요! 아니, 세상이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이거 이천만 원도 넘는 카메라예요!”

삽시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비싸다는 소리에 할머니는 안절부절못했고, 카메라맨은 책임지고 있는 물건이 파손되었으니 난처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카메라맨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카메라맨

 “아, 몰라요! 할머니가 이렇게 해놨으니까 변상해주세요!”

할머니

 “아이구, 내가 그럴 돈이 어딨다고…. 그렇게 큰돈을.”

카메라맨

 “이거 제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회사 건데. 이대로 돌아가면 제가 물어내야 해요. 아, 진짜. 미치겠네! 할머니 자식들 없으세요? 아들이나 딸 있을 거 아니에요. 자식들한테 물어달라고 하세요. 그럴 게 아니라 지금 전화해보세요. 빨리요!”

할머니

 “아니, 그게 저어….”

큰소리가 오고 가는 상황. 모두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 민주가 소란을 발견하고, 카메라맨 옆으로 다가왔다.

민주

 “뭔데요? 왜 그러는 건데요?”

카메라맨

 “아, 글쎄. 이 할머니가 카메라를….”

카메라맨도 답답했는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지지대에 떨어져 파손된 카메라만 봐도 대충 알만한 상황이었다.

민주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렇게 소란이에요? 할머니 놀라시잖아요!?”

민주가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를 의자에 앉혔다. 

놀란 표정인지 얼굴색이 안 좋아 보였다.

민주

 “할머니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할머니

 “아, 나는 괜찮은데…. 저 양반 카메라가 부서졌다는데. 저걸 어쩌면 좋노….”

민주가 웃으면서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민주

 “걱정 마세요. 할머니. 저거 생각보다 별로 안 비싸요. 그리고 방송국은 원래 돈이 많아요. 제가 방송국에 잘 이야기해놓을 테니까 할머니는 그냥 돌아가시면 돼요. 정 뭣하면 보험으로 처리해도 되고요. 보험사가 왜 있는데요? 이럴 때 쓰라고 들어놓은 걸요?”

할머니

 “그래요? 하지만 이런 일도 보험이 되누?”

민주

 “물론이죠. 우리나라가 보험시스템이 엄청 잘되어있어요. 걱정 마시고 돌아가세요. 제가 잘 처리할게요.”

할머니의 손을 뒤덮는 민주의 손을 따스하게 느끼며, 할머니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하며 문밖을 나섰다.

지켜보고 있던 정수가 다가와 민주를 다그쳤다.

정수

 “아니, 누나.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런 건 보험처리 안 되는 거 잘 알잖아요?”

민주

 “누가 보험으로 처리한대?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민주가 카메라맨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민주

 “이거 제 명함이에요. 이 번호로 견적서 뽑아서 보내주세요. 그리고 크게 부서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수리 정도면 되지 않아요? 얼마 되지도 않는 고물 카메라 가지고 2천만 원을 변상하라니요? 카메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이라고 그렇게 막 덤탱이 씌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도 민주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민주

 “그리고, 연세 드신 분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막 그렇게 막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듣다 못한 카메라맨이 반문했다. 

카메라맨

 “아니, 김민주 씨. 제가 언제 막말을 했다고 그래요?”

민주

 “조금 전에 했잖아요. 아들이네 딸이네 들먹거리면서…. 생각해보세요. 아들, 딸이 있는 멀쩡하고 화목한 가정에 계신 할머니가 이런데 오셔서 굳이 아침을 드시겠어요? 지금 기자님은 자식들 들먹이면서 할머니를 두 번 죽이신 거라고요. 아셨어요!?”

카메라맨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바닥에 떨어진 카메라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일행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시원하게 내질렀더니 뭔가 통쾌해진 기분이었다. 경훈을 비롯한 부녀회원들이 민주를 향해 잘했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만 정수만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수

 “누나, 방금 나간 데 악질기사 쓰기로 유명한 조이 패치 기자들이에요. 분명히 가만 안 넘어갈 것 같은데….”

민주

 “됐어. 지들이 뭘 어쩔 건데!? 내가 틀린 말 했어? 허접한 카메라를 2천만 원 주고 물어내라는 놈들은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정수

 “뭐, 하긴 그건 그렇지만….”

여전히 정수의 표정을 펴지질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잘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우려했던 일이 다음 날 터지고 말았다.

***

아침부터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김민주. 갑질 논란.」

정수

 “‘2016년 9월 15일경. 연기자 김민주는 x 생활복지관에서 촬영 중이던 카메라를 파손시키고, 사회적으로 얻은 명예와 직위를 앞세워 촬영 중이던 카메라맨에게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폭언을 행했다. 이는 대표적인 갑질 행위로 고무적이고, 개선되어야 할 연예계의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라고 적혀있는데요? 더 읽어 드려요?”

민주를 밴에 태운 정수는 민주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민주는 뒷자리에 앉아 화가 잔뜩 난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게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날 수 있는 거지? 

기사 쓴 놈을 데리고 와 주리라도 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주

 “됐어. 그만 읽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있어!? 지금 이걸 기사라고 쓴 거니?”

정수

 “그것 보세요. 누나.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얘네들 완전 악질이라고 그랬잖아요.”

민주

 “회사에서는 뭐래?”

정수

 “기사정정 해달라고 요청하고, 파손된 카메라는 회사에서 새 걸로 사주기로 했대요.”

민주

 “뭐!?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모자란 판국에 새 카메라를 사주기로 했다고!?”

정수

 “누나, 이 바닥 잘 아시잖아요. 벌써 이 기사 읽은 사람만 수만 명이에요. 괜히 이미지에 타격 입는단 말이에요. 빨리 기사 내리는 게 상책이에요.”

민주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솟구쳤다.

민주

 “이런 민들레 십장생 같은 놈들이! 피해자 코스프레 완전 쩌네. 와, 나 이것들을 그냥 확!!!”

정수

 “회사에서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는 눈치예요. 누나도 잘 알잖아요. 기자들이 언론 플레이하면 결국 피해는 연예인들만 입는 거. 지들이야 나중에 미안하다고 정정기사 한번 내면 그만이지만 연예인들은 실추된 이미지 회복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냥 조용히 넘어가요. 누나. 괜히 더 이상 문제 만들지 말고.”

문제는 민주 또한 그 말에 너무 동감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의구현? 이 바닥에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렇다고 생리를 잘 안다고 솟구쳤던 화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민주가 한껏 흥분한 어조로 씩씩거렸다.

민주

 “아, 나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빨리 이 바닥을 뜨든가 해야지.”

정수

 “그러게 말이에요.”

별로 좋지도 않은 기분으로 수영센터에 도착한 민주는 밴에서 내리기 직전 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서경훈이 보낸 메시지였다.

경훈

 “기사 봤어요. 괜찮아요?”

틱. 틱. 틱. 틱

민주

 “뭐, 그냥 그래요. 연예인이 다 그렇죠.” 

경훈

 “오늘 오는 날이죠? 지금 오는 중인가요?”

민주

 “센터 앞에 도착했어요.” 

경훈

 “일찍 왔네요? 시간 잠깐 비는데 1층에서 차나 한잔 마실래요? 나도 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민주

 “응?”

하루 종일 신경질로 가득했던 민주의 얼굴이 처음으로 환해졌다.

마음만큼이나 손놀림도 빨라졌다. 민주가 부리나케 자판을 터치했다.

민주

 “좋아요. 1층에서 봐요.”

메시지를 보낸 민주가 급히 거울을 꺼내 들었다. 

틴트를 얇게 덧칠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민주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정수가 민주를 붙잡았다.

정수

 “누나,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차만 하고 같이 들어가요.”

민주

 “어!? 같이? 왜?”

정수

 “네? 왜긴요. 시간 비잖아요. 제가 수업 시간 전까지 같이 있어 드릴게요. 1층에서 커피나 마시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방금 전 핸드폰으로 어떤 내용들이 오갔는지 모른 채 정수가 속도 없이 말했다. 

사실 그대로 말하기도 뭔가 쑥스러웠다. 민주가 어물쩍 말꼬리를 흐렸다.

민주

 “아니, 됐어. 그냥 혼자 갈게.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정수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저도 마침 목말라서 시원한 거라도 한잔 마시려고….”

자꾸 치적 거리는 통에 참다못한 민주가 성질을 버럭 냈다.

민주

 “아니, 얘가 됐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 됐다니까!? 됐어! 됐다고! 그냥 나 혼자 가겠다고!!”

정수

 “네? 아니 전 그냥. 누나 심심해하실까 봐….”

민주

 “아니, 넌 도대체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민주가 눈을 한번 흘겨주고는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건물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정수가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정수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

카페에 들어선 민주는 경훈부터 찾았다. 구석에 사람들 시선이 잘 안 보이는 곳에 앉아 있던 경훈은 민주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경훈

 “앗. 여기예요!”

경훈의 모습을 확인한 민주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 근육을 풀고, 얼른 입을 오므렸다. 

‘아, 내가 왜 이러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민주는 곧장 경훈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방금 스스로가 웃고 있다는 걸 의식해서일까? 저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민주

 “웬일이에요? 차를 다 마시자고 하고?”

경훈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아직 안 시켰어요. 뭐 드실래요?”

민주

 “전 뭐, 아무거나?”

경훈

 “그럼. 아메리카노로 하죠. 체중 조절 중이신 거 같으니까.”

민주

 “뭐. 좋아요.”

주문하러 가는 경훈을 보고 민주는 턱을 괴며 쳐다봤다.

앞선 말과 행동과는 달리 눈빛에는 그윽함이 가득했다.

‘어쩜, 저렇게 다정할까? 내 체중까지 걱정해주고. 이럴 때 보면 참 센스가 있단 말이야?’

그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민주와 조금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는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채윤희와 그의 매니저였다. 

같은 공간 내에서 민주를 발견한 채윤희가 민주를 의식하며 힐끔거리고 있었다.

채윤희

 “헐, 웬일이야? 김민주 수영 배운다고 하더니 여기 센터에 다니는 거였어? 오빤 알고 있었어?”

채윤희매니저

 “아니, 나도 처음 알았는데?”

채윤희

 “그런데 저 남자는 뭐지? 설마 만나는 남자인가? 김민주 남자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은 거 같은데?”

채윤희매니저

 “아, 저 남자. 여기 센터 강사일걸? 꽤 알려진 강사야. 스타강사로.”

채윤희

 “아, 그래?”

채윤희매니저

 “저 강사가 민주 씨 봐주고 있나 보지.”

채윤희

 “근데 둘이 뭔가 분위기가 묘하지 않아?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채윤희매니저

 “글쎄. 뭐 강사랑 수강생이랑 차 한 잔 마시는 것 정도는 흔한 일 아니야?”

채윤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채윤희

 “아니야. 뭔가 느낌이 달라. 느낌이.”


츤데렐라31화 - 반갑지 않은 라이벌

31. 반갑지 않은 라이벌. 

민주와 경훈은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시선도 모른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파트 부녀회에서 있었던 일, 수영에 관한 것도 조금 이야기하고, 경훈이 예전에 가봤던 보라카이 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그냥 시답지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처음에는 민주가 대화를 주도해나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의 말수는 줄어들고 경훈이 말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중에는 아예 민주는 턱을 괴고 경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경훈의 이야기를 듣는 민주의 눈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소녀처럼 반짝거렸다.

시시콜콜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나중에는 경훈이 입만 벙긋해도 웃겨 자지러졌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 싶었다. 

그것을 놓칠 채윤희가 아니었다. 

보다 보니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채윤희

 “뭐야, 김민주 푼수처럼 왜 저래? 저렇게 웃음이 헤픈 캐릭터였나? 앞에 있는 저 강사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 모습을 보던 채윤희 매니저도 동조했다.

채윤희매니저

 “그런 거 같기도 하네.”

채윤희

 “허, 김민주가 남자 때문에 저렇게 웃을 때도 다 있네? 가만있어 보자 오빠. 저 남자가 수영강사라고 그랬지? 저 강사 어디 반인지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채윤희매니저

 “어? 그건 별로 어렵지 않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채윤희

 “어, 나도 수영 좀 배워보려고.”

채윤희매니저

 “웬 수영? 너 수영 잘하잖아?”

채윤희

 “꼭 못하는 사람만 배우라는 법 있어?”

채윤희매니저

 “뭐야? 너 설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매니저가 말꼬리를 흘렸다. 

채윤희도 그러한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채윤희

 “흥, 드디어 김민주를 한 방 먹여줄 날이 왔네. 어디 지도 똑같이 한번 당해보라지. 아니지. 지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인사라도 미리 해놔야겠다.”

채윤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매니저가 당황하며 말렸다.

채윤희매니저

 “뭐, 뭘 어쩌려고?”

채윤희

 “어쩌긴? 가서 인사하려는 거지. 어머!? 언니?”

채윤희가 안면을 싹 바꾸고는 민주와 경훈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매니저가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채윤희 덕에 민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보기 싫은 얼굴이 가장 즐거운 시간에 나타나 훼방을 놓고 있었다. 당연히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민주가 썩 꺼지라며 손짓했다. 

채윤희은 본체만체 웃으며 지가 하고 싶은 말만 해댔다.

채윤희

 “너무 반가워요. 언니. 세상 정말 좁다! 여기서 다 만나게 되네요!?”

민주

 “어? 어…. 그, 그래. 여기서 운동하나 봐?”

채윤희

 “네. 전 여기서 스쿼시 해요. 언니는요?”

민주

 “나? 나 수영 배우는데?”

민주가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채윤희의 어깨를 슬쩍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꽉 다문 이 사이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표정만큼이나 나오는 소리도 곱지 않았다. 

민주

 “이봐, 우리가 이렇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잖아? 썩, 꺼져줄래?”

채윤희는 들은 체 만 체 경훈을 보며 말했다.

채윤희

 “언니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신가 보다. 맞죠?”

경훈

 “아, 네.”

채윤희

 “와. 훈남!!! 센터에 이렇게 잘생긴 선생님이 계신 줄 몰랐네. 아참, 전 채윤희라고 합니다. 민주 언니랑 같이 영화 찍고 있어요.”

경훈

 “아, 네. TV를 통해서 잘 보고 있습니다. 팬입니다.”

채윤희

 “어머!? 호호호호. 제 팬이셨어요? 오히려 제가 영광이에요.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분이 제 팬이라니.”

경훈

 “아, 네. 뭐….”

민주가 다시 채윤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저 여우 같은 기집애가 접근한 데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꿍꿍이가 있는데 속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민주

 “뭐야? 뭔 개수작이야?”

이번에는 채윤희가 민주에게 들릴까 말까 한 말로 속삭였다.

채윤희

 “언니, 저 남자 좋아하나 봐요?”

민주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말소리 새어나가진 않았나 두리번거렸다. 

경훈이 뭔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표정을 보니 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민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채윤희에게 발끈했다.

민주

 “좋아하긴 누가!!! 절대 아니거든!?”

채윤희

 “언니. 티 엄청나거든요?” 

민주

 “그러든 말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채윤희

 “상관있죠. 저도 이제부터 저 남자 좋아할 거거든요.”

민주

 “뭐? 뭐라고!?”

민주의 당황스러움을 즐기기라도 하듯 채윤희가 배시시 웃었다. 

보는 이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하는 상큼한 미소였다. 

미소를 띤 채로 채윤희가 민주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채윤희

 “제가 꼬실 거라고요. 언니가 예전에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

민주

 “…….”

채윤희가 한바탕 뒤집고 나간 후 민주는 그녀가 나간 출입문을 쳐다보며 방금 전 한 말을 고 씹어보고 있었다. 경훈은 수강준비를 위해 먼저 올라갔다. 민주만 덩그러니 테이블에 혼자 남아 있었다. 

심각한 상황만큼이나 얼굴도 심각해졌다. 

뭘까. 그녀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은.

‘내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곰곰이 생각해보니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했다. 

채윤희와 관련 있으면서 자신이 아는 남자라고는 대학교 때 잠깐 만났던 태우 오빠.

그와 관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그때 그 일로 아직까지 앙심이 남아 있는 건가?

자세한 전말은 당사자에게 들어봐야 알겠지만, 이로써 확실해진 셈이었다. 

별로 나쁘지 않은 감정으로 관계를 잘 유지해오던 채윤희와의 관계가 급격히 틀어진 이유가 남자 때문이라는 거.

민주

 “왜 그렇게 투덜거리나 했더니 고작 남자 때문이었어? 하!?”

따지고 보면 자신도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욕도 많이 먹고, 동기들에게 적잖은 따돌림까지 받았으니까. 

물론 모든 것은 오해에서 벌어졌다.

바쁘다는 핑계로 학교에 잘 나와 보지도 못했지만, 그 일을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해명할만한 값어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어떻게 그딴 인간과…!’

정작 당사자인 민주는 그냥 해프닝 정도로만 여기고 넘어갔는데, 채윤희가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일을 마음에 담아주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와서 신경 쓰자니 머리만 아파왔다.

민주

 “아, 몰라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지가 뭐 어쩔 건데!?”

*

그 일이 벌어진 후, 이틀 뒤. 

이제 어느 정도 자유형에 익숙해진 민주는 여느 강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단체 강습과 개인 강습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민주는 빠른 속도로 적응하고 있었다. 

아직은 킥보드 없이 헤엄치는 건 무리였지만 이제는 제법 물 위에 몸을 띄우는 요령도 터득했다. 처음과 비교하자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민주는 옷을 탈의하고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그런데 그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놓고야 말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쟤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풀장 안에는 채윤희가 하얀색 비키니를 입고,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몸을 풀고 있었다. 확실히 키가 커서인지 비율이 좋았다. 한편에서는 회원들이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길게 내밀고, 보란 듯이 이리저리 몸을 푸는 모습을 보자니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질 않았다.

서둘러 민주가 회원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채윤희

 “아, 뭐에요!? 이거 놔요!”

귀찮은 듯 민주의 손을 뿌리친 채윤희가 곱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채근했다.

민주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채윤희

 “수영장에 수영배우로 왔지 왜 왔겠어요!?”

민주

 “아니, 내 말은 왜 하필! 나랑 같은 반에 들어온 건데? 더군다나 이 반은 수강생 마감 된 지 옛날 옛적이거든!? 뭔 꿍꿍이야? 빨리 불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채윤희

 “왜 화를 내고 난리예요? 나는 여기서 언니랑 만나서 무지 반가운데. 언니는 아닌가 보네?”

민주

 “이게, 자꾸 개소리할래!? 빨리 말 안 해!?”

채윤희

 “흥, 제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언니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똑같이 갚아줄 거라고!?”

민주

 “뭐!?”

민주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한 빈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다.

민주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채윤희

“엇!? 경훈 쌤!”

민주는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채윤희가 경훈을 발견한 듯 손을 흔들어 댔다. 입구에는 수영복을 입은 경훈이 들어오고 있었다. 채윤희가 민주를 밀치고 어깨너머로 보이는 경훈에게 다가가려 했다. 무방비상태로 있던 민주가 힘없이 툭 하고 밀리며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민주

 “악!!!”

채윤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방긋거렸다.

채윤희

 “어머!? 미안해요. 언니. 아직까지 여기 있었네? 할 말 다했으면 이만 가 봐도 되죠? 전 경훈 쌤에게 인사하러 가야 해서.”

일부로 밀어놓고도 사과 대신 약만 올린 채 채윤희가 빙글 등을 돌렸다. 

약이라도 올려 죽이려는 속셈인 걸까? 

이제는 저런 행동들이 놀랍지도 않았다.

민주

 “허,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미 채윤희가 수강신청을 했다는 것을 안 것일까? 경훈은 그녀를 보고도 별로 놀라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채윤희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인사치곤 대화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조막만 한 입으로 방긋방긋 거리는 게 여긴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경훈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웃고 있었다. 민주는 그게 더 화가 났다.

민주

 “아니, 뭐가 좋다고 저렇게 하하 호호야? 그리고 뭔 인사를 저렇게 오래 해? 아주 전세 냈네. 전세 냈어.”

채윤희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경훈과는 꽤나 다정해 보였다. 

아주 친한 사이라고 생각될 만큼. 

선남선녀가 웃고 있으니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민주가 인상을 부라리며 투덜거렸다.

민주

 “뭐야? 경훈 씨는 왜 저렇게 친절하게 대해? 처음에 나한테는 엄청 까칠하게 굴어놓고선.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민주는 무엇보다 채윤희의 수영복이 눈에 제일 거슬렸다. 

요즘 트렌드한 섹시 배우답게 여자인 자신이 봐도 대단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저렇게 몸매 좋고, 어리고, 예쁜 여배우가 비키니수영복을 입은 채로 친한 척을 해온다면 어느 남자라도 당해내질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이 제아무리 서경훈이라 할지라도.

민주

 “아이씨, 쟤는 또 뭔 가슴이 저렇게 커?”

투덜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왠지 서경훈의 시선이 채윤희에게로 향할 때마다 가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민주는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별로 커 보이지 않은 가슴이 이렇게 원망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민주

 “수술이라도 해야 하나?”


츤데렐라32화 - 애 닳은 마음은 점점 깊어만 가고

32. 애 닳은 마음은 점점 깊어만 가고.

채윤희의 얄미운 짓은 단체강습이 끝난 후에도 이어졌다. 단체 강습한 것도 모자라 개인강습까지 서경훈에게 신청해 놓은 것이었다. 

이젠 놀랄 것도 없었다. 채윤희는 정말 작정하고 달려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채윤희

 “쌤, 이 부분에서 팔은 어떻게 해야 하죠? 이렇게 펴야 하는 건가요?”

채윤희

 “쌤! 오랜만에 하니까 잘 안되네요. 손 좀 잡아주세요.”

채윤희

 “쌤! 아악! 다리에 쥐가….”

쌤쌤쌤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떨어질라치면 채윤희는 계속해서 경훈을 불러댔다. 팔을 잡아달라는 둥, 쥐가 났으니 다리를 주물러 달라는 둥. 

수작 부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민주는 화가 치밀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민주

 “아주 둘이 붙어서 난리가 났네. 난리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씨! 그리고 개인 수강은 혼자 받는 거 아니었어? 선생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양다리를 걸쳐도 되는 거냐고!?”

난리가 난 것은 둘만이 아니었다. 

채윤희가 등록했다는 것이 소문났는지 출입 가능한 남자회원들은 물론 남자 강사들까지 채윤희를 보고자 몰려들었다. 

어찌 그 숫자가 자신이 처음 왔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아 보였다.

민주

 “도대체 저런 애가 뭐가 좋다고 저러지? 아이씨! 짜증 나!”

***

다음 날 아침.

정수

 “누, 누나 참으세요. 제발.”

채연

 “언니. 후회하신다니까요. 그리고 지금 영화 들어갔잖아요.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대표님 알면 진짜 난리 나요. 네!?”

정수와 채연은 민주의 왼쪽과 오른쪽 팔에 매달려 꼼짝달싹 안 하고 있었다. 풀어주지 않겠다는 뜻이 완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 날 민주가 눈뜨기가 무섭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기 때문이다.

민주

 “이거 놔! 지금 당장 가서 가슴확대수술 받을 거야. 이거 놓으라고!”

정수

 “아휴, 누나…. 제발 좀요. 네?”

옷을 갈아입고 신발장으로 뛰쳐나가는 폼이 기어코 일을 낼 기세였다. 둘은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소동이 시끄러워 나와 본 승훈이가 하품을 쩍쩍해대며 머리를 긁적였다.

승훈

 “어라, 누나? 형, 누나 아침부터 왜 저래요?”

정수

 “어! 승훈아, 잘 왔어! 너희 누나 좀 말려봐.”

승훈

 “누나가 왜요?”

정수

 “저어, 그게….”

말하기가 곤란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민주가 제 입으로 떠들어댔다. 

꿈을 이뤄내고 싶은 절규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민주

 “놔! 나도 수술할 거라고! 수술해서 왕 가슴이 될 거야!!!”

승훈

 “허.”

승훈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승훈

 “뭐야? 갑자기 웬 가슴 수술? 가슴 큰 라이벌이라도 나타났나 보지?”

민주

 “헉! 어떻게 알았어!?”

민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귀신이 따로 없었다.

승훈

 “뭐야, 진짜였어? 난 그냥 해본 말인데. 뭐, 하긴 누나가 글래머 쪽은 아니지. 이참에 수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수술하려는 이유가 경훈이 형 때문이라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민주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승훈

 “경훈이 형은 가슴 큰 여자 별로 안 좋아해.”

민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경훈 씨가 가슴 큰 여자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승훈

 “전에 산책하다가 이야기한 적 있거든. 형은 가슴 큰 여자 별로래. 둔해 보인다고. 여자 보는 취향이 나랑 완전 반대야. 그러니까 안 해도 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던 민주의 표정이 구원받은 듯 환해졌다. 광대가 날개 달려 하늘로 승천할 기세였다.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민주

 “그으래에?”

실실 쪼개는 게 미친X 같아 보였다.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민주

 “뭐, 하긴. 여자가 가슴만 커서 뭐할 거야? 경훈 씨 이제 봤더니 똑똑한 구석이 있네? 아주 마음에 들어.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마음이 예뻐야지. 뭐, 내 것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니까 그냥 하지 말아야겠다.”

그와 동시에 채연과 정수가 민주에게서 떨어졌다. 누가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긴 하지만 뭔가 한심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승훈이 입을 쩍쩍 벌리며 또다시 하품을 해댔다.

승훈

 “아함, 배고프니까 밥이나 줘.”

민주

 “밥?”

말끔히 고민이 해결된 탓일까? 민주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민주

 “그래 알았어. 그러지 말고 맛있는 거라도 시켜 먹을까?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 어때? 아니면 피자? 고기 먹으러 나갈까? 말만 해. 뭐가 먹고 싶은데?”

승훈

 “아, 됐어. 그냥 대충 먹고 오다가 뭐라도 사 먹으면 되지. 어차피 나가서 외식할 거잖아.”

민주

 “뭐? 외식?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래. 오늘 뭔 날이야?”

승훈

 “헐. 오늘 진짜 무슨 날인지 몰라?”

민주

 “…….”

민주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승훈이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승훈

 “아, 오늘 아빠 기일이잖아. 이 밥팅아!”

민주

 “뭐!?”

멍청한 표정을 짓던 민주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따로 메모해놓은 메모장에는 떡하니 오늘 날짜로 아빠 기일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승훈

 “웬일이래. 누나가 아빠 기일을 다 잊어버리고. 나는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고 말 안 했지.”

민주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입에선 자책 어린 말투가 흘러나왔다.

민주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진짜 아빠 기일이네. 저번 주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요즘 내가 왜 이러지?”

승훈

 “누나 요즘 너무 정신없는 거 아니야? 하긴, 누나 요즘 바쁘지? 촬영하랴 수영 배우랴. 뭐,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트집 잡아 한껏 비꼴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승훈이가 저런 말을 할 줄도 알다니.

승훈

 “뭐, 어쨌든 아빠한테 갈 거지?”

민주

 “어!? 어. 당연히 가야지.”

***

용인에 자리 잡은 산세 좋고 공기 좋은 산 중턱. 

그 아래 안장된 어느 묘지 앞. 

몇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민주가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승훈과 정수가 엄숙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을 한 다음 준비해온 돗자리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민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승훈이가 말을 건넸다.

승훈

 “이제 안 우네?”

민주

 “응?”

승훈

 “예전에는 이곳에만 오면 울더니. 이제는 안 운다고. 나야 뭐. 너무 어렸을 때 아빠가 돌아가셔서 기억도 잘 안 나서 그렇지만.”

민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

 “그러고 보니 그랬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돌아가기 싫다고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야.”

장소가 그래서일까. 

표정만큼이나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오래전 일이지만 민주의 기억 속에는 그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 일을 떠올리자 가슴 한편이 또다시 먹먹해졌다. 

세상에는 흘려버릴 수가 있는 일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 민주에게는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 바로 그러했다.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가슴에 고이 묻어두었다. 아직도 아버지란 단어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란 바로 그런 존재였다. 민주에게는.

후으읍.

심호흡하고, 숨을 들이쉬니 차갑고 맑은 공기가 폐부 안에 가득 밀려 들어왔다.

머리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기분이 센치 해졌다.

민주

 “나도 이제 조금씩 나이가 드는가 보지. 아빠의 죽음도 이제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고. 이젠 별로 슬프지도 않아.”

승훈

 “다행이네. 누나 우는 거 보면 나도 마음이 좀 안 좋았거든.”

민주

 “그랬어!?”

승훈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거든? 당연한 거 아니야!?”

민주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그땐 내 정신이 아니었거든. 아버지 떠나보내고, 엄마도 아무것도 못 한 채 병실에 누워있고, 너까지 그렇게 되고 나니 정말이지 나도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거든. 여기 올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더라. 그러고 보니 정말 많이 울었네. 이곳에서.”

승훈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진짜 화가 난 표정이었다.

승훈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죽긴 왜 죽어!!!”

성난 승훈이를 향해 민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주

 “후후, 그냥 그랬었다고.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니까 걱정 마. 여하튼 이곳에서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어. 사실 너 없을 때도 여기에 여러 번 왔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엄마한테도…. 너한테도…. 힘들다고 눈물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 생각해보니 나 여태껏 정말 잘 견뎌온 거 같아. 여러모로.”

담담한 듯 토해내는 민주의 말들에서 그동안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듣고 있던 승훈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왠지 자신도 그런 누나의 어깨에 짐을 보태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졌다.

승훈

 “뭐, 뭐야! 웬 자뻑!?”

일부로 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마 누나가 지금보다도 더 슬퍼할 게 분명했다.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가를 말릴 수 없는 바람이 없는 게 야속했다.

승훈

 “아,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네! 정수 형. 화장실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정수

 “어, 화장실? 그래. 물론이지.”

승훈

 “누나. 나 먼저 내려갈게. 누난 언제 내려올 거야?”

민주

 “응? 먼저 내려가. 나도 아빠한테 인사만 하고 내려갈 테니까.”

승훈

 “알았어. 먼저 간다.”

정수가 휠체어를 밀고 승훈과 같이 내려가는 모습을 민주가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작고 어린애만 같았던 녀석이 벌써 저만큼이나 성장해 어른이 돼 있었다. 

민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주

 “아빠. 승훈이 많이 컸죠?”

들려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민주는 익숙한 듯 혼잣말의 대화를 이어갔다.

민주

 “승훈이랑 어머니는 제가 잘 챙길 테니 걱정 말고 이곳에서 편안히 쉬세요. 그리고 아직 엄마한테는 말 안 했지만, 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요.”

민주아빠

 “남자?”

환청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민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대답했다.

민주

 “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 같아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아요.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같이 있고 싶고 그래요. 요즘에는 그 사람 때문에 울고 웃고 그래요. 아참, 저 그리고 이제 물 공포증도 사라졌어요. 아직은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 사람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서운 줄도 모르겠어요. 왠지 위험이 닥치면 어디선가 나타나 구해줄 것만 같거든요.”

민주아빠

 “민주가 그 남자 많이 좋아하나 보구나?”

민주

 “네.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아직 그 남자의 마음을 모르고 있거든요. 아빠도 알다시피 제가 내숭을 떠는 거나 속마음을 감추는 걸 잘 못 해요. 혹시나 그 남자 앞에서 제 마음이 모두 들통 날까 봐! 그래서 제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남자가 떠날까 봐 무서워요. 좋아하는 사람을 잃는 게 이젠 정말이지 너무 무섭고 겁이 나요.”

민주아빠

 “하지만 민주야.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는 솔직해질 수가 없어. 그건 행복하다고 할 수 없어. 우리 딸. 아빠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민주

 “하지만 그 남자가 이런 저를 좋아해 줄까요?”

민주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없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톱스타 김민주라고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사랑에 빠진 여자일 뿐이다. 

자신을 이성으로써 좋아해 주는 건 십만, 아니 백만 명의 남자가 아니라 온 세상에 딱 한 명이면 족했다. 오직 딱 한 명. 

민주

 “아빠. 나 이제 갈게요.”

민주아빠

 “…….”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원한 마음이 머리카락을 한 움큼 흩날리고 지나갈 뿐.

민주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민주

 “안녕. 아빠.”

츤데렐라33화 - 꼬시는 것도 기술이다 (1)

33. 꼬시는 것도 기술이다 (1)

채윤희

 “어, 경훈쌤?”

일이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경훈은 느닷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긴 복도 통로 끝 편에서 채윤희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알아본 경훈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경훈

 “어? 채윤희 씨 아닙니까?”

채윤희

 “어머, 맞네! 뒷모습이 영락없이 경훈쌤 같더라니까.”

경훈

 “오늘 수업 없는 날인데 이곳에는 웬일입니까?”

채윤희는 가슴골이 훤히 들어나 보이는 노란색 민소매에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걸쳤지만, 딱히 몸을 가리기 위한 용도는 아닌 듯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는지 머리는 젖어 있었다. 

평소에 보아오던 발랄하던 이미지와는 뭔가 많이 달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채윤희

 “스쿼시 치러 왔다가 어제 사물함에 놓고 온 게 생각이 나서 잠깐 들렸어요. 경훈쌤은 지금 퇴근하는 길?”

경훈

 “예.”

채윤희

 “혹시 저녁은 드셨어요?”

경훈

 “예? 아직….”

채윤희

 “어머, 잘됐다. 저도 마침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뭐라도 먹어요.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경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훈

 “매니저분은요? 저번에 보니까 매니저분이랑 같이 오시던 거 같던데….”

채윤희

 “에이, 매니저 오빠는 벌써 퇴근했죠. 저는 혼자서도 잘 다녀요. 오늘도 직접 차 몰고 왔는걸요?”

경훈

 “아, 저는 됐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먹도록 하죠.”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경훈은 정중한 거절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 뒤를 채윤희가 쫓았다.

채윤희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밥 먹어요. 제가 원래 혼자 먹는 걸 되게 싫어하는데 지금 배가 너무 고프단 말이에요. 네? 제가 여기 앞에 진짜 맛있게 하는 집 알아요. 같이 가서 먹어요. 네? 경훈쌤!”

두 눈을 동그랗게 말고 졸라대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혹한 건 사실이었다. 

헌데, 시간이 시간인 만큼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경훈

 “괜히 이런 밤중에 남자랑 단둘이 있는 거 다른 사람들이 보면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식사는 그냥 매니저분 있을 때 같이 셋이서 먹는 거로 하죠. 제가 그땐 맛있는 거 사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하고 문이 열리자 경훈은 가차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채윤희

 “저 오늘 생일이에요!”

멀어지는 경훈을 보며 채윤희가 소리를 빽 하니 질렀다.

날카로운 음성이 귓구멍을 후벼 팠다.

세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경훈이 우뚝하고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등 뒤에는 채윤희가 잔뜩 시무룩해져 있는 표정으로 축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채윤희

 “저녁만큼은 혼자 먹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못 들었으면 좋았으련만 채윤희의 중얼거림을 듣고야 말았다. 손을 대면 왠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대로 두고 가자니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경훈

 “생일이시면 파티라도 즐기셔야죠. 왜 혼자 이러고 계세요?”

채윤희

 “원래 생일 같은 거 안 챙겨요. 딱히 축하해줄 사람도 없고. 몰랐어요? 저 왕따인 거?”

경훈

 “가족은요? 가족은 있을 거 아닙니까?”

채윤희

 “가족들은 모두 미국에 있어요. 저만 활동 때문에 한국에 있는 거예요.”

경훈

 “아…. 그러시구나.”

채윤희가 헤헤거리며 깜찍한 표정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집어넣었다. 

초롱초롱하게 치켜뜬 눈망울이 평소보다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채윤희

 “아, 괜히 말했다! 그냥 못들은 걸로 하세요. 혼자 먹으면 되니까.”

경훈

 “…….”

‘하나, 둘, 셋.’

채윤희가 속으로 숫자를 세면 발을 떼었다.

낚시꾼이 바늘에 미끼를 끼워놓고, 물고기를 기다리듯이 채윤희 또한 떡밥을 던져놓고 물기만을 바랐다.

뜸을 두고 일부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경훈의 옆을 지나갔다. 표정도 최대한 시무룩하게 지었다. 일부로 얼굴을 보라고 시선도 보기 좋게 돌렸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떡밥이면 준비는 완벽했다. 

이젠 물리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걸려라. 걸려라.’

경훈

 “저어….”

‘옳지 걸렸다!’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각도는 45도를 유지하며 최대한 머리가 흩날리지 않게. 목소리는 최대한 가냘프게 내리깔고. 표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하게. 

속마음과는 달리 채윤희의 얼굴에는 실연이라도 당한 여주인공처럼 처연함이 치덕치덕 묻어 있었다. 

채윤희

 “네에…?”

경훈

 “뭐, 저도 출출하니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채윤희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채윤희

 “제가 마침 먹고 싶은 게 있어요. 그거 먹으러 가요!”

경훈

 “네? 네. 뭐, 좋으실 대로.”

채윤희

 “일단 제 차로 같이 가요. 차 두 대로 움직이면 번거로우니까요.”

채윤희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경훈을 잡아 이끌었다. 

몇 발자국까지는 그렇게 이끌려가다가 이내 경훈은 팔을 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 팔을 뺐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갈 곳을 잃은 채윤희의 팔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옆구리에 안착했다. 

경훈이 시선을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짐짓 딴청을 부렸다.

‘오호, 이거 봐라?’

여태껏 이런 남자는 없었다. 괜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좋아. 조금 있다가도 이럴 수 있나 보자!’

***

경훈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처음에 자유로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메뉴선정은 그녀의 몫이었고, 경훈은 앞자리에 같이 앉아 있어만 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장소도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운전은 그녀가 하기로 했고, 묻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허나, 전방 앞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를 보고 경훈은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 정도에서 조용히 식사할 것을 예상했는데 향하고 있는 장소가 예상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경훈

 “국제공항고속도로?”

채윤희가 도리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채윤희

 “영종도 가는 길이잖아요. 한번도 안 가보셨어요?”

경훈

 “네?”

채윤희

 “거기 제가 자주 가는 횟집이 있어요. 자연산만 취급하는 곳인데. 생선이 아주 싱싱하고, 맛도 좋아요.”

경훈

 “회 좋아합니까?”

채윤희

 “그럼요. 아주 환장해요. 없어서 못 먹는걸요? 경훈쌤은 회 안 좋아하세요?”

경훈

 “아니요. 저도 잘 먹습니다.”

채윤희

 “그런데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던 채윤희가 이내 알았다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채윤희

 “아! 돈 많이 나올까 봐 그러는구나!? 걱정 마요. 제가 생일 턱 쏘는 거니까!”

하아….

어째 대화의 포인트가 어긋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경훈

 “누가 돈 때문에 그럽니까? 생각보다 너무 멀리 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채윤희

 “아. 그러셨구나! 금방 가요 금방! 뭐, 이 정도 가지고 멀다고.”

더 이상의 대화는 별로 무의미해 보인다.

경훈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경치나 구경했다. 

승용차는 무서운 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 국제공항고속도로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사방이 뻥 뚫린 다리 위를 지나가자 양옆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채윤희가 속도를 줄이고, 창문을 열었다. 

짠내를 머금은 비릿한 냄새가 폐부로 가득 밀려 들어왔다.

채윤희

 “아, 좋다.”

어린아이처럼 정말로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격의 없는 웃음에 경훈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경훈

 “바다 처음 봅니까?”

채윤희

 “처음은 아니죠. 하지만 남자랑은 처음이죠.”

경훈

 “네?”

채윤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 냄새가 경훈의 코끝을 자극했다. 

아주 좋은 냄새가 풍겨왔다. 

얼굴을 파묻고 싶을 만큼.

경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영종도에 위치한 가고파 횟집. 

둘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횟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이 내부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채윤희를 알아본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남자1

 “와, 채윤희다. 채윤희. 그런데 옆에는 누구? 혹시 남친인가?”

자기들 딴에는 작게 소곤거리고 있지만, 워낙 목소리가 커 대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남자2

 “같은 연예인인가 본데? 와, 그런데 남자도 잘생겼다. 매니저도 없는 거 보니까 진짜 애인인가 본데?”

경훈

 “크흠.”

경훈은 칭찬이 이리 불편할 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게 마치 동물원 안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 당사자는 익숙한 듯 그저 웃기만 했다.

채윤희

 “신경 쓰지 마요. 원래 연예인이 다 이러니까.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집밖에 나오지도 못해요. 아, 저기 비었네! 저쪽에 앉아요!”

채윤희가 성큼 비어있는 테이블 앞으로 가 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녀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제껏 봐온 채윤희는 꽤나 당돌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경훈은 그동안 생각해왔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다소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아 왔던 건 사실이다. 곱게만 자라고, 공주 짓만 할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같은 모습들이 연예인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조막만 한 입술을 달싹이며 회를 주문했다.

채윤희

 “이모! 여기 모둠회 한 접시랑 소주 한 병이요!”

소주라는 단어에 경훈이 화들짝 놀랬다.

경훈

 “술이요? 술 마시게요?”

채윤희

 “당연하죠. 회는 소주죠. 그리고 생일날 축하주가 빠져서 되겠어요?”

경훈

 “아….” 

경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생일축하를 해주러 온 자리라는 걸.

채윤희

 “아! 차 걱정하시는구나? 돌아갈 때는 대리 부르면 돼요! 경훈쌤도 생일 축하해주러 온 자리니 절대! 네버! 빼면 안 돼요! 아셨죠?”

혹시 경훈이 술을 마시지 않을까 미리 못 박아두었다.

어째 채윤희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듯했다.

‘뭐, 괜찮겠지. 술 몇 잔 정도야.’


츤데렐라34화 - 꼬시는 것도 기술이다 (2)

34. 꼬시는 것도 기술이다 (2)

회가 나오고, 술잔이 돌자 경훈은 이내 곧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술 한 잔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한 병을 비우기도 전에 이미 채윤희는 한계치에 도달했다. 

뭔가 떠들어대고는 있는데 혀가 잔뜩 꼬여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경훈

 “채윤희 씨! 이제 그만 마셔요. 충분히 마신 것 같은데.”

채윤희

 “싫어! 더 마실 거야!”

경훈

“취했어요? 집에 그만 가죠. 데려다 드릴게요.”

채윤희

 “더 마실 거라니까요?”

뭐라는 거냐. 이 여자. 

상황이 이쯤 되자 주위 사람들도 채윤희를 보며 뭔가 싶은 눈치였다. 

덩달아 경훈의 한숨도 늘어만 갔다.

주위 시선이 낯 뜨거웠다. 일반인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했겠지만, 술 취한 인기여자연예인을 이런 상태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경훈

“그만 일어납시다. 데려다드릴 테니.”

채윤희

 “어!? 어!? 나 더 마실 건데! 어…. 어….”

경훈은 강제로 채윤희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더 마시겠다고 고집부리는 걸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횟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자신이 왜 이곳에서 채윤희와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산은 물론 경훈의 몫이었다. 대리운전기사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술이라도 깰까 싶어서 바다를 보며 바람을 맞았다. 

채윤희

 “아, 추워. 추워!”

계속 춥다고 채윤희가 칭얼거렸다. 제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밤바다의 공기는 차디차기 마련이다. 핫팬츠에 민소매 티.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치고 있으니, 춥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패션도 좋다지만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경훈

 “그러게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녀가지고….”

경훈이 걸치고 있는 재킷을 벗어 그녀의 몸 위에 걸쳐줬다.

그래도 추웠는지 채윤희는 자꾸만 경훈의 팔짱을 끼며 옆으로 붙어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꾸 뺨에 닿으며 살랑거렸다.

경훈

 “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그녀를 슬쩍 밀어냈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채윤희

 “아, 따뜻해!”

차라리 그 표정을 보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경훈은 너무 행복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마치 온정에 잔뜩 굶주려 있는 강아지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자 차마 더 이상 밀어낼 수가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더 깊숙이 경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원래 이렇게 남자에 대해 경계가 없나 싶은 생각을 들 무렵 젊은 사내가 둘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대리기사

 “혹시, 대리 부르셨나요?”

뭔가 못된 짓을 저지르다 들킨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경훈이 대답했다.

경훈

 “네? 네.”

경훈이 황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찰싹 붙어있는 그녀를 차 뒷좌석으로 구겨 넣었다.

휴우. 한숨이 나왔다. 안도감이 들면서도 뭔가 아쉬운 기분이었다.

대리기사가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대리기사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경훈이 채윤희를 힐끔 쳐다봤다. 

완전히 인사불성 상태였다. 바람이라도 쐬면 술이 좀 깰 줄 알았는데 어째 더 취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경훈은 채윤희가 어디서 묶고 있는지 몰랐다. 몇 번 집이 어디냐고 흔들며 물어봤지만, 술이 만취 상태인데 순순히 대답할 리가 만무했다. 때마침 반갑게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액정에 뜬 발신자를 보니 매니저 오빠라고 적혀있었다. 반색하며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경훈

 “여보세요?”

목소리를 확인한 상대에게서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윤희매니저

 [어라? 윤희 핸드폰 아닌가요?]

경훈

 “아,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센터에서 수영 강습하고 있는 김경훈이라고 합니다.”

채윤희매니저

 [아, 네. 어!? 근데 왜 윤희 핸드폰을 그쪽이…?]

경훈

 “어쩌다 보니 술을 한잔하게 됐는데 채윤희 씨가 지금 많이 취해서요. 지금 대리운전을 불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굳이 보지 않아도 당황해하는 매니저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관리하는 여자 연예인이 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외간남자와 술을 마시고 취해있다니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채윤희매니저

 [거기 어딘가요?]

경훈

 “여기 영종도입니다. 가고파라는 횟집인데….”

채윤희매니저

 [아, 미치겠네. 걘 또 거길 왜 갔대.]

한탄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채윤희매니저

 [제가 지금 볼일이 있어서 부산에 내려와 있어서요. 아, 그런데 윤희가 무슨 일 때문에 술을 먹은 거죠? 걔 술 못 마셔요.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앤데.]

채윤희는 아직도 벌건 얼굴로 쌔근거리고 있었다. 3, 4잔쯤이나 마신 것 같았다. 경훈도 물론 몰랐다. 초반의 패기를 생각하자면 이 정도에 넉다운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훈

 “오늘이 생일이라네요. 술은 그다지 잘 마시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경훈이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경훈

 “제가 같이 있으니 그냥 채윤희 씨를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혹시 어디서 묵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채윤희매니저

 [아, 정말요? 그래 주시겠어요? 강사님이 그래 주신다면 정말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경훈

 “뭐,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채윤희매니저

 “아, 신라호텔로 가면 됩니다. 1203호.”

경훈

 “네? 호텔이요? 집이 아니라요?”

채윤희

 [그게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갑자기 집을 이사하는 바람에 며칠 동안만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거든요.]

경훈

 “아, 네. 뭐 일단 알겠습니다.”

채윤희매니저

 [비밀번호는 1012입니다. 번호 누르고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

경훈

 “예. 그러면 제가 모셔다드리도록 하는 거로 하고 그만 끊겠습니다.”

채윤희매니저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띠리릭.

전화를 끊고 경훈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기사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경훈

 “신라호텔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리기사

 “아, 예. 옆에 계신 분이 채윤희 씨 같은데 많이 취하셨나 봐요?”

경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방금 통화하신 걸 들었으면 아실 테지만 저 남자친구나 그런 거 아닙니다.”

대리기사

 “하하, 아무렴 어떻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다반사로 겪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리기사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보자 왠지 안심되었다.

대리기사

 “자,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

부우웅.

차가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창밖을 내다보니 국제공항고속도로 위를 한창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 창문으로 내다보는 야경이 꽤나 근사했다.

스르륵.

채윤희의 몸이 조금씩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경훈 쪽으로 엎어졌다. 경훈은 잠시 고민했다. 일으켜 세울까. 그대로 둘까. 허나 이내 후자 쪽을 택했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 불편하지 않게 허벅지 위로 머리를 받혀줬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가끔 한 번씩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괜히 오해할까 싶어 운전사가 힐끔 쳐다봤지만, 다행히 그는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도 채윤희는 인사불성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경훈이 채윤희를 호텔 방까지 부축해서 데리고 올라갔다. 제아무리 여자라지만 축 늘어진 몸뚱어리는 꽤나 무거웠다. 

복도를 지나고 있는데 호주머니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울려댔다.

내버려두면 끊을까 싶었는데, 신경질적인 벨 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경훈은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발신자는 친구 남정현이었다.

경훈

 “여보세요?”

정현

 [어, 경훈이냐? 지금 뭐 해?]

경훈

 “나?”

경훈이가 부축하고 있는 채윤희를 힐끔 쳐다보며 대꾸했다. 

경훈

 “밖인데 왜?”

정현

 [웬일이냐? 맨날 집에만 처박혀 있는 녀석이? 나 지금 너 네 집 지나가다가 술 한잔 할까 싶어 전화했는데. 어딘데? 주위가 조용한 거 보니까 술집은 아닌 거 같고….]

경훈

 “할 이야기 없으면 끊어. 인마!”

정현

 [어어어!? 야야야, 너 지금 엄청 수상한데!? 목소리도 약간 숨찬 거 같고? 이 시간에 밖이라면…. 너 혹시 여자 생겼냐?]

경훈

 “…….”

정현

 [헐, 뭐야? 진짠가 보네? 너 지금 여자랑 같이 있지? 혹시 모텔!? 이런, 배신자! 너 진짜 이러기냐? 여자 친구 생겼어?]

……. 약간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명탐정 뺨치는 추리력이다. 녀석은 거의 확신하는 눈치였다. 내버려두자면 별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 싶어 경훈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경훈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끊어 인마!”

정현

 [야야야!!!]

달칵.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 채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 침대에 눕히자 뼈마디가 아우성을 쳐댔다.

우두둑. 우두둑. 

허리를 펴자 그때야 호텔 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별다를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일반적인 호텔 방이었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문자가 왔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정현

 [야, 피임은 꼭 이다. 꼭!!!]

저질 같은 놈. 생각하는 거 하곤. 괜히 꺼내봤다 싶어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싶었는데 아직 그녀가 걸치고 있던 자신의 재킷이 눈에 밟혔다.

벗기려면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벗겨야 하는데 방금 전 정현이의 문자를 받은 탓일까? 뭔가 상황적으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훈

 “뭐, 알아서 가져다주겠지?”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경훈이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후, 자동개폐장치가 울리자 감겨있던 채윤희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다.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던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행동들이 또렷하고 명확했다.

그녀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재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킷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헐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불편해서 벗으려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단단히 여미며 그대로 천장을 보며 뒤로 엎어졌다.

말을 하지 않으니 그녀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채윤희

 “여자 친구라….”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거렸다. 

옅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눈을 멀뚱거리더니 이내 그대로 잠들었다.


츤데렐라35화 - 꼬시는 것도 기술이다 (3)

35. 꼬시는 것도 기술이다 (3)

다음 날.

경훈이 늘 같은 시각에 센터로 진입하고 있는데 정현이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저 얼굴만 봐도 무슨 말을 할 건지 짐작이 갔다. 뭐라고 해명해야 하나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경훈의 속내도 모른 채 구렁이 100마리는 삶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툭 밀었다.

정현

 “뭐냐!? 서경훈? 어젯밤 좋았냐?”

하아. 하필이면 그때 왜 전화를 받아가지고.

경훈

 “그런 거 아니거든?”

정현

 “에이, 그러지 말고 형님한테 다 털어놓아 봐. 누구야? 누군데 말을 안 해 주는 건데!?”

말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정현이 확장된 눈으로 경훈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현

 “서, 설마!? 아니지!?”

뭘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정체는.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단어가 녀석의 목구멍을 통해 거침없이 밖으로 뱉어졌다.

정현

 “기, 김민주!?”

경훈이 서둘러 손으로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들었나 싶어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경훈

 “아, 아니라고! 이 미X놈아! 조용히 못 해!?”

정현

 “헐, 대박!”

경훈

 “아, 미치겠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했던가? 

놈이 딱 그 짝이었다.

이 자식을 내버려두면 뭔 사단이라도 나겠다 싶어서 서둘러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현이 다소 맥 빠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현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근데 채윤희랑 술을 마셨어? 의외인걸? 

경훈

 “그러게 말이다. 나도 내가 왜 같이 술을 마셨는지 이해가 안 간다.”

정현

 “뭐, 젊은 남녀가 같이 술을 마실 수도 있지. 근데 말이야….”

녀석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음흉한 얼굴을 지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 녀석이 하는 이야기는 한 가지뿐이었다.

정현

 “근데 진짜 그냥 눕혀두기만 하고 나왔어?”

음탕함이 두 눈에 가득한 게 영락없이 음란마귀 같았다.

경훈

 “아, 진짜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정현

 “아니, 말이 그렇잖아. 보니까 채윤희가 일부로 너 꼬시려고 같이 술 먹자고 한 거 같은데 호텔 방까지 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이해가 안 가서 그러지. 나 같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안 되겠다 싶어 경훈이가 서둘러 말을 끊었다.

경훈

 “내가 말했잖아. 채윤희 씨가 술 취해서 내가 데려다줬을 뿐이라고.”

정현

 “아, 이 자식 생긴 거랑 다르게 답답하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영종도까지 데리고 가서, 술도 못 먹는 여자가 술 먹고 취했다면 이미 말 다 한 거 아니야? 에라이, 빙X야. 꼬추 떼라.”

경훈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설마 채윤희 같은 연예인이 뭐가 아쉬워서….”

남정현이 혀를 찼다.

정현

 “김민주 해바라기가 다른 여자의 속내를 어찌 알겠냐만은. 너 채윤희 만나면 정중하게 사과해. 그날 밤일은 진심으로 죄송했다고. 여자를 그렇게 두고 나오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에 있냐? 매너 없게.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이지만 채윤희 술 취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경훈

 “어?”

정현

 “여자들이 많이들 쓰는 수법이야. 이 자식 이제 보니까 그런 쪽은 완전히 쑥맥이구만? 앞으로 이 형님의 지도편달이 많이 필요할 거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부터 너를 위해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마.”

경훈

 “에이, 설마….”

정현

 “설마는 무슨. 내 경험상 거의 100%거든? 그리고 오늘부터는 이거 꼭 뒷주머니에 꽂고 다녀. 너 보니까 조만간 이게 필요할 거 같다.”

녀석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경훈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의 정체를 보고 경훈이 질겁했다.

경훈

 “뭐, 뭐야 이게!?”

정현

 “다 필요할 때가 있을 거다. 그때가 되면 형님에게 감사하다 생각할 거니 부담 갖지 말고 넣어둬.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이쯤 되면 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경훈

 “아, 미X 새끼.”

정현

 “향락과 탐욕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한다. 브라덜!”

경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이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

의문의남자

 “오늘도 역시인가?”

달력 오늘 날짜에 X표를 긋는 사내의 음성이 유난히 침울하기만 하다. 

벌써 한 달째. 여신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참다 참다 이제는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밖으로 나와 옆집 1605호 대문 앞으로 다가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바로 민주의 집이었다.

문이 달칵하고 열렸다. 남자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행동이 마치 제집인 것 마냥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가장 먼저 찾아 들어간 곳은 민주의 침실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올 때면 방안은 늘 그녀의 체취가 가득했다. 그녀가 걸친 옷, 그녀가 밤새 덮고 잔 이불, 그녀의 흔적이 묻어 있는 물건들. 운이 좋으면 금방 벗어 던진 옷가지들도 발견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따뜻한 온기도 체취도. 아무런 냄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식어버린 방안의 온도만큼이나 남자의 마음도 냉랭해졌다.

화장대에 놓인 립스틱을 꺼내 자신의 입술에 발랐다. 

그녀가 즐겨 쓰던 핑크색이었다. 

그녀가 즐겨 입던 잠옷을 꺼내 몸에 걸쳐 입었다. 마치 그녀의 체온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가 사놓은 스타킹을 신고, 실내화를 걸치자 마치 그녀와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서랍장을 열었다. 맨 위에 칸에는 상의, 두 번째 칸은 바지, 맨 아래 칸은 속옷이 개어 있었다.

남자는 이 서랍장 속에 있는 옷의 종류는 물론 속옷이 몇 개 있는지도 모두 파악 하고 있었다. 속옷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민주가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노란색 T팬티. 

딱 자신 취향이다. 언제고 이것을 입을 민주의 모습을 상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코가 벌렁거렸다.

한참을 뒤적거렸더니 침울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의문의남자

 “아, 좋다. 나의 민주.”

***

달리는 차 안. 

이른 아침부터 민주가 회사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늘 그렇듯이 정수가 운전하고 뒷좌석에는 민주가 앉아 있었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민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민주

 “아이씨, 이런 변태! 벌레만도 못한 십장생 같은 자식!”

정수

 “네?”

민주

 “아니, 오늘 신문에 난 이 자식! 도대체 성범죄를 저지른 놈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라니? 전자발찌 같은 거로 되겠어? 이런 놈들은 그냥 확! 거세를 시켜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그치?”

정수

 “글쎄요. 뭐, 그래도 거세는 조금 너무 한 거 아닐까요?”

민주

 “뭐야? 남자라고 편들어주는 거야?”

민주가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정수

 “아하하…. 그, 그럴 리가요. 생각해보니 누나 말이 맞네요. 그런 놈들은 아예 거기를 확 잘라 버려야 해요!”

민주

 “그렇지?”

정수

 “암요.”

민주

 “그런데 회사에는 왜 들어오라는 건데? 귀찮게. 할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전화로 하지.”

정수

 “듣기론 무슨 광고가 들어왔다고 하던데요?”

툴툴거리던 민주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연예인치고 광고 찍기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 이전과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민주

 “광고? 무슨 광고?”

정수

 “글쎄요. 가보면 알겠죠?”

민주

 “그래, 빨리 가보자. 더 밟아! 더!”

***

웬일인지 최 이사의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맞은편에는 민주가 앉아 있었고, 그 뒤로 정수가 서 있었다.

커피를 홀짝이는 최 이사의 기분이 유난히도 좋아 보였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최이사

 “와하하하. 우리 민주가 완전 복덩어리네 복덩어리. 봐봐, 수영 배운다니까 바로 수영복 광고촬영 들어오는 거. 물 공포증도 없애고, 광고도 따내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지. 안 그래?”

정수

 “그렇게 좋으세요?”

최이사

 “그럼 좋다마다. 여태껏 물 공포증이다 모다. 쉬쉬하는 바람에 비치웨어 관련된 광고는 하나도 들어온 게 없었잖아.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광고가 들어왔으니 내가 기분이 안 좋고 배겨? 이제 이 광고만 잘 찍고, 런칭되면 다른 광고들도 물밀 듯 몰려들게 뻔한 거 아니겠어?”

정수

 “그런데 찍기로 한 브랜드가 어디에요?”

최이사

 “알레나. 어때? 좋지!?”

정수

 “어? 거기 채윤희 씨랑 국가대표 강민태 선수가 모델로 있었던 곳 아니에요?”

최이사

 “그렇지! 그런데 내가 누구야? 채윤희 밀어내고 우리 민주로 광고를 돌리는 데 성공했지! 우하하하!”

아주 기분이 째지는 모양이었다. 

최 이사가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수

 “와, 정말 대단해요. 이사님. 전 이번에도 채윤희 씨로 연장될 줄 알았는데.”

최이사

 “그렇지?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내가 가서 딱 그랬지! 알다시피 채윤희가 좀 서구적인 체형에 글래머스한 몸매잖아?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 중 A컵을 착용하는 여성이 전체인구 중 70%가 넘어. 채윤희 같은 몸매를 보면 여자들이 얼마나 괴리감을 느끼겠어? 요즘에는 글래머스한 몸매보다 건강한 몸매를 더 선호하는 추세잖아. 그래서 내가 우리 민주의 그런 점들을 어필했지. 그리고 그게 먹혀들어 간 거지!”

그런데 어째 듣다 보니 그리 칭찬 같지는 않아 보인다.

민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민주

 “그러니까 최 이사님 말은 제가 채윤희보다 가슴이 더 작아서 모델이 됐다? 그 말씀이신 거죠?”

최이사

 “그렇지! 바로 그거지!”

가슴 작다고 하는 데 좋아할 여자는 세상천지에도 없었다. 

민주

 “아이씨! 최 이사님!!!”

민주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민주

 “저 절대 작은 가슴 아니거든요!? 누가 제 가슴이 작대요? 누가!?”

최이사

 “아니, 누가 뭐라고 그랬어?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그렇게 가슴 이야기에 민감하고 난리야!?”

며칠 전에 가슴 수술한다고 난리 쳤던 걸 알 리가 없는 최이사는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남자 때문에 가슴 수술을 할 뻔한 사실을 최 이사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참 눈치 없다 생각하며 정수가 화제도 돌릴 겸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정수

 “그보다 남자 모델은 정해졌대요? 이번엔 누가 한 대요?”

최이사

 “남자? 글쎄. 듣기로는 매스컴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을 뽑는다고 하던데? 아직 정하진 못한 모양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민주가 눈동자에 이채를 띄었다.

민주

 “신인 남자 뽑는데요!?”

최이사

 “어, 내가 듣기론 그렇게 들었는데. 왜?”

민주

 “그러면 제가 한 명 추천해도 되요?”

민주의 눈이 마치 수정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몰까? 이 낯선 표정은.

크리스마스 날에 양말에 들어있는 선물을 풀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최 이사를 쳐다보는 눈빛이 꼭 그러했다.

민주의 이런 모습은 최 이사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최이사

 “뭐, 뭐야! 이런 부담스러운 표정은?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네?”

민주

 “딱인 사람이 있어요!”

최이사

 “민주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어? 누구?”

민주

 “있어요. 그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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