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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소설] 죽기살기 프로젝트1-20화
죽기살기 프로젝트1화 - 저승사자? 나 좀 데려가요!
1화 저승사자? 나 좀 데려가요!
“으음..”
“조은하씨 정신이 드세요?”
깨질 듯 한 머리를 부여 잡고 눈을 뜬 은하는 바로 보이는 하얀 천장과 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조은하 씨 제 목소리 들려요?”
“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쇼크가 와서 위 세척을 마친 상태예요, 뭔 약을 그렇게 많이 먹었어요? 진짜 죽을 뻔했어요 조은하씨.”
“……”
“벌써 몇 번 쨉니까? 지겹지도 않습니까?”
“…저 또 안 죽었네요.”
“자꾸 이러면 경찰에 제보할겁니다.”
은하가 이런 일로 병원을 방문하는 게 처음은 아닌 듯 의사는 은하를 보며 버럭 화를 냈다.
“아직 좀 안정이 필요한 상태니까 한 삼일 입원하세요.”
은하가 의식이 돌아 온 것을 확인한 의사는 간호사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포도당 맞고 내일부터 식사 가능하세요.”
간호사는 수액을 조절 하고는 쌩 하니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은하는 멍하니 하얀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복도 더럽게 없는 년이 명은 또 더럽게 길다.’
‘아 병원비는 또 얼마지..응급실로 왔으니 응급 관리료도 붙어서 엄청 비쌀 텐데..이번 달 생활비도 부족한데…어떡하지..’
자신의 몸 속으로 똑똑 떨어지는 포도당 링거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하는 손을 뻗어 링거 바늘을 훅 뽑아버렸다.
그 바람에 피가 훅 하고 솓구쳐 올랐지만 은하는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병실 밖으로 나왔다.
주변 간호사들의 눈치를 살피던 은하는 곧바로 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옥상 문 앞에 도착한 은하는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힘껏 문을 열어 젖혔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훅 하고 불어온 바람이 은하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옥상 안으로 들어 서서 주변을 휙 둘러 보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은하는 만족한 듯 난간에 올라섰다.
발 아래로 보이는 작은 세상에 은하는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 보면 정말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상인데, 이 속으로 들어가 얼마나 치열하게들 살고 있는지..단 하루도 편하게 발 뻗고 잠이 든 적 없는 은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 였고, 축복 받지 못한 탄생이었으니 이렇게 죽어 버린다고 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은하는 병원 복 깊숙이 숨겨온 소주 한 병을 꺼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냥 이 커다란 세상에 먼지 같은 존재라 나 하나쯤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고 나의 부모, 아니 그 지긋지긋한 인간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하는 문득 자신이 이렇게 까지 하찮은 존재였나 싶어 울컥했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그냥 남들처럼!!삼시세끼 밥 먹고 학교 다닐 나이에 학교 다니고 이런 거 하고 싶었다고!!”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은하는 세게 부는 바람에 휘청이다 뒤로 넘어가버렸다.
당연히 쿵 하는 소리와 딱딱한 바닥이 느껴져야 하는데…어쩐지 푹신푹신하다 라는 느낌을 받으며 실눈을 뜬 은하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꽥 질렀다.
“당신 뭐야!”
***
“아 윤배우 왜 그래~좀 더 다가가야지 한별씨 싫어?”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가자!”
감독의 주문에 남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한 번 앞에선 여배우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디..액션!”
액션 사인이 나자마자 여주인공은 감정 몰입을 하곤 남우를 바라보았다.
“대체..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너만..있으면 돼.”
여 배우의 팔을 잡아 자신의 품에 안으려던 남우는 힘 조절을 못해 여배우의 팔을 놓쳐 버렸다.
”컷컷!!!하아..10분만 쉬었다 합시다.”
거듭되는 남우의 실수에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지쳐 버렸고 결국 짜증스런 얼굴로 쉬었다 가자는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은 웅성거리며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저러니까 가수 출신은 쓰면 안 된다니까 그냥 가수나 하지 무슨 연기를 하겠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얼굴만 믿고..쯧..”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수근 거리는 스태프들의 말을 들은 남우는 소리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감독님들이 연기 하세요.”
갑작스러운 남우의 등장에 놀란 스태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남우는 그런 스태프들을 뒤로 한 채 유유히 촬영장을 빠져 나왔다.
세트가 아닌 진짜 병원 일부를 빌려서 하는 촬영이기 때문에 병원에 있는 환자들과 간호사들은 남우를 흘끗 흘끗 쳐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엔 그런 시선을 즐기는 남우였지만 하루 종일 촬영이 풀리지 않는 오늘 같은 날엔 그런 시선조차도 짜증스러웠다.
“저..윤남우씨 맞으시죠?”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을 모자 아래로 깊숙이 감추고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남우를 간호사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아는 척했다.
“아..네 안녕하세요.”
남우는 얼른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저 진짜 윤남우씨 팬이거든요. 사랑의 불꽃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다 봤어요!”
“아..감사합니다.”
적당히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던 남우의 손을 덥석 붙잡은 간호사는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저..싸인 좀 해주세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표정을 확 굳힌 남우는 좀 전과는 달리 짜증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싸인 해주기 싫으세요?”
“네.”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듯한 간호사의 물음에 남우는 망설임 없이 네, 대답하고는 간호사의 손을 툭 털어내곤 성큼성큼 갈 길을 갔다.
“어머머 아니 연예인이 대수야?인터넷에 확 뿌릴 거야!”
뒤에서 들리는 간호사 목소리에 남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유유히 비상구로 향했다.
어차피 이러쿵 저러 쿵 하는 구설수들과 어떻게든 자신을 깎아 내리려는 입방아들은 인기와 함께 늘 비례했기 때문에 그닥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안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뒤적이며 옥상에 올라온 남우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아무도 없네.”
옥상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남우는 그제서야 맘 편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제 좀 살겠다.”
자신만을 향해 있는 카메라 들과 수 십 개의 눈동자들을 보며 늘 긴장을 하고 압박을 받아 왔던 남우에게 지금 오롯이 혼자인 이 순간만이 온전한 쉬는 시간이었다.
지이이잉//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매니저 지훈에게서 온 전화에 금방 인상이 찌푸려진 남우는 짜증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왜.”
[곧 촬영 시작한다는데 어디야?]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치고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뒤돌아 서던 남우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병원 복에 빨간 핏자국을 묻힌 여자가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남우는 순간 잘못 본 거 라고 생각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그냥 남들처럼!!삼시세끼 밥 먹고 학교 다닐 나이에 학교 다니고 이런 거 하고 싶었다고!!”
무슨 사연인지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여자의 모습을 남우는 조용히 지켜봤다.
처음 보는 여자지만 어쩐 지 그냥 지나 칠 수 없었던 남우는 여자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뒤에서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바람에 휘청이는 여자의 모습에 기겁한 남우는 얼른 달려가 여자를 받쳐 주었다.
곧이어 자신의 위로 넘어진 여자가 자신을 보곤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남우는 어이가 없었다.
“당신 뭐냐니까!!”
“하..참..”
“왜 죽으려는 사람을 살려!!왜 방해하냐고!”
자신의 어깨를 퍽퍽 내리치며 소리를 지르는 은하의 모습에 정신이 든 남우가 짜증스럽게 입을 뗐다.
“나 누군지 몰라요?”
다짜고짜 자신이 누군지 모르냐고 묻는 남우의 모습에 은하는 가만히 남우를 훑어 보았다.
그리고는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어?저승사잔가?맞죠 그 쪽 나 데리러 온 저승사자 맞잖아!”
“저승사자?”
“맞네~까만 옷 입고 어?창백한 게..딱 저승사잔데?”
비틀거리며 일어난 은하는 남우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곤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뭐야 술 취했어?”
은하가 가까이 다가오자 훅 하고 풍기는 술 냄새에 남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승사자면 나 데리고 갈 수 있겠네~저기요 저승사자 나 지금 당장 좀 데리고 가줘요.”
자신의 바지자락을 꼭 잡고 저승사자니 어쩌니 하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의 눈엔 그저 그런 술주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술 마셨으면 곱게 들어가야지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남들한테 피해나 주고 어?”
“피해? 내가 무슨 피해를 줬는데에! 태어나는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죽는 거라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뭐!왜!”
“저기요.”
“조은하요 내 이름! 저기요가 아니고! 그리고 아니 무슨 저승사자가 데려갈 사람 이름도 몰라요?”
“저승사자?”
자꾸만 자신을 저승사자라고 지칭하는 은하에 남우는 자신의 옷차림을 쓱 훑어보았다.
장례식장 씬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까만 정장 차림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까만 모자까지 써서 온통 검은 색 이긴 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승사자라니…
“저기요 내가…정말 수 십 번 죽으려고 엄청 노력했거든요? 근데 진짜 박복한 년이 명까지 길어서…참 질기더라고요 내 명줄이…근데 오늘에서야 진짜 저승사자를 만났으니 나…진짜 죽는 거 맞죠?”
“하..참.”
죽기 위해 노력을 했다니…그저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평범하지가 않았다.
“이 생에 미련 없으니까 빨리 나 좀 데려가요.”
그저 이상한 여자려니 싶어 뒤돌아서 가려던 남우는 문득 흐느끼는 소리에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저승사자님!!제발..나 좀 데려가요 어차피…이 세상에 살아봤자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데…여기나 저승에 있는 지옥이나 똑같으니까..나 데려가요..”
자신을 보며 울부짖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홀린 듯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언젠가 드라마에서 본 듯한 대사를 읊조렸다.
“그럼 너에게 딱 100일이라는 시간을 줄게.”
“뭐요? 아 지금 당장 데리고 가요!100일 더 살아서 뭐해!”
무작정 떼를 쓰는 은하를 보며 남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뭐, 저승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다 가는 곳인 줄 알아?”
남우는 어느 새 자신이 진짜 저승사자라도 된 것 마냥 대사를 읊었다.
“아 몰라!나 지금 당장 데려가요!”
“100일 동안 네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아봐.”
“아 진짜 저승사자도 별 수 없네, 또 희망적인 이야기하면서 삶의 이유를 찾아라 뭐 이딴 이야기 할 거면 에이 몰라 그냥 나 확 뛰어내릴래요!”
다시 성큼성큼 난간으로 걸어가는 은하의 손목을 확 낚아 챈 남우는 잔뜩 무서운 표정으로 은하에게 속삭였다.
“너..스스로 목숨 끊어서 저승으로 간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운 지 모르지?”
그런 남우의 모습에 은하는 잠시 멈칫했다.
“..네..?”
“너희가 구전으로 전해 듣는 지옥세계…그것보다 백배 천 배는 더 무서워. 펄펄 끓는 불구덩이에 떨어 뜨리고 산 채로 살가죽을..”
자신도 모르게 구전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술술 내뱉은 남우다.
“으..으..알겠어요…그만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이야기를 내뱉어 대는 남우를 보며 은하는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니까 일단 100일 동안 네가 살아야 할 이유 한번 찾아봐, 100일이 지나고도 못 찾겠다면 내가 너 데려 가줄게 네가 그렇게 원하는 저승이라는 곳에.”
자신도 모르게 술술 저승사자 인 양 떠들어 대던 남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연기 했으면 진작 남우주연상을 타고도 남았겠다..참..’
“만약 100일 동안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은하의 물음에 남우는 잠시 머리를 굴리며 대답을 생각하곤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뭐 그 땐 너도 저승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니까, 자연스럽게 계약은 없던 일이 되는 거지. 어때? 넌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텐데.”
“내가 진짜 살아야 할 이유 못 찾으면 나 꼭 데리고 가야 해요.”
“그 땐 네가 싫다고 해도 데려가 줄게.”
“약속해요.”
은하는 남우를 향해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고 남우는 건성으로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자 이거!”
은하는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빼서 남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게 뭡니까?”
“나한테 엄청 소중한 팔찌 거든요? 다음에 나 찾으러 와야 하니까! 나 잊어버리지 말라고 주는 거예요! 아 나는 어디서 일하냐면요 대희동 지에이 편의점에서 일해요! 잊어버리지 말고 꼭 나 데리러 와야 해요..”
자신의 말을 마친 은하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어..어! 저기요!”
놀란 남우는 얼른 은하를 들춰 업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여기 내려 놓으세요!”
남우가 빈 침대에 은하를 내려 놓자마자 의사는 은하의 병원 복을 보고 손목을 살펴봤다.
“어? 여기 입원해 있는 환자네요?”
“아..네 옥상에 올라갔다가 쓰러져 있길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남우를 보며 의사는 별 의심 없이 더 묻지 않고 은하의 상태를 살폈다.
“술 마시고 기절한 거 같네요 좀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아..네.”
근데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은 의사에 남우는 모자를 더 깊숙이 쓰며 말을 돌렸다.
“아 저는 그냥 옥상에 바람 쐬러 갔다가 쓰러져 있어서...그럼 전 이만 가봐도 되죠?”
“아..네 가보셔도 됩니다.”
편안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든 은하를 한번 쓱 쳐다본 남우는 별 생각 없이 병원을 빠져 나와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별 생각 없이 한 여자의 인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죽기살기 프로젝트2화 - 다른 듯 닮은 일상.
2화 다른 듯 닮은 일상.
“아윽..머리야.”
깨질 듯 한 머리를 부여 잡고 잠에서 깬 은하는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꿈이었나..”
가만히 앉아 주변을 둘러 보던 은하는 자신의 옷깃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어제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드르륵/
“조은하 씨!어제 밤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링거를 갈아 주러 들어 온 간호사는 은하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친구가 왔다고 해서 잠깐 친구 보고 오려다가…친구랑 딱 한 잔만..한다는 게..”
은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술술 거짓말을 내뱉었다.
“위 세척 하고 나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강제 퇴원이예요!”
링거를 다 갈은 간호사는 새침한 표정으로 경고 하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어제 죽음의 문턱 다녀 온 거야?”
어제의 저승사자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진 은하다.
***
“남우야! 일어나~!”
어제 촬영에 늦은 남우 때문에 촬영 시간이 연기가 됐고 결국 밤샘 촬영을 했다.
그 결과 남우는 벤 안에서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해야 했다.
“오 분만 더..”
“어제도 너 때문에 촬영 지체돼서 지금 스태프들 잔뜩 뿔 나 있어 얼른 일어나.”
지훈의 말에 비적거리며 일어난 남우는 짜증스럽게 차문을 열고 나왔다.
“야 미정아 남우 메이크업하고 머리 좀 빨리 다시 해줘.”
“네~”
미정은 얼른 헤어 도구와 메이크업 도구를 가져와 남우의 머리를 만졌다.
“자! 윤배우 준비 다 됐어?”
“아 네 감독님 남우 준비 다됐습니다!”
“빨리 시작하지 어제 지체 돼서 다들 피곤할 텐데.”
감독의 뼈 있는 말에도 평온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메이크업을 받는 남우와 달리 안절부절 못하는 지훈이다.
“미정아 메이크업 좀 빨리 해라.”
“네..네 매니저님!”
“천천히 해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어차피 김한별도 아직 스탠바이 전이잖아.”
“야 박 감독 눈 밖에 나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저 감독 요새 엄청 뜨는 감독인 거 알지? 이번에 잘 해야 다음 작품에 또 불러 줄 거 아냐.”
“나 저 감독 맘에 안 들어.”
“배우가 감독 마음에 안 들어도 감독한테 별 피해가 없는데 감독이 배우 마음에 안들어하면 배우들 밥 줄 끊긴다.”
“아 딴 감독작품 하면 되지.”
세상 편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 남우의 모습에 지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자 스탠바이!!”
감독의 스탠바이 사인에 맞춰 남우는 배우 윤남우의 가면을 쓰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남우의 이중적인 태도에 지훈은 혀를 찼다.
“저런 연긴 참 잘해.”
***
“야 조은하!”
“은하야!”
“오지 말라니까 뭐 하러 왔어.”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해님은 들어오자마자 은하의 몸을 살폈고 준석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은하를 쳐다보았다.
“너 뭐하냐?”
“또..그런 거야?”
두 눈 가득 눈물을 글썽거리며 묻는 해님의 모습에 은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짜..너 왜그래에!”
“…미안해.”
“저번에 약속했잖아 나랑! 앞으로 이런 짓 하지 않기로!”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는 해님을 보며 은하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삼켰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왔어~”
“학교가 중요해? 네가 이러고 있는데?”
“괜찮은 거야?”
“응…나 살아있어.”
은하에게 유일한 가족 같은 친구들, 해님과 준석은 은하에게서 정말 소중한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동네에 살며 한 가족처럼 지내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친하고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도 은하의 이러한 행동을 막지 못했다.
“아저씨한텐 연락했어?”
“..아니..아! 아저씨 아줌마한텐 얘기 하지마 알겠지?”
“조은하 너 진짜 한번만 더 이런 짓 하면 진짜 가만 안둔다.”
준석의 으름장에 은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100일 뒤엔 진짜 죽을 테니까..’
***
“저..윤남우씨..”
“네?”
“아..저 옆에 앉아도 돼요?”
“뭐..그러세요.”
남우는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윤남우씨?”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이름을 불러대는 한별에 그제서야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한별을 쳐다보는 남우다.
“네 김한별씨.”
“아..저..혹시 촬영 끝나고 시간 되시면 저랑 저녁 같이 먹을래요?”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저녁식사를 제안하는 한별의 모습은 어느 누가 봐도 홀릴 듯한 외모지만 남우에겐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하는 그냥 상대역 여자 배우일 뿐이었다.
“내가 왜요?”
퉁명스러운 남우의 대답에 당황한 한별이 버벅거렸다.
“네?아니..그냥 상대 배우끼리 식사 같이하면서 친목도 다지고..”
“친목?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볼 거 같은데…저는 김한별씨랑 식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 둘이라면 더더욱.”
“하..듣던 대로 건방지네요 윤남우씨.”
남우의 거절에 금세 본색을 드러낸 한별은 씩씩 거리며 남우를 노려봤다.
“듣던 대로 쉬운 여자네요 김한별씨.”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준 남우는 울그락 붉으락 해지는 한별의 얼굴을 모른 척하고 감독의 스탠바이 사인에 싱긋 웃으며 촬영장으로 뛰어갔다.
***
“조은하 씨 오늘은 퇴원하셔도 됩니다.”
퇴원을 하라는 간호사의 말에 은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근데..저 병원비가……”
“아 병원비는 이미 다 납부 됐어요.”
“네?”
“어제 하준석이라는 분이 다 완납하셨는데.”
“네?준석이가요?”
“퇴원 수속 밟아야 하니까 1층 원무과 다녀오세요.”
“아..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에서 나온 은하는 바로 준석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어 퇴원했어?]
“너 뭐야?”
[어?]
“너 뭐냐고! 내 병원비를 왜 또 네가 내냐고!”
[야 조은하..나는 그냥 친구니까 내 준거지 우리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사인데?”
[가족 같은 사이지..]
“가족 같은 사이지 가족은 아니잖아.”
[야 조은하 그 말은 좀 섭섭하다.]
“계좌 번호랑 병원비 문자로 보내.”
[너 이번 달 생활비도 부족하잖아 그냥..]
“안 보내면 연락 끊을 거야.”
[야 조은하!]
은하는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잠시 후 바로 준석에게 문자가 왔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줘라..병원비 얼마 안 나왔어 그니까 앞으론 병원에 입원하고 그러지 말고..이번만 그냥 넘어가-준석.
자신을 생각하는 준석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건 싫었다.
물론, 이렇게 매번 죽으려고 시도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물질적으로 까지 민폐를 끼치기 싫었던 은하는 꾹꾹 키 패드를 눌러 답장을 했다.
-자꾸 민폐 끼치기 싫어 네가 이러면 나 진짜 쓸모 없는 사람 같잖아 내가 벌인 일 내가 해결하고 싶어. 계좌번호랑 병원비 문자로 보내줘-
은하의 단호한 답장에 준석은 졌다는 듯 자신의 계좌번호와 병원비를 문자로 보냈다.
물론 자신이 낸 금액 보다 조금 낮춰서…
문자를 확인한 은하는 곧 바로 휴대폰을 켜서 준석의 계좌로 병원비를 보냈다.
통장에 찍힌 잔액을 본 은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달은 한끼만 먹고 살아야겠네…”
힘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걷던 은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우울한 은하와는 달리 하늘은 화창 하기만 했다.
“거 하늘에 저승사자님 들리나?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는데 뭐 하러 100일이란 시간은 또 준거예요? 어차피 이렇게 사나 지금 죽으나 뭐가 다르다고..”
***
“컷컷!한별 씨 오늘 왜 그래?어제는 윤배우가 그러더니 오늘은 여자 주인공이 그러네 둘이 짰어?”
감독의 말에 한별은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한 번에 가자고!”
“네.”
“자 스탠바이~큐!”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고, 남우는 조심스럽게 한별에게 다가갔다.
“키스..해도 돼요?”
남우의 말에 한별은 부끄러워하며 눈을 감으면 되는 장면 이였다.
하지만 남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별은 눈을 감지 않고 뚫어져라 남우를 노려 보았다.
“컷컷!! 한별씨 정말 왜 그래? 대본 숙지 아직 안됐어? 키스신이잖아! 그렇게 눈을 뜨고 있으면 어떡해?”
결국 감독은 버럭 화를 냈고 한별은 고개를 다시 한번 숙여 사과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10분간 휴식!”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은 또 다시 웅성이며 카메라를 내려 놓았다.
남우 역시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촬영장 밖에 준비 된 의자에 앉았다.
“오늘 김한별 왜 저런데?”
“아 몰라 더워 죽겠네.”
남우의 말에 미정이 미니 선풍기를 들고 와 남우의 얼굴에 대줬다.
“근데 오빠 김한별 왜 저래요? 오빠만 계속 노려 보는데?”
미정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저 쪽 건너편에서 한별이 두 눈이 찢어져라 남우를 노려 보고 있었다.
남우와 눈이 마주치자 한별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남우에게 다가왔다.
“윤남우씨.”
“네?”
“이런 기분으론 그 쪽이랑 연기 못 하겠어요 키스신 빼달라고 할게요.”
한별의 말에 남우는 코웃음을 치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김한별씨 당신 진짜 프로답지 못하네 예상은 했지만 좀 전에 나한테 식사 거절 당한 게 기분 나빠서 계속 NG 낸 건가?”
“뭐..뭐예요?”
“다른 남자 배우들은 그런 식으로 굴면 오냐 오냐 하고 부둥부둥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배우들한테 아이고 예쁘다 잘한다 이런 거 잘 못하거든요 그렇게 개인 감정 넣어서 연기하니까 지금 이렇게 촬영이 지체 되잖아요 우리 빨리 빨리 합시다 어차피 지금 내 얼굴 꼴 보기 싫을 텐데 빨리 안 끝내면 이 얼굴 더 봐야 하잖아. 안 그래요?”
남우의 말에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한별의 모습을 보며 남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또..”
“아 몰라 밥 먹자 그래서 싫다 그랬더니 저러잖아.”
“웬만하면 한 번 먹어줘라.”
“왜 같이 밥을 먹어 다음 날 되면 또 분명히 여기저기서 목격담 나오고 얘랑 사귀네 마네 할 텐데.”
“유혜연이랑은 잘 만 먹으면서.”
“혜연이는 친구잖아.”
“정말 저스트 프렌드?”
“아 형은 옆에서 매번 봐놓고선 그래.”
“혜연이는 아닌 거 같은데~”
“아 형!”
지이이잉//
“어?얘도 양반은 못 되네.”
지훈과 장난을 하던 남우는 혜연에게서 오는 전화에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혜연아.”
[촬영 중이야?]
“아니 쉬는 시간 너는 영화 촬영 중 아냐?”
[나는 촬영 다 끝나고 집에 가는 중에 너 보고 싶어서~]
“아 나 촬영 늦게 끝날 거 같은데.”
[그럼 내가 촬영장으로 놀러 가지 뭐~]
“어…안 피곤해?”
[잠깐 얼굴만 보고 가지 뭐~]
“그래 그럼.”
[mbs방송국이지?]
“어?어.”
[금방 갈게~]
“어 그래.”
혜연과의 통화를 마친 남우를 보며 지훈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봐봐 유혜연은 너 친구로 안 본다니까.”
“아 형!”
“자 윤배우 김배우 스탠바이!”
“네!”
감독의 스탠바이 사인에 남우는 지훈에게 슬쩍 눈을 흘기고는 후다닥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그 때, 탁자 위의 놓여 있던 남우의 휴대폰이 짧게 울리고 액정엔 혜연의 문자가 떴다.
-너 좋아하는 샌드위치도 사간다~-
“봐 내 육감이 맞다니까.”
죽기살기 프로젝트3화 - 잘 살고 있나?
3화 잘 살고 있나?
“3800원 입니다.”
“누나 남자친구 있어요?”
“봉투 필요 하세요?”
“이름이 조..은하? 은하 누나 남자친구 있냐고요!”
“거스름돈 1200원 입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의 치근거림에 은하는 꿋꿋이 아무 대꾸 없이 거스름 돈을 건네주었다.
“아 진짜 더럽게 도도하게 구네 그래 봐야 알바주제에.”
은하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남학생은 은하의 면전에 대고 욕을 지껄이곤 편의점을 나갔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기에 은하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넘겼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더 서글퍼지기만 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하지만 곧이어 우르르 몰려 들어 오는 여고생 무리에 서글퍼할 겨를도 없었다.
“컵라면 먹고 갈래?”
“그래!”
각자 컵라면을 고른 여고생들은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밖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컵라면을 다 먹은 여고생들은 음식 먹은 자리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이거 다 먹었으면 치우고 가야 하는데…”
은하의 말에 화장이 짙은 여고생이 뒤돌아 대답했다.
“그거 언니가 치우는 거 아니에요?”
“아…자기가 먹은 건 각자 치워야 하는 건데…”
“그래요? 근데 우리가 좀 바빠서 언니가 좀 치워요.”
여고생은 짙은 아이라인 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을 하곤 은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잔뜩 깔보는 말투로 명령하곤 뒤 돌아서갔다.
저 멀어지는 여고생 무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은하는 결국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자리를 닦던 은하는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누가 볼 새라 얼른 손으로 벅벅 닦아냈다.
평소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들이 요즘엔 너무 크게만 다가왔다.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삼키던 은하는 습관적으로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어?팔찌!”
당연히 만져져야 할 팔찌가 보이지 않자 은하는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간 거야…”
언제나 자신의 몸에 지니고 풀러 본 적 없는데 당연한 듯 팔목에 걸려 있어야 할 물건이 없어지자 은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편의점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팔찌는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은하는 무언가 생각난 듯 그제서야 아!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저승사자..”
며칠 전에 병원 옥상에서 만난 그 저승사자에게 팔찌를 쥐어 준 사실이 떠오른 은하는 소리를 꽥 질렀다.
“내가 미쳤지!!”
***
“내일은 촬영 없으니까 오늘 가서 푹 쉬어.”
“하루 종일 잠이나 자야겠다.”
“그래 요 며칠 계속 밤샘 촬영 해서 피곤하겠다.”
“어? 오빠 이게 뭐예요?”
촬영 때 입었던 옷을 정리하던 미정은 주머니 속에서 나온 팔찌를 보고 물었다.
“어?어 그거 내꺼.”
미정의 손에 들린 팔찌를 본 남우는 화들짝 놀라며 미정에게서 팔찌를 채 오듯 가져와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뭔데 그래 혜연이가 준 거야?”
“어? 아니 그냥 주웠어.”
주머니 속에 있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남우는 옥상에서 만났던 은하를 떠올렸다.
“잘..살고 있겠지?”
문득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던 은하의 눈빛이 생각 나 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
“아니..아냐.”
***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동이 터서야 퇴근을 한 은하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드문 드문 켜져 있던 가로등은 어스름한 새벽이 되자마자 꺼지기 시작했고 은하는 늘 그렇듯이 어두운 골목 사이를 가로질렀다.
일명 달동네라고 하는 곳 중에서도 가장 언덕에 위치해 있는 집에 살고 있는 은하는 숨을 고르며 언덕을 올랐다.
끼익/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 선 은하는 집 안에 풍기는 술 냄새에 코를 막고 발뒤꿈치를 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마음 편히 숨을 내쉰 은하는 가방만 내려 놓고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은하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엄마…”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며 은하는 조용히 엄마를 불러보았다.
“엄마..미안해..엄마가 준 팔찌..잃어 버렸어..”
허전해진 팔목을 만지작 거리며 울먹이던 은하는 엄마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피곤함에 곯아 떨어 졌던 은하는 벌컥 열리는 방문에 벌떡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 밥부터 챙겨야지 어디 여태까지 쳐 자고 있어!”
아침부터 술에 절은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지르는 아빠를 보며 은하는 익숙한 듯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기지배가 밤 늦게 까지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일찍 일찍 들어와서..”
“돈 벌러 다니잖아요 돈!”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는 아빠의 모습에 결국 참았던 은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디서 부모한테 소리를 질러!”
짝/ 소리와 함께 은하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고, 입 안엔 피비린내가 퍼졌다.
“하…참.”
이마저도 익숙해져 버린 은하는 퉁퉁 부어 오르는 얼굴을 부여 잡고 밥을 펐다.
“알아서 챙겨 드세요.”
저런 사람도 부모 라고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꽤나 처량 맞아 보였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오전 아르바이트 장소인 카페로 향하는 은하의 발걸음이 오늘은 더 무거웠다.
“안녕하세요.”
부운 볼을 한 손으로 슬쩍 감싸고 카페 안으로 들어 선 은하는 제발 사장인 재혁이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랬다.
“어? 은하 너 얼굴이 왜 그래?”
하지만 재혁은 성큼 은하에게로 다가와 얼굴을 살폈고, 은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긴 얼굴이 퉁퉁 부었는데..”
“어…넘어졌어요 어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얼른 재혁을 피해 탈의실로 들어 온 은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탈의실로 들어서는 은하의 모습을 본 재혁은 혼자 중얼거렸다.
“또..아버지한테 맞았구나.”
처음에 카페에 출근 했을 때 얼굴에 멍이 든 채 출근하는 은하의 모습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재혁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 우연히 아버지와 은하의 통화내용을 듣게 된 재혁은 크게 놀랐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지 통화 음량을 줄였는데도 선명하게 들리는 욕과 비속어들에 과연 이게 정말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얘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은하가 창피해 할 까봐 재혁은 모르는 척 조용히 그 자리를 피했었다.
처음 입사한 날부터 번번히 얼굴에 상처를 달고 나오는 은하의 모습에 재혁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주문 하시겠어요?”
옷을 다 갈아 입은 은하는 최대한 부은 얼굴이 티 나지 않게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주문을 받았다.
***
지이이잉//
촬영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오자마자 침대로 직행한 남우는 정말 꼬박 하루를 깨지 않고 잠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침대 맡에 올려 둔 끈질긴 휴대폰 진동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미안 잤어?]
“어..어..오늘 쉬는 날이라.”
[나도 오늘 쉬는 날이라 같이 저녁 먹자고 연락했는데..]
“아..”
[피곤하면 내가 집으로 갈게.]
“어?아냐 내가 나갈게 어디서 만날까?”
[내가 매니저 오빠랑 집 앞으로 갈게.]
“아니 식당 앞에서 만나자.”
[뭐 하러 차 두 대가 움직여 내가 가도..]
“우리 자주 가는 그 식당 앞에서 만날까?”
[..그래 여덟 시까지 나갈게.]
“이따 보자.”
혜연과의 통화를 마친 남우는 기지개를 한편 켜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최대한 튀지 않는 티와 바지를 꺼내 입은 남우는 모자와 안경까지 꼼꼼하게 얼굴을 숨겼다.
익숙하게 향수를 뿌리려던 남우는 아차 싶어 다시 내려 놓았다.
요샌 자신이 자주 뿌리는 향수로도 팬들이 알아보기도 했기 때문에 향수를 수시로 바꿔야 했다.
그 옆에 있는 자주 뿌리지 않는 향수를 뿌린 남우는 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
“은하야 오늘은 일찍 들어가.”
“이것만 마저 만들게요.”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었다가 편의점 가라니까…”
“괜찮아요 사장님 저 하나도 안 피곤해요~”
“보는 내가 안 괜찮아 그거 이리 주고 얼른 가.”
재혁의 성화에 결국 은하는 만들던 음료를 내려 놓고 앞치마를 벗었다.
탈의실로 들어 온 은하는 좀 전 보다 가라 앉은 얼굴을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았다.
“티는 많이 안 나네..”
카페는 얼굴이 어떻든 사람들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야간 아르바이트인 편의점은 술 마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얼굴에 난 작은 상처 하나에도 시비 거는 일이 많아 은하는 더 꼼꼼히 상처를 숨겼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사장님.”
“그래 조금 쉬었다 가.”
“네 내일 뵐게요.”
재혁의 말과는 다르게 은하는 집이 아닌 바로 다음 아르바이트 장소인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서오..어? 언니 일찍 왔네요.”
자신과 교대 하기 바로 전 타임 아르바이트 생인 선주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응 카페가 좀 일찍 끝나서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나 저녁 좀 먹어도 되지?”
“네 그러세요~”
은하는 대충 삼각김밥과 우유를 계산하곤 밖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뻑뻑한 삼각 김밥을 우유로 밀어 넣으며 지나가는 대학생들을 구경하는 은하의 눈빛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있었다.
“언니! 저 조금만 일찍 교대해주면 안돼요? 레포트 쓸게 좀 많아서…”
“그래 얼른 가봐.”
선주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곤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갔다.
은하는 느릿하게 자신의 조끼를 입고는 가방에 있는 책을 꺼냈다.
그러다 한 쪽 구석에 놓여 있는 대학 전공 교재를 보고는 선주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뛰어 나갔지만 이미 선주는 보이지 않았다.
은하는 휴대폰을 꺼내 선주의 번호를 찾아 문자를 넣었다.
-선주야 책 놓고 갔어.-
은하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기도 전에 짧게 진동이 울렸고 선주에게선 짧은 문자 한 줄이 와있었다.
-내일 가져 갈게요 그냥 두세요.-
은하는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 인후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오늘 따라 한산한 편의점 분위기에 조금은 여유롭게 메모장을 꺼내 이야기를 끄적이는 은하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대학교재에 시선이 꽂힌 은하는 조심스럽게 책을 펴보았다.
글은 어떻게 쓰는 것인가.
“아..선주가 문예창작 과였나..”
어렸을 적부터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 였던 자신이 선망했던 대학에 가고 싶었던 과를 다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니…
은하는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 보았다.
꽤나 열심히 공부 했는지 책 여기저기 공부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본 은하는 빙긋 웃으며 책을 훑어 보았다.
자신이 그 동안 배우고 싶었던 내용이라 그런지 은하는 곧 바로 책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그래도 손님이 오는 소리를 들은 은하는 대충 인사를 하곤 다시 책에 시선을 돌렸다.
계속 해서 페이지를 넘기던 은하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뭐…뭐예요?”
까만 티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은 남자가 까만 모자를 쓰고 은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죽기살기 프로젝트4화 - 산다는 게 뭔데요?
4화 산다는 게 뭔데요?
“여기!”
혜연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남우는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드는 혜연을 발견하곤 성큼성큼 그 쪽으로 향했다.
“일찍 왔네.”
“우리 집이 더 가깝잖아~뭘 그렇게 꽁꽁 싸매고 왔어~”
“넌 너무 대놓고 다니는 거 아냐?”
모자에 안경까지 쓴 자신과는 달리 혜연은 옅은 화장에 안경 하나 쓰고 나왔다.
“어차피 난 화장 진하게 안 하면 잘 못 알아봐.”
“그래도 티 나.”
“모자는 좀 벗으면 안돼?”
혜연의 말에 주변을 쓱 둘러 본 남우는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었다.
“어차피 우리 밖에 없거든요?”
“저번에 스캔들 날 뻔한 거 우리 쪽에서 막은 거 몰라?”
“치…나면 인정해버리지 뭐.”
“뭐?”
“아냐 아 배고프다 뭐 먹을래?”
“그냥 늘 먹던 거 먹지 뭐.”
“사장님~우리 늘 먹던 걸로 준비해주세요.”
늘 오던 곳이라 자주 먹던 음식을 아는 사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알아서 음식을 내왔다.
“너 김한별 찼다며?”
혜연의 말에 물을 마시던 남우는 물을 뿜을 뻔했다.
“크흡..누가 그래?”
“지훈 오빠가.”
“아니 이 형은 별 말을 다하네.”
“뭐 어때 나한테 얘기 하는 건데~”
“찬 거 아니고 그냥 같이 밥 먹자 했는데 거절한 거지.”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식사 나왔다 먹자.”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남우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와인 한 잔 할까?”
“아니 난 내일 새벽에 촬영 있어.”
“나 혼자 마시기 싫은데…딱 한 잔만 마시면 안돼?”
“차 가지고 왔어.”
결국 혜연은 혼자 와인 잔을 채웠다.
“적당히 마셔 너도 내일 촬영 있다며.”
“네가 있는데 뭐 걱정이야~”
그렇게 혜연은 한 잔 두 잔 와인을 비웠다.
점점 빨갛게 달아 오르는 혜연의 얼굴을 보며 남우는 혜연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뺏었다.
“그만 마셔.”
“딱 한 잔만 더하면 안돼?”
“너 취했어 그만 일어나자.”
식사를 거의 마친 남우는 차 키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아~어어?”
남우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던 혜연은 훅 몰려 오는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괜찮아?”
그 모습을 본 남우가 얼른 뛰어가 혜연을 부축했고, 혜연은 남우의 품에 기대 걸음을 옮겼다.
“차 어디 있어?”
“매니저 오빠한테 전화 해야 되는데…”
“일단 내 차에 타.”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남우는 서둘러 혜연을 자신의 차에 태웠다.
“내가 데려다 준다고 전화 할게.”
“..으응..”
혜연의 매니저 훈석과도 워낙 친했던 사이기에 남우 휴대폰을 꺼내 훈석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어 윤배우.]
“아 형 혜연이가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제 차로 집에 데려다 줄게요.”
[내일 촬영인데 술을 마셨어? 하아..진짜..]
“많이는 아니고 와인 몇 잔 마셨는데 피곤해서 금방 취했나 봐요.”
[매번 고마워.]
“아녜요 혜연이 내일 해장 좀 잘 시켜주세요.”
[그래 수고 좀 해줘.]
“네 쉬세요.”
훈석과 통화를 마친 남우는 옆에서 이미 깊은 잠에 빠진 혜연을 보고 뒷 좌석에 있는 담요를 꺼내 덮어주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혜연의 집에 금세 도착한 남우는 조심스럽게 혜연을 깨웠다.
“혜연아 일어나.”
“으응..?어..도착했어?”
“응 집 앞이야.”
“으응…”
부스스 일어난 혜연은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겨 차 문을 열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탓에 비틀거리는 혜연의 모습이 꽤나 위태로워 보여 남우는 조심스럽게 옆에서 부축했다.
“조심해.”
“들어왔다 갈래?”
“얼른 들어가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응..조심히 가.”
혜연의 집 안 불이 켜지는 것까지 본 후에야 남우는 차에 올라탔다.
심란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온 남우는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혜연이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남우도 느꼈다.
자꾸만 자신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어하고 여자로 다가오려고 하는 혜연의 행동이 남우는 머릿 속이 복잡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우연히 같은 꿈을 꿔 같은 직업을 갖게 된 그런 막연한 사이이기에 혜연의 행동 변화는 남우를 혼란스럽게 했다.
멍 하니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남우는 문득 침대 맡 협탁에 놓인 팔찌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슬그머니 일어나 팔찌를 요리저리 살펴보았다.
은으로 보이는 팔찌엔 팔찌 주인의 이름으로 보이는 이니셜이 각인 되어 있었다.
“KMH…어? 그 여자 이름은 조..은하였는데..?”
팔찌를 더 살펴 보던 남우는 끝에 조그마한 글씨로 MY MOM 이라고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아…”
나의 엄마…문득 남우는 이 물건이 은하에게 엄청 소중한 물건일 것이라는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희동..지에이 편의점..”
자신을 데리러 오라며 편의점 위치를 말하던 은하의 모습이 떠오른 남우는 서둘러 차 키를 챙겨 은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이 생각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 있어 금세 편의점 앞에 도착한 남우는 그제서야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나 싶어 문 앞에서 망설였다.
남우는 혹시나 자신이 저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자신이 연예인이라는 걸 알아보면 어떡하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창 너머의 은하를 쳐다보았다.
창 너머로 비친 은하는 책을 읽다가도 계속 해서 습관적으로 팔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우는 모자를 더 푹 눌러 쓰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책에 꽤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들어와도 쳐다보지도 않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조심스럽게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뭐…뭐예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가 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저..그게..”
누가 봐도 수상한 옷차림의 남우를 보곤 은하는 더듬더듬 비상벨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본 남우가 다급하게 은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남우의 행동에 놀란 은하가 소리를 꽥 지르자 남우는 주머니에 있는 팔찌를 꺼내 보였다.
“이거 이거!! 조은하씨 꺼!”
남우의 손에 들린 익숙한 팔찌를 본 은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우는 혹시나 자신의 정체를 들킬 까 싶어 최대한 모자를 꾹 눌러썼다.
“저승사자..?”
자신을 저승사자로 칭하는 은하의 물음에 남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때 나한테 줬잖아요 이거.”
“그럼 나 벌써 데리러 온 거예요?”
은하의 쌩뚱 맞은 질문에 당황한 남우는 천천히 그 때 일을 회상했고, 자신이 미친 척 100일 뒤에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기억해냈다.
“아..미친..”
“네?”
“아니..아닙니다.”
남우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대답할 말을 생각했다.
“..저기..”
“아 모르겠다 이 팔찌 조은하씨한테 소중한 거 아니야?”
“..맞는데..”
“그러니까 돌려주러 왔어.”
“……?”
“소중한 거 함부로 아무한테 막 주는 거 아냐.”
“하지만 저승사자님은..”
“상대가 저승사자 아니 염라대왕이라고 해도 주면 안돼.”
남우는 자신에 손에 들린 팔찌를 은하의 손목에 다시 채워주며 신신당부 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난 이만.”
자신의 임무를 마친 남우는 미련 없이 얼른 뒤 돌아섰다.
“저기요!”
“왜?”
“..저 그냥 지금 저승 데리고 가면 안돼요?”
또 다시 시작 된 저승 타령에 남우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뗐다.
“어차피 100일 뒤에 죽으나 지금 죽으나 똑같잖아요.”
“……”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한테…살라고 하는 게 죽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데…”
남우는 애써 은하의 말을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
집으로 돌아 온 남우는 은하의 말 한마디가 머릿 속을 어지럽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한테…살라고 하는 게 죽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데…’
대체 그 어린 학생이 어떤 삶을 살고 있길래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죽고 싶은 건지…
남우는 괜히 은하의 애절했던 눈빛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은하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형 사는 게 뭘까?”
“뭐?”
갑작스런 쌩뚱 맞은 남우의 질문에 지훈이 다시 되물었다.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사는 건 다 다르잖아.”
“너 어디 아파?”
지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안 아프거든!”
남우는 지훈의 손을 휙 떼버리곤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
“안녕하세요 어머님~”
은하가 입원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준석의 엄마가 은하를 집으로 초대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얼른 들어와~”
은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술 냄새만 가득하고 어두컴컴한 자신의 집과는 달리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집안 분위기에 은하는 오히려 더 위축되었다.
집 안엔 온갖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 했고, 준석의 식구들이 상을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아 있었다.
“은하 누나!”
준석의 동생인 지석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은하를 반갑게 맞았고 은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딸 왔구나 얼른 이리 와서 앉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리 와서 앉아 이거 다 너를 위한 음식이다 엄마가 너 좋아하는 음식만 했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 됐고 준석의 엄마는 은하의 옆에 앉아 은하를 챙겨주었다.
“어머님 드세요.”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잖아 오늘 많이 먹고 따로 싸놨으니까 집에도 가져가서 아버지도 드리고.”
“..감사해서 어떡해요.매번..”
“우리 딸인데 뭐 엄마니까 당연한 거지.”
“..감사합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울컥한 은하는 행여 또 눈물을 보일까 밥을 크게 한 술 떠 틀어 막았다.
“내일이 미정이 제사지?”
“네…”
“미정이가 우리 은하 보면 기특해 할 거야…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거..”
“……”
은하의 눈시울이 붉어 진걸 눈치 챈 준석이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 엄마 갈비찜이 좀 짠 거 같은데?”
“그래? 난 괜찮은데..”
다행히 금세 분위기가 전환 되었고 준석은 아무도 모르게 은하에게 괜찮냐며 눈짓을 해 보였고 은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밑반찬이고 이건 불고기야 양념 다 한 거니까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돼 알겠지?”
“감사합니다..어머님..”
“조심히 가 응? 또 오고..”
“네…”
“엄마 은하 데려다 주고 올게.”
“그래.”
“안 데려다 줘도 되는데…”
“이렇게 어두운데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고 있냐.”
“괜찮아…익숙해 져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천천히 걷기만 했다.
“준석아.”
“응.”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은하였다.
“엄마가 나 엄청 예뻐했지..”
“그럼 아줌마가 너 엄청 예뻐했고 아꼈지.”
“엄마…보고싶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까만 밤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날 따라 유난히 많은 별들이 까만 하늘을 수 놓아 반짝이고 있었다.
죽기살기 프로젝트5화 - 왜 자꾸 나타나요?
5화 왜 자꾸 나타나요?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양 손 가득 시장에서 장을 본 은하는 천천히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오늘도 역시 술 냄새 가득한 집 안을 까치발로 조심조심 들어 온 은하는 주변을 살펴 보다 아빠가 없는 걸 확인한 후 부엌으로 향했다.
아빠가 들어 오기 전에 서둘러 장 봐 온 것을 꺼내 빠르게 제사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벌써 다섯 번 째 제사네 엄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음식을 다 만든 은하는 작은 상에 음식을 차려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미안해 매번 좁은 내 방에서 음식 먹게 해서…아..맞다!이걸 안 챙겼네.”
은하는 동네 빵 집에서 산 단팥빵을 꺼내 제사상에 올렸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빵 집 단팥빵이야 사장님이 두 개나 더 주셨다?”
멍하니 앉아 혼잣말을 하던 은하는 벌컥 열리는 방문에 벌떡 일어났다.
“야 너 뭐하는거야!!어? 내가 네 엄마 제사 지내지 말랬지!!!”
술에 절은 모습으로 방 안으로 비틀비틀 들어 온 아빠는 은하가 정성스레 차려 놓은 제사상을 발로 차 엎어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죽은 사람은 왜 챙겨!!!산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진짜 왜 이래요!!엄마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한 두 번도 아니고 엄마 생일 때도 제사 때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제대로 된 식사 대접을 못하게 만드는 아빠 때문에 결국 참고 참았던 은하는 폭발하고 말았다.
“왜!!!죽어서까지 밥 한번 편하게 못 얻어 먹게 하냐고!!!대체 왜!!!”
짝/
“이..이X이!!지 애미 닮아 가지고!!!”
결국 짝 소리와 함께 은하의 얼굴이 아빠의 손바닥에 의해 옆으로 돌아가고, 은하는 가방만 챙겨 밖으로 뛰쳐나와버렸다.
***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 그저 정처 없이 걷기만 하던 은하가 도착한 곳은 결국 자신이 일하는 편의점이었다.
“어? 언니! 오늘 쉬는 날이잖아요!”
“어..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야.”
반갑게 맞이 하는 선주에게 억지로 입 꼬리를 끌어 올린 채 인사를 한 은하는 소주 한 병과 단팥빵 두 개를 골라 계산대에 올려놨다.
“언니 왠 소주예요?”
“그냥 좀 마시고 싶어서…”
“무슨 일 있어요?”
“아니..무슨 일은~그냥 좀…”
거듭되는 선주의 관심에 혹시나 상처 난 얼굴이 들킬까 대충 얼버무리고 서둘러 편의점에서 나왔다.
주말 밤 거리는 술에 취한 사람들과 흥에 취한 사람들이 가득했고, 술 집 마다 삼삼 오오 모여 있었다.
은하는 그 사이를 빠르게 빠져 나와 근처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곤 소주를 따서 잔도 없이 바로 병에 입을 대고 들이켰다.
“크으…”
쓴 맛이 입 안에 퍼지자 마자 빵을 뜯어 한 입 떼어 먹은 은하는 또 다시 소주를 벌컥 들이켰다.
“엄마..오늘도 결국 밖에서 나랑 둘이 단팥빵 먹네…”
은하는 새로운 단팥빵을 뜯어 자신의 앞에 놓았다.
“있지 엄마…나 그냥…엄마 따라 갈까?”
그런 은하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쏟아 부었다.
은하는 비를 피하지 않고 그저 오는 비를 몸으로 다 맞으며 앉아 있었다.
“그냥...엄마랑 살고 싶다…쩌어어기 위에서…”
*
“자자! 오늘 여주인공 김배우가 회식 쏜다니까 다들 참석 해!”
“제가 특별히 한우로 준비 했으니까 다들 한.분.도 빠지지 않고 꼬옥~참석해주세요~”
한별은 일부러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우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남우야 오늘 회식 갈..”
“가자 집으로.”
“그래도 여주가 준비한 건데 남주가 가야지 그림이…”
“다음에 내가 회식 준비한다 그래.”
“아니 그래도 이런 자리는…”
남우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윤배우! 오늘 회식 참석할 거지?”
“아…저는..”
“그럼요!감독님 우리 감독님도 참석하시는 자린데 당연히 가야죠~”
감독의 물음에 남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훈이 선수를 쳐 버렸다.
그런 지훈의 모습에 남우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지훈에게 눈치를 줬지만 지훈은 모르는 척 웃어버렸다.
“아이고 당연히 우리 드라마의 기둥이 참석 하셔야지~그럼 조금 있다 봅시다 윤배우?”
남우의 어깨를 툭툭 치곤 촬영장을 빠져 나가는 감독의 뒷모습에 온갖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곤 지훈을 쳐다보았다.
“잠깐 술 한 잔만 받고는 나오자 응?”
지훈은 남우를 어르고 달래 회식 장소까지 데리고 나왔다.
*
“자자 우리 남자주인공 윤 배우 오셨네~이 쪽으로 와!”
짜증스러운 표정을 싹 지우고 환하게 웃으며 회식 장소에 들어 선 남우는 감독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머 오셨네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감독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별은 남우를 보며 비꼬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남들이 보기엔 예쁜 미소 였지만 남우는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식사자리를 거절해서 한껏 비꼬며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임을.
“다 같이 모이는 자린데 당연히 와야죠~”
“아 그럼 저번엔 왜 거절 하셨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별의 말에 감독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남우와 한별을 번갈아 보았고 한별은 이 때다 싶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저번에 제가 대본에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그것 좀 알려달라고 같이 식사 좀 하자고 했는데..글쎄 딱 잘라서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런 거 싫어한다고.”
“아 윤배우 왜 그랬어~ 한별씨 민망했겠네~연기 지도 좀 부탁한건데 너무 매몰차게 굴었다 윤배우~”
감독은 웃으며 남우를 나무랐고 주변 사람들도 남우에게 왜 그랬냐며 질타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같이 모이는 자리엔 오셔서 저 조금 서운했어요.”
대 놓고 한 방 먹이는 한별의 태도에 남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런 식이구나.”
“뭐가요?”
“저번에 석준이랑 드라마 찍었죠?”
“네?네.”
“석준이가 나랑 엄청 친하거든요 석준이한테도 이런 식으로 사람 엿 먹였다면서요?”
“뭐…뭐라구요?”
남우의 말에 한별은 당황한 듯 버벅거렸다.
“단 둘이 밥 먹자고 그러고 거절하면 이런 식으로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남자 배우만 이상한 사람 만들고…”
“무..무슨 소리예요! 난 그냥 다들 선배님이니까 연기 수업 좀 해달라고…”
“아 그리고 저번엔 영화 하나 찍었죠? 주혁이랑?”
“..네..”
“주혁이도 내가 정말 아끼는 동생인데 주혁이도 나한테 김한별씨 조심하라 그러던데 같이 밥 먹자고 유혹해서 스캔들 내서 노이즈 마케팅 하는 걸로 엄청 유명하다면서요?김한별씨 소속사가.”
남우의 말에 주변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남우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네요 죄송합니다 대신에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제 카드 맡겨 놓고 갈게요 마음껏 드시고 감독님 다음 촬영 때 주세요.”
붉게 변한 한별의 얼굴을 못 본 척, 남우는 테이블 위에 자신의 카드를 올려 놓고 회식 자리를 빠져 나왔다.
“왜 벌써 나왔어?”
차에서 잠시 졸던 지훈은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에 벌떡 일어났다.
“아 몰라 형 일단 출발!”
놀란 지훈의 물음에 남우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남우의 말에 지훈은 일단 차를 출발 시켰다.
“무슨 일 있었어?”
“아냐 그냥 피곤해서 내 카드 주고 나왔어.”
남우는 지훈에게 뭐라 더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입을 다 물었다.
피곤한 듯 차 시트에 몸을 파묻는 남우의 모습에 지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 비 오네.”
꾸물꾸물 하던 날씨는 금세 후드득 빗방울을 뱉어 냈고 지훈은 조금 천천히 차를 몰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 소리에 눈을 뜬 남우는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남우는 어렸을 적부터 비를 좋아했다.
비 오기 전 나는 비 냄새도 비 오는 소리도, 비 오는 날 특유의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던 남우는 익숙한 뒷 모습을 보곤 창문을 열었다.
“비 들어와.”
“형!나..여기서 잠깐만 내려줘!”
“왜 비 오는데 어디 가게.”
“자..잠깐이면 돼! 얼른!”
다급한 남우의 목소리에 지훈은 공원 근처에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자마자 남우는 뒷 좌석에서 우산을 꺼내 공원으로 뛰어갔다.
*
금세 옷을 흠뻑 적시는 비를 온 몸으로 다 맞으며 은하는 그저 가만히 앉아 술 병을 비웠다.
저녁 때라 기온이 더 내려가 쌀쌀해진 날씨에 체온이 떨어져 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그 자리에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은하다.
그 때 급하게 까만 우산이 은하의 위로 씌워졌다.
“지금 여기서 뭐해요?”
“어?저승사자다!”
급한 나머지 마스크,안경으로 얼굴도 가리지 못하고 온 게 뒤늦게 생각이 난 남우지만 술에 취한 듯 자신을 아직도 저승사자라고 부르는 은하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왜 자꾸 나 따라다녀여?”
“누가 그 쪽을 따라다녀요 여기 지나가는 길에 비 맞으면서 청승 떨고 있길래 도와주러 온거지.”
“저승사자가 사람들도 도와줘요? 와아 요새 저승사자들은 착하다.”
“일어나요 데려다 줄게.”
남우는 조심스럽게 은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 이거 우리 엄마껀데.”
비틀 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은하는 휙 뒤돌아서 벤치에 널브러져 있는 단팥빵을 집어 들었다.
“그거 비에 젖어서 먹지도 못해요.”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거예요…”
은하는 비에 젖은 단팥빵을 자신의 품에 꼭 안아 챙겼다.
“...일단 차에 타요.”
온 몸이 흠뻑 젖어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덜덜 떠는 은하의 모습이 안쓰러운 남우는 일단 서둘러 은하를 차에 태웠다.
“아는 사람이야?”
차 안에 있던 지훈은 은하를 부축해 오는 남우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 아는 사람이야?”
“연예인은 아닌데…?네가 혜연이 말고 아는 여자도 있어?”
“있어 형 담요 하나만 줘.”
“어 뒤에 손 뻗어봐.”
지훈의 말에 남우는 뒷 좌석에 손을 뻗어 담요를 찾아 덜덜 떨고 있는 은하의 몸을 감싸주었다.
“조은하씨 집이 어디예요?”
“집에…가면 안되는데에…”
술 기운과 감기 기운이 몰려 온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난감한 듯 얼굴을 쓸어 내렸다.
“어떡하냐..이 아가씨 집 몰라?”
“어...아 맞다 핸드폰.”
남우는 은하가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휴대폰을 찾았다.
“여깄다.”
언제적 휴대폰인지 다행히 비밀번호 같은 게 걸려 있지 않는 기종이라 남우는 바로 최근 통화기록을 살펴보았다.
“준석..? 남자친군가?”
제일 통화 기록이 많은 준석의 번호를 꾹 누르자 신호연결음이 가고 곧 이어 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은하야.]
“조은하씨 남자친굽니까?”
[네? 아니 뭐 친군데 근데 누구신데 은하 전화를 가지고 계세요?]
“아 저 윤..아니 그냥 공원 지나가던 사람인데 조은하씨가 공원 벤치에 비 맞고 있어서 제가 잠시 차에 같이 있거든요. 근데 조은하씨가 집주소를 알려주지 않아서…”
[거기가 어디예요?]
“여기 한솔공원 사거리에 까만 suv차입니다.”
[금방 갈게요.]
준석과의 통화를 마친 남우는 휴대폰을 다시 은하의 가방 속에 넣어주었다.
열이 오르는 듯 발갛게 달아 오른 얼굴로 잠이 든 은하는 나쁜 꿈이라도 꾸는 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엄마…”
그 모습이 괜시리 안쓰러웠던 남우는 손을 뻗어 은하의 미간을 꾹꾹 눌러 펴주었다.
“이렇게 인상 쓰면 주름 지는데.”
“그 친구라는 사람 오기 전에 너는 뒷 좌석에 가서 숨어 있어.”
“어?”
“괜히 또 이상한 말 나오게 하지 말고.”
“어..어.”
지훈의 말에 남우는 조심조심 뒷 좌석으로 넘어가 마스크를 썼다.
잠시 후,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훈이 문을 열고 나갔다.
“아 저 조은하씨 친군데요.”
“안에서 잠 들었는데 엎고 갈 수 있겠어요?”
“아..네 죄송한데 제 등에 좀 엎혀주시겠어요?”
지훈이 차 문을 열자 마자 남우는 뒷 좌석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은하야. 은하야? 정신 차려봐.”
준석은 세상 모르고 잠든 은하를 흔들어 깨워봤지만 깊게 잠든 은하는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부축해서 등에 업혀 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네 감사합니다.”
지훈이 은하를 부축해 준석의 등에 업혀 주자 준석은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곤 택시를 잡아 탔다.
“이제 갔어 마스크 벗어도 돼.”
“나 못 본거 같지?”
“그 아가씨 업고 가느라 못봤을거야.”
“다행이다.”
“근데 대체 누구야?”
지훈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남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냥…나랑 좀 많이 닮아서 좀 안쓰럽고 그래서 신경 쓰이는 여자.”
죽기살기 프로젝트6화 - 다른 듯 닮은...
6화 다른 듯 닮은…
“으음…”
방 안에 드는 환한 햇살에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깬 은하는 부스스 일어나 습관적으로 물을 찾았다.
항상 자신의 침대맡에 두는 물컵을 손으로 더듬거려 찾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주변을 둘러 보던 은하는 문득 액자에 걸린 준석의 사진을 보곤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어제 일을 떠올리려고 노력한 은하는 벤치에서 저승사자를 만난 것까지 기억해냈다.
“근데…. 왜 준석이 집에 있지…?”
똑똑/
“어? 네…. 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은하는 후다닥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일어났네?”
“어…. 어 준석아 어제는…”
“어제 그 사람 아니었으면 너 큰일 날 뻔했어.”
“어?”
준석의 말에 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람…?”
“어 어제 어떤 남자가 너 차에 보호하고 있다가 나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 그랬거든.”
“너도 그 저승…. 아니 그 사람…. 아니 그게 보여?”
“얘가 무슨 소리야 아직 잠이 덜 깼나?”
은하의 물음에 준석은 잠이 덜 깼냐며 물을 건넸다.
“이거 마시고 잠 깨라.”
준석이 건네준 물을 들이켠 은하는 자신이 저승사자를 본 꿈을 꿨나 싶어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
“오늘은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돌 그룹 리더에서 이제는 어엿한 배우로 성장한 배우 윤남우 씨를 만나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윤남우 씨!”
“안녕하세요. 연예 티비 시청자 여러분 배우 윤남우 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여러분들이 많이 찾아주셔서 조금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하하.”
“요즘 김한별 씨랑 촬영하시고 계시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반응이 정말 좋아요. 기분이 어떠세요?”
“저희 정말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데 그 수고를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우의 인터뷰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훈은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저 리포터 말 많다고 짜증 내던 남우는 카메라 빨간 불이 들어오자마자 뭐든 감사하는 겸손한 배우 윤남우로 변했다.
“천생 배우라니까.”
“윤남우 씨 하면 어머니 얘기가 빠질 수 없죠. 어머니가 최고의 하이틴 스타 출신 배우 정소현 씨잖아요~”
리포터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란 단어에 지훈은 표정을 굳혔다.
“아…저 질문 안 하기로 했으면서…”
지훈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남우를 바라보았지만, 남우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아유 어머니 얘기 하려니까 좀 쑥스럽네요.”
“어머니는 아들이 나오는 드라마 보시고 충고 같은 거 많이 해주시나요?”
“…. 아…. 네 그럼요 매회 모니터해주시고 전화나 문자로 항상 지적도 해주시고 칭찬도 해주시고 그러세요.”
“정말 멋진 모자 사이 같아요. 부러워요. 윤남우 씨.”
“하하.”
“그럼 이쯤에서 이상형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윤남우 씨도 이제 결혼 적령기잖아요~”
제일 싫어하는 질문만 쏙쏙 뽑아서 하는 리포터에 남우는 점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눌러 참으며 최대한 성심성의껏 그리고 빨리 대답을 했다.
“하하 결혼 적령기가 따로 있나요. 좋은 짝 만나면 당장 결혼하는 거죠.”
“어머 팬분들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 거 같아요.”
“하.하.하 팬분들 저한텐 팬분들밖에 없습니다~”
지겨운 인터뷰도 끝이 나고 이제 마지막 인사만을 앞두고 있었다.
“자 그럼 윤남우 씨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 드립니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끝까지 많은 사랑 부탁 드리고 저는 또 다른 작품에서 더 발전되고 더 성숙한 연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배우 윤남우 많이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드디어 카메라 빨간 불이 꺼지고 리포터는 수줍은 듯 몸을 베베 꼬며 남우에게 다가와 사진을 요청했다.
“윤남우 씨 저 개인적으로 정말 팬인데 사진 한 번만…”
좀 전까지 능숙하게 자신을 인터뷰하던 리포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자신의 앞에서 수줍은 소녀 팬으로 변한 리포터의 모습에 남우는 부글거리는 속을 한 번 더 꾹 눌러 삼키고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 할 때 인터뷰도 제….”
“조심히 가세요.”
다음번에 또 인터뷰하러 오겠다는 리포터의 말을 뚝 자르고 대기실로 들어온 남우는 바로 지훈을 찾았다.
***
“형!”
“어…. 어!”
“이제 저 리포터 부르지 마.”
“어…. 그래! 내가 봐도 말이 너무 많아.”
“내가 싫어하는 질문만 해대는데 나 진짜…. 아 새…. 아니 엄마 얘기는 왜 꺼내는데!”
“그래 걔 좀 이상하더라 내가 분명히 하지 말라고 했는데 신입이라 몰랐나 봐.”
“내가 그때 그 남자 리포터 괜찮다고 했잖아.”
“아 그 리포터가 그만뒀다. 그래서…”
“아무튼 다음부턴 저 리포터 부르지 마.”
“그래 알겠어. 배 안 고파? 팬들이 도시락 보냈는데 줄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날이면 그 날은 종일 저기압이 되는 남우이기에 지훈은 최대한 남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그래 다녀와.”
남우는 주변 눈치를 살피곤 방송국 옥상으로 올라갔다.
***
담배 하나 꺼내 입에 물고 잠시나마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던 남우는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인터뷰 봤나 보네.”
액정에 뜨는 어머니 세 글자에 남우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른 채 느릿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접니다.”
[인터뷰 잘 봤다.]
“…. 네.”
[대본이 있었니?]
슬핏 웃으며 비꼬는 듯한 소현의 목소리에 남우는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여자 앞에선 화난 티를 내는 순간 지는 거니까…
“인터뷰에 대본이 있어요?”
[그렇다면 연기 참 잘하더구나 인터뷰에서도.]
“제 직업이 연기자잖아요. 새.어.머.니.”
[하긴 뭐 너와 나 사이 자체가 연기라는 걸 잊었네.]
“제일 중요한 걸 잊으시면 안 되죠.”
[그래 멋진 모자 사이로 보인다고 하니 반은 성공이구나 끊자.]
“네 들어가세요.”
소현, 아니 새어머니와의 통화를 마친 남우는 좀 전보다 더 더러워진 기분으로 옥상에서 내려왔다.
“형 오늘 스케줄 뭐 남았어?”
“화장품 광고지면 촬영 하나 남았는데…”
“그거 내일로 미룰 수 없어?”
“미룰 수는 있지…혹시 통화했어?”
“어 그 여자 항상 내 인터뷰 보고 전화하잖아. 꼴에…. 아니 나름 챙겨주는 엄마인 척 연기하려고…. 아버지 앞에서.”
“…. 그래 내일로 미룰게. 오늘은 가서 쉬어.”
남우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지훈은 이런 날엔 유난히 더 힘들어하는 걸 알았기에 휴대폰을 꺼내 스케줄을 내일로 미뤘다.
“바로 집으로 데려다줄게.”
“고마워 형.”
남우는 차 시트에 깊게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
“으아…. 허리야.”
입고되어 온 편의점 물건들 정리를 마친 은하는 콕콕 쑤시는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은하는 딸랑/하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별 관심 없이 책에 시선을 빼앗긴 은하는 계산대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후다닥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은하는 서둘러 후다닥 책을 옆으로 치우고 물건을 계산했다.
“8,300원입니다.”
카드나 현금을 당연히 내밀 줄 알고 손을 내민 은하는 고개를 들어 손님을 쳐다봤다.
하얀 맨투맨에 핑크색 스냅백을 쓰고 한눈에 봐도 훤칠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은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 저기 손님 계산을…”
“아…. 아! 네 여기.”
강후는 뒤늦게 얼른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은하에게 건넸다.
“8,300원 계산하겠습니다.”
카드를 긁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은하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저기 손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네? 아…. 아뇨!”
나름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자신을 봐도 별 감흥이 없는 은하의 모습에 강후는 괜한 오기가 들었다.
“여기 사인해 주세요.”
사인해달라는 말에 강후는 이제야 자신을 알아보나 싶어 환하게 웃으며 펜과 종이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카드 아까 드렸잖아요.”
“네? 싸인….”
“아 카드 긁었으니까 여기에…”
은하는 손가락으로 카드 기계를 가리켰다.
“아…”
은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강후는 창피함에 휘갈기듯 자신의 이름을 쓰고는 후다닥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편의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후다닥 차에 올라타는 강후의 모습에 매니저 상욱이 물었다.
“어? 아니…”
“왜 또 알아보고 귀찮게 굴어?”
“아니…. 나를 못 알아봐.”
“뭐?”
“아…아냐 형 앞으로 여기 오자 귀찮게 안 해서 좋다.”
“어? 어…. 그래.”
마스크와 안경 없이는 밖을 나가지도 못하는 강후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은하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못 알아보는 척하는 건가? 아닌데 표정 보니까 정말 모르는 거 같은데…티비를 안보나….”
***
집으로 돌아 온 남우는 피곤과 스트레스로 찌든 몸을 침대에 푹 파묻었다.
도시락이라도 꼭 챙겨 먹으라는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남우는 그마저 하기 싫었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있던 남우는 부스스 일어나 서랍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사진 액자를 꺼냈다.
“엄마 잘 지내?”
남우는 유일하게 남은 엄마와 자신이 함께 찍은 사진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우리 송미연 씨 보고 싶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미연의 모습에 남우는 사진을 꼭 끌어안았다.
“엄마 나 그 여자랑 나름 잘 지내고 있으니까…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남우는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미안해…. 엄마…. 당당하게 엄마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못해서…”
남우는 엄마의 사진을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죽기살기 프로젝트7화 - 내가 알게 뭐야
7화 내가 알게 뭐야.
그 날 이후 강후는 자주 사람이 없는 시간에 맞춰서 편의점, 아니 은하를 찾아왔다.
항상 커피나 음료를 사며 계산이 끝나도 가지 않고 은하의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처음엔 별 관심 없던 은하도 자주 보는 사이가 되자 조금씩 강후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3,500원입니다.”
“드라마 같은 거 잘 안 보나 봐요?”
“네?”
“아니 그냥 뭐…”
“드라마 같은 거 볼 시간이 없어서요. 여기 거스름돈 1,500원입니다.”
“와 진짜 신기하다.”
“뭐가요?”
“이렇게 편하게 일반…. 아니 사람들이랑 대화한 거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강후의 표정에 은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못 본 척 포스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며칠째 이 시간에 와서 물건을 사고 한참을 자신의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강후이기에 은하는 오늘도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그때 딸랑/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 여고생 무리 들이 들어왔다.
강후는 서둘러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 쓰곤 나갈 채비를 했다.
“아 이제 가야겠다. 다음에 또 올게요. 아! 그리고 이거는 조은하 씨 꺼.”
강후는 들고 있던 커피 하나를 은하에게 건네곤 여고생들의 눈을 피해 후다닥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헐 대박 지금 나간 사람 서강후 아냐?”
“어디 어디? 헐 맞아! 대박!!! 언니 서강후 봤어요?”
여고생들은 호들갑을 떨며 연신 어머, 대박을 외쳤고 은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유명한 사람이에요?”
은하의 물음에 여고생들은 하던 행동을 딱 멈추고 어이없다는 듯 은하를 쳐다보았다.
“헐 무슨 조선 시대 사람이에요? 서강후 몰라요? 언니 드라마 안 봐요?”
“어? 어…드라마를 잘 안 봐서…”
“아무리 드라마를 안 봐도 요즘 진짜 핫한 연예인인데! 봐요. 언니 여기 커피에도 그려져 있잖아요!”
강후가 은하에게 주고 간 커피엔 잔뜩 멋진 미소를 지은 채 커피를 들고 있는 강후의 모습이 떡 하니 그려져 있었다.
“아…”
***
“오늘 지면 촬영 스케줄 끝나면 이번에 들어갈 영화 대본 리딩 있는 거 알지?”
“어 알아.”
“아 맞다 이번에 광고 같이 찍는 여배우 누군지 알아?”
“손지혜라며 형이 저번에 그랬잖아.”
“아 어젠가 갑자기 바뀌었데 혜연이로.”
“뭐?”
지이이잉//
“혜연이 전화다.”
“아…어.”
남우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남우야 얘기 들었지? 나랑 같이 화장품광고 촬영…]
“어 지금 들었어. 어떻게 된 거야?”
[손지혜가 하기 싫다는 거 내가 하는 거지 뭐~]
“그 말이 아니잖아. 너 저번에 우유 광고도 갑자기 다른 여배우에서 너로 바뀌고….”
[…그래서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지금이라도 다른 여배우 알아봐 줄까?]
“혜연아.”
[나는 그냥…그 여배우들이 싫다는 거 내가 한다고 한 것뿐인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울먹거리는 혜연에 남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하지 말까?]
“촬영장에서 보자.”
혜연과의 통화를 마친 남우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번에도 손 쓴 거…같지?”
“…그렇겠지 우리 소속사는 뭐 하는 거야? 혜연이랑 자꾸 스캔들 나면 좋을 거 없다니까…나도 나지만 혜연이도 이미지 타격 클 텐데 왜 자꾸 엮지 못해서 안달이야 그 소속사는.”
“우리 소속사에서도 대응하긴 했는데…그쪽에선 혜연이가 워낙 강경하게 하고 싶다고 한다고 해서…”
“후우…. 일단 촬영장으로 가자 형.”
***
“안녕하세요. 윤남우 입니다~”
촬영장에 도착한 남우는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대기실로 들어왔다.
“오빠 옷부터 갈아입고 메이크업할게요. 이거 촬영 의상.”
미정이 건넨 파란 정장을 받아 든 남우는 대기실 한쪽에 위치한 탈의실로 향했다.
편안한 옷을 벗고 몸에 딱 맞는 정장으로 갈아입은 남우는 넥타이를 들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미정아 이거 타이 좀.”
“네 오빠.”
항상 남이 매주던 버릇이 있는 남우는 자연스럽게 미정에게 타이 매는 것을 부탁했고, 미정 역시 자연스럽게 타이를 받아 들었다.
벌컥/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혜연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남우와 미정에게 다가섰다.
“뭐 하는 거야?”
“아 잠깐만 미정아 다 됐어?”
“네 오빠 다 됐…”
“비켜 내가 해줄게.”
혜연은 미정을 밀어내고 자신이 남우의 타이의 매듭을 매기 시작했다.
당황한 미정이 남우를 쳐다보자 남우는 나가 있으라며 눈짓을 했다.
“학교 다닐 때도 타이 혼자 못 매더니…”
“혜연아.”
“잠깐만…다 됐다.”
넥타이 매듭을 단단하게 매준 혜연은 남우의 재킷을 살살 털어주고는 환하게 웃었다.
“누구 친군지 아주 훤하다~”
“유혜연.”
“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혜연의 모습에 남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윤남우 씨 유혜연 씨 촬영 들어갑니다!”
“네.”
“네~갈게요~”
***
남우와 혜연이 촬영장 안으로 들어서자 감독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컨셉이 커플인데 두 사람 벌써부터 잘 어울려~”
감독의 말에 혜연이 수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감독님~보는 눈 있으시네! 우리가 좀 잘 어울리죠?”
“둘이 정말 아무 사이 아냐?”
감독의 말에 혜연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수상해~저번 우유 광고도 둘이 찍었지?”
“촬영 안 들어갑니까? 감독님.”
“어어~자자 스탠바이 합시다!”
남우의 말에 감독은 서둘러 촬영 스탠바이를 외쳤고, 남우와 혜연은 촬영장 안으로 들어섰다.
***
강후가 연예인인 걸 은하가 알게 된 이후 며칠간 강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꽤 자주 왔었던 강후 이기에 그가 보이지 않자 은하는 조금 궁금해졌다.
“하긴…. 연예인이라니까…. 많이 바쁘겠지…”
오늘따라 유난히 한산한 편의점에 은하는 준석이 쓰던 중고 노트북을 꺼내 들어 일기를 끄적였다.
매번 메모지나 이면지에 일기나 글을 쓰는 은하를 본 준석이 기어이 자신은 새 노트북을 산다며 자신이 쓰던 노트북을 자신에게 주었다.
은하는 조심스럽게 타자를 눌러 한 자 한 자 글을 써 내려갔다.
그때/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강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어?”
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반갑다는 듯 소리를 냈고 뒤늦게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나 기다렸어요?”
“네? 아…자주 오셨는데 안 오시길래….”
“그동안 촬영 때문에 좀 바빠서…”
“아…촬영…”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이제 알았어요?”
“아…네 죄송해요. 그동안 못 알아봐서…”
“뭐가 미안해요. 나는 나 못 알아봐서 좀 좋았는데.”
“네?”
은하는 강후가 연예인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강후에게서 조금 거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 은하 씨 나 어색하죠.”
“네? 아…. 네.”
어쩐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라는 은하의 모습에 강후는 푸스스 웃었다.
“나 그럼 이제 여기 못 오는데.”
“네?”
“그동안 은하 씨 보러 여기 온 게 나를 연예인 서강후가 아니라 그냥 사람 서강후로 대해줘서 좋아서 온 거거든요. 방송국에 가거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 앞에선 난 연예인 서강후의 가면을 쓰고 하루 종일 살아야 하거든요. 근데 여기 와서는 은하 씨가 나를 모르니까 그 가면을 벗고 은하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강후의 말에 은하는 아…하고 그를 조금 안쓰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 좀 불쌍하죠.”
“네? 아…혹시 사람 마음 읽을 줄 알아요?”
“푸훗…은하 씨 표정에 다 나타나는데 ‘나 지금 그쪽 좀 안돼 보여요’ 라고 쓰여있어요. 얼굴에.”
“아…”
얼른 고개를 숙여 표정을 숨기는 은하의 모습에 강후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자꾸 웃으세요.”
“은하 씨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요.”
“네?”
강후의 말에 은하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버렸다.
“은하 씨 나랑 친구 할래요?”
“네?”
“뭐 싫으면….”
“아니 친구! 좋은데…그쪽 아니 서강후 씨는 연예인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저랑…”
“어어! 나 여기서는 연예인 서강후 아닌데…은하 씨 솔직히 내가 얼마나 유명한지 내 직업이 뭔지 모르잖아요.”
“네? 어…직업은 연예인…”
“연예인도 종류가 많잖아요. 배우도 있고 가수도 있고 개그맨도 있고….”
“어…. 배우 아니에요?”
“어! 정답! 어떻게 알았어요?”
“아…. 저번에 여고생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요.”
“오 이제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겨요?”
“네? 아…”
“푸핫! 그니까 우리 친구 해요 조은하 씨.”
“네? 네…”
은하의 대답에 강후는 커다란 손을 쑥 내밀었다.
“안녕 나는 서강후 나이는 스물다섯 자 이제 은하 씨 소개.”
“어…. 안녕하세요. 저는 조은하고 스물셋…이요.”
“그럼 내가 오빠네요 잘 부탁해요!”
은하는 강후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
드라마 촬영과 영화 대본 리딩까지 연달아 스케줄을 마친 남우는 피곤한 듯 밴에 들어서자마자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오늘도 고생했다.”
드라마의 시청률이 오를수록 남우의 스케줄도 점점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만큼 남우의 몸은 점점 피곤해졌고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촬영장에서 쪽잠을 자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오랜만에 퇴근하게 된 남우는 집에 가자마자 눈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오늘 날짜를 되새겨보던 남우는 눈을 뜨고 벌떡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형 오늘 며칠이지?”
“오늘? 25일.”
지훈의 말에 남우는 서둘러 휴대폰에 입력된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아…”
25일 날짜 밑에 선명하게 ‘엄마 생일’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본 남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무슨 일이야?”
“형 집 말고 엄마 있는 데로 데려다 줘.”
“아…. 오늘 어머님 생신이야?”
“어…. 가다가 근처 편의점이나 마트 있으면 차 좀 세워줘.”
“어 그래…”
잠시 후 편의점 간판이 보이자 지훈이 얼른 차를 세웠고 남우는 모자와 마스크를 챙겨 쓰고 주변을 살펴보다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편의점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남우는 눈치를 보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
“어서 오세…. 어?”
편의점 한편에 있는 음료 코너로 향하던 남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어…”
자신을 보며 아는 척을 하는 은하를 본 남우는 당황한 듯 그 자리에 굳었다.
“저승사자?”
“아…”
급하게 오느라 은하가 일하는 편의점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남우는 아무 말 못 한 채 쭈뼛거렸다.
“저승사자요?”
은하의 말에 강후는 궁금한 듯 물었다.
은하의 앞에 서 있는 강후의 모습에 남우는 후다닥 모자를 더 깊게 눌러 썼다.
‘서강후가 왜 여기 있지?’
“혹시 저 사람 보여요?”
은하는 남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네!”
강후는 남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요새는 저승사자가 다 보이는구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강후의 시선에 남우는 강후의 시선이 최대한 닿지 않는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강후의 물음에 은하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사실…. 저 사람이 저승사자거든요.”
은하의 말에 강후는 푸스스 웃었다.
“오늘은 왜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은하의 물음에 남우는 목소리를 변조까지 해가며 대답했다.
“어…자…잘살고 있나 해서!”
남우의 말에 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요즘 저승사자는 감찰도 나오나 봐요.”
“요…요샌 그래!”
다급했던 남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막 뱉었다.
“잘살고 있으니 다행이네 나…난 이만.”
자신을 바라보는 강후의 시선에 남우는 정체가 탄로 날까 서둘러 편의점을 빠져나와 밴에 올라탔다.
***
“하아…서강후가 왜 여기 있어.”
“왜 빈손이야?”
“어? 어…내가 찾는 게 없어서….”
“어? 쟤 강후 아냐?”
“어…어 맞아.”
“인사했어?”
“어…. 어 빨리 가자 형.”
유리창 너머로 서로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남우의 기분은 이상해졌다.
“둘이…. 친한가…?”
“어?”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남우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입을 막았다.
“아…. 아냐 아무것도!”
죽기살기 프로젝트8화 - 조금씩 서서히...
8화 조금씩 서서히…
딸랑/
“어서오…어? 촬영 늦게 끝났나 봐요.”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던 은하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강후의 모습에 화색을 띠고 인사를 건넸다.
“나 기다렸어요?”
“네? 아…. 그게 아니라 어…그…. 커…. 커피 들어왔어요.”
“푸흐…. 내가 모델로 해서 그런지 커피 완전 잘나가죠?”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은하의 모습에 강후는 못 본 척 자연스럽게 커피 코너로 가서 늘 그렇듯 자신이 그려져 있는 커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계산이요~”
“3,600원입니다.”
계산을 마치자 당연하다는 듯 커피 하나를 은하에게 쑥 내미는 강후다.
“참 신기해요. 새벽마다 이렇게 나와 있는데 졸고 있는 걸 본 적이 없어.”
“이 시간에 자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 몸이 적응한 거 같아요.”
남들이 들으면 다 안쓰럽게 바라볼 법한 이야기를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은하의 모습에 강후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환하게 웃으며 장난을 걸었다.
“부럽다 체력…. 나는 밤샘 촬영하고 나면 너무 힘든데 나랑 바꿀래요?”
강후의 말에 은하는 아무 대꾸 없이 커피만 홀짝 마셨다.
“아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은하 씨 시간 날 때마다 뭐 막 쓰던데…. 뭐 쓰는 거예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은하의 노트북을 바라보는 강후의 모습에 은하는 부끄러운 듯 후다닥 노트북 화면을 껐다.
“어? 뭔데요~ 그러니까 더 궁금하다.”
“어…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는 거 적고…”
“그리고?”
“그냥…짧게 단편 소설 같은 거 쓰고….”
“우와 멋있다. 다 쓰고 나 제일 먼저 보여줘요!”
“아…. 아직 보여주고 그럴만한 건 아니고….”
“여기 있었네! 우리 예비 작가님이~”
강후의 너스레에 은하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럼 은하 씨는 꿈이 작가예요?”
“…. 네 드라마 작가요! 김주혜 작가님같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런 드라마 쓰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내내 소심했던 은하가 자신의 꿈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반짝 빛났다.
“와 진짜요? 그럼 우리 방송국에서 만날 수 있겠네?”
강후의 말에 은하는 순간 언젠가 방송국에서 작가와 배우로 마주하고 있는 강후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미소를 지었다.
“응원할게요. 은하 씨 꿈.”
강후는 본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양손 주먹을 꼭 쥐었다.
난생처음 자신의 꿈을 응원하는 사람의 존재에 은하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학교도 근근이 다녔던 자신에게 꿈이란 단어는 너무도 사치였다.
말 그대로 먹고사는 것이 바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그저 이렇게 앉아 글을 끄적이는 것이 은하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에 자신의 꿈을 응원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강후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싶지 않아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로 뱉은 감사 인사엔 은하의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버무려져 있었다.
눈물을 참는 은하의 모습을 눈치챈 강후는 그런 은하가 마음이 쓰였다.
“그 꿈 내가 이룰 수 있게 조금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네?”
“아…. 아니에요. 어? 손님 온다 나갈게요!”
강후의 말을 듣지 못한 은하가 다시 한 번 되묻자 강후는 후다닥 도망치듯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그런 강후의 모습에 은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몰려드는 손님들에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오늘은 또 뭐 사려고!”
“어? 아니…. 어 그…. 아! 맥주! 맥주 좀 사서 가려고.”
“아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편의점은 가자고 하냐.”
요 며칠 사이 남우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라고 한 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진 않은 채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 후다닥 다시 밴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어…. 사….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남우는 대충 핑계를 대곤 밴에서 내려 편의점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 아니 훔쳐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서강후와 마주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은하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데…. 내 앞에선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더니.”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본심에 남우는 스스로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뭐…. 그래도 죽을 것 같은 모습보단 훨씬 보기 좋네.”
해사하게 웃는 은하의 모습을 뒤로하고 남우는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갔다.
***
“어머 자기 오랜만이다 촬영 왔어?”
“어? 김 작가님!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냈지~이번 주말극 남주 자기 맞지?”
“네 어쩌다 보니 이 감독님이 잘 봐주셔서~”
“저번 미니시리즈 연기 보니까 잘하던데 뭘~”
김 작가의 칭찬에 강후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고 그런 강후의 모습마저 귀여워 보인다는 듯 김 작가의 눈엔 하트가 가득했다.
“김 작가님 차기작에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영광이니까 저 꼭 불러주세요~김 작가님 작품 너무너무 좋아해요. 저~”
“어머 그러면 나는 너무너무 영광이지~ 조연이 뭐야 주연으로 해야지~우리 자기는~”
강후의 말에 김 작가는 강후의 팔을 살짝 터치하며 얼굴을 붉혔다.
강후는 슬쩍 김 작가의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아 맞다 저…. 김 작가님 혹시 막내 작가 안 필요하세요?”
“막내 작가?”
“네 요즘 작가님 정말 유명해 지셔서 엄청 바쁘시잖아요. 그냥 작가님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할 거 같아서…서브 작가님들도 많이 바쁘시니까 작가님 옆에서 케어해주실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구나?”
말꼬리를 늘리는 강후의 모습에 무언가를 눈치챈 김 작가가 슬쩍 떠보자 강후는 애교 섞인 눈웃음을 지었다.
“사실 제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작가님 너무너무 존경한다고 롤모델이라고 해서…혹.시.나. 막내 필요하시면…”
“우리 자기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안 그래도 막내 작가 한 명 필요했거든~ 자기가 아는 사람이면 믿고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제가 꼬옥 다음에 식사 한번 대접할게요~”
“나중에 내 차기작 주인공 해주면 더 좋고?”
“그럼요 저야 너무너무 영광이죠~”
“내일 방송국에서 한 번 보자고 해요~그럼 난 먼저 갈게 자기?”
“네 감사합니다. 작가님~”
김 작가가 자리를 떠나고 매니저 상욱이 강후에게 다가와 슬쩍 물었다.
“무슨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해~김 작가 차기작 나온다던데 주인공 역할 너 준대?”
“아니 뭐…. 아 형 촬영 늦겠다.”
상욱의 물음에 강후는 얼버무리고 서둘러 촬영장으로 향했다.
***
“안녕히 가세요.”
오늘따라 북적이는 손님들에 은하는 손님이 나가자마자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돌렸다.
“하아…”
저녁을 먹기 위해 물을 부어 놓은 컵라면은 이미 불어버린 지 오래였다.
컵라면을 뒤적이던 은하는 딸랑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어서 왔습니다~”
“어? 서강후 씨 오늘은 촬영 일찍 끝났나 봐요.”
“네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저녁 먹고 있었어요?”
은하의 앞에 놓인 컵라면을 보고 강후가 물었다.
“네? 네….”
“나도 컵라면 좋아하는데 같이 먹어요!”
강후는 컵라면 코너에서 컵라면 두 개와 삼각 김밥 그리고 우유까지 각각 두 개씩 잔뜩 들고 와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이걸 다 드시게요?”
“아뇨 은하 씨랑 같이 먹을 건데.”
강후는 은하의 앞에 있던 퉁퉁 불은 컵라면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갔다 버리고 새로운 컵라면을 뜯어 은하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건 은하 씨 꺼.”
“저는 괜찮은….”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요.”
강후는 삼각 김밥을 까서 은하의 입에 물려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매번 이렇게 컵라면으로 끼니 때우는 거예요?”
“아무래도 바쁘니까…따로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자신의 힘든 사정을 남들에게 알리기 꺼리는 은하는 강후의 물음에 말끝을 흐렸다.
“아 맞다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요?”
“음…. 나쁜 소식?”
“나쁜 소식은 이제 내가 편의점에 올 일이 없어질 거 같아요.”
“네? 왜요…?”
“그건 좋은 소식을 듣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 같은데 들을래요?”
“네.”
“이제 은하 씨랑 나랑 방송국에서 만날 거 같아요.”
“네?”
“은하 씨가 좋아하는 김주혜 작가님이랑 저랑 되게 친하거든요.”
“아…”
“근데 마침 김주혜 작가님이 막내 작가를 구한다는데 좋은 사람 없냐고 묻더라고요.”
“네?”
“그래서 제가 은하 씨 추천했어요.”
자신이 먼저 김주혜 작가에게 은하의 얘기를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분명 은하는 그 자리를 거절할 거 같아 강후는 살짝 상황을 바꿔 은하에게 전달했다.
“아…”
자신의 말에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던 은하는 강후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라면만 뒤적였다.
“어…. 혹시 내가 괜한 짓을 한 거예요?”
예상치 못한 은하의 반응에 강후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너무 감사한데…제가 자신이 없어서…강후 씨가 직접 추천한 자린데…혹시…. 제가 강후 씨한테 피해를 끼칠까 봐요.”
방송국에 취직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좋은 기회이지만 강후가 자신을 추천했다는 얘기에 은하는 덜컥 걱정이 앞섰다.
자신의 행동이 공인인 강후에게, 자신을 추천한 강후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 기회가 망설여졌다.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그래도 제가 잘 못 하면…강후 씨가 욕먹을까 봐 그게 너무 걱정이 돼서…”
“가서 배운다고 생각해요. 막내니까 어려운 걸 시키진 않을 거예요 하나하나 배우면서 점점 더 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고 나랑 같이 내일 방송국가요.”
“하지만…”
“약속하는 거예요?”
강후는 은하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잠시 망설이던 은하는 강후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어? 학생들 들어온다. 그럼 내일 한 시까지 방송국에서 봐요! 오면 전화하고!”
“네? 네!”
강후는 여고생들을 피해 서둘러 마스크를 올려 쓰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은하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포스기를 두드렸다.
그때 여고생 무리들이 계산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기요.”
“네?”
“지금 나간 사람 강후 오빠 맞죠?”
따지듯 묻는 여고생에 당황한 은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맞는 거 같은데 강후 오빠가 뿌리는 향수랑 같은 향수 냄새나는데!”
“아…. 저…. 아니에요…. 어…. 매니저라고 하던데….”
은하는 머리를 겨우 쥐어짜네 대답을 했다.
“강후 오빠 맞잖아요! 내가 밴에서 내리는 거 다 봤는데! 둘이 무슨 사인데 강후 오빠랑 그렇게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같이 밥을 먹어요?”
자신을 죽을 듯 노려보는 여고생들에 놀란 은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슨 사이냐고 묻잖아요!!”
“어….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냥…. 어…. 치…. 친구예요. 정말 아무 사이도…”
은하의 말에 여고생은 앞에 놓인 우유를 은하에게 휙 뿌렸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감히 누구랑 말을 섞어? 편의점 알바 주제에!!!”
분에 못이긴 여고생1은 은하의 뺨이라도 때릴 기세로 씩씩거리며 손을 올렸다.
은하는 그 손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눈만 꼭 감았다.
“뭐…. 뭐야!”
당연히 뺨에 알싸한 고통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은하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자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어디서 이런 못된 걸 배웠나 학생들이.”
은하의 눈앞엔 자신을 때리려던 여고생의 손목을 잡은 채 저승사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승사자?”
죽기살기 프로젝트9화 - 더 늦기 전에...
9화 더 늦기 전에…
“형 뭐 필요한 거 없어?”
“하아…. 이유나 좀 들어보자 대체 들어가지 못하는 편의점에 왜 오는 거야?”
“…. 그냥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어서.”
“야 너 안 되는 거 알지?”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절대 안 돼 알겠지?”
“…. 알아.”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라면을 먹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던 남우는 강후가 나가는 것을 보곤 후다닥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여고생 무리가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것을 본 남우는 뒤돌아 밴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이어 은하를 향해 삿대질하고 달려들 듯 협박을 하는 여고생 무리의 모습을 본 남우는 앞뒤 생각 않고 서둘러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 쓰고 편의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디서 이런 못된 걸 배웠나 학생들이.”
“참 꼰대 짓도 가지가지다.”
“아직 꼰대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라 꼰대 짓 더 하고 싶진 않은데…어떻게 경찰에 신고할까?”
“경찰에 신고할 것도 엄청 없나 보네. 내가 이 여자 때렸어요? 어? 근데 혹시 윤…”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은 여고생의 표정에 남우는 고개를 휙 돌린 채 여고생의 팔을 놓아주었다.
“빨리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누가 신고했는지 저기 경찰차…”
때마침 지나가는 경찰차에 남우는 손가락으로 창밖의 경찰차를 가리켰고 여고생들은 놀란 듯 후다닥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하마터면 자신의 정체를 들킬 뻔했던 남우는 여고생들이 나가자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아니 왜 당하고 있어? 화낼 줄 모르나?”
“손님이랑 싸우면 잘리잖아요.”
“내가 안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어?”
남우는 자신도 모르게 은하에게 버럭 화를 내버렸다.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누가 도와달라고 했나?”
“뭐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아 고마워요! 맞지 않게 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상황에 남우까지 자신에게 화를 내니 은하도 짜증스럽게 대꾸하고 말았다.
“뭐…. 그렇다고 그런 걸 바란 건 아니고…”
“오늘도 안 죽고 잘 살아 있나 감시 나온 거예요?”
“뭐…. 겸사겸사.”
“근데 저승사자가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요?”
예상치 못한 은하의 질문에 당황한 남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요샌 옛날하고 달라서 괜찮아.”
“뭐…. 그런가….”
“그럼…. 난 이만…. 얼굴 봤으니까…”
“네?”
“아…. 아니 바빠서 간다고.”
남우는 서둘러 편의점에서 빠져나와 밴에 올라탔다.
“볼 일 다 끝났어?”
“어…. 어 형 가자.”
지훈은 어쩐 지 조만간 편의점 유리창 너머의 저 여자를 자주 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어 왔어요?”
“네…”
생각보다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의 방송국에 은하는 잔뜩 주눅이 들어 버렸다.
“떨려요?”
“네…. 조금….”
“괜찮아요. 내가 같이 갈 건데 뭐.”
강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은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
“어머 자기 왔어?”
“네 은하 씨 인사해요.”
“아…. 안녕하세요. 조은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주혜라고 해요 반가워요.”
“네…. 네 정말 뵙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근데 자기는 우리 얘기 하는데 같이 있을 거야?”
주혜는 은하의 옆에 딱 붙어 서 있는 강후를 보고 물었다.
“은하가 많이 떨린다고 해서 제가 옆에 좀 있어 주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죠 작가님~”
“그래 그럼~은하 씨 우리는 본격적으로 얘기해볼까?”
강후와 주혜 그리고 은하는 셋이 마주 앉아 앞으로 하게 될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후가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는 듯한 기분에 은하는 조금은 편하게 주혜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주부터 출근하는 거로 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자기는 다음에 또 봐?”
“들어가세요. 작가님~”
“하아…”
“긴장했어요?”
“네…조금….”
“우리 앞으로 더 자주 보겠다.”
“그러게요.”
“편의점은 그만둬야 하죠.”
“네…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다 그만둬야 하겠죠….”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이는 은하의 얼굴에 강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만…. 두기 싫어요?”
“아…. 그게…”
사실 은하는 생활비가 제일 먼저 걱정이 됐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보필해야 하고 집세, 생활비 등등 은하 혼자 다 감당해내야 하기 때문에 일의 종류보단 시급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우선은 월급을 얼마만큼 받느냐였다.
이런 사실을 강후에게 내색하기 싫었던 은하는 그저 입을 다시 다물었다.
“말해주기 곤란한 얘기예요?”
“죄송해요….”
“은하 씨가 뭐가 죄송해요~”
“…. 그래도….”
“강후야 촬영 들어가야 해!”
“금방 가요 형! 은하 씨 나 촬영 때문에 먼저 들어가 봐야 하는데 은하 씨 혼자 갈 수 있죠?”
“네 얼른 들어가세요.”
“이따 연락할게요~”
“네!”
***
집으로 돌아온 은하는 술병이 이리저리 뒹구는 거실을 가만히 바라보다 푹 한숨을 쉬며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널브러져 있는 술병과 그 옆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은하는 마치 자신의 처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한 병 두 병 술병을 치우던 은하는 결국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마저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 울음을 삼키던 은하는 결국 집에서 뛰쳐나왔다.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린 은하는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제는 조금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저런 아버지의 모습에 적응될 법도 한데…다시 힘들어졌다.
은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서러움을 토해냈다.
***
“수고하셨습니다.”
영화 첫 촬영이 끝난 남우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밴에 올라탔다.
“고생했어. 바로 집으로 가지?”
“어….”
“아 맞다 혜연이한테 전화 왔었는데.”
“다음에 하지 뭐.”
“여러 번 왔었어.”
“하아….”
지훈의 말에 남우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혜연의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가기도 전에 애교 섞인 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남우야~촬영 끝났어?]
“어….”
[많이 피곤한가 보다…. 내가 괜히 전화한 거야…?]
“…. 아냐….”
[엄마가 너 좋아하는 약식 잔뜩 만들었는데 너 갖다 주라고 해서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아…. 어머님이….”
[시간 맞춰서 집으로 갈게~]
“다음에 주면 안 될까? 나 오늘은 좀 피곤해서 바로 쉬고 싶은데….”
[며칠 지나면 맛이 없는데…그냥 이것만 주고 가면 안 돼?]
“그럼…경비 아저씨한테 맡겨 놔줘…찾아갈게.”
[야 윤남우 너 너무하다…너 얼굴도 볼 겸 간다는 건데…]
“미안해 혜연아.”
[..치…. 알겠어. 오늘은 이거 경비 아저씨한테 맡겨 놓고 갈게…엄마가 너 보고 싶데.]
“다음에 찾아뵌다고 전해드려.”
[알겠어. 밥 꼭 챙겨 먹고 건강 챙기고 내가 준 비타민 잘 챙겨 먹고 있지?]
“하아…. 어…. 잘 챙겨 먹고 있어 다음에 보자.”
혜연과의 통화를 마친 남우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 좀 붙여.”
“어….”
남우는 지친 듯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공원을 지나치던 남우의 시선 끝에 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몸을 들썩이고 있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서둘러 차를 세웠다.
“형! 잠깐만!”
“어? 왜?”
“잠깐만!”
지훈이 차를 세우자마자 남우는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 쓰고 은하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조…은하 씨?”
“저…. 끅…. 저….”
자신이 옆에 앉자마자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는 은하의 모습에 당황한 남우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서 너무도 서럽게 눈물을 쏟아 내는 은하가 안쓰러워 보여 남우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한참을 남우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 낸 은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남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죄송해요….”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온 은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고 눈물은 꼭 감추는 은하인데 이 남자, 아니 저승사자 앞에선 항상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왜 내가 볼 때마다 그렇게 울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때 나 데리고 갔으면…이렇게 안 힘들잖아요.”
강후와 있는 은하의 모습을 보며 이 여자가 다시는 그런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남우다.
하지만 왜…항상 자신의 앞에선 이런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남우는 한편으론 화도 났다.
“어차피…달라질 것 없는데…꿈 갖는 것조차 사치인데…꾸역꾸역 살면 뭐해요…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조차 …나한텐 꿈인데…”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괜스레 마음이 아렸다.
“내가 하고 싶은 거…할 기회가 왔는데…돈 때문에…망설이게 되고…생활비 걱정이 먼저 되고…남들은 용돈을 벌어서 쓰는데…나는 생활비를 벌어야 하잖아요…”
남우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은하에겐 위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그저 아무 말 없이 은하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러다가…정말 꿈 한번 못 꿔보고…이대로…아빠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죽을까 봐…그러면 너무…. 비참하잖아요…나도 사람인데…나도 나만의 인생이 있는 건데…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한번은 하고 죽어야지…”
“그럼 해봐.”
“…. 네?”
“은하 씨가 하고 싶은 거 해보라고.”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너 스스로 지금 너를 가두고 있잖아.”
“……”
“아빠 때문에 집안 사정 때문에…핑계 대면서 스스로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거잖아.”
남우의 말에 은하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더 늦기 전에 한번 저질러봐.”
***
“또 조은하 씨 만나고 온 거야?”
“…어.”
은하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밴에 올라탄 남우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자꾸 자신의 눈에 띄는 은하를 보며 처음엔 그저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은하의 모습을 보며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점점 은하가 안쓰러워 지고 가여워 보였다.
“동정심…. 인 건가….”
한낮 동정심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자신의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남우는 점점…은하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봐 버렸다.
“큰일 났네…”
죽기살기 프로젝트10화 - 각자의 위로
10화 각자의 위로.
“은하 씨!”
“어…. 강후 씨 촬영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 은하 씨 첫 출근이니까 축하해주려고요~”
남우의 말을 듣고 은하는 정말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모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방송국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은하의 옆에 강후가 든든하게 지켜 주었다.
“엄청 떨리네요…”
“잘할 수 있어요.”
은하는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춤에 쓱쓱 닦아내곤 주혜가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똑똑/
“네.”
“어…. 저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한…”
“들어와요.”
은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혜와 서브 작가 몇 명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일제히 은하에게 시선을 두었다.
갑작스러운 주목에 당황한 은하는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앉아요.”
“아…. 네.”
주혜의 말에 은하는 쭈뼛쭈뼛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강후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주혜에 은하는 잔뜩 긴장했다.
“이쪽은 서브 작가 송서희, 김지수.”
“안녕하세요. 송서희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조은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김지수예요.”
“안녕하세요. 조은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는 이만 하고, 자 이제 회의하자.”
주혜의 말에 지수와 서희는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은하 역시 가방에 챙기고 다니는 메모지와 펜을 슬그머니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 막내는 잠깐 나가서 커피 좀 사 올래?”
“네?”
“일 층에 카페 하나 있거든 아이스 아메리카노 석 잔만 부탁해 아! 막내도 한 잔 사 마시고.”
“아…. 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은하는 조용히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1층으로 향했다.
***
“김주혜 작가 드라마?”
“어 오늘 미팅하고 대본 리딩 좀 해보자고 하네.”
“상대역이 주소연이라고 했지?”
“어 그게…”
“왜?”
“어…김주혜 작가가 혜연이 예뻐하잖아. 이번 드라마 뮤즈가 혜연이였데….”
“근데 왜 주소연을 캐스팅했어?”
“아 처음에 혜연이가 거절해서 주소연 캐스팅했는데 혜연이가 다시 자기가 꼭 해야 한다고 해서….”
“그럼 나도 안 한다 그래…. 혜연이랑 자꾸 엮이는 거 싫다니까.”
“엮이기 싫다고 좋은 작품 놓칠 거야?”
지훈의 말에 남우는 짜증스럽게 앞에 놓인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이번 작품 정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더라 알잖아. 김주혜 작가 시청률 보증 수표인 거.”
“…대본은 나왔어?”
“여기 1회 대본.”
남우는 지훈이 건넨 시나리오를 집중해서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술술 읽히는 시나리오에 남우의 마음이 흔들렸다.
“혜연이랑 호흡은 잘 맞을 거 아냐 그럼 이번 드라마 대박은 그냥 보장 돼 있는 거라니까 스타 작가와 요새 한창 뜨는 배우 윤남우의 만남 게다가 뮤즈가 유혜연 이러면 딱! 뭐 끝난거아냐?”
“그건 그렇지…”
“그럼…. 하는 거로?”
“아 그게…”
“좀 쉬었다 올라와 바로 미팅하게.”
“드라마국 회의실?”
“어 김주혜 작가 위에서 회의 중이야.”
“하아…알겠어.”
지훈은 올라가고 카페에 혼자 남은 남우는 시나리오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캐릭터도 훨씬 좋고, 내용도 꽤 흥미로워 배우들이 연기로 표현만 잘해준다면 정말 대박도 칠 수 있을 만한 대본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주세요.”
“만삼천 원입니다.”
“여기 카드.”
한참 대본에 빠져있던 남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조…은하?”
남우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이름에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커피를 받아 가는 여자는 은하가 맞았다.
“여기에 왜…?”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후다닥 대본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듯 금세 커피를 받아 들어 나가는 은하의 모습에 한숨 돌린 남우다.
***
똑똑/
“들어와요.”
“여기 커피….”
“고마워 아 근데 어떡하지…? 회의실에 몇 명 더 올 거라서…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만 더 부탁해?”
“네? 아…. 네.”
커피를 넘겨주자마자 다시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주혜의 말에 은하는 다시 터덜터덜 카페로 향했다.
***
멍해졌던 정신을 차리고 회의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남우는 자신의 옆에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은하의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겉으론 티를 내지 못한 채 고개만 돌렸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지 양손에 있는 커피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고 있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 줘요?”
어차피 매번 은하를 볼 때마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남우는 대범하게 먼저 말을 걸었다
“네? 아니 괜찮아요.”
자신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는데도 은하는 별 관심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로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된 남우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남우는 김 작가가 있는 회의실 층수인 6층을 누르고 은하를 바라보았다.
“아…. 저도 6층 가요.”
몇 층을 가냐고 묻는 듯한 남우의 표정에 은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6층을 간다는 은하의 말에 남우의 마음속엔 수십 가지의 질문이 퐁퐁 떠올랐지만 애써 입술을 꼭 깨물어 질문을 막았다.
6층에 도착하자마자 은하는 서둘러 총총걸음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저 커피…”
“고마워 은하야 저기 앉아.”
드디어 심부름이 끝났다는 생각에 은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좀 있으면 배우들 올 테니까 좀 기다리자.”
“근데 작가님 민선우 역할은 서강후 씨가 확정된 거죠?”
“응 이건 강후 아니면 못해.”
“그럼 윤남우 씨만 확정되면 바로 대본 리딩 들어가면 되겠네요.”
“응.”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남우와 혜연이 동시에 들어왔다.
“아유 우리 윤 배우님 혜연 씨 왔어요?”
주혜는 벌떡 일어나 남우와 혜연을 맞이했고 서희 지수 그리고 은하도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시나리오는 어땠어요?”
“…. 좋더라고요. 스토리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쭉쭉 읽히는 게…”
“아휴 그렇게 봐주니까 너무 감사하네요~”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던 남우는 한쪽 구석 자리에 앉은 은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막내 작가예요 인사해요. 은하 씨 윤남우 씨 알죠?”
주혜의 소개에 은하는 엉거주춤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조은하라고 합니다.”
“아…. 막내 작가….”
“아 그리고 여기도 알죠? 혜연 씨.”
“아…. 안녕하세요. 조은하….”
“인사는 거기까지 해요 저 앉아도 되죠?”
“어어 그럼 앉아 앉아요. 남우 씨도.”
“네.”
배우들도 자리를 잡고 앉자 지수가 커피를 배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단 읽어보고 아 혜연 씨랑 남우 씨랑은 친하니까 둘은 케미 장난 아니겠다~”
“아니 뭐…”
“그럼요~주인공 커플 케미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작가님~”
똑똑/
잠시 후, 문을 열고 강후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얼른 와서 앉아~”
강후는 꾸벅 인사를 하며 슬금슬금 은하의 옆으로 향했다.
“어 막내는 이제 나가 봐.”
“네?”
“배우들 대본 리딩하는데 굳이 있을 필요 없어 나가서 좀 쉬고 있어.”
“…네.”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을 강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은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하아…”
자신이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물론 처음부터 글을 쓰고 내 글을 인정받고 이러는 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배울 기회는 줄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자신을 마치 심부름꾼 취급을 하고 아예 배제시키는 주혜의 행동에 은하는 맥이 풀렸다.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작가가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도 꽤 큰 은하다.
***
주변을 둘러 보던 은하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다 비상구로 향했다.
그리곤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아침에 올 때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해지면 안 된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긴 은하는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서러움을 꾹 눌러 삼켰다.
“강해져야 해….”
은하는 입술에 하얗게 질릴 정도로 꾸욱 깨물었다.
한참을 혼자서 마음을 다잡고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려던 은하는 갑자기 열리는 문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뭐 해요?”
“네? 아…그냥.”
“그쪽도 여기 아지트로 정했어요?”
“아지트…?”
“여기 내 아지튼데…답답할 때 혼자 시원하게 욕할 수 있는 공간.”
“아…”
“오늘 첫 출근이라면서요?”
“네….”
“엄청 힘들어 보이네…. 얼굴이.”
남우의 말에 은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김 작가님이 원래 그런 텃세가 좀 있어요.”
“저…. 이제 가봐야…”
난감해진 은하는 꾸벅 인사를 하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근데 자기 사람이 되면 엄청 잘해주니까 뭐 일단 버텨봐요.”
남우의 말에 은하는 멈칫했다.
“처음엔 누구나 다 힘들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니지 말라고 조은하 씨.”
“…. 감사합니다.”
어쩐지 조금은 익숙한 남우의 위로에 은하는 꾸벅 인사를 하곤 서둘러 비상구에서 빠져나왔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다간 정말 울음이 터질 거 같아서 은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
“어? 은하 씨!”
“아…. 강후 씨.”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은하는 바로 앞에서 강후와 마주쳤다.
“무슨…. 일 있어요?”
강후는 어쩐 지 좋지 않은 은하의 안색을 살피곤 물었다.
“아뇨…. 어…. 그냥 좀…. 피곤해서.”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요.”
강후는 은하의 손을 붙잡고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저…. 들어가 봐야 하는데…”
“점심 먹으러 갔어요. 다들.”
“아…”
강후가 은하를 데리고 간 곳은 방송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카페였다.
“형!”
“어 강후야 오랜만이다.”
“형 여기 제일 단 케이크하고 음료로 줘요.”
“옆에 여성분은 여자친구?”
“나 배운데 형~ 사생활 보호 안 해줄 거야?”
“알겠어. 금방 갖다 줄게.”
“저…. 이렇게 막 나와도…”
“되냐구요?”
“네…연예인인데…”
“보다시피 여기는 한적해서 괜찮아요. 사람도 별로 없고 또 사장 형이랑도 친하고.”
“아…”
“유일하게 내가 숨 쉴 수 있는 곳이에요 여기가.”
어쩐 지 씁쓸해 보이는 강후의 표정에 은하는 마음이 이상했다.
“자 여기 케이크랑 음료 나왔습니다.”
혁준은 보기만 해도 달다고 느껴질 만큼 온통 초콜릿으로 코팅된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형.”
강후는 케이크 접시를 은하 쪽으로 밀어주고 포크를 건넸다.
“먹어요.”
“…. 고맙습니다.”
은하는 조심스럽게 케이크 한 쪽을 포크로 떠서 입안에 넣었다.
“어때요?”
입안에 넣자마자 퍼지는 달콤함에 은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맛있어요.”
“다행이다.”
“강후 씨는 안 먹어요?”
“저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네? 근데….”
“은하 씨 얼굴에 쓰여 있더라고요 ‘나 지금 너무너무 우울하고 힘들어요’ 라고.”
“아….”
“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고 하잖아요.”
“……”
“이건 나만의 위로 방식인데 어때요?”
강후의 말에 은하는 어린아이처럼 강후에게 기대 펑펑 울고 싶어졌다.
울면 약해진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은하는 처음으로 받아 본 마음을 쓸어주는 위로에 꾹 참고 있던 응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은하 씨….”
“…자꾸 이렇게 잘해주지 마요.”
“네?”
“나…. 자꾸 약해지니까…이렇게 잘해주고 마음 써주지 말아요.”
울먹이며 말하는 은하의 모습에 강후는 아무 말 없이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번쯤은 약해져도 돼요. 이제 내가 은하 씨 위로해 줄게요.”
죽기살기 프로젝트11화 - 어떤 마음
11화 어떤 마음.
주혜가 하는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서 은하는 자연스럽게 잡일 담당이 되었다.
“어 거기 막내 여기 와서 유혜연 씨 화장 좀 고쳐줘.”
“네? 제가요? 저는 작가 팀…”
“여기 메이크업 하는 애가 화장실 갔잖아. 아 빨리.”
“아…네.”
은하는 서둘러 팩트를 들고 가 혜연의 앞에 섰다.
“뭐해요. 얼른 해요.”
“네….”
은하는 조심스럽게 분첩을 들고 혜연의 얼굴을 두드렸다.
서툰 은하의 손길에 답답한 듯 혜연은 짜증스럽게 분첩을 빼앗아 들곤 자신이 화장을 고쳤다.
“가봐요.”
“아…. 네 죄송합니다.”
서둘러 촬영장 밖으로 나온 은하는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느라 아픈 다리를 두드렸다.
“많이 힘들죠.”
“어? 강후 씨.”
“다리 아파요?”
“아…. 괜찮아요.”
“여기 잠깐 앉아요.”
강후는 자신의 의자를 빼 은하를 앉혔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은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지만 강후는 은하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쉬는 시간이니까 좀 앉아 있어요.”
자신의 앞에 지키고 서 있는 강후 때문에 은하는 주변 눈치를 보며 그렇게 불편한 휴식을 취했다.
“자 스탠바이! 어이 거기 막내! 여기 대본 좀 갖다 줘!”
“네? 네!!!”
또다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은하는 후다닥 일어나 대본을 챙겼다.
“여기 있습니다.”
“아 막내 가서 커피 열 잔만 사와.”
“열…잔이요?”
“여기 카드.”
“네.”
“전부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 내건 시럽 두 번 펌프 해서.”
“네.”
***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커피 심부름인지 은하는 한숨을 푹 쉬며 근처 카페로 향했다.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열 잔이요.”
주문을 마친 은하는 아무래도 음료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남을 거 같아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렸다.
잠시나마 주어진 온전한 쉬는 시간에 은하는 주변 카페를 둘러 보며 짧은 휴식을 즐겼다.
“아메리카노 열 잔 나왔습니다~”
“네!”
그 달콤함도 잠시 커피가 나왔다는 말에 후다닥 달려가 양손 가득 커피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수고하세요~”
낑낑거리며 카페 문을 열고 나온 은하는 커피가 행여나 쏟아질까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한 손이 가벼워지더니 시원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윤남우 씨.”
“가요.”
“아! 아니에요. 제가 혼자 들고 갈 수 있는데…”
“그렇게 들고 가다가 다 쏟아지면 욕 엄청 먹을 텐데.”
“아…”
“빨리 따라와요.”
남우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갔고 은하는 종종걸음으로 남우의 뒤를 따랐다.
***
“커피 왔습니다.”
“아니 커피를 왜 배우가 들고 와?”
“아…저기.”
“제가 들고 와서 불만입니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맛있게들 드십시오~ 그리고 커피 좀 줄이세요. 건강에 도움될 거 하나 없는데.”
자신의 손에 있는 커피까지 가져가 손수 돌리는 남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하는 남우가 뒤돌아서는 순간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은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남우에게 인사를 했고 남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눈인사 한 번 하곤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
“자자! 오늘 유혜연 씨가 회식 쏜다니까 다들 한 사람도 빼 먹지 말고 참석하도록! 막내들도 포함!”
촬영이 끝나면 집에 가서 잘 생각에 버티고 있던 은하는 뜬금없는 회식 얘기에 힘이 쭉 빠졌다.
한참 망설이던 은하는 선배인 서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선배님 저는 회식에 굳이 안가도…”
“이런 자리는 꼭 가야 하는 거야 그래야 눈도장도 찍지.”
“아…네.”
서희의 말에 끝나고 퇴근하는 건, 물 건너갔다 싶은 은하는 한숨을 폭 쉬며 짐을 챙겼다.
“은하 씨!”
“아 강후 씨.”
“다 끝났죠?”
“네 이거 정리만 하면 다 끝나요.”
“그럼 이거 내가 도와줄게요. 끝나면 같이 가요 회식장소에.”
“네? 아니 이거 제가 혼자 할게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배우가 작가님 좀 돕겠다는데 누가 뭐래요~”
강후는 주변 시선은 상관없다는 듯 팔까지 걷어붙이고 은하를 도왔다.
강후 덕분에 일찍 끝난 은하는 가방을 챙겨 나왔다.
“갑시다~”
강후와 나란히 어깨를 대고 촬영장을 빠져나오는 은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
“강후 오빠!”
그때 한 여자가 강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달려왔다.
“오빠!”
“하아…”
“오빠 왜 내 전화도 안 받…”
“은하 씨 먼저 가 있을래요? 나 잠깐 얘기 좀 하고 갈게요.”
“네? 아…. 네.”
“저 여자는 누구야? 왜 내 전화는 안 받는 건데!”
“목소리 낮춰 여기 방송국 근처야.”
평소와는 다른 차가운 표정으로 여자를 대하는 강후의 모습이 은하는 조금 낯설었다.
“엄마가 오빠랑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 오빠가 전화도 안 받고…”
“전화하지 말랬잖아.”
“오빠!!!”
여자의 째지는 목소리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은하는 흠칫 놀랐다.
잠시 후, 파란 불이 켜지고 은하는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쩐지 은하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슨 사이지…? 연인 사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은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내가 왜 신경 써.”
‘한 번쯤은 약해져도 돼요. 이제 내가 은하 씨 위로해 줄게요.’
귓가에 맴도는 강후의 다정한 목소리에 은하는 뺨을 찰싹 때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어 조은하?”
“그렇게 때리면 아프지 않나?”
“어…. 어!!!”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은하가 비틀거리자 그 모습에 더 당황한 남우가 얼른 은하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아…. 아니 그렇게 갑자기 뒤에서 나오시면 어떡해요….”
“아…. 놀랐다면 미안해요.”
남우가 잡은 팔을 풀어낸 은하는 괜찮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곤 회식장소 안으로 들어섰다.
***
고기 연기로 뿌얘진 시야에 절로 미간을 찌푸린 채 북적북적한 사람들 속에서 겨우 주혜와 작가 팀을 발견한 은하는 조심조심 주혜가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어 은하 씨 왔어?”
“아…. 네.”
“일찍 왔네 생각보다.”
“네…”
서희의 뼈 있는 말에 은하는 슬쩍 눈치를 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어어 우리 주연배우 윤 배우도 왔네~”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선 남우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회식 장소 안으로 들어섰다.
“자자 빈자리에 앉아~”
“네.”
남우는 주변을 쓱 둘러 보다 성큼성큼 구석 자리에 있는 은하의 옆으로 가 앉았다.
남우의 등장에 작가들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윤 배우님 얼굴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보네요~”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긴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윤 배우님 술 한잔 받으세요~”
서희는 눈꼬리를 잔뜩 아래로 늘어트린 채 콧소리를 내며 은하를 밀어내고 남우의 옆에 자리를 차지했다.
순식간에 옆으로 밀려난 은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잔을 기울였다.
“내일 촬영 때문에 술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한 잔만 받아요~네?”
자신의 옆에서 치대는 서희가 귀찮았던 남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한잔 받으세요~”
“남우는 촬영 전에 술 마시면 안 되니까 그 잔 내가 받을게요.”
서희가 술을 따르려는 순간 혜연이 슬쩍 웃으며 남우와 서희의 사이에 떡 하니 앉아 술잔을 내밀었다.
“아…. 혜연 씨.”
“남우 대신에 제가 대신 받아도 되죠. 서희 작가님?”
“아…. 네…. 뭐.”
갑작스러운 혜연의 등장에 서희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은근한 기 싸움에 옆에 있던 은하는 조용히 눈치만 보았다.
“서희 작가가 우.리 남우 팬이었나 봐요?”
“네 윤남우 배우님 나오는 드라마 영화는 다 봤어요.”
오고 가는 말은 다정한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잡아먹을 것 같이 날카로웠다.
“그래서 그렇게 남우 바라보는 눈에 하트가 가득한 거구나~”
“어머 그런가요? 들켰네요.”
“그렇게 눈웃음을 살살 치는데 어떻게 몰라요~”
“네?”
“어머 내가 실수했네 눈웃음이 참 매력적이라고요.”
“…. 아….”
웃는 얼굴로 서희를 깎아내리는 혜연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은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그만하고 네 자리로 가.”
“나 그냥 여기 앉아서 먹을래 그래도 되죠 서희 씨?”
“아…. 네 뭐 그러세요.”
혜연의 물음에 대충 대답한 서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불판에 고기만 뒤집었다.
싸해진 분위기에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애꿎은 고기만 뒤집거나 물잔을 기울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리 와서 앉아 앉아~”
“죄송합니다~”
강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박 감독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자 배우들도 모두 모였으니 우리 모두 드라마 대박을 위해 건배 한 번 할까?”
“좋습니다~”
“모두 술잔 들어 들어!”
박 감독의 말에 모두들 술잔이나 물컵을 들었고, 은하도 조용히 앞에 놓인 물컵을 들으려다 물컵이 빈 걸 확인하곤 물통을 찾았다.
“물 찾아요?”
“아…. 네.”
은하가 물통을 향해 손을 뻗자 남우는 물통을 열어 은하의 물컵에 물을 가득 채워줬다.
“고맙습니다.”
은하의 인사에 남우는 그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자 우리 모두 열심히 해서 SBN 수목 드라마 1위 한 번 해봅시다!”
“시청률 20%!”
“우리 드라마 시청률 대박을 위하여 건배!”
“건배~”
수십 개의 잔이 허공에서 짠하고 부딪혔고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었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은하는 조용히 옆에서 고기를 집어 먹었고, 주혜와 다른 작가들은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자자 작가 팀 앞으로 우리 잘해봐요~ 그런 의미로 술 한 잔씩 받아!”
“앞으로 잘 부탁해요.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작가 팀 한 잔씩 술잔이 돌아가고 드디어 은하의 차례가 다가왔다.
“우리 막내도 한 잔 받아!”
“아…. 네 감독님.”
감독님이 주는 술잔이라 안 받을 수가 없었던 은하는 일단 술잔만 받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안 마셔? 첫 잔은 원샷인데?”
“아…. 감독님 제가 술을 잘…”
“감독이 주는 술인데 못 마셔도 마셔야지~자! 얼른 마셔 마셔.”
박 감독의 성화와 주변의 눈치로 은하는 두 눈 질끈 감고 술잔을 비웠다.
“으으…”
입안에 퍼지는 쓴맛에 인상을 찌푸린 은하는 얼른 물을 들이켰다.
“우리 막내 아직 애기네 애기~ 자! 그런 의미로 한 잔 더!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아…. 전….”
“안 받아?”
“아…. 네….”
은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박 감독은 계속해서 은하에게 술을 권했고 은하는 두 눈을 꾹 감고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
주변 사람들은 안쓰럽다는 듯 은하를 바라보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진 못했다.
“어때? 이제 좀 마실만하지?”
박 감독은 허허 웃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은하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박 감독은 그 이후로도 은하에게 은근한 스킨십을 했고, 은하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 손을 쳐내지 못하고 그저 박 감독이 눈치채지 못하게 벽 쪽으로 몸을 밀착했다.
“자 한 잔 더.”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 줄을 붙잡고 있는 은하의 술잔에 또다시 맑은 술이 채워졌고 은하는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짠!”
“아…. 네네.”
이번 잔도 거절하지 못하고 두 눈을 꾹 감은 채 술을 쭉 들이켜려던 은하는 갑자기 훅 자신의 잔을 낚아채는 손에 어벙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은하 씨 아까 나랑 못다 한 얘기 하러 나갈까요?”
죽기살기 프로젝트12화 -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
12화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
“네?”
“아까 내가 뭐 물어볼 거 있다고 그랬잖아요~”
은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강후를 바라보자 강후는 은하만 보이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 아 네!”
그제야 강후의 의도를 눈치를 챈 은하가 눈치껏 일어났다.
***
두 사람은 식당 뒤쪽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은하는 빨갛게 달아오른 볼이 조금 식어갔다.
“좀 괜찮아요?”
“네 바람 쐬니까 술이 좀 깨는 거 같아요.”
“아 맞다 이거 마셔요.”
강후가 내민 건 숙취해소 음료였다.
“이거 마시면 내일 숙취가 좀 덜 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은하는 캔을 따서 음료를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으으…”
생각보다 훨씬 더 이상한 맛에 은하가 미간을 찌푸리자 강후는 소리 내어 웃으며 사탕을 건넸다.
은하는 얼른 사탕을 까서 입안에 쏙 넣었다.
“머리는 안 아파요?”
“조금? 근데 바람 쐬니까 괜찮아지는 거 같아요.”
“여기서 술 좀 깨고 들어갑시다. 우리.”
“저는 괜찮은데 강후 씨는 안 들어가 봐도 돼요?”
“괜찮아요 나도 사실 은하 씨 핑계 대고 피신 나온 거거든.”
“네?”
은하가 다시 되묻자 강후가 은하의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사실 나도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해요. 더불어 박 감독님도.”
고개를 살짝 돌리면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소곤거리는 강후의 모습에 잘 식었던 은하의 얼굴이 또다시 훅 붉어졌다.
“어? 열나요?”
“네? 아…. 아니요 아…. 수…. 술기운이 다시 오르나 봐요.”
은하는 손 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서둘러 식히기 바빴다.
“날씨가 꽤 선선하네요. 이제.”
“그…. 그러게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온 남우는 벤치에 다정히 앉아 있는 강후와 은하의 모습을 보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해요?”
“어? 윤남우 씨.”
남우의 등장에 은하는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뭘 그렇게 놀라요. 무슨 짓 하다 걸린 사람처럼.”
“네? 무…무슨 짓이요?”
“에이 선배님 무슨 짓 안 했습니다.”
“그래 뭐 그럼.”
“바람 쐬러 나오셨어요?”
“뭐 담배 한 대 피울 겸….”
남우는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냈다.
“그럼 저흰 먼저 들어가 볼게요.”
“어 그래.”
“은하 씨 우리 들어가요~”
“네!”
은하의 어깨를 감싸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강후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 모습을 본 남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저 두 사람.”
*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길고 긴 회식이 파하고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집을 찾아갔다.
“막내 잘 가고 내일 늦지 마.”
“네 작가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마지막으로 작가 팀들도 해산하고 혼자 남은 은하는 새벽 한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걸어가야 하나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던 은하의 앞에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멈춰 서고 창문이 열렸다.
“은하 씨!”
“어? 강후 씨 아직 안 갔어요?”
“은하 씨를 어떻게 혼자 두고 가요~타요 데려다줄게.”
“그래도…. 돼요?”
“그럼요 얼른 타요!”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은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털고 강후의 차에 올라탔다.
***
“벨트 매요.”
강후의 말에 은하는 서둘러 벨트를 찾았지만,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에 더 당황해 헛손질만 반복했다.
“어…이게 왜…”
“잠깐만요.”
갑자기 자신 쪽으로 훅 다가오는 강후에 은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잠시 후 딸깍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따뜻한 향에 은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 하하….”
괜스레 민망해진 은하가 얼른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자 출발합니다~”
강후는 핸들을 부드럽게 꺾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라디오 들을래요?”
“네? 네!”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강후는 라디오를 틀자 때마침 DJ가 선곡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끝 곡 4885님이 신청하신 버스커버스커의 처음엔 사랑이란 게 틀어드리고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어? 내가 좋아하는 노래네! 은하 씨 이 노래 알아요?”
“네…. 저도 이 노래 좋아해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달콤한 음악에 은하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지이이잉//
그때 블루투스에 되어 있는 강후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액정 화면엔 신고은 이라는 이름이 동동 떠 있었다.
액정을 확인한 강후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거절버튼을 눌렀지만 잠시 후 바로 진동이 또 울렸다.
“잠시만요 은하 씨.”
결국, 강후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어.”
잔뜩 가라앉은 강후의 목소리 너머로 여자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 알았어 기다려.”
전화를 끊은 강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리곤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은하 씨 내가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생겨서.”
“괜찮아요. 거의 다 왔어요. 여기서 걸어가면 돼요!”
은하는 미안해하는 강후에게 괜찮다며 웃어 보이곤 서둘러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정말 미안해요. 은하 씨.”
“괜찮아요. 저기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집이에요.”
“조심히 들어가요. 은하 씨 들어가면 문자 한 통 남겨주고.”
“네! 내일 봬요.”
은하가 뒤돌아서자마자 강후의 차는 저만치 떠났다.
거리에 혼자 남겨진 은하는 왠지 모를 쓸쓸한 기분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
이런저런 생각에 거의 꼴딱 밤을 샌 은하는 비몽사몽 한 채로 머리를 대충 틀어 올려 묶은 다음 화장도 채 하지 못하고 서둘러 방송국으로 향했다.
“하…. 안녕하세요.”
“시간 딱 맞춰서 왔네?”
“…. 죄송합니다.”
서희의 따가운 눈총에 은하는 꾸벅 인사를 하곤 조용히 촬영장 안으로 들어섰다.
스태프 몇몇은 어제 회식의 여파로 힘들어 보였지만 제일 많이 마신 박 감독은 언제 술을 마셨냐는 듯 쌩쌩했다.
“안녕하세요.”
“어 서 배우 왔어? 어제 많이 피곤했나 보네 얼굴이 까칠해.”
“아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박 감독에게 꾸벅 인사를 한 강후는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눈인사했다.
그 모습에 은하 역시 꾸벅 눈인사로 답했다.
강후는 은하의 곁을 살짝 스치면서 조그맣게 속삭이듯 물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네 덕분에…”
“근데 왜 문자 안 했어요. 걱정했잖아요.”
“아…피….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서…”
“그래도 잘 들어갔다니까 다행이다 이따 봐요.”
강후는 은하의 어깨를 톡톡 두어 번 두드리곤 촬영준비를 하기 위해 대기실로 걸어갔다.
간간이 하는 강후의 스킨십에 은하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쿵 떨어졌다 돌아왔다.
“작가 팀 막내!! 커피 좀 사와!”
“네…네!! 다녀오겠습니다.”
박 감독의 말에 은하는 혹 여나 빨개진 얼굴이 들킬까 후다닥 뛰어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열 잔이요.”
이제 은하는 꽤나 자연스럽게 커피를 주문하고 잠시나마 주어진 쉬는 시간을 즐겼다.
매일 커피 심부름을 하는 은하가 안쓰러워 보였던 아르바이트생은 은하가 짧은 자유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즐기게 하기 위해 조금 천천히 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익숙하게 캐리어를 받아 든 은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해 있던 은하는 결국 누군가와 부딪혀 한 손에 있던 커피를 모두 쏟고 말았다.
“어…. 어!”
“뭐야!!?”
부딪힌 사람이 혜연이였던 건지 혜연의 핑크색 원피스엔 얼룩이 작게 튀어있었다.
“어…. 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똑바로 안 보고 다녀? 이거 어떡할 거야?”
앙칼진 혜연의 목소리가 방송국 복도에 울렸고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고 수근 거리며 지나갔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은하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정리했다.
“내 원피스는 안 보여?”
“자…. 잠시만요.”
은하는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내 혜연에게 건넸다.
“니가 직접 닦아.”
혜연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은하를 내려다봤고, 은하는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혜연의 원피스를 닦았다.
“이거 안 지워지잖아! 어떡할 거야?”
하지만 커피 자국은 얼룩이 되었고 혜연은 잔뜩 날 선 표정으로 은하를 보며 물었다.
“제…. 제가 새로 사드려야….”
“네가? 참…. 얘 너 이게 얼만 줄 아니?”
“얼마…”
은하의 물음에 혜연은 성큼 다가와 은하의 앞에 섰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은하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속삭였다.
“네가 1년을 꼬박 일하고 받은 월급보다 더 비쌀걸?”
혜연의 말에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
“어떻게 책임질래? 어?”
혜연은 계속해서 은하를 몰아붙였고 은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무릎 꿇어.”
“네?”
“못 들었어? 무릎 꿇으라고.”
“…저…”
“그럼 이거 물어줄래?”
혜연의 말에 은하는 결국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방송국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잘못 했습니다. 죄송해요.”
은하는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르는 수치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앞으론 없는 사람처럼 다녀 어?”
“…네.”
“이제 일어나.”
일어나라는 혜연의 말에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서 뭐 해?”
“어…. 어 남우야.”
“뭐하냐고 물었어.”
“아…. 아니~여기 얘가 내 원피스에 커피를 쏟았는데…”
“너 말고 조은하 씨 말해봐요.”
“네?”
“어떻게 된 거냐고.”
“아…. 그게 제가…커피를 쏟았는데 그게 유혜연 씨 옷에 튀어서…”
“겨우 그것 때문에 무릎까지 꿇었어요?”
“……”
“겨우 그거라니 남우야 이거 네가 나 데뷔했을 때 처음으로 사준 원피스잖아…근데 여기 이렇게 얼룩이…”
순식간에 차가워진 남우의 표정에 당황한 혜연은 다급하게 남우에게 변명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혜연 너 내가 이런 짓거리 정말 혐오하는 거 알지.”
“남우야.”
“이런 짓 하는 인간은 정소현 내 새엄마만으로도 지긋지긋해.”
“남우야…”
“사과해.”
“어?”
“조은하 씨한테 사과하라고.”
“윤남우!”
“싫어?”
“못해!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럼 내가 대신할까? 조은하 씨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무릎 꿇고?”
“아…. 아니 내가 해 내가 할게.”
남우의 말에 혜연은 은하의 앞으로 다가섰다.
“미안해요. 내가 심했어요.”
“…. 아닙니다. 제가 실수한 건데요….”
“이제…. 됐지?”
“한 번만 더 이런 거 내 눈에 띄면 나 너 안 봐.”
혜연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한 남우는 차갑게 뒤돌아섰다.
“같이 가!”
그런 남우의 뒤를 혜연이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난 뒤, 혜연은 그제야 자신의 재킷에 묻은 커피를 정리하고 촬영장으로 들어섰다.
“막내 커피는 어쩌고 이 꼴로 와?”
“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오다가 커피를 다 쏟아서…”
“막내가 커피 심부름도 못 해? 그럼 널 어디다가 쓰냐.”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죄송합니다만 몇 번을 하는 건지 은하는 이젠 기계적으로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다.
*
“촬영 끝!! 자 수고했어요!”
오늘 촬영분이 끝나고 은하는 오늘도 사람들이 다 나간 빈 촬영장에서 마지막까지 정리를 마치고 가방을 챙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방송국을 걷는 은하의 어깨를 누군가가 톡톡 두드렸다.
“은하 씨.”
“어? 강후 씨 안 갔어요?”
“은하 씨 기다렸지요.”
“저를요? 왜…”
“내가 약속한 거 지키려고.”
“약속이요?”
“짠!”
강후는 짠 하는 소리와 손에 든 케이크 박스를 흔들어 보였다.
“내가 그랬잖아요. 이제 내가 은하 씨 위로해 주겠다고.”
***
강후는 은하의 손목을 잡고 방송국 옥상에 위치한 작은 테라스에 박스를 펼쳤다.
“우와….”
그 안엔 저번에 강후가 은하에게 사줬던 초코케이크와 여러 가지 달콤한 디저트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얼른 먹어요.”
“매번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괜찮으니까 먹어요~”
강후는 은하의 손에 포크를 쥐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은하는 제일 먼저 딸기가 가득 올라가 있는 생크림 케이크를 한입 떠 맛보았다.
“진짜 맛있어요.”
입안에서 살살 녹는 듯한 케이크에 은하는 좀 전에 있었던 서러움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 강후 씨도요.”
은하의 말에 강후는 소리 내어 웃으며 은하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강후의 따뜻함과 다정함에 은하는 마음이 또 쿵 떨어졌다.
그리곤 확실하게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 정말 주제넘게.’
그 감정을 깨닫는 순간 은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넘지 말아야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기분,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느끼는 그런 아주 안 좋은 기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사랑을 시작한 사람의 좌절감.
죽기살기 프로젝트13화 - 좋아...하는 것 같다
13화 좋아…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시간에 남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요 며칠 계속 밤을 새우거나 쪽잠을 자는 일이 다반사라 정말 제대로 된 숙면이 필요했던 남우다.
지이이잉//
하지만 그 평화로움도 잠시 적막을 깨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짜증스럽게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혜연-
액정 위에 뜨는 혜연의 이름에 거절 버튼을 누르려던 남우는 어차피 끊어봐야 끊임없이 진동이 울릴 걸 알았기에 한숨을 푹 내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잤어? 미안…내가 깨웠나 보네.]
“무슨 일이야.”
[엄마가 오늘 남우 너랑 같이 밥 먹자고 해서~올 수 있지?]
“어머님이?”
[응 엄마가 너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차릴 테니까 꼭 오라는데?]
“아…. 오늘은 말고 나중에…”
[남우야 많이 바빠?]
“아 어머님.”
[우리 남우 먹이려고 내가 갈비찜이랑 잡채까지 했는데 와서 같이 밥 한 끼 먹자~ 얼굴 잊어버리겠어~]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우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
“어머 남우 왔구나~어서 들어와.”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웅장한 혜연의 집은 몇 번 와도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남우다.
벨을 누르고 커다란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혜연의 엄마가 마중 나와 반갑게 남우를 맞았다.
“잘 지내셨어요? 아 그리고 이거.”
빈손으로 올 수 없었던 남우는 오는 길에 백화점에 잠시 들러 과일바구니를 사서 혜연의 엄마에게 건넸다.
“뭘 이런 걸 사와~손님도 아니고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그래도…”
“내가 오라고 할 땐 거절하더니 엄마가 오라니까 오는 거 봐 윤남우 너 정말 이럴 거야?”
“아이고 됐어 됐어. 어쨌든 왔잖아 배고프겠다. 이리 와서 앉아.”
커다란 식탁 가득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한 상 가득 채워진 것을 본 남우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뭘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힘드시게…”
“자주 이러는 것도 아니고 뭐~남우 요새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거 아냐~”
혜연의 엄마는 음식들을 남우 쪽으로 다 밀어주었다.
“엄마, 엄마 딸도 제대로 못 챙겨 먹거든요.”
“너는 집에 와서는 제대로 먹을 수 있잖아.”
“치….”
“남우야 많이 먹어~”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부담스러운 식사가 시작되고, 혜연의 엄마는 계속해서 남우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혜연이랑 드라마 찍는다며 어때?”
“아무래도 다른 여배우들보단 편합니다. 잘 맞고.”
“그치~ 어렸을 때부터 둘이 참 잘 맞았어 첫 방송이 다음 주지?”
“네.”
“엄마 남우 밥 좀 먹게 말 좀 그만 시켜~”
보다 못한 혜연이 말리자 혜연의 엄마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미안 남우야 밥 더 줄까?”
“괜찮아요.”
식사자리가 끝나고 남우는 부엌에서 나가지 않고 혜연의 엄마를 도와 싱크대로 그릇을 옮겼다.
“가서 앉아 있어~이따가 일하는 아줌마가 다 할 거야.”
“아니에요. 소화도 시킬 겸 좀 도울게요.”
결국, 끝까지 혜연의 엄마를 도와 정리를 마친 남우는 거실로 나왔다.
“일하는 아줌마가 다 해주는데 뭐하러…”
“그 아주머니도 힘들잖아. 혼자 하시려면.”
“치…”
“과일 먹자.”
쟁반 가득 과일을 내온 혜연의 엄마는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운 접시에 과일을 깎아 올렸다.
“남우는 여자친구 없어?”
“네 아직은 일하는 게 더 좋아서요.”
“그냥 우리 혜연이랑 잘 해보는 건 어때?”
혜연 엄마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태도에 당황한 남우가 먹던 사과를 쿨럭 뱉었다.
“괜찮아?”
“어…. 어.”
“난 우리 남우 같은 사위 좋은데~”
“아…. 하하.”
남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
“전 이만 가볼게요. 식사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어머님.”
“다음에 또 놀러 와~알겠지?”
“네 쉬세요.”
“나 남우 배웅해주고 올게~”
남우는 꾸벅 인사를 하곤 혜연의 집에서 나왔다.
“밤엔 추워 들어가.”
“너 가는 것만 보고~”
차에 올라탄 남우는 창문을 내려 혜연에게 인사를 했다.
“간다. 얼른 들어가.”
“남우야.”
“어?”
“많이…. 좋아해 남자로서.”
혜연의 고백에 남우는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알고 있었지?”
“혜연아 너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더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해줘 너에게.”
“나는…널 잃고 싶지 않아.”
“….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혜연의 물음에 남우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자꾸만 문득 떠오르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할게.”
남우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핸들을 잡았다.
“남우야…”
“갈게.”
언젠가부터 자신을 대하는 혜연의 태도가 달라진 걸 느끼는 남우는 사실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남우는 혜연의 마음을 모르는 척했다.
친구로서, 아니 어쩌면 친구 이상으로 정말 소중한 사람이기에 남녀 사이로 발전되어 만약 헤어진다면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 남자가 아닌 정말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기에 남우는 혜연의 마음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남우는 혜연과의 문제보다도 요즘 들어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하는 은하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언젠가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매일 보다시피 하니 더더욱 은하가 신경 쓰였다.
이런 감정을 언제 느껴봤는지, 이게 호감인지조차도 헷갈리는 남우였다.
그 감정을 확인하고 싶어진 남우는 무작정 은하의 동네로 차를 몰았다.
***
“야! 뭐해!! 밥 안 차려?”
오랜만에 맞는 휴식에 조금 늦잠을 자려던 은하의 계획은 아침부터 술에 절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를 버럭 지르는 아빠의 횡포로 산산이 무산 되었다.
“냉장고에 반찬 있고 밥통에 밥 있는데 차려 드실 수 있잖아요.”
“딸X이 있는데 왜 내가 차려 먹어!! 빨리 일어나서 밥 차려!!”
발로 차려고 시늉하는 아빠의 행동에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국을 데우기 위해 가스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상을 차리던 은하는 방에서 들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후다닥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하 씨 나예요.]
“네 강후 씨 무슨 일로…”
[지금 바빠요?]
“네? 아뇨 바쁘진 않은데…”
[그럼 우리 오늘같이 밥 먹을래요?]
강후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은하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을 보곤 서둘러 대답했다.
“네 어디서 만날까요?”
은하는 통화하며 아빠의 앞에 수저를 놓아주었다.
[나 지금 은하 씨 동네…]
식탁에 앉은 아빠는 강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숟가락을 은하에게 집어 던졌다.
“아!!!”
“너 요새 뭐하고 다니냐!! 반찬이 이게 뭐야!!!”
[은하 씨?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놀란 듯한 강후의 목소리에 은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이X이 진짜!! 요새 안 맞았지!!!”
하다 하다 이젠 반찬 투정까지 하며 반찬을 엎어 버리는 아빠의 행동에 은하는 이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참….”
[은하 씨?]
“미안해요. 강후 씨 이따가 다시 통화…”
짝//
결국, 아빠의 손이 은하의 뺨을 내리쳤고, 그 반동에 은하는 휴대폰을 바닥에 떨궜다.
“하….”
“이게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너도 내가 돈 못 번다고 지금 무시하는 거지!!!”
저놈의 자격지심, 열등감은 언제나 없어질는지 매일 같은 레퍼토리에 지쳐버린 은하는 전화를 끊고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치웠다.
“너는 뭐 다를 줄 알어? 너도 나랑 똑같은 피야 이X아!”
자신이 갖고 있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잘근잘근 밟아 버리는 아빠의 말에 은하는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앞만 보고 뛰던 은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우뚝 멈춰 섰다.
“은하 씨!”
“강후 씨…”
“왜 울어요…”
자신의 눈가를 닦아 주는 강후의 모습에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은하다.
“아…. 나 왜 울지.”
울고 있는 걸 깨닫자마자 더 눈물샘이 자극되었는지 강후의 따뜻한 손길에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졌는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은하는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입술 상처 나겠다…울고 싶으면 울어요.”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고 있는 자신의 입가를 강후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자 기다렸다는 듯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펑하고 터져 버린 은하다.
강후는 그런 은하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고 아이 달래듯 등을 살살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
***
은하의 동네에 도착한 남우는 마침 골목 끝에서 울면서 뛰어나오는 은하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은하에게 향하려던 순간 은하를 붙잡아 세우는 강후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섰다.
“하…”
강후의 품에 안겨 서럽게 눈물을 쏟아 내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끼며 조용히 차에 다시 올라탔다.
“맞네…좋아하는 거.”
죽기살기 프로젝트14화 - 나 왜 좋아해요
14화 나 왜 좋아해요?
“죄…. 송해요.”
한참을 강후의 품에 안겨 울던 은하는 뒤늦게 몰려온 민망함에 후다닥 강후에게서 떨어졌다.
“다 울었어요?”
“…. 네.”
퉁퉁 부어 있을 두 눈이 생각 난 은하는 강후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창피해요?”
“네…”
강후는 아직도 울음 끝이 남아 있는 은하의 손을 깍지 껴 꼭 잡았다.
“많이 힘들었나 보다. 은하 씨.”
“…….”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강후의 말투와 행동에 은하는 꽉 다 잡고 있던 마음이 점점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힘들 땐 힘들다고 하고, 울고 싶을 땐 울고 자기감정에 솔직해져야 살기 편해요. 참으면 병 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은하의 손을 강후는 깍지 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자 이제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나 배고파.”
***
집으로 돌아온 남우는 재킷만 벗어 던지고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하아…”
오늘 혜연의 집 초대에 가지 않고 그냥 집에 하루 종일 있었다면 이런 심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심란해진 남우는 애꿎은 베개만 집어 던졌다.
“윤남우 너가 미친 거야…”
처음엔 이상한 사람인가 싶어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마주칠수록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 호기심이 생겼고, 볼 때마다 울고 있는 게 신경 쓰였고 이젠, 옆에 두고 지켜주고 싶었다.
“동정이야…”
애써 동정이라고 최면을 걸었지만 강후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치미는 질투심은 그것이 동정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었다.
자꾸만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남우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곤 맥주를 있는 대로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자야 해 잠을 못 자서 판단 능력이 흐릿해진 거야.”
결국, 그 자리에서 맥주 8캔을 다 비운 남우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새벽 내내 언제 또 아빠가 문을 벌컥 열까 싶어 마음을 졸이며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하품을 하며 집 밖으로 나오던 은하는 자신의 집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고급 승용차에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곧바로 창문이 열리곤 강후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은하 씨!”
“강후 씨?”
“타요!”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강후를 알아볼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은하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여기는 어쩐 일로…”
“나 이 동네에 아는 사람 은하 씨밖에 없는데.”
“그럼 저 보러 오신 거예요?”
“네! 벨트 매요. 우리 지각하겠다.”
“어…. 네.”
일단 지각은 하지 말자는 생각에 은하는 강후의 말을 들었다.
“출발합니다~”
은하가 벨트를 매자 강후는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침 먹었어요?”
“아…. 원래 아침 잘 안 먹어요.”
“뒷좌석에 쇼핑백 하나 있는데 그거 꺼내봐요.”
강후의 말에 은하가 뒤를 돌아 팔을 뻗어 쇼핑백을 집었다.
“여기…”
“그거 은하 씨 거에요 얼어봐요.”
“제 꺼요?”
은하는 조심스럽게 쇼핑백을 뜯어보자 안엔 샌드위치 두 개와 우유 그리고 커피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침 안 먹으면 건강에 안 좋데요. 그거 먹어요.”
“고맙습니다.”
은하는 샌드위치 하나를 먼저 잘 까서 강후에게 건넸다.
“여기.”
때마침 신호가 걸리자 강후는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 은하가 건넨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당연히 손으로 집을 거라고 생각했던 은하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강후의 얼굴에 또 양 볼이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맛있다. 은하 씨도 먹어요.”
하지만 당사자인 강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지 한 번 더 크게 은하가 잡고 있는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네…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하는 허둥지둥 자신의 샌드위치 포장을 까서 먹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요.”
“고맙습니다. 매번…”
“앞으로도 쭉 챙겨 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죠?”
“앞으로도요?”
“네 앞으로도요.”
강후가 하는 행동에 은하는 종종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에게 자꾸 마음이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챙겨주고 신경 써 주는 강후의 모습에 은하는 조금 씁쓸했다.
“무슨 생각해요?”
“어…. 그냥 아무 생각?”
“그 아무 생각에 내 생각도 있어요?”
“네…. 어? 네?”
“푸흐 농담이에요 농담.”
“아 농담…”
은하는 참고 참았던 질문을 큰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서강후 씨.”
“네 조은하 씨.”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좋아하니까요.”
“…. 네?”
자신의 물음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강후의 태도에 오히려 은하가 더 당황했다.
“내가 조은하 씨 좋아하는 거 몰랐어요?”
“저를요?”
“네 조은하 씨를요.”
“아…”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강후의 태도에 은하는 혼자 탄식했다.
자신이 남자로서 강후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강후는 은하 자신을 그저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보는 거구나, 라는 생각에 괜히 혼자 설렜나 싶어 민망해졌다.
“아 물론 여자로서.”
빨간 불에 신호가 걸리자 강후는 은하의 얼굴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로서 은하 씨 좋아한다고요.”
강후의 옅은 갈색빛 눈동자 가득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은하는 그 시선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내가 부담스러우면 천천히 다가갈게요.”
“…왜.”
“네?”
“저를…왜 좋아해요? 강후 씨 같은 사람이 왜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은하의 말에 강후는 급하게 차를 세웠다.
그리곤 벨트를 풀고 은하 쪽으로 몸을 틀어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은하 씨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혹시 그런 마음이 동정이라면 저 괜찮아요.”
자신을 좋아한다는 강후의 말에 은하의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어딜 가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왜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는지…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지만, 은하는 덜컥 겁부터 났다.
“저…여기서 내릴게요.”
강후가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은하는 후다닥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은하 씨!”
강후가 차에서 내려 은하를 붙잡으려 했지만, 은하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강후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려고 마음먹었던 은하다.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마음이니까 혼자서 잘 정리하려고 했는데…
자신을 좋다고 하는 강후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왔던 ‘네 주제를 알라’는 그 말을 은하는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자신의 주제에 맞게 자신의 분수를 알게 행동하자’가 암묵적인 은하만의 인생철칙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조용히 좋아하다 조용히 마음을 접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후의 마음은 감히 욕심도 내지 못했던 은하지만 자신에게 다정하게 잘 해주는 강후의 모습에 아주 약간의 기대감을 가진 적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좋아한다는 강후의 고백에 은하는 도망쳐 버렸다.
자신의 주제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
그 날 이후, 은하는 눈에 띄게 강후를 피하기 시작했다.
“은…”
“저…. 저 화장실 좀…”
“저 은하 씨…”
“어? 자…. 작가님이 부르셔서…”
강후가 다가올 때마다 은하는 갖은 핑계를 대고 강후를 피하기 바빴다.
그리고 오늘 역시 그런 강후를 피해 방송국 비상구에 숨은 은하다.
“하아…”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은하는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어?”
촬영 쉬는 시간에 사람들을 피해 자연스럽게 비상구 문을 열던 남우는 벌떡 일어서 있는 은하를 보곤 멈칫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네.”
“들어오세요. 제가 나갈게요.”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남우를 본 은하는 꾸벅 인사를 하곤 남우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저기!”
“네?”
“그냥 들어와요.”
“네?”
“그쪽, 아니 은하 씨도 쉬러 들어 온 거 아니에요?”
“네 근데 윤남우 씨가 불편하면…”
“안 불편해요. 그러니까 들어와서 쉬어요.”
“뭐…그럼 그럴게요.”
남우의 말에 은하는 다시 비상구 계단에 털썩 앉았다.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우는 어색한 적막함에 남우는 괜히 큼큼 헛기침했다.
“하아…”
본인도 모르게 나온 한숨에 놀란 은하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무슨 일 있어요?”
“…. 어…”
“아니 뭐…말하기 힘든 얘기면 안 해도 되고…”
또다시 흐르는 적막에 은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거 제 친구 얘긴데요.”
너무도 뻔한 이야기의 시작에 웃음이 터질 뻔한 남우지만 꾹 눌러 참고 대답했다.
“네.”
“자기랑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사는 남자가 제 친구를 좋다고 했대요.”
“다른 세계요?”
“제 친구는 그냥 평범,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아인데 그 남자는 어…연예인? 그냥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래요. 근데 그런 남자가 저를, 아니 제 친구를 좋다고 했대요.”
은하의 말에 남우는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친구의 말이라고 하는 건 은하 본인의 이야긴데 은하를 좋아한다는 남자는 강후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어…. 그럼 은…. 아니 친구는 그 남자가 좋데요?”
남우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물었다.
“…. 친구도…. 좋아한대요.”
“아…”
“그런데…친구는 이제 마음 접으려고 노력한대요.”
“…. 왜요?”
“그 친구는 자신의 분수를 너무 잘 알아서…”
가차 없이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은하의 말에 남우는 울컥 화가 났다.
“은하 씨가 어디가 어때서요?”
“네?”
“아니…. 그…. 그 친구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게요….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없는데…. 주제는 알아야 하는 거니까….”
어쩐 지 쓸쓸해 보이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위로해줄 수도 그 사랑을 응원해 줄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이게 자신에게 온 기회 일 수도 있는 건지…혼란스러워졌다.
“친구한테 힘내라고 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 자신을 깎아내리지 말라고, 자신을 훨씬 더 많이 사랑해줄 그런 인연이 꼭 나타날 거라고도 꼭 전해주세요.”
“…네.”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남우의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은하는 어쩐지 조금 위로가 되었다.
“꼭 전할게요.”
“그리고…. 조은하 씨도 힘내요.”
“…고맙습니다.”
뜻밖의 위로에 은하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죽기살기 프로젝트15화 - 꼭꼭 숨어라
15화 꼭꼭 숨어라.
“은하 씨 나랑 얘기 좀 해요.”
“어…. 저기….”
이제 핑계 댈 거리도 생각이 나지 않은 은하가 버벅거리자 강후가 은하의 손목을 잡았다.
“가요 우리.”
“조은하 씨 나랑 오늘 저녁 먹기로 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강후의 손에 이끌려 나가려던 은하의 앞을 막은 건 남우였다.
“은하 씨 윤 선배님이랑 약속 있어요?”
“어…. 네! 맞아요. 저 윤남우 씨랑 밥 먹기로 했어요. 가…. 가요!”
은하는 강후에게 잡힌 손목을 조심히 빼내고 남우의 옆에 다가가 섰다.
“아…. 그럼 다음에 얘기해요.”
강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돌아섰고 은하는 남우와 함께 방송국을 나왔다.
***
“감사합니다.”
강후가 보이지 않자 은하는 남우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곤 집으로 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어디 가요.”
“네? 집에…”
“나랑 밥 먹으러 가야죠.”
“아니…. 그건….”
“내가 은하 씨 난처한 상황에서 구해줬으니까 밥 한 끼 정도같이 먹자는 부탁 정도는 해도 되죠?”
“아…. 죄송해요…”
자신과 남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느낀 은하는 남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조은..!”
은하를 붙잡으려던 남우는 그제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곤 입을 다물었다.
“아…. 윤남우 등X.”
은하에게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한 자신의 행동이 은하에게 부담을 줬을 거란 생각은 못 했던 남우는 그저 은하의 뒷모습만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강후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대 놓고 은하를 챙기기 시작했다.
“은하 씨 여기 앉아요.”
“아…. 아니 괜찮아요. 여기 서강후 씨 자리잖아요.”
“나는 괜찮으니까 앉아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은하의 손을 잡아 기어이 자신의 의자에 앉히는 강후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강후와 은하의 모습에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은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일 해야 해서…”
“은하 씨.”
은하는 최대한 강후를 피해서 다녔지만 강후는 그런 은하를 끈질기게 찾아냈다.
“은하 씨 여기 있었네요. 커피 마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방송국 1층 카페에 앉아 감독님 드릴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강후는 은하의 앞에 떡 하니 앉아 말을 걸었다.
“나는 커피 마실 건데 은하 씨 나랑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가요.”
“아…. 저는 감독님 심부름 온 거라서 금방 들어가 봐야 해요.”
“나랑 잠깐 얘기 좀 해요.”
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하를 붙잡았다.
“다음에…”
“다음에 언제요?”
“네?”
“계속 이렇게 나 피하면서 다음에 언제 이야기해요. 우리.”
“서강후 씨.”
“앉아요. 나는 지금 당장 은하 씨랑 얘기 좀 해야겠어요.”
좀 전과는 다른 강후의 단호한 표정에 은하는 의자를 빼 다시 앉았다.
“나 왜 피해요?”
“피한 적 없는데…”
“정말 나 피한 적 없어요?”
강후는 은하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강후의 올곧은 시선에 은하는 그 시선을 피해버렸다.
“…. 미안해요.”
“내가…. 싫어요?”
“아뇨! 제가 서강후 씨를 왜 싫어해요….”
“근데 왜 나 피해요 예전엔 내가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잖아요.”
정말로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강후의 모습에 은하는 안절부절못했다.
“아…저는 그저 제가 서강후 씨한테 피해가 갈까 봐…”
“무슨 피해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니까요….”
“……”
“서강후 씨가 저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욕 안 하는데요…제가 서강후 씨 좋아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니까…”
은하의 말에 강후는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피한 거예요…이제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은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촬영장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커피를 전달한 은하는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은하 씨는 좋겠네.”
“네?”
갑작스러운 서희의 등장에 은하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 남자 꼬시는 재주가 특출 난 건가?”
“그게 무슨 소리….”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서강후 씨 말야.”
“아 서강후 씨는 그…방송국에 입사하기 전에 조금 알던 사이라…”
“알던 사이?”
“네…. 그냥 조금 아는 사이예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은데?”
“아…. 그냥…. 서강후 씨가 워낙 착하셔서…”
“순진한 거야 순진한 척하는 여우인 거야?”
“네? 저기 선배님….”
“행동 조심해.”
은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서희는 제 할 말만 하곤 은하의 어깨를 세게 치곤 저만큼 가버렸다.
***
“어! 은하야!”
“해님아~!”
오랜만에 해님을 본 은하는 반갑게 달려가 해님을 끌어안았다.
“너는 취직 했다면서 우리한테 연락도 안 하고 우리랑 연락 끊고 살려고 그랬냐?”
“미안…너무 바빠져서 연락을 못 했어.”
준석의 타박에 은하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바빠서 밥도 못 챙겨 먹지 너.”
준석의 물음에 은하는 걱정 끼치기 싫어 서둘러 대답했다.
“아…아니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까칠해.”
“아 잠을 못 자서…”
사실 그동안 계속되는 촬영에 아침은커녕 점심 저녁도 대충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때우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몸무게가 3kg 정도가 쑥 빠져있었다.
“아침이라도 꼭 챙겨 먹고 다녀 엄마가 조만간 들르래 반찬 챙겨 준다고.”
“응…. 매번 받기만 해서…죄송하다…”
“자자! 분위기 왜 이래~우리 오늘은 실컷 마시자~”
축 처지는 분위기에 해님이 나서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모 여기 소주 세 병이랑 맥주 세 병이요~”
“그걸 다 누가 마시려고…”
“걱정하지 마! 우리가 다 마셔.”
해님은 단호한 표정으로 술잔 가득 술을 채웠다.
한 잔 두 잔 그렇게 술잔을 비우던 세 사람은 어느덧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올랐다.
“그래서~ 서강후는 잘 생겼어?”
“어? 어 잘생겼지.”
“그럼 윤남우는 어때? 나 윤남우 팬인데!”
“어 윤남우 씨도 뭐…잘 생겼어.”
“매일 보면 친하겠다 그치!”
“친하긴 뭐…나는 그냥 잡일 하는 막낸데.”
“그래도~매일 보잖아~”
두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하는 해님의 모습에 은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잉//
그때 테이블에 놓인 은하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고 액정엔 서강후 라는 이름 세 글자가 뚜렷하게 찍혔다.
“어! 서강후?”
“어…. 어 잠시만.”
“은하 너 서강후랑 따로 연락도 해?”
“아…그게…그냥 조금 아는 사이라…”
연달아 울리는 진동에 은하는 휴대폰을 탁자 아래로 내려 문자를 확인했다.
-은하 씨 통화할 수 있어요?
-나 은하 씨 목소리 듣고 싶은데…
은하가 뭐라 답장을 하기도 전에 강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잠시 망설이던 은하는 계속 울리는 진동에 서둘러 휴대폰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
“여보세요.”
[어? 전화 받았다…. 나예요. 은하 씨.]
“네 서강후 씨 무슨 일로…”
[조은하 씨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아…”
평소와는 다른 강후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내가 조금 서툴렀나 봐요. 은하 씨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
[부담을 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은하 씨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라는 거…그건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서강후 씨…”
[그런데 은하 씨…. 나한테 기회를 좀 주면 안 돼요?]
“기회요?”
[한 달 아니 이 드라마 끝날 때까지만 내가 은하 씨에게 내 남은 마음을 다 줄 수 있게….]
“강후 씨…”
[은하 씨가 싫다고 해도 나 그렇게 할 거예요.]
강후의 진심에 은하는 마음이 흔들렸다.
은하는 이대로 그냥 강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좋아해요. 은하 씨.]
나도 좋아해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은하는 겨우 그 말을 밀어 넣고 대답했다.
“…. 미안해요.”
은하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은하에겐 사치였기에 감정이 더더욱 커지기 전에 마음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한편으론 서슴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강후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까맣게 죽어버린 액정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하는 한숨을 푹 쉬고 해님과 준석이 있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
“서강후랑 통화한 거야? 어? 뭐래?”
”아…. 어 일 때문에…”
“에이~아닌 거 같은데~혹시…”
“아냐 그런 거.”
“연예인들이랑은 어울리지 마! 다친다 너.”
준석의 단호한 충고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근데 말야, 그걸 아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가는 지 나도 모르겠어….’
은하는 앞에 놓인 소주잔만 연거푸 비웠다.
“야 천천히 마셔.”
*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가아~”
“데려다준다니까.”
“아 얼른 들어가 아줌마 걱정해.”
“너 혼자 어떻게 보내!”
“괜찮아 얼른 가~”
데려다주겠다는 준석을 기어이 집에 보낸 은하는 혼자 집까지 걷기 시작했다.
찬 바람에 술이 좀 깨는 것 같은 기분에 은하는 조금 천천히 걸었다.
“하아~”
어차피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 봐야 아빠라는 사람에게 무슨 욕을 또 얻어먹을지 몰랐기에 아예 공원 벤치에 앉아 새벽까지 기다리기로 한 은하는 공원을 향해 아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아침저녁으론 쌀쌀해진 날씨에 은하는 얇은 가디건을 좀 더 단단히 여몄다.
***
“수고하셨습니다.”
새벽이나 되어서야 끝난 CF 촬영에 피곤해진 남우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요 며칠 계속되는 밤샘 촬영에 고생한 매니저 지훈을 먼저 퇴근시킨 남우는 직접 운전을 했다.
새벽이라 뻥 뚫린 도로를 달리던 남우는 인적이 드문 시간에 거리를 걷고 있는 한 여자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새벽에 혼자 다니네. 위험하게…그것도 여자 혼자…”
걱정되는 마음에 천천히 속도를 줄여 달리던 남우는 그 여자가 은하라는 것을 확인하곤 서둘러 차를 세웠다. 그리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마스크까지 챙긴 채 차에서 내렸다.
은하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할 거란 걸 알았기에 남우는 저승사자인 척 은하에게 다가갔다.
“조은하 씨?”
죽기살기 프로젝트16화 - 두 사람
16화 두 사람, 두 사랑.
“어? 저승사자 씨다!”
멍하니 길을 걷던 은하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이 밤에 혼자 다녀요? 위험하게.”
“저승사자 씨가 있으니까 안 무서운데요. 뭐.”
“술 마셨어요?”
은하의 주변에서 미미하게 나는 술 냄새에 남우가 물었다.
“네 술 마셨어요.”
“술까지 마시고 혼자 다니는 거 엄청 위험한 행동인데.”
“괜찮아요~새벽이라 사람도 없는데요. 뭐.”
“그러니까 위험하죠. 가요 데려다줄게.”
남우는 은하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은하의 표정에 남우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있어요?”
“저승사자 씨.”
“네.”
“저승사자 씨한테라도 털어놓으면 마음이 좀 시원해질까요?”
“말 해봐요. 듣고 잊어버려 줄게.”
“저승사자 씨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은하의 물음에 남우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있어요.”
저승사자라는 가면 속에서 남우는 자신의 진심을 조금 내비쳐보기로 했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어떤 사람…. 인데요?”
남우는 모르는 척 은하에게 다시 질문했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처음으로 제 마음을 온전하게 줄 수 있는 사람.”
은하의 진심 어린 눈빛에 남우의 마음은 다시 한 번 쿵 곤두박질쳤다.
“…아…”
“저승사자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 여자요.”
“네?”
남우의 대답에 놀란 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남우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은하의 두 눈을 바라봤다.
“조은하 씨.”
“네 왜요?”
“나도 뭐 하나 물어봅시다.”
“네 물어보세요.”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나한테 돌릴 수 있을까요?”
“어…”
당황한 듯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는 은하의 모습을 남우는 가만히 바라봤다.
“어…일단 해보는 데까지 열심히 노력해 볼 거 같아요. 저라면.”
“어떻게요?”
“음…그 여자 분 옆에서 계속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제 마음을 다 주고 그래도 안 된다면…포기할래요.”
“…. 그래요.”
“저승사자 씨도 힘든 사랑 하고 있네요.”
씁쓸하게 웃으며 앞서가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조용히 입을 열어 물었다.
“조은하 씨도 많이 힘들어요?”
남우의 물음에 은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 혼자만 마음 접으면 되는 일인데요 뭐.”
“왜…안 된다고만 생각해요?”
“제가 하는 사랑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랑이거든요.”
“행복할 수 없는 사랑?”
“사람들이 축복하는 사랑은 안되더라도 사람들이 비판하는 사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은하의 말에 남우의 마음이 쓰렸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은하의 사랑을 응원을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진 남우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은하의 집 앞에 도착했다.
***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저승사자 씨 또 봐요.”
“조심히 들어가요.”
“아 맞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던 은하는 다시 몸을 돌려 남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승사자 씨는 꼭 그 여자분이랑 예쁜 사랑 하길 응원할게요.”
예쁘게 웃으며 두 주먹을 꼭 쥐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자신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 저승사자 씨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크..큼 얼른 들어가요.”
괜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남우는 얼른 들어가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럼 또 봐요.”
은하가 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자리를 지키던 남우는 은하의 방 불이 켜지는 것을 본 후에야 뒤돌아섰다.
*
다음 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송국에 도착한 은하는 전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작가 팀 자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름없이 주혜와 지수, 서희에게 인사를 한 은하지만 세 사람은 평소와 다르게 은하의 인사를 못 본 척 무시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지만, 서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갑작스러운 서희의 태도에 당황한 은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막내가 들어온 게 아니라 어디서 여우가 굴러들어왔네.”
지수는 일부러 은하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비웃으며 스쳐 지나갔다.
“네?”
당황한 은하가 되묻자 지수는 쌩하니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주혜: “뭐해? 커피 안 사와?”
주혜는 평소와 같이, 아니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은하에게 카드를 던져주었다.
그런 주혜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은하는 서둘러 카드를 들고 1층 카페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띵 하는 소리와 문이 열리고 강후와 남우가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 은하 씨!”
은하를 먼저 발견한 강후가 반갑게 아는 척을 했고, 은하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고개만 꾸벅하곤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은하 씨!”
강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은하는 빠르게 닫힘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하아….”
그제야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알게 된 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서희와의 대화 이후,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고 그 이유는 그렇다면 강후가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메리카노 세 잔 주세요.”
커피를 주문하고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리던 은하는 진지하게 일을 그만둘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참 간사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걱정거리는 돈이었다.
방송국에 들어오기 위해 하던 아르바이트를 다 정리했기에 다시 구해야 했고, 그 기간에 돈줄이 끊긴다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집 월세 생활비로 직결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하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은하는 깊은 한숨을 내 쉴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노 세 잔 나왔습니다~”
커피가 나왔다는 말에 밍기적거리며 일어나 커피를 받아 들었다.
***
회의실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은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저…. 커피요.”
주혜: “들어와.”
은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커피를 각자 한 잔씩 놓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서희의 앞에 커피를 놓아 주려던 은하는 서희가 툭 하고 쳐서 들고 있던 커피를 대본에 다 쏟게 만들었다.
“어? 어!”
당황한 은하가 허둥지둥 휴지를 찾자, 서희는 짜증스럽게 벌떡 일어나 은하를 확 밀어버렸다.
그 바람에 은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너 이거 어떡할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나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서희의 모습에 은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회의실에서 나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은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비상구로 향했다.
***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은하는 늘 앉던 계단에 걸터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서러움을 삼켰다.
자신이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유명한 연예인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제가 잘못을 한 것처럼 몰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은하는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상황을 생각 안 해 본건 아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감당해 내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으려고 했고, 밀어냈다.
억지로 좋아하는 마음을 삼켰고, 또 선을 그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 싶은 남자를 피하고, 또 숨었다.
은하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계속해서 피하고 또 피했다.
“흐으윽…”
사랑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울컥한 은하는 결국 조용히 서러움을 토해냈다.
행여나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꽉 깨물며 조그맣게 울음을 터뜨렸다.
두 눈이 빨갛게 짓무를 때까지 눈물을 토해낸 은하는 촬영시간이 다가오자 후다닥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
사람들에게 운 모습을 들킬까 싶어 은하는 하루 종일 고개를 푹 숙인 채 감독님의 지시를 따랐다.
간간이 서희와 지수의 차가운 시선이 은하에게 꽂혔지만, 은하는 못 본 척 꾹 참으며 하루를 버텨냈다.
“자 오늘 촬영 끝!”
드디어 끝날 것 같지 않던 촬영이 밤이 깊어져서야 끝이 났고 은하는 평소보다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촬영장에서 빠져나왔다.
“조은하 씨.”
하루 종일 지친 몸을 이끌고 방송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던 은하는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익숙한 목소리에 잡힌 손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조은하 씨!”
그런 은하를 뒤따라온 강후는 은하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주세요.”
“은하 씨.”
“제발 비켜달라고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목을 잡아 세우는 강후의 태도에 은하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은하 씨.”
“비켜주세요. 제발…”
“일단 차에 타요.”
“비켜주세요…”
“조은하 씨….”
“조은하 씨 뭐해요. 여기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남우는 급하게 차에서 내려 은하의 앞을 막아섰다.
“윤남우 선배님이 어쩐 일로?”
“조은하 씨 뭐하냐고 물었잖아요.”
강후의 물음에도 남우의 시선은 여전히 은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랑 밥 먹기로 했잖아요. 오늘.”
“……”
“윤 선배 말 맞아요. 은하 씨?”
“저번에 못한 식사 오늘 하기로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자신을 향해 있는 두 남자의 시선에 은하는 두 눈을 꽉 감아버렸다.
“윤남우 선배님 왜 자꾸 우리 두 사람 앞에 나타나시는 거죠?”
강후의 날카로운 말투에 남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타이밍이 그렇게 됐네.”
“은하 씨가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윤 선배님이 착각하신 거 같네요.”
“서강후 말 맞아요. 은하 씨? 내가 착각 한 거에요?”
남우의 질문에 은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밥 다음에 먹어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은하는 지친 듯 가방을 어깨에 걸쳐 매고 뒤돌아섰다.
천천히 멀어지는 은하의 모습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사이엔 적막만이 흘렀다.
“조은하 씨 좋아해요?”
그 적막을 깬 건 강후의 비아냥이 섞인 물음이었다.
“……”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왜 저번처럼 뺏어 가려고?”
“서강후.”
“유혜연 씨랑 잘해봐요. 남의 여자한테 눈 돌리지 말고.”
“남의 여자?”
“남의 여자 뺏어 가는 게 취미가 아니면.”
“서강후.”
“작작하라고.”
강후의 차가운 시선을 남우는 담담하게 받아내었다.
“제대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네. 또 윤남우한테 안 뺏기려면.”
죽기살기 프로젝트17화 - 조금 더 가까이
17화 조금 더 가까이.
집으로 돌아온 남우는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자 귓가엔 강후가 한 말이 윙윙 울렸다.
남우는 벌떡 일어나 재킷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냈다.
“잘 지내는 거지 이현아….”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이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우는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나…이제 다른 사람 좋아해도 될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남우는 지갑을 한쪽에 놓아두고 눈을 감았다.
오늘 꿈엔 이현이 나타나서 자신의 물음에 꼭 대답해 주길 바라며…
***
“자! 10분간 휴식!”
새벽부터 몰아치는 촬영에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지친 얼굴로 바닥에 앉아 쉬었다.
“여러분 이것 좀 드세요~”
혜연은 촬영하느라 한 끼도 먹지 못한 스태프들을 위해 도시락을 돌렸다.
“역시 우리 유 배우야~”
스태프들은 도시락 하나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은하 역시 작가 팀과 함께 먹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 후, 작가 팀이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하지만 은하가 다가가도 서희와 지수는 모른 척 자신들끼리 떠들며 은하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
은하는 결국 도시락을 들고 비상구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계단에 걸터앉아 도시락을 뜯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도시락이었지만 은하는 선뜻 젓가락을 대지 못했다.
문득 이러고 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 보이고 뭘 잘못해서 이런 취급을 받고 이렇게 홀대를 받아야 하는 건지 화도 났다.
젓가락을 음식을 뒤적거리던 은하는 아직 한참 남은 촬영 시간을 생각해서 억지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무슨 맛인지도 느낄 새도 없이 그냥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몇 숟갈 떠먹은 게 얹힌 건지 결국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한 상태로 촬영을 마친 은하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밀려오는 토기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도시락을 다 게워낸 은하는 힘이 쭉 빠진 채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
벽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른 은하는 뒤에서 불쑥 나타난 남우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랐잖아요….”
“미안해요. 지나가다가 힘들어 보이길래.”
“아….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안색이 안 좋은데.”
“그냥 좀 체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정말.”
은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남우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작은 친절까지도 차갑게 내쳐 버리는 은하의 모습에 남우는 마음이 쓰라렸다.
***
속을 다 비워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편한 은하는 약국 앞에서 망설였다.
주머니 속에 잡히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만지작거리던 은하는 결국 뒤돌아서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가서 바늘로 따면 내려가겠지…”
어렸을 때부터 웬만큼 아픈 건 참고 삭히는 습관이 들어버린 은하에게 소화제도 사치로 느껴질 뿐이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던 은하는 집 앞에 있는 낯선 인영에 발걸음을 멈췄다.
잔뜩 경계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은하는 가로등에 그 낯선 인영이 비쳐 얼굴이 보이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저승사자 씨?”
***
은하를 그렇게 보낸 게 마음에 걸린 남우는 결국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저승사자로 은하에게 약을 전해주기로 했다.
은하의 동네 약국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려던 남우는 약국 앞에서 망설이는 은하의 모습을 보고 얼른 숨었다.
약을 사지 않고 돌아서는 은하를 본 남우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에게 쓰는 단돈 몇천 원도 아까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뒤돌아서는 은하가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소화제랑 감기약 비타민 아플 때 먹는 약은 골고루 다 주세요.”
“네?”
마스크와 모자로 꽁꽁 싸매고 와 약이란 약을 다 달라고 하는 남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웠다.
“저…이 정도면 됐나요?”
약사는 요령껏 필요한 약들을 담았지만 그래도 커다란 비닐봉지로 두 개가 나왔다.
“뭐…. 다음에 또 사면 되니까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남우는 양손 가득 약을 들고 은하의 집으로 향했다.
***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아…. 그냥…”
“무슨 일 있죠?”
남우는 배우 윤남우 였을 땐 하지 못했던 말을 저승사자라는 가면을 쓰고 은하에게 마음껏 표현했다.
“그냥…직장 다니다 보면…. 힘들고 그렇죠.”
“누가 괴롭혀요?”
남우의 말에 은하는 크게 움찔했다.
“뭐…. 그냥 막내니까 이리 처이고 저리 치이고 하는 거죠.”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수척해요.”
“……”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픈 걸 알아채고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은하는 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을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디 아프구나.”
남우는 모르는 척 은하에게 더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괜찮은데…”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냥…. 참을 만해요.”
하나도 안 괜찮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은하의 모습이 남우는 안쓰럽고 또 답답했다.
“왜 참아요. 바보같이.”
“그래도…. 참아야죠.”
“은하 씨가 뭐 잘못했어요?”
“……….”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참아요. 참기를…”
“그러다 잘리면 어떡해요.”
은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은하 씨가 잘못 하지도 않았는데 뭐라 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잘못된 건데 은하 씨가 왜 잘려요.”
“고마워요…저승사자 씨라도 내 편을 들어줘서.”
은하는 진심으로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는 저승사자가 고마웠다.
“잘못 한 거 없는데 괴롭히면 참지 말고 은하 씨 생각을 얘기해요. 그래야 숨통이 좀 트이지.”
“…네.”
“그리고 이거.”
남우는 손에 있던 봉투를 은하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예요?”
“약이요.”
“약은 왜…”
“누구한테 많이 받았는데 남아서…”
남우는 은하가 그 약을 다시 돌려주기 전에 얼른 뒤돌아서 걸어왔다.
“고마워요!”
다행히 은하는 별 거부감 없이 약을 받아 들었고 남우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막내.”
“네 작가님!”
“너는 오늘 8층 라디오국으로 올라가.”
“라디오국은 왜…”
“서강후 씨가 오늘 라디오 일일 DJ 하는데 막내 작가가 필요하데 너 올라오란다.”
“아…. 네.”
“빨리 올라가 봐 오늘은 거기서 일하고 끝나면 퇴근해.”
“네.”
라디오국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은하는 서희와 지수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섰다.
“이쪽으로 잠깐 올래?”
“네? 저 지금 라디오국 올라가 봐야 하는데.”
“잠깐이면 돼.”
“네…”
은하는 지수와 서희를 따라 방송국 소품실 창고로 향했다.
은하가 소품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지수가 달칵하고 문을 잠갔다.
***
“무슨 일로…”
두 사람은 은하의 주변을 에워싸듯 둘러쌌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소리…”
“이거 보고 나서도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얘기가 나올까?”
서희는 자신의 휴대폰을 은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서희가 내민 휴대폰엔 은하와 강후가 함께 식사하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아…. 이건 우연히 저희 동네에서 만났는데 식사 같이하자고 해서…”
은하의 말에 서희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다음 사진을 넘겼다.
“아 그래? 그럼 이건?”
다음 사진 속엔 은하와 강후가 나란히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물론 사진상으론 다정해 보이는 연인의 모습이었지만 저건 은하가 넘어질 뻔했을 때 강후가 잡아 준 것일 뿐이었다.
“이건 제가 넘어질 뻔한 걸 서강후 씨가 잡아 준 건데요…”
은하의 말에 서희와 지수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방송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방송국 밖에서 자주 만난다? 좀 이상하지 않아 지수야?”
“이상하죠.”
비아냥거리는 듯한 두 사람의 태도에 은하는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뗐다.
“…제가 어떻게 서강후 씨랑 무슨 사이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근데 왜 자꾸 꼬리를 쳐 네가.”
한순간에 꼬리 치는 여우가 되어버린 은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냈다.
“감히 누구를 상대로 네까짓 게.”
서희는 은하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쿡쿡 찔렀다.
한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서희의 행동에 은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잘못 한 거 없는데 괴롭히면 참지 말고 은하 씨 생각을 얘기해요. 그래야 숨통이 좀 트이지.”
지난밤 저승사자 씨가 한 말이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똑바로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선배님.”
“왜.”
“서강후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이제 그만해주세요.”
“그럼 왜 자꾸 사적으로 만나는 건데 어?”
“그런 것까지 선배님들한테 일일이 보고를 드려야 해요?”
“야!”
“저는 계속 분명하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고, 저도 제 주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서강후 씨같이 대단하신 분한테 눈길도 안 주고 있어요. 사적으로 몇 번 만난 건 집이 같은 방향이라 몇 번 마주친 거고요 같이 밥을 먹은 건 저번에 말했다시피 방송국에 입사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같이 밥 한 끼 먹었습니다. 근데 제가 선배님들한테 이렇게 추궁당할 만큼 잘못한 건가요?”
“야…. 너….”
매번 당하기만 하던 은하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대꾸를 하자 서희는 당황했다.
“그리고 제가 서강후 씨랑 사귄다고 해도 그건 선배님들이 참견할 바가 아니지 않나요?”
“이…. 이게 정말!”
“그럼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은하는 벙쪄 있는 두 사람을 지나쳐 소품실에서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걸음 한 걸음 소품실에서 멀어진 은하는 소품실이 보이지 않을 때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용기 내서 자기 생각을 똑바로 이야기했다.
***
“하아…”
어젯밤 저승사자가 한 말처럼 정말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매번 잘못한 것도 없이 당하고 속으로 수없이 아픔을 삼키기만 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잘했어…잘한 거야.”
옆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른 은하는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일어나 라디오국으로 향했다.
죽기살기 프로젝트18화 - 과거의 족쇄
18화 과거의 족쇄.
“안녕하세요.”
드라마 촬영장과는 사뭇 다른 라디오 녹음실 분위기에 은하는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어! 주혜네 막내구나! 안녕~”
쭈뼛거리는 은하를 발견한 라디오 프로그램 메인 작가 수현이 활짝 웃으며 먼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조은하입니다.”
“잘 왔어~오늘 잘 부탁해~”
날카로워 보이는 주혜와는 다른 좀 더 부드러워 보이는 수현의 인상과 태도에 은하는 처음으로 마음을 조금 놓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하는 여기서 이거 사연 정리 좀 부탁해~”
“네!”
은하는 수현의 옆에 앉아 라디오국 앞으로 온 엽서를 정리했다.
요즘엔 거의 다 문자나 인터넷으로 사연을 접수하는 것 같았는데 수현이 하는 프로그램엔 아직도 색색의 엽서들이 매일 배달 되어 왔다.
“은하 씨도 엽서 오랜만에 보지?”
“네 초등학교 다닐 때 이후로 잘 보지 못했어요.”
“그치 나는 매일 봐도 항상 새로워.”
수현은 엽서 한 장 한 장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나도 이 프로그램 들으면서 작가 꿈 키웠거든.”
“우와 진짜 멋있어요…”
“한 장 한 장 다 소중한 사연들이라 웬만하면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거든, DJ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이걸 다 보관하세요?”
“우리 프로그램 그렇게 인기 많지 않아서 하루에 백 장도 채 안 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손편지 쓰는 거 귀찮아하잖아.”
수현과 나란히 앉아 사연을 정리하던 은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강후 일찍 왔네.”
“스케줄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은하 씨도 빨리 올라왔네.”
“아…. 주혜 작가님이 오늘 여기로 출근하라고 하셔서…”
은하는 강후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네…. 먹었어요.”
“안 먹은 거 같은데 누나도 아침 안 먹었죠?”
“나야 뭐 항상 새벽에 나오니까 못 먹지.”
“이럴 줄 알고 내가 샌드위치 사 왔죠~”
강후는 샌드위치 가게 로고가 박힌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을 먹어야 방송도 잘 되죠~”
“오 역시 우리 강후 밖에 없네.”
수현은 샌드위치 한 개를 받아 들곤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자 은하 씨는 이거 먹어요.”
강후가 샌드위치 포장을 까서 은하에게 건넸지만, 은하는 거절했다.
“저는 속이 좀 안 좋아서…”
“많이 아픈 거예요?”
강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보았고 은하는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약 먹었어요?”
“네…. 먹었어요. 아 작가님 사연 정리 다 했는데 여기다가 둘까요?”
강후의 관심에 은하는 자연스럽게 수현에게 말을 걸어 화제를 돌렸다.
그런 은하의 태도에 강후는 잔뜩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라디오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강후를 이렇게 대하는 은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거리를 둬야 하는 은하의 마음은 더더욱 괴롭고 힘들었다.
“자 방송 시작 5초 전, 5, 4, 3, 2, 오프닝 멘트.”
“안녕하세요. 박주현의 모닝커피 타임 일일 디제이 배우 서강후입니다. 길었던 여름이 가고 이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네요. 아침저녁엔 쌀쌀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이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포장마차에서 먹는 따뜻한 어묵 국물이 생각 나는 날씨죠. 이렇게 선선한 바람이 불면 어쩐지 좀 더 쓸쓸해지고 외로워 지고 그러는 거 같아요. 저만 그런 건가요? 하하, 첫 곡으로 저처럼 쓸쓸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곡이죠.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 들려드릴게요.”
오프닝 멘트가 끝나면서부터 강후의 시선은 계속해서 은하를 쫓았고 은하는 열심히 강후의 시선을 피했다.
***
“서강후가 걔를 좋아한다고? 야 말도 안 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촬영장으로 향하던 남우는 문득 화장실 쪽에서 들리는 지수와 서희의 대화 소리에 발걸음을 돌려 코너에 숨었다.
“그쵸 언니 말도 안 되죠. 근데 조명 팀에 소희 걔가 봤대요. 서강후가 막내 손잡고 옥상 올라가고, 촬영 쉬는 시간 내내 막내만 쳐다보고 그랬대요.”
“그 여우 같은 기지배가 어떻게 꼬여 낸 거야?”
“그러니까요! 순진한 척하면서 남자들한테 꼬리나 치고 다니고 걔 윤남우랑도 좀 수상하지 않아요?”
“이 남자 저 남자한테 헤프게 행동하니까…”
“행동하니까?”
남우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은하를 깎아내리던 두 사람은 남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 윤남우 씨가 여기…왜…”
“계속 말해봐요 나도 좀 듣게.”
“아…그…저희 팀 막내가 행동이 좀…”
“행동이 좀 어떻다고요?”
“아…”
남우는 빙긋 웃으며 서희와 지수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남우의 눈빛만 이리저리 피했다.
“요새도 이런 식으로 한 사람 돌려 까고 그러는구나.”
“아…. 아니 그건 아니구요..저흰 그냥…”
“뭐 또 애 한 명 데리고 가서 겁도 주고 뭐 그랬나?”
“네?”
“놀라는 거 보니까 그런 짓도 했나 보네 송서희 씨 김지수 씨 두 분 다 일진 출신이에요?”
“아뇨.”
“저번에도 막내 잡고 있는 거 내가 본 거 같은데.”
“……”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게요, 내가 여기서 두 사람에게 무슨 행동을 했다간 두 사람은 또 조은하 씨에게 화풀이하겠죠?”
“……”
“그런데 한 번만 더 이런 행동 하다가 들키면.”
남우는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선 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땐 두 사람 방송계 쪽엔 발도 못들이게 만들 수 있어요.”
할 말을 마친 남우는 두 사람에게 싱긋 미소를 보이곤 휙 돌아 나갔다.
두 여자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후다닥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
“오늘 수고했어 은하 씨~”
“아녜요 저 오늘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은하는 수현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다면 나야 너무 다행이고 종종 구경하러 와요. 많이 가르쳐 줄게.”
“감사합니다. 저 정말 구경하러 와도 돼요?”
“그럼~당연하지.”
“두 사람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라디오를 마친 강후가 부스에서 나오며 수현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밀치며 물었다.
“왜 질투나?”
“아…. 뭐 질투라기보단…”
“그럼 작가님 저는 먼저 가봐도 되죠?”
“어 그래 오늘 진짜 수고했어요~”
“다음에 또 뵐게요. 안녕히 계….”
“누나 나도 갈게 오늘 수고했어요!”
강후는 후다닥 휴대폰을 챙겨 은하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은하 씨 바로 퇴근하는 거죠?”
“네.”
“그럼 나랑 점심 먹어요.”
“서강후 씨.”
“먹어요. 나랑 점심.”
“싫어요.”
“나…. 이제 진짜 싫어해요?”
“……”
“아니잖아요.”
“좋아하지 않게 노력 중이에요.”
“하지 마요 그 노력.”
강후는 단호한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해야 해요.”
“나 좋다면서요.”
“……”
“나 좋아한다면서요.”
“……”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은하 씨.”
“윤남우 씨?”
“여기서 뭐 합니까 둘이?”
“아무것도 안 하니까 가던 길 가세요.”
“은하 씨 표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가라구요.”
“나도 밥 먹으러 가는 길인데 나도 좀 끼워줘요.”
“형.”
“오랜만에 듣네! 형 소리.”
“은하 씨 우린 밥 먹으러 가요.”
강후는 남우를 무시하곤 은하의 손을 잡으려 했다.
“너가 이러면 힘들어지는 건 은하 씨야.”
남우의 말에 강후는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적당히 해 사람들 보는 앞에서.”
“형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안되지 않나?”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신경전에 은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드라마 팀 퇴근 시간이야 다른 데 가서 얘기해.”
“가요 은하 씨.”
“갑시다. 조은하 씨.”
“아…. 아니 저는…”
결국, 은하는 두 남자 사이에 껴서 식당으로 향했다.
***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외관의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은 자연스럽게 세 사람을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여깁니다.”
직원이 방문을 열고 강후와 남우는 자연스럽게 방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들어와요.”
“네…. 네.”
은하가 쭈뼛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서자 강후가 자신의 옆에 방석을 깔고 은하를 안내했다.
“여기 앉아요.”
“아…저는 그냥 여기 앉을게요.”
은하는 방석을 들고 모서리 쪽에 앉았다.
“은하 씨 뭐 먹을래요?”
“나는 늘 먹던 A 코스.”
“그쪽은 알아서 드시고 은하 씨 해물 좋아해요?”
“네…뭐….”
“그럼 B 코스로 해요. 여기 B 코스 두 개 줘요.”
“난 사람 취급도 안 하겠다는 거냐?”
“알아서 시켜 먹던가.”
“여기 A 코스도 하나 주세요.”
음식이 나오고 세 사람 사이엔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큽….”
결국, 음식을 깨작거리던 은하는 사레가 들렸고 두 남자는 동시에 물컵을 내밀었다.
“아…. 아 괜찮아요.”
은하는 앞에 놓인 자신의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고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며 머쓱한 듯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어색한 식사를 마치고, 은하가 화장실을 간 사이 두 남자는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뭐 하자는 거 아닌데.”
“이현이로도 모자라?”
“…. 이현이 그렇게 된 거 나 때문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아니 몰라 이현이 그렇게 된 거 윤남우 너 때문이야.”
“하아…”
“그러니까 이현이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혼자 살아.”
“…강후야.”
“그렇게 부르지 마.”
“미안하다.”
“미안하면 포기해.”
“…미안하다.”
“이현이한테 평생 미안해하라고!!!”
결국, 강후는 남우의 멱살을 잡았다.
“너 때문에 이현이가…이현이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나 해봤어?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겪게 만들었어 네가!!!”
“지금 네가 하는 행동도 조은하 씨 힘들게 하는 거야.”
“뭐?”
“너 때문에 은하 씨 힘들어하는 거 왜 못 봐.”
“무슨 소리야 그게.”
“은하 씨한테 직접 물어봐.”
남우는 강후에게서 잡힌 멱살을 털어내고 뒤돌아섰다.
“야 윤남우!”
“나 이번엔 꼭 지킨다. 아니 꼭 지켜낼 거야.”
***
남우는 식당 문을 열고 나서는 은하에게 눈인사를 한 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다시금 떠오르는 그 날의 악몽에 고개를 숙였다.
“…. 이현아…이 여자 내가 지켜줘도 되지…그렇게 하게 해줘.”
죽기살기 프로젝트19화 - 내가 싫은 날
19화 내가 싫은 날.
하루 종일 계속되는 강행군 촬영에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지쳐 있었다.
“자자! 10분만 쉬자!”
박 감독의 말에 배우들은 바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스태프들도 바닥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제 막방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드라마는 꽤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순항을 했다.
혜연과 남우의 케미와 강후의 순정남 역할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기 충분했다.
은하 역시 틈틈이 모니터하고, 혼자 공부를 했다.
서희와 지수는 은하를 더 이상 괴롭히진 않았지만, 더욱더 멀리했고, 은하는 혼자 다니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은하가 혼자 다니며 궂은일을 다 하는 걸 아는 남우지만 섣불리 나서서 도와줄 수 없어 답답했다.
“막내 이리 와봐.”
“네!”
박 감독의 부름에 은하는 얼른 뛰어갔다.
“오늘 끝나고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네? 어딜…”
“너한테 도움될 만한 분 소개해 줄 테니까 끝나고 나 따라와.”
“아…. 네.”
***
촬영이 끝나고 은하는 박 감독과 함께 박 감독의 차에 올라탔다.
“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좋은데~아주 좋은데 가는 거야.”
은하는 뭔지 모를 불안함에 휴대폰을 손에 꼭 쥐었다.
“자 내려.”
차가 도착한 곳은 저번에 강후, 남우와 함께 식사했던 고급 식당이었다.
박 감독은 자연스럽게 식당 안으로 들어섰고 은하는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섰다.
***
“박준현으로 예약되어 있는데.”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제일 안쪽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여깁니다.”
“고마워요.”
박 감독은 노크를 두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의원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박 감독의 모습에 은하도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박 감독 오랜만이야.”
“네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얼른 앉아 옆에 숙녀분은 누구야?”
김 의원의 시선이 은하를 아래위로 훑었다.
“은하 씨 뭐해 인사 안 드리고.”
“네? 아…. 안녕하세요. 조은하입니다.”
“저희 작가 팀 막낸데 의원님 팬이라고 꼭 같이 오고 싶다고 하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뜬금없는 박 감독의 말에 은하가 흠칫 놀라며 박 감독을 쳐다보았지만, 박 감독은 그런 은하의 시선을 슬쩍 피하곤 은하를 김 의원의 옆에 앉혔다.
“아…. 저…저는….”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은하의 손목을 김 의원이 잡아 다시 앉혔다.
“아이고 작가님이 참 예쁘네.”
김 의원의 손이 은하의 손목에서 자연스럽게 허벅지 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은하는 피할 타이밍마저 놓치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에 잠겼다.
“은하 씨 뭐해 옆에 의원님 잔 비었잖아.”
“네?”
“술 따라 드려야지.”
박 감독의 말에 그제야 은하의 멈췄던 사고회로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꿈이 드라마 작가라고?”
“네? 아…. 네.”
김 의원의 손길은 더욱더 끈적해졌다.
은하는 옆으로 살짝 자리를 옮겨 손길을 피했고, 김 의원은 더욱더 끈질기게 은하의 몸을 쓰다듬으려 했다.
“저…. 왜 이러세요.”
“응? 다 알면서 왜 그래~”
김 의원은 은하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이거 놓으세요!”
은하는 김 의원의 팔을 탁 쳐내며 일어섰다.
그 반동에 김 의원이 들고 있던 술이 쏟아졌고 김 의원은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박 감독이 뭐라 더 하기도 전에 짝 소리와 함께 은하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뭐 이런 기지배가 다 있어? 박 감독 이런 애를 왜 데려온 거야?”
“죄송합니다. 의원님. 너 뭐해 얼른 의원님 옆에 앉아.”
“저는 그냥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너 그나마 있는 막내 자리도 잘리고 싶어? 아니면 영영 이 방송계에 발도 못들이게 해줄까?”
“감독님.”
“집 안 사정도 많이 어려운 거 같은데 그렇게 꼿꼿해서 언제 돈 벌어.”
“……”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던가…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뭐…”
자신의 아버지까지 운운하며 자신을 깎아내리는 김 의원과 박 감독의 가시 돋친 말들에 은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잘 행동하면 돈 걱정 안 하고 살게 해줄 수 있어.”
“앉든지 나가든지 선택은 네가 하는 건데 이렇게 나가면 내일부터 안 나와도 돼.”
은하는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은하에겐 이 길이 자신의 꿈이기도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또 밥줄이었기에 여기서 그만두면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김 의원은 다시 은하의 어깨에 손을 둘렀고 은하는 두 눈을 꾹 감고 버텨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윤남우!”
“어…. 어? 미안 뭐라고 했지?”
“오늘 지혁 오빠랑 저녁 먹는 거 안 잊어버렸냐고 물었어~”
“어…. 맞다 오늘 지혁이 형 입국하는 날이지.”
“응 오빠가 K 레스토랑 예약했데. 가자.”
“어 그래.”
남우는 혜연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유지혁으로 예약되어 있어요.”
“이쪽입니다.”
직원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자 먼저 온 지혁이 환하게 웃으며 혜연과 남우를 맞이했다.
“남우야 오랜만이다~”
“형 이제 완전히 들어온 거야?”
“아니 잠깐 휴가받은 거야 너 보고 싶어서 잠깐 들어왔지.”
“오빠 나는 안 보여?”
“보인다. 보여 너희 요새 둘이 드라마 찍는다며.”
“응 우리 둘이 부부로 나와.”
“남우 네가 힘들겠구나.”
“아 오빠!”
“혜연이가 워낙 잘해서 뭐 나는 편하지.”
“너가 다 받아 주니까 유혜연이…”
“우리 밥부터 먹자 오빠 나 배고파.”
지혁이가 잔소리를 시작하려 하자 혜연은 말을 끊고 식사를 주문했다.
“말 끊는 건 선수라니까.”
“오빠는 뉴욕에서 괜찮은 여자친구 안 생겼어?”
“뭐 다들 나 좋다고 그러는데 내가 뭐 별로 마음에 안 차서.”
“저 잘난 척은 뉴욕에서 못 고치나 보네.”
“야.”
두 남매가 투닥거리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남우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
“어 형.”
지훈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서던 남우는 건넛방에서 나오는 은하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
“자 그럼 우리는 자리를 옮길까?”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는 김 의원의 은근한 손길에 은하의 온몸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럼 그럴까요? 뭐해 은하 씨 김 의원님 부축해 드려야지.”
박 감독의 말에 은하는 김 의원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 부축을 했다.
말이 좋아 부축이지 은하보다 배는 덩치가 큰 김 의원의 덩치에 거의 묻힌 은하는 비틀거리며 김 의원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은하 씨?”
김 의원에게 묻혀 낑낑거리며 밖으로 나오던 은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윤남우 씨?”
“지금 거기서 뭐 합니까?”
웬 늙은 남자 의원에게 묻혀 낑낑거리는 은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아…. 그게…”
“어 윤 배우~”
그때 계산서를 들고 방에서 나오던 박 감독이 남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박 감독을 본 남우의 얼굴은 뭔가를 알아챈 듯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박 감독님.”
“아~은하 씨가 김 의원님 팬이라 그래서 소개해줬지 내가~그렇지 은하 씨?”
박 감독의 물음에 남우의 시선이 은하를 향했다.
“박 감독님 말 맞아요. 조은하 씨?”
“여기서 뭐 해~자리 옮기자니까.”
그때 고개를 든 김 의원이 은근한 손길로 은하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은하는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찰칵/
그때 찰칵하는 카메라 소리와 함께 남우는 은하와 김 의원에게 다가가 은하의 손을 확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데리고 왔다.
“증거 확보.”
그 덕에 중심을 잃은 김 의원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박 감독은 얼른 뛰어가 김 의원을 부축했다.
“지…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윤 배우 미쳤어? 이 분 누군지 몰라?”
“누군지 알죠 시의원님 김순석 의원님 아닙니까.”
“알면서도 지금 이런 행동을 한 거야! 얼른 사과 드려!”
“죄송합니다. 김순석 의원님.”
“너…. 너 배우 생활 그만하고 싶어?”
“아이고 이렇게 높으신 분인데 제가 몰라뵀네요.”
“너…. 이름이 뭐야!”
“윤남우입니다. 김.순.석.의원님.”
“윤 배우 너 왜 이래!”
“박준현 감독 이런 식으로 여자 스태프들 그만두게 만들었구나.”
“뭐…. 뭐?”
“스태프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길래 그냥 찌라시인가보다 했는데 사실이었네.”
“…저…. 윤 배우.”
“자 조은하 씨 이제 대답해봐요. 정말 김 의원님 팬이라서 여기까지 자기 발로 직접 온 거에요?”
남우의 물음에 은하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야…. 야! 너 짤리…”
“이런 식으로 협박까지 하셨고.”
“박 감독 이게 무슨 상황이야!”
술에 취한 줄만 알았던 김 의원이 벌떡 일어나 박 감독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아까까지만 해도 자기 손녀뻘인 여자한테 부축 당해서 나오셨는데 3분 만에 술이 다 깨셨나 봐요. 의원님.”
남우의 말에 정곡을 찔린 김 의원은 괜히 박 감독을 향해 화를 냈다.
“그렇게 화내실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요 김 의원님.”
“그…. 그럼 뭐 어쩌라고!”
“여기 이 여자분을 저 방 안에 데리고 들어가서 술 시중들게 했을 거고, 그다음엔 박 감독은 자리를 피해 주고 어디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셨을까요.”
“그…. 그건!”
남우는 좀 전에 찍은 사진을 김 의원에게 보여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진 제가 아는 기자들한테 넘기려고 하는데.”
“이…. 이 친구가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아뇨 협박이라뇨…. 그냥 선량한 시민을 성추행하는 의원님 한 분을 제보하려는 건데, 김 의원님이 매일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 정의구현, 그거 저도 좀 해보려고 하는 건데요.”
“저…. 윤 배우.”
보다 못한 박 감독이 남우의 옷깃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이러지 말자 응?”
“이거 놓으시죠. 박준현 감독님.”
남우는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양 박 감독의 손을 툭 쳐냈다.
“너가 이거 제보하면 너는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아?”
부탁이 먹히지 않자 박 감독은 남우에게 삿대질하며 화를 냈다.
“박 감독님은 사직서 미리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뭐?”
남우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혜연아 지혁이 형이랑 잠깐 좀 나와볼래.”
“지혁이…형?”
죽기살기 프로젝트20화 - 마음을 삼키고
20화 마음을 삼키고.
남우의 전화에 지혁과 혜연이 건너편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야? 어? 박 감독!”
“감독님도 식사하러 오셨어요?”
“어. 어 혜연 씨…. 지혁 선배 한국에 계셨네요.”
“어~오늘 입국했어. 근데 두 사람 무슨 일이길래 분위기가 이래?”
“형이 저번에 그런 말 한 적 있지.”
“무슨 말?”
“형 회사 소속 감독 중에 막내 스태프들 데려다 윗선들 술 시중들게 하고 접대하는 그런 놈 있는 거 같다고.”
“어 찌라신지 정말인지 알아보고 있는데 왜?”
지혁의 말에 박 감독은 몸을 흠칫 떨었다.
“찌라시 아니고 사실인 거 같은데.”
“어?”
“알아볼 필요 없어 형 여기 그 주인공 있는데 뭐.”
남우는 박 감독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박 감독 이게 무슨 말이야?”
지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박 감독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아니 선배 그게….”
“일단 따라 들어와 혜연이 너는 먼저 가고.”
“어…. 어 알았어. 오빠.”
박 감독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남우를 바라봤지만, 남우는 싸늘하게 그 시선을 무시했다.
김 의원은 진작에 도망가 버렸고, 혜연과 남우 그리고 은하는 나란히 식당에서 나왔다.
“가자 남우야.”
혜연은 자연스럽게 남우의 차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혜연아 미안한데 나 너 못 데려다주겠다.”
“어? 왜?”
“훈석이 형 불러 줄게.”
“왜 같이 못 가는데.”
혜연은 남우의 옆에 서 있는 은하를 흘겨보며 물었다.
“막내 데려다줘야 할 거 같아서.”
“그럼 나는?”
“너는 훈석이 형 있잖아.”
“아….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차에 먼저 타고 있어요 나 혜연이 가는 거 보고 갈 테니까.”
“아니 저는 그냥 혼자 갈게요 저 진짜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니까 내 말 들어요.”
남우는 기어이 은하를 자신의 차에 태웠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힘들어 보여서 데려다주려는 것뿐이야.”
“정말 그것뿐이야?”
혜연의 물음에 남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남우는 혜연이 가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차에 올라탔다.
“벨트 매요.”
“…. 고맙습니다.”
“……”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은하는 남우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괜찮아요?”
“…네.”
뭘 물어봐도 괜찮다 하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만 하는 은하의 태도가 남우는 답답했다.
“힘들면 힘들다 하고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요 왜 자꾸 자기감정을 속이려고 해요.”
“정말…. 괜찮아요.”
“이게 괜찮을 일이에요? 아니잖아, 지금 많이 힘들잖아. 은하 씨.”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남우의 말에 은하의 마음속 곪았던 상처가 툭 하고 터져버렸다.
조금만 건드리면 눈물을 쏟아 낼 듯한 표정을 하고 괜찮다는 자신의 모습이 꽤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기감정을 좀 드러내면서 살아요. 강후한테도 싫으면 싫다고 확실히 표현하고 그렇게 피하지만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은하 씨 괴롭히고 그러면 덤벼보기도 하고 당하고 있지 말고 바보처럼.”
남우의 말에 은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
“내가…위로해줘도 돼요?”
남우는 은하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진심 어린 위로에 은하는 남우를 밀어내지 못했다.
***
“안녕하세요. 이번에 박준혁 감독 빈자리를 채우게 된 김수철이라고 합니다. 남은 기간 잘 해봐요. 우리.”
그 날 이후, 드라마를 반 이상 촬영한 상태에서 감독은 교체되었다.
갑작스러운 감독 교체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소문들이 돌았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야 막내 커피 사와.”
“네.”
새로운 감독 대신에 조감독이 자연스럽게 은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고 은하는 벌떡 일어났다.
“커피를 막내가 사와요?”
“네? 아…. 네.”
“왜?”
김 감독의 질문에 당황한 조 감독이 어버버 거리자 김 감독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본인들이 마실 커피를 저분이 사와요?”
“그게…박 감독님이 자연스럽게 시키셔서…”
“이리 와봐요.”
김 감독은 은하를 향해서 손짓했고 은하는 얼른 뛰어가 김 감독의 앞에 섰다.
“이름이 뭐예요?”
“조…은하입니다.”
“아 은하 씨, 앞으로 커피 심부름 하지 않아도 돼요.”
“네?”
“앞으로 그 시간에 김주혜 작가 옆에서 열심히 배워.”
“아…. 네.”
“그리고 우리 조감독님 이름이?”
“아…. 한준희입니다.”
“그래 앞으로 본인들이 마실 커피는 알아서 마시는 거로.”
“아…네 죄송합니다.”
새로운 감독님 덕분에 은하는 더 이상 커피 심부름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에 주혜의 옆에서 뭘 배우지도 못했다.
지수와 서희의 텃세는 날이 갈수록 더 해져 갔고 대 놓고 괴롭히진 않았지만, 은하가 주혜에게서 뭘 배우지도 못하게 은근하게 막았다.
은하에겐 작가가 꿈이기도 하지만 생계 수단이기도 했기에 빨리 열심히 배워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했기에 이런 상황이 더 힘들게만 느껴졌다.
***
“은하 씨! 집에 가는 거예요?”
하지만 강후는 끈질기게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하에게 아는 척을 해댔고 은하는 더 이상 피하기도 지켜 그저 조용히 대꾸만 했다.
“네.”
“그럼 우리 같이 갔던 그 카페 갈래요?”
“아뇨.”
“와 이젠 진짜 냉정하게 거절하네! 나 상처받게…”
“아…. 미안해요.”
“미안하면 나랑 커피 한잔해요.”
“서강후 씨 나 이제 진짜 힘들어지는데…. 그만하면 안 돼요?”
“네…?”
“강후 씨가 자꾸 이러면 나 이제 진짜 강후 씨 싫어질 거 같아서 그래요.”
은하의 말에 강후는 정말 놀란 듯 멍한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강후 씨가 저한테 잘 해주면 주변 사람들이 저를 괴롭혀요. 제가 대체 왜 좋아요…. 저보다 더 좋은 여자들 많잖아요…그러니까 이제 나 그만 괴롭혀요.”
“은하 씨.”
“자꾸 이러면 저 진짜 강후 씨가 싫어질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러니까 내가 은하 씨 옆에서 지켜 준다니까. 은하 씨가 내 마음 받아주면 내가 은하 씨 남자친구라는 명목이 생기니까 옆에서 지켜 줄 수 있잖아요.”
“저는요 연애 같은 거 할 시간도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처음엔 자신에게 잘 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강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살면서 강후처럼 잘생기고 대단한 사람이 오롯이 자신을 눈에 담아 주고, 챙겨 주고 하니 진짜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뿐이었다. 은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입방아에 오르내려 가며 하는 연애 같은 거 할 상황도 아니었고 연애를 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처음엔 강후가 연예인이라서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이제 강후라서 부담스러웠다.
항상 자신에게 1순위는 돈이었고, 2순위는 언제 죽을까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은하에겐 마냥 부담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요 가요.”
그때 혜연과의 촬영을 마치고 촬영장을 나서던 남우가 둘을 발견하곤 은하의 손을 잡았다.
“어…어…. 네?”
“안 가요?”
남우는 강후 쪽을 슬쩍 눈짓하며 은하에게 눈치를 줬다.
“아 가…. 가요.”
남우의 뜻을 알아차린 은하는 남우의 손을 잡고 강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요.”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강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거지?”
***
“타요.”
“아뇨 저 여기서 그냥 혼자 갈게요.”
“가다가 강후 또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아…. 뭐 그땐…”
“은하 씨도 알고 있잖아요. 강후랑 자꾸 엮이면 본인이 힘들어진다는 거.”
“네…오늘도 고마워요, 아니…. 매번 고마웠네요. 그러고 보니.”
“앞으로도 고마워할래요. 그럼?”
“네?”
“내가 은하 씨 옆에서 은하 씨 계속 보호해줄게요.”
“저를요?”
“나랑 계약 하나 해요.”
“무슨 계약이요?”
“계약 연애.”
“네에???”
남우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단어에 놀란 은하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허….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줄도 아네.”
“아…”
“말 그대로 계약으로 연애하자는 말이에요.”
“왜요?”
“그렇게 하면 강후가 아마 은하 씨 좋아하는 거 그만하지 않을까요?”
“윤남우 씨도 연예인이잖아요.”
“나는 아무래도 강후보단 덜 유명해서 사람들이 신경 많이 안 써요.”
“아무리 그래도 연예인이잖아요. 서강후 씨랑 별반 다를 거 없을 텐데요…서강후 씨 밀어내겠다고 또 제가 상처받을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내가 강후를 잘 아는데…강후 마음 떠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왜요?”
“그건…. 다음에 얘기해줄게요. 아무튼, 계속 강후 마주치는 이상 아니 은하 씨가 방송국에 있는 이상 강후가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
“생각해보고 대답해줘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들어가고.”
어느덧 자신의 집 앞인 걸 깨달은 은하는 벨트를 풀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네. 고맙습니다.”
은하는 남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차에서 내렸다.
“은하 씨.”
계단을 막 올라서려던 은하는 자신을 부르는 남우의 목소리에 다시 뒤돌아섰다.
“그…지켜주기만 할게요.”
“네?”
“다른 사람들 모르게 지켜주기만 할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담…. 이런 거 갖지 말라고….”
“…네 운전 조심하세요.”
은하는 꾸벅 인사를 하곤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하아…”
은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남우는 그제야 큰 숨을 몰아쉬었다.
“윤남우 등X.”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계약 연애.
하지만 은하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자신이 은하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음을 숨기고 은하의 옆에서 은하를 지켜 줄 수 있는 명목.
***
지이이잉//
집으로 핸들을 돌리던 남우는 끈질기기 울리는 진동 소리에 짜증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은하 씨랑 같이 있어?]
“무슨 일이야.”
[형이야말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서강후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 네가 이러는 거 조은하 씨 힘들게 하는 거야.”
[누가 누구한테 충고하는 거야 지금 너야말로 그만해 너 지금 느끼는 거 동정심이고 책임감이야 은하 씨가 이현이랑 닮았으니까 이현이 대신에…]
“입 다물어!”
강후의 말에 남우는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렸다.
[나는 너랑 달라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야. 근데 너는 책임감이잖아.]
“아니 책임감 아니야, 이현이한테 느낀 감정이랑 똑같아.”
[마지막 경고야 은하 씨한테 떨어져.]
으르렁거리는 듯한 강후의 낮은 목소리에 남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현이한테 평생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서강후 너야.”
[뭐?]
“너는 이현이 죽음 막을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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