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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소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 21-52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1화 -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날 믿어줘야돼
“이 길이 너무 좋아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으면 가끔 여길 오곤 했었어. 그러면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괜찮아졌거든. 그래서 나중에 좋은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여길 와야지 했는데…… 당신이랑 함께라서 참 좋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가득했던 표정과 말투는 사라지고, 미소 진 입가에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다.
한결의 고백에 다빈은 얼굴을 숙여, 그의 등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나도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라서 너무 좋아.’
“혹시 말야..나중에 우리 혹시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여기에 오면 무조건 화해하기로 하자. 알았지?”
“응”
그때 한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하다니 대체 누구야!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한결이 전화를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 다빈이 전화부터 받으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다빈을 내려주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소속사 대표인 은표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 지금 큰일 났어”
평소와 달리 다급한 은표의 목소리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한결은 직감했다. 통화 내용이 옆의 다빈에게 들릴까 다빈에게
“잠깐만, 은표 형님이야”
양해를 구하고 몇 미터 떨어져서는 통화를 이어나갔다.
멀리 떨어져 있어 전화기 건너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진 알 수 없지만, 심각한 얼굴의 한결을 보고서 뭔가 급한 일이 일어났구나! 다빈은 짐작했다.
“……화연이는…… 뭐래요?”
화연? 화연이면 왠지 한결을 대하는 눈빛이 남달라 보였던 그 여배우?
왜 지금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거지?
“형님, 일단 알겠어요. 지금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한결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전화기를 끊더니 다빈을 향해 걸어왔다.
“미안한데, 지금 사무실에서 일이 좀 생겼나 봐. 지금 가봐야 할 거 같아”
“무슨 일인데? 안 좋은 일이야?”
“아니 뭐, 걱정할 건 아니고. 일단 회사부터 들어가 봐야겠어. 별일 아니니까 걱정할 필욘 없고”
한결이, 다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다빈은 직감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다빈을 응시하던 한결이 다시 입을 뗐다.
“만약에 말이야……, 혹시 말이야……. 무슨 오해할만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날 믿어줘야 해. 그럴 수 있지?”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빈의 대답을 듣고 난 한결이 그녀를 꼬옥 품에 안았다. 다빈 역시도 두 팔을 벌려 한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댄 서로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서로가 알아챘다.
이윽고, 한결은 두 손을 다빈의 얼굴 쪽으로 옮겨, 얼굴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댔다.
따스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그래 믿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를 믿을게. 그러니 걱정하지 마.’
다빈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못 한 채, 그에 대한 믿음을 다짐했다.
그리곤 그녀 역시도 천천히 한결의 입술을 찾았다.
혀를 찾았고, 입안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마중 나왔던 한결의 혀와 부딪쳤다.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서로의 혀를 찾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한결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는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자”
***
조금 전, 은표의 사무실 안.
은표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중에 최 실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큰일 났어요. 이화연 씨 인터뷰 영상 보셨어요?”
“화연이 인터뷰가 왜?”
“일단 이것부터 보세요.”
최 실장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난 화연의 영상인터뷰에 손가락을 대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은 한결과 화연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어떻게 사귀게 되었나, 데이트할 땐 주로 무엇을 하느냐, <연우결> 출연이 서운하지는 않나,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나……
최도철 기자에 의해 재편집된 영상이 마치 실제 인터뷰 인양 재생되고 있었다.
인터뷰가 이어질수록 일그러지는 은표의 얼굴.
“이거, 어디 어디에 나와?”
“’나이버’랑, ‘이전’이요. 우리나라 양대 포털 ‘나이버’랑 ‘이전’에 실렸으니 뭐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댓글도 어마어마해요.”
“휴…… 최 기자 이 자식. 자꾸 인터뷰하자고 하는 게 이상했어. 이런 식으로 없는 말 만들어서 뒤통수를 치다니!!”
영상 인터뷰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찍었는지 늦은 밤, 한결과 다빈이 팔짱을 끼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컷컷이 찍힌 사진을 내걸고 [김한결 신예 이화연과 열애! 늦은 밤 데이트]란 제목으로 기사까지 내보내고 있었다.
영상이야 실제 촬영본을 찾아낸다 쳐도, 저 사진은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될만한 사진이었다.
그날이었구나. 넷이서 함께 와인을 하고 한결이 화연이를 데려다주던 날. 그날 저들이 그 모습을 찍었구나.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휴
후회가 밀려왔다. 그 사진만 없더라도 어떻게 해결 방법을 찾아낼 텐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정하게 팔짱을 낀 모습이 영락없이 연인 사이였다.
은표는 가라앉지 않는 화를 억누르며 핸드폰을 켜, 최도철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신호음만 이어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자식, 전화 피하네.”
“휴우…어서 화연이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화연이랑 한결이 광고 계약서 다 챙겨오고”
“네!”
은표는 다시 전화기를 켜 이번에는 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결이 전화를 받자마자 은표는 대뜸 한결의 위치부터 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지금 큰일 났어”
다급한 목소리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음을 직감했는지 한결이 이유를 물어왔고, 은표는 대략적으로나마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빨리 수습을 해야 했기에 서둘러 한결에게 사무실로 들어올 것을 지시했다.
*
은표는 직원이 가져다준 광고 계약서를 확인했다. 스캔들 조항이 들어 있는 건 한결이 5개, 화연이 2개였다. 스캔들로 제품에 대한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시, 계약금의 2배를 물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연예인들의 스캔들에 있어서 그게 진실인지, 그저 소문일 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스캔들이 터진 후 추후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더라도 대중들은 이미 거론됐던 스캔들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캔들 후에 제아무리 법적 소송을 하거나, 진실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이미 추락 된 이미지를 되살리기는 쉽지 않다. 연예인에게 있어서 스캔들은 그만큼 치명적이며, 한 번 일어난 스캔들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이번 스캔들도 결국, 사실 여부를 떠나 스캔들로 제품 이미지에 손실을 주었다고 손해배상을 요구해 온다면 고스란히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할 것이다.
화연이야 그렇다 치고, 한참 대세로 떠오르며 광고의 수도, 그 금액도 치솟고 있던 한결에게 광고 계약금의 2~3배의 손해배상이라도 청구된다면 그 금액만도 60~70억이 넘는 큰 금액이 될 것이다.
최도철 기자와 연락이 안 되자, 은표는 HOT 연예뉴스로 전화를 걸어 책임자를 찾았다. 최도철 기자가 이런 사실무근의 영상 인터뷰를 만들어 올렸다, 어떻게 할 거냐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뻔뻔한 답변뿐이었다.
글도 아니고, 영상인터뷰다. 하지 않은 말을 사실이라고 내보낸 적 없다. 더구나 늦은 밤 팔짱을 끼고 오피스텔로 함께 들어가는 사진도 있지 않느냐, 우리는 없는 말을 지어낸 적 없다며 되레 큰소리까지 쳤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법정 싸움으로 갈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인터뷰를 내보내는 이 매체를 매장시키리라 은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은표가 HOT 연예뉴스 책임자와 통화를 끝내고 세차게 전화기를 내려놓는데, 울 듯한 표정의 화연이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왔다.
“오빠, 어떡해요?”
“휴우……”
은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마른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전 정말 그렇게 인터뷰한 게 아니었어요. 자꾸 한결 씨에 대해 질문하길래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워낙 한결 씨가 인기가 많으니까 그래서 물어보는구나 했지 이렇게 멋대로 편집해서 내보낼 줄은 정말 몰랐어요. 흑흑”
얼굴이 사색이 돼서 해명하는 화연을 바라보던 은표의 눈에 화연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가 들어왔다.
“근데, 너 그 반진 어떻게 된 거야?”
화연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아, 이거…… 엄마가 선물해 주신 거에요. 공교롭게도 한결 씨가 하고 있는 반지랑 같은 디자인인 걸 기사 나가고 알았어요. 거기 브랜드가 요즘 인기 많은 브랜드라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디자인으로 엄마가 추천받아 사셨다고 했는데……, 아마 한결 씨도 직원이 추천해주는 걸 사서 그런 걸 거에요”
화연은 둘러 됐다. 차마 이 상황에서 한결과 같은 반지를 끼고 싶은 마음에 똑같은 반지를 샀다고 말할 수 없었다.
“휴…… 사진에 반지까지….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정황상 너무 그쪽 말이 타당해 보이는 상황이야.”
이때 다시 최 실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대표님 기사 또 떴어요.”
노트북을 열어 포탈 ‘나이버’를 열자 이번에는 [김한결, 이화연과 유다빈에 같은 반지 선물, 유다빈은 방패막?!]이란 제목이 연예뉴스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에는 <연우결>에서 한결이 반지를 끼워지는 장면을 캡처한 사진과 확대된 반지 모양, 그리고 인터뷰 때 화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사진이 나란히 확대되어 실려 있었다.
본문에는 한결과 화연이 데뷔 초기 때부터 몰래 사귀어 왔는데, <연우결>에 출연하게 되면서 커플 반지를 낄 수 없게 되자 같은 반지를 선물함으로써 평소에도 마음껏 끼고 있다 등의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기사를 읽은 화연의 얼굴은 경악할 정도였다.
“아, 어떡해? 이럴 줄은……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떡해요, 오빠?”
울먹이는 화연을 탓할 수도 없는 은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차를 급히 몰아 서울로 올라온 한결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길이 너무 좋아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으면 가끔 여길 오곤 했었어. 그러면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괜찮아졌거든. 그래서 나중에 좋은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여길 와야지 했는데…… 당신이랑 함께라서 참 좋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가득했던 표정과 말투는 사라지고, 미소 진 입가에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다.
한결의 고백에 다빈은 얼굴을 숙여, 그의 등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나도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라서 너무 좋아.’
“혹시 말야..나중에 우리 혹시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여기에 오면 무조건 화해하기로 하자. 알았지?”
“응”
그때 한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하다니 대체 누구야!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한결이 전화를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 다빈이 전화부터 받으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다빈을 내려주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소속사 대표인 은표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 지금 큰일 났어”
평소와 달리 다급한 은표의 목소리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한결은 직감했다. 통화 내용이 옆의 다빈에게 들릴까 다빈에게
“잠깐만, 은표 형님이야”
양해를 구하고 몇 미터 떨어져서는 통화를 이어나갔다.
멀리 떨어져 있어 전화기 건너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진 알 수 없지만, 심각한 얼굴의 한결을 보고서 뭔가 급한 일이 일어났구나! 다빈은 짐작했다.
“……화연이는…… 뭐래요?”
화연? 화연이면 왠지 한결을 대하는 눈빛이 남달라 보였던 그 여배우?
왜 지금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거지?
“형님, 일단 알겠어요. 지금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한결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전화기를 끊더니 다빈을 향해 걸어왔다.
“미안한데, 지금 사무실에서 일이 좀 생겼나 봐. 지금 가봐야 할 거 같아”
“무슨 일인데? 안 좋은 일이야?”
“아니 뭐, 걱정할 건 아니고. 일단 회사부터 들어가 봐야겠어. 별일 아니니까 걱정할 필욘 없고”
한결이, 다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다빈은 직감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다빈을 응시하던 한결이 다시 입을 뗐다.
“만약에 말이야……, 혹시 말이야……. 무슨 오해할만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날 믿어줘야 해. 그럴 수 있지?”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빈의 대답을 듣고 난 한결이 그녀를 꼬옥 품에 안았다. 다빈 역시도 두 팔을 벌려 한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댄 서로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서로가 알아챘다.
이윽고, 한결은 두 손을 다빈의 얼굴 쪽으로 옮겨, 얼굴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댔다.
따스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그래 믿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를 믿을게. 그러니 걱정하지 마.’
다빈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못 한 채, 그에 대한 믿음을 다짐했다.
그리곤 그녀 역시도 천천히 한결의 입술을 찾았다.
혀를 찾았고, 입안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마중 나왔던 한결의 혀와 부딪쳤다.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서로의 혀를 찾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한결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는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자”
***
조금 전, 은표의 사무실 안.
은표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중에 최 실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큰일 났어요. 이화연 씨 인터뷰 영상 보셨어요?”
“화연이 인터뷰가 왜?”
“일단 이것부터 보세요.”
최 실장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난 화연의 영상인터뷰에 손가락을 대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은 한결과 화연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어떻게 사귀게 되었나, 데이트할 땐 주로 무엇을 하느냐, <연우결> 출연이 서운하지는 않나,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나……
최도철 기자에 의해 재편집된 영상이 마치 실제 인터뷰 인양 재생되고 있었다.
인터뷰가 이어질수록 일그러지는 은표의 얼굴.
“이거, 어디 어디에 나와?”
“’나이버’랑, ‘이전’이요. 우리나라 양대 포털 ‘나이버’랑 ‘이전’에 실렸으니 뭐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댓글도 어마어마해요.”
“휴…… 최 기자 이 자식. 자꾸 인터뷰하자고 하는 게 이상했어. 이런 식으로 없는 말 만들어서 뒤통수를 치다니!!”
영상 인터뷰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찍었는지 늦은 밤, 한결과 다빈이 팔짱을 끼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컷컷이 찍힌 사진을 내걸고 [김한결 신예 이화연과 열애! 늦은 밤 데이트]란 제목으로 기사까지 내보내고 있었다.
영상이야 실제 촬영본을 찾아낸다 쳐도, 저 사진은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될만한 사진이었다.
그날이었구나. 넷이서 함께 와인을 하고 한결이 화연이를 데려다주던 날. 그날 저들이 그 모습을 찍었구나.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휴
후회가 밀려왔다. 그 사진만 없더라도 어떻게 해결 방법을 찾아낼 텐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정하게 팔짱을 낀 모습이 영락없이 연인 사이였다.
은표는 가라앉지 않는 화를 억누르며 핸드폰을 켜, 최도철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신호음만 이어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자식, 전화 피하네.”
“휴우…어서 화연이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화연이랑 한결이 광고 계약서 다 챙겨오고”
“네!”
은표는 다시 전화기를 켜 이번에는 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결이 전화를 받자마자 은표는 대뜸 한결의 위치부터 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지금 큰일 났어”
다급한 목소리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음을 직감했는지 한결이 이유를 물어왔고, 은표는 대략적으로나마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빨리 수습을 해야 했기에 서둘러 한결에게 사무실로 들어올 것을 지시했다.
*
은표는 직원이 가져다준 광고 계약서를 확인했다. 스캔들 조항이 들어 있는 건 한결이 5개, 화연이 2개였다. 스캔들로 제품에 대한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시, 계약금의 2배를 물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연예인들의 스캔들에 있어서 그게 진실인지, 그저 소문일 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스캔들이 터진 후 추후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더라도 대중들은 이미 거론됐던 스캔들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캔들 후에 제아무리 법적 소송을 하거나, 진실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이미 추락 된 이미지를 되살리기는 쉽지 않다. 연예인에게 있어서 스캔들은 그만큼 치명적이며, 한 번 일어난 스캔들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이번 스캔들도 결국, 사실 여부를 떠나 스캔들로 제품 이미지에 손실을 주었다고 손해배상을 요구해 온다면 고스란히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할 것이다.
화연이야 그렇다 치고, 한참 대세로 떠오르며 광고의 수도, 그 금액도 치솟고 있던 한결에게 광고 계약금의 2~3배의 손해배상이라도 청구된다면 그 금액만도 60~70억이 넘는 큰 금액이 될 것이다.
최도철 기자와 연락이 안 되자, 은표는 HOT 연예뉴스로 전화를 걸어 책임자를 찾았다. 최도철 기자가 이런 사실무근의 영상 인터뷰를 만들어 올렸다, 어떻게 할 거냐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뻔뻔한 답변뿐이었다.
글도 아니고, 영상인터뷰다. 하지 않은 말을 사실이라고 내보낸 적 없다. 더구나 늦은 밤 팔짱을 끼고 오피스텔로 함께 들어가는 사진도 있지 않느냐, 우리는 없는 말을 지어낸 적 없다며 되레 큰소리까지 쳤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법정 싸움으로 갈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인터뷰를 내보내는 이 매체를 매장시키리라 은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은표가 HOT 연예뉴스 책임자와 통화를 끝내고 세차게 전화기를 내려놓는데, 울 듯한 표정의 화연이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왔다.
“오빠, 어떡해요?”
“휴우……”
은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마른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전 정말 그렇게 인터뷰한 게 아니었어요. 자꾸 한결 씨에 대해 질문하길래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워낙 한결 씨가 인기가 많으니까 그래서 물어보는구나 했지 이렇게 멋대로 편집해서 내보낼 줄은 정말 몰랐어요. 흑흑”
얼굴이 사색이 돼서 해명하는 화연을 바라보던 은표의 눈에 화연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가 들어왔다.
“근데, 너 그 반진 어떻게 된 거야?”
화연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아, 이거…… 엄마가 선물해 주신 거에요. 공교롭게도 한결 씨가 하고 있는 반지랑 같은 디자인인 걸 기사 나가고 알았어요. 거기 브랜드가 요즘 인기 많은 브랜드라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디자인으로 엄마가 추천받아 사셨다고 했는데……, 아마 한결 씨도 직원이 추천해주는 걸 사서 그런 걸 거에요”
화연은 둘러 됐다. 차마 이 상황에서 한결과 같은 반지를 끼고 싶은 마음에 똑같은 반지를 샀다고 말할 수 없었다.
“휴…… 사진에 반지까지….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정황상 너무 그쪽 말이 타당해 보이는 상황이야.”
이때 다시 최 실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대표님 기사 또 떴어요.”
노트북을 열어 포탈 ‘나이버’를 열자 이번에는 [김한결, 이화연과 유다빈에 같은 반지 선물, 유다빈은 방패막?!]이란 제목이 연예뉴스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에는 <연우결>에서 한결이 반지를 끼워지는 장면을 캡처한 사진과 확대된 반지 모양, 그리고 인터뷰 때 화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사진이 나란히 확대되어 실려 있었다.
본문에는 한결과 화연이 데뷔 초기 때부터 몰래 사귀어 왔는데, <연우결>에 출연하게 되면서 커플 반지를 낄 수 없게 되자 같은 반지를 선물함으로써 평소에도 마음껏 끼고 있다 등의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기사를 읽은 화연의 얼굴은 경악할 정도였다.
“아, 어떡해? 이럴 줄은……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떡해요, 오빠?”
울먹이는 화연을 탓할 수도 없는 은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차를 급히 몰아 서울로 올라온 한결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2화 - 스캔들
다빈을 내려주고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핸드폰으로 대강의 기사를 확인한 후였다….
굳은 표정으로 화연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한결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사실이 아니란 건 일단 알려야 하잖아요”
“음…. 우선 아니라는 해명 기사 내보내고, 법적 준비 해서 저쪽에서 오보 기사 인정하고 정정기사 내보내도록 해야지”
“그러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요, 그때까지 다른 문젠 없는 거예요?”
그때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옆에 있던 화연의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는 대표인 은표가 아직 외부에 있으니 핸드폰으로 해봐라, 이후에 공식 입장을 내겠다며 은표를 찾는 전화를 따돌렸다. 이어 전화를 끊은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한결 씨 광고주예요.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묻는 걸 외부 출타 중이라고 둘러 됐습니다만 오래 기다려 줄 것 같진 않은데요”
“…….”
“…….”
“…….”
이 상황을 마주한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말을 떼지 못한 채, 심각한 얼굴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선우의 사무실.
선우는 결재서류를 검토하다 무심코 포털 사이트 ‘나이버’에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실검 1순위도 ‘김한결 이화연 열애’였다.
검토 중이던 서류를 내려놓고 마우스를 움직여 기사를 클릭했다. 구체적인 내용과 사진, 기사 내용만 보면 영락없이 열애 중이라 오해할 만했다.
그러나 다빈을 향하던 한결의 눈빛을 선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하던 숨겨진 적개심까지! 그런 김한결이 이화연과 열애 중일 리는 없다. 기자들의 애꿎은 특종싸움에 놀아나는 이 바닥의 흔한 억지 스캔들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빈이었다. 그녀가 이 기사를 본다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다빈이 걱정된 선우는 다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빈아, 바쁜 데 전화 건 거야?”
“아니, 괜찮아”
다행히도 막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에선 특별한 게 느껴지질 않았다.
‘자고 있었던 건가…’
“자고 있었니?”
“응. 어딜 좀 나갔다 왔더니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었어.”
‘그래서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근데 웬일이야?”
“별건 아니고. 외부에 일 있어서 나왔던 참인데, 마침 너희 동네 근처잖아. 집에 있으면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고.”
“음……글쎄”
다빈이 망설였다.
“야, 걱정하지 마. 그냥 친구로 저녁이나 먹자는 거야. 미라도 같이 있으면 불러도 좋고”
뭐, 새삼스레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알았어. 그럼 미팅 언제 끝나?”
“한 시간쯤 후에?”
“알았어. 그럼 간단히 밥이나 먹어”
“응! 집 근처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할게.”
“근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동안 너, 일거수일투족 나 다 알고 있었어. 네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뿐이지.”
“……”
“근처 도착해서 연락할게. 이따가 봐”
“……응”
전화를 끊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나를 지켜봐 왔던 거구나. 그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날 버리진 않았었구나.
다빈은 선우에 대한 측은함이 밀려와 가슴 한편이 시려왔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여전히 그가 예전처럼 사랑스럽다든지, 그의 말 한마디에 가슴 설레는 따위의 감정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옛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친절한 선배의 배려 정도로 느껴질 뿐이었다.
전화를 끊자 다빈도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씻고 화장하고, 준비하고 있으면 얼추 선우가 도착할 시간이 될 듯했다.
통화를 마친 선우 역시도 들고 있던 결재 서류를 덮고, 사무실을 나섰다. 선우의 사무실에서 다빈의 아파트까지는 교통 상황을 감안해 1시간 정도 걸릴 듯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의 예상대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서울시 교통 상황은 온통 정체였고, 평소 같으면
2~3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1시간이 다 되어서야 다빈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
다빈의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 입구 앞쪽에 차를 주차하고는 다빈에게 전화를 했다. 준비를 마친 다빈이 경쾌한 캐주얼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채 아파트 동 입구에서 나왔다.
모자까지 쓰고 나온 걸 보니, ‘아 이제 다빈이도 예전에 내가 알던 유다빈이 아니구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연예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곧 털어버리고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다빈을 태웠다.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신경 쓰여?”
다빈이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전벨트를 매자 선우는 시동을 걸었다.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귀찮은 일 생기는 것보단 낫잖아. 요즘은 SNS도 워낙 많이들 하니 누가 어디서 뭐 하는지 검색만 하면 실시간으로 다 뜨잖아. ‘지금 여기 어딘데 여기서 누구 봤어요.’ 하고”
“음…… 그런가.”
“나야 뭐, 그렇게 유명하진 않아서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푸힛”
“사람들 시선 일일이 신경 쓰고 사는 거 불편하겠다……”
“아냐 난 그럴 정도의 인기는 아니라니까”
새삼 쑥스러워진 다빈이 절레절레 손까지 흔들며 부정했다.
“알았어. 밥은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람들 별로 없는 데로 가야겠네”
“아냐 오빠 좋은 데로 가. 점심을 걸렀더니 배고파서 뭐든 다 괜찮을 것 같아.”
“점심을 왜 걸렀어? 혼자 있어도 잘 챙겨 먹어야지. 너 배고픈 거 못 참…….”
‘못 참잖아’라고 말하려다, 지난번 다빈이 자신을 거절하며 ‘예전과 달라져서 이제는 잘 참는다’고 쏘아붙였던 게 생각나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빈은 별달리 표정의 변화가 없다.
이젠 선우가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라, 정말이지 그저 편한 선배나 오빠처럼 느껴졌다.
“잘 챙겨 먹는데 오늘은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다빈은 그렇게 말하다, 조금 전 한결과 함께 거닐었던 전나무길이 떠올랐다. 그 길에서 나란히 손잡으며 걷는 모습, 한결이 업어 주던 모습, 마침내 키스까지 이어지던 모습이 그대로 떠올라 얼굴까지 붉어졌다.
다빈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선우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큰길 앞에 오모가리 찌개 맛있게 하는 집도 있고, 설렁탕 맛있게 하는 집도 거기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있어. 오빤 어떤 게 좋아?”
선우는 다빈의 말에 고개를 돌려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녀석 아직도 식성은 그대로구나.
근처에서 간단히 먹자던 다빈의 말과 달리 선우는 한참을 차를 몰아, 정원이 잘 가꾸어진 한 고급 한정식집 앞에 차를 멈췄다.
“이렇게 좋은 데까진 올 필요는 없는데”
“오랜만에 밥 사는데, 좀 괜찮은 데서 사야 밥 샀다고 생색이라도 내지. 대신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기대 하면 안 된다? 알겠지? 후훗”
다빈이 혹시라도 부담스러워 할까 봐 먼저 장난스레 받아치는 선우였다.
***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면이 완전히 통유리로 되어 있어 정원의 운치가 그대로 들어왔다. 해 질 녘 석양이 내려앉으면서 멋진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다가와 물었다.
“룸으로 안내할까요?”
얼굴이 알려진 다빈에겐 그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러겠다고 하자, 다빈은 창문서 야경을 보며 식사를 하고 싶다며 창가 자리를 청했다.
지배인이 아직은 비어있는 창가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메뉴판을 건넸다. 지배인의 추천을 받아 이 집에서 가장 잘한다는 메뉴를 골라 2인분을 시키고 나자 지배인이 자리를 떴다.
그때였다.
모자를 눌러 쓰긴 했지만, 다빈과 가까운 테이블 쪽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수근 거리기 시작한 게.
“유다빈 아냐? 김한결 이화연이랑 사귄다더니 유다빈도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나 봐!”
작게 수군거렸지만, 그 소리는 멀지 않은 다빈에게 그대로 들렸다.
“?!”
속닥이는 소리는 이어졌다.
“<연우결>에서 나눠 낀 반지도 이화연한테 준 거랑 똑같은 거래. 이화연이랑 평소에 같이 끼고 다니려고 일부러 오해 안 받게 유다빈한테 준거라잖아.”
“!!”
한결 씨가 이화연이랑 사귄다니, 거기다 반지 얘기까지 대체 무슨 소린 거야?!
다빈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빈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선우가 관심을 돌리려 서둘러 말을 꺼냈다.
“다빈아 너 새로 드라마 들어갔지? 영화는 관심 없”
하는데 다빈이 말을 잘랐다.
“오빠 잠깐만 조용해 줄래”
옆 테이블의 대화를 계속 듣기 위해서였다.
선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 오늘 그 기사 뜨고 완전 깜놀 했잖아. <연우결>에서 그렇게 달달한 척하더니 애인 따로 두고. 그것도 같은 소속사 이화연이라니! 김한결 완전 실망이야.”
“야아…. 실망스럽긴 해도, 그래도 난 여전히 김한결 좋아. 호호. 어차피 방송이 다 그런 거지 뭐.”
오늘 기사?
다빈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나이버’로 들어갔다. 메인에는 한결과 화연이 다정히 팔짱을 낀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밑에는 화연의 동영상 인터뷰가 링크되어 있었다.
다빈은 떨리는 손을 눌러 기사를 읽어나갔다.
기사 따위라면 잘못된 스캔들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대체 뭐라고 설명할 텐가.
기사를 다 읽은 다빈은 다시, 동영상 인터뷰를 눌렀다.
인터뷰에서 화연은 한결과의 열애에 대해 고스란히 인정하고 있었다!!
세상에!!
조금 전, 전나무길에서 소속사 대표의 전화를 받자마자 굳은 표정이 돼서 서둘러 떠난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금까지 내게 한 말과 행동은 다 거짓이었던 거야?
그렇게 다정했던 건 모두 방송을 위한 연기였던 거야?!
그럼, 나랑 한 키스는?! 조금 전까지 우린 키스를 나누다 헤어졌는데……
이화연과 사귀고 있었던 거라고?? 그것도 데뷔 초부터?!
이화연과 그런 사이였으면서, 내게 그랬던 거야? 1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다빈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자 선우가 살며시 다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하는구나.
무슨 사정이 있겠지. 너무 실망하지 마라 다빈아.
네가 그런 표정 지으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다빈아…… 괜찮아?”
“…… 오빠, 미안한데 나 식사는 못 하겠다.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점심도 굶었다며, 밥이라도 먹고 가.”
선우는 덜덜 떨리는 다빈의 손을 잡아주고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 모습은 그녀가 다빈인 걸 알아본,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오지랖 넓은 이들은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급기야 핸드폰을 꺼내 몰래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IT 강국의 국민답게 곧장 자신의 SNS에 올렸다.
‘나 여기 OO 식당서 유다빈 애인과 손잡고 있는 거 봄#유다빈 애인과 데이트 중#유다빈 애인 완전 잘생김#<연우결>은 다 방송일 뿐이었나 봄’
이 포스트는 올리자마자 순식간에 여기저기 퍼져 엄청난 댓글을 만들어냈다.
다빈을 내려주고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핸드폰으로 대강의 기사를 확인한 후였다….
굳은 표정으로 화연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한결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사실이 아니란 건 일단 알려야 하잖아요”
“음…. 우선 아니라는 해명 기사 내보내고, 법적 준비 해서 저쪽에서 오보 기사 인정하고 정정기사 내보내도록 해야지”
“그러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요, 그때까지 다른 문젠 없는 거예요?”
그때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옆에 있던 화연의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는 대표인 은표가 아직 외부에 있으니 핸드폰으로 해봐라, 이후에 공식 입장을 내겠다며 은표를 찾는 전화를 따돌렸다. 이어 전화를 끊은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한결 씨 광고주예요.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묻는 걸 외부 출타 중이라고 둘러 됐습니다만 오래 기다려 줄 것 같진 않은데요”
“…….”
“…….”
“…….”
이 상황을 마주한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말을 떼지 못한 채, 심각한 얼굴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선우의 사무실.
선우는 결재서류를 검토하다 무심코 포털 사이트 ‘나이버’에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실검 1순위도 ‘김한결 이화연 열애’였다.
검토 중이던 서류를 내려놓고 마우스를 움직여 기사를 클릭했다. 구체적인 내용과 사진, 기사 내용만 보면 영락없이 열애 중이라 오해할 만했다.
그러나 다빈을 향하던 한결의 눈빛을 선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하던 숨겨진 적개심까지! 그런 김한결이 이화연과 열애 중일 리는 없다. 기자들의 애꿎은 특종싸움에 놀아나는 이 바닥의 흔한 억지 스캔들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빈이었다. 그녀가 이 기사를 본다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다빈이 걱정된 선우는 다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빈아, 바쁜 데 전화 건 거야?”
“아니, 괜찮아”
다행히도 막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에선 특별한 게 느껴지질 않았다.
‘자고 있었던 건가…’
“자고 있었니?”
“응. 어딜 좀 나갔다 왔더니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었어.”
‘그래서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근데 웬일이야?”
“별건 아니고. 외부에 일 있어서 나왔던 참인데, 마침 너희 동네 근처잖아. 집에 있으면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고.”
“음……글쎄”
다빈이 망설였다.
“야, 걱정하지 마. 그냥 친구로 저녁이나 먹자는 거야. 미라도 같이 있으면 불러도 좋고”
뭐, 새삼스레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알았어. 그럼 미팅 언제 끝나?”
“한 시간쯤 후에?”
“알았어. 그럼 간단히 밥이나 먹어”
“응! 집 근처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할게.”
“근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동안 너, 일거수일투족 나 다 알고 있었어. 네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뿐이지.”
“……”
“근처 도착해서 연락할게. 이따가 봐”
“……응”
전화를 끊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나를 지켜봐 왔던 거구나. 그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날 버리진 않았었구나.
다빈은 선우에 대한 측은함이 밀려와 가슴 한편이 시려왔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여전히 그가 예전처럼 사랑스럽다든지, 그의 말 한마디에 가슴 설레는 따위의 감정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옛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친절한 선배의 배려 정도로 느껴질 뿐이었다.
전화를 끊자 다빈도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씻고 화장하고, 준비하고 있으면 얼추 선우가 도착할 시간이 될 듯했다.
통화를 마친 선우 역시도 들고 있던 결재 서류를 덮고, 사무실을 나섰다. 선우의 사무실에서 다빈의 아파트까지는 교통 상황을 감안해 1시간 정도 걸릴 듯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의 예상대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서울시 교통 상황은 온통 정체였고, 평소 같으면
2~3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1시간이 다 되어서야 다빈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
다빈의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 입구 앞쪽에 차를 주차하고는 다빈에게 전화를 했다. 준비를 마친 다빈이 경쾌한 캐주얼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채 아파트 동 입구에서 나왔다.
모자까지 쓰고 나온 걸 보니, ‘아 이제 다빈이도 예전에 내가 알던 유다빈이 아니구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연예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곧 털어버리고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다빈을 태웠다.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신경 쓰여?”
다빈이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전벨트를 매자 선우는 시동을 걸었다.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귀찮은 일 생기는 것보단 낫잖아. 요즘은 SNS도 워낙 많이들 하니 누가 어디서 뭐 하는지 검색만 하면 실시간으로 다 뜨잖아. ‘지금 여기 어딘데 여기서 누구 봤어요.’ 하고”
“음…… 그런가.”
“나야 뭐, 그렇게 유명하진 않아서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푸힛”
“사람들 시선 일일이 신경 쓰고 사는 거 불편하겠다……”
“아냐 난 그럴 정도의 인기는 아니라니까”
새삼 쑥스러워진 다빈이 절레절레 손까지 흔들며 부정했다.
“알았어. 밥은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람들 별로 없는 데로 가야겠네”
“아냐 오빠 좋은 데로 가. 점심을 걸렀더니 배고파서 뭐든 다 괜찮을 것 같아.”
“점심을 왜 걸렀어? 혼자 있어도 잘 챙겨 먹어야지. 너 배고픈 거 못 참…….”
‘못 참잖아’라고 말하려다, 지난번 다빈이 자신을 거절하며 ‘예전과 달라져서 이제는 잘 참는다’고 쏘아붙였던 게 생각나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빈은 별달리 표정의 변화가 없다.
이젠 선우가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라, 정말이지 그저 편한 선배나 오빠처럼 느껴졌다.
“잘 챙겨 먹는데 오늘은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다빈은 그렇게 말하다, 조금 전 한결과 함께 거닐었던 전나무길이 떠올랐다. 그 길에서 나란히 손잡으며 걷는 모습, 한결이 업어 주던 모습, 마침내 키스까지 이어지던 모습이 그대로 떠올라 얼굴까지 붉어졌다.
다빈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선우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큰길 앞에 오모가리 찌개 맛있게 하는 집도 있고, 설렁탕 맛있게 하는 집도 거기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있어. 오빤 어떤 게 좋아?”
선우는 다빈의 말에 고개를 돌려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녀석 아직도 식성은 그대로구나.
근처에서 간단히 먹자던 다빈의 말과 달리 선우는 한참을 차를 몰아, 정원이 잘 가꾸어진 한 고급 한정식집 앞에 차를 멈췄다.
“이렇게 좋은 데까진 올 필요는 없는데”
“오랜만에 밥 사는데, 좀 괜찮은 데서 사야 밥 샀다고 생색이라도 내지. 대신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기대 하면 안 된다? 알겠지? 후훗”
다빈이 혹시라도 부담스러워 할까 봐 먼저 장난스레 받아치는 선우였다.
***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면이 완전히 통유리로 되어 있어 정원의 운치가 그대로 들어왔다. 해 질 녘 석양이 내려앉으면서 멋진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다가와 물었다.
“룸으로 안내할까요?”
얼굴이 알려진 다빈에겐 그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러겠다고 하자, 다빈은 창문서 야경을 보며 식사를 하고 싶다며 창가 자리를 청했다.
지배인이 아직은 비어있는 창가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메뉴판을 건넸다. 지배인의 추천을 받아 이 집에서 가장 잘한다는 메뉴를 골라 2인분을 시키고 나자 지배인이 자리를 떴다.
그때였다.
모자를 눌러 쓰긴 했지만, 다빈과 가까운 테이블 쪽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수근 거리기 시작한 게.
“유다빈 아냐? 김한결 이화연이랑 사귄다더니 유다빈도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나 봐!”
작게 수군거렸지만, 그 소리는 멀지 않은 다빈에게 그대로 들렸다.
“?!”
속닥이는 소리는 이어졌다.
“<연우결>에서 나눠 낀 반지도 이화연한테 준 거랑 똑같은 거래. 이화연이랑 평소에 같이 끼고 다니려고 일부러 오해 안 받게 유다빈한테 준거라잖아.”
“!!”
한결 씨가 이화연이랑 사귄다니, 거기다 반지 얘기까지 대체 무슨 소린 거야?!
다빈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빈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선우가 관심을 돌리려 서둘러 말을 꺼냈다.
“다빈아 너 새로 드라마 들어갔지? 영화는 관심 없”
하는데 다빈이 말을 잘랐다.
“오빠 잠깐만 조용해 줄래”
옆 테이블의 대화를 계속 듣기 위해서였다.
선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 오늘 그 기사 뜨고 완전 깜놀 했잖아. <연우결>에서 그렇게 달달한 척하더니 애인 따로 두고. 그것도 같은 소속사 이화연이라니! 김한결 완전 실망이야.”
“야아…. 실망스럽긴 해도, 그래도 난 여전히 김한결 좋아. 호호. 어차피 방송이 다 그런 거지 뭐.”
오늘 기사?
다빈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나이버’로 들어갔다. 메인에는 한결과 화연이 다정히 팔짱을 낀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밑에는 화연의 동영상 인터뷰가 링크되어 있었다.
다빈은 떨리는 손을 눌러 기사를 읽어나갔다.
기사 따위라면 잘못된 스캔들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대체 뭐라고 설명할 텐가.
기사를 다 읽은 다빈은 다시, 동영상 인터뷰를 눌렀다.
인터뷰에서 화연은 한결과의 열애에 대해 고스란히 인정하고 있었다!!
세상에!!
조금 전, 전나무길에서 소속사 대표의 전화를 받자마자 굳은 표정이 돼서 서둘러 떠난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금까지 내게 한 말과 행동은 다 거짓이었던 거야?
그렇게 다정했던 건 모두 방송을 위한 연기였던 거야?!
그럼, 나랑 한 키스는?! 조금 전까지 우린 키스를 나누다 헤어졌는데……
이화연과 사귀고 있었던 거라고?? 그것도 데뷔 초부터?!
이화연과 그런 사이였으면서, 내게 그랬던 거야? 1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다빈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자 선우가 살며시 다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하는구나.
무슨 사정이 있겠지. 너무 실망하지 마라 다빈아.
네가 그런 표정 지으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다빈아…… 괜찮아?”
“…… 오빠, 미안한데 나 식사는 못 하겠다.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점심도 굶었다며, 밥이라도 먹고 가.”
선우는 덜덜 떨리는 다빈의 손을 잡아주고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 모습은 그녀가 다빈인 걸 알아본,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오지랖 넓은 이들은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급기야 핸드폰을 꺼내 몰래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IT 강국의 국민답게 곧장 자신의 SNS에 올렸다.
‘나 여기 OO 식당서 유다빈 애인과 손잡고 있는 거 봄#유다빈 애인과 데이트 중#유다빈 애인 완전 잘생김#<연우결>은 다 방송일 뿐이었나 봄’
이 포스트는 올리자마자 순식간에 여기저기 퍼져 엄청난 댓글을 만들어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3화 - 우리 그냥 열애설 인정하자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던 선우는이 상태로는 식사든 뭐든 불가능할 것 같아 다빈의 뜻에 따랐다.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러자. 데려다줄게. 일어나”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빈의 가방을 선우가 대신 들고는, 다빈의 반대쪽 어깨를 살짝 잡아 에스코트해 식당을 나갔다.
둘의 이런 모습이 그대로 남들의 핸드폰의 담기고 있으리란 걸 둘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한결의 소속사 사무실.
은표는 대표실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결이 가장 걱정되는 건 다빈이었다. 해명을 해봐야 어떤 말도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일단 통화부터 하자. 변명하든, 이해를 시키든 일단 그녀의 목소리부터 들어야겠어!
한결이 핸드폰에서 다빈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런데 한참을 들고 있어도 신호음만 떨어질 뿐 다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다빈,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전화 받아!’
다시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한결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 시각에 가방 안에 핸드폰을 넣어둔 다빈은 충격적인 기사에 망연자실하여 선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오르고 있었다.
진동으로 된 전화기가 가방 속에서 울리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불안감에 떨고 있는 가운데 은표가 책상에서 내려와 한결을 마주하고 앉았다.
은표는 끊었던 담배를 꺼내 들고 와서는, 여기가 사무실이란 사실도 망각한 채 몇 번이고 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한결아……”
“?”
은표는 무겁게 입을 뗐다.
“우리 그냥 열애설 인정하자!”
“형님!!”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열애설을 부정하면, 맞네! 아니네, 더 시끄러워져서 이미지가 더 안 좋아져. 그러니 그냥 인정하자.”
“그냥 열애설 인정하고, 화연이랑 예쁘게 사귀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미지엔 크게 타격을 주진 않을 거야. 시끄러운 잡음이 일지 않으면 광고주들도 배상 얘기까진 꺼내지 않을 테고. 일단 네 이미지가 실추되는 걸 막아야 해. 그게 네게도 화연이에게도 최선이야. 그리고 몇십억 배상이라도 하라고 하면 우리 모두 망해, 한결아”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 가장 염려되는 건 다빈이었다.
이런 상황을 다빈도 과연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지금 다빈은 전화조차 되지 않는다.
실망감에 혼자서 울고나 있진 않을지 온 신경은 자신에게 닥친 최악의 스캔들이 아니라 오직 다빈에게 쏠려 있었다.
“형님….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근데 열애를 인정하라뇨”
“안다. 다빈 씨에게 너 특별한 감정 있는 거”
“근데, 지금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너 다빈 씨랑 이어질 수도 없어. 계속해서 언론이랑 팬들이 화연이랑 네 관계 들쑤실 텐데, 다빈 씨와 잘 될 수 있을 거 같아?”
“……”
한결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그냥 인정하고, 이 일이 잠잠해지면 몇 달 뒤에 자연스럽게 결별기사 내자. 다빈 씨한테도 그다음에 고백하면 되잖아. 지금 이 상황에선 그게 최선인 거 같다.”
“……”
“그리고 네가 끝까지 아니라고 하면, 화연이 걔는 어떡하냐? 떡하니 너랑 같은 반지까지 끼고 인터뷰까지 했는데.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여배우가 남자 스타 꼬시려다 거짓말한 이미지밖에 더 남겠냐. 그렇게 해서 방송 생활 더 할 수 있겠어? 걘 그럼 여기서 끝이야.”
한결도 더는 어떡할 수 없었다. 은표의 말대로 지금 여기서 열애설을 인정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다빈이 걸렸다. 이렇게 열애설을 인정했다가 자칫 아직 제대로 갖지도 못한 다빈의 마음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형님, 시간을 좀 주세요”
그리고는 한결이 일어났다.
***
한결은 곧장 차를 달려 다빈의 아파트를 향했다. 다빈의 아파트 앞 주차장. 계속해서 다빈과 전화연결이 되지 않아 한결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갔다.
그런데 잠시 후 고급외제차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낯설지 않은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차에서 내리더니 뒤로 돌아가 보조석 차 문을 열어 여자가 내리도록 도왔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리고 있는 건 바로, 다빈이었다!
내 전화 따윈 받지도 않고,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만나고 있는 사람이 옛사랑 한선우라니!
‘한선우와 있느라 내 전화를 못 받았던 거야?
둘이 다시 시작하기로라도 한 거야?!’
그래서 내 스캔들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난…… 당신이 상처받을까 걱정돼 이렇게 뛰어왔는데
그런 내게 보여주는 모습이 옛사랑을 다시 만나는 모습인 거야!
가슴속에서 불같은 화가 일어났다.
한결은 그대로 차를 돌려 아파트를 빠져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치솟는 화를 억누르고는 전화기를 눌렀다.
“……그렇게 해요, 형님. 그리고 내일 있을 녹화를 마지막으로 <연우결>도 하차할게요.”
- 그래! 그러자.
“내일 <연우결> 촬영 후에 기자회견 할 테니 기자회견 자리도 만들어주세요. 열애 인정 기자발표 할게요”
- 알았다, 잘 생각했다 한결아.
***
다음 날 <연우결> 촬영 현장.
촬영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한결도 다빈도 선뜻 서로를 찾지 못하고 다른 날과는 달리 각자의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로, 상대가 먼저 찾아와서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라면서.
다빈은 어제까지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내일 촬영장에서 만나면 다 설명해 주겠지 하며 안 좋은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그런데! 촬영장에 이미 도착하고서도 자신 앞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있다.
어제 세상이 떠들썩하게 스캔들이 났는데, 자신한테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않고 있는 한결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정말 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됐다.
그래 처음부터 내가 방송에 지나치게 몰입했던 건지도 몰라. 이건 어차피 가상이잖아. 실제 부부가 아니라 방송이라고.
그가 방송을 위해서 좀 달달한 멘트를 던지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던 것 모두 연기일 뿐인 거였다고!
그걸 바보처럼 오해했다니 유다빈,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었어?!
한결의 연기를 바보같이 진짜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
분명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믿어 달라고 말했었다. 아니 믿기 어려웠으면 내게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그 순간에 한선우와 만나고 있는 건 대체 뭐야. 왜? 옛 애인이 찾아와서 다시 만나자고 하니까, 금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나는 신경도 안 쓰였나.
그렇게 한선우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그 와중에 당신 걱정밖에는 없었다. 나로 인해 당신까지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나 때문에 상처나 받지 않았을까. 오직 당신만 떠올랐다.
그런데 내 전화 따윈 안중에도 없더니, 오늘 촬영장에서조차 얼굴 한 번 안 보이는군. 한결과 다빈이 각자의 생각에만 빠져있는동안 촬영 준비가 끝나고 FD가 두 사람에게 촬영 시작을 알렸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처음 보던 날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한 두 사람. 다행인지 오늘 촬영은 두 사람만 하는 게 아니었다. 함께 <연우결>에 출연 중인 지한-민아 커플과 함께 여행 상품권을 두고 게임을 하는 콘셉트였다.
방송을 통해 계속 봐 왔던 얼굴이라 그런지 처음 봤음에도 그다지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만 촬영하는 것보다 게임을 하는 게 더 자연스럽겠단 생각이 들어 다빈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첫 번째 게임은 커플 다트였다. 두 부부가 번갈아 다트판에 다트를 날려 더 점수가 높은 편이 이기는 게임.지한,민아 커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상대에게 파이팅을 외쳐주는 등 알콩달콩열심히 파트너를 응원했다. 서로의 응원 때문이지 던지는 속속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와~~ 민아가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다음으로 한결,다빈의 차례. 기분이 아무리 좋지 않은 상태여도 이건 방송! 다빈이 다트를 던지려는 한결을 향해 파이팅을 한 번 외쳐줬다. 한결이 파이팅에 화답하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실제로는 다빈을 보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쳐다보면서였다. 방송에선 다빈을 향해 웃어 보이는 듯해 보였으나, 시선이 전혀 다빈을 향하지 않았다는 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다.
다빈은 언짢았다.
뭐야… 누군 파이팅 외쳐 주고 싶은 줄 아나. 이제 열애설 공개됐다고 대놓고 저러나.
다음은 다빈의 차례. 좀 전의 한결의 행동에 더 기분이 상해져 다트 과녁에 영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이까짓 것 될 대로 되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점수는 처참했다. 4점, 5점, 2점!
지한-민아 커플이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며 환호의 소리를 질러댔다.
한결이 다가와
“괜찮아 다음 게임 잘하면 돼”
하며 다빈을 위로했다.
‘저 위선…… 역시, 대단한 연기자네.’
다음 게임은 식초 마시기!
한 컵 가득 담긴 식초를 두 사람이 나눠 마셔, 누가 더 빨리 마시나 하는 게임이었다. 한 컵에 2개의 빨대를 꽂아 마시는 게임이라 한 사람이 적게 마시면 다른 한 사람이 다 마셔야 하는 게임.
다빈은 한결을 골탕먹이고 싶어졌다.
시작 소리와 함께 초시계가 째깍째깍 지나가자 두 커플은 서둘러 빨대를 빨기 시작했다. 몇 모금이나 마셨을까. 다빈이 콜록콜록 기침해댔다. 기침뿐인가, 얼굴까지 시뻘겋게 변해서는 캑캑거렸다. 시계는 계속 흐르고 있었고, 앞의 연출팀에서 빨리 마시라는 사인을 주었다. 결국, 한 컵 가득 남은 식초는 오롯이 한결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겉으로 식초에 사레 걸린 표정으로 캑캑거리고 있었지만, 다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쌤통이다.
이번 게임 역시도 지한-민아 커플의 승!
두 게임에서 모두 졌으니 이제 한 판만 더 지면 오늘 여행권 내기 커플 게임을 지한-민아 커플의 승리로 돌아갈 터였다.
마지막 게임은 커플게임에서 빠질 수 없는 남자의 힘 대결!
남자가 여자를 앉고 앉았다 일어서기. 먼저 여자의 몸이 땅에 닿거나, 앉았던 남자가 일어서지 못하면 지는 게임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한결에게 안겨야 하는 게임이라니! 영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던 선우는이 상태로는 식사든 뭐든 불가능할 것 같아 다빈의 뜻에 따랐다.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러자. 데려다줄게. 일어나”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빈의 가방을 선우가 대신 들고는, 다빈의 반대쪽 어깨를 살짝 잡아 에스코트해 식당을 나갔다.
둘의 이런 모습이 그대로 남들의 핸드폰의 담기고 있으리란 걸 둘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한결의 소속사 사무실.
은표는 대표실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결이 가장 걱정되는 건 다빈이었다. 해명을 해봐야 어떤 말도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일단 통화부터 하자. 변명하든, 이해를 시키든 일단 그녀의 목소리부터 들어야겠어!
한결이 핸드폰에서 다빈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런데 한참을 들고 있어도 신호음만 떨어질 뿐 다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다빈,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전화 받아!’
다시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한결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 시각에 가방 안에 핸드폰을 넣어둔 다빈은 충격적인 기사에 망연자실하여 선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오르고 있었다.
진동으로 된 전화기가 가방 속에서 울리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불안감에 떨고 있는 가운데 은표가 책상에서 내려와 한결을 마주하고 앉았다.
은표는 끊었던 담배를 꺼내 들고 와서는, 여기가 사무실이란 사실도 망각한 채 몇 번이고 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한결아……”
“?”
은표는 무겁게 입을 뗐다.
“우리 그냥 열애설 인정하자!”
“형님!!”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열애설을 부정하면, 맞네! 아니네, 더 시끄러워져서 이미지가 더 안 좋아져. 그러니 그냥 인정하자.”
“그냥 열애설 인정하고, 화연이랑 예쁘게 사귀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미지엔 크게 타격을 주진 않을 거야. 시끄러운 잡음이 일지 않으면 광고주들도 배상 얘기까진 꺼내지 않을 테고. 일단 네 이미지가 실추되는 걸 막아야 해. 그게 네게도 화연이에게도 최선이야. 그리고 몇십억 배상이라도 하라고 하면 우리 모두 망해, 한결아”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 가장 염려되는 건 다빈이었다.
이런 상황을 다빈도 과연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지금 다빈은 전화조차 되지 않는다.
실망감에 혼자서 울고나 있진 않을지 온 신경은 자신에게 닥친 최악의 스캔들이 아니라 오직 다빈에게 쏠려 있었다.
“형님….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근데 열애를 인정하라뇨”
“안다. 다빈 씨에게 너 특별한 감정 있는 거”
“근데, 지금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너 다빈 씨랑 이어질 수도 없어. 계속해서 언론이랑 팬들이 화연이랑 네 관계 들쑤실 텐데, 다빈 씨와 잘 될 수 있을 거 같아?”
“……”
한결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그냥 인정하고, 이 일이 잠잠해지면 몇 달 뒤에 자연스럽게 결별기사 내자. 다빈 씨한테도 그다음에 고백하면 되잖아. 지금 이 상황에선 그게 최선인 거 같다.”
“……”
“그리고 네가 끝까지 아니라고 하면, 화연이 걔는 어떡하냐? 떡하니 너랑 같은 반지까지 끼고 인터뷰까지 했는데.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여배우가 남자 스타 꼬시려다 거짓말한 이미지밖에 더 남겠냐. 그렇게 해서 방송 생활 더 할 수 있겠어? 걘 그럼 여기서 끝이야.”
한결도 더는 어떡할 수 없었다. 은표의 말대로 지금 여기서 열애설을 인정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다빈이 걸렸다. 이렇게 열애설을 인정했다가 자칫 아직 제대로 갖지도 못한 다빈의 마음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형님, 시간을 좀 주세요”
그리고는 한결이 일어났다.
***
한결은 곧장 차를 달려 다빈의 아파트를 향했다. 다빈의 아파트 앞 주차장. 계속해서 다빈과 전화연결이 되지 않아 한결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갔다.
그런데 잠시 후 고급외제차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낯설지 않은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차에서 내리더니 뒤로 돌아가 보조석 차 문을 열어 여자가 내리도록 도왔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리고 있는 건 바로, 다빈이었다!
내 전화 따윈 받지도 않고,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만나고 있는 사람이 옛사랑 한선우라니!
‘한선우와 있느라 내 전화를 못 받았던 거야?
둘이 다시 시작하기로라도 한 거야?!’
그래서 내 스캔들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난…… 당신이 상처받을까 걱정돼 이렇게 뛰어왔는데
그런 내게 보여주는 모습이 옛사랑을 다시 만나는 모습인 거야!
가슴속에서 불같은 화가 일어났다.
한결은 그대로 차를 돌려 아파트를 빠져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치솟는 화를 억누르고는 전화기를 눌렀다.
“……그렇게 해요, 형님. 그리고 내일 있을 녹화를 마지막으로 <연우결>도 하차할게요.”
- 그래! 그러자.
“내일 <연우결> 촬영 후에 기자회견 할 테니 기자회견 자리도 만들어주세요. 열애 인정 기자발표 할게요”
- 알았다, 잘 생각했다 한결아.
***
다음 날 <연우결> 촬영 현장.
촬영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한결도 다빈도 선뜻 서로를 찾지 못하고 다른 날과는 달리 각자의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로, 상대가 먼저 찾아와서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라면서.
다빈은 어제까지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내일 촬영장에서 만나면 다 설명해 주겠지 하며 안 좋은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그런데! 촬영장에 이미 도착하고서도 자신 앞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있다.
어제 세상이 떠들썩하게 스캔들이 났는데, 자신한테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않고 있는 한결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정말 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됐다.
그래 처음부터 내가 방송에 지나치게 몰입했던 건지도 몰라. 이건 어차피 가상이잖아. 실제 부부가 아니라 방송이라고.
그가 방송을 위해서 좀 달달한 멘트를 던지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던 것 모두 연기일 뿐인 거였다고!
그걸 바보처럼 오해했다니 유다빈,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었어?!
한결의 연기를 바보같이 진짜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
분명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믿어 달라고 말했었다. 아니 믿기 어려웠으면 내게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그 순간에 한선우와 만나고 있는 건 대체 뭐야. 왜? 옛 애인이 찾아와서 다시 만나자고 하니까, 금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나는 신경도 안 쓰였나.
그렇게 한선우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그 와중에 당신 걱정밖에는 없었다. 나로 인해 당신까지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나 때문에 상처나 받지 않았을까. 오직 당신만 떠올랐다.
그런데 내 전화 따윈 안중에도 없더니, 오늘 촬영장에서조차 얼굴 한 번 안 보이는군. 한결과 다빈이 각자의 생각에만 빠져있는동안 촬영 준비가 끝나고 FD가 두 사람에게 촬영 시작을 알렸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처음 보던 날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한 두 사람. 다행인지 오늘 촬영은 두 사람만 하는 게 아니었다. 함께 <연우결>에 출연 중인 지한-민아 커플과 함께 여행 상품권을 두고 게임을 하는 콘셉트였다.
방송을 통해 계속 봐 왔던 얼굴이라 그런지 처음 봤음에도 그다지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만 촬영하는 것보다 게임을 하는 게 더 자연스럽겠단 생각이 들어 다빈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첫 번째 게임은 커플 다트였다. 두 부부가 번갈아 다트판에 다트를 날려 더 점수가 높은 편이 이기는 게임.지한,민아 커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상대에게 파이팅을 외쳐주는 등 알콩달콩열심히 파트너를 응원했다. 서로의 응원 때문이지 던지는 속속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와~~ 민아가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다음으로 한결,다빈의 차례. 기분이 아무리 좋지 않은 상태여도 이건 방송! 다빈이 다트를 던지려는 한결을 향해 파이팅을 한 번 외쳐줬다. 한결이 파이팅에 화답하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실제로는 다빈을 보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쳐다보면서였다. 방송에선 다빈을 향해 웃어 보이는 듯해 보였으나, 시선이 전혀 다빈을 향하지 않았다는 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다.
다빈은 언짢았다.
뭐야… 누군 파이팅 외쳐 주고 싶은 줄 아나. 이제 열애설 공개됐다고 대놓고 저러나.
다음은 다빈의 차례. 좀 전의 한결의 행동에 더 기분이 상해져 다트 과녁에 영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이까짓 것 될 대로 되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점수는 처참했다. 4점, 5점, 2점!
지한-민아 커플이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며 환호의 소리를 질러댔다.
한결이 다가와
“괜찮아 다음 게임 잘하면 돼”
하며 다빈을 위로했다.
‘저 위선…… 역시, 대단한 연기자네.’
다음 게임은 식초 마시기!
한 컵 가득 담긴 식초를 두 사람이 나눠 마셔, 누가 더 빨리 마시나 하는 게임이었다. 한 컵에 2개의 빨대를 꽂아 마시는 게임이라 한 사람이 적게 마시면 다른 한 사람이 다 마셔야 하는 게임.
다빈은 한결을 골탕먹이고 싶어졌다.
시작 소리와 함께 초시계가 째깍째깍 지나가자 두 커플은 서둘러 빨대를 빨기 시작했다. 몇 모금이나 마셨을까. 다빈이 콜록콜록 기침해댔다. 기침뿐인가, 얼굴까지 시뻘겋게 변해서는 캑캑거렸다. 시계는 계속 흐르고 있었고, 앞의 연출팀에서 빨리 마시라는 사인을 주었다. 결국, 한 컵 가득 남은 식초는 오롯이 한결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겉으로 식초에 사레 걸린 표정으로 캑캑거리고 있었지만, 다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쌤통이다.
이번 게임 역시도 지한-민아 커플의 승!
두 게임에서 모두 졌으니 이제 한 판만 더 지면 오늘 여행권 내기 커플 게임을 지한-민아 커플의 승리로 돌아갈 터였다.
마지막 게임은 커플게임에서 빠질 수 없는 남자의 힘 대결!
남자가 여자를 앉고 앉았다 일어서기. 먼저 여자의 몸이 땅에 닿거나, 앉았던 남자가 일어서지 못하면 지는 게임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한결에게 안겨야 하는 게임이라니! 영 탐탁지 않았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4화 - 두 사람의 가상 결혼이 오늘로 종료 됩니다.
상대 커플인 지한이 먼저 민아를 안아 올리고는, 한결을 향해 팔심 빠지니 어서 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한결이 다빈의 어깨와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한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건만 한결의 품에 안겨 들려지고, 가까이에 있는 그의 얼굴에서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니 가슴이 먼저 콩닥 이기 시작했다.
주책이다 유다빈.
지금 김한결은 너 따윈 관심에도 없다고. 오로지 방송 때문에 널 안은 것뿐이야. 그런데도 이렇게 떨려 하고 싶니? 제발 정신 차리자, 정신!
FD의 카운터링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두 커플 모두 앉았다 일어났다.
“두울, 셋, 넷. 다섯……”
아직은 뭐 그다지 어렵지 않은 듯했다.
FD의 카운터링이 계속됐다.
“열…… 스물하나, 스물 둘…….”
이제 두 남자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얼굴뿐인가, 등 쪽까지 땀이 흘러 옷이 젖어있었다.
“서른하나, 서른 두울, 서른 세엣……”
이쯤 되자, 앉았다 일어날 땐 “흡”하고 저도 모르게 큰 신음 소리가 내질러졌다.
뭘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나, 저러다 허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아니아니,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허리가 다치건 말건, 허벅지에 근육통이 오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상대 커플 민아는 지한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자신의 손바닥으로 닦아내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힘들면 그만해라. 져도 자신은 괜찮다며 지한을 다독여 주었다.
한결 역시도 힘들어 보였지만, 굳이 아는 체 해주고 싶지 않았다. 땀이 주르르 흘러 한결의 눈까지 흘러들어 갔다. 다빈은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얼굴조차 돌려버리다니, 그렇게까지 나를 대하고 싶지 않은 건가.
더 이상 게임을 이기겠다고 버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결은 그대로 다빈을 내려놓았다.
다빈이 내려오자 지한-민아가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 여행 상품권이 두 사람 앞에 내밀어 졌다. 둘은 함께 여행하자며 신이 나 포옹하며, 승리의 기쁨을 그대로 표현해 냈다.
숨을 고르는 한결과 다빈에게는 미션 봉투가 내밀어 졌다. 게임도 다 끝난 마당에 웬 미션봉투?
한결이 미션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 안의 미션 카드에는
- 두 사람의 가상 결혼이 오늘로 종료됩니다. 서로의 가슴에 있던 솔직한 얘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하세요.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가상결혼 종료!
언젠가 끝이 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그 날이 올 줄 몰랐다.
이렇게 세상 떠들썩한 스캔들이 났는데, 계속 <연우결>에 출연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쯤에서 내 마음도 정리하자. 차라리 얼굴을 안 보면 마음 정리하기도 쉬우리라.
마음을 정리하자며 자신을 독려하던 다빈이 슬쩍 한결의 모습을 살폈다.
조금의 동요로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연인이 따로 있는 입장에서 차라리 빨리 하차하고 싶겠지. 어차피 프로그램 출연도 소속사에서 시켜서 했을 테니.
앞에 있던 작가가 스케치북에 ‘각자 하고 싶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세요’를 적어 들어 보였다.
미션 카드를 확인한 두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지 않자, 연출팀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디렉션을 보내온 것이다.
한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이 우리 마지막…… 촬영이네.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솔직하게 하는 시간을 가지라는데 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부인은 하고 싶은 말이나, 혹시 못했던 말이 있어?”
“글쎄……”
못했던 말?
아니, 듣고 싶은 말은 있지.
이화연과의 열애에 대해서. 카메라가 돌아갈 때 하기 어려운 거라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적어도 가상이지만 부부로 출연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아닌가.
내 상식은 그런데, 김한결 넌 톱스타라 그런 배려 따윈 필요 없나 보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속으로만 되뇌었다.
방송용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대한 얘기였으므로.
지금 난 그저 프로그램에 충실히 안타깝게, 아쉽게 이별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 건 없고. 생각보다 가상부부로 지내는 기간이 짧아서 좀 아쉽긴 한데…… 그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동안 잘 챙겨줘서 고마웠어. 예능은 처음이었는데 남편이 연하고, 후배지만 많이 배운 것 같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라고?
스캔들을 얘기하는 거구나.
나를 탓하고 있구나.
그래 내 탓인 게지. 하지만 당신도 이번 하차가 반가운 거 아닌가.
어제 한선우와 함께 있는 거 다 봤다고!
“나도 그동안 정말 방송을 하는 건지, 실제인지 모를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그런 시간 만들어 줘서 고맙고. 내가 실망스러운 행동을 했다면, 이해해주고 용서해 주길 빌게. 다음에 보게 될 땐 더 좋은 모습 보여줄게.”
한결 역시 매끄러운 마무리 멘트를 전했다.
“마지막인데, 우리 한 번 안아주고 끝을 낼까?”
“??”
다빈은 순간, ‘혹시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다 방송을 위한 연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더 의미를 두지 말고 딱 방송용 정도로만 받아주면 될 일.
한결이 팔을 벌리자, 다빈이 한결의 품으로 들어가 살포시 안겼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한결이 더 세게 다빈을 안았다.
“……이게 끝이 아니야.”
한결이 다빈의 귀에 대고 방송에는 나가지 않게 아주 작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빈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한결을 쳐다보았다.
한결은 말없이 다빈을 놓아주었다.
지금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서운하기도, 아쉽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마지막 한결의 표정이 영 찝찝했지만, 다빈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이젠 물어볼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PD의 “컷” 소리가 외쳐지고, 신 PD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 그동안 수고했어요. 스캔들이 사실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캔들만 아니었으면 더 오래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프로그램에 폐를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셈이긴 하지만, 뭐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또 봐요. 이 프로만 있는 게 아니니”
“네. PD님”
신 PD가 다빈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빈 씨, 고마웠어요. 다빈 씨 매력이 너무 많아 좀 더 프로를 오래 했으면 이번에 확실히 뜰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우리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만나요”
“네 PD님. 저도 덕분에 많이 배웠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때 한결의 매니저가 다가와 한결에게 조용히 말을 전했다.
“형, 기자회견 갈 시간 다 됐어요”
“……. 그래, 가자”
분명히 할 말이 아주 많이 남아있었지만,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빈에게 사과의 말이라도 건넬까 하던 중에 은표가 촬영장에 오기 전에 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 너 오늘 현장에서 다빈 씨 만나도, 너무 다정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 게 좋겠다. 이미 열애설 인정하기로 한 마당에 너무 아쉬운 티를 내면 방송 나간 후 그것도 구설수에 오를 수 있어. 사실을 다빈 씨에게 털어놓는 것도 곤란해. 그게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우리 꼴 우습게 된다. 그러니 할 말 많겠지만, 적당히 예의 갖추는 선에서 인사하고 마무리하고 와. 앞으로도 공식적으로 결별설 내기 전까진 냉정하게 대하도록 하고. 뭐 얘깃거리 없나 하고 호시탐탐 지켜보는 눈이 많잖아. 알겠지?
연출진, 스태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던 다빈을 한결이 더할 수 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 이게 마지막……은 아닌 거겠지?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그때까지 한선우에게 너무 많이 다가가 있으면 안 돼.
그때, 고개를 돌리던 다빈과 자신을 향하고 있던 한결이 눈빛이 마주쳤다. 한결은 얼른 표정을 바꾸어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잘 지내고. 난 지금 다른 일정이 있어서 바로 가야 할 듯해”
“그래. 잘 지내”
휴.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다빈 역시도 아쉬움을 숨겼다. 따지고 보면 제대로 뭘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자.
이게 정말 한결과의 마지막 같아서 자꾸만 무너지려 하는 자신을 붙잡아 세웠다.
“근데 한결 씨, 이제 나를 뭐라고 부를 거야? 선배? 누나?”
중요한 것도 아닌 호칭 따위가 이 순간 너무나 궁금해졌다.
이 프로그램이야 여기서 끝이라 해도 앞으로 어떤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충분히 다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때가 되면 한결이 자신을 뭐라 부를까 궁금해졌다.
한결이 그때 만약 ‘선배’나 ‘누나’로 자신을 부른다면……!
가상이긴 해도 몇 달 동안 달달하게 ‘부인’ ‘남편’이라 칭했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선배’나 ‘누나’로 바뀌는 게 쉽게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글쎄. 그건 그때 보도록 해”
잊었어 유다빈?!
당신은 내게 선배나 누나 따윈 절대로 될 수 없다고 했잖아!
한결은 끝내 마음속 대답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한결이 사라지고 나자, 매니저 미라가 다가와 스마트폰 화면을 다빈에게 보여줬다.
“다빈아 너 이거 뭐야?”
미라가 보여준 화면에는 ‘김한결의 가상 아내 유다빈도 열애 중?’ 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빈과 선우가 마주 앉아 손을 포개고 있는 사진이 떡 하니 펼쳐졌다.
이건 어제 사진이잖아?! 이게 어떻게……?!
기사 내용은 어제 김한결이 스캔들 기사가 터진 가운데도 별 반응 없이 다빈이 남자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한 고급식당을 찾아 데이트를 즐겼다며, 김한결 유다빈 모두 자신의 진짜 열애 상대는 따로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김한결도 이 기사를 봤을까?
자신이 거론되는 가십 기사의 파장에는 아랑곳없이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한결이었다.
상대 커플인 지한이 먼저 민아를 안아 올리고는, 한결을 향해 팔심 빠지니 어서 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한결이 다빈의 어깨와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한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건만 한결의 품에 안겨 들려지고, 가까이에 있는 그의 얼굴에서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니 가슴이 먼저 콩닥 이기 시작했다.
주책이다 유다빈.
지금 김한결은 너 따윈 관심에도 없다고. 오로지 방송 때문에 널 안은 것뿐이야. 그런데도 이렇게 떨려 하고 싶니? 제발 정신 차리자, 정신!
FD의 카운터링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두 커플 모두 앉았다 일어났다.
“두울, 셋, 넷. 다섯……”
아직은 뭐 그다지 어렵지 않은 듯했다.
FD의 카운터링이 계속됐다.
“열…… 스물하나, 스물 둘…….”
이제 두 남자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얼굴뿐인가, 등 쪽까지 땀이 흘러 옷이 젖어있었다.
“서른하나, 서른 두울, 서른 세엣……”
이쯤 되자, 앉았다 일어날 땐 “흡”하고 저도 모르게 큰 신음 소리가 내질러졌다.
뭘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나, 저러다 허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아니아니,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허리가 다치건 말건, 허벅지에 근육통이 오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상대 커플 민아는 지한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자신의 손바닥으로 닦아내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힘들면 그만해라. 져도 자신은 괜찮다며 지한을 다독여 주었다.
한결 역시도 힘들어 보였지만, 굳이 아는 체 해주고 싶지 않았다. 땀이 주르르 흘러 한결의 눈까지 흘러들어 갔다. 다빈은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얼굴조차 돌려버리다니, 그렇게까지 나를 대하고 싶지 않은 건가.
더 이상 게임을 이기겠다고 버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한결은 그대로 다빈을 내려놓았다.
다빈이 내려오자 지한-민아가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 여행 상품권이 두 사람 앞에 내밀어 졌다. 둘은 함께 여행하자며 신이 나 포옹하며, 승리의 기쁨을 그대로 표현해 냈다.
숨을 고르는 한결과 다빈에게는 미션 봉투가 내밀어 졌다. 게임도 다 끝난 마당에 웬 미션봉투?
한결이 미션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 안의 미션 카드에는
- 두 사람의 가상 결혼이 오늘로 종료됩니다. 서로의 가슴에 있던 솔직한 얘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하세요.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가상결혼 종료!
언젠가 끝이 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그 날이 올 줄 몰랐다.
이렇게 세상 떠들썩한 스캔들이 났는데, 계속 <연우결>에 출연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쯤에서 내 마음도 정리하자. 차라리 얼굴을 안 보면 마음 정리하기도 쉬우리라.
마음을 정리하자며 자신을 독려하던 다빈이 슬쩍 한결의 모습을 살폈다.
조금의 동요로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연인이 따로 있는 입장에서 차라리 빨리 하차하고 싶겠지. 어차피 프로그램 출연도 소속사에서 시켜서 했을 테니.
앞에 있던 작가가 스케치북에 ‘각자 하고 싶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세요’를 적어 들어 보였다.
미션 카드를 확인한 두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지 않자, 연출팀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디렉션을 보내온 것이다.
한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이 우리 마지막…… 촬영이네.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솔직하게 하는 시간을 가지라는데 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부인은 하고 싶은 말이나, 혹시 못했던 말이 있어?”
“글쎄……”
못했던 말?
아니, 듣고 싶은 말은 있지.
이화연과의 열애에 대해서. 카메라가 돌아갈 때 하기 어려운 거라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적어도 가상이지만 부부로 출연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아닌가.
내 상식은 그런데, 김한결 넌 톱스타라 그런 배려 따윈 필요 없나 보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속으로만 되뇌었다.
방송용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대한 얘기였으므로.
지금 난 그저 프로그램에 충실히 안타깝게, 아쉽게 이별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 건 없고. 생각보다 가상부부로 지내는 기간이 짧아서 좀 아쉽긴 한데…… 그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동안 잘 챙겨줘서 고마웠어. 예능은 처음이었는데 남편이 연하고, 후배지만 많이 배운 것 같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라고?
스캔들을 얘기하는 거구나.
나를 탓하고 있구나.
그래 내 탓인 게지. 하지만 당신도 이번 하차가 반가운 거 아닌가.
어제 한선우와 함께 있는 거 다 봤다고!
“나도 그동안 정말 방송을 하는 건지, 실제인지 모를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그런 시간 만들어 줘서 고맙고. 내가 실망스러운 행동을 했다면, 이해해주고 용서해 주길 빌게. 다음에 보게 될 땐 더 좋은 모습 보여줄게.”
한결 역시 매끄러운 마무리 멘트를 전했다.
“마지막인데, 우리 한 번 안아주고 끝을 낼까?”
“??”
다빈은 순간, ‘혹시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다 방송을 위한 연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더 의미를 두지 말고 딱 방송용 정도로만 받아주면 될 일.
한결이 팔을 벌리자, 다빈이 한결의 품으로 들어가 살포시 안겼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한결이 더 세게 다빈을 안았다.
“……이게 끝이 아니야.”
한결이 다빈의 귀에 대고 방송에는 나가지 않게 아주 작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빈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한결을 쳐다보았다.
한결은 말없이 다빈을 놓아주었다.
지금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서운하기도, 아쉽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마지막 한결의 표정이 영 찝찝했지만, 다빈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이젠 물어볼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PD의 “컷” 소리가 외쳐지고, 신 PD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 그동안 수고했어요. 스캔들이 사실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캔들만 아니었으면 더 오래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프로그램에 폐를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셈이긴 하지만, 뭐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또 봐요. 이 프로만 있는 게 아니니”
“네. PD님”
신 PD가 다빈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빈 씨, 고마웠어요. 다빈 씨 매력이 너무 많아 좀 더 프로를 오래 했으면 이번에 확실히 뜰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우리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만나요”
“네 PD님. 저도 덕분에 많이 배웠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때 한결의 매니저가 다가와 한결에게 조용히 말을 전했다.
“형, 기자회견 갈 시간 다 됐어요”
“……. 그래, 가자”
분명히 할 말이 아주 많이 남아있었지만,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빈에게 사과의 말이라도 건넬까 하던 중에 은표가 촬영장에 오기 전에 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 너 오늘 현장에서 다빈 씨 만나도, 너무 다정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 게 좋겠다. 이미 열애설 인정하기로 한 마당에 너무 아쉬운 티를 내면 방송 나간 후 그것도 구설수에 오를 수 있어. 사실을 다빈 씨에게 털어놓는 것도 곤란해. 그게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우리 꼴 우습게 된다. 그러니 할 말 많겠지만, 적당히 예의 갖추는 선에서 인사하고 마무리하고 와. 앞으로도 공식적으로 결별설 내기 전까진 냉정하게 대하도록 하고. 뭐 얘깃거리 없나 하고 호시탐탐 지켜보는 눈이 많잖아. 알겠지?
연출진, 스태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던 다빈을 한결이 더할 수 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 이게 마지막……은 아닌 거겠지?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그때까지 한선우에게 너무 많이 다가가 있으면 안 돼.
그때, 고개를 돌리던 다빈과 자신을 향하고 있던 한결이 눈빛이 마주쳤다. 한결은 얼른 표정을 바꾸어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잘 지내고. 난 지금 다른 일정이 있어서 바로 가야 할 듯해”
“그래. 잘 지내”
휴.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다빈 역시도 아쉬움을 숨겼다. 따지고 보면 제대로 뭘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자.
이게 정말 한결과의 마지막 같아서 자꾸만 무너지려 하는 자신을 붙잡아 세웠다.
“근데 한결 씨, 이제 나를 뭐라고 부를 거야? 선배? 누나?”
중요한 것도 아닌 호칭 따위가 이 순간 너무나 궁금해졌다.
이 프로그램이야 여기서 끝이라 해도 앞으로 어떤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충분히 다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때가 되면 한결이 자신을 뭐라 부를까 궁금해졌다.
한결이 그때 만약 ‘선배’나 ‘누나’로 자신을 부른다면……!
가상이긴 해도 몇 달 동안 달달하게 ‘부인’ ‘남편’이라 칭했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선배’나 ‘누나’로 바뀌는 게 쉽게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글쎄. 그건 그때 보도록 해”
잊었어 유다빈?!
당신은 내게 선배나 누나 따윈 절대로 될 수 없다고 했잖아!
한결은 끝내 마음속 대답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한결이 사라지고 나자, 매니저 미라가 다가와 스마트폰 화면을 다빈에게 보여줬다.
“다빈아 너 이거 뭐야?”
미라가 보여준 화면에는 ‘김한결의 가상 아내 유다빈도 열애 중?’ 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빈과 선우가 마주 앉아 손을 포개고 있는 사진이 떡 하니 펼쳐졌다.
이건 어제 사진이잖아?! 이게 어떻게……?!
기사 내용은 어제 김한결이 스캔들 기사가 터진 가운데도 별 반응 없이 다빈이 남자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한 고급식당을 찾아 데이트를 즐겼다며, 김한결 유다빈 모두 자신의 진짜 열애 상대는 따로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김한결도 이 기사를 봤을까?
자신이 거론되는 가십 기사의 파장에는 아랑곳없이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한결이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5화 - 열애설 인정
“미라야 이거 그런 게 아니라, 선우 오빠가 근처 왔다고 밥이나 먹자고 해서 잠깐 봤던 거야.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밥도 안 먹고 헤어져 돌아왔는데……”
“그럼, 이 손은 뭐야? 손은 왜 잡고 있었어. 남들 다 보는 데서”
“그런 의미로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내가 좀 힘들어 보였는지 위로해 주는 거였어. 그 이상은 아냐. …그런데 이게 이렇게 사진으로 찍힐 줄 생각도 못 했어.”
“아휴……, 아니면 다행이구. 일단 홍보팀에 얘기해서 정정 기사 내도록 하자. 그런데 너 정말 아니지?”
“아니야, 아니라니까! 이젠 그냥 오빠랑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어. 그게 다야”
“근데, 난 사실 이 사진 보면서 속으로는 이게 진짜여도 괜찮겠다 생각했었는데. 아쉽다”
“이제 선우 오빠랑은 그럴 일 없어. 내 마음이 더 이상 그쪽을 향하지 않아”
“그럼? 다른 쪽에 있다는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선우 오빠에 대한 감정이 이젠 그런 감정이 아니라는 거지”
***
선우의 사무실
인터넷에 올려진 자신과 다빈의 기사를 확인한 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야 일반인이라 이런 구설수가 대수롭진 않지만 다빈에겐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집안에서도 이 기사를 보시게 될 텐데. 선우는 이 기사가 가져올 파장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우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실을 호출했다.
“네, 대표님”
“홍보팀 김 부장님 들어오시라고 좀 해 줘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호출을 받은 홍보팀 김 부장이 선우의 방에 들어섰다.
선우는 기사를 내보낸 해당 매체에 연락하여 기사를 내릴 것을 지시했다. 부탁이 안 통하면, W그룹의 이름이라도 팔아 어떤 식으로라도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 협박을 해서라도.
선우의 지시를 받은 김 부장은 곧장 홍보팀으로 돌아가 해당 매체에 반협박, 반 회유를 통해 기사를 내릴 것을 요구했다.
매체 측에서도 이렇게 얘깃거리가 좋은 기사를 한 번에 내려줄 리 없었지만, W그룹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 할 수 있는 보복조치에 대해서 쭉 한 번 읊어 줬더니 순순히 기사를 내리는 조처를 했다.
선우의 지시가 있은 지 30분도 채 안 되어, ‘나이버’에서 한결과 화연의 열애설 기사와 더불어 메인을 장식하던 선우와 다빈의 기사가 자취를 감췄다. 또한, 이미 퍼진 SNS야 막을 수 없었지만, 그게 포탈에서 검색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포털 사이트 운영팀에도 조처를 해 적어도 검색으로는 그 사진을 더는 볼 수 없게 했다.
홍보팀 김 부장에서 해당 조치에 대한 결과를 보고받은 선우가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한 대표님. 이 비서입니다. 회장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
아버지가? 벌써 기사를 보신 건가?
“나다!”
“네, 아버지”
“인터넷이 시끄럽더구나.”
벌써 보셨구나……
“죄송합니다. 지금 조처를 해 포탈에서는 모두 내렸습니다. 포탈 운영팀에도 얘기해 뒀으니 더 이상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처리했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룹 이미지도 있으니 괜히 연예인이랑 어울려서 가십거리 만드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그 애…… 혹시 예전에 만나던 그 아이 아니냐?”
“……”
“아직도 마음을 못 접은 게냐?”
“그런 거 아닙니다.”
이젠 자신의 마음 따윈 중요하지 않음을 아버지께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굳이 반대하지 않아도, 이미 다빈은 자신을 떠났다고.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주말에 들러라. 밥이나 같이 먹게”
“네”
부자의 대화는 간단히 끝났다.
***
한결의 기자회견장.
기자회견이 예정된 4시. 톱스타답게 기자회견이 마련된 호텔 컨벤션 장에는 꽉 들어찬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결이 등장하기 전, 소속사 사장 은표가 먼저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표 엔터테인먼트 홍은표 대푭니다. 먼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기자님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기자회견은 다른 질문은 받지 않고 김한결 씨의 발표문을 읽는 형식으로 그칠까 합니다. 그러니 기자님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뒤에 따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결의 손에 쥐어 쥔 스마트폰에 다빈의 기사가 펼쳐져 있다. 한결은 어제 다빈의 집 앞 주차장에서 본 선우와 다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선우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제길!
한결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형, 나가셔야 해요. 대표님 얘기 끝나가요”
한결은 매니저를 따라 대기실을 나갔다.
간단한 은표의 얘기가 끝나자 발표문을 든 한결이 컨벤션 홀 앞쪽 정 가운데에 마련된 연단 위로 올라섰다.
한결은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꽉 다문 입술은 열애설을 발표하러 나온 여느 스타와는 달리 비장한 모습이었다.
지금이라도 ‘열애설은 사실이 아니다. <연우결>에서 유다빈에게 보였던 마음은 진실이었다.’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자신의 몸은 이미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속사를 생각해야 했고, 친구인 화연을 생각해야 했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이런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담담한 톤으로 발표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인사말 이후 이어진 말은 화연과의 열애설이 사실이며 둘은 지금 예쁘게 사귀고 있다. 소속사 동료로 만나 우정을 쌓아오다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연우결>에 출연한 점 시청자와 팬들에게 사과 드린다. 앞으로도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며 연기활동 열심히 해 나갈 테니 예쁘게 지켜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10분여에 걸쳐 발표문을 읽은 한결이 ‘자리해준 기자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기자석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 김한결 씨, 유다빈 씨도 연인이 있다는 기사가 났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열애설이 터지고 나서 유다빈 씨와 따로 통화는 하셨나요? 했다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 조금 전에 <연우결> 마지막 촬영을 하고 오신 거로 아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 인터넷에는, 이번 열애설이 가짜고 <연우결>에서 유다빈 씨에게 보여준 행동이 진짜 같다는 의견을 내놓는 네티즌들도 있는데요,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이화연 씨와 사귀시면서 <연우결>에 출연하신 이유는 뭔가요?
- 김한결 씨! 김한결 씨! 하나만 대답해 주시죠!
여기저기서 미처 듣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으러 질문을 외치고 있었다.
한결은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떴다.
한결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은표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는
“기자님들 궁금한 점이 많으실 줄 압니다. 하지만 김한결 씨가 다음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더는 시간을 낼 수 없는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연예인이기 전에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건 개인사이니 지나친 관심은 자제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며 자리를 정리했다.
한결의 열애설 인정은 한결의 발표문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인터넷 매체를 통해 기사들로 쏟아져 나왔다.
[ 김한결 오늘 기자회견 통해 이화연과의 열애 인정! ]
[ 김한결, 이화연 열애, <연우결> 출연은 왜? ]
[ 김한결&이화연 친구에서 연인으로 ]
[ 열애 김한결, 예쁘게 사랑하며 연기활동도 열심히 하겠다. ]
***
다빈은 집으로 돌아오자, 온몸의 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따지고 보면 한결과 제대로 사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떠나 보낸 듯 허탈한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운하고, 화가 났다.
제대로 사귀기라도 한 후, 이런 스캔들을 알았다면 앞에 대고 화낼 자격이라도 있을 것을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방송을 같이해 도의적으로 좀 미안한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다! 어차피 5살이나 어린 남자잖아. 이런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 사람과 계속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을 거야. 한참 잘나가는데 그 마음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 되겠어.
이 나이에 사귀다 끝나면 그게 더 상처지.차라리 시작도 안 하고 끝난 게 더 나은 거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때 매니저 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빈……. 아”
수화기 너머의 미라의 말이 조심스러웠다.
“왜?”
“저기…… 있잖아…… 신 PD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연우결> 한 번만 보충 촬영해 주면 안 되겠냐고……”
“보충촬영? 이미 하차까지 한 마당에 뭘?”
“아 그게 <연우결>이 이번에 일본에 꽤 비싼 값에 팔리나 봐. 뭐 한류스타 김한결이 나오니 당연한 순서겠지. 근데 왜 일본 애들이 수위가 좀 높잖아”
“……그래서?”
“다른 커플들은 그래도 스킨십이 좀 있는데, 너희 커플은 너무 없다고, 그 부분만 조금 추가해달라고 요청했나 봐”
“그런 것도 추가로 보충 촬영하고 그러는 거야?”
“뭐 가상이긴 하지만, 대본이 따로 있는 프로는 아니라서 그런 경우는 없었는데 이번엔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해. 일본 쪽에서 워낙 높은 가격에 사겠다고 제시했는데 조건 사항이 그거 하나래. 그래서 신 PD님이 부탁 좀 한다고. 그냥 만나서 간단히 뭐 하나 하면서 스킨십 조금 해주면 그거 편집해서 다른 회차랑 연결해서 붙일 건가 봐.”
“아무리 방송이래도 이 상황에 좀 그렇다. 마음이 안 내켜”
“네가 그럴 줄 알았는데, 신 PD님 이번 개편 때 <연우결>을 끝으로 드라마국으로 옮긴대. 미니시리즈 들어간다는데 작가가 김우정이야. 알지? 로코의 여왕 김우정 작가! 이 작가가 하면 이건 뭐 바로 시청률 30% 찍고 주인공들 다 뜨고. 근데 거기 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대. <연우결> 때 널 엄청 좋게 봤나 봐. 그러니까 하자. 응? 응?”
“……”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이라……. 여태까지 조연급으로만 머물렀던 다빈에게 혹할만한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한결과 부딪쳐서 그 마음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지금도 이렇게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스킨십을 위한 보충촬영이라니!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김한결 씨 측에서도 찬성해야 보충촬영을 할 거 아냐?”
“그쪽은 걱정하지 마. 신 PD가 얘기했더니 바로 OK 했대. 프로에 그렇게 누를 끼쳤으니 뭐 도의적으로도 거절하기 힘들었겠지. 그러니까 너만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출연해주면 돼”
그때 핸드폰에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 신 PD였다.
“미라야 신 PD님 전화 들어온다.”
“어, 그래? 그럼 난 끊을게. 일단 한다고 해 알았지?”
“미라야 이거 그런 게 아니라, 선우 오빠가 근처 왔다고 밥이나 먹자고 해서 잠깐 봤던 거야.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밥도 안 먹고 헤어져 돌아왔는데……”
“그럼, 이 손은 뭐야? 손은 왜 잡고 있었어. 남들 다 보는 데서”
“그런 의미로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내가 좀 힘들어 보였는지 위로해 주는 거였어. 그 이상은 아냐. …그런데 이게 이렇게 사진으로 찍힐 줄 생각도 못 했어.”
“아휴……, 아니면 다행이구. 일단 홍보팀에 얘기해서 정정 기사 내도록 하자. 그런데 너 정말 아니지?”
“아니야, 아니라니까! 이젠 그냥 오빠랑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어. 그게 다야”
“근데, 난 사실 이 사진 보면서 속으로는 이게 진짜여도 괜찮겠다 생각했었는데. 아쉽다”
“이제 선우 오빠랑은 그럴 일 없어. 내 마음이 더 이상 그쪽을 향하지 않아”
“그럼? 다른 쪽에 있다는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선우 오빠에 대한 감정이 이젠 그런 감정이 아니라는 거지”
***
선우의 사무실
인터넷에 올려진 자신과 다빈의 기사를 확인한 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야 일반인이라 이런 구설수가 대수롭진 않지만 다빈에겐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집안에서도 이 기사를 보시게 될 텐데. 선우는 이 기사가 가져올 파장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우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실을 호출했다.
“네, 대표님”
“홍보팀 김 부장님 들어오시라고 좀 해 줘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호출을 받은 홍보팀 김 부장이 선우의 방에 들어섰다.
선우는 기사를 내보낸 해당 매체에 연락하여 기사를 내릴 것을 지시했다. 부탁이 안 통하면, W그룹의 이름이라도 팔아 어떤 식으로라도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 협박을 해서라도.
선우의 지시를 받은 김 부장은 곧장 홍보팀으로 돌아가 해당 매체에 반협박, 반 회유를 통해 기사를 내릴 것을 요구했다.
매체 측에서도 이렇게 얘깃거리가 좋은 기사를 한 번에 내려줄 리 없었지만, W그룹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 할 수 있는 보복조치에 대해서 쭉 한 번 읊어 줬더니 순순히 기사를 내리는 조처를 했다.
선우의 지시가 있은 지 30분도 채 안 되어, ‘나이버’에서 한결과 화연의 열애설 기사와 더불어 메인을 장식하던 선우와 다빈의 기사가 자취를 감췄다. 또한, 이미 퍼진 SNS야 막을 수 없었지만, 그게 포탈에서 검색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포털 사이트 운영팀에도 조처를 해 적어도 검색으로는 그 사진을 더는 볼 수 없게 했다.
홍보팀 김 부장에서 해당 조치에 대한 결과를 보고받은 선우가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한 대표님. 이 비서입니다. 회장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
아버지가? 벌써 기사를 보신 건가?
“나다!”
“네, 아버지”
“인터넷이 시끄럽더구나.”
벌써 보셨구나……
“죄송합니다. 지금 조처를 해 포탈에서는 모두 내렸습니다. 포탈 운영팀에도 얘기해 뒀으니 더 이상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처리했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룹 이미지도 있으니 괜히 연예인이랑 어울려서 가십거리 만드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그 애…… 혹시 예전에 만나던 그 아이 아니냐?”
“……”
“아직도 마음을 못 접은 게냐?”
“그런 거 아닙니다.”
이젠 자신의 마음 따윈 중요하지 않음을 아버지께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굳이 반대하지 않아도, 이미 다빈은 자신을 떠났다고.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주말에 들러라. 밥이나 같이 먹게”
“네”
부자의 대화는 간단히 끝났다.
***
한결의 기자회견장.
기자회견이 예정된 4시. 톱스타답게 기자회견이 마련된 호텔 컨벤션 장에는 꽉 들어찬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결이 등장하기 전, 소속사 사장 은표가 먼저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표 엔터테인먼트 홍은표 대푭니다. 먼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기자님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기자회견은 다른 질문은 받지 않고 김한결 씨의 발표문을 읽는 형식으로 그칠까 합니다. 그러니 기자님들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
뒤에 따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결의 손에 쥐어 쥔 스마트폰에 다빈의 기사가 펼쳐져 있다. 한결은 어제 다빈의 집 앞 주차장에서 본 선우와 다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선우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제길!
한결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형, 나가셔야 해요. 대표님 얘기 끝나가요”
한결은 매니저를 따라 대기실을 나갔다.
간단한 은표의 얘기가 끝나자 발표문을 든 한결이 컨벤션 홀 앞쪽 정 가운데에 마련된 연단 위로 올라섰다.
한결은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꽉 다문 입술은 열애설을 발표하러 나온 여느 스타와는 달리 비장한 모습이었다.
지금이라도 ‘열애설은 사실이 아니다. <연우결>에서 유다빈에게 보였던 마음은 진실이었다.’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자신의 몸은 이미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속사를 생각해야 했고, 친구인 화연을 생각해야 했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이런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담담한 톤으로 발표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인사말 이후 이어진 말은 화연과의 열애설이 사실이며 둘은 지금 예쁘게 사귀고 있다. 소속사 동료로 만나 우정을 쌓아오다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연우결>에 출연한 점 시청자와 팬들에게 사과 드린다. 앞으로도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며 연기활동 열심히 해 나갈 테니 예쁘게 지켜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10분여에 걸쳐 발표문을 읽은 한결이 ‘자리해준 기자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기자석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 김한결 씨, 유다빈 씨도 연인이 있다는 기사가 났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열애설이 터지고 나서 유다빈 씨와 따로 통화는 하셨나요? 했다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 조금 전에 <연우결> 마지막 촬영을 하고 오신 거로 아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 인터넷에는, 이번 열애설이 가짜고 <연우결>에서 유다빈 씨에게 보여준 행동이 진짜 같다는 의견을 내놓는 네티즌들도 있는데요,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이화연 씨와 사귀시면서 <연우결>에 출연하신 이유는 뭔가요?
- 김한결 씨! 김한결 씨! 하나만 대답해 주시죠!
여기저기서 미처 듣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으러 질문을 외치고 있었다.
한결은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떴다.
한결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은표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는
“기자님들 궁금한 점이 많으실 줄 압니다. 하지만 김한결 씨가 다음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더는 시간을 낼 수 없는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연예인이기 전에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건 개인사이니 지나친 관심은 자제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며 자리를 정리했다.
한결의 열애설 인정은 한결의 발표문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인터넷 매체를 통해 기사들로 쏟아져 나왔다.
[ 김한결 오늘 기자회견 통해 이화연과의 열애 인정! ]
[ 김한결, 이화연 열애, <연우결> 출연은 왜? ]
[ 김한결&이화연 친구에서 연인으로 ]
[ 열애 김한결, 예쁘게 사랑하며 연기활동도 열심히 하겠다. ]
***
다빈은 집으로 돌아오자, 온몸의 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따지고 보면 한결과 제대로 사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떠나 보낸 듯 허탈한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운하고, 화가 났다.
제대로 사귀기라도 한 후, 이런 스캔들을 알았다면 앞에 대고 화낼 자격이라도 있을 것을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방송을 같이해 도의적으로 좀 미안한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다! 어차피 5살이나 어린 남자잖아. 이런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 사람과 계속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을 거야. 한참 잘나가는데 그 마음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 되겠어.
이 나이에 사귀다 끝나면 그게 더 상처지.차라리 시작도 안 하고 끝난 게 더 나은 거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때 매니저 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빈……. 아”
수화기 너머의 미라의 말이 조심스러웠다.
“왜?”
“저기…… 있잖아…… 신 PD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연우결> 한 번만 보충 촬영해 주면 안 되겠냐고……”
“보충촬영? 이미 하차까지 한 마당에 뭘?”
“아 그게 <연우결>이 이번에 일본에 꽤 비싼 값에 팔리나 봐. 뭐 한류스타 김한결이 나오니 당연한 순서겠지. 근데 왜 일본 애들이 수위가 좀 높잖아”
“……그래서?”
“다른 커플들은 그래도 스킨십이 좀 있는데, 너희 커플은 너무 없다고, 그 부분만 조금 추가해달라고 요청했나 봐”
“그런 것도 추가로 보충 촬영하고 그러는 거야?”
“뭐 가상이긴 하지만, 대본이 따로 있는 프로는 아니라서 그런 경우는 없었는데 이번엔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해. 일본 쪽에서 워낙 높은 가격에 사겠다고 제시했는데 조건 사항이 그거 하나래. 그래서 신 PD님이 부탁 좀 한다고. 그냥 만나서 간단히 뭐 하나 하면서 스킨십 조금 해주면 그거 편집해서 다른 회차랑 연결해서 붙일 건가 봐.”
“아무리 방송이래도 이 상황에 좀 그렇다. 마음이 안 내켜”
“네가 그럴 줄 알았는데, 신 PD님 이번 개편 때 <연우결>을 끝으로 드라마국으로 옮긴대. 미니시리즈 들어간다는데 작가가 김우정이야. 알지? 로코의 여왕 김우정 작가! 이 작가가 하면 이건 뭐 바로 시청률 30% 찍고 주인공들 다 뜨고. 근데 거기 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대. <연우결> 때 널 엄청 좋게 봤나 봐. 그러니까 하자. 응? 응?”
“……”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이라……. 여태까지 조연급으로만 머물렀던 다빈에게 혹할만한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한결과 부딪쳐서 그 마음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지금도 이렇게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스킨십을 위한 보충촬영이라니!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김한결 씨 측에서도 찬성해야 보충촬영을 할 거 아냐?”
“그쪽은 걱정하지 마. 신 PD가 얘기했더니 바로 OK 했대. 프로에 그렇게 누를 끼쳤으니 뭐 도의적으로도 거절하기 힘들었겠지. 그러니까 너만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출연해주면 돼”
그때 핸드폰에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 신 PD였다.
“미라야 신 PD님 전화 들어온다.”
“어, 그래? 그럼 난 끊을게. 일단 한다고 해 알았지?”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6화 - 스킨십을 위한 재촬영(1)
미라의 전화가 끊기자, 다빈은 액정을 터치하여 신 PD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다빈 씨. 조 실장한테 얘기는 들었죠?”
“네, 듣긴 했는데……”
“그럼, 한 번만 해줘요. 나도 이것만 보충 촬영해서 일본 측에 넘겨서 계약 성사되면, 바로 드라마국으로 옮길 거에요. 그러니 다빈 씨 부탁 좀 해요.”
“그래도 열애설까지 인정한 마당에 스킨십 부분만 새로 보충 촬영 한다는 게 영 걸려서요”
“아냐, 이번에 찍은 건 좀 더 앞쪽 회차에 편집해서 넣을 거에요. 그러니 스캔들 터지기 전이니까 시간상으로 보는 사람들한테 이상해 보이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일본사람들은 우리랑 달라서 애인도 있으면서 저런데 출연하냐는 시선이 없대요. 일은 일이고, 사적인 감정은 사적인 감정으로 봐 준다는 거죠. 부탁해요 다빈 씨.”
“……음……”
“다빈 씨. 그냥 연기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웬만한 드라마보다도 수위 약할 텐데 뭐.”
“휴……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언제 촬영이에요?”
“음, 촬영하고 편집도 앞의 거랑 같이 다시 붙여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어요. 내일 정도 했으면 하는데. 스케줄은 조 실장이랑 조율해 볼게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다빈 씨.”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미라는 신 PD의 차기작 미니시리즈 여주인공 자리가 탐나는 모양이었지만, 다빈은 오로지 한결과의 재회만이 신경 쓰였다.
어제 마지막으로 촬영장을 떠날 때, 이제 한결과는 다시 엮일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냉정해지자는 머리와는 달리 가슴 한편이 몹시 시렸었다.
그런데 그를 다시 볼 수 있단다. 그것도 달달한 장면만을 재촬영하기 위해. 다빈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자. 또다시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서 설레고, 떨리고, 좋아하고 그러지 말자. 어차피 그에겐 이 또한 연기일 뿐이다. 그동안 숱하게 찍었을 달달한 연애 장면 중의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도 딱 그만큼만 그를 대하자. 떨리면 안 된다, 이런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
다빈은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
다음날 <연우결> 신혼집.
촬영장에 도착해서 한결을 보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어떻게 대해야 하나를 고민하다 다빈은 한숨도 못 자고 밤새워 뒤척였다.
다빈이 도착해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있던 한결은 신 PD에게 오늘 촬영에 관한 디렉션을 받고 있었다.
다빈이 인사를 건네면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한결은 무표정하게 다빈을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저 사람…… 저렇게 차가운 눈빛일 수도 있구나.’
신 PD가 다빈에게는 별다른 주문 없이, 바로 촬영 들어가자며 앵글 밖으로 빠졌다.
‘응? 나에게는 디렉션을 안 주나?’
카메라 녹화 램프가 켜지자 한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부인 피곤하지? 그래서 말이야 내가 오늘 우리 부인 발 마사지 좀 해 주려고”
“발 마사지?”
“응. 그러니까 얼른 이리 와서 앉아봐”
발? 아이 부끄럽게 왜 하필 발 마사지야.
한결에게 맨발을 떡 하니 내보이고, 만지게 한다는 게 너무나 민망했다.
“아니, 남편. 내가 해 줄게. 나 요즘 스케줄도 별로 없어서 안 피곤해. 남편이 앉아.”
다빈이 한사코 마다하자, 한결이 무릎 아래와 어깨에 손을 두르고는 다빈을 번쩍 안아 올렸다.
다빈의 큰 눈이 더 커졌다.
“계속 그러면 안 내려놓는다! 조용히 마사지 받을래, 계속 이렇게 안겨 있을래?”
다빈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까지 벌게졌다.
“알았어, 알았어. 마사지 받을 게”
한결이 다빈을 앉은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말라고!
너! 바로 어제 다른 여자랑 사랑에 빠졌다고 기자회견까지 한 남자잖아!!
한결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와서는 다빈의 발아래 놓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다빈의 발을 양손으로 조심히 잡아 대야에 담갔다.
다빈의 발을 붙잡고 있는 한결의 손에서 다빈과 나누어 꼈던 커플링이 빛나고 있다.
‘반지…… 끼고 있네. 촬영 때문이겠지……’
사실, 다빈도 아침에 나오면서 반지를 찾아 끼고 나왔다.
방송을 위해 서기도 하지만, 왠지 그를 만나는 자리라 끼고 나오고 싶었던 이유가 더 크다.
이미 다른 여자의 연인임을 선언했지만, 이 반지가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결은 따뜻한 물을 다빈의 발등에 고이고이 붓는가 싶더니 앞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꽉꽉 눌렀다. 콕콕 쑤시는 느낌에 몸을 움찔움찔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시원해 부인?”
다정한 눈빛으로 다빈을 바라봤다.
“응.”
이 눈빛이 다 연기라는 거지……
그 눈빛에 가슴 한편이 시려져서, 차마 더 쳐다보지 못하고 다빈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저 한결의 손이 닿는 발끝만을 내려 보았다. 바보처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결이 발을 주무르면서 마이크에 잡히지 않게 작게 말했다.
“방송 중에 잡생각은 그만하시지! 우리 아마추어 아니야, 프로잖아”
“……!!”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가 막혔지만, 달리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우린 프로잖아. 이까짓 달달한 연기쯤 하면 되는 거지. 괜한 감상에 사로잡혀서 못난 꼴 보이지 말아야지.
한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다빈이 혹여 이번 촬영이 한선우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저러나 싶어 순간 질투심이 일었다.
한결의 냉정한 충고에 다빈이 표정을 바꿨다.
카메라를 의식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한결에게 말을 건넸다.
“남편 이제 내가 해줄게. 이쪽으로 앉아.”
“아냐, 난 괜찮아. 다 됐다. 이제 닦아줄게.”
한결이 옆에 놓인 마른 수건을 들어 두 발을 감싸 쥐었다. 꼭꼭 눌러 발에 묻은 물기를 제거했다.
다빈 앞에 양반다리로 앉아 발을 닦아주던 한결이 빙그레 웃으며
“우리 부인은 어쩜 발도 예쁘냐”
며 뺄 새도 없이 발등 위에 ‘쪽~’ 입을 맞췄다.
다빈의 웃는 모습을 보니, 한결도 금세 마음이 풀려서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아이, 남편 뭐야”
“왜, 발등만으론 부족해? 이리와 봐 이번엔 제대로 해 줄 테니까”
한결은 손에서 다빈의 발을 내려놓더니, 이번엔 목 뒤를 끌어당겨 입맞춤이라도 할 태세다.
보통 때 같았으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몸을 뺏을 다빈이었지만
한결의 능청스러움에 질세라 한술 더 뜨며 나섰다.
“그래,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자, 해봐”
키스라도 해보란 듯이,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하하하. 이러면 내가 못 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지?”
“에잇, 알았으니까 그만, 그만!?”
결국, 다빈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오늘 우리 뭐할까?”
“물놀이나 갈까?”
신 PD의 디렉션이 발 마사지와 함께 물놀이였나 보구나.
자연스럽게 스킨십 할 수 있는 거로 잘도 고르셨네.
다빈은 그 의도를 알아챘다.
“근데, 나 수영복도 준비 안 해왔는데?”
“그거면 걱정 마. 미리 매니저들한테 연락해서 얘기해 놔서, 아마 옷장 안에 있을 거야. 잠깐 있어 봐 내가 가져올게”
한결이 안방에 들어가더니, 곧이어 양손에 여자 수영복을 들고 나왔다.
“2가지인데, 어떤 거로 할래?”
오른쪽엔 투피스로 된 비키니 수영복이, 왼손에는 온몸을 다 가리는 래시가드가 들려져 있었다.
“와, 근데 이건 수영복으론 너무 기대를 저버리는 복장 아냐?”
한결이 래시가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비키니로 입을까?”
다빈이 비키니를 건네받아 옷을 펴 몸에 대어 보았다.
삼각의 하의에 가슴골이 시원하게 파인 상의를 보더니 한결이 금세 말을 바꿨다.
“아니다. 이건 좀 곤란하겠다. 부인 아쉽지만, 이번엔 그냥 왼쪽 거로”
“왜, 워터파크에선 시원하게 비키니를 입어줘야지. 래시가드는 안 입어봐서 적응이 안 될 거 같아. 그냥 비키니로 할래 남편”
이런 모습은 나만 봐야지. 방송으로 나가 모두 다 보게 할 수 없다고!
“이렇게 위아래 손바닥만 한 것만 걸치고, 그 사람 많은 워터파크를 돌아다니겠다고? 안돼안돼. 그냥 긴 거로 해 긴 거로!”
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럴 땐, 꼭 진짜 남편 같네.
다빈은 한결의 단속이 싫지 않았다.
결국, 투닥거리면서 래시가드를 입기로 결정했다. 물놀이를 위해서 이동해야 하는 시간.
FD가 다가와 물었다.
“두 분, 차로 함께 이동하실 거죠? 저희는 뒤에서 따라갈게요”
FD의 질문에 한결이 먼저 나서 대답했다.
“아뇨, 각자 이동하고, 촬영은 수영장 도착해서부터 하죠. 피곤해서 차에서 좀 쉬었으면 해서요”
“…아, 그러시겠어요?”
피곤을 핑계 대고 있지만, 다빈과 함께 둘만이 좁은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할 것 같아 따로 가겠다는 눈치다. 뿐만인가, 카메라가 꺼지자 자신을 향하던 그 달콤한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결이 좀 전과는 180도 달라진 아무 감정 없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이따 도착해서 봐. 난 먼저 갈게”
하며 뒷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공과 사는 확실하네!
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연인에게 전화통화라도 하시려고?
이화연이 이 촬영이 마음에 안 든대? 하지 말래?
예전처럼 촬영 중이 아닐 때도 다정하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냉랭하고 사무적인 말 외에는 건네지 않는 한결을 보니
다시금 한결의 열애 사실이 일깨워졌다.
다빈은 서운함을 마음속에 감춘 채, 자신의 차에 몸을 실었다.
워터파크를 향해 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아, 빨리 이 촬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
한편, 한결은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에 올라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좀 전 카메라가 계속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을 땐 차라리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다빈을 향한 눈빛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부부 사이였으니까.
그러나 카메라가 꺼지고, 휴식시간이라도 주어지면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다빈을 대해야 하는 게 영 편치 않았다. 게다가 다빈을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그날 선우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오버랩 되어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기도 했다.
화를 낸다면 자신이 아니라 다빈이 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만은 그렇게 되질 않았다.
그때 한결의 전화가 울렸다. 화연이었다.
한결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예전처럼 화연이 편치 않았다. 스스럼없이 받던 전화도 불편해졌다.
“…여보세요”
그런 한결과 달리 화연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다.
“촬영 중이야?”
“아니. 이동 중”
“이동? 어디로?”
“무슨 일인데?”
한결의 길게 얘기 나눌 기분이 아니어서, 최대한 간략한 대답만 내놓고 있었다.
“아……아니, 촬영 잘하고 있나, 그냥 궁금해서”
“특별한 용건 없이 한 거면, 나중에 통화하자”
“응……. 알았어. 근데 한결 씨 내일 스케줄 없지?”
“아마 그럴걸”
“나도 내일 스케줄 없는데, 오랜만에 우리 영화라도 보러 갈까?”
연인 코스프레라도 하자는 건가?
한결은 순간 짜증이 기어 올라오는 걸 억눌렀다.
“…미안,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다”
“……그래? 알았어. 그럼 쉬다가 심심해지면 연락해. 나도 그냥 집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전화를 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복잡한 심경이 머리를 들쑤셔,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미라의 전화가 끊기자, 다빈은 액정을 터치하여 신 PD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다빈 씨. 조 실장한테 얘기는 들었죠?”
“네, 듣긴 했는데……”
“그럼, 한 번만 해줘요. 나도 이것만 보충 촬영해서 일본 측에 넘겨서 계약 성사되면, 바로 드라마국으로 옮길 거에요. 그러니 다빈 씨 부탁 좀 해요.”
“그래도 열애설까지 인정한 마당에 스킨십 부분만 새로 보충 촬영 한다는 게 영 걸려서요”
“아냐, 이번에 찍은 건 좀 더 앞쪽 회차에 편집해서 넣을 거에요. 그러니 스캔들 터지기 전이니까 시간상으로 보는 사람들한테 이상해 보이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일본사람들은 우리랑 달라서 애인도 있으면서 저런데 출연하냐는 시선이 없대요. 일은 일이고, 사적인 감정은 사적인 감정으로 봐 준다는 거죠. 부탁해요 다빈 씨.”
“……음……”
“다빈 씨. 그냥 연기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웬만한 드라마보다도 수위 약할 텐데 뭐.”
“휴……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언제 촬영이에요?”
“음, 촬영하고 편집도 앞의 거랑 같이 다시 붙여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어요. 내일 정도 했으면 하는데. 스케줄은 조 실장이랑 조율해 볼게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다빈 씨.”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미라는 신 PD의 차기작 미니시리즈 여주인공 자리가 탐나는 모양이었지만, 다빈은 오로지 한결과의 재회만이 신경 쓰였다.
어제 마지막으로 촬영장을 떠날 때, 이제 한결과는 다시 엮일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냉정해지자는 머리와는 달리 가슴 한편이 몹시 시렸었다.
그런데 그를 다시 볼 수 있단다. 그것도 달달한 장면만을 재촬영하기 위해. 다빈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자. 또다시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서 설레고, 떨리고, 좋아하고 그러지 말자. 어차피 그에겐 이 또한 연기일 뿐이다. 그동안 숱하게 찍었을 달달한 연애 장면 중의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도 딱 그만큼만 그를 대하자. 떨리면 안 된다, 이런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
다빈은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
다음날 <연우결> 신혼집.
촬영장에 도착해서 한결을 보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어떻게 대해야 하나를 고민하다 다빈은 한숨도 못 자고 밤새워 뒤척였다.
다빈이 도착해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있던 한결은 신 PD에게 오늘 촬영에 관한 디렉션을 받고 있었다.
다빈이 인사를 건네면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한결은 무표정하게 다빈을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저 사람…… 저렇게 차가운 눈빛일 수도 있구나.’
신 PD가 다빈에게는 별다른 주문 없이, 바로 촬영 들어가자며 앵글 밖으로 빠졌다.
‘응? 나에게는 디렉션을 안 주나?’
카메라 녹화 램프가 켜지자 한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부인 피곤하지? 그래서 말이야 내가 오늘 우리 부인 발 마사지 좀 해 주려고”
“발 마사지?”
“응. 그러니까 얼른 이리 와서 앉아봐”
발? 아이 부끄럽게 왜 하필 발 마사지야.
한결에게 맨발을 떡 하니 내보이고, 만지게 한다는 게 너무나 민망했다.
“아니, 남편. 내가 해 줄게. 나 요즘 스케줄도 별로 없어서 안 피곤해. 남편이 앉아.”
다빈이 한사코 마다하자, 한결이 무릎 아래와 어깨에 손을 두르고는 다빈을 번쩍 안아 올렸다.
다빈의 큰 눈이 더 커졌다.
“계속 그러면 안 내려놓는다! 조용히 마사지 받을래, 계속 이렇게 안겨 있을래?”
다빈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까지 벌게졌다.
“알았어, 알았어. 마사지 받을 게”
한결이 다빈을 앉은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말라고!
너! 바로 어제 다른 여자랑 사랑에 빠졌다고 기자회견까지 한 남자잖아!!
한결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와서는 다빈의 발아래 놓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다빈의 발을 양손으로 조심히 잡아 대야에 담갔다.
다빈의 발을 붙잡고 있는 한결의 손에서 다빈과 나누어 꼈던 커플링이 빛나고 있다.
‘반지…… 끼고 있네. 촬영 때문이겠지……’
사실, 다빈도 아침에 나오면서 반지를 찾아 끼고 나왔다.
방송을 위해 서기도 하지만, 왠지 그를 만나는 자리라 끼고 나오고 싶었던 이유가 더 크다.
이미 다른 여자의 연인임을 선언했지만, 이 반지가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결은 따뜻한 물을 다빈의 발등에 고이고이 붓는가 싶더니 앞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꽉꽉 눌렀다. 콕콕 쑤시는 느낌에 몸을 움찔움찔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시원해 부인?”
다정한 눈빛으로 다빈을 바라봤다.
“응.”
이 눈빛이 다 연기라는 거지……
그 눈빛에 가슴 한편이 시려져서, 차마 더 쳐다보지 못하고 다빈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저 한결의 손이 닿는 발끝만을 내려 보았다. 바보처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결이 발을 주무르면서 마이크에 잡히지 않게 작게 말했다.
“방송 중에 잡생각은 그만하시지! 우리 아마추어 아니야, 프로잖아”
“……!!”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가 막혔지만, 달리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우린 프로잖아. 이까짓 달달한 연기쯤 하면 되는 거지. 괜한 감상에 사로잡혀서 못난 꼴 보이지 말아야지.
한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다빈이 혹여 이번 촬영이 한선우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저러나 싶어 순간 질투심이 일었다.
한결의 냉정한 충고에 다빈이 표정을 바꿨다.
카메라를 의식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한결에게 말을 건넸다.
“남편 이제 내가 해줄게. 이쪽으로 앉아.”
“아냐, 난 괜찮아. 다 됐다. 이제 닦아줄게.”
한결이 옆에 놓인 마른 수건을 들어 두 발을 감싸 쥐었다. 꼭꼭 눌러 발에 묻은 물기를 제거했다.
다빈 앞에 양반다리로 앉아 발을 닦아주던 한결이 빙그레 웃으며
“우리 부인은 어쩜 발도 예쁘냐”
며 뺄 새도 없이 발등 위에 ‘쪽~’ 입을 맞췄다.
다빈의 웃는 모습을 보니, 한결도 금세 마음이 풀려서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아이, 남편 뭐야”
“왜, 발등만으론 부족해? 이리와 봐 이번엔 제대로 해 줄 테니까”
한결은 손에서 다빈의 발을 내려놓더니, 이번엔 목 뒤를 끌어당겨 입맞춤이라도 할 태세다.
보통 때 같았으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몸을 뺏을 다빈이었지만
한결의 능청스러움에 질세라 한술 더 뜨며 나섰다.
“그래,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자, 해봐”
키스라도 해보란 듯이,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하하하. 이러면 내가 못 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지?”
“에잇, 알았으니까 그만, 그만!?”
결국, 다빈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오늘 우리 뭐할까?”
“물놀이나 갈까?”
신 PD의 디렉션이 발 마사지와 함께 물놀이였나 보구나.
자연스럽게 스킨십 할 수 있는 거로 잘도 고르셨네.
다빈은 그 의도를 알아챘다.
“근데, 나 수영복도 준비 안 해왔는데?”
“그거면 걱정 마. 미리 매니저들한테 연락해서 얘기해 놔서, 아마 옷장 안에 있을 거야. 잠깐 있어 봐 내가 가져올게”
한결이 안방에 들어가더니, 곧이어 양손에 여자 수영복을 들고 나왔다.
“2가지인데, 어떤 거로 할래?”
오른쪽엔 투피스로 된 비키니 수영복이, 왼손에는 온몸을 다 가리는 래시가드가 들려져 있었다.
“와, 근데 이건 수영복으론 너무 기대를 저버리는 복장 아냐?”
한결이 래시가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비키니로 입을까?”
다빈이 비키니를 건네받아 옷을 펴 몸에 대어 보았다.
삼각의 하의에 가슴골이 시원하게 파인 상의를 보더니 한결이 금세 말을 바꿨다.
“아니다. 이건 좀 곤란하겠다. 부인 아쉽지만, 이번엔 그냥 왼쪽 거로”
“왜, 워터파크에선 시원하게 비키니를 입어줘야지. 래시가드는 안 입어봐서 적응이 안 될 거 같아. 그냥 비키니로 할래 남편”
이런 모습은 나만 봐야지. 방송으로 나가 모두 다 보게 할 수 없다고!
“이렇게 위아래 손바닥만 한 것만 걸치고, 그 사람 많은 워터파크를 돌아다니겠다고? 안돼안돼. 그냥 긴 거로 해 긴 거로!”
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럴 땐, 꼭 진짜 남편 같네.
다빈은 한결의 단속이 싫지 않았다.
결국, 투닥거리면서 래시가드를 입기로 결정했다. 물놀이를 위해서 이동해야 하는 시간.
FD가 다가와 물었다.
“두 분, 차로 함께 이동하실 거죠? 저희는 뒤에서 따라갈게요”
FD의 질문에 한결이 먼저 나서 대답했다.
“아뇨, 각자 이동하고, 촬영은 수영장 도착해서부터 하죠. 피곤해서 차에서 좀 쉬었으면 해서요”
“…아, 그러시겠어요?”
피곤을 핑계 대고 있지만, 다빈과 함께 둘만이 좁은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할 것 같아 따로 가겠다는 눈치다. 뿐만인가, 카메라가 꺼지자 자신을 향하던 그 달콤한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결이 좀 전과는 180도 달라진 아무 감정 없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이따 도착해서 봐. 난 먼저 갈게”
하며 뒷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공과 사는 확실하네!
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연인에게 전화통화라도 하시려고?
이화연이 이 촬영이 마음에 안 든대? 하지 말래?
예전처럼 촬영 중이 아닐 때도 다정하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냉랭하고 사무적인 말 외에는 건네지 않는 한결을 보니
다시금 한결의 열애 사실이 일깨워졌다.
다빈은 서운함을 마음속에 감춘 채, 자신의 차에 몸을 실었다.
워터파크를 향해 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아, 빨리 이 촬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
한편, 한결은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에 올라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좀 전 카메라가 계속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을 땐 차라리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다빈을 향한 눈빛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부부 사이였으니까.
그러나 카메라가 꺼지고, 휴식시간이라도 주어지면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다빈을 대해야 하는 게 영 편치 않았다. 게다가 다빈을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그날 선우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오버랩 되어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기도 했다.
화를 낸다면 자신이 아니라 다빈이 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만은 그렇게 되질 않았다.
그때 한결의 전화가 울렸다. 화연이었다.
한결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예전처럼 화연이 편치 않았다. 스스럼없이 받던 전화도 불편해졌다.
“…여보세요”
그런 한결과 달리 화연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다.
“촬영 중이야?”
“아니. 이동 중”
“이동? 어디로?”
“무슨 일인데?”
한결의 길게 얘기 나눌 기분이 아니어서, 최대한 간략한 대답만 내놓고 있었다.
“아……아니, 촬영 잘하고 있나, 그냥 궁금해서”
“특별한 용건 없이 한 거면, 나중에 통화하자”
“응……. 알았어. 근데 한결 씨 내일 스케줄 없지?”
“아마 그럴걸”
“나도 내일 스케줄 없는데, 오랜만에 우리 영화라도 보러 갈까?”
연인 코스프레라도 하자는 건가?
한결은 순간 짜증이 기어 올라오는 걸 억눌렀다.
“…미안,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다”
“……그래? 알았어. 그럼 쉬다가 심심해지면 연락해. 나도 그냥 집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전화를 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복잡한 심경이 머리를 들쑤셔,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7화 - 스킨십을 위한 재촬영(2)
워터파크 안.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한결이 다빈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신 PD의 디렉션에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빈이 한결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화이트 바탕에 블루의 스트라이프 무늬가 어깨와 허벅지 옆 라인으로 시원하게 내려앉은 디자인의 래시가드는 군살 없는 다빈의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한결은 그때 처음으로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비키니보다, 래시가드가 더 섹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자로 뻗은 긴 다리,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는 허리, 이와 상반되게 굴곡 있는 곡선을 선보이는 가슴라인…… 머리를 질끈 하나로 올려 묶고 옅은 화장의 다빈이 지금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처음 보는 다빈의 차림에 순간, 넋을 잃은 한결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빙하도 녹일 듯 사랑이 가득 담긴 따뜻한 눈빛은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됐다. 카메라가 돌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린 부부이니까!
“와, 부인……. 진짜 여기서 최고로 예쁘다.”
한결의 칭찬에 다빈이 얼굴을 붉혔다.
“아이, 뭐 그렇게까지야”
“아니, 진짜야. 래시가드가 이렇게 섹시한지 몰랐네.”
“아유…… 창피하게. 근데 남편도 엄청 멋있어”
그러고 보니 수영복만을 입고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한결은, 8등신의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잔 근육들이 마치 유명한 조각가가 조각해 놓은 작품처럼 보였다.
“남편, 방송 보시는 분들 불편해하시겠다. 우리끼리 하는 칭찬은 그만하고 물놀이나 하러 가자?”
“그래, 뭐부터 탈까?”
“난 이런 데 오면 그냥 튜브 타고 유수 풀 도는 게 제일 좋던데”
“좋아 그럼 그러지 뭐”
한결이 유수 풀 내에서 타는 다빈의 커다란 튜브를 가지고 와서는 다빈을 튜브에 앉혔다.
다빈이 튜브에 몸을 싣자, 한결이 천천히 튜브를 밀며 둥둥둥 떠다니는 유수 풀에 몸을 맡겼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유수 풀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니, 다빈이 이번에는 한결에게 타라며 튜브에서 내려왔다.
“아냐, 부인이 타. 난 옆에서 붙잡고 있을게”
“난 한 번 탔잖아. 이번에는 남편이 타. 내가 붙잡을 게”
“그럼 우리 같이 탈까?”
“같이? 튜브를 같이 타자고?”
“응. 이리 와봐”
한결이 먼저 튜브에 올랐다. 그리고는 다빈을 끌어당겼다. 성인 둘이 한 개의 튜브에 오르려 하자 튜브가 흔들흔들 흔들리더니 결국 뒤집히고 말았다.
다시. 한결이 다시 자세를 다잡아 먼저 튜브에 올라갔다.
튜브가 기울어지지 않게 이번에는 아예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다빈에게 자신의 위로 올라와 누울 것을 주문했다.
“빨리 올라와, 내가 잡아줄게”
한 개의 튜브에 둘이 매달려 있는 상황이 무안할 것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아마 신 PD의 주문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다빈도 한결의 뜻에 순순히 응하며 몸을 튜브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누워있던 한결이 다빈의 두 손을 잡고 당겼다. 다빈이 몸이 튜브에 오르는 걸 한결이 도와 다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성공!
튜브에 누운 한결의 가슴에 어깨를 묻고 다빈이 폭 안긴 꼴이 되었다.
한결은 다빈이 떨어질세라 다빈의 어깨에 두르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빈 역시 중심을 맞추기 위해 몸을 한결 쪽으로 더 돌리고는, 한쪽 팔로 한결의 허리를 꼭 감아쥐었다.
이제 튜브도 더는 흔들림 없이 안정감 있게, 물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일정 간격으로 거센 파도가 있는 구간을 지날 때면 튜브가 위로 치솟아 흔들리려 하자 둘은 더 꼭 붙었다.
다빈은 그의 몸에 꼭 붙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늦은 오후, 힘을 다한 태양이 자리를 뜨고 있었다.
평일 오후, 이런 곳에서 물놀이를 즐겨본 게 얼마 만인가.
하늘을 치솟는 인기를 누린 것은 아니지만, 데뷔 이후 얼굴이 알려진 이후로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찾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더구나, 남자 품에 이렇게 포옥 안겨 함께 튜브를 타고 물 위를 떠다니고 있다니
어제의 복잡한 심경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냥 이게 촬영이 아니라, 그와의 평범한 일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부인, 참 좋지? 매일 이러고 살았으면 좋겠지?”
한결이 흐뭇한 미소로 내려보며, 다빈에게 말을 걸었다.
“응. 참 좋다.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
스트레스가 많았어? 그래 그랬겠지. 거기에 나도 한몫했을 테고.
“이렇게 계속 있으면 잠이 솔솔 올 것 같아.”
“아아, 여기서 잠들면 안 되지. 일어나봐. 우리 저쪽 풀로 가서 수영이나 하자.”
성인 풀 쪽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이 수영을 시작했다.
한결이 빠른 속도로 물살을 헤치며 반대쪽까지 갔다가 턴하고 다빈에게 돌아왔다.
다빈 역시도 질세라 유려한 몸놀림으로 물 위에 누웠다. 수면에 반쯤 뜬 몸이 유유히 팔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다빈의 팔이 귀 뒤를 지나 수면 위로 나와 포물선을 그릴 때마다 좌로 우로 흔들리는 몸이 참으로 예쁜 자태를 만들어냈다.
인어공주가 실제 있었더라면 저런 자태로 수영하지 않았을까.
한결에 질세라 열심히 배영을 선보이고 있는 다빈을 보며, 물 위에 누워 물길을 가르고 있는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 부인 은근히 못 하는 게 없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퍼졌다.
카메라 3대가 이들의 달달한 데이트를, 사이사이의 표정을 놓칠세라 열심히 뒤따르며 찍고 있었다.
반대편 물가에 도착한 다빈이 몸을 세워,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이내 한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좀 전 다빈이 출발한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한결이 보이지 않았다.
응? 어디 갔지?
그때였다!
무언가 발밑에서 자신을 몸을 떠받쳐 물 위로 붕~ 띄웠다.
“으악!”
한결이 몰래 수영을 해 와서는, 다빈의 다리 밑으로 들어가 다빈을 목마에 태워 물 위로 띄운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한결의 어깨에 몸이 실린 채 물 위로 올라오자 중심을 잃을 뻔한 다빈이 얼른 한결의 목을 부여잡았다.
“악! 뭐야 깜짝 놀랐잖아?!”
“하하하, 그래도 조금만 살살 잡아줘 부인. 목 빠지겠어.”
“아우, 뭐야 얼른 내려놔”
연출진의 의도가 있긴 했겠지만, 물놀이하면서 자연스레 스킨십이 많아졌고 거기에 또 익숙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결의 손끝만 닿아도, 온 신경 세포가 쭈뼛쭈뼛 서고, 심장이 세차게 요동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한결이 다시 몸을 숙여 물속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여 다빈을 목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서로를 향해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누가 더 일찍 도착하나 시합을 하는 등 알콩달콩한 물놀이 장면이 계속 연출되었다.
둘이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 가운데 연출진의 스케치북 주문이 또다시 등장했다. ‘벌칙 내기 한번 하죠’ 라고 쓰여 있는 종이판을 보자 한결이 즉석에서 제안했다.
“우리 누가 잠수 오래 하나 내기할까?”
“내기? 내기라면 벌칙이 있어야 하잖아?”
“소원 들어주기!”
“음…… 좋아”
둘은 서로 절대 질 수 없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크게 호흡을 하더니 동시에 물속에 얼굴을 넣었다.
10초, 20초, 25초…… 28초 한결이 먼저 고개를 들고 말았다.
“푸하. 후우……”
그 소리에 다빈도 고개를 들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푸후. 내가 이겼어. 하하”
“좋아, 벌칙은?”
다빈이 슬쩍 제작진을 살펴봤다. 스케치북에는 ‘댄스’라고 쓰여 있었다.
“댄스!”
“뭐, 댄스? 여기서 추라고…?”
“벌칙은 벌칙이지. 얼른”
마치 미리 준비라도 되어 있었던 듯, 연출팀에서 빠른 댄스곡을 흘려보냈다. 음악마저 흘러나오자 난감하긴 했지만, 한결이 슬슬 몸을 풀었다. 각지고 큰 팔 놀림, 유연한 꺾임…… 제법 그럴싸한 춤 실력이다.
“와아……. 남편 정말 잘 춘다. 이렇게 잘 출 줄 몰랐어.”
한결은 오랜만에 춘 춤이 쑥스러운지 얼른 말을 돌렸다.
“한 번 더 해”
그 정도야 뭐. 또다시 거뜬히 이겨 주지.
“좋아!”
“자, 숨 쉬고. 하나, 두울, 셋”
이번에도 동시에 둘의 얼굴이 물속에 잠겼다.
...25, 26, 27, 28 이번에는 한결이 잘 버티고 있다. 숨이 차 오는지, 다빈이 물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한결도 두 손을 꽉 쥐고 버텼다.
“……으으으”
“……음음음”
몇 초가 더 지나자 결국 다빈이 참지 못하고 먼저 얼굴을 들었다.
“푸하!”
연이어 한결이 바로 따라 올라와 얼굴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
“푸하. 하하 이번엔 내가 이겼어!”
“인정. 벌칙은?”
패배를 당당히 인정한 다빈이 벌칙을 물어왔다.
“뽀뽀!”
한결의 말에 다빈의 얼굴에는 순간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
“뭘 그리 놀래. 부부끼리 뽀뽀는 기본이지. 우리 커플만 아직 손만 잡고 다니지, 다른 커플들은 벌써 뽀뽀하는 거 몇 번이나 나갔어.”
다른 커플은 누구처럼 애인 따로 두고 있진 않지!
하지만 마다할 수 없었다. 오늘 촬영은 스킨십이 주요 포인트였으므로.
“…… 좋아.”
호흡을 가다듬고 다빈이 한결을 향해 정면으로 섰다.
마주 선 한결이 다빈을 쳐다보았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저 ‘드라마에서 했던 것처럼 간단히 입만 한 번 맞추면 되지 뭐’ 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향한 저 사랑스럽고 설렘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빛에 다빈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다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휴……! 한……다……”
“응”
이미 눈을 감고, 다빈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던 한결의 입꼬리가 점점 더 하늘 높이 올라갔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마구 뛰기 시작했다.
다빈이 천천히 한결에게 다가가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짝 감쌌다. 한결 역시도 긴장됐는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살며시 감은 다빈이 자신의 입술을 한결의 입술에 살짝 대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한결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몸에는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했다. 그래도 방송에 잡혀야 하니 잠시 입술을 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다빈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얼굴을 들려 하려 하자
이번에는 한결이 손이 다빈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다빈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뽀뽀……. 가 아닌 키스가 시작됐다. 한결의 입술이 다빈의 윗입술을 그리고 아랫입술을 삼켰다. 그리고는 핥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마치 다빈의 입술을 먹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부드럽기도 세차기도 하게.
워터파크 안.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한결이 다빈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신 PD의 디렉션에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빈이 한결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화이트 바탕에 블루의 스트라이프 무늬가 어깨와 허벅지 옆 라인으로 시원하게 내려앉은 디자인의 래시가드는 군살 없는 다빈의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한결은 그때 처음으로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비키니보다, 래시가드가 더 섹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자로 뻗은 긴 다리,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는 허리, 이와 상반되게 굴곡 있는 곡선을 선보이는 가슴라인…… 머리를 질끈 하나로 올려 묶고 옅은 화장의 다빈이 지금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처음 보는 다빈의 차림에 순간, 넋을 잃은 한결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빙하도 녹일 듯 사랑이 가득 담긴 따뜻한 눈빛은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됐다. 카메라가 돌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린 부부이니까!
“와, 부인……. 진짜 여기서 최고로 예쁘다.”
한결의 칭찬에 다빈이 얼굴을 붉혔다.
“아이, 뭐 그렇게까지야”
“아니, 진짜야. 래시가드가 이렇게 섹시한지 몰랐네.”
“아유…… 창피하게. 근데 남편도 엄청 멋있어”
그러고 보니 수영복만을 입고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한결은, 8등신의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잔 근육들이 마치 유명한 조각가가 조각해 놓은 작품처럼 보였다.
“남편, 방송 보시는 분들 불편해하시겠다. 우리끼리 하는 칭찬은 그만하고 물놀이나 하러 가자?”
“그래, 뭐부터 탈까?”
“난 이런 데 오면 그냥 튜브 타고 유수 풀 도는 게 제일 좋던데”
“좋아 그럼 그러지 뭐”
한결이 유수 풀 내에서 타는 다빈의 커다란 튜브를 가지고 와서는 다빈을 튜브에 앉혔다.
다빈이 튜브에 몸을 싣자, 한결이 천천히 튜브를 밀며 둥둥둥 떠다니는 유수 풀에 몸을 맡겼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유수 풀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니, 다빈이 이번에는 한결에게 타라며 튜브에서 내려왔다.
“아냐, 부인이 타. 난 옆에서 붙잡고 있을게”
“난 한 번 탔잖아. 이번에는 남편이 타. 내가 붙잡을 게”
“그럼 우리 같이 탈까?”
“같이? 튜브를 같이 타자고?”
“응. 이리 와봐”
한결이 먼저 튜브에 올랐다. 그리고는 다빈을 끌어당겼다. 성인 둘이 한 개의 튜브에 오르려 하자 튜브가 흔들흔들 흔들리더니 결국 뒤집히고 말았다.
다시. 한결이 다시 자세를 다잡아 먼저 튜브에 올라갔다.
튜브가 기울어지지 않게 이번에는 아예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다빈에게 자신의 위로 올라와 누울 것을 주문했다.
“빨리 올라와, 내가 잡아줄게”
한 개의 튜브에 둘이 매달려 있는 상황이 무안할 것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아마 신 PD의 주문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다빈도 한결의 뜻에 순순히 응하며 몸을 튜브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누워있던 한결이 다빈의 두 손을 잡고 당겼다. 다빈이 몸이 튜브에 오르는 걸 한결이 도와 다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성공!
튜브에 누운 한결의 가슴에 어깨를 묻고 다빈이 폭 안긴 꼴이 되었다.
한결은 다빈이 떨어질세라 다빈의 어깨에 두르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빈 역시 중심을 맞추기 위해 몸을 한결 쪽으로 더 돌리고는, 한쪽 팔로 한결의 허리를 꼭 감아쥐었다.
이제 튜브도 더는 흔들림 없이 안정감 있게, 물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일정 간격으로 거센 파도가 있는 구간을 지날 때면 튜브가 위로 치솟아 흔들리려 하자 둘은 더 꼭 붙었다.
다빈은 그의 몸에 꼭 붙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늦은 오후, 힘을 다한 태양이 자리를 뜨고 있었다.
평일 오후, 이런 곳에서 물놀이를 즐겨본 게 얼마 만인가.
하늘을 치솟는 인기를 누린 것은 아니지만, 데뷔 이후 얼굴이 알려진 이후로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찾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더구나, 남자 품에 이렇게 포옥 안겨 함께 튜브를 타고 물 위를 떠다니고 있다니
어제의 복잡한 심경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냥 이게 촬영이 아니라, 그와의 평범한 일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부인, 참 좋지? 매일 이러고 살았으면 좋겠지?”
한결이 흐뭇한 미소로 내려보며, 다빈에게 말을 걸었다.
“응. 참 좋다.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
스트레스가 많았어? 그래 그랬겠지. 거기에 나도 한몫했을 테고.
“이렇게 계속 있으면 잠이 솔솔 올 것 같아.”
“아아, 여기서 잠들면 안 되지. 일어나봐. 우리 저쪽 풀로 가서 수영이나 하자.”
성인 풀 쪽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이 수영을 시작했다.
한결이 빠른 속도로 물살을 헤치며 반대쪽까지 갔다가 턴하고 다빈에게 돌아왔다.
다빈 역시도 질세라 유려한 몸놀림으로 물 위에 누웠다. 수면에 반쯤 뜬 몸이 유유히 팔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다빈의 팔이 귀 뒤를 지나 수면 위로 나와 포물선을 그릴 때마다 좌로 우로 흔들리는 몸이 참으로 예쁜 자태를 만들어냈다.
인어공주가 실제 있었더라면 저런 자태로 수영하지 않았을까.
한결에 질세라 열심히 배영을 선보이고 있는 다빈을 보며, 물 위에 누워 물길을 가르고 있는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 부인 은근히 못 하는 게 없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퍼졌다.
카메라 3대가 이들의 달달한 데이트를, 사이사이의 표정을 놓칠세라 열심히 뒤따르며 찍고 있었다.
반대편 물가에 도착한 다빈이 몸을 세워,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이내 한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좀 전 다빈이 출발한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한결이 보이지 않았다.
응? 어디 갔지?
그때였다!
무언가 발밑에서 자신을 몸을 떠받쳐 물 위로 붕~ 띄웠다.
“으악!”
한결이 몰래 수영을 해 와서는, 다빈의 다리 밑으로 들어가 다빈을 목마에 태워 물 위로 띄운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한결의 어깨에 몸이 실린 채 물 위로 올라오자 중심을 잃을 뻔한 다빈이 얼른 한결의 목을 부여잡았다.
“악! 뭐야 깜짝 놀랐잖아?!”
“하하하, 그래도 조금만 살살 잡아줘 부인. 목 빠지겠어.”
“아우, 뭐야 얼른 내려놔”
연출진의 의도가 있긴 했겠지만, 물놀이하면서 자연스레 스킨십이 많아졌고 거기에 또 익숙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결의 손끝만 닿아도, 온 신경 세포가 쭈뼛쭈뼛 서고, 심장이 세차게 요동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한결이 다시 몸을 숙여 물속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여 다빈을 목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서로를 향해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누가 더 일찍 도착하나 시합을 하는 등 알콩달콩한 물놀이 장면이 계속 연출되었다.
둘이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 가운데 연출진의 스케치북 주문이 또다시 등장했다. ‘벌칙 내기 한번 하죠’ 라고 쓰여 있는 종이판을 보자 한결이 즉석에서 제안했다.
“우리 누가 잠수 오래 하나 내기할까?”
“내기? 내기라면 벌칙이 있어야 하잖아?”
“소원 들어주기!”
“음…… 좋아”
둘은 서로 절대 질 수 없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크게 호흡을 하더니 동시에 물속에 얼굴을 넣었다.
10초, 20초, 25초…… 28초 한결이 먼저 고개를 들고 말았다.
“푸하. 후우……”
그 소리에 다빈도 고개를 들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푸후. 내가 이겼어. 하하”
“좋아, 벌칙은?”
다빈이 슬쩍 제작진을 살펴봤다. 스케치북에는 ‘댄스’라고 쓰여 있었다.
“댄스!”
“뭐, 댄스? 여기서 추라고…?”
“벌칙은 벌칙이지. 얼른”
마치 미리 준비라도 되어 있었던 듯, 연출팀에서 빠른 댄스곡을 흘려보냈다. 음악마저 흘러나오자 난감하긴 했지만, 한결이 슬슬 몸을 풀었다. 각지고 큰 팔 놀림, 유연한 꺾임…… 제법 그럴싸한 춤 실력이다.
“와아……. 남편 정말 잘 춘다. 이렇게 잘 출 줄 몰랐어.”
한결은 오랜만에 춘 춤이 쑥스러운지 얼른 말을 돌렸다.
“한 번 더 해”
그 정도야 뭐. 또다시 거뜬히 이겨 주지.
“좋아!”
“자, 숨 쉬고. 하나, 두울, 셋”
이번에도 동시에 둘의 얼굴이 물속에 잠겼다.
...25, 26, 27, 28 이번에는 한결이 잘 버티고 있다. 숨이 차 오는지, 다빈이 물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한결도 두 손을 꽉 쥐고 버텼다.
“……으으으”
“……음음음”
몇 초가 더 지나자 결국 다빈이 참지 못하고 먼저 얼굴을 들었다.
“푸하!”
연이어 한결이 바로 따라 올라와 얼굴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
“푸하. 하하 이번엔 내가 이겼어!”
“인정. 벌칙은?”
패배를 당당히 인정한 다빈이 벌칙을 물어왔다.
“뽀뽀!”
한결의 말에 다빈의 얼굴에는 순간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
“뭘 그리 놀래. 부부끼리 뽀뽀는 기본이지. 우리 커플만 아직 손만 잡고 다니지, 다른 커플들은 벌써 뽀뽀하는 거 몇 번이나 나갔어.”
다른 커플은 누구처럼 애인 따로 두고 있진 않지!
하지만 마다할 수 없었다. 오늘 촬영은 스킨십이 주요 포인트였으므로.
“…… 좋아.”
호흡을 가다듬고 다빈이 한결을 향해 정면으로 섰다.
마주 선 한결이 다빈을 쳐다보았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저 ‘드라마에서 했던 것처럼 간단히 입만 한 번 맞추면 되지 뭐’ 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향한 저 사랑스럽고 설렘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빛에 다빈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다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휴……! 한……다……”
“응”
이미 눈을 감고, 다빈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던 한결의 입꼬리가 점점 더 하늘 높이 올라갔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마구 뛰기 시작했다.
다빈이 천천히 한결에게 다가가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짝 감쌌다. 한결 역시도 긴장됐는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살며시 감은 다빈이 자신의 입술을 한결의 입술에 살짝 대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한결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몸에는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했다. 그래도 방송에 잡혀야 하니 잠시 입술을 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다빈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얼굴을 들려 하려 하자
이번에는 한결이 손이 다빈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다빈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뽀뽀……. 가 아닌 키스가 시작됐다. 한결의 입술이 다빈의 윗입술을 그리고 아랫입술을 삼켰다. 그리고는 핥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마치 다빈의 입술을 먹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부드럽기도 세차기도 하게.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8화 - 정말 같은 반지가 맞네요
순간, 방송인 걸 잊은 걸까. 다빈의 입술이 열려, 문 앞에서 활개를 치고 있던 한결의 혀와 만났다. 둘은 망설임 없이 엉켰고, 낯선 입안을 열심히 탐색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다가는 모든 신경이 정신줄을 놓을 듯한 순간, 한결이 다빈의 입에서 얼굴을 뗐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한결이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다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을 다빈은 미처 보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던 다빈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한결을 쳐다보았다.
그랬지. 우린 촬영 중이었지. 잠깐 잊을 뻔했다. 한결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건 드라마나 영화 때 종종 해왔던, 키스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이미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 되어 다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죠?”
한결이 연출진을 향해 외쳤다.
신 PD가 고개를 끄덕이자, 촬영은 종료되었다.
“……!!”
좀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눈빛을 쏟아내는 사랑 충만해 뵈던 한결은 온데간데없었다.
카메라가 꺼지자, 언제 키스 따위를 나눴냐는 듯 무심하게 “수고했어요.” 라는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다빈은 섭섭했다, 아쉬웠다, 무심히 대하는 표정을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자신에겐 그런 기분을 느낄 자격이 없지 않은가. 둘은 연인도, 더 이상 가상부부도 아닌 명백히 남남일 뿐이다.
김한결! 로맨스 연기는 하나는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네.
그 연기에 또 속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다빈은 방송임을 잊고 자꾸만 감정이입이 되는 자신을 한없이 책망했다.
***
다음 날 촬영 스케줄이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던 한결은 자꾸만 어제 다빈과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촉촉한 입술, 부드러운 볼, 자그마한 어깨, 한 손에 들어오는 가는 허리…… 그녀를 안고 키스를 나누며 순간 그게 방송임을 잊을 뻔했다. 아니,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잊을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빈에게서 몸을 뗀 후, 떨림과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을 표정을 애써 숨겼다.
그녀 역시도 방송용으로 키스에 응했던 뿐인 것일까.
다빈을 찾아가, 지금의 이 상황을 설명하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까.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자신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화연과 연인 노릇을 한다?
그건 차마 못 할 일을 시키는 것이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상황을 모르는 것이 나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내일 있을 촬영을 위해 대본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대사를 읽는데 글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캔을 꺼내 뚜껑을 땄다.
***
화연의 집.
사실 오늘 잡지 화보 촬영이 있던 화연은 잡지 팀에 부탁해 어렵사리 날짜를 연기했다. 한결이 모처럼 쉬는 날, 자신도 맞춰 쉬고 싶었다. 모처럼 함께 식사해도 좋을 테고, 드라이브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제 통화할 때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으니, 뭐 한결의 집에서 같이 쉬어도 좋았다. 모처럼 단둘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면 뭘 하든지 그건 상관없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화연은 이미 메이크업에 외출 준비까지 끝내고, 한결의 연락을 기다렸다.
시계가 12시를 넘기자
“어제 촬영이 늦게 끝나 아직 자고 있나.”
시계가 2시를 넘기자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할 줄 알았는데……”
시계가 5시를 넘기자
“저녁은 같이 먹자고 연락하겠지…….”
하염없이 시계와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꼬박 한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했다.
창문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화연의 마음에도 먹구름이 끼어 더는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화연이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한결의 번호가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엔 종료를 누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까똑 대화창을 열었다.
- 뭐해? 온종일 기다렸는데
를 썼다가 지웠다.
- 계속 자는 거야?
를 썼다가 지웠다.
- 심심해, 놀자
를 썼다가 지웠다.
- 저녁 같이 먹을래?
를 써 놓고는 한참을 들여다봤다. 보내도 될까? 한결이 먼저 연락해 올 때까지 그냥 기다릴까?
몇 번을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가슴 떨리고 망설여질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화연이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되어도 한결에게는 답변이 없었다.
참담한 심정이 된 화연…… 그때, 화연의 귀에 익숙한 ‘까똑’을 알리는 설정 음이 들렸다.
화연이 얼른 까똑 창을 확인했다.
- 미안, 밥 생각이 없다.
한결이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던가. 자신과 친구로 지낼 때, 한 번도 한결이 차가운 사람이라 느낀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이 조금 수고롭더라도 상대를 배려하는 편이었다. 또 죽이 잘 맞았던 화연이 뭘 하자고 연락을 보내면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가짜 열애설 인정이긴 했지만, 화연은 한결과 좀 더 가까워지리라 은근 기대했었다. <연우결>을 시작하면서부터 한결의 관심이 너무 다빈을 향해 기우는 듯해, 마냥 섭섭해지던 찰라 이제 한결의 관심을 다시 찾아올 수 있겠다 기대했다.
그러나 한결은 오히려 열애설 인정 전보다 더 멀어진 느낌이다.
전화 한 통 하기가 어려웠고, 밥 한번 먹을 시간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의 이 상황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한결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질 줄 몰랐다.
서러움에 화연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이래서 짝사랑이 가슴 아픈 거구나.
이래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인 거구나.
한 번 떨어진 눈물은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연은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사랑의 아픔에, 서글픔에, 그런데도 줄어들지 않는 한결에 대한 커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밤 그렇게 한동안 엉엉 울음을 토해내야 했다.
***
드라마국으로 옮긴 신 PD가 로코의 귀재로 불리는 스타 작가 김은정 작가와 손잡고 새로 들어가는 미니시리즈에 다빈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방송 회차도 벌써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드라마는 첫 방 시청률부터 20%를 넘기며 인기를 예감케 하더니 방송 회차가 더 할수록 시청률이 올라 최근에는 40%에 육박할 정도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의 드라마로 떠올랐다.
덕분에 다빈의 인기도 치솟아 그야말로 ‘자고 나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HOT 한 스타가 되었다.
오늘은 세트 촬영이 있어 분장을 끝낸 다빈이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트에 세세한 소품이 들어오고, 조명이 자리 잡고, 카메라가 앵글을 잡으며 테스트를 하느라 분주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빈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미라와 함께 문을 나서 복도를 걸어갔다. 그때 마침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끝낸 화연이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딱히 화연을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피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 러·나 그녀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한결의 연인이었으므로……
그녀를 보면, 한결이 떠올라 다시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기에.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대해야 했다.
다빈을 발견한 화연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네. 언니 드라마 대박 나신 거 축하해요. 저도 잘 보고 있어요”
“네, 고마워요.”
마침 화연이 자신이 마시려고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가 생각 난 듯 다빈에게 건넸다.
“아, 이거 드세요. 언니”
캔 커피를 내미는 화연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녀의 손에는 다빈에게도 익숙한 반지가 끼어 있었다.
“아, 반……지……”
자신도 모르게 반지란 말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화연이 잠깐, 멈칫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언니도 이 반지랑 같은 반지 갖고 계시죠?”
“아, 네. 그러고 보니 정말 같은…… 반지가 맞나 보네요.”
애써 태연한 척 말했으나, 화연이 그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화가 끌어 올랐다.
이제 와서 그깟 일 밝혀 무엇하랴 싶었지만, 궁금한 건 못 참는 다빈이었다.
“네 같은 반지 맞아요”
화연이 대답했다.
“선물…… 받은 거죠?”
“……네에, 그렇긴 한데……”
화연은 말끝을 흐렸다. 이 반지의 출처에 대해 한결에겐 엄마로부터 선물 받은 반지라고 했으니 “선물 받은 게 맞냐”라는 말에 그렇다는 답변은 맞는 답이긴 했다.
하지만 화연 역시 그 질문의 주체를 모를 리 없었다. 한결이 선물한 게 맞냐는 의미임을. 그러나 화연은 ‘엄마가 선물했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선물이 맞다.’라는 말만 인정한 채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사실을 밝히면 금세 한결이 다빈을 향해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아서, 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거짓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화연의 답변을 듣고 난 다빈은 모든 게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소문이 맞았구나. 같은 반지를 나와 화연에게 같이 선물한 게 사실이었어.
나와의 방송을 핑계로 저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녀도, 연인과의 커플링이라는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테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빈은 다시금 끌어 오르는 서운함과 화를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무슨 기대를 했던 거야 유다빈.
같은 반지가 분명한데. 김한결이 선물한 게 아니라는 소리라도 기대했던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미련스럽게 여태껏 반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못났다 유다빈, 한심하다 한심해!
자신을 책망했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소리에 다빈이 화연과의 만남을 정리하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화연과의 대화를 모두 지켜보았던 매니저 미라가 입을 열었다.
“김한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방송에 나가는 반지랑 같은 반지를 애인한테 선물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됐어. 얼마나 사랑하면 그랬겠어. 둘이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껏 커플링을 끼고 다니고 싶었던가 보지”
“그러게 말야. 그렇게 해서라도 커플링을 끼고 싶었던 게 혹시 김한결이 아니라 이화연이 그런 거라면?”
“무슨 소리야?”
“에잇, 아니야. 그런데 한참 열애 중인 사람 표정이 왜 저러니? 저 때는 얼굴이 확 펴서 제일 예뻐 보일 때 아닌가?”
“…… 뭐, 예쁘기만 하네”
“아냐 아냐, 뭔가 이상해”
미라가 무슨 냄새라도 맡은 탐정처럼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순간, 방송인 걸 잊은 걸까. 다빈의 입술이 열려, 문 앞에서 활개를 치고 있던 한결의 혀와 만났다. 둘은 망설임 없이 엉켰고, 낯선 입안을 열심히 탐색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다가는 모든 신경이 정신줄을 놓을 듯한 순간, 한결이 다빈의 입에서 얼굴을 뗐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한결이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다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을 다빈은 미처 보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던 다빈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한결을 쳐다보았다.
그랬지. 우린 촬영 중이었지. 잠깐 잊을 뻔했다. 한결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건 드라마나 영화 때 종종 해왔던, 키스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이미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 되어 다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죠?”
한결이 연출진을 향해 외쳤다.
신 PD가 고개를 끄덕이자, 촬영은 종료되었다.
“……!!”
좀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눈빛을 쏟아내는 사랑 충만해 뵈던 한결은 온데간데없었다.
카메라가 꺼지자, 언제 키스 따위를 나눴냐는 듯 무심하게 “수고했어요.” 라는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다빈은 섭섭했다, 아쉬웠다, 무심히 대하는 표정을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자신에겐 그런 기분을 느낄 자격이 없지 않은가. 둘은 연인도, 더 이상 가상부부도 아닌 명백히 남남일 뿐이다.
김한결! 로맨스 연기는 하나는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네.
그 연기에 또 속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다빈은 방송임을 잊고 자꾸만 감정이입이 되는 자신을 한없이 책망했다.
***
다음 날 촬영 스케줄이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던 한결은 자꾸만 어제 다빈과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촉촉한 입술, 부드러운 볼, 자그마한 어깨, 한 손에 들어오는 가는 허리…… 그녀를 안고 키스를 나누며 순간 그게 방송임을 잊을 뻔했다. 아니,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잊을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빈에게서 몸을 뗀 후, 떨림과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을 표정을 애써 숨겼다.
그녀 역시도 방송용으로 키스에 응했던 뿐인 것일까.
다빈을 찾아가, 지금의 이 상황을 설명하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까.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자신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화연과 연인 노릇을 한다?
그건 차마 못 할 일을 시키는 것이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상황을 모르는 것이 나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내일 있을 촬영을 위해 대본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대사를 읽는데 글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캔을 꺼내 뚜껑을 땄다.
***
화연의 집.
사실 오늘 잡지 화보 촬영이 있던 화연은 잡지 팀에 부탁해 어렵사리 날짜를 연기했다. 한결이 모처럼 쉬는 날, 자신도 맞춰 쉬고 싶었다. 모처럼 함께 식사해도 좋을 테고, 드라이브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제 통화할 때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으니, 뭐 한결의 집에서 같이 쉬어도 좋았다. 모처럼 단둘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면 뭘 하든지 그건 상관없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화연은 이미 메이크업에 외출 준비까지 끝내고, 한결의 연락을 기다렸다.
시계가 12시를 넘기자
“어제 촬영이 늦게 끝나 아직 자고 있나.”
시계가 2시를 넘기자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할 줄 알았는데……”
시계가 5시를 넘기자
“저녁은 같이 먹자고 연락하겠지…….”
하염없이 시계와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꼬박 한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했다.
창문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화연의 마음에도 먹구름이 끼어 더는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화연이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한결의 번호가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엔 종료를 누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까똑 대화창을 열었다.
- 뭐해? 온종일 기다렸는데
를 썼다가 지웠다.
- 계속 자는 거야?
를 썼다가 지웠다.
- 심심해, 놀자
를 썼다가 지웠다.
- 저녁 같이 먹을래?
를 써 놓고는 한참을 들여다봤다. 보내도 될까? 한결이 먼저 연락해 올 때까지 그냥 기다릴까?
몇 번을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가슴 떨리고 망설여질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화연이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이 되어도 한결에게는 답변이 없었다.
참담한 심정이 된 화연…… 그때, 화연의 귀에 익숙한 ‘까똑’을 알리는 설정 음이 들렸다.
화연이 얼른 까똑 창을 확인했다.
- 미안, 밥 생각이 없다.
한결이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었던가. 자신과 친구로 지낼 때, 한 번도 한결이 차가운 사람이라 느낀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이 조금 수고롭더라도 상대를 배려하는 편이었다. 또 죽이 잘 맞았던 화연이 뭘 하자고 연락을 보내면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가짜 열애설 인정이긴 했지만, 화연은 한결과 좀 더 가까워지리라 은근 기대했었다. <연우결>을 시작하면서부터 한결의 관심이 너무 다빈을 향해 기우는 듯해, 마냥 섭섭해지던 찰라 이제 한결의 관심을 다시 찾아올 수 있겠다 기대했다.
그러나 한결은 오히려 열애설 인정 전보다 더 멀어진 느낌이다.
전화 한 통 하기가 어려웠고, 밥 한번 먹을 시간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의 이 상황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한결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질 줄 몰랐다.
서러움에 화연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이래서 짝사랑이 가슴 아픈 거구나.
이래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인 거구나.
한 번 떨어진 눈물은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연은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사랑의 아픔에, 서글픔에, 그런데도 줄어들지 않는 한결에 대한 커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밤 그렇게 한동안 엉엉 울음을 토해내야 했다.
***
드라마국으로 옮긴 신 PD가 로코의 귀재로 불리는 스타 작가 김은정 작가와 손잡고 새로 들어가는 미니시리즈에 다빈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방송 회차도 벌써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드라마는 첫 방 시청률부터 20%를 넘기며 인기를 예감케 하더니 방송 회차가 더 할수록 시청률이 올라 최근에는 40%에 육박할 정도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의 드라마로 떠올랐다.
덕분에 다빈의 인기도 치솟아 그야말로 ‘자고 나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HOT 한 스타가 되었다.
오늘은 세트 촬영이 있어 분장을 끝낸 다빈이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트에 세세한 소품이 들어오고, 조명이 자리 잡고, 카메라가 앵글을 잡으며 테스트를 하느라 분주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빈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미라와 함께 문을 나서 복도를 걸어갔다. 그때 마침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끝낸 화연이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딱히 화연을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피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 러·나 그녀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한결의 연인이었으므로……
그녀를 보면, 한결이 떠올라 다시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기에.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대해야 했다.
다빈을 발견한 화연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네. 언니 드라마 대박 나신 거 축하해요. 저도 잘 보고 있어요”
“네, 고마워요.”
마침 화연이 자신이 마시려고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가 생각 난 듯 다빈에게 건넸다.
“아, 이거 드세요. 언니”
캔 커피를 내미는 화연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녀의 손에는 다빈에게도 익숙한 반지가 끼어 있었다.
“아, 반……지……”
자신도 모르게 반지란 말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화연이 잠깐, 멈칫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언니도 이 반지랑 같은 반지 갖고 계시죠?”
“아, 네. 그러고 보니 정말 같은…… 반지가 맞나 보네요.”
애써 태연한 척 말했으나, 화연이 그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화가 끌어 올랐다.
이제 와서 그깟 일 밝혀 무엇하랴 싶었지만, 궁금한 건 못 참는 다빈이었다.
“네 같은 반지 맞아요”
화연이 대답했다.
“선물…… 받은 거죠?”
“……네에, 그렇긴 한데……”
화연은 말끝을 흐렸다. 이 반지의 출처에 대해 한결에겐 엄마로부터 선물 받은 반지라고 했으니 “선물 받은 게 맞냐”라는 말에 그렇다는 답변은 맞는 답이긴 했다.
하지만 화연 역시 그 질문의 주체를 모를 리 없었다. 한결이 선물한 게 맞냐는 의미임을. 그러나 화연은 ‘엄마가 선물했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선물이 맞다.’라는 말만 인정한 채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사실을 밝히면 금세 한결이 다빈을 향해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아서, 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거짓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화연의 답변을 듣고 난 다빈은 모든 게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소문이 맞았구나. 같은 반지를 나와 화연에게 같이 선물한 게 사실이었어.
나와의 방송을 핑계로 저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녀도, 연인과의 커플링이라는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테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빈은 다시금 끌어 오르는 서운함과 화를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무슨 기대를 했던 거야 유다빈.
같은 반지가 분명한데. 김한결이 선물한 게 아니라는 소리라도 기대했던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미련스럽게 여태껏 반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못났다 유다빈, 한심하다 한심해!
자신을 책망했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소리에 다빈이 화연과의 만남을 정리하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화연과의 대화를 모두 지켜보았던 매니저 미라가 입을 열었다.
“김한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방송에 나가는 반지랑 같은 반지를 애인한테 선물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됐어. 얼마나 사랑하면 그랬겠어. 둘이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껏 커플링을 끼고 다니고 싶었던가 보지”
“그러게 말야. 그렇게 해서라도 커플링을 끼고 싶었던 게 혹시 김한결이 아니라 이화연이 그런 거라면?”
“무슨 소리야?”
“에잇, 아니야. 그런데 한참 열애 중인 사람 표정이 왜 저러니? 저 때는 얼굴이 확 펴서 제일 예뻐 보일 때 아닌가?”
“…… 뭐, 예쁘기만 하네”
“아냐 아냐, 뭔가 이상해”
미라가 무슨 냄새라도 맡은 탐정처럼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9화 - 오해는 쌓이고 쌓여
좀 전에 화연과의 만남 때문인지 10년 차의 베테랑 연기자 다빈은 집중력이 떨어져 자꾸만 NG를 내고 있었다. 집중하자, 마음을 가다듬자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연기는 머리가 아닌 심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어긋났다.
연거푸 NG가 계속되자 신 PD가 촬영 중지를 외쳤다.
“다빈 씨 평소답지 않게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PD님, 죄송해요”
“그럼, 잠깐만 쉬었다가 갑시다.”
“휴……”
다빈이 가슴 속에 눌어붙어 있는 불편한 응어리를 털어내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다. 요즘 최고의 인기 여배우 유다빈이 웬 한숨을 그리 크게 쉬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는 선우였다!
“오빠? 오빠가 여기는 웬일이야?”
“웬일이긴. 이 드라마 우리 회사에서 투자하는 거잖아. 투자사 대표가 잘 나가는 드라마 현장 찾는 건 당연한 거지”
“이 드라마 오빠네 회사서 투자하는 거였어?”
“몰랐나 보구나. 하하”
그럼 설마, 내 캐스팅도 오빠가?
다빈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선우가 ‘왜 그러냐’는 듯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어보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다빈은 굳이 입 밖으로 내서 질문하지 않았다. 설사 이번 캐스팅에 선우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선우와 특별히 얽히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 그뿐이다. 다행히 드라마 반응도 좋아 잘 되고 있지 않은가. 다빈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의문이 드는 마음을 삼켰다.
“뭐 그런 뜻에서 투자한 드라마 대박 내준 여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내가 오늘 저녁 사면 어때?”
“글쎄, 오늘 저녁까지 계속 촬영할걸? 다 다음 주 분량 오늘 세트 녹화 마친다고 했으니”
“그럼, 촬영만 일찍 끝나면 괜찮다는 거지?”
“?”
선우는 그 길로 신 PD를 찾아가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조연출이 오늘 촬영 종료를 알렸다. 스태프들 회식까지 시켜주기로 한 모양이다.
촬영을 핑계 댔는데, 촬영이 일찍 끝났으니 꼼짝없이 선우의 저녁 식사 제안을 허락해야 할 판이었다. 어서 저녁 먹으러 가자며 선우가 다빈을 재촉했다. 마지못한 다빈이 미라와 함께 선우를 따라나섰다.
***
선우가 다빈과 미라를 태워 도착한 곳은 고급 호텔 내에 있는 한식당이었다. 선우가 식당 내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다가와 룸으로 안내하겠다며 이들을 앞섰다.
룸을 열고 들어서니 인자한 표정의 노신사가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서들 오너라.”
“약속 시간보다 저희가 10분 일찍 온 건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하하. 그냥 오늘은 좀 일찍 와서 기다리고 싶어지더구나. 그동안은 네가 날 기다려줬으니 말이다”
다빈은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노신사는 대체 누군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빨리 이 예쁜 아가씨를 나한테도 좀 소개해줘야지?”
“네, 이쪽은 말씀드렸던 다빈이에요. 유다빈. 다빈아, 인사드려 우리 아버지셔”
아버지? 선우 오빠의 아버지라면 K그룹의 한 회장?
그런데 그 지체 높으신 K그룹의 회장이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런 자리에 나를 왜 부른 거야?!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다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치 빠른 미라는 벌써 상황을 눈치챘는지, 자신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방을 나섰다.
“아……. 안녕……하세요. 유다빈입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우리 선우가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좋아하는 아가씨가 누군가 했더니 만나보니 그 이유를 알겠네. 하하”
한 회장은 사람 좋은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 자리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빈아 지금은 그냥 식사만 하고, 나중에 다 설명할게”
선우가 다빈을 쳐다보며 말을 막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맞춰 가만있어줄 다빈이 아니었다.
“아니, 오빠 어떤 설명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오빠 아버님을 뵐 일은 없는 것 같은데.”
“!”
한 회장과 선우가 동시에 다빈을 쳐다보았다.
“설명도 않고 데려온 게냐?”
“……아버지께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면 다빈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그냥 오늘은 식사만 같이하는 정도로 말하고 데려왔어요”
“흠. …우리 아들놈이 실수했군. 미안해요. 다빈양. 이 녀석이 마음이 급했나 보네. 내가 10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지가 점 찍어 놓은 사람을 허락했더니 너무 서둘렀나 봐. 다빈 양이 좀 이해해줘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선우 오빠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빈은 단호하게 말하며, 무례가 되지 않게 최대한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왔다. 당황한 선우가
“아버지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난감한 심정으로 한 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쯧쯧”
한 회장이 혀를 찼다.
“얼른 나가서 해명부터 해라.”
한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는 다빈을 쫓아 방을 나섰다.
***
서둘러 이곳을 떠나기 위해 룸에서 나온 다빈이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미라를 찾았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미라는 어디 있는 거지. 혼자서 가버리진 않았을 텐데.
다빈은 미라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내 들었다. 그러는 동안 뒤따라 나온 선우가 다빈의 팔목을 잡아 자신을 향해 돌려세웠다.
“다빈아 내 말 좀 들어봐”
“나, 이제 오빠 말 들을 일 더 없다고 지난번에 확실히 얘기한 거 같은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오빠 그만 만나고 싶어.”
“너 당황스러운 거 알겠는데, 내 얘기 좀 들어봐”
“글쎄, 난 더 들을 얘기가 없다니까?”
다빈이 다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선우가 다시 다빈을 붙잡았다.
그때, 뒤에서
“다빈 양……”
한 회장이었다.
“!!”
다빈과 선우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빈 양, 선우 녀석이 오늘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럼 저 녀석은 보내고 이 노인네랑 저녁이나 같이해 주면 어때요? 내가 어려운지 사람들이 업무적인 회동이 아니면 나하고 밥 한 끼를 안 먹어주려고 해서 말이야. 나도 모처럼 일을 떠나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나 나누면서 밥 좀 먹어 보고 싶은데. 내 말 상대 좀 돼 주겠어요? 허허”
냉철한 대기업 회장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자한 말투였다.
다빈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어른의 말을 더는 거절하기 어려워 망설였다.
“뭐하고 있냐, 너는 그만 가 봐.
오늘은 내가 다빈 양하고 말상대도 하고 젊은 사람들 세상 사는 얘기도 좀 들으며 편하게 한 끼 할 테니”
“……아버지.”
“가보래도!”
편안한 얼굴이었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선우도 이쯤 되니, 더 말릴 수도 없어서 다빈에게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떼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자리를 떴다. 선우가 자리를 뜨자, 한 회장이 배가 많이 고프니 다빈에게
어서 들어가 식사를 할 것을 재촉했다. 다빈도 마치 못해 한 회장의 뒤를 따랐다.
*
불편할 자리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한 회장은 편하고, 유머러스했다.
선우 얘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젊은이들의 관심거리나 고민거리, 배우 생활의 노고 등을 물어왔다. 다빈도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니, 그저 심심해하는 할아버지 말벗이라도 되어 드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 선우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다빈 양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만나 보니깐 그 이유를 알겠네”
“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던 다빈이 선우의 얘기에 멈칫했다.
“10년 전에 그 녀석을 유학 보낼 때, 녀석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비서를 통해 들었어요. 그래도 앞으로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라 유학을 가랬더니 아, 이 녀석이 별로 싫다는 내색도 안 하고 간다고 하길래 그렇게 정리 하나 보다 했지.”
그때 그래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유학을 갔던 거구나.
“그랬는데, 녀석이 돌아와서는 뜬금없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거야. 그러더니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리더군. 이제 나이도 됐다 싶어서 결혼 얘기를 꺼냈더니 사업을 성공한 후에 자기 뜻을 따라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 사람을 시켜서 녀석이 왜 그러는지 알아봤지. 그랬더니 다빈 양을 아직 못 잊은 거였더군.”
그랬었구나……
“녀석이 그때 그렇게 쉽게 다빈 양을 두고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집안 시끄럽지 않게 공부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서 사업을 성공 시키고 다빈 양을 다시 데려오기 위함이었던 거야. 그때야 내가 아차! 싶었어요.”
다빈은 한 회장의 얘기를 담담하게 들었다.
“나도 선우 엄마를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와서 집안의 반대를 많이 받았었거든. 결혼해 살면서 사업으로 힘들어질 때 도와줄 언덕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 아들은 좀 도움이 되는 비슷한 집안의 여식과 연결되길 바랐던 거야.”
먼저 걸었던 길, 그래서 자기 아들은 조금 편히 그 길을 걸어갔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 다빈은 자식을 위한 한 회장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했다.
“근데 말야. 나는 지금도 선우 엄마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아. 그 사람 덕분에 난 꽤 잘 살았던 것 같거든.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단 걸 최근에야 깨달았지. 그래서 내가 다빈 양을 한번 보고 싶다고 했어요. 녀석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좋아서 저러고 있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
그런데 회장님 너무 늦으셨어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만나보니 이유가 있었어. 녀석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볼 줄 아는 놈이네…. 허허”
한 회장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다빈은 선뜻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의 사랑을 인정해 주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게 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회장의 뜻을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은 오빠에 대한 마음이 그렇지가 못해요. 지금 오빠는 그냥 대학 선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건 오빠한테도 이미 말했던 부분이고요. 그런데도 오늘 왜 저를 회장님께 인사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랬구먼. 내 허락이 떨어지니 녀석이 물불 안 가리고 다빈 양을 데려온 거였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다빈 양이 죄송할 건 없지. 내가 진작 그놈의 마음을 좀 헤아렸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좀 전에 화연과의 만남 때문인지 10년 차의 베테랑 연기자 다빈은 집중력이 떨어져 자꾸만 NG를 내고 있었다. 집중하자, 마음을 가다듬자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연기는 머리가 아닌 심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어긋났다.
연거푸 NG가 계속되자 신 PD가 촬영 중지를 외쳤다.
“다빈 씨 평소답지 않게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PD님, 죄송해요”
“그럼, 잠깐만 쉬었다가 갑시다.”
“휴……”
다빈이 가슴 속에 눌어붙어 있는 불편한 응어리를 털어내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다. 요즘 최고의 인기 여배우 유다빈이 웬 한숨을 그리 크게 쉬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는 선우였다!
“오빠? 오빠가 여기는 웬일이야?”
“웬일이긴. 이 드라마 우리 회사에서 투자하는 거잖아. 투자사 대표가 잘 나가는 드라마 현장 찾는 건 당연한 거지”
“이 드라마 오빠네 회사서 투자하는 거였어?”
“몰랐나 보구나. 하하”
그럼 설마, 내 캐스팅도 오빠가?
다빈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선우가 ‘왜 그러냐’는 듯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어보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다빈은 굳이 입 밖으로 내서 질문하지 않았다. 설사 이번 캐스팅에 선우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선우와 특별히 얽히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 그뿐이다. 다행히 드라마 반응도 좋아 잘 되고 있지 않은가. 다빈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의문이 드는 마음을 삼켰다.
“뭐 그런 뜻에서 투자한 드라마 대박 내준 여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내가 오늘 저녁 사면 어때?”
“글쎄, 오늘 저녁까지 계속 촬영할걸? 다 다음 주 분량 오늘 세트 녹화 마친다고 했으니”
“그럼, 촬영만 일찍 끝나면 괜찮다는 거지?”
“?”
선우는 그 길로 신 PD를 찾아가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조연출이 오늘 촬영 종료를 알렸다. 스태프들 회식까지 시켜주기로 한 모양이다.
촬영을 핑계 댔는데, 촬영이 일찍 끝났으니 꼼짝없이 선우의 저녁 식사 제안을 허락해야 할 판이었다. 어서 저녁 먹으러 가자며 선우가 다빈을 재촉했다. 마지못한 다빈이 미라와 함께 선우를 따라나섰다.
***
선우가 다빈과 미라를 태워 도착한 곳은 고급 호텔 내에 있는 한식당이었다. 선우가 식당 내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다가와 룸으로 안내하겠다며 이들을 앞섰다.
룸을 열고 들어서니 인자한 표정의 노신사가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서들 오너라.”
“약속 시간보다 저희가 10분 일찍 온 건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하하. 그냥 오늘은 좀 일찍 와서 기다리고 싶어지더구나. 그동안은 네가 날 기다려줬으니 말이다”
다빈은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노신사는 대체 누군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어서 빨리 이 예쁜 아가씨를 나한테도 좀 소개해줘야지?”
“네, 이쪽은 말씀드렸던 다빈이에요. 유다빈. 다빈아, 인사드려 우리 아버지셔”
아버지? 선우 오빠의 아버지라면 K그룹의 한 회장?
그런데 그 지체 높으신 K그룹의 회장이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런 자리에 나를 왜 부른 거야?!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다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치 빠른 미라는 벌써 상황을 눈치챘는지, 자신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방을 나섰다.
“아……. 안녕……하세요. 유다빈입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우리 선우가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좋아하는 아가씨가 누군가 했더니 만나보니 그 이유를 알겠네. 하하”
한 회장은 사람 좋은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 자리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빈아 지금은 그냥 식사만 하고, 나중에 다 설명할게”
선우가 다빈을 쳐다보며 말을 막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맞춰 가만있어줄 다빈이 아니었다.
“아니, 오빠 어떤 설명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오빠 아버님을 뵐 일은 없는 것 같은데.”
“!”
한 회장과 선우가 동시에 다빈을 쳐다보았다.
“설명도 않고 데려온 게냐?”
“……아버지께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면 다빈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그냥 오늘은 식사만 같이하는 정도로 말하고 데려왔어요”
“흠. …우리 아들놈이 실수했군. 미안해요. 다빈양. 이 녀석이 마음이 급했나 보네. 내가 10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지가 점 찍어 놓은 사람을 허락했더니 너무 서둘렀나 봐. 다빈 양이 좀 이해해줘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선우 오빠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빈은 단호하게 말하며, 무례가 되지 않게 최대한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왔다. 당황한 선우가
“아버지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난감한 심정으로 한 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쯧쯧”
한 회장이 혀를 찼다.
“얼른 나가서 해명부터 해라.”
한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는 다빈을 쫓아 방을 나섰다.
***
서둘러 이곳을 떠나기 위해 룸에서 나온 다빈이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미라를 찾았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미라는 어디 있는 거지. 혼자서 가버리진 않았을 텐데.
다빈은 미라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내 들었다. 그러는 동안 뒤따라 나온 선우가 다빈의 팔목을 잡아 자신을 향해 돌려세웠다.
“다빈아 내 말 좀 들어봐”
“나, 이제 오빠 말 들을 일 더 없다고 지난번에 확실히 얘기한 거 같은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오빠 그만 만나고 싶어.”
“너 당황스러운 거 알겠는데, 내 얘기 좀 들어봐”
“글쎄, 난 더 들을 얘기가 없다니까?”
다빈이 다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선우가 다시 다빈을 붙잡았다.
그때, 뒤에서
“다빈 양……”
한 회장이었다.
“!!”
다빈과 선우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빈 양, 선우 녀석이 오늘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럼 저 녀석은 보내고 이 노인네랑 저녁이나 같이해 주면 어때요? 내가 어려운지 사람들이 업무적인 회동이 아니면 나하고 밥 한 끼를 안 먹어주려고 해서 말이야. 나도 모처럼 일을 떠나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나 나누면서 밥 좀 먹어 보고 싶은데. 내 말 상대 좀 돼 주겠어요? 허허”
냉철한 대기업 회장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자한 말투였다.
다빈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어른의 말을 더는 거절하기 어려워 망설였다.
“뭐하고 있냐, 너는 그만 가 봐.
오늘은 내가 다빈 양하고 말상대도 하고 젊은 사람들 세상 사는 얘기도 좀 들으며 편하게 한 끼 할 테니”
“……아버지.”
“가보래도!”
편안한 얼굴이었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선우도 이쯤 되니, 더 말릴 수도 없어서 다빈에게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떼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자리를 떴다. 선우가 자리를 뜨자, 한 회장이 배가 많이 고프니 다빈에게
어서 들어가 식사를 할 것을 재촉했다. 다빈도 마치 못해 한 회장의 뒤를 따랐다.
*
불편할 자리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한 회장은 편하고, 유머러스했다.
선우 얘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젊은이들의 관심거리나 고민거리, 배우 생활의 노고 등을 물어왔다. 다빈도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니, 그저 심심해하는 할아버지 말벗이라도 되어 드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 선우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다빈 양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만나 보니깐 그 이유를 알겠네”
“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던 다빈이 선우의 얘기에 멈칫했다.
“10년 전에 그 녀석을 유학 보낼 때, 녀석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비서를 통해 들었어요. 그래도 앞으로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라 유학을 가랬더니 아, 이 녀석이 별로 싫다는 내색도 안 하고 간다고 하길래 그렇게 정리 하나 보다 했지.”
그때 그래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유학을 갔던 거구나.
“그랬는데, 녀석이 돌아와서는 뜬금없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거야. 그러더니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리더군. 이제 나이도 됐다 싶어서 결혼 얘기를 꺼냈더니 사업을 성공한 후에 자기 뜻을 따라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 사람을 시켜서 녀석이 왜 그러는지 알아봤지. 그랬더니 다빈 양을 아직 못 잊은 거였더군.”
그랬었구나……
“녀석이 그때 그렇게 쉽게 다빈 양을 두고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집안 시끄럽지 않게 공부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서 사업을 성공 시키고 다빈 양을 다시 데려오기 위함이었던 거야. 그때야 내가 아차! 싶었어요.”
다빈은 한 회장의 얘기를 담담하게 들었다.
“나도 선우 엄마를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와서 집안의 반대를 많이 받았었거든. 결혼해 살면서 사업으로 힘들어질 때 도와줄 언덕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 아들은 좀 도움이 되는 비슷한 집안의 여식과 연결되길 바랐던 거야.”
먼저 걸었던 길, 그래서 자기 아들은 조금 편히 그 길을 걸어갔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 다빈은 자식을 위한 한 회장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했다.
“근데 말야. 나는 지금도 선우 엄마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아. 그 사람 덕분에 난 꽤 잘 살았던 것 같거든.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단 걸 최근에야 깨달았지. 그래서 내가 다빈 양을 한번 보고 싶다고 했어요. 녀석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좋아서 저러고 있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
그런데 회장님 너무 늦으셨어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만나보니 이유가 있었어. 녀석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볼 줄 아는 놈이네…. 허허”
한 회장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다빈은 선뜻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의 사랑을 인정해 주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게 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회장의 뜻을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은 오빠에 대한 마음이 그렇지가 못해요. 지금 오빠는 그냥 대학 선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건 오빠한테도 이미 말했던 부분이고요. 그런데도 오늘 왜 저를 회장님께 인사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랬구먼. 내 허락이 떨어지니 녀석이 물불 안 가리고 다빈 양을 데려온 거였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다빈 양이 죄송할 건 없지. 내가 진작 그놈의 마음을 좀 헤아렸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0화 - 사고
“……”
다빈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선우 놈…… 안쓰러워서 어쩌누.”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래도 젊은 사람과 모처럼 사람 냄새 나는 얘기도 나누고 했더니, 오랜만에 기분은 좋네. 허허. 다빈 양 마음이 그렇다니 내가 더는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대신에 선우랑 상관없이 가끔 이 노인네랑 오늘처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식사나 한 번씩 해 주는 건 할 수 있죠?”
“네? 그건……”
“그것마저 거절하지 말아요. 다빈 양”
다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 아버지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한 회장과의 식사자리가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듯 생각 외로 편안한 자리였다.
그때 한 회장의 비서가 들어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허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오늘은 이쯤하고 일어나야겠어요. 다빈 양”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하며 한 회장과 다빈이 룸에서 나왔다.
***
마침 다빈이 있던 호텔 식당에서 한결이 은표와 함께 광고주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광고 연장에 관해 얘기하며 식사를 하고 있던 은표의 눈에, 한 회장과 함께 있는 유다빈이 들어왔다.
“어, 유다빈 씨 아냐? 같이 나오는 저 사람은 K그룹 한 회장인데?!”
다빈의 이름이 언급되자 한결의 시선이 은표의 시선을 쫓았다.
룸에서 나온 듯한 한 회장과 다빈이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K그룹의 한 회장이라면, 한선우 부친?
한선우 부친을 유다빈 당신이 왜?
한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왜?!
한결은 은표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다빈을 쫓아 나갔다. 그러나 이미 미라의 차에 몸을 실은 다빈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
다빈이 한 회장과 식사를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본 한결이 겉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차를 운전해 온 곳은 바로 다빈의 집 앞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다빈이 사는 층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인가?
뭘 어쩔 것도 아닌데, 이대로 돌아서지도 못하겠다.
차 안으로 들어가 막연히 다빈을 기다렸다.
그때 아파트 입구 서 있는 낯익은 한 쌍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다빈과 선우였다.
***
선우는 식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차를 몰아 다빈의 집 앞에서 다빈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다빈이 미라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다.
미라의 차가 출발하고 나자 선우가 차에서 내려 다빈에게 다가갔다.
“……다빈아”
“?”
다빈이 뒤돌아 선우를 확인했다. 그와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한결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우니까.
“오늘 일…… 정말 미안하다. 널 당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 선우 오빠. 지금 여기 이렇게 와서 기다리는 것도 날 놀라게 하는 행동이야. 미안한데 우리 이런 식으로는 그만 보면 안 될까? 난 이미 오빠에 대한 입장정리 확실히 했고, 오빠도 그 말에 충분히 수긍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아버지가 갑자기 널 데리고 오라셔서. 널 인정하신다고 하셔서. 내가 마음이 급했었다. 너에게 얘기하면 분명 거절할 것 같아서 일단 인사부터 시키고 그다음에 널 설득하려고 했어.”
“오빠…… 오빠의 문제가 뭔지 알아? 항상 그다음에, 난 항상 그다음에 해결하려고 하는 거.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어떻게 난 항상 다른 문제 먼저 해결하고 나서, 나중에 해결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선우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랬었구나. 10년 전에도, 지금도. 다른 걸 먼저 해결한 후가 아니라 네가 먼저여야 했던 거였어.
널 먼저 이해시키고, 널 먼저 설득시키고 다른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하는 건데 내가 몰랐구나, 그걸 몰랐어.
선우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더 이상 다빈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자기의 잘못된 판단으로 뭘 놓친 건지,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지난번 다빈에게 고백을 하고, 다빈이 그에게 모진 말을 했을 때도 노력하면 다빈을 다시 돌이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다빈의 곁에 있겠노라 부탁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진정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한결은 차에서 뛰쳐나가 다빈을 선우에게서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그런 자신의 상황에 너무 화가 나서 애꿎은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
한결의 영화 촬영장.
영화 촬영도 어느덧 후반부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도심 추격장면을 찍는 날이다.
한결이 지난 영화의 흥행 대박이 이후, 1년 만에 차기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액션 스릴러 영화로,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부터 한결의 멋진 액션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던 터였다.
제작사에서는 오늘 있을 영화의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 촬영을 앞두고 기자들과 언론에 현장공개를 하기로 했다. 이미 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잡기 위해 취재진이 주변에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와이어를 묶고, 장비를 하나씩 하나씩 체크하는 액션 팀의 손길이 분주했다. 위험한 장면이다 보니 작은 실수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 장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한결만은 도통 영화에 집중되지 않았다. 대사를 읊는 순간에도, 액션 장면을 위해 합을 맞추는 동작에서도 자꾸만 어젯밤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다빈과 선우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둘이 정말 새로 시작이라도 한 건가.
그저 한숨만 자꾸 새어 나올 뿐 무엇 하나 집중이 되질 않았다.
촬영 준비가 거의 마무리가 되었는지, 현장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오늘 촬영할 장면에 관해 설명하며, 촬영 시작을 알렸다.
“자, 기자님들 오늘 촬영은 극 중 태수가 추격자들을 몸싸움 끝내 따돌리고 3층 건물에서 건물 벽을 타고 뛰어내려 추격자 무리를 따돌리는 장면입니다. 안전장비를 다 갖추고 해도 위험한 장면이니, 배우들의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게 가이드 선 밖에서 조용한 취재 부탁 드립니다. 그 외 관련한 다른 얘기들은 촬영 이 끝난 후, 이곳에서 감독님과 배우들 모시고, 별도의 간담회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니 그때 질문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취재진은 가이드라인 밖에서 촬영장 쪽을 향해 카메라를 대기하고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현장 공개 현장이 익숙한 취재진이 곧 촬영이 시작되면 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컷을 남기려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며 앵글과 구도 등을 확인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는 건물 밖 바닥에는 두꺼운 매트리스와 에어 매트가 깔려 있어,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자, 슛 들어갑니다.”
건물 옥상 문을 걷어차고 숨 가쁜 표정의 극 중 태수, 한결이 뛰어온다. 이내 뒤쫓아 온 무리가 한결의 뒤에서 칼을 휘두른다.
옥상 끝. 더는 도망칠 공간도 없다. 뒤돌아 고개를 좌측으로 휙~ 돌려 무리의 칼을 피한다.
칼날이 간발의 차이로 태수의 얼굴을 피해 휘둘러진다.
이내 허리를 숙였다가 일어서는 것 같다니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향해 오른발을 날린다.
칼을 휘두른 자가 칼을 떨어뜨리고 구석으로 나가떨어진다. 다시 한 놈이 한결의 뒤에서 주먹을 날려온다.
뒤에서의 가격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한결이 이번에는 뒷발을 날리는가 싶더니 연속해서 주먹을 날려 놈을 쓰러뜨린다.
먼저 나가떨어졌던 놈이 옆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는 다시 일어선다. 짐승 같은 눈빛으로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빈틈을 노리려 원을 그리며 돈다. 틈을 찾지 못한 놈이 먼저 칼을 휙~ 휙~ 휘두른다.
칼을 날렵하게 피해낸 한결이 벽을 차고 뛰어 올라가, 타닥. 그대로 놈의 손목을 칼을 차내고 연이은 발차기로 얼굴을 가격한다.
착지. 나가떨어진 놈이 정신을 잃었는지 움직임이 없다.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태수. 두 놈은 쓰려졌지만, 뒤에서 놈들의 무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피해야 한다. 갈 곳이 없다. 결심한 듯 옥상 끝에 서는 태수. 무리가 계단을 올라와 옥상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살려면 몸을 날려야 한다. 태수는 그대로 몸을 붕~ 띄워 몸을 날린다. 놓쳤다. 뒤따라 온 무리의 일그러진 표정이 카메라에 담긴다.
공중에서 붕~ 띄워지는 한결의 몸을 와이어가 붙잡고 있다. 대롱대롱 포물선을 그리며 한결의 몸이 줄에 매달려 흔들린다. 건물 밖에서 이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기자들의 눈이 일제히 옥상에 몸을 날린 한결에게 쏠린다.
“컷. 액션 팀. 한결 씨 와이어 내려주세요”
걱정했던 액션씬이 잘 마무리 되어서 다행이다 싶어 와이어에 매달려 있는 한결의 표정이 만족스럽다.
무술 감독의 지시가 있자, 연결돼 있던 와이어가 당겨지기 시작한다. 긴장했던 한결의 표정에 그제야 안도의 빛이 지나간다 싶은 그 순간, ‘찌직~ ‘ 한결의 몸을 연결하고 있던 와이어 줄이 끊어진다.
“아악!!”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건가. 영화는 어떻게 되지. 조금만 더 찍으면 끝인데. 그리고… 유다빈… 당신을, 이제 영영 못 보는 건가…?
와이어가 끊어지며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한결의 머리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악, 저기 봐”
“어어! 떨어진다 떨어져!”
“툭~!!”
한결의 몸이 그대로 커다란 에어 매트 위로 떨어졌다.
순간, 취재진의 카메라 셔터가 연속으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눌러지기 시작했다.
“야. 의료팀, 의료팀! 빨리빨리”
“119! 119부터 불러!”
“한결 씨, 한결 씨!! 정신 차려!!”
혼비백산한 감독과 스태프들이 몰려들었다.
“한결아!”
촬영현장 공개이니만큼, 함께 촬영장을 찾았던 한결의 소속사 대표 은표의 눈이 놀라움과 걱정으로 뒤덮이며 떨어진 한결을 향해 뛰어갔다.
[충격, 배우 김한결 촬영 중 추락]
[김한결 와이어 끊어져 3층 건물에서 추락. 부상 정도 심각]
[김한결 촬영 중 추락, 현장은 혼비백산]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김한결의 촬영 중 추락사고 기사는 사고가 있은 후, 얼마가 지나지 않아 포털 사이트 메인에 도배되다시피 뜨고 있었다.
“……”
다빈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선우 놈…… 안쓰러워서 어쩌누.”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래도 젊은 사람과 모처럼 사람 냄새 나는 얘기도 나누고 했더니, 오랜만에 기분은 좋네. 허허. 다빈 양 마음이 그렇다니 내가 더는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대신에 선우랑 상관없이 가끔 이 노인네랑 오늘처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식사나 한 번씩 해 주는 건 할 수 있죠?”
“네? 그건……”
“그것마저 거절하지 말아요. 다빈 양”
다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 아버지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한 회장과의 식사자리가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듯 생각 외로 편안한 자리였다.
그때 한 회장의 비서가 들어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허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오늘은 이쯤하고 일어나야겠어요. 다빈 양”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하며 한 회장과 다빈이 룸에서 나왔다.
***
마침 다빈이 있던 호텔 식당에서 한결이 은표와 함께 광고주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광고 연장에 관해 얘기하며 식사를 하고 있던 은표의 눈에, 한 회장과 함께 있는 유다빈이 들어왔다.
“어, 유다빈 씨 아냐? 같이 나오는 저 사람은 K그룹 한 회장인데?!”
다빈의 이름이 언급되자 한결의 시선이 은표의 시선을 쫓았다.
룸에서 나온 듯한 한 회장과 다빈이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K그룹의 한 회장이라면, 한선우 부친?
한선우 부친을 유다빈 당신이 왜?
한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왜?!
한결은 은표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다빈을 쫓아 나갔다. 그러나 이미 미라의 차에 몸을 실은 다빈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
다빈이 한 회장과 식사를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본 한결이 겉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차를 운전해 온 곳은 바로 다빈의 집 앞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다빈이 사는 층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인가?
뭘 어쩔 것도 아닌데, 이대로 돌아서지도 못하겠다.
차 안으로 들어가 막연히 다빈을 기다렸다.
그때 아파트 입구 서 있는 낯익은 한 쌍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다빈과 선우였다.
***
선우는 식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차를 몰아 다빈의 집 앞에서 다빈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다빈이 미라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다.
미라의 차가 출발하고 나자 선우가 차에서 내려 다빈에게 다가갔다.
“……다빈아”
“?”
다빈이 뒤돌아 선우를 확인했다. 그와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한결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우니까.
“오늘 일…… 정말 미안하다. 널 당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 선우 오빠. 지금 여기 이렇게 와서 기다리는 것도 날 놀라게 하는 행동이야. 미안한데 우리 이런 식으로는 그만 보면 안 될까? 난 이미 오빠에 대한 입장정리 확실히 했고, 오빠도 그 말에 충분히 수긍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아버지가 갑자기 널 데리고 오라셔서. 널 인정하신다고 하셔서. 내가 마음이 급했었다. 너에게 얘기하면 분명 거절할 것 같아서 일단 인사부터 시키고 그다음에 널 설득하려고 했어.”
“오빠…… 오빠의 문제가 뭔지 알아? 항상 그다음에, 난 항상 그다음에 해결하려고 하는 거.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어떻게 난 항상 다른 문제 먼저 해결하고 나서, 나중에 해결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선우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랬었구나. 10년 전에도, 지금도. 다른 걸 먼저 해결한 후가 아니라 네가 먼저여야 했던 거였어.
널 먼저 이해시키고, 널 먼저 설득시키고 다른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하는 건데 내가 몰랐구나, 그걸 몰랐어.
선우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더 이상 다빈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자기의 잘못된 판단으로 뭘 놓친 건지,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지난번 다빈에게 고백을 하고, 다빈이 그에게 모진 말을 했을 때도 노력하면 다빈을 다시 돌이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다빈의 곁에 있겠노라 부탁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진정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한결은 차에서 뛰쳐나가 다빈을 선우에게서 끌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그런 자신의 상황에 너무 화가 나서 애꿎은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
한결의 영화 촬영장.
영화 촬영도 어느덧 후반부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도심 추격장면을 찍는 날이다.
한결이 지난 영화의 흥행 대박이 이후, 1년 만에 차기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액션 스릴러 영화로,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부터 한결의 멋진 액션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던 터였다.
제작사에서는 오늘 있을 영화의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 촬영을 앞두고 기자들과 언론에 현장공개를 하기로 했다. 이미 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잡기 위해 취재진이 주변에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와이어를 묶고, 장비를 하나씩 하나씩 체크하는 액션 팀의 손길이 분주했다. 위험한 장면이다 보니 작은 실수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 장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한결만은 도통 영화에 집중되지 않았다. 대사를 읊는 순간에도, 액션 장면을 위해 합을 맞추는 동작에서도 자꾸만 어젯밤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다빈과 선우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둘이 정말 새로 시작이라도 한 건가.
그저 한숨만 자꾸 새어 나올 뿐 무엇 하나 집중이 되질 않았다.
촬영 준비가 거의 마무리가 되었는지, 현장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오늘 촬영할 장면에 관해 설명하며, 촬영 시작을 알렸다.
“자, 기자님들 오늘 촬영은 극 중 태수가 추격자들을 몸싸움 끝내 따돌리고 3층 건물에서 건물 벽을 타고 뛰어내려 추격자 무리를 따돌리는 장면입니다. 안전장비를 다 갖추고 해도 위험한 장면이니, 배우들의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게 가이드 선 밖에서 조용한 취재 부탁 드립니다. 그 외 관련한 다른 얘기들은 촬영 이 끝난 후, 이곳에서 감독님과 배우들 모시고, 별도의 간담회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니 그때 질문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취재진은 가이드라인 밖에서 촬영장 쪽을 향해 카메라를 대기하고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현장 공개 현장이 익숙한 취재진이 곧 촬영이 시작되면 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컷을 남기려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며 앵글과 구도 등을 확인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는 건물 밖 바닥에는 두꺼운 매트리스와 에어 매트가 깔려 있어,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자, 슛 들어갑니다.”
건물 옥상 문을 걷어차고 숨 가쁜 표정의 극 중 태수, 한결이 뛰어온다. 이내 뒤쫓아 온 무리가 한결의 뒤에서 칼을 휘두른다.
옥상 끝. 더는 도망칠 공간도 없다. 뒤돌아 고개를 좌측으로 휙~ 돌려 무리의 칼을 피한다.
칼날이 간발의 차이로 태수의 얼굴을 피해 휘둘러진다.
이내 허리를 숙였다가 일어서는 것 같다니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향해 오른발을 날린다.
칼을 휘두른 자가 칼을 떨어뜨리고 구석으로 나가떨어진다. 다시 한 놈이 한결의 뒤에서 주먹을 날려온다.
뒤에서의 가격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한결이 이번에는 뒷발을 날리는가 싶더니 연속해서 주먹을 날려 놈을 쓰러뜨린다.
먼저 나가떨어졌던 놈이 옆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는 다시 일어선다. 짐승 같은 눈빛으로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빈틈을 노리려 원을 그리며 돈다. 틈을 찾지 못한 놈이 먼저 칼을 휙~ 휙~ 휘두른다.
칼을 날렵하게 피해낸 한결이 벽을 차고 뛰어 올라가, 타닥. 그대로 놈의 손목을 칼을 차내고 연이은 발차기로 얼굴을 가격한다.
착지. 나가떨어진 놈이 정신을 잃었는지 움직임이 없다.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태수. 두 놈은 쓰려졌지만, 뒤에서 놈들의 무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피해야 한다. 갈 곳이 없다. 결심한 듯 옥상 끝에 서는 태수. 무리가 계단을 올라와 옥상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살려면 몸을 날려야 한다. 태수는 그대로 몸을 붕~ 띄워 몸을 날린다. 놓쳤다. 뒤따라 온 무리의 일그러진 표정이 카메라에 담긴다.
공중에서 붕~ 띄워지는 한결의 몸을 와이어가 붙잡고 있다. 대롱대롱 포물선을 그리며 한결의 몸이 줄에 매달려 흔들린다. 건물 밖에서 이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기자들의 눈이 일제히 옥상에 몸을 날린 한결에게 쏠린다.
“컷. 액션 팀. 한결 씨 와이어 내려주세요”
걱정했던 액션씬이 잘 마무리 되어서 다행이다 싶어 와이어에 매달려 있는 한결의 표정이 만족스럽다.
무술 감독의 지시가 있자, 연결돼 있던 와이어가 당겨지기 시작한다. 긴장했던 한결의 표정에 그제야 안도의 빛이 지나간다 싶은 그 순간, ‘찌직~ ‘ 한결의 몸을 연결하고 있던 와이어 줄이 끊어진다.
“아악!!”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건가. 영화는 어떻게 되지. 조금만 더 찍으면 끝인데. 그리고… 유다빈… 당신을, 이제 영영 못 보는 건가…?
와이어가 끊어지며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한결의 머리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악, 저기 봐”
“어어! 떨어진다 떨어져!”
“툭~!!”
한결의 몸이 그대로 커다란 에어 매트 위로 떨어졌다.
순간, 취재진의 카메라 셔터가 연속으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눌러지기 시작했다.
“야. 의료팀, 의료팀! 빨리빨리”
“119! 119부터 불러!”
“한결 씨, 한결 씨!! 정신 차려!!”
혼비백산한 감독과 스태프들이 몰려들었다.
“한결아!”
촬영현장 공개이니만큼, 함께 촬영장을 찾았던 한결의 소속사 대표 은표의 눈이 놀라움과 걱정으로 뒤덮이며 떨어진 한결을 향해 뛰어갔다.
[충격, 배우 김한결 촬영 중 추락]
[김한결 와이어 끊어져 3층 건물에서 추락. 부상 정도 심각]
[김한결 촬영 중 추락, 현장은 혼비백산]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김한결의 촬영 중 추락사고 기사는 사고가 있은 후, 얼마가 지나지 않아 포털 사이트 메인에 도배되다시피 뜨고 있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1화 - 발길을 돌리다
한국대학병원 앞.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대거 몰려와 병원 앞이 북적북적하다.
VIP 병실 앞. 보안요원 2명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병실 내 진입을 노리는 취재진으로 복도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한 공중파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한결의 병실을 가리키며 현재 상태를 알리며 촬영 중인 모습도 보인다.
“네 지금 이곳은 배우 김한결 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 앞입니다. 김한결 씨는 응급처치를 마치고 조금 전 병실로 옮겨졌는데요. 현재 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병실 앞은 보안 요원들이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상태라 많은 취재진이 복도에서 김한결 씨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노력 중인 모습이 보입니다….”
***
다빈은 미니시리즈 촬영을 마치고, 귀가를 위해 매니저 미라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휴… 피곤하다.”
“수고했어. 이제 촬영도 얼마 안 남았네.”
“피곤하긴 해도 기분은 좋네. 내 씬 촬영 기다리면서 마냥 대기하는 조연도 아니고. 주인공으로 이렇게 바쁘니까.”
“후훗. 그러게”
다빈은 그간 오랜 조연 생활을 해 온 덕에 연기를 계속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잠잘 틈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지만 한 작품에서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루 2~3시간 정도밖에 못 자다시피 하며 이어지는 강행군 촬영에도 불만이 없다. 아니, 되려 이 시간이 감사하다.
“그런데 다빈아…”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을 꺼내는 미라의 입이 무겁다.
“…왜?”
“김한결 씨 있잖아. …영화 촬영장에서 …사고가 있었나 봐”
놀란 다빈의 눈이 운전하는 미라의 뒤통수에 그대로 꽂힌다.
“사고? 어쩌다…? 얼마나 다쳤는데??”
영화 촬영이라면 지금 한창 촬영 중인 그 액션 영화일 텐데, 액션 영화 촬영 중 부상이라면 그 정도가 심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다빈의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덜 떨렸다.
“글쎄 거기까진 모르겠어. 나도 너 기다리는 동안 포탈에 떠 있는 기사만 잠깐 본 거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다가 와이어가 끊어졌나 봐”
“세상에!!”
하얗게 질린 다빈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포털사이트에 들어간다. 검색을 누를 것도 없이 한결의 사고 소식이 메인에 올라있다. 다빈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기사를 눌렀다.
- 영화배우 김한결의 사고소식이 알려져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오늘 오후 1시경. 영화 <사나이>의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한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하던 중, 와이어가 끊기면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날은 영화 <사나이>의 촬영현장이 공개가 있는 날로, 김한결은 3층 옥상에서 상대 배우들과 몸싸움 끝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던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무사히 촬영을 끝냈으나, 와이어를 당겨 옥상으로 올리던 중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김한결은 응급 구조대에 실려 한국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아직 건강 상태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사를 읽은 다빈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인다.
“…미라야, 한국대 병원으로 가 줘”
“거긴 왜? 어쩌려고…?”
“내가… 봐야겠어. 직접 봐야겠어.”
다빈의 넋 나간 얼굴을 백미러로 확인한 미라가 더 이상 묻지 않고 차를 한국대 병원으로 돌렸다.
이윽고 도착한 병원 정문 앞은 케이블 방송을 포함한 연예정보 간판을 내건 취재 차량과 몇몇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쪽에 주차할 수는 없겠어. 밤이 늦었는데도 아직 기자들이 많네. 일단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게”
차를 그대로 몰아 지하주차장으로 향한 다빈의 벤이 주차장 한쪽에 멈춰 섰다. 차를 세운 미라가 몸을 돌려 다빈을 쳐다본다.
“어쩌려고? 올라가 볼 거야? …아직 기자들이 많아”
“……”
올라가 제 눈으로 한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다쳤는지, 의식은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가도 만날 수도 없을 거야. 이렇게 취재진이 많은데, 관계자 외엔 당연히 모두 출입을 통제시켰겠지.”
말문을 여는 다빈의 목이 축축이 젖어 있다.
“…미라야, 한결 씨 어떤지 내가… 지금 확인해 봐야 하는데”
“….”
김한결 씨가 이미 네 맘을 다 차지하고 있었구나. 촬영용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마음을 주고 있었구나.
고딩 시절부터 다빈을 봐온 미라는 다빈의 지금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 그녀의 감정을 다 알아챌 수 있었다.
“휴… 그럼, 기다려 봐. 상황이 어떤지 내가 먼저 한 번 올라가 보고 올게.”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갔다 올 때까지 내리지 말고 꼼짝 말고 기다려. 괜히 나와서 움직이다가 기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부상으로 기사 쏟아지고 있는 판에 한결 씨한테 더 가십거리 보태주는 거야. 알겠지?”
“알았어.”
걱정스레 다빈을 한 번 더 쳐다본 후, 미라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차에서 내려 서둘러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VIP 병동 몇 호에 한결이 입원해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VIP 병실이 있는 8층에 내리니 한 병실 앞에 늦은 시간임에도 기자들이 병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그 앞을 검은 옷의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었다.
‘저기구나. 김한결의 병실이’
***
차 안에서 미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다빈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다.
많이 다친 거면 안 되는데. 많이 다치지 않았을 거야. 처음부터 와이어가 끊어진 게 아니고 매달린 이후 떨어졌다고 하니 그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을 거야. 그래 괜찮겠지. 그래도 혹시 많이 다쳤으면 어떡하지. 생명에는 지장 없겠지. 척추라도 다쳤으면….
불안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아, 안돼 이런 생각. 제발 무사히 살아만 있어 줘 김한결.
제어되지 않는 눈물이 가슴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와, 어느새 볼을 타고 내렸다. 다스릴 수 없이 찾아드는 불안한 생각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다빈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급히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다빈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굳는다.
휴. 사내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이내 다빈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여긴… 어떻게?”
홍은표 대표였다.
“한결 씨는… 지금 어떤가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다빈이 한결의 상태를 물었다.
“소식 듣고 오셨나 보네요… 그래도… 이렇게 오는 건 서로한테 도움이 안 됩니다. 궁금하시면 저한테 먼저 연락 주시지 그랬어요.”
“…죄송해요. 사고 소식에 너무 놀라서… 한결 씨는 괜찮나요? 생명에는 지장 없는 거죠?”
“네. 다행히 와이어가 길어서 땅에서 그리 먼 높이가 아니었어요. 녀석이 운동신경이 있는데다 떨어지면서 방향을 틀어서 등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은 덕에 척추나 허리도 괜찮다고 합니다.”
“…하. 다행…이네요. 다행이에요.”
다빈에게서 안도의 한숨과 눈물이 쏟아진다. 그리고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지금 홍 대표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한결이 괜찮으니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괜히 기자들 눈에 띄면 일이 더 시끄러워집니다. 화연이하고 열애설까지 인정한 상황 아닙니까.”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못 보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은표의 말이 맞았다. 가뜩이나 사고 소식으로 시끄러워지면서, 언론에서는 하나라도 더 기사를 내보내기 위해서 예전 한결의 사소한 얘기조차 다시 기삿거리로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인인 화연이 있는데, 다빈이 병원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야말로 언론의 먹잇감이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알겠습니다. 괜찮은 거 알았으니 돌아갈게요. 제가 왔었다는 건 한결 씨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네…. 미안합니다. 다빈 씨”
지금 다빈의 심정이 어떨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서로의 걱정을, 마음을 모르는 게 오히려 두 사람에게 이로운 일임을 은표는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이랬던 적이 있었다며, 웃으며 얘기할 날이 오겠지.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은표가 다빈에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궁금한 거 있으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은표가 건네는 명함을 다빈이 가만히 손에 받아 쥔다.
***
언론에서는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집요하게 한결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사고가 났던 후 일주일. 다행히 큰 부상 없이 어깨 골절만 있었던 한결은 오른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큰 부상 없이 잘 치료받고 있다는 모습이 공중파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병실 앞에 붐비던 취재진도 거의 떠나 한산해졌다.
사고를 핑계로 한결은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결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그간같이 작품을 했던 많은 선후배 동료 연예인들이 병문안을 다녀갔다.
공개 연인을 선언한 화연은, 언론을 의식해 병원을 자주 찾으라는 은표의 말이 굳이 아니더라도 매일 병원을 찾고 있었다.
그간 영화촬영으로 바빠 두 사람이 동반하는 공식 석상이 아니면 통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다치긴 했지만, 병문안을 핑계로 한결을 매일 볼 수 있어서 화연은 오히려 이 시간이 좋기도 했다.
“나 왔어.”
무얼 담았는지, 양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들어서는 화연의 얼굴이 밝다.
“…응. 이렇게 매일 안 와도 돼. 벌써 병문안 온 네 모습 뉴스나 연예 프로에 많이 나갔으니까 그냥 네 생활 해. 번거롭게 매일 오지 말고”
어차피 대외용 보여 주기용 연인. 건강을 걱정하며 병문안을 하는 모습이 이미 방송을 탔으니 더 이상 병원을 오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였다.
내가 언론을 의식해서 여기 매일 오는 줄 알아?
제 맘도 몰라주고, 언론에 노출됐으니 이제 그만 와도 된다는 한결의 소리에 화연은 서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남들 눈 때문에 오나. 한결 씨 보러 오는 거지.”
제가 말을 해 놓고도 진심을 무시하는 것 같아 미안해진 한결이 말을 돌렸다.
“근데 손에 들고 온 건 뭐야?”
한결의 말에 화연이 양손에 쥔 종이가방을 높이 들어 보인다.
“이거? 한결 씨 심심할까 봐. 만화책 몇 권 골라왔는데. 맘에 쏙 들지?”
“이야, 지금까지 병문안으로 들고 온 것 중에 제일 맘에 든다. 심심하던 찬데 얼른 꺼내 봐봐”
“이따가…. 나 가고 나서 봐. 지금은 그냥 둘이 있자.”
한결은 자신에게 여전히 같은 마음인 듯한 화연의 마음이 그래도 느껴진다.
“…화연아. 그러지 마…”
한결에게서 돌아서 한쪽 귀퉁이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던 다빈의 손길이 순간, 멈춘다. 공개연인 선언 후, 이렇게 선 긋는 거. 오늘이 처음도 아니건만. 매번 가슴이 아리다.
그래도 애써 표정을 숨기며 가슴을 후벼 파는 한결의 말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를 낸다.
“뭘. 그러지 마. 누가 병문안을 왔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지. 온 사람 무안하게 만화책이나 읽겠다고 하는 건 매너가 아니잖아. 읽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나 얼마 안 있을 거야”
“휴… 알았다. 알았어. 그럼 출출하니까 저기 냉장고에서 뭐 먹을 거나 좀 꺼내 주라”
한국대학병원 앞.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대거 몰려와 병원 앞이 북적북적하다.
VIP 병실 앞. 보안요원 2명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병실 내 진입을 노리는 취재진으로 복도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한 공중파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한결의 병실을 가리키며 현재 상태를 알리며 촬영 중인 모습도 보인다.
“네 지금 이곳은 배우 김한결 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 앞입니다. 김한결 씨는 응급처치를 마치고 조금 전 병실로 옮겨졌는데요. 현재 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병실 앞은 보안 요원들이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상태라 많은 취재진이 복도에서 김한결 씨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노력 중인 모습이 보입니다….”
***
다빈은 미니시리즈 촬영을 마치고, 귀가를 위해 매니저 미라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휴… 피곤하다.”
“수고했어. 이제 촬영도 얼마 안 남았네.”
“피곤하긴 해도 기분은 좋네. 내 씬 촬영 기다리면서 마냥 대기하는 조연도 아니고. 주인공으로 이렇게 바쁘니까.”
“후훗. 그러게”
다빈은 그간 오랜 조연 생활을 해 온 덕에 연기를 계속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잠잘 틈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지만 한 작품에서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루 2~3시간 정도밖에 못 자다시피 하며 이어지는 강행군 촬영에도 불만이 없다. 아니, 되려 이 시간이 감사하다.
“그런데 다빈아…”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을 꺼내는 미라의 입이 무겁다.
“…왜?”
“김한결 씨 있잖아. …영화 촬영장에서 …사고가 있었나 봐”
놀란 다빈의 눈이 운전하는 미라의 뒤통수에 그대로 꽂힌다.
“사고? 어쩌다…? 얼마나 다쳤는데??”
영화 촬영이라면 지금 한창 촬영 중인 그 액션 영화일 텐데, 액션 영화 촬영 중 부상이라면 그 정도가 심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다빈의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덜 떨렸다.
“글쎄 거기까진 모르겠어. 나도 너 기다리는 동안 포탈에 떠 있는 기사만 잠깐 본 거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다가 와이어가 끊어졌나 봐”
“세상에!!”
하얗게 질린 다빈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포털사이트에 들어간다. 검색을 누를 것도 없이 한결의 사고 소식이 메인에 올라있다. 다빈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기사를 눌렀다.
- 영화배우 김한결의 사고소식이 알려져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오늘 오후 1시경. 영화 <사나이>의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한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하던 중, 와이어가 끊기면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날은 영화 <사나이>의 촬영현장이 공개가 있는 날로, 김한결은 3층 옥상에서 상대 배우들과 몸싸움 끝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던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무사히 촬영을 끝냈으나, 와이어를 당겨 옥상으로 올리던 중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김한결은 응급 구조대에 실려 한국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아직 건강 상태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사를 읽은 다빈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인다.
“…미라야, 한국대 병원으로 가 줘”
“거긴 왜? 어쩌려고…?”
“내가… 봐야겠어. 직접 봐야겠어.”
다빈의 넋 나간 얼굴을 백미러로 확인한 미라가 더 이상 묻지 않고 차를 한국대 병원으로 돌렸다.
이윽고 도착한 병원 정문 앞은 케이블 방송을 포함한 연예정보 간판을 내건 취재 차량과 몇몇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쪽에 주차할 수는 없겠어. 밤이 늦었는데도 아직 기자들이 많네. 일단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게”
차를 그대로 몰아 지하주차장으로 향한 다빈의 벤이 주차장 한쪽에 멈춰 섰다. 차를 세운 미라가 몸을 돌려 다빈을 쳐다본다.
“어쩌려고? 올라가 볼 거야? …아직 기자들이 많아”
“……”
올라가 제 눈으로 한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다쳤는지, 의식은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가도 만날 수도 없을 거야. 이렇게 취재진이 많은데, 관계자 외엔 당연히 모두 출입을 통제시켰겠지.”
말문을 여는 다빈의 목이 축축이 젖어 있다.
“…미라야, 한결 씨 어떤지 내가… 지금 확인해 봐야 하는데”
“….”
김한결 씨가 이미 네 맘을 다 차지하고 있었구나. 촬영용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마음을 주고 있었구나.
고딩 시절부터 다빈을 봐온 미라는 다빈의 지금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 그녀의 감정을 다 알아챌 수 있었다.
“휴… 그럼, 기다려 봐. 상황이 어떤지 내가 먼저 한 번 올라가 보고 올게.”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갔다 올 때까지 내리지 말고 꼼짝 말고 기다려. 괜히 나와서 움직이다가 기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부상으로 기사 쏟아지고 있는 판에 한결 씨한테 더 가십거리 보태주는 거야. 알겠지?”
“알았어.”
걱정스레 다빈을 한 번 더 쳐다본 후, 미라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차에서 내려 서둘러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VIP 병동 몇 호에 한결이 입원해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VIP 병실이 있는 8층에 내리니 한 병실 앞에 늦은 시간임에도 기자들이 병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그 앞을 검은 옷의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었다.
‘저기구나. 김한결의 병실이’
***
차 안에서 미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다빈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다.
많이 다친 거면 안 되는데. 많이 다치지 않았을 거야. 처음부터 와이어가 끊어진 게 아니고 매달린 이후 떨어졌다고 하니 그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을 거야. 그래 괜찮겠지. 그래도 혹시 많이 다쳤으면 어떡하지. 생명에는 지장 없겠지. 척추라도 다쳤으면….
불안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아, 안돼 이런 생각. 제발 무사히 살아만 있어 줘 김한결.
제어되지 않는 눈물이 가슴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와, 어느새 볼을 타고 내렸다. 다스릴 수 없이 찾아드는 불안한 생각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다빈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급히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다빈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굳는다.
휴. 사내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이내 다빈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여긴… 어떻게?”
홍은표 대표였다.
“한결 씨는… 지금 어떤가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다빈이 한결의 상태를 물었다.
“소식 듣고 오셨나 보네요… 그래도… 이렇게 오는 건 서로한테 도움이 안 됩니다. 궁금하시면 저한테 먼저 연락 주시지 그랬어요.”
“…죄송해요. 사고 소식에 너무 놀라서… 한결 씨는 괜찮나요? 생명에는 지장 없는 거죠?”
“네. 다행히 와이어가 길어서 땅에서 그리 먼 높이가 아니었어요. 녀석이 운동신경이 있는데다 떨어지면서 방향을 틀어서 등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은 덕에 척추나 허리도 괜찮다고 합니다.”
“…하. 다행…이네요. 다행이에요.”
다빈에게서 안도의 한숨과 눈물이 쏟아진다. 그리고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지금 홍 대표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한결이 괜찮으니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괜히 기자들 눈에 띄면 일이 더 시끄러워집니다. 화연이하고 열애설까지 인정한 상황 아닙니까.”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못 보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은표의 말이 맞았다. 가뜩이나 사고 소식으로 시끄러워지면서, 언론에서는 하나라도 더 기사를 내보내기 위해서 예전 한결의 사소한 얘기조차 다시 기삿거리로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인인 화연이 있는데, 다빈이 병원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야말로 언론의 먹잇감이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알겠습니다. 괜찮은 거 알았으니 돌아갈게요. 제가 왔었다는 건 한결 씨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네…. 미안합니다. 다빈 씨”
지금 다빈의 심정이 어떨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서로의 걱정을, 마음을 모르는 게 오히려 두 사람에게 이로운 일임을 은표는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이랬던 적이 있었다며, 웃으며 얘기할 날이 오겠지.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은표가 다빈에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궁금한 거 있으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이건 제 명함입니다.”
은표가 건네는 명함을 다빈이 가만히 손에 받아 쥔다.
***
언론에서는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집요하게 한결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사고가 났던 후 일주일. 다행히 큰 부상 없이 어깨 골절만 있었던 한결은 오른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큰 부상 없이 잘 치료받고 있다는 모습이 공중파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병실 앞에 붐비던 취재진도 거의 떠나 한산해졌다.
사고를 핑계로 한결은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결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그간같이 작품을 했던 많은 선후배 동료 연예인들이 병문안을 다녀갔다.
공개 연인을 선언한 화연은, 언론을 의식해 병원을 자주 찾으라는 은표의 말이 굳이 아니더라도 매일 병원을 찾고 있었다.
그간 영화촬영으로 바빠 두 사람이 동반하는 공식 석상이 아니면 통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다치긴 했지만, 병문안을 핑계로 한결을 매일 볼 수 있어서 화연은 오히려 이 시간이 좋기도 했다.
“나 왔어.”
무얼 담았는지, 양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들어서는 화연의 얼굴이 밝다.
“…응. 이렇게 매일 안 와도 돼. 벌써 병문안 온 네 모습 뉴스나 연예 프로에 많이 나갔으니까 그냥 네 생활 해. 번거롭게 매일 오지 말고”
어차피 대외용 보여 주기용 연인. 건강을 걱정하며 병문안을 하는 모습이 이미 방송을 탔으니 더 이상 병원을 오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였다.
내가 언론을 의식해서 여기 매일 오는 줄 알아?
제 맘도 몰라주고, 언론에 노출됐으니 이제 그만 와도 된다는 한결의 소리에 화연은 서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남들 눈 때문에 오나. 한결 씨 보러 오는 거지.”
제가 말을 해 놓고도 진심을 무시하는 것 같아 미안해진 한결이 말을 돌렸다.
“근데 손에 들고 온 건 뭐야?”
한결의 말에 화연이 양손에 쥔 종이가방을 높이 들어 보인다.
“이거? 한결 씨 심심할까 봐. 만화책 몇 권 골라왔는데. 맘에 쏙 들지?”
“이야, 지금까지 병문안으로 들고 온 것 중에 제일 맘에 든다. 심심하던 찬데 얼른 꺼내 봐봐”
“이따가…. 나 가고 나서 봐. 지금은 그냥 둘이 있자.”
한결은 자신에게 여전히 같은 마음인 듯한 화연의 마음이 그래도 느껴진다.
“…화연아. 그러지 마…”
한결에게서 돌아서 한쪽 귀퉁이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던 다빈의 손길이 순간, 멈춘다. 공개연인 선언 후, 이렇게 선 긋는 거. 오늘이 처음도 아니건만. 매번 가슴이 아리다.
그래도 애써 표정을 숨기며 가슴을 후벼 파는 한결의 말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를 낸다.
“뭘. 그러지 마. 누가 병문안을 왔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지. 온 사람 무안하게 만화책이나 읽겠다고 하는 건 매너가 아니잖아. 읽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나 얼마 안 있을 거야”
“휴… 알았다. 알았어. 그럼 출출하니까 저기 냉장고에서 뭐 먹을 거나 좀 꺼내 주라”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2화 - 키스씬도 막 찍고 그러니까 좋지
한결이 병원에 입원한 지도 일주일이 다 돼간다.
내일이면 퇴원이다. 온갖 연예정보들이 한결의 사고 소식을 앞다투어 내보냈으니 다빈도 그 소식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함께한 동료애도 없나.
한결은 인터넷이 떠들썩한 사고소식에도 연락 한 번 않는 다빈이 섭섭하고 괘씸했다.
‘사람이 참 인정머리도 없네. 코빼기도 한 번 안 비치고.’
은표는 사고로 지장이 생긴 스케줄을 다시 조율하는 등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았다.
여기저기 전화해 양해를 구하며,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는 은표를 향해 한결이 물었다.
“형, 여기 병문안 오는 거 앞에서 막거나 체크하거나 하지 않죠?”
“그건 갑자기 왜?”
“아니..그냥요. 혹시, 병문안이라고 왔는데 앞에서 막고 있어서 못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병문안 온 사람 누구? 누가 왔다가 앞에서 못 들어가게 했대?”
한결이 다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굳이 그게 다빈임을 말하지 않았다.
“아뇨, 누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첨에 왜 문 앞에 보안요원들이 입구 지키고 있었잖아요. 아직도 그런 건가 해서.”
그 대상이 다빈을 두고 한 말임을 은표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다빈이 왔다가 자신에 의해 병실 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말할 순 없었다.
“너 기사 나고, 방송에 인터뷰도 몇 번 나가고는 보안요원들 다 없앴지. 이제 뭐 사고 건으로 더 기사 나갈 것도 없고 하니.”
기다리는 한결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몰래 지켜보는 눈이 얼마며 그걸로 만들어질 터무니 없는 말의 파장은 또 얼마나 클 텐가.
시간이 지나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화연과의 결별설을 내보낸 후에 그때 실컷 만나고, 사랑해도 될 일이다. 그때까지만 한결에게 미안하자 은표는 단단히 마음먹었다.
***
쉬는 날도 없이 바쁘게 진행되던 다빈의 미니시리즈도 이제 마지막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장에서 자신의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 다빈에게 코디가 다가와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왁스로 고정 시켜 준다.
대본을 보며, 곧 촬영에 들어갈 대사를 다시 한 번 읊고 있던 다빈이 매무새를 만져주던 코디가 옆으로 비켜나자 핸드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공중파의 한 연예정보프로그램이 한결의 병원을 찾아가, 그의 상태를 알려주며 짧게 한결의 인터뷰를 담아 방송에 내보냈다.
다빈이 그 영상을 재생시키니, 환자복을 입은 한결이 자신의 호전 상태에 관해 얘기한 후, 시청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 네, 핫 연예통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한결입니다. 제 사고 소식으로 걱정해주시는 팬들이 많은 거로 아는데요. 보시다시피 저 괜찮습니다.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건 아니라고 하니 팬 여러분들도 걱정 마시구. 저는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여러분 앞에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복은 입고 있지만, 그 빼어난 미모는 숨길 수 없어 훈내 철철 나는 포스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칫. 환자복을 입어도 어쩜 저리 멋지냐.
화면을 보니,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 다빈의 마음도 놓였다.
많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떡하나, 사고 소식을 처음 듣고 얼마나 놀라고 걱정이 됐던지. 며칠 동안 대본은 어떻게 외우고, 촬영은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를 정도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배우분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스태프의 소리가 들렸다. 지금 촬영에 들어갈 장면은 남녀 주인공이 오해 끝에 드디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키스를 나누는 씬이다.
두 배우가 카메라 포인트에 들어서자, 지미집이 하늘로 올라가며 촬영을 준비를 마쳤다.
“다빈 씨, 키스씬 제대로 한 번 그림 좀 되게 찍어보죠.”
“네. 후후”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한 미니시리즈에서 남녀 주인공의 키스씬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더구나 방송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체 시청률을 갱신하며 인기가 치솟아, 인터넷에는 패인을 자처하는 팬카페까지 몇백 개가 새로 생겼을 정도다.
반응이 이쯤 되니, 감독과 작가는 시청자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두 주인공의 달달 장면을 마구 넣어줘야 했다.
보는 시청자들이야 주인공의 달달한 키스씬에 애간장이 녹겠지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진짜로 사랑하는 연인과의 키스가 아니다. 카메라에 러블리하게 잡힐 모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키스 장면의 연기일 뿐이다.
상대 배우와 입을 맞댄 그 순간에도 사랑에 흠뻑 빠진 주인공의 표정이 잘 드러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제아무리 달콤한 키스씬이라 한들 특별한 기분이 들 리 없었다.
카메라의 불빛이 켜지고, 주변이 숨죽일 듯 조용해지자 다빈은 그대로 극 중 인물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남자 주인공이 달달 멘트를 날리며, 여주인공의 눈을 응시한다.
남자 주인공의 눈빛을 받은 여주인공의 눈빛이 서로 교차한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며 뜨거운 눈빛이 오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남자주인공이 천천히 손을 올려 여자의 두 볼을 감싼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
카메라는 위에서, 옆에서, 뒤에서 분주히 둘의 키스 장면을 담고 있다.
얼굴이 상대의 머리에 가려지지 않기 위해 앵글까지 고려한 키스씬.
조용히 두 사람은 입을 맞대고 기다렸다. 감독의 OK 사인이 날 때까지.
“컷, 좋습니다. 다음은 다빈 씨 줌해서 찍을게요.”
“네.”
그사이 얼른 코디가 달려와 살짝 헝클린 다빈의 머리를 다시 내려주고, 립글로스를 살짝 덧발라준다.
다시 카메라의 불이 켜졌다.
키스하는 남자의 뒷모습 뒤로 키스에 흠뻑 빠진 여주인공의 표정이 점점 더 카메라 가까이에 들어온다. 그렇게 길게 이어지는 키스.
감독이 한참 만에야 컷을 외친다.
“감독님 컷을 왜 이렇게 오래 있다가 주세요. 숨 참고 있느라 죽는 줄 알았네”
자칫 뻘쭘할 수 있는 장면에 남자 배우가 먼저 우스갯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풀어 갔다.
이어 계속해서 지금과는 반대의 앵글로 여배우의 뒤에서 한 번, 양쪽 옆에서 한 번. 그렇게 몇 번의 키스 씬 장면을 더 찍고서야 오늘의 마지막 촬영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인사 소리가 들렸다. 방송되는 기간은 2달이 조금 안 되지만, 촬영은 4달 이상을 꼬박 매달렸다. 더구나 다빈으로서는 첫 주연작이니 애착도 더했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인사를 전하는 소리에 다빈은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다빈 씨 정말 수고 많았어요.”
신 PD가 다빈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건넸다.
“네, 감독님도요.”
“이번 작품에 다빈 씨 캐스팅은 진짜 신의 한 수였지. 덕분에 시청률 40% 찍으며 국민드라마 소리도 듣고.”
입바른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처음 다빈을 캐스팅한다고 했을 때 <연우결>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주연급은 아니라 우려의 소리도 만만찮았다. 그런데도 신 PD의 믿음으로 끝내 다빈이 여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신 PD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신인 때보다 더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그러다 보니 극의 중반부쯤 갔을 땐, 이제 연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실제 자기 모습인 양 착각이 들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게 됐다.
그런 다빈의 연기가 화면에 고스란히 담겨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른 이였다면 이처럼 잘해낼 리 없었다. 제 몸에 꼭 맞는 맞춤 옷을 입은 듯 그렇게 다빈은 출중한 연기와 감성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래, 유다빈 수고했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 나가는 거야.’
그렇게 다빈은 자신을 격려하며, 마지막 촬영에 대한 아쉬움과 드라마 성공을 자축했다.
***
며칠 전 퇴원한 한결은 부상 후 완쾌를 위해 별다른 스케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빈이 출연한 시청률 40%의 국민드라마가 마지막 방송되는 날이다.
행여, 드라마 시간을 놓칠까 봐 한결은 10시에 알람까지 맞춰 놓았다. 그간 사수 못 한 본방은 퇴원 후 별달리 할 일도 없던 차에 TV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수차례 봐 왔던지라, 이젠 다빈의 대사마저 다 외울 지경이다.
10시가 되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결은 차기작 검토를 위해 읽고 있던 시나리오를 덮고, 거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75인치 대형 TV의 전원을 켰다.
화면이 커서 그런가. 오늘따라 클로즈업된 다빈의 얼굴이 진짜 저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자꾸만 흠칫흠칫 놀라게 된다.
공중파 드라마의 엔딩이니 당연히 해피 엔딩은 예상했다.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감독이랑 작가가 미쳤나. 마지막 회라고 팬 서비스라도 하나. 무슨 키스씬을 한 회에 두 번이나 넣고 난리야.
더구나 마지막 엔딩의 키스씬은 둘이 끌어안고 앉아 입을 맞추고 있는 시간도 2분이 넘어간다.
젠장할. 둘이 꼭 부둥켜안고서는 입을 맞추고 있는 걸 위에서, 아래서, 옆에서, 뒤에서, 아주 다 각도로 다 보여주고 있다. 입을 맞대고 있는 저 눈은 또 어떤가. 너무나 달콤하고 감미로워서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연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표정이다.
“유다빈,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어. 물이!”
“헐, 뭘 또 저렇게 달달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맞추고 그래.”
“그래, 주연 맡으니까 키스씬도 막 찍고 그러니까 좋지. 쳇. 그러면 나랑 <연우결> 할 때도 어차피 방송이었는데 왜 그렇게 몸을 사렸어!”
“유다빈 주인공 이제 하지 마! 아냐 할 거면 이제 멜로 말고, 액션을 해 액션!
실감 나는 연기에 박수를 보내야 할 진데, 한결은 장면이 장면이다 보니 질투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그래 키스하니 어떻더냐, 마구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젠장!
한결은 리모컨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꺼버렸다.
한결이 병원에 입원한 지도 일주일이 다 돼간다.
내일이면 퇴원이다. 온갖 연예정보들이 한결의 사고 소식을 앞다투어 내보냈으니 다빈도 그 소식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함께한 동료애도 없나.
한결은 인터넷이 떠들썩한 사고소식에도 연락 한 번 않는 다빈이 섭섭하고 괘씸했다.
‘사람이 참 인정머리도 없네. 코빼기도 한 번 안 비치고.’
은표는 사고로 지장이 생긴 스케줄을 다시 조율하는 등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았다.
여기저기 전화해 양해를 구하며,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는 은표를 향해 한결이 물었다.
“형, 여기 병문안 오는 거 앞에서 막거나 체크하거나 하지 않죠?”
“그건 갑자기 왜?”
“아니..그냥요. 혹시, 병문안이라고 왔는데 앞에서 막고 있어서 못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병문안 온 사람 누구? 누가 왔다가 앞에서 못 들어가게 했대?”
한결이 다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굳이 그게 다빈임을 말하지 않았다.
“아뇨, 누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첨에 왜 문 앞에 보안요원들이 입구 지키고 있었잖아요. 아직도 그런 건가 해서.”
그 대상이 다빈을 두고 한 말임을 은표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다빈이 왔다가 자신에 의해 병실 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말할 순 없었다.
“너 기사 나고, 방송에 인터뷰도 몇 번 나가고는 보안요원들 다 없앴지. 이제 뭐 사고 건으로 더 기사 나갈 것도 없고 하니.”
기다리는 한결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몰래 지켜보는 눈이 얼마며 그걸로 만들어질 터무니 없는 말의 파장은 또 얼마나 클 텐가.
시간이 지나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화연과의 결별설을 내보낸 후에 그때 실컷 만나고, 사랑해도 될 일이다. 그때까지만 한결에게 미안하자 은표는 단단히 마음먹었다.
***
쉬는 날도 없이 바쁘게 진행되던 다빈의 미니시리즈도 이제 마지막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장에서 자신의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 다빈에게 코디가 다가와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왁스로 고정 시켜 준다.
대본을 보며, 곧 촬영에 들어갈 대사를 다시 한 번 읊고 있던 다빈이 매무새를 만져주던 코디가 옆으로 비켜나자 핸드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공중파의 한 연예정보프로그램이 한결의 병원을 찾아가, 그의 상태를 알려주며 짧게 한결의 인터뷰를 담아 방송에 내보냈다.
다빈이 그 영상을 재생시키니, 환자복을 입은 한결이 자신의 호전 상태에 관해 얘기한 후, 시청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 네, 핫 연예통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한결입니다. 제 사고 소식으로 걱정해주시는 팬들이 많은 거로 아는데요. 보시다시피 저 괜찮습니다.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건 아니라고 하니 팬 여러분들도 걱정 마시구. 저는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여러분 앞에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복은 입고 있지만, 그 빼어난 미모는 숨길 수 없어 훈내 철철 나는 포스로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칫. 환자복을 입어도 어쩜 저리 멋지냐.
화면을 보니,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 다빈의 마음도 놓였다.
많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떡하나, 사고 소식을 처음 듣고 얼마나 놀라고 걱정이 됐던지. 며칠 동안 대본은 어떻게 외우고, 촬영은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를 정도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배우분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스태프의 소리가 들렸다. 지금 촬영에 들어갈 장면은 남녀 주인공이 오해 끝에 드디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키스를 나누는 씬이다.
두 배우가 카메라 포인트에 들어서자, 지미집이 하늘로 올라가며 촬영을 준비를 마쳤다.
“다빈 씨, 키스씬 제대로 한 번 그림 좀 되게 찍어보죠.”
“네. 후후”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한 미니시리즈에서 남녀 주인공의 키스씬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더구나 방송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체 시청률을 갱신하며 인기가 치솟아, 인터넷에는 패인을 자처하는 팬카페까지 몇백 개가 새로 생겼을 정도다.
반응이 이쯤 되니, 감독과 작가는 시청자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두 주인공의 달달 장면을 마구 넣어줘야 했다.
보는 시청자들이야 주인공의 달달한 키스씬에 애간장이 녹겠지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진짜로 사랑하는 연인과의 키스가 아니다. 카메라에 러블리하게 잡힐 모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키스 장면의 연기일 뿐이다.
상대 배우와 입을 맞댄 그 순간에도 사랑에 흠뻑 빠진 주인공의 표정이 잘 드러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제아무리 달콤한 키스씬이라 한들 특별한 기분이 들 리 없었다.
카메라의 불빛이 켜지고, 주변이 숨죽일 듯 조용해지자 다빈은 그대로 극 중 인물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남자 주인공이 달달 멘트를 날리며, 여주인공의 눈을 응시한다.
남자 주인공의 눈빛을 받은 여주인공의 눈빛이 서로 교차한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며 뜨거운 눈빛이 오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남자주인공이 천천히 손을 올려 여자의 두 볼을 감싼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
카메라는 위에서, 옆에서, 뒤에서 분주히 둘의 키스 장면을 담고 있다.
얼굴이 상대의 머리에 가려지지 않기 위해 앵글까지 고려한 키스씬.
조용히 두 사람은 입을 맞대고 기다렸다. 감독의 OK 사인이 날 때까지.
“컷, 좋습니다. 다음은 다빈 씨 줌해서 찍을게요.”
“네.”
그사이 얼른 코디가 달려와 살짝 헝클린 다빈의 머리를 다시 내려주고, 립글로스를 살짝 덧발라준다.
다시 카메라의 불이 켜졌다.
키스하는 남자의 뒷모습 뒤로 키스에 흠뻑 빠진 여주인공의 표정이 점점 더 카메라 가까이에 들어온다. 그렇게 길게 이어지는 키스.
감독이 한참 만에야 컷을 외친다.
“감독님 컷을 왜 이렇게 오래 있다가 주세요. 숨 참고 있느라 죽는 줄 알았네”
자칫 뻘쭘할 수 있는 장면에 남자 배우가 먼저 우스갯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풀어 갔다.
이어 계속해서 지금과는 반대의 앵글로 여배우의 뒤에서 한 번, 양쪽 옆에서 한 번. 그렇게 몇 번의 키스 씬 장면을 더 찍고서야 오늘의 마지막 촬영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인사 소리가 들렸다. 방송되는 기간은 2달이 조금 안 되지만, 촬영은 4달 이상을 꼬박 매달렸다. 더구나 다빈으로서는 첫 주연작이니 애착도 더했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인사를 전하는 소리에 다빈은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다빈 씨 정말 수고 많았어요.”
신 PD가 다빈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건넸다.
“네, 감독님도요.”
“이번 작품에 다빈 씨 캐스팅은 진짜 신의 한 수였지. 덕분에 시청률 40% 찍으며 국민드라마 소리도 듣고.”
입바른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처음 다빈을 캐스팅한다고 했을 때 <연우결>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주연급은 아니라 우려의 소리도 만만찮았다. 그런데도 신 PD의 믿음으로 끝내 다빈이 여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신 PD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신인 때보다 더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그러다 보니 극의 중반부쯤 갔을 땐, 이제 연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실제 자기 모습인 양 착각이 들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게 됐다.
그런 다빈의 연기가 화면에 고스란히 담겨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른 이였다면 이처럼 잘해낼 리 없었다. 제 몸에 꼭 맞는 맞춤 옷을 입은 듯 그렇게 다빈은 출중한 연기와 감성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래, 유다빈 수고했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 나가는 거야.’
그렇게 다빈은 자신을 격려하며, 마지막 촬영에 대한 아쉬움과 드라마 성공을 자축했다.
***
며칠 전 퇴원한 한결은 부상 후 완쾌를 위해 별다른 스케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빈이 출연한 시청률 40%의 국민드라마가 마지막 방송되는 날이다.
행여, 드라마 시간을 놓칠까 봐 한결은 10시에 알람까지 맞춰 놓았다. 그간 사수 못 한 본방은 퇴원 후 별달리 할 일도 없던 차에 TV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수차례 봐 왔던지라, 이젠 다빈의 대사마저 다 외울 지경이다.
10시가 되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결은 차기작 검토를 위해 읽고 있던 시나리오를 덮고, 거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75인치 대형 TV의 전원을 켰다.
화면이 커서 그런가. 오늘따라 클로즈업된 다빈의 얼굴이 진짜 저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자꾸만 흠칫흠칫 놀라게 된다.
공중파 드라마의 엔딩이니 당연히 해피 엔딩은 예상했다.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감독이랑 작가가 미쳤나. 마지막 회라고 팬 서비스라도 하나. 무슨 키스씬을 한 회에 두 번이나 넣고 난리야.
더구나 마지막 엔딩의 키스씬은 둘이 끌어안고 앉아 입을 맞추고 있는 시간도 2분이 넘어간다.
젠장할. 둘이 꼭 부둥켜안고서는 입을 맞추고 있는 걸 위에서, 아래서, 옆에서, 뒤에서, 아주 다 각도로 다 보여주고 있다. 입을 맞대고 있는 저 눈은 또 어떤가. 너무나 달콤하고 감미로워서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연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표정이다.
“유다빈,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어. 물이!”
“헐, 뭘 또 저렇게 달달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맞추고 그래.”
“그래, 주연 맡으니까 키스씬도 막 찍고 그러니까 좋지. 쳇. 그러면 나랑 <연우결> 할 때도 어차피 방송이었는데 왜 그렇게 몸을 사렸어!”
“유다빈 주인공 이제 하지 마! 아냐 할 거면 이제 멜로 말고, 액션을 해 액션!
실감 나는 연기에 박수를 보내야 할 진데, 한결은 장면이 장면이다 보니 질투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그래 키스하니 어떻더냐, 마구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젠장!
한결은 리모컨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꺼버렸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3화 - 앞뒤로 다 뚫린 그 드레스 안돼
다빈의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인해 중단됐던 한결도 남은 촬영을 마치고 휴식기를 갖던 중, 일본에서 진행되는 ‘아시아 방송 연예대상’ 시상식에 한결과 다빈이 시상자로 함께 초대받았다.
일본에서도 방영되고 있는 <연우결>의 인기가 일본 방송 시청률 상위권에 오르며 인기를 끌자, 주최 측에서 동반 시상자로 둘을 초대한 것이다.
시상식 참석을 일주일 앞두고 한결은 의상을 결정하러 유명 디자이너 샵에 들렀다. 한결의 의상을 많이 협찬한 디자이너 강산은 미리 한결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의 옷 몇 개를 따로 빼 두고는 한결에게 둘러보라고 말했다.
의상을 둘러보던 한결이 다빈과 커플로 나란히 시상식에 등장하려면, 두 사람이 의상 콘셉트를 맞추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온 코디 미숙을 불렀다.
“누나, 이번 의상 나만 고르면 되나. 유다빈 씨 측하고도 콘셉트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거 벌써 맞춰놨지. 다빈 씨가 그날 블랙 드레스를 입는다고 해서 우리도 그쪽에 맞는 옷으로 강산 선생님께 부탁해 뒀지. 이쪽이 선생님이 미리 골라놓은 것 같으니까 이쪽에서 고르면 될 거야.”
“그래? 그래도 그쪽 의상을 직접 보는 게 좋겠는데, 혹시 사진 같은 거 전달받은 거 있어?”
“어. 있어. 보여줄까?”
미숙은 핸드폰을 꺼내 다빈 측 코디에게서 전송받은 사진을 찾았다.
“여깄네. 자, 한 번 봐봐”
미숙이 건네 온 사진을 보던 한결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파격적이지? 그러니까 잘 어울릴만한 거로 골라야 할 거야. 자칫 여배우 의상에 묻혀서 한결 씬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수 있어.”
미숙이 보여준 사진 속의 다빈의 드레스는 가슴과 등이 V자로 깊게 파였는데, 그 깊이가 얼마나 깊게 파였는지 이거 뭐 거의 허리까지 보일 정도다.
‘지금 제정신이야. 아시아 전체에서 이 시상식이 중계될 텐데… 이렇게 허리까지 다 파인 옷을 입겠다고. 정신이 나갔구나! 유다빈.’
“누나, 이거 안돼, 안돼! 저쪽에서 연락해서 그 옷 다른 거로 바꾸라고 해”
“…?!”
미숙이 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나 하는 표정으로 한결을 쳐다봤다. 커플룩으로 색깔 정도야 맞춰 입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쪽에서 입겠다는 옷을 이쪽에서 입어라, 마라 할 권리는 없잖은가.
“안돼. 안돼. 옷이 너무 파격적이라 내가 맞춰서 입을 옷이 없다고 좀 조신한 걸로 고르라고 해”
“그게 말이 되니?! 우리가 뭐라고 다빈 씨 측에 그 옷을 입지 말라고 해.”
미숙은 다빈의 드레스 사진에 이렇게 난리를 치는 한결이 의외다. 그동안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와 함께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물며 공개 연인을 선언한 화연과 함께 등장하는 할 때도, 화연의 의상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던 한결이었다.
그런데 유달리 다빈의 드레스를 보고서는 다른 옷으로 바꾸라고 저 난리인 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연인에 향한 단속처럼 보일 듯한 행동이었다.
“에잇, 말이 안 되긴 뭐가 안돼. 내가 전화할게. 기다려 봐”
한결은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꺼내 다빈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나자 맑고 부드러운 다빈의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음… 난데… 그 시상식 드레스 말이야.”
그 간의 안부 인사 한마디 없이 몇 달 만에 다빈에게 전화를 건 한결은 대뜸 의상 얘기부터 꺼냈다.
마침 샵에서 드레스를 최종 피팅하면서 가봉하러 들렀던 다빈은 ‘남편’이라고 액정에 뜨는 글자를 보고 기대에 차 전화를 받았다.
‘한결씨가?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그런데 앞뒤 다 떼먹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그 옷 안 되겠어. 다른 옷으로 골라서 다시 사진 보내줘 봐봐”
“무슨… 소리야? 안 된다니, 왜?”
사실 다빈도 그 드레스가 너무 노출이 심해 최종 결정을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디자이너와 미라가 노출이 있긴 하지만 야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여신같이 우아하다며 강력 추천하고 나서서 그들의 의견을 따라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 휑~하게 앞뒤로 다 뚫린 옷을 입고 그 카메라 많은 시상식에 등장하시겠다고?! 안돼, 절대 안 돼”
남이야, 내가 거지 누더기 같은 옷을 입든, 마돈나 뺨치는 섹시한 옷을 입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한결 씨가 입어라 마라 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사람 말을 못 알아듣고, 이 여자가 정녕 제정신이야.
“사람이 말이야 배려라는 게 없어. 그렇게 앞뒤로 다 뚫린 옷을 입고 등장하면 같이 서 있는 나한테 카메라가 오겠어? 몸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쪽으로 카메라가 돌아가지. 그럼 난 옆에 서서 카메라 플래쉬 한 번 못 받고 얼마나 무안하겠어, 어?! 안 그래?!”
대충 말을 둘러댔다. 사실은 그 속살이 앞뒤로 뻥뻥 뚫린 옷을 입은 다빈을 침 흘리며 쳐다볼 취재진들과 그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그대로 아시아 전역 남자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으니.
헉. 지금 나 때문에 지 카메라에 주목 못 받는다고 저렇게 난리인 거야?
다빈은 기가 찼다.
“내가 아무리 야한 옷을 입는 들, 한결 씨보다 더 주목받기야 하겠어? 아시아를 통틀어 지금 가장 핫한 배운데”
“아무튼, 안돼. 다시 골라. 안 그러면 나도 똑같이 입어 줄 테니”
“똑같이?”
“그래.”
한결은 그대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선,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어디 적당한 옷이 없나 급하게 이 옷 저 옷 들춰보며 찾는다.
에잇, 코미디에나 나옴 직한 그런 옷이 어디 없나. 지금 바로 딱 보내줘야 기암을 토할 텐데.
“강 선생님. 혹시 남자 정장 중에 반바지로 된 뭐 그런 거 없어요? 그게 지금 아주 필요한데”
강산 선생은 ‘설마 그런 옷을 입으려고?’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저쪽 한구석으로 가서 걸려있는 옷 중 하나를 꺼내 가져온다.
“글쎄, 이런 걸 말하려나. 반바지 정장이 있긴 한데. 지난번 <유한도전>팀에서 부탁해서 제작했던 건데… 설마 이런 콘셉트를 원하는 거야?”
그래, 저거다.
한결이 원하던 바로 그 디자인인지 얼른 강산 선생에게 옷을 넘겨받은 한결이 핸드폰에서 카메라 아이콘을 찾아 누른다.
“선생님 그 옷 좀 들어봐 주시겠어요.”
찰칵.
찍은 사진을 곧바로 다빈에게 전송하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입가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한다.
“어때, 그럼 맞불로 이런 옷 입고 등장해주지. 한 쌍이 오버하며 헐벗은 게 콘셉트도 딱 맞고 좋겠네. 좋겠어.”
대체 어떤 옷이길래. 전송되어 온 사진을 손가락을 그어 크게 확대해 본다.
헐. 반바지 정장?! 이렇게 입고서라도 나한테 쏠리는 카메라를 뺏겠다?
“내가 그 옷 입고 나와서 포토라인에 등장하면, 워스트드레서 커플로 아주 각광을 받겠네. 각광을 받겠어. 어때? 입고 갈까? …당신 그래도 그 옷 입을래? 아니면 바꿀래?
네 맘대로 하라고 소리를 확 질러주고 싶지만, 범 아시아적인 큰 시상식이다. 그런데 둘이 쌍으로 저런 옷을 입고 함께 등장하면 주목을 위해 지나친 노출을 했다는 비아냥을 물론이요, 뷰티 프로그램에 패션 테러리스트 커플이니, 워스트 드레서 어쩌구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게 틀림없었다.
“알았어! 내가 바꿀게. 바꾸면 될 거 아냐!”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는군.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러면 다시 옷 골라서 입고 사진 찍어서 보내. 이번에는 고급지게 앞뒤로 아주 꽉꽉 막힌 거로다 골라. 내가 먼저 검사할 테니”
뭐 검사? 아주 오버가 하늘을 찌르시는구먼. 그런 검사는 네 애인한테 가서나 해!
“아이고, 커플 시상식 두 번만 했다간 아주… 아침마다 의상 점검받으라 하겠네.”
“뭐, 그럼 더 좋고. 아무리 방송용 전 부인이라도 아직 일본에선 방송 중이라고. 그러니 막 입고 다니면 내 얼굴에 먹칠인 거 알지? 알았으면 얼른 골라서 사진 보내. 나도 맞춰서 골라야 하니까.”
한결은 그렇게 자기 말만 다 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다빈은 속이 부글부글. 어쨌건 <연우결> 커플의 연장 선상에서 커플로 등장하는 자리니 둘의 의상이 맞으면 좋을 게 당연했다. 하지만 끝까지 지 위주로 저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전화통화에 다빈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한결의 의상을 바꾸라는 얘기가 다분히 자기 위주의 이유 때문이었지만 듣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 듯했다. 자칫했다간 시상식에서 노출 심한 옷으로 얼굴을 알리려고 안달이 난 신인배우로 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제는 그런 의도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 충분히 얼굴 정도는 알리지 않았던가. 좀 더 고급스러운 옷으로 다시 골라보리라 마음을 굳혔다.
*
다빈에게서 얼마 후 다시 전송된 드레스 사진은 차분한 블랙톤에 목까지 덮고 있는 터틀넥에 어깨 안쪽이 깊게 파인 드레스로 타이트 한 핏이 온몸의 라인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며, 치마 옆으로 트임을 길게 주어 움직일 때마다 다리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옷을 이렇게 못 고르나, 그… 고급지게 말이야. 앞뒤 다 꽉꽉 막히고 그런 거. 그런 게 얼마나 보기 좋아. 단아하고 깔끔하고 말이야. 그런 걸 골라야지. 이거 이거 몸에 딱 달라붙어서 몸매가 그대로 다 드러나는구먼. 거기다 옆은 왜 이렇게 뜯어졌어. 걸을 때 엉덩이까지 다 보이겠네’
어차피 드레스로 온몸을 칭칭 휘감을 수는 없을 터이니 몸매 라인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과 걸을 때마다 허벅지까지 다 보이는 트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처음 골랐던 디자인에 비하면 훨씬 노출이 덜 하다 싶어 이걸로 넘어가자 생각했다.
- 좋아 이 정도는 봐 주지.
전송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결은 손가락 두 개를 벌려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속 다빈이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살이 좀 빠졌네. 얼마 전 끝난 미니시리즈 촬영이 힘들었나. 설마, 시상식 드레스 때문에 일부러 굶어가며 다이어트 하는 건 아니겠지.
전보가 훨씬 수척해진 모습의 다빈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이는 한결이다.
다빈의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인해 중단됐던 한결도 남은 촬영을 마치고 휴식기를 갖던 중, 일본에서 진행되는 ‘아시아 방송 연예대상’ 시상식에 한결과 다빈이 시상자로 함께 초대받았다.
일본에서도 방영되고 있는 <연우결>의 인기가 일본 방송 시청률 상위권에 오르며 인기를 끌자, 주최 측에서 동반 시상자로 둘을 초대한 것이다.
시상식 참석을 일주일 앞두고 한결은 의상을 결정하러 유명 디자이너 샵에 들렀다. 한결의 의상을 많이 협찬한 디자이너 강산은 미리 한결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의 옷 몇 개를 따로 빼 두고는 한결에게 둘러보라고 말했다.
의상을 둘러보던 한결이 다빈과 커플로 나란히 시상식에 등장하려면, 두 사람이 의상 콘셉트를 맞추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온 코디 미숙을 불렀다.
“누나, 이번 의상 나만 고르면 되나. 유다빈 씨 측하고도 콘셉트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거 벌써 맞춰놨지. 다빈 씨가 그날 블랙 드레스를 입는다고 해서 우리도 그쪽에 맞는 옷으로 강산 선생님께 부탁해 뒀지. 이쪽이 선생님이 미리 골라놓은 것 같으니까 이쪽에서 고르면 될 거야.”
“그래? 그래도 그쪽 의상을 직접 보는 게 좋겠는데, 혹시 사진 같은 거 전달받은 거 있어?”
“어. 있어. 보여줄까?”
미숙은 핸드폰을 꺼내 다빈 측 코디에게서 전송받은 사진을 찾았다.
“여깄네. 자, 한 번 봐봐”
미숙이 건네 온 사진을 보던 한결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파격적이지? 그러니까 잘 어울릴만한 거로 골라야 할 거야. 자칫 여배우 의상에 묻혀서 한결 씬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수 있어.”
미숙이 보여준 사진 속의 다빈의 드레스는 가슴과 등이 V자로 깊게 파였는데, 그 깊이가 얼마나 깊게 파였는지 이거 뭐 거의 허리까지 보일 정도다.
‘지금 제정신이야. 아시아 전체에서 이 시상식이 중계될 텐데… 이렇게 허리까지 다 파인 옷을 입겠다고. 정신이 나갔구나! 유다빈.’
“누나, 이거 안돼, 안돼! 저쪽에서 연락해서 그 옷 다른 거로 바꾸라고 해”
“…?!”
미숙이 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나 하는 표정으로 한결을 쳐다봤다. 커플룩으로 색깔 정도야 맞춰 입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쪽에서 입겠다는 옷을 이쪽에서 입어라, 마라 할 권리는 없잖은가.
“안돼. 안돼. 옷이 너무 파격적이라 내가 맞춰서 입을 옷이 없다고 좀 조신한 걸로 고르라고 해”
“그게 말이 되니?! 우리가 뭐라고 다빈 씨 측에 그 옷을 입지 말라고 해.”
미숙은 다빈의 드레스 사진에 이렇게 난리를 치는 한결이 의외다. 그동안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와 함께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물며 공개 연인을 선언한 화연과 함께 등장하는 할 때도, 화연의 의상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던 한결이었다.
그런데 유달리 다빈의 드레스를 보고서는 다른 옷으로 바꾸라고 저 난리인 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연인에 향한 단속처럼 보일 듯한 행동이었다.
“에잇, 말이 안 되긴 뭐가 안돼. 내가 전화할게. 기다려 봐”
한결은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꺼내 다빈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나자 맑고 부드러운 다빈의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음… 난데… 그 시상식 드레스 말이야.”
그 간의 안부 인사 한마디 없이 몇 달 만에 다빈에게 전화를 건 한결은 대뜸 의상 얘기부터 꺼냈다.
마침 샵에서 드레스를 최종 피팅하면서 가봉하러 들렀던 다빈은 ‘남편’이라고 액정에 뜨는 글자를 보고 기대에 차 전화를 받았다.
‘한결씨가?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그런데 앞뒤 다 떼먹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그 옷 안 되겠어. 다른 옷으로 골라서 다시 사진 보내줘 봐봐”
“무슨… 소리야? 안 된다니, 왜?”
사실 다빈도 그 드레스가 너무 노출이 심해 최종 결정을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디자이너와 미라가 노출이 있긴 하지만 야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여신같이 우아하다며 강력 추천하고 나서서 그들의 의견을 따라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 휑~하게 앞뒤로 다 뚫린 옷을 입고 그 카메라 많은 시상식에 등장하시겠다고?! 안돼, 절대 안 돼”
남이야, 내가 거지 누더기 같은 옷을 입든, 마돈나 뺨치는 섹시한 옷을 입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한결 씨가 입어라 마라 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사람 말을 못 알아듣고, 이 여자가 정녕 제정신이야.
“사람이 말이야 배려라는 게 없어. 그렇게 앞뒤로 다 뚫린 옷을 입고 등장하면 같이 서 있는 나한테 카메라가 오겠어? 몸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쪽으로 카메라가 돌아가지. 그럼 난 옆에 서서 카메라 플래쉬 한 번 못 받고 얼마나 무안하겠어, 어?! 안 그래?!”
대충 말을 둘러댔다. 사실은 그 속살이 앞뒤로 뻥뻥 뚫린 옷을 입은 다빈을 침 흘리며 쳐다볼 취재진들과 그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그대로 아시아 전역 남자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으니.
헉. 지금 나 때문에 지 카메라에 주목 못 받는다고 저렇게 난리인 거야?
다빈은 기가 찼다.
“내가 아무리 야한 옷을 입는 들, 한결 씨보다 더 주목받기야 하겠어? 아시아를 통틀어 지금 가장 핫한 배운데”
“아무튼, 안돼. 다시 골라. 안 그러면 나도 똑같이 입어 줄 테니”
“똑같이?”
“그래.”
한결은 그대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선,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어디 적당한 옷이 없나 급하게 이 옷 저 옷 들춰보며 찾는다.
에잇, 코미디에나 나옴 직한 그런 옷이 어디 없나. 지금 바로 딱 보내줘야 기암을 토할 텐데.
“강 선생님. 혹시 남자 정장 중에 반바지로 된 뭐 그런 거 없어요? 그게 지금 아주 필요한데”
강산 선생은 ‘설마 그런 옷을 입으려고?’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저쪽 한구석으로 가서 걸려있는 옷 중 하나를 꺼내 가져온다.
“글쎄, 이런 걸 말하려나. 반바지 정장이 있긴 한데. 지난번 <유한도전>팀에서 부탁해서 제작했던 건데… 설마 이런 콘셉트를 원하는 거야?”
그래, 저거다.
한결이 원하던 바로 그 디자인인지 얼른 강산 선생에게 옷을 넘겨받은 한결이 핸드폰에서 카메라 아이콘을 찾아 누른다.
“선생님 그 옷 좀 들어봐 주시겠어요.”
찰칵.
찍은 사진을 곧바로 다빈에게 전송하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입가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한다.
“어때, 그럼 맞불로 이런 옷 입고 등장해주지. 한 쌍이 오버하며 헐벗은 게 콘셉트도 딱 맞고 좋겠네. 좋겠어.”
대체 어떤 옷이길래. 전송되어 온 사진을 손가락을 그어 크게 확대해 본다.
헐. 반바지 정장?! 이렇게 입고서라도 나한테 쏠리는 카메라를 뺏겠다?
“내가 그 옷 입고 나와서 포토라인에 등장하면, 워스트드레서 커플로 아주 각광을 받겠네. 각광을 받겠어. 어때? 입고 갈까? …당신 그래도 그 옷 입을래? 아니면 바꿀래?
네 맘대로 하라고 소리를 확 질러주고 싶지만, 범 아시아적인 큰 시상식이다. 그런데 둘이 쌍으로 저런 옷을 입고 함께 등장하면 주목을 위해 지나친 노출을 했다는 비아냥을 물론이요, 뷰티 프로그램에 패션 테러리스트 커플이니, 워스트 드레서 어쩌구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게 틀림없었다.
“알았어! 내가 바꿀게. 바꾸면 될 거 아냐!”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는군.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러면 다시 옷 골라서 입고 사진 찍어서 보내. 이번에는 고급지게 앞뒤로 아주 꽉꽉 막힌 거로다 골라. 내가 먼저 검사할 테니”
뭐 검사? 아주 오버가 하늘을 찌르시는구먼. 그런 검사는 네 애인한테 가서나 해!
“아이고, 커플 시상식 두 번만 했다간 아주… 아침마다 의상 점검받으라 하겠네.”
“뭐, 그럼 더 좋고. 아무리 방송용 전 부인이라도 아직 일본에선 방송 중이라고. 그러니 막 입고 다니면 내 얼굴에 먹칠인 거 알지? 알았으면 얼른 골라서 사진 보내. 나도 맞춰서 골라야 하니까.”
한결은 그렇게 자기 말만 다 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다빈은 속이 부글부글. 어쨌건 <연우결> 커플의 연장 선상에서 커플로 등장하는 자리니 둘의 의상이 맞으면 좋을 게 당연했다. 하지만 끝까지 지 위주로 저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전화통화에 다빈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한결의 의상을 바꾸라는 얘기가 다분히 자기 위주의 이유 때문이었지만 듣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 듯했다. 자칫했다간 시상식에서 노출 심한 옷으로 얼굴을 알리려고 안달이 난 신인배우로 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제는 그런 의도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 충분히 얼굴 정도는 알리지 않았던가. 좀 더 고급스러운 옷으로 다시 골라보리라 마음을 굳혔다.
*
다빈에게서 얼마 후 다시 전송된 드레스 사진은 차분한 블랙톤에 목까지 덮고 있는 터틀넥에 어깨 안쪽이 깊게 파인 드레스로 타이트 한 핏이 온몸의 라인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며, 치마 옆으로 트임을 길게 주어 움직일 때마다 다리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옷을 이렇게 못 고르나, 그… 고급지게 말이야. 앞뒤 다 꽉꽉 막히고 그런 거. 그런 게 얼마나 보기 좋아. 단아하고 깔끔하고 말이야. 그런 걸 골라야지. 이거 이거 몸에 딱 달라붙어서 몸매가 그대로 다 드러나는구먼. 거기다 옆은 왜 이렇게 뜯어졌어. 걸을 때 엉덩이까지 다 보이겠네’
어차피 드레스로 온몸을 칭칭 휘감을 수는 없을 터이니 몸매 라인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과 걸을 때마다 허벅지까지 다 보이는 트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처음 골랐던 디자인에 비하면 훨씬 노출이 덜 하다 싶어 이걸로 넘어가자 생각했다.
- 좋아 이 정도는 봐 주지.
전송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결은 손가락 두 개를 벌려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속 다빈이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살이 좀 빠졌네. 얼마 전 끝난 미니시리즈 촬영이 힘들었나. 설마, 시상식 드레스 때문에 일부러 굶어가며 다이어트 하는 건 아니겠지.
전보가 훨씬 수척해진 모습의 다빈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이는 한결이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4화 - 이렇게 사정없이 섹시한 여자였어?
제11회 아시아 방송연예대상이 열리기 30분 전.
한결에게 컨펌(?)받은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다빈에게 코디가 액세서리를 채워주며 마지막 준비를 끝내고 있는데 대기실 문이 열리고 스태프가 들어와 다빈의 차례임을 알려 온다.
“자, 유다빈 씨 준비 다 되셨죠?”
“네”
“저기 복도 끝에서 기다리시다 스태프 지시에 따라 포토라인에 가셔서 사진 찍으시고 시상식장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네.”
말을 마친 스태프가 사라지자, 미라가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던 파우치를 들어 다빈에게 건네준다.
“아까 화장실 다녀오면서 봤더니, 한결 씬 벌써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더라. 어서 가봐”
“응. 넌 여기 있을 거야?”
“그래, 여기서 화면으로 보고 있을 게.”
“그래 그럼.”
휴…. 호흡을 길게 내쉬며 숨을 가다듬는 다빈을 보며 미라가 걱정스레 한 마디 덧붙인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떨리니? …한결 씨 말이야.”
눈치챘구나.
“아냐, 그런 거. 시상식 때문에. 나 이런데 오는 거 처음이잖아. 파이팅! 갔다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다빈이 파우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자, 무릎 아래로 드레스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인다.
***
문을 열고 나서자, 멀지 않은 복도 끝에 포토 타임을 기다리고 있는 몇몇 연예인이 보인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이 쉴 새 없이 터지는 걸 보니 저기가 포토라인인가 보다.
한결 씨는 벌써 와 있다고 했지.
또각또각 높은 하이힐로 중심을 잡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무겁게 와서 꽂히는 시선 하나. 한결이다.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하지? 지난번 <연우결>의 보충 촬영 이후로 몇 달 만에 처음이다.
“보기 좋네”
한결이 먼저 다빈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메이크업에 헤어까지 제대로 하고 드레스를 입은 다빈은 지난번 건네받은 사진에서 보았던 것 이상으로 섹시한 모습이다.
몸에 달라붙은 드레스는 어깨에서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 허벅지를 지나 아름다운 곡선의 라인을 여실 없이 드러내 주었고, 긴 트임 사이로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다리는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쭉 뻗은 라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유다빈. 이렇게 사정없이 섹시한 여자였어?’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황홀함과 마음에 품고 있는 이를 보는 따스함이 담긴 눈빛이 잠시 한결의 입가에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자신의 드레스와 콘셉트를 맞춘 블랙 슈트 차림의 한결의 모습도 다빈의 시선을 빼앗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내 그 마음이 들킬세라 표정을 감추었다.
이내, 다빈이 한결의 가까이 오자 한결이 다빈을 향해 자신의 팔을 내민다. 팔짱을 끼라는 눈짓을 보내며.
포토라인으로 나가면서 해도 될 것을 뭘 벌써 끼고 있으래.
다빈은 모른 채 시선을 돌려 카메라가 터지고 있는 포토라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한결의 손이 다빈의 팔을 끌어당겨 제 팔에 툭. 걸쳐 놓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다빈이 눈을 흘길 듯 한결을 쳐다보자
“왜, 팔짱은 성에 안 차? 좀 더 다정한 콘셉트를 원해? 손잡고 들어가는 게 더 좋아?”
한결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제 말만 하고 있다.
김한결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나 혼자 김한결의 표정 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렇게 신경 쓰는 꼴이라니…
“우리 여기 <연우결> 커플로 초대받은 거 알지? 가상이지만 부부야. 사람들은 프로그램 밖에서는 더 달달한 모습을 기대한다고”
“글쎄… 그거야 둘 다 싱글일 때 해당하는 거겠지. 이 중 한 사람이 이미 공개연인 선언을 해 버렸는데, 여기서 달달한 모습을 기대할까? 괜히 오버해서 달달한 척하다가 여친한테 혼나면 어쩌시려고?”
공개연인 이화연. 이 얘기가 여기서도 나오는구나.
다빈의 뽀로통한 소리에 뭐라 반격할 말이 없다.
“자, 김한결 씨 유다빈 씨 들어 가실게요”
일본인 스태프가 차례를 알려오자, 옆에 있던 통역이 두 사람의 입장을 알려왔다.
한결이 다빈을 에스코트하며 먼저 발걸음을 뗐다. 자신의 팔에 팔짱을 낀 다빈의 손 위에 자신의 반대편 손을 올려두고, 매력적인 웃음을 날리며 성큼성큼 포토라인을 향했다.
한 뼘 정도 높이에 둥근 단을 올려놓은 포토라인에, 먼저 발을 내디딘 한결이 다빈의 팔을 붙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둘의 모습을 1초라도 놓칠세라, 포토라인을 빙 둘러싼 취재진의 카메라 셔터가 쉴새 없이 터졌다.
둥근 단의 중간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는다.
찰칵찰칵.
한결이 몸을 좌측으로 살짝 옮기면서 “좌측” 다빈에게 방향을 지시하자, 다빈 역시도 한결의 시선에 맞춰 몸을 틀었다.
“정면” 다시 한결이 정면을 보자 다빈 역시도 정면을 응시. 이어 “우측” 다빈도 한결을 따라서 우측. 카메라가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가운데, 취재진들 쪽에서 일본말로 뭐라고 요청이 있자 통역이 두 사람을 보며 취재진의 말을 전했다.
“포즈를 바꿔서 좀 더 다정한 연출을 해 달라고 하네요”
통역의 말에 잠깐 멈칫하는 다빈과 달리, 이런 자리가 익숙한 한결이 취재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빼 다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흡!!!
방심하고 있던 차, 갑자기 둘러지는 한결의 손.
한 줌에 들어올 듯한 가는 허리를 붙잡은 한결이 다빈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번에도 역시 좌측, 정면, 우측 방향을 틀어 각 방향의 취재진들을 향해 포즈를 취해 보인다.
다빈은 한결을 따라 방향을 바꿔가며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있지만, 신경은 온통 한결이 손이 머문 허리에 가 있다.
그러고 보니 한결과 키스까지 했는데 새삼 이 정도의 스킨십에 이리도 떨리는지. 가슴이 콩닥콩닥 박자를 잊고 제 맘대로 뛰는 걸 제어할 수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내려오셔도 되세요”
5분가량의 포토 타임이 이어진 후, 스태프의 말을 통역이 대신 전해줬다. 허리에서 손을 뗀 한결이 이번에는 손을 잡고는 먼저 단에서 내려와, 다빈이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다빈이 단에서 다 내려오자 한결은 마지막으로 취재진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퇴장로를 따라 다빈을 에스코트했다. 여전히 손을 꽉 잡은 채.
휴… 처음으로 서 본 시상식에 앞선 포토라인이 끝나자, 다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긴장됐었어?”
“조금. 이런 자리 난 처음이라.”
처음이라. 당신의 첫 시상식 무대를 내가 에스코트했네. 기분 좋다. 그게 뭐든 당신이 처음 경험하는 일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취재진들의 카메라를 벗어나 다시 대기실로 향하는 길. 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한결이 제 손을 꼭 잡고 있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까지 끼고.
“이 손… 이제 그만 놔도 될 것 같지 않아? 카메라도 없는데”
놓으라고? 싫은데.
“나 지금 신사도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라”
“…?”
“그 10센티는 족히 넘을 높은 구두를 신고, 또 치마는 한 발짝 떼기도 어렵게 몸에 짝 달라붙어서 누구 도움 없이 제대로 걷기야 하겠어. 내가 안 잡아주면 어기적어기적 아니면 그대로 고꾸라지기 딱 좋겠구만.”
하. 이 사람 눈에는 드레스를 우아하게 입은 나의 아름다운 자태는 안 들어오나. 이 아름다운 자체를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은 못 할망정, 고꾸라지기 딱 좋은 모양이라고?! 됐네, 됐어. 뭘 기대해.
다빈이 그대로 잡혀있던 손을 빼내려 하자, 한결이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 아파”
“그럼, 도와줄 때 가만히 잡고 있어. 이 손 이거 아무 여자한테나 함부로 내주는 손, 아니라는 거… 익히 잘 알고 있지?”
맞는 말이긴 한데, 제 입으로 저렇게 말을 하는 게 어찌나 뻔뻔스러운지 그 입을 그냥 한 대 콱 때려주고 싶어진다.
“아, 네에…”
쳇. 애인도 있으면서 이렇게 뻔뻔스럽게 제 손을 잡고 있는 한결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지만, 이놈의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건지 아까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고 위아래, 위아래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아주 난리를 치고 있다.
드디어 시상식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무대 아래 수상자와 시상자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아시아를 전체를 관통하는 방송프로그램 시상식답게 수상자도, 시상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화려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이런 시상식에 앉아있다니 다빈은 정말이지 감개무량했다. 언젠가는 저도 이 자리에 수상자로 올라오는 날이 있을까, 그러면 소감을 말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지겠지.
상이 수여되고, 수상자들이 거명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빈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시상식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저기…”
옆에 나란히 앉은 한결이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있는 카메라가 수시로 여기 찍고 있는데. 다정한 척 좀 하지. 말도 좀 걸고. 그렇게 처음 본 사람처럼 시선도 안 주고, 말도 한마디 안 건네고 있으면 팬들이 오해한다고. 방송에서와 달리 둘이 사이가 안 좋은 줄 알고”
한결이 말한 방향으로 눈을 돌려보니 아니나다를까, 카메라 방향이 자신들 쪽을 향해 있다. 그걸 인지한 직후 바로 다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흘러나오며 시선을 한결에게 옮겨왔다. 그러고는
“이런 표정으로 한 번씩 쳐다 봐주면 되지?”
씩~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영 억지웃음이라는 게 티가 난다.
“아니지 아니지. 그 왜 잘하는 거 있잖아. 지난번 드라마 엔딩에서 키스할 때 보여줬던 그 달달한 표정. 그런 표정을 지어 보여야지. 우리 부부로 출연했던 사이잖아.”
키.스.씬? 아, 그 표정… 그게 그런 느낌이었나?
“멜로 연기에 아주 물이 올랐던데? 아니면 촬영하면서 그 선배한테 마음이 끌리기라도 했나. 표정이 아주 리얼하던데”
한결의 입은 카메라를 신경 써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은 심술 맞았다.
“글쎄… 지금은 그런 표정이 영 안 나올 것 같네. 그런 표정이 아무 때나 막 나올 만큼 연기력이 좋지 못해서.”
뭐? 아무 때?!
“어머, 미소 지으세요. 김한결 씨. 지금… 표정이 너무 굳었어요. 아시아 팬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면 쓰나…”
“……”
그때 스태프가 와서 시상 차례임을 알렸다. 둘은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제11회 아시아 방송연예대상이 열리기 30분 전.
한결에게 컨펌(?)받은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다빈에게 코디가 액세서리를 채워주며 마지막 준비를 끝내고 있는데 대기실 문이 열리고 스태프가 들어와 다빈의 차례임을 알려 온다.
“자, 유다빈 씨 준비 다 되셨죠?”
“네”
“저기 복도 끝에서 기다리시다 스태프 지시에 따라 포토라인에 가셔서 사진 찍으시고 시상식장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네.”
말을 마친 스태프가 사라지자, 미라가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던 파우치를 들어 다빈에게 건네준다.
“아까 화장실 다녀오면서 봤더니, 한결 씬 벌써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더라. 어서 가봐”
“응. 넌 여기 있을 거야?”
“그래, 여기서 화면으로 보고 있을 게.”
“그래 그럼.”
휴…. 호흡을 길게 내쉬며 숨을 가다듬는 다빈을 보며 미라가 걱정스레 한 마디 덧붙인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떨리니? …한결 씨 말이야.”
눈치챘구나.
“아냐, 그런 거. 시상식 때문에. 나 이런데 오는 거 처음이잖아. 파이팅! 갔다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다빈이 파우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자, 무릎 아래로 드레스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인다.
***
문을 열고 나서자, 멀지 않은 복도 끝에 포토 타임을 기다리고 있는 몇몇 연예인이 보인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이 쉴 새 없이 터지는 걸 보니 저기가 포토라인인가 보다.
한결 씨는 벌써 와 있다고 했지.
또각또각 높은 하이힐로 중심을 잡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무겁게 와서 꽂히는 시선 하나. 한결이다.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하지? 지난번 <연우결>의 보충 촬영 이후로 몇 달 만에 처음이다.
“보기 좋네”
한결이 먼저 다빈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메이크업에 헤어까지 제대로 하고 드레스를 입은 다빈은 지난번 건네받은 사진에서 보았던 것 이상으로 섹시한 모습이다.
몸에 달라붙은 드레스는 어깨에서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 허벅지를 지나 아름다운 곡선의 라인을 여실 없이 드러내 주었고, 긴 트임 사이로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다리는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쭉 뻗은 라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유다빈. 이렇게 사정없이 섹시한 여자였어?’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황홀함과 마음에 품고 있는 이를 보는 따스함이 담긴 눈빛이 잠시 한결의 입가에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자신의 드레스와 콘셉트를 맞춘 블랙 슈트 차림의 한결의 모습도 다빈의 시선을 빼앗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내 그 마음이 들킬세라 표정을 감추었다.
이내, 다빈이 한결의 가까이 오자 한결이 다빈을 향해 자신의 팔을 내민다. 팔짱을 끼라는 눈짓을 보내며.
포토라인으로 나가면서 해도 될 것을 뭘 벌써 끼고 있으래.
다빈은 모른 채 시선을 돌려 카메라가 터지고 있는 포토라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한결의 손이 다빈의 팔을 끌어당겨 제 팔에 툭. 걸쳐 놓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다빈이 눈을 흘길 듯 한결을 쳐다보자
“왜, 팔짱은 성에 안 차? 좀 더 다정한 콘셉트를 원해? 손잡고 들어가는 게 더 좋아?”
한결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제 말만 하고 있다.
김한결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나 혼자 김한결의 표정 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렇게 신경 쓰는 꼴이라니…
“우리 여기 <연우결> 커플로 초대받은 거 알지? 가상이지만 부부야. 사람들은 프로그램 밖에서는 더 달달한 모습을 기대한다고”
“글쎄… 그거야 둘 다 싱글일 때 해당하는 거겠지. 이 중 한 사람이 이미 공개연인 선언을 해 버렸는데, 여기서 달달한 모습을 기대할까? 괜히 오버해서 달달한 척하다가 여친한테 혼나면 어쩌시려고?”
공개연인 이화연. 이 얘기가 여기서도 나오는구나.
다빈의 뽀로통한 소리에 뭐라 반격할 말이 없다.
“자, 김한결 씨 유다빈 씨 들어 가실게요”
일본인 스태프가 차례를 알려오자, 옆에 있던 통역이 두 사람의 입장을 알려왔다.
한결이 다빈을 에스코트하며 먼저 발걸음을 뗐다. 자신의 팔에 팔짱을 낀 다빈의 손 위에 자신의 반대편 손을 올려두고, 매력적인 웃음을 날리며 성큼성큼 포토라인을 향했다.
한 뼘 정도 높이에 둥근 단을 올려놓은 포토라인에, 먼저 발을 내디딘 한결이 다빈의 팔을 붙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둘의 모습을 1초라도 놓칠세라, 포토라인을 빙 둘러싼 취재진의 카메라 셔터가 쉴새 없이 터졌다.
둥근 단의 중간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는다.
찰칵찰칵.
한결이 몸을 좌측으로 살짝 옮기면서 “좌측” 다빈에게 방향을 지시하자, 다빈 역시도 한결의 시선에 맞춰 몸을 틀었다.
“정면” 다시 한결이 정면을 보자 다빈 역시도 정면을 응시. 이어 “우측” 다빈도 한결을 따라서 우측. 카메라가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가운데, 취재진들 쪽에서 일본말로 뭐라고 요청이 있자 통역이 두 사람을 보며 취재진의 말을 전했다.
“포즈를 바꿔서 좀 더 다정한 연출을 해 달라고 하네요”
통역의 말에 잠깐 멈칫하는 다빈과 달리, 이런 자리가 익숙한 한결이 취재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빼 다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흡!!!
방심하고 있던 차, 갑자기 둘러지는 한결의 손.
한 줌에 들어올 듯한 가는 허리를 붙잡은 한결이 다빈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번에도 역시 좌측, 정면, 우측 방향을 틀어 각 방향의 취재진들을 향해 포즈를 취해 보인다.
다빈은 한결을 따라 방향을 바꿔가며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있지만, 신경은 온통 한결이 손이 머문 허리에 가 있다.
그러고 보니 한결과 키스까지 했는데 새삼 이 정도의 스킨십에 이리도 떨리는지. 가슴이 콩닥콩닥 박자를 잊고 제 맘대로 뛰는 걸 제어할 수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내려오셔도 되세요”
5분가량의 포토 타임이 이어진 후, 스태프의 말을 통역이 대신 전해줬다. 허리에서 손을 뗀 한결이 이번에는 손을 잡고는 먼저 단에서 내려와, 다빈이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다빈이 단에서 다 내려오자 한결은 마지막으로 취재진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퇴장로를 따라 다빈을 에스코트했다. 여전히 손을 꽉 잡은 채.
휴… 처음으로 서 본 시상식에 앞선 포토라인이 끝나자, 다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긴장됐었어?”
“조금. 이런 자리 난 처음이라.”
처음이라. 당신의 첫 시상식 무대를 내가 에스코트했네. 기분 좋다. 그게 뭐든 당신이 처음 경험하는 일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취재진들의 카메라를 벗어나 다시 대기실로 향하는 길. 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한결이 제 손을 꼭 잡고 있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까지 끼고.
“이 손… 이제 그만 놔도 될 것 같지 않아? 카메라도 없는데”
놓으라고? 싫은데.
“나 지금 신사도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라”
“…?”
“그 10센티는 족히 넘을 높은 구두를 신고, 또 치마는 한 발짝 떼기도 어렵게 몸에 짝 달라붙어서 누구 도움 없이 제대로 걷기야 하겠어. 내가 안 잡아주면 어기적어기적 아니면 그대로 고꾸라지기 딱 좋겠구만.”
하. 이 사람 눈에는 드레스를 우아하게 입은 나의 아름다운 자태는 안 들어오나. 이 아름다운 자체를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은 못 할망정, 고꾸라지기 딱 좋은 모양이라고?! 됐네, 됐어. 뭘 기대해.
다빈이 그대로 잡혀있던 손을 빼내려 하자, 한결이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 아파”
“그럼, 도와줄 때 가만히 잡고 있어. 이 손 이거 아무 여자한테나 함부로 내주는 손, 아니라는 거… 익히 잘 알고 있지?”
맞는 말이긴 한데, 제 입으로 저렇게 말을 하는 게 어찌나 뻔뻔스러운지 그 입을 그냥 한 대 콱 때려주고 싶어진다.
“아, 네에…”
쳇. 애인도 있으면서 이렇게 뻔뻔스럽게 제 손을 잡고 있는 한결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지만, 이놈의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건지 아까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고 위아래, 위아래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아주 난리를 치고 있다.
드디어 시상식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무대 아래 수상자와 시상자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아시아를 전체를 관통하는 방송프로그램 시상식답게 수상자도, 시상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화려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이런 시상식에 앉아있다니 다빈은 정말이지 감개무량했다. 언젠가는 저도 이 자리에 수상자로 올라오는 날이 있을까, 그러면 소감을 말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지겠지.
상이 수여되고, 수상자들이 거명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빈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시상식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저기…”
옆에 나란히 앉은 한결이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있는 카메라가 수시로 여기 찍고 있는데. 다정한 척 좀 하지. 말도 좀 걸고. 그렇게 처음 본 사람처럼 시선도 안 주고, 말도 한마디 안 건네고 있으면 팬들이 오해한다고. 방송에서와 달리 둘이 사이가 안 좋은 줄 알고”
한결이 말한 방향으로 눈을 돌려보니 아니나다를까, 카메라 방향이 자신들 쪽을 향해 있다. 그걸 인지한 직후 바로 다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흘러나오며 시선을 한결에게 옮겨왔다. 그러고는
“이런 표정으로 한 번씩 쳐다 봐주면 되지?”
씩~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영 억지웃음이라는 게 티가 난다.
“아니지 아니지. 그 왜 잘하는 거 있잖아. 지난번 드라마 엔딩에서 키스할 때 보여줬던 그 달달한 표정. 그런 표정을 지어 보여야지. 우리 부부로 출연했던 사이잖아.”
키.스.씬? 아, 그 표정… 그게 그런 느낌이었나?
“멜로 연기에 아주 물이 올랐던데? 아니면 촬영하면서 그 선배한테 마음이 끌리기라도 했나. 표정이 아주 리얼하던데”
한결의 입은 카메라를 신경 써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은 심술 맞았다.
“글쎄… 지금은 그런 표정이 영 안 나올 것 같네. 그런 표정이 아무 때나 막 나올 만큼 연기력이 좋지 못해서.”
뭐? 아무 때?!
“어머, 미소 지으세요. 김한결 씨. 지금… 표정이 너무 굳었어요. 아시아 팬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면 쓰나…”
“……”
그때 스태프가 와서 시상 차례임을 알렸다. 둘은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5화 - 팬미팅에서 생긴 일
시상을 발표하는 단상까지는 무대 뒤 막을 걷고 나와 계단을 5개 정도 내려와 5m 정도면 걸어가면 됐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상인 만큼 오후부터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 크게 어려움을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생방송은 처음이라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휴.. 휴… 긴장을 담뿍 담긴 숨을 몇 번 길게 내뱉었다. 객석에선 자신들의 소개가 끝났는지 뜨거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태프가 등장을 알렸다.
다빈은 한 손에 수상자 이름이 적힌 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한결의 팔짱을 끼고 우아한 자태로 다정스럽게 등장…하려고 했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드레스를 고를 때 그저 입고 있는 모습만 생각했지 걷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막상 입고 계단을 걸어 무대 위 단상까지 걸어보니, 긴 드레스는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에 밝혔고, 타이트하게 다리를 감싼 치마 때문에 발걸음이 제대로 떼어지지도 않았다.
그뿐인가 아찔한 S라인을 위해 자그마치 12센티나 되는 하이힐에 몸을 탑승시켰더니 걸을 때마다 신발 위에서 휘청휘청 거리는 느낌이다.
‘아까 리허설 때 미리 의상을 입고 한 번 걸어 봤어야 하는데.’
시상식 경험이 없는 다빈의 실수였다.
‘왜 하필 이 드레스를 골라가지고…!’
객석의 박수와 함께 등장 음악이 나오고, 첫 발자국을 떼는 다빈의 모습이 옆의 한결이 보기에도 영 불안 불안하다.
하필 계단이다. 휘청휘청. 조심조심 한 발짝 한 발짝 잘 내민다 싶더니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어 내려놓는 순간, 높은 굽이 치마를 밟아 휘청~ 손은 수상 봉투를 들고 있어 치마를 끌어 올릴 수도 없었다.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있다. 으악. 생방송인데 이런 망신을 어째.
몸이 휘청거리며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 꽂혀지려는 순간, 다빈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 일으키는 한결의 손.
살았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결을 쳐다보는데, 이 남자 쳇!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한결은 관심 없는 듯 있더니 다빈이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뺐다. 그러더니 다빈이 걷기 좋도록 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고, 수상자를 발표할 단상으로 다빈을 에스코트했다.
한결의 손이 허리를 받치고 에스코트를 해주니, 자유로워진 한 손이 치마를 잡을 수 있게 되어 한결 걷기가 편해졌다.
자칫하면 평생 굴욕으로 남을 만한 사건이 있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방송 중. 아무 일 없었던 듯 자연스레 수상자를 발표하고 나가야 한다.
먼저 마이크 앞에 선, 한결이 카메라를 보며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김한결입니다. <연우결>에서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유다빈 씨가 생방송이 처음이라 많이 긴장한 것 같네요. 여러분 유다빈 씨에게 격려의 박수를 한 번 보내 주시겠습니까?”
한결은 대본에 있는 멘트가 아닌 능숙하게, 방금 일어난 일을 얘기하며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한결의 말에 객석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오자, 다빈이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 그럼 수상자를 소개하겠습니다. 후보자들부터 보시죠.”
***
시상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별도의 객석으로 마련된 시상자 석으로 와 앉았다. 이제 시상도 서너 개만 남기고 끝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고급 슈트 차림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다빈아, 여기서 보게 되네”
“어, 선우 오빠. 여긴… 웬일이야?”
선우를 여기서 만나다니, 다빈도 뜻밖이었다.
“나? 시상하러”
“연예인들만 시상자로 나오는 줄 알았더니, 오빠도 시상자인 거야?”
“우리 회사서 제작한 프로그램이 몇 개고, 그게 아시아에 수출되면서 대박 난 게 또 몇 갠 데. 이래 봬도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는 몸이다. 더군다나 이 시상식 우리 회사서도 협찬했거든.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아, 그랬구나. …오빠 일단 앉아”
이제 선우와 다빈은 편해졌다.
지난번 다빈의 집 앞에서 다빈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깨우친 선우는 깨끗이 다빈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는 다빈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선우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다빈도 더 이상 선우와의 만남이 불편하지 않았고, 그의 배려를 달리 해석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옛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묻혀져 가고 있음을, 둘은 굳이 말하지 않고도 잘 알고 있었다.
“뭐 내 차례가 얼마 안 남은 거 같긴 하지만, 잠깐 앉아 볼까?”
다빈의 옆에 앉은 한결을 보면서 선우가 양해를 구했다.
“옆에 좀 앉겠습니다. 김한결 씨.”
하지만 그런 선우와 달리 한결은 선우의 등장이 영 마뜩잖다.
“아, 네 그러시죠.”
“얼마 전 촬영장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한결은 딱히 악의도 없는 질문이건만, 신경이 곤두서 불편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져 나왔다.
“네. 괜찮습니다.”
자신을 향해 저런 날 선 표정으로 대답하는 거로 봐서 여전히 김한결의 마음은 다빈을 향해 있다.
그렇다면 이화연과의 연인 선언은 아마,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이 바닥의 비즈니스를 익히 알고 있는 선우는 자신을 대하는 한결의 태도만으로도 지금 한결의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잘되길 도와주고 싶다. 당장 연인 선언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다빈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결을 오해하며 가슴앓이는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 회사가 제작하는 작품에도 한 번 출연해 주시죠.”
“뭐, 작품만 좋다면야 언제든지 응해드리죠.”
“저희 쪽에서 초이스해서 제작에 들어가는 작품이라면 아마, 크게 고민하지 않고 출연하셔도 중박 이상은 될 겁니다.”
“하하,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자신감이라기 보다, 오랜 경험에서 작품을 고를 줄 아는 눈이 생긴 거라고 해두죠.”
하, 이 남자 자신감이 대단하다. 이런 자신감이 유다빈을 끌리게 했나.
한결은 속이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걸 억지로 눌러 숨겼다.
그때 스태프가 와서 선우의 시상 차례임을 알려 왔다.
“제 순서라네요, 다음에 또 뵙죠.”
선우가 한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영 마땅찮은 손이지만, 보는 눈이 많은 자리다.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왜인지 호의적인 듯한, 다빈의 애인이었던 아니 현재 애인일지 모를 선우에게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표정을 지으며 선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다빈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응. 오빠. 수고해”
선우가 왔다 간 뒤. 한결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한결이 오늘 본 선우와 다빈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익숙한 모습이다. 그저 과거 한때 사랑했던, 지나간 사랑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두 사람 정말 잘 돼가고 있는 건가?’
한결은 끌어 오르는 질투에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시상식 다음 날은 일본을 방문한 김에 스케줄을 몰아 한결의 팬 미팅이 잡혀 있었다. 다빈은 이 자리에 당사자인 한결도 모르게 깜짝 게스트로 초대를 받았다.
원래 예정되었던 스케줄 대로라면 어제 시상식을 끝내고 일본에서 하루 정도 더 휴식을 하고, 내일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제 시상식 후, 시상식 주최 측에서 내일 한결의 팬 미팅에 깜짝 게스트로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본에서 워낙 인기를 얻고 있는 한류스타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 일본 지상파 프로그램을 통틀어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게 바로 한결과 다빈이 출연한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라고 한다.
그러니 다빈을 그 행사장에 등장하기만 해도 팬들의 환호가 예상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연우결>을 방송하고 있는 방송사 측이 시상식 주최 측과 한국 협찬사 측에 솔깃한 제안까지 하면서 다빈의 섭외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한결의 팬 미팅에 깜짝 게스트라니!
다빈은 웬만하면 한결과는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다빈이 끝내 참석을 거절하자 결국, 한국에서 소속사 대표까지 전화를 걸어와 참석을 독려했다.
이렇게까지 주변에서 모두 참석을 요청하니 더는 참석을 못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명분이 없었다. 결국, 다빈은 어쩔 수 없이 참석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빈은 게스트로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몰래 가서 한결의 모습을 지켜보면 어떨까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한결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상태에서 그가 노래하고, 춤추고, 얘기하고, 웃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서.
하지만 이화연과 연인이 된 이후 더할 수 없이 냉정해진 한결을 팬 미팅이라는 공식 석상에서, 아무 감정 없이 웃으며 볼 자신은 없었다.
한결이 자신을 향해 웃고 얘기하면, 그게 진심 같아서…
접어야 하는 마음이 자꾸만 다시 펼쳐지려고 해서…
‘지금 한참 열애에 빠져있는 한결 씨에게 난, 안중에도 없는 사람일 텐데.’
한결을 떠올릴 때마다 같은 답으로 귀결되는 결론임에도, 기울어진 마음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게 다빈 자신도 참 미칠 노릇이었다.
*
행사팀에서는 혹시 한결이나 팬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 다빈에게 행사가 시작된 후 행사장으로 올 것을 요청했다.
행사장 입구와 담벼락에는 한결의 사진과 한글로 팬심 가득한 마음을 적은 각종 플랜카드가 온통 도배되다시피 붙어 있었다.
객석에서 직접 팬 미팅 현장을 지켜보지 않아도, 행사장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함성만 들어도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김한결,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행사 시작 시간에서 30분쯤 지나 도착한 다빈이 행사장 안 대기실로 들어서는데, 복도에서 한결의 노래가 들린다.
[지금도 난 너를 느끼죠. 이렇게 너를 부르는 지금 이 순간도 난 그대가 보여
내일도 난 너를 보겠죠. 내일도 난 너를 듣겠죠. 내일도 모든 게 오늘 하루와 같겠죠.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곳에 네가 있어.
어떤가요, 그대
어떤가요, 그대…]
시상을 발표하는 단상까지는 무대 뒤 막을 걷고 나와 계단을 5개 정도 내려와 5m 정도면 걸어가면 됐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상인 만큼 오후부터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 크게 어려움을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생방송은 처음이라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휴.. 휴… 긴장을 담뿍 담긴 숨을 몇 번 길게 내뱉었다. 객석에선 자신들의 소개가 끝났는지 뜨거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태프가 등장을 알렸다.
다빈은 한 손에 수상자 이름이 적힌 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한결의 팔짱을 끼고 우아한 자태로 다정스럽게 등장…하려고 했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드레스를 고를 때 그저 입고 있는 모습만 생각했지 걷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막상 입고 계단을 걸어 무대 위 단상까지 걸어보니, 긴 드레스는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에 밝혔고, 타이트하게 다리를 감싼 치마 때문에 발걸음이 제대로 떼어지지도 않았다.
그뿐인가 아찔한 S라인을 위해 자그마치 12센티나 되는 하이힐에 몸을 탑승시켰더니 걸을 때마다 신발 위에서 휘청휘청 거리는 느낌이다.
‘아까 리허설 때 미리 의상을 입고 한 번 걸어 봤어야 하는데.’
시상식 경험이 없는 다빈의 실수였다.
‘왜 하필 이 드레스를 골라가지고…!’
객석의 박수와 함께 등장 음악이 나오고, 첫 발자국을 떼는 다빈의 모습이 옆의 한결이 보기에도 영 불안 불안하다.
하필 계단이다. 휘청휘청. 조심조심 한 발짝 한 발짝 잘 내민다 싶더니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어 내려놓는 순간, 높은 굽이 치마를 밟아 휘청~ 손은 수상 봉투를 들고 있어 치마를 끌어 올릴 수도 없었다.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있다. 으악. 생방송인데 이런 망신을 어째.
몸이 휘청거리며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 꽂혀지려는 순간, 다빈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 일으키는 한결의 손.
살았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결을 쳐다보는데, 이 남자 쳇!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한결은 관심 없는 듯 있더니 다빈이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뺐다. 그러더니 다빈이 걷기 좋도록 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고, 수상자를 발표할 단상으로 다빈을 에스코트했다.
한결의 손이 허리를 받치고 에스코트를 해주니, 자유로워진 한 손이 치마를 잡을 수 있게 되어 한결 걷기가 편해졌다.
자칫하면 평생 굴욕으로 남을 만한 사건이 있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방송 중. 아무 일 없었던 듯 자연스레 수상자를 발표하고 나가야 한다.
먼저 마이크 앞에 선, 한결이 카메라를 보며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김한결입니다. <연우결>에서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유다빈 씨가 생방송이 처음이라 많이 긴장한 것 같네요. 여러분 유다빈 씨에게 격려의 박수를 한 번 보내 주시겠습니까?”
한결은 대본에 있는 멘트가 아닌 능숙하게, 방금 일어난 일을 얘기하며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한결의 말에 객석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오자, 다빈이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 그럼 수상자를 소개하겠습니다. 후보자들부터 보시죠.”
***
시상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별도의 객석으로 마련된 시상자 석으로 와 앉았다. 이제 시상도 서너 개만 남기고 끝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고급 슈트 차림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다빈아, 여기서 보게 되네”
“어, 선우 오빠. 여긴… 웬일이야?”
선우를 여기서 만나다니, 다빈도 뜻밖이었다.
“나? 시상하러”
“연예인들만 시상자로 나오는 줄 알았더니, 오빠도 시상자인 거야?”
“우리 회사서 제작한 프로그램이 몇 개고, 그게 아시아에 수출되면서 대박 난 게 또 몇 갠 데. 이래 봬도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는 몸이다. 더군다나 이 시상식 우리 회사서도 협찬했거든.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아, 그랬구나. …오빠 일단 앉아”
이제 선우와 다빈은 편해졌다.
지난번 다빈의 집 앞에서 다빈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깨우친 선우는 깨끗이 다빈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는 다빈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선우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다빈도 더 이상 선우와의 만남이 불편하지 않았고, 그의 배려를 달리 해석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옛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묻혀져 가고 있음을, 둘은 굳이 말하지 않고도 잘 알고 있었다.
“뭐 내 차례가 얼마 안 남은 거 같긴 하지만, 잠깐 앉아 볼까?”
다빈의 옆에 앉은 한결을 보면서 선우가 양해를 구했다.
“옆에 좀 앉겠습니다. 김한결 씨.”
하지만 그런 선우와 달리 한결은 선우의 등장이 영 마뜩잖다.
“아, 네 그러시죠.”
“얼마 전 촬영장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한결은 딱히 악의도 없는 질문이건만, 신경이 곤두서 불편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져 나왔다.
“네. 괜찮습니다.”
자신을 향해 저런 날 선 표정으로 대답하는 거로 봐서 여전히 김한결의 마음은 다빈을 향해 있다.
그렇다면 이화연과의 연인 선언은 아마,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이 바닥의 비즈니스를 익히 알고 있는 선우는 자신을 대하는 한결의 태도만으로도 지금 한결의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잘되길 도와주고 싶다. 당장 연인 선언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다빈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결을 오해하며 가슴앓이는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 회사가 제작하는 작품에도 한 번 출연해 주시죠.”
“뭐, 작품만 좋다면야 언제든지 응해드리죠.”
“저희 쪽에서 초이스해서 제작에 들어가는 작품이라면 아마, 크게 고민하지 않고 출연하셔도 중박 이상은 될 겁니다.”
“하하,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자신감이라기 보다, 오랜 경험에서 작품을 고를 줄 아는 눈이 생긴 거라고 해두죠.”
하, 이 남자 자신감이 대단하다. 이런 자신감이 유다빈을 끌리게 했나.
한결은 속이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걸 억지로 눌러 숨겼다.
그때 스태프가 와서 선우의 시상 차례임을 알려 왔다.
“제 순서라네요, 다음에 또 뵙죠.”
선우가 한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영 마땅찮은 손이지만, 보는 눈이 많은 자리다.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왜인지 호의적인 듯한, 다빈의 애인이었던 아니 현재 애인일지 모를 선우에게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표정을 지으며 선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다빈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응. 오빠. 수고해”
선우가 왔다 간 뒤. 한결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한결이 오늘 본 선우와 다빈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익숙한 모습이다. 그저 과거 한때 사랑했던, 지나간 사랑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두 사람 정말 잘 돼가고 있는 건가?’
한결은 끌어 오르는 질투에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시상식 다음 날은 일본을 방문한 김에 스케줄을 몰아 한결의 팬 미팅이 잡혀 있었다. 다빈은 이 자리에 당사자인 한결도 모르게 깜짝 게스트로 초대를 받았다.
원래 예정되었던 스케줄 대로라면 어제 시상식을 끝내고 일본에서 하루 정도 더 휴식을 하고, 내일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제 시상식 후, 시상식 주최 측에서 내일 한결의 팬 미팅에 깜짝 게스트로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본에서 워낙 인기를 얻고 있는 한류스타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 일본 지상파 프로그램을 통틀어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게 바로 한결과 다빈이 출연한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라고 한다.
그러니 다빈을 그 행사장에 등장하기만 해도 팬들의 환호가 예상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연우결>을 방송하고 있는 방송사 측이 시상식 주최 측과 한국 협찬사 측에 솔깃한 제안까지 하면서 다빈의 섭외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한결의 팬 미팅에 깜짝 게스트라니!
다빈은 웬만하면 한결과는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다빈이 끝내 참석을 거절하자 결국, 한국에서 소속사 대표까지 전화를 걸어와 참석을 독려했다.
이렇게까지 주변에서 모두 참석을 요청하니 더는 참석을 못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명분이 없었다. 결국, 다빈은 어쩔 수 없이 참석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빈은 게스트로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몰래 가서 한결의 모습을 지켜보면 어떨까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한결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상태에서 그가 노래하고, 춤추고, 얘기하고, 웃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서.
하지만 이화연과 연인이 된 이후 더할 수 없이 냉정해진 한결을 팬 미팅이라는 공식 석상에서, 아무 감정 없이 웃으며 볼 자신은 없었다.
한결이 자신을 향해 웃고 얘기하면, 그게 진심 같아서…
접어야 하는 마음이 자꾸만 다시 펼쳐지려고 해서…
‘지금 한참 열애에 빠져있는 한결 씨에게 난, 안중에도 없는 사람일 텐데.’
한결을 떠올릴 때마다 같은 답으로 귀결되는 결론임에도, 기울어진 마음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게 다빈 자신도 참 미칠 노릇이었다.
*
행사팀에서는 혹시 한결이나 팬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 다빈에게 행사가 시작된 후 행사장으로 올 것을 요청했다.
행사장 입구와 담벼락에는 한결의 사진과 한글로 팬심 가득한 마음을 적은 각종 플랜카드가 온통 도배되다시피 붙어 있었다.
객석에서 직접 팬 미팅 현장을 지켜보지 않아도, 행사장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함성만 들어도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김한결,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행사 시작 시간에서 30분쯤 지나 도착한 다빈이 행사장 안 대기실로 들어서는데, 복도에서 한결의 노래가 들린다.
[지금도 난 너를 느끼죠. 이렇게 너를 부르는 지금 이 순간도 난 그대가 보여
내일도 난 너를 보겠죠. 내일도 난 너를 듣겠죠. 내일도 모든 게 오늘 하루와 같겠죠.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서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곳에 네가 있어.
어떤가요, 그대
어떤가요, 그대…]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6화 - 유다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담담히 읊조리는 듯 부르는 한결의 노래에
잔뜩 슬픔이 묻어져 나오는 듯하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잔한지, 대기실로 향하던 다빈도 걸음을 멈춰 노래에 빠져들었다.
쳇. 연기력 좋은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노래까지도 아주 애간장을 녹이네! 녹여.
공개 열애 중인 걸 몰랐다면,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 만큼 슬픈 감성이 잔뜩 묻어나는 노래였다.
무대 위. 한결의 노래가 끝나자 조명이 꺼졌다.
팟! 팟! 팟!
곧이어, 무대 위 조명이 다시 켜져, 황홀한 불빛의 조명이 무대 중앙을 비추자, 빠른 비트의 음악이 장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동작, 유연한 몸놀림… 한결의 퍼포먼스가 드디어 시작됐다. 아이돌 그룹 출신인 한결의 댄스 솜씨는 여전했다.
수년을 갈고닦았던 실력은 몸에 배어 한동안 무대 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와…!!!”
팬들의 환호가 점점 더 거세졌다.
뻗는 팔 동작 하나에, 굽히는 발동작 하나에 함성은 이어졌고, 팬들은 열광했다.
무대 위에서 이런 춤을 춰 본 게 언제였던가. 팬들의 환호에 한결의 심장도 주체할 수 없이 뛰었고, 그 사랑을 오롯이 무대 위에서 다시 뿜어냈다.
“와…. 김한결! 김한결! 김한결!”
팬들은 일본식 이름이 아닌, 한결의 이름을 우리말 그대로 외쳐댔다.
드디어 한결의 화려한 댄스가 끝이 났다. 오랜만에 보는 무대 위의 모습에 팬들의 환호 했고, 뜨거운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감사합니다. … 제가 오랜만에 무대에 서서 미숙한 점이 많았을 텐데… 실망하진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아직 일본어가 미숙한 한결의 멘트가 끝나자 무대 위로 올라온 통역이 한결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실망하지 않았냐는 말이 통역되자, 손사래를 해 보이는 팬들.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산다고 했던가.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더니, 나를 사랑해는 주는 팬들이야말로 국경이 없음을 실감하게 했다.
한결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 반응하고 열광하는 팬들. 이들의 뜨거운 환호가 고맙고 감동스러워 한결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곧이어 스크린에 <연우결> 방송분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이미 끝난 방송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방송이 한참 인기를 얻고 이는 중이라 다빈과 한결의 달달한 장면이 나오자 부러움에 “꺅꺅”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무대 위의 한결 역시도 화면을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모두가 환호와 부러움으로 영상을 쳐다보는 와중에, 꾹 다문 입술로 유달리 일그러진 인상으로 영상을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
“이 무대 끝나면 준비한 소품 무대 밖으로 내리고 다음 소품 준비해”
상사로 보이는 스태프가 남자에게 지시하자 남자는 금세 표정을 바꿨다.
“네.”
영상이 끝나자 무대 좌측으로 조명이 옮겨졌고, 사회자가 등장했다.
“단스토 준비시타 에조모 마시타??”
(댄스와 영상은 잘 보셨습니까?)
“기와 시치기오토노 치칸데쓰.”
(다음은 질의응답 시간입니다.)
사회자 옆에 서 있던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팬들에게 입장 전 받아 두었던 질문지가 담긴 상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앙케토 에란데 구다사이”
(질문지 뽑아 주시죠)
한결이 상자에 손을 넣어 질문지 하나를 뽑아 사회자에게 전달했다. 사회자가 팬들을 향해 질문 내용을 읽자, 옆에 있던 통역사가 한결에게 질문 내용을 통역했다.
“평소 촬영이 없을 땐 주로 무얼 하며 지내나요?”
통역자에게서 질문을 들은 한결이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특별할 건 없어요. 운동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공연을 관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팬들을 생각하기도 하죠. 하하핫”
한결의 대답을 통역이 마이크를 대고 통역하자, 마지막 멘트에 팬들 사이에 웃음이 일었다.
다시 사회자가 요청에 한결이 다음 질문지를 뽑았다.
“요즘 가장 관심 가는 게 뭔가요?”
한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음… 사람과의 관계요. 연예계 생활이라는 게 내가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의 오해를 살 수 있고. 그걸 또 쉽게 풀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해서.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한결이 마지막 질문지를 뽑아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노래와 그걸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요?”
“음… 좋아하는 노래라. 들으면 가볍고 즐거워져서 <나랑 결혼해줄래>를 자주 흥얼거리곤 합니다. 그리고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죠.”
그게 화연일거라 짐작한 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나왔지만, 한결은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네. 질의 응답은 이쯤에서 마치고, 다음은 우리 팬들께서 무대를 마련하셨다고 하는데요. 어떤 무댄지 한 번 보실까요?”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여성팬들 10여 명이 올라와, 칼군무를 선보이며 아이돌 시절 한결이 속해있던 그룹이 히트 친 댄스곡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팬들의 무대가 한참 진행되는 동안, 한결은 잠깐 무대 아래로 내려와 목을 축이며 팬들이 꾸미는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아직 못 찾은 거야? 분명히 왔다며. 그런데 어디 갔단 소리야?”
팬들의 무대를 감상하고 있던, 한결의 귀에 “다빈”이라는 이름이 꽂혔다.
“?”
행사를 기획한 박 PD의 심각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조 실장에게 다시 연락해 봐. 이제 곧 다빈 씨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잖아”
“박 PD님 무슨 일입니까?”
한결이 박 PD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 그게 실은… 한결 씨가 알면 안 되는 건데… 오늘 깜짝 게스트로 다빈 씨를 초대했어요. 마침 다빈 씨가 시상식 때문에 일본에 왔다는 소리를 듣고 일본 방송국 측에서 부탁해 왔거든요. 프로그램 홍보도 되니 다빈 씨가 깜짝 등장해 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런데요?”
“그런데 행사 시작하고 30분쯤 후에 조 실장하고 같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모습이 안 보여요. 조 실장도 찾으러 나가고. 원래는 조금 전 영상 보고 난 후 바로 등장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핸드폰은? …핸드폰은 해 보셨어요?”
“핸드폰은 대기실에 두고 갔다고 합니다.”
“핸드폰까지 두고 간 거라면, 멀리 가진 않았다는 얘긴데 그런데도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거라면 지금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일이 아니죠.”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한결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유다빈…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시죠. 조 실장님하고 같이 있는 게 아닌데 연락이 안 되는 거라면…”
무서운 상상에 한결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다빈 씨는 저희가 계속 찾아볼 테니 한결 씨는 얼른 올라가서 마무리하세요.”
머리는 온통 다빈의 걱정으로 가득 차 있건만, 지금 한결은 무대 위로 올라가서 팬들에게 웃음을 보여야 한다.
차마 웃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속내를 표현할 수 없는 이 직업이 이럴 땐 너무나 힘겹고 버겁다.
유다빈… 당신 괜찮은 거지…?
절대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선 안 돼.
내가 행사를 끝내고 내려왔을 때, 당신 꼭 내 앞에 나타나 있어라. 제발…!
***
‘여기가 어디지? 그래 조금 전 화장실을 가다가 어떤 남자한테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었어.’
1시간 전.
“미라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점심도 굶어서, 샌드위치로 허기를 때우고 있던 미라가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래, 같이 가”
“괜찮아.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복도 꺾어서 바로 있던데. 배고플 텐데 넌 샌드위치나 마저 먹고 있어. 금방 화장실만 다녀올게”
“그래, 그럼. 대신에 깜짝 게스트니까 여기 온 거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다녀와.”
“알았어”
미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빈은 대기실 문을 나섰다. 행사장 안에서는 여전히 함성과 탄성이 이어져 복도까지 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빈은 자신이 온 걸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앞을 살피며 천천히 화장실을 향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모른 척하고 있으면 지나가겠지.’ 하던 찰나 음산한 기운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혹시 유다빈 씨?”
내가 여기 온 걸 아직 들키면 안 되는데 어쩌지.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팬일지 모르는데 계속 못 들은 척하고 있을 수 없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빈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내리꽂아 지더니 다빈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든 다빈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손과 발이 묶여 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오늘 행사장에서 쓰였을 소품과 각종 장비, 공구들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봉고차 짐칸이다.
오늘 이곳에는 한결의 공연 외에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를 납치한 게, 여기 현장 스태프?
대체. 나를 왜 납치한 거지? 지금쯤 내가 납치된 게 알려졌을까? 아니면 미라 혼자서 내가 없어진 줄로만 알고 찾고 있는 걸까.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두려움에 굵은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나가야 한다…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 여기는 김한결의 팬 미팅 현장이다. 나 때문에 한국도 아닌 외국에서의 팬 미팅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공포로 덜덜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주저앉히고, 다빈은 묶인 두 발로 문을 쾅쾅 내리찍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주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다빈의 간절한 외침에도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여전히 정적만이 흘렀다.
뉘어 있던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다. 하지만 팔이 몸 뒤로 묶여 있는 통에 팔을 몸을 일으켜 앉기도 쉽지 않았다.
하체에 온 힘을 주고 뒤로 묶인 손으로 바닥을 힘껏 눌러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사람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해.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해. 한결 씨… 나 어떻게 해야 해…”
두려움과 공포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 이 순간, 가장 떠오르는 얼굴 한결. 다빈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한결의 이름만 되뇌었다.
담담히 읊조리는 듯 부르는 한결의 노래에
잔뜩 슬픔이 묻어져 나오는 듯하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잔한지, 대기실로 향하던 다빈도 걸음을 멈춰 노래에 빠져들었다.
쳇. 연기력 좋은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노래까지도 아주 애간장을 녹이네! 녹여.
공개 열애 중인 걸 몰랐다면,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 만큼 슬픈 감성이 잔뜩 묻어나는 노래였다.
무대 위. 한결의 노래가 끝나자 조명이 꺼졌다.
팟! 팟! 팟!
곧이어, 무대 위 조명이 다시 켜져, 황홀한 불빛의 조명이 무대 중앙을 비추자, 빠른 비트의 음악이 장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동작, 유연한 몸놀림… 한결의 퍼포먼스가 드디어 시작됐다. 아이돌 그룹 출신인 한결의 댄스 솜씨는 여전했다.
수년을 갈고닦았던 실력은 몸에 배어 한동안 무대 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와…!!!”
팬들의 환호가 점점 더 거세졌다.
뻗는 팔 동작 하나에, 굽히는 발동작 하나에 함성은 이어졌고, 팬들은 열광했다.
무대 위에서 이런 춤을 춰 본 게 언제였던가. 팬들의 환호에 한결의 심장도 주체할 수 없이 뛰었고, 그 사랑을 오롯이 무대 위에서 다시 뿜어냈다.
“와…. 김한결! 김한결! 김한결!”
팬들은 일본식 이름이 아닌, 한결의 이름을 우리말 그대로 외쳐댔다.
드디어 한결의 화려한 댄스가 끝이 났다. 오랜만에 보는 무대 위의 모습에 팬들의 환호 했고, 뜨거운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감사합니다. … 제가 오랜만에 무대에 서서 미숙한 점이 많았을 텐데… 실망하진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아직 일본어가 미숙한 한결의 멘트가 끝나자 무대 위로 올라온 통역이 한결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실망하지 않았냐는 말이 통역되자, 손사래를 해 보이는 팬들.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산다고 했던가.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더니, 나를 사랑해는 주는 팬들이야말로 국경이 없음을 실감하게 했다.
한결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 반응하고 열광하는 팬들. 이들의 뜨거운 환호가 고맙고 감동스러워 한결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곧이어 스크린에 <연우결> 방송분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이미 끝난 방송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방송이 한참 인기를 얻고 이는 중이라 다빈과 한결의 달달한 장면이 나오자 부러움에 “꺅꺅”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무대 위의 한결 역시도 화면을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모두가 환호와 부러움으로 영상을 쳐다보는 와중에, 꾹 다문 입술로 유달리 일그러진 인상으로 영상을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
“이 무대 끝나면 준비한 소품 무대 밖으로 내리고 다음 소품 준비해”
상사로 보이는 스태프가 남자에게 지시하자 남자는 금세 표정을 바꿨다.
“네.”
영상이 끝나자 무대 좌측으로 조명이 옮겨졌고, 사회자가 등장했다.
“단스토 준비시타 에조모 마시타??”
(댄스와 영상은 잘 보셨습니까?)
“기와 시치기오토노 치칸데쓰.”
(다음은 질의응답 시간입니다.)
사회자 옆에 서 있던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팬들에게 입장 전 받아 두었던 질문지가 담긴 상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앙케토 에란데 구다사이”
(질문지 뽑아 주시죠)
한결이 상자에 손을 넣어 질문지 하나를 뽑아 사회자에게 전달했다. 사회자가 팬들을 향해 질문 내용을 읽자, 옆에 있던 통역사가 한결에게 질문 내용을 통역했다.
“평소 촬영이 없을 땐 주로 무얼 하며 지내나요?”
통역자에게서 질문을 들은 한결이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특별할 건 없어요. 운동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공연을 관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팬들을 생각하기도 하죠. 하하핫”
한결의 대답을 통역이 마이크를 대고 통역하자, 마지막 멘트에 팬들 사이에 웃음이 일었다.
다시 사회자가 요청에 한결이 다음 질문지를 뽑았다.
“요즘 가장 관심 가는 게 뭔가요?”
한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음… 사람과의 관계요. 연예계 생활이라는 게 내가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의 오해를 살 수 있고. 그걸 또 쉽게 풀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해서.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한결이 마지막 질문지를 뽑아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노래와 그걸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요?”
“음… 좋아하는 노래라. 들으면 가볍고 즐거워져서 <나랑 결혼해줄래>를 자주 흥얼거리곤 합니다. 그리고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죠.”
그게 화연일거라 짐작한 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나왔지만, 한결은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네. 질의 응답은 이쯤에서 마치고, 다음은 우리 팬들께서 무대를 마련하셨다고 하는데요. 어떤 무댄지 한 번 보실까요?”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여성팬들 10여 명이 올라와, 칼군무를 선보이며 아이돌 시절 한결이 속해있던 그룹이 히트 친 댄스곡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팬들의 무대가 한참 진행되는 동안, 한결은 잠깐 무대 아래로 내려와 목을 축이며 팬들이 꾸미는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아직 못 찾은 거야? 분명히 왔다며. 그런데 어디 갔단 소리야?”
팬들의 무대를 감상하고 있던, 한결의 귀에 “다빈”이라는 이름이 꽂혔다.
“?”
행사를 기획한 박 PD의 심각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조 실장에게 다시 연락해 봐. 이제 곧 다빈 씨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잖아”
“박 PD님 무슨 일입니까?”
한결이 박 PD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 그게 실은… 한결 씨가 알면 안 되는 건데… 오늘 깜짝 게스트로 다빈 씨를 초대했어요. 마침 다빈 씨가 시상식 때문에 일본에 왔다는 소리를 듣고 일본 방송국 측에서 부탁해 왔거든요. 프로그램 홍보도 되니 다빈 씨가 깜짝 등장해 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런데요?”
“그런데 행사 시작하고 30분쯤 후에 조 실장하고 같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모습이 안 보여요. 조 실장도 찾으러 나가고. 원래는 조금 전 영상 보고 난 후 바로 등장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핸드폰은? …핸드폰은 해 보셨어요?”
“핸드폰은 대기실에 두고 갔다고 합니다.”
“핸드폰까지 두고 간 거라면, 멀리 가진 않았다는 얘긴데 그런데도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거라면 지금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일이 아니죠.”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한결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유다빈…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시죠. 조 실장님하고 같이 있는 게 아닌데 연락이 안 되는 거라면…”
무서운 상상에 한결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다빈 씨는 저희가 계속 찾아볼 테니 한결 씨는 얼른 올라가서 마무리하세요.”
머리는 온통 다빈의 걱정으로 가득 차 있건만, 지금 한결은 무대 위로 올라가서 팬들에게 웃음을 보여야 한다.
차마 웃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속내를 표현할 수 없는 이 직업이 이럴 땐 너무나 힘겹고 버겁다.
유다빈… 당신 괜찮은 거지…?
절대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선 안 돼.
내가 행사를 끝내고 내려왔을 때, 당신 꼭 내 앞에 나타나 있어라. 제발…!
***
‘여기가 어디지? 그래 조금 전 화장실을 가다가 어떤 남자한테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었어.’
1시간 전.
“미라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점심도 굶어서, 샌드위치로 허기를 때우고 있던 미라가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래, 같이 가”
“괜찮아.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복도 꺾어서 바로 있던데. 배고플 텐데 넌 샌드위치나 마저 먹고 있어. 금방 화장실만 다녀올게”
“그래, 그럼. 대신에 깜짝 게스트니까 여기 온 거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다녀와.”
“알았어”
미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빈은 대기실 문을 나섰다. 행사장 안에서는 여전히 함성과 탄성이 이어져 복도까지 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빈은 자신이 온 걸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앞을 살피며 천천히 화장실을 향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모른 척하고 있으면 지나가겠지.’ 하던 찰나 음산한 기운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혹시 유다빈 씨?”
내가 여기 온 걸 아직 들키면 안 되는데 어쩌지.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팬일지 모르는데 계속 못 들은 척하고 있을 수 없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빈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내리꽂아 지더니 다빈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든 다빈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손과 발이 묶여 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오늘 행사장에서 쓰였을 소품과 각종 장비, 공구들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봉고차 짐칸이다.
오늘 이곳에는 한결의 공연 외에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를 납치한 게, 여기 현장 스태프?
대체. 나를 왜 납치한 거지? 지금쯤 내가 납치된 게 알려졌을까? 아니면 미라 혼자서 내가 없어진 줄로만 알고 찾고 있는 걸까.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두려움에 굵은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나가야 한다…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 여기는 김한결의 팬 미팅 현장이다. 나 때문에 한국도 아닌 외국에서의 팬 미팅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공포로 덜덜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주저앉히고, 다빈은 묶인 두 발로 문을 쾅쾅 내리찍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주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다빈의 간절한 외침에도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여전히 정적만이 흘렀다.
뉘어 있던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다. 하지만 팔이 몸 뒤로 묶여 있는 통에 팔을 몸을 일으켜 앉기도 쉽지 않았다.
하체에 온 힘을 주고 뒤로 묶인 손으로 바닥을 힘껏 눌러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사람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해.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해. 한결 씨… 나 어떻게 해야 해…”
두려움과 공포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 이 순간, 가장 떠오르는 얼굴 한결. 다빈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한결의 이름만 되뇌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7화 - 납치
“정신 차리자 유다빈. 한결 씨를 다시 보려면 이곳에서 안전하게 나가야 해. 그러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처한 상황에 집중했다.
문을 열려면 손부터 풀어야 한다. 손목에 온 힘을 주고 손을 비틀었다. 그러나 빠지질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다시 손목을 비틀고는 매듭에서 손목을 빼려 힘을 줬다. 하지만 손목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매어진 매듭이 손목을 눌러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해졌다.
그때 짐칸 한쪽에 공구함같이 생긴 통이 눈에 들어왔다. 다빈은 그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등을 지고 앉아 뒤로 묶인 손을 움직여 공구함을 열었다.
공구함에는 다행히 여러 가지 공구들이 들어 있었다. 안을 뒤져보니 공구용 커터 칼이 들어 있다.
다빈은 얼른 등을 돌려, 묶인 손으로 칼을 꺼내 양손 사이에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묶인 매듭을 자르기 시작했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칼날의 움직임에 손목과 손바닥이 베였다. 하지만 공포 때문에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슥슥슥” 온 힘을 다해 칼날을 움직였다.
***
다시 무대 위에 오른 한결은 예정되었던 순서를 소화하며, 차질 없이 팬 미팅을 마무리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빈 씨는? 찾았어?”
내려오자마자 한결은 매니저 동호에게 물었다.
“아뇨, …아직 이에요, 형.”
“경찰에 신고는?”
“그게 우리나라도 아니고, 괜히 가십거리에 오를 수도 있다고 조 실장님이 CCTV부터 먼저 확인하자고 하셔서. 지금 박 PD님이랑 같이 보안 실로 가서 CCTV 확인하고 계세요.”
“휴우…!!”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한결은 마른 숨을 내뱉었다.
“내 전화기 줘봐”
동호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한결은 보안 실에서 CCTV를 확인하고 있다는 미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실장님. CCTV에 뭐 좀 잡혔나요?”
수화기 너머 미라의 답변에 한결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진다.
“뭐라고요! 여기 행사 스태프라구요?! 그래서 지금 그 자식은 어디 있습니까?”
- 여기 담당 팀장이 여기 현지 대여업체로 심부름을 보냈다네요. 그거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라고 했다니까 아마 그쪽으로 이동한 것 같아서 박 PD님하고 그 업체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쪽이 어딥니까. 주소 찍어주세요. 저도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 한결 씨까지 움직이면 일이 커질 수 있어요. 담당 팀장 말로는 평소 문제가 있던 사람은 아니라고 해요. 그 사람 움직인 지도 얼마 안 됐다고 하니까, 바로 뒤쫓을 수 있어요. 그러니 한결 씨는 그냥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 그럴 순 없습니다.!!”
다빈이 지금 납치를 당했다. 그것도 나의 팬 미팅 행사에 게스트로 출연하러 왔다가. 그런데 어떻게 잠자코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제 행사에 왔다가 그런 일을 당했어요. 그냥 이대로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저 바로 출발합니다. 위치, 문자로 찍어주세요”
한결은 일이 커질까 우려해 만류하는 미라의 얘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동호야 차 가져와.”
***
갖은 애를 쓰며, 뒤로 묶인 손의 끈을 자르고 있었지만, 끈은 쉽사리 잘리지 않았다.
다빈의 얼굴에 땀이 흘러 이마를 흥건하게 적셨다.
그때 인적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차 문이 드르르 열렸다.
다빈은 순간, 의식이 돌아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남자는 차에 오르며 다빈을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다, 한쪽 눈썹을 움찔하더니 별다른 행동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덜컹덜컹”
차가 출발한 모양이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처음 겪는 공포에 다빈은 숨통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자칫 숨소리라도 크게 새어 나와 그 소리라도 들릴까 작은 숨을 내뱉는 심장은 이미 제 심장이 아닌 듯했다.
‘더 이상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희망을 버리지 마! 유다빈!’
감은 다빈의 눈꺼풀이 공포로 파르르 떨려왔다.
그렇게 10여 분쯤 달렸을까.
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 섰다.
‘왜? 멈춘 거지? 나를 여기서 내려줘요. 그럼 다 용서해 줄게요. 어떤 죄도 묻지 않을게요. 그러니 제발 나를 놓아주세요’
다빈은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내려!!”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정신 차린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내리라구!”
트렁크 뒷문을 연 남자가 다빈을 끌어내렸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져 있었고, 차량이 많지 않은 제법 한적한 길가 어디쯤이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너 때문에! 우리 화연 씨가 불행하니까!”
뭐? 이화연? 이화연 때문에…?!
남자의 눈빛이 일그러지며, 울분을 토해냈다.
“네가 있으면 우리 화연 씨가 불행해. 오늘 이 자리도 네가 아니라 우리 화연 씨가 있어야 하는 자리라고”
이런 사람일수록 차분하게 대해야 한다. 같이 흥분하면 상대를 더욱 자극할 뿐이다.
다빈은 목소리를 차분히 낮추고, 최대한 두려움이 배제된 톤으로 입을 열었다.
“이화연 씨 팬이신가 보네요. 제가 여기에 온 건 한결 씨랑 같이 한 방송 때문이에요. 어디까지나 일 때문이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어요. 이건 이화연 씨도 이해할 거에요. 지금 당신이 이러는 거 이화연 씨에게도 좋지 않아요?”
화연에게 안 좋다는 말이 막혀 들었는지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화연 씨 팬이 이화연을 걱정해 납치를 벌였다. 이게 알려지면 이화연 씨는 괜찮을까요?”
남자가 다빈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팬의 입장에서 이러는 거겠지만, 화연 씨에게는 심각한 가십거리 하나를 얹혀주는 거에요. 그러니 날 그냥 돌려보내 줘요. 당신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을게요”
“……”
애초에 다빈에게 겁만 주려 했던 것이다. 다시는 한결의 옆자리가 제 자리인양 나서지 말라고. 남자의 눈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다시는! 우리 화연 씨가 있어야 할 김한결의 옆자리에 네가 있지마.”
“그래요…. 그럴게요. 원하는 게 그거라면 굳이 있으라고 해도 있을 이유… 더는 없어요”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나지만. 다음에 또 우리 화연 씨 자리 넘보면… 그래서 우리 화연 씨가 슬퍼하게 되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명심해”
“네.”
처음부터 이 남자 다빈을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던 듯해 보였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이 화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런 일까지 벌인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당신 신경 쓰는 일…”
“빵! 빵!”
다빈이 채 말을 끝내기 전, 다급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이어 차량 두 대가 나란히 들어오더니 남자의 차 뒤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한결이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빈을 향해서 뛰어 왔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다빈을 보니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손이 묶인 채 남자 앞에서 떨고 있는, 다빈을 한결이 그대로 끌어안았다. 가녀린 어깨가 한결의 품에서 심하게 떨려 왔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서 다행이야…”
낮게 울리는 한결의 따뜻한 목소리에, 다빈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결 씨가 여길… 어떻게…”
고마워… 무사해 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만약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난 아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거야. 유다빈.
얼마나 그렇게 다빈을 안고 있었을까.
한결이 자신의 품속에서 다빈을 떨어뜨리고는 다빈의 모습을 살폈다.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묶여 있던 손을 풀려고 애썼는지 핏자국이 손바닥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이 자식!!
다빈의 손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니 한결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한결은 그제야 겁먹은 듯한 눈으로 한결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 왔다.
한결은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향해 세차게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맞은 남자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일어나 이 자식”
한결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리려는데, 뒤따라 온 박 PD와 미라가 한결을 말리고 나섰다.
“한결 씨! 이쪽은 내가 정리할게요. 누가 보는 사람 없을 때 한결 씨랑 다빈 씨는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게 좋겠어요”
박 PD가 한결의 팔을 붙잡았다.
“맞아요 한결 씨. 여기서 더 있다간 괜히 얘깃거리만 더 만들어 언론에 기삿거리만 제공할 거에요. 여기서 정리하고 뒷수습은 박 PD님께 맡겨요. 어차피 이 사람 이번 행사 스태프니까 박 PD님이 처리하는 게 조용히 마무리하는 방법일 거예요.”
고작 주먹 한 대밖에 못 날렸다. 저놈을 죽을 만큼 패주고 다빈에게 싹싹 비는 모습을 봐야 화가 풀릴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보는 눈이 있는 자리다.
- 다빈 씨를 마주쳐도 괜히 친절하게 굴거나 하지 마. 여기 말 많은 곳이잖아. 언제 어디서든 보는 눈을 조심하라고
시상식을 위해 사무실을 나올 때 했던, 은표의 당부가 생각나 한결은 불끈 쥔 주먹을 내렸다.
젠장!
***
박 PD님 뒤처리를 위해 그곳에 남고, 한결의 차를 다빈과 미라가 숙소를 향했다.
조금 전 한결을 보고 나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가 이토록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근데 이 남자 차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말 한마디가 없다.
미라의 말처럼 자신의 팬 미팅에서 불미스런 일이 생긴 거에 대한 책임감으로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아니면… 다빈을 걱정해 쫓아온 걸까.
다빈은 새삼 한결의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렇더라도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입이라도 떼고, 무슨 말이라도 걸어주면 자연스럽게 물어볼 텐데 지금 한결은 더할 수 없이 냉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어 쉽사리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어느새 차는 달려 다빈이 묵는 호텔에 다다랐다.
“정신 차리자 유다빈. 한결 씨를 다시 보려면 이곳에서 안전하게 나가야 해. 그러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처한 상황에 집중했다.
문을 열려면 손부터 풀어야 한다. 손목에 온 힘을 주고 손을 비틀었다. 그러나 빠지질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다시 손목을 비틀고는 매듭에서 손목을 빼려 힘을 줬다. 하지만 손목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매어진 매듭이 손목을 눌러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해졌다.
그때 짐칸 한쪽에 공구함같이 생긴 통이 눈에 들어왔다. 다빈은 그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등을 지고 앉아 뒤로 묶인 손을 움직여 공구함을 열었다.
공구함에는 다행히 여러 가지 공구들이 들어 있었다. 안을 뒤져보니 공구용 커터 칼이 들어 있다.
다빈은 얼른 등을 돌려, 묶인 손으로 칼을 꺼내 양손 사이에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묶인 매듭을 자르기 시작했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칼날의 움직임에 손목과 손바닥이 베였다. 하지만 공포 때문에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슥슥슥” 온 힘을 다해 칼날을 움직였다.
***
다시 무대 위에 오른 한결은 예정되었던 순서를 소화하며, 차질 없이 팬 미팅을 마무리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빈 씨는? 찾았어?”
내려오자마자 한결은 매니저 동호에게 물었다.
“아뇨, …아직 이에요, 형.”
“경찰에 신고는?”
“그게 우리나라도 아니고, 괜히 가십거리에 오를 수도 있다고 조 실장님이 CCTV부터 먼저 확인하자고 하셔서. 지금 박 PD님이랑 같이 보안 실로 가서 CCTV 확인하고 계세요.”
“휴우…!!”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한결은 마른 숨을 내뱉었다.
“내 전화기 줘봐”
동호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한결은 보안 실에서 CCTV를 확인하고 있다는 미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실장님. CCTV에 뭐 좀 잡혔나요?”
수화기 너머 미라의 답변에 한결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진다.
“뭐라고요! 여기 행사 스태프라구요?! 그래서 지금 그 자식은 어디 있습니까?”
- 여기 담당 팀장이 여기 현지 대여업체로 심부름을 보냈다네요. 그거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라고 했다니까 아마 그쪽으로 이동한 것 같아서 박 PD님하고 그 업체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쪽이 어딥니까. 주소 찍어주세요. 저도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 한결 씨까지 움직이면 일이 커질 수 있어요. 담당 팀장 말로는 평소 문제가 있던 사람은 아니라고 해요. 그 사람 움직인 지도 얼마 안 됐다고 하니까, 바로 뒤쫓을 수 있어요. 그러니 한결 씨는 그냥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 그럴 순 없습니다.!!”
다빈이 지금 납치를 당했다. 그것도 나의 팬 미팅 행사에 게스트로 출연하러 왔다가. 그런데 어떻게 잠자코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제 행사에 왔다가 그런 일을 당했어요. 그냥 이대로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저 바로 출발합니다. 위치, 문자로 찍어주세요”
한결은 일이 커질까 우려해 만류하는 미라의 얘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동호야 차 가져와.”
***
갖은 애를 쓰며, 뒤로 묶인 손의 끈을 자르고 있었지만, 끈은 쉽사리 잘리지 않았다.
다빈의 얼굴에 땀이 흘러 이마를 흥건하게 적셨다.
그때 인적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차 문이 드르르 열렸다.
다빈은 순간, 의식이 돌아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남자는 차에 오르며 다빈을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다, 한쪽 눈썹을 움찔하더니 별다른 행동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덜컹덜컹”
차가 출발한 모양이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처음 겪는 공포에 다빈은 숨통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자칫 숨소리라도 크게 새어 나와 그 소리라도 들릴까 작은 숨을 내뱉는 심장은 이미 제 심장이 아닌 듯했다.
‘더 이상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희망을 버리지 마! 유다빈!’
감은 다빈의 눈꺼풀이 공포로 파르르 떨려왔다.
그렇게 10여 분쯤 달렸을까.
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 섰다.
‘왜? 멈춘 거지? 나를 여기서 내려줘요. 그럼 다 용서해 줄게요. 어떤 죄도 묻지 않을게요. 그러니 제발 나를 놓아주세요’
다빈은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내려!!”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정신 차린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내리라구!”
트렁크 뒷문을 연 남자가 다빈을 끌어내렸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져 있었고, 차량이 많지 않은 제법 한적한 길가 어디쯤이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너 때문에! 우리 화연 씨가 불행하니까!”
뭐? 이화연? 이화연 때문에…?!
남자의 눈빛이 일그러지며, 울분을 토해냈다.
“네가 있으면 우리 화연 씨가 불행해. 오늘 이 자리도 네가 아니라 우리 화연 씨가 있어야 하는 자리라고”
이런 사람일수록 차분하게 대해야 한다. 같이 흥분하면 상대를 더욱 자극할 뿐이다.
다빈은 목소리를 차분히 낮추고, 최대한 두려움이 배제된 톤으로 입을 열었다.
“이화연 씨 팬이신가 보네요. 제가 여기에 온 건 한결 씨랑 같이 한 방송 때문이에요. 어디까지나 일 때문이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어요. 이건 이화연 씨도 이해할 거에요. 지금 당신이 이러는 거 이화연 씨에게도 좋지 않아요?”
화연에게 안 좋다는 말이 막혀 들었는지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화연 씨 팬이 이화연을 걱정해 납치를 벌였다. 이게 알려지면 이화연 씨는 괜찮을까요?”
남자가 다빈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팬의 입장에서 이러는 거겠지만, 화연 씨에게는 심각한 가십거리 하나를 얹혀주는 거에요. 그러니 날 그냥 돌려보내 줘요. 당신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을게요”
“……”
애초에 다빈에게 겁만 주려 했던 것이다. 다시는 한결의 옆자리가 제 자리인양 나서지 말라고. 남자의 눈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다시는! 우리 화연 씨가 있어야 할 김한결의 옆자리에 네가 있지마.”
“그래요…. 그럴게요. 원하는 게 그거라면 굳이 있으라고 해도 있을 이유… 더는 없어요”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나지만. 다음에 또 우리 화연 씨 자리 넘보면… 그래서 우리 화연 씨가 슬퍼하게 되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명심해”
“네.”
처음부터 이 남자 다빈을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던 듯해 보였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이 화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런 일까지 벌인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당신 신경 쓰는 일…”
“빵! 빵!”
다빈이 채 말을 끝내기 전, 다급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이어 차량 두 대가 나란히 들어오더니 남자의 차 뒤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한결이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빈을 향해서 뛰어 왔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다빈을 보니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손이 묶인 채 남자 앞에서 떨고 있는, 다빈을 한결이 그대로 끌어안았다. 가녀린 어깨가 한결의 품에서 심하게 떨려 왔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서 다행이야…”
낮게 울리는 한결의 따뜻한 목소리에, 다빈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결 씨가 여길… 어떻게…”
고마워… 무사해 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만약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난 아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거야. 유다빈.
얼마나 그렇게 다빈을 안고 있었을까.
한결이 자신의 품속에서 다빈을 떨어뜨리고는 다빈의 모습을 살폈다.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묶여 있던 손을 풀려고 애썼는지 핏자국이 손바닥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이 자식!!
다빈의 손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니 한결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한결은 그제야 겁먹은 듯한 눈으로 한결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 왔다.
한결은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향해 세차게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맞은 남자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일어나 이 자식”
한결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리려는데, 뒤따라 온 박 PD와 미라가 한결을 말리고 나섰다.
“한결 씨! 이쪽은 내가 정리할게요. 누가 보는 사람 없을 때 한결 씨랑 다빈 씨는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게 좋겠어요”
박 PD가 한결의 팔을 붙잡았다.
“맞아요 한결 씨. 여기서 더 있다간 괜히 얘깃거리만 더 만들어 언론에 기삿거리만 제공할 거에요. 여기서 정리하고 뒷수습은 박 PD님께 맡겨요. 어차피 이 사람 이번 행사 스태프니까 박 PD님이 처리하는 게 조용히 마무리하는 방법일 거예요.”
고작 주먹 한 대밖에 못 날렸다. 저놈을 죽을 만큼 패주고 다빈에게 싹싹 비는 모습을 봐야 화가 풀릴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보는 눈이 있는 자리다.
- 다빈 씨를 마주쳐도 괜히 친절하게 굴거나 하지 마. 여기 말 많은 곳이잖아. 언제 어디서든 보는 눈을 조심하라고
시상식을 위해 사무실을 나올 때 했던, 은표의 당부가 생각나 한결은 불끈 쥔 주먹을 내렸다.
젠장!
***
박 PD님 뒤처리를 위해 그곳에 남고, 한결의 차를 다빈과 미라가 숙소를 향했다.
조금 전 한결을 보고 나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가 이토록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근데 이 남자 차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말 한마디가 없다.
미라의 말처럼 자신의 팬 미팅에서 불미스런 일이 생긴 거에 대한 책임감으로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아니면… 다빈을 걱정해 쫓아온 걸까.
다빈은 새삼 한결의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렇더라도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입이라도 떼고, 무슨 말이라도 걸어주면 자연스럽게 물어볼 텐데 지금 한결은 더할 수 없이 냉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어 쉽사리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어느새 차는 달려 다빈이 묵는 호텔에 다다랐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8화 - 연인 사이를 의심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차에서 내린 한결이 다빈이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 고마웠어… 한결 씨”
고맙다니. 당신을 잃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내가 고마워. 무사해 줘서. 지금은 그 고마움을 한마디도 밖으로 꺼낼 수 없지만…
언제고… 이런 마음 하나하나까지 다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아무 일 없이 날 좀 기다려 줘.
“고마워할 건 없고. 내 행사에 게스트로 와준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지.”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그게 오늘 온… 이유였어?
조금 전, 당신이 찾아와 주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얼마나 안심이 됐든지 당신은 상상조차 못 하겠지. 내게 당신은 이미 그 정도의 크기인데…
당신에게 난… 그저 최소한의 예의 정도를… 지키면 되는 동료이구나…
한결의 말에 가슴 한편이 바늘에 찔리는 듯 아려왔다.
“그래. 우리 동료였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내가 잠시 잊을 뻔했네.”
“……”
“어쨌든 데려다줘서 고마워.”
다빈은 서운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한결에게서 몸을 돌려 호텔 안으로 향했다.
휴우…
뒤돌아 들어가는 다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결의 마음이 한없이 복잡하다.
***
팬 미팅 행사장에서 다빈을 납치한 남자는 이날 행사 스태프로 행사 때 <연우결> 영상이 나오면서 한결과 다빈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순간 이성을 잃었다고 한다.
평소 이화연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던 남자는 다빈의 영상을 보면서, 화연이 가져야 할 웃음을 빼앗아간 것 같은 기분에 분노가 일었다.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던 다빈이 현장에 있는 걸 보고, 어떻게든 다빈이 이 무대에 오르지 않게 하려고 다빈을 납치했다고 설명했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 웃으며 한결의 미소와 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아야 할 대상은 다빈이 아니라 화연이었다고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다빈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냥 행사가 끝나는 동안만 붙잡아두고 더는 한결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게 겁만 줄 생각이었다고. 자신의 그런 행동이 화연에게 오히려 누가 될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했다고.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한결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경찰에 신고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지만, 다빈 측은 이제 제대로 주연급으로 발돋움했는데, 괜한 입방아에 오르느니 조용히 무마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길 원했다.
결국, 박 PD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며, 차후에 다시 이런 일을 벌일 시 어떠한 법적 책임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를 받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
일본에서의 사건은 관계자들만 아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되었고, 다빈은 며칠간의 휴식을 더 가진 후, 귀국했다.
사무실에 들렀더니 시나리오가 제법 많이 들어와 있었다.
드라마가 대단한 사랑을 받으면서, 출연자 중 단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 다빈을 캐스팅하려고, 드라마 종영 전부터 시나리오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미라가 그 중, 다빈의 이미지를 잘 살릴 수 있는 시나리오 몇 개를 골라 다빈에게 넘겼다.
“너 영화 하고 싶댔지?”
데뷔 이후, 제대로 영화에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한 적이 없다. 소소한 조연으로는 출연하긴 했어도.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돈을 내고 보러 와야 하는 일명 ‘티켓파워’를 필요로 하기에 관객 흡입력이 있는 배우가 아니면 쉽게 비중 있는 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다빈은 이렇게 뜨기 전, 곧잘 미라에게 괜찮은 영화 한 작품 정도는 프로필로 갖고 싶다는 소리를 종종 해 왔었다.
이 바닥 일이라는 게 그렇게 애쓰고 노력할 때는 전혀 기회가 안 오더니, 드라마로 일약 국민 여배우로 뜨고 나니, 한 번만 출연해 달라며 여기저기서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가장 핫하고 이슈 몰이 할 때 데려가 그 덕에 장사 좀 해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작품도 있었지만.
미라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받은 다빈은 그날로 집으로 들어가 꼼꼼히 검토했다. 뭐,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중 한 작품이 유난히 다빈의 마음에 와 닿았다. <모태솔로 탈출기>!
아직은 무거운 역할보다는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시작하고 싶기도 했고, 좀 밝게 사랑하는 작품을 하면서 기분도 전환하고 싶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맡은 배역에 몰입하다 보면 극 중 배역에 빠져 기분이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처럼 마음이 허할 때, 로맨스 영화를 촬영하다 보면 기분도 좀 밝아질 것 같았다.
그때 울리는 전화벨.
“여보세요…”
“일본에서 사고가 있었다며?”
선우였다.
“조용히 덮기로 했는데… 소문도 빠르네.”
“행사 진행하던 회사가 우리 회사랑도 여러 번 같이 작업했던 회사라… 그쪽 대표와 다른 만났다가 우연히 들었어.”
“아아… ”
“많이 놀랐겠네… 지금은 괜찮고?”
“응. 이화연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지 나한테 해코지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뭐 이렇게 자기 암시하며 잊으려 노력하고 있어.”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차기작은 좀 살펴보고 있어?”
“응. 안 그래도 미라가 넘겨준 시나리오 몇 개 보고 있던 참이야.”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는 있고?”
“응. 하나 있기는 해. 좀 밝은 게 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런 게 들어왔네”
“제목이 뭐야?”
“<모태솔로 탈출기>! 시나리오 제목 되면 아나?”
“후훗. 네가 그거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어? 이 시나리오 아나 보네”
“하아. 얘가 누누이 얘기해도 자꾸만 나를 띄엄띄엄 보네… 그 작품 우리 회사서 제작하는 거야”
“아, 정말?”
“여배우님… 그러니까 이 제작자 안목 믿고 출연 결정 하셔도 크게 손해날 일은 없을 겁니다. 못해도 중박은 될 테니.”
사실 이 작품은 선우가 일부러 한결과 다빈을 위해서 고른 작품이다.
이제는 옛사랑이 된 다빈이지만, 그녀의 사랑을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둘이 한 작품에 출연하면 지금의 상황도 의외의 방법으로 해결책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사실, 그 작품 너를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
한결 측에서는 다행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조만간 시간 한 번 내. 감독이랑 PD랑 해서 미팅 일정 잡아볼 테니까”
“응. 그럴게. 그런데 남자주인공은 결정됐어?”
지금 말해줘도 될까, 계약 후 상대 배우를 밝혀도 될 문제였다.
자칫 지금 알게 되어 출연을 망설이기라도 할까 싶어 고민하다, 그래도 솔직히 말해주는 쪽을 택했다.
“…김한결! …불편…하니?”
“…아니 뭐… 그럴 이유가 없잖아. 불편하긴.”
다빈이 마음을 속인다. 그 마음이 투명해서 다 보인다고 해도, 절대 아니라고. 괜찮다고. 아무 사이 아니라고…
“나한텐 안 속여도 돼. 너랑 김한결 편치 않은 사이란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아냐. 내가 안 편할 게 뭐 있어. 김한결 애인 있잖아. 난 그냥 그 <연우결> 덕분에 뜬 거로 만족해”
공개연인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김한결도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상태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을 다빈이 다 보인다.
‘이제 사랑하고, 사랑받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둘이 서로 한 발짝도 더 다가가지 못하고 왜 그러고만 있는 거야.‘
***
사무실에 들른 화연이 대표실에서 은표를 기다리는 중이다.
무심히 핸드폰을 이리저리 터치하고 있다가 소파 테이블에 놓인 대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모태솔로 탈출기?”
화연은 은표를 기다리는 동안 시나리오는 읽어 볼까 싶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화연이 한참 대본을 읽고 있는데 은표가 들어와 앉는다.
“아, 그 대본 보고 있었구나.”
“재밌는데요. 근데 이거 누구한테 들어온 거에요?”
“응… 한결이. 아직 계약은 안 했지만, 한결이도 거의 결정한 상태야.”
무심코 보던 대본이었지만, 한결이 출연한다는 소리에 화연의 귀가 솔깃해진다.
“여주인공은요?”
“글쎄. 아직 물색 중인가 보던데. 제작사 측에서 의중에 둔 여배우가 있다고는 하는 것 같은데 며칠 뒤에 미팅해 보면 알겠지!”
“오빠… 이거… 제가 하면 안 돼요?”
연인 선언 이후, 되려 예전보다 더 서먹서먹해진 사이가 영 마음에 걸려, 함께 작품이라도 하게 되면 예전처럼 다시 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네가?”
“네. 제작사 측에서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공개 연인인 저희가 동반 출연한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이슈가 될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긴 하지.”
“그러니까 오빠가 얘기 좀 해 주세요.”
“음… 글쎄… 생각 좀 해 보자.”
“오빠… 저 이 작품 하고 싶어요. 할 수 있게 오빠가 좀 도와주세요. 한결 씨 계약 조건으로, 제가 같이 출연하는 조건 내걸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잖아요.”
대세 김한결이 차기작으로 선택만 해준다면 제작사나 투자사 측에서 웬만한 조건은 다 수락할 것이다. 그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흥행은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일 테니. 그러니 한결의 출연 조건에 다빈의 출연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화연 역시도 최근 꽤 주목받고 있는 신예다. 게다가 한결과의 연인 선언 이후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둘의 연인 선언 이후, 화연은 김한결이 사랑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보태지면서 CF나 인터뷰 요청도 훨씬 늘었다.
“뭐, 너 정도면 그쪽에서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것보다 한결이가 수락하려나”
“한결 씨가 저랑 하는 걸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후훗. 아시잖아요. 저랑 한결 씨 예전부터 친한 거.”
은표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근데 너… 이 작품 굳이 하려는 이유가 뭐야?”
이유는 오직 하나. 한결. 그가 출연하기 때문이었지만 화연은 그런 이유까지 다 말하고 싶진 않았다.
“대…. 대본이 좋잖아요… 그동안 너무 청순 쪽으로만 가서 이미지도 좀 바꾸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알았다. 김 감독한테 연락해 둘게”
“와… 오빠 감사해요…”
***
화연이 돌아가고 나자 홍보팀 최 실장이 은표 방에 들어섰다.
“대표님…”
“응”
“요즘 인터넷에서 한결 씨랑 화연 씨 연인 사이를 의심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은표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차에서 내린 한결이 다빈이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 고마웠어… 한결 씨”
고맙다니. 당신을 잃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내가 고마워. 무사해 줘서. 지금은 그 고마움을 한마디도 밖으로 꺼낼 수 없지만…
언제고… 이런 마음 하나하나까지 다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아무 일 없이 날 좀 기다려 줘.
“고마워할 건 없고. 내 행사에 게스트로 와준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지.”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그게 오늘 온… 이유였어?
조금 전, 당신이 찾아와 주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얼마나 안심이 됐든지 당신은 상상조차 못 하겠지. 내게 당신은 이미 그 정도의 크기인데…
당신에게 난… 그저 최소한의 예의 정도를… 지키면 되는 동료이구나…
한결의 말에 가슴 한편이 바늘에 찔리는 듯 아려왔다.
“그래. 우리 동료였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내가 잠시 잊을 뻔했네.”
“……”
“어쨌든 데려다줘서 고마워.”
다빈은 서운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한결에게서 몸을 돌려 호텔 안으로 향했다.
휴우…
뒤돌아 들어가는 다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결의 마음이 한없이 복잡하다.
***
팬 미팅 행사장에서 다빈을 납치한 남자는 이날 행사 스태프로 행사 때 <연우결> 영상이 나오면서 한결과 다빈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순간 이성을 잃었다고 한다.
평소 이화연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던 남자는 다빈의 영상을 보면서, 화연이 가져야 할 웃음을 빼앗아간 것 같은 기분에 분노가 일었다.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던 다빈이 현장에 있는 걸 보고, 어떻게든 다빈이 이 무대에 오르지 않게 하려고 다빈을 납치했다고 설명했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 웃으며 한결의 미소와 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아야 할 대상은 다빈이 아니라 화연이었다고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다빈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냥 행사가 끝나는 동안만 붙잡아두고 더는 한결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게 겁만 줄 생각이었다고. 자신의 그런 행동이 화연에게 오히려 누가 될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했다고.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한결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경찰에 신고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지만, 다빈 측은 이제 제대로 주연급으로 발돋움했는데, 괜한 입방아에 오르느니 조용히 무마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길 원했다.
결국, 박 PD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며, 차후에 다시 이런 일을 벌일 시 어떠한 법적 책임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를 받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
일본에서의 사건은 관계자들만 아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되었고, 다빈은 며칠간의 휴식을 더 가진 후, 귀국했다.
사무실에 들렀더니 시나리오가 제법 많이 들어와 있었다.
드라마가 대단한 사랑을 받으면서, 출연자 중 단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 다빈을 캐스팅하려고, 드라마 종영 전부터 시나리오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미라가 그 중, 다빈의 이미지를 잘 살릴 수 있는 시나리오 몇 개를 골라 다빈에게 넘겼다.
“너 영화 하고 싶댔지?”
데뷔 이후, 제대로 영화에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한 적이 없다. 소소한 조연으로는 출연하긴 했어도.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돈을 내고 보러 와야 하는 일명 ‘티켓파워’를 필요로 하기에 관객 흡입력이 있는 배우가 아니면 쉽게 비중 있는 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다빈은 이렇게 뜨기 전, 곧잘 미라에게 괜찮은 영화 한 작품 정도는 프로필로 갖고 싶다는 소리를 종종 해 왔었다.
이 바닥 일이라는 게 그렇게 애쓰고 노력할 때는 전혀 기회가 안 오더니, 드라마로 일약 국민 여배우로 뜨고 나니, 한 번만 출연해 달라며 여기저기서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가장 핫하고 이슈 몰이 할 때 데려가 그 덕에 장사 좀 해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작품도 있었지만.
미라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받은 다빈은 그날로 집으로 들어가 꼼꼼히 검토했다. 뭐,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중 한 작품이 유난히 다빈의 마음에 와 닿았다. <모태솔로 탈출기>!
아직은 무거운 역할보다는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시작하고 싶기도 했고, 좀 밝게 사랑하는 작품을 하면서 기분도 전환하고 싶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맡은 배역에 몰입하다 보면 극 중 배역에 빠져 기분이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처럼 마음이 허할 때, 로맨스 영화를 촬영하다 보면 기분도 좀 밝아질 것 같았다.
그때 울리는 전화벨.
“여보세요…”
“일본에서 사고가 있었다며?”
선우였다.
“조용히 덮기로 했는데… 소문도 빠르네.”
“행사 진행하던 회사가 우리 회사랑도 여러 번 같이 작업했던 회사라… 그쪽 대표와 다른 만났다가 우연히 들었어.”
“아아… ”
“많이 놀랐겠네… 지금은 괜찮고?”
“응. 이화연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지 나한테 해코지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뭐 이렇게 자기 암시하며 잊으려 노력하고 있어.”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차기작은 좀 살펴보고 있어?”
“응. 안 그래도 미라가 넘겨준 시나리오 몇 개 보고 있던 참이야.”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는 있고?”
“응. 하나 있기는 해. 좀 밝은 게 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런 게 들어왔네”
“제목이 뭐야?”
“<모태솔로 탈출기>! 시나리오 제목 되면 아나?”
“후훗. 네가 그거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어? 이 시나리오 아나 보네”
“하아. 얘가 누누이 얘기해도 자꾸만 나를 띄엄띄엄 보네… 그 작품 우리 회사서 제작하는 거야”
“아, 정말?”
“여배우님… 그러니까 이 제작자 안목 믿고 출연 결정 하셔도 크게 손해날 일은 없을 겁니다. 못해도 중박은 될 테니.”
사실 이 작품은 선우가 일부러 한결과 다빈을 위해서 고른 작품이다.
이제는 옛사랑이 된 다빈이지만, 그녀의 사랑을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둘이 한 작품에 출연하면 지금의 상황도 의외의 방법으로 해결책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사실, 그 작품 너를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
한결 측에서는 다행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조만간 시간 한 번 내. 감독이랑 PD랑 해서 미팅 일정 잡아볼 테니까”
“응. 그럴게. 그런데 남자주인공은 결정됐어?”
지금 말해줘도 될까, 계약 후 상대 배우를 밝혀도 될 문제였다.
자칫 지금 알게 되어 출연을 망설이기라도 할까 싶어 고민하다, 그래도 솔직히 말해주는 쪽을 택했다.
“…김한결! …불편…하니?”
“…아니 뭐… 그럴 이유가 없잖아. 불편하긴.”
다빈이 마음을 속인다. 그 마음이 투명해서 다 보인다고 해도, 절대 아니라고. 괜찮다고. 아무 사이 아니라고…
“나한텐 안 속여도 돼. 너랑 김한결 편치 않은 사이란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아냐. 내가 안 편할 게 뭐 있어. 김한결 애인 있잖아. 난 그냥 그 <연우결> 덕분에 뜬 거로 만족해”
공개연인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김한결도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상태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을 다빈이 다 보인다.
‘이제 사랑하고, 사랑받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둘이 서로 한 발짝도 더 다가가지 못하고 왜 그러고만 있는 거야.‘
***
사무실에 들른 화연이 대표실에서 은표를 기다리는 중이다.
무심히 핸드폰을 이리저리 터치하고 있다가 소파 테이블에 놓인 대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모태솔로 탈출기?”
화연은 은표를 기다리는 동안 시나리오는 읽어 볼까 싶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화연이 한참 대본을 읽고 있는데 은표가 들어와 앉는다.
“아, 그 대본 보고 있었구나.”
“재밌는데요. 근데 이거 누구한테 들어온 거에요?”
“응… 한결이. 아직 계약은 안 했지만, 한결이도 거의 결정한 상태야.”
무심코 보던 대본이었지만, 한결이 출연한다는 소리에 화연의 귀가 솔깃해진다.
“여주인공은요?”
“글쎄. 아직 물색 중인가 보던데. 제작사 측에서 의중에 둔 여배우가 있다고는 하는 것 같은데 며칠 뒤에 미팅해 보면 알겠지!”
“오빠… 이거… 제가 하면 안 돼요?”
연인 선언 이후, 되려 예전보다 더 서먹서먹해진 사이가 영 마음에 걸려, 함께 작품이라도 하게 되면 예전처럼 다시 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네가?”
“네. 제작사 측에서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공개 연인인 저희가 동반 출연한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이슈가 될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긴 하지.”
“그러니까 오빠가 얘기 좀 해 주세요.”
“음… 글쎄… 생각 좀 해 보자.”
“오빠… 저 이 작품 하고 싶어요. 할 수 있게 오빠가 좀 도와주세요. 한결 씨 계약 조건으로, 제가 같이 출연하는 조건 내걸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잖아요.”
대세 김한결이 차기작으로 선택만 해준다면 제작사나 투자사 측에서 웬만한 조건은 다 수락할 것이다. 그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흥행은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일 테니. 그러니 한결의 출연 조건에 다빈의 출연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화연 역시도 최근 꽤 주목받고 있는 신예다. 게다가 한결과의 연인 선언 이후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둘의 연인 선언 이후, 화연은 김한결이 사랑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보태지면서 CF나 인터뷰 요청도 훨씬 늘었다.
“뭐, 너 정도면 그쪽에서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것보다 한결이가 수락하려나”
“한결 씨가 저랑 하는 걸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후훗. 아시잖아요. 저랑 한결 씨 예전부터 친한 거.”
은표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근데 너… 이 작품 굳이 하려는 이유가 뭐야?”
이유는 오직 하나. 한결. 그가 출연하기 때문이었지만 화연은 그런 이유까지 다 말하고 싶진 않았다.
“대…. 대본이 좋잖아요… 그동안 너무 청순 쪽으로만 가서 이미지도 좀 바꾸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알았다. 김 감독한테 연락해 둘게”
“와… 오빠 감사해요…”
***
화연이 돌아가고 나자 홍보팀 최 실장이 은표 방에 들어섰다.
“대표님…”
“응”
“요즘 인터넷에서 한결 씨랑 화연 씨 연인 사이를 의심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은표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9화 - 양보할 수 없는 이유
“벌써? 열애 사실 인정한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글들이 올라와?”
“둘이 데이트하는 모습도 안 보이고, 공식 석상에 별반 동반하는 일도 없고 하니까, 진짜 사귀는 게 맞냐는 의심이 나오는 거 같아요.”
“일부로라도 티를 좀 내랬더니, 하여간 김한결 융통성 없기는!!”
연애나 스캔들 금지조항이 있던 CF들의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이 공식 석상에 함께 있는 모습이라도 일부러 더 노출 시키는 게 좋으리라.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자리를 최대한 많이 잡아. 시사회도 좋고. 화보도 좋고. 뭐든지 간에.”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실을 나가자, 은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결심한 듯 핸드폰 주소록을 뒤져 김호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안 가서 수화기 너머에서 김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셨어요. 홍 대표님”
“허허… 네…. 작품 준비는 잘 돼 가시죠?”
“작품 준비야 뭐, 캐스팅이 반이잖아요. 표 엔터에서 한결씨만 보내주시면 일이 훨씬 더 빨리 진행될 텐데 말입니다. 한결 씨 의중은 어떤가요?”
“음… 그래서 전화 드렸는데요… 이번 작품을 화연이랑 동반 출연으로 했으면 해서요… 혹시 거론 되는 여배우가 있나요?”
“두 사람이 동반 출연 하겠다구요?”
“네. 화연이가 차기작을 한결이랑 함께 하고 싶어 하네요. 이미지도 좀 밝게 바꾸고 싶어 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아직 확정이 안 됐으면 화연이는 어떠신지 여쭤 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 저희가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배우가 있긴 한데요. 한결 씨랑 화연 씨가 함께 출연해준다면 그것도 꽤 이슈 몰이가 될 듯해. 솔직히 솔깃한 제안이기는 합니다.”
김 감독이 듣기에도 솔직한 제안이기는 하다.
얼마 전 공개 연인을 선언하면서 지금 연예계 가장 핫한 커플이 바로 김한결과 이화연 아닌가. 그런 두 사람이 동반 출연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출연만으로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할 것이다.
“허허. 그럼 화연이에게 맡기시는 거로 방향을 좀 틀어보세요. 뭐… 확실히 플러스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애초부터 제작자인 W 엔터에서 유다빈을 여주인공으로 할 것을 거론해 왔다. 얼마 전 다빈 측에서 온 연락도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전해 들었다.
이 상황에서 여 주인공을 바꾼다? 김 감독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저희 쪽 프로듀서랑 제작사 측이랑 상의 좀 해 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김 감독은 바로 W 엔터를 찾아갔다.
***
“표 엔터 쪽에서 김한결 출연 조건에 이화연 동반 캐스팅을 내세워 왔습니다. 저희로선 뭐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커플이 함께 출연해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화연 이미지도 좋고, 로코물은 처음이니 연기 변신도 기대할 수 있구요. 유다빈 씨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이화연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김 감독의 말에 프로듀서인 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둘 중 누가 한다고 해도 아까울 거 없을 것 같네요. 유다빈은 지금 드라마 후폭풍으로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이화연은 김한결의 연인이니… 둘 다 만만찮은데요”
김 감독이 농담을 던져본다.
“하핫… 그럼 대본 고치고 여주인공을 둘로 해서 삼각으로 갈까요?”
“오… 그런 방법도 있군요…”
최 PD가 맞장구를 치며 농담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선우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둘 중 누가 돼도 아쉽지 않다는 말씀이시죠?”
“네. 둘의 캐릭터가 다르긴 하지만 누가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네. 캐스팅 효과 부분도 그렇구요”
“음… 그럼 두 사람을 불러서 오디션을 합시다. 심사는 김한결까지 불러서 우리 넷이서 하구요”
김 감독과 최 PD가 선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한결과 다빈을 함께 출연시키려 했던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제작사 대표라 한들 무조건 다빈을 주장하고 나서기는 명분이 없었다.
해서 선우는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정당한 명문을 만들기 위해 오디션을 제안했다.
애초 다빈에게 가장 어울릴만한 시나리오를 골랐던 만큼, 경쟁 오디션을 가진다 해도 절대 다빈이 이화연에게 밀릴 리 없을 것이란 게 선우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심사위원에 남자 주인공 자격으로 김한결을 앉혀두는 건 신의 한 수리라. 온통 정신이 다빈을 향해 쏠려 있는 김한결이 다빈을 제쳐 두고 화연을 선택할 리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
처음 다빈이 <모태솔로 탈출기> 시나리오를 받고 출연 의사를 밝히자 제작사나 투자자, 감독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헌데. 며칠 전 뜬금없이 오디션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것도 이화연과 단둘이서. 왜 갑자기 이화연이 이 역할을 탐내는지 모르겠다.
설마, 김한결이 이화연을 추천하기라도 했나?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보아 온 김한결은 이런 부분에서 일과 사랑을 구분 못 하고, 이미 얘기가 오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연인을 그 자리에 앉힐 만큼 경우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걸까, 왜 갑자기 이화연이 굳이 이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 이유가 뭐였든 왠지 모르게 얌전히 여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다.
“그래, 이화연 정정당당히 한 번 붙어 보자구. 현실의 사랑에선 내가 네게 졌지만, 연기에서까지 네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그러니 제대로 준비하고 와야 할 거야.”
오디션 사실을 알리려 전화를 했던 선우 역시도,
“기존의 이화연 캐릭터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그 벽을 넘기는 쉽지 않을 거야. 연기 경력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러니 별 부담 없이 해.”
라며 부담 없이 임할 것을 얘기했다.
하지만 정작 다빈은 지금까지 봐 왔던 수없이 많았던 그 어떤 오디션 보다, 이 오디션이 가장 긴장되는 오디션이었다.
***
화연은 자신과의 출연을 김한결의 계약 조건으로 제시하면 출연확정에 큰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김한결의 파워가 통하지 않은 건지, 다빈이 요즘 그만큼 대세인 건지 둘을 두고 경쟁 오디션을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부터 여배우로 지명되었던 인물이 다빈이란 소리에 화연은 더욱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또다시 한 작품에서 한결 씨와 다빈 선배가 만나게 둘 순 없어.’
지난번 <연우결>에서는 우연찮게 자신과 한결의 열애설이 터지고, 어쩔 수 없이 열애를 인정하게 되면서 다행히 자진 하차 하게 되었지만, 영화 작업은 다르지 않은가.
이미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있는 두 사람이 한 작품을 촬영하면서 얼마나 친해질 것이며, 혹여 자신과의 열애설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가짜였음을 실토라도 한다면 한결과의 인연은 정말이지 여기가 끝일 것이다.
화연은 자꾸만 복잡해지는 마음을 비워 내려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
‘오디션장에서 생각이 많아지면 곤란해. 지금은 오로지 연기만 생각하자.’
자신의 오디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화연이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이화연 씨 준비되셨으면 나오시죠”
조연출 석민이 대기하고 있던 화연을 불렀다. 화연은 떨려오는 발걸음을 옮겨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심사 석에서는 선준, 김 감독 최 PD와 한결이 앉아 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화연이 자신이 연기할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오해를 거듭하다 결국 이별하게 된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분을 준비해 봤습니다.”
심사 석에 앉은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화연이 연기해 보일 부분은 두 주인공이 비로소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여주인공이 사랑을 고백하며 로맨틱 코미디의 알콩달콩함의 포텐이 터지는, 극 중 클라이막스에 해당 되는 부분이었다.
“…선준 씨… 사랑해.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해…”
일순간에 화연의 눈빛이 사랑에 흠뻑 빠진 여인의 눈빛을 내고 있었다.
이어 두 주인공의 달콤한 키스. 상대역이 없는 오디션 연기라 혼자 키스 장면의 표정을 연기해 내는 것이 쉽진 않아 보였다.
하지만 화연은 극 중 배역 유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너무 좋다. 키스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걸 난 왜 여태 안 하고 산 거야."
남자 주인공과의 키스 후, 달뜬 표정의 화연.
화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듯했지만, 할 말을 다 하는 유리의 캐릭터를 차분히 연기해 냈다.
“네. 거기까지 하죠. 잘 봤습니다. 이화연 씨”
감독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화연의 연기를 멈추었다.
“결과는 저희끼리 상의를 거쳐서 홍 대표님 통해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화연이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치고, 심사 석에 앉아 있는 한결에게 눈길을 주었다.
한결은 두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수고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연이 나가자, 김 감독이 바로 조연출을 불렀다.
“석민아, 다빈 씨 대기하고 있으면 바로 시작하자고 해.”
“네. 바로 모실게요.“
잠시 후, 긴장한 표정의 다빈이 들어와 가운데 자리를 잡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8개의 눈. 그중에 한결이 있다.
오디션이란 게 아무리 베테랑 배우라 해도 긴장되기 마련인데, 이 사람 눈빛으로나마 응원해 주기는커녕 그 눈빛이 어찌나 차가운지, 자기랑 얼마 전까지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한결의 냉정한 눈빛에 다빈은 서운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런 다빈의 표정을 읽은 선우가, 말없이 입 모양으로 ‘잘해. 파이팅’을 해 보인다. 다빈은 용기를 얻어 다시 여주인공 유리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나는 김유리다. 김유리. 나는 지금 비로소 사랑을 확인하게 된 남자 이선준을 떠나 보내야 한다. 내일이 그의 결혼식이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사랑하는 남자를 보는 심정. 그 심정을 유리가 빙의라도 된 듯 표현해 내리라.
“안녕하세요… 유다빈입니다. 저는 남자주인공의 결혼식 하루 전날, 남자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며 가슴 아파하는 장면을 골랐습니다.”
“벌써? 열애 사실 인정한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글들이 올라와?”
“둘이 데이트하는 모습도 안 보이고, 공식 석상에 별반 동반하는 일도 없고 하니까, 진짜 사귀는 게 맞냐는 의심이 나오는 거 같아요.”
“일부로라도 티를 좀 내랬더니, 하여간 김한결 융통성 없기는!!”
연애나 스캔들 금지조항이 있던 CF들의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이 공식 석상에 함께 있는 모습이라도 일부러 더 노출 시키는 게 좋으리라.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자리를 최대한 많이 잡아. 시사회도 좋고. 화보도 좋고. 뭐든지 간에.”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실을 나가자, 은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결심한 듯 핸드폰 주소록을 뒤져 김호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안 가서 수화기 너머에서 김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셨어요. 홍 대표님”
“허허… 네…. 작품 준비는 잘 돼 가시죠?”
“작품 준비야 뭐, 캐스팅이 반이잖아요. 표 엔터에서 한결씨만 보내주시면 일이 훨씬 더 빨리 진행될 텐데 말입니다. 한결 씨 의중은 어떤가요?”
“음… 그래서 전화 드렸는데요… 이번 작품을 화연이랑 동반 출연으로 했으면 해서요… 혹시 거론 되는 여배우가 있나요?”
“두 사람이 동반 출연 하겠다구요?”
“네. 화연이가 차기작을 한결이랑 함께 하고 싶어 하네요. 이미지도 좀 밝게 바꾸고 싶어 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아직 확정이 안 됐으면 화연이는 어떠신지 여쭤 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 저희가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배우가 있긴 한데요. 한결 씨랑 화연 씨가 함께 출연해준다면 그것도 꽤 이슈 몰이가 될 듯해. 솔직히 솔깃한 제안이기는 합니다.”
김 감독이 듣기에도 솔직한 제안이기는 하다.
얼마 전 공개 연인을 선언하면서 지금 연예계 가장 핫한 커플이 바로 김한결과 이화연 아닌가. 그런 두 사람이 동반 출연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출연만으로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할 것이다.
“허허. 그럼 화연이에게 맡기시는 거로 방향을 좀 틀어보세요. 뭐… 확실히 플러스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애초부터 제작자인 W 엔터에서 유다빈을 여주인공으로 할 것을 거론해 왔다. 얼마 전 다빈 측에서 온 연락도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전해 들었다.
이 상황에서 여 주인공을 바꾼다? 김 감독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저희 쪽 프로듀서랑 제작사 측이랑 상의 좀 해 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김 감독은 바로 W 엔터를 찾아갔다.
***
“표 엔터 쪽에서 김한결 출연 조건에 이화연 동반 캐스팅을 내세워 왔습니다. 저희로선 뭐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커플이 함께 출연해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화연 이미지도 좋고, 로코물은 처음이니 연기 변신도 기대할 수 있구요. 유다빈 씨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이화연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김 감독의 말에 프로듀서인 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둘 중 누가 한다고 해도 아까울 거 없을 것 같네요. 유다빈은 지금 드라마 후폭풍으로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이화연은 김한결의 연인이니… 둘 다 만만찮은데요”
김 감독이 농담을 던져본다.
“하핫… 그럼 대본 고치고 여주인공을 둘로 해서 삼각으로 갈까요?”
“오… 그런 방법도 있군요…”
최 PD가 맞장구를 치며 농담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선우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둘 중 누가 돼도 아쉽지 않다는 말씀이시죠?”
“네. 둘의 캐릭터가 다르긴 하지만 누가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네. 캐스팅 효과 부분도 그렇구요”
“음… 그럼 두 사람을 불러서 오디션을 합시다. 심사는 김한결까지 불러서 우리 넷이서 하구요”
김 감독과 최 PD가 선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한결과 다빈을 함께 출연시키려 했던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제작사 대표라 한들 무조건 다빈을 주장하고 나서기는 명분이 없었다.
해서 선우는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정당한 명문을 만들기 위해 오디션을 제안했다.
애초 다빈에게 가장 어울릴만한 시나리오를 골랐던 만큼, 경쟁 오디션을 가진다 해도 절대 다빈이 이화연에게 밀릴 리 없을 것이란 게 선우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심사위원에 남자 주인공 자격으로 김한결을 앉혀두는 건 신의 한 수리라. 온통 정신이 다빈을 향해 쏠려 있는 김한결이 다빈을 제쳐 두고 화연을 선택할 리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
처음 다빈이 <모태솔로 탈출기> 시나리오를 받고 출연 의사를 밝히자 제작사나 투자자, 감독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헌데. 며칠 전 뜬금없이 오디션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것도 이화연과 단둘이서. 왜 갑자기 이화연이 이 역할을 탐내는지 모르겠다.
설마, 김한결이 이화연을 추천하기라도 했나?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보아 온 김한결은 이런 부분에서 일과 사랑을 구분 못 하고, 이미 얘기가 오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신의 연인을 그 자리에 앉힐 만큼 경우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걸까, 왜 갑자기 이화연이 굳이 이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 이유가 뭐였든 왠지 모르게 얌전히 여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다.
“그래, 이화연 정정당당히 한 번 붙어 보자구. 현실의 사랑에선 내가 네게 졌지만, 연기에서까지 네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그러니 제대로 준비하고 와야 할 거야.”
오디션 사실을 알리려 전화를 했던 선우 역시도,
“기존의 이화연 캐릭터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그 벽을 넘기는 쉽지 않을 거야. 연기 경력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러니 별 부담 없이 해.”
라며 부담 없이 임할 것을 얘기했다.
하지만 정작 다빈은 지금까지 봐 왔던 수없이 많았던 그 어떤 오디션 보다, 이 오디션이 가장 긴장되는 오디션이었다.
***
화연은 자신과의 출연을 김한결의 계약 조건으로 제시하면 출연확정에 큰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김한결의 파워가 통하지 않은 건지, 다빈이 요즘 그만큼 대세인 건지 둘을 두고 경쟁 오디션을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부터 여배우로 지명되었던 인물이 다빈이란 소리에 화연은 더욱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또다시 한 작품에서 한결 씨와 다빈 선배가 만나게 둘 순 없어.’
지난번 <연우결>에서는 우연찮게 자신과 한결의 열애설이 터지고, 어쩔 수 없이 열애를 인정하게 되면서 다행히 자진 하차 하게 되었지만, 영화 작업은 다르지 않은가.
이미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있는 두 사람이 한 작품을 촬영하면서 얼마나 친해질 것이며, 혹여 자신과의 열애설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가짜였음을 실토라도 한다면 한결과의 인연은 정말이지 여기가 끝일 것이다.
화연은 자꾸만 복잡해지는 마음을 비워 내려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
‘오디션장에서 생각이 많아지면 곤란해. 지금은 오로지 연기만 생각하자.’
자신의 오디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화연이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이화연 씨 준비되셨으면 나오시죠”
조연출 석민이 대기하고 있던 화연을 불렀다. 화연은 떨려오는 발걸음을 옮겨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심사 석에서는 선준, 김 감독 최 PD와 한결이 앉아 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화연이 자신이 연기할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오해를 거듭하다 결국 이별하게 된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분을 준비해 봤습니다.”
심사 석에 앉은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화연이 연기해 보일 부분은 두 주인공이 비로소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여주인공이 사랑을 고백하며 로맨틱 코미디의 알콩달콩함의 포텐이 터지는, 극 중 클라이막스에 해당 되는 부분이었다.
“…선준 씨… 사랑해.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해…”
일순간에 화연의 눈빛이 사랑에 흠뻑 빠진 여인의 눈빛을 내고 있었다.
이어 두 주인공의 달콤한 키스. 상대역이 없는 오디션 연기라 혼자 키스 장면의 표정을 연기해 내는 것이 쉽진 않아 보였다.
하지만 화연은 극 중 배역 유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너무 좋다. 키스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걸 난 왜 여태 안 하고 산 거야."
남자 주인공과의 키스 후, 달뜬 표정의 화연.
화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듯했지만, 할 말을 다 하는 유리의 캐릭터를 차분히 연기해 냈다.
“네. 거기까지 하죠. 잘 봤습니다. 이화연 씨”
감독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화연의 연기를 멈추었다.
“결과는 저희끼리 상의를 거쳐서 홍 대표님 통해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화연이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치고, 심사 석에 앉아 있는 한결에게 눈길을 주었다.
한결은 두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수고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연이 나가자, 김 감독이 바로 조연출을 불렀다.
“석민아, 다빈 씨 대기하고 있으면 바로 시작하자고 해.”
“네. 바로 모실게요.“
잠시 후, 긴장한 표정의 다빈이 들어와 가운데 자리를 잡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8개의 눈. 그중에 한결이 있다.
오디션이란 게 아무리 베테랑 배우라 해도 긴장되기 마련인데, 이 사람 눈빛으로나마 응원해 주기는커녕 그 눈빛이 어찌나 차가운지, 자기랑 얼마 전까지 가상 부부로 호흡을 맞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한결의 냉정한 눈빛에 다빈은 서운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런 다빈의 표정을 읽은 선우가, 말없이 입 모양으로 ‘잘해. 파이팅’을 해 보인다. 다빈은 용기를 얻어 다시 여주인공 유리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나는 김유리다. 김유리. 나는 지금 비로소 사랑을 확인하게 된 남자 이선준을 떠나 보내야 한다. 내일이 그의 결혼식이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사랑하는 남자를 보는 심정. 그 심정을 유리가 빙의라도 된 듯 표현해 내리라.
“안녕하세요… 유다빈입니다. 저는 남자주인공의 결혼식 하루 전날, 남자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며 가슴 아파하는 장면을 골랐습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0화 - 제가 같이 연기 해 보겠습니다
다빈을 바라보던 심사 석의 눈빛이 한껏 기대에 차, 더할 수 없이 진지한 분위기다.
연기 전, 잠시 다빈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눈을 뜬, 다빈은 이제 <모태솔로 탈출기>의 여주인공 유리다.
"너의 그 마음을 몰랐어. 아니 처음엔 알면서도 그냥 외면하고 싶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 마음을 받을 준비가 안 됐었어. 그래도 그냥 넌 계속 거기에 있을 것 같았어."
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그간의 사랑만을 어렵사리 꺼내놓는 다빈.
“그때 집 앞에서 떡하니 서 있는 선준 씨 보고…, 얼마나 안기고 싶던지. 날 좀 안아 줄 수 있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선준 씨한테 안겨서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는데. 차마 말을 못하겠더라.”
여운 가득한 다빈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네 남자는 지금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어질 정도로 호소력 있는 연기다.
“그러고는 내가 간신히 한단 말이 괜찮으니 가란 말이었어… 나 참 못났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한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부분을 제가 잠시 같이 연기해 보겠습니다. 합이 얼마나 잘 맞는지 봐 주십시오”
다빈이 한 참 감정 씬에 눈물 그렁그렁해 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한결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옆에 와 섰다.
그리고는 다빈의 놀란 눈빛은 안중에도 없이, 대본을 넘겨 해당 부분의 페이지를 찾아 남주인공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맘도 모르는 채, 오해만 거듭하면서 계속 어긋나기만 한 거였구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한결은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아, 한결 역시도 따로 연기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몰입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씩씩해 보였었나 봐. 그게 아니었는데. 나 선준 씨 그만두고… 꽤… 힘들었었는데…”
한결의 등장에 잠시 당황해하던 다빈도 어느새 다시 감정을 잡고, 여주인공 대사를 맞받아쳤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한 채, 애써 그 슬픔을 티 내지 않으려 웃는 다빈의 얼굴이, 남주인공 선준이 된 한결은 아프기만 하다.
다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그 모습을 남자 주인공에게 들키지 않으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차마 닦지도 못하고 얼굴을 돌린다.
“행복하지 마….”
슬픔을 삼킨 다빈의 대사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하다.
“선준 씨 행복하면 나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아. 평생 기억하고 살아. 나 이렇게 놓친 거”
아아, 내가 만약 당신을 놓치면 이런 마음이 들까. 지금 다빈이 제 앞에서 하는 말이 대사 같지 않아서, 정말 자신의 잘못을 탓하는 것만 같아서 대사를 받아치고 있는 주는 한결의 마음이 한없이 아려온다.
“…그래. 기억은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나 잊고 행복해라.
당신을 평생 기억하는 건 내가 할게.”
어느새 한결의 목소리도 잔뜩 젖어 있었다.
이윽고 허공에서 만나는 두 눈빛. 눈물 가득 담은 두 눈빛은 서로의 눈을 올곧게 한참을 응시한다.
다빈이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한결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려던 찰나!
갑작스레 다가와 자신을 품에 가두는 팔.
‘응? 여기까지 할 필요가…’
하는 데, 한결이 다빈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얼굴을 서서히 드는가 싶더니 점점 더 얼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결의 입술이 다빈의 입술 위로 포개진다.
‘헉!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황당함 속에서도 다빈은 순간, 어렴풋이 이 키스가 어찌나 슬프게 느껴지는지.
키스가 사랑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해왔었는데, 지금 한결이 자신에게 하는 키스는 차마 다 뱉지 못한 마음을 어쩔 수 없이 속에 담아두는 듯한 아픔이 느껴져 이 키스가 슬프기 그지없었다.
얼마간 슬픔 가득한 키스를 표현해낸 한결이, 다빈에게서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다빈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결의 표정은 언제 가슴 절절한 연기를 선 보였냐는 듯 무표정하게 바뀌어 있다.
냉랭한 톱스타 김한결로 돌아온 그는 존칭까지 쓰며
“유다빈 씨 수고하셨어요. 감독님 남녀 주인공의 연기 호흡이 어떤지 참고해 주세요”
심사 석의 사람들을 향해 입을 뗐다.
다빈과 한결의 연기를 몰입해서 지켜보던 세 사람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요. 다빈 씨 오디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오늘 수고하셨어요”
연기긴 했지만, 감정 씬이라 내내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다빈이 그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에 가득 담겨있던 눈물을 덩그렁 떨어뜨렸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뒤를 돌아 나가는 다빈의 모습이, 극 중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는 유리의 모습 같아 지켜보던 남자들의 마음에도 여운이 그대로 남았다.
그중에서도 한결은 특히나.
‘유다빈 진짜로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것 같아 순간, 참을 수 없었어.’
다빈과 화연,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연기를 지켜본 심사위원들의 의견조율 과정이 바로 시작됐다.
화연의 연기가 사랑을 확인하는 기쁨을 표현한 연기인 반면, 다빈의 연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연기로 완전히 다른 연기를 선보인 두 사람이었다.
화연은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에서, 한층 밝고 쾌활해진 모습을 보여 극 중 유리의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와 달리, 떠나는 연인에게 행복하지 말라고 말하는 다빈의 모습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면서, 붙잡기도 하는 듯한 이중적인 모습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여주인공 역에 완벽히 몰입된 모습이었다.
네 사람은 길게 의논할 필요도 없이 만장일치로 <모태솔로 탈출기>의 여주인공 역으로 다빈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화연.
화연의 눈에서 불같은 화가 일어났다.
***
[연우결의 가상부부 김한결 유다빈, <모솔 탈출기> 캐스팅]
[예능에 이어 영화까지 커플로 김한결 유다빈 영화 <모솔 탈출기> 출연 확정]
[김한결 차기작 <모솔 탈출기>서 유다빈과 연인으로 다시 만나]
[김한결, 유다빈 <연우결>에 이어 영화 <모솔 탈출기>까지 동반 출연 결정>
둘의 캐스팅 소식이 빠르게 기사화되어 나왔다.
해당 기사의 댓글에는 이화연은 어쩌고 또 둘이 함께 출연하느냐 이화연이 기분 나쁘겠다. 이화연보다 다빈과 더 잘 어울린다, 이참에 이화연과 결별하고 다빈과 잘 됐으면 좋겠다. 김한결과 연거푸 두 번이나 같이 출연하는 다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이 틀림없다 부럽다 등 반응들이었다.
한결은 얼마 전 촬영 중 부상까지 당하며 촬영을 끝냈던 액션 영화 <고공행진>의 개봉을 앞두고 부르는 곳이 부쩍 많아졌다.
여성지에서 인터뷰와 함께 화보 촬영을 요청해 오자, 은표가 화연과 동반해 커플 화보 진행을 거론하자, 한결은 단칼에 거절했다. 화연과 함께하는 커플 화보라면 하지 않겠다고.
그러잖아도 인터넷에선 둘의 관계를 두고 의심쩍어하는 판에 둘이 함께 화보라도 진행하면 잠시라도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한결은 단호했다.
“형님, 화연이와의 열애설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제 입으로 인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만약 결별설이 거론된다고 하면 그냥 인정할 겁니다.”
“그럼, 너 그다음 일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 안 해?!”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해결할게요. 손해배상을 하라면 하고, 어쨌든 저 화연이랑 결별설 무마시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안 할 테니까 그것 때문에 둘이 같이하는 스케줄 잡지 마세요. 저 안 해요!”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는 한결을 은표도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저 크게 시끄럽지 않은 상태에서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 광고계약 기간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오늘은 그렇게 해서 결국 한결 혼자 인터뷰를 겸한 화보 촬영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영화가 액션 장르이니만큼 화보도 영화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그대로 차용해 와 상남자의 거친 면모를 표현하는 콘셉트로 진행하기로 했다.
스모키한 메이크업에 정리되지 않은 듯한 거칠 느낌의 헤어. 적당히 자란 수염까지. 웃음기 거둔 얼굴은 별다른 포즈와 표정을 짓지 않아도, 그 상태 그대로 거친 남자의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찰칵찰칵.
“네, 한결 씨 좋습니다. 옆으로 시선을 좀 돌려봐 주세요”
찰칵찰칵.
만족스런 피사체를 보는 사진작가의 감탄이 이어졌고, 한결의 능숙한 포즈 때문인지 타고난 외모 때문인지 촬영은 예정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한결이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열심인 동안, 한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드 매니저 동호는 핸드폰으로 이것저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맡은 배우에 대한 기사나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나 영상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도 매니저의 일 중 하나다.
동호는 한결에 관해 새로 올라온 영상이 뭐가 있나 싶어 들어간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한 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유다빈 새 영화 출연 캐스팅에 얽힌 비하인드’
다분히 흥미로운 제목에 동호는 영상을 터치했다. 영상을 끝까지 본 동호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진다.
오전부터 시작된 화보촬영은 오후가 되어 끝이 났다. 스튜디오에서 나와 동호를 찾는 한결의 눈에 촬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동호가 들어온다.
한결이 조용히 동호 곁으로 다가가서는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촬영 끝난 줄도 모르고. 끝났으니 그만 들어가자”
고 말을 하면서 무심코 동호의 손 위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에 시선이 머무르는데, 순간 한결의 동공이 커진다.
“이거 뭐야? 누가 올린 거야?”
“글쎄요… 그건 모르겠고… 지금 조회 수는 엄청납니다. 댓글도 그렇구요.”
“이리 줘봐!”
한결이 동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처음부터 영상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다빈을 바라보던 심사 석의 눈빛이 한껏 기대에 차, 더할 수 없이 진지한 분위기다.
연기 전, 잠시 다빈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눈을 뜬, 다빈은 이제 <모태솔로 탈출기>의 여주인공 유리다.
"너의 그 마음을 몰랐어. 아니 처음엔 알면서도 그냥 외면하고 싶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 마음을 받을 준비가 안 됐었어. 그래도 그냥 넌 계속 거기에 있을 것 같았어."
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그간의 사랑만을 어렵사리 꺼내놓는 다빈.
“그때 집 앞에서 떡하니 서 있는 선준 씨 보고…, 얼마나 안기고 싶던지. 날 좀 안아 줄 수 있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선준 씨한테 안겨서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는데. 차마 말을 못하겠더라.”
여운 가득한 다빈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네 남자는 지금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어질 정도로 호소력 있는 연기다.
“그러고는 내가 간신히 한단 말이 괜찮으니 가란 말이었어… 나 참 못났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한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부분을 제가 잠시 같이 연기해 보겠습니다. 합이 얼마나 잘 맞는지 봐 주십시오”
다빈이 한 참 감정 씬에 눈물 그렁그렁해 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한결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옆에 와 섰다.
그리고는 다빈의 놀란 눈빛은 안중에도 없이, 대본을 넘겨 해당 부분의 페이지를 찾아 남주인공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맘도 모르는 채, 오해만 거듭하면서 계속 어긋나기만 한 거였구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한결은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아, 한결 역시도 따로 연기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몰입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씩씩해 보였었나 봐. 그게 아니었는데. 나 선준 씨 그만두고… 꽤… 힘들었었는데…”
한결의 등장에 잠시 당황해하던 다빈도 어느새 다시 감정을 잡고, 여주인공 대사를 맞받아쳤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한 채, 애써 그 슬픔을 티 내지 않으려 웃는 다빈의 얼굴이, 남주인공 선준이 된 한결은 아프기만 하다.
다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그 모습을 남자 주인공에게 들키지 않으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차마 닦지도 못하고 얼굴을 돌린다.
“행복하지 마….”
슬픔을 삼킨 다빈의 대사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하다.
“선준 씨 행복하면 나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아. 평생 기억하고 살아. 나 이렇게 놓친 거”
아아, 내가 만약 당신을 놓치면 이런 마음이 들까. 지금 다빈이 제 앞에서 하는 말이 대사 같지 않아서, 정말 자신의 잘못을 탓하는 것만 같아서 대사를 받아치고 있는 주는 한결의 마음이 한없이 아려온다.
“…그래. 기억은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나 잊고 행복해라.
당신을 평생 기억하는 건 내가 할게.”
어느새 한결의 목소리도 잔뜩 젖어 있었다.
이윽고 허공에서 만나는 두 눈빛. 눈물 가득 담은 두 눈빛은 서로의 눈을 올곧게 한참을 응시한다.
다빈이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한결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려던 찰나!
갑작스레 다가와 자신을 품에 가두는 팔.
‘응? 여기까지 할 필요가…’
하는 데, 한결이 다빈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얼굴을 서서히 드는가 싶더니 점점 더 얼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결의 입술이 다빈의 입술 위로 포개진다.
‘헉!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황당함 속에서도 다빈은 순간, 어렴풋이 이 키스가 어찌나 슬프게 느껴지는지.
키스가 사랑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해왔었는데, 지금 한결이 자신에게 하는 키스는 차마 다 뱉지 못한 마음을 어쩔 수 없이 속에 담아두는 듯한 아픔이 느껴져 이 키스가 슬프기 그지없었다.
얼마간 슬픔 가득한 키스를 표현해낸 한결이, 다빈에게서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다빈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결의 표정은 언제 가슴 절절한 연기를 선 보였냐는 듯 무표정하게 바뀌어 있다.
냉랭한 톱스타 김한결로 돌아온 그는 존칭까지 쓰며
“유다빈 씨 수고하셨어요. 감독님 남녀 주인공의 연기 호흡이 어떤지 참고해 주세요”
심사 석의 사람들을 향해 입을 뗐다.
다빈과 한결의 연기를 몰입해서 지켜보던 세 사람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요. 다빈 씨 오디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오늘 수고하셨어요”
연기긴 했지만, 감정 씬이라 내내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다빈이 그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에 가득 담겨있던 눈물을 덩그렁 떨어뜨렸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뒤를 돌아 나가는 다빈의 모습이, 극 중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는 유리의 모습 같아 지켜보던 남자들의 마음에도 여운이 그대로 남았다.
그중에서도 한결은 특히나.
‘유다빈 진짜로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것 같아 순간, 참을 수 없었어.’
다빈과 화연,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연기를 지켜본 심사위원들의 의견조율 과정이 바로 시작됐다.
화연의 연기가 사랑을 확인하는 기쁨을 표현한 연기인 반면, 다빈의 연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연기로 완전히 다른 연기를 선보인 두 사람이었다.
화연은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에서, 한층 밝고 쾌활해진 모습을 보여 극 중 유리의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와 달리, 떠나는 연인에게 행복하지 말라고 말하는 다빈의 모습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면서, 붙잡기도 하는 듯한 이중적인 모습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여주인공 역에 완벽히 몰입된 모습이었다.
네 사람은 길게 의논할 필요도 없이 만장일치로 <모태솔로 탈출기>의 여주인공 역으로 다빈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화연.
화연의 눈에서 불같은 화가 일어났다.
***
[연우결의 가상부부 김한결 유다빈, <모솔 탈출기> 캐스팅]
[예능에 이어 영화까지 커플로 김한결 유다빈 영화 <모솔 탈출기> 출연 확정]
[김한결 차기작 <모솔 탈출기>서 유다빈과 연인으로 다시 만나]
[김한결, 유다빈 <연우결>에 이어 영화 <모솔 탈출기>까지 동반 출연 결정>
둘의 캐스팅 소식이 빠르게 기사화되어 나왔다.
해당 기사의 댓글에는 이화연은 어쩌고 또 둘이 함께 출연하느냐 이화연이 기분 나쁘겠다. 이화연보다 다빈과 더 잘 어울린다, 이참에 이화연과 결별하고 다빈과 잘 됐으면 좋겠다. 김한결과 연거푸 두 번이나 같이 출연하는 다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이 틀림없다 부럽다 등 반응들이었다.
한결은 얼마 전 촬영 중 부상까지 당하며 촬영을 끝냈던 액션 영화 <고공행진>의 개봉을 앞두고 부르는 곳이 부쩍 많아졌다.
여성지에서 인터뷰와 함께 화보 촬영을 요청해 오자, 은표가 화연과 동반해 커플 화보 진행을 거론하자, 한결은 단칼에 거절했다. 화연과 함께하는 커플 화보라면 하지 않겠다고.
그러잖아도 인터넷에선 둘의 관계를 두고 의심쩍어하는 판에 둘이 함께 화보라도 진행하면 잠시라도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한결은 단호했다.
“형님, 화연이와의 열애설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제 입으로 인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만약 결별설이 거론된다고 하면 그냥 인정할 겁니다.”
“그럼, 너 그다음 일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 안 해?!”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해결할게요. 손해배상을 하라면 하고, 어쨌든 저 화연이랑 결별설 무마시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안 할 테니까 그것 때문에 둘이 같이하는 스케줄 잡지 마세요. 저 안 해요!”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는 한결을 은표도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저 크게 시끄럽지 않은 상태에서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 광고계약 기간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오늘은 그렇게 해서 결국 한결 혼자 인터뷰를 겸한 화보 촬영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영화가 액션 장르이니만큼 화보도 영화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그대로 차용해 와 상남자의 거친 면모를 표현하는 콘셉트로 진행하기로 했다.
스모키한 메이크업에 정리되지 않은 듯한 거칠 느낌의 헤어. 적당히 자란 수염까지. 웃음기 거둔 얼굴은 별다른 포즈와 표정을 짓지 않아도, 그 상태 그대로 거친 남자의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찰칵찰칵.
“네, 한결 씨 좋습니다. 옆으로 시선을 좀 돌려봐 주세요”
찰칵찰칵.
만족스런 피사체를 보는 사진작가의 감탄이 이어졌고, 한결의 능숙한 포즈 때문인지 타고난 외모 때문인지 촬영은 예정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한결이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열심인 동안, 한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드 매니저 동호는 핸드폰으로 이것저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맡은 배우에 대한 기사나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나 영상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도 매니저의 일 중 하나다.
동호는 한결에 관해 새로 올라온 영상이 뭐가 있나 싶어 들어간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한 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유다빈 새 영화 출연 캐스팅에 얽힌 비하인드’
다분히 흥미로운 제목에 동호는 영상을 터치했다. 영상을 끝까지 본 동호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진다.
오전부터 시작된 화보촬영은 오후가 되어 끝이 났다. 스튜디오에서 나와 동호를 찾는 한결의 눈에 촬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동호가 들어온다.
한결이 조용히 동호 곁으로 다가가서는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촬영 끝난 줄도 모르고. 끝났으니 그만 들어가자”
고 말을 하면서 무심코 동호의 손 위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에 시선이 머무르는데, 순간 한결의 동공이 커진다.
“이거 뭐야? 누가 올린 거야?”
“글쎄요… 그건 모르겠고… 지금 조회 수는 엄청납니다. 댓글도 그렇구요.”
“이리 줘봐!”
한결이 동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처음부터 영상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1화 - 의문의 영상
영상의 시작은 전에 선우와 다빈의 스캔들 기사가 났던 사진이 여러 컷 캡쳐되어 동영상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데이트 중인 연인으로 오해할 만한 사진. 이어 얼마 전 일본에서 있었던 아시아방송연예대상의 관람석에서 다빈과 선우가 만나서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흘러나온다.
당시 생방송 중인 화면에 아마 다빈과 한결 선우의 모습이 잠깐 나갔던 모양인데, 그중에서 다빈과 선우의 모습만을 캡처해서 담은 컷컷을 영상처럼 연결했다.
이어 며칠 전 있었던 <모태솔로 탈출기>의 오디션 전, 심사 석에 김 감독과 박 PD, 한결… 그 옆의 선우가 앉아 아직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 담소를 나누는 사진이다.
이어, 다빈이 등장하고 밝게 웃어 보이는 선준의 모습. 긴장한 티가 역력한 다빈에게 입 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 짧게 편집되어 붙어 있었다.
이어 오디션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다빈의 모습이 보이고, 그 모습을 너그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선우의 모습을 등장하고 있었다.
마지막 영상 밑으로 자막이 흐른다.
- 자신 연인의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앉은 제작사 대표. 오디션은 하나 마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현장에 처음 식당만 제외하고는 두 장소 모두에 한결 역시도 있었다. 당시 현장 분위기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캡처 사진이나, 영상이라는 게 어떻게 의도하며 편집해 놓느냐에 따라서 결과물은 달라진다.
대체 누가?!
시상식 화면이야 생방송으로 다 나갔으니 그걸 녹화했다 편집해 썼다고 쳐도, 오디션은 비공개였다. 다빈과 화연 단둘만이 벌이는 경쟁 오디션이라 굳이 공개할 필요도 없었고, 외부에 알릴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의 소속사와 제작사 감독 정도만 알고 진행된 오디션이었다. 더구나 오디션 전 담소를 나누는 심사위원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분명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올린 영상일 것이다.
누구란 말인가. 다빈에게 스캔들을 만들어 덕을 볼 사람. 그리고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
한결은 한 명에게 모아지는 추론에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
한결은 화연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올라오는 의심을 지워냈다.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며 이슈가 되자, 언론은 먹잇감을 찾던 굶주린 맹수처럼 관련 영상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영상이 올려져 이슈가 되고 있다는 팩트만 다룬 기사가 있는가 하면, 선우와 다빈의 연인관계를 의심하며 선우가 여주인공 자리를 처음부터 다빈에게 내정하고 있었던 건 아니냐는 다분히 주관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이슈를 조장하는 추측성 기사가 훨씬 많았다.
꾹 다문 한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결심한 듯 한결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 버튼을 눌렀다.
“김한결입니다. 지금 시간 되십니까?!”
선우는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본 후, 처리방법을 두고 고민하고 있던 차 한결의 전화를 받았다.
선우는 한결이 왜 전화했는지를 알겠기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 사무실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죠. 마침 강남이라 2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따가 뵙죠”
수화기 너머 김한결은 흥분을 억지로 참아 누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난 선우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혼자 웃음을 지었다.
“이 영상이… 의외로 두 사람의 관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
잠시 후, 한결이 도착했는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네”
들어선 한결의 모습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선우가 자리에 앉는 한결에 물었다.
“유튜브 영상 보셨습니까?”
“네. 좀 전에.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내가 알기론 김한결 씨 이화연 씨와 연인 사이인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
공식적으론 선우의 말이 맞다. 하지만 몇 번의 우연히 마주쳤을 때 한선우가 다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음을 한결은 직감했었다.
때문에, 이런 질문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뭐, 그건 그렇다고 쳐 두고. 그런데 날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분이 사실이든 아니든 따질 여유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선우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다빈을 오해 속에서 그대로 내팽개쳐두고 있는 한결을 야단치는 말투였다.
한결은 그렇다고 선우에게 밀릴 마음은 조금만큼도 없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유다빈… 그 사람과 지금 어떤 관계입니까. 두 사람 다시 만납니까? …전에 둘이 있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한결은 화연과의 열애설이 터지고 그걸 해명하기 위해 다빈의 집으로 갔다가 봤던 두 사람이 함께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라면… 우리 둘의 예전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까?”
“유다빈 씨… 제 첫사랑입니다.”
“……?”
“고교 시절 처음 유다빈 씨를 봤습니다. 그때 다빈 씨는 대학생이었고… 당신의 연인이었지요. 당신과 헤어지던 날, 당신에게 버려지던 날 처음 다빈 씨를 봤습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해 지금까지 쭉 사랑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다빈 씨랑 다시 만나십니까? “
그렇게 오래전부터 다빈을 좋아해 왔었다니, 그럼 김한결이 유다빈을 사랑한 기간만 해도 10년이 넘는다는 얘기다.
“하하. 만나기야 하죠”
“?!!”
한결의 두 눈을 부릅뜨고 선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관계는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대학 선배이자, 동종 업계의 관계자? 정도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제야 한결의 표정이 다소 풀린다.
“그러면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섣불리 한 대표님이나 w 엔터에서 움직이시면 괜히 잡음만 더 커질 수 있으니 나서지 말아 주십시오”
스캔들이 나면 대게의 소속사에선 반박자료를 내거나 드물게는 열애를 인정하며 응원을 부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캔들의 당사자고 아니고, 대외적으론 동료 연예일 뿐인 자기가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하지만 선우는 지금 한결의 표정에선 비장함까지 느껴져, 그의 말이 그저 호기로 한 번 하는 말 같지는 않아 보였다.
“자신… 있습니까…?”
“해결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믿고 기다려 보십시오.”
“아니 그것 말고!”
“?”
“다빈이… 말입니다. 지금 다빈이 당신 때문에 꽤나 속앓이 하며 힘들어하는 눈치던데 다빈이 더는 안 힘들게 할 수 있냐 그 말입니다.”
화연과의 열애설을 인정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 부분이라면 처음 화연과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이미 달리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해결하고 다빈의 마음을 감싸 안아줄 자신이 있냐고 묻는 말이라면…
한결은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위약금이 예상되는 광고계약 기간이 종료되고, 화연의 입지도 조금 더 단단히 자리 잡을 시간이 지나야 하기에.
“최대한 빨리 해결할 겁니다. 그건 다빈 씨와 저. 두 사람 간의 일이니 관심 꺼주십시오.”
한선우에게 이런 말까지 듣다니, 한결은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그랬다간 내 마음이 다시 다빈이를 못 놓아주겠다고 할 수 있으니…”
적의 없는 당부였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 새로이 찾은 사랑과 이제 그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한결은 그 마음조차 달가울 리 없지만, 어쨌든 다빈과 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건 같은 마음이었다.
“할 말 다했으니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선우의 집무실을 나오는 한결의 마음이 묵직하다.
***
동호가 운전 중인 벤으로 이동 중인 한결.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손 기자님 잘 지내셨어요?”
“어, 한결 씨가 전화를 다 주고 웬일이야?“
“하하. 저 영화 개봉 앞두고 있잖아요. 그래서 인터뷰 요청 좀 드릴까 해서요”
“진짜야? 그런 거라면 우리야 언제든 OK지. 근데 좀 의외네. 인터뷰 요청을 매니저나 소속사 홍보팀이 아니고 연기자가 직접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 요청하고 말야”
평소 한결과 친분이 있던 손 기자지만 뭔가 냄새가 나는 듯하다.
“언제든 괜찮으시다면, 바로 시간 잡죠. 전 마침 스케줄이 비어서 오늘도 괜찮은데”
“오늘? 야 빨라서 좋은데?”
갑자기 먼저 전화해 와서 인터뷰하자? 분명 한결 쪽에서 무언가 인터뷰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손 기자는 기자 특유의 촉이 당겼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있다가 오후에 뵙도록 하죠. 장소는 제 매니저랑 정하시면 될 겁니다.”
“그래, 있다가 보자구”
한결은 전화를 끊고,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뭔가 복잡한 일이 있을 때 하는 한결의 오래된 습관이다.
오랫동안 한결과 함께 움직인 동호가 백미러를 통해 한결을 쳐다본다.
“형님, 인터뷰는 왜…? 아직 영화 홍보 스케줄은 안 나왔는데요.”
“……”
동호의 질문에도 한결은 별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동호야…”
한참 만에 입을 연 한결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그 영상 말이야.”
“네”
“네가 보기엔 그거 누가 한 거 같냐”
“… 그걸…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못 하는 동호의 목소리가 영 어색하다.
“그 사진 찍힌 장소에 있었던 사람… 몇 명 안 되잖아. 그날 나 오디션 심사 들어가 있을 때 누가 카메라 갖고 있다거나 사진 찍는 거 본 거 없어?”
사실 처음 영상을 보자마자, 동호는 그걸 올린 사람이 화연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날 현장에는 심사를 맡았던 4명과 오디션 당사자 화연, 다빈 그리고 그녀들의 매니저와 현장에서 진행을 돕던 조연출 정도가 다였다.
그러니 자신들의 제작 작품에 흠집을 낼 사람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화연이었다.
그리고 화연의 오디션이 끝나고 다빈의 오디션 차례가 되자, 귀가해도 좋다는 조연출의 말에 알았다고 하며 가는 것 같더니 가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는 모습을 동호가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호는 섣불리 화연의 이름을 거론하지 못했다. 같은 소속사 연기자이기도 하고, 별달리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한결과 연인 사이가 아닌가.
“사진 찍는 걸 본 건 아니고…”
“다른 거라도 본 거 있어?”
“화연이 누나가, 다빈이 누나 오디션하고 있을 때 무대 뒤쪽으로 가서 보는 걸 봤어요”
음… 역시 화연이 너였구나.
한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영상의 시작은 전에 선우와 다빈의 스캔들 기사가 났던 사진이 여러 컷 캡쳐되어 동영상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데이트 중인 연인으로 오해할 만한 사진. 이어 얼마 전 일본에서 있었던 아시아방송연예대상의 관람석에서 다빈과 선우가 만나서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흘러나온다.
당시 생방송 중인 화면에 아마 다빈과 한결 선우의 모습이 잠깐 나갔던 모양인데, 그중에서 다빈과 선우의 모습만을 캡처해서 담은 컷컷을 영상처럼 연결했다.
이어 며칠 전 있었던 <모태솔로 탈출기>의 오디션 전, 심사 석에 김 감독과 박 PD, 한결… 그 옆의 선우가 앉아 아직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 담소를 나누는 사진이다.
이어, 다빈이 등장하고 밝게 웃어 보이는 선준의 모습. 긴장한 티가 역력한 다빈에게 입 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이 짧게 편집되어 붙어 있었다.
이어 오디션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다빈의 모습이 보이고, 그 모습을 너그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선우의 모습을 등장하고 있었다.
마지막 영상 밑으로 자막이 흐른다.
- 자신 연인의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앉은 제작사 대표. 오디션은 하나 마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현장에 처음 식당만 제외하고는 두 장소 모두에 한결 역시도 있었다. 당시 현장 분위기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캡처 사진이나, 영상이라는 게 어떻게 의도하며 편집해 놓느냐에 따라서 결과물은 달라진다.
대체 누가?!
시상식 화면이야 생방송으로 다 나갔으니 그걸 녹화했다 편집해 썼다고 쳐도, 오디션은 비공개였다. 다빈과 화연 단둘만이 벌이는 경쟁 오디션이라 굳이 공개할 필요도 없었고, 외부에 알릴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의 소속사와 제작사 감독 정도만 알고 진행된 오디션이었다. 더구나 오디션 전 담소를 나누는 심사위원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분명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올린 영상일 것이다.
누구란 말인가. 다빈에게 스캔들을 만들어 덕을 볼 사람. 그리고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
한결은 한 명에게 모아지는 추론에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
한결은 화연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올라오는 의심을 지워냈다.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며 이슈가 되자, 언론은 먹잇감을 찾던 굶주린 맹수처럼 관련 영상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영상이 올려져 이슈가 되고 있다는 팩트만 다룬 기사가 있는가 하면, 선우와 다빈의 연인관계를 의심하며 선우가 여주인공 자리를 처음부터 다빈에게 내정하고 있었던 건 아니냐는 다분히 주관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이슈를 조장하는 추측성 기사가 훨씬 많았다.
꾹 다문 한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결심한 듯 한결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 버튼을 눌렀다.
“김한결입니다. 지금 시간 되십니까?!”
선우는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본 후, 처리방법을 두고 고민하고 있던 차 한결의 전화를 받았다.
선우는 한결이 왜 전화했는지를 알겠기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 사무실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죠. 마침 강남이라 2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따가 뵙죠”
수화기 너머 김한결은 흥분을 억지로 참아 누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난 선우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혼자 웃음을 지었다.
“이 영상이… 의외로 두 사람의 관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
잠시 후, 한결이 도착했는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네”
들어선 한결의 모습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선우가 자리에 앉는 한결에 물었다.
“유튜브 영상 보셨습니까?”
“네. 좀 전에.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내가 알기론 김한결 씨 이화연 씨와 연인 사이인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
공식적으론 선우의 말이 맞다. 하지만 몇 번의 우연히 마주쳤을 때 한선우가 다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음을 한결은 직감했었다.
때문에, 이런 질문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뭐, 그건 그렇다고 쳐 두고. 그런데 날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분이 사실이든 아니든 따질 여유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선우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다빈을 오해 속에서 그대로 내팽개쳐두고 있는 한결을 야단치는 말투였다.
한결은 그렇다고 선우에게 밀릴 마음은 조금만큼도 없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유다빈… 그 사람과 지금 어떤 관계입니까. 두 사람 다시 만납니까? …전에 둘이 있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한결은 화연과의 열애설이 터지고 그걸 해명하기 위해 다빈의 집으로 갔다가 봤던 두 사람이 함께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라면… 우리 둘의 예전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까?”
“유다빈 씨… 제 첫사랑입니다.”
“……?”
“고교 시절 처음 유다빈 씨를 봤습니다. 그때 다빈 씨는 대학생이었고… 당신의 연인이었지요. 당신과 헤어지던 날, 당신에게 버려지던 날 처음 다빈 씨를 봤습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해 지금까지 쭉 사랑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다빈 씨랑 다시 만나십니까? “
그렇게 오래전부터 다빈을 좋아해 왔었다니, 그럼 김한결이 유다빈을 사랑한 기간만 해도 10년이 넘는다는 얘기다.
“하하. 만나기야 하죠”
“?!!”
한결의 두 눈을 부릅뜨고 선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관계는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대학 선배이자, 동종 업계의 관계자? 정도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제야 한결의 표정이 다소 풀린다.
“그러면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섣불리 한 대표님이나 w 엔터에서 움직이시면 괜히 잡음만 더 커질 수 있으니 나서지 말아 주십시오”
스캔들이 나면 대게의 소속사에선 반박자료를 내거나 드물게는 열애를 인정하며 응원을 부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캔들의 당사자고 아니고, 대외적으론 동료 연예일 뿐인 자기가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하지만 선우는 지금 한결의 표정에선 비장함까지 느껴져, 그의 말이 그저 호기로 한 번 하는 말 같지는 않아 보였다.
“자신… 있습니까…?”
“해결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믿고 기다려 보십시오.”
“아니 그것 말고!”
“?”
“다빈이… 말입니다. 지금 다빈이 당신 때문에 꽤나 속앓이 하며 힘들어하는 눈치던데 다빈이 더는 안 힘들게 할 수 있냐 그 말입니다.”
화연과의 열애설을 인정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 부분이라면 처음 화연과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이미 달리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해결하고 다빈의 마음을 감싸 안아줄 자신이 있냐고 묻는 말이라면…
한결은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위약금이 예상되는 광고계약 기간이 종료되고, 화연의 입지도 조금 더 단단히 자리 잡을 시간이 지나야 하기에.
“최대한 빨리 해결할 겁니다. 그건 다빈 씨와 저. 두 사람 간의 일이니 관심 꺼주십시오.”
한선우에게 이런 말까지 듣다니, 한결은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그랬다간 내 마음이 다시 다빈이를 못 놓아주겠다고 할 수 있으니…”
적의 없는 당부였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 새로이 찾은 사랑과 이제 그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한결은 그 마음조차 달가울 리 없지만, 어쨌든 다빈과 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건 같은 마음이었다.
“할 말 다했으니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선우의 집무실을 나오는 한결의 마음이 묵직하다.
***
동호가 운전 중인 벤으로 이동 중인 한결.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손 기자님 잘 지내셨어요?”
“어, 한결 씨가 전화를 다 주고 웬일이야?“
“하하. 저 영화 개봉 앞두고 있잖아요. 그래서 인터뷰 요청 좀 드릴까 해서요”
“진짜야? 그런 거라면 우리야 언제든 OK지. 근데 좀 의외네. 인터뷰 요청을 매니저나 소속사 홍보팀이 아니고 연기자가 직접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 요청하고 말야”
평소 한결과 친분이 있던 손 기자지만 뭔가 냄새가 나는 듯하다.
“언제든 괜찮으시다면, 바로 시간 잡죠. 전 마침 스케줄이 비어서 오늘도 괜찮은데”
“오늘? 야 빨라서 좋은데?”
갑자기 먼저 전화해 와서 인터뷰하자? 분명 한결 쪽에서 무언가 인터뷰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손 기자는 기자 특유의 촉이 당겼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있다가 오후에 뵙도록 하죠. 장소는 제 매니저랑 정하시면 될 겁니다.”
“그래, 있다가 보자구”
한결은 전화를 끊고,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뭔가 복잡한 일이 있을 때 하는 한결의 오래된 습관이다.
오랫동안 한결과 함께 움직인 동호가 백미러를 통해 한결을 쳐다본다.
“형님, 인터뷰는 왜…? 아직 영화 홍보 스케줄은 안 나왔는데요.”
“……”
동호의 질문에도 한결은 별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동호야…”
한참 만에 입을 연 한결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그 영상 말이야.”
“네”
“네가 보기엔 그거 누가 한 거 같냐”
“… 그걸…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못 하는 동호의 목소리가 영 어색하다.
“그 사진 찍힌 장소에 있었던 사람… 몇 명 안 되잖아. 그날 나 오디션 심사 들어가 있을 때 누가 카메라 갖고 있다거나 사진 찍는 거 본 거 없어?”
사실 처음 영상을 보자마자, 동호는 그걸 올린 사람이 화연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날 현장에는 심사를 맡았던 4명과 오디션 당사자 화연, 다빈 그리고 그녀들의 매니저와 현장에서 진행을 돕던 조연출 정도가 다였다.
그러니 자신들의 제작 작품에 흠집을 낼 사람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오디션에서 떨어진 화연이었다.
그리고 화연의 오디션이 끝나고 다빈의 오디션 차례가 되자, 귀가해도 좋다는 조연출의 말에 알았다고 하며 가는 것 같더니 가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는 모습을 동호가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호는 섣불리 화연의 이름을 거론하지 못했다. 같은 소속사 연기자이기도 하고, 별달리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한결과 연인 사이가 아닌가.
“사진 찍는 걸 본 건 아니고…”
“다른 거라도 본 거 있어?”
“화연이 누나가, 다빈이 누나 오디션하고 있을 때 무대 뒤쪽으로 가서 보는 걸 봤어요”
음… 역시 화연이 너였구나.
한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2화 - 그녀를 위한 일
조금 전 급하게 잡은 인터뷰를 위해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결 씨가 직접 인터뷰를 하자고 해 주고 말이야. 이거 영광이야.”
“에이 왜 그러세요 기자님. 참, 기자님 매체에서 인터넷으로는 영상 인터뷰도 올리시죠?”
“응. 영상인터뷰도 올리고 지면으로도 가기도 하고. 왜 영상까지 같이 갈래?”
“어차피 인터뷰하는 김에 같이 하죠 뭐.”
“그래 그럼”
손 기자가 함께 온 후배 사진기자에게 영상촬영을 지시했다. 영상 인터뷰라고 해도 대단하게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구도, 각도, 앵글에 신경 쓰는 것과 달리 어차피 인터넷 용이라 삼각대에 카메라 한 대만 세워두고 찍을 뿐 크게 구성이란 게 없어서 복잡할 건 없었다.
“아, 손 기자님 인터뷰 주 내용은 이번에 개봉할 영화 <고공행진>이 되겠지만, 뒤에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 캐스팅에 대해서도 한 번 물어봐 주세요”
“새로 들어가는 영화라면 그 <모태솔로 탈출기> 말이야? 그거 유튜브에 영상 올라와서 요즘 시끄럽던데 괜찮겠어?”
“네”
으음…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손 기자는 동물적인 기자감각으로 직감했다.
“자, 그럼 시작할까?”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고, 사진기자가 영상 카메라의 녹화버튼을 눌렀다.
“한결 씨 이번 영화에서 맡은 역할 좀 소개 시켜 주시죠”
“네, 이번 영화에서 제가 맡은 역할은…”
*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고공행진>을 선택하게 된 이유, 촬영하면서 중점을 두었던 부분이나 에피소드, 얼마 전 있었던 사고 얘기까지 손 기자의 질문에 한결은 능숙하게 답변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한 시간여 정도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벌써 차기작은 결정하셨죠?”
손 기자가 한결의 부탁대로 <모태솔로 탈출기>의 캐스팅 관련 얘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네. <모태솔로 탈출기>라고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처음이신데요… 특별히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특별한 이유라고 할 것까진 없구요. 시나리오를 받고 재미가 있어서요. 배우야 시나리오만 좋으면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요”
“네, 그러시군요. 상대역이 지난번 <연상연하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가상 부부로 출연했던 유다빈 씨로 알려져 벌써부터 관심이 높던데요?”
“네. 저희야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하죠. 유다빈 씨랑은 이전 프로그램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춰봤던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좋은 파트너가 없을 만큼 좋은 호흡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유튜브에 유다빈 씨 캐스팅 관련해서 영상이 올라오면서 제작자와의 친분으로 캐스팅된 게 아니냐는 시선이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영상 저도 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유다빈 씨가 캐스팅되기 전부터 이 역에 유다빈 씨가 출연하면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연히도 시나리오를 본 다빈 씨도 이번 작품에 출연 의사를 보였는데, 다른 분과 최종 결정을 앞두고 연출진과 투자자분들과 저까지 참석한 가운데서 오디션이 열렸습니다.”
“김한결 씨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그 현장에 계셨군요?”
“네. 현장은 비공개였는데 그 사진과 영상이 어떻게 찍혀져서 유튜브까지 올라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다빈 씨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이 역은 그냥 유다빈 씨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분만큼 그 역할을 잘 소화해낼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멋진 연기를 보여주셨거든요. 오죽했으면, 연기를 지켜보던 제가 사전 얘기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한 부분을 직접 맞춰 보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하하, 그랬군요. 말씀을 듣고 나니 여주인공 캐스팅 관련 비하인드 영상이 아니라 한결 씨가 갑자기 올라가 다빈 씨와 연기 호흡을 맞추는 그 장면이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하하. 따로 촬영을 해 둘 걸 그랬나 보네요. 그날 오디션에서 워낙 멋진 연기를 보여주셔서 심사한 4명이 다 오디션임을 잊고 다빈 씨의 연기에 몰입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악의가 담긴 영상이 나돌아 같은 동료로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한결 씨가 이런 뒷얘기까지 해 주시니 이후부터 유다빈 씨 캐스팅 관련해 잡음이 사그라들겠네요.”
“네, 그러길 저도 바랍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가 아주 크시네요… 자칫… 이화연 씨가 질투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
화연의 얘기에 한결이 순간 멈칫, 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아 말을 이어 나갔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일에 영향을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요”
한결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 괜한 오해를 사지 않을 말을 골라 적당히 답변을 얼버무렸다.
“아하…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입니까?”
“<고공행진>개봉 후, 얼마간 홍보활동을 한 후 아마 바로 크랭크인이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
“네. 잘 알겠습니다. <고공행진>도 제목처럼 흥행하시고, 새 영화도 기대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정지 버튼이 눌러지고, 녹화가 멈추자 손 기자가 먼저 질문해왔다.
“오늘 수고 많았어. 원하던 질문과 해명이 된 거야?”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뒤에 <모태솔로 탈출기> 캐스팅 잡음 때문에 이 인터뷰 부탁한 거지?”
손 기자가 저의 없이 넌지시 물었다.
“아… 뭐, 새로 들어가는 작품에서 시작 전부터 잡음이 일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
“정말… 그 이유뿐이야?”
손 기자가 다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하. 그럼 뭐가 더 있을 것 같으신데요?”
“음… 그건 한결 씨가 알겠지. 어쨌든 오늘 내가 도와준 거 같으니… 다음번에 뭔가 특종 터트릴 게 있으면 그거…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 한다?”
“하핫. 당연하죠.”
“그래, 오늘 수고했어.”
손 기자가 한결의 어깨를 한 번 툭 쳐주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인터뷰를 마치고 카페를 나서며 손 기자는 직감했다. 김한결이 유다빈을 위해 인터뷰까지 하고 나설 정도라면, 좀 전 인터뷰에서 한결이 밝힌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임을.
하지만 그 이유가 공식적으로 기사화 될 때가 되면, 한결이 제일 먼저 자신을 찾아 사실을 말해 줄 것임을 믿어, 더 이상의 질문은 그저 담아두기로 했다.
***
한결과의 인터뷰 기사는 다음 날 곧장 기사화되었다. 노련한 손 기자의 필력에 한결의 진심이 담긴 인터뷰는 다빈의 캐스팅에 대한 의심의 눈길도 수그러들게 하였다.
지면과 인터넷으로 기사가 나가고, 몇 시간 뒤 동영상 인터뷰도 20분 정도로 편집되어 올라가자 인터넷에서의 댓글이 우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결국, 제작자와의 연인 관계라 캐스팅됐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었군요. 사실, 유다빈 경력만큼 연기 내공도 만만찮기는 하죠.
- 근데, 유튜브에 그 영상은 누가 올린 걸까요? 함께 오디션을 했다는 다른 배우가 악의적으로 올린 듯한 냄새가…
- 김한결 유다빈 잘 어울리는 듯…. 연우결 때부터 팬인데, 둘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도 기대 만땅.
- 인터뷰 영상 보니 결국 유다빈이 실력으로 된 거구만. 설사 유다빈이 제작자와 연인관계라 하더라도 유다빈의 연기력만큼은 인정.
- 연기가 되는데, 제작자랑 애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모태솔로 탈출기> 기대됨.
시끄러웠던 캐스팅에 대한 논란도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이 논란으로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크랭크인까지 간단히 광고 촬영 정도의 스케줄만 소화하며 집에서 대본 연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다빈의 집에 와 대본 연습을 도와주고 있던 미라가 먼저 한결의 인터뷰 얘기를 꺼냈다.
“너도 그 인터뷰 봤지?”
“응”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일이 없었더라도 첫 주연 영화의 상대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이 쏠렸을 터인데, 인터뷰에서 논란에 올라있는 다빈을 해명하는 말까지 해 주어 순식간에 자신의 스캔들을 잠재워 주지 않았던가.
“한결 씨 덕분에 선우 선배랑 스캔들은 잠잠해져서 다행이야. 지난번 스캔들 났을 때도 사실 별 해명 없이 넘어가서 언제고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다시 터지겠다 싶긴 하더라.”
“어차피 사실도 아닌데 뭐. 신경 안 써”
“너는 사실 아니래도 이 바닥이 어디 그러냐. 더구나 여배우한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무튼 한결 씨 덕분에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그러고 보면 한결 씨 은근 너 챙긴다…?”
“챙기긴. 가끔 공식 석상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마나 냉정한지. 무안할 정도다.”
“…왜? 그래서 서운했어?”
미라가 배시시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서운하긴! 그렇다고 내가 서운할 건 뭐라고. 그런 거 없어.”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다빈을 보아온 게 대학 때부터 벌써 몇 년인가. 미라는 다빈의 속내가 다 보이는 듯하다.
“근데… 이화연이랑은 잘 되고 있나?”
“잘 지내고 있겠지. 이번 영화 오디션도 뜬금없이 이화연이 끼어든 거 보면 둘이 아주 죽고 못 사나 보지”
“그것도 이상해. 스타 커플이 열애설 인정하고 공식 커플 된 후에 함께 드라마나 영화 출연하는 거 본 적 있어? 부부는 간혹 있긴 했지만 말야. 커플은 조용히 데이트나 하고 싶어 하지 함께 출연을 하고 싶어 하냐고. 괜히 언론에 얘깃거리만 만들어주고 신경 쓰일 텐데”
다빈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날 오디션장에서도 갑자기 한결이 올라와 자신의 연기를 도와주지 않았나. 연인과 함께 출연하고 싶었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이화연의 오디션에 올라가서 함께 대사를 맞춰주었어야 하는 게 옳다.
“아, 몰라. 대본이나 외울래”
이화연과 함께 있는 한결의 모습을 더 떠올리기 싫었다.
***
<모태솔로 탈출기> 크랭크인을 앞두고 주요 배역의 배우들과 감독이 단합대회 겸 함께 모였다.
스케줄이 없던 다빈은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모임 장소에까지 데려다준 미라는 다른 일을 보고, 파할 때쯤 데리러 오겠다며 바로 식당을 떠났다.
약속 시간 7시가 되자 주요 배우들 모두가 도착했고, 한결만이 다른 일정을 끝내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이라며 매니저 동호가 조연출에게 연락을 해 왔다.
“자, 한결 씨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우리 먼저 시작하시죠”
조금 전 급하게 잡은 인터뷰를 위해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결 씨가 직접 인터뷰를 하자고 해 주고 말이야. 이거 영광이야.”
“에이 왜 그러세요 기자님. 참, 기자님 매체에서 인터넷으로는 영상 인터뷰도 올리시죠?”
“응. 영상인터뷰도 올리고 지면으로도 가기도 하고. 왜 영상까지 같이 갈래?”
“어차피 인터뷰하는 김에 같이 하죠 뭐.”
“그래 그럼”
손 기자가 함께 온 후배 사진기자에게 영상촬영을 지시했다. 영상 인터뷰라고 해도 대단하게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구도, 각도, 앵글에 신경 쓰는 것과 달리 어차피 인터넷 용이라 삼각대에 카메라 한 대만 세워두고 찍을 뿐 크게 구성이란 게 없어서 복잡할 건 없었다.
“아, 손 기자님 인터뷰 주 내용은 이번에 개봉할 영화 <고공행진>이 되겠지만, 뒤에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 캐스팅에 대해서도 한 번 물어봐 주세요”
“새로 들어가는 영화라면 그 <모태솔로 탈출기> 말이야? 그거 유튜브에 영상 올라와서 요즘 시끄럽던데 괜찮겠어?”
“네”
으음…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손 기자는 동물적인 기자감각으로 직감했다.
“자, 그럼 시작할까?”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고, 사진기자가 영상 카메라의 녹화버튼을 눌렀다.
“한결 씨 이번 영화에서 맡은 역할 좀 소개 시켜 주시죠”
“네, 이번 영화에서 제가 맡은 역할은…”
*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고공행진>을 선택하게 된 이유, 촬영하면서 중점을 두었던 부분이나 에피소드, 얼마 전 있었던 사고 얘기까지 손 기자의 질문에 한결은 능숙하게 답변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한 시간여 정도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벌써 차기작은 결정하셨죠?”
손 기자가 한결의 부탁대로 <모태솔로 탈출기>의 캐스팅 관련 얘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네. <모태솔로 탈출기>라고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처음이신데요… 특별히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특별한 이유라고 할 것까진 없구요. 시나리오를 받고 재미가 있어서요. 배우야 시나리오만 좋으면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요”
“네, 그러시군요. 상대역이 지난번 <연상연하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가상 부부로 출연했던 유다빈 씨로 알려져 벌써부터 관심이 높던데요?”
“네. 저희야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하죠. 유다빈 씨랑은 이전 프로그램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춰봤던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좋은 파트너가 없을 만큼 좋은 호흡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유튜브에 유다빈 씨 캐스팅 관련해서 영상이 올라오면서 제작자와의 친분으로 캐스팅된 게 아니냐는 시선이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영상 저도 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유다빈 씨가 캐스팅되기 전부터 이 역에 유다빈 씨가 출연하면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연히도 시나리오를 본 다빈 씨도 이번 작품에 출연 의사를 보였는데, 다른 분과 최종 결정을 앞두고 연출진과 투자자분들과 저까지 참석한 가운데서 오디션이 열렸습니다.”
“김한결 씨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그 현장에 계셨군요?”
“네. 현장은 비공개였는데 그 사진과 영상이 어떻게 찍혀져서 유튜브까지 올라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다빈 씨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이 역은 그냥 유다빈 씨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분만큼 그 역할을 잘 소화해낼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멋진 연기를 보여주셨거든요. 오죽했으면, 연기를 지켜보던 제가 사전 얘기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한 부분을 직접 맞춰 보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하하, 그랬군요. 말씀을 듣고 나니 여주인공 캐스팅 관련 비하인드 영상이 아니라 한결 씨가 갑자기 올라가 다빈 씨와 연기 호흡을 맞추는 그 장면이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하하. 따로 촬영을 해 둘 걸 그랬나 보네요. 그날 오디션에서 워낙 멋진 연기를 보여주셔서 심사한 4명이 다 오디션임을 잊고 다빈 씨의 연기에 몰입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악의가 담긴 영상이 나돌아 같은 동료로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한결 씨가 이런 뒷얘기까지 해 주시니 이후부터 유다빈 씨 캐스팅 관련해 잡음이 사그라들겠네요.”
“네, 그러길 저도 바랍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가 아주 크시네요… 자칫… 이화연 씨가 질투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
화연의 얘기에 한결이 순간 멈칫, 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아 말을 이어 나갔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일에 영향을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요”
한결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 괜한 오해를 사지 않을 말을 골라 적당히 답변을 얼버무렸다.
“아하…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입니까?”
“<고공행진>개봉 후, 얼마간 홍보활동을 한 후 아마 바로 크랭크인이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
“네. 잘 알겠습니다. <고공행진>도 제목처럼 흥행하시고, 새 영화도 기대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정지 버튼이 눌러지고, 녹화가 멈추자 손 기자가 먼저 질문해왔다.
“오늘 수고 많았어. 원하던 질문과 해명이 된 거야?”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뒤에 <모태솔로 탈출기> 캐스팅 잡음 때문에 이 인터뷰 부탁한 거지?”
손 기자가 저의 없이 넌지시 물었다.
“아… 뭐, 새로 들어가는 작품에서 시작 전부터 잡음이 일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
“정말… 그 이유뿐이야?”
손 기자가 다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하. 그럼 뭐가 더 있을 것 같으신데요?”
“음… 그건 한결 씨가 알겠지. 어쨌든 오늘 내가 도와준 거 같으니… 다음번에 뭔가 특종 터트릴 게 있으면 그거…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 한다?”
“하핫. 당연하죠.”
“그래, 오늘 수고했어.”
손 기자가 한결의 어깨를 한 번 툭 쳐주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인터뷰를 마치고 카페를 나서며 손 기자는 직감했다. 김한결이 유다빈을 위해 인터뷰까지 하고 나설 정도라면, 좀 전 인터뷰에서 한결이 밝힌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임을.
하지만 그 이유가 공식적으로 기사화 될 때가 되면, 한결이 제일 먼저 자신을 찾아 사실을 말해 줄 것임을 믿어, 더 이상의 질문은 그저 담아두기로 했다.
***
한결과의 인터뷰 기사는 다음 날 곧장 기사화되었다. 노련한 손 기자의 필력에 한결의 진심이 담긴 인터뷰는 다빈의 캐스팅에 대한 의심의 눈길도 수그러들게 하였다.
지면과 인터넷으로 기사가 나가고, 몇 시간 뒤 동영상 인터뷰도 20분 정도로 편집되어 올라가자 인터넷에서의 댓글이 우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결국, 제작자와의 연인 관계라 캐스팅됐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었군요. 사실, 유다빈 경력만큼 연기 내공도 만만찮기는 하죠.
- 근데, 유튜브에 그 영상은 누가 올린 걸까요? 함께 오디션을 했다는 다른 배우가 악의적으로 올린 듯한 냄새가…
- 김한결 유다빈 잘 어울리는 듯…. 연우결 때부터 팬인데, 둘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도 기대 만땅.
- 인터뷰 영상 보니 결국 유다빈이 실력으로 된 거구만. 설사 유다빈이 제작자와 연인관계라 하더라도 유다빈의 연기력만큼은 인정.
- 연기가 되는데, 제작자랑 애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모태솔로 탈출기> 기대됨.
시끄러웠던 캐스팅에 대한 논란도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이 논란으로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크랭크인까지 간단히 광고 촬영 정도의 스케줄만 소화하며 집에서 대본 연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다빈의 집에 와 대본 연습을 도와주고 있던 미라가 먼저 한결의 인터뷰 얘기를 꺼냈다.
“너도 그 인터뷰 봤지?”
“응”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일이 없었더라도 첫 주연 영화의 상대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이 쏠렸을 터인데, 인터뷰에서 논란에 올라있는 다빈을 해명하는 말까지 해 주어 순식간에 자신의 스캔들을 잠재워 주지 않았던가.
“한결 씨 덕분에 선우 선배랑 스캔들은 잠잠해져서 다행이야. 지난번 스캔들 났을 때도 사실 별 해명 없이 넘어가서 언제고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다시 터지겠다 싶긴 하더라.”
“어차피 사실도 아닌데 뭐. 신경 안 써”
“너는 사실 아니래도 이 바닥이 어디 그러냐. 더구나 여배우한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무튼 한결 씨 덕분에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그러고 보면 한결 씨 은근 너 챙긴다…?”
“챙기긴. 가끔 공식 석상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마나 냉정한지. 무안할 정도다.”
“…왜? 그래서 서운했어?”
미라가 배시시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서운하긴! 그렇다고 내가 서운할 건 뭐라고. 그런 거 없어.”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다빈을 보아온 게 대학 때부터 벌써 몇 년인가. 미라는 다빈의 속내가 다 보이는 듯하다.
“근데… 이화연이랑은 잘 되고 있나?”
“잘 지내고 있겠지. 이번 영화 오디션도 뜬금없이 이화연이 끼어든 거 보면 둘이 아주 죽고 못 사나 보지”
“그것도 이상해. 스타 커플이 열애설 인정하고 공식 커플 된 후에 함께 드라마나 영화 출연하는 거 본 적 있어? 부부는 간혹 있긴 했지만 말야. 커플은 조용히 데이트나 하고 싶어 하지 함께 출연을 하고 싶어 하냐고. 괜히 언론에 얘깃거리만 만들어주고 신경 쓰일 텐데”
다빈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날 오디션장에서도 갑자기 한결이 올라와 자신의 연기를 도와주지 않았나. 연인과 함께 출연하고 싶었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이화연의 오디션에 올라가서 함께 대사를 맞춰주었어야 하는 게 옳다.
“아, 몰라. 대본이나 외울래”
이화연과 함께 있는 한결의 모습을 더 떠올리기 싫었다.
***
<모태솔로 탈출기> 크랭크인을 앞두고 주요 배역의 배우들과 감독이 단합대회 겸 함께 모였다.
스케줄이 없던 다빈은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모임 장소에까지 데려다준 미라는 다른 일을 보고, 파할 때쯤 데리러 오겠다며 바로 식당을 떠났다.
약속 시간 7시가 되자 주요 배우들 모두가 도착했고, 한결만이 다른 일정을 끝내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이라며 매니저 동호가 조연출에게 연락을 해 왔다.
“자, 한결 씨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우리 먼저 시작하시죠”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3화 - 몰래 한 키스
6명 남짓한 배우들과 감독, 조연출, 프로듀서의 앞에 놓인 잔에 잔이 채워지고, 고기가 불판에 올려져 지글지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 앞에 놓은 잔을 비운 김 감독이 앞에 앉은 다빈에게 술병을 들어 보인다.
“다빈 씨, 한잔해요. 오디션장에서 다빈 씨 연기보고 제가 완전히 반했잖습니까. 아무쪼록 우리 잘해 봐요”
다빈은 얼른 채워진 잔을 비우고, 김 감독이 주는 술을 받았다.
“네, 열심히 할게요. 전부터 영화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감독님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에이, 너무 티 나는 접대용 멘트인데요. 이제 촬영 하는 동안 계속 얼굴 볼 사인데 그런 형식적인 접대용 멘트 안 해도 돼요. 하하”
“접대용 멘트 아니에요. 감독님.”
다빈이 웃으며 대꾸했지만, 감독이 믿는 눈치는 아니다. 다빈이 한참 감독의 전작들을 들추며 접대용 멘트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린다.
“어, 한결 씨 왔네. 어서 와 한결 씨”
다빈의 잔에 술을 따라주던 김 감독의 시선도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어, 한결 씨. 이쪽으로 와요. 다빈 씨도 이쪽에 있으니 두 주연 배우들하고 얘기 좀 하게”
감독의 말에 시선을 내려보니 이미 꽤 마셨는지 다빈의 두 볼이 발그스레하다. 잠시 한결을 향하던 다빈의 시선이 다시 불판으로 내려지고, 어색함을 이기려 다빈은 괜히 조금 전 뒤집었던 고기를 다시 뒤집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부인”
한결이 장난스레 호칭을 붙였다.
“응…. 오랜만. 일전에… 인터뷰 때 내 얘기해 준거 고마웠어.”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말투. 다빈은 오랜만에 마주한 한결의 다정한 말투가 뜻밖이다.
“뭘… 상대 배우에 대해 그 정도야 뭐.”
이화연과 열애설을 인정한 뒤로는 내내 냉랭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주변에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 건가.
평소와 달리 다정한 한결이 영 적응이 안 됐다.
“두 분 연우결 때 케미도 좋았는데, 이번 작품에서 더 좋은 호흡… 제가 기대 많은 거 알죠? 나 두 사람 덕에 그냥 업혀가려는데. 한결 씨 <고공행진>도 천만 찍었던데… 우린 로코를 감안해서 4백만! 4백만, 한 번 찍어보죠.”
로맨틱코미디로 4백만이라… <고공행진> 천만에 못지않은 흥행 스코어를 주문하고 있는 김 감독이다.
8명 남짓, 많지 않은 사람이 모인 자리라 화기애애한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각자 신인 시절 얘기부터 이번 작품에 대한 얘기까지.
“참, 이번 영화 크랭크인 장면은 바닷가 씬으로 하기로 했어요. 크랭크인이니 고사도 지내야 할 테고, 좋은 기운 받아서 기분 좋게 시작하자는 뜻으로.”
바닷가 씬이면 두 주인공이 퇴근 후 갑작스레 떠난 밤 바닷가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달달한 장면이다.
“그날, 고사도 지내니까 매니저나 대표님들도 같이 오셔서 해 주시면 좋고.”
술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넘기는 다빈은 이 자리가 참 새삼스럽다.
여주인공으로 촬영 전 단합대회에 앉아있다니. 이제 정말 촬영이 며칠 남지 않았구나.
‘기대된다….’
그게 오로지 첫 주연작에 대한 기대인지, 다시 한결과 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어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목을 넘어가는 술맛이 오랜만에 다디달다.
오랜만에 술이 받는지, 아니면 한결의 다정한 태도에 기분이 풀어져서인지 다빈은 저도 모르게 제법 많은 술을 받아넘겼다.
너무 많이 마셨나, 바람 좀 쐐야겠어.
시작을 앞두고 기분 좋은 자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다빈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의 주차장 옆 정원으로 나와 바람을 쐬었다.
***
적당히 오른 취기 때문인지, 제법 쌀쌀한 밤바람이 싫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현장 분위기도 좋을 것 같아, 처음 한결과 함께 출연하는 것을 두고 고민이 했던 것에 한 시름 놓았다.
“하아…”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찬바람을 들이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 한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편에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한결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잠깐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화장실 가는 줄 알았더니 전화통화를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괜히 얼굴 부딪쳐봐야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할 것 같아 다빈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돌아섰다.
그때였다.
“뭘 그렇게 보자마자 돌아들어 가. 사람 서운하게”
“전화… 통화하는 것 같아서. 마저 해. 난 먼저 들어갈게”
“다 끝났어.”
한결은 꺼진 전화기를 흔들어 보였다.
그렇다 한들, 이제 와서 새삼 한결과 나눌만한 대화거리가 없었다.
“뭐, 어쨌든.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밤바람이 차서,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다빈의 얘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추운 게 이유라면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는 듯 한결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다빈의 어깨에 올려주었다.
“아,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어깨에 올려진 스웨터 앞섬을 바람이 들지 않게 더 꼼꼼히 여며주며 한결이 입을 뗐다.
“자, 이렇게 하면 괜찮지?”
추위가 문제가 아닌데. 너랑 같이 있는 자릴 피하기 위해서야.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최근 몇 번 본 한결은 확실히 예전의 냉랭하던 분위기에서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다. 아니, 누그러진 정도가 아니라 예전 방송 때처럼 다정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다.
“?”
무슨 심각한 얘기길래 저렇게 진지해지나 싶어 다빈이 한결을 쳐다봤다.
“화연이랑 열애설… 말이야…”
그 얘기라면 더 듣고 싶지 않다. 니들이 사귀든 말든, 사랑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거든.
“됐어. 두 사람이 사귀는 건 두 사람 문젠데…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잖아. 그 얘기라면 나 안 듣고 싶어”
하아… 갈 길이 멀구나. 무작정 날 믿고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건 욕심이겠지
“그래도 난 말하고 싶은데. 나 때문에 속상하고 서운했던 거 있으면 다 풀어. 당신에게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 설명도, 미안하단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그랬어.”
“……”
“그래도 이것만은 믿어줬으면 좋겠다. 그때 당신에게 했던 말, 행동들…. 모두 다 진심이었다고. 그때… 내가 말했었지? 어떤 상황이 와도 날 믿어달라고. 그 말 다시 한 번 부탁할게. 지금은 내가 이렇게밖에 못하는 게 너무 미안하지만…”
뒤에 생략된 수많은 말들을 눈에 가득 담아, 다빈을 쳐다보았다.
내게 말 못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거구나. 어쩌면… 그때 내가 느꼈던 이 남자의 마음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수 있겠구나…
다빈 역시 한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이 한결의 신선을 받아냈다.
말하지 않아도 않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따뜻한 눈빛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던 한결이, 다빈의 얼굴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살포시 다빈의 얼굴을 감싸 안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겹쳐지는 한결의 입술. 다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결의 입술이 아랫입술을 머금는 듯하다가, 이내 윗입술을 머금었다.
달콤한 입술은 이런 맛이리라. 한결이 키스가 점점 강해지자 다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한결의 혀를 받아들였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쉴새 없이 엉켜 드는 혀는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다빈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한결의 손이 뒤로 움직여 한 손은 다빈의 머리를, 한 손은 다빈의 허리를 끌어당겨 좀 더 밀착시켰다. 방향을 바꾸려 고개를 살짝 틀었다. 가지런한 다빈의 치아를, 혀 안쪽 구석을 모두 점령한 한결의 혀는 다빈의 혀를 쉴 틈 없이 빨아들였다.
“아유… 저기 뭐냐? 그림 좋은데…”
어디선가 날아드는 취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
다빈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한결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아, 우릴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걱정부터 앞섰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당황해하는 다빈과 달리 한결은 침착했다.
어둠 속이라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알아보진 못했을 것이다. 한결은 서둘러 다빈의 팔을 잡아 자신의 뒤로 숨겼다. 혹여 얼굴이 보이더라도 다빈만은 들키게 하지 않기 위해.
“괜찮아. 얼굴까진 못 봤을 거야. 옆으로 돌아서 뒷문으로 들어가”
낮은 소리로 다빈에게 속삭였다.
나만? 나보다 더 얼굴이 알려진 건 한결 씨잖아.
“한결 씬?”
“취객이야.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같이 들어가다 누가 보면 그게 더 복잡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가려고 하는데 한결이 잡고 있던 손을 놓기 전,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꽉 준다. 걸음을 떼려다 쥐어지는 힘에 가려다 말고 멈칫하는 다빈.
어둠 속이라 그 눈빛을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말보다 더 진한 그 무엇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이내 한결이 손을 놓아주자, 다빈은 건물을 돌아 후문으로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붙어서 키스를 나누는 남녀가 떨어지자, 취객이 다시 떠들어댔다.
“둘이 좋아 죽는 거야 당신들 맘인데 말야… 그래도 남들 눈도 좀 신경 써야지. 이런 데서 그러고 있으면… 되겠어!”
저런 취객들이야 상대 안 하는 게 최고다. 사과하면 그 사과의 말에 또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 게 뻔하니까.
‘다빈 씨도 이쯤이면 들어갔겠지.‘
한결은 취객에게 어둠 속에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겨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의 텀을 주려고 일부러 화장실까지 들렀다가 천천히 일행들이 있는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다빈의 볼이 불게 달아올라 있다.
그 모습이 되레 사랑스러워 한결의 입꼬리가 위로 스윽 올라갔다.
하지만 다빈은 눈도 못들 지경이다. 처음 한결이 식당에 들어설 때와 다른 의미로 한결을 마주하는 게 어색해졌다.
이 사람들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단둘만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게 너무 좋고, 또 부끄럽기도 해서….
6명 남짓한 배우들과 감독, 조연출, 프로듀서의 앞에 놓인 잔에 잔이 채워지고, 고기가 불판에 올려져 지글지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 앞에 놓은 잔을 비운 김 감독이 앞에 앉은 다빈에게 술병을 들어 보인다.
“다빈 씨, 한잔해요. 오디션장에서 다빈 씨 연기보고 제가 완전히 반했잖습니까. 아무쪼록 우리 잘해 봐요”
다빈은 얼른 채워진 잔을 비우고, 김 감독이 주는 술을 받았다.
“네, 열심히 할게요. 전부터 영화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감독님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에이, 너무 티 나는 접대용 멘트인데요. 이제 촬영 하는 동안 계속 얼굴 볼 사인데 그런 형식적인 접대용 멘트 안 해도 돼요. 하하”
“접대용 멘트 아니에요. 감독님.”
다빈이 웃으며 대꾸했지만, 감독이 믿는 눈치는 아니다. 다빈이 한참 감독의 전작들을 들추며 접대용 멘트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린다.
“어, 한결 씨 왔네. 어서 와 한결 씨”
다빈의 잔에 술을 따라주던 김 감독의 시선도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어, 한결 씨. 이쪽으로 와요. 다빈 씨도 이쪽에 있으니 두 주연 배우들하고 얘기 좀 하게”
감독의 말에 시선을 내려보니 이미 꽤 마셨는지 다빈의 두 볼이 발그스레하다. 잠시 한결을 향하던 다빈의 시선이 다시 불판으로 내려지고, 어색함을 이기려 다빈은 괜히 조금 전 뒤집었던 고기를 다시 뒤집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부인”
한결이 장난스레 호칭을 붙였다.
“응…. 오랜만. 일전에… 인터뷰 때 내 얘기해 준거 고마웠어.”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말투. 다빈은 오랜만에 마주한 한결의 다정한 말투가 뜻밖이다.
“뭘… 상대 배우에 대해 그 정도야 뭐.”
이화연과 열애설을 인정한 뒤로는 내내 냉랭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주변에 시선을 의식해서 그런 건가.
평소와 달리 다정한 한결이 영 적응이 안 됐다.
“두 분 연우결 때 케미도 좋았는데, 이번 작품에서 더 좋은 호흡… 제가 기대 많은 거 알죠? 나 두 사람 덕에 그냥 업혀가려는데. 한결 씨 <고공행진>도 천만 찍었던데… 우린 로코를 감안해서 4백만! 4백만, 한 번 찍어보죠.”
로맨틱코미디로 4백만이라… <고공행진> 천만에 못지않은 흥행 스코어를 주문하고 있는 김 감독이다.
8명 남짓, 많지 않은 사람이 모인 자리라 화기애애한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각자 신인 시절 얘기부터 이번 작품에 대한 얘기까지.
“참, 이번 영화 크랭크인 장면은 바닷가 씬으로 하기로 했어요. 크랭크인이니 고사도 지내야 할 테고, 좋은 기운 받아서 기분 좋게 시작하자는 뜻으로.”
바닷가 씬이면 두 주인공이 퇴근 후 갑작스레 떠난 밤 바닷가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달달한 장면이다.
“그날, 고사도 지내니까 매니저나 대표님들도 같이 오셔서 해 주시면 좋고.”
술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넘기는 다빈은 이 자리가 참 새삼스럽다.
여주인공으로 촬영 전 단합대회에 앉아있다니. 이제 정말 촬영이 며칠 남지 않았구나.
‘기대된다….’
그게 오로지 첫 주연작에 대한 기대인지, 다시 한결과 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어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목을 넘어가는 술맛이 오랜만에 다디달다.
오랜만에 술이 받는지, 아니면 한결의 다정한 태도에 기분이 풀어져서인지 다빈은 저도 모르게 제법 많은 술을 받아넘겼다.
너무 많이 마셨나, 바람 좀 쐐야겠어.
시작을 앞두고 기분 좋은 자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다빈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의 주차장 옆 정원으로 나와 바람을 쐬었다.
***
적당히 오른 취기 때문인지, 제법 쌀쌀한 밤바람이 싫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현장 분위기도 좋을 것 같아, 처음 한결과 함께 출연하는 것을 두고 고민이 했던 것에 한 시름 놓았다.
“하아…”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찬바람을 들이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 한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편에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한결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잠깐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화장실 가는 줄 알았더니 전화통화를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괜히 얼굴 부딪쳐봐야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할 것 같아 다빈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돌아섰다.
그때였다.
“뭘 그렇게 보자마자 돌아들어 가. 사람 서운하게”
“전화… 통화하는 것 같아서. 마저 해. 난 먼저 들어갈게”
“다 끝났어.”
한결은 꺼진 전화기를 흔들어 보였다.
그렇다 한들, 이제 와서 새삼 한결과 나눌만한 대화거리가 없었다.
“뭐, 어쨌든.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밤바람이 차서,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다빈의 얘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추운 게 이유라면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는 듯 한결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다빈의 어깨에 올려주었다.
“아,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어깨에 올려진 스웨터 앞섬을 바람이 들지 않게 더 꼼꼼히 여며주며 한결이 입을 뗐다.
“자, 이렇게 하면 괜찮지?”
추위가 문제가 아닌데. 너랑 같이 있는 자릴 피하기 위해서야.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최근 몇 번 본 한결은 확실히 예전의 냉랭하던 분위기에서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다. 아니, 누그러진 정도가 아니라 예전 방송 때처럼 다정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다.
“?”
무슨 심각한 얘기길래 저렇게 진지해지나 싶어 다빈이 한결을 쳐다봤다.
“화연이랑 열애설… 말이야…”
그 얘기라면 더 듣고 싶지 않다. 니들이 사귀든 말든, 사랑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거든.
“됐어. 두 사람이 사귀는 건 두 사람 문젠데…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잖아. 그 얘기라면 나 안 듣고 싶어”
하아… 갈 길이 멀구나. 무작정 날 믿고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건 욕심이겠지
“그래도 난 말하고 싶은데. 나 때문에 속상하고 서운했던 거 있으면 다 풀어. 당신에게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 설명도, 미안하단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그랬어.”
“……”
“그래도 이것만은 믿어줬으면 좋겠다. 그때 당신에게 했던 말, 행동들…. 모두 다 진심이었다고. 그때… 내가 말했었지? 어떤 상황이 와도 날 믿어달라고. 그 말 다시 한 번 부탁할게. 지금은 내가 이렇게밖에 못하는 게 너무 미안하지만…”
뒤에 생략된 수많은 말들을 눈에 가득 담아, 다빈을 쳐다보았다.
내게 말 못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거구나. 어쩌면… 그때 내가 느꼈던 이 남자의 마음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수 있겠구나…
다빈 역시 한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이 한결의 신선을 받아냈다.
말하지 않아도 않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따뜻한 눈빛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던 한결이, 다빈의 얼굴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살포시 다빈의 얼굴을 감싸 안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겹쳐지는 한결의 입술. 다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결의 입술이 아랫입술을 머금는 듯하다가, 이내 윗입술을 머금었다.
달콤한 입술은 이런 맛이리라. 한결이 키스가 점점 강해지자 다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한결의 혀를 받아들였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쉴새 없이 엉켜 드는 혀는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다빈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한결의 손이 뒤로 움직여 한 손은 다빈의 머리를, 한 손은 다빈의 허리를 끌어당겨 좀 더 밀착시켰다. 방향을 바꾸려 고개를 살짝 틀었다. 가지런한 다빈의 치아를, 혀 안쪽 구석을 모두 점령한 한결의 혀는 다빈의 혀를 쉴 틈 없이 빨아들였다.
“아유… 저기 뭐냐? 그림 좋은데…”
어디선가 날아드는 취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
다빈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한결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아, 우릴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걱정부터 앞섰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당황해하는 다빈과 달리 한결은 침착했다.
어둠 속이라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알아보진 못했을 것이다. 한결은 서둘러 다빈의 팔을 잡아 자신의 뒤로 숨겼다. 혹여 얼굴이 보이더라도 다빈만은 들키게 하지 않기 위해.
“괜찮아. 얼굴까진 못 봤을 거야. 옆으로 돌아서 뒷문으로 들어가”
낮은 소리로 다빈에게 속삭였다.
나만? 나보다 더 얼굴이 알려진 건 한결 씨잖아.
“한결 씬?”
“취객이야.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같이 들어가다 누가 보면 그게 더 복잡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가려고 하는데 한결이 잡고 있던 손을 놓기 전,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꽉 준다. 걸음을 떼려다 쥐어지는 힘에 가려다 말고 멈칫하는 다빈.
어둠 속이라 그 눈빛을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말보다 더 진한 그 무엇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이내 한결이 손을 놓아주자, 다빈은 건물을 돌아 후문으로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붙어서 키스를 나누는 남녀가 떨어지자, 취객이 다시 떠들어댔다.
“둘이 좋아 죽는 거야 당신들 맘인데 말야… 그래도 남들 눈도 좀 신경 써야지. 이런 데서 그러고 있으면… 되겠어!”
저런 취객들이야 상대 안 하는 게 최고다. 사과하면 그 사과의 말에 또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 게 뻔하니까.
‘다빈 씨도 이쯤이면 들어갔겠지.‘
한결은 취객에게 어둠 속에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겨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의 텀을 주려고 일부러 화장실까지 들렀다가 천천히 일행들이 있는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다빈의 볼이 불게 달아올라 있다.
그 모습이 되레 사랑스러워 한결의 입꼬리가 위로 스윽 올라갔다.
하지만 다빈은 눈도 못들 지경이다. 처음 한결이 식당에 들어설 때와 다른 의미로 한결을 마주하는 게 어색해졌다.
이 사람들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단둘만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게 너무 좋고, 또 부끄럽기도 해서….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4화 - 여주인공이 먼저 해야지
화조대 바닷가 앞.
철 지난 평일 바닷가 앞은 촬영 팀 외에는 달리 통제할 필요도 없이 한산했다. 백사장 한쪽에 간이 테이블이 올려지고 그 위에 흰 종이를 덮고, 스태프들은 준비한 음식을 올리며 고사상을 준비하고 있다.
크랭크인 전, 고사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은표가 백사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행히 늦은 건 아니네. 김 감독님 저 왔습니다.”
“안 오시나 해서 서운해하려던 참이었는데 시간 딱 맞추셨네요.”
사람 좋은 김 감독이 웃으며 은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 오긴요. 제가 한결이 영화 고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이제는 그게 징크스처럼 돼서 아무리 바빠도 안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가 혹시나 영화 잘 안 될까 싶어서요. 허허”
“어, 그런데 이화연 씨도 같이 오셨네요?”
김 감독이 은표의 옆에 있는 화연을 보며 반겼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오디션에서 떨어져서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우리 한결 씨 영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저희 대표님 오신다기에 따라 왔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잘 되길 빌어드리면 좋겠다 싶어서요”
“하하. 이거 고마워요. 화연 씨. 다음 작품에는 꼭 화연 씨를 일 순위로 두고 캐스팅할게요.”
“그 말씀 꼭 지키셔야 해요.”
“네네…”
김 감독과 적당히 인사를 마친 화연이 한결의 옆으로 갔다.
“한결 씨, 나 왔어.”
한결은 은표가 온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화연이까지 따라올 줄은 모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화연의 등장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다.
“우리 연인이잖아. 애인 영화 고사에 응원하러 온 거지. 모처럼 바닷바람도 쐴 겸해서. 여기 참 좋다. 크랭크인 장면이 참 예쁘겠어.”
“…그런가”
영 시큰둥한 반응이다.
마침 스태프들에 둘러싸여 고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다빈과 눈이 마주쳤다. 화연과 뭘 한 것도 아닌데, 화연이 여기 온 것만으로 다빈의 시선이 영 신경 쓰인다.
“자, 세팅 다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돼지머리까지 상 위에 올라가고, 고사상 준비가 끝이 났는지 조연출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감독님 다 됐습니다. 이제 시작하시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김 감독이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돼지의 입에 물리고는 뒤로 물러나 절을 했다. 이어 제작사 대표가 절을 끝내자, 김 감독이
“다음은 한결 씨가 하지”
한결의 차례를 알렸다.
한결이 매니저에게 맡긴 지갑을 건네받아 수표 몇 장을 꺼내 드니 그 액수에 주변에서 “와아” 함성이 짧게 일었고, 그 소리에 다시 웃음이 일었다.
“자, 다음은 누가 하실래요?”
김 감독이 빙 둘러싼 관계자들과 스태프들을 보며 물었다.
누구 하나 딱히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자 김 감독이
“홍 대표님이 먼저 하시죠”
감독의 얘기에 은표가 앞으로 나섰다. 은표의 절이 끝나자 한결의 뒤에 있던 화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감독님 저도 해도 되죠? 한결 씨 영화 저도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 저도 하고 싶은데. 이런 건 많이 할수록 좋은 거잖아요”
뜻밖에 화연의 얘기에 감독이 순간 의외다 싶었지만, 굳이 마다할 이유 또한 없어서 그러라고 하려던 참에 한결이 막고 나섰다.
“아니지! 여 주인공이 아직 안 했네. 유다빈 씨가 먼저 하시죠”
화연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한결이 한쪽에 있던 다빈을 향해 눈빛으로 어서 와서 절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안해 하는 화연을 슬쩍 보며 망설였지만, 옆에 있던 미라가
“그래, 여주인공이 먼저 해야지.”
하며 떠밀자 마지 못해 고사상 앞으로 나가 돈을 올리고 절을 했다.
무안해진 화연이 다빈이 절을 하는 동안, 입을 씰룩거리며 한결에게만 들리는 낮은 소리로 쏘아붙였다.
“한결 씨. 굳이 사람들 많은 데서 나한테 무안 줄 필요 있어?”
“여기 네가 나설 자리 아니야. 내 영화 고사에 왜 네가 와서 절까지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여주인공까지 제치고”
“그거야, 한결 씨 영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지”
“여기 와 있는 기자들 의식해서는 아니고?”
화연의 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오늘 크랭크인 현장에 가면 김한결의 차기작 크랭크인이니 공개현장이 아니라 한들 몇몇 취재진들이 자리할 것을 예상했다. 그때, 절이라도 하면서 연인의 작품을 응원하는 훈훈한 사진과 함께 기사를 기대했던 것이다.
김한결의 옆자리는 이, 이화연의 자리라고 다시 한 번 공공연히 알리고 싶었다. 현장에 있을 유다빈에게는 특히.
“굳이 의식했다기 보다… 내가 응원해 주는 모습이 나쁠 게 없겠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어.”
“화연아….”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한들, 화연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다빈에게는 모두 마음 쓰이는 일일 터. 한결은 자꾸만 화연의 행동들이 거슬렸다.
“너 지난번 캐스팅에 대해 떴던 동영상. 그거… 네가 한 거야?”
“…한결 씨. 그게… 나쁜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 난 꼭 이 작품 하고 싶었는데, 안 됐다고 하길래… 그런데 알아보니까 이 작품 투자자가 다빈 선배랑 스캔들 났던 사람이란 걸 알았고… 그래서 억울해서…”
“억울해? 네가? 원래 이 작품 네가 나 앞세워 끼워 넣기 조건 걸기 전부터 유다빈이 하기로 내정됐던 작품이었어. 네가 중간에 끼어드는 통에 없던 오디션까지 진행했던 거고. 그런데 네가 억울하다고?”
“…한결 씨….”
제 편이 아니었다. 화연은 속상하고 서운한 맘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휴우… 그만하자. 여기 기자들도 있는데 괜히 또 시끄러운 얘기 나오는 거 싫다. 고사 끝내고 바로 은표 형이랑 올라가. 그리고 다시는 여기 촬영장에 나타나지 말고. 더 이상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하면 나 배상이고 뭐고! 그냥 너랑 나 관계 사실대로 발표해 버릴 테니까”
“…!!”
화연은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그대로 뒤를 돌아 타고 왔던 밴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미라. 무슨 말을 하는진 알 수 없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흐른다는 걸 감지했다.
*
고사가 끝내고 촬영 준비를 마치고 첫 촬영은 밤바다 장면이다. 현장의 밥차에서 저녁 식사를 대강 마친 배우들은 촬영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이 대본을 들고 와 한결과 다빈에게 디렉션을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두 사람이 아직 자신들의 감정을 밝히지 않고서, 서로 마음에만 품고 있는 상태니까 너무 오버되지 않게. 알겠죠?”
“네.”
“그래도 남주 입장에선 여기서 터트릴까 말까 하는 고민이 살짝 있는 장면이니까 너무 감추지는 말고”
“네.”
“자, 그럼 촬영 들어갈까요?”
감독이 카메라 뒤 자신의 의자로 가서 앉아 “레디 액션”이 외쳐지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백사장 앞에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향해 서는 여주인공 유리. 그리고는 눈을 감고 크게 바다 내음을 들이마신다. 그때 들려오는 남주인공 선준의 목소리.
"춥지 않아?”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온 남주인공 선준이 어느새 따라왔는지 뒤에 와 선다.
“자, 커피는 조금 전에도 마셔서 이번엔 유자”
“이 밤 중에 문 연 가게도 없을 텐데 어디서 났어?”
“저쪽에 자판기가 있길래.”
“하여튼, 이선준 자상함 하나는 비교 불가다!”
여주인공 유리가 두 손으로 종이컵을 꼬옥 잡아 쥐고는, 후후 불며 한 모금을 삼킨다.
“나, 누구한테나 다 자상한 놈 아니야.”
이때 고개를 들어 시선이 교차 되는 두 주인공. 여주인공 유리가 추운지 제 팔로 팔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남주 선준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여주 유리의 어깨에 덮어준다.
이어지는 느낌 가득한 눈빛. 다빈은 그 눈빛이 너무나 깊어 순간 다음 대사를 잊어버렸다. 눈빛은 극 중 선준의 눈빛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한결의 눈빛인 것 같아서.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다.
“컷!”
감독의 컷 소리가 외쳐졌다.
그사이에도 바로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응시하던 한결은 눈빛은 감독이 가까이 오고 나서야 슬며시 다빈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좋아요. 좋은데…. 지금은 막 시작하는 단계야. 그러니까 눈빛이 너무 깊거나 슬퍼지지 않게… 음… 막 관심이 쏠리는 이성을 바라보는 정도의 느낌이 좋을 것 같아요. 조금 전 눈빛은… 뭐랄까 너무 깊어. 이미 완전 사랑에 빠진 눈빛 같거든.”
역시 감독이라 그런가. 예리했다. 한결은 자칫하다간 제 마음이 들킬까 감정 조절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촬영해야 하니 다빈이 어깨에 올려진 재킷을 벗어 한결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감독의 디렉션이 다시 다빈에게 이어진다.
“다빈 씨도… 이 부분에서… 아직은 이 사람이 날 좋아하나, 아닌가… 정도의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사랑에 확 빠진 느낌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의심하는 정도…?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감독의 말에 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시작하겠지 하는데, 감독이 코디를 불러 바람에 날린 두 사람의 의상과 헤어를 점검해 줄 것을 지시한다.
이제 시작하겠거니 하는데, 조연출이 감독에게 와서 뭐라고 얘기하자 알았다며 감독과 조연출이 저쪽으로 사라진다.
밤바다의 바람이 제법 차다. 다빈이 추운지 어깨를 움츠리는 게 보인다.
한결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극 중 선준처럼 다빈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아냐, 괜찮아. 곧 컷 들어갈 텐데”
“입고 있어. 컷 들어가면 그때 벗으면 되지. 당신 추워하는 거 신경 쓰여”
그래… 이렇게 온 신경이 나에게 쏠려 있던 사람이었지. 연우결 촬영 때만 해도. 지금… 그 마음이 다시 온 건가… 아니면, 극 중 캐릭터에 또다시 너무 몰입한 건가…
“고마워”
잠시 문제가 생겼던 부분이 해결됐는지 촬영을 알리는 소리가 이내 들려왔다.
“자, 15씬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소리에 다빈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한결에게 넘겨 주었다.
“레디 액션!”
화조대 바닷가 앞.
철 지난 평일 바닷가 앞은 촬영 팀 외에는 달리 통제할 필요도 없이 한산했다. 백사장 한쪽에 간이 테이블이 올려지고 그 위에 흰 종이를 덮고, 스태프들은 준비한 음식을 올리며 고사상을 준비하고 있다.
크랭크인 전, 고사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은표가 백사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행히 늦은 건 아니네. 김 감독님 저 왔습니다.”
“안 오시나 해서 서운해하려던 참이었는데 시간 딱 맞추셨네요.”
사람 좋은 김 감독이 웃으며 은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 오긴요. 제가 한결이 영화 고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이제는 그게 징크스처럼 돼서 아무리 바빠도 안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가 혹시나 영화 잘 안 될까 싶어서요. 허허”
“어, 그런데 이화연 씨도 같이 오셨네요?”
김 감독이 은표의 옆에 있는 화연을 보며 반겼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오디션에서 떨어져서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우리 한결 씨 영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저희 대표님 오신다기에 따라 왔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잘 되길 빌어드리면 좋겠다 싶어서요”
“하하. 이거 고마워요. 화연 씨. 다음 작품에는 꼭 화연 씨를 일 순위로 두고 캐스팅할게요.”
“그 말씀 꼭 지키셔야 해요.”
“네네…”
김 감독과 적당히 인사를 마친 화연이 한결의 옆으로 갔다.
“한결 씨, 나 왔어.”
한결은 은표가 온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화연이까지 따라올 줄은 모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화연의 등장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다.
“우리 연인이잖아. 애인 영화 고사에 응원하러 온 거지. 모처럼 바닷바람도 쐴 겸해서. 여기 참 좋다. 크랭크인 장면이 참 예쁘겠어.”
“…그런가”
영 시큰둥한 반응이다.
마침 스태프들에 둘러싸여 고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다빈과 눈이 마주쳤다. 화연과 뭘 한 것도 아닌데, 화연이 여기 온 것만으로 다빈의 시선이 영 신경 쓰인다.
“자, 세팅 다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돼지머리까지 상 위에 올라가고, 고사상 준비가 끝이 났는지 조연출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감독님 다 됐습니다. 이제 시작하시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김 감독이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돼지의 입에 물리고는 뒤로 물러나 절을 했다. 이어 제작사 대표가 절을 끝내자, 김 감독이
“다음은 한결 씨가 하지”
한결의 차례를 알렸다.
한결이 매니저에게 맡긴 지갑을 건네받아 수표 몇 장을 꺼내 드니 그 액수에 주변에서 “와아” 함성이 짧게 일었고, 그 소리에 다시 웃음이 일었다.
“자, 다음은 누가 하실래요?”
김 감독이 빙 둘러싼 관계자들과 스태프들을 보며 물었다.
누구 하나 딱히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자 김 감독이
“홍 대표님이 먼저 하시죠”
감독의 얘기에 은표가 앞으로 나섰다. 은표의 절이 끝나자 한결의 뒤에 있던 화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감독님 저도 해도 되죠? 한결 씨 영화 저도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 저도 하고 싶은데. 이런 건 많이 할수록 좋은 거잖아요”
뜻밖에 화연의 얘기에 감독이 순간 의외다 싶었지만, 굳이 마다할 이유 또한 없어서 그러라고 하려던 참에 한결이 막고 나섰다.
“아니지! 여 주인공이 아직 안 했네. 유다빈 씨가 먼저 하시죠”
화연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한결이 한쪽에 있던 다빈을 향해 눈빛으로 어서 와서 절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안해 하는 화연을 슬쩍 보며 망설였지만, 옆에 있던 미라가
“그래, 여주인공이 먼저 해야지.”
하며 떠밀자 마지 못해 고사상 앞으로 나가 돈을 올리고 절을 했다.
무안해진 화연이 다빈이 절을 하는 동안, 입을 씰룩거리며 한결에게만 들리는 낮은 소리로 쏘아붙였다.
“한결 씨. 굳이 사람들 많은 데서 나한테 무안 줄 필요 있어?”
“여기 네가 나설 자리 아니야. 내 영화 고사에 왜 네가 와서 절까지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여주인공까지 제치고”
“그거야, 한결 씨 영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지”
“여기 와 있는 기자들 의식해서는 아니고?”
화연의 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오늘 크랭크인 현장에 가면 김한결의 차기작 크랭크인이니 공개현장이 아니라 한들 몇몇 취재진들이 자리할 것을 예상했다. 그때, 절이라도 하면서 연인의 작품을 응원하는 훈훈한 사진과 함께 기사를 기대했던 것이다.
김한결의 옆자리는 이, 이화연의 자리라고 다시 한 번 공공연히 알리고 싶었다. 현장에 있을 유다빈에게는 특히.
“굳이 의식했다기 보다… 내가 응원해 주는 모습이 나쁠 게 없겠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어.”
“화연아….”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한들, 화연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다빈에게는 모두 마음 쓰이는 일일 터. 한결은 자꾸만 화연의 행동들이 거슬렸다.
“너 지난번 캐스팅에 대해 떴던 동영상. 그거… 네가 한 거야?”
“…한결 씨. 그게… 나쁜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 난 꼭 이 작품 하고 싶었는데, 안 됐다고 하길래… 그런데 알아보니까 이 작품 투자자가 다빈 선배랑 스캔들 났던 사람이란 걸 알았고… 그래서 억울해서…”
“억울해? 네가? 원래 이 작품 네가 나 앞세워 끼워 넣기 조건 걸기 전부터 유다빈이 하기로 내정됐던 작품이었어. 네가 중간에 끼어드는 통에 없던 오디션까지 진행했던 거고. 그런데 네가 억울하다고?”
“…한결 씨….”
제 편이 아니었다. 화연은 속상하고 서운한 맘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휴우… 그만하자. 여기 기자들도 있는데 괜히 또 시끄러운 얘기 나오는 거 싫다. 고사 끝내고 바로 은표 형이랑 올라가. 그리고 다시는 여기 촬영장에 나타나지 말고. 더 이상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하면 나 배상이고 뭐고! 그냥 너랑 나 관계 사실대로 발표해 버릴 테니까”
“…!!”
화연은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그대로 뒤를 돌아 타고 왔던 밴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미라. 무슨 말을 하는진 알 수 없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흐른다는 걸 감지했다.
*
고사가 끝내고 촬영 준비를 마치고 첫 촬영은 밤바다 장면이다. 현장의 밥차에서 저녁 식사를 대강 마친 배우들은 촬영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이 대본을 들고 와 한결과 다빈에게 디렉션을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두 사람이 아직 자신들의 감정을 밝히지 않고서, 서로 마음에만 품고 있는 상태니까 너무 오버되지 않게. 알겠죠?”
“네.”
“그래도 남주 입장에선 여기서 터트릴까 말까 하는 고민이 살짝 있는 장면이니까 너무 감추지는 말고”
“네.”
“자, 그럼 촬영 들어갈까요?”
감독이 카메라 뒤 자신의 의자로 가서 앉아 “레디 액션”이 외쳐지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백사장 앞에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향해 서는 여주인공 유리. 그리고는 눈을 감고 크게 바다 내음을 들이마신다. 그때 들려오는 남주인공 선준의 목소리.
"춥지 않아?”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온 남주인공 선준이 어느새 따라왔는지 뒤에 와 선다.
“자, 커피는 조금 전에도 마셔서 이번엔 유자”
“이 밤 중에 문 연 가게도 없을 텐데 어디서 났어?”
“저쪽에 자판기가 있길래.”
“하여튼, 이선준 자상함 하나는 비교 불가다!”
여주인공 유리가 두 손으로 종이컵을 꼬옥 잡아 쥐고는, 후후 불며 한 모금을 삼킨다.
“나, 누구한테나 다 자상한 놈 아니야.”
이때 고개를 들어 시선이 교차 되는 두 주인공. 여주인공 유리가 추운지 제 팔로 팔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남주 선준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여주 유리의 어깨에 덮어준다.
이어지는 느낌 가득한 눈빛. 다빈은 그 눈빛이 너무나 깊어 순간 다음 대사를 잊어버렸다. 눈빛은 극 중 선준의 눈빛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한결의 눈빛인 것 같아서.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다.
“컷!”
감독의 컷 소리가 외쳐졌다.
그사이에도 바로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응시하던 한결은 눈빛은 감독이 가까이 오고 나서야 슬며시 다빈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좋아요. 좋은데…. 지금은 막 시작하는 단계야. 그러니까 눈빛이 너무 깊거나 슬퍼지지 않게… 음… 막 관심이 쏠리는 이성을 바라보는 정도의 느낌이 좋을 것 같아요. 조금 전 눈빛은… 뭐랄까 너무 깊어. 이미 완전 사랑에 빠진 눈빛 같거든.”
역시 감독이라 그런가. 예리했다. 한결은 자칫하다간 제 마음이 들킬까 감정 조절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촬영해야 하니 다빈이 어깨에 올려진 재킷을 벗어 한결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감독의 디렉션이 다시 다빈에게 이어진다.
“다빈 씨도… 이 부분에서… 아직은 이 사람이 날 좋아하나, 아닌가… 정도의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사랑에 확 빠진 느낌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의심하는 정도…?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감독의 말에 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시작하겠지 하는데, 감독이 코디를 불러 바람에 날린 두 사람의 의상과 헤어를 점검해 줄 것을 지시한다.
이제 시작하겠거니 하는데, 조연출이 감독에게 와서 뭐라고 얘기하자 알았다며 감독과 조연출이 저쪽으로 사라진다.
밤바다의 바람이 제법 차다. 다빈이 추운지 어깨를 움츠리는 게 보인다.
한결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극 중 선준처럼 다빈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아냐, 괜찮아. 곧 컷 들어갈 텐데”
“입고 있어. 컷 들어가면 그때 벗으면 되지. 당신 추워하는 거 신경 쓰여”
그래… 이렇게 온 신경이 나에게 쏠려 있던 사람이었지. 연우결 촬영 때만 해도. 지금… 그 마음이 다시 온 건가… 아니면, 극 중 캐릭터에 또다시 너무 몰입한 건가…
“고마워”
잠시 문제가 생겼던 부분이 해결됐는지 촬영을 알리는 소리가 이내 들려왔다.
“자, 15씬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소리에 다빈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한결에게 넘겨 주었다.
“레디 액션!”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5화 - 키스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여튼, 이선준 자상함 하나는 비교 불가다!”
“나, 누구한테나 다 자상한 놈 아니야.”
“후훗, 그래? 내 보기엔 누구한테나 다 자상하던데”
남주의 마음을 아직 알아채지 못한 여주 유리가 무심코 던진 말에 발끈한 남주 선준. 여주 유리를 쳐다본다. 쳐다보는 눈빛에 덩달아 따라서 쳐다보는 여주.
극 중 유리의 눈빛이겠지만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한결은 이 여자를 품에 안아, 그 입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은 촬영 중. 사적인 감정과 연기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신 차리자.
자신을 타이르며 다시 연기에 집중하려는 듯하다가 한결이 갑자기 표정을 풀어버린다.
이를 알아챈 감독이 “컷”을 외치자, 다빈은 한결에게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감독이 다가오자 한결이
“감독님, 이 부분에서 대사를 치는 것보다 키스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본에 없는 제안에 감독이 한결에게 되물었다.
“키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빈 역시도, 뜬금없는 한결의 키스 씬 제의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결을 쳐다봤다.
“네! 아직 시작단계긴 하지만 남주는 분명 여주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젊은 청춘 남녀가 늦은 밤, 밤바다에 단둘만 있어요. 그리고 여주가 자극하는 멘트를 던지는데… 이때 뭔가 보란 듯이 남주가 키스를 하면서 둘의 감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요”
한결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다. 잠깐 고민을 하던 김 감독이 한결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대본에는 없지만. 그럼 키스까지 이어가고 다빈 씨는 처음에는 놀란 느낌으로 가다가 받아들이는 느낌 정도로 한 번 가봅시다.”
키스 씬을 추가하기로 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레디 액션!”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누구한테나 다 자상한 놈 아니야.”
남주 선준의 대사가 먼저 시작됐다.
“후훗, 그래? 내 보기엔 누구한테나 다 자상하던데”
여주 유리의 대사가 이어졌다.
이내, 여주를 향하는 남주의 눈빛. 눈빛이 뜨겁다. 둘의 시선이 한참을 교차하는 듯싶다가 이내 성큼 다가와서는 여주 유리를 품 안에 안은 선준이 입술을 맞춘다.
카메라 테이크로 기교를 부리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에서의 키스는 사실적인 느낌의 전달을 위해 키스 정도는 실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지금 다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는 한결의 키스가 사심 가득한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키스 인지는 다빈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촬영 중이라는 생각도 잊었는지, 키스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게 극 중 주인공 선준과 유리인지, 연기를 하고 있는 한결과 다빈인지 모를 정도로 한결과 다빈은 연기와 실제를 가리지 못하고 키스에 빠져들었다.
“컷!”
둘의 입술이 수줍음을 가득 담고, 붙었다 떼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김 감독의 컷이 외쳐졌다.
조금만 더 있다가 외쳐주시지. 한결은 아쉽기만 했다.
“와, 그림 좋은데… 예쁘다. 이번 씬은 그럼 키스로 가기로 하고, 카메라 반대쪽에서 한 번 더 가볼게요. 준비됐죠? 자, 레디 액션”
아쉬운 마음도 잠시, 한결의 갓 시작되는 연인들의 설렘 가득한 키스는 다시 시작됐다.
***
첫 촬영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첫 씬이 밤바다 씬이라 새벽 4시까지 바닷가의 찬 바람을 맞았더니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다빈의 몸은 으슬으슬 한기가 계속됐다.
“이제 겨우 첫 촬영을 마쳤을 뿐인데, 여기서 감기라도 들면 곤란한데”
미라에게 말해서 약이라도 사다 달라고 할까 싶다가 지금 이 시간에 문을 연 약국도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고 눕는데 벨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미라가 몸이 안 좋은 걸 알고 약이라도 사 왔나 싶어 입은 옷 그대로 문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미라니?”
방문 바깥쪽에서 별 대꾸가 없다.
“?”
문을 열려다 말고 다시, 미라냐고 재차 확인했더니 그제야 문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나야. 부인”
한결 씨?
다빈이 문을 열자, 아직 씻지도 않았는지 조금 전 촬영 때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한결이 손에 들고 있는 걸 다빈에게 내민다.
“찬 바닷바람 많이 맞아서 당신 컨디션 떨어지는 것 같길래. 일단 이거라도 먹고 자”
한결이 내민 약 봉지 안에는 따뜻한 쌍화탕 한 병과 알약이 들어 있었다.
“이 시간에 이걸 어디서 사 왔어?”
“24시간 하는 약국에서”
“24시간 하는 약국?”
여긴 서울도 아닌 화진포. 여기서 사는 사람도 아니라 이곳 지리가 익숙하지도 않을 텐데, 대체 어디까지 가서 24시간 하는 약국을 찾아 이 약을 사 온 걸까. 그러느라 아직 숙소도 못 들어간 것 같은 차림의 한결이 약을 건네며 다빈에게 다짐을 받는다.
“바로 먹고, 이불 따뜻하게 덮고 자. 그럼 아침에는 가뿐할 거야”
“응… 고마워 한결 씨”
“이 정도야 뭘. 상대 배우가 감기로 골골하면, 같이 호흡 맞추기 힘들잖아. 그럼 푹 쉬고 낼 촬영 때 보자”
“응…”
다빈에게서 대답을 들은 한결이 뒤를 돌아 아래층 자신의 숙소로 내려갔다. 다빈은 문을 닫지 않고,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공개 연인이 엄연히 있는 남자의 배려를 이렇게 무작정 받아도 되는 건가. 그렇다고 외면하기는 한결을 향한 마음이 이미 너무 커져 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쌍화탕과 알약을 보며, 다빈은 고마움과 함께 복잡한 마음이 교차 되었다.
한결이 주고 간 약을 먹고 자리에 누운 다빈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번 촬영 전 키스를 나눈 것에서부터, 오늘 바닷가에서 굳이 키스 장면을 넣자고 한 거, 그리고 조금 전 어렵게 사 왔을 감기약까지… 분명 그저 함께 촬영하는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로 눈감아 버리기엔 그의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마음을 받아 줄 것인가.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김한결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아.’
자신들의 직업이 남들의 눈을 사는 이런 직업이 아니었다고 해도, 복잡할 문제이건만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쉬운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 더욱 결정을 어려웠다. 둘이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이화연은…?
이화연과 헤어지고 자신을 사귄다는 게 알려지면 팬들과 언론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복잡하기만 한 문제였다. 거듭 생각을 해도 달리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고민만 계속하다 다빈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촬영은 영화의 엔딩 부분에 해당하는 장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랑하게 된 남녀 주인공이 함께 왔던 이 바닷가를 다시 찾아와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이었는데, 바닷가 장면의 촬영을 위해 내려온 김에 같은 장소가 배경인 장면을 연결해 찍게 된 것이다.
초반부 장면과 후반부 장면은 배우들의 감정선이나, 촬영을 거듭하면서 연기에 몰입하면서 달라져 후반부의 장면은 이렇게 초반에 연결해서 찍는 건 꺼리는 편이지만, 두 사람은 원래 친분이 있던 터였고 화진포까지 내려온 김에 경비도 아낄 겸 찍고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오늘 촬영할 엔딩 장면은 두 주인공의 키스 장면이다. 어제는 얼떨결에 추가된 장면이었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대본에 나와 있는 장면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결은 촬영장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내내 가글을 입에 달고 다니고 있다. 마치 키스 장면을 처음 찍는 사람처럼. 아니, 다빈과의 키스가 처음인 사람처럼.
다빈과의 키스가 처음도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후면 다빈과 키스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춘기 소년의 첫 키스에 대한 기대처럼 설레고 떨리기만 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행여 좋지 않은 구취라도 날까 싶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글, 군것질 하나 먹고는 가글, 좀 전부터 줄곧 가글가글 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키스 씬 장면이 기대돼서인지, 다빈을 조금이라도 일찍 보기 위해서인지 한결은 한 시간이나 일찍 촬영장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는지, 가글을 하며 촬영장을 돌며 스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도 촬영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때, 촬영준비로 분주한 스태프들 사이로 보이는 반가운 얼굴. 다빈이 밴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스태프들에게 맑게 인사를 건네는 다빈의 표정 역시도 왠지 모르게 조금 들떠 보였다. 인사를 건네며 현장을 한 번 쭉 훑어보는 눈에 한결이 들어왔다. 먼저 가서 인사를 할까 싶다가 그냥 이따가 촬영 시작할 때 보면 되지 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자신을 발견한 한결이 한 손에는 대본을 든 채 다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등 뒤에 태양을 등지고 걸어오는 이 조각 같은 남자에게 그야말로 후광이 비치는 느낌마저 들었다.
왜 저렇게 잘 생겨 보이는 건 또 뭐야. 가슴 설레게.
“왔어?”
“응…”
듣고 보니, 연우결 촬영도 아닌데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리고 데뷔는 더 까마득한 인간이 번번이 반말이다. 그게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안심되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컨디션은 어때?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응. 어제 사다 준 약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가뿐해. 고마워”
“다행이네.”
“근데 왜?”
자신에게 왜 왔냐는 소리다. 용건이 없으면 남녀주인공이 사담도 못 나누나. 용건을 묻는 다빈의 말에 서운함이 살짝 지나갔지만, 한결은 티 내지 않고 대본을 펼쳐 보였다.
“오늘 촬영 장면 말이야. 어떻게 할 건지 얘기를 좀 맞춰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촬영 장면이라면… 키스 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키스 씬을 아름답게 담기 위해서 배우나 연출진은 고민을 많이 한다. 때문에 촬영 전 각도나 진하기 정도 등을 미리 말을 맞추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새삼 한결이 다가와 키스 씬에 대해 얘기 하자고 하니, 다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한결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응. 어떻게 할까?”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여튼, 이선준 자상함 하나는 비교 불가다!”
“나, 누구한테나 다 자상한 놈 아니야.”
“후훗, 그래? 내 보기엔 누구한테나 다 자상하던데”
남주의 마음을 아직 알아채지 못한 여주 유리가 무심코 던진 말에 발끈한 남주 선준. 여주 유리를 쳐다본다. 쳐다보는 눈빛에 덩달아 따라서 쳐다보는 여주.
극 중 유리의 눈빛이겠지만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한결은 이 여자를 품에 안아, 그 입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은 촬영 중. 사적인 감정과 연기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신 차리자.
자신을 타이르며 다시 연기에 집중하려는 듯하다가 한결이 갑자기 표정을 풀어버린다.
이를 알아챈 감독이 “컷”을 외치자, 다빈은 한결에게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감독이 다가오자 한결이
“감독님, 이 부분에서 대사를 치는 것보다 키스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본에 없는 제안에 감독이 한결에게 되물었다.
“키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빈 역시도, 뜬금없는 한결의 키스 씬 제의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결을 쳐다봤다.
“네! 아직 시작단계긴 하지만 남주는 분명 여주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젊은 청춘 남녀가 늦은 밤, 밤바다에 단둘만 있어요. 그리고 여주가 자극하는 멘트를 던지는데… 이때 뭔가 보란 듯이 남주가 키스를 하면서 둘의 감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요”
한결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다. 잠깐 고민을 하던 김 감독이 한결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대본에는 없지만. 그럼 키스까지 이어가고 다빈 씨는 처음에는 놀란 느낌으로 가다가 받아들이는 느낌 정도로 한 번 가봅시다.”
키스 씬을 추가하기로 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레디 액션!”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누구한테나 다 자상한 놈 아니야.”
남주 선준의 대사가 먼저 시작됐다.
“후훗, 그래? 내 보기엔 누구한테나 다 자상하던데”
여주 유리의 대사가 이어졌다.
이내, 여주를 향하는 남주의 눈빛. 눈빛이 뜨겁다. 둘의 시선이 한참을 교차하는 듯싶다가 이내 성큼 다가와서는 여주 유리를 품 안에 안은 선준이 입술을 맞춘다.
카메라 테이크로 기교를 부리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에서의 키스는 사실적인 느낌의 전달을 위해 키스 정도는 실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지금 다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는 한결의 키스가 사심 가득한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키스 인지는 다빈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촬영 중이라는 생각도 잊었는지, 키스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게 극 중 주인공 선준과 유리인지, 연기를 하고 있는 한결과 다빈인지 모를 정도로 한결과 다빈은 연기와 실제를 가리지 못하고 키스에 빠져들었다.
“컷!”
둘의 입술이 수줍음을 가득 담고, 붙었다 떼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김 감독의 컷이 외쳐졌다.
조금만 더 있다가 외쳐주시지. 한결은 아쉽기만 했다.
“와, 그림 좋은데… 예쁘다. 이번 씬은 그럼 키스로 가기로 하고, 카메라 반대쪽에서 한 번 더 가볼게요. 준비됐죠? 자, 레디 액션”
아쉬운 마음도 잠시, 한결의 갓 시작되는 연인들의 설렘 가득한 키스는 다시 시작됐다.
***
첫 촬영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첫 씬이 밤바다 씬이라 새벽 4시까지 바닷가의 찬 바람을 맞았더니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다빈의 몸은 으슬으슬 한기가 계속됐다.
“이제 겨우 첫 촬영을 마쳤을 뿐인데, 여기서 감기라도 들면 곤란한데”
미라에게 말해서 약이라도 사다 달라고 할까 싶다가 지금 이 시간에 문을 연 약국도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고 눕는데 벨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미라가 몸이 안 좋은 걸 알고 약이라도 사 왔나 싶어 입은 옷 그대로 문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미라니?”
방문 바깥쪽에서 별 대꾸가 없다.
“?”
문을 열려다 말고 다시, 미라냐고 재차 확인했더니 그제야 문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나야. 부인”
한결 씨?
다빈이 문을 열자, 아직 씻지도 않았는지 조금 전 촬영 때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한결이 손에 들고 있는 걸 다빈에게 내민다.
“찬 바닷바람 많이 맞아서 당신 컨디션 떨어지는 것 같길래. 일단 이거라도 먹고 자”
한결이 내민 약 봉지 안에는 따뜻한 쌍화탕 한 병과 알약이 들어 있었다.
“이 시간에 이걸 어디서 사 왔어?”
“24시간 하는 약국에서”
“24시간 하는 약국?”
여긴 서울도 아닌 화진포. 여기서 사는 사람도 아니라 이곳 지리가 익숙하지도 않을 텐데, 대체 어디까지 가서 24시간 하는 약국을 찾아 이 약을 사 온 걸까. 그러느라 아직 숙소도 못 들어간 것 같은 차림의 한결이 약을 건네며 다빈에게 다짐을 받는다.
“바로 먹고, 이불 따뜻하게 덮고 자. 그럼 아침에는 가뿐할 거야”
“응… 고마워 한결 씨”
“이 정도야 뭘. 상대 배우가 감기로 골골하면, 같이 호흡 맞추기 힘들잖아. 그럼 푹 쉬고 낼 촬영 때 보자”
“응…”
다빈에게서 대답을 들은 한결이 뒤를 돌아 아래층 자신의 숙소로 내려갔다. 다빈은 문을 닫지 않고,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공개 연인이 엄연히 있는 남자의 배려를 이렇게 무작정 받아도 되는 건가. 그렇다고 외면하기는 한결을 향한 마음이 이미 너무 커져 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쌍화탕과 알약을 보며, 다빈은 고마움과 함께 복잡한 마음이 교차 되었다.
한결이 주고 간 약을 먹고 자리에 누운 다빈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번 촬영 전 키스를 나눈 것에서부터, 오늘 바닷가에서 굳이 키스 장면을 넣자고 한 거, 그리고 조금 전 어렵게 사 왔을 감기약까지… 분명 그저 함께 촬영하는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로 눈감아 버리기엔 그의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마음을 받아 줄 것인가.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김한결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아.’
자신들의 직업이 남들의 눈을 사는 이런 직업이 아니었다고 해도, 복잡할 문제이건만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쉬운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 더욱 결정을 어려웠다. 둘이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이화연은…?
이화연과 헤어지고 자신을 사귄다는 게 알려지면 팬들과 언론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복잡하기만 한 문제였다. 거듭 생각을 해도 달리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고민만 계속하다 다빈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촬영은 영화의 엔딩 부분에 해당하는 장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랑하게 된 남녀 주인공이 함께 왔던 이 바닷가를 다시 찾아와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이었는데, 바닷가 장면의 촬영을 위해 내려온 김에 같은 장소가 배경인 장면을 연결해 찍게 된 것이다.
초반부 장면과 후반부 장면은 배우들의 감정선이나, 촬영을 거듭하면서 연기에 몰입하면서 달라져 후반부의 장면은 이렇게 초반에 연결해서 찍는 건 꺼리는 편이지만, 두 사람은 원래 친분이 있던 터였고 화진포까지 내려온 김에 경비도 아낄 겸 찍고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오늘 촬영할 엔딩 장면은 두 주인공의 키스 장면이다. 어제는 얼떨결에 추가된 장면이었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대본에 나와 있는 장면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결은 촬영장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내내 가글을 입에 달고 다니고 있다. 마치 키스 장면을 처음 찍는 사람처럼. 아니, 다빈과의 키스가 처음인 사람처럼.
다빈과의 키스가 처음도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후면 다빈과 키스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춘기 소년의 첫 키스에 대한 기대처럼 설레고 떨리기만 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행여 좋지 않은 구취라도 날까 싶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글, 군것질 하나 먹고는 가글, 좀 전부터 줄곧 가글가글 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키스 씬 장면이 기대돼서인지, 다빈을 조금이라도 일찍 보기 위해서인지 한결은 한 시간이나 일찍 촬영장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는지, 가글을 하며 촬영장을 돌며 스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도 촬영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때, 촬영준비로 분주한 스태프들 사이로 보이는 반가운 얼굴. 다빈이 밴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스태프들에게 맑게 인사를 건네는 다빈의 표정 역시도 왠지 모르게 조금 들떠 보였다. 인사를 건네며 현장을 한 번 쭉 훑어보는 눈에 한결이 들어왔다. 먼저 가서 인사를 할까 싶다가 그냥 이따가 촬영 시작할 때 보면 되지 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자신을 발견한 한결이 한 손에는 대본을 든 채 다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등 뒤에 태양을 등지고 걸어오는 이 조각 같은 남자에게 그야말로 후광이 비치는 느낌마저 들었다.
왜 저렇게 잘 생겨 보이는 건 또 뭐야. 가슴 설레게.
“왔어?”
“응…”
듣고 보니, 연우결 촬영도 아닌데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리고 데뷔는 더 까마득한 인간이 번번이 반말이다. 그게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안심되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컨디션은 어때?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응. 어제 사다 준 약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가뿐해. 고마워”
“다행이네.”
“근데 왜?”
자신에게 왜 왔냐는 소리다. 용건이 없으면 남녀주인공이 사담도 못 나누나. 용건을 묻는 다빈의 말에 서운함이 살짝 지나갔지만, 한결은 티 내지 않고 대본을 펼쳐 보였다.
“오늘 촬영 장면 말이야. 어떻게 할 건지 얘기를 좀 맞춰야 할 것 같아서.”
오늘 촬영 장면이라면… 키스 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키스 씬을 아름답게 담기 위해서 배우나 연출진은 고민을 많이 한다. 때문에 촬영 전 각도나 진하기 정도 등을 미리 말을 맞추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새삼 한결이 다가와 키스 씬에 대해 얘기 하자고 하니, 다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한결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응. 어떻게 할까?”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6화 - 못 참겠다. 유다빈
“엔딩 장면이고, 이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좀 진하게 가도 될 것 같은데… 어때?”
“진…하게? …그…그래.”
“그럼, 얼굴을 감싸고 하는 게 좋을까, 허리를 안고 하는 게 좋을까?”
“그… 글쎄… 뭐가 더 좋을까…”
다빈의 기분을 묻는 게 아니었다. 화면에 잡힐 아름다운 구도, 어떤 모습이 관객들에게 더 사랑스러워 보일 거냐고 묻는 질문일 텐데, 다빈은 마치 자신과의 키스가 어떤 게 더 좋냐는 질문처럼 들려 얼굴이 붉어졌다.
“둘 다 바다 배경으로 해서 담으면 그림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있다가 감독님하고 다시 상의해 보자.”
“그래. 그럼, 입술만 대고 있는 상태에서 카메라 도는 거지?”
“15세 관람가 드라마야? 입술만 대고 있게. 이거 영화야. 진짜로 딥하게 해야지.”
새삼스레 이런 신인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게 낯부끄러웠다. 상대방이 한결이 아니었으면 그다지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을 텐데… 상대가 한결이다 보니 이런 부분까지 궁금해졌고, 생각하니 떨려왔다. 이러다 촬영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아, 그렇지. 영화지. 내가 영화 속 키스 장면은 처음이라. 드라마는 대충 하는 척만 하잖아.”
“카메라가 가까이 들어와서 잡을 수 있으니까, 당신도 그냥 입만 대고 있으면 안 돼. 열심히 해야지.”
“어, 알았어. 실수 안 할게”
“뭐, 실수해 주면 더 좋고.”
미소로 답변하던 한결은 이번 장면만은 NG가 나면 날수록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야, NG 없이 한 방에 갈 거야. 그러니까 처음엔 부드럽게 가다가 강렬하게 가는 건가? 리드는 아무래도 남자 쪽에서 하는 거로?”
“뭐 사랑하는 사이에 리드가 어디 있어.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거지.”
“이건 연기잖아. 본능이 어디 있어. 사소한 부분도 다 맞추고 해야 실수가 없지. 그러니까 말야 처음엔 이쪽 방향에서 시작할까?”
다빈이 한결에게 가까이 다가가 키스를 하는 양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보였다. 순간, 내내 아무렇지 않게 키스 씬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한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냥 얼굴의 각도만 맞춰보는 건데도 가까이에서 자신의 입술을 응시하며 고개를 살짝 돌리는 다빈을 보며, 순간 당황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주위에 보는 눈들만 없었다면, 저 입에 그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걸 한결은 간신히 눌러 참았다. 아, 준비를 대체 얼마 동안이나 하는 거야. 빨리 시작 안 하나.
둘이 한참 키스 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김 감독이 다가오며 말했다.
“와, 성실한 배우들 같으니라고. 벌써들 와 있었네요.”
“네… 이따가 찍을 키스 씬에 대해 얘기 좀 나누고 있었어요.”
“그러게. 일단 첫 테이크는 카메라가 이쪽에서 잡을게요. 아무래도 바다가 배경으로 나오는 게 멋지니까”
감독이 두 배우를 세워 놓고 한 방향에서 카메라가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쪽 카메라에 잘 보이게 얼굴 가리지 않게 잘 키스해 주시고.”
“손은 어떡할까요? 얼굴에 둘까요? 안고 할까요?”
“음… 둘 다 그림이 괜찮을 거 같은데…. 일단 두 개 다 찍어 놓고 나중에 촬영본 보고 더 괜찮은 거로 가죠.”
감독의 설명에 둘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엔딩 장면이라 길게 갈 거니까, 처음엔 얼굴 가까이서 찍고 그다음 카메라 점점 뒤로 빠지면서 전체 바다 배경으로 다 나오게 찍을 테니까 컷 소리 날 때까지 길게 가주세요. 카메라 빠지고 나서부터는 그냥 입만 대고 있어도 되고, 그건 뭐 알아서들 하시고”
김 감독이 설명하며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초반부에는 리얼하게 가는 거 말 안 해도 알죠?”
“네”
“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리얼? 걱정 마세요. 감독님. 리얼의 진수를 보여 드릴 테니. 한결의 가슴 속에 벌써부터 음난 마귀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두 손을 맞잡고, 마주 선 두 남녀. 상대의 눈을 사랑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결과 다빈이 아니라, 선준과 유리… 극 중 인물이어야만 하거늘 이렇게 코앞에서 자신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다빈을 마주하고 있자니 한결은 자꾸만 자신이 선준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반듯한 이마, 귓가에 달라붙은 잔머리와 뽀얀 목덜미 그 아래서 일정한 간격으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가슴을 보고 있자니 한결은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사랑해…”
선준이 된 한결이 유리로 제 앞에 서 있는 다빈을 꼭 끌어안아 가슴에 묻었다. 제 가슴에 얼굴은 묻은 다빈에게서 그린 향이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이어, 선준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유리가 선준을 쳐다보자 좀 전보다 훨씬 그윽해진 눈빛. 선준이 유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이윽고 포개지는 두 입술. 아랫입술을 핥던 남자의 입술이 위로 올라가 윗입술을 핥는다.
부드럽지만 뜨거운 입맞춤. 카메라가 둘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잡고 있다.
원래는 키스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카메라 각도나 앵글, 화면에 비칠 모습을 상상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촬영만은 카메라에 예쁘게 찍히고 있는지, 행여 내 움직임에 상대의 얼굴이 화면을 가리지는 않는지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진심으로 탐하기 시작했고, 키스는 점점 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밀고 들어온 한결의 혀가 다빈의 연약한 입속 안쪽까지 들이닥치자, 온몸에 전기가 내린 듯 찌릿해졌고 점점 더 정신은 몽롱해져 이성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은 촬영 중이잖아…
멀찌감치서 모니터로 두 사람의 키스를 바라보고 있는 김 감독의 표정이 흐뭇하다.
“햐… 그림 좋은데…”
키스에 완전히 몰입한 한결이 잠시 입술을 떼고, 방향을 바꾸고는 다시 다빈의 입술을 찾았다. 다시 부딪친 입술은 이내 다빈의 입속으로 밀고 들어와 세차게 다빈이 혀와 엉겨 들었다.
이게 촬영인지… 아닌지… 구분할 정신도 없이 키스에 흠뻑 빠져있는 다빈의 다리에 점점 힘이 빠져나가 조금만 더 키스를 나눴다간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키스까지 왜 이렇게 감미로운 거야. 이 남자 대체 못 하는 건 뭐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다빈이 혀의 움직임을 멈췄다. 이를 눈치챈 한결이 더욱 거세게 다빈의 혀를 빨아들였다 놓았다. 이대로 절대 놓아 줄 수 없다는 듯.
그때 울리는 소리
“컷!”
감독의 컷 소리에 어렵사리 다빈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뗀 한결이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 뜨거워진 눈빛으로 다빈을 내려봤다. 이는 분명 연기가 아닌, 사랑하는 이를 갈구하며 뜨거워진 사내의 눈빛이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던 한결이 그대로 다빈을 제 품으로 안았다.
“못 참겠다. 유다빈”
이 무슨… 저쪽에서 스태프 한 무더기가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고. 다빈이 얼른 한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빈의 걱정과는 달리 이 모습을 지켜보는 감독과 스태프들은 그저 연기의 연결 정도로 생각했지 두 사람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두지는 않는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같은 장면을 카메라 방향을 바꿔 몇 번을 더 찍은 후, 엔딩 키스 장면은 끝이 났다. 한결은 이 촬영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해가 지고 있어 낮 장면인 이 장면을 더 이상 촬영할 수는 없었다.
화진포 바닷가에서의 촬영은 모두 끝이 났고, 촬영장은 현장 정리에 분주했다.
자신의 벤에 탄 한결은 촬영이 이미 끝났음에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형님, 이제 올라갈까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 동호가 물었다.
“유다빈 씨는 아직 안 올라간 거 같지?”
“네, 좀 전까지 미라 누나 왔다 갔다 하는 거 봤으니까, 아마 아직 계신 거 같아요”
한결은 손에 쥐 핸드폰을 벌써 몇 분째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 이따가 서울 올라가서 잠깐 볼 수 있어?
읽은 문자를 다시 한 번 고심하며 들여다보더니 전송버튼을 눌렀다.
***
의상을 갈아입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금 전 키스 장면을 떠올리고 있던 다빈은 휴대폰 소리에 문자를 확인하니 한결이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늦을 텐데 보자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한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지 않겠다. 생각했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영화 동반출연에 지난번 키스까지. 분명 둘 사이에는 정리해야 할 게 있었다.
- 그래 알았어. 이따가 올라가서 연락할게.
다빈은 고민 끝에 적은 글에 전송버튼을 눌렀다.
***
촬영장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니 이미 10시가 다 되어갔다. 집에 도착한 한결은 동호를 돌려보내고, 간단히 샤워 후 옷만 갈아입고 다빈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샤워 후, 바쓰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현관 벨이 울린다. 누가 온 모양이었다. 동호가 다시 돌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현관으로 나서 인터폰 화면을 보니 화연이었다.
문은 그대로 둔 채 통화 버튼을 눌러 한결이 물었다.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야?”
화연은 인터폰 화면에 와인 병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마도 와인이나 한잔하자며 온 모양이다. 이전에는 집이 멀지 않은 화연이 종종 와인을 가지고 와 곧잘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잠깐만”
한결은 문을 여는 대신 방으로 들어가, 가운을 벗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을 열어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한결이 직접 나오자 화연이
“뭐하러 직접 나와. 문만 열면 되지!”
하며 들어서려 발을 떼는데, 한결이 문 앞을 막아섰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좀 전에 동호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한결 씨 내일 스케줄 없다며? 그래서 와인이나 한잔하자고 갖고 왔지!”
한결은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들이닥친 화연의 등장이 영 달갑지 않다.
“나 지금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
“엔딩 장면이고, 이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좀 진하게 가도 될 것 같은데… 어때?”
“진…하게? …그…그래.”
“그럼, 얼굴을 감싸고 하는 게 좋을까, 허리를 안고 하는 게 좋을까?”
“그… 글쎄… 뭐가 더 좋을까…”
다빈의 기분을 묻는 게 아니었다. 화면에 잡힐 아름다운 구도, 어떤 모습이 관객들에게 더 사랑스러워 보일 거냐고 묻는 질문일 텐데, 다빈은 마치 자신과의 키스가 어떤 게 더 좋냐는 질문처럼 들려 얼굴이 붉어졌다.
“둘 다 바다 배경으로 해서 담으면 그림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있다가 감독님하고 다시 상의해 보자.”
“그래. 그럼, 입술만 대고 있는 상태에서 카메라 도는 거지?”
“15세 관람가 드라마야? 입술만 대고 있게. 이거 영화야. 진짜로 딥하게 해야지.”
새삼스레 이런 신인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게 낯부끄러웠다. 상대방이 한결이 아니었으면 그다지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을 텐데… 상대가 한결이다 보니 이런 부분까지 궁금해졌고, 생각하니 떨려왔다. 이러다 촬영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아, 그렇지. 영화지. 내가 영화 속 키스 장면은 처음이라. 드라마는 대충 하는 척만 하잖아.”
“카메라가 가까이 들어와서 잡을 수 있으니까, 당신도 그냥 입만 대고 있으면 안 돼. 열심히 해야지.”
“어, 알았어. 실수 안 할게”
“뭐, 실수해 주면 더 좋고.”
미소로 답변하던 한결은 이번 장면만은 NG가 나면 날수록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야, NG 없이 한 방에 갈 거야. 그러니까 처음엔 부드럽게 가다가 강렬하게 가는 건가? 리드는 아무래도 남자 쪽에서 하는 거로?”
“뭐 사랑하는 사이에 리드가 어디 있어.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거지.”
“이건 연기잖아. 본능이 어디 있어. 사소한 부분도 다 맞추고 해야 실수가 없지. 그러니까 말야 처음엔 이쪽 방향에서 시작할까?”
다빈이 한결에게 가까이 다가가 키스를 하는 양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보였다. 순간, 내내 아무렇지 않게 키스 씬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한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냥 얼굴의 각도만 맞춰보는 건데도 가까이에서 자신의 입술을 응시하며 고개를 살짝 돌리는 다빈을 보며, 순간 당황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주위에 보는 눈들만 없었다면, 저 입에 그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걸 한결은 간신히 눌러 참았다. 아, 준비를 대체 얼마 동안이나 하는 거야. 빨리 시작 안 하나.
둘이 한참 키스 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김 감독이 다가오며 말했다.
“와, 성실한 배우들 같으니라고. 벌써들 와 있었네요.”
“네… 이따가 찍을 키스 씬에 대해 얘기 좀 나누고 있었어요.”
“그러게. 일단 첫 테이크는 카메라가 이쪽에서 잡을게요. 아무래도 바다가 배경으로 나오는 게 멋지니까”
감독이 두 배우를 세워 놓고 한 방향에서 카메라가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쪽 카메라에 잘 보이게 얼굴 가리지 않게 잘 키스해 주시고.”
“손은 어떡할까요? 얼굴에 둘까요? 안고 할까요?”
“음… 둘 다 그림이 괜찮을 거 같은데…. 일단 두 개 다 찍어 놓고 나중에 촬영본 보고 더 괜찮은 거로 가죠.”
감독의 설명에 둘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엔딩 장면이라 길게 갈 거니까, 처음엔 얼굴 가까이서 찍고 그다음 카메라 점점 뒤로 빠지면서 전체 바다 배경으로 다 나오게 찍을 테니까 컷 소리 날 때까지 길게 가주세요. 카메라 빠지고 나서부터는 그냥 입만 대고 있어도 되고, 그건 뭐 알아서들 하시고”
김 감독이 설명하며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초반부에는 리얼하게 가는 거 말 안 해도 알죠?”
“네”
“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리얼? 걱정 마세요. 감독님. 리얼의 진수를 보여 드릴 테니. 한결의 가슴 속에 벌써부터 음난 마귀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두 손을 맞잡고, 마주 선 두 남녀. 상대의 눈을 사랑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결과 다빈이 아니라, 선준과 유리… 극 중 인물이어야만 하거늘 이렇게 코앞에서 자신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다빈을 마주하고 있자니 한결은 자꾸만 자신이 선준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반듯한 이마, 귓가에 달라붙은 잔머리와 뽀얀 목덜미 그 아래서 일정한 간격으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가슴을 보고 있자니 한결은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사랑해…”
선준이 된 한결이 유리로 제 앞에 서 있는 다빈을 꼭 끌어안아 가슴에 묻었다. 제 가슴에 얼굴은 묻은 다빈에게서 그린 향이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이어, 선준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유리가 선준을 쳐다보자 좀 전보다 훨씬 그윽해진 눈빛. 선준이 유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이윽고 포개지는 두 입술. 아랫입술을 핥던 남자의 입술이 위로 올라가 윗입술을 핥는다.
부드럽지만 뜨거운 입맞춤. 카메라가 둘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잡고 있다.
원래는 키스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카메라 각도나 앵글, 화면에 비칠 모습을 상상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촬영만은 카메라에 예쁘게 찍히고 있는지, 행여 내 움직임에 상대의 얼굴이 화면을 가리지는 않는지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진심으로 탐하기 시작했고, 키스는 점점 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밀고 들어온 한결의 혀가 다빈의 연약한 입속 안쪽까지 들이닥치자, 온몸에 전기가 내린 듯 찌릿해졌고 점점 더 정신은 몽롱해져 이성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은 촬영 중이잖아…
멀찌감치서 모니터로 두 사람의 키스를 바라보고 있는 김 감독의 표정이 흐뭇하다.
“햐… 그림 좋은데…”
키스에 완전히 몰입한 한결이 잠시 입술을 떼고, 방향을 바꾸고는 다시 다빈의 입술을 찾았다. 다시 부딪친 입술은 이내 다빈의 입속으로 밀고 들어와 세차게 다빈이 혀와 엉겨 들었다.
이게 촬영인지… 아닌지… 구분할 정신도 없이 키스에 흠뻑 빠져있는 다빈의 다리에 점점 힘이 빠져나가 조금만 더 키스를 나눴다간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키스까지 왜 이렇게 감미로운 거야. 이 남자 대체 못 하는 건 뭐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다빈이 혀의 움직임을 멈췄다. 이를 눈치챈 한결이 더욱 거세게 다빈의 혀를 빨아들였다 놓았다. 이대로 절대 놓아 줄 수 없다는 듯.
그때 울리는 소리
“컷!”
감독의 컷 소리에 어렵사리 다빈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뗀 한결이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 뜨거워진 눈빛으로 다빈을 내려봤다. 이는 분명 연기가 아닌, 사랑하는 이를 갈구하며 뜨거워진 사내의 눈빛이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던 한결이 그대로 다빈을 제 품으로 안았다.
“못 참겠다. 유다빈”
이 무슨… 저쪽에서 스태프 한 무더기가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고. 다빈이 얼른 한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빈의 걱정과는 달리 이 모습을 지켜보는 감독과 스태프들은 그저 연기의 연결 정도로 생각했지 두 사람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두지는 않는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같은 장면을 카메라 방향을 바꿔 몇 번을 더 찍은 후, 엔딩 키스 장면은 끝이 났다. 한결은 이 촬영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해가 지고 있어 낮 장면인 이 장면을 더 이상 촬영할 수는 없었다.
화진포 바닷가에서의 촬영은 모두 끝이 났고, 촬영장은 현장 정리에 분주했다.
자신의 벤에 탄 한결은 촬영이 이미 끝났음에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형님, 이제 올라갈까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 동호가 물었다.
“유다빈 씨는 아직 안 올라간 거 같지?”
“네, 좀 전까지 미라 누나 왔다 갔다 하는 거 봤으니까, 아마 아직 계신 거 같아요”
한결은 손에 쥐 핸드폰을 벌써 몇 분째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 이따가 서울 올라가서 잠깐 볼 수 있어?
읽은 문자를 다시 한 번 고심하며 들여다보더니 전송버튼을 눌렀다.
***
의상을 갈아입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금 전 키스 장면을 떠올리고 있던 다빈은 휴대폰 소리에 문자를 확인하니 한결이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늦을 텐데 보자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한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지 않겠다. 생각했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영화 동반출연에 지난번 키스까지. 분명 둘 사이에는 정리해야 할 게 있었다.
- 그래 알았어. 이따가 올라가서 연락할게.
다빈은 고민 끝에 적은 글에 전송버튼을 눌렀다.
***
촬영장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니 이미 10시가 다 되어갔다. 집에 도착한 한결은 동호를 돌려보내고, 간단히 샤워 후 옷만 갈아입고 다빈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샤워 후, 바쓰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현관 벨이 울린다. 누가 온 모양이었다. 동호가 다시 돌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현관으로 나서 인터폰 화면을 보니 화연이었다.
문은 그대로 둔 채 통화 버튼을 눌러 한결이 물었다.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야?”
화연은 인터폰 화면에 와인 병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마도 와인이나 한잔하자며 온 모양이다. 이전에는 집이 멀지 않은 화연이 종종 와인을 가지고 와 곧잘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잠깐만”
한결은 문을 여는 대신 방으로 들어가, 가운을 벗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을 열어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한결이 직접 나오자 화연이
“뭐하러 직접 나와. 문만 열면 되지!”
하며 들어서려 발을 떼는데, 한결이 문 앞을 막아섰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좀 전에 동호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한결 씨 내일 스케줄 없다며? 그래서 와인이나 한잔하자고 갖고 왔지!”
한결은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들이닥친 화연의 등장이 영 달갑지 않다.
“나 지금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7화 - 사랑해
“이 시간에?”
지금 막 화진포에서 서울로 올라온 걸 알고 있는 화연은 한결이 이 밤에 갈 데가 있다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응. 그러니 오늘은 안 되겠다. 그리고 다음에도… 이렇게 맘대로 찾아오는 건 사양할게”
점점 자신을 대하는 게 차가워지기만 하는 한결을 보고 있자니, 화연은 가슴이 먹먹해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혹시…. 다빈 선배… 보러 가는 거야?”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던 한결이
“응”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 어쩌려고 그래? 다빈 선배랑 뭐, 연애라도 하겠다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지금 상황, 계약 그런 거 다 신경 안 쓰려고. 그런 거야 뭐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겠지.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졌다.”
한결의 뜻은 단호해 보였다. 와인을 들고 있던 화연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
화연을 보내고 바로 다빈의 집으로 향한 한결이 다빈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문자를 보냈다.
- 지금 도착했어. 나와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요기를 때우고 있던 다빈이 한결의 문자를 받고는 모자를 찾아 눌러 쓰고는 집을 나섰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니,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결이 나와 조수석 문을 열고 다빈을 태웠다.
“피곤하지 않아?”
다빈의 컨디션을 묻는 한결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럽다.
“응. 괜찮아. 내일 촬영 없으니 낼 쉬어도 되고”
“그래? 그럼 좀 멀리 가도 되지?”
“멀리? 어디?”
대답 대신 한결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근데… 우리 이렇게 만나도 돼?”
“안 될 건 뭔데?”
“한결 씨… 이화연 씨랑… 화연 씨가 알면 안 좋아할 텐데”
“화연이 신경 쓸 거 없어.”
“신경 쓸 거 없다니, 한결 씨 애인이잖아…”
“후… 가려면 좀 걸리니까, 피곤할 텐데 좀 자둬. 도착하면 깨울게”
한결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다빈의 손을 끌어와 깍지를 끼어 꼭 잡았다.
“한…. 결…. 씨…”
애인도 있는 남자와 이래도 되는 건지… 이러면 안 되는데… 복잡한 심경의 눈으로 다빈이 한결을 쳐다보자
“괜찮아. 걱정하지 마.”
한결이 다빈을 안심시켰다.
한결이 잡아 준 손은 따뜻했다. 맞잡은 손바닥으로 한결의 심장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 겨우 손 하나 잡은 것뿐인데 이토록 떨리고, 두근거리다니. 이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다빈은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려 작게 휴… 숨을 내쉬었다.
그 시간이 짧아도 좋다. 지금 이 순간만은 복잡한 생각 따윈 밀어버리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둬 보리라 마음을 먹어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맞잡은 손의 온기에 두근두근 거리다 다빈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네비를 종료시키고, 시동을 끈 한결이 몸을 돌려 다빈을 쳐다보았다.
단잠에 빠진 건지, 자는 모습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한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는 옆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겨주었다. 그게 간지러웠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다빈이 이내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자신의 자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결이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다빈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돼서, 허리를 세워 다시 앉았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네. 다 온 거야?”
“응.”
한결이 여전히 그윽한 눈빛으로 다빈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다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다빈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차마 한결의 얼굴을 쳐다볼 수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어디야 여기?”
“아직 해가 뜨려면 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잠깐 내릴래?”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한결이 먼저 내려서는 차 뒤로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열어 다빈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해를 품은 하늘에서 어렴풋이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여기, 지난번에 왔었던 그 전나무 길이네”
“응. 기억하네”
“그럼, 이 길 참 좋았어. 그때 이후로 몇 번 오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렇다니 다행이네. 여기서 그때 내가 고백했었잖아.”
그랬었다. 처음 한결의 마음을 보여 준 곳. 그리고 방송용이 아니라 진짜 둘 만의 첫 키스를 나눈 곳.
“미안해. 그 고백 지켜주지도 못하고 오해한 채로 둬서…”
“처음 열애설을 인정했을 땐, 무슨 사정이 있겠지 했었어. 그래서 그렇게 발표는 했었어도 내게 와서 설명이든, 해명이든 해 줄줄 알았었는데…”
한결이 다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날 당신의 집 앞으로 갔다가 당신이 한선우와 있는 걸 봤어. 그 모습에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지.”
한결을 본 이후부터 한 번도 선우에게 마음을 준 적 없었는데 하필… 그날 함께 있는 모습을 봤구나.
“선우 오빠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야…”
“알아, 지금은. 그래서 당신한테 더 미안해. 내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당신한테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그땐 한선우랑 있는 모습에 너무 화가 나서 당신한테 사실을 묻고 싶지도, 내가 열애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어.”
그랬었구나. 열애설이 진짜가 아녔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던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운해하고 속앓이를 했었는데… 진작 말이나 해주지… 그랬으면 혼자 가슴 아파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간의 속앓이가 다시 생각나 다빈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한결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손을 들어 다빈의 얼굴을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내주었다.
“울지마…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하잖아… 그때 말 못해서 미안해. 오랫동안 오해하게 둬서 미안해.”
흘러내리던 눈물은 한결의 미안하다는 말에 더 크게 쏟아져 내렸다. 한결은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멈추고 다빈의 들썩이는 어깨를 그대로 안았다.
아, 이 품을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던가. 다시 이 품에 안길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싶어 눈물을 흘린 날 역시 적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차디찬 표정과 말에 얼마나 가슴 쓰려 했었던가.
한결의 품에 안긴 다빈의 어깨가 조그맣게 들썩거렸다.
“미안해… 내가 못나서… 그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열애설을 인정하는 게 아니었는데….”
한결은 다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서로의 심장이 소리가 다 들릴 만큼 한 치의 틈도 없었다.
그때 다빈의 눈에 한결의 목걸이 끝에 매달려 있는 낯익은 반지가 들어왔다.
“이 반지…”
<연상연하 우리 결혼했어요> 에 출연할 때 한결이 선물했던 그 커플링 반지였다.
“응. 맞어. 내가 당신과 나눠 꼈던 그 커플링이야.”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화연 씨가 끼고 있던 그 반지는 뭐야? 정말 화연 씨 말대로 당신이 선물한 거야?”
“그럴 리가! 화연이가 내가 선물했다고 그렇게 말해?”
“당신이 선물했다고는 안 했지만, 선물 받은 거라고 해서 난 당연히 당신이 한 줄 알았지.”
“결단코 난 아냐. 이 반지는 정말 당신과 둘만 나눠 끼려고 한 반지야. 방송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정말 내 맘 그대로야. 그래서 화연이가 그 똑같은 반지 갖고 있는 걸 보고도 내내 목에 이렇게 끼워서 하고 다녔어. 어차피 나와의 커플링은 당신에게 준 그 반지 하나니까.”
한결의 얘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이던 다빈이 제 손을 들어 보인다.
다빈의 움직임에 따라 한결의 눈길이 머문 다빈의 손가락에 한결과 똑같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이거 다시 끼고 있었어, 얼마 전부터. 그럼… 나 이화연 씨한텐 안 미안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제 더는 누구 눈치 안 보고 편하게 당신 만나고 사랑할 거야.”
“그랬다가, 기자들이나 팬들이 눈치라도 채면 어떡해?”
“어떡하긴. 우리 둘이 사귄다고 인정해야지.”
“또, 열애설을 인정하겠다고? 완전 바람둥이 이미지로 굳겠어.”
“괜찮아. 이미지야 어떻게 되든. 내 사랑의 끝은 이제 당신이 될 거거든. 사랑해… 유다빈”
한결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던 다빈이 얼굴을 들어 한결을 쳐다보았다.
“나도…”
“…사랑해…”
이윽고 그대로 내려와 입술에 꽂히는 한결의 입술.
둘은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점점 더 강해졌다. 마음을 숨길 필요도 이젠 없어졌다. 이제 당신은 내 사람이라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강하게 밀려오는 키스에 다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세상이 끝난다면, 그와 키스를 하며 그 끝을 맞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키스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거세게 다빈의 혀를 빨아들이던 한결의 혀가 다빈의 입속에서 거침없이 움직였다. 입속 안쪽의 여린 살을 훑으며, 입안 미세한 감각이 있는 곳에 닿자, 손끝이 찌릿찌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다빈도 적극적으로 한결에게 키스를 돌려주기 시작했다.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나 또한 널 사랑하고 원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다빈의 키스가 적극적이 되자 한결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달아올랐다. 더 이상 했다가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 되어서 입술이 떨어졌다. 숨을 내쉬는 다빈의 입술 위에 한결이 다시 한 번 짧게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해가 떠 아침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키스에 빠져 있었던 거야.
한결과 키스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이 이렇게나 지난 줄 알지 못했다.
“이 시간에?”
지금 막 화진포에서 서울로 올라온 걸 알고 있는 화연은 한결이 이 밤에 갈 데가 있다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응. 그러니 오늘은 안 되겠다. 그리고 다음에도… 이렇게 맘대로 찾아오는 건 사양할게”
점점 자신을 대하는 게 차가워지기만 하는 한결을 보고 있자니, 화연은 가슴이 먹먹해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혹시…. 다빈 선배… 보러 가는 거야?”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던 한결이
“응”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 어쩌려고 그래? 다빈 선배랑 뭐, 연애라도 하겠다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지금 상황, 계약 그런 거 다 신경 안 쓰려고. 그런 거야 뭐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겠지.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졌다.”
한결의 뜻은 단호해 보였다. 와인을 들고 있던 화연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
화연을 보내고 바로 다빈의 집으로 향한 한결이 다빈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문자를 보냈다.
- 지금 도착했어. 나와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요기를 때우고 있던 다빈이 한결의 문자를 받고는 모자를 찾아 눌러 쓰고는 집을 나섰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니,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결이 나와 조수석 문을 열고 다빈을 태웠다.
“피곤하지 않아?”
다빈의 컨디션을 묻는 한결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럽다.
“응. 괜찮아. 내일 촬영 없으니 낼 쉬어도 되고”
“그래? 그럼 좀 멀리 가도 되지?”
“멀리? 어디?”
대답 대신 한결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근데… 우리 이렇게 만나도 돼?”
“안 될 건 뭔데?”
“한결 씨… 이화연 씨랑… 화연 씨가 알면 안 좋아할 텐데”
“화연이 신경 쓸 거 없어.”
“신경 쓸 거 없다니, 한결 씨 애인이잖아…”
“후… 가려면 좀 걸리니까, 피곤할 텐데 좀 자둬. 도착하면 깨울게”
한결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다빈의 손을 끌어와 깍지를 끼어 꼭 잡았다.
“한…. 결…. 씨…”
애인도 있는 남자와 이래도 되는 건지… 이러면 안 되는데… 복잡한 심경의 눈으로 다빈이 한결을 쳐다보자
“괜찮아. 걱정하지 마.”
한결이 다빈을 안심시켰다.
한결이 잡아 준 손은 따뜻했다. 맞잡은 손바닥으로 한결의 심장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 겨우 손 하나 잡은 것뿐인데 이토록 떨리고, 두근거리다니. 이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다빈은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려 작게 휴… 숨을 내쉬었다.
그 시간이 짧아도 좋다. 지금 이 순간만은 복잡한 생각 따윈 밀어버리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둬 보리라 마음을 먹어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맞잡은 손의 온기에 두근두근 거리다 다빈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네비를 종료시키고, 시동을 끈 한결이 몸을 돌려 다빈을 쳐다보았다.
단잠에 빠진 건지, 자는 모습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한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는 옆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겨주었다. 그게 간지러웠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다빈이 이내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자신의 자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결이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다빈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돼서, 허리를 세워 다시 앉았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네. 다 온 거야?”
“응.”
한결이 여전히 그윽한 눈빛으로 다빈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다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다빈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차마 한결의 얼굴을 쳐다볼 수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어디야 여기?”
“아직 해가 뜨려면 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잠깐 내릴래?”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한결이 먼저 내려서는 차 뒤로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열어 다빈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해를 품은 하늘에서 어렴풋이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여기, 지난번에 왔었던 그 전나무 길이네”
“응. 기억하네”
“그럼, 이 길 참 좋았어. 그때 이후로 몇 번 오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렇다니 다행이네. 여기서 그때 내가 고백했었잖아.”
그랬었다. 처음 한결의 마음을 보여 준 곳. 그리고 방송용이 아니라 진짜 둘 만의 첫 키스를 나눈 곳.
“미안해. 그 고백 지켜주지도 못하고 오해한 채로 둬서…”
“처음 열애설을 인정했을 땐, 무슨 사정이 있겠지 했었어. 그래서 그렇게 발표는 했었어도 내게 와서 설명이든, 해명이든 해 줄줄 알았었는데…”
한결이 다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날 당신의 집 앞으로 갔다가 당신이 한선우와 있는 걸 봤어. 그 모습에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지.”
한결을 본 이후부터 한 번도 선우에게 마음을 준 적 없었는데 하필… 그날 함께 있는 모습을 봤구나.
“선우 오빠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야…”
“알아, 지금은. 그래서 당신한테 더 미안해. 내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당신한테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그땐 한선우랑 있는 모습에 너무 화가 나서 당신한테 사실을 묻고 싶지도, 내가 열애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어.”
그랬었구나. 열애설이 진짜가 아녔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던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운해하고 속앓이를 했었는데… 진작 말이나 해주지… 그랬으면 혼자 가슴 아파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간의 속앓이가 다시 생각나 다빈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한결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손을 들어 다빈의 얼굴을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내주었다.
“울지마…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하잖아… 그때 말 못해서 미안해. 오랫동안 오해하게 둬서 미안해.”
흘러내리던 눈물은 한결의 미안하다는 말에 더 크게 쏟아져 내렸다. 한결은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멈추고 다빈의 들썩이는 어깨를 그대로 안았다.
아, 이 품을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던가. 다시 이 품에 안길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싶어 눈물을 흘린 날 역시 적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차디찬 표정과 말에 얼마나 가슴 쓰려 했었던가.
한결의 품에 안긴 다빈의 어깨가 조그맣게 들썩거렸다.
“미안해… 내가 못나서… 그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열애설을 인정하는 게 아니었는데….”
한결은 다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서로의 심장이 소리가 다 들릴 만큼 한 치의 틈도 없었다.
그때 다빈의 눈에 한결의 목걸이 끝에 매달려 있는 낯익은 반지가 들어왔다.
“이 반지…”
<연상연하 우리 결혼했어요> 에 출연할 때 한결이 선물했던 그 커플링 반지였다.
“응. 맞어. 내가 당신과 나눠 꼈던 그 커플링이야.”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화연 씨가 끼고 있던 그 반지는 뭐야? 정말 화연 씨 말대로 당신이 선물한 거야?”
“그럴 리가! 화연이가 내가 선물했다고 그렇게 말해?”
“당신이 선물했다고는 안 했지만, 선물 받은 거라고 해서 난 당연히 당신이 한 줄 알았지.”
“결단코 난 아냐. 이 반지는 정말 당신과 둘만 나눠 끼려고 한 반지야. 방송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정말 내 맘 그대로야. 그래서 화연이가 그 똑같은 반지 갖고 있는 걸 보고도 내내 목에 이렇게 끼워서 하고 다녔어. 어차피 나와의 커플링은 당신에게 준 그 반지 하나니까.”
한결의 얘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이던 다빈이 제 손을 들어 보인다.
다빈의 움직임에 따라 한결의 눈길이 머문 다빈의 손가락에 한결과 똑같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이거 다시 끼고 있었어, 얼마 전부터. 그럼… 나 이화연 씨한텐 안 미안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제 더는 누구 눈치 안 보고 편하게 당신 만나고 사랑할 거야.”
“그랬다가, 기자들이나 팬들이 눈치라도 채면 어떡해?”
“어떡하긴. 우리 둘이 사귄다고 인정해야지.”
“또, 열애설을 인정하겠다고? 완전 바람둥이 이미지로 굳겠어.”
“괜찮아. 이미지야 어떻게 되든. 내 사랑의 끝은 이제 당신이 될 거거든. 사랑해… 유다빈”
한결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던 다빈이 얼굴을 들어 한결을 쳐다보았다.
“나도…”
“…사랑해…”
이윽고 그대로 내려와 입술에 꽂히는 한결의 입술.
둘은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부드럽게 시작된 키스는 점점 더 강해졌다. 마음을 숨길 필요도 이젠 없어졌다. 이제 당신은 내 사람이라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강하게 밀려오는 키스에 다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세상이 끝난다면, 그와 키스를 하며 그 끝을 맞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키스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거세게 다빈의 혀를 빨아들이던 한결의 혀가 다빈의 입속에서 거침없이 움직였다. 입속 안쪽의 여린 살을 훑으며, 입안 미세한 감각이 있는 곳에 닿자, 손끝이 찌릿찌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다빈도 적극적으로 한결에게 키스를 돌려주기 시작했다.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나 또한 널 사랑하고 원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다빈의 키스가 적극적이 되자 한결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달아올랐다. 더 이상 했다가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이 되어서 입술이 떨어졌다. 숨을 내쉬는 다빈의 입술 위에 한결이 다시 한 번 짧게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해가 떠 아침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키스에 빠져 있었던 거야.
한결과 키스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이 이렇게나 지난 줄 알지 못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8화 - 취중연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언젠가 한결이 녹음해준 음악을 듣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어제와는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세상은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세상을 보는 제 눈은 어제와는 달랐다. 창가로 내리쬐는 햇살도 사랑스러웠고,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싱그러웠고, 집안을 가득 채운 커피 향은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분. 한결의 사랑이라는 오로라가 제 몸을 감싸 보호막을 형성해주기라도 한 듯 몸이 붕 떠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기분이랄까. 아침부터 다빈의 입에서 흥얼거리던 콧노래는 끝날 줄을 몰랐다.
한결은 뭐 하고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한결에게서 문자가 왔다.
- 이따가 촬영장에 같이 갈래? 내가 데리러 갈게
문자를 확인한 다빈 역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신들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결은 이제 굳이 숨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다들 보란 듯 대놓고 연애하며 떠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 아냐, 이따가 미라 오기로 했어. 촬영장 가서 만나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지 한결에게 바로 답문이 왔다.
- 왜?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데리러 갈게
다빈도 곧장 답문을 보냈다.
- 사람들이 의심해. 굳이 남들 입방아에 오를 필요 없잖아. 조금 조심하는 게 편하지
- 난 이제 그런 거 상관 안 할 건데. 당신이 그러는 편이 편하면 그렇게 해.
연애를 시작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괜히 ‘이 사람이 내 사랑이에요’하고 자랑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빈 역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면 이화연과의 결별설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을 겪을 건 한결이었기에 다빈은 그 마음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조금만 숨겼다가 한결의 새 연애를 팬들이 좀 더 편하게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때 그때 알려도 충분할 것이다.
***
미라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촬영장에 도착하니, 이미 도착해 있던 한결이 다빈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왔어?”
“응. 일찍 왔네?”
“여기 오면 당신을 볼 수 있단 생각에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이 더디게 가길래 그냥 와서 기다리자 싶어 일찍 와버렸지”
“아유… 동호 씨가 힘들겠다. 담부턴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지 마.”
자신을 신경 써주는 다빈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한결이 웃으면서 말했다.
“후훗, 알았어, 알아서 할게”
오늘 촬영장면은 남주인 선준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서로 얼굴조차 볼일이 없어진 여주가 회식 때 술을 마시고, 남주가 보고 싶어서 울음을 터트리게 되고, 그 소릴 들은 남주가 한밤중에 여주의 집 앞까지 찾아오는 장면이었다.
“오늘 술 취하는 장면이던데? 좀 어렵겠더라. 과하면 오버 같고 부족하면 느낌이 전달이 안 될 테고.”
한결이 다빈의 장면에 대해 걱정을 표했다.
“그러게… 그래서 여러 각도고 고민해 봤는데… 카메라에 어떻게 담길지 모르겠네.”
“에이 엄살은! 잘하잖아. 왜 그래 연기 경력이 몇 년인데.”
“맞다… 내가 한결 씨 보다, 한참 선배지… 나이도 그렇고”
이럴 때, 굳이 선후배는 왜 따져.
“원한다면 선배님, 선배님 해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해줘?”
“아… 아냐…”
절대 그건 싫었다. 한결에게 선배나 누나 따위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호칭은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건 자신이 한결에게서 여자가 아님을 말하는 것 같아서.
“나…. 사실 연우결 끝나고 나서 어쩌다 마주칠 때 한결 씨가 날 어떻게 부를까 걱정 많이 했거든.”
“뭘 그런 걸 걱정해?”
“그렇잖아. 아무리 방송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부인… 부인… 이렇게 부르며 반말하던 사람이 방송 끝났다고 딱 선을 그으면서 선배나 누나 이러면서 막 존댓말 깍듯이 쓰고 그러면 내 기분이 얼마나 이상하겠어.”
“… 그런가”
“뭐든 그랬었는데,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아서 안심했었어. 이화연 씨랑 열애설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날 당신이라 불러주고, 반말을 계속해 주는 게 아직은 그다지 먼 사이는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아서”
“하하… 그랬구나… 여하튼 여자들은 참 복잡해…”
둘이 그렇게 편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벌써 촬영 준비가 끝나는지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소리가 들렸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여주 유리의 회식 자리. 퇴사로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남주 선준이 오늘 회식 자리에 온다는 소리에 기대하고 있던 유리의 귀에 못 온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준이 못 온대요.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야근해야 하나 봐요.”
…휴. 못 오는구나. 선준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 실망감이 먹물처럼 퍼지는 감정이 그대로 다빈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유리는 속상한 마음에 연거푸 술을 마셔댄다. 그리곤 속이 울렁거려오고, 다시 한 잔을 비워내고 잔을 내려놓는 표정에서 버거운 표정이 드러난다.
이내 화장실로 가는 유리. 꽥꽥거리며 쭈그려 앉아 속을 게워 내는 모습을 카메라가 뒤에서 잡고 있다.
그때
“컷”
김 감독이 다가와 묻는다.
“다빈 씨, 술 좀 마셔요?”
“네… 웬만큼은요…”
속이 울렁거려 토하는 모습이 영 사실감이 없었나? 감독의 질문에 다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연기가 나쁜 건 아닌데… 뭐랄까 다른 데서 많이 보던 연기랄까. 좀 더 사실감 있게 갔으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음… 술 좀 할 줄 알면 술을 좀 마셔보고 할래요? 아무래도 맨정신에 토하는 연기보다야 좀 취기가 있는 상태에 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 거 같은데…”
‘와 영화는 진짜 술을 마시기도 하는구나.’ 지금껏 몇십 편의 드라마에 출연해 봤지만, 실제 술을 먹으면서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보다는 리얼리티가 중시되는 영화 현장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있기도 했다.
“네. 그럴게요”
다빈의 동의에 김 감독에 조연출을 시켜 술을 사 오게 지시했고, 이내 소주병과 간단한 안주가 담긴 검은 봉지가 배달되어 왔다.
혼자 마시기에 머쓱할 것 같아 한결이 대작을 해 주겠다며 다빈의 앞에 앉았다. 소주용 종이컵에 술을 따라주자, 다빈이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조 감독님. 종이컵 작은 거 말고 그냥 큰 거 없어요? 어차피 취하려고 마시는 거 빨리 마시고 취하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 잠시만요.”
조연출은 얼른 뛰어가 현장 어디쯤에 있던 종이컵을 가져와 다빈에게 건네줬다.
“자, 그럼 제대로 시작해 볼까요?”
다빈이 건네받은 종이컵을 한결에 내밀며, 어서 술을 따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반 종이컵을 내밀며, 술을 따르자고 하자 한결은 영 걱정이다.
“무리할 필요 없어. 대충 조금만 마시고 해”
“아냐, 제대로 해 보이고 싶어. 내 첫 영화고 한결 씨랑 함께하는 첫 작품이잖아.”
다빈의 얼굴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져, 한결도 더는 말리지 못하고 다빈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잔, 두 잔, 세 잔…. 다섯 잔. 별 안주도 없이 어느새 술병 하나가 거의 다 비워져 갔다. 그것도 스태프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며 스트레이트로 계속 들이붓고 있었다.
“천천히 마셔. 이거 안주라도 좀 먹고. 그러다 속 버리겠다”
뭘 술까지 먹여가며 연기를 시키는지, 상황이 이쯤 되자 한결은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만 먹고 대충 찍자고 우겨봐도, 이 여자는 말을 듣지도 않고 연거푸 원샷을 날리고 있다.
저러다 급성위염이라도 오면 어쩌나 싶어 바라보는 한결만 애가 타고 있다. 얄미운 감독은 옆에 앉아 잔을 채워줄 뿐. 그만하라는 소리도 없다. 젠장.
그렇게 소주를 원샷을 계속해서 날리며 한 병 반가량이 비워지자, 빈속에 급하게 술을 먹었던 다빈의 위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감독님… 이제 촬영 들어가죠…”
이 여자 진짜 속이 엄청 안 좋은 표정이다. 조금만 더 붙잡았다간 여기다 그대로 방금 먹은 것은 확인 사살이라도 시켜줄 표정이다.
“괜찮아?”
한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다빈은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이며, 괜찮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감독의 ‘큐’ 사인이 울리자, 다빈의 리얼한 연기가 시작됐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정말 속이 좋지 않았다. 다빈은 바로 변기를 붙잡고 불편한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아… 이쯤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지.
취기 때문인지 눈물도 금세 흘러나왔다. 햐… 술 거 참 좋네. 연기도 술술 풀리고. 그래서 술인가. 다빈은 울면서도 술의 위대함을 경이해 맞았다.
속을 게워 낸 유리, 다빈이 화장실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좀 전보다 더 세차게 줄줄 흘러내렸다.
아, 나도 이런 기분이 적이 있었어. 차갑게 변한 한결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을 때. 달콤하기만 했던 눈빛이 사라지고, 냉랭하기만 했었을 때. 그때 이런 눈물을 혼자 흘리곤 했었지.
다빈은 연기하면서도 별달리 대사 없는 감정씬이라 슬픔을 표현하며, 어느새 예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울리는 휴대폰. 유리를 짝사랑하는 남자 사람 친구 준호의 전화다.
- 어, 유리야. 회식 끝났어?
“…햐아. 아니…. 아직… 1차…야”
- 너, 말투가 왜 그래? 취했어?”
“아, 그게… 파도타기를… 했는데…. 게임도 했어… 그래서 내가… 마셨는데…”
- 야, 술도 잘 못 하는 애가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수화기 너머 준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그대로 가슴에 와 박힌다. 한때 저런 멘트는 선준의 몫이었는데.
“그러게 술도 못 마시는데, 아 힘들어… 근데 있잖아… 준호야… 나 힘들다? 힘들어…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준호의 말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우는구나. 그리움과 보고 싶음에 복잡해진 표정을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잡는다. 한 번 흐른 눈물은 그칠 줄 모르더니, 점점 더 격해져 다빈은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감정이 격해지는 유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느꼈던 감정. 다빈은 한결을 생각하며 그때의 그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언젠가 한결이 녹음해준 음악을 듣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어제와는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세상은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세상을 보는 제 눈은 어제와는 달랐다. 창가로 내리쬐는 햇살도 사랑스러웠고,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싱그러웠고, 집안을 가득 채운 커피 향은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분. 한결의 사랑이라는 오로라가 제 몸을 감싸 보호막을 형성해주기라도 한 듯 몸이 붕 떠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기분이랄까. 아침부터 다빈의 입에서 흥얼거리던 콧노래는 끝날 줄을 몰랐다.
한결은 뭐 하고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한결에게서 문자가 왔다.
- 이따가 촬영장에 같이 갈래? 내가 데리러 갈게
문자를 확인한 다빈 역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신들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결은 이제 굳이 숨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다들 보란 듯 대놓고 연애하며 떠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 아냐, 이따가 미라 오기로 했어. 촬영장 가서 만나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지 한결에게 바로 답문이 왔다.
- 왜?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데리러 갈게
다빈도 곧장 답문을 보냈다.
- 사람들이 의심해. 굳이 남들 입방아에 오를 필요 없잖아. 조금 조심하는 게 편하지
- 난 이제 그런 거 상관 안 할 건데. 당신이 그러는 편이 편하면 그렇게 해.
연애를 시작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괜히 ‘이 사람이 내 사랑이에요’하고 자랑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빈 역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면 이화연과의 결별설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을 겪을 건 한결이었기에 다빈은 그 마음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조금만 숨겼다가 한결의 새 연애를 팬들이 좀 더 편하게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때 그때 알려도 충분할 것이다.
***
미라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촬영장에 도착하니, 이미 도착해 있던 한결이 다빈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왔어?”
“응. 일찍 왔네?”
“여기 오면 당신을 볼 수 있단 생각에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이 더디게 가길래 그냥 와서 기다리자 싶어 일찍 와버렸지”
“아유… 동호 씨가 힘들겠다. 담부턴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지 마.”
자신을 신경 써주는 다빈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한결이 웃으면서 말했다.
“후훗, 알았어, 알아서 할게”
오늘 촬영장면은 남주인 선준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서로 얼굴조차 볼일이 없어진 여주가 회식 때 술을 마시고, 남주가 보고 싶어서 울음을 터트리게 되고, 그 소릴 들은 남주가 한밤중에 여주의 집 앞까지 찾아오는 장면이었다.
“오늘 술 취하는 장면이던데? 좀 어렵겠더라. 과하면 오버 같고 부족하면 느낌이 전달이 안 될 테고.”
한결이 다빈의 장면에 대해 걱정을 표했다.
“그러게… 그래서 여러 각도고 고민해 봤는데… 카메라에 어떻게 담길지 모르겠네.”
“에이 엄살은! 잘하잖아. 왜 그래 연기 경력이 몇 년인데.”
“맞다… 내가 한결 씨 보다, 한참 선배지… 나이도 그렇고”
이럴 때, 굳이 선후배는 왜 따져.
“원한다면 선배님, 선배님 해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해줘?”
“아… 아냐…”
절대 그건 싫었다. 한결에게 선배나 누나 따위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호칭은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건 자신이 한결에게서 여자가 아님을 말하는 것 같아서.
“나…. 사실 연우결 끝나고 나서 어쩌다 마주칠 때 한결 씨가 날 어떻게 부를까 걱정 많이 했거든.”
“뭘 그런 걸 걱정해?”
“그렇잖아. 아무리 방송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부인… 부인… 이렇게 부르며 반말하던 사람이 방송 끝났다고 딱 선을 그으면서 선배나 누나 이러면서 막 존댓말 깍듯이 쓰고 그러면 내 기분이 얼마나 이상하겠어.”
“… 그런가”
“뭐든 그랬었는데,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아서 안심했었어. 이화연 씨랑 열애설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날 당신이라 불러주고, 반말을 계속해 주는 게 아직은 그다지 먼 사이는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아서”
“하하… 그랬구나… 여하튼 여자들은 참 복잡해…”
둘이 그렇게 편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벌써 촬영 준비가 끝나는지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소리가 들렸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여주 유리의 회식 자리. 퇴사로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남주 선준이 오늘 회식 자리에 온다는 소리에 기대하고 있던 유리의 귀에 못 온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준이 못 온대요.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야근해야 하나 봐요.”
…휴. 못 오는구나. 선준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 실망감이 먹물처럼 퍼지는 감정이 그대로 다빈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유리는 속상한 마음에 연거푸 술을 마셔댄다. 그리곤 속이 울렁거려오고, 다시 한 잔을 비워내고 잔을 내려놓는 표정에서 버거운 표정이 드러난다.
이내 화장실로 가는 유리. 꽥꽥거리며 쭈그려 앉아 속을 게워 내는 모습을 카메라가 뒤에서 잡고 있다.
그때
“컷”
김 감독이 다가와 묻는다.
“다빈 씨, 술 좀 마셔요?”
“네… 웬만큼은요…”
속이 울렁거려 토하는 모습이 영 사실감이 없었나? 감독의 질문에 다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연기가 나쁜 건 아닌데… 뭐랄까 다른 데서 많이 보던 연기랄까. 좀 더 사실감 있게 갔으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음… 술 좀 할 줄 알면 술을 좀 마셔보고 할래요? 아무래도 맨정신에 토하는 연기보다야 좀 취기가 있는 상태에 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 거 같은데…”
‘와 영화는 진짜 술을 마시기도 하는구나.’ 지금껏 몇십 편의 드라마에 출연해 봤지만, 실제 술을 먹으면서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보다는 리얼리티가 중시되는 영화 현장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있기도 했다.
“네. 그럴게요”
다빈의 동의에 김 감독에 조연출을 시켜 술을 사 오게 지시했고, 이내 소주병과 간단한 안주가 담긴 검은 봉지가 배달되어 왔다.
혼자 마시기에 머쓱할 것 같아 한결이 대작을 해 주겠다며 다빈의 앞에 앉았다. 소주용 종이컵에 술을 따라주자, 다빈이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조 감독님. 종이컵 작은 거 말고 그냥 큰 거 없어요? 어차피 취하려고 마시는 거 빨리 마시고 취하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 잠시만요.”
조연출은 얼른 뛰어가 현장 어디쯤에 있던 종이컵을 가져와 다빈에게 건네줬다.
“자, 그럼 제대로 시작해 볼까요?”
다빈이 건네받은 종이컵을 한결에 내밀며, 어서 술을 따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반 종이컵을 내밀며, 술을 따르자고 하자 한결은 영 걱정이다.
“무리할 필요 없어. 대충 조금만 마시고 해”
“아냐, 제대로 해 보이고 싶어. 내 첫 영화고 한결 씨랑 함께하는 첫 작품이잖아.”
다빈의 얼굴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져, 한결도 더는 말리지 못하고 다빈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 잔, 두 잔, 세 잔…. 다섯 잔. 별 안주도 없이 어느새 술병 하나가 거의 다 비워져 갔다. 그것도 스태프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며 스트레이트로 계속 들이붓고 있었다.
“천천히 마셔. 이거 안주라도 좀 먹고. 그러다 속 버리겠다”
뭘 술까지 먹여가며 연기를 시키는지, 상황이 이쯤 되자 한결은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만 먹고 대충 찍자고 우겨봐도, 이 여자는 말을 듣지도 않고 연거푸 원샷을 날리고 있다.
저러다 급성위염이라도 오면 어쩌나 싶어 바라보는 한결만 애가 타고 있다. 얄미운 감독은 옆에 앉아 잔을 채워줄 뿐. 그만하라는 소리도 없다. 젠장.
그렇게 소주를 원샷을 계속해서 날리며 한 병 반가량이 비워지자, 빈속에 급하게 술을 먹었던 다빈의 위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감독님… 이제 촬영 들어가죠…”
이 여자 진짜 속이 엄청 안 좋은 표정이다. 조금만 더 붙잡았다간 여기다 그대로 방금 먹은 것은 확인 사살이라도 시켜줄 표정이다.
“괜찮아?”
한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다빈은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이며, 괜찮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감독의 ‘큐’ 사인이 울리자, 다빈의 리얼한 연기가 시작됐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정말 속이 좋지 않았다. 다빈은 바로 변기를 붙잡고 불편한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아… 이쯤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지.
취기 때문인지 눈물도 금세 흘러나왔다. 햐… 술 거 참 좋네. 연기도 술술 풀리고. 그래서 술인가. 다빈은 울면서도 술의 위대함을 경이해 맞았다.
속을 게워 낸 유리, 다빈이 화장실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좀 전보다 더 세차게 줄줄 흘러내렸다.
아, 나도 이런 기분이 적이 있었어. 차갑게 변한 한결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을 때. 달콤하기만 했던 눈빛이 사라지고, 냉랭하기만 했었을 때. 그때 이런 눈물을 혼자 흘리곤 했었지.
다빈은 연기하면서도 별달리 대사 없는 감정씬이라 슬픔을 표현하며, 어느새 예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울리는 휴대폰. 유리를 짝사랑하는 남자 사람 친구 준호의 전화다.
- 어, 유리야. 회식 끝났어?
“…햐아. 아니…. 아직… 1차…야”
- 너, 말투가 왜 그래? 취했어?”
“아, 그게… 파도타기를… 했는데…. 게임도 했어… 그래서 내가… 마셨는데…”
- 야, 술도 잘 못 하는 애가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수화기 너머 준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그대로 가슴에 와 박힌다. 한때 저런 멘트는 선준의 몫이었는데.
“그러게 술도 못 마시는데, 아 힘들어… 근데 있잖아… 준호야… 나 힘들다? 힘들어…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준호의 말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우는구나. 그리움과 보고 싶음에 복잡해진 표정을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잡는다. 한 번 흐른 눈물은 그칠 줄 모르더니, 점점 더 격해져 다빈은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감정이 격해지는 유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느꼈던 감정. 다빈은 한결을 생각하며 그때의 그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9화 - 당신도 얼른 씻고 나와
그 모습을 감독 옆에서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던 한결의 가슴이 찡해져 온다. 저 모습이 비단 연기만이 아니라는 게 한결에게까지 느껴져서. 그간 혼자 저렇게 울었을 다빈의 모습을 본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촬영은 계속되었다.
이때,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 많이 취한 것 같아 유리를 쫓아온 다른 직원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린다.
"유리 씨 괜찮아?"
유리는 흐르는 눈물을 한 손으로 닦아낸다.
"괜찮아. 금방 나갈게. 먼저 가 있어."
직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멈춰지지 않는 울음을 애써 삼킨다. 취중이라 울음이 맘처럼 멈춰지질 않는다.
극 중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된 나머지, 이제 그만 눈물을 그치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이 너무 과잉되어 보이지는 않을까?' 싶던 참에 감독의 컷 소리가 들렸다.
"컷"
“다빈 씨 아주 좋았어요.”
술 때문인지 여주의 감정이 사실감 있게 잘 표현되었다. 김 감독도 다빈의 연기가 마음에 든 눈치다. 그게 연기라기 보다, 지난 감정이 그대로 올라와 제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었다는 걸 눈치챌 리 없었지만.
연기를 끝낸 다빈이 모니터링을 위해 감독에게로 오자, 한결이 입 모양으로 ‘잘했어. 아주 좋았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웠다.
아직까지 눈물이 채 그치지 않아 그렁해 있던 다빈이 눈물을 닦으며, 한결의 말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속은 괜찮아? 진짜로 안 좋아 보이던데?”
“응. 그랬었는데… 토하고 나니까 한결 편해졌어. 아… 근데 나 좀 취했나 봐… 살짝 어지럽네”
말을 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빈이 휘청하자 얼른 한결이 다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진짜로 취했나 본데…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걸 보면…”
“이히힛… 진짜 그런가.”
연기할 때는 모르겠더니 뒤늦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건지, 한결과 함께 이렇게 웃으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그런 건지, 자꾸만 배시시 웃음이 세어 나왔다.
행여 중심을 잃어 넘어지기라도 할까 한결은 잡은 다빈의 허리를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다. 한결의 손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온기에 찌릿하게 감전이라도 된 듯, 모든 신경이 허리를 향하는 느낌이었다.
허리에 살이라도 잡히면 어쩌지. 요즘 통 다이어트에 신경을 못 써서 허릿살이 꽤 잡힐 텐데…
“있다가…… 대사 까먹으면 어떡하지?”
다빈은 괜스레 생각을 돌려보려 별스러울 것도 없는 말을 꺼내봤다.
“어쩔 수 없지. 감독님의 시킨 거니 뭐라고도 못하겠지. 괘씸하니까 이참에 막 NG나 내 버려. 술에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이히힛. 정말 그럴까 봐. 히힛”
한결의 심술에 다빈이 유쾌한 웃음을 소리를 냈다. 자꾸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다빈을 보며, 한결도 따라 웃어 보였다.
“당신 진짜 취했나 보다. 자꾸만 실실 웃는 걸 보니.”
“에잇. 이 정도에 취할 유다빈이 아니라구. 자 봐…”
다빈은 허리를 붙잡고 있던 한결의 손을 떼어내고는 혼자 똑바로 서 보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회전을 한 번 해 보이려는데…. 마음과 달리 반 바퀴도 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해 푹 쓰러져 버렸다.
“거봐… 취했네.”
한결이 주저앉은 다빈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가… 히히힛”
다빈의 말꼬리에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뒤따라 붙었다.
촬영 틈틈이 이어지는 둘의 깨알 연애는 이어졌다. 두 사람의 모습을 혹여라도 의심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인 건지 어쩐 건지 이미 화연과의 열애설을 인정한 덕분에 별달리 둘의 모습을 의심하는 눈치는 없었다.
게다가 <연우결>에서 가상부부로 호흡을 맞춘 이력까지 있으니, 그 정도의 친분은 당연하다 생각해 스태프들은 특별히 두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자, 장소 이동하겠습니다.”
다음 장면은 유리의 집 앞. 유리가 운다는 소리를 듣고 늦은 밤 유리의 오피스텔 앞으로 달려온 선준이 유리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장소의 이동을 줄이기 위해, 회식장면을 촬영한 식당 옆에 있는 오피스텔을 섭외해 두었다.
식당 장면을 촬영 하고 있는 동안 이미 촬영을 준비하고 다 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터라 감독과 배우들이 도착하자 이내 촬영이 시작되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유리. 적막한 밤의 공기에 짙어진 그리움이 가득 담긴 표정이다.
나 홀로인 밤,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다빈은 금세 역할에 몰입하여, 한 번 흘렸던 눈물을 어렵지 않게 다시 만들어 냈다.
떨치려 해도 떨치지 않는 그리움과 보고픔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채, 택시에서 내리는 유리의 눈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는 얼굴, 한결 아니 선준이 들어온다.
“…여…긴 어떻게…?”
유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아, 울면 안 되는데. 울면 안 돼. 이런 모습 보이기 싫은데.
눈물을 감추려는 표정이 다빈의 얼굴에 고스란히 올려진다.
“…괜찮아?”
급한 일로 회식자리에 참석하겠다는 소리를 번복했다가, 유리가 울고 있다는 소리에 걱정되어 늦은 밤, 유리의 집 앞까지 달려온 선준이 묻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걱정스레 바라보는 선준에게, 유리는 애써 괜찮다며 어색하기만 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 밤 널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다빈은 조금 전 선준이 보고 싶어 흘린 눈물과 반대로, 지금은 자신을 찾아온 선준이 반가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심정을 그대로 얼굴에 담아냈다.
하지만 그리움의 말을, 보고픔의 말을 차마, 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유리와 그 모습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선준이 된 한결은 제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다빈이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정말이지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그녀를 제 품에 안아 보듬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컷”
스태프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긴 했음에도, 촬영을 구경하고 있던 시민의 소리가 동시 녹음되던 오디오에 잡히자 감독이 촬영을 중단시켰다.
감독의 컷 소리가 나자, 한결이 한 발짝 다빈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에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잘했어.”
한결의 칭찬에 금세 해사한 웃음을 웃어 보이는 다빈. 그 모습을 보며 한결은 속으로 ‘천생 연기자가 틀림없네. 금방 저렇게 해맑게 웃어 보이고’라는 생각이 들어 따라 웃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눈물이 다빈이 흘리는 실제 눈물이 아니라, 연기를 위함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다빈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한결이었다.
*
늦가을부터 시작됐던 촬영은 어느덧 한겨울에 접어들었다. 추위로 고생스럽기 그지없던 한겨울의 야외촬영도 서로와 함께 있어선지 추운 줄을 몰랐다.
“오늘 촬영 끝나고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
한결이 촬영 중 쉬는 틈을 타고 다빈에게 말했다.
“뭐, 특별한 요리라도 해 주려고? 후훗”
“음… 치맥이나 하자고 하려던 거였는데… 기대치가 너무 높은데?”
“하하. 그냥 해 본 소리야. 치맥 좋아. 금요일은 치느님이 답이라며. 콜!”
다빈은 유쾌하게 승낙했다.
겨울의 특성상 해가 일찍 지니 낮 씬인 오늘 촬영은 몇 장면의 촬영을 더 하고서 끝이 났다.
한결은 매니저 동호를 먼저 돌려보내고, 촬영장 근처에서 다빈을 기다렸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있긴 했지만, 눈빛만은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미라에게 찡긋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차에서 내려 한결의 차에 올라탔다.
***
그간 몇 번 와본 한결의 집은, 고급 타운하우스라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단속되어 다빈이 드나드는 것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싶어 다빈은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늘 신경이 쓰였다.
집안으로 들어온 한결이
“앉아서 좀 기다리고 있어. 금방 씻고 나올게”
말을 건네며,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응.”
달리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연인이 씻고 나오길 기다리는 기분은 어쩐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냥 하루 종일 밖에 있다 들어왔으니 씻는 것뿐이라고.’
다빈은 멀뚱히 기다리기도 뭐해, 음식이 배달되어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세팅이나 해 두자 싶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회용 행주 한 포를 뜯어 식탁을 닫고, 포크 2개를 꺼내 마주 보는 자리에 놓았다.
“맥주가 좀 있으려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캔맥주 몇 개와 병맥주 몇 개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맥주는 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문을 닫으려다, 야채 칸에 있는 메론과 방울 토마토 등의 과일이 보여 미리 씻어두려 꺼냈다.
자기 주방이 아니라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서, 씻을 그릇을 찾느라 여기저기, 담을 접시를 찾느라 여기저기, 문을 죄다 열어 본 후에야 원하는 것을 꺼낼 수 있었다.
씻은 방울 토마토의 물기를 빼려 거름망에 담아 놓고, 이내 메론을 깎기 시작했다. 둘이 먹기엔 좀 많다 싶은 양이지만 뭐, 건강에도 미용에도 좋은 거니까. 능숙한 솜씨로 메론을 다 깎자 다시 담을 접시를 찾았다.
잘 정리된 주방에 제일 밑 칸에는 자주 쓰는 듯한 그릇들이 들어 있었고, 그 위 칸에는 주로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예뻐 보이는 접시를 하나 골라 꺼내려 하는데 음… 너무 높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깨뜨리기라도 할까 싶어 까치발을 들고,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접시들이 쌓인 틈에서 하나를 빼내려 하는데, 그때 언제 왔는지. 등 뒤 다빈의 머리 위에서 뻗어진 손이 다빈의 손이 닿았던 접시를 꺼내 든다.
“나더러 꺼내 달라고 하지”
말을 하는 한결의 부드러운 중저음 보이스가 입김과 함께 목덜미에 닿자, 묘하게 떨렸다.
“어… 어. 기다리는 동안 해 두려고 그랬지…”
꺼낸 접시를 싱크대 위 아무 데나 내려놓은 한결이 그대로 등 뒤에서 다빈을 껴안았다.
“이렇게 우리 집에서 당신이랑 있으니까 참 좋다.”
콩닥콩닥. 귀 뒤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결의 숨결에 다빈의 심장이 고장 난 시계추처럼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당신도 얼른 씻고 나와”
그 모습을 감독 옆에서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던 한결의 가슴이 찡해져 온다. 저 모습이 비단 연기만이 아니라는 게 한결에게까지 느껴져서. 그간 혼자 저렇게 울었을 다빈의 모습을 본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촬영은 계속되었다.
이때,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 많이 취한 것 같아 유리를 쫓아온 다른 직원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린다.
"유리 씨 괜찮아?"
유리는 흐르는 눈물을 한 손으로 닦아낸다.
"괜찮아. 금방 나갈게. 먼저 가 있어."
직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멈춰지지 않는 울음을 애써 삼킨다. 취중이라 울음이 맘처럼 멈춰지질 않는다.
극 중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된 나머지, 이제 그만 눈물을 그치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이 너무 과잉되어 보이지는 않을까?' 싶던 참에 감독의 컷 소리가 들렸다.
"컷"
“다빈 씨 아주 좋았어요.”
술 때문인지 여주의 감정이 사실감 있게 잘 표현되었다. 김 감독도 다빈의 연기가 마음에 든 눈치다. 그게 연기라기 보다, 지난 감정이 그대로 올라와 제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었다는 걸 눈치챌 리 없었지만.
연기를 끝낸 다빈이 모니터링을 위해 감독에게로 오자, 한결이 입 모양으로 ‘잘했어. 아주 좋았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웠다.
아직까지 눈물이 채 그치지 않아 그렁해 있던 다빈이 눈물을 닦으며, 한결의 말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속은 괜찮아? 진짜로 안 좋아 보이던데?”
“응. 그랬었는데… 토하고 나니까 한결 편해졌어. 아… 근데 나 좀 취했나 봐… 살짝 어지럽네”
말을 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빈이 휘청하자 얼른 한결이 다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진짜로 취했나 본데…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걸 보면…”
“이히힛… 진짜 그런가.”
연기할 때는 모르겠더니 뒤늦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건지, 한결과 함께 이렇게 웃으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그런 건지, 자꾸만 배시시 웃음이 세어 나왔다.
행여 중심을 잃어 넘어지기라도 할까 한결은 잡은 다빈의 허리를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다. 한결의 손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온기에 찌릿하게 감전이라도 된 듯, 모든 신경이 허리를 향하는 느낌이었다.
허리에 살이라도 잡히면 어쩌지. 요즘 통 다이어트에 신경을 못 써서 허릿살이 꽤 잡힐 텐데…
“있다가…… 대사 까먹으면 어떡하지?”
다빈은 괜스레 생각을 돌려보려 별스러울 것도 없는 말을 꺼내봤다.
“어쩔 수 없지. 감독님의 시킨 거니 뭐라고도 못하겠지. 괘씸하니까 이참에 막 NG나 내 버려. 술에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이히힛. 정말 그럴까 봐. 히힛”
한결의 심술에 다빈이 유쾌한 웃음을 소리를 냈다. 자꾸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다빈을 보며, 한결도 따라 웃어 보였다.
“당신 진짜 취했나 보다. 자꾸만 실실 웃는 걸 보니.”
“에잇. 이 정도에 취할 유다빈이 아니라구. 자 봐…”
다빈은 허리를 붙잡고 있던 한결의 손을 떼어내고는 혼자 똑바로 서 보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회전을 한 번 해 보이려는데…. 마음과 달리 반 바퀴도 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해 푹 쓰러져 버렸다.
“거봐… 취했네.”
한결이 주저앉은 다빈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가… 히히힛”
다빈의 말꼬리에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뒤따라 붙었다.
촬영 틈틈이 이어지는 둘의 깨알 연애는 이어졌다. 두 사람의 모습을 혹여라도 의심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인 건지 어쩐 건지 이미 화연과의 열애설을 인정한 덕분에 별달리 둘의 모습을 의심하는 눈치는 없었다.
게다가 <연우결>에서 가상부부로 호흡을 맞춘 이력까지 있으니, 그 정도의 친분은 당연하다 생각해 스태프들은 특별히 두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자, 장소 이동하겠습니다.”
다음 장면은 유리의 집 앞. 유리가 운다는 소리를 듣고 늦은 밤 유리의 오피스텔 앞으로 달려온 선준이 유리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장소의 이동을 줄이기 위해, 회식장면을 촬영한 식당 옆에 있는 오피스텔을 섭외해 두었다.
식당 장면을 촬영 하고 있는 동안 이미 촬영을 준비하고 다 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터라 감독과 배우들이 도착하자 이내 촬영이 시작되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유리. 적막한 밤의 공기에 짙어진 그리움이 가득 담긴 표정이다.
나 홀로인 밤,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다빈은 금세 역할에 몰입하여, 한 번 흘렸던 눈물을 어렵지 않게 다시 만들어 냈다.
떨치려 해도 떨치지 않는 그리움과 보고픔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채, 택시에서 내리는 유리의 눈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는 얼굴, 한결 아니 선준이 들어온다.
“…여…긴 어떻게…?”
유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아, 울면 안 되는데. 울면 안 돼. 이런 모습 보이기 싫은데.
눈물을 감추려는 표정이 다빈의 얼굴에 고스란히 올려진다.
“…괜찮아?”
급한 일로 회식자리에 참석하겠다는 소리를 번복했다가, 유리가 울고 있다는 소리에 걱정되어 늦은 밤, 유리의 집 앞까지 달려온 선준이 묻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걱정스레 바라보는 선준에게, 유리는 애써 괜찮다며 어색하기만 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 밤 널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다빈은 조금 전 선준이 보고 싶어 흘린 눈물과 반대로, 지금은 자신을 찾아온 선준이 반가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심정을 그대로 얼굴에 담아냈다.
하지만 그리움의 말을, 보고픔의 말을 차마, 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유리와 그 모습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선준이 된 한결은 제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다빈이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정말이지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그녀를 제 품에 안아 보듬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컷”
스태프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긴 했음에도, 촬영을 구경하고 있던 시민의 소리가 동시 녹음되던 오디오에 잡히자 감독이 촬영을 중단시켰다.
감독의 컷 소리가 나자, 한결이 한 발짝 다빈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에 맺혀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잘했어.”
한결의 칭찬에 금세 해사한 웃음을 웃어 보이는 다빈. 그 모습을 보며 한결은 속으로 ‘천생 연기자가 틀림없네. 금방 저렇게 해맑게 웃어 보이고’라는 생각이 들어 따라 웃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눈물이 다빈이 흘리는 실제 눈물이 아니라, 연기를 위함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다빈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한결이었다.
*
늦가을부터 시작됐던 촬영은 어느덧 한겨울에 접어들었다. 추위로 고생스럽기 그지없던 한겨울의 야외촬영도 서로와 함께 있어선지 추운 줄을 몰랐다.
“오늘 촬영 끝나고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
한결이 촬영 중 쉬는 틈을 타고 다빈에게 말했다.
“뭐, 특별한 요리라도 해 주려고? 후훗”
“음… 치맥이나 하자고 하려던 거였는데… 기대치가 너무 높은데?”
“하하. 그냥 해 본 소리야. 치맥 좋아. 금요일은 치느님이 답이라며. 콜!”
다빈은 유쾌하게 승낙했다.
겨울의 특성상 해가 일찍 지니 낮 씬인 오늘 촬영은 몇 장면의 촬영을 더 하고서 끝이 났다.
한결은 매니저 동호를 먼저 돌려보내고, 촬영장 근처에서 다빈을 기다렸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있긴 했지만, 눈빛만은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미라에게 찡긋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차에서 내려 한결의 차에 올라탔다.
***
그간 몇 번 와본 한결의 집은, 고급 타운하우스라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단속되어 다빈이 드나드는 것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싶어 다빈은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늘 신경이 쓰였다.
집안으로 들어온 한결이
“앉아서 좀 기다리고 있어. 금방 씻고 나올게”
말을 건네며,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응.”
달리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연인이 씻고 나오길 기다리는 기분은 어쩐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냥 하루 종일 밖에 있다 들어왔으니 씻는 것뿐이라고.’
다빈은 멀뚱히 기다리기도 뭐해, 음식이 배달되어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세팅이나 해 두자 싶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회용 행주 한 포를 뜯어 식탁을 닫고, 포크 2개를 꺼내 마주 보는 자리에 놓았다.
“맥주가 좀 있으려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캔맥주 몇 개와 병맥주 몇 개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맥주는 저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문을 닫으려다, 야채 칸에 있는 메론과 방울 토마토 등의 과일이 보여 미리 씻어두려 꺼냈다.
자기 주방이 아니라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서, 씻을 그릇을 찾느라 여기저기, 담을 접시를 찾느라 여기저기, 문을 죄다 열어 본 후에야 원하는 것을 꺼낼 수 있었다.
씻은 방울 토마토의 물기를 빼려 거름망에 담아 놓고, 이내 메론을 깎기 시작했다. 둘이 먹기엔 좀 많다 싶은 양이지만 뭐, 건강에도 미용에도 좋은 거니까. 능숙한 솜씨로 메론을 다 깎자 다시 담을 접시를 찾았다.
잘 정리된 주방에 제일 밑 칸에는 자주 쓰는 듯한 그릇들이 들어 있었고, 그 위 칸에는 주로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예뻐 보이는 접시를 하나 골라 꺼내려 하는데 음… 너무 높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깨뜨리기라도 할까 싶어 까치발을 들고,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접시들이 쌓인 틈에서 하나를 빼내려 하는데, 그때 언제 왔는지. 등 뒤 다빈의 머리 위에서 뻗어진 손이 다빈의 손이 닿았던 접시를 꺼내 든다.
“나더러 꺼내 달라고 하지”
말을 하는 한결의 부드러운 중저음 보이스가 입김과 함께 목덜미에 닿자, 묘하게 떨렸다.
“어… 어. 기다리는 동안 해 두려고 그랬지…”
꺼낸 접시를 싱크대 위 아무 데나 내려놓은 한결이 그대로 등 뒤에서 다빈을 껴안았다.
“이렇게 우리 집에서 당신이랑 있으니까 참 좋다.”
콩닥콩닥. 귀 뒤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결의 숨결에 다빈의 심장이 고장 난 시계추처럼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당신도 얼른 씻고 나와”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50화 - 밤의 유혹
“어?!”
순간, 경직되는 다빈이 느껴져 한결이 능청스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놀래. 종일 밖에서 바깥바람 맞으며 촬영했는데 씻고 편하게 치맥을 즐기자는 소린데…. 뭔가 다른 걸 기대했나 봐?”
“다른 걸… 기대하다니 무슨… 그래. 나도 좀 씻어야겠다. 기다려 금방 손만 좀 씻고 나올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결은 어색함에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다빈을 놓아주지 않은 채, 다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대충 씻고 나오면 안 되는데. 우리 집 깨끗한 거 안 보여? 개운하게 샤워도 하고 나와. 후훗.”
이거 신호인가?
연예계 생활을 하느라 사생활을 거의 같지 못했던 탓에 감이 너무 떨어진 건지. 지금 한결의 말이 특별한 의미를 담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오버해서 받아들이는 건지 다빈은 영 모르겠다.
“괜찮아. 치맥만 좀 하다가 갈 건데. 굳이 샤워까진 뭐.”
“누가 가래? 올 때는 맘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맘대로 못 나가는 게 우리 집인데. 그러게 잘 생각하고 들어 왔어야지”
오늘따라 유달리 짓궂은 농담을 하는 한결이었다. 농담인 줄 알면서도 심장은 두근거리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이 연하 연인의 농담에 그대로 놀아날 순 없어 다빈도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음… 그럼 나 오늘 못 가는 거야? 함부로 사람들인 거 후회할 수도 있을 텐데…”
다빈이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하하하. 기대되는데?”
다빈도 반달 눈을 하며 한결을 따라 웃었다.
“어쨌든 개운하게 좀 씻어. 하루 종일 찬 바람 맞았잖아.”
“응”
종일 찬 바람을 맞고 있다가 집 안에 들어오니, 얼른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기도 했다. 그래 뭐 어때. 샤워 정도는 괜찮겠지.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생각을 굳힌 다빈은 욕실을 향해 들어갔다.
언제 받아두었는지 욕조에는 이미 거품 목욕을 할 수 있게 적당한 온도의 물이 받아져 있었다.
“후훗. 자상하기도 해라”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살짝 손을 담갔다가, 이내 옷을 벗고 욕조 깊이 몸을 담갔다. 하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금세 나른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밖에서 치맥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결만 없었다면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고 싶을 만큼 편안했다.
신기해. 내 집도 아닌데, 전혀 안 불편하네.
그때, 문밖에서 “똑똑” 노크가 울린 후, 한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문 앞에 갈아입을 옷 놔뒀어. 다 씻고 나면 갈아입고 나와”
괜찮은데, 굳이 또 옷까지 찾아온 모양이다.
“응. 거기 두고 가”
다빈은 욕실 밖으로 소리가 들리게 한껏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다빈은 거품을 한 손 가득 떠서 어깨 위로 얹었다. 부드러운 거품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좋아 몇 번을 문질러 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욕조 안에서 거품 목욕을 즐기고 난 후, 한결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아 샤워기로 몸을 헹구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감고 난 후, 마른 몸을 대충 닦고 한편에 걸려 있는 바스 가운까지 입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슴 부분을 꽉 여미어 잡은 후 욕실 문밖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살짝 문을 열어서는 손만 뻗어 문 앞에 놓인 옷가지를 얼른 갖고 들어갔다.
티셔츠와 반바지였다. 한결에게는 슬림핏의 쫄티였을 티셔츠는 여자치고도 마른 다빈이 입으니 헐렁한 박시핏이 되었다. 자기 딴에는 나름 작은 옷을 찾는다고 찾았겠지만 184의 장신인 한결의 옷이 다빈에게는 미니 원피스쯤 되는 길이었다. 아래에 고무줄로 된 반바지까지 입으니 영락없이 아빠 옷을 뺏어 입은 아이 꼴이다.
“후훗. 그래도 편하긴 하네.”
옷에서 익숙한 한결의 향이 올라왔다. 너무 오래 씻었나. 한결이 지루하겠다 싶어 젖은 머리를 대충 닦은 후 욕실 문을 열고 나섰다.
거실에 앉아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한결이 일어나 다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너무 오래 있었지. 빨리 나온다고 나온 건데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리네”
“괜찮아.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서 첫날밤이 되면 이런 그림이겠구나, 상상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잘 가던데. 하핫”
한결의 능청스런 농담에 다빈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머, 누가 한결 씨랑 신혼여행 간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하는 다빈에게 한 발 더 바짝 성큼 다가선 한결이 다빈의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눈을 내리뜨고 말했다.
“그럴 거 아닌가? 난 그럴 건데.”
갑자기 너무 진지해진 눈빛에 다빈은 그대로 눈을 마주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하지만 이내 한결의 손이 다빈의 턱을 치켜세우더니,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어 왔다.
달콤하게 시작된 키스는 점점 더 거세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혀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엉켜 들었다.
같은 향의 나누어 가진 두 사람의 체취가 달게 코를 자극했고, 여전히 물기가 뚝뚝 떨어질 듯한 젖은 머리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본능을 일깨워 냈다.
한결의 손이 다빈의 젖은 머리칼 속을 팍 들었다. 이제 이 여자는 내 여자다. 더는 이 여자를 사랑함에 있어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며 한결은 다짐했다.
입술을 떼고 뜨거워진 숨결을 잠시 내쉬던 한결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더니 다시금 다빈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온 다빈의 혀가 한결의 입속을 찾아들었다. 쉴 틈 없이 엉켜 드는 서로의 혀의 놀림에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해져만 갔다.
너무나 뜨거워 아찔하기까지만 한 키스가 계속 이어지던 중 한결의 손이 다빈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허리를 만지던 손이 빙 돌아 왼쪽 허리춤에 닿았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온몸에 짜릿한 기운이 퍼져갔다.
이제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오롯이 서로를 갈구하는 욕망만이 꿈틀거렸다. 다빈은 이대로 사랑이 계속되어도 좋을 듯했다.
그때 요란하게 울리는 현관 벨.
깜짝 놀란 다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결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한 다빈을 안아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후, 한결이 기다려보라며 인터폰으로 화면을 확인하니 치킨 배달이었다.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네. 치킨이야, 치킨 배달 왔어.”
한결의 말을 듣고서야, 다빈이 휴. 하고 긴장을 풀었다.
“저쪽 안 보이는 쪽으로 잠깐 가 있어. 문 열어주게”
고개를 끄덕인 다빈이 현관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방으로 몸을 숨기자 한결이 현관문을 열고 치킨을 건네받았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한결을 알아본 배달맨이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한결이 한 번 더 목례를 하고는 문을 열어주자, 배달맨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건네받은 치킨 박스를 들고 주방으로 가져가, 식탁 위에 내려놓은 한결이 다빈을 보고 말했다.
“피하라고 한 거 혹시 기분 언짢진 않지? 난 괜찮은데… 남자 집에 와 있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당신에게 안 좋을 것 같아서.”
“전혀. 난 괜찮아. 우리, 그럼 이제 치맥을 한 번 즐겨볼까?”
“어? 지금… 치…치맥을 즐기자고? 우리 하던 거 있었잖아. 그거… 마저 하고.”
“아우, 무슨 소리야. 치킨은 식으면 맛없다고. 그러니까 얼른 앉으세요”
다빈은 아쉬워하는 한결을 끌어다 식탁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2개를 꺼내와 각자 앞에 놓고는 자신도 한결의 앞에 앉았다.
아쉬움이 컸지만, 서둘지 않으리라. 한결은 제 앞에 놓은 맥주를 들어 마개를 따 다빈의 앞에 내려 주고는, 다빈의 것을 따 건배를 청했다.
“자, 건배”
다빈도 입가에 호선을 그으며, 한결의 맥주에 캔을 부딪쳤다.
꼴깍꼴깍. 한결이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참기 어려워진 다빈에 대한 욕망을 삼키기라도 하듯.
***
오랜만에 찾은 라디오 부스는 여전히 정겨웠다. 한때 심야 라디오의 DJ로 활동하기도 했던 한결은 연이은 폭설로 인해 야외촬영이 연기되면서 뜻하지 않은 짧은 휴식을 취하던 중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윤수의 부탁을 받고 라디오국을 찾았다.
한결에 이어 다음 DJ로 바통을 이어받은 윤수의 <한밤의 음악 도시>의 매주 수요일은 연애상담코너가 진행되는 날인데, 고정 게스트로 출연해 청취자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진중한 충고를 해 주던 시현이 지방 공연 때문에 부득이 출연할 수 없게 되자 윤수의 부탁으로 한결 대신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익숙한 2부 시그널이 나가고, 노련한 디제이의 멘트가 흘렀다. 2부 첫 곡이 소개되자 한결도 디제이 부스로 들어가 헤드셋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작가로부터 오늘 소개할 사연을 건네받아 낭독 연습과 코멘터리를 생각하며 몇 가지 도움될 만한 말들을 적어두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고 잔잔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부스 너머의 PD 신호가 있자 한결이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늦깎이 대학생인 사연자는 대학 생활 중에도 형편 때문에 몇 번의 휴학을 해, 동기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여대생이었다. 그런데 점점 한 교수님이 마음에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6살 정도의 차이였지만 교수와 학생의 신분으로 섣불리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짝사랑만 점점 더 커지던 중, 교수님이 최근 선을 봐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마음이 통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네, 사연 잘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시현 씨께서 지방 공연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대신 김한결 씨가 함께해 주실 예정인데요. 안녕하세요. 김한결 씨.”
“어?!”
순간, 경직되는 다빈이 느껴져 한결이 능청스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놀래. 종일 밖에서 바깥바람 맞으며 촬영했는데 씻고 편하게 치맥을 즐기자는 소린데…. 뭔가 다른 걸 기대했나 봐?”
“다른 걸… 기대하다니 무슨… 그래. 나도 좀 씻어야겠다. 기다려 금방 손만 좀 씻고 나올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결은 어색함에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다빈을 놓아주지 않은 채, 다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대충 씻고 나오면 안 되는데. 우리 집 깨끗한 거 안 보여? 개운하게 샤워도 하고 나와. 후훗.”
이거 신호인가?
연예계 생활을 하느라 사생활을 거의 같지 못했던 탓에 감이 너무 떨어진 건지. 지금 한결의 말이 특별한 의미를 담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오버해서 받아들이는 건지 다빈은 영 모르겠다.
“괜찮아. 치맥만 좀 하다가 갈 건데. 굳이 샤워까진 뭐.”
“누가 가래? 올 때는 맘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맘대로 못 나가는 게 우리 집인데. 그러게 잘 생각하고 들어 왔어야지”
오늘따라 유달리 짓궂은 농담을 하는 한결이었다. 농담인 줄 알면서도 심장은 두근거리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이 연하 연인의 농담에 그대로 놀아날 순 없어 다빈도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음… 그럼 나 오늘 못 가는 거야? 함부로 사람들인 거 후회할 수도 있을 텐데…”
다빈이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하하하. 기대되는데?”
다빈도 반달 눈을 하며 한결을 따라 웃었다.
“어쨌든 개운하게 좀 씻어. 하루 종일 찬 바람 맞았잖아.”
“응”
종일 찬 바람을 맞고 있다가 집 안에 들어오니, 얼른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기도 했다. 그래 뭐 어때. 샤워 정도는 괜찮겠지.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생각을 굳힌 다빈은 욕실을 향해 들어갔다.
언제 받아두었는지 욕조에는 이미 거품 목욕을 할 수 있게 적당한 온도의 물이 받아져 있었다.
“후훗. 자상하기도 해라”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살짝 손을 담갔다가, 이내 옷을 벗고 욕조 깊이 몸을 담갔다. 하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금세 나른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밖에서 치맥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결만 없었다면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고 싶을 만큼 편안했다.
신기해. 내 집도 아닌데, 전혀 안 불편하네.
그때, 문밖에서 “똑똑” 노크가 울린 후, 한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문 앞에 갈아입을 옷 놔뒀어. 다 씻고 나면 갈아입고 나와”
괜찮은데, 굳이 또 옷까지 찾아온 모양이다.
“응. 거기 두고 가”
다빈은 욕실 밖으로 소리가 들리게 한껏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다빈은 거품을 한 손 가득 떠서 어깨 위로 얹었다. 부드러운 거품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좋아 몇 번을 문질러 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욕조 안에서 거품 목욕을 즐기고 난 후, 한결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아 샤워기로 몸을 헹구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감고 난 후, 마른 몸을 대충 닦고 한편에 걸려 있는 바스 가운까지 입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슴 부분을 꽉 여미어 잡은 후 욕실 문밖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살짝 문을 열어서는 손만 뻗어 문 앞에 놓인 옷가지를 얼른 갖고 들어갔다.
티셔츠와 반바지였다. 한결에게는 슬림핏의 쫄티였을 티셔츠는 여자치고도 마른 다빈이 입으니 헐렁한 박시핏이 되었다. 자기 딴에는 나름 작은 옷을 찾는다고 찾았겠지만 184의 장신인 한결의 옷이 다빈에게는 미니 원피스쯤 되는 길이었다. 아래에 고무줄로 된 반바지까지 입으니 영락없이 아빠 옷을 뺏어 입은 아이 꼴이다.
“후훗. 그래도 편하긴 하네.”
옷에서 익숙한 한결의 향이 올라왔다. 너무 오래 씻었나. 한결이 지루하겠다 싶어 젖은 머리를 대충 닦은 후 욕실 문을 열고 나섰다.
거실에 앉아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한결이 일어나 다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너무 오래 있었지. 빨리 나온다고 나온 건데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리네”
“괜찮아.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서 첫날밤이 되면 이런 그림이겠구나, 상상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잘 가던데. 하핫”
한결의 능청스런 농담에 다빈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머, 누가 한결 씨랑 신혼여행 간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하는 다빈에게 한 발 더 바짝 성큼 다가선 한결이 다빈의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눈을 내리뜨고 말했다.
“그럴 거 아닌가? 난 그럴 건데.”
갑자기 너무 진지해진 눈빛에 다빈은 그대로 눈을 마주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하지만 이내 한결의 손이 다빈의 턱을 치켜세우더니,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어 왔다.
달콤하게 시작된 키스는 점점 더 거세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혀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엉켜 들었다.
같은 향의 나누어 가진 두 사람의 체취가 달게 코를 자극했고, 여전히 물기가 뚝뚝 떨어질 듯한 젖은 머리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본능을 일깨워 냈다.
한결의 손이 다빈의 젖은 머리칼 속을 팍 들었다. 이제 이 여자는 내 여자다. 더는 이 여자를 사랑함에 있어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며 한결은 다짐했다.
입술을 떼고 뜨거워진 숨결을 잠시 내쉬던 한결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더니 다시금 다빈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온 다빈의 혀가 한결의 입속을 찾아들었다. 쉴 틈 없이 엉켜 드는 서로의 혀의 놀림에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해져만 갔다.
너무나 뜨거워 아찔하기까지만 한 키스가 계속 이어지던 중 한결의 손이 다빈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허리를 만지던 손이 빙 돌아 왼쪽 허리춤에 닿았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온몸에 짜릿한 기운이 퍼져갔다.
이제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오롯이 서로를 갈구하는 욕망만이 꿈틀거렸다. 다빈은 이대로 사랑이 계속되어도 좋을 듯했다.
그때 요란하게 울리는 현관 벨.
깜짝 놀란 다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결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한 다빈을 안아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후, 한결이 기다려보라며 인터폰으로 화면을 확인하니 치킨 배달이었다.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네. 치킨이야, 치킨 배달 왔어.”
한결의 말을 듣고서야, 다빈이 휴. 하고 긴장을 풀었다.
“저쪽 안 보이는 쪽으로 잠깐 가 있어. 문 열어주게”
고개를 끄덕인 다빈이 현관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방으로 몸을 숨기자 한결이 현관문을 열고 치킨을 건네받았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한결을 알아본 배달맨이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한결이 한 번 더 목례를 하고는 문을 열어주자, 배달맨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건네받은 치킨 박스를 들고 주방으로 가져가, 식탁 위에 내려놓은 한결이 다빈을 보고 말했다.
“피하라고 한 거 혹시 기분 언짢진 않지? 난 괜찮은데… 남자 집에 와 있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당신에게 안 좋을 것 같아서.”
“전혀. 난 괜찮아. 우리, 그럼 이제 치맥을 한 번 즐겨볼까?”
“어? 지금… 치…치맥을 즐기자고? 우리 하던 거 있었잖아. 그거… 마저 하고.”
“아우, 무슨 소리야. 치킨은 식으면 맛없다고. 그러니까 얼른 앉으세요”
다빈은 아쉬워하는 한결을 끌어다 식탁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2개를 꺼내와 각자 앞에 놓고는 자신도 한결의 앞에 앉았다.
아쉬움이 컸지만, 서둘지 않으리라. 한결은 제 앞에 놓은 맥주를 들어 마개를 따 다빈의 앞에 내려 주고는, 다빈의 것을 따 건배를 청했다.
“자, 건배”
다빈도 입가에 호선을 그으며, 한결의 맥주에 캔을 부딪쳤다.
꼴깍꼴깍. 한결이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참기 어려워진 다빈에 대한 욕망을 삼키기라도 하듯.
***
오랜만에 찾은 라디오 부스는 여전히 정겨웠다. 한때 심야 라디오의 DJ로 활동하기도 했던 한결은 연이은 폭설로 인해 야외촬영이 연기되면서 뜻하지 않은 짧은 휴식을 취하던 중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윤수의 부탁을 받고 라디오국을 찾았다.
한결에 이어 다음 DJ로 바통을 이어받은 윤수의 <한밤의 음악 도시>의 매주 수요일은 연애상담코너가 진행되는 날인데, 고정 게스트로 출연해 청취자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진중한 충고를 해 주던 시현이 지방 공연 때문에 부득이 출연할 수 없게 되자 윤수의 부탁으로 한결 대신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익숙한 2부 시그널이 나가고, 노련한 디제이의 멘트가 흘렀다. 2부 첫 곡이 소개되자 한결도 디제이 부스로 들어가 헤드셋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작가로부터 오늘 소개할 사연을 건네받아 낭독 연습과 코멘터리를 생각하며 몇 가지 도움될 만한 말들을 적어두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고 잔잔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부스 너머의 PD 신호가 있자 한결이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늦깎이 대학생인 사연자는 대학 생활 중에도 형편 때문에 몇 번의 휴학을 해, 동기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여대생이었다. 그런데 점점 한 교수님이 마음에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6살 정도의 차이였지만 교수와 학생의 신분으로 섣불리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짝사랑만 점점 더 커지던 중, 교수님이 최근 선을 봐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마음이 통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네, 사연 잘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시현 씨께서 지방 공연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대신 김한결 씨가 함께해 주실 예정인데요. 안녕하세요. 김한결 씨.”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51화 - 사랑은 현재 진행형
“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한결입니다. 오랜만에 라디오국을 찾으니 떨리기도 하고, 아주 반갑네요. 오늘 제가 이시현 씨 만큼은 안 되겠지만.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아유 엄살은. 디제이도 하셨던 분께서. 자, 그럼 좀 전에 소개해드린 사연으로 들어가서요. 이런 상황이면 어쩌면 좋을까요?”
“교수님을 짝사랑한다… 이건 또 중고딩 때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거 하고는 좀 다를 텐데요. 고백하기도 영 쉽지 않을 거 같긴 하네요”
한결이 좀 전 읽었던 사연에 공감을 표했다.
“그러게요. 고백했다고 받아주기도 쉽지 않지만, 교수님이 또 학생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학생이랑 사귀면 주위의 시선도 안 좋을 것 같구요. 사연자 분 많이 고민되시겠는데요. 일단 마음을 표현이라도 해 보고, 잘 되든 안 되든 그다음에 고민하면 어떨까요?”
“네. 제 생각에도 그렇게 하시는 게 나중에 후회도 덜 되고, 지금 가슴앓이도 덜 하실 것 같네요. 다른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걸 표현하면 상대도 그걸 오해 없이 받아 줄 것 같아요. 그런 다음에 상대의 마음도 같은지 다른지는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 봐야 하는 거구요. 교수와 제자라는 특별한 상황이긴 하지만… 다른 오해 없게 마음을 잘 한번 표현해 보세요. 뭐 안 돼도 일단 고백이라도 했으니 미련은 덜 할 테니까요”
“네. 김한결 씨는 고백해 보라고 충고해 주셨는데요. 아무튼, 사연 주신 분 좋은 결과 있으시면 좋겠네요. 그런데. 한결 씨. 한결 씨도 누구 짝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순간 한결의 뇌리에 중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서 처음 다빈을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럼요. 있죠.“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결이 긍정의 대답을 하자 윤수가 흥미롭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
“천하의 김한결 씨도 짝사랑을 다 하셨군요.”
왠지 짝사랑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비주얼의 한결도 짝사랑해 봤다고 하니 윤수가 궁금한 듯 물어왔다.
“중학교 때 우연히 보게 된 분을 혼자 좋아하게 됐는데요. 나중에 우연히 그분을 다시 만났어요.”
“와, 그래서 그분께 고백하셨나요?”
“음… 중간에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결국 고백을 하긴 했어요, 중딩 때부터 짝사랑했었다는 소리는 못했지만”
“어쨌든 고백을 하긴 하셨군요. 천하의 김한결이 고백했으니 뭐 당연히 그 사랑은 이뤄졌겠죠?”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았어요. 그때 상황이.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 채 가슴앓이를 많이 했었죠. 나중에 그게 많이 미안했어요.”
“상황이 간단하지 않았다. 왠지 데뷔 후의 얘기 같다는 느낌이 팍 오는데요. 맞습니까?”
“하하하. 글쎄요…”
한결은 그쯤에서 즉답을 아꼈다.
“한결 씨 얘기에 게시판에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요. 그분이 지금 공개연인인 그분? 아니냐는 얘기가 올라오네요”
한결은 윤수에 질문에 잠깐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너무나 단호하게 부정하는 말투에 되려 무한해진 윤수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네. 아니시랍니다, 팬 여러분. 자 그럼 여기서 노래 한 곡 듣고 가시죠”
노래가 전파를 타기 시작하자 마이크를 닫은 윤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야? 화연 씨 아냐? 데뷔 후에 너 연애 하는 거 나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후후… 화연이랑은 그런 사이 아냐”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한결의 뜻밖의 답변에 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응.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아까 방송 때 말한 그 상황이 화연이 씨랑 열애설 인정해야 했던 그 상황이야…? 우와 너 그럼 혹시 그 짝사랑녀와 현재 진행형??”
“후후…. “
한결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더는 대답이 없었다.
“이야… 이거 기자들한테 말하면 바로 톱뉴스 감이네. 너 나한테 잘 보여 김한결. 아는 기자한테 확. 다 불어버리기 전에”
“뭐, 그러고 싶으면 그러시던가. 맘대로 해. 대신 다신 나 볼 생각은 하지 말고”
한결은 배짱 두둑한 모습이었다. 그런 한결의 모습을 보고 있는 윤수의 눈에도 뿌듯함이 서렸다. 이곳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만난 후배지만, 친동생처럼 아끼는 한결이다.
이성 문제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뜬금없이 화연과의 열애설을 인정할 때도 참 의아하게 생각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의 마음을 훔친 여자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예전에 비해 훨씬 밝아지고, 좋아졌다. 역시, 사랑의 힘이란 숨길 수 없구나. 윤수는 노래가 끝나가자 한결의 어깨를 한번 툭 쳐주고는, 다시 헤드셋을 썼다.
***
다빈은 모처럼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한결의 얘기를 전해 듣고, 10시부터 라디오를 켜 놓고 있었다. 11시 넘어가고 드디어 2부 코너에 들어가자 낯익은… 부드러운 중저음. 한결의 음성이 들렸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다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한결을 향하는 디제이의 질문. ‘짝사랑해 본 적 있냐’라는 질문에 대한 한결의 대답.
뭐야, 대답하는 뉘앙스를 보면 데뷔 이후 같은데. 그럼 이화연 말고 달리 여자가 또 있었단 소리야?
다빈은 한결의 말에 내심 질투가 스멀스멀 번져 왔다.
“치. 아닌 것 같더니 할 건 다 했네. 나만 순진하게 사람들 눈치 보느라 연애도 제대로 못 하고. 와… 이거 완전 억울하네”
“그럼 그 여자랑은 왜 헤어진 거야? 그렇게 여자관계가 복잡하셨다. 이거지?!”
혼잣말하면서, 다빈은 점점 더 목소리가 커졌다.
다빈이 괜히 질투가 나서 혼자 불뚝하고 있는데, 방송을 끝낸 한결에게서 바로 문자가 들어왔다.
- 라디오 지금 끝. 방송 들었어?
쳇. 짝사랑 얘기 하는 거 들었냐고? 들어도 못 들었다 왜!
- 아니 들으려고 했는데, 전화가 와서 통화하느라.
일단 이번은 내 못 들은 척 눈감아 주지. 좋은 여자 만난 줄 알아 김한결!
다빈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 그랬구나. 난 당신이 듣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 왜? 뭔가 중요한 얘기라도 했어?
다빈은 모른 척하고 물었다.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모처럼 라디오 방송이니까 당신이 들어주길 바랬지 뭐.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 늦었다.
뭐야, 아쉬운 듯한 저 반응은. 지 짝사랑 얘기를 왜 내가 들어주길 바래. 뭐, 뭐… 그래서 결국은 지가 고백했더니 사랑은 이뤄졌다. 지가 이렇게 인기 많은 남자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잠시 의문이 생겼지만, 다빈도 더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잘 자’라는 문자를 보내고는 침대로 올라갔다.
***
영화는 순조롭게 촬영되어 어느덧 후반부에 치닫고 있었다. 한결은 촬영 스케줄을 조정해, 해외로 팬 미팅과 화보 촬영을 위해 출국했다.
그간 촬영을 핑계로 매일 만나고 있던지라 7일간의 빈자리도 꽤 크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 출국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항 어딘가에 있을 파파라치 기자들과 팬들의 눈을 의식해 전날 집에 바래다주는 길에 인사하는 거로 대신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을 가득 메우고 있던 현지 팬들에 둘러싸였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사진과 함께 바로바로 올라왔다.
옆에서 웃고, 장난칠 때는 모르겠더니 저렇게 인기가 많은 남자가 연인이라니, 새삼 가슴 벅차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잠시 후, 수십 명의 팬들이 둘러싼 공항을 무사히 통과한 한결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 난 잘 도착했어. 혼자서도 촬영 잘하고 있지?
다빈은 한결의 출국으로 다빈의 분량을 조정해서 몰아서 찍고 있었다. 스케줄을 조절해 자신의 분량을 몰아서 찍는 건 별반 어렵지 않았으나, 저 혼자 있는 촬영장이 너무나 휑하게 느껴져서 얼른 한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볼펜을 들어 고작 7일뿐인 공백 일을 하루하루 X표까지 칠하며 기다린 끝에 길고 길었던 7 일째가 되던 날.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부터 달랐다.
“와, 드디어 오늘 한결 씨 오는 날이네.”
해외 스케줄이 7일 이길 다행이지 몇 달이 되면 어떡하나 싶다가, 언제 이리도 마음이 커져 단 며칠간의 부재도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건지… 한결에 대한 사랑이 그새 훌쩍 커져 있음을 새삼 느꼈다.
- 이따가 공항으로 마중이라도 나가고 싶지만, 기자들과 팬들이 있을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네. 조심히 돌아와.
- 응. 몇 시간만 기다려. 한국 도착하자마자 달려갈 테니까. 너무 보고 싶다.
- 나두.
답 문자를 보내는 다빈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을 나오는데 예상대로 팬들과 취재진들이 북적거렸다.
오늘 촬영분을 끝낸 다빈이 밴에 오르자마자 포탈에 들어가니 벌써 연예면은 김한결의 귀국 기사로 도배되어있다.
사진 속 한결은 대충 걸친 듯한 옷에도 워낙에 우월한 기럭지와 몸매 때문인지 간지가 철철이다. 역시나 패션의 완성은 얼굴임이 틀림없다. 이런 멋진 남자가 연인이라니. 다빈은 사진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문자를 알리는 효과음.
-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 나 당신 집 근처 거의 다 왔어.
문자를 확인한 다빈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진다.
“미라야 얼른 출발하자.”
한 일주일 영 기운이 없더니, 한결의 귀국 했다는 소리 하나에 저리 생기가 도는 걸 보면, 좋아하기는 어지간히 좋아하나 싶어 미라가 퉁을 주며 시동을 걸었다.
오피스텔 앞에서 내린 다빈은 곧장 미라를 돌려보냈다. 겨울이라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해는 어둑어둑해 있어 한결의 차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깜빡깜빡 빛나는 헤드라이트. 빛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이 다빈은 차를 향해 뛰었다. 달려오는 다빈의 모습에 한결도 차에서 내려 그대로 뛰어가 다빈을 안아 올렸다.
“하아… 보고 싶었어. 일주일이 아니라 일곱 달은 못 본 거 같네.”
한결의 품에서 다빈이 대꾸했다.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며칠 만에 보니까 진짜 반갑다.”
다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가 보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얼른 차로 오르자며 한결을 이끌었다. 한결이 조수석 문을 열고 다빈을 태운 후, 돌아가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담에는 해외 스케줄도 무조건 같이 가자. 하마터면 못 참고 밤에 왔다 가려고 했잖아.”
“푸후후. 그 정도였어?”
“아니… 그 이상!”
한결은 더 말할 것도 틈도 없이 다빈의 입술부터 찾아들었다. 이제는 익숙할 만도 하련만 뜨겁게 입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한결의 입김이 여전히 떨리고, 설레 아찔한 벼랑 끝으로 내몰리듯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간 참았던 키스를 한꺼번에 쏟아 붓듯 간절한 한결의 혀가 다빈의 혀를 찾아들었다. 훅 빨아 당기는가 싶더니, 놓고, 핥는가 싶더니, 다시 세차가 빨아들였다.
키스는 점점 더 농밀해졌다.
“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한결입니다. 오랜만에 라디오국을 찾으니 떨리기도 하고, 아주 반갑네요. 오늘 제가 이시현 씨 만큼은 안 되겠지만.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아유 엄살은. 디제이도 하셨던 분께서. 자, 그럼 좀 전에 소개해드린 사연으로 들어가서요. 이런 상황이면 어쩌면 좋을까요?”
“교수님을 짝사랑한다… 이건 또 중고딩 때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거 하고는 좀 다를 텐데요. 고백하기도 영 쉽지 않을 거 같긴 하네요”
한결이 좀 전 읽었던 사연에 공감을 표했다.
“그러게요. 고백했다고 받아주기도 쉽지 않지만, 교수님이 또 학생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학생이랑 사귀면 주위의 시선도 안 좋을 것 같구요. 사연자 분 많이 고민되시겠는데요. 일단 마음을 표현이라도 해 보고, 잘 되든 안 되든 그다음에 고민하면 어떨까요?”
“네. 제 생각에도 그렇게 하시는 게 나중에 후회도 덜 되고, 지금 가슴앓이도 덜 하실 것 같네요. 다른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걸 표현하면 상대도 그걸 오해 없이 받아 줄 것 같아요. 그런 다음에 상대의 마음도 같은지 다른지는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 봐야 하는 거구요. 교수와 제자라는 특별한 상황이긴 하지만… 다른 오해 없게 마음을 잘 한번 표현해 보세요. 뭐 안 돼도 일단 고백이라도 했으니 미련은 덜 할 테니까요”
“네. 김한결 씨는 고백해 보라고 충고해 주셨는데요. 아무튼, 사연 주신 분 좋은 결과 있으시면 좋겠네요. 그런데. 한결 씨. 한결 씨도 누구 짝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순간 한결의 뇌리에 중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서 처음 다빈을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럼요. 있죠.“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결이 긍정의 대답을 하자 윤수가 흥미롭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
“천하의 김한결 씨도 짝사랑을 다 하셨군요.”
왠지 짝사랑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비주얼의 한결도 짝사랑해 봤다고 하니 윤수가 궁금한 듯 물어왔다.
“중학교 때 우연히 보게 된 분을 혼자 좋아하게 됐는데요. 나중에 우연히 그분을 다시 만났어요.”
“와, 그래서 그분께 고백하셨나요?”
“음… 중간에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결국 고백을 하긴 했어요, 중딩 때부터 짝사랑했었다는 소리는 못했지만”
“어쨌든 고백을 하긴 하셨군요. 천하의 김한결이 고백했으니 뭐 당연히 그 사랑은 이뤄졌겠죠?”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았어요. 그때 상황이.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 채 가슴앓이를 많이 했었죠. 나중에 그게 많이 미안했어요.”
“상황이 간단하지 않았다. 왠지 데뷔 후의 얘기 같다는 느낌이 팍 오는데요. 맞습니까?”
“하하하. 글쎄요…”
한결은 그쯤에서 즉답을 아꼈다.
“한결 씨 얘기에 게시판에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요. 그분이 지금 공개연인인 그분? 아니냐는 얘기가 올라오네요”
한결은 윤수에 질문에 잠깐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너무나 단호하게 부정하는 말투에 되려 무한해진 윤수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네. 아니시랍니다, 팬 여러분. 자 그럼 여기서 노래 한 곡 듣고 가시죠”
노래가 전파를 타기 시작하자 마이크를 닫은 윤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야? 화연 씨 아냐? 데뷔 후에 너 연애 하는 거 나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후후… 화연이랑은 그런 사이 아냐”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한결의 뜻밖의 답변에 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응.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아까 방송 때 말한 그 상황이 화연이 씨랑 열애설 인정해야 했던 그 상황이야…? 우와 너 그럼 혹시 그 짝사랑녀와 현재 진행형??”
“후후…. “
한결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더는 대답이 없었다.
“이야… 이거 기자들한테 말하면 바로 톱뉴스 감이네. 너 나한테 잘 보여 김한결. 아는 기자한테 확. 다 불어버리기 전에”
“뭐, 그러고 싶으면 그러시던가. 맘대로 해. 대신 다신 나 볼 생각은 하지 말고”
한결은 배짱 두둑한 모습이었다. 그런 한결의 모습을 보고 있는 윤수의 눈에도 뿌듯함이 서렸다. 이곳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만난 후배지만, 친동생처럼 아끼는 한결이다.
이성 문제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뜬금없이 화연과의 열애설을 인정할 때도 참 의아하게 생각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의 마음을 훔친 여자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예전에 비해 훨씬 밝아지고, 좋아졌다. 역시, 사랑의 힘이란 숨길 수 없구나. 윤수는 노래가 끝나가자 한결의 어깨를 한번 툭 쳐주고는, 다시 헤드셋을 썼다.
***
다빈은 모처럼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한결의 얘기를 전해 듣고, 10시부터 라디오를 켜 놓고 있었다. 11시 넘어가고 드디어 2부 코너에 들어가자 낯익은… 부드러운 중저음. 한결의 음성이 들렸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다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한결을 향하는 디제이의 질문. ‘짝사랑해 본 적 있냐’라는 질문에 대한 한결의 대답.
뭐야, 대답하는 뉘앙스를 보면 데뷔 이후 같은데. 그럼 이화연 말고 달리 여자가 또 있었단 소리야?
다빈은 한결의 말에 내심 질투가 스멀스멀 번져 왔다.
“치. 아닌 것 같더니 할 건 다 했네. 나만 순진하게 사람들 눈치 보느라 연애도 제대로 못 하고. 와… 이거 완전 억울하네”
“그럼 그 여자랑은 왜 헤어진 거야? 그렇게 여자관계가 복잡하셨다. 이거지?!”
혼잣말하면서, 다빈은 점점 더 목소리가 커졌다.
다빈이 괜히 질투가 나서 혼자 불뚝하고 있는데, 방송을 끝낸 한결에게서 바로 문자가 들어왔다.
- 라디오 지금 끝. 방송 들었어?
쳇. 짝사랑 얘기 하는 거 들었냐고? 들어도 못 들었다 왜!
- 아니 들으려고 했는데, 전화가 와서 통화하느라.
일단 이번은 내 못 들은 척 눈감아 주지. 좋은 여자 만난 줄 알아 김한결!
다빈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 그랬구나. 난 당신이 듣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 왜? 뭔가 중요한 얘기라도 했어?
다빈은 모른 척하고 물었다.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모처럼 라디오 방송이니까 당신이 들어주길 바랬지 뭐.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 늦었다.
뭐야, 아쉬운 듯한 저 반응은. 지 짝사랑 얘기를 왜 내가 들어주길 바래. 뭐, 뭐… 그래서 결국은 지가 고백했더니 사랑은 이뤄졌다. 지가 이렇게 인기 많은 남자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잠시 의문이 생겼지만, 다빈도 더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잘 자’라는 문자를 보내고는 침대로 올라갔다.
***
영화는 순조롭게 촬영되어 어느덧 후반부에 치닫고 있었다. 한결은 촬영 스케줄을 조정해, 해외로 팬 미팅과 화보 촬영을 위해 출국했다.
그간 촬영을 핑계로 매일 만나고 있던지라 7일간의 빈자리도 꽤 크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 출국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항 어딘가에 있을 파파라치 기자들과 팬들의 눈을 의식해 전날 집에 바래다주는 길에 인사하는 거로 대신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을 가득 메우고 있던 현지 팬들에 둘러싸였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사진과 함께 바로바로 올라왔다.
옆에서 웃고, 장난칠 때는 모르겠더니 저렇게 인기가 많은 남자가 연인이라니, 새삼 가슴 벅차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잠시 후, 수십 명의 팬들이 둘러싼 공항을 무사히 통과한 한결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 난 잘 도착했어. 혼자서도 촬영 잘하고 있지?
다빈은 한결의 출국으로 다빈의 분량을 조정해서 몰아서 찍고 있었다. 스케줄을 조절해 자신의 분량을 몰아서 찍는 건 별반 어렵지 않았으나, 저 혼자 있는 촬영장이 너무나 휑하게 느껴져서 얼른 한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볼펜을 들어 고작 7일뿐인 공백 일을 하루하루 X표까지 칠하며 기다린 끝에 길고 길었던 7 일째가 되던 날.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부터 달랐다.
“와, 드디어 오늘 한결 씨 오는 날이네.”
해외 스케줄이 7일 이길 다행이지 몇 달이 되면 어떡하나 싶다가, 언제 이리도 마음이 커져 단 며칠간의 부재도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건지… 한결에 대한 사랑이 그새 훌쩍 커져 있음을 새삼 느꼈다.
- 이따가 공항으로 마중이라도 나가고 싶지만, 기자들과 팬들이 있을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네. 조심히 돌아와.
- 응. 몇 시간만 기다려. 한국 도착하자마자 달려갈 테니까. 너무 보고 싶다.
- 나두.
답 문자를 보내는 다빈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을 나오는데 예상대로 팬들과 취재진들이 북적거렸다.
오늘 촬영분을 끝낸 다빈이 밴에 오르자마자 포탈에 들어가니 벌써 연예면은 김한결의 귀국 기사로 도배되어있다.
사진 속 한결은 대충 걸친 듯한 옷에도 워낙에 우월한 기럭지와 몸매 때문인지 간지가 철철이다. 역시나 패션의 완성은 얼굴임이 틀림없다. 이런 멋진 남자가 연인이라니. 다빈은 사진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문자를 알리는 효과음.
-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 나 당신 집 근처 거의 다 왔어.
문자를 확인한 다빈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진다.
“미라야 얼른 출발하자.”
한 일주일 영 기운이 없더니, 한결의 귀국 했다는 소리 하나에 저리 생기가 도는 걸 보면, 좋아하기는 어지간히 좋아하나 싶어 미라가 퉁을 주며 시동을 걸었다.
오피스텔 앞에서 내린 다빈은 곧장 미라를 돌려보냈다. 겨울이라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해는 어둑어둑해 있어 한결의 차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깜빡깜빡 빛나는 헤드라이트. 빛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이 다빈은 차를 향해 뛰었다. 달려오는 다빈의 모습에 한결도 차에서 내려 그대로 뛰어가 다빈을 안아 올렸다.
“하아… 보고 싶었어. 일주일이 아니라 일곱 달은 못 본 거 같네.”
한결의 품에서 다빈이 대꾸했다.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며칠 만에 보니까 진짜 반갑다.”
다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가 보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얼른 차로 오르자며 한결을 이끌었다. 한결이 조수석 문을 열고 다빈을 태운 후, 돌아가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담에는 해외 스케줄도 무조건 같이 가자. 하마터면 못 참고 밤에 왔다 가려고 했잖아.”
“푸후후. 그 정도였어?”
“아니… 그 이상!”
한결은 더 말할 것도 틈도 없이 다빈의 입술부터 찾아들었다. 이제는 익숙할 만도 하련만 뜨겁게 입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한결의 입김이 여전히 떨리고, 설레 아찔한 벼랑 끝으로 내몰리듯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간 참았던 키스를 한꺼번에 쏟아 붓듯 간절한 한결의 혀가 다빈의 혀를 찾아들었다. 훅 빨아 당기는가 싶더니, 놓고, 핥는가 싶더니, 다시 세차가 빨아들였다.
키스는 점점 더 농밀해졌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52화 - 당신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자제력이 없어져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엉킨 혀는 좀처럼 풀어질 줄 몰랐다.
둘의 호흡도 착착 맞아, 한결이 한번 다빈의 혀를 빨아들이면, 그다음은 다빈이 한결의 혀를 세차게 말아 빨아들였고, 이내 목구멍 안쪽까지 닿을 듯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사랑 하나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이 기분을 달리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을 얻지 못해 가슴앓이했던 날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더 열심히, 더 강하게 서로를 탐하고, 서로를 원했다.
달아오른 욕망에 한결이 다빈의 몸을 좀 더 제 쪽으로 세차게 끌어당기고는, 뜨거워진 손으로 다빈의 등에서부터 허리를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몇 번이고 허리와 등을 쓸어 내리던 손이 셔츠 안으로 밀고 들어가더니 봉긋한 다빈의 가슴 위에서 멈췄다.
흐앗. 순간 멈칫한 다빈이 짧은 숨소리를 내뱉었지만, 이내 강렬히 머금는 한결의 입술에 삼켜져 소리는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한결의 손이 봉긋한 가슴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더니, 이내 가슴을 가리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들추어내고는 부드러운 맨살 위에 손을 올렸다. 세상 이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또 있을까. 한결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가슴 끝의 볼록 올라있는 정점을 건드렸다. 순간 아랫배가 찌릿 아파오는 느낌. 다빈 역시 무엇에 홀린 듯 탄탄한 한결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의 가슴을 오롯이 느꼈다.
다빈이 넓고 탄탄한 가슴을 만지다 자석에 끌리듯 얼굴을 묻자 한결의 손이 더 바쁘게 다빈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다빈을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제 몸을 다빈의 의자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눕다시피 자신의 아래에 있는 다빈의 얼굴에, 귓불에,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키스 세례 중, 자신의 배쯤에서 딱딱해진 한결의 남심이 느껴져 다빈이 흠칫 놀랐다.
“하아… 한결 씨…. 그만… 여기서… 더는…”
긴장 때문인지, 저마저도 멈추기 힘든 욕망 때문인지 다빈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한결은 그제야 어렵사리 다빈의 몸에서 떨어져서는 짧게 쪽.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다빈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더니, 깊이 있는 눈빛으로 다빈을 쳐다보았다.
“휴…. 요즘 당신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자제력이 없어져…”
나도 그래.
다빈은 이미 자신도 한결과 같은 마음임을 마음속으로 되뇌고는, 한결의 가슴팍에서 꼭 쥐어져 있던 한결의 손을 당겨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런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해 한결이 그대로 다빈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달콤한 향이 그녀의 머리칼을 타고 코를 자극했다.
시간이 여기서 멈춰도 좋을 것만 같았다. 한결은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에게 안겨있는 다빈의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
촬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배우의 감정 흐름을 중요시하는 김 감독은 장소나, 시간의 구애가 있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본 순서대로 촬영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가슴이 뛰지 않을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이화연의 남자인 이 비주얼도 찬란한 남자를 바라보며 사랑 연기를 하자니 점점 더 사심이 개입되어, 대사가 제대로 쳐지질 않았다.
때마침 조명을 점검하기 위해 잠시 촬영이 중단되었다.
“…….좋다”
조명을 조정하는 동안 대기하고 마주 서 있던 다빈을 보며 짧게 내뱉은 한결의 한 마디에 가슴에서 하트 백만 개가 피어올랐다.
“우리 다음 작품도 같이 할까?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이거 해보니까 일석이조네”
이 남자가 점점 팔불출이 되어 가나.
“우리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나 뭐. 시켜 줘야 하지.”
“안 시켜준대? 누가? 어느 감독이? 그럼 뭐… 이참에 내가 제작 한번 해 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다빈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왜 괜히 시작했다가 쫄딱 망하면 어쩌려고?”
“그럼 뭐, 당신이 먹여 살려야지. 당신 연기파 배우잖아. 하핫. 아니지 지난번 드라마로 대박 떠서 지금은 데뷔 10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핫한 스타지. 그런데 뭘 걱정해. 당신이 있는데.”
“어머, 점점! 나한테 빌붙으려는 생각 하지도 마. 애인 뒤치다꺼리하면서, 먹여 살려주면서 연애할 생각 없으니까.”
“애인한테는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나? 그럼 뭐… 남편 해야 되겠네. 남편은 먹여 살려 줄 거 아냐. 설마 영화 하나 망했다고 남편 버리기라도 할 거야?”
남편? 김한결이 남편이 된다…? 그에게 유다빈의 남편 이름을 붙여주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한결의 말에 잠시 한결이 남편이 된 상황을 상상해 봤지만 영,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보기 보다 냉정한 여자라서.”
둘이 촬영 중간중간 수시로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웃음을 교환하는 모습에 옆에서 촬영 대기 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입을 뗐다.
“두 사람, 사이 참 좋아. 전에 다른 프로에서 한 번 같이 했어서 그런가. 호흡도 잘 맞고. 사귀는 사람 있다는 거 몰랐으면 스캔들 나겠어”
카메라 감독의 별 의도 없이 건넨 말에 다빈은 순간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너무 생각 없이 친한 티를 냈나.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겠다.
“자, 5분 뒤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연출이 촬영을 알리는 소리가 외치자, 두 사람은 다시 촬영에 몰입했다.
***
늦은 촬영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한결은 잠자리에 들기 전 다른 연인들이 그러하듯 전화기를 찾아 다빈에게 전화기를 걸었다.
다빈과 다시 만난 이후부터 잠들기 전, 그녀의 음성을 듣고 침대에 몸을 눕혀야 편안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나야.”
“응.”
“잤어?”
“아직.”
“뭐 하고 있었는데?”
“스트레칭 좀 하고, 인터넷으로 기사 좀 보고”
연예인이면 대게 자신의 이름으로 매일 검색을 해서 새로 뉴스난 건 없는지, 팬들이 어떤 글들을 올리는지 궁금해해, 자칫 댓글로 상처를 받기 쉬움에도 인터넷을 멀리하기 어려웠다.
“뭐 특별한 얘기 난 거 있어?”
“난 없는데…… 한결 씨 얘긴 좀 있다…”
“내 얘기? 뭐?”
뭐 톱스타 이름을 넣기만 하면, 조회 수가 훌쩍 올라가니 이런 게 대체 기삿거리나 될까 싶은 것들도 뉴스로 올라오는 일이 허다했다.
해서 한결은 웬만하면 인터넷에 관심을 두지 말자는 주의라, 일부러 기사를 찾아본다거나 댓글을 읽는다거나 하는 일은 잘 없었다. 한결이 일부러 찾아 읽지 않아도, 중요한 기사는 이미 소속사에서 체크하고 그에 맞게 대응하니까.
“뭐 별건 아니고…”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 한결이 재차 물었다. 회사에서는 특별한 얘기 없었는데.
“뭔데?”
“이화연 씨랑 결별한 게 아니냐는…”
다빈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어렵게 말해. 오히려 미안해하고 눈치를 봐야 할 건 나인데.
한결은 여전히 사람들에겐 제 연인의 자리가 다빈이 아닌 화연으로 알려져 있는 게 못내
미안했다. 그런데도 다빈은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 싫은 소리나 눈치를 보인 적이 없었기에 한결은 더욱 미안해졌다.
“미안. 그런 데까지 신경 쓰이게 해서”
“아냐. 난 괜찮아. 그게 한결 씨에게도 회사에도 좋은 일이라면 뭐 사람들이 어떻게 알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한결 씨 마음이 내게 있는 걸 이젠 아는데.”
단단한 다빈의 믿음이 고마웠지만, 가슴 한편에 묵직한 쇳덩이를 달아 놓은 듯 한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미안해, 유다빈……
***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한결과 다빈의 연기 호흡도 잘 맞아 NG도 많지 않아 거의 매번 예상보다 촬영은 일찍 끝났다.
3달에 걸친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좋은 영화는 개봉 이후 성적도 좋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게 맞다면 이번 영화 역시도 틀림없이 대박일 것이다.
편집까지 끝나고 개봉 일이 잡히자 홍보팀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제 영화 촬영은 끝이 났으니 남은 건 홍보의 힘, 얼마만큼 관객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홍보팀에서 영화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부탁했고, 그중 의뢰가 왔던 몇 개 프로그램의 리스트를 들고 와 다빈과 한결에게 출연 의사를 물어왔다.
제작사 회의실에 함께 앉은 다빈과 한결이 출연 프로그램 의논하고 있었다.
“어떤 프로그램이 좋을까?”
“글쎄… 난 드라마나 영화보다… 예능 출연이 훨씬 더 긴장되더라.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언제 말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그곳이 총성 없는 전쟁터지. 한 마디라도 더 살려 방송에 나가야 하니까. 그야말로 목숨 걸고 하는 곳이지.”
“응. 그래서 난 예능 프로는 자신이 없어. 한결 씨 혼자 나가면 안 될까? 한결 씬 예능 많이 해 봤으니까 나만큼 부담스럽진 않잖아.“
그렇긴 했다. 연기, 예능, 노래 굳이 뭐가 더 좋냐고 따져 묻기도 유치하지만, 한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제 예능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럼, <뛰는맨>은 어때?”
“<뛰는맨>?”
<뛰는맨>이라면 국민 MC라 불리는 유진석이 프로그램을 이끌며 매회 약간씩 다른 포맷으로 미션 수행을 해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이 프로라면 한결은 물론 다빈도 좋아해 자주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주로 미션을 수행하며 게임을 하게 되니, 특별히 웃긴 말을 애써 하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부담이 덜 되는 것 같았다.
“말로 웃겨야 되는 것보단, 몸으로 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긴 하네”
“그럼, 우리 이걸로 하자”
“그래 그럼. 대신 한결 씨가 나 많이 도와줘야 해. 방송 욕심내느라 나 버리면 안 돼?!”
“하하하…. 이 오빠만 믿으셔!”
한결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엉킨 혀는 좀처럼 풀어질 줄 몰랐다.
둘의 호흡도 착착 맞아, 한결이 한번 다빈의 혀를 빨아들이면, 그다음은 다빈이 한결의 혀를 세차게 말아 빨아들였고, 이내 목구멍 안쪽까지 닿을 듯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사랑 하나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이 기분을 달리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을 얻지 못해 가슴앓이했던 날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더 열심히, 더 강하게 서로를 탐하고, 서로를 원했다.
달아오른 욕망에 한결이 다빈의 몸을 좀 더 제 쪽으로 세차게 끌어당기고는, 뜨거워진 손으로 다빈의 등에서부터 허리를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몇 번이고 허리와 등을 쓸어 내리던 손이 셔츠 안으로 밀고 들어가더니 봉긋한 다빈의 가슴 위에서 멈췄다.
흐앗. 순간 멈칫한 다빈이 짧은 숨소리를 내뱉었지만, 이내 강렬히 머금는 한결의 입술에 삼켜져 소리는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한결의 손이 봉긋한 가슴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더니, 이내 가슴을 가리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들추어내고는 부드러운 맨살 위에 손을 올렸다. 세상 이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또 있을까. 한결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가슴 끝의 볼록 올라있는 정점을 건드렸다. 순간 아랫배가 찌릿 아파오는 느낌. 다빈 역시 무엇에 홀린 듯 탄탄한 한결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의 가슴을 오롯이 느꼈다.
다빈이 넓고 탄탄한 가슴을 만지다 자석에 끌리듯 얼굴을 묻자 한결의 손이 더 바쁘게 다빈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다빈을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제 몸을 다빈의 의자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눕다시피 자신의 아래에 있는 다빈의 얼굴에, 귓불에,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키스 세례 중, 자신의 배쯤에서 딱딱해진 한결의 남심이 느껴져 다빈이 흠칫 놀랐다.
“하아… 한결 씨…. 그만… 여기서… 더는…”
긴장 때문인지, 저마저도 멈추기 힘든 욕망 때문인지 다빈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한결은 그제야 어렵사리 다빈의 몸에서 떨어져서는 짧게 쪽.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다빈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더니, 깊이 있는 눈빛으로 다빈을 쳐다보았다.
“휴…. 요즘 당신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자제력이 없어져…”
나도 그래.
다빈은 이미 자신도 한결과 같은 마음임을 마음속으로 되뇌고는, 한결의 가슴팍에서 꼭 쥐어져 있던 한결의 손을 당겨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런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해 한결이 그대로 다빈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달콤한 향이 그녀의 머리칼을 타고 코를 자극했다.
시간이 여기서 멈춰도 좋을 것만 같았다. 한결은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에게 안겨있는 다빈의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
촬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배우의 감정 흐름을 중요시하는 김 감독은 장소나, 시간의 구애가 있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본 순서대로 촬영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가슴이 뛰지 않을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이화연의 남자인 이 비주얼도 찬란한 남자를 바라보며 사랑 연기를 하자니 점점 더 사심이 개입되어, 대사가 제대로 쳐지질 않았다.
때마침 조명을 점검하기 위해 잠시 촬영이 중단되었다.
“…….좋다”
조명을 조정하는 동안 대기하고 마주 서 있던 다빈을 보며 짧게 내뱉은 한결의 한 마디에 가슴에서 하트 백만 개가 피어올랐다.
“우리 다음 작품도 같이 할까?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이거 해보니까 일석이조네”
이 남자가 점점 팔불출이 되어 가나.
“우리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나 뭐. 시켜 줘야 하지.”
“안 시켜준대? 누가? 어느 감독이? 그럼 뭐… 이참에 내가 제작 한번 해 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다빈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왜 괜히 시작했다가 쫄딱 망하면 어쩌려고?”
“그럼 뭐, 당신이 먹여 살려야지. 당신 연기파 배우잖아. 하핫. 아니지 지난번 드라마로 대박 떠서 지금은 데뷔 10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핫한 스타지. 그런데 뭘 걱정해. 당신이 있는데.”
“어머, 점점! 나한테 빌붙으려는 생각 하지도 마. 애인 뒤치다꺼리하면서, 먹여 살려주면서 연애할 생각 없으니까.”
“애인한테는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나? 그럼 뭐… 남편 해야 되겠네. 남편은 먹여 살려 줄 거 아냐. 설마 영화 하나 망했다고 남편 버리기라도 할 거야?”
남편? 김한결이 남편이 된다…? 그에게 유다빈의 남편 이름을 붙여주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한결의 말에 잠시 한결이 남편이 된 상황을 상상해 봤지만 영,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보기 보다 냉정한 여자라서.”
둘이 촬영 중간중간 수시로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웃음을 교환하는 모습에 옆에서 촬영 대기 하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입을 뗐다.
“두 사람, 사이 참 좋아. 전에 다른 프로에서 한 번 같이 했어서 그런가. 호흡도 잘 맞고. 사귀는 사람 있다는 거 몰랐으면 스캔들 나겠어”
카메라 감독의 별 의도 없이 건넨 말에 다빈은 순간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너무 생각 없이 친한 티를 냈나.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겠다.
“자, 5분 뒤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연출이 촬영을 알리는 소리가 외치자, 두 사람은 다시 촬영에 몰입했다.
***
늦은 촬영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한결은 잠자리에 들기 전 다른 연인들이 그러하듯 전화기를 찾아 다빈에게 전화기를 걸었다.
다빈과 다시 만난 이후부터 잠들기 전, 그녀의 음성을 듣고 침대에 몸을 눕혀야 편안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나야.”
“응.”
“잤어?”
“아직.”
“뭐 하고 있었는데?”
“스트레칭 좀 하고, 인터넷으로 기사 좀 보고”
연예인이면 대게 자신의 이름으로 매일 검색을 해서 새로 뉴스난 건 없는지, 팬들이 어떤 글들을 올리는지 궁금해해, 자칫 댓글로 상처를 받기 쉬움에도 인터넷을 멀리하기 어려웠다.
“뭐 특별한 얘기 난 거 있어?”
“난 없는데…… 한결 씨 얘긴 좀 있다…”
“내 얘기? 뭐?”
뭐 톱스타 이름을 넣기만 하면, 조회 수가 훌쩍 올라가니 이런 게 대체 기삿거리나 될까 싶은 것들도 뉴스로 올라오는 일이 허다했다.
해서 한결은 웬만하면 인터넷에 관심을 두지 말자는 주의라, 일부러 기사를 찾아본다거나 댓글을 읽는다거나 하는 일은 잘 없었다. 한결이 일부러 찾아 읽지 않아도, 중요한 기사는 이미 소속사에서 체크하고 그에 맞게 대응하니까.
“뭐 별건 아니고…”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 한결이 재차 물었다. 회사에서는 특별한 얘기 없었는데.
“뭔데?”
“이화연 씨랑 결별한 게 아니냐는…”
다빈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어렵게 말해. 오히려 미안해하고 눈치를 봐야 할 건 나인데.
한결은 여전히 사람들에겐 제 연인의 자리가 다빈이 아닌 화연으로 알려져 있는 게 못내
미안했다. 그런데도 다빈은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 싫은 소리나 눈치를 보인 적이 없었기에 한결은 더욱 미안해졌다.
“미안. 그런 데까지 신경 쓰이게 해서”
“아냐. 난 괜찮아. 그게 한결 씨에게도 회사에도 좋은 일이라면 뭐 사람들이 어떻게 알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한결 씨 마음이 내게 있는 걸 이젠 아는데.”
단단한 다빈의 믿음이 고마웠지만, 가슴 한편에 묵직한 쇳덩이를 달아 놓은 듯 한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미안해, 유다빈……
***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한결과 다빈의 연기 호흡도 잘 맞아 NG도 많지 않아 거의 매번 예상보다 촬영은 일찍 끝났다.
3달에 걸친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좋은 영화는 개봉 이후 성적도 좋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게 맞다면 이번 영화 역시도 틀림없이 대박일 것이다.
편집까지 끝나고 개봉 일이 잡히자 홍보팀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제 영화 촬영은 끝이 났으니 남은 건 홍보의 힘, 얼마만큼 관객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홍보팀에서 영화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부탁했고, 그중 의뢰가 왔던 몇 개 프로그램의 리스트를 들고 와 다빈과 한결에게 출연 의사를 물어왔다.
제작사 회의실에 함께 앉은 다빈과 한결이 출연 프로그램 의논하고 있었다.
“어떤 프로그램이 좋을까?”
“글쎄… 난 드라마나 영화보다… 예능 출연이 훨씬 더 긴장되더라.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언제 말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그곳이 총성 없는 전쟁터지. 한 마디라도 더 살려 방송에 나가야 하니까. 그야말로 목숨 걸고 하는 곳이지.”
“응. 그래서 난 예능 프로는 자신이 없어. 한결 씨 혼자 나가면 안 될까? 한결 씬 예능 많이 해 봤으니까 나만큼 부담스럽진 않잖아.“
그렇긴 했다. 연기, 예능, 노래 굳이 뭐가 더 좋냐고 따져 묻기도 유치하지만, 한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제 예능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럼, <뛰는맨>은 어때?”
“<뛰는맨>?”
<뛰는맨>이라면 국민 MC라 불리는 유진석이 프로그램을 이끌며 매회 약간씩 다른 포맷으로 미션 수행을 해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이 프로라면 한결은 물론 다빈도 좋아해 자주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주로 미션을 수행하며 게임을 하게 되니, 특별히 웃긴 말을 애써 하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부담이 덜 되는 것 같았다.
“말로 웃겨야 되는 것보단, 몸으로 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긴 하네”
“그럼, 우리 이걸로 하자”
“그래 그럼. 대신 한결 씨가 나 많이 도와줘야 해. 방송 욕심내느라 나 버리면 안 돼?!”
“하하하…. 이 오빠만 믿으셔!”
한결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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