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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강가의 흙집에 산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그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시대의 귀인(貴人)이었다.

 

 

1.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아산현감의 죽음

 

1578년 7월. 충남 아산현 관아. 이 고을의 백성들이 뛰쳐나와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 고을 현감의 죽음 때문이었다. 

부임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고을 현감의 죽음. 그러나 백성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석달 남짓 짧은 기간 동안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 그가 바로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다. 

 

 

 

토정 이지함(李之函.1517-1578)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토정비결(土亭秘訣)>이다.

<토정비결>은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것으로 그 저자가 이지함으로 널리 알려져 와서,

이지함 하면 미래를 점치고 예언하는 기이한 인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지함이 죽은 후 고을 백성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지함은 더 없이 존경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지함의 모습에서 기인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2. 무쇠솥에 나막신, 기인(奇人) 이지함

 

우리에게 <토정비결>의 저저로만 알려져 있는 토정 이지함.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들로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막고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행동보다 더 기이한 것은 그의 행색이었다. 그는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는 무쇠솥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무쇠솥. 이지함은 이것을 마치 갓처럼 머리에 쓰고 다닌 사람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지함은 전국 유람을 좋아해서 다니다가 어디서든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솥을 이고 다닌 것이라 한다.

또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해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나막신을 신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성시)에 나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 <선조수정실록>

 

이지함의 갖가지 기이한 행동은 <실록>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

 

19세기 서울 지역을 그린 지도인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당시 한강변의 한 지명에 이지함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가 있다.

 

 

 

한강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 마포구 일대. 이곳에 아직도 토정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 '토정동'

마포대교 입구에서 상수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토정로'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집터>도 있다. 이지함은 이곳 마포 한강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지대가 낮고 물이 괴는 쓸모없는 땅입니다. 이 땅에 토정 이지함 선생이 오셔서

가난한 백성들을 모아 흙을 메우고 집을 지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정자', '토정(土亭)'입니다."

                                               - 이승창(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기이한 풍모만큼이나 이지함은 사는 모습도 남달랐다. 스스로 척박한 땅에 들어와 보잘 것 없는 흙집을 하나 짓고 살았던 것이다.

 

3. '미래를 내다보는' 토정 이지함 

 

1549년. 지함의 나이 33세 어느날 이지함은 형을 찾아와 다급히 말했다.

 

"긴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아내의 가문에 큰 화가 미칠 것 같습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큰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지함은 사가에 닥친 불긴한 기운을 예감하고 가족들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날 밤 지함은 식솔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지함의 예언은 현실로 나타났다. '이홍난의 고변'이라고 알려진 이 역모사건에

장인은 끌려가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훗날 이지함의 행적을 모아 후학들이 남긴 <토정유고>.이 책에는 이지함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기록까지 나와 있다.

 

1576년 지함은 제자들을 만나 15년 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을 했다.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를 것이다."

"15년 안에 옛날 성현들의 글을 많이 읽고, 임금에게 덕을 권장하여, 난리가 사라지고 앙화가 없어지게 해야 한다."

<금계필담(錦溪筆談)> <해동이적(海東異蹟)> <어우야담(於于野談)> <동비낙송(東裨洛誦)>

이지함의 기이한 면모들은 많은 야사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데 주로 도술을 부려 사람들을 구했다거나, 위험한 일을 예견했다는 식이다. 이제껏 기인으로만 알고 있던 이지함. 그런데 그에 대해 전혀 뜻밖의 기록이 있다.

 

4. 시대를 앞지른 선진적 경제 사상가

 

 

<북학의(北學議)>.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담은 박제가의 대표적인 저서다.

청의 선진문물 수용과 상공업 진흥을 주장했던 박제가. 바로 이 책에 토정 이지함의 이름이 등장한다.

해외 통상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지함.

"토정 이지함이 일찌기 외국 상선 수 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조선후기 백과사전격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저자 이규경.

그는 이지함의 선구적인 면모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도대체 이지함은 어떤 주장을 했던 것일까?

 

이지함이 포천 현감에 재직 당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육지와 바다의 자원을 개발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돕자는 것이었다.

 

"산과 들에 버려져 있는 은(銀)은 무엇이 아까워서 주조를 못하게 하며 옥(玉)은 무엇이 아까워서 채굴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닷 속에 무궁무진한 고기(魚)는 무엇이 아까워서 잡지 못하게 하며 갯벌에 무궁무진한 소금(鹽)은 무엇이 아까워서 굽지 못하게 하십니까?"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창고입니다.

이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실물이니 이것을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고나라가 다스려진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이 자원의 창고를 열 수만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지함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전라도 만경현에 고기잡이 할 수 있는 섬이 있고, 황해도 풍천부에 소금을 구울 수 있는 섬이 있고,

이 섬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된 적이 없다고 하니,포천현에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이것들을 팔아 곡식을 마련한다면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자원개발을 하고,이 자원들을 통상에 이용하자는 이지함의 주장은,

농업 이외의 산업을 천시하면서 그 이익을 독점했던 지배층에게는 경악할만한 것이었다.

 

"굉장한 개혁적인,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통치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사회 구조적 시스템으로 구체화되기에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는 위험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주장이 선구적, 파격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이윤규 교수(경기대 회계학과 한국전통상학회 회장)

 

당시 조선사회는 땅과 바다를 백성들과 공유한다는 큰 원칙을 세운다.

 

"땅과 바다의 모든 자원들을 백성들과 공유한다.(山林川澤與民共之)"

 

그 누구든 먼저 개발하면 그것은 생산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자원개발의 실질적 이득은 모두 소수 힘있는 권력층의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생산을 해내면 거기에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붙여 관리들이 착취했다.

 

이 때문에 자원 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금이다.

  

당시 막대한 이윤을 냈던 소금도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 지도층에게 이윤이 넘어갔다.

"삼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소금을 생산하면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금 생산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금 생산과 판매의 이윤을 상당수 지배층이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 이 욱 박사(학국국학진흥원)

 

이지함은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고 소수 지배층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자원들을

국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통상에도 이용하자는 선구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조선시대 보수적 성리학자였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조차

이지함의 이런 선구적 면모에 대해 감탄과 존경을 전했다.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 토정의 문하에서 배우지는 못했으나 선배들에게 그 풍요와 명성을 듣고서는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 그는 국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 먼저 나라의 부를 키워야 한다는 이른바 <국부론>을 주장한 학자다. 그런데 아담스미스보다 200년 앞서서 조선의 토정 이지함은 이 같은 주장을 했다.

  

5.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마포나루 '토정'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선 해외 통상과 자원 개발에 국가 경제 정책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명분과 신분 질서가 우선시 되던 조선 사회에서 그는 어떻게 이처럼 선진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까?

 

충남 보령 청리동.

지금은 물에 잠긴 이곳이 이지함이 태어난 곳이다. 이지함은 사대부 명문가인 한산 이씨 가문에 태어났다.

 

화암서원.

이지함이 죽은 지 100년 지나 1686년 숙종이 사액을 내릴 정도로 한산 이씨 가문은 그 명망이 높다.

이지함은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의 6대손이며,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명망있는 사대부 출신의 이지함은, 그러나 전혀 뜻밖의 길을 걷는다.

그가 집을 떠나 주로 활동했던 곳은, 바로 상인들과 천민들이 사는 저자거리였다.

 

이곳에서 이지함은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배우며

몸소 장사의 길을 나선다. 양반이 저자 거리에 나서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함은 양반이라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상인들 틈에 끼여 물건을 팔았다.

"몸소 장사를 하고 생업을 경영하여 2~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 <토정유고>

 

이렇게 장사에 뛰어든 이지함은 뛰어난 상인이었다. 수완이 좋아 장사를 나설 때마다 매번 많은 이윤을 남겼다고 기록은 전한다.

신분 구별이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상인을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천한 일은 양반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하고 천한 것은 길이 달라서 서로 섞일 수도 없고 뒤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명백하다."

                                                                      - <성종실록>

 

이런 상황에서도 이지함은 배를 타고 무인도까지 들어가 장사를 했다.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었다.

"섬에 들어가서 박을 심어 익은 박 수만 개를 수확했다. 바가지를 만들어 팔면 곡식이 몇  천섬이나 생겼다."

                                                                 - <토정유고>

  

"사실 그 당시의 양반 명문가의 후손이 상업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모험이었습니다.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 천시된 때에 명문가 자손이 직접 상업에 종사해 재산을 증식한다는 자체는

양반 사회에서 손가락질이 될 일이었습니다."

                                           - 신병주 박사(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러나 지함이 장사를 했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백성이 넘쳐나는 시대.

지함은 자신이 번 돈을 모두 곡식으로 바꿨고, 이 곡식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준다.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가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준 다음 옷자락을 털고 떠나곤 했다."

                                              - <토정유고>

 

그가 장사를 하고 사업을 일으킨 모든 이유가 가난한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했던 것이다.

 

토정이 살았던 16세기 중반 백성들의 생활고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임꺽정의 난 - 16세기 학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도적이 되기도 했다. 

조선초기의 국가 토지제도는 과전법 -> 직전법 -> 관수관급제로 거듭 바뀌어 가며, 

국가 통제력이 약해지고 무너지고 그 틈을 타서 양반들은 마구 토지를 사들였고 농민들은 소작농 신세로 내몰렸다.

(지주전호제 현상 - 1/2세, 병작반수제)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는 데는 왕실도 앞장섰다.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왕실 소유 토지를 늘려나갔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지주들의 땅을 붙여 겨우 제 손에 들어오는 수확으로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겨웠다.

굶주림과 학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고 이 도적떼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명종 때 '임꺽정의 난'이 그 대표적이다.

 

가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이지함. 그는 농사 지을 땅에만 의지했던 조선 사회에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는 상업에 눈을 돌렸다.

 

"농촌 경제에만 한정되지 말고

상업, 수공업, 유통 경제 활성화를 통한 전반적인 국가 경제의 부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부의 혜택이 백성들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조선 사회를 이지함은 구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소 나서고 그런 분위기 만들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 신병주 박사

 

이지함은 상업유통을 하면서 찾아갔던 곳은, 화담 서경덕의 문하였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의 수용을 견지하는 개방적인 학풍의 지식인 그룹이었다.

 

이것은 서경덕과 그 문하들이 개성 출신이라는 것도 연관이 되는데

개성지역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해 일찌기 상업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지함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업 중심의 조선 사회에 취약성을 보완하는 장치로 상업의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개성사람들은 양반들도 상인을 했고 또 서경덕 제자 중에는 실제로 상인이 많았고,

따라서 그들의 사상은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조선 왕조는 농업에 근간을 했고 농업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가 재정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반면 서경덕이나 이지함 등은 농업 이외에 상업이란 것이 주는 재정적 효과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얻어지는 이윤을 국가 재정에서 활용하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 이 욱 박사

 

 

 

 

충남 보령 주교면. 이지함의 고향에는 아직도 '지함재'라는 고개길이 있다.

이 고개길은, 그가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한양까지 다녔던 길로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서해 바다를 경유해 한양까지 왕래하는 그에게 가난한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삼개포구 = 마포포구.

 

지함이 장사를 하는 동안 흙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 서울 한강변 마포였다. 당시 마포는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였다. 

해상 교통에 의존하던 조선시대.바로 이 한강변의 나루터는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그중 마포는 수상 교통의 유통량이 가장 많은 물류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서울로 들여오는 쌀과 곡물, 해산물, 목재, 특산물 등이 이곳 마포나루로 직결되었고 그만큼 상업의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해상무역의 교두보 같은 바로 그런 거점 지역이 마포의 '토정'이었습니다.

 

이지함이 이곳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했다는 것은

해양 자원의 개발, 수산업, 배를 이용한 유통 경제, 상업 활동 등 이런 부분에 십분 이해가 있었고,

 

또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실천했던 이지함의 터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신병주 박사  

 

이지함은 이런 마포나루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고 상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여기서 쌓은 식견을 다시 백성들에게 가르치기까지 했다.

땅을 잃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자립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물건을 만들고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王者以民爲天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民以食爲天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사회 제일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가난한 백성들의 친구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살았다.

 

6.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책, <토정비결>

 

답한 양반사회의 틀을 깨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자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 이지함이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이지함을 찾았다. 그에게 스스럼없이 고민을 덜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이지함이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쓴 책이 <토정비결>이란 이야기도 전해온다.

<토정비결>의 '토정'도 이지함의 호를 땄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정비결>의 저자는 사실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과연 이지함이 쓴 게 맞을까?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이곳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정비결>이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만들어진 연대나 지은이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이 자료안에서는 토정 이지함과 관련된 근거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서울대 규장각>.

<토정비결>을 언급한 다른 기록을 알아보기 위해 규장각에 소장된 다른 조선 시대 풍속 자료를 찾았다.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 18세기말 서울 지역의 세시풍속을 기록했다.

의복과 음식 뿐만 아니라 당시 신년의 운세를 점쳤던 유점이나 오행점에 대한 기록도 자세하다.

 

"당시 유점이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도잡지>라든가, 비슷한 시기 홍성모라는 사람이 쓴 <동국세시기>에도, 오행점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토정비결>에 대해선 기록이 없습니다."

                                                                       - 신병주 박사

 

 

토정 이지함의 집에는 항상 사람들로 넘쳐났다. 건강부터 가족문제 등 일신상의 문제를 이지함에게 상담받기 위해서다.

 

토정은 역술은 물론 천문, 지리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이런 면모때문에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찾아와 상담을 했고 토정의 조언에 큰 힘을 얻어가곤 했다.

 

"토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점), 율려(음악), 산수, 소리에 능했다. 관상, 신방과 비결에 통하지 않았던 분야가 없었다."

                                                                      - <토정유고>

 

"학문 범위가 성리학에 더해서 천문, 지리, 율려 등 여러 가지 다양하게 실학자들과 유사한 광범위한 지식을 추구했기에,

백성들 속에서 묘지도 봐주고, 집도 봐주고, 애기 이름도 지어주고, 이러다보니 백성과 아주 친숙해진 듯 합니다."

                                                                  - 권인호 박사(대전대 철학과)

 

책 제목 <토정비결>도 이지함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이지함의 저서임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 책의 특징은 70% 이상이 행운의 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토정비결>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희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토정비결>은 어떻게 든 희망을 주기 위한 역술서라는 것.

그렇다면 <토정비결>의 운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온 걸까?

 

한 역술인을 찾았다. <토정비결>을 보기전에 먼저 사주로 운세를 보았다.

 

"주역이란 사주로 보니까, 손재수가 나와 있네요.

사실은 금년에 투자하는 게 위험합니다. 금년은 투자를 자제하고 현상유지, 복지부동하는 게 낫습니다."

                                                                                          - 김찬동 역술인

 

그렇다면 <토정비결> 운세는 어떻게 나올까?

 

"길함은 있고 흉함은 없다. 재수대통이다 해서 재물관계에 크게 형통한다, 큰 돈을 만진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금년도 <토정비결>을 보니까 다 좋고 뭘 해도 잘 된다는 뜻입니다."

                                                                                            - 김찬동 역술인

 

 

 

<주역>과 <토정비결>의 차이 - 토정비결은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괘이다.

<주역>이 사주팔자로 운세를 보는 반면 (생년, 월, 일, 생시의 4주 8자로 괘를 만듦. 총 64괘),

<토정비결>은 생시가 빠진 3주 6자로만 본다. (생년, 월, 일의 3주 6자로 괘를 만듦. 총 48괘)

 

<토정비결> 또한 주역의 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훨씬 단순한 방법으로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는 역술서다.

<토정비결>을 이지함의 저술이라 믿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도 쉽게 자신의 운세를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 책이 삶에 지친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끊임없이 주려고 했던 토정 이지함의 면모와 그대로 닮아 있다.

 

<토정비결>이 단순한 역술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민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저자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토정 이지함의 삶과 그대로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16세기 조선중기는 '사화의 시대'

그런데 이지함의 이러한 애민사상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명문 사대부 집안에 태어나 관직에 나가 부와 명예를 누리며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놀랍게도 이지함은 스스로 양반의 삶을 포기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지함이 살았던 조선 중기는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집권층인 훈구 척신과 신진 사림들간에 갈등이 계속 되고 명종때까지 네 차례 사화(士禍)로 수많은 선비들이 숙청을 당했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乙巳士禍)

 

특히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문정왕후와 척신들의 학정은 극에 달했다.

이런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이지함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지함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명세(, 1518~1548)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주범들이었던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이 사료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그들은 이 기록을 문제 삼으며 안명세를 잡아들인다.

끌려간 안명세는 끝까지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고문끝에 숨진다.

사관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며 죽어간 친구 안명세는 지함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라도 양재역 벽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글이 나붙으면서

또 한 차례 사림들이 대거 숙청 당하게 된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이다.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아래에서는 간신들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

이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정국이 들끓는 가운데 2년 후엔 '이홍난의 고변'으로 지함의 장인이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다.

절친한 친구와 장인의 죽음을 목격한 지함은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는다. 

이지함에게 있어 벼슬길은 부당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기묘사화 이후로 제대로 정치를 하고 또 백성을 위해서 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명세 사건이라든지, 4대 사화  선비들이 화를 입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권인호 박사

8. 긴 유랑, 세상을 변화시킬 꿈을 꾸다!

 

이후 이지함은 기나긴 유랑을 시작했다. 이 유랑 시절에도 지함은 거의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돌아다녀야 할 만큼

당시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이지함은 안명세의 처형을 보고 바닷가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하지만 이지함은 이 유랑기간 동안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그는 재야의 지식인을 끊임없이 만나며 개혁의 방안을 모색했다.

 

지함과 두터운 교분을 나눴던 분들중에 대표적인 분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이다.

 

그는 재야에 머무르면서도 현실 정치에 비판을 가한 강직한 학자였다.

이지함과 조식은 둘 다 나라가 해결하지 못한 백성들의 곤궁 문제를 깊이 고민하며 극복할 현실을 모색해왔던 사람들이다.

 

조식은 명종 말년에 왕의 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이 자리에서 조식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정치를 혁신하는 것, 인재를 등용하는 것, 임금 자신이 학문에 힘쓰는 것 등 강조했다.

 

"이지함이, 남명 조식이나 화담 서경덕, 그리고 정명도와 같은 인물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조선 중기에는 이지함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성리학적 사고에서 조금은 탈피하고, 성리학적 문제를 조금 더 보완하고 이를 실천하려 했던, 지식인 그룹들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 신병주 박사

 

이지함은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재능있는 양민이나 천민 출신의 제자를 가르치는데 힘썼다.

 

천민 출신의 서기라는 사람이 공부하는데 도와주는가 하면, 노비출신의 김순종이란 아이를 데려와 가르치며 그 노비 본역까지 삭제시켰다. 김순종은 이지함의 도움으로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여 사대부까지 되었다.

 

"서기는 출신이 미천한 사람이었는데 이지함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서 성취하도록 하였다."

                                                                                      

"김순종의 노비문서에 올라있는 본역을 삭제시켰다(本役而率)"

                                                                                           - <토정유고>

 

이지함은 재야에 있었지만 현실 정치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책임과 본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

 한 번은 이율곡이 병을 핑계로 관직을 관두려 하자, 이를 호되게 꾸짖었다.

 

"공자는 신병이 났다는 핑계로 유비를 만나주지 않았고

맹자 역시 병이 낫다는 핑계로 왕의 부름에 아니 나갔잖는가?

그런 탓에 후세의 선비들까지도 아무 병이 없으면서 툭하면 병이 들었다고

엉뚱한 핑계를 대는 자들이 많아진 것일세."

 

서경덕, 조식 같은 이들은 당대 성리학적 주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를 꿈꿨던 지식인들이다.

이지함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익혔고 현실세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서민들과 더불어 장사하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견문과 학식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9. 내가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 것이다! 

 

그의 나이 쉰 일곱이 되던 해, 이지함은 마침내 그가 꿈꿨던 세상을 현실에서 이룰 기회의 발판을 얻게 된다.

 

명종 이후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의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당시 조정에서는 어지러운 정치를 쇄신하기 위해 '유일등용책' 즉 재야에 있는 인재들을 뽑아 관리로 등용하고자 했다.

 

"'유일지사(遺逸之士)' 추천하여 등용하는 것은

새로 정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 <선조실록(1567)>

 

선조 6년(1574). 이지함은 율곡의 추천을 받아 관리로 발탁되었다. 지함은 종6품직 포천현감에 임명되었다.

 

나이 쉰을 넘어 처음 벼슬을 얻었다. 재야에서 학문을 얻고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며 지함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

그 오랜 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선조수정실록>     

 

부임 첫날밤.

밥상을 받은 지함은 아전들을 꾸짖는다. "밥상을 보니 먹을 것이 없다."

지함의 꾸지람에 놀란 아전들은 더욱 진수성찬을 차려 상을 올린다. "역시 먹을 것이 없구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데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 현실에 대해 지함은 탓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함은 앞으로 오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만 담아올리게 한다.

그가 고을현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정부패를 한 관리를 문책하는 것이었다.

 

관리를 벌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관리라도 잘못을 하면 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게 했다.

덕이 부족해 아이만 같지 못하니 스스로 깨우치고 뉘우치라는 것이었다.

이지함이 목격한 백성들의 삶은 기막힘 자체였다. 포천은 토지가 척박해 기본적으로 농사 지을 땅이 부족했다.

땅이 없는 백성들은 거리로 나 앉았고 굶어죽는 이들도 허다했다. 지함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고민끝에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포천현의 가난을 구제할 방도를 쓴 것이었다.

 

 

은, 옥, 물고기, 소금 등 자원을 개발해 먼저 빈민구제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게 조선 사회의 이념이지만 재물과 이익도 좋은 마음으로 쓰면 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義)와 이(利)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나쁜 사람이 악용을 하면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되지만,

선한 사람이 사용한다면 재물과 이익도 모두 덕이 될 것입니다."     - 1578년 이지함의 상소중에서

 

"의(義)와 이(利)를 대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정치를 펼 수 있다는 생각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직접적으로 현감직을 맡으면서 실천하려고 했다는 점, 이런 점에서 이지함은 아주 뛰어난 학자적 관료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신병주 박사

 

그러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자 지함은 부임 1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3년후 지함은 다시 아산현감으로 부임한다.

 

아산에 부임하고 그가 처음한 일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산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아 왕에게 바치고 있었는데

지함은 물고기를 잡던 못을 메워 버린다.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을 메워 없애 버렸다." - <토정유고>

(有養魚池 其池永絶)

 

"이 공지 내에 숭어지가 있어서 숭어를 잡아서 진상하였는데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어 토정 현감이 그걸 메워 백성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이 근처인데 경지 정리를 몇 번씩 해서 정확한 자리를 모르겠습니다."

                                                                                                       - 김일희(향토사학자)

 

관리가 임금이 먹을 음식을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해버린 것이다.

             

"백성을 위해서 자기가 죽을 각오로 메워버린 것입니다.

공물로 바치는 숭어장을 메워버려 못 바치게 했다는 것은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일이지요."

                                                                                                              - 권일호 박사

 

지함은 이번에도 백성들을 위한 혁신적인 정치를 펼쳐냈다.

 

그는 먼저 '걸인청(乞人廳)'을 세웠는데 이곳에 걸인들을 모아 먹이고 잘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걸인청은 단순한 보호시설이 아니었다. 걸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기술을 가르쳤고 각자의 능력에 맞춰 일감을 나눠줬다.

 

또 지함이 직접 걸인들을 시장에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치기도 한다.

지함은 조선 중기 봉건 사회에 최초로 근대적 재활 기관 탄생시킨 것이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서 그들에게 어떤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것,

그것은 지금 관점에서 봐도 아주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실천이었습니다."

                                                                                                   - 신병주 박사

 

 

 

하지만 이지함은 부임 3개월 만에 돌연 세상을 뜬다. 그의 나이 예순 둘에 역질에 걸려 죽은 것이다.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을 위주로 하고,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했다. 한창 기반을 갖추어 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 <선조수정실록>

 

가난한 백성을 단순히 먹이고 재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가르쳤던 21세기형 복지가.

이것이 토정 이지함의 참모습이다. 200년후의 실학자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았을 만큼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실학 사상을 펼쳤던 이지함. 그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꿈꿨던 기인(奇人)이었다.

 

 


 

토정비결과 토정 이지함

 

기인으로 알려진 이지함, 실은 사회복지 선구자

 

2007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대개 심심풀이로, 혹자는 진지한 마음에 잔뜩 기대를 가지고 토정비결로 한 해 운세를 한 번씩 점쳐본다. 이는 조선 후기 무렵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이다. 왜 조선 후기부터일까? 토정(土亭) 이지함 선생이 토정비결을 짓고, 민간에 퍼지기 된 게 그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이지함 선생. 
   
  조선 중종 12년인 151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인(奇人)으로, 유학을 비롯 도장사상, 천문, 지리, 산술 등 온갖 학문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걸출한 인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최근에는 이지함을 실학사상을 선구적으로 실천한 학자로 조명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지난해 11월 발기한 토정이지함기념사업회에서는 바로 이러한 이지함의 사상을 제대로 밝혀내고 현실에 맞게 복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지함은 시대를 앞 서 간 사회복지운동가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스스로 ‘재물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재앙이 따르는 법’이라면 청빈함을 신조로 삼고 살았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한 가지. 이지함은 세상을 떠돌 때 ‘쇠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관례(冠禮, 성년이 되는 예식) 때 쓴 갓을 수십년 간 쓰다 망가져 버린 후 선비로서 바깥 출입을 위해서라도 갓을 마련해야 했던 이지함. 마침 집에 있던 낡은 밥솥까지 구멍이 뚫려 더 이상 못 쓰게 되자, 이지함은 쇠갓을 만들어낸다. 쇠로 갓을 만들었으니 낡아서 버릴 염려를 안해도 되고, 뒤집으면 밥솥으로 쓸 수 있으니 이지함의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 준 것이다. 
   
  이런 이지함은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도 않았으나, 잠깐 동안 맡은 벼슬은 당시 종6품이었던 현감이었다. 처음 맡은 자리는 그의 나이 56세였던 1573년 포천현감에 부임한 것. 이지함은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보고 현실적인 해결 방안 등을 담은 상소(포천현감사직소)를 올렸으나 조정에서 받아주지 않아 현감 직을 버렸다. 
   
  다시 벼슬길에 나선 것은 4년 뒤인 1578년 아산현감으로 부임한 것. 이지함은 고을에 빈민이 너무 많아 그들을 위해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었다. 이지함은 걸인청에다 고을의 빈민을 모조리 수용해 일을 시켰다. 노약자와 병자는 새끼를 꼬는 등의 쉬운 일을 시켰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땅을 개간시키거나 고기잡이를 시켰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에게는 도구를 마련해주고 수공업에 종사토록 했다고 한다. 애초 이지함이 걸인청을 만들 때 고을 아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 이지함은 “내가 걸인청을 세우려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 양민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과 땅을 갖게 하여 잘살게 하려는 것”이라며 물리쳤다고 한다. 
   
  이밖에 원래 호가 수산(水山)인 이지함에게 ‘토정’이란 호가 붙은 이유도 그의 청빈함과 가난을 구제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지함은 결혼을 한 뒤 한강변에 진흙을 개어 지은 흙집에 살았다. 사람들이 그 집을 흙으로 지은 정자, 즉 토정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어 이지함이 그것을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지금의 마포구 토정동이 바로 이지함의 ‘토정(土亭)’에서 유래되었다. 
   
  이 토정을 일종의 ‘사회복지관’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지함이 이 토정을 통해 빈민, 장애인, 과부, 죄인 등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이지함은 토정에 사람이 찾아오면 먼저 상담하여 자립의지가 있는지 확인해 지원을 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현물로 쌀과 옷감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지함이 빈민 등을 상담할 때 마음의 병을 치료하면서 남긴 책이 이후 토정비결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실제로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인터넷에서 ‘토정 이지함’을 검색하면 이지함 선생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기 힘들고 ‘인터넷 운수사이트’의 자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만큼 ‘토정’, ‘이지함’, ‘토정비결’은 모두 ‘운수’와 관련된 단어들로 인식되고 있는 중. 
   
  세상사가 각박해질수록 운에 기대보려는 세상 사람들의 심리도 강해질 터이고, 그에 따라 길거리 사주까페, 점집, 철학관, 인터넷 운수사이트들이 성행하겠지만, 토정비결을 볼 때 보더라도 한 번 쯤은 이지함의 삶을 떠올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혹시 아나 이지함 선생이 저 세상에서 좋은 괘를 던져줄 지.


2007년01월06일 ⓒ민중의소리

 

 



▣방송 : 2007. 9. 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박건PD 
▣작가 : 정윤미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솥갓을 쓰고, 마포강가의 흙집에 산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그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시대의 귀인(貴人)이었다.

 

 

70%이상이 행운의 괘로써 삶에 지친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 
<토정비결>. 그 저자를 둘러싼 미스터리 안에 토정 이지함에 관한 진실이 담겨있다

 

▶ '토정비결'의 미스터리, 왜 이지함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미래를 점치는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것입니다." 
그는 장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을 예견, 가솔을 이끌고 움직여 당대 최대의 정치적 무고사건인 청홍도 사건에서 살아남았으며, 
"15년 후에는 이 나라에 피가 천리나 흐를 징조이다."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지함이 백성들의 세상사 고민거리를 풀어주고, 처방하기 위해 지은 책이라 알려진 <토정비결>. 그러나 <토정비결>에는 저자가 기록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풍속서 어디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 다.

 

  기인(奇人)으로만 기억되어야 하는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토정 이지함


이지함은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갓 대신 솥을 쓰고 다녔으며, 마포강가에 흙집을 짓고 살았던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토정'을 지은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였다. 이지함은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직접 박 장사를 하여 막대한 부를 끌어 모으게 된다. 대대로 위세를 떨치던 당대 최고 사대부집안의 자손이었던 이지함. 
상업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양반으로서의 권위와 부를 버리고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에 내려간 것이다. 
이지함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주민들에게 전수해주고, 축적한 곡식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다. 양반인 그가 장사를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빈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시대를 앞지른 선진적 경제사상을 발휘하다.


쉰일곱이 되던 해, 재야에서 성리학 외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이지함에게 드디어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선조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그가 관리로 등용된 것이다.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던 이지함. 
그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은, 옥 등의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을 개발, 해외에서 유통 시키자고 주장한다. 소수 지배층들이 독식하고 있는 자원을 국가가 관리해서 외국와의 통상을 통해 부를 축적하자는 것이다. 이 해외통상론은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지함은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경제사상가였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토정 이지함-

 

백성을 가난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지함을 21세기형 복지가로 만든다. 
민중들의 가난이 유난히도 가혹했던 조선 중기, 그는 
현대적 개념의 빈민구제기관 걸인청을 설립한다. 걸인들에게 단지 먹고 잘 곳을 제공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였다.

 

 

 

 

 

 

이지함이 죽은 후 백성들을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를 세웠다. 

"현감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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