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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에 와서 / 도종환 (목소리 허무항이) 영암산 골이 깊어 바람이 길다 시를 쓰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 태어나 몇 편 시에 생애를 걸고 옮겨 딛는 걸음이 무겁다 새해엔 또 어디로 쫓기어 갈 것인가 아직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노모께 맡기고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큰애가 문에 서서 빨리 다녀오라고 민들레처럼 손을 흔들 때 자주 오지 못하리란 말일랑 차마 못 하고 손을 마주 흔들다 돌아서며 아내여, 당신을 생각했다 이 싸움은 죽어서도 끝날 수 없는 싸움임을 생각했다 세상을 옮겨간 당신까지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지켜주어야 하는 싸움임을 생각했다 슬픔보다는 비장함이어야 한다 이 땅 어느 그늘 들풀 크는 곳이면 내가 못 갈 곳 없지만 에미 잃고 애비와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당신께라도 다시 보살펴달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 이 미어짐을 당신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이 길을 가야 한다 봄이면 할미꽃 제비꽃 다시 피는 이 나라 죽음도 삶도 모두 한세상 이루어 우리도 무성히 되살아나며 이 길을 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