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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만나느 송창식 그의 인생이야기...

by 곶감 on Nov 1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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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희한테 말했죠, 망가지면 고치고 새로 만져 끝까지 타고 가는 자동차처럼 평생 노래하며 살 거라고”

어김없이 한복 아랫도리에, 마고자 비슷한 웃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기타를 ‘쓱쓱’ 문지르던 그는 ‘으흠’ 하고 목을 풀더니 지체없이 노래를 불러갔다.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에헤~ 으헤 으헤 으허허….”(‘가나다라’)

얼마 전 경기 하남시 미사리 카페 ‘쏭아’(ssonger)에서 만난 송창식(66)은 기타리스트 함춘호(52)와 함께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1968년 남성 듀오 ‘튄폴리오’(트윈폴리오)로 가요계에 데뷔했으니, 올해 송창식은 데뷔 45주년이 됐다.

“45주년이라? 난 여태 노래를 이렇게 할 줄 알고 있었어요. 평생 해야 하는 학문처럼, 내게도 노래는 그런 것입니다. 늙었다고 포기만 안 한다면 끝까지 가는 것이 음악 공부죠.”

카페에 앉아 있던 팬들이 무대에 선 송창식에게 신청곡을 적은 종이를 들이밀었다.

“어허, 이건 정말 못하겠는데…. 그냥 맛보기만 보여드릴게요.”

‘사랑하는 그대여 날 좀 봐요 봐요 봐요/ 날 좀 봐주세요/ 동지섣달 꽃 보듯이 날 좀 봐요 봐요 봐요….’(‘밀양머슴아리랑’)

올해로 가수 데뷔 45주년을 맞은 가수 송창식이 최근 경기 하남시 카페 쏭아에서 활짝 웃으며 인터뷰하고 있다. | 김문석 기자


■ 지휘자 되고 싶어 예고 진학… 금난새가 고교 동기

얼굴은 기어코 ‘하회탈’이 되어가고 만다. 가뜩이나 작은 눈을 감고 끝날 때까지 좀체 뜨지도 않는다. 가수 송창식은 늘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1968년 윤형주와 함께 부른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등으로 그는 스타가 됐다. 1970년 솔로가 되고 난 뒤 노래마다 히트했다. ‘왜 불러’ ‘고래사냥’ ‘푸르른 날’ ‘우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 ‘담배가게 아가씨’ ‘선운사’ ‘참새의 하루’…. 어떤 노래에는 반항기가, 어디에는 한국적 정서와 해학이 가득했다. 노래 대부분을 직접 지어 불렀다.

가수가 되기 전의 삶은 퍽 신산했다. 그는 ‘노숙자’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 이후부터 행방불명됐다. 인천 신흥동에 조부와 함께 살던 그는 서울예고 성악과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무전취식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땡전 한푼 없었다. 송창식은 “클래식 지휘자가 되고 싶어 서울예고를 들어갔는데, 그곳이 부자들의 학교인지 미처 몰랐다”면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클래식 공부는 돈 없으면 안된다는 걸 알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고교 동기인 금난새는 훗날 유명한 지휘자가 됐다.

송창식은 1965년과 1966년 겨울을 서울 길바닥에서 났다. 길거리에서 잠이 들기도 하고, 대학가 캠퍼스를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인천 할아버지 집으로 갈 차비도 없었고, 낙도 없고, 할머니도 재취(재혼)하신 분이라 그냥 노숙을 했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찬바람 피하려 서울역이나 지하도에 가지만 그때는 그런 곳에 들어설 수도 없었다”고 떠올렸다.

송창식은 “그때 내게 음악은 한이었고, 미련이었다”고 말했다. 기타가 갖고 싶어 합판에 전깃줄을 꼬아 직접 만든 일도 있었다. 실비집 된장찌개가 30원 정도 하던 시절, 800원 정도를 하던 기타는 ‘언감생심’이었다.

■ ‘세시봉 열풍’ 그저 추억거리로 스쳐 지나갈 것

서울역에서 뽑혀 일일 잡부로 공사판을 갈 수 있는 날에는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기회도 드물었다.

“어쩌다가 ‘야방’이라고 하는 일이 있긴 했죠. 집장사가 유행하던 시기여서 텅 빈 새 집들이 있었거든요. 팔릴 때까지 그걸 지키는 일이었죠. 월급요? 에이, 그런 게 어딨나요. 잠자리나 먹을 것만 쥐어주던 시기였는데!”

1967년 방송인 이상벽 등의 소개로 들어간 서울 명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에 대해 송창식은 “야방에서 도둑놈 취급받고 쫓겨났던 내게 세시봉은, 무엇보다도 그 해 혹독한 겨울 밖에서 또 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준 곳”이라고 말했다. 세시봉에서도 처음엔 클래식을 주로 불렀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기타로 쳐서 노래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2011년 TV에서 불거졌던 ‘세시봉 열풍’에 대해 “그저 추억거리로 다시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금지곡도 많았다. ‘고래사냥’ ‘왜 불러’ 등 4~5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송창식은 “‘고래사냥’은 대학생들이 데모할 때마다 불러 나중에 사후 검열을 받아 금지곡이 됐다”고 설명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고래사냥’)

송창식은 “그 시절 젊은 사람들의 속이 다 노래가사와 같았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시절, 길에서는 머리가 밀리고, 옷차림을 단속 받았다. 어른들은 정부에 동조하면서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쳤고, 그사이 우리 젊은 사람들과 문화는 더 크게 비틀어졌다”고 말했다.

■ 메모해 둔 악상 1000여개… 함춘호와 음반 준비

‘왜 불러’는 당시 장발 단속에 저항하고 공권력을 조롱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송창식은 “영화 <고래사냥>에서 머리를 단속하는 하 순경이 주인공을 부를 때 하필 그 노래가 울려퍼졌고, 그렇게 금지곡이 됐다”면서 “한때 내게는 이발소 가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며 껄껄 웃었다.

‘고래사냥’의 가사를 지어준 작가 최인호씨가 올해 눈을 감았다. 송창식은 “(최인호씨는) 시류를 잘 아는 작가였다”고 말했다. ‘그의 죽음이 속상하냐’는 물음에 “나도 죽을 텐데, 뭐 그리 속상한 일이냐”고 되물었다.

노래마다 그의 경험이 녹아 있다. ‘담배가게 아가씨’ 속 ‘아가씨’는 사실 와이셔츠 가게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고 한다.

“매부가 명동 와이셔츠 가게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가게가 녹아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만들었어요. ‘와이셔츠 가게’가 입에 안 붙어 ‘담배가게’로 바꾼 것이고요.” 다른 히트곡 ‘가나다라’는 재일 교포 3세들이 한글을 잘 모른다 해서 만들었다. 동네방네 아이들이 모두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는 1989년 이후 공연만 했지, 새 음반을 발표하진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레코딩에 취미가 없어졌다”며 “댄스가 나라를 뒤덮고 랩이 들어왔고, 지금 역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사이 메모해둔 악상은 1000개가 넘는다. “(함)춘호와 함께 연주 음반을 한 번 내볼까 하는데 올해 중에는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새벽 1시에 인터뷰 끝… “이제 점심 먹으러 갑니다”

20~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장희, 최백호, 한영애 등과 함께 꾸리는 ‘사인사색’ 공연 무대에 오른다. “춘호랑 무대에 올라 오늘같이 노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오르는 동료 출연진을 두고 “각자 방식으로 멋스럽게 사는 이들”이라고 했다.

검정색 개량 한복 바지가 풀 먹인 듯 빳빳했다.

“1975년 홍콩 국제아마추어가요제에서 느낀 일일 거예요. 비싼 양복을 입고 갔는데도 외국인들과 함께하니 내가 제일 형편없더라고요. 우리한테는 양복이 안 어울린다 싶었지요.”

1986년쯤 아내에게 개량 한복 느낌의 디자인을 부탁했다. 그걸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있는 양장점에서 가져갔고, 그 뒤로 줄곧 거기서 옷을 해 입었다.

단 한번도 가수를 그만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음악을 좀 알 만한데 몸이 늙어가는 게 아쉽다”고 했다.

“수도승이 될까도 했는데 그곳도 구속이 있는 것 같고, 가수만큼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네요. 가수요? 적당히 존경받아도 부담스럽지 않고, 적당히 멸시받아도 억울하지 않고, 어느 장소를 가도 늘 발을 뺄 수도 있고, 늘 담글 수도 있고….”

지금도 범상치 않게 산다. 오후 느지막이 잠에서 깬 뒤 몇 시간씩 기타를 연습한다. 술도 안 마신다. 이날 오후 11시에 인터뷰한 까닭도 연습, 공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기인’ ‘가인’ 등이란 별칭이 달갑지 않다고 한다. ‘싱글벙글’이란 소싯적 별명, 송아지와 싱어송라이터의 의미를 두루 아우르는 ‘쏭아’(ssonger)라는 별명이 가장 흐뭇하다.

“(이)장희한테 이야기했듯이 나는 평생 노래할 거예요. 인생이 길이라면 수레도, 자동차도 타잖아요. 내게 노래는 그런 겁니다. 망가지면 고치고, 새로 만지고 끝까지 타고 가는 것이죠.”

새벽 1시쯤. 인터뷰가 끝났다. “이제 저는 점심 먹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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