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르르릉~
가게의 전화가 울리고 민영이가 전화를 받자 향아는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며 쳐다보았다.
"네. 허브 샌드위칩니다. 네. 에그 샌드위치 열 개, 햄 샌드위치 다섯 개, 비프 샌드위치 다섯 개요? 네. 감사합니다. 30분 안에 가겠습니다."
향아는 자기도 모르게 실망한 티를 팍팍 내며 다시 달걀을 짓이기 시작했다.
끝까지 전화 안 한다 이거지?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민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이 났다. 친구의 연애가 이렇게 쏠쏠한 재미를 주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연애하라고 닦달할 걸 그랬다.
“뭐해? 얼른 준비해서 가야지?”
민영의 말에 향아는 뿌루퉁한 모습으로 마지못해 엉덩이를 들었다.
“안 그래도 준비하려고 했어. 배달하고 바로 퇴근해도 되지? 낼은 내가 일찍 나올게."
“그러던가.”
향아는 민영을 도와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에도 계속 핸드폰으로 신경이 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먼저 전화를 할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그를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해 버렸다.
하긴.. 쿨 하게 시작한 연애인데 요즘 내가 너무 성심성의를 다하긴 했잖아. 잠시 쉬어가자.
이건 좋은 기회야.
그런데.. 만약.. 만약에...
“민영아….”
“응?”
민영은 샌드위치를 빠른 손놀림으로 만들며 시선을 들지 않았다.
“……. 이대로 헤어지는 거면 어쩌지?”
잔뜩 겁먹은 향야의 목소리에 민영이 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찾아갔어도…. 반가워하지도 않았어.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그때 모임에서 내가 너무 촌스럽고 짜증 나게 굴어서 싫어진 걸까? 그랬는데 내가 엄마 앞에서 그런 짓을 해서 완전히 질려 버린 걸까?”
“이향아. 또 소설 쓴다. 다들 싸우고 몇날 며칠씩 연락두절 하고 그래. 나랑 태진이 연애 초기 때 생각 안나? 우리 개 싸우듯이 싸우고 헤어지기도 몇번을 헤어졌니?”
“알아. 하지만 너희는 볼 수밖에 없었잖아. 나랑 다른 친구들이랑 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다르다. 민영과 태진의 경우는 자신들과 확실히 다르다. 그와 자신은 일명 금수저와 흙수저라고 하는 관계이지 않은가?
“사실…. 민정우 너무 잘났잖아.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스펙이…. 엄청나잖아. 이렇게 빨리 끝나버려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연애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 대단한 스펙 모르고 시작했어? 상관없는 거였잖아.”
“…….”
“니 마음이 변해서 무서운 거야. 사소한 다툼인데 자꾸 더 크게 생각하는 거야.”
“내 마음이…. 변해?”
“쿨 한 연애가 네 연애였잖아. 이 세상에 쿨 한 연애가 어딨니? 찌질하고 찐득거리고. 질투하는 게 연애란 말이야.”
민영의 말에 향아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언제 그렇게 돼버린 거지? 어쩌다? 이게 다 민정우 때문이다.
나쁜 자식!
***
"손님 중에 김명호 씨 계신가요?"
"샌드위치 배달 오신 분이시죠? 따라오세요."
웨이터가 향아가 들고 있는 배달 가방과 손님 이름을 듣더니 향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
“그런 표정 집어치우지. 이런 재미없는 장난도 그만하고.”
정우는 앞에 앉아 있는 유리를 보며 짜증이 치솟았다. 선 볼 상대가 차라리 모르는 여자였다면 효도 차원이라 넘겼겠지만, 앞에서 자신도 모르고 나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한유리는 그의 성질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유리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집안 어른들께 부탁드렸어요. 하지만 장난은 아니에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나도 집안 입김 이용하는 거 싫어해요. 하지만 오죽하면 내가 이래? 당신한테 여자 생긴 것 같아서 처음에는 깨끗하게 물러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까…. 어디서 그런 여자를…. 기막혀.“
“그런 여자?”
“아무것도 아니잖아! 뭣하나 볼 것도 없잖아요! 그따위 여자 때문에 나랑 헤어지다니!”
흥분한 유리의 음성이 높아졌다. 유리는 심호흡하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댔다.
화려한 매니큐어로 장식된 손가락으로 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긴 후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신 같은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알고, 집안 어른들도 그 여자, 싫어할 거예요. 나는 당신이 뭘 하든지 지원해 줄 수 있어요. 지금 하는 인테리어 사업도 훨씬 더 단시간에 키워 줄 수도 있어요.”
정우는 유리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이 났다.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향아를 만나기 전 자기 생각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결혼한다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그리고 집안과도 어울리는 여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그가 향아를 만나고 나서는 그녀만 봤다. 이향아의 배경이 아니라 이향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향아가 왜 웃는지,
왜 우는지, 이향아가 무얼 싫어하는지, 이향아가 무얼 좋아하는지, 자신이 보지 않을 때 이향아는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가 최대 관심사다.
심지어 자신을 막 대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는데도 그녀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정우의 시인에 유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한때는. 그랬던 그 남자는 당신과 만났을 때 나야.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이향아라는 여자 하나만으로도 벅차. 그러니 다른 여자는 더 이상 필요 없지.”
하지만 이어지는 정우의 말에 유리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난 정말 민정우 당신을 사랑해. 당신도 나와 결혼하면 절대 손해 보지 않아. 순간의 감정 때문에 미래를 망치는 바보짓은 말아요.”
유리는 간절하게 그를 원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손해 보지는 않을 거라구? 사랑을 믿지는 않지만, 당신의 사랑은 더욱더 믿지 못하겠는걸?"
정우는 유리의 말에 실소를 감추지 못하다가 자신들을 뚫어져라 보는 향아의 눈과 마주쳤다.
향아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발이 대리석 바닥을 뚫고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어머! 향아 씨?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네요.”
유리가 당황한 척하며 놀라워했다.
“배달…. 오셨나 봐요?“
가게 이름이 적힌 비닐봉지를 보는 유리의 얼굴에는 얄팍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의 계략대로 이향아는 제대로 따라 주었다.
이 호텔 커피숍은 맞선 장소로 유명하다.
성사율이 높다고 소문이 나서였다.
미간을 찌푸리는 정우와 당황한 척하는 표정의 명품차림의 한유리.
눈이 부시게 예쁘다.
향아는 분홍색 타올지의 트레이닝복 차림에 한손엔 가게 가방을 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보고 싶었는데... 하루에 수십, 아니 수백 번을 핸드폰을 보고 망설였다.
행여나 그의 마음이 변했을까 봐 얼마나 겁이 났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게 돼버렸다.
“난처하게 돼버렸네요…. 집안끼리 선 이야기가 오가서 이렇게 만나는 거예요.”
한 번쯤은 생각했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 그가 선을 본다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한 것처럼 상대방을 봐 줄 수 있을까 하고..
대답은 예스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습적으로 현실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가 사랑은 물론이고, 결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 정말로 선을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녀가 느끼는 것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재미가 아니라 배신감이었다. 게다가 한유리라니…. 하필이면.
왜 향아가 초라한 모습일 때만 저 여자는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날까?
“미안해요. 향아 씨.”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그녀는 그제야 몸이 움직였고 급하게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뒤따라오는 그의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고
그만 로비에서 덩치가 큰 남자와 부딪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볼썽사납게 뒤로 나가떨어짐과 동시에 잘 포장된 스무 개의 샌드위치도 종이 가방 밖으로 튕겨 나갔다.
"아씨. 뭐야!"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와 부딪힌 사람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향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로비에 흩어진 샌드위치를 급하게 주워담았다.
“아! 배달을 못 했네.. 어쩌지..”
대강 주워담고 일어서자 그녀 앞으로 샌드위치를 내미는 정우가 서 있었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샌드위치를 잡았지만
그는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본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샌드위치를 포기하고 돌아서 버렸다.
"도망가는 거야?"
"...도망...아니야."
도망이라니.
결국! 이런 꼴을 보고야 말았지만.. 비록 그녀의 마음이 변해버렸다지만,
그리고 민정우의 마음도 그녀와 다르게 변했다지만 두 사람의 끝을 비겁한 도망으로 남겨두기는 싫었다.
향아는 뻣뻣한 근육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돌아섰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께만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그냥.. 갑작스러워서..나 여기 배달 왔거든."
횡설수설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떨려 나온다.
이렇게 당황한 티를 내다니…. 향아는 자신을 입을 꿰매어 버리고 싶었다. 차마 그를 바로 볼 수가 없어
그녀의 시선은 호텔 로비 바깥을 배회했다. 쪽팔리게 눈이 시큰해 온다.
절대 안 돼! 절대로 울면 안 돼! 이미 충분히 우스운 꼴 보여 줬어. 아름다운 마무리는 물 건너갔지만.
더 이상 추해지지는 말자.
향아는 눈에 힘을 빡 주며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참았다.
"거짓말쟁이."
그의 말에 향아는 고개를 들었고, 정우의 강렬한 눈빛과 눈물이 가득 고인 향아의 눈이 마주쳤다.
"민정우! 어쩜 이럴 수 있어! 가만 안 둘 거야!"
한유리였다. 다시 한 번 자신을 두고 양해도 없이 자리를 떠난 정우 때문에 모멸감으로 잔뜩 화가 나 따라 나온 것이다.
그런 유리를 정우는 완전 무시해 버린 채 향아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우 씨! 왜 이래! 아프단 말이야."
향아가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정우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
“놔! 민정우. 놓으라구!”
***
“민정우! 당신 정말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거기서! 거기 서란 말이야!”
유리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그들의 뒤를 쫓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얼마나 잘 나서.. 날 이렇게 만들어? 당신도.. 저 여자도.. 너무 미워..”
놀란 향아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정우의 힘으로 결국 그의 차에 구겨지듯 억지로 넣어지고 말았다.
“아프잖아!”
향아의 볼멘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차 문까지 잠가 버리고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다.
향아는 놀란 가슴이 가라앉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누가 선본다고 뭐라고 했나? 그냥 자리 비켜준 건데 왜 화를 내? 마치 내가 바람이라도 핀 것처럼 난리잖아.
정말 사람 잘못 봤다.
민영이 말을 듣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 걸 그랬었나 보다.
"차 세워. 당신이랑은 어디든 가기 싫으니까."
향아는 흥분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역효과였는지 정우는 말없이 더욱 속력을 높여 앞서 가는 차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추월해 갔다.
***
겁이 난 향아는 차가 멈출 때까지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차가 멈추자 그녀도 화가 잔뜩 나 차에서 내려 차 문이 부서져라 닫았다.
"신나는 드라이브였어. 집에는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데려다주지 않아도...“
언제 내렸는지 정우는 또 그녀의 팔을 잡고는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앗! 왜 또 이래! 미쳤어?"
무지하게 높고…. 폼 나는 건물이다.
혹시?
"민정우, 이 손 놔! 안 들어갈 거야! 놔! 놔! 이거 납치야! 소리 지를 거야!"
향아는 이미 소리를 질러대며 남은 한 손으로 그를 때리고, 발로 차고 저항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화가 난 그녀의 거센 저항에 그는 처음엔 몇 대 맞아 팔을 놓치더니 금세 그녀의 두 손을 꽉 잡아 버렸다.
"그만해!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고 싶어?"
주변은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두 사람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마음을 쓰기에 그녀는 너무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행동으로 직접 보여줬다.
“윽!”
향아가 그의 손을 꽉 물어버렸지만 정우는 인상을 쓰면서도 손에 힘은 풀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시원찮은 반응에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공중에 떠서 머리가 바닥을 향하며 피가 얼굴로 쏠렸다.
"야! 민정우!"
그의 어깨에 걸쳐진 그녀는 당황과 모욕감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손에 죽기 전에 얼른 내려놔! 지금 그만두면 숨은 쉬게 해 줄게!"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으름장에 정우는 웃음이 났지만 꾹 참았다.
퍽! 퍽!
“놔!”
그녀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그의 등을 세게 쳤지만 돌아온 거라고는 매정한 말투였다.
"이제부터 한마디씩 하거나 나를 때릴 때마다 당신 엉덩이를 때려줄 거야.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하는 행동이나, 말투,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 내려놓기만 해봐라..
저승사자와 하이파이브하게 만들어 주마!
이를 악물며 잠잠해진 그녀를 들쳐 메고 가는 정우의 입가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게 느껴져 즐겁기 그지없었다.
***
정우는 집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를 내려놓았다.
향아는 발이 지상에 닿자마자 그의 정강이를 향해 발을 날렸지만, 그는 이미 예상한 듯 피한 후였다.
머리카락이 홀랑 타버릴 정도로 화가 난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정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정우의 손에 잡혀 다시 돌려 세워졌다.
“갈 거야! 놔!”
“안 돼. 제대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절대 못 나가. 하루고. 이틀이고 계속 여기 있어야 해.”
치솟는 화로 향아의 얼굴이 벌게졌지만, 정우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는커녕 그의 얼굴도 보기 싫다.
"이제 차분하게 얘기할 준비 됐어?"
"똘아이랑은 할 얘기 없어."
향아가 다시 현관문 손잡이를 잡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홱 돌아서서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에게 그가 갑작스러운 키스를 해 왔다.
이러면 내가 어영부영 넘어갈 줄 알고? 진짜 바보로 보는구나!
더 화가 난 그녀는 그의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아얏!"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가 고개를 들자 입술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러게…. 왜 화난 나를 건드려? 그냥 가게 내버려두지…."
향아는 막상 그가 다친 것을 보자 미안해졌다.
정우가 다시 바짝 다가왔다. 눈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그녀는 현관문에 바짝 붙었다.
"오지 마! 이번엔 무는 정도로 안 끝나!"
하지만 그가 다시 다가오자, 향아는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대응했다.
"바라던 바야."
그가 그녀의 얼굴을 돌리지 못하게 두 손으로 꽉 감싸고는 거친 키스를 했다. 그녀의 숨결을 모두 빨아들이는 그를 밀어내려던 그녀도 몸속 깊은 곳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와 있을 때면 항상 느끼던 그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며 휘돌았다.
두 손은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있던 그의 손도 그녀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혀가 그녀에게도 똑같은 열정을 요구하며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턱선을 지나 목에 자잘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상의는 벗겨져 있었고 속에 받쳐 입은 민소매의 끈을 끌어 내리는 그의 손길을 느꼈지만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도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아….”
하지만 서툰 손길에 넥타이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더 꼬여갔다. 자신도 모르게 절망의 신음 소리를 냈는지 정우가 넥타이를 풀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 향아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뉘었다.
그녀의 폐 속에 남아있던 공기마저 빠져나가 버린 듯 호흡이 가빠왔다.
"하아... 정우 씨..."
향아는 두렵지 않다고 이대로 계속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낯선 감각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그 전율에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기분을 알아챈 정우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향아의 손바닥으로 그의 쉴 새 없이 쿵쾅대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녀는 시선을 올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와 눈빛을 마주했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그녀는 이러려고 하던 게 아니었는데...
정우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몸이 움찔거려질 정도이면서도 불안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마음도 스멀거렸다.
"정우 씨 나... 아니 우리..."
정우가 향아의 귀를 살짝 깨물자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중에.. 지금 말고 나중에 얘기해.. 하지만 당신이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멈출게."
정우는 온몸이 참을 수 없는 열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 정말? 그래 줄 수 있어…?"
“끄응..”
그가 힘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래. 난 나만큼이나 당신도 이 순간을 소중하고 즐겁길 바라..."
향아는 그의 단단함과 부드러움에, 정우는 그녀의 포근함과 사랑스러움에 취해갔다.
*
"먹어."
정우는 간단한 식사를 차려 놓고는 향아에게 자신의 상의 잠옷만 입힌 다음 조심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혔다
"이러지 않아도 돼. 내가 걸을 수 있어."
"알아.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하는 서비스가 아니니까 그냥 있어, 먹고 나면 씻겨 줄게."
"뭐?! 됐어!"
샤워를 같이하다니... 묵은 때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다.
옷깃을 잡으며 진심으로 경계하는 하는 그녀를 보고 정우는 미소 지었다.
"알았어, 그런데 몸은 좀 괜찮아?"
정우의 말에 향아의 얼굴은 물론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실 몸이 좀 쑤시긴 했다.
“배고픈 거 빼고는 멀쩡해.”
식탁에는 간단하게 콩나물국과 소세지, 황태구이와 나물, 김치와 김구이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한다더니 당신이 다 만든 거야?"
정우는 향아가 일부러 말꼬리를 돌린다는 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녀를 안고 싶지만 엄청난 자제력으로 참는 중이었다. 이런 자신의 상태를 안다면 향아는 어떻게 할까?
"아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반찬을 해주시고 가. 그 소세지는 내가 한 거야."
그는 짓궂은 마음을 접고 작고 통통한 소세지에 문어처럼 보이게 칼집을 내고 기름에 대강 굴린 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그녀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이렇게 잘해 주다니…. 향아는 수저를 식탁 위에 내려놨다.
"왜? 더 먹어."
"당신.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건데? 나한테 성질 낸 거 미안해서 그러지?"
정우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 왜 내가 화가 났는지 알아?"
"선 본 거 내가 봐서? 아니면 선 보는 거 안 봐주고 나와 버려서?"
향아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또 상처 입는 자신을 깨달았다. 어차피 알고 시작했고,
자신도 이미 한 짓인데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그걸 모르고 지나가길 원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화가 난 건 아니야."
"왜? 왜 모르길 원했어? 당신은 내 선 볼 때 따라와 놓고선. 당신은 되고 난 안 돼?"
모순적인 배신감이 그녀를 울컥하게 했다.
"오해할 테니까. 끝난 사이라 해놓고서 선을 본다니까 오해할 거잖아. 내가 모르는 새 집안끼리 정해버린 거였어. 그리고 설사 유리가 아니었어도 당신이 내가 선 본 걸 알면 배신감을 느낄 테니까. 안 보고 거절할 수는 없었어. 집안 어른들이 정하신 거니까 만나야 했어."
"잘난 척하지 마. 내가 배신감을 느꼈을지, 재밌어했을지 어떻게 알아?"
그녀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그가 얄미워 투덜댔다.
"그럼 아니야?"
"맞아. 선수는 선수네…. 그럼 왜 화가 난 건데?"
빈정거리며 선수라는 말을 하는 향아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화가 나는 건 내가 당신에게 있어서..젠장! 이런 말까지 여자한테 하게 되다니..."
정우는 자신이 앞으로 할 말이 자신도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듯했다.
"우리 엄마한테 들켜서 그런 거야? 걱정하지 마. 뒤탈 없게 잘 처리했어. 이미 말했는데 안 믿어?"
"처리했다니? 난 당신의 그런 점이 날 화나게 해! 날 샌드위치 열 개짜리 김 사장 취급을 하는 게 싫어, 내가 당신에게 그런 존재야? 부모님께 숨겨야 할 존재?"
정말 화가 났나 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무섭기는커녕 사탕을 숨겨놨다고 삐진 꼬맹이 같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야? 당신은 그래?”
“아니. 우리가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사이일 수가 있어?”
“그럼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한 건데?”
정우는 여전히 그 일로 그녀에게 화가 났다.
"화내지 마. 당신 나랑 결혼하고 싶어?"
"뭐?!"
뜻밖에 그녀의 말에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싫지? 만약 그 날 엄마한테 당신을 애인으로 소개했다가는 1시간 이내에 당신 호적조사를 끝내고 당장 식 올리라고 했을 거라구. 설사 그런 사태를 피해 갈 수 있었다 해도 나는 당신과 헤어지는 그 날까지 매일매일 보고를 해야 했을지도 몰라. 상상을 해봐……. 싫잖아."
기가 막혔다. 이런 이유로 그를 밀어버렸다는 건가? 다른 여자 같으면 일부러라도 그런 기회를 만들 텐데…. 망설임 없이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차버리다니. 이 여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래도 우리가 키스한 걸 보셨는데…?"
결혼이라는 말에 움찔하는 정우를 보자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뭘 또 그렇게 티 나게…….
향아는 그런 마음을 재빨리 눌러 버리고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눈물겨웠던 이야기를 현란한 바디 랭귀지를 곁들여 털어놓았다.
“…. 결국 엄마가 이러셨지…. 야야…. 아니면 됐다. 와 성을 내노. 내는 니가 이리 살다가 혼자 늙을까 봐서 그러지……. 라며 나를 믿어 주셨어.”
그가 자신의 재치를 칭찬해 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유부남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는 뺐다. 그걸 뺐는데도 그는 그녀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그런 말에 어머님이 속으시다니…."
정우는 황당했다. 확실한 장면을 보고도 저런 어설픈 변명에 속으셨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말했잖아. 우리 엄마, 내 얘기는 무조건 믿으신다구……. 그런데 당신 반응이 뭐 그래? 난 당신이 안심할 줄 알았어."
“하아….”
정우는 한숨을 일어서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저 여자 분명 연구대상이다.
향아는 또 그런 그가 불만이었다. 이래도 못마땅하고. 저래도 못마땅하고 어쩌라는 건지.
***
띠르르르릉~!
"네, 허브 샌드위칩니다."
<나 김 사장인데 샌드위치 열 개 배달해 준다더니 왜 안 가져오는 거야?>
민정우다. 어제 자기네 집에서 자고 바로 출근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 열기가 계속 생각나서 자꾸만 어젯밤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거로 갖다 드릴까요?"
<잘 잤어?>
정우의 그 말에 그녀의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샌드위치 없는데?"
<오늘 저녁 같이 먹을까? 7시쯤에 데리러 갈게.>
"아~니야, 그냥 밖에서 만나."
<그럼 준희네 가게에서 보자.>
"응."
전화를 끊고 나니 민영이가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 얼굴이 아니라 목에 키스 마크가 있네."
헉!!! 뭐라? 키. 스. 마. 크…….
향아는 빨개진 얼굴로 손을 목에 갖다 댔다.
"오른쪽 말고 왼쪽. 진하네."
헐……. 이게 웬 망신이야….
민정우! 사람 난처하게 만드는데 선수라니까….
"정우 씨랑 화해한 거야?"
"…. 으응. 하하하하하하하하…."
향아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자 민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네가 걱정할 만큼 그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여자에게는 나쁜 남자야."
"그게 좋아. 나쁜 남자라서. 지금 나한테만 좋은 남자면 돼. 나와 만나는데 만인의 남자일 필요는 없잖아."
"고등학교 때 어깨에 하얀 비듬 쌓고 다니던 지리 선생님 좋다고 할 때부터 취향 독특한 건 알았다마는……."
"걱정하지 마. 친구…! 그런데 태진이랑은 언제까지 연애만 할 거야? 가게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았는데."
"말꼬리 돌리지 마."
"너야말로 나의 센스티브한 취향을 모독하지 말란 말이지."
민영은 장난스럽지만 자기답게 의사 표현을 하는 향아에게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가벼운 만남으로 그쳤던 남자들과는 달리 뭔가가 진행되고 있기는 한 것 같다.
고1 때 처음 만났을 때 향아는 자기를 선배로 보고는 꾸벅 인사를 해왔다.
그렇게 알게 된 두 사람은 죽이 척척 맞았고 덤벙대고 낙천적이며 사람을 잘 믿어버리는 그녀를 챙겨주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렸나 보다.
“알았어. 그런데 어제 좋았어?”
“어우 야~~!!! 뭘 그런걸!!!!!!!!!!!!!!!!”
민영의 돌직구에 향아는 과한 반응을 보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굳이 말 안 해도 반응을 보니 알 만하다.”
결국, 잘되건 못되건 향아의 연애다. 현재 자신이 저렇게나 만족하는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걱정은 하지 말자.
민영은 자신의 걱정이 너무 과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 네가 원하던 징한 연애해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SOS 쳐."
민영의 말에 향아는 상기된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그럼…. 그럼 말이야…. 너 태진이랑 자면 어떤 느낌이야? 속옷은 항상 세트로 챙겨 입는 거야? 같이 샤워도 해?"
향아는 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향아의 몸이 굳어지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드는 그의 귀에 대고 그녀가 머뭇거리며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말했었다.
"나…. 첨…. 이야…."
잔뜩 잠긴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려 하자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자기 얼굴을 보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의 귀에 키스했다.
정우는 자꾸 어제 일이 생각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좋은 일 있으면 같이 웃자. 네 덕에 어제 집안 분위기 굉장했어."
정민은 결재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책상에서 돌아 나와 그의 앞에 앉았다.
집 전화는 물론 자신의 전화마저 받지 않는 녀석 때문에 회사에서 일부러 사무실로 불러들여 정우에게 어제 일의 해명을 요구했는데 이 녀석은 연신 실실거리고 있어서 화가 났다.
"미안, 형."
정우는 짜증스런 형의 목소리에 다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사실 애쓸 필요도 없었다.
향아가 그녀의 어머님께 둘러댔다는 핑계가 생각나자 기분이 언짢아졌기 때문이었다.
"어제 일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네가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이번에는 심했어, 어른들 얼굴이 있는데 그러고 가버리면 어떡하니? 여자 쪽도 화가 많이 났다더라."
“…….”
“너 이런 녀석이었어? 너무 무책임하잖아. 아버지도 이번엔 화나셨어. 어떻게 그런 자리에서 다른 여자 손목을 잡고 나갈 생각을 해? 생각이 있어? 없어?”
자신보다 더 흥분하는 일이 없는 형인데 진짜 화가 났나 보다. 문득 형이 잔뜩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정우는 또 웃음이 났다.
항상 엉뚱한 행동을 하는 향아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야! 민정우, 너 진짜 미쳤냐? 돌았어?”
기어이 정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화날 만도 하다. 아무리 그 대상이 유리였다 해도 그런 사고를 치고서 전화는 일절 받지도 않고. 이렇게 불러와서까지 딴 생각하며 웃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님과 어머님께는 죄송해.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삼송 한 회장님도 이런 일로 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거야."
"만에 하나까지 생각하는 놈이 그런 짓을 해? 어머님 엄청나게 화나셨어. 어지간해서는 풀리지 않으실 거야."
"알아."
“넌 뭐가 이렇게 쉽냐? 매사에 이런 식이야! 왜 너 하고 싶은 대로야?”
“미안해. 형. 형이 있어서 난 내 욕심만 채웠나 봐. 가끔은 형이 힘들기도 하겠다는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야. 그런데도 생각만 했어.”
난데없이 처음 보는 정우의 진심에 정민은 당황했다. 정우의 말대로 장남이라는 무게는 무거웠다.
정우를 볼 때면 얄밉고 부러웠었다. 그랬지만 정작 자신이 힘들 때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기도 하는 정우였다.
바로 이번에 기획실 실장직을 잠시나마 맡아준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보여 준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확실히 그러고 보니 요즘 이 녀석 나사 빠진 놈처럼 혼자 실실대고 다닌다.
그러다가 까칠해져서 직원들이 눈치 보게 한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다.
설마……?
"그때 회사 로비에서 같이 본 그 여자야?"
"…."
"그 정도로 생각하는 여자라면 식구들한테 정식으로 소개해 줘야 하는 거 아니니?"
"형. 제발…. 관심 꺼줘."
“어떻게 관심을 끄냐? 너라면 그러겠어?”
“차차 말할게. 그러니까 당분간 모른 척 좀 해 줘.”
"정민이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용납할 수가 없구나."
"어머니."
정민과 정우는 회사 출입이라고는 하지 않던 어머니의 등장에 벌떡 일어났다.
그녀나 그나 어머니의 난이다….
***
향아는 준희의 가게로 가는 도중 정우가 좀 늦어진다는 전화를 받고 혼자 가게로 들어섰다.
준희도 보이지 않았고 가게는 초저녁이라 그런지 한산해 보였다. 바에 앉아 가벼운 자몽 마티니를 시켰다.
그녀는 가게에서 나오기 전에 액세서리 가게에 들러 그 키스 마크를 숨기기 위해 사서 목에 두른 스카프를 만지작거리며 지난밤에 대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첫 경험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배려하고 아끼고 너무도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아직도 남아서 몸을 떨리게 했다.
그와의 하룻밤 이후 더 자주 민정우를 생각하게 된다.
이게 당연한 걸까?
향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또 습관처럼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온종일 그 생각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아까 민영이가 그녀더러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지 모른다며 경고했었는데…….
이미 늦었나? 민정우도 자신과 같을까?
할 일 없이 앉아서 마시다 보니 어느새 빈 잔이다.
한 잔 더 시킬 요량으로 바텐더를 부르려는데 눈앞에 준희가 칵테일 잔을 들고 있었다.
"Hi"
"엄마야!!“
놀란 그녀가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자 준희가 든든하게 잡아 준다.
준희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마가리타예요. 제가 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정우랑 만나기로 했죠? 전화가 와서 잘 부탁한다고 어찌나 부탁에 부탁을 하는지…. 아주 팔불출이 따로 없어요.”
준희의 말에 향아는 기분이 좋아져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표정을 전혀 감출 줄을 모르네. 너무 그렇게 다 드러내도 손핸데. 특히 민정우한테는 말이죠.”
“네?”
“그 자식 능구렁이인 거 알죠? 대강 보고도 웬만한 사람들 속마음은 다 들여다보는 녀석이죠. 앗! 내가 친구 놈 정보를 너무 흘리나 봐요!”
준희가 감칠맛 나게 중간에서 말을 끊자 향아는 애가 탔다.
“더 얘기해 주세요! 시음할 거 있어요? 그러면 얼마든지 저 불러서 시켜주세요!”
향아는 눈을 반짝이며 간절함을 어필했다.
“시음은 됐고….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한데….”
“할게요!”
“푸하하하하하!!”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향아의 반응에 준희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 정우 씨 왔다. 여기요!”
마침 향아가 정우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반가워한다.
정우는 준희가 웃는 것을 보며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자타공인 바람둥이 박준희지만 개자식은 아니니까. 하지만 준희가 향아의 매력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준희는 향아의 말에 정우를 보고는 웃음이 잦아들었다.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아서였다.
“무슨 얘기 중이었길래 그렇게 재미있어?”
정우는 향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확실한 영역 표시.
“정우 씨!”
당황한 상기 된 얼굴로 향아가 그를 밀쳤지만, 그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최대한 빨리 날아온 거야."
정우의 향기에 향아의 몸이 반응했다.
"5분만 더 늦었으면 여기 있는 술 다 마셔 버리고 뻗어 버리려고 했어."
향아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그나저나 뭐야?”
정우가 이번에는 준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 별거 아닌데. 향아 씨가….”
“준희 씨! 이거 한 잔 더 주세요! ”
향아가 준희의 말을, 티 나게 자르며 빈 칵테일 잔을 내밀었다. 준희는 그런 그녀의 바람대로 잔을 받아들였다.
“그러죠. 잠깐만 기다려요. 정우 너는 뭐로 할래?”
“난 됐어. 당신도 그만 마셔. 저녁 먹기 전에 취하겠다.”
“물이라도 한잔하고 숨 좀 돌리고 가. 뭐가 그렇게 급해?”
준희가 바 뒤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래. 잠깐 앉았다가 가.”
향아도 그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정우는 자리에 앉아 향아의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손을 내려 그녀의 목에 감긴 스카프를 쓰다듬었다.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일부러 내 목에 자국 낸 거지?"
향아는 그의 미소를 보고 그랬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왜? 누가 보고 뭐라 그래?"
정우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무의식적인지 긴 손가락으로 향아의 목을 계속 쓰다듬었다. 향아는 그 느낌에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을 보자 그는 향아의 그런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나도 손 있어요. 민정우 씨.
“응. 누가 뭐라 그랬어.”
향아는 장난 가득한 미소를 띠며 손에 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내려 그의 허벅지에 손에 올려놓았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호라…. 이 정도로는 약하단 말이지? 향아는 자신도 몰랐던 과감함으로 슬슬 손을 위로 올렸다. 그의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지며 정우가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그녀는 그를 흉내 내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탁!
500cc 맥주 컵 가득 얼음이 담긴 생수가 둘의 눈앞에 놓이면서 분위기가 깨졌다. 준희였다.
"어허~ 무슨 짓이야? 하얀 손수건처럼 순진한 날 앞에 두고?"
향아는 준희가 다 보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정우는 소유욕이 담긴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상했다. 여자와 잤다고 해서 그 여자가 자기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향아에 대해서만은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
향아는 준희와 정우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다.
"배고프지? 나가자"
정우는 향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 물은 너 혼자 다 마셔라. 간다.”
그리고는 준희를 약 올리며 가게를 나섰다.
***
정우는 향아의 손을 꼭 쥔 채로 밖으로 나가 차에 태웠다. 그가 데려간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왜 집으로 왔어?"
"키스 마크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짓궂은 대답에 향아가 얼굴을 찌푸리자 정우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소파에 그녀를 곱게 앉혔다.
“얌전히 앉아 있어. 내가 다 되면 부를게.”
그는 향아의 손에 리모컨까지 쥐여 주더니 주스까지 내어 왔다.
“왜 이렇게 특별대우야? 나한테 할 말 있어?”
“그냥. 하고 싶어서. 내가 이러고 싶어서 그래.”
정우가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방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는 향아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어본다더니…. 공주 대접도 받아 본 사람만 편한 거지.
향아는 주스를 원샷으로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도와줄게.”
“가서 앉아 있어. 혼자 해도 돼.”
“내가 불편해. 그냥 거들기만 할 게.”
“좋아. 그럼 거기 두부랑 채소 좀 썰어 줘”
두부랑 채소? 그러보니 준비된 식재료가 김치? 김치찌개?
"의외야. 스파게티나 뭐…. 그런 거만들 줄 알았는데…."
“그때 당신이 김치찌개 맛있게 먹었던 거 생각나서.”
“진짜? 완전 감동! 당신이 이런 남자였구나~~”
향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부를 썰었다.
“이런 남자는 뭐고, 당신이 상상했던 나는 또 어떤 남자야?”
조리대 앞에 서서 두부를 정성스럽게 썰고 있는 그녀 쪽으로 정우가 돌아봤다.
“이런 남자는…. 카스테라 같은 남자? 그리고…. 내가 상상…. 했던 당신은 오래된 바게트?”
정우는 두부 하나 쓸면서 무슨 예술 작품이라도 하는 듯 도마로 파고들 자세인 향아 뒷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다 썰었으면 줘."
향아는 도마째 그에게 건넸다. 두부를 본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부는 네모난 모양이 아닌 여러 가지 모양들---별, 삼각형, 동그라미. 직사각형….---을 하고 있었다.
"우린 이제 내 두부로 인해 세상에서 하나뿐인 특별한 김치찌개를 먹게 되는 거야 마치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어린 왕자와 장미처럼."
정우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마를 받아 내려놓고 그녀를 다시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됐어. 이제는 가서 앉아있어. 알았지?”
잠시 식욕을 자극하는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하자 향아는 곧 수저와 반찬들을 내놓았고, 그들만의 밥상이 차려졌다.
정우표 김치찌개는 어설픈 향아의 솜씨와 비교하면 과연 예술이라 할 만했다.
“…. 음…. 와! 와! 와!!!”
"어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향아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정우가 맛 평가를 원하자 그녀는 엄지를 척하니 들어 보였다. 엄지 백 개라도 모자랄 맛이다.
"장가가면 사랑받겠어."
"나, 당신한테 장가갈까 봐."
“켁! 켁! 켁!”
갑작스러운 그의 발언에 향아는 사레가 들려 괴로워했다. 정우가 옆으로 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자신이 들은 게 맞나? 농담인가? 진담…. 아니지. 김칫국 마시면 안 돼. 이 연애에서는 기대하면 상처받아.
"뭘 그렇게 놀래…? 농담 가지구…."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말에 적잖이 당황해 얼버무려 버렸다.
"…. 놀래지. 그런 무서운 발언을 하다니!"
향아는 그런 말을 농담으로 하는 정우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진짜 화가 났다.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이렇게 툭툭…. 두 번씩이나.
“그런 농담이 재밌니? 김치찌개가 맛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준다.”
당혹감으로 식욕이 뚝 떨어질 정도였지만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꾸역꾸역 먹어댔다.
정우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향아의 모습이 미워 보였다. 농담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진심도 있었다. 아니, 자신도 미처 몰랐던 진심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인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게나 밟아버리지?
"그렇게 먹으니까 살이 찌지!"
심통 가득한 그의 말에 향아는 울컥했다. 먹으라고 해 줄 때는 언제고….
“그럼 왜 해줬어? 차라리 다이어트 약을 주지?”
“그럴까 생각 중이야.”
정우의 말에 향아는 머리카락이 홀랑 타버릴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수저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지…. 지금 말다…. 했어!…? 정말…. 정말…."
향아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말을 버벅댈 정도였다.
정우는 유치한 심술을 참지 못한 자기 입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잔뜩 화가 나 가방을 들고 나가버리는 그녀를 잡을 수도 없을 만큼 미안했다.
젠장! 어머니는 당장 수수께끼의 여인을 밝히지 않으면 계속 선을 보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마저 찬성했다.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둘 사이를 숨기는 그녀에게 과연 자신의 부모를 만나자고 하면 선뜻 만난다고 나설까?그래서 슬쩍 떠보려던 것이 이렇게 돼버렸다. 멍청한 자신에게 화가 난 정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자책했다.
콰당!
갑자기 다시 문이 세게 열리면서 벽에 부딪혔다.
“민정우, 이 망할 자식아! 너랑 결혼할 여자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다음번 여자 사귀기 전에 정신 연령부터 업그레이드시켜! 그리고 내 눈에 한 번만 더 알짱거려라. 병신을 만들어 줄 테니까!”
향아는 야멸차게 외치더니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보이고는 다시 현관문이 부서져라 닫고는 가버렸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우는 향아가 나가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웃음이 터져 버렸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고 입가가 아파서 웃는 게 힘들어지고 나서야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 여자가 당신인데…. 어쩌려구?”
***
“향아야,”
“됐거든! 민정우 그 망할 자식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그 얘기하려고 한 거 아닌데?”
“아….”
향아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요 며칠 정우 때문에 짜증이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콤플렉스인 다소 통통한 몸매를 지적한 것에 발끈하긴 했지만, 그보다 결혼 얘기를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농담에 심장이 벌렁거려 튀어나올 정도로 설렜던 게 너무 화가 났다.
“두 사람 사랑싸움 때문에 내가 눈치를 봐야겠어? 여기는 우리 사업장이라구. 인상 쓰고 있으면 손님들이 이해해 줄 것 같아?”
민영의 따끔한 말에 향아는 무안해졌다. 민영는 태평양 같은 마음의 소유자였다가도 어떤 때는 아주 매서워진다. 그 덕에 이 작은 가게가 제대로 굴러가긴 한다.
“미안. 앞으로는 조심할게.”
금세 기가 죽은 향아를 보니 민영은 또 마음이 안 좋아졌다.
“고민거리 있으면 얘기해 볼래? ”
“아냐. 그냥 성격 차이지 뭐…. 이러니까 결혼 생활 10년은 된 기분이다…. 헤헤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그러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들어서 죽네사네, 헤어지자. 참자…. 또 만나고…. 또 싸우고.”
민영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냅킨을 예쁘게 접어 나간다. 그녀가 보기에 향아는 지금 다른 사람 연애하듯 그렇게 평범한 연애를 하고 있다. 싸웠는지 며칠째 그의 전화를 죄다 무시하고 있다.
“너희들, 결혼은 언제 해?”
“가게 좀 더 자리 잡은 후에. 태진이는 늦어도 1년 후쯤으로 생각하긴 하는데 모르지.”
“그렇구나….”
“갑자기 그건 왜 물어? 혹시 너희들….”
“아냐! 우린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시작한 거 알잖아.”
향아는 지레 찔려서 강하게 부정했다.
“누가 뭐래? 너희들 혹시나 우리 결혼 선물 벌써 계획 중인가 싶었지. 그럼 뭐가 필요한지 말하려고.”
“아..그랬구나. 하하하하... 어쨌든 태진이랑 너랑 연애 기간이 너무 길지 않아? 어른들이 그러는데 연애 너무 오래 해도 안 좋다잖아.”
“네 걱정이나 해.”
“그래서 말인데. 태민영, 정말 객관적으로 나를 봤을 때 많이 뚱뚱해?”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너 그래서 얼마 전부터 저녁 건너뛴 거야? 간식도 잘 안 먹고.”
“응. 좀 통통하기는 해. 그치?”
향아는 자신의 몸이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찔러봤다.
“쿠션감이……. 좋다….”
"민정우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 이미 그 사람은 너만 보면 좋아서 눈에서 하트 솟잖아. 무리하지 마.“
“그 하트 바닥났나 봐…. 나더러 살쪘대…. 망할 자식….”
향아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리에서 쪼그라든다.
“뭐? 진짜 그랬어? 민정우가?”
민영은 믿기지 않았다. 설혹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대놓고 말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응. 그 민정우가 대놓고…. 그러더라.”
“미친 거 아냐? 어쩜 그런 말을 하니? 재수 없어!”
민영이가 흥분했지만, 향아는 민영의 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좋겠다. 기집애…. 먹어도 먹어도 갈 곳만 가니….”
“여하튼 민정우. 실망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민영아, 나 반쪽이 되기 전에는 안 봐! 민정우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영원히 안 보게?”
“야! 태민영! 너까지 이럴 거야? 두고 봐! 내가 다이어트가 뭔지 보여 줄 테니까.”
향아의 다이어트 타령은 학교 때부터다.
그리고 많은 여자들이 평생을 다이어트라는 운명을 친구처럼 적처럼 곁에 두고 살지 않는가?
지금 향아를 보니 무슨 소리를 해도 먹힐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민정우를 볼 기회가 생기면 꼭 한 마디 해줘야지.
“아, 맞다! 다른 얘기 하려고 하다가 완전히 새버렸다.”
“응?”
“진영 선배가 전화 왔더라.”
“진영 선배가? 왜? 혹시…. 나한테….”
“민정우 하나로 부족해? 이제 막 양다리 걸치고 싶고 그래? 응? 아무리 홧김에라도 양다리는 예의가 아니야.”
“그러고 싶어. 그래야 실종 직전인 자존감이 나 여기 있다고 존재감이라도 알려줄 것 같아.”
향아는 정말이지 새로 태어나고 싶을 정도다.
***
준희는 위스키 한 잔을 다시 정우 앞에 놓았다.
묻지 않아도 안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향아겠지.
민정우를 이렇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라 너무 마음에 든다.
정우만 아니었다면 여자로 봤을 것이다.
정우는 여전히 말없이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자신이 여자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 백번 인정한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박준희, 여자 몸무게가 그렇게 대단한 거냐?”
아하~알겠다!
민정우 이 재미없는 놈이 향아의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대해 농담이랍시고 한마디 한 거다! 준희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재미의 미소가 번져갔다.
“다이어트에 관련된 모든 사업이 왜 안 망하는데? 여자들은 55사이즈도 뚱뚱하다고 생각해.”
“그거야.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향아 씨한테 화가 나 있는데도 편드냐? 등신.”
준희가 그를 약 올렸다. 어디까지 화를 내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며칠을 전화 한 통이 없냐? 이향아가 이렇게 속 좁은 여자인 줄 몰랐다.”
술이 제법 들어가서인지 정우가 말이 많아지며 불만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면 니가 전화해. 초딩이냐? 유치하게.”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이 진짜 더 화가 난 이유는 자신의 장난 같았던 청혼에 대한 향아의 반응이 서운해서니까. 하지만 이걸 준희한테 말할 수는 없다. 늙어 죽을 때까지 얼마나 놀려대며 재미있어할지 너무도 뻔하다.
“넌 내 친구냐? 이향아 팬이냐? 나도 고집 있어.”
정우는 갑갑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첫 데이트가 생각났다. 향아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키스를 했었다.
“니가 내 친구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
준희의 말에 술이 확 깨며 정우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죽을래?”
순식간에 정우의 표정이 차갑게 돌변했다. 준희가 헛소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다.
“아니. 그리고 난 이 신나는 세상 오래오래 살 거야. 그리고 향아 씨가 매력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오히려 무서운 스타일이지. 너나 해라.”
준희가 얄미운 미소를 짓자 정우는 짜증이 났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오히려 찜찜한 것만 알아 버렸다.
“그런데 넌 향아 씨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 응.”
“뭐? 진짜?”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란다.
준희는 사실로 확인이 되자 너무도 놀랐다.
“잡으려고. 눈치도 없고. 다혈질에 어설픈 거짓말쟁이인데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정우는 손에 쥔 술잔을 돌리며 본인이 아닌 엉뚱한 준희에게 난데없는 커밍아웃을 했다.
“……. 미친놈…. 제대로구나.”
준희가 빈 술잔에 다시 위스키를 가득 따라 준다.
***
“김선미 씨, 부탁한 자료가 아닙니다. 화장실에서 화장 고치고 올 시간에 일에 신경을 더 써주시면 제가 더 감사하겠죠?”
실장의 말에 사무실 막내 김선미 씨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냥 다시 자료 찾아오라고 하면 될 것을….
“거기 서서 울면 자료가 저절로 찾아집니까?”
“…. 죄…. 죄송합니….”‘
선미는 말도 채 끝을 내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런 그녀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저런 지적을 받을 줄 알았다. 걸핏하면 화장 고치느라 수시로 들락거리니 사실 다른 직원들의 눈에도 거슬렸던 건 사실이다.
실장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거래처로 외근을 나간다며 나갔다. 최고의 순간은 상사가 외근을 나가는 순간이다.
“아…. 숨 막혀! 요즘 왜 또 저래? 정중해도 무서워.”
“차라리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면 욕이라도 실컷 하지.”
“맞아. 이건 뭐 우리도 다 느끼는 문제점에 대해서만 콕콕 집어서 말을 하니 뭐라고 말도 못하잖아.”
“것뿐이야…? 사실 전에 최 실장님보다 월등한 실력자야. 최 실장님이 모아만 두고 간 문제 덩어리들 벌써 3분의 1은 해결하셨어.”
“최 실장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 교통사고가 그렇게 크게 났는데 본인은 오죽하시겠어?”
“어쨌거나 성격만 좋으면 완벽한데 말이야.”
직원들의 말을 들으며 태진은 실장의 히스테리는 백발백중 사랑싸움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인간적인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것도 가벼운 다툼이 아니다. 며칠째 향아는 실장의 얘기만 나와도 신경질을 내고, 민영도 아무 얘기 말라고 언질을 줬다. 실장도 며칠째 초조해 한다.
태진은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 음료 자판기 옆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는 민 실장을 발견했다.
외근 나간다더니…. 여기서 뭘 하지?
창밖을 보는 모습이 꽤 심각하다. 이유야 뻔하겠고.
간섭해? 말아? 어설픈 큐피드 역을 하다가 화살 잘못 꽂으면 어쩌지? 진짜 회사 그만두는 지경이 되는 거 아닐까?
처음에는 민 실장과 향아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어울렸다. 안 되면 안 되는 거지만 잘되면 더 좋겠다.
친구의 남편이 로얄 패밀리라니…. 왠지 친하게 지내고 싶기도 하고,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거라는 인간적인 계산도 선다.
어쨌든 민영의 말에 의하면 서로가 좋아죽는 건 확실한데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내가 그 타이밍 맞춰 줘봐? 애들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두 사람만의 일이 공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끼치니까. 아니야. 아니야, 민영이 말대로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자.
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마침 돌아서던 실장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할 얘기 있습니까?"
"네?"
태진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아…. 유리창에 비쳤구나…. 유리창에는 어리바리 당황한 자신이 보였다.
멍청해 보였겠다…….
정우의 차가운 눈길에 마치 목이 졸리는 것 같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아…. 네. 저기….”
마치 당장 실토하지 않으면 얼려 버리겠다는 분위기다.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지만…. 향아요…."
태진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서기로 했다.
두 사람 화해하면 한턱쏘라고 해야지.
"주제넘은 참견 맞군요."
정우의 쌀쌀맞은 대꾸에 태진은 일순간 벙어리가 돼버리는 듯했다.
정우는 둘의 일을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미 형과 어머니, 기석의 잔소리만으로도 넘칠 지경이니까. 아버지는 참고 계신 듯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극적으로 참여할 확률이 높다.
10대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무슨 간섭들을 그다지도 하고 싶은 걸까?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들 같아 더 짜증이 난다.
게다가 향아가 지나치게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에 그도 성질이 난 상태였다. 정우는 냉정한 표정으로 태진을 지나쳐 갔다.
향아가 이를 가는 이유를 알겠다.
태진은 정우의 뒷모습을 보며 저 냉정함을 흔들어 주고 싶었다.
얼마나 잘났던 간에 실장도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진심이라면 반응이라는 게 있겠지. 없다면 우정의 힘으로 향아와 민정우의 사이를 끊어 놓고 말겠어!
아무리 잘나도 내 친구를 아프게 하는 꼴을 뻔히 두고 볼 수는 없지!
태진은 정우가 모퉁이를 돌 무렵 민영의 번호를 눌렀다.
"자기~~나야. 잠깐 머리 식히러 나왔어. 참, 향아 소개팅 나갔어?“
태진은 자판기에 돈을 넣는 척하며 곁눈질로 실장을 확인했다.
성큼성큼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 당연! 잘 되겠지. 그 녀석이 먼저 향아한테 맘이 있어서 계속 소개해 달라고 했던 거니까 성공은 당연한 거야. 그리고 실장님이랑 만나는 것 같지도 않던데 무슨 걱정이야?”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와서 섰지만 모르는 척 통화를 계속했다. 하지만 등 뒤의 살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쌀쌀맞기 그지없던 모습과 그동안 사무실 분위기를 냉동고로 만든 괘씸죄를 적용해서 한술 더 떴다.
"실연은 새로운 사랑으로 극복하는 거야. 우리 향아가 은근히 매력 있지. 걔가 워낙에 관심이 없어서 싱글이었던 거지 인기는 많지.“
어? 좀 전에 손가락 꺾는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태진은 충분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만 전화 끊어야겠어. 퇴근하고 외식하자. 응~ 나중에 봐~"
태진은 전화를 끊고 천연덕스런 표정처럼 보이도록 노력하며 민정우를 쳐다보았다.
"무슨... 저한테 할 얘기라도 있습니까?"
민정우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고 있지만, 태진은 그가 먼저 묻기 전에는 입을 열 생각이 없다.
이거 의외로 재미있다. 잘하면 실장의 사과를 받을지도!
우정의 힘으로 큐피드의 화살을 제대로 꽂은 것 같다.
"어딥니까?"
쫙 깔린 실장의 음성. 이런 걸 얄짤 없다고 하나?
사과는커녕 오히려 향아를 소개팅시켜 줬다고 멱살이라도잡을 기세였다. 실제로 꽉 쥔 민정우의 주먹을 태진은 보았다.
태진은 굽힐 때 굽힐 줄 아는 융통성 있는 남자였다.
"대현 빌딩 커피숍."
***
태진의 전화를 끊은 민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소개팅은 뭐고, 민정우는 또 뭐야? 분명 진영 선배를 만나러 나갔다는 걸텐데..
“설... 이 인간 무슨 사고 친 거 아냐?”
꺼림칙해 하던 그녀는 다시 그에게 전화하려다 손님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
"정말 고마워요. 선배."
향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영에게 미소를 지었다.
"뭘~ 마침 그 선배도 아침배달 해 주는 곳을 찾길래 네 생각이 나서 소개해 준 것뿐인데. 도움이 됐다니까 나도 좋아."
민영이 말로는 진영 선배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아는 선배네 사무실로 샌드위치 배달을 정기적으로 해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선배 편한 날에 시간 잡아요. 우리가 한턱 쏠게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에이~ 그래야 제 맘이 편해요. 민영이도 당연히 그러라고 했구요."
"그럼 맘 편하게 얻어먹을게."
“수정이랑은 잘 돼가요? 결혼은 언제 해요?”
“…. 실은 요즘 좀 그래.”
“싸웠구나? 참 그렇죠? 좋아 죽겠는데도 자존심 세우게 되고. 보고 싶어 죽겠는데 숙이고 들어가기 싫고.”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어.”
“보고 싶지 않아요?”
“아니. 지금은 차라리 편안해.”
“아…….”
진영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가 눈길만 줘도 녹아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지난번 집 근처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제 선배는 남자로서 아무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정우와 다투고 삐딱한 마음에 양다리라도 걸쳐 볼까 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넌 요즘 어때?”
“네?”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진영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별로 안 바쁘면 밥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얼마 전에 교수님 뵐 일이 있어서 학교에 갔었는데 옛날 생각나더라. 같이 가보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에이~ 그런 건 나 말고 수정이랑 가야죠. 그래야 화해도 하죠. 안 그래?”
향아는 그의 의중을 눈치채고는 철벽 방어를 쳤다.
“……. 남자친구 있어?”
“봤잖아요. 물랑루즈에서.”
“아! 그 남자!”
진영은 같은 남자가 봐도 강한 매력과 위압적이던 그가 단박에 생각이 났다. 그 날 수정도 계속 그 남자 얘기를 했다.
“네. 그 남자.”
향아는 진영의 표정을 보고 웃음이 났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진영의 얼굴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더라. 여자 힘들게 할 것 같아. ”
뭔 상관?
향아는 비록 정우와 냉전 중이어도 다른 사람이 그를 좋지 않게 말하는 건 싫었다.
“아뇨! 절대! 네버! 완전 보들보들해요. 겉모습이 좀…. 그래 보이죠. 하지만 나한테는 완전 순둥이인걸요. 수정이랑 넷이서 밥 한번 먹어요. 시간 잡으면 언제든 콜! ”
향아는 전화하라는 시늉을 하며 너무도 행복한 척을 했다.
지금은 민정우 생각만 해도 열불이 끓어올라 죽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아…. 그래.”
진영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기 하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는 이런 거였나?
향아는 유치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 물랑루즈에서 그녀는 진영 선배에게 마음을 보이며 매달렸었는데 이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한 남자 있으니 어이없는 질투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고마워요, 다음에 또 이런 기회 있으면 부탁해요.”
“그래.”
두 사람이 커피숍의 입구를 막 나서려는데 정우가 그들 앞을 막아섰다.
"정우 씨!"
향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기도 했지만 반가움이 몰려들었다.
일부러 그동안 그를 피했지만,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어느새 미워했던 일보다 그리움이 더 많이 차지할 만큼 그가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여기서 일 있었어?”
향아는 반가움으로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만난다. 어쩔까?
자신과 그런 사랑을 나누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남자와 만난다는데 그런 그녀를 보게 되면 어쩔까?
그래도 자신의 행동 때문에 홧김에 나갔으리라 생각하며 화는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녀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보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물랑루즈에서 그녀가 칭칭 감겨 있던 그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표정은 향아를 보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향아가 오케이 사인만 주면 이 남자는 뼈다귀에 홀린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올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화가 나 다짜고짜 그녀의 팔목을 잡고 커피숍을 나왔다.
반항할 줄 알았던 그녀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향아야…."
"선배, 나중에 연락해요!"
자기가 화난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녀는 그 남자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이건 보란 듯이 자신을 도발하는 거다.
정우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했다. 자신의 존재를 다시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저딴 녀석은 내 발끝에도 못 미쳐. 당신은 나만 봐. 나만이 당신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어!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누구도 그녀를 보고, 그녀와 웃고, 그녀를 만지는 꼴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
얼결에 당한 그녀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어딘가 상당히 낯익은 패턴에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힐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퍽!
"윽…! 이향아!"
정우는 무지하게 아파했다.
"맞아, 나 이향아야.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어?“
향아가 다시 나머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려 했지만, 그가 아슬아슬하게 피해버렸다.
“이럴 때 다짜고짜 잡아끌고 대로에서 무조건 키스하는 건 양아치라구!”
그가 피했다는 사실에 향아는 더 열이 받았다.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알겠어? 민정우!"
한 방 먹었다.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하잖아!”
“그렇지 않아.”
“진심이 안 느껴져! 그냥 마지못해 하는 사과야!”
향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막무가내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비록 자신이 당분간 연락하지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했지만, 막상 그렇게 하니 자신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는 생각만 들고 서운했다. 이런 마음도 억지인 걸 아는데도 자신의 마음이 그랬다.
“하아….”
정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딴 놈이었으면 그냥 데리고 나오는 거로 끝났을 텐데 그때 그놈이라는 걸 안 순간 눈이 돌아 버린 것이다.
질투심에 미쳐 날뛰는 놈들은 죄다 한심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그 최고봉에 있는 꼴이다.
“심각한 척….”
“양아치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
좀 더 쏴붙이려던 향아는 그가 기운 없이 중얼거리자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 내가 정말 한심한 짓을 했어.”
"진짜야?“
말없이 끄덕이며 향아를 애처롭게 보는 정우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다시 한 번 뚱땡이라고 해봐. 그때는 확실하게 눌러 버릴 테니까.”
정우는 그녀를 꼭 안았다.
“미안해. 정말이야. 다시는 그런 바보짓 안 해.”
그녀가 화가 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받아주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는 어쩌면 그녀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그 시시한 사랑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진짜 다음부턴 국물도 없어….”
그의 품에 얼굴이 묻혀서 웅얼거리듯 소리가 나왔다. 그녀의 말에 그가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
정우는 그녀가 일을 끝마칠 때쯤 가게로 데리러 왔다. 향아 친구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마도 향아가 친구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게 분명하다.
“언제 같이 한 번 술 마시죠?”
지금 당신의 멱살을 잡아 던져 버리고 싶지만, 향아를 봐서 참아요. 다음 기회에 긴 대화를 나눠봅시다. 라고
그녀의 눈이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향아랑 시간 정해서 보시죠.”
정우가 예의 바르게 말하는 중에 향아가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왔다.
“나중에 전화할게. 먼저 간다!”
향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가자 민영은 태진에게 오늘 특급칭찬이라도 해줘야겠다 싶었다. 아까 낮의 그 뜬금포 전화가 윤태진의 귀여운 작전이었다니.
***
식사를 마친 후 정우는 향아를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가 와인을 마셨다. 별말이 없어도 편안한 시간이었다.
영화 채널에서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는데 갑자기 그가 그녀를 안아왔다.
"저기 나…. 그러니까…."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었다.
"그냥 안고 있고 싶어서 그래.“
그는 향아를 곰 인형 껴안듯 그렇게 껴안고서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 그녀의 목에 코를 비벼대며 만족스러운듯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긴장했던 그녀도 차츰 그의 품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당신, 그 커피숍에는 어떻게 온 거야? 혹시 거기 나 있는 거 알고 왔어?"
문득, 그가 갑자기 그곳에 나타났던 것이 궁금해져 그에게서 벗어나며 물었다.
정우는 태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깔깔깔~ 당신 태진이한테 당한 거야! 민정우가 그런 수에 속아 넘어가다니!"
"이향아니까…."
향아는 재미있어하며 그곳에 있었던 이유를 말해주었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였어. 참고로 더 말해주자면 내가 왜 진영 선배한테 반했었는지 모르겠더라. 난 진영 선배가 아니라 그냥 사랑이….”
향아는 문득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신은 진영 선배가 아니라 단지 사랑이 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 상태에서 진영 선배라는 그럴듯한 대상이 나타났고 덥석 물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양수정이라는 사랑의 장애물까지 나타나 줘서 더욱 애가 탔던 것 같다.
“사랑이 뭐?”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그가 되물었다.
“…. 진영 선배 사랑싸움했나 보더라구.”
“뭐야? 지금 그놈 생각해? 내 품에 안겨서?”
정우가 다시 버럭 하자 향아는 몸을 뒤로 빼며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야말로 뭐야?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러자 정우는 향아를 다시 끌어안았다.
“아니. 그래도 다시 그놈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해. 알았지?”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정우의 품에 안겨 그의 규칙적으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5분만 더 있다가 일어나자. 10분만..15분... 그러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
“어.. 음... 어….”
방이 좀…….어라? 자신의 방이 아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아침인데 여기가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차에 어제 일이 생각났다.
세상에…. 민정우의 집에서 자다니…!
게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정우가 그녀를 안고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상의를 벗은 상태다.
그의 근사한 근육이..미쳤어? 지금이 군침 흘릴 때야? 언제 침대에 누운 거야? 아주 편안하게 숙면을 취했어! 잠이 잘도 왔구나….
장하다. 이향아….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풀고 일어나려는데 정우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향아는 다시 원위치가 되었다.
"모닝 키스도 안 해주고 내빼려구?"
그녀는 정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그의 탄탄한 가슴이 꽉 들어찼다. 난감하게도 침이 고여 황급히 시선을 올리자 이번에는 잔뜩 졸린 눈에 웃음을 가득 담은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와 턱에 푸릇하게 난 턱수염이 평소 차가워 보이는 그를 귀엽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까칠해…."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올라가 그의 턱을 만졌다. 까슬까슬한 느낌이 의외로 좋았다.
정우는 그런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혹시 자다가 침이라도 흘렸나? 혹시 눈곱이라도??? 그래! 이단 콤보구나! 침에, 눈곱에…. 설마…. 잠꼬대까지 한 걸까? 삼단 콤보야?
향아의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침도 닦고 싶고, 눈곱도 떼고 싶은데 어쩌지?
"쌍꺼풀이 풀렸어."
쌍꺼풀…. 다행이다…!
"잘 풀려. 이번에 수술해 버릴까? 누구 눈처럼 해 달랠까?"
"하지 마. 없으니까 귀여워. 요술 쌍꺼풀이잖아."
그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까칠한 턱을 향아의 얼굴과 목에 비벼댔다.
"꺄! 따가워!"
그녀가 움츠렸지만, 그는 더 신나했다.
"그리고 살도 빼지마.“
“살 얘기 꺼내지도 마!”
향아는 정우의 팔을 아프게 꼬집었지만 그는 살짝 미간만 찌푸렸을 뿐이었다
“키도 크지 마…. 그냥 이대로 있어…."
그의 장난스럽던 입술이 점점 열정을 담고 여기저기 자국을 남기고 다니더니 그녀의 옷 위로 가슴에 키스했다.
"…. 정우 씨……."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 당신 때문에 나 어제 제대로 못 잤어…."
"출근해야지…."
정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나도 당신을 원해' 뿐이야. 다른 말은 안 들을래…."
투정을 부리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정우를 보던 향아는 그의 눈동자까지 내려온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꿔 그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천천히…. 그를 맛보듯이 혀로 입술 윤곽을 따라 그렸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얼굴을 살짝 돌려 그이 귓불을 깨물었다. 그의 큰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출근해야 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간간이 신음소리만 들려왔다.
***
“젠장…. 도대체….”
기석이 부쩍 까칠해진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에는 당혹감과 절망감이 어려있다.
정우와 기석은 밤이 늦도록 그들의 사무실에서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뭔가가 아주, 상당히, 찜찜하다. 사업을 시작하고 여러 번의 고비를 넘겨왔고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내가 실수한 거야. 이번엔 확실했는데!”
기석은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정우가 집안 사업으로 이쪽으로 신경을 제대로 못 쓰는 동안 자신이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렇게 치면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쓴 부분도 있어. 네 탓이 아니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잦아.”
정우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세 번째야. 우리보다 더 싼 곳에서 치고 들어왔다고 쳐도 세 번 연속이라니 뭔가 이상해.”
“그럼 넌 누군가가 장난을 치기라도 한다는 거냐?”
“그렇지 않고서야 막판에 연속 세 번을? 말도 안 되잖아.”
“그렇다면…. 나도 이건 확실하지 않아서 나도 입 다물고 있었는데 삼송이 얼쩡거린다는 소문이 돌긴 했어.”
기석의 말에 정우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이번 일은 상당히 큰 건이었고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기회였다. 아무리 큰 건 세 건이 무산 되었다 해도 사무실이 휘청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타격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경제적 타격보다는 정신적 타격이랄까? 민정우가 이 정도로 무너질 유리 멘탈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당연히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삼송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우리가 무슨 위협이 된다고?”
“유리야.”
“유리 씨? 유리 씨가 삼송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삼송 회장님 질녀야.”
“뭐?!”
기석은 턱이 빠질 듯 놀라고 말았다. 한유리의 배경이 그 정도였다니…!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해결하면 돼.”
정우의 단호한 대꾸에 기석은 묘하게도 안심이 됐다. 하지만 금방 걱정에 휩싸였다. 정우의 개인적인 능력도 믿고, 그의 집안 배경도 탄탄하지만 삼송그룹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띠링~♪
향아의 문자였다.
<보고 싶어요…. 함께 걸어요>
요즘 아버지 회사와 자신이 사무실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녀의 얼굴도 2주일이 넘도록 보지 못했다. 날카로워진 상태에선 그 누구라도 보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나마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시원찮았다. 그녀의 문자를 보는 순간 미소가 번졌다.
***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
두 사람은 손을 잡고서 따뜻한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걷는 길이지만 평온하고 좋았다. 2주일 만의 만남임을 아는지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정우의 손에서 왠지 찐한 그리움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향아는 행복해졌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 비해 요즘 정우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그는 별일 아니라는 항상 같은 대답이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피로감을 지워 주고 싶다. 향아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불이 환한 카페 앞의 화단에 앉혔다.
"여기 앉아봐. 그리고…. 이렇게…."
향아는 자신도 옆에 앉은 다음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뜻밖에 그녀의 행동에 정우는 놀란 듯 몸이 굳어졌었지만 금세 풀리며 편하게 기댔다.
그러자 그녀는 정우의 손을 잡았다.
"…. 쉬어. 그냥 아무 생각 말고 눈 감아."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 사람은 작지만 따뜻한 어깨를 빌려주고 다른 또 한 사람은 그 어깨에 길었던 하루를 올려놓고 쉬었다.
아…. 어깨 아프다.
포용력 백만 평짜리 여자 친구처럼 폼 내느라 어깨를 빌려주긴 했지만 이렇게 아플 줄이야…. 너무도 편하게 있는 그에게 머리를 들라 할 수도 없고…. 쥐가 날 것 같다.
어깨에도 쥐가 나나? 코에 침이라도 바를까?
정우는 이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 요즘 쌓일 대로 쌓인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고 행복함이 느껴져서 이 순간을 포기하기가 싫었다.
"나…. 백수 되면 먹여 살릴 수 있어?"
"뭐~~~?!"
깜짝 놀란 향아는 몸을 빼 버렸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정우도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화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괜찮아? 미안…. 너무 놀래서….”
향아는 당황하며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 주었다.
정우는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다.
“나 백수 되면 그래 줄 수 있어?”
헐…. 농담 아냐? 진담이었어!
그녀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정말? 회사 망해? 그럼 우리 태진이는 어쩌지?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 어떡해? 괜찮아?"
그는 재킷에 묻은 흙을 마저 털어 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찡그리지 마. 더 못생겨지잖아. 안 망해. 그냥 좀 신경 쓰일 일이 있어서 그래."
정우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문지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하지 말고. 진짜 뭐야?”
향아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가만히 보던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당겨 가볍게 키스를 했다.
쪽!
향아는 고개를 쑥 빼내어 양손으로 그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이따구로 얼렁뚱땅 넘어 가려구!"
“아얏!”
정우는 제법 아픈지 볼을 연신 문지르며 향아를 째려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고는 세상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풀리지 않는 일은 없대."
"누가 그래?"
"드라마에서 봤어. 폼 나는 대사지? 당신도 그럴 거야. 난 당신 믿어."
향아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근거도 없는 정체 모를 믿음을 머리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알아서 보내고 있었다.
정우는 향아의 엉뚱한 대답에 발가락 끝이 짠 해지며 다시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사실 향아에게서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막막했다. 기석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 나니 다시 힘이 생겨났다.
"이향아, 우리 결혼하자."
정우 자신도 생각지 않았던 말이 흘러나왔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아마도 최근 들어 가장 하고 싶던 말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하자, 향아야.”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어?"
잘못 들었다. 요즘 들어 나이 탓인지 청각에 장애가 생기고 있다. 그것도 너무 자주.
"어딜 가도 나만큼 괜찮은 남자 찾아보기 힘들어."
진짜다! 분명 제대로 들었다. 민정우가 그녀에 프러포즈란 것을 한 것이 분명하다.
정우는 자신과 같은 것을 바라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단단한 손으로 내려갔다.
대답을 해줘야 해…. 뭐라도 말을 해!
그래서 그녀는…….
뛰었다…….
차도로 뛰어들어 택시를 세워…….
황당해 하는 그를 뒤로 한 채…….
집으로 도망쳤다…….
***
<뭐? 왜? 도대체 뭔 짓이야?! 이런 미친년!>
향아는 집 전화기 너머로 심하게 흥분해서 방방거리는 민영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행여나 흥분한 정우가 쫓아 올까 봐서 집에 없는 척하기 위해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방 안에 있다. 게다가 철두철미하게 핸드폰 전원도 꺼놨다.
"…. 왜는……. 할 말이 없으니까…."
<기가 막혀서 원…. 내가 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너 진짜 또라이야?>
"정우 씨…. 많이 화났겠지?"
<그걸 말이라구 하니? 프러포즈 받고 도망친 여자는 동서고금, 온 우주를 털어도 너뿐일 것이고, 프러포즈하고 새 된 남자도 유일무이하게 민정우뿐일 거다. 다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보면 넌 그냥 미친년이야.>
"나도 그런 행동한 거 후회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좋으면 좋다고 그러고 싫으면 싫다 그러지!>
"싫다. 그러면 완전 끝나버릴 것 같고…."
<그럼 좋다 그러지…! 혹시 저번에 내가 정우 씨 바람둥이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거야? 향아야, 난 니가 조금 더 신중했으면 하는 생각에 했던 말이야.>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
<널 어쩌면 좋으니….>
“…. 그땐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 ”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지, 민정우라면 껌뻑 좋아 죽으면서!>
"결혼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난 결혼 타입이 아니라구."
향아는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민영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정 이도 저도 아니고 당황스러웠던 거라면,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 그랬어? 솔직히 걱정돼. 아주 많이.>
"뭐가?"
<향아 너, 지금까지 남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온다 싶으면 항상 몸을 사렸잖아. 그래서 좋은 사람 놓친 적도 있어. 그건 너도 인정하지?>
"내가 언제?"
향아는 시치미를 뗐지만, 그녀를 10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본 민영의 말이 옳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결국 그녀 자신이 형편없는 겁쟁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향아야….>
"이만 자. 나도 잘래. 낼 가게 문 열려면 일찍 자야지…."
민영과 이야기를 하면서 혼란스런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더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창가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가 차에 기대어 그녀의 집 창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한 주제에 그녀는 그가 와 준 것이 반가웠다. 이런 그녀의 마음이 얄밉지만 그래도 반가운 건 사실이다.
“약았다. 이향아. 너 진짜 재수 없어.”
향아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
정우는 화도 나고 어처구니가 없어 여기까지 따라 왔지만,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불도 켜지 않고, 전화기도 꺼놓은 상태지만 향아가 지금 창가에서 자신을 보리라는 건 자신의 사무실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그녀의 대답을 이미 반쯤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라 나머지 대답을 듣기가 싫었다.
오늘은 봐 준다. 이향아. 푹 자라.
결국, 그는 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향아는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도 한참이나 창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화가 엄청났을 것이다. 다른 때는 별생각 없는 농담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가 진심임을 알면서, 아니 알아서 피해버렸다.
민정우 당신은 모를 거야. 내게는 결혼하자는 말이 제일 기쁜 말이면서 제일 무서운 말인 거.
***
탁!
"그래가지고 잔이 깨지겠냐? 아예 던져라,"
"그렇지 않아도 성질 난 애를 왜 자꾸 긁냐?"
"송기석…. 넌 아무래도 전생에 우리 엄마였나 보다. 어찌나 잔소리가 심하신지…."
"너 같은 자식 있었음, 난 이미 화병으로 죽었다."
정우는 준희와 기석의 다툼에는 상관없이 계속 잔을 비워댔다.
"혹시 공사건 때문이냐? 소문엔 삼송 측에서 손댔다고도 하던데?"
준희도 그 소문을 알고 있다니! 소문이 아니라 확신이지만 말이다.
"소문 한번 빠르네."
기석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 바닥이 그렇지……. 한유리가 드디어 실력 발휘하는 건가요?"
준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정우가 그를 노려본다.
“뭐야? 준희 너도 유리 씨 정체 알고 있었어? 나만 몰랐던 거야?”
기석이 억울해했다.
“알면, 진즉에 오더라도 받으려고 그랬냐”
“이 자식아, 그게 아니잖아!”
준희가 깐죽대자 기석이 버럭 한다.
"그 일이 신경은 쓰이지만, 문젯거리는 되지 않아."
정우가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삼송이 코딱지만 한 우리 사무실을 건드리는데 문젯거리가 아니라구?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상상도 안 된다. 그나저나 삼송이라면 전국 10대 그룹 중 하나야. 그런 덩치가 아무리 손녀가 이뻐도……. 어이없다."
기석은 정우의 대담함에 고개를 저었다.
"……. 물론…. 너 믿어. 네가 어디…. 만만한 녀석이더냐….“
기석은 다시 정우를 위로했지만, 설득력은 별로 없었다.
"유리 걔는 생긴 거나 하는 짓은 여우인데, 가끔 그렇게 맹꽁이 짓을 하더라. 머리가 나쁜 거야. 난 머리 딸리는 애들 싫어."
준희는 다시 기석과 정우의 잔을 채우며 끼어들었다.
"차라리 맹꽁이 짓이 나아."
퉁명스러운 정우의 반응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기석은 뜻 모를 정우의 반응을 의아해했다.
"향아 씨 얘기네."
역시 준희의 눈치는 예술이다.
"널 이렇게 열 받게 만들 사람 그 여자 빼고는 없지. 햐~ 이향아 씨는 갈수록 맘에 들어."
"향아 씨랑 싸우기라도 한 거냐? 틀림없이 네가 성질 부렸지? 왜 그랬냐? 사무실 일 때문이라면 네가 티를 내면 안 되지. 향아 씨가 뭘 안다고. 좀 잘해줘라. 처음에 너무 애지중지한다 했어. 설마 너…. 벌써 질린 거야?"
기석이가 다짜고짜 정우를 나무라고 나섰다.
“송기석. 왜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잖아도 짜증 나는데 왜 내가 당연히 못됐다고 되는 거지? 누가 누구한테 당한 건데!
정우는 정말 화딱지가 나고 억울했다. 사무실 일보다 향아와의 일이 더 미치도록 분했다.
"내가 보기엔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은데?"
준희가 뻔하다는 듯 재미있어한다.
얄미운 박준희! 저 자식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다. 아니. 악마다! 그보다 더한 건 이향아다!
"민정우한테 이향아는 아까워도 너무 아깝지."
"…."
"그런 농담 하지 말라 준희야. 정우 상태 봐 가면서 하라구."
기석이가 너무 재미있어하는 준희를 보며 슬쩍 눈치를 줬다.
"난 진담이야."
준희는 뜻밖에 정색을 했다. 그러지 정우의 표정도 싸늘해졌다.
"박준희, 전에 내가 말했었지? 죽고 싶으면 그래 보던가."
정우는 준희를 매섭게 쬐려 보고는 부글거리는 속으로 계속 술을 들이부었다.
“그래, 준희 너 그만해. 지나쳐. 자꾸 그러면 나도 화낸다.”
기석이 정색하자 준희는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준희 저 녀석은 저놈의 재미 찾다가 언젠가는 큰코다칠 거다.
"정우야, 그만 마셔!"
그새 정우가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기석이가 말리고 나섰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고, 결국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이 녀석 왜 이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야, 정신 좀 차려. 일어나 봐.”
기석이가 정우를 흔들었지만 이미 그는 기절 상태나 마찬가지라 소용이 없었다.
“찬물을 부어도 소용없을 거야. 민정우 지킴이 불러야지.”
준희가 정우의 핸드폰 0번을 누르자, 예상한 번호가 뜨자 그의 얼굴엔 시큼한 미소가 올라왔다.
***
♬♪♬~~♬♪♬~~♪
“엄마야! 깜짝이야! 놀래라!”
핸드폰을 켜자마자 정우의 번호가 뜨자 깜짝 놀랐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받아보니 준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향아 씨, 저 준희예요. 잘 있었어요?>
"준희 씨…. 잘 지냈어요?"
안도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솔직히 실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정우의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섭섭하네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다니….>
“하하하하…. 그렇지 않아요…. 그냥 뜻밖이라. 조금 놀랐달까요?”
<내가 잘 지내는지 그렇지 못한 지는 직접 보러 와요.>
"다음에 꼭 들릴게요…."
<담이 아니라 지금 와 봐요. 평생 가도 못 볼 구경거리가 있어요.>
준희는 궁금증만 가득 떠안기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우의 전화기로 한 걸 봐서는 그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데….
싸움이라도 벌어졌나? 혹시 나한테 차였다고 울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결국 호기심에 진 향아는 준희의 가게로 향했다.
준희의 가게는 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님들의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편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때처럼 자신은 거지처럼 입고 왔다. 정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마음이 급했다.
들어가서 정우 일행을 찾는데 준희가 구석 테이블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곳에는 정우가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정우 씨!“
놀란 향아가 한걸음에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정우 씨! 정우 씨….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그를 흔들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다.
준희는 걱정돼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향아가 움직이지도 않는 그가 걱정되어 준희를 쳐다보았다.
"아녜요. 이 녀석이 오늘따라 술을 과하게 마셨어요. 술 냄새가 문 앞에서부터 났을 텐데. 냄새 안 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면? 지금 민정우 술에 담긴 거야?
“이 녀석 이러는 거, 중1 때 이후론 첨이에요."
중1…. 그때면 초등학생에 가까운 시기잖아? 하여튼 잘 났다, 민정우…….
향아는 인사불성으로 잠이 든 그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정우 씨…. 정우 씨…."
그녀가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자 정우가 한쪽 눈을 힘겹게 살짝 올렸다.
"어_________________라? 이게 누궁……. 시오?"
아주 많이 취했군……. 말은 늘어지고 혀는 꼬여 있다.
“일어나요. 집에 가자.”
향아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자신보다 훨씬 큰 그를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준희 씨, 좀 도와주세요.”
향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향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설마 취한 척?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니다.
"이…. 향….아…. 너 뭐….야? 왜…. 왜…."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던 그는 결국 그녀의 품 안으로 고꾸라지더니 쌔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향아는 겨우 그를 버티고 섰다.
많이 속상했구나…. 나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이렇게 마셨을까?
향아는 자신이 한 짓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왜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그런 말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바보! 멍청이! 등신! 쪼다!
"이런…. 이 녀석 이렇게 쉽게 뻗어버리다니…. 재미없네~ 좀 더 빨리 오지."
준희는 아쉬워하며 향아에게 미소를 짓는다.
“으쌰~ 일루와라. 이놈아.”
그리고는 향아에게 기대어 있는 정우를 자기 쪽으로 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하아……. 향아 씨는 그냥 먼저 집에 가요. 이 녀석은 제가 집에 던져 놓을게요."
“어? 향아 씨 왔네요?”
“안녕하세요….”
기석이가 다가오며 아는 척을 하자 향아도 인사를 했다.
“됐어. 준희 너는 장사해야지. 이놈은 내가 들고 갈게. 하아…. 무슨 술을…. 어유!”
“그래. 그럼 부탁한다. 그리고 향아 씨. 다음에 꼭 와요.”
“네.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향아가 준희에게 인사를 하는 틈에 기석이가 정우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 자식아, 다리에 힘줘. 나 힘들어!”
기석이가 정우를 보며 투덜대자 향아도 정우의 재킷을 챙겨 들며 일어섰다.
"같이 가요."
***
택시를 막 타려는데 준희가 따라 나와 향아를 불러 세웠다.
“향아 씨, 잠깐만요!”
“네?”
“한가지 당부 말이랄까…. 제가 원래 이런 놈은 아닌데 이번에 정우 놈 보니까 아주 조금 불쌍해져서요.”
“무슨 말을…?”
“민정우,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네? 저는 그런…. 그러지 않았는데요….”
향아는 찔렸지만 아닌 척했다. 따지고 보면 ‘괴롭힌’ 건 아니다. 좀…. 짜증 나게 했을 뿐이지…. 화를 돋웠을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다행이구. 저 녀석,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어요. 순진한 게 아니라 먹통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한없이 센 놈은 아니니까 살살 다뤄주세요.”
“……. 네….”
“그럼 조심해서 가요.”
준희는 향아가 택시에 타자 차 문을 닫아 주었다.
***
술 취해 늘어진 그는 어찌나 무겁던지…. 그를 오피스텔로 데려왔을 때는 기석이나 향아나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향아 씨,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전 좀 더 있다가 가려구요……. 그래도 되겠죠?"
“하하하…. 물론이죠. 저보다야 향아 씨가 옆에 있는 걸 저놈도 더 좋아할 걸요. 그럼 대신 수고해 주세요.”
“네. 그럼 먼저 가세요.”
“…. 저….”
그런데 기석이 선뜻 가지를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슨…. 저한테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설마…. 이 사람도 나한테 민정우를 살살 다뤄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정우가 요즘 사무실 일 때문에 예민한 상태예요. 혹시나 향아 씨한테 짜증을 내거나 예민하게 굴 수도 있는데 이해해 주세요.”
아…. 맞아. 그때 민정우가 백수가 되면…. 이라는 말을 했어.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나한테 말을 안 하고 혼자 끙끙댔어.
“정우가 향아 씨 많이 좋아하니까. 좀 봐주세요.”
“무슨 일인지 말해 주세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금방 해결될 거라서.”
“말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정우 씨가 이유 없이 짜증을 내도 알아서 대처하죠. 네?”
주눅이 들거나, 순진한 모습만 봐 왔는데 의외로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리가 관련된 일인데 껄끄러운 얘기다.
역시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준희 씨라면 알려 줄 것 같아요.”
향아가 금방이라도 갈 듯 일어섰다.
“잠깐만요…. 급하시네….”
기석은 향아를 잡았다. 차라리 자기가 말해 주는 게 낫지. 준희 녀석이라면 어디까지 말할지 불안 불안하다.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진짜 별거 아닌데. 사무실 운영하다 보면 가끔 일어나요…. 저기 뭐냐…. 계약하기로 했던 일이 삐끗해서 좀 날카로워진 거죠. 금방 해결될 거예요.”
자신의 말을 들으며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향아를 보며 기석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그런 표정 지을 만큼 심각한 거 아니니까……. 아무리 큰 회사도 이런 일 자주 있어요.”
“네. 알았어요.”
“알았다면서 표정이 왜 그래요?”
“…. 서운해서…. 미안해서….”
“에? 뭐가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서운하고 왜 미안합니까?”
금방이라도 울 듯한 향아를 보며 기석은 당황했다.
“내가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힘들다는 말도 제대로 않았을까요? 나는 무슨 일이 있다는 거 알면서도 내 생각만 했어요….”
“아~ 이러라고 말한 거 아닌데!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아뇨. 제가 더 미안하죠. 죄송합니다.”
“왜 저한테 미안해해요? 정우가 알면 저 진짜 혼나요. 그러니까 그런 소리 마요. 네? 향아 씨?”
기석은 자신의 입을 찢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향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더 불안하다.
“향아 씨?”
기석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만 가세요. 너무 늦었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죄송해요. 걱정 말고 가세요. 아침에 전화할게요.”
“…. 네. 그럼 가볼게요. 수고해요. 향아 씨.”
향아는 마음을 추스르며 기석을 보냈다.
향아는 기석을 내보내고 정우의 신발과 넥타이, 벨트를 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잘도 잔다.
“왜 아무 말 안 했어? 진짜 내가 못 미더웠던 거야?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걸핏하면 엉뚱한 소리나 해대고. 기껏 결혼하자고 했더니 도망가고…. 하나도 도움도 못 되는 주제에 오히려 화나게만 했어……. 진짜…. 너무너무 미안해…. 미안해 정우 씨….”
셔츠 단추를 풀던 그녀는 바닥에 앉아 침대에 팔을 괴고서 그를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멋진 남자야. 어쩌다가 내게 온 걸까?”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그의 얼굴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넓은 이마를 지나 날렵한 코로, 기다란 속눈썹, 수염이 푸르스름하게 오른 턱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입술, 이 입술은 그녀에게……. 향아는 머리를 저으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잡았다.
정신 차려! 변태 같으니! 지금 술 취해서 자는 남자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향아 넌 지금, 반성해야 하는 거라구! 침 흘리지 말고!
그는 음식물이 입가에 묻을 때면 꼭 자기가 직접 닦아 주고, 안경을 벗어 놓고 깜박할 때면 꼭 챙겨 주고, 사랑을 나누고 나면 항상 껴안아 주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토닥여 주기도 했다. 일어나면 항상 내려다보면서 잘 잤냐고 물었다.
민정우는 그녀와 만나는 동안 그녀만을 보는 남자였다. 그걸 그녀도 잘 알았다. 알지만 항상 불안했다.
"미안해…. 정우 씨…. 아까 내가 바보짓 한 거 알아. 당신더러 이해해 달라는 소리 안 할게. 그냥….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는 별나게 예쁘지도…. 그렇다고 배경이 근사하지도 않아. 난 게으르고…. 우유부단하고….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성격도 나빠…. 당신과 있을 때는 얼마나 참는지 몰라. 이런 결점투성이인 내가 당신과 행복할 수 있을까? 당신이 이런 내게 실망해 가는 모습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게 겁이 나……."
정우가 갑자기 속눈썹을 움찔거리자 바짝 긴장했던 그녀는 다시 그가 깊은 잠이 든 듯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자 긴장을 풀었다.
“앞으로는 내가 더 용기를 낼 게. 당신이 너무 좋아.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래 줄 거지? 혼자 힘들지 않게 내가 더 씩씩해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는 거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흘러내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그리고 입술을 내려 그의 입술을 찾았다.
윽…. 술 냄새…. 얼마나 마신 거야?
그녀는 그의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뽀뽀는 담에 해 줄게. 민정우."
눈부신 아침 햇살을 저주하며 깨어지는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향아였다.
분명 술기운에 그녀가 준희의 가게로 자신을 찾으러 왔던 걸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도 분명히 같이 왔었다.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뭐라고 했더라…. 으…. 머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탁 위에는 콩나물 북엇국이 차려져 있었다. 그녀의 작품이겠지. 한 입 국물을 떠먹자…….
아! 이래서 2% 부족한 맛이라고 했구나. 정확한 표현이다. 북어가 들어가면 맛이 안 나기도 힘든데….
그래도 그는 콩나물 북엇국을 꾸역꾸역 다 먹은 다음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출근을 했다.
할 일이 많다. 삼송에도 가봐야 하고……. 향아를 잡아 앉혀놓고 이야기도 해야 한다.
***
아침부터 실장에게서 진하게 풍기는 술 냄새에 직원들은 낯설어하면서도 지뢰를 밟는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찬바람이 불까 봐 모두가 숨소리마저 내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뜻밖에도 실장은 그 누구에게도 성질을 부리거나 올바른 꼬투리마저도 잡지 않았다. 심지어 실책을 범했음에도 다음번에는 조심해달라는 간단한 말만 덧붙였을 뿐이다.
그는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 향아의 가게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커다란 벽 유리를 통해 바삐 움직이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젯밤 그녀가 무슨 말을 했지? 무엇인가를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중요한 말을 못들은 게 분명하다!
그녀를 만나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데 그녀가 배달이라도 가는 듯 종이가방을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쓸 것이지 왜 일일이 자기가 배달을 가?
향아가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은 정우였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향아도 그를 발견했다.
"정우 씨!"
그녀의 눈이 안경 너머로 놀란 토끼 마냥 된 것을 보며 그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다시 한 번 달리기할 생각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분명 용기를 낼 거라고 다짐하고 약속했는데. 또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지만 이렇게 갑자기 준비 없는 만남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못했다.
정우는 차 문을 열고 타라는 행동을 취해 보였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에 시선이 멈추자 숨김없이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배달 가는 중이거든. 나중에 전화해."
향아는 재빨리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타.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당신도 바쁠 텐데…."
정우는 엉덩이를 뒤로 최대한 쭉 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려는 티를 내는 그녀 때문에 애써 누르고 있는 화가 치솟기 시작했다.
"내가 태워줄 수도 있어. 당신 맘에 안 들 거야."
그의 표정이나 말투는 그가 결코 곱게 태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향아는 하는 수 없이 구시렁거리며 그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거리도 안 되는데…. 걸어가는 게 운동도 되고…."
하지만 그녀가 차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자마자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닫히는 바람에 말꼬리마저 잘라먹어 버렸다.
정우는 분명 어제 일로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그래…. 더 이상 건드리지 말자…. 어제 그렇게 반성을 해놓고는 어쩜 다시 이렇게 도로아미타불이니? 구제불능이다. 어제 한 반성 오늘부터 실천하자!
그녀는 다짐하며 삭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세종 문고로 가자."
"……."
음…. 역시 분위기를 풀기에는 너무 약한 대사였어. 그럼….
"차로 가기에는 심하게 가깝지?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같이 걸을까? 어제저녁처럼…."
천하의 멍청이 이향아. 필사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려도 시원찮을 기억을 굳이 굳이 자기의 입으로 다시 되새겨주다니!
향아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아 버리고 싶은 걸 참았다.
"……."
그녀 얼굴에 구멍을 낼 듯 쳐다보는 정우의 화난 눈빛에 향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할 말 있으면 해…."
"당신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야…."
싸늘한 말투와 표정을 보니 정말 조를 것 같다. 향아의 손을 슬그머니 목으로 올렸다.
“생각보다 굵을 텐데…….”
라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미안….”
정말 화난다. 자신의 프러포즈를 그렇게 거절하고 그 흔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계속 엉뚱한 소리에 도망갈 궁리만 한다.
그는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맘을 꾹 눌렀다.
"나한테 해야 할 말 있지 않아?"
있지…. 아주 많지…. 다만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문제지….
맘 같아서는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원하는 답을 하기 전에는 차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왜 그녀에게는 결혼하기 두려운 그럴듯한 극적인 이유가 없단 말인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상처를 받았다던가…. 너무도 아픈 사랑에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던가…. 자신이 알고 보니 외계인이라던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건 당연하고, 당연히 설득도 되지 않을 변명이다.
하나도 진실이 아닌데 어떻게 설득이 된단 말인가?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 프러포즈…. 정말 고마웠어…."
"그래. 몹시도 고마워하더군.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겠더라. 그게 당신 대답이야?"
기막혀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그의 목소리는 향아를 안절부절못하고 잔뜩 긴장하게 하였다. 정우의 말에 수긍한다면 그는 그대로 끝내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이대로 그를 놓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못난 면을 보여주기가 망설여졌다.
실망하고 돌아서 버리면 어떻게 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를 못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 나한테 화를 내도 이렇게 보고 있는 게 더 좋은데….
"정우 씨,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더 들을 말? 갑자기 우리의 장밋빛 미래가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그가 눈앞에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보이는 듯 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과장되게 손을 펼쳐 보였다.
빈정거리는 게 분명한 그 모습에 향아는 답답해졌다. 여기서 더 회피하면 문제만 쌓일 뿐이다. 최대한의 진심과 최소한의 진실만이라도 말해야 한다.
"제발….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돼? 부탁이야. 나도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
그녀는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애원이라는 것을 했다. 그 약발이 들었음인지 그의 표정이 약간 풀리는 듯했다.
"우리 이대로 있자. 지금 결혼이라는 말이 오가기에는 만난 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지금이 좋아. 좀 천천히 하면 안 될까?"
향아는 그의 팔을 두 손을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그녀의 손을 떨치며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우 씨!”
향아가 급하게 그를 뒤따라 나갔다.
그는 화가 많이 났는지 쉽게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고 한참을 딴 곳을 보며 서 있었다.
“내 말은….”
향아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가 매서운 기세로 그녀를 돌아봤다.
"그럼 왜 당신은 그 짧은 시간에 나랑 섹스까지 한 거지? 당신처럼 그렇게 쉽고 가벼운 여자가 어떻게 인간관계는 시간 단위야? 얼마나 만나면 그 대단한 결혼을 해 주실 건데?"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그녀에게 상처받은 만큼 그녀도 아프길 바랐다. 더 아프길 바랐다.
냉정하게 비아냥거리는 정우의 말과 표정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녀의 편리대로 부린 욕심의 대가였지만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해? 아무리 화가 났어도 너무 하잖아!”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래서, 뭐가 어때서? 당신도 날 우습게 보잖아.”
하지만 정우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향아는 그가 너무 미워 자기도 모르게 그의 뺨을 세게 쳐 버렸다. 자신의 행동에 놀란 그녀를 뒷걸음을 쳤다.
그래도 정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알아 둬. 난 결혼을 구걸하지 않아. 그게 당신이라고 해도 말이야."
오히려 더 매몰차졌다. 그의 그런 모습에 향아는 목구멍에 뭐가 커다란 게 걸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을 뜯어내는 것같이 아팠다.
정우가 그녀를 어쩌면 자기 생각보다 좀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랬으니 결혼 신청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기적인 짓을 참아 줄지도 모른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했나 보다.
바보같이…. 설마설마했어. 영원한 건 없는데…. 어쩌면 민정우는 영원할 거라고 기대해 버린 거야. 그래서 이기적으로 굴었어. 바보같이….
하지만 지금의 그를 보면 결혼 신청 자체가 그날의 순간적인 기분에 휩쓸려 했다가 자신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자존심 상해하는 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는 척하며 눈물을 재빨리 훔쳐냈다.
"…. 당신은…. 그러는 당신은 왜 내게 결혼하자고 한 거야?"
그의 눈동자에는 무서운 폭풍이 일 듯하더니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때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르겠군."
그런 그를 그녀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이유라는 게…. 그렇게 쉽게 잊힐 것이었다면 당신의 청혼도 별거 아니었네.“
향아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못된 소리를 해서라도. 그 말에 스스로가 상처를 입더라도 민정우에게만 이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면 뭐든지 됐다.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이렇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웃겨….오히려….내가 거절해 줘서 고맙지 않아? 당신의 그 대단한 청혼, 없던 거로 해 줄 테니 자존심 한번 구겼다 생각해. 잘 가."
이 말을 해버리면 두 사람이 화해 할 확률은 저만치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향아는 거침없이 말해버렸다.
미련 따위 끊어 버리고 싶었다. 금방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이런 남자를 위해 더 이상 미련이라는 감정을 잡고 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련은 질척거리는 짜증 나는 감정이다.
울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말을 마친 향아는, 가득 차오른 눈물이 흘러넘치기 전에 그의 앞에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안경을 벗고 눈을 세게 문지르는데 어느새 따라온 정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돌려세웠다.
“앗! 뭐….”
갑작스러운 일에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가 향아의 머리를 두 손을 꽉 잡고는 다짜고짜 키스했다.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억지 키스에 그녀의 입술이 터져 피 맛이 났지만 정우는 막무가내였다.
쫙!
그녀가 그를 겨우 밀어내고 다시 한 번 그의 뺨을 때렸지만, 정우는 너무도 쉽게 그 손을 잡아 둘 사이에 붙들어 두고는 밀어붙였다.
"정…."
그를 부르느라 입을 열자 그는 재빨리 혀를 들이밀어 넣었다. 정우의 키스는 그녀가 숨이 가빠 올 때쯤에야 끝이 났다.
정우는 매정하게 그녀를 밀듯이 떼어냈다. 향아의 입술에 맺힌 피를 보는 그의 눈이 아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는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길가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흐흑..흑..윽..윽..흑.. 흑으어어엉엉….”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쳤다. 대낮에 대로변에서 그녀는 울고 말았다. 큰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어버렸다.
누가 보든 말든 보이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울어도, 울면 울수록 더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타버리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심장이 타고 있는데도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
끼이이익!!!!
속력을 높여 거칠게 차를 몰던 정우는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들을 칠 뻔 하고서야 급정거를 했다. 그 반동으로 미처 안전벨트를 했어도 그는 핸들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눈앞이 까매지며 머리가 몽롱해졌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놀란 사람들이 그를 향해 욕을 해대는 것이 보였지만 눈앞에 막이 낀 듯 흐릿해 보이기만 했다.
차츰 시야가 맑아지면서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좌절감으로 핸들을 몇 번이고 내리쳤다.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에 사람들이 그를 노려보자 정우는 그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시비를 걸고 싶을 정도였다.
“망할 이향아같으니……!”
자신의 마음을 단박에 거절한 그녀에게 못 견디게 화가 났다. 그녀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자신처럼 그녀도 언제나 같이 있기를 바란다고 믿었다. 그녀의 눈빛이, 행동이, 말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다 거짓이었다니! 그런 거짓 된 것들에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갔다. 자신을 속였다. 그녀가…. 그토록 자신을 흔들어 놨던 그녀가 너무도 쉽게 자신을 짓밟아 버렸다.
***
며칠 전 서점으로 배달을 갔던 향아는 갑자기 생리가 시작됐다고 바로 집으로 간다며 민영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이틀 정도를 생리통이 심하다고 가게에도 나오지를 않았다.
걱정되어 찾아가려 하자 조용히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하는 통에 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온 향아는 정말 반쪽이 되어 있었다. 정우의 프러포즈 때문인 게 분명하지만,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터에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태진에게 정우의 근황에 대해 물어봤지만, 민정우는 별반 다른 게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향아랑 싸우고 나면 사무실이 완전 얼음장이었거든. 그랬는데…. 너무 무난해. 그냥 평소랑 똑같아.”
싸운 것 같기는 한데 양쪽의 반응이 너무 다르니 혼란스럽다.
“왜 그렇지? 왜 반응의 강도가 달라졌지?”
"신경 꺼. 사랑싸움하는 거야. 남자와 여자가 만났는데 조용하면 그게 이상치!"
태진이 의외로 민영을 다독였다.
"정말 그럴까?"
"넌 너무 오랫동안 향아 언니 노릇을 해 온 게 탈이야. 걔도 우리랑 동갑이라구. 만약 둘 사이에 나쁜 일이 있어도 그건 둘이 해결할 문제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
항상 누나 같고 언니 같은 면이 더 많은 민영이지만 가끔은 너무 가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면 철부지 같은 태진이가 브레이크를 걸어주기도 한다.
"맞아…. 내가 너무 걔를 막냇동생 취급을 했나 봐."
"그래. 향아도 정말 힘들면 우리한테 털어놓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냥 지켜봐 줘. 친구라고 다 알아야 하는 법은 없잖아.“
"우와~윤태진 씨! 당신이 그런 말을? 오빠 멋져~"
민영은 장난스럽게 태진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자 태진도 그녀의 장단에 맞춰 느끼하게 답했다.
"우리 간만에 찐~~한 뽀우뽀나 한번 할까?"
그는 민영의 얼굴 이곳저곳에 쪽쪽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 댔다.
향아는 가게로 들어오다가 재미있어하는 두 커플을 보고 발을 멈췄다.
"아무 데서나 쪽쪽 거리지 좀 마."
향아가 불쑥 끼어들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찐한 키스로 마무리했다.
기막혀하며 쳐다보는 향아의 팔을 잡아끈 태진은 그녀를 위한 기분다운 개그를 잊지 않았다.
"이리와. 우리 앞이빨이 쏙 빠지도록 뽀뽀나 해보자구!"
퍽! 향아는 아무 말 없이 태진의 복부에 제법 센 펀치를 먹였다.
“으윽…. 어우…. 야…. 아프잖아….”
그녀는 두 사람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너무 고마웠다. 그들이 물어봤다면 그녀는 다시 멈추지 않는 울음을 터뜨리거나 죄 없는 친구들에게 짜증을 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그녀는 너무도 미운 민정우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를 욕하는 게 싫기도 했다.
아무도 다시 그를 떠올리지 않게만 한다면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참, 어머니가 가게로 전화하셨더라. 핸드폰이 안 된다고 하시던데?"
"어."
향아는 바람 빠지는 고무풍선 마냥 푸스스하게 의자에 쓰러졌다.
“요즘 어머님께서는 다시 선의 불길을 댕기셨지요. 어디서 그런 남자들을 아시는지 처음에는 엄마의 발이 넓다고만 생각했더랬습니다. 도대체 어머님의 인맥은 어디가 끝인지 궁금해질 즈음 출처는 중매 할매를 넘어선 결혼 정보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진정 우리 어머님의 제 결혼을 향한 의지는 넘사벽이지요.”
비장함이 느껴지는 향아의 읊조림에 비장함마저 풍겼다.
“아…. 그랬구나.”
“우리 향아 수고한다….”
민영과 태진은 진심으로 위로했다.
“정말 싫어!”
“그렇지. 싫을 만해.”
태진이가 확실한 리액션을 해주며 맞장구를 쳐준다.
“만나라는 남자마다 나이, 가족관계, 직업 등을 트집 잡아 거절했지만, 엄마 사전에 목표달성의 그 날까지 포기란 없는 거야. 엄마의 끝없는 수고에 파이팅을…! 짝! 짝! 짝!”
그녀는 손뼉까지 치고서는 꺼 놓았던 핸드폰 전원을 다시 켰다.
"향아야, 낼 영화 보러 같이 가자."
태진이가 말했지만 향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온통 혹시나 모를 정우의 부재중 전화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아주 조금 기대를 했다. 그가 전화해 올지 모른다고. 아니면 찾아와서 화낸 거 미안하다고 말할 거라고…. 그러면 자신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먼저 연락하고 싶었지만, 정우의 프러포즈를 그렇게 어이없게 거절한 후로 마음이 편치 않아 먼저 연락하기가 민망하고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이 헤어진 날이 되어 버렸나 보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었다. 그의 청혼에 당황했지만 좋았었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별것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그녀와 헤어지려고 청혼한 걸까? 이제 별생각이 다 든다.
이제 와서 다 무슨 상관이야? 다 끝났는데…. 혼자 웃고 까불고 착각만 하다가 끝이 난 건데…. 촌스럽게 혼자서 미련을 떨고 있잖아.
"…. 우리, 헤어졌어."
미련을 지금부터 버리자….
“응?”
“…. 뭐?”
갑작스러운 향아의 말에 민영과 태진이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야, 나 요즘 청력이 안 좋은가 봐. 귀 파 줘.”
태진이가 민영이를 보며 긴가민가하며 말하다가 민영이의 심각해진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실장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평소와 똑같았는데?
“실장님은 평소와 똑같던데? 에이 좀 싸운 거지? 크게 싸웠구나?”
태진은 설마 설마 했다. 갑자기 이렇게 하루아침에…. 말이 안 된다.
“걱정 마.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민영이랑 나 봐라. 수천, 수만 번을 싸웠어도 아직도 같이 있잖아.”
태진은 옆에 앉은 민영의 어깨를 당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신의 입으로 헤어졌다고 말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수천수만 번을 싸웠어도 같이 있다는 태진의 말에 향아는 울컥했다.
“그러게. 우리는 한 번으로도 충분한가 봐.”
그녀의 말에 태진와 민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사람이 헤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오늘 전단지 돌리기로 했지? 이거야? 잘 나왔네, 내가 며칠 안 나왔으니 땜빵할게.”
향아는 입구 카운터 위에 있는 가게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또 울 것 같았다. 민정우가 너무 보고 싶다며 그를 너무 좋아한다고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멍청하게 굴다가 그를 놓쳐 버렸다며 대성통곡하고 미친 듯이 발악하고 싶었다.
“지금 전단지가 문제야? 하던 얘기마저 해.”
태진이가 나가는 향아를 불렀지만, 그녀는 황급히 나가버렸다.
“향아 저대로 둘 거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할 거 아냐?”
“애 아니라며? 두 사람 일은 둘이서 해결하게 두라며?”
“야! 말이 그런 거지! 이건 단순한 연인 사이의 이별이 아니야. 내 직장 상사와 내 친구 일이라구.”
“그럼, 구구절절 알아내서 어쩔 건데? 두 사람 각자 불러내서 깜짝 화해라도 시키게?”
“…. 어케 알았어? 천잰데?”
민영의 정확한 추리에 태진은 감탄한다.
“틀림없이 민정우 탓이야.”
“뭐? 왜?”
태진은 민영이가 뜬금없이 정우 탓을 하자 그는 의아해했다.
“척 보면 몰라? 모태솔로급 이향아와 모태바람둥이급 민정우 잖아!”
“그렇긴 한데….”
과하게 편파적인 민영의 말에 태진이 반박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잘랐다.
“게다가 향아는 옳은 말이라도 독한 소리 하고 나면 두고두고 후회하는 특급 A형이야. 그런데 니네 민정우는 딱 봐도 얼음송곳 같이 생겼잖아. 틀림없이 민정우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틀림없어!”
바로 그 순둥이 이향아가 개바람둥이 민정우의 가슴에 대못을 꽂았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채 민영은 그를 못된 놈으로 몰아붙였다.
냉정한 척하더니 민영은 민정우를 향해 칼을 갈고 있었나 보다.
얼음송곳 같이 생겼건, 성격이 사포던 여자들의 선망인 대상인 그를 이렇듯 까는 그녀를 보니 태진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다.
“전화해서 오라 그래. 틀림없이 어리바리 향아를 이리저리 구슬려서 데리고 놀다가 프러포즈하는 척만 한 거야. 개바람둥이 같으니! 이건 향아 뿐만 아니라 여자 모두를 물로 본 거야.”
민영은 살벌함은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기세다.
“에이…. 실장님이 좀 싸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인데 그래도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향아 걔가 은근히 사람 열 받게 하는 면이 있잖아."
민영이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진짜로 그를 불러와야 할 판이었다.
얼음송곳이든 카사노바든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는 상사다. 그것도 로열패밀리!
“너야말로 열 받게 하지 마! 향아 위해 주는 척하더니 결국 그놈 편이니?”
“그게 아니라….”
이래서 남의 연애사에는 끼는 게 아니구나 싶은 태진이었다.
향아와 실장이 화해할 때까지 민영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했다.
그보다 진짜 헤어진 거면?
***
가게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걸어와서야 향아는 길가 벤치에 주저앉았다. 자꾸만 정우와의 마지막 순간이 생각났다.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에게 프러포즈란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열등감과 소심함으로 그 순간을 망쳐 버렸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지금이라도 그에게 미안하다고 할까?
아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향아는 마음을 다잡으며 행인들에게 가게 전단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그럼 나도 그렇게 지낼 수 있어. 개도 소도 하는 사랑, 내 연애라고 뭐 특별할 게 있나? 헤어지면 끝인 거지.
“맞아. 특별할 거 없어!”
“이런 거 직접 하나 봐요?”
“엄마야!”
혼자 중얼거리는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향아는 식겁했다.
앞에 서 있는 여자의 하이힐이 보였다. 찌를 듯 뾰족한 앞코에 10센티는 훌쩍 넘는 빨강색 힐이었다.
시선을 올리기 싫었다. 누군지 알겠기에 자신의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커다란 후드 티에 레깅스, 운동화 차림. 게다가 무슨 자신감으로 맨얼굴이다. 비비크림조차도 바르지 않았다.
아…. 진짜…. 선크림만 발라서 얼굴에 개기름 올라왔을 시간인데…. 왜 민정우 관련 사람들은 내가 꼭 이런 꼴일 때만 만나게 되는 거야?
밉다 밉다 하니 꼭 미운 짓만 하는구나.
향아는 불만스러운 자신의 상태에 한탄하며 마지못해 시선을 들었다.
“우리가 볼일이 있나요?”
대놓고 너 보기 싫다는 걸 확실히 전하는 향아다.
“향아 씨랑 얘기 좀 하려고 가게에서부터 따라 왔는데, 우리 얘기 좀 해요.”
새빨간 입술이 그녀를 향해 말을 하고 있다. 무슨 얘기일지 뻔하다. 향아는 지금 그런 말을 들어 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설사 지금 이 세상 모든 신이 강림한다 해도 이 여자를 참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받으시던가, 가시던가.”
향아가 한유리에게 전단지를 내밀며 까칠하게 굴었다. 유리는 그 전단지가 더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한쪽으로 살짝 비켜섰다.
“됐어요. 난 이런 거 안 받아.”
“하…. 하하하….”
“뭐야? 왜 웃어요?”
“재수 없어서요.”
민영이 생각하는 독한 소리 못하는 향아는 지금 여기 없다. 이 여자에게는 심한 소리뿐 아니라 욕도 할 수 있다.
“내 말을 듣고도 과연 나한테 이럴 수 있을까요? 과연 누가 누구에게 더 재수 없는 인간일지?”
우리가 헤어진 걸 모르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야? 무슨 소용이래. 다 끝났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도 내가 선심 쓰….”
“당신 때문에 정우 씨 사업 망할 거예요.”
향아가 헤어졌다는 말을 하려는데 유리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오래 버티지 못해요. 물론 정우 씨가 사무실 하나 접는다고 굶어 죽지는 않겠죠.”
유리가 충격받은 향아의 얼굴을 보며 의기양양해졌다.
“그래도 당신이 포기하지 못한다면, 정우 씨 집안 회사를 건드릴 거예요.”
어이없다. 이 여자…!
“당신이 뭔데? 뭔데 그런 짓을 해?”
향아가 분노로 손을 떨었다.
“집안 힘 빌리기 싫었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하죠. 우리 할아버지가 삼송그룹 회장이시거든요. 대명 정도야…. 껌이죠.”
향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삼송이라면 1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이다. 얼마 전 기석이가 사무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했던 게 이 여자 때문이라니…. 아니, 자기 때문이라니!
“아~ 걱정 마요. 대명은 건드려도 당신네 샌드위치 가게는 안 건드려요. 당신은 잘 먹고 잘살아야 정우 씨가 마음이 그나마 좋지 않겠어요?”
아! 우리 가게…. 민영이…. 태진이….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손에서 전단지들이 힘없이 떨어져 사방을 흩어졌다.
“잘 생각해요. 이향아 씨. 당신은 그 사람에게 피해만 입히는 존재지만, 난 아니야.”
유리는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는 향아를 두고 돌아섰다.
“……. 잠…. 잠깐만!!!”
한유리가 저만치 멀어질 즈음에야 향아는 제정신이 들며 그녀를 쫓아갔다.
“벌써 결정했어요? 뭐, 들으나 마나 겠지만. 잘 결정했어요.”
향아의 마음 같아서는 저 거만한 낯짝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기뻐할 말을 전해 주었다.
“이미 민정우랑 헤어졌어요. 그러니까 나랑 상관없는 그 남자한테 괜한 짓거리 마요.”
“…. 정말이에요?”
유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깜짝 선물 같았다. 이렇게 빨리 헤어졌다니?
“네. 며칠 전에 끝난 사이니까…. 그런…. 협박하고 다니지 마요.”
향아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요.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니까. 그래도 당신 따위가 그런 남자를 만났다는 걸 좋은 추억으로 생각해요.”
한유리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향아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정우 때문에 가슴이 설레고, 행복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사람이 곁에 없으니 너무 속상해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책에서 드라마에서 실연 후 왜 저러나 싶었던 행동들이 이제야 이해가 가고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자신보다 아픈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민정우는 멀쩡하게 살고 있으니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실 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의 말로 인해 그런 희망 따위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발밑을 어지럽게 날려 다니는 전단지를 뒤늦게야 발견한 향아는 기계적으로 전단지를 줍기 시작했다.
“…. 아…. 나 때문에 손해 봤는데….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향아는 그렇게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있었다.
***
눈부신 햇살에 마지못해 눈을 뜨니 12시다.
“햇살이 정말……. 지랄 맞게도 눈부시네. 비나 쏟아지지…. 폭풍이면 더 좋고….”
향아는 화창한 날씨를 못마땅해 하며 구시렁거렸다. 한유리를 길거리에서 만난 게 10년은 된 것 같은데…. 겨우 이틀 전이라니. 시간이 어쩜 이렇게 안가나?
“좋아! 밀린 빨래들 다 하고, 청소도 하고. 옷 정리도 다 하고…. 1년 치 집안일 다 하면 해 떨어지겠지.”
하지만 모든 일을 해치웠음에도 해가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볼 생각에 현관을 나서던 그녀는 현관 거울을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꼬락서니 봐라…. 온몸으로 실연 중이라고 티를 내냐? 아예 목에 팻말을 걸고 다니지….”
향아는 다시 들어가 한껏 치장했다.
“난 괜찮아지는 중이야. 하루하루 괜찮아져. 이제는 그 사람도 제 자리를 찾을 거고…. 정말 큰 일 날 뻔했는데 모두가 무사해졌잖아. 그러니까 잘 된 거지.”
향아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주문을 외듯 말했다.
***
화창한 날씨에 화창한 옷차림이지만 기분은 여전히 바닥을 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커플들이 많은 걸까?
‘커플 지옥!’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거였어.
우울한 표정으로 먼저 영화관으로 발을 돌렸던 그녀는 정우와 왔던 극장으로 자연스레 오게 되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 영화관이 리모델링을 하기 전부터 기석과 준희, 정우가 학교 때부터 자주 오던 곳이라고 했다.
“뭐야! 그 사람 생각은 금지야! 하지 마!”
향아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의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했다. 그와 헤어진 후 부쩍 혼잣말이 많아졌다.
왜 하필이면…. 발길을 돌리려는데 오래전에 올라온 영화가 아직도 있었다. 이왕 온 김에 저거라도 보고 가자. 이미 본 영화지만……. 그때도 정우와 봤었다. 사실 민영과 이미 본 영화였지만 그와 극장에 가고 싶어서 안 본 척하고 한 번 더 본 것이었다.
생각대로 극장 안에는 좌석 번호를 무시하고 앉아도 될 정도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맨 앞에 앉은 그녀는 제일 큰 사이즈 팝콘과 빅 사이즈 콜라를 입에 물고 편안한 기분으로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정우는 영화관에서는 잘 보지는 않지만 오게 될 경우에는 항상 맨 앞줄에 앉는다고 했다. 뒷자리는 다리가 길어서 걸린다나 어쨌다나…. 또 민정우 생각을 하고 있다.
구제불능이다…. 이대로면 환상도 보일 것 같잖아. 자꾸 이러면 신경정신과로 자진 출두해야겠어.
향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생긴 배우들이 화면을 분주하게 다니고 총알 세례에 폭탄까지 퍼붓는 것을 보던 그녀는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감긴 눈꺼풀 속으로 화면의 빛이 뚫고 들어왔지만,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잠이 들었을까? 너무 편해서 자신이 잠든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의 뺨 아래 누군가의 어깨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혹시….’
향아는 정우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시는 접근금지인 그지만,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정우에게 들릴까 봐 가슴이 졸이며 기대하며 시선을 올렸다.
"……. 준희 씨!"
"잘 잤어요? 보기에는 푹 자던데?"
준희가 싱글거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멍청한 제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손에는 자신이 들고 있었던 팝콘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자는 동안 그가 받아 주었나 보다.
“뭐야? 혹시 정우인 줄 안 거예요? 그래도 실망한 티 너무 낸다.”
"…. 아…. 하하하…. 하하……."
향아가 민망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준희는 그녀의 손에 들린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따라나섰다. 헤어진 애인의 친구와 이렇게 만나는 건 정말 어색한 거구나 싶은 그녀다.
"영화가 재미없었어요?"
"……. 그 얘기 안 하면 안 돼요?"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런데 요즘 왜 이렇게 뜸해요? 정우 녀석이랑 아니면 우리 가게는 오지도 않을 겁니까?"
"아…. 그게…."
민정우와 그녀가 헤어진 걸 그는 모르나 보다. 말해줘야 하나?
이 사람은 삼송그룹의 일을 알고 있나?
그런데……. 왜 그는 아직도 우리가 헤어진 걸 말하지 않았지?
한유리가 민정우를 찾아가지 않았나?
"싸웠구나? 애들처럼 그게 뭡니까?"
준희의 말에 향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사실은…."
"우리 가게로 가요. 마침 줄 것도 있는데 잘됐네."
준희는 그녀가 말할 새도 주지 않고 그녀를 차에 태워 가게로 향했다. 다시 말하고 내리려는데 그의 말에 금세 마음이 약해지는 향아였다. 정우의 주변 사람들이라도 만나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우가 왔을지도 몰라요. 가끔 쉬는 날이나 심사가 뒤틀린 날에 와서 시비 거는 게 취미거든요. 하는 짓이 딱 5살이죠."
그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온 것이다. 미움보다 그리움이 더 컸다. 그리고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원래 이런 중재자 역할 귀찮아서 안 하는데 정우 녀석이 여자 때문에 속 썩는 걸 보게 된 게 너무 기분 좋아서요. 녀석을 생각하면 계속 지켜보고 싶지만, 향아 씨를 좋아하거든요."
"네?"
좋아한다니? 친구의 애인으로써겠지? 그런데 말투가 그렇게 들리지 않는 건 요즘 들어 부쩍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애인만 아니었다면 뺏고 싶을 정도로요."
"네?!!!!!!!!"
저런 말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밥이나 먹을까? 라는 표정이다.
농담이지?
물론 배우 뺨칠 비주얼의 남자가 좋다는데 싫지는 않아도 전 애인의 친구라니 이건 좀 많이 부담스럽다. 그녀의 멘탈로는 불가능한 관계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갈 듯한 표정을 짓자 준희는 다시 평소 같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돌아갔다.
"걱정 마요. 친구 여자는 내게 여자가 아니니까."
너만 아니면 그만이에요? 그런 말을 들어버린 나는 어쩌라구! 기든 아니든 부담스럽다구요!
향아는 그에게 대꾸하고 싶은 걸 눌러 참았다. 말해봤자 부질없는 말들이니까.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가게에 도착해 앞서 들어가던 준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머뭇거리며 가게로 막 들어가려는 그녀를 향해 돌아서는 그의 눈빛에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당황한 빛이 서려 있다. 의아해하는 그녀를 준희가 막아섰다.
"왜요?"
"…. 가게가 엉망이네요. 오늘 정리할 게 있었는데 직원 녀석이 대강 해 놨어요. 가서 혼꾸녕을 내줘야 해서 다음에 와요."
마지막으로 정우를 만나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차라 서운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계속 준희를 보기도 어색하던 차에 향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사과가 더 싫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더 밉겠지. 보면 오히려 더 화가 날지도 몰라. 그보다…. 내가 울며불며 염치도 없이 매달릴지도 몰라.
그런데 단념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을 잡아채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우 씨, 왜 요즘 그렇게 뜸했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조금만 더 늦게 연락했음 다시는 안 보려고 했는데, 당신도 나 보고 싶었구나?"
아……. 그랬구나…. 잘 지내는구나….
향아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아 벽을 잡아야 했다.
“향아 씨!”
놀란 준희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준희 눈에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려서 웃었는데 유령 같았다.
“들어와요. 들어가서 저 새끼 뺨이라도 날려요.”
준희의 말에 향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그런 자격 없어요.”
“무슨 말이에요? 자격이라니? 당신한테 그런 자격이 없다면 대체 누구한테 있다는 겁니까?”
진심으로 흥분하는 준희를 보자 향아는 갑자기 울컥했다. 그냥 그가 고마웠다.
“도대체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했길래…….”
준희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답답해했다.
“…. 저기…. 정우 씨 사무실 괜찮아요? 별 탈 없죠?”
그녀의 물음에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알고 있어요. 너무 늦게 알았지 뭐예요.”
“설마…. 그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겁니까?”
“괜찮은지만 말해주세요.”
“…. 하아…. 이거 참…. 두 사람 다 왜 이렇게 등신같이 구는 거야?”
준희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흩트리며 답답해한다.
“정우 녀석 끄떡없어요. 해결…. 됐어요.”
솔직히 기석 말로는 정우가 삼송을 찾아갔지만, 회장 만나기가 힘들다고 한다.
“다행이다….”
준희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들어가요. 들어가서….”
“우리 헤어졌어요!”
준희가 놀라서 멈춘다.
“오늘 정우 씨 보고 직접 묻고 싶었어요. 회사 괜찮냐고…. 그리고 나 때문에 미안했다고…. 그런데 직접 보지 않아도 확인했으니 됐어요.”
“향아 씨….”
“고마워요. 계속 걸렸었는데 오늘 준희 씨 만나서 홀가분 해졌어요. 그리고…. 오늘 저 만난 거 정우 씨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부탁 드려요.”
“….”
“다음에 우리 가게에 들르세요. 동업자 권한으로 10회 무료 식사권 드릴게요. 가볼게요.”
향아는 점점 자신이 처량해져 견딜 수가 없어서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진짜 등신 커플이야? 먹통 등신과 착한 등신?
준희는 향아를 보며 짜증이 치밀었다. 처음에는 정우에 대한 장난이었고, 향아를 본 다음엔 호기심과 호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우 녀석에게 화가 난다.
***
향아는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지만 토할 것 같아 얼마 못 가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그냥 발길이 가는 데로 그렇게 걸었다. 머릿속에는 JeJe에서 본 그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준희가 그녀의 시야를 필사적으로 가리려고 했지만, 눈은 의자에 앉아 있는 커플을 단박에 찾아냈다. 민정우였다.
역시나 아찔하게 예쁜 여자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유리가 아닌 처음 보는 여자였다.
바보 같은 이향아. 그는 그때 너를 잘라 내버린 거야. 그게 끝이었어. 그는 너만큼 너를 좋아한 게 아니었어. 민정우는 싸구려 바람둥이라구.
향아는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며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민정우 같은 남자가 그녀처럼 평범하디 평범한 여자를 좋아한다길래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꽤 멋진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만남으로 인한 특이한 케이스였을 뿐이었다.
“아…. 쪽팔려….”
***
"민정우."
"가게 비워 두고 어디 갔다 와?"
"Hi~준희 씨."
준희는 정우 옆에 빈대처럼 붙어 있는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냐?"
"영미잖아. 기억 안 나?"
"아이~준희 씨 벌써 나 잊어먹은 거예요? 섭섭하다~~~"
"뭐냐구?!"
정우는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영미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까이 당겼다.
"뭐긴. 보면 몰라?"
"….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는 거냐?"
정우는 코웃음을 쳤다. 발끝에서 스멀스멀 흥분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그를 꽉 막고 있던 그 무엇. 그래서 며칠 동안 그것을 없애려고 기다리고 있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박준희, 너 오지랖도 넓다?"
준희는 그제야 평소답지 않은 자신을 깨닫고는 못마땅해 하며 돌아섰다.
"언제부터 딴 사람 일에 그렇게 신경을 썼냐? 그거 내 맘대로 해석해도 되냐?"
정우는 준희의 뒤통수에 대고 계속 빈정댔다.
"그만해라. 민정우."
"왜? 니 맘 들키니까 쑥스러워?"
"왜들 그래요? 그만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영미는 불편해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퍽!
“꺄__________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준희가 정우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먹을 날린 것이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나오자 정우는 그 피를 보면서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살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퍽!
다시 정우의 주먹이 준희를 복부를 질렀다. 준희가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뒤에 있던 테이블과 소파가 넘어갔다.
“꺅! 꺅!”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형들! 그만해요! 이게 무슨 짓들이야!!"
직원인 경석이가 말리려고 끼어들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야만 했다.
"으악! 형!"
우당쾅! 콰당! 퍽! 퍽!
그들의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죽던지, 항복하든지 할 때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그 누구도 항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우는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고 한 듯이 맹목적으로 덤비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준희가 좀 더 불리해 보였다. 경석은 욱신거리는 뺨을 만지며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둘까 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병신새끼! 지랄 떨려면 딴 데 가!"
"도둑놈!"
"뭐? 니가 나한테 그럴 말 할 자격이나 있어?"
"남의 여자한테 침 흘리는 놈이 누구더라?"
퍼억!
다시 준희의 주먹이 정우의 배에 정확하게 꽂혔다. 정우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친구 여자는 여자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준희는 아직도 구석에서 꺅꺅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영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꺼져!"
정우도 영미의 높은 소프라노음에 지렸는지 버럭 화를 냈다.
"정…. 정우 씨!"
영미가 기가 막힌 듯 새된 소리를 냈지만, 정우는 더 화가 났다.
"꺼지라구! 꺼지란 말 못 알아들어!"
정우의 거친 말에 민망해진 그녀가 토라져 가게를 나가버린 후 긴장된 침묵이 흐르며 두 사람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경석은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둘 다 얼굴도 엉망에다가 옷도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퉤!
준희가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너도 꺼져! 이 새끼야."
준희의 말에 정우는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떼더니 바로 향했다. 경석은 얼결에 물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정우는 물수건을 받아들더니 얼굴에 묻은 피를 훔쳐냈다. 그리고는 그 지저분해진 수건을 준희에게 집어 던졌다. 준희는 말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맥주."
경석은 잽싸게 맥주를 바에 올려놓았다. 정우는 사나운 표정으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맥주병을 입구 쪽으로 홱 집어 던졌다.
퍽!
"내가 오는 게 싫었으면 말로 하지…."
기석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정우의 폭격을 피한 그는 가게 안의 참상을 보며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더니 엉망진창인 준희와 정우의 얼굴을 보고는 기가 찬 듯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입 다물어."
정우가 짜증스럽게 툴툴거렸다.
"히죽거리지도 마,"
이번에는 준희였다.
"너희들…. 얼굴이…. 그럼 우리 삼총사 중에 내가 제일 잘 생기게 된 건가?"
"미친놈."
"미친놈."
이번엔 둘 다였다.
"기석형, 왜 이제야 와요? 5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살벌했는데….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경석은 기석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사람?"
"……."
"……."
"나…. 삐지려고 그래"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농담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죽마고우인 기석뿐이다.
정우는 쓴웃음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왔다. 벌써 후덥지근해진 공기에 짜증이 났다. 요즘 들어 그가 느끼는 기분이라고는 짜증뿐이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이향아를 무시하려 해도 불쑥불쑥 생각이 났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였다.
회사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윤태진을 볼 때마다 따지고 싶었다.
아무 죄도 없는그의 멱살을 잡고 이향아는 왜 그따위냐며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야!“
준희가 뒤따라 나와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정우가 거칠게 쳐냈다.
“치워!”
“…. 이런 새끼를 왜 걱정하고 왜 미안하대? 멍청한 여자야.”
“뭐?”
정우는 준희가 정확하게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니가 왜 향아를 만나?”
다시 한판 붙을 기세로 정우가 준희의 멱살을 잡아챘다.
“신경은 쓰이는 놈이 왜 그 여자를 내버려두는 건데?”
“건방 떨지 마!”
"조금 전에 왔었어.“
“…. 뭐?”
정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절대 먼저 화해하자고 올 여자가 아닌데…. 왔어!
잔뜩 화가 났던 정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왔다가 딴 여자랑 시시덕거리는 꼴을 봤지.”
준희의 말에 정우의 입매가 다시 굳어졌다.
“그리고 너와 헤어졌다고 말했어. 네 사무실이 괜찮냐고도 묻고. 자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대.”
“…….”
준희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정우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떨쳐냈다.
“등신같이 굴지 마. 나도 끼기 싫다.”
***
준희가 들어가고 나서도 정우는 좀처럼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무실 일은 어떻게 안 거지? 게다가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정우는 그녀를 보러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하지만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돌려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정신이 흐트러질 만큼 술을 마신 것은 아니지만, 이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행여나 다시 말실수할까 염려가 돼서였다.
내일 차분한 정신으로 만날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그것도 얍삽한 박준희와 주먹질이라니.
하지만 그 자식이 향아와, 아니 준희가 아니어도 그 어떤 놈이어도 향아와 같이 있는 건 싫다. 절대 싫다.
“하하하하…. 하하…. 이게…. 젠장….”
자신이 먼저 향아를 찾아갔어야 했다. 그녀가 결혼하자는 말에 당황했을 때 좀 더 침착하게 대응했어야 했다. 그녀 말대로 시간을 줬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 앞으로 갔을 때 정우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유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여자인 유리가 아니라 준희였다면 다시 주먹다짐하고 싶었을 만큼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
“나가”
정우는 자신을 따라 다짜고짜 들어 온 유리에게 짜증을 냈지만, 그의 말이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나 보다.
“다쳤잖아! 누구랑 싸운 거예요? 어쩜 좋아……. 앗! 정우 씨…. 왜 이래! 정우 씨!”
정우는 유리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끌고 갔다.
“…. 그 여자와 끝났다면서요?”
그녀의 말에 정우는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유리가 어떻게 안 거지? 준희는 자신보다 조금 먼저 그 사실을 알았고, 그 일을 유리에게 말할 이유도, 그럴 녀석도 아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거라면 이러지 마요. 이해해. 이렇게 빨리 끝날 것도 모르고 나한테 그런 거잖아. 하지만 그 여자와 끝날 거 난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유리는 정우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점차 손을 그의 가슴으로 옮겼다. 그와의 잠자리는 짜릿하다. 그의 단단함이 느껴지자 기대감으로 몸이 떨려 왔다.
정우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는데 그녀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난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앗!”
정우가 그녀의 팔을 강한 힘으로 낚아채자 그제야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왜…. 그래요? 이거 놔요…. 아파요!”
“누가 그래? 우리가 헤어졌다고?”
자신의 팔을 움켜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고 있다.
“그 여자한테서 직접 들었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이것 좀 놔요!”
향아가 직접? 허탈해진다. 화도 나지 않는다.
직접 얘길 해?
정우는 유리의 팔을 놓아버리고는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가.”
“정우 씨….”
“끌어낼까?”
그의 등 너머로 흘러나오는 차갑고 오싹한 말투에 유리는 한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정말 당신은……. 정말 답답해! 그런 여자 때문에 왜 이래요?”
화내던 유리는 정우가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오자 뒷걸음을 쳤다.
“쉬어요……. 상처 치료 잘해요.”
문이 닫히자 정우의 입에서는 실소가 나왔다.
잠깐이라도 향아가 찾아왔었다는 사실에 기대한 자신이 바보다. 지금 생각하니 자신을 찾으러 JeJe로 온 것이 아니라, 준희를 만나러 왔던 거다. 그곳에 자신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게 니 마음이구나…. 준희한테. 한유리한테…. 이제 알았어. 이향아.”
***
몸살이 이렇게 무서운 건지 처음 알았다. 이틀을 쉬었는데도 여전히 온몸이 뻐근한 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다.
민영은 계속 쉬라고 했지만 아무 일도 않고 있으려니까 자꾸 괴로운 생각만 더 났다. 사람들이 심란할 때 왜 더 열심히 움직이는지 알 만하다.
정우가 그 여자와 다정히 껴안고 키스하고…. 웃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건망증 중증이어도 그런 것은 더욱더 단단히 기억에 박힌다. 차라리 확 깨는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면 실연 극복에 도움이 될 텐데…. 불행히도 그랬던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하나 있다…. 다른 여자와 끈적거리며 웃고 있던 거. 그래. 계속 이걸 생각하는 거야.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게!
하지만 어제 태진이가 전화로 정우가 얼굴이 엉망인 채로 회사에 나왔더라는 얘기를 듣고는 달려갈 뻔했다. 정말 바보다.
그 꼴을 보고도 걱정을 하다니…. 그러니까 그런 취급 받고 차인 거야.
"향아야! 이향아…."
민영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준희가 눈앞에 있다.
놀래라……!
"지나친 생각은 정신 건강에 나쁘다는 거 알죠?"
"준희 씨…. 그런데…."
그의 얼굴도 엉망이다. 이곳저곳에 얼룩덜룩 든 멍뿐 아니라 입술에도 딱지가 앉아있다. 혹시 그날 정우와 준희가 싸운 건가? 설마…. 준희가 자신에게 한 말이 진담이었던가?
"이 모양이어도 여전히 잘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준희의 썰렁한 농담에 향아는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금세 부담감으로 얼굴이 굳어 버렸다.
"잠깐 나가서 얘기할 수 있어요?"
향아는 민영의 의혹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준희와 함께 밖으로 나와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곧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향아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로 잘 돌아다니네요."
볼수록 맞은 곳이 엄청나게 아플 것 같아 향아는 자신도 모르게 걱정으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이럴 땐 많이 아프냐고,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묻는 거 아닌가?"
"척 봐도 아픈 건 뻔하고…. 정우 씨랑 싸운 거예요?“
준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 왜요?”
“지금 향아 씨가 예상하는 그 답?”
준희의 대답에 어색해진 향아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홀짝였다.
“부담스럽구나. 마음에 들어요. 부담스럽다는 건 의식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의 말에 향아는 그만 뜨거운 커피를 꿀떡 삼키고 말았다.
“켁! 앗 뜨…. 뜨…!”
향아가 손부채 질을 하며 어쩔 줄을 몰라한다.
“여기 얼음물 좀 갖다 줘요! 데이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준희는 빠르게 주문을 하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좀 놀란 것뿐이에요.”
아….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손바닥으로 부채질하던 향아는 준희의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표정이 엄청 버라이어티했을 텐데…. 혀는 물론이고 위까지 화끈거린다.
“큰 효과는 없겠지만 마셔요.”
잠시 후 얼음물이 오자 향아는 괜찮다고 한 말과는 반대로 숨도 쉬지 않고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준희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직원이 가져온 얼음물을 마시는 동안 그는 그녀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너무 미안해 하니 오히려 향아가 더 미안하고 불편해졌다.
“…. 볼수록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하죠?”
향아의 농담에야 비로소 준희의 표정이 풀렸다. 그녀는 내숭도 없고…. 내숭에는 원래 소질이 없어 보인다. 유머 감각도 있고. 사람 자체가 유쾌한 스타일이랄까?
계산도 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것 같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에 작은 코 위에 올라가 있는 안경. 서른이라는 나이에도 아이 같은 면이 보이는가 하면 그 나이의 성숙한 면도 보인다.
민정우, 복 터진 놈….
“무슨 일로 왔어요? 그 얼굴 보여주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다른 여자들은 날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던데?”
“…. 지금 작업하는 거예요?”
“작업 들어가면 받아줄 건가요?”
어라? 세게 나오네?
향아는 자신이 밀어붙였다는 걸 알지만, 준희가 스트레이트로 나오자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그가 조민성을 닮았고,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고, 자신도 그가 싫지는 않지만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 하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그가 조민성을 조금만 덜 닮았더라면 덜 아까울 텐데. 아니면 자신이 무지하게 뻔뻔한 여자였으면. 먹을 때는 뻔뻔스러울 수 있으나 인간관계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됐거든요.”
“하하하하하! 당신 정말 재미있는 여자예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다른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준희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약간은 서운한 마음이 드는 향아였다.
“서운하죠?”
이 남자 눈치가 백 단이다. 아니면 넘겨짚기?
“향아 씨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생각하는 게 그대로 나타나요. 자, 이거 줄려고 왔어요.”
준희는 향아 앞에 카드를 내밀었다.
“우리 가게 골드 멤버십 카드예요. 이것만 있으면 공짜나 다름없죠.”
“왜 이런 걸…….”
“부담 갖지 마요. 예전부터 주려고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서 못 줬었어요.”
향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준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 사심이라고는 없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만사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이런 대답은 안 받아요.”
“아쉽지만 그렇게 말해야겠네요. 정우 씨와 헤어졌는데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어요….”
“……. 왜 헤어졌어요?”
“…….”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게 울었는데 눈물은 여저히 마르지 않은 채로 언제나 울 수 있게 대기 중이다.
“서로……. 맞지 않았어요.”
향아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아 참다 보니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향아 씨.”
“가게로 돌아가 봐야 해요. 요즘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빠져서 눈치 보이거든요.”
결국, 그녀가 준희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고 일어서자 그도 마지못해 일어났다.
두 사람의 화해는 쉽지 않을 듯하다. 자신이 더 이상 뭘 한다는 건 주제넘은 짓이고. 위험한 일이다.
앞서 가는 향아는 그가 뒷덜미라도 낚아챌까 봐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뒤에서 그가 줄곧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가 정우와의 화해 때문인지, 농담처럼 말했던 개인적 호감 때문인 건지는 모르지만, 그가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향아 씨, 이거.”
샌드위치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향아는 준희가 자신의 손에 카드를 억지로 쥐여주자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정우랑 상관없어요. 언제든지 와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무료 고민상담도 해줍니다.”
말을 마친 준희는 향아가 미처 뭘 어쩌기도 전에 재빠르게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그녀는 손에 쥐어 쥔 카드를 난감하게 보았다.
돌려줘야지…. 그런데 재수 없게 또 민정우와 다른 여자를 만나면 어떡해? 그때 보니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는 것 같던데….
“하아…….”
향아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는 차를 몰고 가면서 백미러를 통해 카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향아의 모습을 확인했다. 조만간카드를 들고서 찾아오겠지.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의 상당 부분은 정우를 위한 것도 있지만, 통제 불능한 일부분이 이향아를 여자로 보고 있다. 그야말로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난감하기 그지없다.
“박준희…. 아주 오지랖이 태평양이다. 참나….”
중얼거리던 그의 눈에 백미러를 통해 차도 한쪽에 세워진 정우의 차를 보였다.
“구제불능 멍충이는 아니네. 그런데 타이밍도 참 예술로 맞춘다. 또 얻어맞아 줘야 하려나?”
***
정우는 차 안에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충동에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향아에게 모진 말을 하고 돌아선 후, 화풀이라도 하듯 이 여자 저 여자 만났지만, 그녀 생각만 더 간절해질 뿐이었다. 여자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마다 향아와 비교를 했다.
그녀라면 웃을 텐데…. 그녀라면 화낼 텐데…. 그녀라면 울 텐데…. 그녀라면 내 손을 잡아 줄 텐데……. 그녀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씩씩하게 말해 줄 텐데….
그녀라면…. 그녀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향아 생각에 괴롭기만 했다.
그래도 어쩌면 향아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는데 유리에게 자신들이 헤어졌다는 말을 했다는 걸 아는 순간 배신감이 들었다.
미칠 것 같은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일단 그녀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몰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준희가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얼어 버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준희 녀석 그래도 설마 했는데…. 정말 향아와 만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준희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후 만나는 사람이 자신의 친구라니……. 두 사람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실제로 차에 시동을 걸 뻔하기도 했다.
자신을 이렇게 극으로 몰아가는 향아가 밉기까지 했다. 향아를 알게 된 이후로 그녀 때문에 화가 났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증오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그 남자가 바로 그 조민성 닮았다는 사람?”
“응….”
“민정우는 친구도 잘생겼구나. 끼리끼리라는 말이 진리다. 그런데 왜 왔대?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왜 널 만나러 와? 니 친구도 아니면서?”
향아는 민영의 앞에 그가 준 골드카드를 밀어주었다.
“그 사람 가게 골드카드래. 땡기면 가라. 태진이랑.”
“와~ 태진이 침샘 터지는 게 보이네.”
민영은 골드카드를 이리저리 뒤집어 본다.
“그런데 그 남자….”
민영은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향아에게 물으려다 심란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아! 맞다. 너 잠깐 나간 사이에 아주머니가 전화하셨더라.”
“아이고야…….”
향아가 금세 죽는소리하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너한테 전해 달래. <니가 이팔청춘인 줄 아나? 여자는 나이 묵으면 무조건 값이 떨어지는 기다. 니가 먼 생각으로 사는지 참말로 모르것다. 이번에는 아부지도 억수로 화가 나삤다. 각오 단다이 해라이>…. 너한테 전화하면 하도 짜증을 내고 딴소리만 해대서 열불 터지신다고 나더러 전해 달래.”
민영이가 그럴듯하게 향아 엄마의 말투를 흉내 내며 제법 실감 나게 업무를 완수했다.
“우리 엄마 정말 열정적이시지? 아마도 그 정도였으면 다른 딸내미들은 갔을 거야. 그런데 내가 좀 강적이지. 워낙에 비협조적이라 마음에 안 드시는 거야. 우리 엄마 덕에 나는 세상 모든 남자를 만나 볼 수도 있어. 대단하지?”
“효도 선이라며? 그냥 받아들여.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다는 게 짜증 나. 결혼은 그렇다 치고 난 어떻게 연애마저 이렇게 어려워?”
“……. 정우 씨와는 왜 헤어진 거야? 프러포즈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헤어졌다니.”
“그냥…. 뭐…. 성격 차이…. 그런데 괜찮아. 연애 기간도 짧아서 그런지 금방 그럭저럭 하다.”
향아는 시큰둥하게 말하는데 그 말을 듣는 민영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친다.
“뭐냐, 너? 내가 괜찮다는데 너 표정이 왜 그래?”
“향아야…. 너 눈물 나…. 울고 있다고!”
“……. 내가…?”
향아는 그제야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뭔가 뜨끈한 게 주룩 하고 흐른다. 울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어…. 어…. 엉어어어어으으응어엉…. 흑흑….”
“하아…….”
민영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향아의 울음보가 터지자 손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하나둘 나가자, 민영은 아예 가게 문을 닫아버렸다.
눈물, 콧물, 침까지..인간이 울면서 흘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원 없이 빼낸 후에야 향아는 울음을 그쳤다.
패~~~~~~앵!
마무리로 코를 진하게 풀고 코를 한번 훌쩍인 후에야 향아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힘들어한다는 놈이 다른 여자 만나서 낄낄댈 수 있는 거야?”
“뭐? 그놈이 그새 딴 년을 만나?”
민영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듯했다. 역시 친구란 좋은 것이다.
끄덕이는 향아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주르륵 굴러떨어졌다.
“잠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설마 그놈 스토커 짓이라도 하는 거니?”
“아냐! 그렇게..훌쩍..후지..게는 안 굴어..훌쩍..훌쩍..”
패~~~앵!!!!
향아는 다시 한 번, 거하게 코를 풀고는 마음을 다독였다.
“나 때문에 민정우 개인 사무실이 망할 뻔했대. 그래서……. 사과하러 갔었는데…. 봤어….”
“너 때문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향아가 유리와 그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동안 민영의 표정은 점점 살벌해져 간다.
“망할년. 미친년. 어디서 갑질이야? 지가 뭔데?”
피식….
향아는 웃음이 났다.
“웃지 마! 지금 이 일이 웃을 때야?”
“웃음이 난다…. 가슴이 뻥 뚫렸는데 웃음이 나.”
“다 그래.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뭐…. 이런 말 지금 너한테 들리지도 않겠지만, 다 지나가.”
“민영아, 가슴이 아파. 너무 아파…. 사랑이 이런 거였다면 정말…. 정말 안 했을 거야…. 난 아픈 거 싫어. 그래서 죽어라. 피해 다녔는데…. 차라리 만나지 말걸…. 너무 후회돼.”
민영은 향아가 띄엄띄엄 말하는 그간의 얘기를 들으며 그녀가 안쓰러웠다. 난생처음 만난 감정에 향아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사랑이란 게 정답이 없었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향아는 이리저리 튀는 사랑 때문에 당황해 버려서 주저앉은 거다.
“나 어쩌면 좋을까? 솔직히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 가게 나와서도 껍데기야.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라.”
향아는 그녀에게 확실한 답을 바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너더러 어떻게 하라고 말해 줄 수가 없어. 하지만 네가 살면서 후회로 시간을 죽여 버리는 게 싫어. 뭘 하든 네 마음 가는 대로 가. 나중에 후회하지 마.”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하면 나아질 거라는 대답을 바라던 향아는 민영의 대답이 실망스러웠다.
“김윤호…. 기억나? 솔직히 난 지금도 후회해. 왜 그때 그렇게 보내버렸을까…. 그래서 태진이한테 항상 미안해. 차라리 그때 내 감정에 충실했다면 어차피 같은 결말이 났더라도 태진이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생각하며 그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 윤호 씨를 아직도 생각해?”
향아는 민영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 잠시 자신의 문제를 잊어버렸다.
김윤호…. 민영이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남자였다. 성격, 집안 모두 극과 극을 달렸던 두 사람이었다.
결국, 민영은 극구 반대하는 주변의 환경에 굴복해 버렸고, 그는 조용히 떠났다. 그렇게 끝나버린 건 줄 알았는데 민영은 가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생각나. 갑자기, 불쑥…. 생각지도 못하게 생각이 나기도 해.”
“…. 상상도 못 했어.”
향아는 당혹스러워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태진도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어쩜 내가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말했어도 잘 안됐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내 감정을 속이고 그를 밀어 내버렸던 게 후회가 돼.”
“…. 맞아. 네 말대로 난 아닌 척했어. 그래서 생각지도 못하게 민정우를 다시 만날 기회가 올때 뭔가 기대하고 할 말을 준비했어. 하지만…. 정우씬…. 다른 여자를 만났더라구….”
“그럼 따귀라도 올려주고 오지 그랬어?”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곳에 왔다는 걸 알리고 싶지가 않았어, 벌써 날 지워버렸는데 나만 미련 있다는 거 들키고 싶지 않았어!”
“넌 정말 형편없는 바보야. 사람을 만날 때 제일 중요한 건 마음을 보여 주는 거야. 왜 그걸 몰라? 내생각에 그는 프러포즈를 통해서 너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줬다고 봐. 서툴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넌 정작 그에게 마음을 보여 주지 않았어.”
“…….”
“넌 한 번이라도 그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어?”
“소용없어! 프러포즈를 왜 했냐고 물었더니….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했단 말이야! 이미 끝났어….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향아는 울컥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해도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 미안. 내가 좀 간섭이 심했다. 나처럼 두고두고 미련을 가질까 봐서…. 이미 끝난 일인데 뭘 어쩌라구. 그지? 내 말 신경 쓰지 마.”
민영의 말에 향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문 다시 열자.”
민영이가 문을 여는 모습을 보던 향아가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윤호 씨랑 헤어지고 나서 어떻게 극복했어? 주사라도 맞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야.”
“그냥 시간이 가는 거야. 그것밖에 없어.”
“요즘은 시간도 안가. 하루가 한 달 같아…….”
“그래도 시간은 가. 걱정 마. 조금씩 나아질 거야.”
“전혀 위로가 안 돼.”
“실연은 그 누구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위로가 안 되더라. 민정우 욕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해."
“실망입니다. 사적인 일에 공적인 힘을 행사하시다니요?”
정우는 한 회장 앞에서 조금의 꿀림과 스스럼도 없이 불쾌감을 나타냈다.
"하하하하하! 자네 듣던 대로 겁이 없군. 지나치게 당당해."
한 회장은 민정우가 스케줄 약속을 잡았을 때 빌러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삼송은 국내 기업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민정우가 대명의 차남이고, 또 아무리 대명이 알찬 기업이라지만 삼송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짜고짜 직선적으로 말할 줄은 생각지 않았다.
자신의 손녀를 무시한 거로 모자라 모욕을 준 것이다.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 쪽은 회장님이시죠.”
정우의 말에 한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리가 귀염만 받고 자라 제멋대로 인 것은 사실이어서 한 회장은 되도록 유리가 삼송을 믿고 건방진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 왔다.
하지만 이번 일은 자신도 자존심이 상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천방지축 손녀라도 자신의 어여쁜 피붙이가 아닌가!
그래서 유리가 김 비서를 통해 자신 몰래 일을 부탁하자 모르는 척하며 보채는 유리의 청을 들어주게 해 민정우의 개인 사무실인 에 손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겁 없는 청년의 첫마디가 가관이다. 게다가 단정치 못하게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나타나서는 당당하기가 그지없다.
"유리와 제 일입니다. 상관하실 바가 아니지요, 그래도 속상해하시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속상하시면 저를 직접 불러 나무라시거나 차라리 주먹을 한 대 날리시지 그러셨습니까? 실망이 큽니다."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불쾌한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정우가 한 회장은 탐났다. 자신도 이러니 유리의 마음은 백 번이고 이해가 간다.
“자네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어디서 주먹질을 한 것 같군.”
정우는 한 회장의 말에 약간 민망해했지만, 다시 처음의 융통성 없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계약 건을 되돌려 주면 되겠나?"
"계약 건, 필요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찾아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대로 사과해 주세요.“
"싫다면?"
한 회장은 그 누구라 그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민정우는 비웃는 미소로 맞짱을 떴다.
"그렇다면 실망입니다."
“자네의 실망이 내게 중요하지는 않지. 나는 손녀가 바라는 것이면 다 들어준다네. 그러니 자네가 굽히는 게 낫지 않겠나? 생각해보게. 삼송이라는 백그라운드를. 이런 조건이라면 세상 누구라도 자네 앞에 엎드리겠지. 사내라면 그 정도는 해봐야지 않겠나?”
“백그라운드가 필요할 만큼 못나지 않습니다. 누구를 엎드리게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제힘으로 할 일이죠. 그리고 사내라면 조건으로 내 여자를 고르지 않습니다.”
단호한 정우의 태도에 한 회장은 거듭 감탄했다.
“젊은 혈기라 보기는 좋지만, 세상사는 일이 혈기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이건 협박이다. 하지만 정우는 이따위 협박에 굴할 만큼 시시한 놈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 거였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아는데도 넘어가 주지 않습니다. 전, 무서운 게 없는 놈이거든요.”
건방진 놈! 정말 탐나는 녀석이다. 유리의 부탁으로 손을 쓰기 전 미리 정우와 그의 사무실에 대해 알아봤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무실이었지만 업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었고 기반도 잡혀있었다.
지금까지의 성장보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더 기대되고 믿음이 가는 사무실이었다. 그 중심은 바로 민정우였다. 손녀 사윗감으로 더할 나위 없지만, 그 일이 물 건너가 버린 일이라면 자신의 계열사에라도 들여앉히고 싶을 정도이다.
“미안하네. 자네 말대로 유리일은 자네와 그 녀석 일인데 내가 지나친 간섭을 한 거 인정하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네."
한 회장이 정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정우는 그 손을 잡고 한 회장의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실 큰 소리 뻥뻥 치고 있었지만 조금은 떨었다. 그걸 들키면 여기까지 온 게 아무 소용도 없기에 아닌 척 더 세게 나갔다.
정우가 회장실을 나서자 문 앞에는 화가 나서 새파랗게 질린 유리와 그녀의 친구인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표정들을 봐서는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은 듯했다.
유리는, 친구 나희와 있다가 할아버지인 한 회장의 부름을 받고 온 터였다. 틀림없이 정우의 회사 일로 부른 것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그와 부딪히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터였다.
"다시는 이런 장난하지 마."
칼바람이 불 정도로 냉정한 정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리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철썩!
그리고 유리의 손이 그의 뺨을 때리는 마찰음이 터질 듯이 났다.
정우의 고개가 돌아갈 정도의 힘이었고, 비서실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정우…. 당신이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잘났어?"
유리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입가에 근육이 떨릴 정도였다.
"이걸로 우리 사이는 깨끗이 끝낸 거로 하지."
“어떻게 이래? 난 당신을 기다렸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이렇게 잔인하게 밟아버릴 수 있어?”
“마음? 마음이 아니라 자존심이겠지. 당신 자존심은 나 말고 다른 놈한테 세워 달라고 해.”
말을 마친 그는 부르르 떠는 유리를 무시한 채 나가버렸다.
유리는 나가는 그를 향해 꽃병을 집어 던졌지만 이미 문은 닫히고 난 뒤였다.
“유리야!”
비서실의 직원들과 나희는 살벌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는 형편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회장이 나왔다. 이미 칠순에 가까운 나이지만 행동이나 눈빛은 새파란 청춘 못지않았다.
“들어오너라.”
기세등등한 유리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온순하게 회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
잠시 후 회장실에서 나온 유리의 표정은 좀 전에 정우에게 따귀를 날렸을 때보다 더 살벌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온 유리를 따라 나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따라나섰다.
한유리는 우월감 빼면 시체인 여자다.
그런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남자를 뺏겼으니 곱게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리만 보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할아버지마저 그녀에게 불호령을 내린 게 분명하다.
나희는 그런 유리의 상태를 알아서 저 엄청난 자존심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됐다.
“저기…. 유리야.”
“이렇게 놓치면 한유리가 아니지. 저 남자가 매달리게 할 거야.”
역시 나희의 예상대로 유리는 기가 꺾이기는커녕 더 기세등등해졌다.
“이런 일까지 있었는데 괜찮겠어? 그냥 단념하는 게 어떨까?”
나희의 말에 유리의 눈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안 좋은 꼴을 보였잖아. 걱정돼서 그래.”
나희는 진심으로 걱정됐다. 아무리 해도 민정우는 유리에게 마음이 없다. 오히려 더 멀어졌고 아까 그 표정으로 봐서는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라 유리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게 뭐? 어차피 들통 날 일이었어. 걱정될 거였으면 애초에 그런 짓 하지도 않았어.”
유리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평소처럼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심지어 여유 있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나희로서는 유리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련한 집착이지만 유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다.
설사 그게 유리의 진심이라 해도 민정우와는 절대 해피엔딩이 될 수가 없다. 그가 싫다지 않은가.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자신에게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기는 유리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한 회장과의 면담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퇴근 시간이 제법 지난 후 회사 문을 나서는데 회사 앞 화단에 준희가 앉아 있었다. 정우의 표정이 살기를 띄었지만, 준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뭐야?”
살벌한 정우의 물음에 준희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일어서더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회사 일 잘 풀렸다며?”
“왜, 우리 회사에 취직이라도 하게?”
정우는 준희를 보자 그녀를 만나던 게 생각나 자연스럽게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래 볼까? 그런데 날 종일 봐도 견딜 수 있겠어?”
하지만 준희는 겁은커녕 오히려 편한 표정이었다. 편한 표정이라기보다는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워낙에 잘생긴 두 사람이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찾아온 목적이 뭐야?”
정우의 주먹이 자연스레 쥐어지자, 준희도 그걸 눈치챘다.
“너도 알잖아. 이향아.”
“확실히 말해. 돌리지 말고.”
“니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 향아 씨 꽤 좋아. 아직은 그 정도. 너한테 이렇게 터놓고 말해도 위험하지 않을 정도. 그런데 앞으로는 위험해 질 거야.”
“미친 새끼!”
준희의 말에 정우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도 확실히 말해. 그래야 나도 어떻게든 하지.”
준희는 자신의 말에 정우가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비겁하다. 향아에게 정식으로 고백해서 거절당하는 것보다 이렇게 정우를 몰아붙여 억지로 물러서는 척하는 게 나았다.
“…. 그 여자가…. 그 여자가 날 먼저 밀어냈어.”
정우가 준희를 밀쳐 냈다.
정우 이 자식이 아직도 버틴다.
아둔한 새끼!
구제불능 멍청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했나 보다.
“그게 중요하냐? 병신새끼.”
“….”
“그래. 자꾸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라. 나도 이제 안 봐줘!”
자신을 등지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준희를 보며 정우는 화가 났다. 자신이 틀렸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이번 일도 당연히 이향아의 잘못이었다. 자신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그 프러포즈를 비웃었다. 그리고 먼저 이별을 말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자신이 나쁜 놈이 돼야 하는가?
정작 상처를 입은 것은 자신이다. 그에 비해 향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자신의 친구인 준희와 웃고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얘기하는 모습을 봤다. 그런데도 그녀에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
“아…. 젠장…….”
절로 욕이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욕을 달고 산다.
어제 그렇게 준희와 헤어지고 혼자서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실연당했다고 술에 쩔어 사는 인생들만큼 한심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정우는 그 꼴불견 인생 중에서도 최고다.
어제 잔뜩 술에 취해서는 향아의 집까지 찾아갔었다. 이향아 넌 참 못된 년이라고 욕을 해 줄 참이었다.
그런데 벨을 아무리 눌러도, 심지어 문을 걷어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결국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패잔병처럼 축 늘어져서 집으로 와야 했다.
만약 어제 그 꼴로 향아를 만났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침대에서 일어서려 하자 핑 도는 것 같더니 풀썩 쓰러져 버렸다. 머리만 움직여도 토할 것 같아 한참을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요즘은 그가 유일하게 하는 일이라고는 숙취라는 놈과 친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 얼빠진 놈 같으니….”
정우는 학생 때는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한 번도 하지 않은 결근을 해야 했다.
향아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줄기찬 호출과 때마침 겹친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2박 3일의 일정 동안 최소한 1건의 맞선이 대기하고 있으리라는 걸.
하지만 하루 3건씩이라니! 역시 넘사벽! 우리 어머님 브라~보!
차라리 선 아르바이트라는 게 있다면 제법 짭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헤…. 가시나, 꼬라지가 이게 머꼬? 옷이 이거 바께 없나? 돈 벌어서 다 묵나?”
엄마가 향아의 옷차림을 보며 연신 불평을 해 대신다.
결혼식 때는 가만 계시더니 선 보러 가려니까 갑자기 못마땅해지셨나 보다.
“결혼식 때도 이거 입었잖아. 뭘 새삼스럽게 이라노? 정 엄마가 별로라카모는, 선 보는 거 취소하자.”
퍽!
“악! 엄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의 강스파이크가 그녀의 등에 내리꽂혔다.
“아프다!”
“이기 이기….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퍼뜩 나가라! 이번에도 또 까탈 부리라. 확 고마 주패삐기다!”
“알았다고 몇 번을 말을 해…. 만나기도 전에 선 볼 남자 싫어진다.”
“이기 또!”
“간다!”
엄마의 손이 올라가자 향아는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
몸은 있되 영혼은 없다. 지금 이향아의 상태다.
민정우를 잊게 해줄 남자를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 그만큼 못돼 처먹었음에도 매력이 있는 남자가 또 존재하기란 쉽지 않았다.
민정우를 염두에 두고 보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은 남자들이었다. 심지어 과분하다 싶은 상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망할 민정우 때문에 모든 것 하나하나가 비교됐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어느새 눈앞의 남자는 민정우로 인해 의문의 KO패를 당하고 있었다.
“망할 놈!”
“네?!”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 눈이 당혹감으로 휘둥그레져서 자신이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걸 믿기지 않아 하고 있다.
“…. 어…. 그…. 그게 아니라…. 욕을 한 게 아니라……. 신발! 신발이요”
향아는 무엇이든 변명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이 구두가 새 구두라 발꿈치가 너무 아파서 저도 모르게 구두에게 욕을…. 초면에 죄송합니다.”
그녀의 급조된 사과가 먹혔는지 맞선남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 구두가 좀 그렇죠?”
“…. 네.”
“그래서 말인데 서울에 가서 한 번만 더 만날까요?”
“네?”
싫은데……. 이 어색한 시간을 서울까지 가서 또 느끼라구? 절대 반댈세!
향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이 없는데 그러자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향아 씨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집에서 독촉이 장난이 아니에요. 이대로 끝내면 우리 집에서 절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서울 가서 한 번 더 보기로 했다고 하면 향아 씨나 저나 하루라도 편하지 않겠어요?”
그럴듯했다. 보기로 하고 안 보면 그만이고, 내일 출발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편히 잠들고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민정우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데 자꾸 선 문제로 잔소리하니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러다가는 엄마에게 못된 소리를 잔뜩 할 건 분명하다.
“네. 그렇게 해요.”
향아는 냉큼 그러기로 하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
“아놔…. 이게 뭐야? 어떤 놈이야?”
향아가 집을 비운 사이 어떤 미친 인간이 현관문을 차서 여기저기 신발 자국에, 심지어 얼마나 사정없이 문을 찼는지 살짝 파이기까지 했다. 옆집 사람들에게 혹시 뭔가를 보거나 들었냐고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변들이었다.
“잡히기만 해라, 아주 현관문에 빵꾸가 날 때까지 차게 해 줄 테다!”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지만,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
겨우 샤워를 마치고 진한 커피를 석 잔 연달아 마실 즈음, 문득 어젯밤의 기억 중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술을 마시다가 유리의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났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끔찍하다. 자신이 이런 머저리 같은 짓거리를 한 것에 대해 한숨이 나왔다.
이게 다 이향아 때문이다. 고집불통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여자. 그 여자를 알면서부터 모든 게 삐걱대기 시작했다.
“윽…….”
정우는 또다시 온몸이 휘청거려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
“가만 안 둘 거야!”
유리는 독한 양주를 물 마시듯 계속 마시고 있었다. 나희가 술병을 뺏으려 했지만 살기 어린 그녀의 서슬에 슬그머니 손을 떼야 했다.
유리는 할아버지가 그녀를 남자 하나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 회사 힘까지 이용하는 못난 손녀라며 그녀를 꾸짖었다.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짐짓 엄한 척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심하게 화를 내신 적은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 만난 그는 그 여자 때문에 술에 취해 있었다.
“정우 씨. 그만 마셔요.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 한유리…. 또 너야? 저리 좀 가! 짜증난다구…!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정우는 잔뜩 술에 취해서는 앞에 앉은 유리를 향해 팔을 휘저어 댔다.
“그 여자 때문에 이래요? 그깟 여자…. 아무것도 아닌 그딴…. 것 때문에 이래?”
유리의 말에 정우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술잔만 뚫어져라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민정우가……. 그 여자를 사랑해…. 그런데 그 여자는 아닌가 봐…. 결혼하자는데 막 도망을 가. 그리고선 뻔뻔해……. 미친놈…. 그래도 난 그 여자 생각만 해…. 이 머릿속에, 이 마음속에…. 그 여자 말고는 아무것도 못 들어와….”
술이 잔뜩 취해서는 그녀는 보지도 않고 계속 이향아, 그 여자 얘기만 했다. 계속, 계속…. 계속….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깟 촌스런 계집 때문에 날 찰 수가 있어? 나이도 많고, 가진 것도 없어! 내가 그년 보다 못한 게 뭐야? ”
“그깟 여자 생각하지 마. 민정우란 놈도 결국은 눈 낮은 양아치라고 생각하면 돼. ”
유리를 진정시키려던 나희는 오히려 무섭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길에 움찔하고 말았다. 말을 할수록 유리는 더 독기만 차오르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냥 두고 보다가 집에 고이 데려다주는 게 제일 나은 방법 같다.
“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 내 자존심을 이렇게 형편없이 짓밟아버리다니…. 후회하게 해 줄 거야. 가만 안 둘 거야!”
술잔이 넘어질 정도로 내려놓은 유리는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술잔이 굴러떨어지며 박살이 났지만, 그녀는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어딜 가게?”
“그년한테….”
“유리야!”
밖으로 나간 유리는 차 문을 열고 있었다.
***
“안 돼. 너 너무 취했어.”
나희가 유리의 팔을 잡다 당기며 운전석에 앉지 못하게 말렸다.
“비켜! 비키라구!”
하지만 유리는 막무가내로 나희를 밀어내며 운전대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술에 취해서인지 그 힘이 대단했다.
“…. 좋아.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줄게. 됐지?”
할 수 없이 나희는 유리를 설득해서 조수석에 타게 했다.
다행히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으로 가서 앉았다.
나희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그녀의 고집에 고개를 저으며 잘 빠진 스포츠카의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유리가 그 여자 가게의 위치를 알려 주자 그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오늘 또 한 여자가 형편없이 깨지겠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났다. 아니면 그 여자에게 갈 동안 유리가 차라리 잠이 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
오랜만의 출근에 몸이 적응을 못 하는지 종일 멍했다. 솔직히는 정우 생각 때문이었다. 씩씩하게 올라온 게 그녀의 최선인가 보다. 차라리 고향 집에 있을 때가 머릿속은 더 평화로웠다. 엄마가 하도 볶아대서 정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올라오니 가게 밖을 오가는 남자만 봐도 자꾸만 그가 생각났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에게 가고 싶은 그녀와 겁쟁이 같은 그녀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 손님도 없고…. 태진이 불러서 술이나 할까?”
민영의 말에 향아는 민정우도 불러 달라는 말을 삼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문을 닫고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너가던 향아는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을 알았다.
“핸드폰!”
“빨리 갖다 와.”
향아는 민영에게 열쇠를 받아들고 다시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려 뛰다가 그만 열쇠를 떨어뜨려 버렸다. 열쇠를 주우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자동차를 발견했다.
유리는 눈앞에 그 여자가 보이자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이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나희가 쥐고 있던 핸들을 꺾어버렸다.
“꺅! 유리야!”
나희는 유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맥없이 당해 버렸고, 차는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는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이익___!
타이어의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 들렸다.
“향아야!”
향아는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고 있었지만,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눈이 부셔 눈을 꼭 감고 말았다.
***
그녀가…. 그녀가 다쳤다고 한다……. 정우는 태진에게서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지며 바로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해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두 다리가 자꾸만 휘청거려 몇 번이고 멈춰야만 했다.
겨우 가쁜 숨을 가르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차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 차를 발로 차대며 욕을 해 댔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는데 왜 이리도 차가 잡히지 않는 것인지……. 지나려는 택시를 몸으로 막아 타자 운전기사가 상스런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출근 시간이 한참이 지났을 무렵에야 윤태진이 까칠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그는 지각에 잔소리하는 문과장에게도 건성으로 죄송하다는 대꾸를 하고는 온종일 인상을 쓰며 책상에 앉아있었다.
정우는 그런 그를 보며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꼭 향아에게 뭔가가 나쁜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은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그녀에게 전화했지만 온종일 받지도 않았다. 당장 찾아가 볼까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온종일 바빠 식사 시간도 제대로 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 까지 겹쳐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다.
저녁 늦게라도 그녀를 만나야겠다.
그녀를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화가 나긴 했지만 그녀에게 못할 소리를 하고 그런 자신을 자책했지만 나아지는 건 당연히 없다.
이래저래 시간만 보내버린 것이다. 망설임을 모르던 그를 그 여자가 이렇게 주저하게 만들었다.
업무 시간이 끝나고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 잔무를 처리를 하는데 태진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정우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실장님, 야근하시게요?”
“네. 할 얘기라도 있습니까?”
정우는 목까지 올라오는 향아의 안부를 물어보려다가 망설여졌다.
“향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태진이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태진 씨, 또 주제넘게 간섭하는 겁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둘의 관계에 대해 또다시 남의 훈계나 들어야 한다는 게 공연히 머쓱하고 기분이 나빠져 삐딱한 반응이 나와 버렸다.자신이 이렇게까지 치졸한 인간인 줄 지금에야 알았다.
“미안합니다. 그러려던 게..”
태진은 실망감과 차가움을 담은 표정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하죠. 그럼 수고하시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실장님.
요즘은 미치광이들이 많아서 밤길이 꽤 위험하거든요.”
정우는 뭔가가 자꾸만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향아.. 잘 지내죠?”
“그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셔야죠.”
“…. 온종일 전화를 받지 않던데…. 어디 여행이라도 떠났습니까?”
“병원에 입원 중이니 전화 받을 형편은 아니죠.”
“입원이라니? 어디가 아픕니까?”
정우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
태진이 그녀가 간밤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정우는 병원도 제대로 묻지 않고 달려 나왔다.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묻고 나서야 병원을 알 수가 없어서 태진에게 전화했는데 잘 못 걸어 몇 번을 다시 했는지 모른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손과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려 꽉 잡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대로 그녀를 보낸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할 생각도 없었다.
간밤에 내내 생각했다. 설혹 그녀가 준희와 만나더라도 다시 뺏어 버리겠다고…. 그에게 그녀는 이미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문제는 잔뜩 화가 나 있을 그녀를 어떻게 풀어줄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화가 나서 끝났다고 밀어내도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너무도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병원에 도착해 그녀의 입원실 앞에 서자 그는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이렇게 두려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녀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까 봐……. 숨을 죽이고 문을 조심스레 열자 간호사가 막 나오려던 중이었다.
간호사의 어깨너머로 힐끗 본 그녀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이마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상…. 상태가…. 환자 상태가 어떻습니까?”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간호사는 하얗게 질린 그의 상태를 보더니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리가 골절되고,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상태는 아주 좋아요.”
“아….”
몰려오는 안도감에 정우는 다리가 풀려 쓰러질 뻔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순간 정우의 다리 힘이 풀리며 휘청거렸다. 간호사가 그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주저앉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면회가 안 되세요. 면회시간이 아닙니다.”
간호사의 말에 그의 눈이 순식간에 험악한 빛을 띠더니 간호사를 내몰고 문을 잠가 버릴 기세다. 간호사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그 변화에 움찔했다.
“지금 그녀를 꼭 봐야 해요. 부탁합니다.”
그는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부탁이란 것을 간호사에게 하고 있었다. 말이 부탁이지 표정이나 분위기는 협박이다.
“..그럼 딱 5분 만이에요?”
간호사가 가고 난 뒤에도 정우는 문을 쉽사리 열지를 못했다. 그녀가 무사하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향아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이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의 힘없이 늘어진 손을 살며시 잡자 그녀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차가워진 손에 온기를 전해 준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정말로 무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찬 손에 뭔가 따뜻한 것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울고 있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만졌다. 이마의 붕대가 그를 아프게 했다. 볼에 나 있는 붉은 생채기가 마치 자신의 심장을 할퀴는 것 같아 따끔거렸다.
“조심하지…. 바보같이…. 조심하지…. 이게…. 뭐야….”
다시 목이 잠겨왔다. 그의 거무스름하고 큰 손에 잡힌 그녀의 흰 손이 더 연약해 보여 겁이 났다.
항상 개구진 웃음을 띠고 있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 창백하고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다.
“…. 당신, 우는 거야…?”
잔뜩 쉰 향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우는 자신이 환청을 듣기라도 한 듯 믿기지 않았다.
“……. 향아야…….”
“어….”
“향아야….”
“응….”
“…. 괜찮아? 당신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을 리가 있어. 달리는 차랑 맞짱을 떴는데….”
그녀는 너무도 심각한 그의 얼굴을 풀어 주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괜찮아. 태진이 말을 빌리자면 난 정말 지랄 맞게도 운이 좋은 편이래. 그런데……. 당신이 더 아파 보여….”
향아는 손을 뻗어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만졌다. 정우는 그 손을 꽉 쥐었다.
“그래…. 나 지금 너무 아파…. 당신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날 밀어내서 날 미치게 하더니…. 이런 사고나 당하고……. 당신 때문에 난 애가 타서 죽고 거야…. 왜 이렇게 속을 썩여?”
“푸훗~!”
그의 말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당신 때문에 10년은 명이 줄었다구! ”
“쌤통이다. 나도 그동안 당신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데…. 나만 아팠으면 억울하지.”
갑자기 그는 입을 닫아버렸다. 조금 전까지의 포근한 표정은 사라지고 뭔가 심각한 결심을 한 표정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향아는 다시 불안해졌다. 그의 뜨거운 눈물에 눈을 떴을 때 그가 겁에 질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심장이 터질 듯 반가웠었다.
“…. 정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우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향아의 말을 잘랐다.
“내가 그날 한 말…. 진심이 아니야. 당신만 보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내 옆에 있어도 불안해. 날 보고 웃고 떠들어도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았어, 아무리 껴안고 있어도 부족해. 그래서 모든 방법으로 당신을 내 곁에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어 두고 싶었어….“
“정우 씨….”
“내 성급한 마음이 당신을 숨 막히게 했나 봐. 내가 그런 걸 제일 싫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당신한테 그걸 강요하고 있었어. 내 욕심이 너무 앞섰나 봐….”
나지막하게 진심을 말하는 그 때문에 이번에는 그녀가 목이 메였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나는…. 나는 자신이 없어. 별로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날 너무 좋아해 주는 당신을 실망하게 할까 봐 두려웠어. 그래서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어. 당신에게, 당신 집안에 현모양처가 못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내게 실망해 가는 당신을 지켜볼 자신이 없어…. 당신에게 좋아 보이는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았어.”
차가 자신을 덮쳐 오는 순간 죽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 살았음을 느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그였다.
그리고 그를 만나면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얘기하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진작 해줬어야 할 얘기를 이제야 하게 되어 미안했지만 이렇게 그를 보고, 만지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너무도 감사할 뿐이었다.
정우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정말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 화가 났다. 지금껏 그녀가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에 화가 났다.
“당신. 이렇게 다쳐서 누워있지 않았다면 엉덩이를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때려줬을 거야. 알아?”
“왜 화를 내?”
향아는 서운해져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당신 정말 바보 아냐?!”
바보라니…. 조금 전까지 그녀를 깨질세라 유리그릇처럼 다루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이다.
샐쭉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도 정우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완벽한 여자를 바랬다면 당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났을 거야. 그걸 몰라?"
정우가 속상해하며 말한다.
"정말…? 정말이야?“
향아의 기대가 잔뜩 담긴 목소리에 정우는 차마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녀 앞에서 거짓말할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솔직히….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
“잘났다…….”
향아가 귀여운 코웃음을 치자 정우는 그런 그녀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하지만 이향아라는 여자가 완벽한 여자였다면 첫 만남 이후로 두 번 다시 보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건망증 심하고 덤벙대고 잘 웃고, 잘 우는 그냥 당신이야. 왜 그걸 몰라?”
사랑? 사랑이라구? 민정우가 방금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는가?
“정말…. 정말 날 사랑해?”
“물론이지! 그것도 몰랐다고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으니까….”
“말했어.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에게 키스할 때마다. 눈으로 손으로 항상 말했어.”
“칫…. 입으로 말해야 알지…. 그렇게 말해서 누가 알아?”
삐죽거리는 그녀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는 그녀의 붕대로 감긴 이마에도, 뺨에, 코, 입술에 키스했다.
“당신은? 당신은 어때?”
“…. 알면서 왜 물어?”
너무 행복해서인지 그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쑥스러워진 그녀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 그녀를 그는 한참을 쳐다보더니 얼굴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결혼하자는 말 더 이상 안 할게. 나는 몰랐지만 어쩌면 내가 당신에게 믿음을 주지 못해서 당신이 내 청혼을 거절한 게 아닐까 싶어. ”
“그런 건 아니야….”
“그래. 알아.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나에게 믿음을 가질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마. 단,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향아는 청혼을 미루는 그 발언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그가 다시 청혼한다면 좋다고 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를 어쩔 수 없을 만큼 사랑하지만, 문득문득 가끔 그의 마음을 의심해 본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는 다시 걱정스러워진다.
“어디가 아픈 거야? 의사를 부를까? 많이 아파?”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그의 반응에 그녀는 다시 웃음이 났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왜 또 웃어? ”
“귀여워서.”
“귀엽다구? 살 만한가 보네.”
정우는 한층 안심되는 듯 다시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는 그녀의 곱슬 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눈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감기는 것 같아서 너무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피곤해 보여. 쉬어.”
“정우 씨….”
“왜?”
“…. 아니야…. 나 잘래.”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뺨에 키스했다.
“당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게. 대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져야 해.”
“그게 가능한지는 의사 선생님께 여쭤봐.”
정우는 피곤한 듯 눈을 감는 향아을 보며 다시 가슴이 저려 왔다. 하마터면 이런 그녀를 못 볼 뻔했다.
“…. 어디…. 가지…. 마….”
잠 속으로 빠져드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을 꼭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에 점점 힘이 빠지더니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그는 의사를 찾아 병실 밖으로 나왔다.
“향아가 풍선을 날려 버리거나 뺏겨 버리지는 않을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민영 씨!”
민영이가 의자에 앉아 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향아와 민정우의 화해를 축하한다는 뜻이에요.”
뜻 모를 소리였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왜 안 들어오고 여기 있었어요?”
“면회 금지잖아요. 민정우 씨한테는 소용없었지만요. 게다가 얼핏 들어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대화 중이길래 몸 좀 펴고 있었어요.”
민영이 손가락으로 오그라드는 시늉을 하자 그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안색도 나빠 보인다.
“밤새 여기 있었어요?”
“네….”
“정말 고맙고…. 미안해요.”
“…….”
간밤의 악몽이 생각나 민영은 다시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
민영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눈앞에서 향아가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이며 온몸이 떨려 왔다.
“……. 향아가 또…. 핸드폰을 가게에 두고 왔어요. 향아는 건망증이 심해요……. 알죠?”
그녀가 정우를 보자 그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다시 길을 건너는데……. 차가…. 갑자기 덮쳤어요…. 그러다가…. 그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그랬는데도…. 그래서…. 어쨌든 저 정도 다친 거라더군요……. 향아가 꼼짝도 않고 누워있었는데…. 정말…. 정말….”
띄엄띄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민영의 몸이 가늘게 떨리자 정우는 그녀의 손을 감쌌다.
“사고차량은요?”
" 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특실에.. 여자더군요.”
“여자?”
정우는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 아직 보지 못했는데 태진이가 그러더군요. 조수석에 있던 여자가 핸들을 꺾었는데 운전하던 여자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구요…. 그래서 향아가 그나마…. 저 정도였던 거라고……. 운전하던 여자는 안전벨트를 한데다가 에어백 덕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는데 조수석 여자는 가벼운 뇌진탕으로 입원했다더군요…. 웃기죠? 누구는 부러지고 긁히고..엉망인데..정작 사고 낸 당사자는 가벼운 뇌진탕에 특실 입원까지...”
민영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우는 무섭게 화가 난 표정으로 일어섰다.
“정우 씨?”
“….”
심상치 않은 정우의 표정에 민영은 그가 사고 낸 여자를 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퐈이팅!”
민영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응원했다.
***
특실 문을 열자 창가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앉아 있는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짜증스런 표정이다. 향아를 저렇게 만들어 놓고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표정이다. 눈앞이 빨개진다.
유리는 그를 보고는 어지간히 놀랐던지 담배를 떨어뜨렸다.
“…. 정…. 우 씨….”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창가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정우는 성큼성큼 다가가 주저 없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쫘악!
얼마나 세게 쳤던지 비틀거리던 유리가 주저앉아 버렸다.
정우는 유리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다.
“정우…. 씨”
유리는 잔뜩 겁에 질려 금방이라도 울 듯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았다.
“아니야…. 뭐…. 뭔가 착각한 거야!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운전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이래?”
이 상황에서도 유리는 자기 탓이 아니라고 우겨댔다.
“……. 죽여 버릴까?”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자 유리는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금세 눈에 독기를 품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죽일 테면 죽여 봐! 당신을 사랑해서 그랬어…. 너무 사랑해.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거야? 당신 때문이야! 그 여자가 다친 건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유리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당신은 원래 그런 여자.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그…. 그 삐뚤어진 소유욕 때문에 사람이 죽을 뻔했어! 향아가 죽을 뻔했다고!”
정우는 유리를 마구 흔들어 대며 소리쳤다.
정우는 그녀가 죽었으면 어쩔뻔 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유리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유리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너무 화가 나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래도 겁이 났다. 숨이 막혀왔다.
겁에 잔뜩 질려 부들부들 떠는 유리를 보며 정우의 손에는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 저…. 정우…. 씨…. 그….”
유리가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고 애원하자 정우는 이상하게도 향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디 가지 마….’
순간 정우는 정신이 번쩍 들며 유리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제대로 인식이 되며 손에 힘을 풀었다.
향아에게 가 봐야 한다. 이런 여자와 있기 싫다.
사랑을 믿지도 소유하는 것도 싫어했지만 향아를 만나면서 바뀐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유리가 자신의 배필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넌 죽을 가치도 없어.”
정우는 경멸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에게서 손을 떼었다.
“넌 평생 이렇게 살아. 남 탓만 하면서. 이기적으로 굴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게 아무렇지 않은 너로 살아. 평생을 행복이 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른 채 이렇게 살아.”
유리는 그의 말에 입술이 바르르 떨려왔다. 평생 이 순간만큼 모욕적이었던 때가 있었던가? 자신이 정우에게 이토록 의미가 없던 존재였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널 죽일 수도 있을 만큼 화가 났지만, 지금은 니가 불쌍해 보이는군.”
“뭐…? 내가 불쌍하다구?”
평생 부러운 것 없이 남위에 군림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고 부러움의 대상이 됐으면 됐지 경멸이나 동정의 대상이 된 적은 없는 한유리였다.
“네가 말하는 그 사랑으로는 평생 사랑이 뭔지, 그 사랑 때문에 심장이 간지럽다는 것도, 그 사랑 때문에 심장이 터질 만큼 아파진다는 것도…. 사랑한다고 해서 소유가 당연시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테지.”
“웃기지 마…. 나도 사랑이 뭔지 정도는 알아. 난 지금도 당신을 사랑해!”
유리는 진짜 끝났다는 걸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니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건 원하던 것을 가졌다는 만족감, 뺏겼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분함이겠지.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야. 가르쳐 줘도 모를 그런 감정들을 평생 느끼지 못할 테니까. 그런 감정을 사랑으로 알고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 그게 당신에게 주는 벌이야.”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경멸만이 가득했다.
“나는 향아가 있어서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어. 그런 감정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어."
그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민정우의 눈에는 온기가 가득 돌았다. 유리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정우는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 보고는 돌아서자 문 앞에 한 회장과 준희가 서 있었다.
한 회장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고, 뒤쪽에 서 있는 준희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정우는 한 회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준희가 느릿느릿 따라나섰다.
그가 옆에서 싱글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정우는 준희를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만큼 그에 대한 감정이 풀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놈의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사고 치길 기대했는데 실망이야.”
“꺼져.”
“너 보러 온 거 아냐.”
웃음이 실린 준희의 목소리에 정우는 다시 성질이 솟구치려는 걸 애써 참았다. 그가 바라는 게 말했던 대로 정우가 자제력을 잃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던 정우가 별말이 없자 준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병실에 가니까 향아 씨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 너 살인하러 갔다고 가르쳐 줘서 구경 온 거야.”
준희는 정우의 살벌함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한 대 치고 싶으면 쳐. 맞아 줄 용의도 있어.”
퍽!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우의 주먹이 준희의 배에 꽂히자 준희가 거친 숨을 뱉으며 충격으로 병원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꺅! ”
지나던 간호사와 환자들이 놀라 그들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랐다.
“때리란다고 정말 때리냐?”
준희는 꽤 아픈 듯 쉽게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런 그를 본체만체하고 정우는 걸음을 옮겼다.
“향아 씨는 네 생각뿐이더라. 저런 쪼잔한 자식 어디가 좋다는 건지….”
그 말에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무표정하게 바닥에 앉은 준희를 내려다보았다.
“알아. 그래서 그 정도로 그친 거야. 다행으로 알아.”
그리고는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미소에 올인하고야만 간호사들과 여자 환자들의 한숨만 남았다.
준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망할 자식 같으니….
“얌마! 너 나한테 빚진 거야! ”
심통 부리는 아이 같은 준희의 투정에 정우는 돌아서서 그를 보며 삐딱하게 웃어 보였다.
***
정우가 오자 민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사고라도 칠까 봐 꽤 걱정했나 보다.
“걱정할 만한 일 없어요. 앞으로 걱정할 일도 없구요.”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지만, 한쪽 입술만 살짝 올라간 그의 미소는 왠지 찬바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향아 부모님께는 알려 드렸나요?”
“아직 이요. 마침 친구분들이랑 여행을 가셨는데 연락이 안 되네요. 하지만 모레쯤 돌아오신댔으니 곧 오실 거예요.”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민영 씨도 어젯밤부터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들어가세요. 여긴 제가 있겠습니다.”
“정우 씨 회사는 어쩌구요?”
“로얄 패밀리가 이럴 때 좋은 거죠.”
정우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민영도 따라 웃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에 띄기만 하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말이다.
정우는 향아가 깨어났을 때 옆에 있고 싶었다.
결국, 이 사고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유리 말이 맞는 게 있다. 제일 중요한 사실…. 이 모든 사고가 자기가 아니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향아도 누가 자기를 쳤는지 알고 있습니까?”
“술 취한 여자라는 정도만 알아요…. 그런데 누구예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향아가...”
민영의 물음에 정우는 다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민영은 그런 그를 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향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요?”
민영은 침울해진 정우에게 다시 물었다.
“아까.. 향아가 무사한 걸 알면서 다짐했어요. 다시는 그녀에게 거짓말할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이번 일은 숨겨서 될 일도 아니고 숨겨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그녀예요.”
“좋아요 민정우 씨. 당분간은 향아한테 당신 욕 안 하는 거로 할게요.”
정우는 다소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 민영의 태도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인정해 주는 건가요? 윤태진 씨는 감정이 많아 보이던데?”
“태진이요? 하하하.. 걔가 좀 꽁한 면이 있죠. 그래도 나름대로 향아 생각하는 방식이에요.”
“참, 향아는 어때요? 아직도 자나요?”
“네. 정우 씨는 그만 집으로 가세요. 오늘 더 이상의 면회는 안 된다니까요. 있어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아닙니다. 민영 씨 어제도 여기서 밤새웠는데 오늘은 집에 가서 편하게 쉬어요. 내가 있을게요.”
“그래도 될까요? 내일 일찍 와서 교대할게요.”
잠시 후, 태진이 그녀를 데리러 와 정우가 민영과 그를 배웅해주고 병실로 돌아와 보니 준희가 병실 앞에 앉아있었다.
“면회시간이 끝났다네.”
준희는 꽤 아쉬워하며 병실을 쳐다봤다.
“아무나 면회시켜 주는 줄 아냐?”
“쪼잔한놈. 풀린 거 아니었어?”
“건드리지 마라. 죽도록 패주고 싶은 걸 겨우 참는 중이야.”
정우는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농담할 여유도 있네.”
“앞이...다 캄캄해지더라... 향아를 못 볼까 봐….”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는 정우의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향아 씨는 어때?”
준희의 걱정스러운 말에 정우는 민영의 말이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은 괜찮다는 거로 해석해도 되냐?”
하하하하! 정우는 지나던 사람들이 미친 사람 보듯 힐끗거리는 데도 한참을 웃어댔다.
“어. 다리 부러지고…. 찰과상이 여기저기 나도 여전히 사랑스러워.”
“못 들어 주겠네. 비위 상하려고 그래.”
준희는 정말 비위가 상하는 듯 몹시도 거북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정우는 쑥스러운 척하며 다시 그의 배를 세게 쳤다.
“아야.. 이 자식. 너 일부러 때린 데 또 때렸지?”
“당연하지.”
준희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정우의 신호를 알아채고는 일어섰다.
“갈 테니까 그만 노려봐라. 그리고 향아 씨한테 안부나 전해 줘.“
준희는 몇 걸음 가더니 다시 정우 쪽을 돌아봤다.
“니가 하도 쫌팽이스러워서 행여나 해서 하는 소린데….”
“알아.”
정우가 그의 말을 막았다.
“내가 눈이 돌긴 했지만, 네가 선을 절대 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 그리고 향아도 너한테 다른 감정 없었다는 거 알아.”
“무슨 자신감?”
준희는 다소 김이 빠진 듯 투덜댔다.
“모든 걸 다 잃을 뻔하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무서웠어...그녀를 다시는 못 볼까 봐.”
재수 없는 새끼…. 모든 것이란다. 무서웠단다. 이향아가 모든 것이란다. 진짜 재수 없다.
준희는 쓴웃음을 삼키며 그 자리를 떴다.
*
다음 날 아침, 민영이가 왔을 때 정우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밤새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민정우 씨. 지금 이런 몰골을 향아가 보면 더 걱정해요. 향아 걱정시키고 싶어요?”
“그래도…. 잠깐이라도 향아 눈 뜨면 보고 가고 싶어요.”
“간호사가 그랬잖아요. 깊이 잠들었다고. 깨워줘요?”
“…. 아닙니다. 그럼 회사 들러서 일 처리해 놓고 다시 올 테니까 민영 씨도 어디 가면 안 됩니다?”
“네~ 네~ 여기서 망부석이라도 될 테니 볼 일 충분히 보고 오세요.”
마지못해 자리를 뜨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 그를 보며 민영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정말 못 말리겠네. 저런 사람이 모진 소리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그동안 안 보고 있었대?”
정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사무실로 돌렸다. 가서 대강 일을 보고 와야 다시 내일 온종일 그녀 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물….”
잠에서 깼는지 향아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깼어?”
민영의 향아의 입에 빨대가 꽂혀 있는 물잔을 가까이 대어 주었다. 그녀가 눈을 떠서 정말 다행이다. 잠든 향아의 모습을 보는데 눈을 뜨지 못할까 봐 겁이 나던 참이었다.
향아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하더니 실망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정우 씨 좀 전까지 있다가 일 처리하고 온다고 갔어.”
“아…. 진짜지? 내가 어제 꿈꾼 거 아니지?”
향아는 걱정했었다. 어제 정우가 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했던 게 꿈이었을까 봐 겁이 났었다.
“그래. 절대 꿈 아니야. 눈 뜨자마자 정우 씨부터 찾다니…. 우정보단 사랑이 먼저다 이거지?”
민영은 밉지 않게 삐죽거리며 향아를 놀렸다.
향아는 기쁨으로 자꾸만 입이 귀에 걸린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그를 보지 못한 게 서운하기도 했다.
“정우 씨가 계속 있다가 너 눈 뜨는 거 보고 가겠다는 걸 내가 억지로 보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거든.”
“잘했어. 고마워 민영아.”
“진짜 고맙기는 하니? 어찌나 정우 씨 안 보이니까 실망을 하시던지요. 나 서러워서 울 뻔했어.”
“좀 봐줘~ 나 환자잖아~”
“말 안 해도 너 환잔 거 알아. 내가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하아….”
다시 민영이의 몸이 떨려 온다.
“나 정말 괜찮아. 그런데 사고 낸 그 여자…. 특실에 있다고 했나?”
“어? 어…….”
“내가 이 꼴이래서 갈 수는 없고, 볼 수 있을까?”
“오라고 한다고 올 여자가 아닌 것 같던데?”
“뭐? 정말 재수 만렙 일세! 사고 낸 주제에 자기는 특실에 누워있고…. 나는 일반 병실에 누워있는데 최소한 와서 죄송하다고는 해야 할 것 아냐? 그래도 용서해 줄까 말까인데!”
“그래도 1인용이잖아.”
“그래도 특실은 아니지!”
“향아야…. 그 여자….”
민영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말할지 말지 망설였다. 이 얘기는 정우가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일단은 그 여자는 생각 마. 그게 뭐가 급해? 정우 씨 이야기 하자. 정우 씨 너 다친 거 알았을 때 어땠는지 자세히 말해 줄까?”
민영의 말에 향아의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나…. 그 사람 그러는 거 처음 봤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더라.”
“그러니까. 너 너무 많이 좋아하더라니까. 내가 샘이 날만큼!”
“또 보네요. 이향아 씨”
갑작스레 들리는 차가운 말투에 민영과 향아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에 빈틈없이 붙는 호피 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유리였다.
“여긴 무슨 일…….”
설마 한유리는 아니겠지…. 아무리 사랑에 미쳤다 해도 사람을 일부러 칠 수가 있겠어?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사고의 책임자라 할지라도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을까?
향아의 표정이 꽤 적나라했는지 유리는 금방 그녀의 궁금증에 답을 해줬다.
“퇴원하기 전에 당신 얼굴은 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퇴원하기 전…? 그럼 당신이 사고….”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 거예요. 그런 거 바라지도 않겠지만.”
“…….”
저…. 저…. 런…. 싸가지 없는…. 향아는 그제야 왜 사람에게 콧구멍이 두 개인지 알 것 같았다. 아직 고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당장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아 바보같이 입만 뻐끔거리고 있다는 거다.
“그럼 왜 왔어요? 고소를 하나 안 하나 확인하러 온 건가요?”
기막혀하는 향아를 대신해서 민영이 대신 나섰다.
“하고 싶으면 해요. 그깟 거 겁 안 나요. 단지 당신을 다시 보고 싶었어요. 혹시 내가 보지 못한 대단함이 있었나 해서. 무슨 수로 민정우라는 꽤 쓸 만한 남자를 엮었는지 알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다시 봐도 별 볼 일 없군요. 그렇다면 민정우도 결국 별 볼 일 없는 흔하디흔한 돌멩이였군요.”
“이것 봐요!”
민영이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화가 나 벌떡 일어섰다.
“민영아, 괜찮아. 나 이제 괜찮아.”
향아는 정말 괜찮았다. 정우와의 사랑을 확인한 지금에는 아주 조금은 한유리라는 여자가 가진 대단한 배경에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와 마주친 지금이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술을 부리는군요. 간절히 원하던 장난감을 갖지 못한 아이가 애써 아닌 것처럼 구는 것 같아. 당신말대로 고소 같은 거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렇게 해서라도 그 꼴 같지 않은 정신을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그렇게 하겠지만…. 아마 정우 씨도 당신이 사고를 냈다는 걸 알았을 때 죽이지 않은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뭐…. 뭐라구?!”
“정우 씨….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당신을 그냥 뒀다는 건 그게 벌이기 때문일 거야. 당신은 평생 모르겠지? 정우 씨와 내가 서로에게서 찾은 게 뭔지? 다시 생각해보면 당신에게 고마워, 자칫하면 놓쳐버릴 뻔한 걸 당신 덕에 찾았거든.”
유리는 정우에게서 느꼈던 모멸감보다 더 큰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저 여자가 민정우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자신은 절대 못 할 감정을 두 사람은 공유하고 있는 거다.
“나가줘. 보다시피 난 쉬어야 할 사람이야.”
*
그날 오후 정우가 다시 왔을 때 향아는 또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자는 약만 주나…. 어떻게 된 게 올 때마다 자는 거야?”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정우의 태도에 가게로 가려고 짐을 챙기던 민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잘 만도 해요. 피곤할 거야. 아침부터 한 건 올렸거든요.”
“네?”
“그 여자가 왔었어요. ”
“유리가요?”
순식간에 정우의 인상이 살벌하게 바뀌었다.
“거들먹거리며 왔다가 본전도 못 찾고 갔어요. 향아 완전히 멋졌거든요. 정우 씨도 봤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너무 아깝다.”
민영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세워 보였다.
“무슨 말입니까?”
민영이 전해 준 얘기를 듣고는 정우는 다시 한 번 미친놈처럼 웃어댔다.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은 점점 더 커지는 것이었나 보다.
그녀가 그날 자신의 앞에 와서 앉아 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리고 그날 자신을 그곳으로 불러낸 형에게도 고마웠다. 자신들을 만나게 해준 운명에도 감사했다.
“너 어제오늘 거의 사무실에 없었다며?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정민이가 피곤해 보이는 정우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아들이긴 해도 집안에 걱정을 끼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정우가 피곤한 모습으로 집으로 온 것이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대낮에 나갔었다는데 밤이 늦어서야 들어왔다.
정우는 자신을 걱정스레 보는 가족들을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저런 일들이 좀 많았어.”
정우가 자리에 앉자 형수가 그의 앞에 녹차를 내려놓았다.
“형수님도 앉으세요. ”
식구들은 긴장과 호기심으로 그를 주시했다.
“저, 결혼합니다. 그러니 어머니, 더 이상 애쓰지 마세요.”
하고 싶다도 아닌, 하겠다는 통보다.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니…? 설마…. 그때 그…. 아가씨니?”
어머니의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설마설마하는 눈빛을 보자 정우는 심술 맞게도 웃음이 났다.
“사고가 있어서 병원에 입원 중인데 곧 소개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향아에게는 서둘지 않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 어머니가 조급해하며 여자들을 소개해 주시려 하는 것이 싫었다.
정우는 폭탄을 떨어트리고는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거실에는 당황스러운 침묵만 흘렀다.
“…. 여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정우가 결혼하겠다잖아요!”
“….”
“어머니. 저도 그 여자 잠깐 봤는데 인상은 좋았어요. 너무 지레 걱정하지 마세요.”
정민의 말에 호기심 가득한 공격적인 시선이 와서 꽂혔다.
아…. 괜히 말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
다음날 오전, 정우는 의사를 만나 99%의 협박과 1%의 애원으로 병실에 있는 것을 허락받았다.
환자를 절대 피곤하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에 맹세를 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병실로 오자 마침 환자들의 식사시간이라 그가 직접 식판을 들고 향아의 병실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식판을 올려놓은 다음 의자에 앉아 잠든 향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병원 밥 맛없다던데 다른 거로 사 올까? 일어서려는데 향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가위에 눌린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괴로워했다.
“…. 안돼…! 안돼…! 아….”
“향아야! 향아야…! 괜찮아 일어나, 일어나….”
정우는 그녀를 안고는 달래듯 흔들어 깨웠다. 말로는 괜찮은 것처럼 했지만 애써 그런 척한 것뿐이었다.
“정우 씨….”
향아가 아직 꿈에서 덜 깬 듯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꿈이야. 괜찮아. 괜찮아.”
향아는 주삿바늘을 꽂지 않은 다른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금씩 그녀의 숨결이 안정되어 갔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정말 미안해….”
정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볼에 난 생채기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뭐가…. 당신이 사고 낸 것도 아닌데. 미안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 하지 마”
“원인은 나 때문이잖아.”
“그래도…. 사고가 나서 당신이 이렇게 내 곁에 있잖아. 난 그렇게 생각하는걸.”
“당신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사고가 나지 않아도 당신과 헤어질 생각 따윈 없었어. 화가 났지만 단 한 순간도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마. 알았어?”
정우가 속상해하며 말했다.
“…. 응. 알았어.”
끄덕이는 향아를 보며 정우는 거칠어진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심호흡을 했다.
“…. 밥 먹어야지. 병원 밥 싫으면 다른 거 사올게”
“됐어. 이럴 때 병원 밥 먹어보지 언제 먹어보겠어.”
향아의 말에 정우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침대 머리를 조절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죽을 떠먹였다.
“불편해. 내가 직접 먹을래.”
정우가 먹여주는 것이 불편했던지 그녀가 겨우 한 숟가락을 받아먹고는 숟가락을 달랜다.
“불편해도 참아, 자.”
정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반찬을 집어 올린다.
“불편해도 참으라니?!”
향아가 발끈해도 정우는 기어이 반찬을 먹였다.
“누가 다치래? 그러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지.”
“기막혀…. 당신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먹어, 당신이 빨리 나아야 잡아먹지.”
향아가 기막혀하든 말든 정우는 죽을 떠서 입으로 후후 불며 식히고 있었다.
“나랑 결혼할래?”
향아가 불쑥 말했다.
“……. 뭐?…! 다시 말해 봐….”
그녀의 돌발발언에 정우는 불던 자세 그대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말 웃긴 포즈…!
“재방송은 없어.”
향아의 얼굴이 잘 익은 고구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 정말…. 정말이야?”
“자꾸 물어보면 취소해 버린다.”
쑥스러움으로 그녀는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청혼이 이렇게 쑥스러운 거였던가? 그래서 그녀가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가 기분 나빠했나 보다.
그의 표정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왜 그녀가 마음이 변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는데 겨우 하룻밤이 지나자 그녀가 되려 청혼을 했으니 당연히 궁금하겠지….
“아까 가위에 눌렸다가 깨어났을 때 날 안고 있는 당신을 보고 그때 생각했어, 살아가면서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그냥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구…. 그런 생각이 들었어.”
향아는 시트를 쥐었다 꼬았다 팽팽하게 당겼다 하며 초조함을 견뎠다. 어려운 고백을 했는데 정우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와 마주친 그의 시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 분명히 해.”
갑자기 그의 마음이 변한 걸까? 향아는 차가운 손이 자신의 심장을 서서히 움켜쥐고 비트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지금…. 당신이 내게 청혼한 거 맞지?”
“…….”
심장이 어찌나 미친 듯이 펄럭거리던지 그녀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는 그런 그녀를 뚫어지게 보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살짝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자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그는 아이가 맛있는 초콜릿을 아껴 먹는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는 것처럼 그녀의 입안과 혀를 맛보았다.
향아는 한 손으로 그를 더욱더 가까이 당겼다.
둘 사이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됐고 금방이라도 온몸이 타 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향아는 침대에 눕다시피 해 있었다.
“무르기 없기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 놀랬잖아….”
“우리가 더 놀랬다. 머하는 기고?”
헉…. 엄마다!
향아는 자동으로 정우를 다시 홱 밀쳐 버렸다. 이번에는 정우도 적잖이 당황해 급히 몸을 뗐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열린 병실 문 앞에는 황당해 하는 엄마와 무시무시한 표정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엄마는 향아와 정우를 번갈아 보더니 정우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한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뜻이다.
“니…. 니…. 미칬나? 아무리 남자가 음써도 그러치! 오데 유부남이랑 지랄이고! 지랄이!”
그렇다…. 이제 생각났다. 그때 엄마의 오해 방지를 위해 정우를 유부남이라 했었지….
정우는 향아 어머니의 뜻 모를 소리에 향아가 찔리는 표정을 짓자 사건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래처 사장에서 멈춘 게 아니라 유부남까지….
정우를 바라보는 향아 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이다! 그게 아니고….”
향아의 때늦은 변명이 시작됐지만 이미 아버지는 당신보다 한참 큰 정우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이 노무 새끼가…. 어디 할 짓이 업써서…. 순진한 처녀나 꼬시네! 갱찰 불러라! 머하노? 퍼뜩 불러라! 퍼뜩!”
“아버님, 진정하세요, 오해하신 거예요. 저희 결혼합니다.”
“머라꼬?”
“에나가?”
에나? 에나가 뭐지? 아기를 낳으라는 건가? 벌써? 아버님, 어머님이 성격이 급하시구나….
정우는 좋아서 웃음이 났다.
엄마와 아버지의 화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고, 눈에서는 광채를 뿜어내셨다.
저 눈빛의 의미를 알지…. 이제 남은 건 간단한 호구 조사와 양가 상견례, 그리고 결혼식이다.
두 분의 기대 어린 물음에 정우는 향아의 손을 꼭 잡고 소유욕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이제부터 제 여잡니다.”
“그라모는…. 어짜지?”
그녀의 엄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와그라노?”
“그게…. 전에 집에 왔을 때 야가 선을 밨다 아입니까? 그때 그 총각은 우리 향아가 좋다고 했다면서 서울서 또 만날끼라고 했다는데?”
엄마의 말에 아버지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우리 향아가 갑자기 복이 터지삤네~허허허허”
아버지는 노처녀 딸의 뜻밖의 인기에 꽤 기분이 좋았다. 시집은 못 갈 거라는 확률이 높아지며 당신의 시름도 깊어지기만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정우의 머릿속은 폭발 직전이었다. 또 선을 봐? 다치지만 않았어도 혼쭐을 내줬을 거다. 정우의 적나라한 눈과 마주친 향아는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웃어? 웃었다 이거지?
“잠 좀 편하게 자보려고 했던 거야.”
정우가 어이없어했다.
“뭐?”
“먼소리고? 향아 니 그런기 있었나? 아이구~가시나. 나이 먹어서 별게 다 있다. 그나저나 그 총각이 상심이 클 낀데…. 우짜노? 다른 처녀 한번 알아바 조야겠다.”
말은 미안해하시는데 표정만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엄마였다. 엄마의 시선은 듬직해 보이는 정우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
햇빛이 따끈따끈하던 6월의 오후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야유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양가 상견례가 끝난 지 두어 달이 겨우 넘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사고라도 친 거 아니냐고 주변에서 의심하자 정우는 한시라도 빨리 별을 따려고 한다며 넉살 좋게 넘겼다.
향아는 행복했다.
솔직히 아직도 결혼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두렵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식 내내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이 남자와 라면 얼마든지 가볼 만한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례사가 끝나고 사회자ㅡ원래는 준희였는데 정우가 준희는 믿을 수 없다며 기석으로 바꾸게 했다ㅡ가 맹세의 키스를 하게 했다.
정우는 두 손으로 향아의 얼굴을 잡고는 축하객들이 민망해할 정도로 열렬한 키스를 했다.
“이향아, 앞으로 한눈팔면 죽어!”
“민정우, 사랑해”
두 사람은 둘만의 사랑의 협박과 맹세를 속삭였다.
틀림없이, 그리고 당연하게 앞으로도 미친 듯이 싸우고, 미친 듯이 사랑하며 살 것이다. 어쩌면 왜 결혼을 했냐며 소용없는 한풀이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민정우와 이향아는 서로가 아니면 안되니까.
아라비카2017.05.21 22:14
얼큰삼촌2017.05.21 21:49
짬톨2017.05.21 20:24
짬톨2017.05.20 23:08
피래미2017.05.20 19:30
아라비카2017.05.19 23:00
투니버스2017.05.19 19:06
DJ소다2017.05.19 01:10
DJ소다2017.05.19 01:07
DJ소다2017.05.19 01:05
DJ소다2017.05.19 01:02
코스모2017.05.18 21:23
짬톨2017.05.18 19:07
손오공2017.02.23 21:13
레시피여왕2017.01.30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