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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소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

by 로망s on Jan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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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화 - 안녕하세요 남편님

다빈

 "우와 떨려…. 상대가 누굴까…. 너무 어리면 어떡하지…. 설마 아이돌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후유…."

아무리 가상 결혼 프로라고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첫 촬영이라니! 

다빈은 실제 소개팅 보다 백만 배쯤 더 가슴이 떨렸다. 

얼굴이 알려진 배우라 그동안 소개팅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다빈

 “누군지 좀 알려주고 시작하지. 첫 만남부터 그냥 카메라를 돌린담. 너무 하네! 너무해.

다빈

 “이상한 사람 나와서 맘에 안 들어 하는 표정 화면에 다 잡히면 어떡하지….”

다빈

 “너무 애가 나와서 이모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다빈

 “진짜 부부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할 텐데, 친하지 않은 남자 앞에선 나 완전 목석인데…”

이런저런… 오만 가지가 다 걱정이다.

다빈

 “아……. 몰라…."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 

과연 상대는 누굴까, 너무 나이 차가 많이 나면 어떡하지, 상대가 내 타입이 너무 아니면 어떡하지, 부부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방송인 거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걱정이 앞선다. 

미라

 “그렇게나 떨려? 데뷔 몇 년 찬데 그렇게 떨고 그래” 

걱정이 늘어진 다빈을 보던 매니저이자 절친인 김 실장이 어차피 방송인데 새삼 뭐 그리 떨고 그러냐는 표정이다.

다빈

 “아…. 이게 그냥 드라마도 아니고, 실제잖아…. 거기다 부부… 아…. 내가 결혼을 해 봤어야지…. 그런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것도 연하…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남편…. 난 당신 아내 유다빈 이랍니다… 뭐 이런 거잖아… 아우…”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지는 걸 보니 다빈이 긴장하긴 했나 보다. 

다빈

 “상대가 너무 어리면 어떡하지? 나 오늘 어때 보여? 화면에 너무 나이 차 나게 보이면 안 되는데… 나 그래도 30대까지로는 안 보이지?. 아닌가? 30대 초반 정도로는 보이나?” 

차라리 애걸하는 눈빛이다.

미라

 “어이구…. 우리 유 배우님…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너 초 동안이야…. 너 나이 모르고 보면 그냥 20대 중반이야 걱정하지 마…”

걱정하는 다빈을 안심시키는 매니저이자 친구 미라다.

다빈

 “그렇지… 아직은 나… 괜찮지…?”

다빈이 이런 오만 가지 걱정으로 속사포 같은 걱정을 늘어놓는 동안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어느새 촬영장에 다다랐다. 

미라

 “자… 촬영장 다 왔다…. 내리면 바로 카메라가 돌 거야… 상대방이 먼저 도착해 있을 수도 있고, 네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그동안 꽁꽁 얼어있던 연애 세포 다 동원해… 시청자가 보기에도 충분히 달달한 신혼부부 그림… 알지?”

다빈이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라

 “혹시 알아, 시청률 잘 나와서 이 프로 덕분에 데뷔 10년 만에 확~ 뜰지”

격려의 의미로 다빈의 어깨를 한 번 토닥거려 주고는 미라가 차에서 내렸다. 

다빈은 ‘휴…’하고 숨을 크게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빈

 “그래 그냥 연애한다 생각하자 까짓거. 맘 가는 대로 한번 해 보지 뭐”

***

차 문을 열고 내리는데, 다빈의 눈앞에 갑작스레 내밀어 지는 꽃다발. 

‘어어…. 이게 뭐지’ 

한결

 “안녕하세요….” 

어색한 듯, 쑥스러운 듯….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본연의 달콤한 미소를 환하게 드러내며 꽃다발을 내민 건, 김한결이었다.

한결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남편… 입니다. 맘에 드시나요? 하하.” 

헉, 김.한.결. 이다!!

맘……에드냐고??

당연하지!!

지금 대한민국에 당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할 여자가 몇이나 되겠어!!

어머머, 나 혹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행운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한결이 차에서 내리는 다빈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했다. 

한결은 다빈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괜찮은 남자…. 로 보이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인기가 아무리 하늘 찌를 듯 높다고 해도, 그녀 또한 연예인. 

인기 정도라는 게 거품이란 걸 이미 알고 있을 터. 

더구나 동종업계에 있다 보니 오히려 같은 연예인에게는 관심 없어 하는 여자 연예인도 많지 않은가.

다빈의 마음속 환호를 알지 못한 채, 한결 역시도 두 사람의 첫 만남이 걱정됐던 터다. 

김한결. 아이돌 출신으로 시작했다가 음악프로는 물론, 예능에서 호감을 얻어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니시리즈 서브 남자주인공으로 발탁,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단연 영화계 진출. 개봉 한 달 반 만에 천만 관객을 끌어들이며 그야말로 지금 가장 핫 한 대세 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가수출신 배우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상대역이라니… 다빈은 기대 이상이라 좋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 뭐라 인사를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빈

 “아…. 네… 꽃까지 준비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크크 힛…, 처음 뵙는 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하기만 한 다빈과는 달리, 예능 프로를 많이 해서인지 긴장한 표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결이다. 

연하임에도 자신을 대함에 있어 어리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오빠 미소를 장착한 채로, 어색해 하는 다빈을 자연스럽게 리드해 갔다. 

한결

 “이제 제가 남편인데…. 하하, 어떻게 제가 마음에 안 드신 건 아닌지……?”

다빈

 “아뇨, 그럴 리가요.” 

다빈은 한결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다빈

 “저야 맘에 무척 드는데… 괜히 한결 씨 팬들에게 제가 욕먹는 건 아닐지…”

한결

 “제 팬들 그렇게 속 좁지 않아요.” 

다빈을 향한 달달한 미소에 얼어붙은 빙하도 녹지 않을까 싶은 다빈이다. 

한결

 “아마 아내…로 아, 이렇게 불러도 되죠? 우리 이제 부부니까… 하하…. 부…. 인…. 을 제 팬들도 많이 좋아해 줄 것 같은데요…”

‘부.인.’ 이라니. 낯설지만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는 한결의 낮은 중저음이 마치 마법의 주문인 듯 더욱더 빠져들게 했다. 

다빈

 “아… 그럼 정말 다행인데요… 전 사실 이 프로가 연상연하 부부 콘셉트라 걱정이 좀 됐거든요…. 너무 어리신 분이 나와서 괜히 욕만 먹는 건 아닐까 해서요… 근데 저보다 얼마나… 어리…시죠?”

한결

 “저, 28…인 데요…. 아내님은 33이시죠? 하하”

다빈

 “에고… 제 나이까지 밝히실 필요는 없는데…… 그러니까 저보다 5살이나…. 어리시네요” 

5살 연하. 막상 나이를 들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화면에 과연 연인처럼, 부부처럼 보이기는 할까. 

내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건 아닐까. 

괜히 시작했다가 오히려 반응이 안 좋으면 어떡하지….

막상 한결에게서 나이를 들으니 더 난감해졌다. 

한결

 “아이 뭐…. 나이가 중요한가요… 부부 사이에 허허… 이제부터 선배라 생각 안 하고, 어찌 됐든 부부니까 편하게 대하겠습니다… 괜찮죠?”

다빈

 “아…네 그럼요”

한결

 “부…인…. 이랑 부부가 돼서 전 아주 좋은데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다빈

 “네…. 감사합니다. 제 팬이 많지가 않은데 팬이셨다니… 거짓말이죠?”

한결

 “아니에요. 진짜예요. 데뷔가 단막극 <사랑에 얽힌 보고서> 시잖아요. 남자 주인공 짝사랑하는 역할로. 그때 저 완전히 반했었거든요”

캠퍼스 연인이었던 남자친구가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며 돌연 이별을 통보해 오고, 상심에 빠져있던 다빈은 우연한 기회에 <사랑에 얽힌 보고서>란 단막극에 조연으로 출연했었다. 

거기서 주인공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로 등장했었는데, 그 이미지가 나름 괜찮았었는지 이후 방송을 본 PD들의 연락이 와, 지금까지 10년째 배우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데뷔작을 알다니… 저쪽도 상대가 나인 줄은 몰랐을 테니 검색을 해서 안 것은 아닐 테고 진짜 내 팬이라도 되나? 어쨌든 팬이라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한결

 “우리가 오늘 처음 봤지만, 어쨌든 부부니까… 제가 선배님이나 누나라고 부를 순 없고… 호칭을 정해야 할 텐데요…. 저를 뭐라고 부르실래요?”

다빈

 “네? 아…. 호칭이요….”

연기할 때 ‘여보’ ‘당신’ ‘자기’란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다빈

 “글쎄, 뭐라고…. 부를까요? 저…. 는 뭐라고 부르실……. 건데요?”

한결

 “음…. 그냥 ‘부.인.!’ 이렇게 부르려고요. 우리 이제 부부잖아요. 하하”

다빈

 “네…에… 그럼 저도… 남편…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아… 쑥스러워….” 

남. 편.

김한결을 ‘남편’으로 부르다니. 

아, 부끄러워 부끄러워.

쑥스럽지만, 실제 남편이 된 것도 아니지만, 그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이 프로가, 

고.맙.다, 아주 마음에 든다. 

이거 일이 아닌, 사심 채우기 방송이 되는 건 아닌지 몰라. 히히히

한결

 “그러면 우리 한 번 불러보죠… 부…이인….”

한결이 먼저 다빈을 향해 ‘부인’을 선창했다. 

쑥스러운 듯, 사랑스러운 듯, 기대에 찬 듯….

한결은 그렇게 먼저 부인을 부른 후, 어서 그쪽도 불러 보라는 표정으로 다빈을 바라봤다. 

다빈

 “네… 나…. 암…. 펴…언….” 

쑥스러움에 몸들 바를 몰라,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남편을 불렀다. 

다빈은 이게 뭐라고, 드라마에서 숱하게 불렀던 ‘남편’ 소리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살짝 다빈을 품에 안아주는 한결이다. 

벌써 포옹을? 싶었지만… 연인의 포옹이라기보다는 지인의 다독임 정도로 보이는 가벼운 포옹인지라 다빈도 괜한 오해는 말자며 마음을 붙잡았다.

*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담고, 이어 앞으로 살게(?) 될 신혼집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자 벌써 밤이 꽤 깊어졌다. 

한결

 "음, 그런데 부인… 졸리지 않아요?" 

한결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1시, 꽤 늦은 시간이었다. 

다빈

 “난 아직은 뭐 괜찮은데, 남편…님 졸린가 보네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한결과 같이 있으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던 다빈이다. 

‘촬영은 이제 끝나는 건가?’

다빈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높이의 한결을 올려다봤다. 

한결

 “네…. 오늘 부인 처음 만난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선지, 좀 피곤하기도 한데, 우리 그만 잘까요?”

다빈

 “자….? 자자…. 구요?? 진짜로? 여기서요?”

한결

 “아니, 뭘 그렇게 놀래요, 우리 이제 부부니까 같이 자는 게 당연하지”

뭘 놀라느냐며 당연하다는 한결의 말은, 다빈을 놀리는 눈빛이 분명했다. 

그런데 정말 잠까지 자는 건가?

그동안 드라마를 찍으면서 잠자는 장면을 촬영하며 남자 배우와 한 이불 속에 누운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깐 카메라가 돌아갈 때뿐이었다. 

그런데 여긴 가상 부부 프로라고 진짜 잠까지 자는 건가? 

오늘 처음 본 남자와 그것도 저렇게나 멋진 김한결과 함께 잠을 잔다??

도대체 잠이 오기나 하겠어!

잠이 오는 건 둘째치고, 카메라가 안 돌아갈 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해?

아니 아니지, 잠결에 내가 인형인 줄 알고 끌어안기라도 하면 어떡해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화 - 동침

취침에 들어가는 장면은 무인 카메라로 대신하겠다며 모든 스태프가 자리를 떴다. 

이제 안방을 비롯해 거실 등 몇 군데에 장착된 무인 카메라만 있을 뿐, 

오롯이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떠나기 전, 신 PD는 카메라 위치를 알려주며, 자연스러운 모습을 요구했다. 

신혼 첫날 밤, 첫 동침(?)을 담는 장면이니만큼

첫날 밤의 설렘과 떨림, 달콤함을 잘 살려달라고. 

무인 카메라는 한결과 다빈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며 두 사람을 담아냈다. 

이게 있단 걸 고마워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감시(?) 아닌 감시를 받는 가운데, 두 사람의 첫날 밤이, 아니 촬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결

 “누가 먼저 씻을까요? 부인…이 먼저 씻을래요? 내가 먼저 씻을까요?”

다빈

 “씨…씨…. 씻느냐고요? 아… 네, 씻긴 해야죠…”

대체 뭘 상상한 거야, 유다빈!

잠자기 전, 메이크업한 얼굴은 씻어야 할 거 아냐

한결의 얘기가 무슨 말인지 알고 있음에도, 

첫날 밤(?), 먼저 씻으라는 한결의 소리는 이상하리 마치 야하게 들렸다. 

다빈

 “그럼 제가 먼저 씻을게요”

쑥스러움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다빈이 욕실을 향했다. 

한결

 “저기 잠깐!”

다빈

 “네??” 

다빈이 돌아봤다. 

한결

 “여기 수건… 아까 욕실 안에 보니 수건이 없더라고요”

다빈

 “아… 네… 고마워요”

부끄러우면 지는 거다.

이건 어디까지나 방송. 

진짜, 둘이 첫날밤이라도 치를 듯한 이 표정, 이 반응… 이거 오버야, 오버!

오버하지 말자,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듯 당당하게~ 흠흠!!

세면대에서 거울을 보며, 찬물을 끼얹은 다빈이 스스로 다그쳤다. 

다빈은 잡생각을 없애듯, 다른 날보다 더 빡빡 얼굴을 문지르며 세안을 시작했다. 

방송용으로 진하게 얼굴을 덮었던, 메이크업이 남김없이 지워졌다. 

마지막으로 찬물을 한 번 더 얼굴에 끼얹은 다빈이 얼굴을 들어 거울을 쳐다봤다. 

그야말로 쌩얼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 쌩얼!'

이 얼굴이 그대로 방송을 타는구나.

김한결에게도 그대로 보여줘야 하잖아. 

잡티가 그대로 보이는 보이네. 비비라도 바르고 나갈까?’ 

배우가 된 이후에도 촬영이 아니면 굳이 진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을 만큼 피부가 좋은 다빈이었다. 하지만 막상 민얼굴로 카메라 앞에, 한결 앞에 서자니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에라 모르겠다, 기초 제품으로 보습만을 준 다빈이 결심한 듯 욕실 문을 열고 나섰다. 

다빈이 씻는 동안, 침대에 앉아 기다리던 한결에게도

처음 겪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는 둘만 있는 침실, 물론 무인카메라가 촬영하고 있긴 하지만…!

한 여자가 욕실에서 씻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유다빈이.

아, 이런 기분이구나.

사랑하는 여자가 씻고 나오길 기다리는 기분이.

평소 느껴보지 못한 설렘에, 기대에, 한없이 떨려오는 심장을 멈출 수 없는 한결이었다. 

비록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안을 마친 다빈이 맑고, 깨끗한 민낯으로 한결을 쳐다봤다. 

그런 그녀를 미소로 쳐다보던 한결이 말을 이었다. 

한결

 “화장 지우니까, 훨씬 예뻐요”

다빈

 “에이, 거짓말” 

접대용 멘트라 생각했지만, 듣기 좋았다. 

한결

 “진짠데. 화장하기 전보다 훨씬 어려 보이기도 하고.”

다빈

 “푸힛.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잘 참 알아…”

다빈

 “근데 그건 뭐에요?”

한결

 “우리 커플 잠옷이요. 자, 받아요. 난 씻으면서 갈아입을 테니까. 우리 아내님도 갈아입고 기다려요”

다빈

 “어머,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요? 커플 잠옷이네”

한결

 “첫날 밤인데 그냥 츄리닝 입고 자는 건 또 아니잖아요, 하하.”

다빈에게 잠옷을 건네고는, 자신의 잠옷을 들고 한결은 욕실을 향했다. 

다빈은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잠옷을 펼쳐 보았다. 

얇고 보드라운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분홍빛 실크 잠옷이었다. 

카메라를 피해 방을 나간 다빈은 한결이 건네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얼마 후, 젖은 머리를 털면서 한결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 역시도 같은 디자인의 파란색 잠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결

 “하하…. 입었네요. 잘 어울려요”

다빈

 “남편님도요… 푸힛”

씻기도 다 씻었는데, 이제 뭘 한담?

어색한 정적이 다시 두 사람을 에워쌌다. 

한결

 “어유, 그런데 좀 춥지 않아요? 잠옷이 얇아서 그런가…”

다빈도 그러고 보니 얇은 잠옷 때문인지, 조금 으슬으슬하기는 했다. 

봄이긴 했지만, 밤은 아직 추워 보일러를 켜야 하는 정도의 날씨. 

하지만 촬영장인 이곳은 아직 난방까진 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한결

 “우리 그럼 간단하게 와인이라도 한잔할까요?”

다빈

 “네. 좋죠”

한결

 “기다려요. 내가 간단히 준비해 올게요”

주방으로 나간 한결이 와인과 치즈 그리고 간단히 만든 카나페를 들고 들어왔다. 

한결

 “자, 우리 부인… 한 잔 받아요”

다빈이 두 손으로 잔을 받아 들자, 

한결

 “제 부인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이 다빈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기분 좋은 멘트를 날렸다. 

‘나야말로!’

어떡하다 보니 이 프로에 출연해서, 첫 만남에 동침까지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다. 

아니, 촬영을 떠나 그야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다. 

나를 바라보는 하트 충만한 저 눈빛이 진심이든, 방송용이든……

다빈

 “저도…, 제 남편…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다빈 역시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한결

 “자, 그럼 건배!”

한결이 잔을 들어 보였다. 

짠~, 다빈이 한결의 잔에 자신의 잔을 살짝 부딪쳤다.

그리고는 입으로 한 모금 마시려 하자

한결이 다빈의 팔을 붙잡았다. 

한결

 “아니, 지금 혼자 마시려고”

다빈

 “네? 그럼?”

한결

 “에이, 우리 아내… 눈치도 참 없다. 이럴 땐, 러브샷을 해야죠. 자, 다시 건배”

한결은 자신의 팔을 끼라는 듯, 팔을 들어 보였다. 

다빈도 좀 쑥스럽긴 하지만, 냉큼 한결의 팔에 자신의 팔을 엇갈리게 끼었다. 

진짜 연인처럼, 부부처럼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사랑을 가득 담은 하트 눈이 되어 한 잔을 들이켰다. 

한결

 “아, 근데 우리 이제 부부도 됐고 하니까 말을 놓는 게 어때요?”

다빈

 “아… 네… 그…. 그럴까요?”

한결

 “어린놈이, 대 선배한테 말 놓는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죠?”

다빈

 “아, 아뇨…”

손사래를 치는 다빈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선배’나, ‘누나’라고 부르면 거리감에 그게 더 씁쓸할 뻔했기 때문이다. 

5살이나 어린 한결이었지만, 그저 자신을 여자로 봐주길 바랐다.

그저 방송뿐이라 할지라도…….

한결

 “좋아. 그럼 지금부터 말 놓기. 부인 한 잔 더 받아”

오늘 처음 봤지만, 겨우 반나절 만에 말을 했지만,

5살이나 어린, 데뷔 년 차로 따지면 한 참이나 후배였지만

그의 반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살갑게 들려 

‘그와 함께 있는 이 밤이 끝없이 계속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빈

 “응, 남~~편~~도 한 잔”

그렇게 깨소금 냄새 폴폴 풍기는 다정다감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연출하며 

한두 잔의 와인이 오가고 나자 시간은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한결

 “아유, 부인 이제는 정말 자야겠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다빈

 “아, 그래… 그럼… 그럴까?”

다시 잠자리 얘기가 나오자 다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빈

 “그럼, 어떻게 자야…되지?”

한결

 “음, 난 침대에서만 자서 바닥에서는 허리가 아파서 못 자”

‘그렇다면 내가 바닥에서 자야 하나?’

다빈은 일어나 이불을 꺼내기 위해 장롱문을 열며 말했다. 

다빈

 “그래, 그러면 남편이 침대에서 자. 내가 바닥에서 자지 뭐”

그런데 이불장까지 스태프들이 신경을 못 썼는지 장롱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결이 놀리듯 말했다. 

한결

 “아이고, 어쩔 수 없이 같은 침대에서 자야겠네. 설마 이불도 없이 바닥에서 잘건 아니지? 히히”

난감했다. 아, 어떡하지, 그래 뭐 대범해지자. 어차피 방송이잖아. 

다빈

 “그래 그럼, 침대에서 같이 자자 남편”

결심한 듯 다빈이 침대 위에 올라앉자, 한결이 이불을 들쳐냈다. 

붉어진 얼굴이 들킬세라 다빈은 후다닥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다빈

 “잘 자, 남편”

한결은 그런 다빈의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짓궂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한결

 “잘 잘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렇게 미인 옆에서…흐흐”

다빈

 “아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남편”

다빈이 흘기듯 쳐다봤다. 

한결

 “저 카메라 고장 좀 안 나나…”

으하하. 벌써 부부가 마음이 딱딱 맞네

다빈은 ‘내 심정 그렇다’며 맞장구치고 싶었지만

여자는 좀 내숭도 떨어줘야 할 것 같아 말을 삼켰다. 

한결

 “하하. 농담이니까 이제 그만하고 정말 자자”

한결이 협탁 위의 불을 끄자, 방안은 완전히 어두컴컴해졌다. 

어둠 속이라 카메라에 오디오만 잡힐 뿐, 까만 화면 외에는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다. 

막상 불을 끄고 이렇게 나란히 서로의 숨소리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다빈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봤지만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슬쩍 돌려 옆을 쳐다봤다. 

한결 역시 잠을 청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코, 날렵한 턱선, 지긋이 다문 입술…까지

뉘 집 자식인지 참 잘 생겼다.

이런 남자 옆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좀 전에 마신 와인 때문인가.

다빈의 심장이 좀 전보다. 심하게 쿵쾅거렸다. 

옆에 있는 한결에게 들리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다빈은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고서야 마침내 잠이 들었다.

한결 역시도 잠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 

자신의 첫사랑이 지금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

손을 뻗으면 그녀를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서.

어둠 속이라 카메라 따윈 걱정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자신을 그저 후배로만 볼 게 뻔했다. 

좀 더 친해지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그때 제대로 고백해야지…

한결은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스르르 잠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잠자리에 예민한 한결이 잠에서 깼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침실에는 냉기가 흘렀다. 

얇은 이불과 잠옷이 잠결에도 추웠던지 한결을 등지고 모로 누운 다빈은, 

새우처럼 몸을 바짝 움츠린 채 잠결에 자꾸만 이불을 당기고 있었다. 

‘추운가 보구나’

한결은 다빈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한결은 한쪽 팔을 다빈의 머리 아래에 넣어 팔베개했다.

그리고는 다른 한쪽 팔로는 다빈의 어깨와 팔을 살며시 안았다. 

다빈이 한결의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잠결에도 온기가 느껴졌는지, 다빈이 바짝 움츠린 몸을 조금씩 폈다. 

그리고는 그 따뜻한 온기의 중심을 찾아 더 바짝 몸을 댔다. 

다빈의 등이 한결의 가슴에 빈틈없이 닿았다.

한결은 다빈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둘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붙어 있었던 것처럼

그날 밤, 한결은 그렇게 따뜻한 밤을 보냈다. 

코 고는 건 어떡하고, 잠꼬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다빈의 뇌를 스쳐 갔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3화 - 사귀는 것도 만나는 것도 안됩니다

다음 날 아침, 

다빈은 어젯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옆에 누운 한결이 신경 쓰여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나서였을까, 스르륵 잠이 든 게. 

원래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자는 다빈이지만, 잠결에 으슬으슬 추워져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불 속이 따뜻해져서 짧은 시간이지만 숙면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자신을 꼭 안아준 한결의 체온 때문이란 건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얼마간의 촬영이 더 있고 나서야 <연상연하 우리 결혼했어요> 의 첫 번째 촬영이 끝이 났다. 

신PD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했어요…”

다빈

 “끝난 거에요?”

 다빈이 되물었다. 

신PD

 “네. 두 분 기대 이상으로 투 샷이 잘 어울리네요… 첫 방 나가봐야 알겠지만, 반응 괜찮을 것 같은 같은데요… 느낌이 좋습니다. “

한결

 “하하하 그러면 정말 좋겠네요. 감독님”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한결이 말했다. 

신PD

 “아. 그리고… 뭐 다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두 분 촬영하시는 동안 공개 열애나 스캔들 같은 건 절대 안 됩니다. 지난번에 시즌 1 때 출연했던 김선우가 열애설 나는 바람에 저희 방송 없어질 뻔했어요. 그래서 콘셉트를 연상연하로 바꾸고 간신히 시즌 2로 살아남은 거니까 특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다빈

 “아…. 네 그 정도는 이 프로 출연하면서 당연한 거죠.”

다빈도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점이다. 

신PD

 “그리고 또 한가지. 방송 외에도 되도록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빈

 “??”

한결

 “??”

신PD

 “촬영하다가 정이 들어 사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요… 이것도 촬영하는 동안에는 주의해주셔야 합니다. 뭐 프로 끝나고서야 사귀는 건 괜찮지만, 방송 중에 몰래 사귀고 만나고 하면 아무래도 화면에 잡히는 모습이 신선함이랄까 설렘이랄까 하는 모습이 떨어져서 시청률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두 분 감정은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 촬영하면서 나오는 감정이 실제 감정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프로시니까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다빈

 “아…네… 알겠습니다.”

감독의 말에 금세 수긍하는 다빈과 달리 한결은 뭐 그렇게까지 자제를 시키느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결

 “아무튼, 방송에 지장 없게만 하면 되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

한결은 <연우결> 촬영을 끝낸 후, 장소를 옮겨 화보와 CF 촬영을 더 소화한 후에야 일과가 끝이 났다. 

귀갓길, 소속사 대표이자 매니저인 은표가 운전하는 차에 은표가 옆에 타고 있었다. 

그때 한결의 전화벨이 울렸다. 

한결

 “여보세요?”

화연

 - 응… 나야. 오늘 첫 촬영 잘했어?

한결과 같은 소속사에 소속된 동갑내기 여배우 화연의 전화였다. 

한결

 “응. 촬영은 괜찮았던 거 같아”

화연

 - 그래. 근데 한결 씨 와이프라는 영광을 차지한 분은 대체 누구야? 나 너무 궁금해서 드라마 리딩만 아니었으면 거기 현장으로 달려갈 뻔했잖아

비슷한 시기에 함께 데뷔한 데다 소속사까지 같아 유달리 친한 두 사람이었다. 더구나 취향도 비슷해 꽤 말이 잘 통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 선정이나 연기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이였다.

한결

 “하하.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이화연 씨께서 그거 궁금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대”

화연

 - 그러니까! 은표 오빠가 촬영 방해되니 전화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소속사 대표와 연예인이기 전에 워낙 서로 간에 친분이 두터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평소 형, 오빠로 호칭하는 세 사람이었다. 

한결

 “그럼 그렇지…. 네가 지금까지 전화 없는 게 이상하다 했다”

운전하며 둘의 통화를 듣고 있던 은표가 입 모양으로 ‘누구? 화연이?’ 라고 물어왔다.

수화기를 든 채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표가 

“드라마 리딩 잘 끝났는지 물어봐”라고 말하자

한결

 “은표 형이 너 오늘 리딩 잘 끝났느냐고 물어보라는데?”

화연

 - 응. 잘 끝냈어. 지금 끝나서 돌아가는 길이고

한결

 “우리도 좀 전에 스케쥴 다 끝나고 귀가하는 길”

화연

 - 그렇구나. 그럼 우리 모처럼 셋이 시간도 맞는데 첫 촬영 축하는 뒤풀이라도 할까?

화연의 질문을 은표에게 그대로 던지자 은표 역시 좋다며 손가락으로 OK를 만들어 보였다. 

은표

 “그럼 어디 가기도 그러니까, 그냥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 거기서 간단히 한잔하지 뭐”

한결

 “화연아, 그럼 형 네 집으로 와. 우리도 그쪽으로 바로 갈게”

화연

 -그래 알았어. 이따가 봐

***

차를 주차하고 집에 들어서자 은표의 아내 지은과 먼저 도착한 화연이 두 사람을 맞았다. 

네 사람이 워낙 친해 종종 은표네 집에서 모여 술자리를 갖고 하곤 했지만, 한결의 인기가 높아진 후에는 도통 시간을 내지 못해 오랜만에 모인 자리였다. 

지은

 “와… 한결 씨 오랜만이다. 이제는 정말 방송에서만 보지 얼굴 보기 어렵네”

지은이 오랜만에 보는 한결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한결

 “네 형수님. 갑자기 찾아와서, 있다가 저희 가고 나면 은표 형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지은

 “에잇, 우리 사이에 뭐.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가지 좀 긁혔겠지만 말이야. 호호”

지은은 한결과 화연의 모처럼의 방문이 반갑기만 한데, 웬 바가지냐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은표

 “자자… 서 있지만 말고 저쪽으로 가서 한잔하자. 여보 집에 술 뭐 있지?”

거실로 들어온 네 사람이 거실 한편에 자리한 소파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은

 “술이야 뭐 종류대로 다 있지. 여러분 어떤 술을 원하시나요?

그렇게 반가운 인사가 오간 뒤, 지은이 맛깔스러운 안주와 함께 술상을 봐 왔다. 

한결이 은표의 술잔을 채우자, 술병을 건네받은 은표가 한결, 화연 그리고 지은에게 차례대로 술을 따랐다.

은표

 “자, 한 잔씩들 하자” 

은표의 선창에 네 사람은 살짝 잔을 부딪치고는 가벼이 목을 축였다. 

지은

 “근데, 아까 화연이한테 들으니까 이번 상대역이 유다빈 이라며? 나 그 사람 느낌 괜찮던데 실제론 어때?”

한결

 “네… 괜찮은 거 같아요.”

말을 아끼는 한결의 대답에, 은표가 슬쩍 고개를 들어 한결의 표정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은표

 “두 사람이 오늘 한결이를 봤어야 하는데”

지은

 “왜요, 오빠?”

은표

 “촬영 전부터 첫인상 좋게 한다고 꽃도 직접 사서 가고, 촬영 때도 완전 달달한 표정이 진짜 연인이랑 촬영하는 거 같더라니까? “

한결

 “…….”

한결은 별 대꾸 없이 자신의 잔을 비우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은

 “어머, 한결 씨 그 촬영이 정말 좋았나 보다. 다빈 선배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한결을 향했지만,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한결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은

 “그래, 그런 마음으로 촬영해야지. 카메라 꺼졌다고 다르게 대하면 서운하지. 둘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여야 이 방송도 성공할 수 있어. 카메라 안 돌아갈 때도 똑같이 대해. 그 감정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니까”

지은의 훈수에 

한결

 “네 형수님” 

한결은 다시 한 번 사람 좋은 미소를 날렸다.

화연은 그런 한결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술잔을 비웠다. 

지은

 “뭐 어쨌든 같이 출연하는 커플 중에 제일 반응이 좋았으면 좋겠다. 참… 그래서 말인데, 아까 신 PD가 원하는 촬영 테마나 이벤트 할 거 있으면 미리 얘기해 달라고 하더라. 웬만하면 출연자들 요구대로 진행한다고.”

한결

 “아아… 그래요?”

지은

 “그러니까 뭐 생각나는 거나 하고 싶은 거 있음 얘기해봐”

한결

 “음…. 그럼 뭐가 좋을까요? 여자들은 뭘 하면 좋아하려나?”

지은

 “웨딩드레스! 웨딩드레스 입고 결혼식 한 번 올려. 소박한 둘만의 웨딩!” 

지은이 나섰다. 

한결

 “웨딩드레스요? 화연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한결이 화연의 의견을 물었다. 

화연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결

 “넌 시상식이나 행사 때 드레스 많이 입잖아. 다빈 씨도 그럴 텐데 그걸 특별하게 생각할까?”

화연

 “모르는 소리. 아무리 드레스를 많이 입어봐도 웨딩드레스는 달라. 드라마 하면서 웨딩드레스 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으면, 그게 촬영인데도 그렇게 설레더라. 남자들은 알 수 없는 웨딩드레스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여자들한텐 다 있어.”

한결

 “음… 그런가. 형 그럼 이걸로 하죠. 신 PD님한테 다음 촬영 컨셉은 이걸로 가면 어떤지 물어봐 주세요”

은표

 “그래, 알았어”

그렇게 오랜만에 뭉친 네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는 동안 시계는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은표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은표의 말에

지은

 “두 사람 낼 오전 스케쥴은 없어? 우리야 괜찮지만 두 사람 어서 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지은의 말처럼 한결은 내일도 오전부터 촬영 스케쥴이 빽빽이 짜여 있었다. 

한결

 “그러게요.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 일어나야겠네요.” 

한결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은표 역시도, 두 사람을 데려다주기 위해 옷을 챙겼다. 

한결

 “형은 그냥 형수님이랑 쉬세요. 화연이는 제가 술도 깰 겸 바래다주고 들어갈게요.”

한결은 늦은 시간에 신혼부부를 귀찮게 한 것도 미안한데, 이 시간에 다시 집을 나서게 하는 게 미안했다. 

더욱이 바래다준다고는 하지만 세 사람은 같은 동네 주민이었다. 한결은 은표를 따라서 은표가 사는 타운하우스 바로 위층에 집을 얻었고, 화연 역시도 걸어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은표

 “정말 내가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가깝다고는 해도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을, 그것도 미혼의 남녀를 함께 보내도 되나, 그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해서 괜한 오해나 사지 않을까 은표는 살짝 걱정됐다. 

한결

 “바로 코 앞인데요. 뭘. 늦은 시간이라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테고, 모자 쓰면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형”

은표

 “그래, 알았다. 부탁한다”

가까운 거리니 별일은 없겠지 싶어 은표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곧이어,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한결과 화연이 은표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

인터넷 뉴스 매체인 HOT 연예뉴스의 기자인 최도철은 기획 기사 ‘스타가 사는 곳’이라는 기사의 취재를 위해 늦은 시간까지 청담동 일대의 부동산을 돌며 공인중개사들을 만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넉살 좋은 웃음으로 부동산에 들어서서는 근처 연예인 누가 살지 않느냐, 요즘 매매가는 얼마 정도냐, 집안의 인테리어는 어떠냐 등을 꼼꼼히 취재한 후, 근처 맥주 바에서 동행한 후배와 한 잔 중이었다. 

후배

 “선배님 아까 취재한 집 같은 데서 살면 기분이 어떨까요?:

햇병아리 인턴 기자의 질문에 도철은 피식 웃었다.

도철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나도 그런 데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후배

 “하긴 그렇죠. 우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이 그런 곳에 가볼 일이라도 있겠어요? 이러니 다들 연예인 하겠다고 하나 봐요”

오늘 취재하며 돌아다닌 집들을 생각하니 괜히 자신의 신세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듯 한탄 조의 말이었다. 

도철은 그런 후배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도철

 “이번 취재는 이쯤 하면 자료는 얼추 모은 거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원고 들어가야겠다. 지난주에 한남동 쪽 조사한 부분 초고 써서 나한테 넘겨. 합쳐서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후배

 “알겠습니다. 선배님”

도철

 “그럼 그만 일어나자. 내일 또 출근해서 평범한 직.딩. 생활이라도 하려면 그만 가서 쉬어야지. 하하”

그렇게 두 사람은 남은 술잔을 마저 비우고, 맥주 바를 나섰다. 

바를 나선 두 사람은 주차할 곳이 없어, 건물 뒤 주택가 쪽에 주차했던 차로 가서는 대리운전을 불렀다. 

대리운전을 기다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는데, 인턴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도철을 불렀다. 

후배

 “선배님, 저기 있는 사람 김한결 아니에요?”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4화 - 여자의 로망, 웨딩드레스

후배

 “선배님, 저기 있는 사람 김한결 아니에요?”

후배가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 일반인이라면 절대 나오기 힘든 아우라를 풍기는 한결을 도철은 금방 알아봤다. 

도철

 “어, 그러네. 근데 옆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야?”

후배

 “이…화…연?? 이화연이네요……! 와… 저 두 사람 사귀나. 이 밤에 둘이 뭐죠?”

도철

 “야, 뭐해. 빨리 사진 찍지 않고! 얼른 찍어!”

후배

 “네, 네!!”

두 사람은 카메라를 꺼내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는 들킬세라 조용히 뒤를 따르며 한결과 화연을 지켜봤다. 

아직은 밤기운이 차가운 이른 봄날 밤, 얇은 블라우스 하나만 걸치고 있던 화연은 추운지 어깨를 움츠렸다.

화연

 “아우, 좀 춥네. 나 팔 좀 빌려도 괜찮지?”

화연이 자연스레 한결의 팔짱을 꼈다. 한결 역시도 평소 이 정도의 스킨십은 익숙했던지라 대수롭지 않게 팔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금세 도착한 화연의 오피스텔로 들어섰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이 도철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혔다. 

도철

 “근데 저기 누구 집이냐?”

후배

 “아까 부동산 아저씨가 김한결이 저기 산다고 했잖아요.”

도철

 “음…. 그럼 김한결 집에서 데이트를 마치고 나와서는 이화연을 바래다주는 길이었구먼. 이야, 우리 오늘 한 건 했다!! 특종이야 특종. 김한결 이화연 열애!!”

소속사 사장이 한결과 같은 타운하우스 위아래 층에 살고 있고, 한결과 화연이 한결의 집이 아닌 은표의 집에서 나오는 길이란 걸 도철이 알 리 만무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영락없이 몰래 데이트를 즐기고 나오는 연인처럼 보이는 게 당연한 상황.

그렇게 도철은 뜻하지 않게 잡은 특종에 쾌재를 불렀다. 

이날 도철이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차후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 첫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다빈. 처음 해보는 예능 프로 촬영이라 긴장했던지 집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미라

 “오늘 수고했어. 현장에서는 두 사람 꽤 잘 어울렸는데 편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매니저인 미라가 주방에서 물 한잔을 따라 가지고 나와서 다빈에게 건넸다. 

다빈

 “나도. 그나저나 이 프로 한다고 한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미라

 “이미 엎어진 일. 후회는 금물!!”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 출연 결정을 두고 끝까지 망설이던 다빈을 마지막까지 설득시킨 건 바로 미라. 데뷔 10년이나 됐지만, 아직 톱스타급으로 오르지 못한 다빈은 주·조연급으로 그간 큰 기복 없이 배우 생활을 해 왔었다. 

하지만 주연급도 아닌 30대를 넘어선 여배우가 맡을 배역의 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 결혼이라도 해서 자연스레 유부녀 역할로 넘어가면 괜찮겠지만, 나이에 비해 동안인 그녀는 아직 유부녀 역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안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 뭔가 새로운 이슈가 필요했다. 그러던 즈음, 평소 출연치도 않았던 예능 프로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그것도 연상연하 커플의 가상 결혼 프로그램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

여자인 자기가 봐도 저리 사랑스러운데 남자가 보면 더욱 그럴 터. 가상이긴 하지만 부부 콘셉트이니 그녀의 매력이 그대로 드러날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이유로 미라는 출연을 망설이던 다빈을 끝끝내 설득해 출연시켰다. 

미라

 “난 오늘 그 자리에 김한결이 떡 하고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다빈

 “그렇지? 나도”

다빈은 오늘 낮, 처음 한결을 보고 심쿵 했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빈

 “나도 상대방이 누군지 모른 상태였으니까, 그쪽도 나를 모르고 나왔겠지?”

미라

 “아마… 그렇겠지. 요즘 너무 핫해서 웬만한 예능 프로에는 출연을 안 할 텐데… 우리 입장에서야 뭐 고마울 따름이지. 근데 스타랍시고 한참 목에 힘 빡~! 들어가 있는 거 아냐..?”

다빈

 “그런 사람 같지는 않던데. 아직 본 지 얼마 안 됐으니 뭐 알 수 없긴 하지”

두 사람은 오늘 촬영 때 있었던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 떠올리며, 수다에 여념이 없었다. 

미라

 “어쨌든 나이답지 않게 심하게 발랄하고 엉뚱한 평소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 혹시 알아? 진짜 너를 사랑하게 될지? 푸힛”

다빈

 “아…. 뭐야… 그럴 리가 있겠어? 요즘 좋다고 달라붙는 어리고, 예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

그렇게 말하지만, 내심 ‘정말 한결과 연인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다빈이었다. 

*

1주일 후, 촬영을 위해 한결과 다빈이 다시 만났다. 촬영 장소는 그들의 신혼집이 아닌, 지금은 폐쇄된 경기도의 어느 한적한 간이역.

기차가 지나다닌 지 오래된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낡은 철길…그 옆에서 봄바람에 살랑이는 풀잎들. 카메라가 멀리 빠져 철길 위를 거니는 두 사람을 담자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됐다. 

그렇게 봄날의 햇볕을 가득 받으며 촬영이 시작되었다. 

한결

 “부.인… 잘 지냈어?”

다빈

 “어? 어…. 잘 지냈지. 남편님은?” 

아직 부인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만 한 다빈이었다. 

한결

 “나도 잘 지냈지. 드라마 촬영 하면서 간간이 우리 ‘부인’ 생각도 하면서…. 하하”

다빈

 “아, 정말? 나도 그랬는데…. 히히” 

쑥스럽지만, 다빈의 진심이기도 했다. 

촬영용 멘트일 수 있지만, 다빈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결의 사랑스러운 표정과 달콤한 멘트가 싫지 않았다. 아니, 매우 좋았다. 

방송을 위해 어느 정도는 꾸며진 멘트일텐데

그 말들이 정말 자신을 향한 말인 듯, 이미 오래전부터 연인 사이였던 듯

그렇게 달콤한 표정과 사랑에 빠진 듯한 그 눈빛을 받는 이 순간이 마냥 행복했다. 

다빈

 “그런데 오늘 여기엔 왜 나오자고 한 거야?”

한결

 “결혼식 하려고”

다빈

 “결혼식?”

사전에 언지를 받지 못했던 다빈이 재차 물었다. 

다빈

 “그러려면 드레스랑 메이크업이랑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한결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준비했어. 자 열어봐!”

한결은 예쁘게 리본으로 포장된 큰 상자를 다빈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제법 큰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 든 다빈이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 속에는 예쁜 웨딩드레스가 담겨 있었다.

다빈

 “어머, 이게 뭐야? 너무 예쁘다.”

다빈은 한결이 준비한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어깨가 드러난 탑 미니 웨딩드레스는 발랄함이 돋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짧은 치마와는 대조적으로 등 뒤쪽에는 긴 샤로 된 망사가 부착되어 웨딩드레스의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한결

 “어때? 마음에 들어?”

다빈

 “그럼. 당연하지. 근데 너무 발랄한 디자인이라 어울릴지 모르겠네”

한결

 “우리 아내한테 뭔들 안 어울리겠어. 자기한텐 다 잘 어울릴 거야. 촬영 장소가 철길이라 긴 드레스는 불편할 거 같아서 내가 짧은 거로 보여달라고 했어.”

다빈

 “그럼 남편님이 직접 고른 거야?”

한결

 “응. 우리 아내 생각하면서 가장 잘 어울릴만한 디자인으로 골랐지”

다빈

 “와, 감동… 요즘 스케쥴 많아서 잠잘 시간도 모자랄 텐데, 직접 가서 고르기까지 하고 정말 고마워”

한결의 말에 다빈의 눈은 점점 더 반달모양이 되어갔다. 

한결

 “자, 그럼 어서 가서 입고 나와봐. 나도 턱시도로 갈아입고 나올게”

다빈

 “응”

얼마 후, 턱시도를 갈아입는 한결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한결이 등장하자 여자 스텝들 사이에서 ‘우와~’ 하는 작은 함성이 일었다. 

한결은 신부 드레스와의 발랄함을 맞추기 위해 클래식한 디자인에서 약간 벗어나 보라색의 재킷에 깔끔한 그레이톤 팬츠를 매치했다. 

여기에 흰 셔츠와 나비넥타이를 더해 그야말로 만화를 찢고 나온 댄디한 새신랑의 모습을 고스란히 연출해 내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잡고, 다빈을 기다리고 있는 한결… 

그의 기다림이 길어지지 않게 곧이어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다빈이 등장했다. 

발랄해 보이는 미니 탑 웨딩드레스는 하얗고 가녀린 어깨를 그대로 드러냈고, 미니스커트의 길고 쭉 뻗은 다리는 발랄함을 더해 주었다. 

거기에 가슴 부분의 다이아몬드식 커팅으로 된 비즈가 장식과 스커트 앞부분과 달리 등에서부터 다리까지 이어지는 긴 베일이 미니드레스에서 빠질 수 있는 우아함까지 붙잡아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했다. 

여신이 있다면 이리도 아름다울까.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위해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저 여인이 정말 내 첫사랑 유다빈이 맞단 말인가.

이게 꿈이라면 정말이지 깨고 싶지 않았다. 

다빈의 아름다움에 ‘와~’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한결을 향해 다빈이 조금씩 다가왔다. 

앙증맞은 미니 부케를 두 손으로 잡고, 부끄러운 듯한 발 한 발 천천히.

다빈

 “남편님 어때? 어울려요?”

한결

 “와… 우리 여보 정말 예쁘다. 진짜 여신 같다…. 흐흐….”

다빈

 “그래? 다행이다. 푸힛”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다빈에게 한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결

 “자…”

한결이 손. 을 내밀었다. 

손??

아…. 부끄러워. 

그깟 손 한번 잡는 게 뭐라고 이리도 부끄러운 건지.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빛을 숨기지 못한 채 다빈은 한결이 내민 손을 살며시 잡았다. 

한결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만 잡은 것뿐인데…

모든 신경이, 몸속 모든 세포가 손으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에,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치 전기라도 통하듯 찌릿찌릿했다. 

‘유다빈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이 정도에 뭘 이렇게 떨고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남자 손 한두 번 잡아봐?!’ 

이 순간, 다빈은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지

앞에서 작가들이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지

심지어 자신의 옆에선 한결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따뜻하고 보드라운 한결의 손에만 신경이 가 있을 뿐. 

다빈의 이런 떨림이 한결에게도 느껴졌는지

한결은 자그마한 다빈의 자그마한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다빈은 부끄러움에 부케로 얼굴을 가린 채, 한결을 올려다보았다. 

선명한 눈썹, 오뚝한 코, 웃음 지을 때마다 사정없이 부드러워지는 눈매, 거기에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야말로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멋진 남자가 지금 턱시도를 입고 자신의 옆에 서 있다. 

‘유다빈, 오늘 정말 계 탔네, 계 탔어!

오늘 장면 방송 나가면 평생 소장할 거야. 평생’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5화 - 노출사고

  

한결

 “옷도 갖췄으니까, 우리 혼인서약서 같이 읽을까”

다빈은 한결을 올려다보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이 준비해온 서약서를 꺼내 펼쳐 들고는 종이 위를 가리켰다.

한결

 “요 부분은 내가 읽고, 이 부분은 부인이 읽어. 그다음은 같이 읽고”

다빈

 “응. 알았어요” 

다빈은 연하임에도 자신을 자연스레 앞서 가는 한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한결

 “자 그럼 시작할게.”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한결이 먼저 서약서를 읽어 나갔다.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섞인 채로…

한결

 "아직은 이른 봄날, 신랑 김한결과 신부 유다빈이 운명처럼 만나 이제 결혼식을 올리려 합니다. 나 김한결은 유다빈을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낄 것을 다짐합니다." 

자신의 부분을 읽은 한결이 다빈이 읽을 부분을 가리키자 다빈이 이어서 낭독하기 시작했다. 

다빈

 “나 유다빈은 만찢남 김한결을 신랑으로 맞아 평생 존중하고, 사랑할 것을 다짐합니다.”

한결

 “자, 이번에는 같이”

한결의 말에 따라

한결

 “이제 우리 두 사람 김한결, 유다빈의 혼인이 원만이 이루어진 것을 선언합니다.”

다빈

 “이제 우리 두 사람 김한결, 유다빈의 혼인이 원만이 이루어진 것을 선언합니다.”

혼인서약서를 낭독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진짜도 아닌 것이, 가짜 같지도 않은 것이 그야말로 이상한 감정. 

그런데도 왠지 행복하기만 한, 둘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한결

 “자 혼인서약서도 낭독했으니 다음은 입맞춤!”

한결이 능청스레 눈을 감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다빈은 한결의 넉살이 싫지 않았지만, 아직 키스는 아무래도 빠른 것 같아 잠시 망설이다 이내 결심한 듯 한결의 볼에 ‘쪽~’ 입을 맞추었다. 

한결은 이것만으로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다빈 누나와 이런 모습까지 연출할 수 있다니. 오늘을 평생 못 잊겠다.’

그의 속내까지는 담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결

 “여기 길도 운치 있는데, 우리 좀 걸을까?”

한결이 다빈을 끌고 앞서 나갔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투 샷을 원거리에서 길게 잡으려고 두 사람을 앞서 멀리 빠졌다. 

햇살이 내리는 철길 위. 

웨딩드레스의 한 신부, 그 앞에서 손을 뒤로 빼 신부의 손을 잡은 채 앞서 걷고 있는 신랑.

앞뒤로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걷고 있는 그림 같은 남녀를, 카메라는 앞으로 멀리 빠져 원거리로 철길과 함께 길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때, 

한 손으로는 한결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부케를 들고 따라 걷던 다빈의 긴 베일이 철길 옆의 나뭇가지에 걸렸다. 

다빈은 그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나뭇가지에 걸린 베일이 점점 당겨지자 

옷핀으로 대충 가봉해 놓은 옷의 뒷부분 여밈이 툭~하고 뜯어져 옷이 흘러 내리려 했다.

다빈

 “앗!” 

다빈이 옷의 가슴 깨를 붙잡으며 외마디를 질렀다. 

다빈의 고함에 뒤를 돌아보던 한결은

잠시의 틈도 없이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겨 와락 다빈을 안아버렸다.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벗겨지려던 상황을 누구도 보지 못하게 막으려는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다빈에게 속삭였다. 

한결

 “괜찮아. 내가 바로 안아서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을 거야”

당혹스러움에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다빈.

'아, 이게 무슨 망신이야.'

하필 김한결 앞에서.

얼마나 칠칠 맞게 생각할까.

미정이는 옷 좀 잘 입혀주지. 아무리 옷핀 가봉이래도 이렇게 허술하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한결은 옷이 더 흘러내리지 않게 계속해서 다빈을 안고 있었다. 

행여 누구라도 볼세라, 흘러내릴 듯한 다빈의 앞섶이 카메라에 잡힐세라, 조금의 틈도 없이,

그렇게 단단하게 다빈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다빈이 좀 진정됐겠다 싶어진 한결은 한쪽 팔로는 다빈을 품에 안은 채, 

다른 한쪽 팔을 천천히 움직여 자신의 재킷을 벗었다. 

그리고는 다빈의 어깨를 덮고, 자칫 흘러내릴 뻔했던 앞섶을 재킷으로 단단히 여며 주었다. 

다빈

 “고…. 마…. 워”

부끄럽고 당혹스런 상황. 

카메라가 원거리가 아니라 앞에서 촬영하고 있었다면 자칫 더 큰 해프닝이 일어날 수도 있던 터였다. 

자신을 재빨리 감싸 안은 한결이 없었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데 이렇게 한결에게 안겨 있으려니, 

자신의 머리 위에서 숨을 내쉬고 있는 한결의 숨소리가, 다소 거친 호흡이 그대로 느껴졌다. 

좀 전과는 다른 이유로 다빈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 대체… 이런 상황에서도 심장이 두근거릴 건 뭐람. 주책!!’ 

다빈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심장을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런. 데.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건 한결도 마찬가지였다.

옷이 흘러내려 다빈의 속살이 카메라에 찍히지나 않을까 싶어, 망설일 틈도 없이 다빈을 꽉 끌어안았다. 

거기까지는 뭐 괜찮았다. 

그런데 호흡을 가다듬고 긴박한 상황을 면하고 나니, 봉곳이 솟은 다빈의 가슴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제 한결의 심장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이 여자를 안으면 이런 기분이구나’

한결은 다빈의 앞섶을 가린 재킷을 다시 한 번 여며주고는, 신 PD와 매니저인 미라를 불렀다. 

한결

 “PD님 촬영 잠시만 중단해주세요. 그리고 조 실장님~~ 여기 좀 봐주시죠”

멀찌감치 있었지만, 무슨 일이 생긴 걸 직감한 PD가 촬영을 중단시키자 미라가 바로 다빈에게 다가왔다. 

미라

 “어머,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미라는 당혹스런 상황에 다빈과 한결을 번갈아 쳐다봤다. 

다빈

 “나중에 설명할게. 우선 이 옷 좀 어떻게 해줘”

미라가 나서서 옷을 만져주려 하자, 그제야 한결이 다빈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한결이 자리를 비켜주자, 다빈에게서 참았던 창피함이 터져 나왔다. 

다빈

 “아…. 미쳐… 이게 무슨 망신이야…. 못살아! 못살아! 아흑…!!”

미라

 “그래도 한결 씨 덕분에 이쯤에서 끝났네. 우린 멀리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도 못했어. 아휴… 옷이 더 흘러내렸거나 카메라에 찍히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다빈

 “야…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해!”

미라

 “푸힛… 그런데 한결 씨 아까 멋있더라. 갑자기 너를 화~악 당겨서 안아버리는데,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심쿵했잖아.

다빈

 “…….”

좀 전의 상황이 떠올라 다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다빈

 “야~아~~ 그만 놀려!!”

미라

 “알았어, 알았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옷부터 고쳐 입자”

다빈

 “그래”

그렇게 위기의 상황을 모면한 다빈이 미라의 도움을 받으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옷을 고쳐 입은 다빈이 다시 나오자, 다시 카메라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언제 도착했는지 기다리고 있던 사진작가의 주문에 따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웨딩 화보를 촬영이 시작됐다. 

그렇게 몇 시간의 촬영을 더 한 후에야, 비로소 녹화가 끝이 났다.

떠나려는 한결이 먼저 인사를 고했다.

한결

 “오늘 수고했어.”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 한결을 다빈이 불러 세웠다. 

다빈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한결

 “고맙긴. 명색이 남편인데 아내의 노출 사고를 그대로 지켜볼 리 없잖아.”

다빈

 “뭐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한결

 “아냐…. 그 정도에 그쳐서 다행이야. 그래도 놀랐을 텐데 얼른 들어가 쉬어”

갑작스럽긴 하지만 스킨십 때문이었을까. 

다빈은 한결이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더는 반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

몇 번이 촬영이 별문제 없이 끝났고, 드디어 첫 회가 방송되었다. 

방송이 나간 직후, 다빈은 컴퓨터를 켜고 관련 기사를 모조리 찾아 읽었다. 

요즘 가장 핫한 한결의 출연한 때문이지, 꽤 많은 양의 기사가 올랐고 그 평 또한 좋은 편이었다. 

다빈의 우려와 달리 한결과 다빈은 썩 잘 어울렸고, 실제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한 모습이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은 덩달아 설렜다.

다빈

 “한결 씨도 방송 보고 있으려나? 첫 방이니까 보고 있겠지?

전화번호라도 알면 문자라도 한 줄 보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둘은 아직 전화번호조차 교환하지 않고 있었다. 

다빈

 “어휴, 전화번호라도 좀 알아둘걸. 아니! 그런 건 남자가 좀 먼저 물어보면 좀 좋아?!”

하더니, 금세 마음이 바뀐 듯

다빈

 “아냐 아냐, 연하라서 내게 다가가기 어려워서 일 수도 있어.”

그리고는 손가락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세어보더니 자책하듯

다빈

 “나이는 그렇다 치고, 경력으로도 내가 대체 몇 년이나 선배야”

다빈

 “내가 어려운 거야, 어려운 거!”

다빈은 괜스레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때, 갑자기 ‘띵 똥~’ 울리는 다빈의 핸드폰.

‘부인. 첫 방 본 소감이 어때?’

한결의 문자였다!

다빈

 “아흑, 심장이야! 내 번호를 알고 있었던 거야??”

뭐 핸드폰 번호쯤이야 알아내려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파트너로 함께 출연 중이니 번호를 묻는다고 해서 달리 의심을 살 리도 없는 터. 

그러니 매니저에게 물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빈

 “가만, 가만, 뭐라고 답하지… 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려”

다빈은 핸드폰을 쥐고 몇 번이나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남편 반가워. 첫 방송에서 우리 부부만 보이더라.’ 라고 쓴 후,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하하…. 나도 그렇던데. 이제 옆방 커플은 그만 하차해야 할 듯’이라는 문자가 곧바로 도착했다. 

다빈은 문자를 확인하며 자꾸만 비실비실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다 우리 남편님이 멋있어서 그런 듯. 남편님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핸드폰 문자 하나하나에 가슴이 울렁울렁, 이런 설렘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다빈은 다시 들떠서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다빈의 달달한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한결의 답 문자.

‘그렇다고 내 매력에 너무 빠지면 곤란해 부인. 방송은 방송일 뿐인 걸 잊지 마!’

악!! 뭐래. 이건 나더러 김칫국 마시지 말란 소리잖아?!

결국, 방송 이상은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도 다빈은 그 날 밤을 꼬박 새워 <연우결> 다시보기를 계속해서 눌러댔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6화 - 우린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1)

다음 날 아침.

어젯밤 늦게까지 <연우결>을 본 탓에 늦잠을 자고 있던 다빈이 핸드폰 벨 소리에 눈을 떴다. 매니저 미라였다. 

다빈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다빈

 “응. 미라야” 

미라

 “뭐야 아직 자고 있었던 거야?”

다빈

 “응. 어제 늦게까지 뭘 좀 하느라…”

미라

 “그랬구나. 어제 첫 방 봤지? 촬영 현장에서 다 본 나도 방송 보는 내내 왈랑왈랑 하더라 히힛”

다빈

 “그랬어? 푸힛. 편집이 잘 된 거지 뭐. 정말 다행이야…”

미라

 “그건 그렇고 좀 전에 신 PD님한테 전화 왔는데, 어제 첫 방 시청률이 높다고 오늘 저녁에 회식하자네. 한결 씨네 쪽 스케쥴 벌써 맞췄나 봐”

다빈

 “응 알았어.”

미라

 “그럼, 있다가 시간 맞춰 데리러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다빈

 “응”

지난번 촬영 이후, 한결을 본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사적으로 만나지 말아 달라는 담당 PD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두 사람이 따로 만나는 일 따윈 생기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쉽.게.도.

***

티 나지 않게 한껏 단장한 다빈이 미라와 함께 회식 장소에 도착했다. 

신PD

 “어, 저기 다빈 씨 왔네. 다빈 씨 여기에요, 여기!”

제일 먼저 다빈을 알아본 신 PD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빈은 신 PD에게 목례를 하면서도, 눈은 한결 만을 찾고 있었다. 

이내, 테이블 가장 안쪽 자리에 소속사 대표 은표와 함께 자리한 한결이 눈에 들어왔다. 

옆의 스태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한결이 때마침 고개를 들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다빈의 시선과 마주쳤다. 

다빈은 촬영 때와는 달리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다빈은 연예인이지만 특별한 자리가 아니면 늘 과하지 않은 차림을 즐겼다. 

오늘 역시도 화이트 셔츠에 청바지, 뽀얀 목덜미를 드러내며 경쾌하게 올려 묶은 당고머리 차림이 절대 30대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신PD

 “다빈 씨, 이쪽으로 와서 한결 씨 옆에 앉아요. 부부가 옆에 나란히 앉아야지 하핫”

다빈

 “네. 감사합니다.”

다빈이 가까이 와서 앉으려 하자, 한결이 의자를 빼주며 다빈이 앉는 것을 도왔다. 

다빈

 “고마워”

다빈의 인사에 한결은 미소로 답했다.

신PD

 “자자… 오늘의 주인공들이 다 모였으니 우리 건배 한 번 하죠. 한결 씨, 다빈 씨! 두 분 덕분에 시청률이 아주 잘 나왔어요. 순간 시청률이 시즌 1까지 통틀어 동 시간대 최고야 최고”

다빈과 미라의 술잔이 채워지자, 신 PD의 선창으로 모두 ‘건배’를 외쳤다. 

먼저 잔을 비운 신 PD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다빈을 보고는

신PD

 “에이 뭐야, 커플은 러브샷을 해야죠.” 

순간 합창이라도 하듯, 스태프들의 “러브샷!, 러브샷!” 주문이 울려 퍼졌다. 

다빈

 “에이 왜 그러세요.” 

다빈이 쑥스러움에 손사래를 치며 술잔을 내려놓는데, 

한결이 그녀 앞에 놓인 술잔을 다시 손에 쥐여주며 팔짱을 꼈다. 

한결

 “자, 러브샷!” 

한결이 먼저 러브샷을 외치며 술잔을 비우자, 

다빈도 못 이기는 척 술잔을 비웠다.

한결의 은근한 시선을 받으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술이 약했던 다빈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한결은 다빈의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다빈과 마주하고 있자니, 불현듯 맨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

10년 전.

한결과 몇몇 친구들이 단짝 친구 현호의 집에 모였다. 

내년이면 고3 생활이 시작되니, 주말에는 실컷 놀아보자며 주말이면 종종 모여 게임과 영화를 즐겼다. 

그날도 거실에 모여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게임에 한참 몰두해 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리고, 현호가 문을 열어주자 

과연 이 세상 사람이 맞는 걸까 싶은 미모의 여인이 손에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다빈

 “이모, 나 왔어!”

현호모친

 “그래, 이모 빨래 널고 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소리치는 현호 모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실로 들어온 그녀의 눈에, 자신의 등장은 아랑곳없이 게임에만 열중인 이종사촌 동생 현호가 들어왔다. 

다빈

 “야, 너, 누나가 왔는데 인사도 않고!!”

여전히 눈은 게임기와 텔레비전 화면에 꽂힌 채 현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현호

 “어, 누나 어서 와” 

그녀는 그런 현호의 머리를 세게 한번 쥐어박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현호의 주변에 저런 미인이 살고 있다니! 

한참 사춘기인 현호의 친구들이 탄성을 지르며, 그녀의 등장에 관심을 보였다. 

현호친구

 “누구야 누구?”

현호

 “응. 우리 외사촌 누나”

현호친구

 “우와 진짜 예쁘다”

현호

 “음…. 저 누나가 좀 예쁘긴 하지.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렇지!”

현호의 외사촌이라는 대학생 누나. 

한결은 마치 여신이 현세에 있다면 저런 미모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 녀석들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속사포 같은 질문을 퍼붓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가 들어간 주방을 연신 곁눈질을 하며 그녀를 훔쳐 볼 뿐이었다. 

다빈이 손에 들고 왔던 짐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 빨래를 다 널은 현호 모친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다빈

 “이모, 엄마가 밑반찬 많이 했다고 갖다 주래서”

현호모친

 “아이고 고마워라. 어디 맛 좀 보자”

현호의 모친이 다빈이 가져온 반찬 통의 뚜껑을 열어보자

그 안에는 맛깔스럽게 보이는 밑반찬 5~6가지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젓가락을 찾을 새도 없이 손가락으로 한 점 맛을 본 현호 모친은 

현호모친

 “음…. 정말 맛있다. 네 엄마 솜씨를 우리만 먹고 말기는 너무 아깝다. 그러지 말고 너희 엄마한테 반찬 사업이라도 좀 해보라 해. 분명 대박 날 거야”

다빈

 “아이고 난 싫어”

현호모친

 “왜??”

다빈

 “반찬가게 하면 맨날 엄청나게 반찬 해 대야 할 텐데, 난 엄마 고생하는 거 난 싫어”

현호모친

 “아이고 기특한 것. 예쁜 게 마음 씀씀이까지 곱단 말이야.” 

다빈

 “히힛. 요즘은 예쁜 애들이 성격도 좋은 거 몰라?”

현호모친

 “그래, 맞다 맞아 호호!” 

현호 모친은 다빈이 가져다준 반찬들을 반찬 통에 옮겨 담으려, 식탁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을 향했다.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던 다빈이 거실의 현호 무리들로 시선을 옮기더니

다빈

 “현호는 요즘 성적은 좀 올랐어?”

현호모친

 “아이고 오르긴! 저러고 있는데 성적이 오르겠냐. 그래도 어울리는 놈들이 다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놈들이라 내 잔소리는 안 하고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지 친구들 열심히 하는 거 보면 지도 뭔가 느끼는 게 있겠지”

다빈

 “현호랑 같이 있는 재들이 공부를 잘해?”

현호

 “응, 그 오른쪽에 있는 키 크고 잘 생긴 놈 있지? 저놈이 특히 됨됨이도 괜찮고 성적도 좋은가 보더라”

다빈

 “남색 셔츠 입은 쟤?”

다빈이 한결을 가리켰다. 

현호모친

 “응. 생긴 것도 참 잘 생겼지? 나중에 배우 해도 되겠어.”

다빈

 “그러네…. 신의 축복을 한몸에 받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네.”

다빈은 다시 한 번 한결을 쳐다봤다. 

180이 훨씬 넘을 듯한 큰 키, 서글서글한 눈매, 빙그레 웃는 입매를 보며 속으로 ‘고놈 진짜 잘생겼네’ 를 내뱉었다. 

현호모친

 “점심 먹고 갈 거지?”

현호 모친의 말을 들으며, 다빈이 거실로 나왔다. 

다빈

 “아냐, 나 금방 가봐야 해. 약속 있어.”

거실로 나온 다빈은 여전히 게임에 열중인 현호 무리들 뒤에서 서서 이들이 하는 게임을 조용히 지켜봤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실력이 한심할 정도다. 

다빈

 “야야, 이리 줘봐! 누나가 하는 것 좀 봐”

다빈은 냉큼 현호의 손에 잡혀있는 게임기를 뺏어 들고는, 그간 갈고닦았던 솜씨를 여실 없이 선보였다. 

다빈

 “이 정도는 해줘야지. 너네 못해도 너무 못한다.”

다빈에게 조종당한 화면 속 저격수는 쉴새 없이 악당들을 쳐부수고 있었다. 

다빈

 “누나가 시간만 좀 더 있으면 제대로 한 수 가르쳐 주고 싶다만, 데이트가 있어서 여기까지만!”

현호

 “와… 누나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대단한데??

다빈

 “프힛. 신이 나에게는 모든 것을 주셨잖니. 미모에 몸매에, 재능에, 머리까지…”

현호

 “어이구 저 잘난 척. 됐네요!! 데이트 있으시다면서요~ 얼른 가실 길이나 가세요~~”

다빈은 현호의 비아냥에도 아랑곳이 좀 더 게임 솜씨를 선보이다가는 

벽에 걸릴 시계를 보고서야 얼른 게임기를 현호에게 다시 건넸다. 

다빈

 “어,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정말 가야겠다.”

현관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다빈의 뒷모습을 보며 현호가 물었다. 

현호

 “그 형 만나러 가는 길이야?”

다빈

 “으응”

현호

 “와. 그 형 아직도 만나? 오래도 만난다!”

다빈

 “야야, 그 오빠 보다 멋진 넘이 당최 있어야지. 오빠 만나고 눈만 높아져서 절대 못 헤어져. 안돼 안돼”

현호

 “아이고…. 그러다 그 형한테 차이기라도 하는 날엔 한강에라도 뛰어드시겠어!”

다빈

 “이놈이 무슨 악담을!! 나 진짜 간다”

다빈은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황홀경에 빠져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무리들에게 손을 들어 보인 후문을 나섰다. 

한결은 그 뒷모습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여신의 퇴장을 그저 아쉬워만 하며……

한결은 현호 무리와 얼마간을 더 어울린 뒤 집에 가기 위해 현호의 집을 나섰다. 

한동네에 사는 현호의 집을 올 때 한결은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결은 골목을 넘어 페달을 밟다가 핸들을 가까운 한강공원 쪽으로 꺾었다. 

공부하다가 머리가 지끈거릴 때나, 바람을 쐬고 싶을 때면 

곧잘 한강공원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곤 했다. 

한결은 그렇게 시원한 한강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로드를 즐겼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기 전 목이 말라 공원 내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물 한 병을 사서 근처 벤치에 앉았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마른 목을 축이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던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하얀 셔츠에 청바지, 상큼하게 올려 묶은 머리 아래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

조금 전 현우네서 자신의 넋을 잃게 만들었던 여인이 웬 남자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저 남자가 애인이구나’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7화 - 우린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2)

‘저 남자가 애인이구나’

한결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이 보통 연인들의 데이트 모습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두 사람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가 난 건지, 싸우는 건지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얼마 후, 말을 마친 듯 남자가 여자를 살짝 안아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일어선 남자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여자를 

얼마간 내려다보더니 먼저 자리를 떴다. 

남자가 떠난 후에도 여자는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저 누나… 괜찮은 건가?’

얼마 후 다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슬픈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공원을 지나, 큰길을 지나, 상점을 지나……

그렇게 여자는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한결은 그런 다빈의 뒤를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따라 걸었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세라도 쓰러질 듯한 그녀를 차마 혼자 둘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날이 제법 어두워졌다.

그렇게 계속 걷던 다빈이 걸음을 멈췄다. 

신호등 앞.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던 다빈이 그만 그 자리에 폭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가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면……’

‘당신을 울게 하는 그 남자 정말 밉다.’

한결은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가끔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는 그녀와 마주치는 우연은 생기지 않았다. 

간혹, 비슷하게 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에 뒷 목선이 가녀린 여자를 보고 그녀가 아닐까 오해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한결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주말 저녁, 

무심코 TV를 돌리는데 낯설지 않은 얼굴이 나왔다. 

단막극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여대생. 

그녀였다. 

평소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던 한결이었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드라마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갔다. 

출연자 자막의 거의 마지막 즈음, 그녀의 역할과 이름이 올라갔다. 

유.다.빈 그녀의 이름이었다. 

‘유다빈… 배우가 되었구나….’

이후, 한결은 현우에게서 다빈이 우연히 한 연예기획사에 캐스팅 되어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그녀는 정말이지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그렇게 먼… 사람이 된 것 같아 한결은 마음이 아렸다. 

오.랫.동.안…

*

한결이 아련한 기억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오니, 기분 좋은 회식 자리가 이어졌다. 

그때, 미라의 전화벨이 울렸다. 

미라

 “여보세요? …. 뭐라고 교통사고? 많이 다쳤어? 알았어. 지금 갈 테니까 경과 지켜보면서 계속 전화해줘!”

다빈은 다급한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다빈

 “무슨 일이야?”

미라

 “희동이가 다쳤대. 교통사고!! 나 지금 바로 그리로 가봐야겠다.”

다빈의 소속사의 막내 희동이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다빈

 “어?! 그래그래 어서 가. 가서 상황보고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도 연락해 주고…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미라

 “그래 알았어. 아, 근데 너 어떻게 가지?”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들은 

한결의 소속사 대표 은표가 

은표

 “다빈 씨는 제가 데려다줄게요. 걱정하지 말고 가셔서 사고 수습부터 하세요. 조 실장님”

은표의 말에 미라가 다빈을 쳐다봤다.

미라

 “그래도 괜찮겠어?”

다빈

 “그럼, 내가 애도 아니고. 혼자서 갈 수 있으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봐!”

미라

 “그래 알았어. 있다가 전화할게”

미라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갔다. 

미라의 퇴장 이후에도,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미라에게 다빈을 데려다주겠다 호언장담한 은표는 사실 미라에게 전화가 오기 전부터 이미 적잖이 취해있었다. 

이후, 신 PD의 자랑해 마지않는 폭탄주가 파도를 탔고, 두세 번 잔을 받은 은표를 포함해 대부분 일행들이 거나하게 취했다. 

내일도 새벽부터 CF 촬영 스케쥴이 잡혀 있어, 유일하게 파도타기에서 제외됐던 한결 만을 제외하고! 

FD

 “이제 그만들 일어나죠. 낼 편집도 들어가야 하고, 스케쥴 있는 분들도 있을 텐데…”

FD가 자리 종영을 재촉하자, 신 PD도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PD

 “그런데 홍 대표님이 저렇게 취했는데 다빈 씨는 어떻게 가지?”

이미 술인지, 물인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취해버린 은표는 ‘괜찮다’며 자기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가라며 신 PD를 내보내려 했다. 

신PD

 “우리가 다시 방송국 들어가지만 않으면 우리가 데려다줄 텐데 어떡하지? 아, 한결씨가 안 마셨으니까 한결 씨가 맡아주라”

지금까지 그 상황을 지켜보던 한결이 그제야

한결

 “네 그럴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PD님은 어서 들어가세요. 있다가 나오는 임시편집본 확인하셔야 한다면서요”

신PD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자 조심히들 들어가시고 다음 촬영 때 봅시다”

일행 모두가 떠난 자리에는 술에 취해 널브러진 은표와 한결, 다빈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빈

 “저… 난, 그냥 콜택시 불러서 가면 되니까 홍 대표님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한결 씨는 홍 대표님 모시고 들어가”

한결

 “그럴 수는 없지. 잠깐만”

한결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결

 “아, 형수님. 지금 어디 계세요? 지금 형님이 많이 취하셨는데 제가 모셔다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서요”

전화기 너머에서 지은이 ‘알았으니 곧 출발하겠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결

 “형수님 온다니까 우리 조금만 더 있다가 갑시다”

다빈

 “아유…. 미안해서…. 난 괜찮은데…”

이미 전화까지 한 마당에 더는 사양할 수 없어 다빈은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 없이 한결과 단둘만이 함께 있다.

이 기회를 더 마다할 필요가 없잖은가. 

매력 발산이라도 해서, 한결의 마음이라도 한 번 사로잡아 볼까 은근 장난기가 치솟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둘만 남고 보니, 이렇게 어색할 수가. 

당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에잇 술이나 더 마시자’

다빈은 그렇게 홀짝, 홀짝 남아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한결은 잔을 비운 다빈이 자작을 위해 술병을 들자 병을 빼앗아 잔을 채워줬다. 

‘원래 술이 센가? 저렇게 마셔도 되나?’ 

약간의 걱정이 되긴 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쯤이 지났을까, 지은이 도착해 취한 은표를 데리고 떠났다. 

이제 한결에게 오롯이 떠넘겨진 다빈.

아, 그런데 이 여자 완전히 취했다!

홀짝홀짝 계속 마실 때부터 알아봤다!! 

한결

 “내 이럴 줄 알았어. 술 못 마실 것 같더라니. 자자 부인, 우리도 일어납시다!”

다빈

 “햐…. 부인이래…. 맞아 남편이지, 남편. 나보다 5살이나 어린 남편!!”

한결이 다빈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팔을 빼며 다빈이 혼자 일어섰다.

다빈

 “나 괜찮아. 안 취했어!”

곧이어 한결이 부른 콜택시가 도착하자, 둘은 뒷자석에 나란히 앉았다. 

취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다빈은 애써 몸을 꼿꼿이 세우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자꾸만 수그러들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한결은, 다빈이 마치 애 같아 귀엽기만 하다. 

그렇게 얼마간 몸을 곧추 세웠다, 수그러들기를 반복하던 다빈이 잠이 들었다. 

잠든 머리는, 차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 때마다 함께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다빈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려 하자 

한결이 팔을 뻗어 다빈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목을 굽혀 자신의 어깨에 다빈이 기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한결의 어깨에서 다빈은 곤히 잠들었다. 

***

다빈을 등에 업은 한결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려 비틀거리면서도 굳이 혼자서 걸어가겠다는 다빈을 한결은 아예 들춰 업어버렸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정신 줄을 놓을 정도는 아닌 다빈이었지만

막상 그의 등에 업히고 나니, 그 온기가 너무 따스해 더는 마다하고 싶지 않아졌다. 

도리어, 행복함에 그의 목을 더욱 감싸 안았다. 

한결

 “707호 여기 맞지?”

다빈

 “응. 고마워…남편니…임….”

현관 앞에 도착하자 한결이 다빈을 내려놓았다. 

다빈

 “내가 연예인 되고 나서는 밖에서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데 말이야. 헤헤 오늘은 내가 남편님하고 둘이 남으니까 너무 어색해져서… 술을 계속 마셔 버렸네~”

취기에 다빈이 진담을 쏟아놨다. 

한결은 잠자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다빈

 “김한결! 내 남편이 되어 줘서 고마워…. 음…. 이 말은 진심이야… 어쨌거나 이제 우리 부부 사인데, 이 누나… 맘 아프게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어? 대답 안 하네?! 알았지??!”

한결

 “알았어” 

한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빈의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주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는 말았다. 

한결

 “내 할 일은 끝난 거 같으니, 그만 가볼게. 이불 꼭 덮고 자”

그때 갑자기, 

다빈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갑자기 뒤꿈치를 들어 한결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다빈

 “이건 차비”

한결

 “??”

그리고 다빈은 부끄러움에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다빈

 “잘 가~~!”

닫힌 문 안에서 다빈의 소리가 들렸다.

한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서, 다빈이 입을 맞춘 자리를 되만졌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띄운 채.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8화 - 옛 연인

<연우결> 촬영장.

성공적인 첫 방이 방송된 후, 현장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스태프들도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린다며 이참에 정식으로 사귀어 보는 게 어떠냐며 곧잘 농담을 던졌다. 

이번 촬영은 두 사람이 함께 베이커리를 만드는 콘셉트였다. 

촬영 팀이 섭외한 한 베이커리 카페에서 한결과 다빈은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이곳 사장이자 파티시에의 조언에 따라

함께 반죽하고, 베이커리 장식을 한 후, 오븐에 넣었다. 

오븐에서 빵이 익어가는 동안,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다빈은 평소 빵을 좋아하긴 하지만

오늘 빵을 만드느라 너무 많은 양의 빵을 맛봐서인지, 입안이 달달하기만 한 게

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그때,

한결

 “자, 커피”

한결이 매니저를 통해 공수해 온 아메리카노 커피를 내밀었다. 

다빈

 “와…. 고마워. 안 그래도 커피 생각이 간절했었는데”

한결

 “우리 아내 마음, 남편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 흐흣”

다빈

 “푸하핫. 그런가”

둘이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다빈

 “여보세요”

선우

 - 다빈…. 이니?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빈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금세 알아챘다.

10년 만의 듣는 목소리지만, 그의 음성을 다빈이 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먼저 아는 체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아직도 자신이 선우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빈

 “누구세요?”

선우

 - 흠, 벌써 내 목소릴 잊었구나. 기억할 줄 알았는데

다빈

 “……”

잊었냐고? 당신의 목소릴 어떻게 내가 잊을 수 있겠어.

당신의 그 음성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었는데

그런데 당신, 내가 여태껏 당신 목소릴 기억해주길 기대했던 거야?

어째서. 어떻게. 내게 이리 당당할 수 있어.

흥분으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지만

목소리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빈은 통화를 이어갔다. 

선우

 - 나, 선우야. 한선우! 잘 지냈지?

잘 지냈냐고? 10년 만에 그게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소리라도 질러대고 싶었지만

그게 오히려 더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해

다빈은 오히려 더 차분히 대답했다. 

다빈

 “나는 잘 지내긴 하는데, 오빤 무슨 일이야? 새삼 내 안부가 궁금해서 연락했을 리는 없을 테고”

선우

 - 너 <연우결> 나오는 방송 봤어. 여전히 사랑스럽더라. 방송 보면서 옛날 생각 많이 했어.

다빈은 뜻하지 않은 선우의 말에 도무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빈

 “…….”

다빈은 그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선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선우

 - 너도 그럴 거로 생각했는데, 내가 갑자기 전화해서 당황했나 보구나. 오늘은 인사만 하고, 담에 정식으로 얼굴 보자.

다빈

 “글쎄… 난 다시 오빠 얼굴 볼 일 없을 것 같은데”

선우

 - 아냐, 가까운 시일 안에 보게 될 거야. 그럼 그때 다시 얘기하자. 잘 지내

그렇게 선우의 전화는 끊겼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전화를 끊고도 그렇게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다빈을

한결이 옆에서 지켜봤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정확히는 아니지만

얼핏얼핏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대충의 전화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결은 내색하지 않았다.

한결

 “부인… 무슨 전환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다빈

 “응? 아… 아냐…. 심각하긴. 그나저나 우리 코디는 어디 갔지. 쉬는 동안 메이크업도 한 번 안 봐주고. 나 잠깐 코디한테 가서 메이크업 수정 좀 하고 올게”

한결

 “……그래”

짐짓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채 다빈은 한결의 곁을 떴다. 

그리고는 다빈은 코디와 매니저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파리한 입술……, 매니저이자 절친인 미라는 다빈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단 걸 금세 눈치챘다. 

미라

 “다빈아, 무슨 일 있었어?”

다빈

 “……” 

미라

 “왜 그래?”

다빈

 “선우 오빠… 한테서 전화가 왔어.”

미라

 “선우 오빠가? 전화해서는 뭐랬는데?”

다빈

 “넌 별로 안 놀라네”

미라

 “아니 뭐, 오빠가 귀국했다는 건 몇 년 전에 듣긴 했으니까 언제고 네게 연락해 올 거라 생각은 했지. 이렇게 10년씩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미라는 다빈이 의심이라도 할까, 얼른 말을 둘러댔다. 

만약 다빈이 그 사실을 알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뭔가를 자신에게 숨기는 미라를 다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

첫 방의 시청률이 높고, 관심이 높아지자 방송국 측에서 <연우결>의 제작발표회를 알려왔다.

이름이야 제작보고회지만, 요즘은 방송 전보다는 1~2회 방송이 된 후 제작보고회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연우결>의 출연자 두 커플과 담당 PD가 자리해 간단한 홍보 영상과 메이킹 필름 등을 보여주는 이벤트 후, 기자들과 함께하는 기자간담회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행사 진행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한결과 다빈이 연이어 도착해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다빈은 자리가 자리다 보니, 평소 촬영 때보다는 훨씬 더 드레시한 차림이었다. 

몇 주 전부터 이날 의상을 두고 고민하던 다빈은 한결과 함께하는 공식 석상이니 조금이라도 더 어려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긴 드레스보다는 미니스커트를 원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다빈이 최종 선택한 의상은 민소매로 된 아이보리빛 플레어 미니 원피스로, 러블리한 느낌의 의상이었다. 

메이크업 역시도 은은한 코랄 빛의 아이섀도와 립글로스를 사용해 평소의 발랄한 모습보다는 여리여리한 모습을 강조했다. 

대기실에 들어서던 다빈이 한결을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다빈

 “어머, 남편님 먼저 도착해 있었네”

한결

 “응. 오늘 예쁘다”

다빈

 “히힛, 그래? 신경 좀 쓰긴 했는데”

외모 칭찬이 다소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칭찬을 마다치 않는 다빈이었다. 

그런데 한결은 다빈의 허벅지 전체가 훤히 다 보이는 짧은 스커트가 영 마음에 걸렸다. 

한결

 “그런데 유부녀가 치마를 너무 짧게 입은 거 아냐?”

다빈

 “하핫. 유부녀…? 오늘만 봐줘 남편… 예쁘게 보여야 하는 날이잖아. 내가 남편에 맞춰 어려 보이려고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눈웃음으로 한결을 달랠 셈인지

다빈은 계속해서 눈웃음을 흘리며 한결의 곁에 와 앉았다. 

헉, 그런데 등 한가운데 훤히 파여있는 게 아닌가.

한결

 “부인! 이 등은 뭐야? 이렇게 다 보여주고 다녀도 돼?”

파진 등을 가리키며 

한결

 “여기 안 추워?”

짐짓 농담처럼 말했지만, 한결은 이런 짧은 스커트와 등까지 보이는 노출이 탐탁잖았다. 

다빈

 “히힛, 어때? 섹시하지? 의상이 너무 밋밋한 거 같다고 지영이가 뒤에 이렇게 힘을 줬더라고”

마뜩잖았지만 한결의 입장에서 더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저런 의상을 입고 나왔다면 당장 갈아입으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아직은 연인도, 부부도 아닌 그저 프로그램을 함께하는 파트너일 뿐이니 말이다. 

이때, FD가 무대 대기를 알려왔다. 

홍보 영상 상영이 다 끝나고 기자간담회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사회자의 출연진 소개 후, 주요출연자와 담당 PD가 무대 위에 올라 간단한 인사를 마치면 개별 커플의 포토타임이 이어지고, 이어서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형식이었다.

드디어 무대에 오를 시간.

국내 연예 매체란 매체는 모두 다 왔는지, 행사가 진행되는 컨벤션 홀 뒤쪽은 이들의 모습을 담으려는 동영상 촬영 카메라로 즐비했다. 앞에는 마치 서커스 공연장에서, 조금이라도 앞에서 쇼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뒤에 마련된 좌석을 마다하고 무대와 가까운 바닥에 옹기종기 끼여 앉아있는 모습처럼, 잠깐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열기를 뿜으며 많은 사진 기자들이 자리싸움을하고 있었다. 

배우들이 무대 아래에서 나타나자 카메라 셔터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결, 다빈 커플 이전에 이미 <연우결>에서 부부 호흡을 맞추고 있던 두 배우가 먼저 무대에 올랐고, 이어 한결과 다빈의 차례였다. 

한결은 무대 위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다빈에게 먼저 오르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다빈의 짧은 치마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저런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르다간, 치마 속이 보이지나 않을까,

그 모습이 행여 이 수많은 카메라 중 하나에라도 잡혀 인터넷 포탈에 굴욕 사진으로 뜨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다빈이 먼저 올라가게 한 후, 자신이 그 뒤를 바짝 붙어서 올라가야지

그럼 밑에서 이들을 보고 있는 스태프들도, 쉴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에도 다빈의 뒷모습이 잡힐 리 없겠지. 

한결의 의중을 읽지 못한 채 다빈은 그저 한결의 손짓대로 먼저 계단을 올랐다. 

다빈이 첫 번째 계단에 한 발을 올리자, 그 뒤를 한결이 바짝 쫓았다. 

역시나, 무대 위 오르기 전부터 지나치게 붙어서 올라가는 이들의 이런 모습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리곤 다음 날 인터넷 포털엔 ‘우리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란 제목으로 순간 조회 수 상위를 장식했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과 PD의 간단한 무대 인사가 끝나자 무대 위에 의자와 테이블이 세팅됐다. 

본격적인 기자간담회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MC

 “그럼, 질문 있으신 기자분들은 손을 들어 주시면 저희 스태프들이 마이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느 기자분이 먼저 질문 하시겠습니까?”

무대 앞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포토 기자 뒤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있던 한 기자가 손을 높이 들자, 스태프가 와서 마이크를 건네줬다. 

기자

 - 김한결 씨와 유다빈 씨께 묻겠습니다. 첫 촬영을 위해 현장에 오기 전까지 파트너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고 알고 있는데, 현장에서 파트너를 보고 첫 느낌이 어땠는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한결

 “네,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결이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한결

 “유다빈 씨가 오셔서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아름다우시잖아요. 하핫. 앞으로 좋은 케미가 나오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미 이런 식의 인터뷰에 익숙한 한결은 정답을 준비하고 온 듯 간단히 답했다. 

‘음, 역시 프로구나. 난 뭐라고 해야 하지’ 

한결이 답변하는 동안 다빈도 자신의 답변을 마음속을 정리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9화 - 10년 전 그때도 이런 표정이었지

다빈

 “먼저 한결 씨, 저를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상대방이 김한결 씨인 걸 보고 무척 좋았습니다. 요즘 김한결 씨 안 좋아하는 여자분 없잖아요. 호홋.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긴 했는데요. 예능은 제가 처음이라서 현장에선 오히려 한결 씨가 리드를 해 주셔서 잘 촬영하고 있습니다….”

다빈 역시도 싱그러운 미소를 띄운 채, 낮은 톤으로 또박또박 답변을 이어갔다. 

기자

 - 두 분 첫날 밤도 보내신 거로 아는데요, 촬영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 본 사이에 같이 잔다는 게 어색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실제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한결

 “어색… 하기 보다 저는 좋던데요 하하. 이런 미인이 옆에 있는데 좀 어색하면 어떻겠어요. 저는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앞으로 촬영 때마다 이렇게 1박 2일씩 촬영이 됐으면 합니다 하핫. 감독님 제 말 들으셨죠?”

한결은 유머를 섞은 능숙한 답변으로, 자칫 딱딱할 수 있는 간담회장 분위기를 띄웠다. 

기자

 - 다빈 씨도 어떠셨는지, 한 말씀 해 주시죠.

다빈

 “네, 뭐 저도 좋았습니다. 후훗.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예능은 처음이라 정말 함께 잠까지 자는 줄은 몰랐는데요. 음…. 어색한 것 보다, 저는 자는데 난방이 안 돼서 너무 춥더라고요. 호홋. 감독님 저희 신혼집에 보일러 좀 놔주세요. 흐흣”

다빈의 답변에 기자석에서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긴장하긴 했지만, 다빈 역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채 매끄러운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기자

 - 김한결 씨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가상이긴 하지만 결혼 생활을 해 보니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런 기자간담회에서는 기자들의 질문 대상만 봐도 누가 지금 가장 핫한지 금세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기자들 질문이 한 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날 역시도 질문은 한결과 다빈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같이 자리한 다른 커플이 무안해 할 정도로. 

한결

 “결혼하면 어떤 기분일까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일찍 결혼하고 싶다고 꿈꿔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상이긴 하지만 그 부분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음….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첫사랑을 다시 찾아온 것처럼 설레고 떨리는 감정입니다. 

기자

 - 첫사랑 얘기를 하셨는데요. 김한결 씨는 데뷔 이후 이상형이 바뀌지 않고 인터뷰 때마다 같은 얘기를 줄곧 해 오신 거로 아는데요. 그럼 그 이상형과 유다빈 씨는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데뷔 이후, 인터뷰 때마다 묻는 이상형에 대한 질문에 계속 같은 대답을 해 왔던 한결이었다. 

맑고 청아한 피부에 흰 셔츠가 잘 어울리고, 명랑한 여자. 거기에 가끔은 엉뚱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꼭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눈빛을 가진 여자… 그런 여자를 이상형으로 말해오고 있었다.

한결

 “유다빈 씨요? 기자님 얼마 전에 저를 인터뷰도 하셨잖아요. 그럼 기자님도 잘 아실 것 같은데, 기자님이 보시기엔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하핫”

한결은 능숙하게 답변을 피해갔다.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숱하게 말해 왔던 나의 이상형은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유다빈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 감춘 채. 

기자

 - PD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사실 두 분의 조합이 좀 의외인데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셨나요?

신PD

 “새 출연자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한결 씨보다 다빈 씨 출연이 먼저 확정됐었는데요. 다빈 씨는 이 프로 외주제작을 맡은 대표님과 회의를 하다가 그간 예능 프로에 얼굴을 보이지 않은 여배우 중에서 골라보자는 의견이 나와 섭외하게 됐는데요. 그 과정은 K엔터테인먼트의 한선우 대표님이 더 잘 말씀해 주실 것 같은데요. 한 대표님 잠깐 위로 올라오셔서 대답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신 PD의 시선을 따라 뒤를 기자들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거기엔 고급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한선우 대표가 팔짱을 낀 채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PD

 “한 대표님 무대 위로 올라와서 말씀해 주시죠”

신 PD의 재청이 있자, 더는 마다할 수 없어진 선우가 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선.우??!!

선우 오빠?

선우 오빠가 왜 저기 있지

그럼 선우 오빠가 나를 추천해 내가 캐스팅됐단 말인가?

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선우의 이름이 거명된 순간

다빈은 망치에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선우

 “안녕하세요. K엔터테인먼트 한선웁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다빈 씨의 팬이어서 데뷔 때부터 모든 출연작을 눈여겨봤었는데요. 아직 제대로 매력을 선보일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됐습니다. 예능 프로에는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어, 데뷔 년 차가 꽤 되긴 했지만 엉뚱한 매력이 시청자들의 호감을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방송이 얼마 나가진 않았지만, 몇 회 차의 촬영이 더 있었던 거로 아는데요. 개인적으로 다빈 씨 캐스팅은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한선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미국에 경영학을 공부하러 간댔으니, 당연히 귀국 후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는데

K엔터테인먼트? 연예 쪽엔 관심도 없었잖아. 

더구나 뭐? 신의 한 수? 나의 캐스팅이 신의 한 수였다고?

당신, 자신의 옛 여친을 가상 결혼 프로에 캐스팅할 정도로 냉정한 비즈니스맨이 된 거야?

내가 한때나마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가 이리도 차가운 남자였어?

내가 알고 있던 한선우가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내가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거야?

선우의 말에 다빈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이런 다빈의 모습을 한결이 놓칠 리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다빈의 손을 한결이 꼭 잡았다. 

표정은 여전히 정면을 향한 채,

테이블 아래 가려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유다빈. 10년 전 그때도 이런 표정이었지.

저 남자가 당신을 남겨두고 가버린 그 날, 벤치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때도 꼭 이런 표정이었어. 

금세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표정이었지만

절대 눈물을 흘려내기 싫어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숙였었지. 

손?

다빈은 한결의 손길에 값싼 감상에서 돌아왔다. 

금세 눈물이 쏟아지는 걸 참아 보려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의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버티고 있는 찰나

한결이 자신의 손을 잡아줬다. 

마치 지금, 자신의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것처럼

이런 나를 위로라도 한다는 것처럼

이 남자…. 뭐지?

그 이유가 어찌 됐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한결의 손이 너무 따스해 빼고 싶지 않았다. 

간담회 이후,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기자들을 위한 간단한 음료와 식사가 준비된 파티가 이어졌다.

뷔페식으로 마련된 음식을 각자 편하게 즐기는 분위기였다. 

이런 자리에 웃는 낯으로 서 있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빠질 순 없는 터. 

간단히 참석해 준 분들께 인사 정도만 하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에 다빈은 파티 자리를 지켰다. 

한결과 다빈이 간단히 칵테일을 즐기며, 아는 체 해오는 관계자들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멀리서 이 둘을 지켜보는 이, 선우였다. 

다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려서 무너져 버릴 듯한 표정이 되어 버린 한선우.

다빈아… 이제야 널 다시 보는구나. 

10년 만에 다시 보는 너지만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방긋하게 웃는 입매, 웃을 때면 살짝 주름이 지는 귀여운 미간, 

상대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깊은 눈으로 응수하는 눈빛,

맑게 울리는 음색까지 여전히 그대로네.

그날 내가 10년 만에 네게 전화했던 날,

넌 날 아주 차갑게 대했지. 왜 이제서야 널 찾느냐고

이제 서가 아니야, 유학을 간 후, 그리고 6년 만에 한국을 돌아온 후에도

한 번도 널 잊어본 적이 없어. 

내 사랑은 너뿐이니까.

그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미안해.

널 <연우결>에 캐스팅하자고 제안한 건, 

네가 이곳에서 다시 활짝 피길 바라는 마음이었어. 

그리고 너라면, 네가 그 프로에 출연해 본연의 그 사랑스러움을 발휘한다면

그 프로가 성공할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

너의 성공을 내가 만들어 주고 싶었어.

그 후에 널, 당당히 집안에 소개하고 싶었어. 

내가 제작한 프로로 당당히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네가 내 사랑이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널 인정해 달라고.

그저 비즈니스를 위해서 널 그 프로에 출연시키고자 했던 거 아니야.

그러니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10년이나 늦춰진 우리 사랑을……

선우가 다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우

 “여기 있었네.”

복잡한 심경과 달리 태연한 표정이었다.

다빈

 “…….”

선우

 “우리 10년 만이지.”

다빈

 “다시 만날 거란 얘기, 이걸 말한 거였어?”

선우

 “이른 시일 안에 널 찾아가 만날 생각이었지만, 그게 오늘이 될지는 몰랐어.”

다빈

 “그래? 그런데 어쩌지, 난 오빠랑 더 나눌 얘기가 없는데”

선우

 “……. 다빈아”

그때 한결이 끼어들었다. 

다빈이 한선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싫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었다. 

한결

 “저기, 국장님이 아까부터 찾으셔서…, 얘기 끝나셨으면 우린 자리를 좀 옮길게요”

‘이 녀석 뭐지! 지금은 촬영 중도 아닌데’

촬영이 아닐 때, 두 사람은 그저 동료 선후배일 뿐이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온통 주변이 기자들 천지라 여기서 괜한 승강이를 벌여 기자들 눈에라도 띄면, 다빈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선우는 말을 참았다. 

결국, 다빈은 한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다빈

 “국장님 아까 뵀었잖아?”

한결

 “그냥 한 말이었어. 그 자식하고 말하는 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 자식?’

그건 분명 좀 전, 자기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선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그것도 자신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외주 제작사 대표를 두고 그 자식이라고?

이건 설마 질투……?

에잇, 그럴 리가. 이제 우리 만난 게 몇 번이나 된다고.

***

한결의 집. 

샤워를 막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 한결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개를 땄다.

벌컥벌컥.

마른 목을 축이고 나니, 낮에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한결

 “유다빈 괜찮은가?”

한결은 핸드폰을 꺼내 키패드를 눌렀다. 

‘우리 부인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던데 기분 좀 나아졌나?’

얼마 후 다빈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기분 안 좋을 일 없었는데?’

한선우를 보고, 무너지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놓고선

그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갖고 있으면서

오늘 아무 일이 없었다고?

그래, 믿어주자. 

가슴 아픈 시련 따윈 겪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애초에 한선우와 연애 따윈 하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여 줘 유다빈.

모르는 척, 장난스러운 문자로 다빈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난 또 질문이 나에게만 쏠려 기분 안 좋아진 줄 알았지. 아니면 다행’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0화 - 다시 사귀자고 하면 어떡할 거야?

                    

오늘 선우와의 재회 이후 수 만 가지 생각이 오간 다빈이다. 

도대체 왜 이제 와서 자기를 찾는 걸까?

정말 내 매력을 팔아 방송을 성공하고 싶은 거였을까?

내가 알던 한선우는 적어도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비록 그때 집안의 성화에 못 이겨,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유학길에 오르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나와의 이별을 택한 건 어쩌면 날 위한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기약 없는 유학 기간 동안, 한참 사랑하고 사랑받을 나이의 나에게 기다려 달라고 하긴 미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귀국 후 한 번도 날 찾지 않은 것일까?

얼굴이 알려진 직업이라 찾기도 쉬웠을 텐데

외주 제작사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 못할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

아직 내게 마음이 남아 있는 건가?

그럼, 유다빈

넌, 선우 오빠가 다시 사귀자고 하면 어떡할 거야?

어떤 쪽으로 생각을 해봐도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했다. 

그때, 한결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 부인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던데 기분 좀 나아졌나?’

뭐야, 내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안다는 말투잖아.

하긴, 내가 워낙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타입이라

뭔가 평상시하고 다르다고 느꼈겠지.

살뜰한 사람. 한결을 떠올리면서 언제 심각했었냐는 듯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이럴 땐 잡아떼는 게 최선이지.’

아무 일 없는데 왜 그러냐는 듯한, 다빈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투의 문자를 찍었다. 

‘오늘? 기분 안 좋을 일 없었는데?’

바로 한결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난 또 질문이 나에게만 쏠려 기분 안 좋아진 줄 알았지. 아니면 다행’

헉, 뭐야 괜찮으냐고 묻는 게 이런 이유였어?!

그럼 그렇지. 연기 구력이 몇 년인데

옛 남친이 나타났다고 유다빈이 그걸 고스란히 티를 냈겠어.~!

표정 하나 변화 없었을 거다. 푸하하

한결과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 심란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소의 발랄한 다빈으로 돌아와 있었다. 

***

은표가 운전하는 차 안. 

한결의 스케쥴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한결이 아무리 스타라고 해도 소속사 대표가 굳이 운전까지 하며 따라다닐 짬밥(?)은 아니었지만 은표는 한결의 스케쥴에 자주 로드 매니저를 자청하며 함께 다니곤 했다. 

소속사 배우이기 이전에 마치 친동생처럼 아끼는 터라, 시간만 허락한다면 되도록 자신이 뒤를 봐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신호대기 중,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결의 눈에 큰 길가 쥬얼리 샵이 들어왔다. 

한결

 “형, 저기 잠깐만 세워줘요”

은표

 “어디? 저기 편의점 앞?”

한결이 가리킨 쥬얼리 샵 옆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애인도 없는 한결이 쥬얼리 샵을 가리켰을 리 만무하기에

편의점에 들러서 음료수라도 한 병 사려고 하나보다, 은표는 생각했다. 

한결

 “네, 형. 거기 세워주세요”

은표가 차를 멈추자, 한결이 내리며 

한결

 “형, 금방 못 나올 수도 있으니까 어디 차 좀 대고 기다려 줄래요?”

은표

 “너 편의점 가는 거 아냐? 뭘 얼마나 사길래 차까지 주차하고 기다리래?’

한결

 “아무튼, 좀 기다려주세요 형. 나오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걸음을 옮기는 한결을 가만히 지켜보니, 한결이 들어간 곳은 편의점이 아닌 쥬얼리 샵이었다. 

‘쥬얼리 샵?’

한결이 쥬얼리 샵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직원이 금방 그를 알아보고, 입이 함지 막하게 벌어져서는 인사를 건넸다. 

여직원

 “어서 오세요. 어떤 거 보러 오셨어요?”

한결이 진열된 액세서리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결

 “반지… 를 좀 살까 하는데요. 추천 좀 해 주시겠어요?”

여직원

 “네… 착용하실 분의 연령대가 어떻게 되시죠?”

한결

 “30대요…. 실은 제 아내… 주려고요. 하핫” 

아내라고 하니 멋쩍었다. 하지만 <연우결>쯤은 알고 있겠지.

여직원

 “아아, 유다빈 씨 주시려고요?”

한결이 대답 대신 미소 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직원은 진열장 안에 디스플레이 된 반지들을 쭉 한 번 내려다보더니, 반지 하나를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여직원

 “이건 어떠세요? 너무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가운데 큐빅이 있어 커플링이나 프러포즈용으로 많이들 선호하는 디자인이에요” 

직원이 소개해준 반지는 심플한 밴딩으로 되어 가운데에 섬세하게 컷팅 된 큐빅이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디자인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 남자가 하기에도 무난해 보였고, 가운데에서 빛나고 있는 큐빅 덕분에 여성에게도 어울릴 듯한 그런 디자인이었다. 

한결은 반지를 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보고는

한결

 “아내 거 사이즈는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커플링으로 하게 제 것도 보여주세요.”

직원이 같은 디자인의 남성용 반지를 꺼내주었다. 

넘겨받은 반지를 착용하자, 한결의 섬세하고 긴 손가락에서 맞춤인 양 빛났다.

여직원

 “호홋, 잘 어울리시네요. 어쩜 손가락도 아주 예쁘시네요”

점원의 눈에 하트가 솟구쳤다. 

여직원

 “이런 반지를 다 받고. 방송이지만 유다빈 씬 참 좋겠어요”

한결

 “하하 마음에 들어 하면 좋겠네요.”

여직원

 “디자인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디자인이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워 연예인들한테도 입소문 많이 나 있어요. 유다빈 씨도 아마 좋아하실 거에요”

한결

 “하하…. 네. 그럼 이걸로 포장해주세요”

한결은 케이스에 넣어 포장한 반지를 건네받아, 쥬얼리 샵을 나섰다. 

그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설렘이 넘쳤다. 

샵에서 나온 한결이 전화를 걸자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있던 은표가 차를 가지고 와 한결을 태웠다. 

은표

 “거기서 뭘 산 거야?”

한결

 “……반지요”

은표

 “반지?”

한결

 “네. 이제 곧 우리 100일이잖아요. 그때 선물로 주고 싶어서요.”

은표

 “히핫, 녀석 꼼꼼하기는. 근데 너 이거 방송을 위한 거냐, 진심인 거냐?”

한결

 “음… 어느 쪽인 것 같으세요?”

은표

 “뭐야? 너 진심이야? 야, 김한결. 너 지금 계약해 놓은 CF가 몇 갠 데. 지금은 안돼”

한결

 “알아요 나도. 회사에 피해 주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아직 <연우결> 촬영도 더 남았잖아요. 그게 다 끝나면 그때 고백하고 제대로 시작할 거에요”

은표

 “어휴… 너 그때까지 기자나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마라. 그러면 정말 상황 곤란해진다”

한결

 “네 알아요. 형”

은표

 “인마, 회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한결

 “알았다니까요 하핫”

하하 음흉한 녀석. 

언제부터 인 거야?

일만 하느라고 연애는 통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하긴 한참 좋은 나이에 연애도 하고, 실연도 당해봐야지 

그게 다 나중에 연기에 녹아서 나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괜히 언론에 알려지면, 입방아에 한결이도 상대방도 힘들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녀석, 숨기기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기다려라.

그때가 되면 열심히 너의 사랑을 응원하마.

***

신혼집 촬영장.

한결과 다빈이 주방에서 분주하다. 오늘은 두 사람의 소속사 식구들을 초대해 집들이할 예정이었다. 

한결이 냉장고 문을 열어보며 말했다. 

한결

 “뭐가 있나? 음… 장을 봐야겠다. 냉장고가 텅텅 비었네”

다빈

 “그래야 할 것 같아. 근데 메뉴는 뭐로 하지?”

한결

 “우리 부인이 가장 잘하는 거로 하나, 내가 잘하는 거로 하나. 그 정도로만 하자. 어차피 초대받아 오는 사람들도 음식에 관해서 큰 기대 안 하고 올 테니 말이야”

다빈

 “어머, 왜 기대를 안 해. 이래 봬도 내 음식 솜씨는 이미 우리 회사에서는 정평이 나 있다고. 내 밥 한 번 더 먹어보려고 사무실 사람들이 얼마나 오매불망하고 있는데”

한결

 “하하핫. 그 정도야? 그건 뭐 이따가 확인해 보면 알 테고! 그거 거짓말이면 반나절도 안 돼서 바로 들통 나는 거 알지?”

다빈

 “어머, 사람 말을 안 믿네. 좋아. 이렇게 된 거 내 오늘 최고의 솜씨로 ‘냉장고를 부탁해’ 셰프들에 버금가는 실력을 보여주겠어.”

한결

 “하하 기대할게. 우선 장부터 보러 가자”

***

마트로 이동하는 차 안, 

차 앞쪽에 부착된 무인 카메라가 카메라 감독을 대신해 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한결이 물었다. 

한결

 “우리 아내님은 나중에 결혼하면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다 하는 거 있었어?”

다빈

 “음…. 나는…. 그거 해보고 싶었어. 저녁에 잠자기 전에 피곤해 진 남편 발을 씻겨 주는 거. 발 마사지를 하면서 로션도 톡톡 발라주고….”

한결

 “아…. 그게 하고 싶었구나…. 그럼 나한테도 해주겠네? 흐흣”

다빈

 “어? 어… 그…. 그래…….“

다빈은 자신이 한결의 발을 씻겨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왈랑왈랑 해졌다. 

이 남자 연애를 많이 했나. 진짜, 선수네 선수!

다빈과 한결이 달콤한 대화가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마트에 다다랐다. 

한결은 차에서 내리려는 다빈을 저지하더니, 먼저 내렸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 다빈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다정하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이. 

다시… 연애를 하게 된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사랑받는 기분. 

온 신경이 자신에 집중된 듯 소중히 대하는 한결의 매너에 다빈의 입꼬리는 더욱 위로 올라갔다. 

***

미리 촬영에 대한 양해를 구한 마트에서 다빈과 한결이 나란히 카트를 밀며 장을 보고 있다. 

촬영이긴 하지만, 최대한 영업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최소 인원으로 촬영하기로 해 카메라 감독과 PD 정도만 들어와 촬영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 

한결

 “부인…은 어떤 요리할 거야?”

다빈

 “밀푀유나베”

한결

 “밀푀유나베? 그게 뭐야? 이름만 들어선 뭔가 대단히 거창한 것 같은데?”

다빈

 “하하, 당연하지. 실은 이름은 거창해 뵈는데 뭐 별로 요리할 것도 없어. 고기랑 채소를 차곡차곡 쌓아서 전골냄비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끝이거든”

한결

 “그래? 그럼 채소부터 골라야겠네”

한결은 다빈이 필요하다는 채소를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서 카트에 담았다. 

그 모습에 마치 깐깐한 검사관이라도 된 듯  

다빈은 채소를 고를 때는 뿌리가 신선하고, 색이 선명한 놈으로 골라야 한다며, 한결이 넣은 채소를 되받아 꺼내고는 신선한 거로 다시 골라 담았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신혼부부였다. 

이런 게 함께 하는 행복이구나. 

뭔가 대단한 이벤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이 여인과 함께 카트를 밀며, 마트를 돌고 있는 것뿐인데

이렇게 사소한 일상이… 이렇게 행복하다니

유다빈. 고마워.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줘서,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어줘서,

내 옆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어줘서,

아직은 고백할 순 없지만…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아주머니들

 “두 분 잘 어울려요. 진짜 결혼하세요!”

마침 장을 보러 왔다, 한결과 다빈의 촬영 모습을 목격하게 된 아주머니들이

흡사 골프장의 갤러리들처럼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 외친 소리였다. 

그제야 한결도 혼자만의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한결

 “아, 네… 감사합니다. 하핫”

다빈 역시도 아주머니들의 소리가 싫지 않은 듯,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한결

 “그럼 여기서 채소 고르고 있어. 난 얼른 저쪽에 가서 내가 할 요리 재료 좀 골라 올게”

다빈

 “응” 

한결은 다빈에게서 떨어져 몇 블록 앞 가공식품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고딩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다빈을 알아보고 몰려든 게.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1화 - 집들이

남학생1

 “와… 유다빈이다~~~!!”

남학생2

 “누나…. 유다빈 맞죠… 와…. 정말 예뻐요”

다빈

 “응. 고마워. 그런데 지금 촬영 중이라…….”

남학생1

 “누나, 사진 같이 한번 찍어주세요”

남학생들은 카메라까지 가리며 금세 다빈을 에워쌌다. 

남학생2

 “누나 악수 한 번 해주세요, 악수!”

유달리 짓궂어 보이는 인상의 한 남학생이 바짝 다가와, 피할 새도 없이 다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혹스럽지만, 지금은 촬영 중. 

빨리 악수를 해주고, 상황을 수습해야지. 

나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면 안 돼.

얼른 요구를 들어주고 촬영에 더는 지장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다빈은 그대로 손을 내주고 있었다. 

그래야 빨리 이 고딩들이 자리를 비켜줄 것 같아서. 

그런데 악수를 하자며 덥석 손을 잡고 있던 남학생이 좀 더 저돌적으로 변해 다빈을 안으려는 듯 더 가까이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의 일이라 당황한 다빈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이걸 피해야 하나, 하지 말라고 말을 할까?’라는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가는 동안

다빈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뒤로 숨기는 손. 한결이었다!

한결

 “학생들 이렇게 예쁜 사람을 실제로 만나볼 기회가 없어서 그러는 건 알겠지만 말이야. 뭘 또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가워 해주고 그래. 그런데 어쩌나, 저기 카메라 보이지? 이분이 저 카메라 돌아가는 동안은 내 아내 신분이라서 말이야. 난 내 아내가 아무하고나 막 손잡고 그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대신 내 손은 괜찮은데, 나는 어때? 이 손도 평생 한 번 잡아 보긴 힘든 손인데 말이야.”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한결은 다빈을 자신의 뒤로 숨긴 채, 고딩의 손을 잡아 꽉 힘을 주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악력이 고딩의 손을 짓이길 듯 눌렀다. 고딩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남학생2

 “아… 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유다빈 누나를 실제로 보니 너무 반가워서….”

한결

 “예쁜 우리 부인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 내 다 알지. 나도 그렇거든. 그래도 이 정도까지만 해줘야겠어. 더 보고 싶으면 나중에 <연.우.결> 방송하면 그때 보도록 하고! 우리 지금 촬영 중인데 너희가 방해하고 있는 거거든. 나랑 악수하는 영광도 누렸으니 이제 그만 비켜 주는 게 어떨까? 우린 촬영을 계속해야 해서”

얼굴이 알려진 유명 연예인이다 보니 어디에서건 표정관리는 기본이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도 없다. 팬이라고 무작정 달려드는 사람들에게조차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게 연예인의 숙명이라면 숙명이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한별이었기에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 말만은 어느 때보다 강하고 단호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촬영을 중지시킨 신 PD가 다가왔다. 

신PD

 “다빈 씨 괜찮아요?”

다빈

 “네. 학생들이 반가워서 그런 건데요 뭘”

요즘에 고딩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어른보다 더한 행동도 하는 게 고딩들이라고! 보통 때도 저렇게, 팬이라면 무방비 상태로 대하나? 한결은 살짝 걱정됐다. 

한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항상 조심해.” 

아무한테나 막 손 내주고 그러지 말고. 나도 얼마나 잡아보기 어려운 손인데!

‘나를 걱정해주는 건가?’ 

한결의 기분 좋은 잔소리에 다빈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신PD

 “자, 시간이 제법 됐으니까 장 보는 건 이 정도로 하죠”

신 PD가 현장 마무리를 지시하자, 촬영 팀을 철수를 서둘렀다.

***

신혼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요리 준비에 부산하다.

깨끗하게 씻긴 배춧잎, 깻잎, 버섯, 숙주 등이 쟁반 위에 나란히 올려져 있다. 

그 앞에 도마를 편 다빈이 배춧잎, 그 위에 깻잎, 그 위에 고기를 깔았다. 

그리고는 먹기 좋게 네 등분해 전골냄비에 담았다. 그러기를 서너 번 반복해서 담고는 가운데에 버섯을 놓았다. 그랬더니 그야말로 그럴싸한 전골 요리가 완성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한결이 

한결

 “와, 부인. 비주얼이 그럴싸한데? 무슨 궁중음식 같기도 한 게”

다빈

 “푸힛. 괜찮지?”

한결

 “응. 나도 한 번 해볼까?”

냉큼 다빈 앞에 놓인 도마를 자기 앞으로 밀더니 배추 한 장을 떡하니 깔았다. 

한결

 “그다음이 뭐지?”

다빈

 “깻잎” 

다빈이 깻잎을 가져다주자 한결이 배춧잎 위에 살포시 포개어 얹었다. 

한결

 “부인. 그다음은 고기겠네? 고기는 큼직한 놈으로 많이!”

한결은 고기 접시에 담긴 남은 고기 중 가장 큼지막한 놈을 올리겠다며, 둥글게 말려있는 얇은 고기 점을 떼어서 들어보고 작아서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다빈

 “어머, 고기들이 다 찢어졌잖아. 얇아서 고르지 말고 한 번 잡은 애들은 그냥 올려야 해”

다빈이 예쁜 눈을 살짝 흘겼다. 

한결

 “그러네. 그럼 어쩔 수 없지. 크기로 안 되면 양으로라도 승부해야지!”

한결은 얇아서 찢어진 고기들을 여러 차례 깔아 두툼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빈

 “아유…. 뭐야, 고기만 먹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고기만 여러 겹 겹치면 색깔이 다른 애들하고 안 맞잖아.”

한결

 “하긴 붉은색 층이 너무 높긴 하네. 하핫”

다빈

 “저기 남편…. 이쪽은 안 도와줘도 될 것 같으니까. 가서 남편 거나 만들어. 이제 시간 거의 다 됐잖아”

한결

 “내꺼?”

다빈

 “응. 남편은 무슨 요릴 할 건데? 지금 솜씨를 봐선 무슨 요리가 나올지 완전 궁금!”

한결

 “내건 미리 해두는 거 아냐”

다빈

 “그럼 언제 해? 메뉴가 뭔데?”

다빈이 궁금증을 못 참고 물어보자, 한결은 좀 전에 장 봐온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보였다.

한결

 “이거!”

다빈

 “!!”

한결

 “지금 할 필요 없겠지? 그치? 하핫” 

한결이 능청을 떨었다. 

다빈

 “뭐야, 라면?!”

한결의 손에는 신라면 5개들이 한 봉지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헛웃음 밖에 안 나온다는 표정의 다빈은 뭘 기대하겠냐는 듯 

지금 만든 양으로는 모자라겠다며, 싱크대에서 다른 냄비를 하나 더 꺼내서는 다시 고기와 채소를 쌓아 담았다. 

한결은 다빈이 눈을 흘겨도 예쁘고, 잔소리를 퍼부어도 예쁘기만 하다. 하하.

그때, 

신PD

 “잠시 테이프 갈고 갈게요!” 

잠깐의 휴식시간.

다빈

 “아, 우리 아까 커피 마시기로 해서 물 끊였는데, 요리에 집중하느라 잊었네”

한결

 “그러네! 정말. 지금 마실까?”

다빈

 “응, 좋아. 간만에 노동을 좀 했더니 피곤하던 차였어. 이럴 땐 달달한 믹스 커피가 최고지.”

한결

 “그래 기다려 내가 타다 줄게”

한결이 믹스 커피를 가져와 머그잔 두 개에 각각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좀 전에 끓여 두었던 커피포트의 물을 심혈을 기울여 따랐다. 

한결

 “조금 적어, 음, 그래도 좀 적네. 아, 좋아 딱 이 만큼!”

달랑 믹스 커피 하나 타면서, 물의 양을 맞추는 모습은 세상에 없는 커피를 끊여 내는 최고의 바리스타의 모습이었다. 

한결

 “물을 끊여 놓은 지 좀 돼서, 좀 식은 거 같은데?”

다빈

 “바로 마시기 좋지 뭐. 그냥 주세요~~.”

한결

 “자, 여기”

한결이 머그잔을 들어 다빈에게 건네려는 순간!

내미는 손과 받으려는 손이 어긋나  

머그잔이 휘청. 커피가 촤아~ 

다빈의 앞섶에 그대로 흘러내렸다. 

다빈

 “앗, 뜨거”

한결

 “괜찮아?!, 괜찮아?!”

데이지 않았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결은 서둘러 다빈에게 커피가 쏟아진 옷 위를 손으로 털털 털어냈다. 

그게 다빈의 가슴 앞섶이라는 생각도 잊은 채. 

순간, 말랑한 그 무엇이 한결의 손에 닿았다.

헉!!

다빈

 “어머!” 

다빈이 당혹스러움에 외마디를 질렀다.

아니, 지금, 손이 어디를 만지고 있는 거야!

당황한 다빈이 서둘러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한결

 “아, 미안…. 난 그저…. 옷에 떨어진 커피 물을 털어 내려고 한 게… 미안….”

당황하긴 한결도 마찬가지였다. 

다빈

 “그렇다고 아무 데나 막 손을 대면 어떡해”

한결

 “흠흠. 미안. 정말 데이기라도 했을까 봐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다구”

커피 물에 데기라도 했을까 봐 얼마나 놀랐는데……

근데 털어낸 게 커피 물이 아니라, 하필……가슴……이라 좀 놀랬지만 서도……

얼굴이 홍당무가 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정적을 깨는, 구원의 손길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신PD

 “자, 촬영 다시 시작합니다”

*

약속 시간을 지켜 초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실은, 더 일찍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 PD의 지시로 그제야 들어섰던 거지만……

우르르 들어선 손님들은 실제 집을 임대해 촬영장으로 쓰고 있는

아기자기 꾸며진 신혼집을 보고 감탄했다. 

미라

 “와, 집 너무 예뻐요”

정훈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미라

 “난 이런 집보다 저렇게 생긴 사람이랑 연애라도 한번 해 봤음 좋겠어.”

실장

 “두 사람 앞치마까지 커플로 입고 있어. 호호홋”

들어선 무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왁자지껄, 두 사람의 대화 소리 외에도 손님들의 부러워 마지않는 소리에 집안은 진짜 집들이 중인 신혼집처럼 들떠 있었다. 

천상여자 분위기의 화연도 조용히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이 한결 씨가 다빈 언니와 함께 있는 곳이구나.

이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부럽다, 다빈 언니.’

화연은 자신의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빙그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카메라가 사방에서 찍고 있어 언제 자신의 표정이 카메라에 잡힐지 모르므로 웃음은 기본으로 장착했다. 

화연

 “와, 난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집을 빌렸네. 진짜 신혼집 같아”

한결

 “그렇지 크큿. 자, 소개해 줄게 이쪽은 이화연, 알지? 나랑 동갑인 데다 데뷔도 비슷하게 해서 절친이야. 그야말로 여자 사람 친구. 여긴 내 아내, 뭐 방송 봐서 다 알 테고”

한결과 비슷하게 데뷔해, 청순하고 여성스러운 매력으로 요즘 막 주목받기 시작한 화연의 존재를 한결에게서 종종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스킨곡류 화장품 CF까지 꿰차 TV에서만 봐 왔는데, 실물로 보니 더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빈

 “반가워요” 

다빈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화연

 “말씀 낮추세요. 언니. 제가 한결 씨랑 동갑이라 언니보다 한참이나 어려요”

다빈

 “아, 네… 차차”

한결 씨랑 동갑이라 한참이나 어리다고? 뭐 굳이 그걸 그렇게 강조하고 그래. 흥.칫.뿡이다~!! 

한결

 “화연아 이쪽으로 와서 앉아”

한결이 거실 한가운데 마련된 방석을 앞에 두고 서서 화연을 불렀다. 

화연

 “응, 고마워”

*

테이블 위에 다빈이 마련한 음식이 놓였다. 

음식을 맛본 손님들의 ‘연기만 해와서 요리를 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다 배웠느냐’, ‘얼굴 예쁜 사람이 음식까지 잘하면 우린 어쩌냐’ 등등 듣기 좋은 칭찬이 이어졌다. 

음식이 맛있다는 칭찬에 마치 진짜 집들이에서 칭찬이라도 받은 양, 어깨가 우쭐해졌다. 

식사를 끝낸 후, 제대로 된 토크 타임이 시작됐다. 

가까운 소속사 식구들만 알고 있던 한결과 다빈의 은밀한(?) 비밀이 성토되었고, 두 사람은 그들의 농담에 웃기도 하고 난처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신혼 집들이에 빠질 수 없는 메뉴, 벌칙 게임이 시작됐다. 

정훈

 "자자, 이쯤에서 우리 게임 한 번 합시다. 신혼부부 벌칙은 또 한 번 시켜줘야지"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2화 - 벌칙을 기대해

미라

 "숫자게임 해요, 숫자 게임"

정훈

 "좋아. 7까지 부르게 해서 마지막에 7을 외치는 사람이 벌칙 받는 겁니다."

다빈은 은근 긴장이 됐다. 워낙에 게임에 약하기도 한데다 카메라까지 앞에서 타이트하게 잡고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정훈

 "하나!"

한결의 로드 매니저부터 숫자를 외치고 들어갔다. 

미라

 "둘" 

다빈의 매니저인 미라가 순조로운 출발을 이어갔다. 

뒤이어 "셋", "넷" 소리가 급박하게 이어졌다. 

이제 다섯, 여섯을 놓치면 벌칙이다. 

여섯은 위험하다. 이번을 놓치면 안 된다!

행여 누가 먼저 외칠까 봐 다빈이 바로 이어 "다섯!"을 외쳐댔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절대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 신 PD 하수인들이 '다섯'을 양보할 리 없었다. 

화연과 다빈이 동시에 다섯을 외치고 말았다.

정훈

 "와하하하하. 다빈 씨 당첨!!" 

나만 아니면 돼! 환호가 이어졌다. 

정훈

 "자자, 벌칙 들어갑시다. 화연 씨의 벌칙이야 뭐 편집될 테니까, 바로 다빈 씨 벌칙 갑시다!."

화연

 "호호. 좋아요!"

너무 난감한 걸 시키면 안 되는데.

가무에 능하지 않은 다빈은 이런 게임에서의 벌칙이 너무나도 당혹스럽다. 

동정에라도 호소해봐야지.

다빈은 손으로 턱에 꽃받침을 만들어서는 불쌍한 고양이 표정으로 소속사 식구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이 사람들 어림도 없다! 냉정하기가 한겨울 얼음장이다. 

실장

 "벌칙 뭐로 하지? 센 거로 가야 하는데"

다빈

 "아우, 실장님……."

다빈은 이젠 애걸이다. 

실장

 "에이 좋아. 그럼 간단히 섹시 댄스 가자"

세…. 세…. 섹시 댄스?!

춤과는 거리가 먼 다빈이었다. 요즘이야 소속사에서 가수든 배우든 할 것 없이 춤과 노래 연기는 기본으로 가르치지만, 다빈이 데뷔했을 때만 해도 그저 한 우물이었다. 그런데 춤을 추라니. 그것도 섹시 댄스를, 그것도 한결 앞에서!

아, 망했다! 망했어!

절망의 늪으로 떨어지는 다빈과 달리 한결은 다빈의 섹시 댄스가 한껏 기대됐다. 

이 구경꾼인지, 소속사 식구들인지는 벌써 스마트폰에서 요즘 가장 핫한 아이돌의 노래를 찾아 재생시키고는 빨리 추라며 박수까지 치고 난리다. 

워!워!워!워! 짝.짝.짝. 박자를 딱딱 맞춘 구경꾼들의 박수가 쏟아지고 있다. 더는 빼기도 어려운 상황. 

아우, 방송만 아니었으면 내 이 인간들을!

그래, 까짓거! 일단 추고 나중에 PD님한테 편집해 달라고 하자. 

휴. 호흡을 가다듬고 섹스댄스를 위한 포즈~ 장전!

시작은 앞뒤 웨이브.

엉덩이를 뒤로 쭉 뺀 다빈이 둥~글게 웨이브를 만들려고 했으나……. 결과는 각이 딱딱 진. 꺾기 춤이!

내친김에 이번에는 옆 웨이브다! 

엉덩이를 좌측으로 쑥 빼고 고개를 우측으로 내밀고 둥~글게 웨~이~브~~!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이건 뭐 'ㄴ'자 만들기다. 

자자, 분위기를 몰아서. 이번엔 한결의 가슴팍에 손을 탁! 대고는 앉았다 일어서는 웨이브~~!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역시 결과는 그저 앞뒤로 꿈틀꿈틀 그냥 앉았다 일어서는 꿈틀 이다. 

좌중은 섹시 댄스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웨이브인지 알아보지 못할 춤에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난리다. 

미라

 “아하하하하!”

정훈

 “푸하하하핫!”

땅을 치며 웃는다. 웃다가 배꼽이 빠져도 모를 정도다. 

한결 역시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결

 “섹시 댄스 한 번 끝내주네! 너무 섹시해서 다 녹아내리겠어. 하하”

웃어? 김한결 이제 곧 네 차례라고!

다빈

 "자, 다음 게임 갑시다. 갈 길이 멉니다"

다음 타겟은 당연히 한결일 터. 일단 다빈은 한차례 벌칙을 받았으니 한숨 돌렸다. 

다음 게임은 숫자 외치며 일어서기 게임!

이번에는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리라. 다빈이 당당히 “1”’을 외쳤다. 

음, 아내가 일을 외쳤으면, 남편이 이를 외쳐야지. 2……. 는 둘이라 2였다!

다빈에 이어 2를 외친 건 한결과 함께 로드 매니저 정훈이었다.

한결

 "아!" 

안타까운 탄성이 한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실장

 "오호, 한 번에 걸려주시네. 자 벌칙! 벌칙 들어갑시다."

미라

 "진짜 센 거로 가요!" 

이 사람들이! 신혼집 집들이 왔으면 벌칙은 뽀뽀하기 뭐 이런 19금이나 외칠 것이지. 자꾸만 뭔 가무야 가무를 젠장!

뽀뽀, 키스 이런 거면 내가 아주 필~ 빡 오게 해 줄 수 있는 데 말이야. 신 PD님이 그런 건 하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주시기라도 했나.

내심 스킨십 벌칙을 기대했던 한결은 기대는 헛된 바람이었다. 

다빈

 "아내가 댄스를 보여줬으니, 남편은 뽕짝 한 번 갑시다. 뽕짝!"

하하하. 댄디한 귀공자풍 이미지의 한결에게 뽕짝이란다!

그거 한 번 쌤통이다!

다빈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와, 물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한결

 "저기 아내분. 너무 하는 거 아냐?!"

한결이 볼멘소리로 다빈을 노려봤다. 

다빈

 "어허, 내 벌칙에 웃고 난리 난 사람이 누구였더라"

쳇! 한다, 해! 해!

흠흠

한결

 "아주 그냥~ 죽여줘요~~~!!."

미라

 "와아아아!!"

버터 발라 놓은 듯 느끼한 표정을 가득 지은 한결의 입에서 '샤방샤방'한 노래가 아주 그냥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한결

 "누구나 사랑하는 매력적인 내가 한 여자를 찍었지~

아름다운 그녀 모습 너무나 섹시해~

얼굴도 샤방샤방 몸매도 샤방샤방 모든 것이 샤방샤방~

얼굴은 V라인 몸매는 S라인~ 

아주 그냥 죽여줘요~”

얼굴은 도무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만화를 막 찢고 나온 듯한 비주얼을 하고는 느끼한 노래에 맞춰 손가락까지 휘어잡는 안무를 보고 있자니 안 어울릴 것 같은 노래가 또, 썩이나 잘 어울린다. 

역시 참, 뭘 해도 멋진 남자야! 

한결

 “샤방샤방 샤방샤방 샤방샤방 샤방샤방~ 

아주 그냥 죽여줘요~~~"

느끼함을 철철 흘리며, 클라이맥스에서 쐐기를 박았다.

제스처까지 똑같이 흉내 낸 모습에 일동, 배꼽이 빠지라 웃어 젖혔다. 

"와아아아" 박수와 함성이 이전보다 더 크게 쏟아졌다. 

정훈

 "이참에 형 그냥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는 건 어때요?"

미라

 "그러게 한결 씨 트로트 음반 내면 이제 아줌마 팬들까지 완전히 섭렵하겠어요. 하하핫"

노래 부를 땐 거기에 흠뻑 빠져 완전 느끼한 표정과 눈빛으로 불러 젖혔지만, 노래가 끝나고 나니 창피함이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아, 이거 방송 나가도 되나! 아, 내 이미지……!

이 정도면 웃음 분량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싶었는지, 연출진에서 카메라에 오디오가 물리지 않게 입 모양과 제스처로 스킨십 벌칙을 주문해 왔다. 

손님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리 가상이라 한들 스킨십이 벌칙을 짜고 치면 남녀 사이 특유의 설렘과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실장

 “자, 마지막 게임은 3,6,9로 갑시다!” 

게임 하나는 15세 관람가를 고려해, 참 착한 거로만 골랐다!

게임엔 영 소질 없는 다빈이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번엔 정말 손님들 제대로 애 좀 먹이리라 다짐을 했다. 

실장

 “자. 시작합니다.”

미라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삼육구”

‘ 일. 이, 짝, 사, 오, 짝,…’

다들 초긴장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숫자를 외쳐댔다.

오오……, 만만치 않아.

정훈

 “이십팔”, “이십구”

‘짝’

아무 말 없이 박수만 이어지는 마의 30대 번호에 진입했다. 

짝. 짝. 짝짝, 짝. 짝…… 드디어 다빈 차례!

짝인가? 짝짝인가? 어, 뭐지? 뭐지?!

하……, 결국 타이밍을 놓쳤다!!

실장

 “와아아아 당첨!”

정훈

 “휴, 십 년 감수했어요. 한 번 쳐야 하는지 두 번 쳐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한 번 쳤는데. 다빈 씨 아녔으면 내가 틀렸을 것 같아. 다빈 씨 고마워요! 하하핫!”

화연

 “이번 벌칙은 달달한 걸로 가요. 두 사람 속으로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겠어요.”

실장

 “에잇, 그럼 이번 벌칙은 인심 한 번 쓸까요?”

정훈

 “까짓 그렇게 해 주죠, 뭐!”

미라

 “그래요. 그럼 뽀뽀 한 번 가줍시다!”

일행들은 마치 봐 줘서 스킨십 벌칙을 준다는 양, 거드름을 피우며 뽀뽀 벌칙을 주문 내렸다. 

정훈

 “그냥 뽀뽀는 재미없잖아요? 그냥 뽀뽀가 무슨 벌칙이야 선물이지.”

실장

 “그건 그러네. 그럼 서로 눈 가리고 한결 씨가 립스틱을 발라주면, 그대로 양쪽 볼과 이마 그리고 입술에 립스틱 찍기 어때요?”

아유, 좀 정상적인 뽀뽀 이런 거 시키면 안 되나. 사람들이 말이야, 남들 달달한 꼴을 못 봐요!

좀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뽀뽀 게임이라 한결은 은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방송에서 사심이 드러나면 안 되는데…… 흠흠!

정훈

 “오호, 그거 괜찮겠다. 빨리 안대로 가리고 립스틱도 가져다주세요. 아주 진한 색으로다가”

미라가 가방 파우치에서 붉디붉은 립스틱을 찾아 한결에게 건넸다. 한결이 건네받은 립스틱 뚜껑을 열어 바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다빈

 “남편, 입술 잘 찾아서 예쁘게 발라줘야 해. 아무렇게 바르면 굴욕 사진 인터넷서 몇 달은 갈 거야”

한결

 “알았어. 알았어. 아주 그냥 앵두 같이 발라줄게”

저렇게 말은 하지만 영~ 걱정이다. 스태프에게서 안대가 넘어오자, 두 사람은 안대를 하고 마주 섰다. 

한결

 “부인, 흔들리지 않게 나를 잡아”

한결이 다빈의 손을 당겨 제 허리춤에 대었다. 다빈의 손이 한결의 허리 부분을 잡자, 한결이 한 손으로 다빈의 얼굴을 더듬더듬 입술을 찾았다. 코 아래, 손가락으로 다빈의 입술을 찾은 한결이 한 손으로 다빈의 얼굴을 붙잡고, 립스틱을 쥔 손가락으로 입술을 다시 한 번 톡톡 건드려 바를 위치를 정조준했다. 

찌릿.

따뜻한 한결의 손가락이 다빈의 입술에 닿자, 마치 전기가 통하듯 온몸에 전류가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신경이 더욱 집중되어 모든 신경 세포가 한결의 손이 닿는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다빈의 볼을 꼬옥 잡은 한결의 손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술 위에 천천히 립스틱을 그려 나갔다. 잘못 그려서 우리 부인이 캡처된 굴욕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지 않게! 카메라는 둘의 얼굴을 양쪽에서 타이트하게 잡았다. 

상대적으로 더 쉬운 아랫입술부터 정성을 다해 그리고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윗입술 위치를 확인. 윗입술도 천천히 그려 나갔다. 

밖으로 많이 벗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눈을 감고 그렸지만, 그다지 보기 흉하지 않게 제법 잘 그려진 다빈의 입술이 클로즈업돼서 카메라에 잡혔다. 

한결

 “다 그렸다.”

숨죽이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입술 바르기 완성을 외쳤다. 

정훈

 “자자, 이제 뽀뽀! 양쪽 볼과 이마, 입술이 맨 나중에! 다빈 씨 예쁘게 입술 도장 한 번 찍어봐요. 하핫.”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3화 - 100일 기념 여행

눈을 뜨고 하라고 했으면 덜 떨렸을 것을, 눈을 감으니 더욱 떨려왔다. 앞에 마주 선 한결이 내뱉는 숨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허리춤에 있던 손을 올려 더듬더듬 한결의 얼굴까지 손을 올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꼭 잡고는 왼쪽에 입술을 쪽!

다빈의 입술을 기다리는 한결 역시도 떨리는 건 마찬가지다. 다빈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한결이 긴장감에 숨을 멈췄다. 여자의 볼을 만지며 키스하는 장면을 숱하게 찍어봤지만, 여자에게 볼이 잡힌 채 뽀뽀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다빈의 입술이 왼쪽 볼에 닿았다. 쪽~!

하.

다빈의 촉촉한 입술이 감미롭게 한쪽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제 오른쪽 볼에도 다빈의 입술이 닿겠지. 입술이 닿기를 기다리는 이 짧은 순간이 어찌나 가슴 떨리는지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다빈의 입술이 방향을 바꿔 한결의 오른쪽 볼을 찾았다. 쪽~!

이번에는 연이어 이마를 향했다. 쪽~!

하. 

이제 마지막 남은 건 입술뿐.

쿵, 쿵, 쿵.

쿵쿵거리는 소리가 서로에게 다 들릴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들에게 벌칙은 더는 방송이 아닌, 그야말로 리얼이었다.

다빈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떨리는 기운을 내뱉듯 숨을 내쉬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벌칙 수행에 들어갔다. 

한결의 입술 위에 쪽~!

다빈의 입술 위에 발려진 붉은 립스틱은 한결의 양 볼에, 이마에, 입술에 선명히 자국을 남겼다.

*

중간중간 카메라 테이프를 가느라 촬영이 쉬어 가기도 했지만, 마치 실제 신혼집 집들이를 온양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화연

 “참, 나 선물 가져왔는데”

한결

 “선물?”

화연이 준비해 온 선물을 한결에게 내밀었다. 

한결

 “와, 와인이네.”

세로로 긴 상자에는 고급 와인 한 병이 들어있었다. 

화연

 “응. 한결 씨가 좋아하는 와인이지? 두 사람 잠 안 오는 밤에 한 잔씩 하고 자라고”

한결

 “와, 고마워”

‘김한결이 좋아하는 와인 종류까지 아는구나.’

친한 거야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서로의 취향까지 훤히 알고 있는 걸 보니 다빈은 뽀로퉁 심술이 나려 했다. 

카메라가 두 사람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동안, 화연이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다. 

그때 화연의 눈에 소파 한쪽 끝에 떨어져 있는 반지 케이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건 뭐지?’

옆에 한결이 벗어 놓은 재킷이 있는 거로 봐선, 재킷 주머니에서 떨어진 듯했다

화연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반지 케이스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반지네’

자신도 모를 이끌림에 케이스를 열어본 화연은 그 안에 있는 반지를 꺼내서 왼쪽 네 번째 끼어 보았다. 좀 컸다. 반지를 빼, 이번에는 검지에 끼워 보았다. 이번에는 컸다. 

어느 손가락에도 맞는 않는 반지가 마치 어떻게 해도 자신과 한결은 연결될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이건 어디까지나 일인 거잖아. 

한결 씨가 아무리 전부터 다빈 언니 팬이었다고 해도, 실제 곁에서 지켜보는 것과는 다르잖아.

이 반지도 진심이 아닐 거야, 그냥 방송을 위한 이벤트 일 거야.

그러니 서운해하지 말자, 섭섭해 하지 말자. 

화연은 밀려오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리고는 거울로 옷매무새를 살피고는 문을 열고 나겠다. 

그 길로 나가 카메라가 이쪽을 찍지 않는 틈을 타,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반지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아무도 모르게.

***

화연의 차 안.

모레 있을 드라마 촬영의 대본을 아직 마저 못 외웠다며, 화연은 일행들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분명 일일 뿐인데, 화연은 요즘 한결을 보고 있는 게 자꾸만 불안하다.

처음엔 소속사의 동갑내기 동료로 만났지만

둘 취향도 같았고, 관심사도 비슷했고, 즐겨 듣는 음악에, 식성까지 닮아 금세 친구가 됐다. 

그런 한결이 언제부터인지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마 먼저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인이 아닐 뿐, 그들은 절친이란 이름으로 충분히 자주 어울렸으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역시도 자기와 같은 맘이 되겠지. 

기다리려고 했다.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다빈을 대하는 한결의 눈빛이 자신을 보는 눈빛과 다름을 알았다.

자신에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눈빛으로 오직 다빈만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불안하기만 하다. 

더는 한결의 옆에 자신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서. 

이대로 그저 좋은 친구로 끝날 것 같아서.

그런데도 자신은 도저히 그를 친구로만 남겨두고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상념에 빠져있던 화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문득 샵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좀 전에 봤던 반지 케이스에 쓰여 있던 주얼리 브랜드의 매장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화연은 차를 멈추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 들어서서는, 진열장에 진열된 반지들을 쭈욱 한 번 훑었다. 

여직원

 “반지 보세요?”

화연

 “아, 네…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분명히 이 브랜드가 맞을 텐데. 반지가 너무 많아서 찾을 수가 없네.’

화연

 “저, 심플하게 밴딩으로 된 디자인 있을까요?”

점원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지 하나를 내놓았다.

여직원

 “아, 네. 이 디자인 어떠세요. 얼마 전에 출시된 제품인데요. 심플한 거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사 가세요.”

좀 전에 봤던 그 반지다!

화연

 “네 예쁘네요. 한 번 껴볼게요”

화연이 건네받은 반지를 껴보자, 조금 전 껴본 반지와 같은 사이즈인지 화연의 손가락에는 조금 헐거웠다. 

화연

 “이것보다 한 치수 작은 것도 있나요?”

여직원

 “네. 이걸로 껴 보시겠어요?”

다시 꺼내준 반지는 이번에는 맞았다. 

화연

 “잘 맞네요. 이걸로 할게요.”

여직원

 “네, 잘 선택하셨어요. 호홋. 이 반지, 며칠 전 김한결 씨도 오셔서 <연우결>에서 커플링으로 끼실 거라고 사가지고 간 거에요.”

화연

 “네에…. 그렇군요.”

화연은 전혀 모르고 있는 얘기인 듯 대꾸한 후,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나왔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이미 한결이 고른 반지와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연우결> 방송은 주 1회 방영이 됐지만, 촬영은 방송과는 달랐다. 

같이 뭘 배우기도 하고, 이벤트를 하기도 하고, 데이트하기도 했지만, 촬영 후 재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그 촬영분은 방송을 타지 못했다. 

또, 방송된다 하더라도 30분 정도라, 종일 촬영한 부분의 상당 분량이 편집되고, 그야말로 액기스만 방송이 됐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카메라가 그들을 계속 찍고 있어도, 이게 촬영인지 일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점점 더 촬영임을 잊고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께 촬영을 시작한 지 벌써 100일 째다. 그간 여러 회차의 촬영이 있었고 방송도 10회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춘천 청평사 가는 길. 

한결의 제안으로 여행을 나선 두 사람. 

이번 여행은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매력이 다르고 경춘선이 개통되면서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더 늘어난 춘천의 청평사. 

이젠 제법 친해지기도 했고, 또 편해지기도 했다. 

오랜만의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이라 한결과 다빈은 적잖이 설렜다. 

촬영이라기 보다, 정말 데이트를 위해 나선 것 같았다.

기차에서 내린 한결과 다빈은 소양강을 가로 지르는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겨울 칼바람이 코트를 뚫고 들어왔다. 외투 깃을 더 단단히 여미긴 했지만, 이 추위가 싫지 않았다. 대학 때 이후 얼마만의 여행인가. 새삼 여행의 흥분에 빠져, 아이 마냥 두 사람의 기분도 들떠 있었다. 

선착장에 내려 청평사까지 내려가는 길. 가파른 산길이 아님에도 오랜만에 산속을 걷는 다빈은 오르막에서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다. 

한결이 매고 있던 배낭에서 생수를 꺼내 다빈에게 건넸다. 다빈이 한결에게 건네받은 생수를 마시며 쉬고 있는 동안, 연출진의 요구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게 말 대신 작가가 스케치북에 뭔가를 써서 들어 보였다. 

'한결 씨, 다빈 씨 업고 가보죠'

연출진의 디렉션이 티 나지 않게 한결은 자연스럽게 다빈에게 말을 걸었다. 

한결

 “부인. 힘들면 업어줄까?”

다빈

 “아니, 괜찮아”

다빈 역시도 연출진의 디렉션을 봤지만, 이 산길에서 한결에게 업혀서 올라가는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연출진의 디렉션을 너무도 잘 따르는 건지, 다빈을 너무도 업고 싶어 그러는 것인지 한결이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다빈이 업힐 생각을 안 하자, 한결이 다빈 앞에 허리를 숙여 등을 내밀었다. 얼른 자신의 등에 오르라고. 

한결

 “자, 부인 얼른 업혀”

다빈

 “아이, 싫어. 남편 힘들 텐데…”

한결

 “오늘 밥 많이 먹었어? 몸무게 들킬까 봐 그러는 거지? 하핫”

다빈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다빈

 “아잇 뭐야.”

결국, 다빈이 못 이기는 척 한결의 등에 올랐다. 

한결은 가벼……. 울 줄 알았지만, 생각 외로 다빈은 무.거.웠.다. 이런 오르막 산길에선 더욱더.

한결이 몇 발짝 떼지 못하고 ‘헉헉’ 앓는 소리를 냈다. 

민망한 다빈.

민망함에 작은 손으로 콩콩 한결의 등을 때리며

다빈

 “뭐야, 남편. 나 별로 안 무거운데. 그렇게 헉헉거리면 방송에서 내가 너무 무거워 보이잖아”

입술을 씰룩거렸다. 

한결

 “아냐 아냐, 부인 하나도 안 무거워. 헉헉” 

한결은 일부러 더 크게 헉헉 소리를 냈다. 

다빈

 “아이, 나 그만 내릴래. 남편 그만 내려줘”

한결

 “하나도 안 무거운데. 그래도 부인이 기어이 내리고 싶다면 그만 내려줄게.”

다빈이 말을 바꿀까, 얼른 내려놓는 한결이었다. 

다빈은 밉지 않게 한결에게 눈을 흘겼다. 

하하. 

두 사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지켜보는 연출진들까지 알콩달콩한 모습을 시샘하게 만들며.

한결

 “그럼, 이제 손잡고 가자”

한결이 다빈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었다. 

그리곤 다빈의 몇 발 앞에서 걸어나갔다.

다빈은 한결이 손을 잡아 주는 게 참 좋다.

자신보다 큰 손이 자신의 손을 포근히 감싸는 느낌이 좋았고,

한결의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좋았고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지금의 이 떨림이, 설렘이 좋았다. 

그게…… 한결의 손이라서 더 좋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결이 걸어가면서, 점퍼 안쪽 주머니에서 반지를 슬쩍 꺼내

다빈과 잡고 있는 자신의 손으로 옮기더니

깍지 낀 손가락을 움직여 다빈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다빈

 “?”

한결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제 손에 무언가 끼워지는 게 느껴졌다. 

다빈은 걸음을 멈추고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확인했다. 

다빈

 “……반지……네. 예쁘다……”

한결

 “마음에 들어?”

다빈

 “응” 

다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4화 - 나랑 결혼해 줄래

다빈

 “남편…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한결

 “오늘이 우리 100일 되는 날이잖아. 지난번 결혼식 때 우리 혼인서약서만 읽고 말았잖아. 그때 반지 못 준 게 영 걸리더라. 그래서 준비했지. 봐봐, 나도 꼈어.”

한결은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들어 보였다.

한결의 손가락에서도 다빈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다빈

 “……커플링이네. 고마워…. 남편. 난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 커플링까지 같이 끼고 있으니까, 정말 둘이 무언가로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데, 다빈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고맙다는 말 외에는. 

하지만 고맙다는 말보다 더 행복해하는 다빈의 표정이 충분히 그 표현을 대신해 줬다.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

청평사에 들러 간단히 들러본 후 촬영팀이 예약한 민박집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오래된 듯한 민박집의 방 한 칸. 

오늘 한결과 다빈이 묵을 방이다. 

방 안에는 아무 가구도 소품도 없이 그저 덜렁 비키니 옷장 하나.

겨울 찬 바람에 덜컹덜컹하는 문은 요즘은 보기도 어려운 한지가 발려진 옛날식 미닫이문이었다. 

한결

 “아, 출출하다. 부인도 배고프지?”

다빈

 “응. 우리 그럼 뭐 좀 먹을까?”

한결

 “그러게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여기서 뭘 먹지?”

다빈

 “잠깐만 기다려”

다빈은 그 길로 나가더니 매니저에게 맡겨두었던, 자그마치 10층이나 되는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한결이 그 규모(?)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결

 “부인, 이게 다 뭐야?”

다빈

 “응. 내가 도시락을 좀 쌌어.”

한결

 “근데 뭐가 이렇게나 많아? 하나, 둘, 셋…. 아홉, 열! 자그마치 10층이네?! 도대체 뭐를 이렇게나 많이 싸서 온 거야?”

한결이 도시락 뚜껑을 열자 밥, 김밥, 유부초밥, 부침, 김치, 달걀말이, 불고기, 소시지, 베이컨, 과일, 마른안주, 과자까지….! 메인 요리부터 디저트, 주전부리, 안주가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카메라는 정성 가득한 다빈의 10층 도시락과 한결의 감동한 표정을 차례로 담아냈다.

한결

 “우와… 이거 다 부인이 한 거야?”

다빈

 “응. 100일 기념 우리 첫 여행인데 뭔가 좀 정성을 담은 걸 먹여주고 싶어서……”

한결

 “와, 부인 고마워.”

이 많은 걸 싸자면 아침부터 얼마나 서둘렀을까. 

그 정성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한결이 다빈을 향해 팔을 벌렸다. 

한결

 “하하, 우리 부인 한 번 안아보자”

한결의 말에, 다빈이 얼굴을 붉히며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한결의 품에 안겨들었다.

한결은 다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오전 9시부터 촬영이 시작됐으니 이동 시간을 빼고 그 전에 도시락 준비를 마쳤으면 얼마나 일찍 일어나서 이걸 준비한 걸까. 잠은 자기라도 한 걸까.

고맙고, 감사했다. 

한결

 “배고픈데 우리 빨리 먹자. 와아, 안주까지 있네! 나 오늘 이거 다 먹고 잘 거야!”

한결이 호기를 부리며, 숟가락을 들어 밥을 큼직하게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딱 그 2배만큼이나 크게 불고기를 들어 다시 입 안에 넣었다. 

한결의 입은 터질 듯 부풀어졌지만, 눈은 점점 더 반달 눈이 되어갔다. 

한결

 “와, 맛있어. 맛있어. 부인도 어서 먹어”

한결의 재촉에 다빈도 밥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한결

 “아 참, 우리 음악 들으면서 먹을까?”

한결이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몇 번을 터치하니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땅따 땅따 따라라라”

‘나랑 결혼해줄래

 나랑 평생을 함께 살래

 우리 둘이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

 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

 천년만년 아프지 말고 난 살고 싶은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널 더 좋아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게 좋다고 하던데–

 내가 더 사랑할게

 내가 더 아껴줄게

 눈물이 나고 힘이 들 때면 아플 때면

 함께 아파할게

 평생을 사랑할게

 평생을 지켜줄게

 너만큼 좋은 사람 만난 걸 감사해

 매일 너만 사랑하고 싶어……’

이승기의 ‘나랑 결혼해줄래’가 나왔다. 

노래는 분명 그 노래가 맞았다. 

그런데! 

음성은 익히 들어왔던 이 노래를 부른 가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바로 내 옆에서 반달 눈을 하고, 입이 찢어질 듯 음식을 넣고 있는 남자,

바로 한결의 목소리였다! 

다빈

 “남편… 목소리잖아?”

한결

 “하하. 들을 만은 해? 좀 더 잘 부르고 싶었는데, 막상 부르려니까 너무 떨려서 잘 안 되더라 하핫”

한결은 멋쩍은 듯, 과장되게 웃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한결의 ‘나랑 결혼해줄래’는 담백했다. 

허튼 기교나 기술 없이 담백하게 무슨 노래는 마치 그의 진심처럼 

읊조려졌고, 음을 탔고,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정말 다빈에게 결혼이라도 해 달라는 청혼 가처럼….

다빈

 “멋있다. 남편…. 잘 불렀어. 원곡 가수보다 남편 노래가 백만 배쯤 더 좋다. 고마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감동에 젖은 눈빛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이날 방송은 지금까지 방송 회 차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

늦은 밤.

문밖에 켜놓은 조명만이 옅게 방안으로 세어 들어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불을 끄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나란히 베개를 베고 누워서, 두 팔만 이불 밖으로 내놓은 게 마치 차렷 자세 같은 두 사람.

둘 사이에는 마치 금이라도 그어 놓은 듯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누워 있었다. 

한결

 “오늘 피곤했지?” 

한결이 말을 건넸다. 

다빈

 “응. 좀 그렇긴 한데. 남편 덕분에 즐거웠어. 오랜만에 기차도 타보고, 청평사도 보고……, 이 반지도 받고”

다빈이 손을 들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다시금 만지며 말했다. 

한결

 “그거 고를 때, 사실 목걸이로 할까, 반지로 할까 망설였었어.”

다빈

 “그런데 왜 반지로 선택한 거야?”

한결

 “목걸이는 아무 때나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100일이라 뭔가 좀 특별한 의미를 주고 싶었거든.”

다빈

 “그랬구나. 반지… 마음에 들어. 매일 끼고 있을게. 정말 고마워”

한결

 “좋아해 주니까 나도 좋다. 그만…… 자야지.”

한결의 자자는 말에 갑작스레 찾아온 어색함.

한결

 “……팔베개해줄까?”

다빈

 “응? 아…아니… 팔 아프잖아. 괜찮아”

한결

 “내 팔 걱정해서 그런 거야? 내 팔 돌이야 돌. 감각을 못 느껴. 자 그러니까 여기 베고 누워”

다빈이 못 이기는 척, 한결의 팔을 베려 머리를 들자 

한결은 다빈이 베기 편하게 몸을 더 바짝 붙여주었다.

얼마간 벌어졌던 틈이 좁혀지고, 서로의 몸이 맞닿았다. 

두 사람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 말을 안 하고 있으면, 그 소리가 다빈에게 그대로 들릴 것 같아 한결은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한결

 “부인 팔베개 해준 거 오늘이 처음 아니다?!”

다빈

 “응??”

그럼 언제?

한결

 “우리 처음 같이 자던 날, 부인 추워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자길래 팔베개해서 뒤에서 안아 줬었는데, 몰랐지?”

그 밤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다빈

 “어머, 진짜?”

한결

 “응. 우리 부인, 한번 잠들면 또 어찌나 깊게 숙면을 취하시는지. 남편이 팔베개를 해주는지, 뒤에서 백허그를 해주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자알 주무시던데 하핫”

아…. 그래서 그때 잠깐 춥다가 따뜻해진 거였구나.

다빈

 “어머 어머 몰랐어. 정말.”

한결

 “그럼 이제 우리 팔베개도 하고 백허그도 한 사인데, 다음 진도 나가볼까? 하핫”

다빈

 “카메라가 다 찍고 있는데, 뭐야 남펴…언”

한결

 “카메라가 찍고 있으니 뽀뽀지, 아니었음, 다른 걸 해야지”

다빈

 “어머 어머. 이 프로 15세 관람가 아니야? 그런 야한 농담 막 던지고 그래도 돼?”

한결

 “하하하”

한결의 농담이 싫지 않았다. 

다빈

 “푸힛”

그렇게 농담인 듯, 진담인 듯한 말들이 한참이나 오간 후.

한결이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아 노래를 재생시켰다.

그리고는 이어폰 한쪽을 자신의 귀에 꽂고, 다른 한쪽을 다빈에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한결

 “음악 들으면서 잘래?”

다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이 다빈의 귀에, 남은 이어폰 한쪽을 꽂아주었다. 

조금 전 들었던 한결이 부른 ‘나랑 결혼해줄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더 사랑할게

내가 더 아껴줄게

눈물이 나고 힘이 들 때면 아플 때면

함께 아파할게

평생을 사랑할게

평생을 지켜 줄게

너만큼 좋은 사람 만난 걸 감사해

매일 너만 사랑하고 싶어

나랑 결혼해줄래’

읊조린 듯 달콤히 부른 마지막 소절 ‘나랑 결혼해줄래’를 끝으로 노래는 끝이 났다. 

그런데! 

잠시 후, 한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폰을 타고 귓가에 스며들었다. 

'음음… 여보 유다빈. 

요즘 난 당신을 만나서 참 행복하다. 

내게 이런 행복을 줘서, 고맙고. 

당신도 이 기분을 그대로 나눠 가질 수 있도록 나도 노력할게. 

그리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앞으로 혹시 내게 화나고,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지금 이 모든 행동이 그저 방송만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내 진심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줘.'

낮은 중저음이 한결의 진심이 그대로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노래 끝에 녹음한 이 말은 이어폰으로 흘러나와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았다. 

다빈만이 들을 수 있게 이어폰을 통해 들려준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은 

한결과 다빈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다빈은 그저 말없이 한결을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았다고, 그러하겠다고, 당신을 믿겠다고.

그런 다빈을 한결이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품에 안긴 다빈에게서 향긋한 향이 퍼졌다.

밤은 점점 더 깊어갔다.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던 것일까,

새벽부터 도시락에, 오랜만의 산행에 피곤했던 다빈은 한결의 품 안에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야아, 나를 옆에 두고 잠이 오나 보네. 내가 매력이 없는 거야?, 나를 너무 믿는 거야?, 저 카메라를 수호신쯤으로 여기나? 이까짓 카메라쯤이야 꺼버리면 그만인데!

한결은 자신의 팔을 베고 잠든 다빈의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살짝,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한결

 “잘자 부인”

그렇게 달달한 가상 부부의 밤이 방송을 탔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5화 - 친구로라도 네 옆에 있게 해줘

  

고급 레스토랑 안.

다빈은 창가 테이블 한쪽에 앉아 매니저인 미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토랑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창가에는 아름다운 한강 야경이 겨울밤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다빈은 턱에 손을 괴고, 음악에 취해 야경을 감상하며 기다리다가

다빈

 “둘이 저녁 먹는데, 왜 이렇게 좋은 레스토랑에서 보잔 거야. 이런 데는 남자랑 와야지”

한결과 함께 이런 데서 저녁 데이트를 즐겨도 참 좋겠다.

그때, 긴장한 듯 천천히 다가와서는 그녀 앞에서 멈춰선 고급 남성 슈즈.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였다!

선우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서 기다리는 거 여전하구나”

다빈

 “……!!”

선우

 “오늘은 내가 일찍 와서 기다려주고 싶었는데, 또 선수를 뺏겼네”

당황해하는 다빈의 눈빛과 달리 선우의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다빈

 “여긴 웬일이야? 난 미라하고 약속이 있었는데??”

선우

 “미안, 내가 미라를 졸랐어.”

다빈

 “미라가 날 속이고 약속을 잡은 거였어?”

선우

 “미라한테 뭐라고 하지 마. 안 된다는 걸 내가 계속 부탁한 거야. 내가 연락하면 안 만나 줄 것 같아서”

다빈

 “안 만나 줄 걸 알면서도, 굳이 당신 맘대로 이런 자릴 만들었네!!”

선우

 “다빈아…….”

선우의 눈빛이 애잔하다. 

다빈

 “나 그만 일어날게. 미안한데 난 이 자리가 너무 싫거든. 잠시도 못 있겠거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려는 다빈의 손을 선우가 붙잡아 세웠다.

선우

 “잠깐만 앉아봐. 너 이제 나한테 감정 없다며? 그럼 이렇게 화낼 필요도 없어야 하는 거잖아? 내가 잘못했고, 다 내 잘못인 거 아는데, 그래도 잠깐만 날 봐줘라. 내 얘기 좀 들어줘, 다빈아”

머리는 냉정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고 외쳤지만

마음속은 그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자기를 만나려는 이유가 뭔지,

이제 와서 왜 내 주변에서 얼쩡대는 건지!

다빈은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우

 “우선 뭐 좀 먹자. 너 배고픈 거 못 참잖아.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하.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다빈

 “아니, 나 달라졌어. 예전처럼 배고픈 거 못 참지 않아. 지금은 촬영하면서 바쁠 땐 종일 한 끼 먹고도 버텨.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잖아”

예전 스무 살 시절의 내가 아냐! 아직도 내가 그때의 나로 남아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여전히 차가운 말투의 다빈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선우는 난감하기만 했다. 

선우는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고, 우유와 커피를 시켰다. 우유는 따뜻하게 데워달라는 말과 함께.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와 우유가 오자 선우는 다빈 앞에 우유를 놓아 주었다. 

선우

 “그럼 이거라도 마셔”

그리고 자신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의 얘기들을……

*

집안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다빈에게 이별을 통보했지만, 그게 선우의 진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유학생활 동안 다빈에게 그저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빈을 놓아주었다.

너는 그냥 너의 삶을 살고 있어. 언제고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다시 찾아갈 테니. 

그렇게 선우는 아픈 이별을 결심했었다.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선우는 K그룹 본사에 입사해 경영 수업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자 다빈을 찾고 싶었지만, 집안에서는 이미 비슷한 수준의 결혼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조연급 연예인에 지나지 않는 다빈을 데리고 가, 소개한다는 건 불 보듯 뻔한 결과를 가져오리란 걸 선우는 알았다. 

고심 끝에 집안에 조건을 내밀었다. 

새로이 K 엔터테인먼트 창립하고,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성과를 내보이겠다고. 급부상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사업을 K그룹에서도 이제는 시작해야 할 때 아니냐고. K 엔터테인먼트로 성공하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달라고. 그 이후의 결혼 문제는 제 뜻에 맡겨달라고. 

그래서 4년 동안 오직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 

다빈을 다시 찾기 위해서!

K 엔터테인먼트는 그간 영화, 방송 및 드라마, 만화, 음원 다방면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투자에 높은 이익을 거둬내며 업계에서 빠른 성장을 해나갔다. 

그때 만들어 성공했던 프로 하나가 바로 <우린 결혼했지요>였다. 

그런데 몇 년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더니 비슷비슷한 포맷의 프로가 많아지고, 출연자들조차 인기 수단으로만 이용해 프로는 점점 진정성을 잃어갔다. 

그러던 중 출연 중인 한 아이돌 스타의 스캔들이 터졌고 이는 곧 사실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각종 비난과 힐책이 이어졌고, 급기야 방송국 측에서 프로그램 폐지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로그램 포맷을 바꿔 한 번 만 해보자고 방송국을 설득한 게 선우였고, 제목을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로 바꾸고 예능 출연이 전혀 없었던 연상의 여배우와 연하의 남자 주인공을 기용해 연상연하 콘셉트로 바꿔 가기로 했다. 

물론, 선우의 속내는 프로그램의 성공보다는 아직 크게 이름을 알리지 못한 다빈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실, 선우 입장에서야 굳이 이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다.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고 회사의 수익을 내는 게 이 프로만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냥 접고 다른 곳에서 수익을 내면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집을 부렸다. 다빈 때문이었다. 

그녀가 출연하기만 한다면, 그녀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보여준다면, 분명 크게 인기몰이를 할 거라는 걸 확신했다. 그 인기를 발판삼아 그녀를 우리나라 최고의 여배우로 만들 계획이었다. 선우는 충분히 자신 있었다. 

다빈의 매력에 자신의 마케팅이 합쳐진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톱여배우가 아니라 아시아 최고 자리도 차지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그녀의 인지도가 상승하고 나면, 그녀를 집안에 알릴 예정이었다. 

물론, 연예인 며느리를 달가워하진 않겠지만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배우 경험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설득하면 어렵겠지만, 그런대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 믿었다.

훗날 자신이 K그룹 본사로 들어가고, 그녀가 원한다면 K 엔터네인먼트 경영을 맡겨도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자신은 여전히 너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고 애원했다. 

선우의 긴 얘기에 다빈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더는 선우를 원망하지 않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웠다. 

젊음으로 한참 빛났던 시절, 그때의 그 사랑이 못난 사랑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자신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려 했던 못난 남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의 뜻하지 않은 사랑 고백이 예전만큼 기쁘지 않았다. 

이제 더는 자신은 선우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알았다. 

아니,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았다. 

김한결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이미 자신의 마음을 모조리 차지해 더는 내어줄 마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희망 고문이 되지 않게 제대로 얘기해줘야지.

이제 당신의 사랑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러니 나를 그만 바라보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라고

앞으로 오래오래 당신 옆에서 당신만 바라보며 행복해할 사람을.

다빈

 “오…빠”

선우

 “그래, 다빈아…”

다빈

 “날 좋아해 줘서 고마운데, 이제 난 그 마음 못 받아. 내가 오빠한테 줄 수 있는 마음이 이젠 없어.”

선우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다빈

 “응. 아직은 나 혼자 마음일 뿐이지만”

선우

 “누구? 혹시…… 김한결?”

선우는 김한결을 떠올렸다.

한결과 함께하는 방송에서, 함께 있던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한결을 향하는 다빈의 눈빛이 예전에 자신을 향하던 눈빛과 같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빈

 “아직은 나 혼자 좋아하는 거라, 누구라고 입 밖으로 내긴 그렇고. 더 묻지 말고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고만 알아줘.

선우

 “……”

다빈

 “오빠, 그러니까 이제 나 잊어. 오빠가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선우

 “……”

다빈

 “내가 한때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나 때문에 아프게 사는 건 싫어.”

선우

 “그래…… 알았어. 그래도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거니까, 그럼 네 옆에 친구로라도 있게 해줘. 널 귀찮게 안 할게. 정말 친구처럼, 힘든 일 있거나, 술친구, 밥 친구 필요할 때 그럴 때 날 써먹어. 그렇게 친구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 나한테도 다시 좋은 사람이 생기겠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다빈

 “……그래”

선우

 “자, 이거 받아 내 연락처야”

한결은 다빈의 손에 자신의 명함을 쥐여줬다. 

선우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야 해. 알았지?”

***

선우의 집 서재.

편한 니트에 면 팬츠 차림의 선우가 책상 앞, 가죽 의자에 엉덩이 끝만 살짝 걸치고 앉아 팔꿈치를 무릎에 붙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손에 들려진 양주 글라스엔 얼음도 없이 독한 양주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제 내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없다고? 이제 네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네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으니 그만 물러나야 하는 건가. 

그래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어. 내가 너무 늦게…… 널 찾았어.

그런데 난…… 도저히 자신이 없다. 

유학 6년, 귀국해 회사의 성공에만 몰두한 4년…… 너만을 생각하고 쉬지도 않고 앞으로 달려왔다. 그건 오직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결국, 이런 결과를 얻자고 이토록 열심히 달려왔던 건 아니었다.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 선우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다빈의 말이 떠올라, 가슴을 후벼 팠다. 

그 간의 세월이 모래성이 무너지듯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이제는 너무도 늦어버린 후회가 물밀 듯 쏟아져 왔다. 

손에 들고 있던 로얄 샬루트을 삼켰다. 

썼다. 다른 날보다 훨씬 더…… 

***

도철의 사무실 안.

도철이 지난번 찍었던 한결과 화연의 사진을 넘기며 한참을 보고 있다.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도철이 결심한 듯, 소리친다. 

도철

 “거, 누구 표 엔터테인먼트 전화번호 좀 가지고 와봐”

후배 기자 한 명이 연예 소속사 전화번호가 담겨있는 연락처 수첩을 내려놓았다.

도철은 책상 앞에 놓인 수화기를 들어 꾹꾹 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두 번의 신호음이 있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도철

 “홍은표 대표님이시죠? 안녕하세요. HOT 연예뉴스의 최도철 기잡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6화 - 당신 나한테 누나 아니야

은표

 “아, 예 최 기자님 안녕하세요”

도철

 “이화연 씨 인터뷰를 좀 진행하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은표

 “화연이요? 화연인 얼마 전에 드라마 끝내고 CF 정도만 하면서 쉬고 있는데, 쉬고 있는 배우에게 인터뷰 요청을 다 하시네요?”

도철

 “하하. 이화연 씨 CF 요청도 많고, 요즘 기대주잖습니까…. 뜨기 전에 인터뷰 한 번 해두려는 거죠.”

은표

 “하하. 글쎄요. 출연작도 없이 휴식 기간에 인터뷰하면 딱히 할 말이 있을까요?”

도철

 “그건 제가 이끌어 갈 테니까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은표

 “하하, 그러지 말고 최 기자님. 다음에 작품 새로 들어가면 그때 인터뷰 하는 거로 하죠. 그때 연락 주시면 제일 먼저 최 기자님 인터뷰부터 해드리겠습니다.”

도철

 “아, 그거야 출연하는 프로그램 홍보 차원으로 하는 인터뷰 일 테고요. 저희는 그냥 이화연 씨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인터뷰 나눴으면 합니다. 아직 인터뷰도 많이 하신 편이 아니라서 뭐 같은 말 재탕, 삼탕 되는 인터뷰 아니니 나름 반응도 괜찮을 것 같고요.”

은표

 “음… 그럼 화연이랑 얘기 한 번 해보고 차후 연락 드리도록 하죠”

도철

 “네. 잘 써드릴 테니 빠른 시일 내로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은표

 “알겠습니다. 최 기자님”

전화를 끊은 최 기자의 입꼬리가 기대에 찬 듯 올라갔다. 

도철

 “특종이 멀지 않았어.”

***

다빈의 집.

한쪽 어깨가 흘러내려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박시한 니트 차림의 상의에 요가 트레이닝 팬츠를 입은 다빈이 스마트폰을 꺼내 음악을 재생시켰다. 

지난번 촬영 때 들려준 노래를 한결이 다빈에게 전송해 준 터였다. 

한결의 감성이 그대로 들어간 ‘나랑 결혼해줄래’가 흘러나왔다. 

다빈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다빈

 “김한결,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난 지금 당신 노래 듣고 있는데…….”

다빈의 얘기가 들리기라도 한걸까. 

‘띠링’

다빈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한결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결

 - 부인 뭐 하는 중? 난 밤 촬영 있어서 어젯밤 꼴딱 새고 이제야 퇴근 중.

밤새 촬영했구나. 

힘들겠네, 우리 남편.

다빈

 ‘밥은 먹었어? 스케줄 많아서 제대로 먹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잘 챙겨 먹어’

다빈이 걱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문자를 전송했다….

맛있는 거라도 해서 갖다 먹이고 싶지만, 오늘은 촬영 날도 아니니 만날 수도 없고.

그때 다시 문자가 들어왔다. 

한결

 - 걱정되면 부인이 직접 해주든가

다빈

 “응? 직접 해달라고? 이건 무슨 뜻이지?”

다빈

 - 오늘이 <연우결> 촬영 날이면 맛있는 거 만들어 줬을 텐데. 아쉽네, 남편

한결

 - 그럼 우리 오늘 촬영하자고 신 PD님께 연락할까?

다빈

 - 네 그렇게 해보세요. 신 PD님이 아주 좋다고 하며 바로 촬영하자고 하겠네

다빈은 한결의 문자를 그저 농담으로 되받아쳤다.

한결

 - 그럼 우리끼리 촬영하는 건 어때?

다빈

 - 우리끼리?

한결

 - 나 집에 잠깐 들러 옷만 좀 갈아입고 갈 테니까 있다가 2시간 뒤에 신혼집에서 만나

다빈은 무슨 소린지 당최 감이 안 온다. 

다빈

 - 뭐야? 진짜로?

한결

 - 당근! 있다가 봐

한결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얼떨떨해하기만 한 다빈.

그럼 지금 신혼집에서 만나자는 거야?

이건…… 몰.래.데.이.트?

그래도 되나? 신 PD의 촬영 외 만남 금지 주문이 있었는데, 이렇게 몰래 만나도 되는 건지 다빈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마음보다는 한결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커 걱정을 밀어내고 만다. 

에라 모르겠다. 

마음이 급해진 다빈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메이크업을 마친 다빈은 차를 몰아 신혼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는 냉장고에서 꺼내 온 밑반찬들과 식 재료들이 담긴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띠띠띠띠”

다빈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니, 아직 한결은 와 있지 않았다.

<연우결> 촬영 때 신혼집으로 쓰이는 이곳은, 실제 신혼집처럼 웬만한 것들이 다 갖춰져 있어서 들어와 산다고 해도 별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촬영 때가 아니면 아무도 들릴 일이 없는 곳이고, 혹여 이웃의 누가 보더라도 ‘<연우결> 촬영이 있다’라고 생각할 터이니 그야말로 안전지대이긴 했다.

다빈

 “남편은, 아직이네. 빨리 서둘러야겠다.”

다빈은 이젠 ‘남편’이랑 호칭이 입에 익어, 방송이 아닐 때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끼니도 거른 듯했는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얼마나 배가 고플까.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채소를 씻고, 요리를 시작했다. 가지고 왔던 밑반찬과 김치를 꺼내 정갈하게 담아 식탁 위에 올렸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분주히 준비하는 다빈의 손 위에서 한결이 건넨 100일 반지가 반짝이고 있다. 

30분쯤 지났을까.

“띠띠띠띠”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쿵쿵쿵. 

도어락이 해제되고,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낼 한결을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래서 죄짓고 못 사는 거구나’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아. 우리가 몰래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촬영장에 와서 잠깐 밥만 먹고 가려는 것뿐이잖아. 그냥 밥. 밥인데 뭐.

다빈은 애써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한결

 “부인, 나 왔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한결의 얼굴은 밤샘 촬영으로 인해 수척해져 있었지만, 다빈을 보는 표정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한결

 “와, 이거 무슨 냄새야? 된장찌개 냄새 같은데?”

다빈

 “응.”

다빈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띠며 한결을 바라봤다. 

한결

 “이야, 정말 밥을 해 놨어?”

다빈

 “직접 와서 해 달라며?”

한결

 “와, 영광인데. 촬영 중도 아닌데 이렇게 요리까지 직접 해줄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하하”

다빈

 “뭐야, 그럼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였어? 나는 정말 배고파서 그런 줄 알고, 빨리 와서 요리하느라 얼마나 서둘렀는데…….”

다빈이 한결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한결

 “아냐……. 같이 먹으려고 한 건 맞지. 그래도 우리 부인이 이렇게 직접 음식을 해 놓고 기다릴 줄은 몰랐어. 만나서 뭐라도 시켜 먹을까 했는데…… 고마워.” 

한결이 고마움의 표시로 다빈을 품에 안았다. 

헉! 포옹?!

‘아아… 이건 뭐?

우린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동료일 뿐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이 사람은 큰 의미 없이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이런 스킨십을 곧잘 하는 스타일인가?’

뜻하지 않은 한결의 포옹에 놀란 다빈의 볼이 붉게 타올랐다.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천하의 김한결의 품에 안긴 여자 중에 설레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침착하자, 촌스럽게 오버하지 말고’

다빈은 큰 의미 없는 일상적인 포옹에 자신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나 싶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애썼다. 

한결

 “흠…. 좋다…”

다빈을 품에 안고 있다가, 얼굴을 내려 그녀의 어깨에 기대던 한결의 눈에 다빈의 손에 끼여진 반지가 들어왔다. 

한결

 “와 …반지 끼고 있네. 나도 반지 계속 끼고 있었는데”

다빈

 “푸힛, 그럼 남편이 준 반진데 계속 끼고 있어야지. 방송 끝날 때까지”

한결

 “뭐, 방송 끝날 때까지만?”

다빈

 “종종 잊나 본데, 우리 방송서만 부부야!”

한결

 “흠!! 그런 거면 곤란한데……”

다빈

 “어머, 방송 후에도 내 손아귀에서 안 벗어나고 싶은 거야? 후훗”

한결

 “뭐, 난 벗어나고 싶은데 우리 부인이 아쉬워할까 봐 그러지!”

다빈

 “그런 걱정 붙들어 매세요. 나 좋다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 매니저가 그거 때문에 골치 아파서 일을 다 그만두려고 하잖아”

한결

 “아, 네……”

얼굴 가득 미소를 담은 채 두 사람의 농담이 이어졌다. 

다빈

 “그런데……, 우리 이렇게 만나도 되나……?. 신 PD님이 따로 만나는 일 없게 하랬는데.”

한결

 “우리가 뭐, 중딩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만나는데 만나라 마라 하는 거 자체가 웃긴 거지. 프로그램에 피해만 안 주면 돼. 그리고 우리가 만나서 뭐, 뭘 하기라도 했어? 고작 된장찌개 끓여서 밥 먹는 건데 뭘.”

다빈

 “그래도……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좀 그러네”

걱정하지 마. 그래 봐야 열애설밖에 더 나겠어. 당신과의 열애설이라면 난 싫지 않은데 당신은 어떨까.

짐짓 가라앉으려는 분위기를 깨고자 다시 한결이 농담을 건넸다. 

한결

 “그럼, 그렇게 걱정이 되는 와중에도 용기를 내서 나 보러 온 거란 말이지? 음, 이거 기분 좋네 하핫”

한결의 달콤한 중저음 목소리가 무척이나 달다.

다빈

 “아니 뭐… 용기랄 거까진 아니고……”

한결이 다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헉. 이 사람 왜 자꾸 안고 그래. 설레게.

한결

 “고마워, 부인. 보고 싶었어.”

‘나두……’ 다빈도 조그맣게 응답했다. 

다빈

 “된장찌개 식겠다. 남편, 어서 먹자”

다빈의 말에 한결은 팔을 좀 더 느슨히 푼 후, 상체를 떨어뜨려 다빈을 정면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윽한 눈 맞춤을 보낸 후에야 다빈을 팔에서 풀어주었다. 달달한 미소는 기본으로 장착한 채. 

오늘 무척 피곤했는데, 이렇게 당신을 보니 피로가 한 번에 사라진다.

매일 이렇게 당신과 함께했으면 좋겠다……

한결

 “그래, 배고프다. 얼른 먹자 부인”

오늘 만남의 원래 목적이었던 식사를 위해 두 사람이 주방으로 향했다. 

한결은 식탁 의사를 빼 다빈을 먼저 앉히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한결

 “어디 우리 부인 된장찌개 솜씨는 어떤지 맛 한번 봐볼까?”

된장찌개를 후후 불더니 한결이 후루룩 입 안에 넣어 삼켰다. 

한결

 “으음… 맛있어. 역시!”

한결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짓자, 다빈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 

‘맛이 없으면 어떡하나?’, ‘맛있게 해 준다는 메뉴가 고작 된장찌개였나’, 라고 할까 봐 은근 걱정이 됐던 터였다. 

다빈

 “다행이다.”

한결

 “뭐가?”

다빈

 “뭔가 좀 더 근사한 요리를 해 주고 싶었는데, 급하게 오느라 장 봐 놓은 것도 없고 해서 그냥 된장찌개만 끊겼거든. 맛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었어.”

한결

 “아냐, 정말 맛있어.”

한결은 얼른 한 숟가락을 다시 크게 떠 입에 넣었다. 

한결

 “혼자 사니까 이런 집 밥이 좋더라. 진짜로 결혼을 하면 매일 이런 밥을 먹을 텐데. 하핫, 우리 그냥 확 결혼해 버릴까?”

다빈

 “아이, 뭐야…… 자꾸 누나한테 그런 농담 하면 이 누나, 진짠 줄 알고 오해해!”

다빈은 일부러 ‘누나’를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농담에 빠져,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아서.

한결

 “나한테 누나이고 싶어?” 

한결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빈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다빈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너에게 누구보다 여자로 보이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당대 최고 스타와 5살이나 많은 조연급의 여배우.

그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정말이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한결

 “당신…… 나한테 누나 아냐, 그리고 선배로 받들고 싶은 생각도 없어.”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7화 - 숨을 쉬면서 키스를 해야지. 그러다 숨막혀 죽어

한결의 말에 다빈이 멈칫했다.

한결

 “나 진심이야 유다빈. 당신 나한테 여자야”

장난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었다. 

‘쿵’

다빈은 심장이 세차게 내려앉았다.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 차마 얼굴을 들 수도 없었다. 

처음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던 날, 촬영장에 도착해 자신의 상대가 톱스타 김한결인 걸 알고 나서

막연하게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진짜 애인이라면 어떨까 하고

그러나 그런 건 역시 괜한 상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다빈 역시도 연예인이긴 하지만, 조연급에 지나지 않는 자신에게 한결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한결이 지금 자신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설마……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닐 테지?

다빈

 “지…지금 뭐라고 했어?”

한결

 “당신이랑 함께 하고 싶은 거 진심이라고”

다빈

 “한……결……씨……”

한결의 눈빛은, 목소리는, 조금 전 그의 말이 진심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한결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결

 “그러니 당신도 날 진심으로 대해 줘. 지금은 그 정도면 돼. 할 수 있지?”

다빈

 “……응” 

다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꿈…. 은 아닌 거지?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

식사를 마친 한결은 피로가 몰려왔는지

잠깐 다빈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소파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꼬박 밤을 새우고 피곤함에 지쳐 소파에서 잠이 든 한결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주연 배우들은 하루에 2~3시간 정도도 못 잘 때가 허다하다. 

특히나 미니시리즈의 경우는 그야말로 ‘살인 스케줄’이라 불릴 정도로 촬영 일정이 빡빡했다. 그런 데다 한결은 사이사이 화보촬영에 CF, 인터뷰 그리고 자신과 함께하는 <연우결>까지……. 그러니 어젯밤만 못 잔 게 아니었으리라. 이번 미니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은 계속될 터. 같은 연예인이지만 한 번도 이처럼 바빠 본 적 없는 다빈은 잠든 한결이 안쓰러웠다. 

다빈은 자신의 소리에 행여나 한결이 깰까 숨을 죽이고, 조용히 일어나서 침실로 들어가 담요와 베개를 가지고 나왔다. 

모로 누워 있는 소파와 한결의 몸 사이사이에 담요를 집어넣었다. 뒤척임에 담요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리고는 팔로 머리를 받쳐 베개를 베어 주려는 순간, 

눈을 뜬 한결이 팔을 들어, 다빈의 머리를 자신의 얼굴을 향해 가져왔다.

그리곤 갑작스레 이어진 입맞춤….

앗. 뭐야… 이건 키스?

순간, 깜짝 놀란 다빈의 동공이 커졌다.

입을 뗀 한결이 그윽한 눈빛으로 다빈을 응시했다. 

당혹스러운 다빈은 어색함을 떨치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다빈

 “아…. 저기…. 불편할 것 같아서 베개를 베…….”

뒷말은 한결의 입술에 의해 삼켜졌다.

두 손으로 다빈의 얼굴을 감싸 쥔 한결의 달콤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아,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 

가만있으면 마음이 없다고 생각할 텐고’

한결의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떼어지더니 다빈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머릿속은 지진이라도 난 듯 휘청거렸고, 정신은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키스가 처음도 아니지만

예전 선우와 나누었던 착하기만(?) 한 키스와는 달랐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멈출 수 없을 듯 세차게 뛰었고, 정신은 잃을 듯 어지러웠다. 

한결의 혀가 다빈의 입술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달콤하면서도, 세차게!

오래지 않아 닫혀있던 다빈의 가지런한 치아가 스르르 문을 열어주었다. 

두 개의 혀가 서로의 입속을 들어섰다. 

둘은 이제 오롯이 서로의 입술에만 집중했다. 

서로의 입술을 탐했고, 혀를 찾았고, 그 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누가 더 세차게 혀를 움직일 수 있는지

누가 더 열심히 상대의 입안을 탐색할 수 있는지 

마치 시합이라도 하듯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생각도 스며들 틈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서로의 입술을 탐했을까.

한결이 천천히 입술이 떼고 다빈을 안았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다빈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손가락으로 다빈의 코끝을 ‘톡’ 건드리며 한결이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한결

 “우리 부인. 키스씬 안 찍어 봤어? 숨을 쉬면서 키스를 해야지. 그러다 숨 막혀 죽어”

다빈은 창피함에 더 깊이 한결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리고는 작은 손으로 한결의 가슴팍을 톡톡. 내리쳤다.

하. 이 누나 이거 어찌 이렇게 귀여워!

한결은 그런 다빈이 귀여워 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의 품에서 다빈을 부서뜨리기라도 할 듯이. 

한결

 “사랑해 유다빈!”

다빈은 그간의 의문과 혼자만의 생각이 이제 다 길을 찾은 듯했다. 

삶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마냥 행복에 빠진 눈빛으로 다빈은 한결을 응시했다. 

***

은표의 사무실 안, 은표와 화연이 CF 출연 계약서를 확인하고 있다. 청순한 이미지 때문인지 지난번 화장품 CF에 이어 들어온 이온음료 CF도 곧 성사될 단계였다. 계약서의 여러 가지 조항을 꼼꼼히 검토한 은표가 이 정도면 괜찮겠다며 최종 사인을 하자던 참이었다. 

그러고는 농담처럼 화연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두 CF 모두 열애설이나 좋지 못한 구설수가 나 제품 이미지에 영향을 미칠 경우 배상에 대한 조항이 있으니, 괜히 오해 살 행동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톱스타의 경우 이런 계약서에 이의를 제기해 수정하기도 하지만 화연처럼 이제 막 주목받고 있는 신인의 경우 원하는 조항을 다 내걸 순 없었다. 크게 무리가 없는 조항이라면 웬만하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야 했다. 그게 싱글을 유지하는 조항, 즉 열애설을 내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을지라도.

계약서 검토를 끝낸 은표가 최도철 기자의 인터뷰 제의 건에 대해 말을 꺼냈다. 

은표

 “화연아 너 인터뷰 요청 들어왔는데 할래? 보통은 휴식기 때 인터뷰를 잘 안 하기는 하는데 기자가 워낙 간곡히 요청하네”

화연

 “그래요? 어느 매체에요?”

은표

 “그 왜 인터넷 연예뉴스 매체 ‘HOT 연예뉴스’라고 있지?, 거기야”

화연

 “음……. 거기라면 인터넷 연예 매체 중엔 지명도가 최고잖아요?”

은표

 “그렇긴 해. 어때 한 번 해볼래?”

화연

 “네, 전 좋아요.”

은표

 “알았어. 그럼 일정 잡는다.”

내친김에 은표는 그 자리에서 최도철 기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떨어지고 최 기자가 전화를 받자, 은표는 화연의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말하며 일정을 조율했다. 

이 인터뷰가 훗날 어떤 결과를 갖고 올지 차마 예상치 못한 채 그렇게 인터뷰 일정이 잡혔다. 

***

다빈의 드라마 촬영장.

4부작 특집극에 조연으로 캐스팅된 다빈이, 이날의 마지막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마지막 촬영은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악역을 맡은 다빈을 우연히 만나 찬물 세례를 퍼붓는 장면.

이런 촬영은 NG 없이 가야 수고를 덜 수 있기에, 한 번에 세게 제대로 해 주는 게 오히려 당하는 배우를 돕는 일이다. NG라도 날라치면 젖은 머리에, 메이크업에, 의상까지 다시 준비해야 하므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빈보다 한참은 위로 뵈는, 주인공의 엄마 역할의 선배 연기자가 촬영 전 다빈에게 양해를 구했다.

여자선배

 “다빈아, NG 나면 다시 가기 번거로우니까 세게, 한 번에 갈게. 괜찮지?”

다빈

 “그럼요, 선배님. 편하게 하세요”

다빈이 선배의 말에 수긍하며 웃어 보였다. 

감독

 “자, 다들 준비됐죠. 그럼 슛 들어갑니다. 액션!”

‘액션’을 외치는 소리에 두 사람의 연기가 시작됐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조금 전 화기애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 여인의 팽팽한 기 싸움이 시작됐다. 

다빈과 마주하고 있던 중년의 여배우는 응징의 대사와 함께 테이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세차게 다빈의 얼굴에 끼얹었다. 

애초 반쯤 채우겠다는 조연출의 얘기와 달리 소품 팀에서 준비한 물컵에는 넘칠정도로 가득 물이 채워졌고, 중년의 여배우는 그걸 얼굴 중심을 향해 붓는다는 게 조금 아래로 부어버려 코 아래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입, 목을 거쳐 옷 앞섶을 그대로 다 적셔버렸다.

세찬 물세례가 마음에 들었던지 감독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제야 매니저 미라가 수건을 가지고 다가와 다빈에게 내밀었다. 

그때, 건네받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던 다빈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한결이었다. 저만큼 멀찍이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한결이 다빈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빈

 “응? 한결 씨네?”

미라

 “아 오늘 <연우결> 촬영, 한결 씨가 너 촬영장 방문하는 것부터 찍고 싶다고 해서 좀 전부터 찍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다빈의 드라마 촬영 이후, <연우결>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한결의 제안으로 격려 차 다빈의 촬영장을 방문하는 것부터 촬영하기로 했다. 덕분에 <연우결>의 모든 스태프들은 예정 시간보다 3시간이나 일찍 이쪽 촬영장으로 집합해야 했다. 

촬영에 방해될까 봐 마지막 장면 촬영 전부터 조용히 멀리 떨어져 지켜보고 있던 한결은 촬영이 끝난 듯하자, 드라마 연출진들과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우리 아내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녔다. 

한결의 등장을 알아챈 여자 스태프들 사이에선 환호가 터져 나오기도 했고, 그중 누구는 “잘 어울려요. 진짜 결혼하세요”를 외치기도 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다빈에게 한결이 다가왔다. 

다빈

 “남편…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예상치 못했던 한결의 등장에 반가운 다빈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한결

 “우리 부인 드라마 들어간다기에, 응원하러 왔지. 근데 어째 힘들어 보이네”

연기이긴 하지만, 맞는 씬이나 이렇게 물세례를 받는 씬이 좋을 리 없단 걸 한결 역시도 잘 알고 있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조금 붓고 말겠지 했는데, 막상 가까이 와서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끼얹은 물의 양이 많아 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한결의 시선은 물기를 먹은 얼굴을 따라, 물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하얀 색 블라우스로 내려갔다. 젖은 블라우스는 몸에 달라붙어 다빈의 가슴라인과 속옷을 훤히 내보여주고 있었다. 

한결

 “흠!흠!”

한결이 시선 둘 곳을 몰라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제야 한결의 시선을 의식한 다빈이 얼른 얼굴을 닦고 있던 수건으로 가슴께를 가렸다. 

어.어. 아냐 아냐, 일부러 보려 했던 건 아냐!

근데 왜 하필 하얀색 옷에 진한 색 속옷을 입고 와서는. 저기 카메라 감독님이나 조명 감독님이 다 봤겠네!

한결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얼른 다빈에게 덮어 주었다. 

<연우결>팀의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우리 부인은 매번 같은 부위에서 문제가 생겨. 하핫. 다른 남자 앞에서 이런 모습 보이면 곤란한데 말야. 

한결

 “부인,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옷 갈아입고 와”

옷이 젖었으면 재깍재깍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봐봐. 이런 차림으로 계속 있으니까, 여기 스태프들 눈에 하트 그려지는 것 좀 봐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다빈도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자 서둘러 대꾸했다. 

다빈

 “응. 그럼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아입고 올게”

다빈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에도 <연우결>의 카메라는 계속해서 한결을 담았다. 

한결은 다빈을 기다리며 준비해 온 음료와 샌드위치를 스태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감독을 찾아가 “우리 아내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원하신다면 카메오로 출연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는 외조를 발휘하고 있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8화 - 앞으로 좀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어요

드라마 촬영장에서의 녹화가 끝나자 타로점을 보기 위해 홍대 앞 한 카페로 이동했다. <연우결>은 촬영 때 달리 대본이 있진 않았지만, 주요하게 ‘오늘은 무엇을 한다.’ 정도의 콘셉트는 미리 정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오늘은 작가들이 타로점을 보러 가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촬영팀이 미리 섭외해둔 타로점 카페를 찾아, 둘은 홍대 놀이터를 지나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가서 있는 작은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두 사람이 카페 안을 들어가자 한 중년의 여인이 둘을 맞았다. 

중년여인

 “타로 보러 오셨어요?”

한결

 “네” 

한결이 대답했다. 

중년여인

 “그럼 이쪽으로 앉으세요”

인자하지만 예리한 눈빛의 중년의 여인이 자리를 권하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카메라는 앞뒤로 2개가 배치되어, 중년 여인과 두 사람의 상반신에 포커스를 맞춰 촬영을 시작했다. 

방송이긴 했지만, 타로점이 처음인 다빈은 살짝 긴장되기도 했다. 더구나 앞에 앉아있는 중년 여인의 눈빛에는 뭔가 강한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중년여인

 “자, 두 분은 어떤 게 궁금해서 오셨죠? 타로는 신점하고는 달라서 먼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가까운 미래를 보는 쪽이에요. 질문도 구체적으로 해 줄수록 좋답니다. 어떤 점이 궁금하세요?”

다빈

 “음… 우리 둘이 하는 일이 잘 되는지 볼까? 아니면 궁합?” 

다빈이 한결을 쳐다보자 자신의 팔짱을 낀 채 앉아있던 한결이 눈썹을 찡긋해 보이며, 원하는 대로 하라는 표정이다. 

중년여인

 “타로를 처음 본다니까 말씀드릴게요. 타로가 보는 미래는 ‘가능성’이지 ‘단정이나 확신’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5월에 애인이 생기겠다고 말하는 건, 5월에 연애운이 많이 들어와 애인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에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5월이 됐다고 해서 애인이 생기진 않아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5월에 애인을 만날 노력을 더 많이 해야겠죠? 소개팅한다든가 새로운 모임에 나간다든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때 고백해 본다든가. 타로점만 믿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연애운이 들어왔다가도 그냥 나가요. 그래서 타로 운이 부정적으로 나와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노력으로 바꾸면 되니까. 이해됐나요?”

한결

 “아아, 네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여인

 “자 그럼 뭐부터 질문할 건지 정했나요?”

다빈

 “네. 우리 둘이 잘 어울리는지, 궁합은 어떤지 봐주세요”

여인은 카드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치며 섞더니, 드르륵 반원 모양으로 쭉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한결에겐 오른손으로 4장을, 다빈에겐 왼손으로 4장을 고를 것을 주문했다. 

카드를 고르는 것만으로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라도 할 듯, 다빈은 떨리는 마음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천천히 한 장 한 장, 모두 4장의 카드를 골랐다. 

다빈과 달리 한결은 성큼성큼 별 고민 없이 카드를 골라냈다. 사실 한결은 타로점 결과 따위가 어떻게 나오든 크게 상관없었다. 결과가 어떻든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이 여자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4장의 카드 윗줄에 다시 4장의 카드를 올려놓은 여인이 카드를 한 장씩 펼쳐 놓았다. 알록달록 형형색색의카드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카드에서는 위엄조차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참 카드를 들여다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중년여인

 “두 사람 연애운이 시작된 게 아주 오래전부터네요. 안 지 오래됐나요?”

라는 질문에 다빈이 

다빈

 “아니요. 얼마 전에 <연우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났어요”

중년여인

 “음… 어쨌든 카드에는 인연이 오래전부터 시작된 거로 나오네요”

여인의 말에 한결이 흠칫했다. 하지만 10년 전 다빈과 우연한 만남이 있었고, 그 이후 다빈이 자신의 마음을 꽉 채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맞히다니……

중년여인

 “지금 현재 두 사람의 연애운은 아주 좋네요. 서로가 서로에게 엄청 끌려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사랑스럽고 좋게 느껴져요. 가만 놔두면 금방 확 불붙겠어요.”

다빈

 “불이요?”

여인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중년여인

 “남녀 간에 불이 뭐가 있겠어요? 후훗”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다빈과 한결이 민망해하며,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여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중년여인

 “음, 그런데 지금은 걸리는 게 있네요. 그래서 둘 다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요”

<연우결> 출연을 말하는 건가. 마치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하는 듯한 여인의 말에, 다빈은 조금 더 바짝 테이블에 다가앉으며 여인의 말에 집중했다. 

중년여인

 “둘은 잘 맞아요. 일단 여자분이 덜렁거려서 실수도 잦고 주변의 도움을 좀 필요로 하는 성격인데, 반대로 남자분은 자상하고 챙겨주길 좋아하네요. 그래서 여자분이 항상 걱정되고, 눈에 안 보이면 물가에 둔 애 같아 늘 신경 쓰이고 그래요”

그때까지 ‘재미 삼아 보는 거지’ 했던 한결도 ‘진짜 저런 게 저 카드 8장에 다 나온단 말야?’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빈은 한결과의 궁합이 잘 맞는다는 말에 괜히 안심됐다. 

중년여인

 “그런데…”

중년 여인이 말끝을 흐렸다.

한결

 “?”

중년여인

 “…앞으로 좀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어요.” 

힘든 일이 생길 수 있다?

중년여인

 “그래도,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앞으로는 계속 좋은 일만 있겠네요. 그런데 그 일이 많이 힘들 수 있어요. 마음을 잘 다스리고 현명하게 대처하도록 하세요.”

그게 무슨 일이냐고 다빈이 되물었지만, 여인은 그게 무슨 일인지 까진 알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카드에 나와 있는 걸 그대로 해석하는 것뿐이라고. 

방송에는 편집되어 더 나가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두 사람은 몇 가지의 질문을 더 한 뒤 카페를 나왔다. 

다빈은 앞으로 생길 수 있다는 힘든 일이란 게 대체 뭘까, 걱정되긴 했지만, 부정적인 기운도 노력하면 좋은 기운으로 바뀐다고 했으니 괜한 점괘에 마음 쓰지 말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

화연의 인터뷰 날. 

정원이 내다보이는 카페 한쪽 테이블, 아이보리 원피스에 웨이브 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청순한 미모의 화연이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다. 

진하지 않은 메이크업, 요란하지 않은 행동 가짐이 평소의 차분하기만 한 화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최도철 기자와 영상 카메라를 대동한 VJ가 함께 들어와 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녹화를 준비했다.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는 VJ를 보며 화연이 입을 열었다. 

화연

 “오늘 인터뷰가 영상 인터뷰인지는 몰랐어요”

도철

 “아, 제가 홍 대표님께 말씀을 안 드렸었나요? 저희가 인터넷 연예뉴스라 영상 인터뷰가 반응이 좋아서 영상으로도 많이 진행해요.”

화연

 “네 아무튼 잘 부탁 드립니다.”

도철

 “네, 그럼 시작해 볼까요?” 

화연

 “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 집안의 반대는 없었는지,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는데소감이 어떤지, 촬영이 없는 날에 주로 뭐를 하며 지내는지, 차기작은 결정되었는지…… 1시간이 조금 넘도록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을 준비해 왔던 화연은 막힘 없이 차분하게 질문에 답했다. 

도철

 - 첫사랑은 누구였나요?

화연

 “중학교 때 친구의 오빠를 좋아한 적이 있었어요. 잘 생기고 큰 키에 매너까지 좋아서 친구들이 다 좋아했었어요”

도철

 - 많이 좋아하셨나요?

화연

 “네 그땐 많이 좋아했었던 거 같아요. 후훗. 사춘기 때니 그런 매너 좋고, 잘 생기고, 인기 좋은 남자 안 좋아할 수 없죠. 그래 봐야 다 철없었던 사춘기 때 얘기에요”

도철

 - 소속사 동료분들 중에는 어느 분하고 친하나요?

화연

 “저희는 워낙 가족 같은 분위기라 소속사 분들이 모두 다 친해요. 

도철

 - 김한결 씨도 같은 소속사죠? 그러고 보니 첫사랑이 한결 씨 이미지랑도 비슷하네요”

화연

 “호홋 그렇네요. 한결 씨도 멋진 외모에 매너 좋고, 주변도 잘 챙겨서 여자분들에 인기 많죠.”

도철

 - 김한결 씨랑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화연

 “네. 친한 친구예요. 데뷔도 비슷한 때 했고 나이도 동갑이고, 같은 소속사다 보니 데뷔 초기 사무실에서 자주 어울리다가 금방 친해졌어요. 서로 취향도 잘 맞아서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도철

 - 두 분 만나시면 주로 뭘 하면서 보내나요?”

화연

 “만나면요? 글쎄요. 둘이 따로 약속하고 만난다기보다 사무실에 들렀다가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하는 건 일반분들이 친구 만나 하는 거랑 똑같죠. 사무실 식구들하고 같이 영화 보러 가기도 하고, 맥주 한잔 하기도 하고요. 요즘은 바빠서 통 얼굴 보기가 힘들지만요”

도철

 - 친한 친구라고 하시니, 서로 연기에 조언도 하고 그러시겠네요?

화연

 “네 출연작 모니터도 해주고, 칭찬도 해 주고요. 한결 씨가 저에 비하면 훨씬 연기를 잘해서 제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연기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고, 현장에서 선배들이나 스태프들 대하는 태도 같은 것도요.”

도철

 - 김한결 씨 요즘 <연우결>에 출연 중이잖아요, 가상이긴 하지만 부럽진 않나요?

화연

 “호호. 부러워요. 저도 빨리 결혼해서 한결 씨 같은 남편이 자상하게 챙겨주고 아껴줬으면 좋겠단 생각 많이 해요. 

도철

 - 절친이라고는 하지만 김한결 씨가 너무 유명해져서 친구로서 서운한 건 없나요?

화연

 "서운하다기 보다, 워낙 바쁘니까 그러려니 이해해요. 유명하지 않을 때 같은 목표를 두고 얘기 나누던 때랑은 다르니까요."

도철

 - 사귀는 분이 아직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결혼은 언제쯤 하고 싶으세요?

화연

 “결혼이요? 아직 사귀는 사람도 없는데.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고요. 그냥 뭐, 정말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런 다음에 천천히 생각하고 싶어요. 후훗”

그러다 도철의 시선이 화연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머물렀다. 

도철

 - 반지가 아주 예쁘네요. 선물 받으신 건가요?

화연

 "아…. 네"

화연이 잠시 당황한 눈빛을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바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화연

 "엄마가 선물로 주셨어요. 마음에 들어서 요즘 항상 하고 다녀요”

도철이 VJ에게 눈짓을 보내자, VJ는 카메라 포커스를 화연의 얼굴에서 내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클로즈업했다. 

자신이 한결을 따라 사서 낀 반지가, 클로즈업까지 되면서 촬영되고 있다는 걸 화연은 알 리 없었다. 

다만, 자신의 인터뷰에 지나치게 한결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는구나 싶었지만, 워낙 한결이 인기가 있어서 그러려니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포부를 묻는 말을 끝으로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도철

 - 오늘 감사합니다. 

화연

 “네, 편집 잘 부탁 드려요”

그렇게 화연의 인터뷰는 끝이 났다. 

***

최도철 기자의 사무실. 

도철

 “이화연, 가편집본 나왔어?” 

영상 편집팀의 직원이 가편집 된 영상이라며 녹화된 CD를 들고 들어왔다. 

직원이 CD를 건네며 

후배

 “이거 이렇게까지 해도 되겠어요?”

도철

 “괜찮아. 나중에 문제 되면 해명 기사 한 번 내면 끝나. 실제로 둘이 있는 사진도 있으니 완전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가도 크게 문제 될 거 없어.”

후배

 “아휴, 전 모르겠습니다. 문제 되면 선배님이 다 책임지세요”

CD를 건넨 직원이 사라지자, 도철이 자신의 노트북에 CD를 놓고 파일을 재생시켰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19화 - 악마의 편집

재생된 영상은 자막으로 질문이 나가면 화연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답하는 건 분명 화연이 맞았지만, 질문이라고 나온 자막은 처음 화연에게 건넸던 질문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인터뷰 때 도철이 화연에게 했던 질문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부분이 한결과의 열애에 대한 부분으로 맞춰져 질문되었다. 

대답 역시도 화연이 했던 말을 교묘히 재편집해 열애를 인정하는 듯한 대답만으로 짜 맞추어, 사실과는 전혀 얘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김한결 씨랑 사귄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화연

 "네. 데뷔도 비슷한 때 했고 나이가 동갑이고, 같은 소속사라 데뷔 초기 사무실에서 자주 어울리다가 금방 친해졌어요. 서로 취향도 잘 맞아서……."

[김한결 씨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화연

 "그런 매너 좋고, 잘 생기고, 인기 좋은 남자 안 좋아할 수 없죠."

[김한결 씨 어떤 부분에 끌리셨나요?]

화연

 "멋진 외모에 매너 좋고, 주변도 잘 챙겨서……."

[데이트는 주로 어떻게 하세요?]

화연

 "사무실에 들렀다가 보는 게 많아요. 하는 건 일반분들이 하는 거랑 똑같죠. 사무실 식구들하고 같이 영화 보러 가기도 하고, 맥주 한잔 하기도 하구요."

[김한결 씨가 연기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시나요?]

화연

 “네 출연작 모니터도 해주고, 칭찬도 해 주고요. 한결 씨가 저에 비하면 훨씬 연기를 잘해서 제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연기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고, 현장에서 선배들이나 스태프들 대하는 태도 같은 것도요.”

[김한결 씨 요즘 <연우결>에 출연 중인데, 질투가 나진 않나요?]

화연

 "서운하다기 보다, 워낙 바쁘니까 그러려니 이해해요." 

이어 영상은 화연의 반지를 클로즈업해서 찍었던 화면으로 이어졌다. 

[반지가 아주 예쁘네요. 김한결 씨가 선물한 건가요?]

화연

 "아…. 네. 선물로 주셨어요."

[두 분 결혼까지 계획하고 계신가요?]

화연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고요.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런 다음에 천천히 생각하고 싶어요. 후훗”

인터뷰 영상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재편집되어 끝이 났다. 

도철이 짠 대본에 화연의 말을 잘라 붙인, 그야말로 악마의 편집이었다. 

***

한결의 소속사.

모처럼 스케줄이 일찍 끝나 사무실에서 들른 한결과 은표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늘은 월급날. 은표는 결재로 올라온 정산 내역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결의 인기가 워낙 높아 그동안은 회사 수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몇 달 전부터 화연이 두각을 나타내며 CF 등의 출연 요청이 잇달아 요 몇 달간 매출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소속 배우들의 정산내역과 사무실 직원들의 급여 지출에 사인한 은표가 먼저 회식을 제안하며 나섰다. 

은표

 “오늘 우리 회식 어때?”

정훈

 “와아~~”

직원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은표

 “다들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실장

 “회식에는 삼겹살이죠.”

한편에 앉아 있는 직원이 먼저 소리쳤다. 

은표

 “삼겹살? 음, 에잇 기분이다. 오늘은 한우로 쏜다”

정훈

 “와아……!”

좀 전보다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결

 “와아, 형님 오늘 제대로 쏘시려나 봐요. 한우라니. 하핫”

은표

 “다들 열심히 해 준 덕에 수익도 점점 좋아지고, 격려도 할 겸 한 번씩 맛난 것도 먹어주고 해야지. 하핫. 너도 있다가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해라”

한결

 “네, 형님”

한결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은표

 “그럼 이따 퇴근 후에 다들 빠지지 말고 참석하고, 배우들에게도 연락해. 스케줄 있으면 늦게라도 참석하라고 하고”

실장

 “네!”

***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한우 전문점.

한결의 소속사 직원들이 모두 모여 회식 중이다. 

홀 안쪽에 넓게 마련된 룸을 차지하고, 테이블을 나란히 붙여 표 엔터테인먼트 식구들이 마주 보고 앉아 열심히 한우를 먹으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은표와 한결은 마주 앉아 서로에게 술을 따라주며 한잔하는 가운데, 스케줄을 마친 화연이 뒤늦게 룸으로 들어섰다. 

화연을 본 은표가 어서 와 앉아 식사하라며 자신의 옆자리에 화연의 자리를 마련하며 부르자, 화연이 들어와 은표의 옆에 앉았다. 화연의 자리에 수저와 술잔이 세팅되고, 한결은 집게를 들어서 고기를 구워서 화연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자상한 사람. 

늘 받아 왔던 한결의 친절이 요즘 들어 새삼스러워진다. 

한결

 “배고프겠다. 얼른 먹어”

화연

 “응. 고마워” 

한결이 먹기 좋게 구워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한결

 “술 한잔 할래? 뭐로 줄까?” 

화연

 “다들 소주 마시네. 나도 그걸로 할게”

한결은 소주병을 들어 화연의 잔을 채웠다. 

화연이 맛있게 한 잔을 들이켰다. 

화연

 “오늘 술 맛있네. 한 잔 더 주라”

한결이 다시 잔을 채웠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이 오갔다. 조금씩 취기가 오른 직원들은 옆이나 앞에 앉은 동료들과 각자의 얘기를 나누며, 

시끌벅적한 회식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화연의 옆에서 직원들이 주는 술을 고스란히 마셨던 은표도 취기가 오르는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다. 

화연

 “한결 씨…….”

한결

 “응.” 

한결이 화연을 응시했다. 

화연을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말을 돌렸다. 

화연

 “요즘 즐거워 보여, 표정도 밝고”

한결

 “그런가…. 하핫”

한결의 수긍에 화연의 마음이 쓰라렸다. 

요즘 한결의 표정이 좋아 보이는 이유가 혹시 다빈 때문인 걸까. 

화연은 한 잔을 더 입에 부었다. 

자리가 한참 이어지고, 배가 부른 직원들이 2차를 외쳤다. 

은표는 오늘 제대로 쏜다며 2차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쯤에서 빠지고 싶은 한결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일어섰다. 이를 본 화연이 같은 방향이니 자기도 그만 일어나겠다며 한결의 뒤를 따랐다. 

직원들과 은표가 식당을 나와 근처의 2차 장소로 이동하자, 한결과 화연도 집을 향했다. 한결이 부른 대리 운전기사가 도착하자, 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올랐다. 

***

취기 때문인가. 

화연은 왠지 오늘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늦췄다간 영영 기회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화연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화연

 “휴우….” 

마음을 가다듬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그런 화연을 보고, 한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한결

 “오늘 좀 많이 마셨지? 속이라도 불편해?”

화연

 “아니 그건 아니고……”

한결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참아”

한결은 다른 날보다 술을 많이 마신 화연이 속이 불편해 그러는 줄 알고, 조금만 참으라며 화연을 달랬다. 

이윽고 차는 화연의 오피스텔 앞에 다다랐다. 한결이 먼저 내려 화연이 내리는 걸 도와주려,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화연은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쉽게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그런 화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한결. 

한결

 “힘든가 보구나, 얼른 들어가서 쉬어.”

***

그제야 차에서 내린 화연이 얘기를 좀 나누자며 대리운전을 보낼 것을 부탁했다. 평소와 좀 다르다 싶었지만, 할 말이 있다는 화연의 말에 대리운전기사에게 돈을 건네주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전했다.

대리운전기사가 가고 나자, 화연이 차에서 내려 차 문에 기대어 섰다. 한결이 그 앞으로 가 화연을 주시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화연이 입을 열었다. 

화연

 “……나 사실은……”

한결

 “……?” 

한결이 화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연

 “한결 씨…… 좋아해……”

한결

 “……!!”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뜻하지 않은 화연의 고백에 한결은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어떻게 말을 해야 화연이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 끝에 한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결

 “화연아 네가 그런 마음인 줄은 정말 몰랐어. 내가 혹시라도 오해 살만한 행동을 했다면 미안하다. 난 그냥 네가 친구로서 좋아.”

미안하다 화연아. 네게 넌 여자가 아니야. 

화연

 “…….그랬구나.”

화연은 가슴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마음. 여기서 쉽게 돌릴 수 없었다. 자신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한결이지만, 화연은 어떻게 해서든 그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화연

 “내 마음…… 받아 줄 순 없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오래전부터 유다빈을 사랑해 왔어. 그래서 네게 나눠 줄 마음이 없다. 내 우정이 널 오해하게 만들었구나. 미안하다.

잔인하겠지만, 이럴 때 명확하게 거절해 주는 게 괜한 기대감에 마음 다칠 일이 더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아 한결은 부드럽지만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한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넌 항상 내게 제일 좋은 친구였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화연

 “혹시…… 다빈 선배 때문이야?”

예리한 화연의 질문에 한결이 흠칫 놀랐지만 여기서 부정하면 화연의 마음이 내내 자신을 향할 것 같아 한결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응. 사실은 오래됐어.”

화연

 “그랬구나. 원래부터 다빈 선배 팬인 건 알았지만, 진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한결

 “나 아주 오래 기다렸어. 아직은 제대로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옆에서 자주 보고 같은 프로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 지금 굉장히 행복하다.”

화연

 “그랬…구나. 그랬어… 되든 안 되든 네게 고백은 하고 싶었어.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나한테 신경 쓰거나 하지 마. 그러면 내가 더 서글퍼질 것 같아. 그러니 이 얘긴 오늘로 끝!”

한결

 “……” 

화연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 한결은 미안했다. 

화연은 애써 괜찮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연

 “휴우… 속 시원하다. 비록 거절은 받았지만 어쨌거나 고백하고 나니 속은 후련하네. 그래도 우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지?

한결

 “그럼!”

한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화연

 “자, 그럼 이제 난 할 말 다했으니까 들어갈게. 바래다줘서 고마워”

화연은 더 이상 초라해 보이지 않게 씩씩한 척, 얼른 뒤를 돌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뒷모습을 한결은 안쓰럽게 바라봤다. 

몇 년을 절친으로 뭉쳐서 다녔지만, 화연이 자신을 남자로 여기는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편하게, 친하게 대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자신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한결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빨리 그 마음을 털고, 예전처럼 편한 친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자신의 절친이 자신 때문에 속앓이 하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결은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화연이 들어간 오피스텔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지 못했던 고백을 받고, 그 마음을 거절한 한결은 갑작스레 다빈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미안함에도 그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이유……, 다빈이 있기 때문이었으므로!

사실, 한결이 <연우결>에 출연한 이유는 모두 다빈 때문이었다. 

당시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리던 한결이 <연우결>을 하겠다고 하자, 소속사에서도 말리고 나섰다. 

그러나 한결은 한사코 출연을 고집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 우연찮게 다빈의 캐스팅 소식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연상연하 - 우리 결혼했어요20화 -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6개월 전 방송국 사무국.

출연하던 예능 프로그램의 회의차 방송국 사무실에 들른 한결. 매니저가 마침 화장실에 간 사이 한결 홀로 회의실로 향하던 참이었다. 

그때 열려있는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의 전화통화 소리가 들렸다. 

FD

 “안녕하세요. <연상연하 우리 결혼했어요> 의 김미순 작가입니다. 지난번에 유다빈 씨 캐스팅 의뢰 드렸었는데요. 결정하셨는지 여쭤 보려고요”

그쪽에서 긍정의 대답을 보였는지, 작가는 알겠다며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에 미팅 날짜를 잡아서 다시 논의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한결의 귀에 들어온 그 이름 유.다.빈.!

그녀가 <연우결>에 새로 투입된다고?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화장실을 다녀온 매니저에게 음료수를 들려서 <연우결>팀에게 가서 인사를 하게끔 시켰다. 

그리고는 한결이 새로 개편되는 <연우결>에 내심 출연하고 싶어한다는 의도를 넌지시 전하게 했다. 

김한결이라니! <연우결> 연출팀에서야 환영해 마지않을 캐스팅이 아닐 수 없었다. 최고의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스타가 <연우결>에 자진해서 출연하고 싶어 한다니, 달리 더 캐스팅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한결의 <연우결> 출연이 결정되었다. 

한결이 다빈의 캐스팅 소식을 미리 알았다는 점은 매니저조차 알지 못했지만, 한결 측이 먼저 그 프로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도를 밝힌 건 한결과 매니저 둘만의 비밀이었다.

한결은 방송국에서 시즌2를 준비하면서 한결의 소속사에 캐스팅 의뢰를 했고, 한결이 자연스레 그 의뢰에 응한 것 같은 모습을 갖추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괜한 오해를 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다빈의 아파트 입구 앞.

얼떨결에 화연의 고백을 받고, 그 고백에 최대한 화연이 상처받지 않게 거절을 하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다빈이 보고파진 한결이 깊은 밤, 다빈의 아파트를 찾았다. 

다빈이 사는 곳에 대해선 언젠가 촬영 휴식 때 들은 바 있었다. 그 길로 한결은 다시 대리운전을 불러 이곳에 왔다. 

늦은 밤이라 ‘그녀를 불러내도 되나?’ 몇 번을 망설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차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서 서성거리다 차에 올라타기를 여러 번, 끝내 한결은 다빈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차에 타 다빈을 생각하다가, 결국 운전석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이른 아침, 

다빈은 여느 때처럼 아침 운동을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평일 이른 아침, 조깅을 나가던 다빈이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고급 외제 차가 눈에 띄자 그 앞에 멈춰 섰다. 

언젠가 촬영 때 한결의 차로 이동한 적이 있었던 다빈은 ‘설마 아니겠지.’ 하며 무심코 그 차 안을 들여다봤다. 

헉, 그런데 웬일인가.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건 한결이 아닌가!

다빈

 “남…. 편?”

촬영 때도 아닌데, 이미 입에 밴 호칭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여긴 무슨 일이지? 설마 나를 보러? 그럼 언제부터 와서 기다린 거야? 잠이 든 걸 보면 한참 전에 온 거 같은데…. 

다빈이 걸음을 옮겨 운전석 쪽으로 가 조용히 차창을 두드렸다. 

‘똑똑’

그 소리에 눈을 뜬 한결의 눈에, 창문 밖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다빈이 들어왔다. 

지금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지 않게, 눈뜨자마자 여심을 제대로 저격하는 살인 미소가 날아온다.

이 와중에도 잘 생겼네! 김한결!

반가움에 눈이 반달모양이 된 한결이 창문을 내렸다.

한결

 “굿모닝?”

다빈

 “남편…. 어쩐 일이야?”

한결

 “일단 타”

누가 보기라도 해 괜한 구설수에라도 오를까, 한결은 까맣게 선팅이 된 자신의 차에 다빈을 태웠다. 차에 오른 다빈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다빈

 “어떻게 된 거야?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서 자고 있어? 나 만나러 온 거야?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우리 집은 또 어떻게 알았고?”

속사포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한결

 “하핫. 부인 하나씩 질문해. 우선 여긴 새벽부터 와 있었고, 사무실 사람들하고 회식하고 집에 돌아가는데 갑자기 부인이 너무 보고 싶잖아. 그래서 바로 이리로 와 버렸지. 그런데 부인이 자고 있을 것 같아서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기다렸는데, 기다리다 잠이 들어 버렸네”

다빈

 “세상에! 그럼 여기서 밤을 샌 거야?!”

한결

 “응, 그렇게 됐네. 하핫”

다빈

 “어휴….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가만 보는 사람은 없나?”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다빈이 차창 너머 누가 지켜보지는 않는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한결

 “후훗. 다행히 아무도 없는 것 같네. 그럼 일단 여길 뜰까?”

다빈

 “어디로?”

한결은 차 시동을 걸더니 어디론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 

***

한결은 그렇게 한참을 차를 몰아갔다. 다빈은 더 이상 한결에게 왜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이 싫지 않았다, 아니 반갑고 설렜다. 

다른 사람이 만일 이런 행동을 했다면 당연히 부담스러웠을 테지만,

한밤중에 자신이 보고 싶어 달려와서는 부르지도 못하고, 기다리다 차 안에서 잠이 들어버린 이 남자의 무모한 행동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운전 중이던 한결이 슬며시 다빈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 그깟 손 한 번 잡은 거에 차 안의 공기가 10도쯤은 갑자기 올라간 듯한 느낌이다. 다빈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그런 다빈의 얼굴빛을 확인한 한결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졌다. 

목까지 빨개진 다빈은 그 모습이 못내 창피해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한결

 “보고 싶어서 왔는데, 그렇게 얼굴을 돌리고 있으면 어떡해?”

다빈

 “응? 응…….”

한결

 “나 좀 봐주라. 그 예쁜 얼굴 좀 보여주라고”

다빈이 다시 얼굴을 돌려 한결을 바라봤다. 

한결

 “우리 부인은 얼굴에 감정이 금방 드러나 거짓말도 못 하겠어. 어쩌면 저렇게 금방 빨개지냐. 하핫”

다빈

 “아… 뭐야, 손잡은 게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한결

 “아니면? 아니면 뭔데? 하핫, 싫은 사람이 손잡아도 이렇게 얼굴이 홍당무가 되나?”

다빈이 눈을 슬쩍 흘기더니, 잡고 있던 손을 빼, 두 뺨을 가렸다. 

한결

 “하핫, 알았어 알았어. 안 놀릴게. 손은 다시 주라”

한결이 다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다시 잡았다. 

쑥스러운 상황이긴 했지만, 맞잡은 한결의 손길이 다빈은 좋았다. 한결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도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내내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았다. 5살이나 어린 이 남자에게 자꾸만 의지하게 된다.

다빈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한결

 “응. 좋은데!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봐”

다빈

 “피곤하지 않아?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한결

 “전혀. 우리 부인을 이렇게 아침부터 보고 있는데 어떻게 피곤할 수 있겠어? 도리어 힘이 주체가 안 되는고만. 하핫”

다빈

 “아이 뭐야…. “

그렇게 꽁냥꽁냥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네비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길 안내를 종료합니다’를 선언했다. 

한결이 호젓한 산길 입구에 차를 세웠다. 

다빈

 “여기가… 어디야?”

다빈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며 물어봤다. 

한결

 “응. 내가 어릴 때 자주 오던 곳. 잠깐 내려서 좀 걸을래?”

다빈

 “응”

먼저 내린 한결이 다빈이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고는 다시 다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산길 초입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지나가는 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아침 산길. 양옆에 커다란 전나무가 빽빽이 늘어져 산길의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없으면, 오롯이 산새들의 지저귐만 있는 이곳, 둘은 나란히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서로 마주 잡고 걷는 길,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한결과 걷고 있다니 지금 이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다빈

 “여기 너무 좋다. 어쩜 길이 이렇게 예쁘지?”

한결

 “웬만한 유명 전나무길보다 좋지? 어릴 적 외할머니 집이 근처라서 종종 왔었어.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못 와서 나도 온 지 한참 됐네.”

다빈

 “그랬구나…. 이런 좋은 길도 알고. 데이트하며 걷기 완전히 좋은 곳이다. 사람들도 안 많고. 푸힛”

한결

 “하하. 우리 지금 데이트 하는 거야? 그렇지 데이트, 데이트 맞지!”

다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들도 없고 걷기에 좋은 길이라고”

한결

 “하핫, 그래 사람들이 없어서 몰래 데이트하기 딱 좋은 길!!”

다빈

 “아이, 그만 놀려!”

한결

 “흐흐,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만할게”

그렇게 둘은 손을 맞잡은 채 한참을 걸었다. 

오전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맡으며, 오랜만의 걷는 흙길은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삭막한 아스팔트 위에서 느낄 수 없는 안락함을 주었다. 

하긴, 굳이 이 멋진 전나무길이 아니라고 한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 함께 걷는다면 아스팔트 위라도 아름답지 않았을까. 

한결

 “다리 아프지 않아? 업어줄까?”

다빈

 “잉? 아냐 아냐……. 나 무거워” 

쑥스러움에 다빈이 한사코 마다한다. 

그런다고 호락호락 물러설 한결이 아니었다. 

한결

 “에이, 우리 부인 또, 부끄러워서 그러는구나!”

다빈

 “저기요……. 우리 지금 <연우결> 촬영하는 거 아니거든요.”

한결

 “촬영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우리 부인 업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자, 얼른 업혀”

한결이 한 발 앞쪽에 서더니, 무릎을 숙여 다빈이 업히기 좋게 등을 내보였다. 

다빈도 더 마다하기 뭐해 그대로 한결의 등에 몸을 얹혔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에잇. 모르겠다.

등에 오르니 한결의 온기가 그대로 온몸에 퍼졌다. 몸이 너무 닿지나 않을까, 한결의 등에 제 몸이, 가슴이 그대로 닿아서 그 느낌이 전해질까 싶어 다빈은 한결의 목을 꽉 잡지 않고 팔을 가슴 앞쪽으로 대어, 한결의 등에서 얼마간 몸을 떨어뜨렸다. 

이를 눈치챈 한결이 등에 매달려 있는 다빈의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한결

 “꽉 잡어 부인. 떨어뜨리기 전에!”

다빈

 “어머, 뭐야!”

금세 떨어뜨리기라도 할 듯 흔들어대는 통에 다빈은 자신도 모르게 한결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다빈의 가슴이 한결의 등에 그대로 밀착되었다. 

‘가슴이…… 느껴질까?’

부끄럽게도 이럴 땐, 말초신경이 한결과 닿는 부위로만 쏠리는 듯했다. 어떻게 이 순간을 모면해야 하나, 아니 이럴 때일수록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갑자기 몸을 떼면 한결이 눈치챌 텐데, 그러고 나면 너무 상황이 어색해지잖아. 에라 모르겠다.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자. 옷이 두꺼우니 가슴이 안 느껴질 수도 있잖아. 

그 순간, 한결도 봉긋이 솟은 말캉한 그 무언가가 등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의 다빈이었다면 바로 몸을 뗐을 텐데 가만히 있는 걸 보면, 그녀 역시도 싫지 않은가 보구나…….

혼자만의 해석으로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행복해지는 한결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걷고 난 후, 한결이 입을 열었다. 

한결

 “참 좋다…. 당신이 내 등에 업혀 있다니”

다빈

 “흐응. 그래? 근데 힘들 텐데 이제 내려줘. 이 정도면 됐어.”

한결

 “싫어. 더 이러고 있고 싶은데… 등 뒤로 당신이 와 닿는 느낌이 얼마 좋은데 이걸 그만해. 하핫”

등에 업혀 있느라 한결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그 말투만으로도 지금의 음흉스런 표정이 고스란히 상상되었다. 

다빈

 “뭐야?! 나 내릴래”

다빈이 몸을 떼 내리려고 하자, 한결은 더 꽉 손에 힘을 주어 그녀가 내릴 수 없게 막았다. 

한결

 “꽉 잡아. 그렇게 몸을 꼿꼿이 세우면 내 허리 나간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하던 다빈은 한결의 허리에 무리라도 갈까 다시 몸을 숙여 한결의 등에 그대로 기댔다. 

이 여자, 나이답지 않게 참 순진한 면이 있다. 

부끄러워하는 다빈의 모습에 한결의 눈은 점점 더 반달 눈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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